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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변 재건축 아파트 35층 이하로 제한 추진

    서울 한강변의 재건축 아파트 층수가 35층 이하로 제한된다. 서울시는 이런 내용의 ‘한강변 관리 기본방향’을 마련했다고 24일 밝혔다. 서울시의 방안에 따르면 한강 주변 10곳의 전략·유도정비구역 가운데 여의도 구역에 한해서만 아파트 재건축 때 50층까지의 고층 개발이 허용되고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35층 이하로 제한된다. 잠실지구의 경우에는 역 주변의 비주거용은 50층까지 개발할 수 있지만 주거지역은 35층까지만 허용된다. 또 한강변 일대의 용도지역을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방안이 확정되면 한강변 최고 층수가 제한돼 수익성 저하 등을 이유로 재개발·재건축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오세훈 전 시장 때 통합 개발 원칙 때문에 개발할 수 없었던 지역도 이번 방안이 적용되면 개별적, 단계적인 개발을 할 수 있다”면서 “35층도 충분히 높으며 이로 인해 수익성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 방안을 토대로 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청회를 열고 2월 중 도시계획위원회를 거쳐 가이드라인을 확정한 뒤 한강변 개발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용역 발주할 계획이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외환銀, 中企돕기 ‘국제금융 자문센터’ 설립

    외환은행이 ‘중소기업 국제금융 자문센터’를 설립한다.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금융 상담은 물론 자금 중개까지 무료로 도와주는 전담 조직이다. 정부나 공기관이 아닌 시중은행이 이런 전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처음이다. 외환은행은 24일 이르면 2월 중 ‘중소기업 국제금융 자문센터’를 개소한다고 밝혔다. 금융 자문에서부터 자금 중개, 신용장 개설, 환율 변동 대처, 해외투자신고, 해당국 정보, 현지 진출 노하우 등에 이르기까지 해외 진출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원스톱’ 제공한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전문 자문역들이 각 단계별로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히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그렇더라도 서비스를 무료로 책정한 것은 다소 파격이다. ‘중소기업도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살고, 그래야 은행도 산다’며 윤용로 행장이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1차 지원대상은 하나금융그룹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이다. 외환은행, 하나은행, 하나대투증권과 거래 실적이 있으면 된다. 거래 실적이 없더라도 신규 거래를 트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코트라(KOTRA) 등과 제휴해 진출 대상국의 규제정보 제공과 사업 파트너 연계 등 비금융 분야에 대한 자문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 전 세계 23개국에 뻗어 있는 외환은행의 해외 네트워크를 토대로 미주, 동남아, 유럽, 중국 등 지역별로 세분화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전담직원 40~5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해외근무 경험자 중 임금피크 대상자나 외환 트레이딩 경험자 가운데 뽑을 방침이다. 눈에 띄는 점은 하나은행과의 협업이다. 센터 설립 주체는 외환은행이지만 서비스 이용 대상에 하나은행 거래고객을 포함시켰는가 하면, 하나은행 인력 중에서도 센터 자문역을 뽑기로 했다. 중소기업의 ‘손톱 밑 가시’도 뽑고, 퇴직을 앞둔 고참 은행원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한 식구가 된 외환·하나은행의 내부 단합도 다지는 ‘일석삼조’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한 시대의 어머니였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 채 참으로 모진 ‘여자의 일생’을 살았다. 글 공부는 근처에도 못 갔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억지 결혼을 했다. 남편의 바람기와 혹독한 시집살이, 게다가 자식의 죽음까지 가슴이 찢어지듯 처절하게 감내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손녀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배우고 죽은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면서 유리창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눈물로 겪은 어머니였다. 연극 ‘어머니’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연극은 1999년 2월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매년 공연되고 있다. 그래서 연극 ‘어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초연 당시 어머니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고 그해 5월 러시아 타캉가극장에 초청돼 ‘마마’라는 환호 속에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공연 때 한국 기업가한테 격려금을 받았다는 구설수로 32일 만에 환경부 장관직을 그만두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손숙(69)이다. 흔히 배우들은 타인의 삶을 산다고 한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주로 맡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대에서 살아온 지 50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손씨는 다음 달 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하용부, 윤정섭, 김미숙, 김철영 등과 함께 오른다. 이 연극이 끝나면 오는 4월 임영웅 연출가와 함께 극단 산울림에서 치매 노인을 다룬 신작 ‘나의 황홀한 실종기’에 출연한다. 또 7월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손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공연한다. 10월쯤에는 극단 신시와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손씨는 연극 공연에 항상 남다른 의욕을 보이지만 올해만큼은 더욱 바쁘고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 같아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카페에서 잠시 만났다. 단발머리에 편한 티셔츠 차림, 그리고 소탈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50주년을 맞는 소감부터 물었더니 “글쎄 바쁘게 살다 보니 인생의 반은 다른 인생으로 산 것 같다”고 웃으면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연극으로 견딜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서게 됐다. 고스란히 내 인생만 살았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관객들의 박수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특히 ‘어머니’는 연극 인생 중 자신에게 각별한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어머니’ 덕분에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서 매년 연극제가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10여년 동안 늘 밀양연극제 폐막작으로 무대에 오르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이를 보려는 지역 주민들이 객석을 꽉꽉 채운다. 자연스럽게 고향 시절 얘기가 먼저 나왔다. “밀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가 발발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대신 육군병원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는 바람에 입학식만 본교에서 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강변 솔나무나 들판 돌멩이 위에 칠판 올려놓고 공부하고 겨울에는 창고를 빌려서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유 가루와 학용품 등 구호물자를 실은 미군 트럭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말 그대로 춥고 배고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것이 큰 축복으로 남는다고 술회한다. 또한 밀려오는 피란민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다.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그러다가 부산여중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왔다. 잠시 어머니를 회고한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여자의 일생이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어머니는 16살에 결혼했지만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고 시집살이를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자식들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저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됐습니다.” 서울로 온 손씨는 돈암동에 살면서 시골 아이 취급을 받아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다. 하지만 풍문여고에 진학하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다. 문예반장을 맡아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황석영·조해일 등 여러 학생들과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손숙 학생은 작가가 되려고 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와 폴 발레리 등에 심취했다. 종로2가에 있는 음악홀에서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얘기하는 것이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년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도전할 만큼 작가 지망에 대한 열의를 가졌다. 그는 살아오면서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책을 썼는데 이 또한 그의 문학적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그 문학소녀는 고3 어느 날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접하게 됐다. 이해랑 선생이 연출하고 황정순·장민호·여운계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문학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갑자기 찾아온 연극의 전율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고려대 사학과 재학생이던 그는 1963년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스페인 작가 알라르콘 이 아리사의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꿈에 그리던 남산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랐다. 남자 주인공은 당시 고대극회 선배인 김성옥(77·목포시립극단 예술감독)씨가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사랑이 시작돼 2년 뒤 결혼하게 된다. 1968년에는 극단 동인극장에 들어가 유진 오닐의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에서 주인공 엘렉트라 역을 맡아 직업 배우로 연극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극단 산울림 창단(1969년)에 참여해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임영웅(77) 연출가와 인연을 맺었다. 또한 2년 뒤에는 국립극단에 들어가 이해랑(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연극 인생을 회고하면서 “산울림과 국립극단에서 청춘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잊지 못할 작품으로는 산울림 시절의 ‘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홍당무’, ‘바다의 침묵’ 등을, 국립극단 시절의 ‘파우스트’, ‘간계와 사랑’, ‘천사여 고향을 보라’ 등을 꼽았다. 그는 “15년 동안 지낸 국립극단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과 작품의 한계도 많았다”면서 “이런 분위기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맞지 않아 자꾸 반발했더니 미운털이 박히고 나중에는 싸움닭이 되더라”며 웃었다. 다시 현재 진행형인 ‘어머니’로 화제를 돌렸다. 환경부 장관과 맞바꾼 연극이기 때문이다. 하여 당시 상황을 물었다. “러시아 공연 1주일 전에 장관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체결된 국가 간 약속을 도저히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공연을 강행했지요. 평생 잊지 못할 무대였습니다. 관객들이 15분 동안 ‘마마’를 외치며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무대에 올라온 기업인들로부터 액수도 모른 채 격려금을 받았지요. 단원들에게 나눠 주고 지방 공연을 하지 못해 위약금으로 썼는데 그게 뇌물이라고 하더군요. 장관직 사퇴 후 너무 억울해서 열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울었습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미국 그랜드캐니언으로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얼마 후 귀국한 그는 임영웅 선생한테 위로의 전화를 받고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오게 된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로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어머니’로 빨리 제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동료 배우들이 TV드라마로 넘어갈 때에도 오로지 연극무대를 지켰다. 하지만 먹고살기는 여전히 빡빡했다. 게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후 많은 빚을 졌다. 때마침 라디오 진행 섭외가 들어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989년부터 MBC ‘여성시대’를 진행하게 됐다. 이때 다양한 청취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여성과 환경문제 등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뱉어 냈다. “연극은 관객과 같이 호흡하는 현장 예술입니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호흡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또 스크린이나 TV드라마와 달리 관객으로부터 치유받을 때도 많지요. 연극이 열악한 환경이긴 하지만 그걸 다 초월해 연극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극 인생을 다시 회고하면서 ‘담배 피는 여자’, ‘그 여자’, ‘셜리 발렌타인’ 등 모노드라마를 잊지 못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선 지금 자신의 인생 모노드라마를 잠시 떠올리는 것 같다. 앞으로의 인생 모노드라마는 어떻게 이어 나갈까.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극을 하지 않겠느냐. 연극을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일이 매우 즐겁다”고 말하고, 웃으면서 그런 관객을 위해 연습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연극인 손숙은 19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여중 시절 서울로 왔다. 풍문여중과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고려대 사학과 1학년 때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의 주인공으로 데뷔했다. 1969년 극단 산울림 창단 멤버로 참여했고 1971년 국립극단에 입단, 고 이해랑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연출가들과 작품을 함께 했다. 1989년 MBC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20여년 동안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199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이 밖에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2002)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활화산’(1975), ‘객사’(1979), ‘어머니’(1999)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이 밖에 대한민국연극제 여우주연상(1986), 이해랑연극상(1997), 은관문화훈장(2012)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여성수첩’,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있다.
  • 세종시 관문 오송역 택시 ‘불법 기승’

    세종시 관문 오송역 택시 ‘불법 기승’

    세종시 관문 역인 충북 청원군의 KTX 오송역이 개통된 지 2년이 지났지만 택시들의 불법행위와 불법주차가 근절되지 않아 충북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23일 충북도에 따르면 도는 보건복지부 산하 6개 국책기관으로 구성된 오송 보건의료행정타운에 이어 지난달 정부세종청사 개청 등으로 오송역 이용객이 증가하고 있으나 청주·청원지역 택시기사들의 단거리 승차거부와 부당요금 징수 등이 사라지지 않아 암행 단속을 벌이고 있다. 청주시와 청원군 등 관련 지자체들은 오송역 택시 승강장 앞에 부당요금 신고전화 안내 현수막을 내걸고 택시업체와 자정결의대회까지 가졌지만 아직도 불법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현재 가장 심각한 것은 승차거부라는 게 이용객들의 얘기다. 택시들이 세종시나 청주 등 장거리 운행을 선호해 3㎞ 정도 떨어진 보건의료행정타운을 가려는 손님을 태우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 A서기관은 “식약청을 가자고 하면 ‘장거리를 가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기다렸다’며 승차를 거부하는 기사들을 여러 번 봤다”면서 “수도권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혀를 찼다. 부당요금 징수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부 기사들은 여전히 웃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획재정부 B사무관은 “오송역에서 세종시까지 미터기 요금은 2만 6000원 정도인데 3만 5000원을 주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면서 “세종시 관문역이라면서 세종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부당요금을 징수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송역 주변의 불법주차는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다. 코레일 네트윅스가 역사 바로 앞에서 380대 규모의 주차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하루 이용차량은 20여대에 불과하다. 이런데도 군의 단속인력은 한 명에 불과하다. 코레일 네트윅스 관계자는 “5000원이면 24시간 차를 세울 수 있어 이용료가 비싸지도 않다”면서 “인도와 횡단보도 위에 주차된 차량들에 한해 양심주차 스티커를 부착했더니 반발이 심해 이마저도 못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청원군 관계자는 “택시 불법행위 근절을 위해 3월까지 강력한 단속을 벌이고, 올해 안에 불법주차 단속 폐쇄회로(CC)TV 두 대를 설치할 계획”이라면서 “오송역 때문에 충북의 첫인상이 나빠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송역은 지붕 누수 등으로 이번 겨울에만 두 번이나 일부 승하차장이 물바다가 돼 이용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괴물 신인왕의 길 ‘맞춰잡기’란 없다

    괴물 신인왕의 길 ‘맞춰잡기’란 없다

    “목표는 신인왕이다.” ‘몬스터’ 류현진(26·LA 다저스)이 23일 인천공항을 통해 ‘약속의 땅’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그는 출국에 앞서 “두 자릿수 승리와 낮은 방어율로 신인왕을 차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힘이 좋아 맞춰 잡기보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투구할 생각”이라며 “낮은 공을 던지도록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류현진은 “부담을 얼마나 빨리 떨치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던지면서 자연스럽게 적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일부 예상대로 3선발로 뛰기 위해서는 캠프에서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올리겠다”고 설명했다. 류현진은 오는 2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될 구단 팬미팅 투어에 참가해 ‘다저스맨’으로서 새해 첫 일정을 시작한다. 이후 개인 훈련을 이어 가다 다음 달 13일 시작하는 스프링캠프에 합류한다. 류현진은 캠프에서 ‘인상적인’ 피칭으로 3선발 자리를 꿰찰 복안이다. 두 자릿수 승리와 2점대 평균자책점에 도전한다. 팀당 162경기를 부상 없이 풀타임 소화하기 위한 절대 요소로 체력 강화가 꼽힌다. 또 필살기인 체인지업을 예리하게 가다듬는 것도 과제다. 이날 다저스는 홈페이지를 통해 전설적인 왼손 투수 샌디 쿠팩스(78)가 마크 월터 구단주의 특별 보좌역으로 스프링캠프에 합류한다고 밝혔다. 빅리그 연착륙에 나선 류현진에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지도를 받는 것만으로도 동기 부여는 물론 투구 메커니즘이나 심리 조절 요령 등을 전수받을 수 있다. 1955년 다저스에서 데뷔한 그는 한 차례 퍼펙트게임을 포함해 4차례나 노히트노런을 작성했다. 류현진은 다음 달 24일부터 4월 1일까지 시범 경기를 통해 기량을 검증받는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전지현 “결혼 후 연기에 자신감 생겼어요”

    전지현 “결혼 후 연기에 자신감 생겼어요”

    2001년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엄청난 성공은 전지현(당시 20세)을 ‘20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극장보다는 TV광고에서 만나기가 쉬웠다. 좀처럼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은 탓에 ‘연예인이 봐도 연예인 같은 사람’으로 통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공포(‘4인용 식탁’), 판타지액션(‘블러드’), 멜로(‘데이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그래도 대중은 여전히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로 기억했다. 어느새 그녀도 서른셋. 또한, 한 남자의 여자가 됐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31일 개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특별한 영화가 될 듯싶다. 아픔을 간직한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통역관 련정희 역을 맡았다. 류 감독이 “물 같은 배우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앞으로 전지현이 얼마나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전지현은 23일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배우란 직업이 실제 경험했던 일만을 연기할 수는 없다. 다만, 자신감이 생기니까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베를린’ 촬영 직전에 결혼한 게 컸다. 어른의 반열에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도 날 그렇게 대했다”고 털어놓았다. 련정희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신인여배우의 역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지현이 캐스팅되면서 비중이 커졌고, 그는 날이 바짝 오른 수컷들의 스파이 액션에 미묘한 감정을 불어넣었다. 전지현은 “류 감독님과 오래전부터 일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비중과 관계없이 선택했다. 다만, 감독님이 여배우와 작업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충분히 친해지지 못한 건 아쉽다. 한 작품을 더 했으면 좋겠다. 그땐 액션 장면을 많이 주셨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1998년 TV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16년차. 전지현은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일에 올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이 전부가 되면 일이 없을 때 너무 힘들다. 나란 사람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지금도 일을 좋아하지만 1순위는 아니다. 나의 행복이 먼저”라고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구청장 신년인터뷰] 신연희 강남구청장

    [구청장 신년인터뷰] 신연희 강남구청장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높아진 강남의 브랜드 가치를 적극 활용해 강남이 세계적인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초석을 놓겠습니다.”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22일 “올해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관광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지역 경제 활성화와 연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는 1차적으로 연 200만명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세웠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도약해 보다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해 나갈 것”이라며 “지난해 11월 관광진흥과를 신설해 한류스타 거리 조성과 관광정보센터 건립, 한류페스티벌 공연 개최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류 관광 중심 도시를 올해 역점사업으로 꼽은 데는 관광을 통해 경제 활성화와 지역 개발, 일자리 창출 등과 연계해 나가겠다는 복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역에 있는 다양한 문화관광자원을 지역 경제와 연계해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강남그랜드세일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겠다”면서 “지역 특화산업인 패션산업과 웨딩산업의 발전을 위해 국내외 박람회 참여 지원은 물론 지역별 특성에 맞는 상권을 개발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내외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쇼핑중심도시 만들기에 나선다. 코엑스몰 주변과 압구정로데오거리, 신사동 가로수길, 청담동패션거리 등을 주요 4대 상권으로 지정해 육성할 방침이다. 의료관광객 유치 목표도 지난해보다 20% 많은 3만 7000여명으로 잡았다. 특히 높아진 브랜드 가치를 활용해 우량 기업 유치에도 적극 나선다. 기업유치위원회를 통해 올해 20개 이상의 우량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도 2만개 이상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울러 명품 도시 강남을 만들기 위한 선진시민의식정착운동도 강화한다. 지역 내 불법 퇴폐 업소를 뿌리 뽑고, 불법 광고물·노점상·주정차·건축물 등 불법 무질서를 추방해 나갈 계획이다. 지역 개발사업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는 “수서 KTX역이 2014년 완공될 예정이어서 수서 역세권 개발이 시급하다”면서 “올해는 KTX 수서역세권 개발과 한전 이전 부지 일대, 학여울역 세텍(SETEC) 부지를 국제 전시·컨벤션, 호텔, 공연장, 미술관, 업무시설 등으로 복합 개발하려는 계획이 가시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30년 이상 방치돼 왔던 구룡마을과 재건마을 등 무허가 집단판자촌의 공영개발계획이 확정됐지만 수정마을과 달터공원 등이 남아 있고, 5만여 가구의 아파트가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개인 주거환경 개선뿐 아니라 도시미관을 위해 불법 무허가 판자촌 정비와 아파트 재건축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걷기 운동 등 전 구민 생활체육인 운동도 펼칠 예정이다.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주민과 함께하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서 “23일부터 한달간 각 동을 찾아다니며 ‘올 한 해 살림 보고회’를 개최해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지역 발전을 위해 함께 뛰겠다”고 말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찐~득한 눈웃음 지우고 진~득한 눈물을 흘려요

    찐~득한 눈웃음 지우고 진~득한 눈물을 흘려요

    아직 그를 생각할 때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과묵하고 냉철한 킹메이커나 ‘내 아내의 모든 것’의 희대의 카사노바 캐릭터를 떠올린다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영화 ‘7번방의 선물’(24일 개봉)로 돌아온 류승룡(43) 얘기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첫 주연작인 이번 영화에서 6세 지능의 지적장애인 용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18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류승룡을 만났다. →휴먼 코미디 장르는 처음인 것 같다. -맞다. 처음이다. 그동안 악역을 많이 했는데 오히려 반전으로 순수함을 보여 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고정관념을 깨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휴먼 코미디는 평소 (배)고파했던 장르였고 도전해 볼 만한 캐릭터였다. 연출을 맡은 이환경 감독이 전작에서 가끔 나타나는 강아지 같은 순한 눈과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보고 캐스팅했다고 했다. 모험일 수도 있지만,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 출연했다. →사실상 첫 주연작이다. 카리스마를 포기하고 모험을 한 이유가 있었나. -주위에서 첫 주연이라는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데 나는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전과 똑같이 열심히 연기했다. 무대 인사를 더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관객은 냉정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연기를 하다 보면, 오히려 관객은 배우가 그런 연기밖에 못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배우는 여러 사람의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카리스마적인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동안 검증된 캐릭터에 대한 원금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투자를 했다면, 이제 위험을 떠안는 공격적인 투자를 해 보려고 한다(웃음). →극 중 용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흉악범들이 가득한 교도소 7번 방에 수감된다. 하지만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순수함을 지닌 인물이다. 지적장애인 연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혼자 연구한다고 해결될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와 수차례 만남을 가졌다. 처음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고 도치법을 자주 쓰거나 발음할 때 각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굴리는 습관을 연기에 반영했다. 웃기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상당히 치열하고 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용구는 지적장애인이지만 딸 예승을 끝까지 지키려는 눈물 나는 부성애를 보인다. -용구는 비록 이성적인 판단이 흐린 6세 지능을 가졌지만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딸을 위한 괴력이 나온다. 그것은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보호 본능이다. 딸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아빠 노릇을 하려고 엄하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겐 두 아들이 있는데 딸 못지않게 애교가 많다. 용구의 어투와 표정을 한 뒤 거기에 제 마음을 대비시켰다. 부모로서의 감정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 영화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아빠와 딸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지적 장애인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난해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연타석 흥행에 성공했다. 전성기 아니었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기존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터닝포인트였다. 그때는 대중이 잘 모르는 내 장기를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관심을 환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친구들이 연기를 하나도 안 했다고 할 정도로 극 중 성기는 실제 내 모습과 흡사했다. 반면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정중동의 캐릭터였다. 이전 작품에서 주로 액션을 많이 했는데 리액션과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유발시키고 권위를 주는 절제의 미학을 배운 것 같다. →삼십대 후반 뒤늦게 영화판에 뛰어들어 명품 조연을 거쳐 주연 배우까지 올라갔다. -연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연극을 했으니 상당히 일찍 시작한 편이다. 하지만 영화는 ‘박수칠 때 떠나라’(2005)가 데뷔작이다. 결과적으로 늦게 데뷔한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20대 때 영화판에 나왔더라면 많이 소모되고 실수도 많이 해서 문제를 일으켰을 것 같다. 시행착오를 혼자 감내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열린세상] 동묘를 기억하라/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열린세상] 동묘를 기억하라/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서울의 동대문 밖에 여느 고궁과는 달리 어딘지 낯설고 초라한 느낌을 주는 유적이 있다. 최근 보수공사가 진행되기 전 찾아보았을 때 이곳은 퇴락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건물은 허물어지다시피 서 있고 더러운 도시의 때가 켜켜이 쌓여 있으며 담장도 없는 경내에는 방뇨의 냄새가 코를 찔렀고 군데군데 노숙자들이 누워 있거나 배회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중고품 시장이 개설되어 하루종일 시끌벅적하였고 점포의 낡은 물품들은 오히려 이곳의 황량한 풍정을 대변하는 듯하였다. 바로 이곳이 한·중 간의 깊은 우호를 상징하는 유적인 동묘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동묘는 중국 촉한의 장군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주지하듯이 관우는 촉한의 선주 유비의 결의형제로서 한실 부흥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오의 지장 여몽에게 패사한 후 충의의 화신으로 민간에서 숭배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군신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재신을 겸하게 되어 더욱 광범위하게 숭배되었는데 마침내 중국의 토착종교인 도교에서 관성제군이라는 큰 신격으로 좌정하기에 이르렀다. 관우가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한양·평양이 속속 함락되고 선조가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몽진하여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태세인 위기 상황에서 명의 장군 이여송이 구원병을 이끌고 조선으로 오게 된다. 이여송의 명군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조선을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일거에 전쟁 국면을 전환시켰다. 조선이 명의 파병에 감사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죽하면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라고 까지 표현했겠는가. 물론 명의 파병 의도와 이후 명군의 소극적인 참전 태도 등은 정치적 차원에서 달리 읽을 여지가 있겠으나 당시 아니 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조선과 명의 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선 신뢰와 인정의 차원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강국 청과 패할 것이 뻔한 전쟁을 해서 비극을 초래한 병자호란을 들 수 있다. 여하튼 조선 조야의 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명군이 숭배하는 군신 관우의 사당을 각지에 건립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할 때 관우가 현몽하여 승리의 전술을 계시하였다고도 한다. 동묘는 그때 건립된 여러 사당 중의 하나로 지금까지 존속해온 것이다. 선조 이후 조선 말기까지 관우의 사당인 동묘는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정중하고 융숭하게 관리되어 왔다. 중국의 사신들 역시 내한할 때 이곳을 참배하여 한·중 간의 관계를 음미하며 감회의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한국과 중국이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이곳은 버려졌고 냉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돌보는 이 없이 황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유적이 지닌 본래의 의미조차 망각되어 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돌고 돌아 한국과 중국은 이제 과거의 빈번했던 교류와 밀접했던 정치적· 경제적 협력관계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안타까운 것은 해마다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을 찾아오지만 대부분 관광지와 상가를 배회할 뿐 자신들의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동묘를 방문하는 이는 드물다는 점이다. 더구나 동묘가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해 음미해보는 이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야흐로 한국과 중국의 인터넷 상에서는 이른바 역사전쟁, 문화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의 획책으로 인해 촉발된 역사전쟁, 강릉 단오제에 대한 오해로 인해 야기된 문화전쟁은 모두 상대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동묘가 지녔던 따뜻한 우호의 정신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퇴락한 동묘의 겉모습을 보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내재적 의미를 밝히 드러내고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오늘의 한·중 관계를 신뢰와 우의의 토대 위에 구축하는 역사적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조코비치 ‘벌벌’… 샤라포바 ‘펄펄’

    남녀 프로테니스 코트를 호령하는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와 마리야 샤랴포바(러시아)의 호주오픈 행보가 대조적이다. 조코비치는 20일 멜버른파크에서 열린 대회 남자 단식 4회전에서 스타니슬라스 바브링카(17위·스위스)를 상대로 무려 5시간2분의 접전 끝에 3-2(1-6 7-5 6-4 6<5>-7 12-10)로 겨우 이겼다. 1세트를 내준 조코비치는 2세트에도 게임스코어 2-5까지 몰려 패색이 짙었지만 그 뒤 내리 5게임을 따내며 2세트를 가져와 위기를 넘겼고, 결국 마지막 5세트에서만 1시간44분의 혈투를 벌여 가까스로 8강에 합류했다. 지난해 결승에서 라파엘 나달(스페인)과 무려 5시간53분의 혈투 끝에 힘들게 승리했던 조코비치는 하루를 쉬고 토마시 베르디흐(6위·체코)를 상대해야 하는 일정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약점으로 지적된 약한 체력 탓에 번번이 고비를 넘기지 못한 최근을 되짚어 보면, 대회 목표인 3연패 달성도 낙관할 수 없다. 호주오픈 18연승을 이어간 조코비치는 “바브링카도 승자나 다름이 없다”며 “지난해 결승이 생각날 정도로 힘든 경기였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 샤라포바는 4회전까지 치르면서 상대에게 내준 게임이 5게임뿐이다. 1, 2회전을 내리 2-0(6-0 6-0)의 ‘더블 베이글 스코어’로 이긴 샤라포바는 3회전에서 비너스 윌리엄스(미국)를 2-0(6-1 6-3)으로, 16강전에서는 키르스턴 플립컨스(43위·벨기에)를 2-0(6-1 6-0)으로 제압했다. 4경기를 치르는 데 걸린 시간은 4시간9분. 한 경기에 불과 1시간 2분 남짓을 썼다. 역대 메이저대회 여자 단식 8강까지 오르면서 가장 적게 게임을 내준 선수는 1994년 프랑스오픈 때 마리 피에르스(프랑스)로, 4게임만 내줬다. 그러나 샤라포바는 “사실 지금부터가 고비”라며 “여자 테니스는 흐름이 갑자기 바뀔 수 있어 대회 마지막까지 좋은 흐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세계주니어 랭킹 7위인 정현(17·수원 삼일공고)은 남자 단식 2회전에서 융팍롱(홍콩)을 2-0(6-1 6-4)으로 가볍게 제치고 16강전에 올랐다. 정현은 동갑내기 김덕영(마포고)과 호흡을 맞춘 복식에서도 2회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틀 전 만 14세8개월로 국내 선수 메이저대회 단식 최연소 승리 기록을 갈아치웠던 청각 장애 3급의 이덕희(제천동중)는 크리스티앙 가린(칠레)에게 0-2로 져 탈락했다. 최병규 기자 cbk91065@seoul.co.kr
  • 北, ICBM 자체개발 기술·부품 조달력 보유

    北, ICBM 자체개발 기술·부품 조달력 보유

    북한이 지난달 발사한 장거리 로켓 ‘은하 3호’의 부품이 대부분 북한산으로 드러나면서 정밀도는 떨어져도 최소한 사거리 1만㎞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자체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과 부품 조달 능력은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군 관계자는 21일 “이번 로켓은 1990년대 초반 개발된 노동미사일과 같은 엔진을 사용했다”면서 “용접 등 제작 수준이 조악하고 정밀도는 떨어지지만 수많은 발사 실험을 통해 기술 수준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나로호와 비교하자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의미로 우리는 KTX를 타고 가려 하고 북한은 화물열차를 탄 셈”이라고 비유했다. 군 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은하 3호는 1단 15m, 2단 9.3m, 3단 3.7m와 위성 탑재부 2m로 구성돼 전체 길이가 30m에 이르고 총중량은 91t으로 추정된다. 연료는 스커드·노동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등유의 일종인 케로신에 일부 탄화수소 계열 화합물을 첨가한 혼합물을 사용했다. 특히 군은 북한이 중국과 유럽 등에서 전자기기 센서와 전선 등 부수 장치에 필요한 10개 상용 부품을 수입했으나 엔진 계통의 터보펌프와 연소실, 보조 엔진, 산화제통, 연료통 등 핵심 부품을 자체 제작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북한이 미사일 분야의 협력국인 이란 등 중동 지역에 핵심 부품과 기술을 수출한다는 분석이 힘을 얻게 됐다. 조광래 나로호 발사추진단장은 “온도나 압력센서 등은 국제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물품으로 수입품이냐 국산품이냐가 별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유엔과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사무국에 조사 결과를 통보할 계획이나 상용 부품을 수입한 만큼 MTCR에 저촉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과 부품 수출국들이 북한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와 관련된 금융 거래 전면 차단 등을 포함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를 어겼는지도 관심사다. 은하 3호의 방향 제어 방식이 나로호와 다른 점도 눈길을 끈다. 방향 제어에 사용되는 4개의 3t급 보조 엔진은 상하 36도로 움직이게끔 설계됐다. 군 당국에 따르면 나로호에 사용되는 편향추력방식은 로켓에 탑재된 소프트웨어로 방향 제어를 하고 로켓이 기울면 소프트웨어가 엔진의 노즐 방향을 조정하는 식이다. 조 단장은 “보조 엔진 활용은 소련식 스커드 미사일의 특징으로 연료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지난해 4월 은하 3호 1차 발사 실패 시 문제가 됐던 단 분리 기술도 보완했다. 이번 로켓에서는 2단 추진부와 1단 산화제통·연료통 연결 부위에 각각 가속모터 6개와 역방향으로 작동하는 제동모터 4개를 설치해 단 분리 시 뒷부분과 앞부분의 충돌을 막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사설] 정부조직 개편 부처 로비에 휘둘려선 안 돼

    5년 단위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것이 정부조직개편과 그에 따른 부처 반발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주 정부조직개편안을 공개하자 일부 부처들은 일제히 로비전에 나섰다. 조직과 권한, 인원을 다른 부처로 넘겨주거나 아예 없애야 하는 부처들은 저마다 반대논리를 내세우며 인수위와 정치권을 상대로 설득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장관이 직접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찾아다니는 모습에서는 절박함마저 묻어난다. 정부조직개편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경제부총리 부활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뿐, 그 자체가 경제 회복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조직개편은 당선인의 국정운영 철학이 농축돼 있는, 한정된 자원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통상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하는 방안도 ‘통상외교의 실종’이라고 무조건 손을 내저을 게 아니다. 이제는 통상업무를 외교차원을 넘어 기업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외교와 통상을 분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추세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인수위가 밝힌 조직개편안의 일부 내용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를 계기로 발족한 대통령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를 2년 만에 없애는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을 들을 만하다. 원자력 진흥과 규제를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맡게 되면 원자력 안전관리에 소홀할 소지가 많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 진흥업무를 미래창조과학부로 넘겨 규제와 진흥 기능을 분리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창구가 이원화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방통위와 미래창조과학부에 모두 ‘현안’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등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대 정부조직개편이 정부안대로 처리된 적은 없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1월 임시국회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조정·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통합당은 미래창조과학부 신설, 해양수산부 부활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총리와 경제부총리 역할 구분이 모호한 점, 미래창조과학부의 과도한 권한 등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터다. 정부조직개편안이 부처 이기주의와 공무원들의 밥그릇 지키기 차원의 로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5년 전 정부조직개편 당시에도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히자 인수위 고위관계자는 “역대 정부가 왜 정부조직을 개편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고 말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처의 주장을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정부조직개편안은 국정운영 철학이 없는 ‘빈껍데기’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 [지금&여기] 비참한 사람들(Les Miserables)/최재헌 국제부 기자

    [지금&여기] 비참한 사람들(Les Miserables)/최재헌 국제부 기자

    아버지를 잃고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일곱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은 19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어린 딸 코제트의 병원비가 필요했던 미혼모 판틴은 머리를 자르고 생니를 뽑은 것도 모자라 몸까지 팔았다. 19세기 프랑스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리마다 넘쳤다. 사람들은 왕정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혁명의 노래를 불렀다. 1862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속에서 이들의 영혼은 결국 사랑과 용서로 구원받는다. 21세기 프랑스는 세계 초강대국이 됐지만 나라를 버리는 ‘비참한 사람들’로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프랑스 최고부자인 루이비통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지난해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의 부자 증세를 피해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다. 올 초에는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같은 이유로 러시아 시민권을 획득했다. 국민배우로 사랑받던 그의 도피성 국적 포기에 프랑스인들은 안타까움을 넘어 비난을 쏟아냈다. 서로 다른 시대 프랑스의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150년 전의 ‘그들’은 너무 못살아서, 지금의 ‘그들’은 너무 부자이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롭게도 드파르디외는 프랑스 TV연속극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었다. 드라마 속에서 당대의 비극에 분노하는 장발장 역을 맡았던 그가 마침내 현실에서 뜻을 이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지난 연말 뮤지컬 형식의 영화 레미제라블을 관람하면서 지금의 현실과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불행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라든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서민의 현실 같은 것 말이다. 몇몇 지인들은 대선 직후 허탈감에 빠졌던 심신을 영화로 위안 삼았다고 했다. 물론 영화 속 메시지 가운데 어느 부분에 공감했는지는 관객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2013년 현재도 각 나라의 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으며, 정부에 실망한 99%의 시민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150년 전 위고가 책 머리말에 적은 글귀가 문득 떠오른다.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책들도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goseoul@seoul.co.kr
  • 리훙장은 시대를 만든 영웅? 시대가 만든 영웅!

    19세기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리훙장(李鴻章·1823~1901).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무려 40여년간 실권을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서양 문물을 수용해 중국을 근대화하려다 실패한 양무운동을 이끌었고 외국 열강과의 굴욕적 조약을 잇따라 체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삶 때문인지 당대 중국인들은 물론, 후대는 청일전쟁과 관련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에게 매몰찬 평가로 일관해왔다. ‘외국 열강에 나라를 판 매국노’, 한간(漢奸), ‘부정부패자’…. 역사와 그 역사를 관통한 인물에 대한 후대의 재평가는 어쩔 수 없는 일. 경제 강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에서 최근 양무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재고와 함께 리훙장을 다시 보자는 돌풍이 불고있다. 그 평가는 종전과는 판이하다.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 ‘민족주의 정치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을 견제하려 했던 외교가’…. 굴곡 많았던 그의 삶만큼이나 사후의 인물 평도 극단의 변형을 보여 얄궂다. ‘리훙장 평전’(량치차오 지음,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펴냄)은 최근 중국의 리훙장 재평가 바람에 편승해 출간된 흥미로운 책이다. 후대의 평가가 아닌, 당대를 같이 살았던 인물이 리훙장 사망연도인 1901년 서양식 전기문체로 그의 일생을 기록, 서술한 점이 신선하다. 리훙장보다 50세 연하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당대 숱한 정치 논술을 써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상가이자 혁명가, 문학가로 리훙장과는 많은 견해 차를 보였던 인물이다. “시국에 대한 나의 견해를 숨기지 않음은 이 책이 옛 사람들이 아닌, 후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는 저자가 내린 리훙장 평가는 일단 “시대가 만든 영웅일 뿐, 시대를 만든 영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리훙장의 친구 보다는 오히려 정적에 가까웠던 그가 기록한 리훙장 흔적들은 연민과 두둔에 가깝다. “리훙장이 뛰어난 영웅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어 감히 파격적이지 못했기 때문”“치욕의 자리가 분명한 각종 조약 체결 자리에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간 것은 고생을 피하지 않고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청일전쟁 패배며 외국 열강들과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리훙장 한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망친 다른 중신들의 죄까지 모두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은 요즘 세태에 얹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만8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커버스토리-위기의 활자매체] 영상매체에 밀린 종이책, 우연히 만나는 책의 즐거움을 찾아라

    [커버스토리-위기의 활자매체] 영상매체에 밀린 종이책, 우연히 만나는 책의 즐거움을 찾아라

    “출판은 죽을 수가 없다. 출판은 인간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이나 정보·지식을 발신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수신하고 싶어 하며,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고 본능이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 전화번호부에서 학술서까지 팔방미인처럼 굴었다면, 이제부터 책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남기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은 사라지지 못한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강무성(52) 주간은 17일 ‘출판의 위기, 활자매체의 고사’라는 주제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이 책을 안 읽는다거나, 대한민국 출판계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출판사는 장사해야 한다 치고, 사람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하죠”라는 강력한 반론이 들어오기도 했다. 강 주간은 1985년 출판계에 들어와 지난 28년간 출판계의 성쇠를 경험하고 있다. 1980년대는 소설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폭발적 수요가 뒷받침된 출판의 중흥기였지만, 1990년대 개인컴퓨터(PC) 보급과 2000년대 말 스마트폰의 확산 등으로 출판은 날로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매체의 비약적 성장과 대비한 활자매체의 침체는 몰락으로 표현할 만하다. 고려대 불문과 81학번인 그는 동기들이 대기업에 입사할 때 출판계에 투신했다. 대학 신문기자 출신인 그는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소개하는 전문출판사를 하자’는 홍지웅 대표의 뜻을 반영해 출판사 이름을 순 한글인 ‘열린책들’이라 짓고 로고도 직접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책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기획·교정·교열이란 순수 편집자의 길보다는 서체 개발, 북디자인 등 책의 형태와 모양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출판계에 입문했을 때 ‘초판 1쇄’는 5000권을 의미했다. 대부분 5000권 정도는 소비됐고, 3000권 정도가 손익분기점이었던 만큼, 1쇄를 다 판매한 출판사는 다음 책을 준비할 여유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3000권으로 줄었고,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 이후부터는 2000권으로 줄었다. 요즘 1쇄는 1000권을 찍는 일도 허다하다. 학술서적은 최소 단위인 500부를 찍는다는 것이 이제 비밀도 아니다. 역사전문 출판사로 사랑받는 푸른역사는 최근 레미제라블과 함께 신문에 서평이 많이 소개된 ‘속물교양의 탄생’을 초판 1쇄로 1000권을 찍었고, 2쇄로 500권을 더 찍었다.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는 “요즘 1500부 이상 안 찍는다. 불황도 원인이지만 출판 도매상들이 다 도산해 뿌릴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 주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점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5000부는 찍어야 달라는 서점에 다 넣을 수 있었다. 아마 문방구가 서점을 겸업하는 곳까지 치면 약 1만개가 넘었을 것이다. 출판사의 책이 말초 혈관, 모세혈관까지 들어갔다. 시골 작은 서점에서 책이 팔리지 않더라도 반품되지 않고 그 서점에서 운명을 마치는 일이 허다했다. 현재 출판사가 약 2000개가 된다고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출판사는 500여개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출판연구소에 따르면 전국의 서점은 2011년 1752곳으로 2004년의 2205개와 비교하면 453개(20.5%)가 줄었다. 그는 “서울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걸어갈 때 그 옆으로 줄줄이 서점이 있었는데, 이젠 다 사라지고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정도 살아남은 것 아니냐”고 했다. 1980년대 모세혈관이 팔아주던 만큼 인터넷서점에서 팔아주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인터넷서점을 통해서는 사람들이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는 책’을 바랄 수는 없게 됐다”고 말했다. 서점에서 만나는 우연한 책은 왜 중요할까? “문득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치자.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집 근처에 서점이라도 있으면 둘러보다가 한 권 골라서 나오면 되는데, 서점들이 사라지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인터넷서점에서는 대형 출판사들이 노출하는 광고를 보거나, 검색해서 책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런 수많은 정보는 정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그냥 우연하게 책을 만나야 하는데, 주변에 서점이 없으니 그것이 안 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출판사가 독자를 찾기가 쉬웠다. 책 종류가 적었고, 독자들은 신간이 나오면 주목했다. 활자매체의 힘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1990년에 소설책 ‘빠빠라기’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적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티저광고를 신문사에 냈다. 5단 광고로 폭이 5㎝에 불과한 조인트 광고인데, 광고 세번 만에 대박이 났다. 당시 편집자들은 잘나가는 책이 아니라도 독자의 손에 책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독자를 만날 방법은 훨씬 더 다양해졌지만, 책의 움직임을 통해 독자를 만날 가능성은 훨씬 줄었다. 독자와 출판 편집자의 거리가 너무 멀다. 독서인은 줄었지만 출판사가 그럭저럭 유지되는 이유로 도서관의 꾸준한 증가를 꼽을 수 있다. 2011년 도서관 수는 1만 3320개로 2004년 1만 1793개와 비교하면 1527개(13.4%)가 늘었다. 2011년 도서구입비가 680억원으로 2005년 433억원과 비교하면 247억원(57%)이 증가한 덕분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공공도서관은 도서구입비를 정가의 80%를 보존하도록 규정해 두었다. 출판사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요즘 출판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까지 책의 분류는 ‘소설/비소설’이었다. 교보문고에서도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소설 관련 매대가 넓게 자리 잡았었다. 이제 그 자리를 인문학에 내주고 있다. 2000년대 ‘인문학의 위기’가 논란이 됐지만 인문학은 오히려 유지된다. 강 주간은 “인문·실용서는 폭발적이지 않아도 필요로 하는 인구를 겨냥해 큰 욕심을 내지 않으면 순환되는 구조다. 그런데 ‘인생 그 어딘가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을 서술하는 문학은 경기 위축에 같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문선공들이 납 활자를 찾아서 조판하던 시대에서, 1990년대 오프셋인쇄와 사진식자로 전환됐고, 이제 전자식자로 전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1980년대 하루에 30~40쪽 이상의 조판을 할 수 없던 시절엔 하루 교정지도 30~40장만 보면 됐다. 시간은 느리고 여유롭게 흘렀다. 그러나 30여년 세월 사이에 출판과 관련된 수많은 직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선공, 조판사, 컴퓨터 조판사, 사식 치는 아가씨들 등등. 출판 위기의 시대에 강 주간은 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왜 장담하는가. 그는 “책에 최적화된 콘텐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주선이 달나라에 가는 요즘도 돌과 망치로 못을 박아야 할 때가 있지 않느냐. 석기시대, 철기시대가 아니더라도 어떤 도구는 사라질 수 없는데, 책이 그런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의 손에 들어간 칼은 나무도 베고, 요리도 하고, 사냥도 하고, 뗏목도 만들고, 머리카락과 수염도 자른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 칼의 분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과도, 초밥 칼, 흉기, 부엌칼, 고기칼, 유화나이프 등등. 칼의 기능이 다양화된다고 해서 칼의 소비가 주는 것이 아니듯, 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만, 책의 본질적 기능을 남기도록 노력하고 다양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 전자출판을 위해 독립도 해봤던 강 주간은 이제 본격적인 전자책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직감하고 있다. “조선의 음향기기 시장은 1926년 윤심덕의 음반 ‘사의 찬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음반으로 조선에 겨우 몇 개 있었던 축음기가 몇 천 개로 확산되는 거다. 물론 극작가 김우진과의 정사(情死)라는 스캔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당시 축음기 가격을 현재가로 환산하면 아이폰 가격인데도 조선 식자층은 ‘사의 찬미’라는 음반 한 개 때문에 축음기를 구입했다. ‘사의 찬미’는 1920년대의 킬러 콘텐츠였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전자책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될 콘텐츠가 나오면 사람들은 그 책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종이책은 종이책에 최적화한 콘텐츠로 살아남을 것이다. 출판계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찾고 있다.” 다시 “책을 꼭 읽어야 할까요”로 돌아가 보자.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좋은 책 필요 없다.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된다.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더 문제다. 책은 아무 때나 손에 걸리는 대로 읽어도 된다. 절망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만 읽는 것이 아니다. 아무 관련 없는 책도 몇 줄만 읽다 보면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나 반발 등이 올라오는데, 그렇게 내 안에서 솟아 나오는 그 무엇을 찾는 시간이 소중한 것 아니겠나.”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스페셜올림픽 선수 모두들 존엄성 혁명 일으킨 혁명가”

    “스페셜올림픽 선수 모두들 존엄성 혁명 일으킨 혁명가”

    “몸무게 40㎏도 되지 않는 소녀 역도 선수가 자신의 최고 기록을 들어 올렸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티머시 슈라이버(54) 스페셜올림픽국제기구(SOI) 회장은 17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의 호텔에서 진행된 인터뷰 도중 스페셜올림픽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순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슈라이버 회장은 “얼굴에 환하게 미소를 짓던 그녀는 10㎏ 정도 들었을 뿐이지만 그가 평생 남긴 기록 중에 가장 뛰어났다”며 “그 순간 그는 이 호텔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한 인간이었다”고 돌아봤다. 한 번도 제대로 달려 보지 못한 선수가 10㎞ 달리기를 마치고, 동물 취급을 받던 어린이가 축구 선수로 거듭난 사례 등 여러 일화를 소개하면서 슈라이버 회장은 “스페셜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선수가 자신의 존엄성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세상의 편견을 떨치고 나와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 모두가 혁명가란 것이다. 그는 “무기와 힘으로 정부를 뒤엎거나 법과 제도를 혁신시키는 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쉬운 일일 수 있다”며 “마음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선수뿐 아니라 대회를 지켜본 모든 이의 마음에 ‘존엄성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대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덧붙였다. 슈라이버 회장은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다시 쳐다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며 “그런 변화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존엄성의 혁명’”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스페셜올림픽을 계기로 이런 혁명이 일어나길 꿈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는 29일 개막하는 평창 스페셜올림픽 대회에 대해서 그는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시설이 완벽한 평창에서 선수들이 뛴다는 것이 기대된다”면서도 아직 우리 국민들이 대회를 잘 알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했다. 아테네 연합뉴스
  • [DB를 열다] 1968년 폭파 직전 공중에서 본 밤섬/손성진 국장

    [DB를 열다] 1968년 폭파 직전 공중에서 본 밤섬/손성진 국장

    길쭉하게 두 개의 섬이 잇대어 있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1968년 2월 10일 폭파 직전의 밤섬 모습이다. 밤의 형상을 한 밤섬은 한자로 율도(栗島)로 표기되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왜 밤섬인지 알 수 있다. 밤섬과 여의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섬 사이에는 모래톱이 있어 물이 불으면 잠기고 빠지면 드러났다. 역사서에 밤섬은 ‘가산’(駕山), ‘율주’(栗州)라고도 쓰여 있다. 사진 속에 집이 보이듯이 밤섬은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고려 때는 귀양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업자들이 살았다. 또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쳤으며 약초도 심고 염소를 방목했다. 여의도에 윤중제를 만들어 개발하는 과정에서 밤섬은 폭파된다. 그때까지 밤섬에는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폭파 전 강 건너 창천동으로 이주했다. 주민들은 2년에 한 번씩 고향 밤섬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김현옥 시장이 폭파 단추를 눌렀다. 밤섬을 폭파하게 된 것은 여의도에 제방을 만듦에 따라 한강물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다음으로는 폭파 부산물인 돌을 제방공사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의도와 밤섬은 현재와 같이 500m 이상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폭파 공사로 밤섬은 중심부가 파헤쳐지고 9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졌다. 밤섬은 그 뒤 30여년 동안 형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상류 쪽 작은 섬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점차 커져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밤섬에서 한강 너머로 당인리 발전소가 보인다. 지금은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인리는 예전에 당나라 사람(唐人)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인리 발전소는 1930년 11월 1호기(1만kW)를 준공하여 발전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병합발전을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석탄을 연료로 썼지만, 지금은 매연을 줄이고자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발전소는 주변이 개발되면서 혐오시설이 되었고 지하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영화 닮아서 식상하다? 스크린 속 ‘광해’는 잊어 주세요”

    “영화 닮아서 식상하다? 스크린 속 ‘광해’는 잊어 주세요”

    “윤대는 세 마디만 하면 된다. ‘들라 하라’, ‘다음’, ‘경의 뜻대로 하시오.’ 해 보아라.” 굵은 목소리로 허균(박호산·김대종)이 말한다. “경…경의 뜻….” 안절부절못하는 하선(배수빈·김도현)이 연방 더듬대자 호통이 따른다. “낮고 근엄하게!” 이래저래 읊조려 보지만 허균 일행에게는 만족스럽지 않다. 안 될 일이라는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 위엄과 호방함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광대 하선이 조선의 15대 왕 광해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서울 종로에 있는 한 극장에서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 연습이 한창이다. 트레이닝 바지, 면 티셔츠 등 차림은 제각각이지만 배우들의 말투와 행동으로 연습실은 조선 궁궐이 됐다. 광해(하선)와 허균, 조내관(손종학), 박충서(황만익), 중전(임화영) 등 출연진은 ‘배역의 옷’을 갈아입고 움직임을 맞추고 있었다. 16일 연습실에서 만난 배수빈(37)은 저지 소재의 편한 검은색 트레이닝 복장이었지만, 수염을 길러 ‘사극용 모양새’를 갖추고 광해와 그의 닮은꼴 하선을 오갔다. ‘광해’는 이미 영화로 관객 1200만명을 모은 흥행작이고 소설도 만만치 않게 관심이 쏠렸다. 두 영역의 작품들과 비교된다는 부담이 클 터. 또한 “왜 또 광해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은 상상력을 자극할 여지가 훨씬 많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사실적인 연기를 하고 있지만, 인물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여지가 더 크죠. 영화는 감독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지만 연극은 관객 스스로 자신의 시선과 편집해서 보고 싶은 점을 찾을 수 있거든요. 그게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고, 연극 ‘광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명쾌하게 대답한 배수빈이 설명을 이어갔다. “눈앞에서 배우들이 땀 흘리고 울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성을 느끼는 건 공연에서만 가능합니다. 설사 내용이 같아도 무대를 통해서 나왔을 때는 또 다른 의미로 전달되겠죠.” 영화와 TV드라마에서 많이 알려졌지만, 연극 경험은 ‘다리퐁 모단걸’(2007)과 ‘이상 12월 12일’(2010)뿐인 그가 ‘광해’를 선택한 것은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잘 만들어진 연극 작품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싶은지와 배우로서 실험 가능성을 많이 고려해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라는 그는 ‘광해’에 대해 “어떤 사람이 권력을 잡아야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에 확실한 방점이 찍혀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게 파고들지만은 않는다는 게 또 연극 ‘광해’의 미덕이다. 실제로 자유로운 광대 하선이 갑갑한 궁중 생활에 몸이 뒤틀려 툭툭 내뱉는 음담패설이나 궁중의 격식에 아연실색하는 장면 등 키득 댈만한 부분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 신사복이 잘 어울리는 ‘실장님’ 연기를 많이 했던 그에게 ‘하류인생’ 하선도 꽤나 잘 어울린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대단히 비장하거나 무게를 잡는 작품이 아닙니다. 즐겁고 재치 있는 장면이 많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서 보시면 되죠. 물론 의미나 감동이 웃음에 가려지는 일 없이 잘 전달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인터뷰는 두 가지 의문을 풀지는 못했다. 광해와 하선이 1인 2역인데, 둘이 만나는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또 하나.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 영화는 비교적 해피엔딩이고, 소설은 광해가 광기를 드러내면서 하선의 죽음을 암시했다. “정말 말해 줄 수 없다”는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답을 던졌다. “무엇을 생각하든 놀라게 될 겁니다. 직접 와서 확인하셔야죠.”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 2월 23일~4월 2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3만 5000~5만원. (02)3014-2118.
  • 뉴욕 ‘메트오페라’ 감동 그대로…

    뉴욕 ‘메트오페라’ 감동 그대로…

    오페라 팬이라면 한 번쯤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보고 싶을 터. 지갑 사정도, 시간도 여의치 않은 게 문제다. 아쉬운 대로 서울 삼성동 베어홀에서 메트오페라의 2012~13시즌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20일과 27일, 첫 작품으로 도니제티(1797~1848)의 오페라부파(희가극) ‘사랑의 묘약’ 을 볼 수 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목소리로 익숙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시골 농장주의 딸 아디나와 그녀를 사랑하는 농사꾼 네모리노, 하사관 벨코레의 삼각관계에 엉터리 사랑의 묘약을 파는 약장수 둘카마라가 얽힌 경쾌한 희극이다. 테너 매튜 폴렌자니가 네모리노 역을,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 안나 네트렙코가 여주인공 아디나를 맡았다. 이 밖에 마우리시 크비에치엔이 벨코레 역을, 엠브로지오 마에스트리가 둘카마라 박사 역을 맡았다. 이번 시즌 메트오페라에는 탄생 200주년을 맞은 베르디의 작품이 유독 많다. ‘오텔로’(2월 2, 17, 24일)를 시작으로 ‘가면무도회’(5월), ‘아이다’(6월), 리골레토(9월)가 이어진다. 한국인 베이스 연광철이 데보라 보이트, 수전 그레이엄과 함께 출연하는 베를리오즈의 ‘트로이사람들’(7월)도 눈길을 끈다. 이 밖에 아데스의 ‘템페스트’(3월), 모차르트의 ‘티토황제의 자비’(4월), 도니제티의 ‘마리아스투아르다’(8월), 바그너의 ‘파르지팔’(10월), 잔도네이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1월),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12월)가 대기한다. ‘트로이사람들’과 ‘파르지팔’, ‘줄리오 체사레’는 전막 상영한다. 나머지는 장일범·유정우·유형종·황지원씨의 해설과 함께 1시간 30분 정도 하이라이트를 보게 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한국 철도역사 첫 여성 서울역장 김양숙 씨

    [김문이 만난 사람] 한국 철도역사 첫 여성 서울역장 김양숙 씨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린다. 무작정 산골의 조용한 곳을 향해 기차를 타고 떠나 본다. 기다리는 이 없어도 그곳에 가면 누군가 꼭 반갑게 마중 나올 것만 같다.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기대와 설렘은 내리는 함박눈과 함께 더욱 쌓여만 간다. 그곳에는 예쁜 눈사람이 있을 것 같고, 앙증맞은 인형을 든 귀여운 소녀가 있을 것만 같다. 이런 날 영화 한 편을 떠올린다. ‘철도원’(후루하타 야스오 감독, 오토마쓰 주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2월 설연휴를 앞두고 개봉됐다. 철도원 오토마쓰는 아무리 눈이 내려도, 아무리 이용객이 없어도 오로지 성실 하나로 살아간다. 여느 때처럼 새해 아침이다. 역에 쌓인 눈을 치우던 오토마쓰, 그 앞에 인형을 든 낯선 여자아이가 찾아오면서 고독하고 외로운 철도원의 인생은 놀랍게 전환된다. 누구나 철도 여행에 대한 추억이 있을 터. 그렇다면 철도원을 얘기할 때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될까. 여러 가지 이미지로 다가오겠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진다. 설날 연휴에는 더욱 그러하겠다. 우리는 그리운 고향으로 가지만 철도원들은 그러지 못하니 말이다. 철도인 인생 25년 김양숙(45) 서울역장. 그는 철도가 생긴 이후 113년 만에 첫 여성 서울역장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여성으로서 최초라는 수식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최대의 중앙역인 서울역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역은 하루 이용객이 30만명이 넘는다. 외국인만 해도 하루 3000여명이다. 이쯤 되면 국제적인 기차역인 셈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만 100여명인 데다 연간 코레일 수입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서울역장은 전국 역장 중 가장 중요한 자리로 여긴다. 9급 철도공무원에서 출발해 25년 만에 1급 서울역장이 되기까지 그의 철도인 인생은 어떠했을까. 또 그가 부임한 이후 서울역은 어떻게 변모해 가고 있을까. 지난 10일 오후 서울역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수더분한 모습에 인터뷰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며 웃는다. 자리에 앉으면서 서울역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쯤 됐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벌써 그렇게 됐네요”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요즘 어떤 일로 바쁜지 먼저 물었다. “알다시피 서울역은 한국의 대표 역입니다. 외국인도 많아 국경의 역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그 위상을 활기차게 업그레이드시켜야 합니다.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한국적인 역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지요” 물론 그동안 많은 서울역장들이 거쳐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겠지만 신임 김 역장은 여성으로서의 다부진 의욕이 간단치 않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서울역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물었다. “디자인이 한국적으로 달라집니다. 현대적 세련미와 한국적 전통의 모습이 함께 잘 조화된 모습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서울역은 외국인들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국적인 느낌을 주려고 합니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서울역이 참 인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문화와 예술이 함께 펼쳐지는 상설공연 무대, 고객들을 위한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김 역장은 외부 디자인 전문가에게 의뢰해 구체적인 그림을 완성했으며 올 상반기에 달라진 서울역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서울역 재창조 작업에 역점을 두는 것은 공항철도와 연계되면서 서울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관문이 됐고 이에 따라 서비스의 품격도 성숙해져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문화와 디자인이 있는 서울역을 표방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져서인지 벌써 재즈협회 등 몇몇 예술단체에서 공연을 하겠다는 문의가 온다고 귀띔했다. 그는 2011년 5월 문화홍보처장을 맡았을 때부터 춘천역 재건설 계획에 합류해 디자인 공모 등을 통해 새로운 춘천역 탄생에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역 매장과 주변 광고물을 재정비하고 천편일률적인 역사 대합실에 색다른 변화를 주어 이용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이끌어 냈다. 또한 ‘제1회 철도문화체험전’을 성황리에 개최한 것도 김 역장의 작품이었다. 이어 서울역장 부임 두 달 동안의 소감을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외부 귀빈(VIP)들이 이곳을 많이 이용하더군요. 때마침 대선 기간이어서 대선 후보들도 여러 번 왔습니다. 직원들은 물론 서울역을 이용하는 고객들과 자주 만나 대화도 했고 많이 바빴습니다. 지난 1일에는 직원들과 함께 서울역 2층 대합실에서 고객들에게 무료로 커피, 녹차, 생강차 등을 대접했습니다. 평창 스페셜올림픽 홍보 전단지도 나눠 드렸지요. 감동 있는 서비스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누구나 서울역장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오로지 열심히 할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울역장이 됐을까. 이 질문에 “누구나 자기 조직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굳이 말한다면 성실과 열심으로 일해 온 것이 쌓여 인정을 받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혜택받을 일도 없고 또한 어떤 거창한 능력이 있어서 서울역장이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철도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전남 고흥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한다. 발령지는 철도청 소속 순천기관차 사무소였다. 당시 김 역장을 제외하곤 직원 300명이 전부 남자였다. 또한 기차를 움직이는 기관사나 철도를 관리하는 현장직 업무여서 노동강도 또한 셌다. 김 역장은 그들과 함께 성실하게 일을 해 나가면서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근무여건이 달랐던 점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꼼꼼하게 일을 챙겼다. 좀 힘들긴 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11년 동안 기관차 사무소에서 일했다. 1998년 9월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직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평소 몸에 밴 ‘성실철학’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여러번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기회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나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나섰던 것. ‘여자라서’ 또는 ‘직급이 낮아서’라는 생각은 떠올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일을 해 나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나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해 본 적은 별로 없어요.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불평 없이 일을 했습니다. 제가 인정받았다면 아마 그런 근무 열정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2001년 지방청에서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본사로 근무지를 이전한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주변의 좋은 평가가 한몫했다. 2007년 서대전역장이 된 것도 그의 성실성 덕분이었다. 서대전역장 시절 전단지를 직접 들고 열차 관광지 홍보에 앞장선 일화는 지금도 코레일 내부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때 여행상품을 3개나 기획해 판매에 성공했다. 당시를 떠올린 그는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인사노무실 노경지원처장, 홍보문화실 문화홍보처장 등 본사 발령 당시 6급에서 1급으로 승승장구했다. 서울역장에 발탁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서울역장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인 만큼 수익 증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여행상품 얘기를 꺼낸다.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KTX처럼 빨리 가는 열차를 좋아하지만 요즘 주말에는 느림을 즐기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와인시네마 열차, 숙식이 가능한 관광열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요. 얼마 후 선보일 중부내륙권, 남도해양권 순환 관광열차는 철도여행에 새로운 문화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많이 홍보해 주세요(웃음).”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남편도 공무원이다. 그가 회사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과 도움에서 비롯됐다. 아무런 불평 없이 성장해 준 아이들, 또 집안일을 거들어 준 고마운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쁜 와중에도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영화 ‘철도원’을 봤느냐고 물었더니 “주인공이 무척 성실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대답한다. “자랑스럽고 성실한 철도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며 웃는 그를 보니 전국의 철도역 대부분을 다녀왔다는 기찻길 인생의 발자취가 잠시 그려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양숙 서울역장은 196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순천여고를 졸업한 뒤 재수 준비 도중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철도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철도청 순천기관차사무소 사무원(1987년),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과원(1998),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매각계장(1999), 조달본부 물자관리과 과원(2001), 전략기획실 평가2팀장(2004), 철도공사 경영혁신실 경영혁신부장(2005), 대전충남본부 서대전역장(2007), 인사노무실 노경지원처장(2010), 홍보문화실 문화홍보처장(2012) 등을 거쳐 지난해 11월 서울본부 서울역장에 부임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으며 남편도 공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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