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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황석영 ‘해질 무렵’으로 맨부커상 후보에

    소설가 황석영 ‘해질 무렵’으로 맨부커상 후보에

    황석영(76) 작가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2019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 후보가 오른 것은 2016년, 2018년 한강(49) 작가 이후 두 번째다. 황 작가는 13일 맨부커상 선정위원회가 홈페이지에 발표한 13명의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5명의 심사위원이 108권의 책을 두고 13권을 추린 이번 심사에서 황 작가는 2015년 발표한 소설 ‘해질 무렵’(영문명 At Dusk)으로 후보에 올랐다. 소설을 영어로 옮긴 김소라 번역가도 함께다. 아니 에르노(프랑스), 마리온 포쉬맨(독일) 등과 함께 경쟁하게 됐다. ‘해질 무렵’은 성공한 60대 건축가와 젊은 연극인을 주인공으로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소설이다. 산동네 어묵 장사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류대학을 나와 승승장구한 건축가가 인생의 해질 무렵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젊은 연극인은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삶을 버텨내는 이야기를 그렸다. ‘해질 무렵’은 지난해 영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됐고, 프랑스에서 ‘2018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선정위원회는 다음달 9일 최종 경쟁 후보 6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최종 수상자는 5월 21일 열리는 공식 만찬 자리에서 발표된다. 수상자와 번역가는 5만 파운드(약 7500만원)를 나눠 받는다. 2016년에 한강 작가가 소설 ’채식주의자’로 같은 부문에서 수상한 바 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황석영, 세계3대 문학상 맨부커상 후보…한국인 두번째

    황석영, 세계3대 문학상 맨부커상 후보…한국인 두번째

    소설가 황석영이 ‘해질 무렵’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은 2016년, 2018년 한강 이후 두번째다. 맨부커상 선정위원회는 13일 홈페이지에 황석영을 포함, 에르노(프랑스), 마리온 포쉬맨(독일) 등 13명의 후보를 발표했다. 황석영은 2015년 한국에서 발표한 소설 ‘해질 무렵’(영문명 At Dusk)으로 후보에 올랐고, 이 소설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김소라도 함께 후보에 올랐다. 이 책은 산동네 어묵 장사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류대학을 나와 승승장구한 건축가가 인생의 해질 무렵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젊은 연극인은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삶을 버텨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지난해 영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됐고, 프랑스에서 ‘2018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선정위원회는 다음 달 9일 최종 경쟁 후보 6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최종 수상자는 5월 21일 열리는 공식 만찬 자리에서 발표된다. 수상자와 번역가에게는 5만 파운드가 수여된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며 영미권에서는 노벨문학상에 못지않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클론 강원래 “반려동물과 이별할 때 웃으며 보내주세요”

    클론 강원래 “반려동물과 이별할 때 웃으며 보내주세요”

    2000년 최정상을 달리던 클론의 강원래. 당시 클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만에서도 그들의 인기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부모님 댁에 가던 중, 불법 유턴하던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그 사고로 그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인이 됐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장애를 인정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강씨. 아이를 갖기 위해 여러 번의 시험관 시술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이는 아니라고 판단한 강씨가 아내 허락없이 몰래 데려온 반려견 똘똘이. 녀석과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8년간의 동행은 지난 2016년 추운 겨울 막을 내렸다. “똘똘이가 하늘나라로 막 가려는 순간에 ‘똘똘아, 똘똘아, 똘똘아’라고 수 십 번 목 놓아 외쳤던 거 같아요. 근데 정작 똘똘이는 죽는 그 순간에 저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아니, 제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요’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똘똘아, 너 때문에 우리가 정말 행복했어. 고맙고 사랑해. 잘 가고 또 만나자’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막연히 너무 급한 마음에 ‘똘똘이’만 외쳐 마지막 순간까지 부담을 준 거 같아 너무 미안해요” 그리고 지금도 강아지 키우는 분들 만나면 진심을 담아 꼭 이런 얘기해요. “키우던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될 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게 웃으면서 갈 수 있도록 연습해 놓으세요”라고. 똘똘이가 죽은 그 해는, 8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결혼 10년 만에 아들 선이를 가진 해이기도 했다. 8년간 함께 했던 천사를 보내고 또 다른 ‘천사’를 가족으로 맞이한 강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드라마나 소설에서 나올 만한 기적과도 같은 얘기죠. 그런 것을 통해 위로의 말도 많이 들었어요. 사람 참 못된 게 선이가 세상에 태어나니깐 똘똘이가 점점 잊혀 가더라고요. 똘똘이 사진과 인형, 같이 놀던 테니스공 같은 걸 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보더라도 ‘안녕, 똘똘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할 수 있은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선이 태어나고 아내, 선이, 강원래 순으로 서열이 새로 정해지더라고요. 아내가 가끔 ‘조용히 해’ 라고 말하면 숨도 안 쉬고 잘 때도 있어요. 그래도 행복해요” 강씨는 아들 선이를 위해 새로운 반려견을 입양하려고 한다. 그것도 몸집이 제법 큰 걸로 말이다. “선이가 강아지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요.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근데 강아지 생명이 너무 짧아요. 선이가 몇 살 정도 됐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떠나겠지 라고 생각하면 맘이 좀 그래요. 그래도 같이 있으면 선이도 배려심이 생기고 좋을 거 같아서 다시 가져볼 생각이에요” 미세먼지가 심한 지난 6일, 라디오 방송을 끝내고 집에 도착한 그를 주차장에서 만났다. 얼굴 안색도, 몸 상태도 안 좋아 보였다. 날씨가 짓궂으면 몸이 아프다고 했다. 미안한 맘이 들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강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와 열정 그리고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줬다. 고맙고 감사했다. 반려견 똘똘이를 눈물로 보내고 아들,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 2막, 짧지만 진지하고 솔직했던 그와의 만남을 정리했다.(Q)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상대적으로 소외된 분들, 몸이 불편한 분들 특히 장애인분들이 많이 듣는 KBS3 라디오 12년째 진행하고 있고 구준엽씨와 클론으로 활동도 계속하고 있어요. 또한 장애인들도 인간이고 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강연도 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Q) 반려견을 원래부터 많이 좋아하셨는지제가 태어나기 전에 형이 셰퍼드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봤으니깐 아마 저도 태어나면서부터 반려견들과 함께 지낸 거 같아요. 아버지도 반려견을 엄청 좋아하셨어요. 덩치가 큰 것들 뿐 아니라 도사견도 키우고 개들이 항상 집에 있었어요. 저도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Q) 8년 동안 함께 했던 반려견 ‘똘똘이’를 어떻게 만났는지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된 이후에 아내와 결혼을 하고 2세를 갖기 위해 시험관 아기를 시도했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자꾸 실패를 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죠. “우리 아이는 아닌 거 같은데 강아지나 한 마리 키워볼까” 그랬더니 아내가 결사코 싫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제가 무작정 한 마리를 데려왔죠. 그게 웰시코기 똘똘이였어요. 처음엔 털도 많이 빠지고 말도 안 들어서 힘들었는데 아내도 강아지를 좋아하고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깐 정이 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집에서 살게 된 거죠.(Q) 똘똘이는 어떤 병으로 고생했는지2008년인가 송이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오빠 똘똘이 목 주변에 있던 살들이 암 덩어리야” 저는 “어떻게 개가 암이 걸려 말도 안 돼”라며 믿지 않았죠. 하지만 사실이었죠. 살이 많이 찌긴 했는데 그게 살이 아니었던 거였죠. 의사 선생님이 힘든 과정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좀 편한 과정을 택하겠느냐고 하시길래 어떻게 해서라도 똘똘이가 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힘든 과정을 택하게 된 거죠. (Q) 두 달 시한부 판정을 받고 어떻게 2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는지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성이 있어서 오래 살고 정성이 없어서 빨리 세상을 떠나고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똘똘이도 운이 좋지 않았나 싶어요. 똘똘이가 하고 싶은 거 많이 하게 해주고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많이 해준 덕에 조금은 활기를 찾게 되고 컨디션도 좋아지다 보니깐 오래 견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병 투병 중에도 두 분을 위해 활발한 모습을 보여 줄 때 마음은 어땠는지강아지의 본능인 거 같아요. 나중에 똘똘이가 정말 아플 때였어요. 보통 방 아니면 마루에서 자던 똘똘이가 어느 날 갑자기 신발장 쪽에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때까지는 주인을 위해서 또 한 가정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한 거 같아요. 똘똘이가 나한테 와서 꼬리를 막 흔들었던 건 뭔가 기대감을 갖고 “주인님, 나도 좀 힘들어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라는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똘똘이를 너무 오라 가라 하면서 괴롭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너무나 힘들 때 투정부리고 남한테 막 억지로 말 걸 때가 많이 있었거든요. (Q) 집에 있는 사진들 대부분이 똘똘이 사진이다.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다면똘똘이랑 함께 찍은 사진도 없었고 방송에서 하는 거니깐 기념촬영 한 번 하자고 해서 찍었던 건데 이 사진이 우리 집에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똘똘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저 사진을 볼 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찍을 땐 굉장히 재밌었지만 힘들어했죠. 계속 인상 쓰고 무서워하다가 깜짝깜짝 놀라는 게 하는 순간 찍어서 사진은 잘 나왔죠. 아직까지 저 모습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Q) 똘똘이와의 마지막 여행 계획을 세웠던 이유는똘똘이가 제일 신나게 뛰는 모습은 눈 내리는 운동장, 바닷가 해변가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고 똘똘이도 신나게 해주고 싶었죠. 똘똘이 버킷 리스트까지 만들었죠. 똘똘이 부모 만나게 해주기, 똘똘이 맛있는 거 사주기, 똘똘이가 가고 싶은 눈길, 바닷길 등 여러 목록을 만들었는데, 결국 눈길까지는 갔지만 바닷가는 못 가고 세상을 떠났죠. (Q) 똘똘이는 강원래씨 부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천사였던 거죠.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와줬고, 선이를 임신해서 아내와 제가 가장 행복했을 때 우리 곁에서 떠났거든요. 똘똘이가 죽었을 때 정말 슬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천사가 우리를 위해 우리 가정에 와서 행복하게 해줬던 거 같아요. 선이한테 “똘똘이가 너보다 형이야”라고 말하면 선이도 “나중에 우리가 천국가면 똘똘이형 있겠네”라고 말해요. (Q) 혹시 안락사를 생각한 적은 없으신지똘똘이가 힘들어하더라도 우리가 곁에서 잘 보살펴 주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락사보다는 똘똘이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우리 곁에 함께 있다가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는 것을 어떤 책임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처럼 진정한 책임감을 갖고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선이의 탄생으로 이별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선이는 정말로 내가 또다시 태어난 느낌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부모님에 대한 효도이자, 국가에 대한 충성인 셈이죠. 인간의 본능인 거 같아요. 부모님에 대한 효도보다 아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 큰 거 같아요. 그래서 선이는 또 다른 천사죠. (Q) 똘똘이와의 마지막 여행지를 선이랑 다시 갔는데 심정이 어땠는지그 자리에 다시 가면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선이랑 함께 가니깐 그렇지 않더라고요. 왜 있잖아요. 부모님하고 산소에 갈 때 부모님의 눈빛은 슬퍼 보이지만 저를 보시면 기분 좋아지시는 느낌. 저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비록 똘똘이가 하늘나라 갔지만 네가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맙다 선이야. 사랑한다’고 속으로 얘기했죠.(Q) 주병진씨 웰시코기 대중소와의 만남을 가진 계기는주병진씨가 키우는 웰시코기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똘똘이를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병진씨 친구인 임백천씨가 방순국 제 옆 방에서 라디오 방송을 진행 하세요. 임백천씨께 주병진씨 강아지를 보고 싶다고 연락처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알려 주셨어요. 바로 전화해서 집에 놀러 가고 싶다고 하니깐 오히려 직접 오시겠다고 해서 만남이 성사된 거죠. 정말 깜짝 놀랐어요. 특히 대중소의 ‘대’는 똘똘이를 너무나 닮았더라고요. 가슴이 뭉클했고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많은 스텝 분들 앞에서 힘들게 꾹 참았던 기억이 있어요. (Q) 똘똘이를 떠나서 강원래씨에게 반려동물이란아주 좀 나쁜 얘긴데, 내가 위로받기 위한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건 똘똘이를 위해 뭔가를 해준 게 없단 뜻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요. 처음엔 내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하고 키웠죠. 전동휠체어 타고 함께 산책하고 똥도 치우고 했는데 점점 내 위주로 변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다시 키운다면 정말 노력을 많이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Q) 동물학대, 유기 등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저도 솔직히 그런 적이 있었어요. 댄서시절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안무를 짤 때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정말 컸어요. 가수에게는 박수치고 댄서한테는 ‘이리 와, 저리가’란 소리 들으며 천대받았다고 느꼈을 때, 집에 와서 강아지들을 막 때리고 했어요. 가끔 동물학대 영상을 보면 ‘아, 나도 저랬었는데...’ 하면서 너무 미안한 맘이 들어요. 강아지들이 화풀이 대상이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도 저에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면 예뻐해 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후회스럽고 반성도 많이 하고 있어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런 경험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아지를 화풀이 대상으로 키우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 같아요. (Q) 반려동물을 키우려고 시작하는 초보 맘들에게어떤 매뉴얼이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최근에 강아지가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다며 바꿔달라고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강아지를 집어던지는 장면을 봤어요. 똘똘이도 그랬어요. 자기 배설물을 먹고 종이도 찢고. 그런 강아지들은 교육이 필요한 거 같아요. 선이도 태어나서 몸을 뒤집기 시작하고 걸을 때까지 1년이란 시간이 걸렸거든요. 마찬가지로 강아지도 생명체잖아요. 정성을 쏟고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아나간 후 천천히 가족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Q) 2015년 모교에서 ‘다시 꾸는 나의 꿈’이란 강연으로 큰 감동을 선사했다. 본인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뜻하지 않게 장애인이 될 때,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됐을 때 웃을 수 없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거예요. 화나고 짜증나고 심지어 ‘이렇게 살 바에 죽어버리자’ 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해요. 그게 정상인 거예요. 우리 스스로가 조금 더 그런 분들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될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는 분들도 자기의 힘듦을 자꾸 말해야 돼요. 참 신기한 게 사람들은 누구를 도와줄 줄은 아는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힘들어하더라고요. (Q) 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신다면오늘도 아내가 도시락 싸줘서 라디오 방송 잘했어요. 요즘 선이가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유치원 다니는데 아내가 걸어서 직접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해요.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죠. 아내가 그만큼 더 열심히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제가 또 더 열심히 잘해야겠죠. 우리가 힘들 때 하늘이 주신 천사 선이와 함께 하는 게 너무 행복해요. (Q) 앞으로의 계획과 꿈이 있다면?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교통사고 이후 힘들었던 몇 가지 일들을 직접 시나리오 써서 연극으로 만들고 싶고 그 외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아요.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저 친구 잘 살았네’라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싶어요. 이런 말 있죠.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짜증내지 말고 ‘꿍따리 샤바라’를 외치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클론의 강원래가 되고 싶어요. 응원해 주세요.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민지 기자 sungho@seoul.co.kr
  • [기고] 창작극 개발을 위한 노력/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연출가

    [기고] 창작극 개발을 위한 노력/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연출가

    공공극장은 국가나 자치단체의 재정을 지원받아 운영하는 극장이고 민간극장은 기업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극장이다. 서울시가 출연해 설립된 공공극장인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산하에 있는 서울시극단은 1997년 1월 뜻있는 연극인들의 열망과 서울시가 함께해 창단됐다. 서울시극단은 단장의 성향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곤 했지만, 창단 당시 키워드인 공공성, 예술성, 대중성은 변함없는 화두였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모든 단장들이 이 화두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7대 단장인 본인은 ‘함익’, ‘옥상 밭 고추는 왜’ 등 공공성, 예술성, 대중성에 기반을 둔 창작극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물론 이 모든 작품들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작품에 따라 부침이 심했는데, 기존 연극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수상작이 나오기도 했고 최고의 매출과 수지율(제작비 대비 공연수익금)을 달성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패한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창작극은 이미 검증된 해외 번역극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지금, 이곳 시대의 아픔이나 이슈를 담아 낼 수 있어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 있다. 이런 아픔이나 이슈가 때에 따라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창작극을 개발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것과 똑같은 일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공공극장이 관객 취향의 작품을 올려야 하는 건 아니기에 다소 부침이 있더라도 서울시극단은 창작극 개발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서울시극단도 여느 공공극장이 안고 있는 문제인 실적에 적잖이 목매어 있다. 공공극장의 공적기능보다 실적과 수지율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면 창작극 개발에 소홀해질 수 있다. 이는 자칫 예술가의 창의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고 단체의 예술적 역량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생력이 부족한 우리 창작극을 공공이나 민간극장의 보호 아래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공연으로 만드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울시극단도 그 의무에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 고현정 대학강의 중 흡연 ‘학부모 항의 전화에도..’

    고현정 대학강의 중 흡연 ‘학부모 항의 전화에도..’

    고현정 강의실 흡연 사진이 화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고현정 강의실에서 담배 사진’이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고현정이 D대 교수로 재직할 때 강의를 들은 적 있다. 고현정은 잦은 지각이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매 수업 강의실에서 수업 중 담배를 태웠다. 학생 중 어느 학부모가 학교로 전화 항의를 했다”라며 “그랬더니 과대(과 대표)가 고현정 교수님 담배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묵인하라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사진 보고 판단해라. 연기 교육차 담배 태우는 상황 아니고 매 수업시간 10회 정도의 흡연을 하였고, 학부모 항의 전화 뒤로도 종강까지 흡연은 계속됐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공개된 두 장에 사진에서 책상에 앉은 고현정의 오른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현재 해당 글은 삭제된 상태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가 90학번 출신인 고현정은 지난 2014년 학과 동문 교수들의 제안을 받고 겸임교수로 임용됐다. 2014년 1학기, 3·4학년을 대상으로 한 ‘매체 연기’ 과목을 강의했다. 고현정은 모교에 꾸준히 장학금도 기부했다. 2006년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이후 ‘고현정 장학기금’을 운영하며 매년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1920년대 전반, 드디어 조선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올렸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조선 영화의 첫발을 뗀 1919년부터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 이전의 시기, 조선 영화계는 어떤 영화들을 만들면서 무성영화 시대를 개척해 갔을까. 주목할 부분은 식민지와 제국 구도에서 조선인들만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 아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국의 정책뿐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조선의 이야기를 다루는 조선인 감독의 연출과 조선 사람을 연기하는 조선인 배우들의 연기였다. 이 지점이 조선의 무성영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던 셈이다.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 일본인 흥행사가 제작한 최초의 상업영화 ‘춘향전’(1923),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제작된 ‘장화홍련전’(1924)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무성영화 제작 현장을 살펴보도록 한다.●조선인이 감독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1923년에 공개된 ‘월하의 맹서’는 온전한 극영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외의 활극 장면만 영화로 표현했던 이전의 연쇄극과 달리,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모두 필름 촬영으로 소화한 극영화라는 점 그리고 각본, 감독, 출연 모두 조선인의 손으로 이뤄낸 점이다. 당시 언론인이자 연극인으로 활동했던 윤백남(1888~1954)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그가 이끌어 온 민중극단의 단원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다. 신파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월화(1904~1933)는 이 영화를 통해 조선 영화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 등극한다. 한편 영화 매체를 성립시키는 기술 파트까지 조선인이 해결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오타 히토시가 맡았다. 사실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개봉한 극영화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였다. 다시 말해 영화관용 상업영화가 아니라 당국의 선전영화였다.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처음 상영했고, 이후 순회영사로 각 지역에서 공개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는 ‘월하의 맹서’의 분량을 ‘전 2권’, ‘2천척의 긴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이를 상영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33분 정도에 해당한다. 중편 길이의 영화였던 것이다. ‘월하의 맹서’ 제작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무성영화는 자본과 기술의 제공, 연출과 배우의 역할이 분리되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은 무엇보다 큰 자본이 필요한 작업이고 촬영, 현상 등의 근본적인 기술이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본, 연출 그리고 출연 영역에서 조선 영화인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렇게 조선 무성영화는 첫발을 뗐다.‘월하의 맹서’ 공개 이전에도, 일본인 영화제작사가 만든 ‘국경’(1923)이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 등 재조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극동영화구락부가 제작한 영화로, 촬영은 일본에서 온 나리키요 에이가 담당했다. 물론 출연은 박순일 등 조선인 배우들이 맡았다. 이 영화는 중국 국경 지대의 마적을 토벌하는 일본국경수비대의 활약을 묘사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다시 상영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조선공론’의 문예담당 기자 마쓰모토 데루카가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직접적인 야유를 보내 중지시키는 것은 심히 좋지 않은 일이다”고 기록한 것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과격한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학생들 야유로 하루 만에 상영 중단된 ‘국경’ 이 영화의 상영이 하루 만에 중단된 사정을 현재로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진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조선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마적들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장독립군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관객과 만나지 못한 ‘국경’은 상업영화로서 실패했지만, 조선인 관객들이 영화를 거부한 사건으로 영화사 기록에 남게 되었다. 조선 영화계가 본격적인 상업영화의 시대를 연 것은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설립한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1923) 그리고 조선인 영화관 단성사가 영화제작을 위해 설립한 촬영부의 ‘장화홍련전’(1924)이 등장하면서이다. 하야카와는 1913년 경성의 일본인 거리에 고가네칸을 설립하며 조선 흥행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조선부업공진회 개최에 맞춰 고전 소설 ‘춘향전’의 영화화를 추진하며, 하야카와 고슈라는 이름으로 직접 연출까지 나섰다. 영화는 전북 남원 현지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해 당대 최고의 인기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으로, 기생 한명옥이 춘향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였던 김조성이 배우의 역할로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자본주가 감독에 나선 작품이지만, 조선 고전의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던 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춘향전’은 조선부업공진회가 개최된 1923년 10월 5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해 조선인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18일부터 전북 군산의 군산좌에서, 21일부터 공진회 내의 활동사진관에서 연이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최초의 상업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하야카와는 ‘춘향전’의 성공을 기반으로 1924년 7월 인사동의 조선인 상설관 조선극장을 인수해 단성사의 라이벌로 나섰다.●‘장화홍련전’ 흥행에 日 ‘춘향전’ 재개봉 응수 당시 ‘춘향전’은 “이건 한 개의 슬라이드지, 영화에 대한 몽타주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흥행에 성공하자, 조선 영화계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는 조선 흥행계의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고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으로 응수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이 추동된 점이다. 바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조선인 주도의 영화 제작은 바로 이듬해에 이어졌다. 하야카와의 행보에 자극 받은 단성사의 박승필이 1924년 7월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설치하고, 역시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을 극영화로 제작했다. 배우는 장화와 홍련 역에 기생 김옥희와 김운자, 원님 역에 인기 변사 우정식을 출연시켰다. 앞선 ‘춘향전’의 성공 요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연출 인력이 보강되었다. 각색은 단성사의 변사로 유명한 김영환이, 감독은 우미관 출신의 영사기사로 단성사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었던 박정현이 나섰다. 훗날 감독이 되는 이구영도 당시 단성사 직원으로 각본과 연출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무성영화 현장은 지금의 프로듀서와 감독처럼 그 역할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촬영 역시 조선인이 맡았다는 점이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로 기록되는 이필우(1897~1978)가 이 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장화홍련전’의 영화사적 의미는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초창기 영화매체의 가장 중요한 성립 조건인 기술에서도 전부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경성 천지의 키네마 팬이 한결같이 손꼽아 기다리던” ‘장화홍련전’이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조선에 영화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맞는 대성황을 이뤘고, 이에 하야카와의 조선극장은 ‘춘향전’의 재개봉으로 응수한다. 이후 동아문화협회는 하야카와가 다시 감독으로 나선 ‘비련의 곡’(1924), 김조성이 감독으로 나선 ‘흥부놀부전’(1925)을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후, 경영난으로 해산했다. ●무성영화 개척해 간 조선영화인들 초창기 조선 영화계에서 극장의 산하가 아닌, 영화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다. 1924년 7월 11일 일본인 사업가들에 의해 부산에서 설립됐다. 촬영소는 복병산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했고, 회사의 중심인물은 부산 묘각사 주지였던 승려 다카사 간초였다. 그는 왕필렬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회사 창립작 ‘해의 비곡’(1924)과 원제가 ‘암광’이었던 ‘신의 장’(1925), ‘동네의 호걸’(1925)을 직접 연출했다. 촬영기사는 작품마다 일본에서 불러왔다. 동아문화협회에서 김조성의 역할처럼,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도 조선 영화인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무성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경손, 안종화 등 당시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해의 비곡’의 경우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등 조선인 배우들이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실질적인 감독 역할이었다. 규모를 키운 2회작 ‘운영전’에서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이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조선키네마 역시 조선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가담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한편 무성영화의 스타 나운규가 조선키네마의 연구생이던 당시 ‘운영전’에서 처음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923년부터 1925년까지의 무성영화 전기에 모두 12편의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다. 1923년 2편, 1924년 3편, 1925년 7편이다. 이 작품들 중 다수는 일본인 제작자가 만들고 연출도 겸했다. 그리고 그 제작 현장에서 조선인 감독과 기술 스태프들이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처럼 연출과 출연은 물론이고, 조선인 촬영기사가 전면에 나선 작품도 있었다. 이처럼 무성영화 시기, 제작, 연출 그리고 촬영 등의 기술 파트에서 일본인과 조선 영화인이 만들어내는 도제, 경합, 협업 등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차화연, 방송에서 딸 차재이 언급 ‘얼마나 예쁘길래?’

    차화연, 방송에서 딸 차재이 언급 ‘얼마나 예쁘길래?’

    차화연 딸 차재이 외모가 화제다. 7일 밤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해피투게더4’에서는 차화연이 딸 차재이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차재이를 잘 알고 있는 배우 임예진은 “정말 예쁘게 생겼다”며 차재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임예진의 딸과 차재이는 미국에서 같은 학교를 다닌 사이다. 차재이는 엄마 차화연을 닮아 하얀 피부, 큰 눈이 돋보인다. 뉴욕대학교 티쉬예술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차재이는 지난 2014년 tvN 드라마 ‘마이 시크릿 호텔’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후 차재이는 MBC 드라마 ‘엄마’, 영화 ‘어떤 살인’, 연극 ‘꽃의 비밀’ 등으로 꾸준히 연기 활동을 펼쳐왔다. 차화연 딸 차재이 사진을 접한 네티즌은 “너무 예쁘다”, “차화연 딸 차재이..앞으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차화연 리즈시절 보는 듯해”등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경기전에서 제20회 여성대회 개최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전북 전주시 경기전에서 제20회 전북 여성대회가 열린다. 이번 대회는 ‘성 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를 주제로 치러진다. 대회를 주최하는 전북여성단체연합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없애고,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며 “성 평등 사회가 실현될 때까지 미투 운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회에서는 전북 여성운동에 기여한 디딤돌과 성 평등을 저해한 걸림돌을 선정한다. 디딤돌에는 극단 내 뿌리 깊은 성범죄를 고발한 연극배우 송원씨가, 걸림돌에는 공직사회의 성희롱 사건을 묵인·은폐한 의혹을 받는 김제시 이모 전 시장권한대행이 선정됐다. 또 전 유도선수 신유용씨가 밝힌 코치의 성폭행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과 검찰, 전북도체육회, 전북유도회 등도 여성운동의 걸림돌로 지목됐다. 단체는 “피해 당사자인 신유용씨가 코치로부터 20차례 넘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지만, 경찰과 검찰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만 끌었다”며 “체육회와 유도회도 사건을 묵인·방조하다가 피해자가 자신의 생을 걸고 언론에 사건을 알리자 뒤늦게 사과와 대책을 내놓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낭독으로 만나는 중국연극

    낭독으로 만나는 중국연극

    서울문화재단과 한중연극교류협회가 12~17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제2회 중국희곡낭독공연’을 선보인다. 올해 낭독공연에서는 ‘물고기인간’을 쓴 궈스싱의 ‘청개구리’를 비롯해 지난해 타계한 중국 연극계의 거장 사예신의 ‘내가 만약 진짜라면’, 주샤오핑의 원작 소설을 천즈두와 양젠이 연극으로 각색한 ‘뽕나무벌 이야기’ 등 3편을 만날 수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올해 중국의 현대극 5편과 전통극 5편 등 총 10편을 번역·출판해 이가운데 작품 3편을 선정해 무대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중국희곡이 생소한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으로 보는 중국연극 이야기’ 등 강연회도 부대 프로그램으로 마련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정읍 벚꽃축제 30일 개막

    전북 정읍시 벚꽃축제가 이달 30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닷새간 정읍천변에서 진행된다. 정읍벚꽃축제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 정읍예술제와 자생화 전시회, 자생차 페스티벌도 같은 기간에 열려 재미를 더해준다. 벚꽃축제장은 정읍천 5km 구간이다. 이곳에는 1200여 그루의 벚나무와 개나리, 튤립이 어우러져 화려한 경관을 연출한다. 조명을 설치해 밤에도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축제장에서는 대규모 불꽃 쇼와 버블 쇼, 공예체험, 전통놀이 등의 문화행사도 펼쳐진다.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1.2km 구간은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해 차량 통행을 전면 통제한다. 벚꽃축제와 동시에 치러지는 정읍예술제는 지역 예술인과 시민이 마련한 공연과 전시를 선보이는 자리다. 농악단 경연대회, 무용, 연극, 국악, 청소년 댄스페스티벌 등 20여개 공연과 미술·서화·사진 전시회 등으로 꾸며진다. 자생화 전시회는 500여점의 초본류, 목본류, 난류를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자생차 페스티벌은 정읍에서 생산되는 녹차, 발효차, 여주, 구절초, 알로에 차 등을 음미할 기회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정읍 벚꽃은 꽃봉오리가 크고 탐스러운 데다 색상이 은은하고 멋스러워 정읍 9경의 하나로 꼽힌다”며 “문화 축제들까지 한 자리에 모은 만큼 더욱 풍성하고 즐거운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전혜진 모친상 이선균 장모상, 발인은 오는 8일 [공식입장]

    전혜진 모친상 이선균 장모상, 발인은 오는 8일 [공식입장]

    전혜진 모친상-이선균 장모상을 당했다. 배우 전혜진 이선균 소속사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측 관계자는 6일 “전혜진이 모친상을 당한 것이 맞다”고 밝혔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다. 발인은 오는 8일이다. 전혜진 이선균 부부는 슬픔 속에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 전혜진과 이선균은 연극배우로 인연을 맺고 7년의 열애 끝에 지난 2009년 부부가 됐다.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왕성한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혜진은 최근 영화 ‘뺑반’에서 활약했고, 또 다른 영화 ‘비스트’(가제)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이선균은 영화 ‘악질경찰’의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또 다른 영화 ‘기생충’과 ‘킹메이커’에 주연으로 출연을 확정 지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윤지오 누구? ‘故장자연 문건 핵심 증인+끼 많은 배우’ [종합]

    윤지오 누구? ‘故장자연 문건 핵심 증인+끼 많은 배우’ [종합]

    그동안 익명으로 언론 인터뷰를 진행해 왔던 ‘장자연 문건’ 관련 핵심 증인 배우 윤지오가 처음으로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다. 윤지오는 5일 오전 방송된 tbs교통방송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렇다면 윤지오는 누구일까. 윤지오는 10년 전 고(故) 장자연이 언론사 사주 등이 포함된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할 당시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동료다. 윤지오는 과거 ‘베이글녀’, ‘건어물녀’로 주목받은 배우로, 장자연이 출연한 KBS2 ‘꽃보다 남자’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윤지오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중학생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 그는 이후 귀국해 한양대 대학원 국제경영 ‘최연소 MBA 석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데뷔 전 대형기획사에서 2년간 연습생 시절을 보내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낸 윤지오는 각종 미인대회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아시아모델협회 운영위원과 친환경 홍보대사 등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피아노, 대금 등 8가지의 악기를 다루는 윤지오는 퓨전 국악단과 전자 현악단 등의 공연팀에서도 활약했다. 이후 윤지오는 2009년 KBS2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영화, 연극, 방송 예능 등 무대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던 윤지오는 2012년 11월 연극 ‘뉴보잉보잉’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같은 기획사에서 배우로 활동했고, 이후 2008년 8월 5일 장자연이 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지오는 장자연이 세상을 떠난 2009년부터 검찰과 경찰로부터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아왔으며, 지난해에는 3차례 익명으로 JTBC 뉴스룸에 관련 내용을 증언하기도 했다. 5일 윤지오는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에서 “캐나다 같은 경우는 이런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케이스가 공개적으로 진행된다. 피해자, 가해자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다. 그런 것이 당연시 여겨진다”면서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어찌 보면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며 얼굴과 실명을 공개한 이유를 밝혔다. 이날 윤지오의 용기 있는 고백에 청취자들과 네티즌들은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한편 故 장자연은 2009년 언론사 간부 등의 이름이 적힌 성접대 문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라디오스타 곽동연, 동갑내기 차은우와 코드 안 맞는다?

    라디오스타 곽동연, 동갑내기 차은우와 코드 안 맞는다?

    아역 출신 배우 곽동연이 ‘라디오스타’에서 입담을 뽐낸다. 오는 6일 수요일 밤 11시 10분 방송 예정인 고품격 토크쇼 MBC ‘라디오스타’(기획 김구산 연출 한영롱)는 송재림, 이주연, 곽동연, 안우연 네 사람이 출연하는 ‘주연 즈음에’ 특집으로 꾸며진다. 곽동연은 지난해 연극 무대에 올랐다가 혀가 잘릴 뻔한 아찔했던 순간을 고백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창 연기를 하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어 혀의 3분의 1 정도가 찢어졌던 것. 그는 아찔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하면서도 관객들의 반응을 위트있게 전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가 하면 곽동연은 절친한 배우이자 형인 박보검에 대해 ‘날개 없는 천사’라고 지칭하는 한편, 동갑내기 친구 차은우와는 ‘코드가 안 맞는다’고 밝혀 웃음을 자아냈다. 이와 함께 곽동연은 동년배보다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편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또한 곽동연은 불금을 무서워하는 이유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사건사고 강박증이 있는 ‘걱정 인형’의 모습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와 함께 그는 일과 사생활이 분리가 안 된다는 사실과, 가장 오래한 연애가 ‘90일’이라는 사실을 줄줄이 고백해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 놨다. 그의 얘기를 듣던 송재림과 이주연은 곽동연을 위한 즉석상담소를 오픈했다는 후문. 그런가 하면 곽동연은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절미를 실제로 만난 사연을 털어놔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그는 최근 다니엘과 동거 중인 사실을 공개하며 애정을 드러냈는데, 이 다니엘의 정체에 또다시 스튜디오가 웃음바다가 됐다는 후문이다. 과연 곽동연이 함께 사는 다니엘의 정체는 무엇일지, 아찔했던 혀 일부분 절단 사고의 전말은 오는 6일 수요일 밤 11시 10분 방송되는 ‘라디오스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라디오스타’는 김국진-윤종신-김구라-차태현 4MC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촌철살인의 입담으로 게스트들을 무장해제 시켜 진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독보적 토크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송일국, 초등학교 입학 앞둔 삼둥이 근황 공개 ‘장난기 가득’

    송일국, 초등학교 입학 앞둔 삼둥이 근황 공개 ‘장난기 가득’

    송일국 아들 삼둥이의 근황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최근 송일국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동영상 한 개를 공개했다. 영상에는 삼둥이가 아빠 송일국이 출연하는 연극 ‘대학살의 신’을 홍보하는 모습이 담겼다. 삼둥이는 ‘대학살의 신’ 글자에 맞춰 삼행시를 했다. 삼둥이는 “학수고대 기다렸어요”, “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연극 처음이에요”, “의심하지 마세요”, “신명나게 해드릴게요” 등 재치 넘치는 삼행시로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 송일국은 지난 2008년 3월 정승연 판사와 결혼해 2012년 3월 삼둥이 대한, 민국, 만세를 얻었다. 지난 2015년에는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삼둥이는 올해 3월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인스타그램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해치’ 박지연, 현장 밝히는 비하인드 컷 “이 구역의 사극 여신”

    ‘해치’ 박지연, 현장 밝히는 비하인드 컷 “이 구역의 사극 여신”

    배우 박지연의 드라마 현장이 포착됐다. 소속사 에잇디크리에이티브는 4일 SBS 월화드라마 ‘해치’(극본 김이영, 연출 이용석, 제작 김종학프로덕션)에서 연잉군 이금(정일우 분)을 짝사랑하는 ‘초홍’으로 맹활약 중인 박지연의 현장 비하인드 컷을 공개했다. 사진 속 박지연(초홍 역)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곱게 땋은 올림머리로 단아한 한복 자태를 발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첫 사극이라 믿기지 않는 그녀만의 독보적인 분위기가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어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더불어 박지연의 ‘핫팩 사랑’이 눈길을 끈다. 사극의 특성상 대부분의 촬영이 야외 세트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만큼 언제 어디서나 두 손으로 핫팩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 특히 ‘핫팩 꽃받침’은 그녀의 러블리한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어진 사진 속 박지연은 아까와는 180도 다른 진지한 눈빛으로 변신, 대본을 뚫을 듯 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리허설 현장에서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은 ‘초홍’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하는 그녀의 연기 열정을 고스란히 엿보이게 한다. 박지연의 소속사 관계자는 “박지연은 최근까지 연극과 드라마를 병행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밝히고 있다”며 “극 중 ‘초홍’의 활약이 커지고 있는 만큼, 캐릭터와 극의 완성도를 위해 노력 중이니 앞으로도 배우에게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린다”고 전했다. ‘해치’는 오늘(4일) 밤 10시에 13~14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SKY 캐슬’ 김정난, 우울했던 적 있었느냐는 질문에..

    ‘SKY 캐슬’ 김정난, 우울했던 적 있었느냐는 질문에..

    배우 김정난이 1년 공백기를 언급했다. 김정난은 3일 방송된 올리브 ‘모두의 주방’에서 “쓸쓸해서 우울했던 적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김정난은 “지난해와 올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일부러 한 1년 정도를 일을 안 했다. 우리 나이쯤 되면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많이 들어온다. 새로운 걸 하고 싶은데 그게 원할 때 주어지지 않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이어 “조금 기다려야 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동하면서 쉬었다. 좀 무거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연극이 들어와서 너무 좋은 작품을 하게 됐다. JTBC 드라마 ‘SKY 캐슬’(스카이 캐슬)도 그때 같이했다. 드라마, 연극, 캐릭터 모두 사랑받고 외롭고 쓸쓸할 시간도 없이 사랑받는 느낌으로 살았던 것 같다”며 “의외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느낀다. 외로움을 느끼는 건 사치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전했다. 사진 = 올리브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 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을 모두 해임했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들은 모두 해임됐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윤봉길 종손’ 윤주빈, 큰할아버지와 똑 닮은 외모 ‘그는 누구?’ [종합]

    ‘윤봉길 종손’ 윤주빈, 큰할아버지와 똑 닮은 외모 ‘그는 누구?’ [종합]

    윤봉길 의사의 종손인 윤주빈에게 관심이 모아졌다. 탤런트 윤주빈은 1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피아노에 맞춰 ‘심훈 선생이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윤주빈은 윤봉길 의사의 종손이다. 윤봉길 의사는 윤주빈의 큰할아버지다. 윤주빈은 지난달 28일 방송된 KBS 2TV 3.1운동 100주년 전야제 ‘100년의 봄’에 출연해 큰할아버지 윤봉길 의사의 사진에 “너무 많이 봐왔던 사진인데 오늘 또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의 용기 덕분에 대한민국은 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윤주빈은 또한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큰할아버지 #윤봉길 #윤우의 #매헌 #매헌윤봉길 #윤남의 24세의 큰할아버지와 31살의 나 멋진 사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과 사진을 올렸다. 윤주빈은 1989년생으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2012년 OCN 드라마 ‘신의 퀴즈3’로 데뷔한 윤주빈은 tvN ‘더 케이투’, JTBC ‘미스 함무라비’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윤주빈 소식을 접한 네티즌은 “윤봉길 의사와 정말 닮았다”, “멋있다”, “대한의 핏줄”, “자랑스럽겠다”, “멋져요”등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이종걸, 45년 지기 황교안에 “메멘토모리”로 축하 인사

    이종걸, 45년 지기 황교안에 “메멘토모리”로 축하 인사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28일 45년 지기 자유한국당 황교안 신임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친구로서 ‘메멘토 모리’(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란 말을 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종걸 의원은 황교안 대표와 경기고등학교 72회(1976년 졸업) 동창이다. 이 의원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축하인사를 하기엔 한국정치가 너무나 녹녹치 않다. 친구로서 그에게 ‘메멘토 모리’란 말을 해주고 싶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로, 로마시대에 승전한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겸손해지라고 누군가 뒤를 따라가면서 외쳤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종걸 의원은 또 2009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정치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글을 추천했다. 이 의원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해보고, 검사로 산전수전 다 겪어본 황 대표가 정치를 순진하게 바라보거나 호락호락 여기고 도전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황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글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정치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통찰력이 담겨 있다”며 일독을 권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썼던 ‘정치하지 마라’ 전문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 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언제 이 실패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고는 이 길을 회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습니다.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도 사람들의 비난, 법적인 위험, 양심의 부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거짓말의 수렁 -거짓말을 좋아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유권자나 참모들과 싸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상대방의 거짓말, 근거 없는 보도, 풍문에 상처를 입고 진실을 밝혀 보겠다고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곧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나중에 보면 거짓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점차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거짓말에 익숙해집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소재로 우스개꺼리를 만들어 웃고 즐기고 돈벌이까지 합니다. 단지 그 정도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거저 농담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고 분노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의 양심도 인격도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돈의 수렁 -돈정치는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에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조달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후원회 제도가 많이 정비되기는 했지만, 지역을 관리하거나 열심히 일하는 의원에게는 한참 부족합니다. 원외 정치인의 사정은 참담하다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가끔 뭘 먹고 사느냐? 세금은 얼마나 냈느냐? 이런 질문이라도 받는 날이면 참으로 난감한 처지가 됩니다. 원외 정치인은 둘러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벌이를 할 방법도 없습니다. 국회의원에게는 연금제도도 없습니다. 결국 노후는 대책이 없습니다. 원외 정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돈이 많은 부자이거나 샘이 깊은 후원자라도 있는 복이 많은 정치인에게는 이런 이야기는 해당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 많겠습니까? 또 그런 사람만 정치를 하는 나라 정치가 과연 잘될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언젠가 정치와 돈에 관한 이야기도 글로 써볼 작정입니다.- 사생활의 노출 -정치인은 사생활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인 일도 정치인에게는 비밀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의 자유도 없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는 일도, 골프를 치는 일도 세상 분위기와 언론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농담도 함부로 하면 사고가 납니다. 실수가 아니라도 실수가 됩니다. 저격수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인으로서 검증을 받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겠지만, 당사자로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사생활보호의 한계가 너무 모호하여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전투구의 저주 -정치인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가?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민주주의 정치 구조가 본시 싸우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당을 서로 나누어 싸우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정치는 무너집니다. 정도의 문제일 뿐입니다. 독재 시절에는 여야의 싸움이 전쟁이었습니다. 감시하고 조사하고 죄를 씌워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 직장생활도 못하게 했습니다. 야당은 정치는 고사하고 먹고사는 것도 힘들게 했습니다. 패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니 전쟁인 것이지요.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싸움이 전쟁에서 게임으로 바뀌었습니다. 패자라도 정계에서 밀려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싸움입니다. 민주주의라고 싸움이 항상 규칙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정쟁을 전쟁으로 하던 적대적 정치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큰 나라에서는 자연 싸움이 거칠어지고 패자에 대한 공격도 가혹해 지기 마련입니다. 욕설, 몸싸움, 거짓말, 중상모략, 뒷조사 이런 악습이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결국 이런 싸움판에서 싸우는 정치인들은 스스로 각박해 지고 국민들로 부터는 항상 욕을 먹는 불행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과 가난 -좀 막연한 짐작입니다. 이미 그런 처지에 빠진 정치인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돈을 좀 모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통의 정치인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형편이나 관계도 과거와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정치를 하는 동안 옛날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생각과 정서도 달라지기도 하고, 손을 자주 벌려서 귀찮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치인들은 저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돈도 친구도 없는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어느 직업보다 높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저의 말대로 정치할 사람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요? 정치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정치의 신뢰가 이런 속도로 계속 떨어지면, 정치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90년 3당 합당 이후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를 하자고 권유를 하고 다녔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을 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지옥 같은 터널을 겨우 빠져 나왔지만, 남은 사람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어떤 정치인이 쓴 ‘정치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변명으로서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도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별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인을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가 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정치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먼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의 처지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이 알아주지 않는 머슴들은 결코 훌륭한 일꾼이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존심 상한다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무릅쓰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해답이 아니라 문제제기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저의 이 이야기는 모든 정치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좋은 조건에 있지 않은 보통의 정치인들은 거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해당 없는 분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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