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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유학생 납치 조선족2명 추가 검거

    중국 유학생 송모씨(31·베이징 사회과학원 박사과정) 피랍사건을 수사하고있는 경찰청은 달아났던 주범 조선족 신모씨(24·길림성 서란현)와 같은 지역에 사는 정모씨(24)를 중국 공안당국이 지난 23일 추가로 붙잡아 조사하고있다고 25일 밝혔다. 이로써 22일 붙잡힌 조선족 남모씨(28)와 장모씨(18·여)를 포함,송씨 납치일당 4명이 모두 검거됐다. 신씨는 사건 발생 한 달 전쯤 송씨에게 접근,친분을 쌓은 뒤 지난 20일 정씨와 함께 송씨를 납치해 한국에 있는 송씨의 부모로부터 몸값 1억원을 뜯어내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은 베이징 시내의 한 환치기 장소에 잠복,신씨와 정씨를 붙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은 “중국 공안당국이 신씨와 정씨를 상대로 지난 2일 발생한 조명철(趙明哲·40·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씨 납치 사건과의 관련성 여부도함께 캐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조명철씨 납치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 성동경찰서는 지난 2일 중국현지에서 붙잡힌 납치범의 신원은 조선족 고모씨(36·연길시 공원가)와 최모씨(23·흑룡강성 해남현)라고 밝혔다. 경찰은 조명철씨와 조씨로부터 2억5,000만원을 통장으로 받은 한모씨(61·여)와 한씨의 사위 이모씨(36) 등을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경찰은 조씨가 송금 요청 및 은행에 지불정지를 요청한 경위,한씨 등이 은행계좌를 통해 돈을받은 이유 등을 캘 계획이다. 김경운 장택동기자 kkwoon@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 연재를 마치며

    이 연재의 목적은 광복 이후 오늘까지,20세기 후반기의 한국문학이 정치사회사적으로 당했던 검열과 규제와 탄압의 양상을 시대별로 정리하려는 것이었다.주로 작품을 중심으로,그것도 사회체제나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만다뤘기 때문에 몇몇 필화 사건들은 빠졌다. 예컨대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투옥까지 당했던 조영암의 ‘하와이 근성 시비’라든가,역시 같은 이유로 월간 ‘문학사상’을 몇 호 정간 당하게 만들었던 오영수의 ‘특질고’같은 사건인데,다른 자리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진 않았으나 독재자에 의하여 슬그머니 폐기처분 당해버렸던 서정주의 ‘이승만박사 전기’(1949)도 흥미있는 사건이었다.진보당가의 작사 시인 박지수,김동명 시인의 국가보안법 반대 논설문,소설 ‘오발탄’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난 해직교사 제1호 이범선,이병주·송지영의 민족의식이 강했던 논설과 투옥 사건,단편 ‘임진강’으로 곤욕을 치렀던 유주현,희곡 ‘수치’로 물의를 빚었던 시인 구상,통혁당 관련으로 치도곤을 당했던 조동일·임중빈,동베를린 사건 관련의 천상병,1974년 문학인 사건의 이호철·정을병·김우종·장백일,긴급조치로 구속 당했던 김지하,언론인 해직기자 김병익,남민전 사건의 김남주 시인,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송기원,대학에서 해직 당한 김병걸·송기숙·백낙청,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의한 여러 차례에 걸친 각종 집회와 시위로 끊임없이 연행 당했던 고은·신경림·민영·박태순·이문구·조태일·채광석·김정환,노동해방문학 사건에 연루되었던김사인·임규찬·정남영 등등은 문학인의 직접적인 사회참여 활동이 가져왔던 변혁운동의 일환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문학인은 가장 앞섰다.세칭 ‘문학인 방북 사건’ 제1호는 작가 황석영이었다.1989년 3월 20일,남한작가로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황석영은 북한을 방문,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북한인사들과 가장 넓은지역을 두루 다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그는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4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신동아’와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다가 필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며1993년 귀국,구속되었다. 두 번째 방북 문인은 시인 박영희였다.그는 1991년 4박5일 동안 방북했다가7년의 수감생활을 겪어야 했던 불굴의 시인이다.1962년 무안에서 출생한 이시인은 중학 2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공원·구두닦이·신문배달·건축공사장 인부 등 밑바닥 인생을 체험하면서 시집 ‘조카의 하늘’‘해뜨는 검은 땅’을 냈다.박시인은 일제 치하의 광부 징용을 서사시로 쓰기 위해 그취재차 방북을 감행했으나 전혀 목적을 이루지 못하여 아예 일정을 앞당겨귀국,즉각 투옥당했다. 세 번째의 방북은 작가 김하기였다.부산소설가협회 소속회원들과 백두산 등정 후 연길식당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나중에 월북으로 밝혀졌던 이 사건은분단 민족사에서 가장 ‘문학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은 사회정치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에로티시즘과도 끊임없이 마찰했다. 박용구의 ‘계룡산’ 이후 박승훈,염재만으로 이어졌던 외설시비는 마광수와장정일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면서 20세기를 마감한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변혁으로서의 문학운동은 아마 한국이 가장 풍성한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며,이것은 21세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 동대문구, 中企시장 해외로 넓힌다

    동대문구는 관내 중소기업의 해외판로 개척을 위해 방문단을 구성,13일 중국 방문길에 오른다. 유덕열(柳德烈)구청장을 단장으로 구의원,중소기업 대표 등으로 구성된 18명의 방문단은 19일까지 자매결연지인 북경시 연경현 및 길림성 연길시를 방문,경제협력 방안 등을 논의한다. 방문단은 우선 연경현에서 요청한 국영기업 ‘팔달령여행사’와 관내 여행사간 합작방안을 중점 협의할 예정이다.중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갈수록늘고 있는 추세여서 양국 여행사간의 협력은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또한 연경현이 추진중인 약 640만평에 이르는 연경현 강서초원 위락관광지조성사업에 유망한 국내기업을 추천,기업들에 해외진출 교두보를 마련해준다는 복안도 갖고있다.연경현이 임대해 운영중인 북경시내 백화점에 구매사절단을 파견하는 방안도 협의할 예정이다.이밖에 연경현에서 서울시내 및 동대문구에 추진중인 정통 중국음식점 개업을 돕기 위해 투자자를 추천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투자규모 및 사업내용 등에 관해서도 협의할 방침이다. 유구청장은 “이번 방문은 그동안 우리 구가 벌여온 경제 교류사업의 폭을해외로 넓히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문창동기자
  • 타계한 라이사여사

    우아한 외모와 매너,뛰어난 패션감각에 활달함까지.생전 라이사 고르바초프 여사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다. 매사 적극적으로 남편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내조했던 라이사 여사는 이전까지의 소련 퍼스트 레이디와는 전혀 달랐다. 남편을 따라 외유에 나선 최초의 소련 퍼스트 레이디였다. 모스크바대 철학교수 출신인 그녀는 비록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사치스럽고 튀는 여성’으로 부정적 여론의 도마에 자주 올랐지만 서방세계에서는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으로 주의를 끌었다. 이때문에 그녀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함께서방세계에 크렘린의 어두운 이미지를 바꿔놓은 주인공으로 평가됐다. 남편인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의 금실은 전세계가 알아줄 정도.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평소 라이사 여사를 ‘나의 라야’로 부르며 평생의 동반자이자정치적,이념적 동지로 아끼며 신뢰했다. 라이사 여사가 최근 독일에서 투병생활을 할때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녀의 병상을 지켜,두 사람의 애정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여사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난 7월부터 독일 뮌스터대학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했고, 통일의 은인이기도 한 병상의 그에게 독일 국민들은 매일 꽃다발과 위문편지를 보내며 여사의 쾌유를 빌었다. 본명이 라이사 막시모브나 티타렌코인 여사는 32년 남부 시베리아에서 철도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모스크바 대학 재학시절 댄스 파티에서 같은 대학법대생이었던 고르바초프를 만나 53년 결혼했다.지난 91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실각한 뒤부터 건강이 악화됐으나 부군의 해외강연길에 꼬박꼬박 동행하며 내조를 다했다. 이경옥기자 ok@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인터뷰-연극계 노장 장민호씨

    KBS-1TV TV문학관 ‘아우와의 만남’방영일자가 우여곡절끝에 새달 26일로잠정결정됐다. 작가 이문열씨의 동명 원작을 얼개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북에 남은 이씨 아버지 생존여부를 둘러싼 최근 일련의 해프닝 ‘덕’에 일단 화제를 업고 들어가게 된 것이 사실. 이처럼 도드라지지는 않으나 드라마에 눈밝은 이들이라면 반가워할 작은 ‘호재’도 숨어 있다.연극배우 장민호(72)씨의 출연이다. 지난 97년 배우인생 50년을 맞은 장씨가 TV나들이에 나서는 것은 지난 96년SBS 민영TV의 날 특집극 ‘아까딴유’이래 3년만. “북에 두고온 처를 50년만에 만나려고 연길행 비행기에 오르는 노인역입니다.이복동생을 찾는 주인공만으로는 단조로워질 수 있는 드라마에 활력을 더해주는 요소라고나 할까요.”역시 황해도 출신 월남민인 장씨에게 배우생활 50여년은 분단시계 흐름과 바로 일치한다.때문에 그는 연기자보다 실향민으로서 할말이 더 많다. “백두산이라면 아무 민족이나 가질 수 없는 명산인데요,그나마 반쪽이 중국에 팔렸어요.또 우린 우리 민족 소유도 아닌중국쪽으로 로케를 가기 위해그 까다로운 비자심사를 거칠 수밖에 없었으니 이 얼마나 희비극적입니까.”그는 또 거리를 둔 자만의 특권으로 방송제작의 졸속 관행도 공박한다. “운나쁜 이는 열흘 올라도 해를 볼 수 없다는 백두산 정상 로케일정이 딱하루 잡혀있더군요.나쁜 일기에서 고군분투하고 돌아섰는데 그 다음날 등반팀에게서 천재일우의 맑은 날을 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모두 아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북경에서 열린 베세토연극제에 함세덕의 ‘무의도 기행’을 올리고 며칠전돌아온 장씨는 아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영원한 현역’임을 자부했다. 손정숙기자
  • SBS ‘출발모닝와이드’ 백두산 조선족 농촌생활 엿보기

    백두산 하늘 아래 첫동네인 중국 길림성 이도현 내두촌.해발 1,100m에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조선족 60가구 180명이 살고 있다.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100여년 전 간도 대이주때 둥지를 틀고 집단부락을 형성했다.워낙 오지인 탓에 연길이나 도문에 사는 조선족들도 잘 모를 정도이다. SBS ‘출발모닝와이드’(매일 오전 6시)는 21일부터 13부작으로 이 곳 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부제는 ‘윤동혁PD의 백두산 조선족 탐방기’. 연길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의 내두촌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가장 가까운 읍내로 나가려면 3일에 한번씩 오가는 마을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로 산길 22㎞를 달려야 한다.제작진은 마을 촌장집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순박하기 이를데 없는 주민들의 일상을 엿보았다.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두부 찌꺼기로 돼지를 먹이는가 하면 어느새 남편과 술을 빚는 홍미엄마는 영락없는 우리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다.고사리를 캐는 할머니를 따라 집을 나선 제작진은 운좋게 백두산 원시림을 촬영,화면으로 내보낸다.영화세트장 같은 내두촌의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코리안드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딸을 대구로 시집보낸 집도 있고,아들을 서울대학교에 유학보낸 이도 있다.제작진은 또 서른명 남짓되는 조선어린이들이 조선말로 공부하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다.2학년과 5학년은 한 명도 없고,중학교는 50리 떨어진 읍내로 나가야 한다. 이 프로는 내두촌에 이어 중국내 조선족 20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모여살고 있는 연변지역을 탐방했다.HOT의 노래가 유행하는 이 곳은 취업사기와 탈북자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악화돼있다. 윤PD는 “한국대표팀과 중국대표팀이 경기를 벌이면 연변 조선족 열이면 열 모두 중국팀을 응원하는 데 깜짝 놀랐다”면서 “우리가 조선족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고 취재과정에서 느낀 점을 털어놓았다. 이순녀기자 coral@
  • 흥사단, 北‘꽃제비’돕기 나섰다

    島山 安昌浩선생의 뜻을 받들어 통일운동과 청소년교육,민주시민교육을 펼쳐온 흥사단이 중국 만주지방을 떠돌아 다니는 탈북 어린이 돕기에 나섰다. 흥사단 조국통일운동본부는 중국 현지의 목사·선교사와 유지들의 도움을받아 부랑아(일명 꽃제비)로 떠도는 북한어린이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펴겠다고 밝혔다.국내에서 성금과 쌀을 모아 만주 지역의 학교와 고아원 등을 통해 북한어린이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도움을 받을 어린이들은 북한의 부모 곁을 떠나 만주로 온 뒤 구걸을 하거나 빵,고구마를 훔쳐 연명하고 있다.대부분은 북한 가족들과 연락이 되고 있으며 가족과 함께 온 아이들도 있다.흥사단은 우선 200여 꽃제비 가족을 도울 예정이다. 조국통일운동본부 金潤彙본부장은 “만주의 북한 어린이들은 구걸을 하거나 훔쳐 마련한 돈과 식량을 국경에서 북한에 남아있는 부모를 만나 건네주기도 한다”면서 “우리 돈으로 20여만원이면 한 가족 4∼5명의 1년치 생활비가 된다”고 말했다. 흥사단이 탈북 어린이 돕기에 나서게 된 것은 金본부장이 지난해 11월 만주에서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신발을 신지 못한 채 식량을 훔치거나 동냥을 하며 지내는 수백명의 어린이들을 만나면서부터. “굶주리고 추위에 떨던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金본부장은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한달 동안 털실 운동화를 보내기 위한 모금에 나섰다.곧 500여만원이 모이자 운동화 2,500켤레를 사서 지난 6일부터 14일까지 중국으로 가 어린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신발 선물을 받은 북한 어린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金본부장이 방문했던 만주의 도문,장춘,연길 지방은 중국 정부의 탈북자 색출 작전으로 삼엄한 분위기였다.金본부장은 “만주 땅을 헤매고 있는 2만∼3만명의 북한동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흥사단은 앞으로 북한 농민들에게 비닐하우스 40여동을 보내는 등 북한주민 돕기에도 나설 계획이다.또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활동도 펴기로 했다.金본부장은 “연변대학에서 북한 교수들과 만나는 등 북한과의 교류 확대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또 가까운 시일 안에 공식 방북 승인을 얻어 직접교류도 하겠다는 생각이다.金美京 chaplin7@
  • 심장병수술 조선족어린이 延吉 부모와 화상전화

    ◎“엄마 아빠 나 이젠 안아파요”/부모 얼굴 나타나자 울음/퇴원후엔 청와대 등 방문 “아빠,보고 싶어요” “의사선생님 말씀 잘 듣고 건강하게 돌아와야 한다” 한국어린이보호회 초청으로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난 15일 입국한 조선족 어린이 21명 가운데 16명이 30일 서울중앙병원 등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서 영상전화를 통해 중국 연길에 있는 그리운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5명은 너무 어리거나 치료중이어서 영상전화를 하지 못했다. 선천성 심장병의 일종인 팔로씨4증후군을 앓고 있는 朴麗云양(5)은 화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보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몇 밤을 자면 집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고 부모들은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빨리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타일렀다. 어떤 부모는 수술부위를 보고 그저 눈물만 흘리기도 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들은 다음달 2일 퇴원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15일까지 청와대를 비롯,서울시내를 구경하게 된다. 한국어린이보호회 趙敏善씨(28·여)는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산다는 연길에 아직도 수술을 받아야 하는 심장병환자 어린이가 300여명이 있다”면서 “이들이 하루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다른 단체들도 힘을 모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해외거주 보고싶은 얼굴들 국제영상전화로 만나세요

    ◎한국통신 동화상 서비스/중국 연변지역부터 실시 외국에 살고 있는 가족·친지들과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 동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통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국통신은 15일부터 1차로 중국 연변 지역에 있는 가족·친지와 동화상을 보면서 통화할 수 있는 ‘국제영상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전화요금은 일반 국제전화와 같으며 기존 한국통신 KT카드나 신용카드 등으로도 지불이 가능하다. 이 서비스는 한국통신 광화문 전화국과 연길시 우전국을 연결함으로써 이뤄진다.한국통신은 지난 8월 정부수립 50주년에 맞춰 연변 동포들을 대상으로 ‘영상 만남의 행사’를 실시한 바 있는데 반응이 좋아 서비스를 일상화하게 됐다고 밝혔다. 먼저 85만 연변 동포를 상대로 서비스를 실시한 뒤 반응이 좋으면 사할린, 카자흐스탄 등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구상 전 지역으로 서비스를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연변 동포와 통화를 희망하는 사람은 15일부터 광화문전화국 1층으로 나오면 된다.서비스는 시간 제한 없이 24시간 실시된다.문의 한국통신 마케팅본부(02­750­5102).
  • 북한 문화재 100억대 밀매

    ◎고미술협회장·묵인 세관원 등 8명 구속/中 통해 구입… 일부는 日로 거액의 외화를 밀반출해 북한 문화재를 밀수입한 한국 고미술협회장 등 문화재 밀매단과 이를 묵인해준 세관공무원 등 11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대검 중수부(李明載 검사장)는 1일 고미술협회의 金種春 회장(49),金泰亨 부회장(42),전통고미술연구소 대표 吳圭洪씨(48) 등 골동품상 6명을 관세법 및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또 김포세관 감사반장 張化植씨(44·7급)를 뇌물수수 혐의로,암달러상 金玉仙씨(54)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각각 구속했다. 이와 함께 金永姬씨(46·여)를 불구속 입건하고 중국에 체류 중인 鄭贊敬씨(46) 등 브로커 2명을 수배하는 한편 고려청자 등 북한문화재 111점(시가 30억원)을 압수했다. 고미술협회장 金씨는 지난 해 5월부터 지금까지 청자항아리 등 북한 문화재 113점(시가 20억원)을 중국 단둥·연길 등지에서 골동품 수집상 鄭씨를 통해 밀수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미술협회 부회장 金씨는 지난 해 10월부터 지난 6월까지청자매병 등 북한 문화재 16점(시가 23억원)을 밀수입하고 백자대첩,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묘지(誌) 등 우리 문화재 3점(시가 12억원)을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 국제통화 일시적 장애/5∼9일 매일 4∼8분씩

    ◎통신위성 태양 영향 받아 5일부터 9일까지 5일간에 걸쳐 태양의 영향으로 일시적 국제전화 장애가 발생한다. 한국통신은 이 기간에 △미국,호주 등 태평양위성을 이용하는 국가와의 통화는 매일 상오 8시56분부터 4∼8분동안 △영국,독일 등 유럽국가와 중국,러시아 등 인도양위성을 사용하는 국가와의 통화는 하오 5시26분부터 4∼8분간 △아시아샛 위성을 이용하는 중국 연길 지역은 하오 2시40분부터 4∼6분간 각각 국제통화 장애가 발생할 것이라고 4일 밝혔다.
  • 지자체 고유상품 개발하자/진진형 서울 관악구청장(공직자의 소리)

    IMF체제를 맞아 정부는 요즘 조직개편을,기업은 구조조정,근로자는 정리해고라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우리사회의 각부문에서 군살을 빼기위해 부림치고 있는 이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지방자치단체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치단체가 할 일은 무엇일까.무엇보다도 절박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자치단체 나름대로의 건설적 역할을 발견,재정립하는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리 관악구에서는 세계화·개방화라는 시대적 추세와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도움을 주기위해 수입억제,외국투자 유치 및 수출확대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외화모으기·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해 3억원상당을 모으는 성과를 거뒀다. 우리구는 특히 수출증대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소기업제품 수출촉진단을 결성해 중국에 파견하는 등 수출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통상전문요원을 채용하고 국제교류 담당조직을 과단위로 신설해 중소기업제품의 수출 및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상담하고 있다.특히 지난해 우리구와 우호협력관계를 수립한 중국 길림성 연길시와 심양시,내몽고 호화허터시에 중소기업체들의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역사적인 사업을 전개하게 됐다. 이에따라 지난 2월5일부터 23일까지 약 50여일간 18개업체 120여개 품목 13억원 상당의 물량을 순회판매해 좋은 성과를 올렸다. 필자도 중소기업체들의 수출지원을 돕기위해 기업인 18명을 인솔하고 지난달 5일부터 10일까지 연길시에서 4일간 직접 판매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의 새로운 출발을 계기로 관악구는 해외수출사업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발전시키고 앞으로 무역공사를 산하단체로 설립할 계획이다. 우리구의 이번 상품 순회전시판매전은 작은 발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해외수출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자치단체 고유의 모델을 개발하게 되면 지자체도 국제간 상품거래를 활성화시켜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 소수민족 허저족(흑룡강 7천리:22)

    ◎중 정부 “희귀 종족 보호” 산아제한 없애/45년 300여명서 95년엔 4,275명으로/‘고향’ 동강시만 821명… 민속박물관도 여기는 삼강평원,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강이다.중국 역사는 동강을 이렇게 적고 있다.주나라 때는 동강이 숙진부,당나라 때는 하북도 흑수부,요나라에서는 동경도 오국부,명나라에 이르러 삼성부도관할구에 속했다는 것이다.1906년 이곳에 임강주가 서고 3년 후엔 임강부로 개칭,또 4년 후에는 임강현이 됐다.동강으로 이름이 고착되기는 그 다음해인 1914년이고 현에서 시로 승급한 때는 겨우 10년 전인 1987년이다. 오랜 옛적에는 성곽이었던 이 곳을 허저족들의 말로는 라하쑤쑤(나합소소),페허라는 뜻으로 불렀다. 1654년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을 일망타진한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합수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했다.하지만 아침 9시에 가목사를 떠나 270㎞ 겨울길을 달려서 동강에 도착한 때는 지난해 12월4일 하오 4시,벌써 겨울 짧은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가로등이 널따란 아스팔트 길을 밝히고 도로 양켠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에는 전기불이 밝혀졌다.옛날엔 페허였을지 몰라도 오늘의 동강시는 발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우리는 동강호텔로 곧장 갔다. 동강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우립군(35) 주임과 오채운(42) 부주임이 호텔에서 우리를 맞았다.가목사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이미 전화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점심에 도착할 줄 알고 식사를 같이 하려고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오 두 사람은 모두 허저족(혁철족)이었다.중국 사책에서는 허저족을‘허진(혁진)’ ‘허지쓰리(혁길사륵)’ ‘허지리(혁길륵)’ 등으로 표기했는데 그 뜻은 동방,하류라는 것이다. ○선조는 북해지방서 어렵 바로 흑룡강 하류에 사는 동방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허저족으로 사책에 처음 기재된 것은 ‘청성조실록’인데 “강희 2년 3월 임진(1663년 5월1일)에 4성 쿠리하(고리합) 등에 명하여 수달피를 바치도록 했는데 허저 등국은 영고탑에서 수납했다”고 씌어 있다.허저족으로 고정되기시작한 것은 민국 23년(1934년) 능순성이라는 사람이 ‘송화강 하류의 허저족’이라는 책을 펴낸 때부터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북해지방 바이칼호 부근에서 어렵으로 살았답니다.어렵장 쟁탈 전쟁에서 쫓겨 흑룡강,송화강,우수리강 유역으로 옮겨온 연대는 똑똑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서북방에서 온 통구스(통고사)인임엔 틀림이 없답니다” 1976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허저족을 위한 일을 해온 오채운 여사의 말이었다. 현재 동강시 오기진의 만족들이 1990년 인구조사때 허저족으로 등기하고 허저족자치촌을 만든 사실이 이를 입증하기도 한다.‘효종실록’에 기재된 변급의 견문기에도 “흑룡강 하류에 또 어피달자가 있다.북경에 귀순했다”고 돼있다. 이튿날 동강시에 있는 허저족 민속박물관을 참관했다.흑룡강변 공원 옆에 세워진 박물관 건물은 영국인들의 세관이었다고 한다.청조 말년에 동강이 중국 북방의 중요한 무역항구로 되면서 1907년에 라하쑤쑤분관이 섰다.그러나 청조는 영국·미국·독일·러시아·일본·프랑스 등 11개 국가와체결한 불평등한 ‘신축조약’에 따라 해 관세 등을 배상금으로 외국인한테 주었다.1910년 영국인들은 바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반반씩 섞인 벽돌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항일전투서 40명 희생 인적이 끊긴 박물관은 썰렁했다.모두 네 개의 칸으로 된 박물관은 허저족들의 복장(짐승가죽과 물고기 가죽으로 만들었다),생산공구(활,작살,그물 등)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적은 민족이랍니다.18세기 초 강희 말년에 1만2천여명(2천398호)이었는데 1856년에는 5천16명,1911년에는 3천400여명이었습니다.그런데 20년 후인 1930년에는 겨우 1천200명뿐이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는 300명밖에 안 남았었지요.우리 민족은 멸망의 변두리에 이른 것이랍니다” 오채운 여사가 말했다. “동강,부금지구에서 우리 민족이 항일에 나선 용사들은 50여명입니다.칠성강 전투에서 40여명이 희생되고 나머지 분들은 러시아로 해서 신강으로 이전해서 항일을 계속했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허저족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향수,인구가 급성장했는데 1995년 당시 4천275명이 되었다.한족은 무조건 아이 하나,만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은 아이 둘까지 허용되어 있지만 허저족은 둘 이상도 허용된다. “정부에서는 허저족에 대한 특별한 우대정책을 주고 있습니다.동강시구역 내에 사는 허저족은 821명입니다.일년에 한 번씩 운동대회를 할 때면 국가에서 자금을 대지요.올해 여름 운동대회때 시 민족사무위원회,시 정부,향 정부에서 각각 10만원씩 30만원을 대주었습니다” ○조선족은 ‘대우’ 못받아 12만 인구를 가진 동강시 관할구역 내에 사는 조선족은 922명,허저족보다도 많지만 소수민족 대우를 그들처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동강진병원 원장 박광일(44)씨는 말한다. “동강은 허저족의 고향입니다.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자치주의 수도 연길을 수도처럼 생각하듯이 허저족들도 동강시의 동강진을 수도처럼 여긴답니다.민속박물관도 여기에 있습니다.용정에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섰다더군요.허저족 민속박물관을 볼 때마다 용정에 가서 우리 민족의 박물관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민족을 모르고 산답니다” 흑룡강성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45만,그런데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아직 없는 실정이다.내년에 가목사시에 박물관이 서는데 두칸을 내서 허저족과 조선족의 민속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 북한,월북자 이례적 추방/이용가치 없다고 본듯/30대 이발사

    국가안전기획부는 18일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밀입북했다가 북한 당국에 붙잡혀 중국으로 강제 추방된 최모씨(33·이발사·충북 단양읍)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12월14일 중국 심양으로 출국,연길 등을 거쳐 같은달 18일 북한으로 몰래 들어가려다 국경경비대에 체포돼 1개월여동안 월북 경위 등에 대해 조사를 받은 뒤 지난 달 16일 중국으로 추방 당했다. 안기부 관계자는 “밀입북 이유와 북한에서 조사받은 내용 등을 조사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자진 월북자를 강제 추방한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최씨가 체제 선전에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 한국경제위기 울상짓는 연변/무역·관광산업 등 큰 타격…경기 급랭

    ◎건설 등 각종 합작사업 마무리 난항 【북경=정종석 특파원】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에 극심한 타격을 주고 있다.몇년 동안 한국특수에 힘입어 반짝했던 연변경제가 한국의 금융위기로 달러송금액이 급감하는 등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연변은 오는 28일의 설날(춘절)을 앞두고 ‘한국파고’의 영향으로 경기가 썰렁하다.자치주은행에 입금됐던 거액의 달러 정기예금이 모두 빠져나가고,지난해 10월 이후 자치주 중국은행의 국제무역결산통계에 한국과의 무역결산통계가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3개월 전부터 시작된 한국원화 폭락과 달러태환 송금 차단의 여파다.IMF불똥이 엉뚱하게도 연변으로 튀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 한국과 이뤄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무역은 지난해 총 수출입액이 1억9천5백만달러에 이르렀으나 연변지역 기업들과 거래하던 한국무역업체 중 부도위기에 몰린 곳이 많아 현지 무역업계에 난국이 닥쳤다.외국인투자기업,투자유치,노무송출,관광 등의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연변지역 합자기업 600여개중 한국이 74%를 차지,이미 투자와 건설이 시작된 많은 사업들을 마무리짓기 어렵게 됐다. 반면 연변경제에 유리한 일면도 있다.현재 달러수요가 막바지에 오른 한국,말레이지아 등 금융위기 국가들에 대한 채무를 상환하는 호기로 생각하고 있다.연길비행장 확장건설 때 한국으로부터 들여온 80억위안(당시 1천만달러)을 현재의 환율로 상환한다면 절반도 안되는 420만달러를 물어주면 되기 때문이다.또 한국 등 금융위기국가들의 선진기술·설비가 헐값으로 떨어져 이를 싸게 도입하면 그만큼 연변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치주관계자들은 크게 낙담하고 있다.연변경기 급락은 그동안 너무 한국일변도의 무역과 인력송출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싹트고 있다.한 관계자는 “백두산관광을 위해 최근 몇년간 해마다 10여만명(연 관광수입 2억여위안)씩 찾던 한국관광객들이 발길도 뜸해질 것같다”고 현지 관광산업의 침체를 걱정했다.
  • 북방동포 인기가요/‘눈물젖은 두만강’ 1위

    ◎소양강 처녀·낙화유수·봉선화 연정순 중국 연길 등에 거주하는 북방동포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는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인 것으로 조사됐다. KBS 사회교육방송국의 북방동포 대상 프로그램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올들어 11월까지 접수한 북방동포 신청가요를 집계한 결과,‘눈물젖은 두만강’이 23회로 1위에 올랐다.다음으로는 ‘소양강처녀’(20회),‘낙화유수’(18회),‘봉선화연정’(15회),‘사랑의 거리’(15회),‘서울에서 평양까지’(12회),‘꿈에 본 내 고향’(12회),‘홍도야 우지마라’(11회)등이다. 한편 중국 연변방송국에 의뢰,11월15일부터 한달동안 연변지역 동포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가요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20대 젊은층에선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30∼40대에선 배일호의 ‘요점만 간단히’,50대 이상에선 ‘눈물젖은 두만강’이 가장 인기있는 가요로 꼽혔다. 또 연변대 1·2학년생 107명과 연변 재정학교 학생 150명 등 20대 257명을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존재의 이유’(57명)에 이어 HOT의 ‘캔디’(48명),영턱스클럽의 ‘정’(36명),클론의 ‘빙빙빙’(11명),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8명),젝스키스의 ‘배신감’(8명),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꺼야’(8명)등의 차례로 좋아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밖에 연길시 노래방 5곳에서 실시한 30∼40대 조사에선 ‘요점만 간단히’,현숙의 ‘요즘 남자 요즘 여자’,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편승엽의 ‘초대받고 싶은 남자’ 등이 인기있었다. KBS 사회교육국은 이 조사결과를 1월2일 하오 10시 신년특집으로 방송한다.
  • 백두산 반달가슴곰 도입/새달 연길서 한쌍

    백두산 반달가슴곰 암수 한쌍이 오는 10월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산림청은 29일 다음달 10일께 중국 연길에서 3∼4년된 백두산 반달가슴곰 암수 한마리씩 들여올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들 반달가슴곰은 중국 연길에서 육로로 심양까지 옮겨진 뒤 항공편으로 김포공항까지 수송된다.산림청은 이들 반달곰을 광릉수목원 야생동물원에서 키울 계획이다.
  • 치치하얼의 조선족(흑룡강 7천리:6)

    ◎20년대 첫 이주… 1만9천명 ‘공생’/눈강평원 드넓은 초원/서광촌·명성촌·선명촌서 농사일­상업으로 생계 이어 흑룡강 한 지류인 눈강유역의 평원은 장관이다.달리는 열차에서 바라본 차창밖으로 푸른 벌판이 아득했다.하늘을 흐르는 흰 뭉게구름과 초원에서 풀을 뜯는 새하얀 양떼가 어울린 평원은 그야말로 목가적이었다.그 망망한 초원 한 가운데 옹기종기한 마을은 마치 섬처럼 보였다.조선족들도 일찍 눈강평원에 들어와 그 섬같은 외로운 마을을 꾸렸다.눈강유역인 흑룡강성 치치하얼지구의 조선족은 지금 1만9천명을 넘는다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눈강평원의 조선족 이주는 1929년에 시작되었다.조선시대 사육신의 한분인 성삼문을 배출한 성씨가문의 22대손이 식솔을 이끌고 첫발을 들여놓았다.오늘의 흑룡강성 용광현 서광촌이었는데,당시 지명은 눈강성 대유수다.그 손자 성영석씨(46)는 지금 서광촌에 살고있다.할아버지가 처음 서광촌으로 들어올때 이끌고 온 식구는 여섯이었다는 것이다.지금은 성씨네 일가가 100명으로 늘어났다는 그는 이주해온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지식인이었던 모양입네다.한일합방이 되자 벼슬할 꿈을 버리고 경상도 청도읍에서 서당을 꾸렸다고 기래요.한학에 능하셨던 할아버지는 일제의 농촌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서리 관리들의 밉상을 받았디요.그래서리 고향을 등지고 만 것입네다.아들 삼형제와 사촌까지 여섯이 고향을 떠나왔다고 합데다.봉천까지는 기차로 왔으나 더 갈만한 노자가 있어야디요.꼬박 두달을 남부여대하고 걸어서 대유수(서광촌)에 도착했다는 것이디요” ○성삼문 22세계 첫발 그들 일가는 비록 일망무제한 옥토에 짐을 풀었다고는 하지만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부릴 소나 말은 고사하고 씨앗도 없었기 때문이다.그 할아버지는 당시 눈강성 이몽기 성장에게 글을 올렸다.문장에 감복한 성장은 성소재지 치치하얼로 불러들였다.한주일여를 성장집에 머물면서 필담으로 교유한 두 사람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성장은 마차 두대에 쟁기며 양식,씨앗을 선물했다.첫해의 농사도 대풍을 이루었다.그래서 사람을 고향 청도로 보내 일가친척들을 서광촌으로 데리고 왔다. ○일제때 강제이주 시작 오늘날 눈강유역 평원에는 서광촌 말고 치치하얼시 메리스구 명성촌과 선명촌에도 조선족이 몰려있다.서광촌이 자생마을인 것과는 달리 이들 명성촌과 선명촌은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당시 눈강성에는 이같은 집단 이주마을이 13군데나 되었다고 한다.한 마을에 100호씩이 자리잡았다.모두가 경상북도 사람들이었는데,이주 초기인 1942년에는 일제가 배급도 주었다.그러다 일제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이른바 대동아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놓은 쌀을 모두 군량미로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 등쌀에 견디다 못해 마을을 등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경상도에서 온 전병형씨네 일가도 겨우 이태를 살고 도망치다시피 내몽골로 들어갔다.해방을 맞고서도 십수년이 지난뒤 그들 일가는 치치하얼로 돌아왔다.아들 성렬씨가 한국전쟁때 북한 인민군 소대장으로 참전했다가 대퇴하고 식솔 모두를 치치하얼시 메리스구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한때 선명소학교 교장을 지낸 아들도 이미 세상을 떴다.지금은 치치하얼시 교육위원회 종교처장으로 일하는 손자 창국씨(49)가 가계를 잇고 있다.창국씨는 1968년 치치하얼 조선족고급중학 재학 당시 반혁명분자로 몰렸다.그는 이듬해 제적되어 선명촌으로 쫓겨났다.반혁명분자이기는 했지만 선명촌에서 촌장 아래 직급인 생산대장으로 올라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그가 쫓겨나서 일했던 선명촌은 눈강을 사이에 두고 명성촌과 마주한 마을이다.모두 조선족 마을이지만,한때는 남조선 북조선이라 불렀다.요새는 한국 북조선으로 바뀌었다.그렇다고 다른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단지 강남북에 자리한 마을 위치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가 반혁명분자로 쫓겨났던 선명촌은 말하자면 북한이다.요즘에 와서 보면 두 마을의 별칭에는 유머러스한 구석도 있다.그러나 문화혁명 당시 그의 선명촌생활은 말이 아니었다.1975년 중앙민족대학으로 진학하기 이전까지 옹근 여섯해를 오로지 농촌에 매달렸다.기왕 농촌으로 들어온 바에야 조선족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각오로 별별 궂은 일을 다 맡았다. “아마 1973년인가 그럴겁네다.그 무렵 여기서는 농사일에 부릴 수 있는 한마리 말값이 3천원이라 싼 말을 사러 내몽골로 갔디요.하라이얼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자동차와 말을 갈아 타고 우숴무에 도착했수다.거기서는 말 한마리에 550원을 해서리 20마리를 사디 않았갔수.그 말을 끌고 초원을 지나 대흥안령을 넘어오는데 40일이 걸렸디요” 그 시절 총각 전창국은 마을 처녀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처녀들은 아무런 사심없이 일에만 매달린 그의 열정에 흠뻑 반했던 것이다.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전통가치관이 사뭇 달라졌다.그런 신랑감이라면 거들떠 보지않는 세월로 변한 것이다.농촌처녀들은 파랑새처럼 도시로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그래서 힘을 들여 농사일을 하는 총각들이 짝을 못 찾는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그런데 치치하얼에 머무는 동안 선명촌으로 가는 강가에서 한쌍의 젊은 남녀를 만났다.“옳지,아직은 짝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총각은 치치하얼시에서 소문난 업소 금복문술집(금복문주점)주인 김홍률씨(51)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듣고 이내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외지 농촌에서 왔다는 예쁘장한 처녀는 바로 금복문주점 종업원으로 주인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날 저녁 2백만명 가까운 인구를 가진 치치하얼시에서 손꼽는 금복문주점을 들렀다.남향으로 나앉은 술집은 칸막이 온돌방에 식탁을 갖춘 홀을 갖추었다.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도 출수 있는 또 다른 홀과 별채의 숙소가 있어서 마시고 놀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아가씨가 열둘에 강씨라는 마담 한사람을 둔 금복문주점은 아직 초저녁인데도 제법 흥청댔다. ○시골주점 손님 북적 강마담은 한달에 천원을 받는다고 했다.아가씨들은 아예 월급이 없다는 것이다.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라서 아가씨들은 팁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연변에서 왔다는 미스김은 말이 아가씨였지 사실은 유부녀라고 실토했다.연길시 철남구가 집인 그녀는 한국으로 갔던 남편이 빚 5만원만을 진채 강제 송환되어하는 수 없이 치치하얼로 흘러들어왔다.내가 연길사람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시시콜콜한 화류계 속사정을 다 까발려 놓았다. “팁이야 주는 사람 마음에 달렸디요.한국사람들은 보통 백원씩은 줍데다.그것도 침대에 올라가야 백원을 주디요.한국사람은 팁은 꽤 주지만 손이 점잖지 않아서 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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