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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라지는 풍속도(연변 조선족 1백년:13)

    ◎“마시고 즐기자”/개방바람 타고 「흥청망청」 확산/무도·오락·커피 3청 급증… 이혼율 높아져 중국조선족의 성분을 이주목적을 기준으로 해서 나눌 때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쪽박차고 건넌 빈농들이고,다음은 독립운동을 위해 이주한 일부 지사들이다.또 상인과 선교사·교육자 혹은 문학인들을 꼽을 수 있다.어떻든 모두 합쳐도 빈농의 수를 능가하지 못할 만큼 거의 호구지책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고 할 수 있다. ○88년 가라오케 첫 등장 여자들이라고 해서 집안에 들어앉아 남편의 시중이나 처분만을 바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발벗고 나서서 무슨 짓이든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지 못했다.억척여성이라는 명찰이 붙을 만큼 악착스럽게 일하며 살아왔다.지금은 그 노력의 대가로 겨우 먹고 살 만하게 되었다.그렇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자유화의 물결과 갖가지 외래문화의 범람으로 인해 조용하던 호수가 파문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1988년초 지금의 연길시 노동자문화궁 옆에 처음으로 「은방석다방집」이 생겨났다.그후 이어 「봉황루커피청」등 커피집이 또 문을 열었다.다음해는 더욱 다양한 서비스업종이 선을 보이게 되었다.이를테면 가라오케가 생겨 맥주를 마시며 마음껏 춤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가라오케는 이곳 조선족들의 오락적 성향에 맞아 더욱 번창되었다. 중국조선족의 음주는 중국의 다민족중에서도 단연코 상위에 속하며 노래나 춤도 둘째가라면 서운할 만큼 잘한다.술마시는데 독작과 대작이 있다.조선족은 대작을 즐긴다.대작이란 술상에서 서로 한잔 부어주고 한잔 받고 하여 서로 잔을 치면서 마시는 것이다.연변에서는 흔히 대작시에 『술은 권하는 맛으로 마시는 것이지 혼자 먹어서야 무슨 재미인가』하면서 상대방에 강권하면서 만취하게 만드는 음주풍속도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한다. ○서민에겐 “그림의 떡” 1990년부터 연변의 가라오케는 급변하기 시작했다.밀폐식 단칸방에 흐린 색등을 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이지 않게 시설을 꾸몄다.그리고 여종업원을 채용하여 손님과 동석시켜 술시중을 들게 했다.손님의 청에 따라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말하자면 겉으로는 노래방이지만 내용상 카바레나 술집의 기능을 겸한 것이다.지금은 분업화된 서비스업종이 다양하게 성업중이다. 연변에는 부유층의 출현으로 향락과 소비성 유흥업이 계속 생겨났다.어느 통계에 의하면 1991년에 1백50개소밖에 없던 연길시의 가라오케가 다음해에는 4백36개소로 증폭했다고 한다.오랜 기간 사회주의 정책에 눌려 있던 조선족은 이러한 유흥업소가 더 없이 신기하고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나 『돈이 많이 들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즐거움도 한번쯤 누려봐야지』하고 자위한다.그러나 전부터 있어온 나이트클럽이나 「야총회」「무도청」과는 달리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가라오케·술집·요리집·사우나 등은 일반서민층에게는 선망의 대상일뿐 경제적으로 발붙일 곳이 못된다. 연길시는 인구 30만명이 안되는 중형도시인데도 불구하고 1천5백여대의 택시가 바쁘게 뛰고 있다.이것을 비아냥거리는 말로 사람들은 『연길시는 세가지가 많고 한가지가 괴상하다』고 한다.즉,「유흥장소가 많고,주정뱅이가 많고,택시가 많으며 자전거가 택시를 탄다」는 것이다.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결국 음성적인 매춘행위의 범람을 초래하게 했다.이윽고 당국이 메스를 들었다.1993년 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문화오락업과 음식·봉사업 등 업종의 경영장소질서를 참답게 정돈하고 엄하게 관리하는 데 관한 통고」라는 긴 제목의 통제문이 공표되었다.밀폐식 단칸방이 금지되고,조명도 10촉 아래는 안되게 되었다.이때 많은 업소가 폐소되었고 수백명이 처벌을 받았다. ○한국과 교류도 원인 산업화의 물결이 일어 시장경제가 도입된 이래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외화수입도 늘어났다.그러나 구질서의 붕괴에 따르는 자본주의의 나쁜 점들이 만연되어 사회병리현상으로 발전한 것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예컨대 여성들의 건전하던 의식이 향락으로 빠졌고,이로 인해 가정의 불화가 이혼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점을 들 수 있다. 연길시에서도 이혼이 1988년의 2백23건에서 89년도에는 6백26건으로 증가되었다.이어 90년에는 8백45건으로 88년에 비해 약 4배가 되었다.연길시의 이혼유형에서 한가지 특징은 여성이 이혼을 제기한다는 점이다.이혼의 이유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전체의 40%이고,다음이 남자의 외도를 들고 있다.두번째의 문제점은 청소년들의 비행이다.유흥업소의 범람은 청소년들에게 과소비풍조를 부채질했다.3청(무도청·오락청·커피청)을 다니면서 먹고,마시고,놀고 즐기는 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이전의 청소년범죄의 주종은 상해죄였는데 최근에는 성범죄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연변의 조선족 사회병리가 날로 심화해가는 모습을 보고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다.
  • 중경찰 청부해결사 노릇/부도내고 해외도피 한인사업가

    ◎채권자 청탁받고 불법 감금폭행 【북경 연합】 중국 경찰들이 국내에서 부도를 내고 도피중인 한국인 사업가 전상만씨(43·전 우성산업 대표)를 연행하면서 전씨를 무수히 폭행·감금하는가 하면 전씨와 함께 중국에 온 형 상룡씨(48·주식회사 장수 대표)와 이 회사 이사 정경연씨(43)도 함께 강제연행해 심하게 구타한 뒤 3일이나 불법감금했다가 풀어줘 말썽이 되고 있다. 정씨 등에 따르면 이들 3명은 구랍 26일 중국 청도공항에 내린 직후 채무변제 관계로 전상만씨와 분쟁관계에 있는 나승훈씨(38·전 안도정밀 대표)의 청탁을 받은 연길시 경찰 등 10여명으로부터 권총 등으로 위협을 받으며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혁대·포승·넥타이 등으로 팔을 뒤로 묶인 채 강제연행돼 자동차편으로 44시간을 달려 연길시 공안국으로 끌려갔다. 정씨는 특히 『전상만씨는 국내에서 낸 부도 등으로 인터폴(국제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하더라도 중국경찰이 연행,감금하는 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법적으로 무관한 그의 형과 나까지 감금,구타한 것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라면서 『중국경찰이 나씨와 결탁,전상만씨와 나씨간에 이미 법적으로 종결된 채무 문제에 개입,청부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무차별 징세(최두삼 귀국리포트:19)

    ◎농촌부과 세금·잡부금 2백69종/난집자·난탄파·난벌관의 「3난」이 유행어로 『이 가죽잠바는 한벌에 3백60위안(원·약3만6천원)인데 2백60위안씩에 처분 합니다.방금 부리나케 10개나 팔고보니 이제 겨우 3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어서들 사세요.후회를 말고요』 지난 5월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서시장에서는 한 옷장수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바로 그 옆에서는 서너명의 남녀가 똑같은 가죽잠바를 들고나와 『옳아요.우리들이 방금 2백60위안씩을 주고 샀어요』하며 틀림없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저놈들은 모두 한통속이다.옷판을 벌인지 이제 10분 밖에 안됐고 아직 한벌도 못팔았는데 10벌이나 팔았다니 지독한 거짓말쟁이들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이때 바로 옆에 서있던 한 사나이가 호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내 두드려보더니 영수증을 한장 내밀며 말했다.『저는 세무국에서 일보고 있습니다.방금 잠바 10벌을 2백60위안씩에 팔았다고 하셨는데,총판매액 2천6백위안에대한 5%의 세금 1백30위안을 내십시오』 그러자 당장 이 장사꾼은 『그게 아니다』며 변명을 하려했으나 주변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이 『방금 10벌을 팔았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하고 나서자 어쩔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세금을 내놓고야 말았다. 이 얘기는 흑룡강신문 94년 5월28일자에 『거짓말에 과세』란 제목으로 보도 됐었는데,중국농촌에서는 요즘 각종 세금남발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예를 들었을 뿐이다. 중국세무원들이 한국의 인천이나 부천에서 처럼 세금을 받아 통째로 삼키는 버릇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를 못했다.그러나 아직도 가난한 중국 농민들에게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잡부금을 거두고 있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중국농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3난」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이는 3차례에 걸친 난리를 의미하는게 아니다.모금을 위해 내는 돈을 제멋대로 정해 부과하는 「난집자」,무차별로 균등하게 돈을 거두는 「난탄파」,닥치는대로 벌금을 부과하는 「난벌관」등을 가리켜 3난이라 부르고 있었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같은 3난에 속하는 농촌의 잡부금 또는 잡세의 종류가 무려 93가지라고 밝히고 그중 각종 비용징수가 73가지,갖가지 명목의 모금이 11가지,기금정립 2가지,기타 7가지라고 설명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이같은 잡세의 종류가 무려 2백69가지라는 설도 있으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한국농촌에서도 각종 잡부금을 모으면 그렇게 많아지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어쨌든 지난 93년 여름 한때 중국농촌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었다.그 주요 원인은 이같은 3난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됐었다.그래서 당국은 갖가지 대책을 내놓았다.우선 중앙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대책에 따라 농민부담 잡세 37개가 취소됐다.그 내용은 농촌 집터 사용비,농촌음료수 개선 모금,농촌변소 개선 모금,수력발전 건설기금,어선어항관리비,삼림자원 경신비,향촌의사 보조비,향진이하 방송망 보호비,TV중계방송 채널 점용비등을 들수 있다.이밖에 혼인등기비용과 고기배 검사비등 17개 항목은 금액을 조정했으며 알곡구입 판매계약공증과 신문구독등 14개항목은 강제 집행하지말고 주민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할수 있도록 했다. 그런가하면 해외에서 부쳐온 우편송금도 현금으로 내주지않고 수개월 후에나 교환가능한 「백조」라고하는 일종의 차용증서로 내주고 있어서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우체국을 습격하거나 직원을 다치게하는 등의 소요가 무려 11개 성에서 발생했다고 일부 서방신문들이 보도하기도 했다.이 백조는 우체국 뿐아니라 정부 곡물수매대금이나 학교 교원들의 월급지불에까지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주요원인은 지방정부가 각종 건설사업에 무턱대고 돈을 쏟아넣다 보니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방고위간부들은 먹고 마시고 도박하며 여자와 놀아나기등 이른바 중국인들의 4대 즐거움을 위해 공공비용을 물쓰듯 하기도 했다.그런가 하면 전국에서 빈곤하기로 이름난 하북성 령수현의 당서기는 모친 장례식때 각기관이나 개인들이 보내온 현금만 30여만위안(약3천만원)에 달했을 정도였다.그는 공무원들 3∼4개월 월급에 해당하는 1천위안미만의 부조금을 낸 사람들은 아예 접대도 하지 않았지만 돈을 많이 낸 사람들은 상등석에 앉혀놓기까지 했다가 결국 반부패 투쟁 때에 걸려 쫓겨나고 말았다.
  • 중국 연변 샤오잉쯔 뼈인물상(한국인의 얼굴:8)

    ◎“부릅 뜬 눈” 근엄한 가부장/청동기 초기의 석관묘서 출토/우리민족 형성에 큰몫 했을듯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에 해당하는 만주일대는 우리 민족과 무관하지 않은 지역이다.그러니까 흥안령 동쪽 일대의 만주지역은 신석기시대부터 문화전통을 한반도와 함께하고 있었다.그리고나서 요령을 중심으로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이를 한반도와 공유했다.이 청동기문화에서는 같은 북방 루트를 타고 내려온 이웃 오르도스문화와의 차별현상이 발견된다. 이렇듯 민족형성과 깊은 연관을 갖는 중국 동북지방 유적 가운데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교외의 샤오잉쯔(소영자)유적이 있다.민족형성을 마무리 지은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가 약간 맞물려있는 샤오잉쯔 유적에서는 예술적으로 뼈를 조각한 인물상이 출토되었다.흔히 골제인물상으로 부르는 이 조각품은 청동기시대 초기의 돌널무덤(석관묘)에서 나왔다. 짐승의 뼈를 소재로 얼굴모양을 다듬고 나서 그 밑에다 긴 꽂을대를 갖추었다.마치 머리통이 큰 비녀를 연상시키는 이 조각품의 길이는 18㎝.얼굴에다 부릅뜬 눈,불거져 나온 광대뼈,굳게 다문 입을 새겨 전체적으로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긴다.근엄한 표정의 권위적 남성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거니와,가부장적 부신의 등장을 의미하는 조각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인물상을 만든 샤오잉쯔 청동기사람들은 돌널무덤에 다른 껴묻거리로 옥 따위의 치레걸이도 묻었다.석회암 널돌(판석)을 떼어다 돌널무덤을 축조한 이들은 언덕위로 이어진 많은 움집을 지었다.언덕위 집터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민무늬토기(무문토기)도 쏟아져 나왔다.이 같은 사실은 지난 1943년에 일본인들이 내놓은 「만주국 고적고물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것이지만,현재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 샤오잉쯔유적은 1937년 일제치하의 간도성민중교육관 주사 다케시타(죽하군언)가 사람뼈와 몇점의 석기를 찾아내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그 다음해 만주국은 민생부소속의 야마다(산전문영)의 보고에 따라 조사계획을 세웠다.발굴은 1939년까지 진행되었다.이 발굴에는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의학부가 당시 일인교수 후지타(등전량책)의 인솔로 참여했다. 뼈 조각품 인물상은 이 때 출토되었다.경성제대가 발굴에 참여했기 때문에 인물상은 현재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그러나 발굴에 나섰던 일인학자들이 샤오잉쯔유적의 형성시기를 너무 올려잡았다.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그저 막연히 석기시대에다 꿰맞추어 놓았다.이를 실수로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당시 간도 주둔 일본군수비대의 삼엄한 경비속에 이루어진 발굴이기는 하나,딛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 부분에는 일본 관학의 우리 민족사에 대한 왜곡 내지는 비하라는 저의가 깔려있다.우리민족에게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는 식민사관의 틀을 샤오잉쯔유적에도 적용한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민족은 청동기시대를 열지 못한채 석기시대를 계속살다가 초기철기시대를 맞았다는 것이 일제의 주장이었다.그러나 우리 민족도 훌륭한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있었고,실제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다. 뼈 조각품 인물상이 나온 샤오잉쯔유적의 돌넘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대표적 무덤형태의 하나.고인돌(지석묘),독무덤(옹관묘)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돌널무덤은 시베리아로부터 중국 동북지방(만주),한반도를 잇는 선에 널리 퍼져있다.특히 샤오잉쯔유적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은 우리 고대민족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이 유적이 자리한 연길시와 그 주변은 옛 고구려 고토가 아닌가.
  • 아동문학/최인학(연변조선족 1백년:8)

    ◎“어린이가 희망” 일제때 창작 활발/탄압 피해 최서해·윤동주·윤극영 등 간도서 활약/해방후 「어린이신문」 발간… 80년대 중편 소년소설 등장 창작활동이 한반도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1930년대의 간도는 작가들의 활동무대였고 은신처였다.아동문학도 예외는 아니다.암흑기를 방불케 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아동문학가들은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동화 동시를 써 왔다.30년대 초창기 문학가중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작가들이 간도에서 아동문학으로 활동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농사짓다 문학생활 최서해는 1915년에 북간도 백하지구에 건너와서 농사를 짓다가 쪼들린 생활을 이기지 못해 7년간이나 유랑생활을 했다.그러다 1924년에 서울로 향했다.윤극영은 1926년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 음악교사로 있었다.그 후 일본,하얼빈 등지로 다니며 음악을 전공하며 가무단을 이끌기도 하다가 용정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김예삼은 1935년 흑룡강성 목릉현 흥원에 이주하여 교편을 잡았으며,채택룡은 1938년연길현 명륜학교로 와서 교편을 잡다가 광복을 맞았다.그리고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출생하여 평양숭실학교를 다니다가 36년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에 편입했다. 이 밖에도 간도에서 이 무렵 활동하던 아동문학가로서 윤해영 안수길 함형수 이호남 천청송 염호열 김연호 박화목 한해수 등을 꼽을 수 있다.중국 조선족의 아동문학은 이들 작가군에 의해 형성되었고 1936년 창간된 「가톨릭 소년」은 작품의 발표원이 되었다.당시의 상황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은 문학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그리고 항일운동과 독립전쟁을 몸소 경험하는 현장이었기에 아동문학의 저변도 이러한 경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의 생활상 표현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이곳까지 물밀듯 엄습했다.작가들은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이 무렵 윤동주는 참혹한 당시의 생활상을 동시로 표현했다.그의 초기 작품중 한편을 감상해보자.「굴뚝」이라는 동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게지 총각애들이/깜박깜박 검은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40년대에 와서는 윤동주에 이어 이호남 천청송 함형수 등이 계속 동요와 동시를 썼다.그러나 검열제도가 심해지자 전처럼 노골적인 항일의지 표현의 길은 막혀버렸다.다만 상징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써가며 새경지를 개척해 갈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와중에서도 항일유격대 안에서는 전투성이 강하고 선동성이 짙은 아동문학이 생성되었다.항일가요로는 「혁명군이 왔고나」「아동단가」「어디까지 왔나」등이 있으며 아동극으로는 「유언을 받들고」「아버지는 이겼다」등이 있다.이들 선동성이 강한 작품을 통해서 미래의 혁명투사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끈질겼으나 작가들이 붓을 꺾지 아니한 보람이 있어서 중국조선족 아동문학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1945년 광복을 맞아 아동문학은 활기를 찾게 된다.연변에서는 주로 채택룡 염호열 이호남 김순기 최형동 등이 활동을 했으며 「연변일보」「길동일보」「동북조선족인민보」「불꽃」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를 했다.목단강 일대에서는 주로 김예산이 발표를 많이 했는데 1949년에는 「건설」이라는 잡지를 편집하여 작품을 게재도 했다.하얼빈일대에서는 김태희 임효원 등이 「인민신보」를 내면서 작품을 게재했다.특히 임효원은 1947년 「어린이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70년대 30여명 활동 그 후 문화대혁명의 혼란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는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목표아래 중국조선족도 새로운 문단조직으로 가다듬었다.그 결과 아동 문학작가는 거의 30여명에 달했다.발표지도 늘어나 「소년아동」「중국조선족소년보」「별나라」「꽃동산」등이 속속 발행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이처럼 많은 작가와 발표지를 가지면서도 아동문학의 문학성 부진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자아확립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그러므로 1980년대는 모두가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 깊이 반성하기에 이른다.즉 과거처럼 틀에 박힌 작품활동,교시적이고 피상적인 주제보다는현실적이고 자아개발이라는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재고해 가는 과정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난날의 계급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인위적인 갈등을 설정하여 정치적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하던 창작정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이러한 반성문학운동을 업고 궤도수정을 한 것이 다름아닌 중편 소년소설의 등장이다.과거 동시나 동요 위주였던 아동문학이 중편소설의 등장으로 새국면을 맞는다.이처럼 중편소년소설이 등장하자 최소한 아이들의 성격 묘사가 가능해졌다.진정한 의미의 문학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중국 주재원·여행객 “안전비상”/이상봉씨 피살 계기로 본 현지실태

    ◎유랑인구 대거 유입… 대도시 치안 실종/“달러 많다” 소문에 한국인이 범죄표적 23일 상해시 홍교빈관(강교빈관­호텔)에서 발생한 삼호물산 대리 이상봉씨 피살사건은 중국의 치안 악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이 사건은 한국인의 중국방문 및 체류자가 늘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크게 늘어난 가운데 발생,우려를 더하게 한다. 현지경찰은 이번 사건을 금품을 노린 강도살해 사건으로 보고 있다.금품과 관련,중국에 체류하던 한국인이 피살된 사건은 지난 4월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서인석씨에 이어 올들어 두번째.그러나 이상봉씨 피살 사건은 호텔내 객실에서 대낮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중국체류 국내 주재원들과 여행객들의 걱정은 더 크다. 지난 9월초 길림성 연길시에서 여행중이던 국내여행사 안내원이 술집에서 술에 취해 나오다 조선족등에게 납치,돈을 빼앗기고 머리를 크게 다친 일도 한국 여행자가 중국에서 당할 수 있는 전형적 사건중 하나다.중국주재 상사원 사이에선 술집과 술집 주위에서 걸어오는 시비,특히 조선족청년들의 시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흑룡강성·길림성 등에선 한국에 대한 조선족 동포들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돼 있어 주의해야 한다. 중국에 체류하는 국내 주재원들은 중국의 치안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말한다.요즘에는 예전과 달리 총을 휴대한 무장경찰이 사이카를 타고 야간순찰을 돌고 있다. 치안악화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유동인구의 확대.개혁개방의 진전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지던 거주이전에 대한 통제가 크게 완화됐기 때문이다.치안문제 제로지대라던 북경·상해 등의 대도시에 농촌 등에서 수백만명의 직업없는 「유랑인구」가 유입되면서 이들에 의한 각종 강도사건이 빈발하고 있다.한 중국인은 북경조차도 최근에는 밤거리에서 부녀자들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도사건이 빈발한다고 귀띔한다.한국인은 특히 달러를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술집에서 많은 팁을 내놓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이런 명성을 더 높이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도 연안지역에서의 범죄가 크게 늘고 있다며 올 하반기들어 광동·심천 등 남부의 치안불안 지역을 포함,전국적 범죄퇴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불법무기류의 유통과 급속히 늘고 있는 범죄조직도 중국정부가 당면한 골칫거리중 하나.지난 2년간 39만정의 불법무기류를 압수했다는 공안부의 발표(9월)에도 불구,불법무기를 이용한 떼강도와 열차강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또 대만과 홍콩의 폭력조직이 개방과 자유화 물결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매춘과 마약밀매 등에도 조직적으로 관여하는 등 일반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중국주재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한국 여행자들이 중국내 범죄조직과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며 혼자 여행하는 것은 가급적 삼가는 등 중국의 치안악화에 따라 여행객들의 주의가 각별히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 혼인 풍속(연변 조선족 1백년:4)

    ◎간소해진 전통혼례… 잔치는 1주간/신부 혼수 갈수록 많아져… TV·냉장고는 필수품 한국인은 어디 가서 뿌리를 내려 살더라도 혼인만은 인륜지대사로서 정중하게 전통성을 지키는 것이 관례다.특히 한국과 가장 인접해 사는 중국 조선족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최근 자유화의 물결로 인해 연변이 놀라울 만큼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혼인풍속의 변이만 보더라도 고금의 차이가 실감난다. 과거 연변에서는 혹간 연애결혼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통혼례 의례를 따랐다.선보기가 끝난 다음에는 남자 측에서 부모나 후견인이 여자집으로 가서 청혼을 한다.그러면 여자쪽에서 궁합을 보고 좋으면 허혼한다.남자집에서 신랑될 사람의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면,신부집에서는 연길을 신랑집으로 보낸다.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다.사돈보기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즉,신랑쪽의 부모가 음식을 차리고 신부네 집으로 가서 사돈끼리 혼인날짜와 혼담을 나누는 방법이다.사주단자나 연길을 생략한 형식이지만 이 두 제도를 복합한 간이형식이라고도 할 수있다.그리고 혼인전에 신랑쪽에서 납폐를 보낸다.고향이 남쪽인 사람들은 남자쪽에서 혼수감을 준비하지만 북쪽 사람은 여자쪽에서 혼수감을 마련한다.예단도 준비한다. 혼인 당일 신랑이 신부집으로 간다.가까운 친척 3∼5명이 상객으로 함께 간다.연변에서는 「우시꾼」이라 한다.신부집에 도착하면 「대반」의 안내를 받아 전안례를 치른다.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상위에 놓고 부채로 세번 들이민다.이때 짓꿎은 사람들이 『썩 들이밀어! 좀 더』하고 음담을 하여 장내를 웃긴다. 나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에 관한 유래담이 한국에서는 채록된 것이 없다.그런데 연변의 향경선생이 쓴 「내가 본 민속반세기」에 소상히 나온다. ○전안례의 유래 전해 「옛날 한 사람이 봄 가을에 기러기때 내리는 자리에 옹노(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놓고 기러기를 잡으려고 했다.하루는 옹노에 기러기가 잡혔나 해서 가보았다.그랬더니 기러기 두마리가 잡혀 죽어 있었다.자세히 보니 기러기 한마리는 확실히 옹노에 걸려 죽고,다른 한마리는 옹노에 걸려 죽은 기러기의 목에 자기 목을 걸고 죽어 있었다.더 자세히 보니 옹노에 걸려 죽은 기러기는 수컷이고 목에 자기 목을 걸고 죽은 기러기는 암기러기였다.기러기잡이꾼은 이 부부기러기의 애절한 사랑의 죽음을 아쉽게 여겨 작은 널조각으로 관을 만들고 죽은 기러기 한쌍을 사람 무덤처럼 묻어주었다.그리고 그 무덤에다 「열녀 기러기묘」라고 쓴 비를 세웠다.기러기잡이꾼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기러기옹노를 없애버리고 나무를 깎아서 한쌍의 기러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자기 딸이 시집갈 때 신랑신부가 그 나무기러기를 가져가게 하여 서로 바꾸게 했다」 전안례가 끝나면 연변에서는 교배례가 없고 신랑은 큰 상을 받는다.신부는 뒷 골방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이때 신랑을 따라온 우시꾼은 딴 집에서 상을 받는다.신랑이 상음식을 갈라서 부모님께 보내겠다면 뜻대로 하게 한다.큰 상에는 삶은 닭에 붉은 고추를 물려 쌀사발에 담아 놓는데 액막이와 생육을 상징한다.신랑이 큰 상을 받을때 신랑이 우시꾼을 불러 상차림을 보게 한다.상을 얼마나 잘 차렸는가 보라는것이다.신랑이 먹는 밥그릇에는 삶은 달걀 두개를 밥에 묻어두는데 신랑은 한개를 먹고 나머지 한개는 신부에게 물린다.여기서도 부부의 금실이 좋음을 의미한다. ○「신방엿보기」 사라져 신부는 가마를 타고,신랑은 말을 타고 떠난다.남의 천금을 가져온다는 관념에서 음식을 주는 대로 먹고,점잖게 신부를 데려온다.신부를 태운 가마가 신랑집 마당에 들어설 때 대반이나 인접하는 사람만으로는 교군꾼을 달래기 힘들다. 『신부가 너무 무거워서 인제는 가마를 내팽개치겠다』 『신랑집에서 대접이 뜰뜰하니 가마를 메고 돌아가겠다』 하고 입씨름을 벌이며 가마를 일부러 흔들어 댄다.그러면 신랑의 어머니가 나와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제발 이번만 용서하십시오』 하고 손발이 닳도록 빌면서 술과 고기 안주를 내 오고 돈푼도 넣어준다. 신부가 받는 큰 상은 신랑이 받았던 큰 상과 비슷하다.이때 신부측 우시꾼은 애를 먹이며 우쭐대고 주정하는척 한다.신랑측에서는 이러한 억지나 무례한 짓에도 거의 무조건 좋은 말로 달랠 뿐이다.아무리 남존여비라지만 이날만은 여존남비로 역순 된다.이튿날 신부는 시집 어른들에게 예단을 놓고 큰 절을 올린다.지금은 이튿날 신랑신부가 음식을 차려서 부모 가까운 친척과 함께 신부집으로 가서 인사를 한다.옛날엔 삼일만에 떠나는 「삼일」이지만 지금은 다음날로 바뀌었다.돌아온 뒤에는 시어머니나 동서 되는 사람이 신부를 데리고 일가친척을 돌아다니며 소개한다.이것을 연변에서는 「집보기」라 한다.신랑신부 다루기나 신방엿보기 습속은 해방전까지는 지속되었으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없어졌으며 다만 신랑 친구들이 좀 지껄이다가 마는 정도다. 오늘날 혼인잔치에서 변수로 나타난 모습은 혼인잔치가 하루에 끝나지 않고 여러날 계속된다는 것이다.예컨대 혼인날 일주일이나 열흘전부터 오늘은 아버지 직장의 손님을,내일은 어머니 직장의 손님을,모래는 또 관계되는 직장 손님들…이렇게 하다가 혼인 당일은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을 청하는 것이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손 대접이 푸짐한 정서가 다시 살아난 듯 하다.또 하나의 다른 변수는 신부가 마련하는 혼수가 기하급수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70년대 후반부터 생긴 이러한 경향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와서는 더더욱 심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처음에는 신부가 이불 두채,옷장 하나쯤 갖추면 만족했지만 차차 늘어나서 이불 네채,옷장 두개로 늘더니,지금은 이불 여덟채에 최신식 옷장·찬장·컬러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녹음기 등을 갖추어야만 한다.신부들은 마치 경쟁이나 하듯 남보다 더 차려가려고 한다.이렇게 푸짐한 혼수감이 준비된 신부를 얻은 신랑들은 수지맞는 편이다. ○약혼해도 정식부부 이처럼 혼인풍속도가 달라진 것은 아마도 가치관의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한국의 사정도 강건너 불보듯이 아니라 70∼80년대에 직접 겪었다.고난과 가난을 겪은 전세대들의 가치관과 핵가족의 주인들이 될 현재의 젊은이들 간에는 그만큼 괴리가 생겨난 것이다. 또 하나 기성세대가 고민하는 혼인풍속도는 현행 제도가 약혼후 행정기관에 신고만 하면 혼인증서를 발부하는 문제다.법적으로는 약혼으로 정식부부임을 증명받은 셈이다.전통적 관례에 따르면 혼인식이 끝나야 정식부부가 되고,달이 차지 아니한 아이를 출생하면 당연히 혼전 경험으로 인정되어 핀잔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현행제도와 관례 사이에 파생되는 갈등이 고민이다.성문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은 본국이나 연변이나 마찬가지다.
  • 강상호 전북한 내무성 부상(인터뷰)

    ◎“북 세습체제 무너뜨려야 통일 가능”/매스컴통해 국제적인 반북여론 형상 긴요/식량 등 경제원조땐 군비확장 악용 소지 『김정일 북한체제의 실상을 소상히 파헤쳐 한민족이 단결해야 통일도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 수립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러시아로 망명했던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씨(85)는 28일 열린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94서울대회」에 앞서 김정일체제 붕괴를 위해 모든 국민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서 열리는 이번 대회의 성격은. ▲서울대회는 북한체제에 반대해 탈출한 망명인사들로 구성된 「구국전선」의 미국·일본·러시아 등의 지부회원 3백여명이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대회」를 가진데 이어 2번째 대회이다.서울에서 대회를 갖는 것은 김일성사후 변화하는 북한 정세에 맞춰 북한에 민주화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해외 인사들 뿐만 아니라 한국내 여러 사회단체들의 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의 김정일 위치는. ▲그는 머리가 둔하고 영도력이 없다.김정일에 반대하는 삐라가 김일성 장례식이후 평양중앙거리에 뿌려졌다는 점은 인민들이 김정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한 단면이다. ­남북통일의 방향은. ▲김일성이 유언으로 남긴 적화통일을 김정일도 그대로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김정일 체제의 실상을 폭로,세습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제도를 세운뒤라야 통일이 될 수 있다.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출판·방송등을 이용,국제적인 반왕조세습체제 및 개인숭배 반대여론을 형성하는게 중요하다. ­북한에도 반체제 활동이 있는가. ▲정확한 수와 규모는 파악되지 않지만 반체제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또 이들 단체는 해외의 반북단체들과 극비리에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일성사후 북한의 변화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등지에서 일하는 북한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북한은 김일성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김정일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그를 영도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정일정권은 어느 정도로 안정적인가.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처 김성애와 아들 김평일을 지지하는 세력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으나 이들은 아직 김정일세력에 대항할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당분간은 김정일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개발 정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는 이미 갖고 있다는 추측과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이 2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북통일을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은. ▲북한에 식량 등 경제원조를 할 경우 북한이 이를 군비확장에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지원하거나 자극하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강씨는 자신이 상임공동의장으로 있는 「조선민주통일 구국전선」과 「북한민주화추진협의회」(회장 이연길)가 공동주최하는 이날 대회에서 북한사회의 개방과 주민들의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대회사를 하기 위해 지난 26일 입국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강씨는 45년 구 소련군에 입대,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북한에 남아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공산당 생활을 시작,54년 북한 내무성 부상겸 정치국장에 올랐다. 강씨는 그러나 「개인숭배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내용의 논문을 내무성 신문인 「내무원」에 게재,혹독한 사상검토를 당한뒤 59년 11월 소련으로 다시 돌아가 김일성부자체제 타도 활동에 앞장서왔다.
  • 망명한 전직 북고위층 27명/“김정일 즉각퇴진” 촉구

    ◎북 민주화 서울대회… 8개항 결의문 채택 「북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94 서울대회」가 28일 하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파크텔에서 북한 전직 고위인사로서 해외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27명과 시민등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김일성 사후의 북한정세 및 북한의 민주화 방안등을 집중 논의했다. 이날 대회에는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강상호·85)씨 등 해외망명 반북한인사들이 결성한 「조선민주통일 구국전선」(약칭 구국전선,상임의장 박갑동 전 남로당 지하총책·75)과 국내에서 반북운동을 벌이고 있는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회장 이연길·68)가 공동주최했다.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이회장은 『김일성이 사망한 뒤 국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김정일체제의 본질을 각성시키기 위해 이번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게 됐다』며 『앞으로 북한체제의 변혁 내지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김정일의 즉각적인 퇴진과 정치범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한국과의 자유왕래 및 외국여행 자유 보장 ▲6개월내 자유총선거 실시 ▲핵무기 생산 즉각 중단 등 8개항을 북한 당국에 촉구했다. 대회 참석자 가운데에는 전 김책군관학교장 장학봉씨,전 문화선전성 부상 정상진씨,전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씨,「혁명 1세대」인 최종학 전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아들 최아파나시씨(러시아),엄승렬 전 국가계획위 부위원장의 아들 엄페렉스씨(러시아),재일동포 북송에 앞장섰다가 나중에 반북인사로 변신해 지금은 「북송동포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모임」 중앙위원으로 있는 장명수씨(재일동포)등 북한 전직 고위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한편 「구국전선」은 이번 대회에 앞서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미국과 일본·러시아 등지의 회원 3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차 대회를 가졌으며,내년에는 모스크바에서 3차 대회를 가질 계획이다.
  • 택일/노영현 한국물가정보 회장(굄돌)

    무슨 큰일을 치르거나 중요한 결정을 하고자 할 때 날짜를 고르는 일을 택일 또는 택길이라 하고 특히 결혼일 선택은 연길이라고 한다. 택일은 신랑·신부의 생기복덕을 기려서 살이 없는 날을 택하게 된다. 또 지방에 따라서는 신랑·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날,두집안에 불길한 일이 있었던 날,조상의 제삿날,농번기,삼복이 낀 달 또는 마지막 달 등을 피하여 고르기도 한다. 국가의 일꾼을 뽑는 선거의 택일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는 그간 택일과정에서 여·야의 의견이 달라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제 자치단체장 선거를 목전에 두고 또 한차례 승강이가 재현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미국의 경우 아예 대통령선거와 중간선거의 투표일을 「11월의 첫째 월요일의 다음 화요일」로 못박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이 날로 지정이 된것일까.1845년 미의회의 결정을 존 무어는 최근 그의 저서 「워싱턴을 말한다」에서,11월을 택한 까닭은 농한기라 투표율을 높일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일요일은 「교회에 가는 날」,월요일은 「한주를 시작하는 날」이라서 제외됐고 목요일은 「영국의 투표일」,금요일은 「주말을 앞둔 날」,토요일은 「쇼핑의 날」이라서 안되고….결국 남은 요일 중에서 화요일을 택하게 됐다. 투표일을 첫째 화요일로 하지 않고 「월요일의 다음 화요일」로 한 것은 11월1일은 10월의 결산으로 몹시 바쁘기 때문에 이날이 투표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 하며,그래서 94년 미중간선거의 투표일은 11월8일이 된다. 이같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택일에 있어 길흉화복에 바탕을 둔 주술적 의미가 강한 반면 서양에서는 실생활에 바탕을 둔 현실적 의미가 강함을 엿볼수 있다 하겠다. 어쨌든 택일은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대상으로 하고 있느니만치 신중해 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같다.
  • 시인 미당 서정주(이세기의 인물탐구:61)

    ◎팔순에도 샘 솟는 시정… 문단의 거봉/새로운 언어­독특한 깊이로 감동의 운율빚어/어릴적 가난­방랑 벽이 창작욕이 밑거름으로/“내 숨결 그칠 때까지 시어 더듬고 또 더듬겠다” 1948년 선문사가 발행한 미당의 두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김동리 발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의 유일한 정신상의 재보로서 쌓아왔다. 그의 뇌락불기한 인격과 자유분방한 시혼은 그 처녀시집 「화사집」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그「비늘을 번득인」바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적어도 이 땅에서 시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이 혹성의 찬연한 광망과 위치에 등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평자들이 미당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용되는 명평이다. 「뇌락불기」란 「마음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남에게 구속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당의 문학적 족적은 광활하고 높고 깊다. 그리고 훨훨 나는 그의 두루마기 차림처럼 시에 관한한 무장무애하고 무소불위하다. 지금은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서 있지만 미당의 지난 세월은 가난과 슬픔과 방황과 방랑벽으로 그 인생의 절반이 혹독하게 얼룩져 있었다. 어릴 때는 당시를 배울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만14세 되던해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서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적이 있고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다가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으로 또 한번 퇴학을 당했다.다시 서울로 올라와 극예술연구회 연극배우노릇, 마포 도화동 빈민촌에 입주하여 넝마주이 행색으로 쓰레기를 줍기도 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교장이며 존경하는 스승인 석전 박한영을 만나 안암동 개운사에서 능엄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릴때는 당시배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곡량주식회사 연길지점에서 경리과직원이 되는가 하면 김좌진장군과 이승만대통령의 전기집필,「옥루몽」등 옛소설 번역으로 생계를 잇다가 인촌 김성수 집안과의 인연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 학예부장을 지내는 등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이 깊고 다양하기만 했다. 이토록이나곡절이 심한 방만한 생활덕분에 한때는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치고 생명의 존엄을 체험하고 나서야 미당은 비로소 삶에 대한 의욕과 생명의 활기가 몸속에 용솟음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광주 무등산 자연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무렵 「무등을 보며」「학」「상리과원」같은 명품을 연달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시들은 끊일줄 모르는 시심과 계류와도 같은 운율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마치 가을 한낮 거문고 소리처럼 청랑한 운기로 흥취와 운치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이다. 그의 탁월한 시업은 과거로의 관념적 도피나 신비주의에 탐닉한 시절이 있었고 영원의 생명에 대한 명상으로 온자하고 정밀한 내면을 구축하면서 「육체적 인간의 본원적 충동을 순화시켜 어느 순간엔가 숭고한 정신적 표현의 극에 도달」한 것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최근 「시와 시학」지에서 시인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싶은 시」로 추천한 「무등을 보며」는 명편중의 명편으로 미당이 아직 38세이던 19 53년 「현대공론」에 발표한 것이다. 그때 이 시를 읽은 젊은 이들은 「구구절절 감명을 사로잡는 명구」라든지 「화살처럼 꽂히는 충격」으로 이를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여름 산같은/우리들이 타고난 살결/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수 있으랴/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미당의 주옥같은 시들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단지 그가 낳는 시마다 절륜의 절창으로 평가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창의성 있는 언어구사와 독특한 깊이와 지혜, 상당량의 시편이 그릇 큰 시인의 구비조건이라면 20세기 우리 시인 가운데서 이러한 조건을 가장 보기좋게 구비한 이로 미당」을 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과연 언어를 부리는 장인적 기술에서나 직관과 상상의 능력에 있어서나 만인이 칭송하는 대가의 반열에 선 그는 한국적 릴리시즘의 탁월한 정형을 만들어냈고 안주를 모르는 시정신으로 한국의 운치와 위엄을 어느 시에서나 감동적으로 증명해 왔다. 해인사 체류시절 미당을 사로잡은 소쩍새 울음소리는 그에게 불치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음향으로 다가와 저 유명한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벌써 일본여선생을 흠모하는가 하면 불혹의 나이때도 때때로 여난을 겪게 되어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는/삼천 사발의 냉숫물」은 미당을 엿보게 하는 낭만시인의 일면이기도 하다. ○속과 선을 아는 성품 만년의 그는 인생을 관조하는 허허로운 마음과 가족을 거느린 가부장적 자세를 빌리고 있으나 「속도 알고 선도 아는 복합적인 성격」과 대체로 괴팍과 까다로움이 승한 편이다. 그 한 예로 70년대 초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청으로 영국시인 스티븐 스펜더가 한국에 왔을때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미당은 취중이었는지 한국의 정상다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팡이를 휘둘러 「TS 엘리엇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외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인 고은이 한때 주란과 폭소버릇으로 위아래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처음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어지로운 헛웃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가족회의끝에 그를 공덕동에서 추방하고 「고은출입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다. 그의 풍류는 나무와 돌과 침향(심향)과 글씨 그림외에도 난취미가 으뜸이다. 지난 70년 25년간 살아온 공덕동을 떠나 관악산밑 사당동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택호를 쑥 봉자 마늘 산자를 따서 봉산산방으로 붙여놓고 그는 한동안 나무심기와 난수집에 주력했다. 시암 배길기와의 광동보세며 삼중당 일력에 자필 시를 써주고 받은 제주한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류시인 김양식과의 중국춘란에 얽힌 대화는 난향같은 일화다. 당시만도 그가 지닌 서른분쯤의 난들은 「겨우 여중 2학년 정도의 잎만 여남은게 솟아올린채 꽃필날이 아득하기만 한데」 난화부재의 겨울날 김양식이 불쑥 전화를 걸어 「대만에서 구해온 중국춘란이 아주 썩좋게 한송이 피었다」고 자랑삼았던 모양이다.이때 미당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웃하나가 명주바지를 입으면 여러 가호가 두루 따뜻한거라는데 나도 그 푼수니 염려말고 잘 만끽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김양식은 가족들과 휴가를 가게되니 「그 사이 며칠만 돌보아주시며 즐겨보시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당은 그제서야 눈이 번쩍 띄게 반가워했고 비록 빌렸을 망정 책상위에 난을 놓고 보고 또 보고 난향을 맡으며 「시의 감동이란 것도 내 생애에서 항용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내가 소유하는 것에서보다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감동으로 시를 쓴 것이 많았다」고 한 산문에 적고있다. ○커피보다는 맥주 즐겨 그의 정열과 의욕은 식을 줄을 몰라 한때는 영어단어를 하루에 수십개씩 외는가 하면 70년 초반부터는 세계를 두루 일주하며 끝없는 여행길에 오르더니 최근엔 세계의 산봉우리를 높이순으로 1천6백여개나 줄줄이 기억해내는 독특한 취미를 보이고 있다. 미당은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그 시작은 그의 방창앞에 심은 소나무처럼 청청한 천뢰의 소리를 잃지 않는 기상이다.요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커피보다는 맥주」를 권하고 제자들이 마련한 시낭독회나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9일에는 송파문화원에서 열린 국선문학회에 나와 「국선(국선)」이란 모임이름을 지어주고 후배들의 회장추대를 극구 사양하여 주변을 송구스럽게 했었다. 이제 자기자신을 홀연히 내쳐버리는 무집착의 상태에서 그의 최근의 시들은 글맛이 한층 무르익어「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다. 산다는 것이야말로 사변의 연속이었던 시대를 거치면서 일찍이 김동리가 지적했듯이 미당은 지금도 「내 숨결이 아주 내 육신을 떠날 때까지는 더듬어보고 또 더듬어」 새로운 시에 대한 분방한 광망을 접어두거나 조금도 늦추려들지 않는다. ▷연보◁ ▲1915년 5월18일 전북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출생.서광한씨와 김정현여사의 2남2녀중 장남 ▲1929년 부안 줄포보통학교 졸업.서울 중앙고보 입학 ▲1931년 전북 고창고보2학년 편입,권고자퇴,서울 상경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 「벽」당선 ▲1936년 시전문지 「시인부릭」편집인겸 발행인 ▲1941년 처녀시집 「화사집」(남만서고)1백부 한정판 출간 ▲19 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문교부산하 예술과 초대과장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2년 광주 조선대학 부교수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 ▲1955년 미국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1960년 동국대 부교수 ▲1961년 제1회 5.16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5년 서울 신문회관서 회갑연 ▲1976년 미당시를 주제로한 시화전 서울서 제주까지 6개월간 전시 ▲1977년 한국문인협회 회장 ▲1979년 동국대 정년퇴임,대우교수로 대학원 강의 ▲1980년 동아일보 문화대상 개인상부문 본상 「귀촉도」「서정주시선」「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안 잊히는 일들」「늙은 떠돌이의 시」「산시」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전5권) 「서정주 시선집」(전2권)등 시 8백여수와 「서쪽으로 가는 달처럼」등 산문집과 여행기가 있음.
  • 넉넉한 마음/최인학(연변 조선족 1백년:1)

    ◎“상다리 휘게 손님 대접” 풍습 그대로/학술회의 쉬는 시간마다 술·음식 우리가 흔히 북간도로 불려온 오늘날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외롭고 고달픈 민족의 땀과 한이 얼룩진 수천리 밖의 북지다.그 미지의 땅을 찾아 이민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지도 어언 한 세기를 맞게되었다.그럼에도 거기에 뿌리를 내린 이른바 조선족은 중국속의 영원한 소수민족이다.서울신문은 그들 삶의 애환을 민족지(민주지)시각에서 추적,매주 금요일에 연재키로 했다.집필은 현지를 장기답사한 인하대 최인학교수(비교민속학)가 맡았다. 올해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방문한 것은 제1회 중국조선민족민간문예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연길시내 신화반점이 회의장소였는데 40명 정도의 학자들이 참석했고 이중에 22명이 주제발표에 나섰다. 민간문예는 구비문학을 말한다.문학성에 비중을 두어 구비문학이라는 명칭을 보편화 한 우리로서는 약간 생소했다.민간문예는 연희성을 더 강조한데서 붙여진 용어다.일본의 구승문예와도 맥을 같이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회의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의장이 상오회의를 종결했다.정확히 상오11시30분에 식당으로 몰려갔다.참가자 전원이 식탁에 둘러앉았다.『낮이어서 술은 약간 들겠습니다』라고 건배를 자청했다.그러나 사정은 사뭇 달라 독한 술병이 계속 비워졌다.음식 역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날라왔다.가져올 만큼 다 가져와야하는 접대모습 때문에 중간에서 그만 둘 수도 없었고,나중에는 채 비우지 목한 음식접시에 다른 음식 그릇들이 포개포개 쌓였다. 서울에서 학술회의를 자주 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대뜸 경비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참가비도 없고 요리는 고급인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그렇다고 연회상을 앞에 놓고 궁금증을 물을 수도 없다.꾹 참을 수 밖에.하오2시가 되자 분과회의가 시작되었다.소파에 앉아 정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술기운에 졸음을 참느라 고생했지만 그들은 늠름했다.낮술이 열기를 더 해 줬는지 회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하오5시가 되자 모두 식당으로 안내되었다.낮보다 성대한 만찬이 베풀어졌다.다음날도같다.더는 참을 수 없어 귓속말로 의장에게 물었다.『경비가 많이 드실 테지요』하자 의장은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북경(중앙정부를 지칭)에서 지원을 해주었으나 모자라서 몇몇 회사로부터 찬조금도 받았고,잡지사로부터 책을 내는 조건으로 공동주최를 한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북경에서 지원금을 받을 정도라면 이 회의의 성격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고 보니 연변 뿐아니라 요령·흑룡강성에서도 참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결국 동북 3성이 모이고 한국을 넣어 국제회의 성격이 되었다.처음 계획단계에는 북한 학자도 참석하기로 했으나 김일성사망으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설명이다. 어떻든 회의는 진지하게 진행됐지만 잔치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었다.일상 먹는 것보다 특별하게 차려 먹으면 그게 잔치가 아니겠는가.그렇지만 우리 시각에서는 과소비요 낭비임에 틀림 없다.얼마전 조선족의 박경휘씨가 쓴 「조선족의 미풍양속의 계승과 제거해야 할 몇가지 풍습」이란 글을 읽었다.이 글에는 장점과 단점을 명료하게구분하여 항목을 늘어놓았는데 단점으로는 첫째 대식풍습,둘째 허례허식 풍습,셋째 과소비풍습,넷째 체면과 겉치레 풍습,다섯째 어린이를 황제처럼 모시는 풍습의 5개항목이다.어쩜 한국인의 단점이라고 해도 무방 할 만큼 공감이 가는 항목들이 아닌가.「나쁜 버릇 개 줄까?」하는 속담이 떠 올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 한국은 현실적으로 빠른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데 비해 중국조선족은 그 속도가 느리다는 것 뿐이다.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식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 먹고 남아야 식성이 풀리는 것 아닌가.중국조선족 스스로가 악습이라고 하는 이 잔치의식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첫째는 대접정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우리에게는 가난한 선비 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깎아 술을 받아와 남편의 벗을 대접했다는 설화가 있다.대접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마음이 넉넉하지 아니하고서는 남을 생각할 수 없다.옛날엔 부인들이 끼니 때가 되면 이웃집 굴뚝을 버릇처럼 쳐다보곤 했다는것이다.만일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으면 양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 보리쌀을 바가지로 퍼다 주었다는 미담은 설화가 아니라 실화로 남아있다. 둘째는 넉넉함이다.우리가 생각한만큼 조선족은 가난하지 않다°그들은 우리처럼 자가용차나 개인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고,집안에 수세식 변소나 무엌에 냉장고가 없다 뿐이지 마음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그리고 최소한의 의식주는 넉넉하며 생활에도 불편이 없다.국민학교 학생들의 의복을 보면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아이들보다 한결 사치하게 입혀 놓았음을 알 수 있다.아이들의 얼굴도 명랑하고 동심이 활짝 피어 있다.백화점에 가면 전기제품을 비롯한 상품이 넉넉하지 못함을 실감한다. 그러나 시장거리를 가보면 야채가 풍부함을 느낀다. 셋째 황금만능주의가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아직은 위험선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곧 한국처럼 황금만능주의가 생겨 겉치레 경제가 만연해질까 걱정이다.그러나 한국처럼 오랜지족,야타족이 생겨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그것은 아직도 성인사회가 자녀들의 장래를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황금만능주의가 중국조선족에 파급된 요인은 한국 방문객 탓이라는 조선족 지성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중국에 차관 첫 제공/남항대교 건설등에 340억원

    ◎정부,연리 3.25% 중국에 처음으로 3백40억원의 차관이 제공된다. 12일 재무부와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9월 말 개도국의 각종 경협사업을 지원하는 원조자금인 대외개발협력기금(EDCF)에서 4천3백만달러를 중국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지난 6월 김영삼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중국측에 약속한 것이다. 차관 자금은 천진시 남항대교 건설(1천5백만달러),산동성 용구항 확장(8백만달러),흑룡강성 동령철도 복원(1천만달러),연변자치주 연길비행장 확장(1천만달러) 등 4개 사업에 쓰인다. 지원 조건은 연리 3.25%,5년의 거치기간을 포함해 20년 분할 상환이다.EDCF 차관의 지원 실적은 지난 86년 7월부터 현재까지 모두 26건,2천8백52억원이다.수출입은행측은 앞으로 차관 협약 체결과 구매 계약서 작성 등의 절차를 남겨두고 있어 2∼6개월이 지나야 차관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백두산 산삼 31뿌리 밀반입/중국교포 둘 검거

    경찰청 외사3과는 5일 백두산 산삼을 국내로 밀반입해 시중에 팔아온 중국교포 박정희씨(31·중국 길림성 연길시)등 2명을 붙잡아 관세법 위반 혐의로 서울세관에 넘겼다. 박씨등은 지난 4월 중국령 백두산에서 캐낸 50∼1백년생 자연산 산삼 31뿌리와 재배한 산삼 1백69뿌리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중국돈 12만원(한화1천2백만원)에 사들여 3차례에 걸쳐 인천항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한 뒤 서울·대전 등지를 돌며 산삼 16뿌리와 재배산삼 1백69뿌리를 각각 4천8백만원과 7백만원에 판 혐의를 받고 있다.
  • 북,핵포기 않고 경제살리기 고육책/한국기업체 투자유혹 손짓 왜할까

    ◎한국자본 끌어와 서방투자 유도/기업­정부 분리노린 전술 분석도 북한당국이 당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올들어 부쩍 남한 자본 유치를 겨냥한 물밑 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가 최근 우리측 해덕익스프레스사와 대호건설에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 일부에 대한 토지이용권 및 광고이용권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최근 북측이 가장 부족한 물품 중의 하나인 플래스틱과의 맞교환을 염두에 두고 한국플라스틱공업협동조합측에 북한산 생수의 공급권을 주겠다는 의사를 간접 타진해 온 것도 마찬가지다. 북한당국이 최근 대외경제협력추진위 북경 거점인 고려민족발전협회를 대폭 강화,우리측 기업인들에 대한 접촉을 늘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북측 인사들은 한국측 경제인들을 만날 때마다 『핵문제는 곧 타결될 것』이라면서 투자논의를 서두를 것을 종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북한이 한국의 특정기업을 지정하면서 까지 개발권을 주겠다는 내용 등을 담은 「담보서」를 보내온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그런 만큼 북한당국의 다목적 계산이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당국은 이에 대해 북측이 핵카드를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한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기도로 파악하고 있다.즉,핵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열릴 경우 기업인 방북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우리측의 핵·경협 연계정책을 우회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설령 남한 기업과의 직간접 접촉을 통해 필요한 자본을 유치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민간기업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라는 분석도 있다.경제분야에 적용하고 있는 통일전선전술인 셈이다. 물론 남한 기업에 대한 북측의 추파는 당면한 경제난을 해결하지 않으면 체제유지가 어렵다는 절박감을 반영하고 있다.다시 말해 나진·선봉경제특구에 당초 기대했던 서방자본의 유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 따른 고육책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84년 9월 합영법 제정이후 잇단 법령 정비와 올 상반기중 자본주의 바람의 북한 전역 확산을 막기 위해 나진·선봉지역 주변에철조망을 치는 등 외자 유치를 위한 1차 정지작업은 완료했다. 그러나 그동안 외국으로 부터의 대북투자 총액은 1억5천만달러에 불과한 데다 그나마 투자기업도 일본의 조총련계 기업에 편중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북한의 대외 신용도 추락과 핵문제로 인한 정치·경제적 위험부담과 사회간접자본 부족 등 불리한 투자환경으로 인해 기대했던 미국,일본,독일 등 서방기업의 실제 대북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요컨대 북측도 열악하기 짝이 없는 대북 투자 환경을 감안,본격적인 서방자본 유치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라도 남한기업들의 대북 투자유인을 자극할 필요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올들어 남북을 오가며 중개역을 맡고 있는 이철호 연길시 선호기업집단 대표 등 중국교포 기업인들이 서울행이 잦아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북­중 국경무역 싸고 갈등 조짐/일 요미우리신문 연길 르포

    ◎올 교역량 큰폭 감소… 평양 “전전긍긍”/나진·선봉·두만강개발에 북경 “시큰둥” 북한과 중국의 국경경제가 삐걱거리고 있는 가운데 서방과의 경제관계 강화를 서두르고 있는 중국과 핵문제 등 불안요인을 안고 있는 북한과의 미묘한 이해대립이 표면화되고 있다.중국의 관세우대조치 철폐로 양국간의 무역이 크게 줄어들고 북한의 자유경제무역지대의 건설과 두만강개발을 둘러싼 불협화음 등이 나타나고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5일 중국의 연길발로 보도했다.다음은 요미우리신문의 국경지역 르포기사의 요약이다. 중국 연변과 북한의 국경무역이 올들어 격감하고 있다.올 1∼5월의 무역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5% 줄어든 8천44만달러.연간목표액의 15%에 지나지 않는다.7월 김일성주석이 사망했을 때는 한때 상호왕래가 끊어지기도 했었다. 연길의 중국관리에 따르면 무역고 격감의 최대 원인은 지난해부터 국경무역의 관리를 강화해온 중국정부가 올해는 연변지역에 대한 우대조치를 철폐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종래의 물물교환 중심의 무역에서는서류상 적자가 있으면 관세를 면제했으나 지금은 흑자나 적자에 관계없이 무역액의 17%를 관세로 징수한다.외화지불능력이 없는 북한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수 없다.이러한 조치는 북한과의 무역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고 서서히 외화결제로 바꾸려는 중국의 태도변화라 할 수 있다. 중국측 무역관계자에 따르면 김주석의 사망후 북한은 최근 수년분에 달하는 약 2천5백만달러의 무역채무를 5만∼10만달러씩 분할상환하기 시작했다.북한의 이러한 갑작스런 조치는 국제적 신용을 잃지 않기 위한 것으로 북한도 중국과의 무역변화에 심각한 위기감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불협화음은 자유무역지대설치를 둘러싸고도 나타나고 있다.외교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은 경제특구인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모두 벽으로 둘러싸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서양문화의 유입을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비용부담을 중국에 요구했다.그러나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북한도 중국에 대해 두만강개발과 관련 항구건설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나타냈다.이는동해로 직접 나오는 출구의 확보를 오랫동안 원해왔던 연변으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한국·일본·미국으로부터의 자본·기술도입과 중국·북한·러시아 3국의 국경지대의 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꾀하는 연변과 일정의 외화는 필요하지만 자국항만의 권익과 폐쇄사회체제를 지키려는 북한과의 이해가 상충하고 있다.그러나 중국으로서는 북한을 완전히 방치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북한의 혼란은 연변지역의 혼란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중국은 이해의 대립이 있더라도 자신의 안정을 위해 북한에 식량과 석유를 계속 공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변의 관계기관 통계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냉해에 의한 대흉작으로 쌀생산량이 목표(1천5백만t)의 3분의1인 5백만t 밖에 안됐다.올해는 무더위로 작황은 회복되고 있으나 병충해의 발생도 있어 7백∼8백만t 정도로 예상된다.식량난의 해결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 연길서 외국위폐사건 잇따라/올 달러·엔화 등 50장

    【도쿄 연합】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인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주자치주에 최근 일본 엔을 포함한 위조외국화폐가 발견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고 일본의 지지통신이 24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지지통신은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연길시에서 발행되는 연길만보(16일자)를 인용,이같이 전하고 특히 북한으로부터 1만달러분의 위조달러를 갖고 연변으로 들어왔다가 중국 금융기관에 신병이 구속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의 요미우리신문도 이날 북경발로 연길시에는 최근 미달러,일본엔,홍콩달러 등의 가짜외국지폐가 나돌고 있다고 전하고 지난해 적발된 위폐는 2백47장에 달했으며 올해도 1백원(1원은 약 96원)이상에 해당하는 위폐가 50장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 광부 출신… 75년 북탈출/위장벌목공 박문덕은 누구

    ◎연길서 조선족여인과 동거… 수차례 신분 바꿔 북한벌목공으로 위장귀순한 사실이 들통난 박문덕씨(54)는 「박장걸」 「전명수」 「정씨」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북한주민에서 중국교포로,또 북한벌목공으로 변신해가며 북한·중국·한국을 오가는등 「카멜레온」같은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40년8월 황해도 황주 태생으로 국민학교 2년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박씨는 75년7월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 자리를 잡았다.박씨의 가짜인생이 시작된 것은 연길에서 조선족 미망인 이금자씨(50세가량)를 만나 동거해오다 91년4월 이씨의 사망한 남편 「박장걸」 명의의 중국여권을 이용해 서울에 들어오면서부터다. 박씨는 이후 불법체류사실이 당국에 적발돼 92년9월 강제추방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이씨의 남편 「박장걸」로,이웃주민등에게는 「정씨」로 행세해왔다.물론 「박문덕」이라는 본명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중국으로 추방된 뒤 러시아로 재탈출한 박씨는 북한벌목공으로 다시한번 변신,김포공항을 통해 재입국했다. 그러나박씨는 탈출벌목공으로 입국할 때 찍은 신문의 사진을 본 임균경씨(69·화교·서울 서대문구 홍은3동 265)에 의해 정체가 탄로나게 된 것이다. 임씨는 박씨가 91년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동안 셋방살이를 한 집주인. 임씨는 『당시 우연히 알게 된 중국교포를 통해 박씨에게 월세 15만원을 받고 방을 빌려주었으며 박씨는 자기를 「정씨」로,이금자씨는 부인이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또 『남대문시장의 통조림도매상에 불법취업한 박씨가 동거녀 이씨의 친척을 통해 연변·하얼빈등지에서 들여온 고서화등을 골동품상에 팔아 상당한 돈을 챙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들이 국제통화를 자주 하는 바람에 국제전화료가 한달에 40만원이나 나오기도 했으며 91년11월 이씨가 중국으로 나갈 때 1만달러를 환전하는 등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말했다. 박씨가 91년12월 집근처에서 전치 3개월의 뺑소니교통사고를 당해 2달여 입원해 있던 청구성심병원의 간호사 김순임씨(32)도 『중국교포신분인 박씨의 보험처리가 불가능해 이를 딱하게 여긴 병원측이 치료비 2백만원중 상당액을 깎아주었다』며 박씨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박씨는 당시 병원진료기록과 서울서부경찰서의 교통사고조사기록에 「이름 박장걸,나이 63세,주소 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흥가 11조」로 신원을 위장해 병원과 경찰을 감쪽같이 속여넘겼다. 『위장귀순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은 안기부는 교통사고당시 왼쪽다리뼈에 철심을 박아넣는 수술을 받은 박씨의 수술병력을 확인,북한탈출 후 20년동안 숨겨온 「진짜」얼굴을 찾아냈다.
  • 벌목공 위장해 귀순/16일 입국 박문덕

    ◎91년에도 입국… 강제추방 경력 국가안전기획부는 지난 16일 입국한 북한벌목공 8명 가운데 전명수씨(54)가 벌목공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정확한 신원 및 위장귀순경위 등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고 18일 밝혔다. 안기부에 따르면 전씨의 본명은 박문덕(54)으로 40년 8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인민학교를 2년만에 중퇴하고 탄광노동자로 근무하다가 75년 7월 중국으로 탈출,길림성 연길에서 현지교포 이모씨(50세가량)와 동거해 오던중 91년 4월 이씨의 사망한 남편 「박장걸」(64)명의로 여권을 발급받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92년 9월 불법체류혐의로 검거돼 중국으로 강제추방됐다는 것이다. 박씨는 중국으로 추방되자 마자 신분노출을 우려,92년 9월 러시아로 들어간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탈출한 북한벌목공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며 기회를 노리다 자신도 벌목공으로 신분을 위장해 「전명수」라는 가명으로 위장귀순한 것으로 밝혀졌다.
  • 연변서 「한글 컴퓨터 정보처리」 학술대회/남북한학자 45명 참가

    ◎김일성 사후 첫 대면 【연길 연합】 김일성사망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학자들이 모여 「컴퓨터와 우리말 사용」등을 토론하는 「94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가 연변 전자정보센터 주최로 6일 하오1시 중국 연변호텔에서 개막돼 4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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