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타악과 재즈의 달인 류복성
한 거장이 있다. 짧은 백발, 까만 반팔 티셔츠에 공수특전단 군복바지를 늘 입고 다닌다. 얼핏 악동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양미간을 찡그리더니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낸다. 오른손 왼손, 어깨가 절로 흔들린다.‘두르르타타 두르르타타’ 봉고와 콩가, 그의 무릎앞에 놓인 원초적 ‘타악’을 인정사정없이 불러낸다. 심장이 박동한다. 다들 생명의 날개를 달고 춤을 춘다. 한바탕 신명과 환희에 빠져들게 한다.
류복성(64)씨.1970년대 TV화면에 봉고라는 작은 타악기를 들고나와 미친 듯 두드리던 사내. 암울하고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정적 연주를 보고 어깨를 들썩이며 잠시나마 위안을 받기도 했다. 또 있다.71∼89년까지 최장수 인기프로였던 TV드라마 ‘수사반장’의 타이틀곡을 제작한 추억의 주인공이다. 얼마전에도 영화 ‘살인의 추억’ 오프닝곡에서도 스릴넘치는 봉고연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평론가들은 류씨를 “심장으로 연주하는 타악기의 거장”이라고 곧잘 표현한다. 또한 한국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 봉고와 드럼 연주의 1인자라는 자리매김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 어떤 즉흥연주에도 생명력과 아름다운 선율로 혼을 빼는 감동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류씨 자신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태초의 음악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47년 재즈인생을 살고 있음을 자부한다.
지난 24일 밤 9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재즈카페 ‘천년동안도’ 2층.20∼30대 연인들, 단체 입장한 회사원, 그리고 외국인 남녀 등 약 300명의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이들은 ‘류복성과 재즈 올스타즈’의 연주에 맞춰 테이블에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특히 류씨가 박진감 넘치는 드럼과 봉고 연주를 할 때면 무아지경에 빠진 듯 환호한다.‘수사반장2’를 새로 선보이자 한동안 박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류씨는 이날도 여전히 까만 티셔츠에 군복바지 차림. 연주 도중 갑자기 음악을 멈추는가 하면 기상천외의 물건(?)을 흔들며 코믹한 연기를 자주 펼쳐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입장객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시선을 무대에 고정시켜 온몸으로 흔들흔들 즐긴다.‘혼자걷는 명동길’ 등 추억의 노래와 ‘수비두비돔’이라는 즉흥곡이 나올 땐 더욱 그랬다.“우리는 만났지 재즈클럽에서/처음 본 순간 너무 좋았지/열받는 사람 신나는 사람/여기 다 모여 노래를 부르자.”
그렇게 2시간 동안 류씨 연주에 흠뻑 빠진 관객들은 좀처럼 떠나줄 몰랐다. 한 종업원은 “요즘 날씨가 선선해지고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재즈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류복성씨 공연때에는 추억의 재즈팬들이 많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류씨는 매주 목요일 저녁 이곳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공연이 끝난 이튿날 서울 광진구 구의동 ‘류복성 드럼&퍼커션 스쿨’(www.mrbongo.co.kr 02-3435-7827)에서 별도의 인터뷰를 가졌다. 류씨는 만나자마자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매스컴에서 각광받는 요즘 세태를 보노라면 정말로 한심하다고 쏘아붙인다. 상업성만 좇는 매스컴 관계자들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재즈는 전세계에 팬들을 확보한 지구촌 최상급 음악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전설적인 재즈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불멸의 히트곡 ‘What a wonderful world’의 가사를 보더라도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고 노래하고 있지 않으냐며 재즈 선율의 감미로움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 어쨌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쩌면 재즈계의 거장으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고달픔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제자 몇명이 왔다. 이들은 류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각자 악기 앞에서 곧바로 연습에 몰입했다. 가끔 귀에 들리는 소리가 거슬렸던지 류씨는 “그게 아니야, 이거야. 두리두리 바라밤, 오케이.”하면서 지적해 준다.
‘류복성의 드럼&퍼커션스쿨’은 류씨의 타악인생 45년을 기념해 2년전 문을 열었다.5개의 드럼부스와 합주공간에서 취미반 입시반 프로반 등을 마련,1대1 레슨을 시키는 사실상 국내 유일의 곳. 류씨는 “그동안 배우고자 하는 요청이 많았지만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여생에 좋은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는 일에 더욱 신경을 쓸 생각이라고 재즈사랑과 고생담을 회고했다.
류씨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가 아무리 말려도 동네에 찾아온 풍물패를 쫓아다닐 정도의 음악에 미쳤다. 타고난 끼 덕에 꽹과리와 징소리는 그에겐 늘 즐거움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우연히 미8군 방송(AFKN) 라디오를 통해 ‘스바라두바 스두비디바라’라는 음악을 접했다. 듣는 순간 리듬에 맞춰 몸이 절로 움직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이 캐논볼 애덜리(알토 색소폰), 존 콜트레인(테너 색소폰) 등과 함께 연주한 ‘Straight no chaser(58년)’라는 곡이었다. 이 노래로 인생이 확 바뀐다. 바로 저런 음악, 재즈연주자의 길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재즈를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큰집이 있는 창신동으로 갔다. 때마침 동북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는 한 달음에 달려갔다. 오디션에 거뜬히 합격했다. 공부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고, 늘 학교건물 지하에 있는 밴드부에서 살았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맨날 행진곡풍 음악만 연주해 밴드부를 뛰쳐 나왔다. 며칠뒤 우연히 종로 거리를 지나는 길에 미8군 쇼를 보게 됐다. 그 길로 미8군 쇼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단장을 쫓아다니며 짐도 날라주고 허드렛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좀처럼 드럼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루는 단장이 ‘버디 리치’라는 드러머가 쓴 드럼 교본을 빌려 줬다. 곧바로 문방구에 달려가 오선지 공책을 하나 사서는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이때부터 하루 20시간을 연습했다.
그후 악단을 여기저기 찾아 다니면서 드럼을 쳐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험부족이란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다. 얼마뒤 전국 드럼경연대회에 우연히 출전했다. 여기에서 많은 박수갈채를 받게 됐고, 이때 고 이봉조 선생과 만나 프로 악단에 입문하게 됐다.
그러던 중 67년 워커힐호텔에서 재즈 드러머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호텔 ‘힐탑바’라는 재즈클럽이었다. 여기에서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씨를 만났다. 둘은 곧 ‘류복성과 재즈 메신저스’라는 팀을 만들어 재즈 전도에 나섰다.
또한 이태원의 재즈클럽 ‘올 댓 재즈’에도 자주 나갔다. 당시 이곳은 재즈음악의 산실로 재즈를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모이곤 했다. 류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인근 미군부대 앞 중고품 가게에서 월급을 몽땅 털어 재즈 LP판을 샀던 기억 등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후 70년대 들어 나미의 ‘영원한 친구’, 송대관의 ‘해뜰날’ 등 수많은 대중음악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해 돈을 벌었다. 그러나 사운드 엔지니어나 편곡자들과 마찰이 자주 생겨 나중에는 때려 치우고 말았다.
90년대 들어 나이 쉰을 넘긴 뒤에도 ‘재즈 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92년의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97년 ‘서머 재즈 페스티벌’,99년 ‘아듀 재즈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공연을 기획, 국내의 재즈 뮤지션들을 한 곳에 불러모으는 성과를 거둔다.
잠시 창밖을 응시하던 류씨는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나이를 의식한 듯 자신의 재즈사랑을 이어줄, 거장의 바통을 이어갈 후배를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지난 세월, 정말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왜 그래요?(침묵) 가슴을 뻥뚫는 음악, 필요해요 안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1년 용인 출생
▲1958년 미8군 쇼단 입단
▲61년 이봉조 악단 입단 5년간 연주
▲66년 길옥윤 재즈올스타즈와 연주활동
▲67년 류복성과 재즈메신저스, 정성조씨와 창단
▲68년 세계적인 타악인 아기콜론(미국)에게 사사
▲71∼89년 MBC 수사드라마 수사반장 타이틀곡 봉고연주
▲78년 류복성과 신호등(라틴코리아나)창단 및 출반
▲87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류복성 재즈올스타즈 협연
▲88년 한강 국제재즈페스티벌 출연
▲92년 제1회 대한민국 재즈페스티벌 연출기획
▲97년 여름재즈페스티벌 연출기획
▲2000년 각 대학 특강 및 군악대 특강
▲03년 재즈인생 45주년 기념 류복성 재즈콘서트
▲05년 현재 류복성 라틴재즈 올스타즈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