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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포토] 손연재 ‘훈련하러 갑니다~’

    [서울포토] 손연재 ‘훈련하러 갑니다~’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17일 오전(현지시간) 훈련장소인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로 들어가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손연재 ‘공과 하나가 되어’

    [서울포토] 손연재 ‘공과 하나가 되어’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17일 오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있는 힘껏 점프’

    [서울포토] ‘있는 힘껏 점프’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17일 오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우아하게 점프’

    [서울포토] ‘우아하게 점프’

    손연재가 17일 오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열정적으로’… 손연재, 첫 공식 훈련

    [서울포토] ‘열정적으로’… 손연재, 첫 공식 훈련

    손연재가 17일 오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손연재와 취재진

    [서울포토] 손연재와 취재진

    손연재가 17일 오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해 많은 취재진이 몰린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손연재 ‘발레리나처럼’

    [서울포토] 손연재 ‘발레리나처럼’

    손연재가 17일 오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우아하고 유연하게’

    [서울포토] ‘우아하고 유연하게’

    손연재가 17일 오전(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서울포토] 리듬체조 손연재의 쉴 새 없는 다리…‘조금만 버텨줘’

    [서울포토] 리듬체조 손연재의 쉴 새 없는 다리…‘조금만 버텨줘’

    올림픽 리듬체조 대표선수인 손연재(22·연세대) 선수가 18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 19일 개인종합 리듬체조 예선 출전을 앞둔 손연재 선수의 다리 곳곳에는 테이핑과 파스가 붙어있다. 손연재 선수가 대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손연재 선수는 19일 밤 10시 20분부터 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에 출전한다. 참가선수 26명 중 상위 10위 안에 들면 오는 21일 오전 4시 50분쯤 시작하는 리듬체조 개인종합 결선에 나선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 우아한 몸풀기…리듬체조 손연재 첫 공식 훈련

    [서울포토] 우아한 몸풀기…리듬체조 손연재 첫 공식 훈련

    올림픽 리듬체조 대표선수인 손연재 선수가 18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애슬리트 파크에서 첫 공식 훈련을 소화하는 모습. 손연재 선수는 19일 밤 10시 20분부터 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에 출전한다. 참가선수 26명 중 상위 10위 안에 들면 오는 21일 오전 4시 50분쯤 시작하는 리듬체조 개인종합 결선에 나선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싱글벙글’ 전인지 “TV서 보던 리듬체조 손연재 만났어요”

    ‘싱글벙글’ 전인지 “TV서 보던 리듬체조 손연재 만났어요”

    진지하게 골프 얘기를 하던 전인지(22·하이트진로)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났다. 전인지는 18일(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올림픽 골프 코스(파71·6천245야드)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골프 여자부 첫날 1라운드 경기에서 버디 5개와 보기 4개를 묶어 1언더파 70타를 기록했다. 오전 1시 현재 선두에 5타 뒤진 공동 17위를 달리고 있다. 경기 후 다소 굳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소감을 밝히던 전인지는 선수촌 생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얼굴이 확 살아났다. 그는 “근대5종 대표 김선우(20·한국체대) 선수와 많이 친해졌다”며 “서로의 종목에 대해 얘기해주는 게 되게 즐거웠다”고 했다. 전인지는 브라질 도착 후 이틀을 선수촌에서 보낸 뒤 대한골프협회가 마련한 숙소로 거처를 옮겼다. 선수촌에서는 리듬체조의 손연재(22·연세대), 배드민턴의 이용대(28·삼성전기)와도 마주쳤다. 전인지는 “TV에서만 보던 선수들을 만나 신기했는데, 그 선수들은 또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라”며 밝게 웃었다. 이날 골프장에는 적지 않은 한국인 갤러리가 찾아 전인지를 비롯한 태극낭자들을 응원했다. 경기를 마친 전인지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인사한 뒤 사인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리듬체조 손연재, 첫 공식훈련 소화…“오른쪽 발목에 진통제 분사”

    리듬체조 손연재, 첫 공식훈련 소화…“오른쪽 발목에 진통제 분사”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첫 메달을 노리는 손연재(22·연세대)가 대회 첫 공식훈련에 나서 컨디션을 점검했다. 손연재는 18일(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리우의 선수촌 옆 훈련장에서 루마니아 대표인 안나 루이자 피리오리아누(17)와 공식훈련에 나섰다. 손연재는 지난달 말부터 상파울루에서 러시아 리듬체조 대표팀과 현지 적응 훈련을 소화한 뒤 16일 리우에 입성했다. 브라질의 기후와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종목당 1분 30초 동안 일정한 호흡으로 연기를 펼치려면 온도와 습도 적응은 필수적이다. 이날 손연재에게 배정된 공식훈련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낮 12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손연재는 먼저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밸런스를 맞췄다. 수구 없이 몇몇 루틴을 소화한 손연재는 이내 수구를 꺼내 음악 없이 후프, 볼, 곤봉, 리본 순으로 연기를 펼쳤다. 피리오리아누가 프로그램 배경 음악에 맞춰 리허설할 때는 잠시 포디엄에서 물러났다가 상대방이 연기가 끝났을 때는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마스터리와 리스크 동작을 중심으로 기술을 점검했다. 옐레나 리표르도바(러시아) 코치는 손연재의 연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리표르도바 코치는 제자 중 한 명인 하야카와 사쿠라(일본)의 리우행이 좌절되면서 손연재만 전담 지도하고 있다. 신분도 한국 선수단 소속이다. 리표르도바 코치의 목에는 한국 AD 카드(Accreditation Card)가 걸려 있었다. 리표르도바 코치는 손연재의 실수가 나왔을 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손연재는 지적을 받은 동작을 몇 차례 되풀이해서 매끄럽게 소화한 뒤에야 다음 기술로 넘어갔다. 리표르도바 코치는 리듬체조계에서 깐깐하고 엄격한 선생님으로 잘 알려졌다. 이날 훈련장에는 리표르도바 코치와 손연재가 러시아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적막이 흘렀다. 손연재는 리본을 등 뒤로 흘러내리듯 떨어뜨려 받는 동작을 여러 차례 연습한 뒤 스트레칭을 마지막으로 연습을 마쳤다. 여전히 오른쪽 발목 상태는 좋지 않은 듯 보였다. 피지컬테라피스트 김은정 씨가 손연재의 발목에 스프레이 진통제를 분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손연재는 선수촌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현지시간으로 오후 6시 30분부터 대회 공식 경기장인 리우 올림픽 경기장에서 또 한 번 프로그램 점검을 할 예정이다. 손연재는 하루 더 공식훈련을 하고 19일 오후 10시 20분부터 개인종합 예선에 출전한다. 참가선수 26명 중 상위 10위 안에 들면 21일 오전 4시 59분부터 시작하는 개인종합 결선에 나선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첫 출근일은 1981년 9월 23일, 결혼 날짜는 1982년 12월 20일입니다. 아직 기사 마감 전이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다음날 그가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인터뷰 때 정확한 날짜를 얘기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도움 될 만한 정보와 자료들을 문자와 이메일로 알려 왔다. 참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다 싶었다.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이끌고 있는 김달진(61) 관장은 그런 사람이다. 아마도 이런 섬세함과 집요함이 한국 근현대 미술자료 수집과 연구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지금의 그를 있게 했으리라. -“신문 쪼가리 모아서 밥은 어떻게 먹고살려는지…쯧쯧.” 어른들은 하나같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했다. 한창 공부에 집중해야 할 고등학생이 신문이건 잡지건 서양 명화가 실린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오려서 스크랩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나중에 밥벌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을 게다. 나도 앞날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은 좋아하는 취미가 우선이었다. 비록 인쇄물이긴 해도 르누아르, 피카소, 천경자, 박수근의 그림을 모으는 기쁨은 컸다. 고교를 졸업할 때 내가 모은 미술자료는 스크랩북으로 10권이나 됐다. 결과적으로 이 자료들이 내 밥벌이의 든든한 밑천이 됐다. -충북 옥천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초등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셋째 형님을 따라 대전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시작은 껌종이, 담뱃갑, 우표 등이었다. 기념우표가 나오면 가장 먼저 우체국 창구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다 ‘주부생활’ ‘여원’ 등 잡지에 실린 세계 명화를 접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본격적인 수집에 나섰다. 틈만 나면 헌책방이 많았던 청계천 6, 7, 8가를 돌며 미술전집 등을 샀다. 서점 주인에게 그림 한 장을 뜯어서 팔라고 조르기도 했다. 1972년 고 3 여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인쇄물로 된 서양의 명화만 보다가 우리 근대미술의 주옥같은 작품을 실물로 보니 그 감동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걸 네가 직접 다 모은 거냐? 참으로 기특하구나.” 고 3때 당시 홍익대박물관장이던 이경성 교수님을 만나 뵈었다. 막연하나마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술계와 학계, 출판계에 계신 분들에게 무작정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뜻밖에도 이 교수님이 한번 보자고 하셔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큰절을 한 뒤 가방에 싸 간 스크랩북 10권을 보여 드렸다. 교수님은 깜짝 놀라시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과 함께 등을 두드려 주셨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때의 만남이 나중에 큰 인연으로 이어졌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인사동 전시장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던 시절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를 알게 됐다. 잡지사에 편지를 보내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학천 사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더라. 지금의 남대문경찰서 인근 초원다방에서 만났는데 대뜸 “잡지 일은 어렵다. 사환으로 심부름도 하면서 취재하러 다녀야 한다. 월급은 따로 없고 교통비 정도만 줄 수 있는데 그래도 하겠느냐”고 물었다.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1978년이다. 취재해서 기사 쓰고, 미술자료 기획물도 연재하고, 편집일도 배우며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바람으로 잡지가 폐간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청소부라도 좋습니다. 미술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전시계’가 폐간된 뒤 청주에서 누님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도우며 지내던 1981년 이경성 교수님이 정년퇴임하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하셨다는 기사를 봤다. 당장 편지를 썼다. 관장님은 흔쾌히 나를 받아 주셨다. 당시 미술관 직원은 30명에 불과했다. 전시과, 서무과 2개만 있었고 큐레이터란 직제는 아예 없었다. 나중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오광수 선생이 그때 전문위원으로 큐레이터 역할을 했는데 전문위원실에 책상 하나를 얻어 자료 수집을 담당했다. 하루 4500원 일당의 임시 일용직이었지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매주 금요일마다 출근부에 사인한 뒤 인사동, 사간동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그전까지 미술관은 보내오는 자료만 수집했는데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얻은 별명이 ‘금요일의 사나이’다. 한쪽 어깨엔 가방을 메고, 다른 손엔 쇼핑백을 든 채 신문사와 전시장을 쏘다녔다. 화랑 관계자들은 “뭐하러 이걸 가지고 가느냐. 다 보내줄 텐데”라고 의아해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전시장에 걸린 그림과 도록에 실린 작품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도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니 모 신문사 기자로부터 “편집광적이다”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오류들이 자꾸 눈에 띄는 걸 어쩌겠나. 한 번 잘못 기록되면 계속 확대재생산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었다. 그때 하도 몸을 혹사한 탓인지 2011년 척추에 종양이 생겨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정년퇴직 때까지 미술관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1996년 1월 미술관을 그만뒀다. 일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응어리가 지더라. 처음 별정직 7급 계약직으로 들어가 8년을 일했는데 그다음에 기능직 10급으로 강등됐다. 미술 잡지에 내가 쓴 미술자료 관련 글이 여럿 소개되고, 신문에도 인용 보도되면서 미술자료 전문가로 인정받았지만 승진은커녕 월급도 오르지 않았다. 당시 아들이 몸이 약해 큰돈이 들어가야 하는 처지였던 데다 좌절감까지 더해져 결국 미술관을 떠나게 됐다. 마침 가나화랑 이호재 사장과 인연이 닿아 자료실장으로 발탁됐다. 5년 10개월 근무하는 동안 ‘가나아트’ 잡지 편집회의에 참석했고, 기획물과 인터뷰 기사를 썼다. 이 사장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미술 정보지 ‘파리스코프’를 견본으로 포켓용 전시회 가이드를 만들기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가나에서 독립한 뒤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내게 됐다. -2001년 12월 직장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내 이름을 건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고, 그해 9월 미술정보 포털 사이트 ‘달진닷컴’도 오픈했다. 그리고 2008년 40여년 가까이 수집한 자료들을 한곳에 모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각종 희귀 자료와 기증 자료, 단행본, 정기간행물, 학회 자료 등이 하루가 다르게 쌓이면서 공간은 점점 부족해졌다. 평창동, 통의동, 창성동, 창전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전월세 생활을 한 끝에 지난해 3월 상명대 입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오래된 건물을 매입해 박물관 겸 사옥을 마련했다. 건물 사느라 은행에 빚을 많이 졌는데 건축가 김원이 재능 기부로 리모델링을 맡아 준 덕에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미술자료를 수집·정리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잡지 미술 연재물 기록을 시작으로, 미술단체카드, 미술인명카드, 주제별 미술기사 색인 카드 등을 정리했다. 1980~90년대 중반까지 내가 발표한 글이 신문에 자주 인용 보도되면서 ‘자료 하면 김달진’이란 인식이 서서히 자리잡았다. 평론가를 비롯해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없었다. 특히 미술자료 기록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선미술’ 1985년 겨울호에 쓴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 보존을 위한 제언’이란 글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료의 힘이랄까, 자료의 활용도와 중요성을 널리 알린 게 나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미술인 하면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만을 생각하지만 나는 비창작 미술인인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미술행정가, 작품 보존 및 수복전문가 등에 대한 기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아트가이드’ 미술계 인명록에 이런 인물에 관한 내용을 수집해 꾸준히 연재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해 2010년 ‘대한민국미술인 인명록 1’을 발간했다. 조선시대 초상화가 채용신부터 1850년 이후 태어난 4900명을 실었다.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1000부를 비매품으로 찍었는데 이 책을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가였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이 책에 약력이 실려 있어 깜짝 놀랐다. 가보로 삼겠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 밤하늘 별 중에 왜 일등별만 기억해야 하느냐. 이등별, 삼등별 자료도 남겨야 우리 미술계가 풍부해진다. 인명록에 숫자 1을 붙인 건 언젠가 2권을 꼭 만들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현재 달진닷컴에서 7800명의 미술인이 검색되니 곧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 왔으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아내(최명자씨)는 전시계에서 일할 때 같이 근무한 동료였는데 책을 좋아하고, 서예가 취미인 점 등이 나와 잘 맞았다. 박봉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할 때 아내가 아침마다 신문 배달하고, 우유 배달해서 살림에 보탰다. 직장이든 집이든 자료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아이들과 놀아 준 기억이 별로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 관악구 남현동의 오래된 예술인 마을에 살았는데 자료를 놓아 둘 데가 없어서 라면 박스와 사과 박스에 담아서 안방에 침대 매트리스처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잤다. 어느 날 무게를 못 이겨 마룻바닥이 휜 것을 본 주인이 방을 빼라고 하더라. 할 수 없이 앞집의 빈 지하실을 얻어서 자료를 옮겼는데 여름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자료를 몽땅 버려야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언젠가 그때 얘기를 하는 걸 듣고 마음이 아팠다. 딸 영나(32)와 아들 정현(29)은 지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딸은 대학에서 만화창작을 전공했고, 아들은 미술경영학을 공부했다. 일부러 시킨 건 아닌데 자기들이 스스로 아빠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를 잇겠다고 하더라. 미술계 지인들이 다 부러워한다. 아내도 서울아트가이드 발행인을 맡고 있다.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를 창립했다. 전시, 학술, 뮤지엄 분과로 나뉘어 있고 3권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라키비움(라이브러리+아카이브+뮤지엄) 강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우환, 천경자 화백의 위작 논란 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작품 이력과 같은 객관적 정보들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비엔날레 같은 대형 전시 등 눈에 보이는 지원에만 신경쓰지 말고 자료 수집과 보존, 디지털화, 공공 수장고 확보 등 미술계 토양을 튼튼히 하는 인프라에 좀더 지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신 일도 많으시지만 하실 일도 많으십니다.”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2005년 11월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국내 미술계가 직면한 한국 미술의 정체성 문제, 미술계 위작 시비, 미술시장 활성화, 한국 미술의 해외 진출 등 많은 문제들의 단초가 오늘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전시 리플릿 한 장, 메모 한 줄에 담겨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30년 전 ‘관람객은 속고 있다’에 쓴 글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신념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순녀 문화부장 coral@seoul.co.kr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46년간 한국 근현대 미술자료 수집과 보존, 연구에 매진해 온 자타공인 국내 미술자료 전문가 1호다. 미술계 안팎에선 오래전부터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미술계 인간 자료실’로 통했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전문 분야를 개척해 온 그는 스스로를 “한국 근현대 미술의 기록과 공유를 지향하는 아키비스트(기록관리자)”라고 부른다. 2013년부터 라키비움 프로젝트를 통해 아키비스트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1955년 충북 옥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금속공예과 졸업(1993),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졸업(1999) ▲월간 전시계(1978~1981),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1981~1996),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1996~2001)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 개관 ▲2002년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창간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개관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 창립 및 협회장, 한국박물관협회 홍보위원장, 서울시박물관협의회 이사, 종로구사립박물관협의회 회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2010), 한국미술저작출판상(2014), 홍진기창조인상(2016)
  • 손연재 리우 입성…“지금까지 정말 참 잘 왔다 꼬꼬마”

    손연재 리우 입성…“지금까지 정말 참 잘 왔다 꼬꼬마”

    손연재(22·연세대)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갈레앙 공항에 러시아 리듬체조 대표팀과 함께 도착한 것은 지난 16일(이하 한국시간). 일본의 국가대표 미나가와 가호(19)와 함께였다. 미나가와는 공항에서 왁자지껄하게 단체 셀카 사진을 찍는 러시아 선수들 사이에서 외로운 섬과 같았다. 미나가와는 공항으로 마중 나온 일본 선수단 관계자와 함께 러시아 선수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조용히 선수촌행 버스를 기다렸다. 미나가와의 모습은 6년 전 세종고 1학년 때 러시아로 홀로 유학을 떠난 손연재를 떠올리게 했다. 손연재도 미나가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러시아에서 텃세와 홀대,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손연재는 상파울루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뒤 결전지인 리우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초등학생 때 볼 연기 사진을 올렸다. 손연재는 그 사진 옆에 “지금까지 정말 참 잘 왔다 꼬꼬마”라고 적었다. 수많은 인내와 고통, 좌절의 시간을 버텨내고 이 자리에까지 온 스스로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읽혔다. 손연재는 그렇게 자신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목표인 올림픽 메달을 향해 연기를 펼칠 날이 이제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손연재는 19일 오후 10시 20분부터 리우 올림픽 경기장에서 대회 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에 출전한다. 참가선수 26명 중 상위 10위 안에 들면 역시 21일 오전 4시 59분부터 개인종합 결선이 시작된다. 손연재는 상파울루에서 러시아의 세계적인 ‘투톱’ 야나 쿠드랍체바, 마르가리타 마문 등과 막바지 담금질에 열중했다. 훈련 프로그램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비춰보면 손연재는 쿠드랍체바, 마문 등과 함께 실전과 같은 모의 시합을 매일 같이 진행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서 긴장감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어떻게 해야 높은 점수를 받는지를 터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리듬체조 세계 최강 러시아의 훈련 시스템은 정평이 나 있지만, 손연재가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첫 메달을 수확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올 시즌 국제체조연맹(FIG) 주관 월드컵 대회 기준으로 손연재의 개인종합 최고점은 74.900점으로, 강력한 동메달 후보인 우크라이나의 간나 리자트디노바(75.150점)에게 뒤진다. 벨라루스의 멜리티나 스타뉴타(74.550점)도 큰 대회에서 더욱 강한 특유의 저력이 살아난다면 충분히 메달에 도전할 만한 후보다. 하나 남은 동메달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이제 나흘 뒤면 드러난다. 손연재가 러시아에서 6년 넘게 그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하나의 꿈을 향해 바쳤던 땀과 눈물이 보답을 받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 손연재 리우 입성 ‘여기가 선수촌’

    [서울포토] 손연재 리우 입성 ‘여기가 선수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리듬체조에 출전하는 손연재(22·연세대)가 16일 오후(현지시간) 선수촌 광장을 둘러보고있다. 전날 밤 늦게 리우에 도착한 손연재는 입촌 첫날 훈련 대신 휴식을 취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올림픽 포토] 선수촌 광장 둘러보는 손연재

    [올림픽 포토] 선수촌 광장 둘러보는 손연재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리듬체조에 출전하는 손연재가 16일 오후(현지시간) 선수촌 광장을 둘러보고있다. 전날 밤 늦게 리우에 도착한 손연재는 입촌 첫날 훈련대신 휴식을 취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봉지아, 리우] 나홀로 선수들의 외로운 싸움, 응원합니다

    [봉지아, 리우] 나홀로 선수들의 외로운 싸움, 응원합니다

    ‘함상명, 우하람, 손연재.’ 세 선수의 공통점은 자신의 종목에서 홀로 리우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는 것이다. 함상명(21·용인대)은 복싱 밴텀급(56㎏)에, 우하람(18·부산체고)은 남자 다이빙 3m 스프링보드에 출전해 이미 경기를 치렀다. 리듬체조의 손연재(22·연세대)는 오는 19일 예선전에 출전할 예정이다. 홀로 경기에 나서는 만큼 더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하지만 여태까지는 분위기가 신통치 않다. 당초 결선 진출을 기대했던 우하람은 15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 마리아 렝크 수영 경기장에서 열린 3m 스프링보드 예선에서 364.10점을 받아 전체 29명 중 24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카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491.50점을 받으며 7위에 올랐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자동적으로 상위 18명이 겨루는 준결승행도 무산됐다. 우하람은 경기가 끝난 뒤 “시합장에 바람이 불어 실수를 많이 했던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같은 체급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출전을 포기해 복싱선수로는 유일하게 리우행 비행기를 탄 함상명도 아쉽게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는 지난 14일 열린 16강전에서 중국의 장자웨이에게 0-3 심판 전원 일치 판정패를 당했다. 이로써 한국 복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노메달을 확정 지었다. 사실 선수가 홀로 출전했다는 것은 그 종목이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수층이 얇아 출전하는 선수가 적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복싱과 다이빙의 성적이 좋지 않은 것도 어찌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선수들은 해당 종목에 대한 막중한 책무를 어깨에 지고 있다. 이들의 활약에 따라 단숨에 종목이 부흥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처럼 침체를 반복할 수도 있다. 해당 종목의 관계자들은 김연아(26)가 피겨스케이팅 변방국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둬내 ‘연아키즈’의 성장을 이끌어냈듯이 이들도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남은 경기는 우하람의 남자 10m 플랫폼과 손연재의 리듬체조다. 특히 지난달 말부터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러시아 선수들과 함께 현지 적응훈련에 임했던 손연재는 이날 리우에 입성했다. 그는 사실상 마지막이 될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한국 리듬체조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따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앞선 경기에서는 부진을 거듭했지만 남은 경기에서는 이들이 외롭게 싸워온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는 멋진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 리우데자네이루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부고] ‘한컷에 담은 현대사’… 백무현 前서울신문 화백 별세

    [부고] ‘한컷에 담은 현대사’… 백무현 前서울신문 화백 별세

    역대 대통령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 시리즈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했던 시사만화가 백무현 화백이 지난 15일 위암 투병 중 별세했다. 52세. 백 화백은 1988년 평화신문 창간과 함께 시사만평을 그렸고,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신문에 ‘백무현 만평’을 연재하며 편집위원을 지냈다. 2005년부터는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을 주제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 회장을 지내면서 냉전·학벌·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물든 시사만화계를 자정하겠다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12년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지난 4월 총선 때는 고향인 전남 여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위암 3기 판정을 받았지만 끝까지 선거를 완주했다. 유족으로 부인 윤정숙씨와 딸 승영, 아들 승건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2호실. 발인은 18일 오전 8시 30분이며, 장지는 천주교 용인공원묘지다. (02)3010-2292.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日병원서 섬뜩한 눈빛… 덕혜옹주 ‘망국의 한’

    日병원서 섬뜩한 눈빛… 덕혜옹주 ‘망국의 한’

    강제 결혼 소식에 사흘 식음 전폐 저자 “무서워 조현병 앓았던 걸까”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은)과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덕혜옹주(1912~1989)의 운명은 기구했다. “때가 오기까지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기다리라”는 아버지 고종(1852~1919)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영친왕은 기쁠 때는 미소를 약간 짓는 데 그쳤고, 슬플 때는 억지로 참다가 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다. 영친왕은 말년에 실어증을 앓았고, 조국에 돌아온 뒤로도 7년간 병상에 누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영면했다. 누이인 덕혜옹주 역시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후에 조현병과 실어증을 앓으며 세상을 향한 말을 잊고 타계했다. 4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중인 영화 ‘덕혜옹주’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김장한은 1950년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을 지낸 김을한(1905~1992) 기자를 모델로 했다. 영화 흥행 열기를 타고 김을한이 남긴 책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페이퍼로드)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 책은 1970년 한 일간지에 연재된 것을 묶어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왔다가 2010년 39년 만에 재출간됐고, 이번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이 책은 영친왕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지 고종과 형님 순종, 누이 덕혜옹주, 명성황후, 대비 윤씨, 의친왕과 이우 등 왕손들의 삶은 쓸쓸한 역사의 뒤안길을 보여 준다. 영친왕은 평생을 조국에 죄과를 씻는 심정으로 살았던 것 같다. 당시 제3대 국회가 ‘구황실 재산처리법’을 제정해 고궁과 왕릉 등 구황실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하자 일본 측은 영친왕에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부추긴다. “전하, 한국 정부가 전하의 재산을 다 빼앗고 생계비도 드리지 않는 것은 법률 위반이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꼭 이깁니다.” 그러자 영친왕은 “이것은 우리나라 내부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234쪽) 김을한의 아들인 김수동 전 KBS 드라마국장은 책머리에서 고교 1학년 때 영친왕을 직접 만났던 일과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덕혜옹주를 문안한 뒷얘기를 전한다. 영친왕의 첫인상은 다부진 체격과 온화한 표정의 기품 있는 노신사였지만 정신병원에 있던 덕혜옹주의 말로는 참혹했다. 덕혜옹주는 1946년부터 1962년 1월 귀국할 때까지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냈다. 김을한의 부인이자 덕혜옹주의 유치원 시절 동급생인 민덕임은 “중년 부인 한 분이 독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는데,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큰 눈에는 광기가 섬뜩할 정도였다”고 덕혜옹주의 모습을 전했다. 덕혜옹주는 퇴계로에 있던 일출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에 끌려간 후 19세가 되던 해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덕혜옹주는 처음 그 말을 듣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울었지만 일본인 궁녀들은 “정말 시집을 아니 갈 테야”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김을한은 “강제 결혼을 하게 되니 모든 것이 무섭고 구슬퍼서 필경 정신병 환자가 된 것이 아닐까”라고 썼다.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조선의 현실을 깨닫고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건 감독이 덕혜옹주를 재창조한 것이자 명백한 허구다. 일본군 육군 중장을 지낸 영친왕이나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기록은 전해지는 게 없다. 망국의 한만 전해져 올 뿐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대형 재난우려 지역 등 안전표지판 정비·확충

    전국 각지의 낡은 안전표지판이 정비되고 재난 우려 지역의 안전표지판이 확충된다. 국민안전처는 지난달 5일 울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대형 자연재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지방자치단체가 시급히 설치해야 하는 안전표지판을 설치할 수 있도록 특별교부세 29억원을 지원한다고 16일 밝혔다. 앞서 안전처는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설치가 시급한 안내표지판에 대한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안전처 관계자는 “지진해일 대피안내, 물놀이 사망사고 발생지역 등 표지판을 비롯해 13개 종류의 2457개 표지판을 확충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지자체들은 안전처의 지침에 따라 안내표지판을 설치해야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탓에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미루기가 일쑤였다. 그런데도 안전처는 지자체를 대상으로 안전표지판 설치 여부에 대한 실태 파악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지난달 대규모 지진이 일어난 뒤에야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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