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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미러 정상회담 저자세 비판에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것” 해명

    트럼프, 미러 정상회담 저자세 비판에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것” 해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이를 비난하는 미국 내 여론이 거세다.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개입을 놓고 푸틴 대통령 면전에서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진보, 보수를 떠나 비판이 나오자, 미·러 관계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핀란드 헬싱키에서 미·러 정상회담을 한 후 미국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트윗을 올려 “오늘 그리고 전에도 여러 번 말했듯이 내 정보기관 사람들에게 대단한 신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정보 당국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 것은 이날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개입한 게) 아니라고 했다. 러시아는 그렇게(개입) 할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이는 이미 러시아의 대선개입 결론을 내린 미 정보당국보다 푸틴 대통령을 더 신뢰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볼수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 트럼프 대통령은 “하지만 더 밝은 미래를 만들려면 과거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며 “우리는 세계 최고의 두 핵 강국으로서 서로 잘 지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내 여론은 푸틴 대통령에게 저자제로 일관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집중 포화를 가하고 있다.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 편에서 미국 정보당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양국 정상이 러시아의 대선개입 의혹을 함께 부인하는 놀라운 광경이었다”고 지적했다. CNN 앵커 앤더슨 쿠퍼는 현지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 가운데 하나를 지켜보셨다”고 말했다.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선거개입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민주-공화 양당으로부터 강한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트윗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헬싱키 기자회견은 ‘중범죄와 비행’의 문턱을 넘어섰다”면서 “반역적인 것과 다름없다”고 밝혔다. 보수매체도 가세했다. 폭스비즈니스 진행자인 네일 카부토는 “유감스럽지만 제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의 가장 큰 적, 상대국, 경쟁자에게 최소한의 가벼운 비판조차 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폭스뉴스 패널 가이 벤슨은 “쉽게 말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최악의 하루”라고 촌평했다. 이런 가운데 미 민주당은 이와 관련, 대러 제재 강화와 백악관 안보팀 청문회 출석 등을 주장했다. 민주당의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이날 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미·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보다 러시아의 이익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하면서 이같이 요구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美, 대두 수출 첫 하향 조정… ‘트럼프 표밭’ 흔들

    미국 정부가 공화당 표밭의 대표적 품목인 대두 수출 전망을 처음으로 하향 조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무역정책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되레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미 농무부는 지난 12일 발표한 월간 전망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올해(2018년 9월~2019년 8월) 대두 수입량을 1억 300만t에서 9500만t으로 낮췄다. 이에 따라 미국 대두 수출량은 6230만t에서 5550만t으로 11%가량 감소할 전망이다. 미국이 앞서 중국산 제품 340억 달러(약 38조 4000억원) 규모에 25%의 관세를 매기자 중국은 미국산 대두, 면화 등의 제품에 25%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며 맞대응했다. 미 대두수출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미국산 대두에 대한 관세는 13%에서 38%로 높아졌다. 대두는 미국이 중국으로 수출하는 농산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미국 대두의 주요 생산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통적인 표밭이다. 미·중 관세폭탄 주고받기가 예고됐던 터라 관세 발효일인 6일 이전부터 교역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식량비축관리그룹공사는 지난 4월부터 미국산 대두의 수입을 중단했고 지난달 61만 5000t의 미국산 대두의 주문을 취소했다고 인민일보가 전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보잉사는 관세가 공급망 관리 비용에 미칠 여파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데니스 뮬런버그 보잉 최고경영자(CEO)는 15일 “관세에 따른 중대한 여파가 아직 관찰되지 않았다”면서도 “중국은 수송력을 강화할 항공기가 필요하고 미국은 수천개의 수출 일자리를 항공기 분야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고용 쇼크·성장률 후퇴… 불안한 경제

    고용 쇼크·성장률 후퇴… 불안한 경제

    성장률 전망도 3.0→2.9% 하향 미·중 무역전쟁, 수출·투자 악재 김동연 “고용지표 구조적 부진” 또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론’한국은행은 올해 취업자 수가 18만명 증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1년 전 전망(35만명)과 비교할 때 반 토막 수준으로 떨어졌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도 기존 3.0%에서 2.9%로 끌어내렸다.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 호조라는 훈풍 대신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역풍에 직면한 영향으로 해석된다. 한은은 12일 발표한 ‘2018년 하반기 경제 전망’에서 올해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18만명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7월 전망 당시 예상한 35만명에서 지난 1월 30만명, 4월 26만명에 이어 1년 사이 15만명이나 낮춰 잡았다. 20만~30만명대를 오르내리던 취업자 수 증가 폭은 지난 2월부터 5개월 연속 10만명 안팎으로 급락했다. 고용 절벽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추세적으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경제현안간담회에서 “고용지표 부진은 국민 삶과 직결된 만큼 우리 경제에서 매우 아픈 부분”이라면서 “구조적 요인과 결부돼 있어서 단기간에 개선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부총리는 또 최근 고용 부진과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 관계에 대해 “일부 업종과 연령층의 고용 부진에는 최저임금 인상 영향이 있다”면서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시한을 하루 앞두고 속도 조절의 필요성을 거론했다.한은은 또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을 기존 3.0%에서 2.9%로, 내년 전망은 2.9%에서 2.8%로 각각 0.1% 포인트씩 내렸다. 한은의 올해 성장률 전망이 2%대로 떨어진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미·중 무역갈등이 수출과 투자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봤다. 한은은 지난 4월 3.6%로 예상했던 상품수출 증가율을 이번에는 3.5%로, 2.9%로 제시했던 설비투자 증가율은 1.2%로 각각 낮췄다. 한은은 이날 이 총재 주재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현행 연 1.50%로 유지했다. 이로써 기준금리는 지난해 11월 인상 이후 다섯 차례 연속 동결됐다. 서울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세종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포토인사이트] 자유한국당, 14년 전…

    [포토인사이트] 자유한국당, 14년 전…

    자유한국당은 11일 오후 당사를 기존 여의도 한양빌딩에서 여의도를 벗어난 우성빌딩으로 옮겼다. 왼쪽부터 함진규 정책위의장, 안상수 비대위준비위위원장, 김성태 대표권한대행 윤재옥 수석부대표. 아래 사진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 당사에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모습이다. 2018.7.11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버블티는 어떻게 마시지?…대만, 내년 7월부터 일회용 빨대 금지

    버블티는 어떻게 마시지?…대만, 내년 7월부터 일회용 빨대 금지

    대만 정부가 내년 7월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금지하는 강력한 환경 규제 정책을 발표하면서 대만의 국민음료인 버블티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올해 1월 1일부터 비닐봉지 무상 제공을 금지시킨 대만 정부는 2030년부터는 요식업계에서 일회용 빨대와 수저, 컵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내년 7월부터는 정부기관과 학교, 병원, 백화점, 쇼핑몰의 식당과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는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 제공이 금지된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해양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돼 왔다. 특히 지난 2015년 코스타리카 연안에서 바다거북가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가 끼어 괴로워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전세계적으로 경각심이 일었다.미국 시애틀은 지난 1일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 250달러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연 30억개의 일회용 빨대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 사람들은 일회용컵에 음료를 담은 뒤 비닐로 입구를 밀봉하고, 끝이 뾰족한 빨대로 구멍을 낸 다음 음료를 마시는데 익숙하다. 특히 버블티처럼 구(球) 모양의 타피오카 펄이 음료 안에 가라앉아 있는 마실거리는 굵은 빨대를 꽂아 빨아들이며 마신다. 일회용 빨대가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음료 업계에서는 빨대 대용품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종이빨대, 대나무빨대 등이 대용품으로 거론되지만 이런 제품은 대부분 소매용으로 판매되며 플라스틱 빨대 가격의 5배 이상이다.종이빨대는 물에 쉽게 젖고 타피오카 펄이 빨대 표면에 달라붙어 잘 따라올라오지 않는 게 문제다. 대만에서는 사용자가 재사용할 수 있는 빨대를 휴대할 수 있도록 파우치와 함께 판매하는 사업자도 생겨났다. 스테인리스는 내구성이 강하지만 쉽게 뜨거워지고 어린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다칠 위험이 크다. 유리 빨대는 깨지기가 쉽고 대나무 빨대는 가볍지만 습기와 곰팡이에 약한 것이 문제다. 실리콘 빨대는 안전하고 휴대하기도 편리하지만 버블티 비닐을 뚫기에는 강도가 약하다. 대만의 한 환경운동가는 빨대 대신 숟가락으로 떠먹으라는 대안을 제시했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美 고사작전에… 이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일촉즉발

    美 고사작전에… 이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일촉즉발

    이란산 원유 수출 봉쇄 조치에 나선 미국에 대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초강경 대응을 시사하면서 양측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이스마일 코사리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4일(현지시간)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막으면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어떤 원유 선적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란 뉴스 통신사 ‘영저널리스트클럽’(YJC)을 통해 공언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해상 통로로 가장 좁은 곳의 폭이 50㎞에 불과하다. 이란이 마음만 먹으면 봉쇄할 수 있는 영역으로, 실제 무력시위에 나서면 국제 원유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도 클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30% 규모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중동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이라크의 수출길이다. ●이란 내 반미 감정·수뇌부 책임론까지 이란은 2012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 국면으로 갈등이 커질 때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했지만 실행한 적은 없다. 미국과 역내 앙숙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군사 행동에 나서는 역풍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란의 으름장으로 끝날지는 지켜봐야 한다.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파기로 이란 내 반미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데다, 이란 수뇌부의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먼저 해협 봉쇄 의사를 내비친 건 이 같은 제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로하니 대통령은 지난 2일 스위스에서 “미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완전히 차단하겠다고 한다. 중동의 다른 산유국은 원유를 수출하는 동안 이란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막으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차하면 호르무즈 해협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봉쇄 위기를 가중시키면서 국제 유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중인 것으로 보인다. 로하니 대통령과 정치적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혁명수비대 정예군인 쿠드스군의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그런 시의적절하고 현명한 말을 하다니 로하니 대통령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다”면서 “이란에 충성하는 어떤 정책이라도 즉시 실행할 준비가 됐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미국은 모든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자유롭게 통행할 권리를 보장할 것이라는 성명을 즉각 발표했다. 미 중부사령부 대변인 빌 어반 대위는 이날 “미 해군과 지역 동맹국들은 국제법이 허락하는 곳에서 항해와 무역의 자유를 담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만약의 경우 바레인에 주둔한 해군 제5함대가 개입할 수 있다. 국지적이라도 미국과 이란 간 물리적 충돌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美 해군 함대 개입 가능성도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핵합의를 파기하고 이란산 원유 수출을 ‘제로’로 줄이는 대이란 제재 복원에 착수했다.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오는 11월 4일까지 이란산 원유를 전면 수입 금지하는 조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역시 이란산 원유 금수를 거부한 국가에 대한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 등의 으름장을 놓고 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동네 태권도학원 모함했다가…‘맘충’으로 조리돌림

    동네 태권도학원 모함했다가…‘맘충’으로 조리돌림

    경기 광주 지역 엄마들의 인터넷카페에서 한 회원이 동네 태권도학원을 모함했다가 되려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여성은 태권도학원 원장이 아이들을 태운 차량을 난폭하게 운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화가 난다는 글을 맘카페에 올렸지만, 원장이 당시 장면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반박글을 올리자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 소동은 이른바 ‘맘충’(엄마들을 비하하는 속어) 사건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널리 알려졌다. 여성이 다니는 회사 이름과 주소까지 공개돼 홈페이지에 비난글이 속출하는 등 역풍이 거세다. A씨는 지난 3일 경기 광주 맘카페에 ‘학원 어린이차량 난폭운전에 화가 난다’는 글을 올렸다.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A씨는 “회사에 큰 화물차가 못 들어와서 회사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싣고 있는데 노란색 어린이 차량이 계속 경적을 울리더니 질주해서 화물차 앞까지 달려왔다”고 주장했다.A씨는 “차량에는 5세에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10명 넘는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며 차량을 운전한 학원 원장 B씨와 말다툼을 벌인 이야기를 적었다. A씨는 “B씨가 먼저 길 막은 사람이 누군데 화를 냈다”면서 “2~3분 기다리는 순간에도 화가 나서 애들 태우고 저러는데 다른 일엔 얼마나 더 심할까”라고 주장했다. 이 글에는 어느 학원인지 알려달라는 댓글이 이어졌고, A씨는 쪽지를 통해 학원명을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B씨가 카페에 반박글을 올리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B씨는 4일 해당 카페에 ‘학원 어린이차량 난폭운전에 대한 진실을 말씀드린다’며 차량 블랙박스 동영상을 공개했다. 학원의 이름과 자신의 실명을 밝힌 B씨는 “학부형의 확인 전화로 카페에 글이 올려진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동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난폭운전은 전혀 없었고 경적을 울린 이유는 좁은 도로에 큰 차량이 통행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B씨는 아이들은 체육관 뿐만 아니라 여러 스케줄이 있는데 A씨가 다니는 회사의 화물차가 길을 가로막아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그럼에도 승강이를 벌인 것은 반성하겠다고 밝혔다. B씨는 A씨가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훼손을 했다며 법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뜻도 내비쳤다. 이에 카페 회원들은 “역시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영상을 확인한 A씨도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A씨는 “공개적으로 사과드린다. 제 눈에는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껴 원장님과 다툼이 있었는데 느끼기 차이인 것 같다”면서 “짧은 생각으로 원장님과 모든 부모님께 걱정과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적었다. 사태는 그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자동차 커뮤니티인 보배드림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동영상과 글이 퍼지면서 A씨에 대한 비난 여론으로 이어졌다. A씨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까지 공개되면서 홈페이지 문의게시판에 비방글로 도배됐고, 회사 측은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그러자 일부 네티즌은 포털사이트 지도 서비스의 후기 게시판에 A씨와 회사를 비방하는 글을 올리고 있다. 감정이 상해 온라인 공간에서 B씨를 몰아간 A씨의 잘못은 분명하지만, A씨를 ‘맘충’으로 모욕하고 A씨가 다니는 회사에까지 피해를 주는 것 역시 이성적인 태도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트럼프 ‘反이민 무관용’에 반기… 美도, 국제사회도 뿔났다

    트럼프 ‘反이민 무관용’에 반기… 美도, 국제사회도 뿔났다

    美 이민세관단속국 직원들은 “조직 해체해 달라” 장관에 서한 국제사회의 트럼프 반감 노골화 IOM사무총장 선거 美후보 낙마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여론에 떠밀려 불법이민자 부모와 미성년 자녀를 격리 수용하는 정책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불법이민자 무관용 정책’에 대한 역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미 전역에서 격리 가족들의 즉각적 재회를 촉구하는 시민 집회는 물론 불법이민자 단속 전담 기관 내부에서 조직을 해체해 달라는 청원이 등장했고,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이 독식해 온 이민자 관련 기구 수장직을 뺏겼다. CNN 등 미 언론들은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댈러스 등 미국 전역 750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참여한 대규모 이민정책 항의 시위를 일제히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불법입국자 가족에 대해 부모와 아이를 격리 수용하는 정책을 중단하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지만 이미 격리된 부모와 아이가 다시 결합하는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에는 2000여명의 아이들이 집단 구금시설이나 위탁 보호시설에 수용된 채 부모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 집회 참석자 수십만명은 각 도시에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Families Belong Together)고 적힌 피켓을 들고 강제로 분리된 불법이민자 가족들의 즉각적 재회를 요구하고 무관용 정책의 전면 중단을 촉구했다.NBC는 뉴욕에서만 약 3만명이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며 “이민자들이 이 다리를 건설했다”고 외쳤다고 전했다. 워싱턴DC에서도 시위대 3만여명이 백악관 인근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부끄러운 줄 알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메인주 포틀랜드에서는 집회 규모가 커지면서 주요 거리가 폐쇄됐고 불법이민자 자녀들이 격리된 수용소 인근의 텍사스주 매캘런 국경경비대 시설 앞에도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이번 집회는 영국 런던, 독일 뮌헨과 함부르크, 프랑스 파리 등 해외 대도시에서도 함께 열렸다. 이날 시위에는 엘리자베스 워런, 벤 카딘, 에드 마키 상원의원과 조 케네디 3세, 프라밀라 자야팔 하원의원 등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과 가수 얼리샤 키스, 여배우 아메리카 페레라 등 아티스트들도 대거 참여했다. 앞서 진보 성향의 여배우 수전 서랜던은 지난달 28일 워싱턴DC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항거하고자 열린 ‘여성 불복종’ 집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됐다. 연방 이민세관단속국(ICE) 직원들 일부가 “조직을 해체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상급 기관인 국토안보부의 키어스천 닐슨 장관에게 보낸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ICE 조사관 19명이 연대 서명해 닐슨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ICE를 해체하고 우리 임무를 다른 부처에 귀속시켜 달라”는 요구 사항이 담겨 있다. ICE는 불법이민자 단속 외에도 인신매매 단속, 마약 거래, 사이버 범죄 대응 등도 맡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대대적인 불법이민자 단속으로 다른 업무에 집중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인신매매·마약 거래 등을 단속하는 제2의 기구를 창설하고 불법이민자 단속과 구금, 추방은 별도의 조직에서 관장하도록 기능을 분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앞서 마크 포칸 민주당 하원의원 등은 2003년에 창설된 ICE가 다른 기관들과 업무가 중복되고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 남용의 도구가 되고 있다며 지난주 ICE 해체 입법안을 제출했다.국제사회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반감이 노골화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제이주기구(IOM) 사무총장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밀었던 미국 후보인 켄 아이작스가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한 채 탈락했다. 새 사무총장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안토니우 비토리노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이 선출됐다. 이주자 보호와 권리 증진을 추구하는 국제기구인 IOM은 1951년 설립 후 단 한 차례(1961~1969년)를 빼고는 미국인이 사무총장을 맡는 게 관례였다. IOM에 가장 많은 예산을 지원하는 국가가 미국이기도 했지만 ‘이민자의 나라’라는 역사적 상징성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주제네바대표부 대사를 지낸 케이스 하퍼는 트위터에 “미국의 힘과 권위, 명망이 소멸되는 또 하나의 징조”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기업인 만난 민주당, 연이틀 “탄력근로 3→6개월 검토”

    기업인 만난 민주당, 연이틀 “탄력근로 3→6개월 검토”

    홍영표 “규제개혁·입법 전력” 재계 “사전규제 보다 사후규제” 경제지표에 위기감 ‘민생 집중’ 한국노총 등 노동계 달래기도더불어민주당이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의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방안을 연이틀 강조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28일 대한상공회의소와 정책간담회를 갖고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규제 문제 등을 논의했다. 간담회 후 박재근 대한상의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탄력근무제와 관련해 기업의 어려움을 알고 있고 단위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홍 원내대표는 전날 중견기업 최고경영자 조찬 강연에서도 “적어도 3개월로 돼 있는 것을 6개월 정도로 하는 탄력근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경미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홍 원내대표가 6개월로 늘리겠다고 확정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라며 “여전히 보완책을 고려하고 의견을 모으겠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홍 원내대표는 “과감한 규제 개혁에 당이 앞장서도록 하겠다”며 “산업과 신기술 분야에서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고 우리 당이 국회에 제출한 규제 혁신 5법도 조속히 입법화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태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정치권이 이렇게 속도가 빨라졌나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원내대변인은 “경제적인 상황이 전시에 버금가는 위기이기 때문에 속도감을 느끼게 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의는 이날 간담회에서 사전 규제를 줄이고 사후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의 규제 개혁 등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홍 원내대표는 “기획재정부에 내년 재정 확대를 요청하겠다. 재계도 협조를 부탁한다”고 답했다. 민주당은 26일 부산·울산·경남 시·도지사 당선자들과의 정책간담회를 시작으로 27일 한국노총과 정책 협의를 가진 데 이어 이날 대한상의와 정책간담회를 개최해 경제 문제에 당력을 집중했다. 민주당이 이처럼 민생 현장을 찾는 데는 최악의 실업률과 고용률 등 경제지표가 좋지 않게 나오면서 민심이 들썩이기 시작하자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한국노총과 최저임금 제도 개선에 합의하며 최대 지지층 중 하나인 노조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민주노총과의 관계 회복은 요원하다. 원내 관계자는 “민주노총과도 간담회를 가지려 하지만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국회 관계자는 “지방선거는 사실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로 치렀다”며 “항상 정권의 위기는 경제 문제에서 시작되는데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잡기에만 신경 쓰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서울광장] 경총, 몰락한 전경련의 전철을 밟으려 하나/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경총, 몰락한 전경련의 전철을 밟으려 하나/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재계를 대표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몰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수금 창구 역할이 드러나면서 전경련의 위상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국가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에 기대 재벌들의 사적 이익에 앞장선 전경련에 등을 돌렸다. 1961년 창립 이후 숱한 부침을 겪었지만 이번처럼 국민적 지탄을 받아 본 전례는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전경련의 대타로 나선 경영자총연맹(경총)에서 최근 의미 있는 사건이 진행 중이다. 바로 송영중 경총 부회장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다. 그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대한 국회 논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총 내부에서 자진 사퇴의 압력을 받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입장에서 반대편인 노동계의 손을 들어 줬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지만 찬찬히 이번 파문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내부 갈등이 촘촘히 얽혀 있다. 14년간 지속된 전임자 ‘김영배 체제’의 경총 사무국과 회원사 중심으로 운영 방향을 개혁하려는 송 부회장 간의 반목이 큰 몫을 했다. 삼성노조 와해 사건에 연루된 경총 내부 인사의 변호사비 지원 문제 등 회계 처리의 불투명성과 내부 임원의 무단 대표 등기 등을 둘러싼 잡음 등이 증폭된 측면도 있다. 시곗바늘을 지난 4월로 돌려 보면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경총 회장단은 지난 4월 6일 “노사 문제에 경륜과 식견이 높으며 고용과 복지 문제에도 밝은 송영중 석좌교수가 경총 상임부회장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경총 회장단이 밝힌 대로 송 부회장은 2002년 청와대 노사관계비서관으로 주 5일제 근무 도입과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 근로기준법 정부안을 만들었던 주인공이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임금 근로시간 제도 개선과 고용서비스 선진화에 대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를 노사 간 당면 현안을 풀어 갈 적임자로 본 것이다. 도화선이 된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송 부회장은 국회에서 법이 통과돼도 노조가 있는 기업은 다시 임단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총 회장단의 일원인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이 “산입 범위 조정 문제를 최저임금위원회로 돌려보내자고 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단협 과정에서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가 노사 분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측면이 크다.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노동계의 편에 섰다는 역풍이 불자 송 부회장에게 ‘친노동’ 딱지를 붙여 책임을 전가했다는 분석이다. 과거에도 노사 합의 없는 노동법 개정은 숱한 분란을 일으켰다. 1996년 노동법 파동이 대표적이다. 정리해고 도입 등 노사 간 첨예한 사안을 일방적으로 국회에서 처리했다가 노동계의 격렬한 반발로 YS(김영삼)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8년 IMF 사태 직후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정리해고를 도입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송 부회장은 다음달 3일 총회에서 진퇴가 결정된다. 현재로선 그의 퇴진 가능성이 높지만 경총의 앞날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친재계를 표방한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서는 권력의 일방적 지원으로 노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경총이 이익단체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업의 공공재적 성격을 감안하면 의사회 등 일반의 이익단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공복리와 공정경제를 열망하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 시대의 운영체제를 답습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지난해 경총이 일자리 대책을 놓고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다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당사자”라고 경고를 받고 급격하게 위상이 추락한 전례도 있다. 자본주의는 노사가 서로 인정할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발휘하는 제도다. 어느 한쪽의 탐욕이 커지면 서로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경총 스스로 이런 이분법적인 제로섬 게임을 단절하고 시대정신에 걸맞은 공존의 길을 걸어야 한다. oilman@seoul.co.kr
  • 美관세폭탄 역풍… 할리데이비슨 해외 이전

    美 철못업체, 철강 값 올라 감원 트럼프 “세금은 할리의 변명”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중국뿐 아니라 멕시코, 캐나다, 유럽연합(EU) 등 동맹국에도 관세폭탄을 퍼붓는 무역전쟁에 돌입한 미 정부가 내부에서부터 역풍을 맞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상징(아이콘)’이자 대표적인 일자리 창출 기업이라고 공개적으로 치켜세웠던 오토바이 제조사 할리데이비슨이 25일(현지시간) EU의 보복관세를 피해 해외로 생산시설 일부를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미 최대 철못 생산업체도 멕시코산 철강 가격 상승에 따른 경영난으로 감원에 나섰다.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본사를 둔 할리데이비슨은 이날 생산시설 이전 계획을 밝히면서 “회사의 선호에 따른 결정이 아니다.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시장인) 유럽에서 경영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옵션”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할리데이비슨은 유럽에만 전 세계 판매량의 6분의1 수준인 4만여대를 팔았다. EU는 미국이 철강·알루미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 데 맞서 지난 22일부터 미국산 버번위스키, 청바지, 오토바이 등에 28억 유로(약 3조 6000억원) 규모의 보복관세를 단행했다. 할리데이비슨의 EU 수출용 오토바이 관세도 기존 6%에서 31%로 급격히 상승했다. 무역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할리데이비슨은 오토바이 1대를 수출할 때마다 평균 2200달러(약 245만원)의 비용을 추가 부담해야 한다. 올해 남은 기간만 따지면 최대 4500만 달러(약 501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다만 이를 소비자에게 전가하지는 않을 방침이라고 회사 관계자는 밝혔다. 할리데이비슨은 앞으로 9~18개월에 걸쳐 미국 밖으로 생산시설 이전을 완료할 예정이다. 미주리주에 공장을 둔 철못 생산업체인 ‘미드콘티넌트 스틸앤드와이어’는 지난 15일 전체 직원 500명 중 시급 10달러 노동자 60명을 해고했다. 이달 1일부터 미 정부가 수입철강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철못 가격 상승으로 주문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들은 트럼프발(發) 무역전쟁이 자국 기업에 의도치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며 할리데이비슨이 그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윗을 올려 “할리데이비슨이 가장 먼저 백기 투항한 데에 놀랐다. 세금(관세)은 그저 할리의 변명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26일 또다시 “올해 초 할리데이비슨은 캔자스시티 공장 시설 다수를 태국으로 이전하겠다고 말했다. 그 시점은 (EU의 보복)관세가 발표되기 오래전이었다”고 꼬집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민주당은 부·울·경… 평화당 서울·인천… 범여권 ‘민생 행보’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이 26일 각각 부산·울산·경남과 서울·인천을 방문하며 민생 행보 경쟁에 나섰다. 민주당은 고용시장 지표가 악화되자 정부 대신 ‘민심 달래기’에 뛰어든 반면 평화당은 경제정책에서 정부·여당과 각을 세우며 ‘민심 얻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오거돈·김경수·송철호와 현안 논의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등 원내 지도부는 이날 울산도시공사에서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자,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자, 김경수 경남지사 당선자 등과 정책간담회를 열고 지역 현안과 공약 이행을 위한 정부 예산을 논의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후 고용 위기를 겪는 경남 창원의 GM 협력업체 경남금속을 찾아 상황을 점검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민주당은 이날 지방 방문을 시작으로 28일부터 대한상공회의소와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정책간담회를 여는 등 민생 행보를 이어 간다. 민주당의 민생 행보는 야당의 내홍으로 국회 공전이 장기화되자 직접 경제 현안을 챙기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경제 주체 간 갈등이 심화되고 여론이 악화되는데도 정부의 대응은 미흡해 자칫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당내에서 나오고 있다. 홍 원내대표 등 원내지도부는 최저임금위를 거부하고 있는 양대 노총을 만나 설득한다는 계획이지만 정책간담회 일정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남동공단 찾아 최저임금 등 간담 평화당 조배숙 대표 등 당 지도부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어려움을 겪는 인천 남동공단의 중소기업 삼화이앤피, 서울 금천구의 시흥유통상가 상인회를 찾아 간담회를 열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평화당은 정부 여당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개혁 입법에는 협조하지만 경제·민생 현안에 대해서는 제 목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방침이다. 조 대표는 “일자리는 계속 감소하고 있고 실업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의 경제 기조인) 소득주도 성장론을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정책 전환을 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여당을 비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데스크 시각] ‘5984자’의 모두 발언에 담긴 함의/임일영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5984자’의 모두 발언에 담긴 함의/임일영 정치부 차장

    ‘샴페인’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례 없는 6·13 지방선거 압승 이후 첫 번째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가 열린 지난 18일, 2시간에 걸친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집권세력이 승리에 취해 자만해질 것을 경계했다. 평소 4~5배에 이르는 ‘5984자’의 대통령 모두 발언 대부분은 ‘당부의 말’로 채워졌다. 이날 ‘문재인 정부 2기 국정운영 위험요소 및 대응방안’ 보고를 맡은 조국 민정수석은 정부·여당의 오만한 심리가 작동해 독선·독주를 낳고 내부 권력 투쟁으로 발현될 위험을 지적했다. 과거 정부도 선거 승리 이후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 및 독선, 측근 비리 및 친인척 비리,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국민들의 피로감이 가중됐다는 것이다.집권 2년차에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곧바로 새 지도부 선출하는 정치일정까지 현 상황은 박근혜 정부와 묘하게 닮았다.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등장한 비박 지도부는 친박과 극심한 계파 갈등을 빚었다. 당청 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2016년 4·13 총선에서 야권이 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됐음에도 새누리당은 충격적 패배를 당했다. 6·13 선거가 끝난 뒤 17대 총선을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04년 탄핵 역풍이 불면서 열린우리당은 152명을 당선시켰다. 108명이 초선이었다. 분당으로 구 민주계, 호남 중진의 이탈로 공천 문턱이 낮아진 덕에 예전 같으면 당내 경선을 통과하기 쉽지 않았을 정치 신인이 대거 등원했다. ‘탄돌이’란 달갑지 않은 별칭도 붙었다. 이들을 축으로 ‘실용 vs 개혁’ 논쟁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여당이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던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개혁법)은 누더기가 됐고 국민은 이후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표를 줬다. 이번 선거에서 80%에 육박하는 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와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에서 못 벗어난 보수정당의 궤멸, 두 가지 반사이익을 부인할 민주당 당선자는 없을 것이다. 특히 1990년 3당 합당 이후 ‘묻지마식’ 보수 정당 지지가 뚜렷했던 민주당 ‘험지’에선 더 그러하다. 지역주의 벽에 맞선 끝에 8전 9기로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 같은 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척박한 ‘밭’에서 공천 구인난을 겪었고 일부 기초단체장·의원의 경우 함량 미달 인사가 당선된 것도 현실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특히 부산·울산·경남은 어려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양질의 후보군이 부족했다. 함량 미달도 있고, 본인도 막판에 뒤집힐 줄 알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참여정부를 경험한 이들은 기시감마저 느낀다”면서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집권세력 내부의 원심력이 강화될 수 있는 요인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지역주의 및 색깔론의 종언으로 규정하면서도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라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그런 정도의 두려움”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국민은 또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 줬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한반도의 봄’을 이끌어 낸 ‘한반도 운전자론’ 등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성과는 기대치를 넘어섰다. 하지만 고용·소득·분배 지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데다 현 정부의 경제 기조인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아직 체감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반기 이후에도 가시적 성과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민심은 또 모른다. 문 대통령이 “국민에게 유능함을 보여 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것도 무관치 않다. 21대 총선까지는 채 700일도 남지 않았다. argus@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추미애 대표는 꽃을 좋아한다. 연꽃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추 대표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연꽃 두 송이를 따 품에 안는 태몽을 꾸고 그를 가졌다. 낳기도 전에 고이 기르고 싶어서 그림전람회에 걸린 화가 이름을 따 이름부터 지어 놓고 낳기를 기다리던 딸이었다. ‘아름답게(美) 사랑하며(愛)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추 대표는 이름 같은 인생을 살 수 없었다. 경쟁적인 약육강생의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살았다. 15대 초선 전후로 ‘추다르크’로 시작해 ‘추고집’, ‘독불장군’, ‘추설공주’라는 별명이 붙었다.그런 추 대표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동산에서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니 생경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6·13 압승에 등골이 서늘하게 두렵다”고 했지만, 지방선거 등에서 압승한 당 대표로서 추 대표는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당 대표실에는 축하 난 화분 세 개가 놓여 있다. 두 개는 문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해 10월 23일 추 대표 60세 생일 때 보낸 축하 난이다. 나머지 한 개는 6·13 지방선거 승리 직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보낸 난이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짧게 씌어 있었지만, 지역주의 타파에 승부를 걸었던 노 전 대통령의 유지가 보이는 듯했다. 추 대표는 지난 15일 권 여사에게 감사의 전화 통화를 했다. 권 여사는 “이렇게 좋은 날도 있네요. 대통령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추 대표도 수화기 너머 흐느꼈단다. 민주당 사람들에게 노무현은 아직 눈물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노무현을 표현한다.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린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저를 많이 아껴 주셨어요. 통일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제안하시기도 했어요”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추 대표는 지난 2004년 민주당 대표 시절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후 2박 3일 광주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를 삼보일배로 사죄했지만, 그해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추 대표를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후보 시절에 “차기에 추미애도 있고, 정동영도 있고”라고 발언했다가, 대선 투표 전날 정몽준 후보로부터 ‘팽’당하기도 했다. 추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완승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선전에 한껏 고무됐다. 민주당 출신으로는 처음인 정세용 구미시장의 당선뿐만 아니라 임대윤 대구시장 후보도 39.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등 분전한 덕분이다. ‘대구의 딸’ 추 대표로서는 뿌듯한 업적이다. “지역주의가 극심할 때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당보다는 지역주의에 함몰돼 투표하는 경향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지역주의가 이번 선거에서 해소됐다. 고향 분들이 드디어 마음을 여셨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1997년 대선부터 추 대표는 민주당 깃발을 들고 대구로 향했다. 당시 대구 인심은 민주당이 들어갈 틈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를 하면 돌을 맞는다’는 말이 떠돌 때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잔다르크가 프랑스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잉글랜드 100년 전쟁에 참여해 샤를 7세를 옹립한 것과 같이 대구에 나타나 선거유세를 벌였다. 그는 이때 지칠 줄 모르는 선거유세로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추 대표는 무려 20년을 넘어서야 결실을 본 셈이다. 민주당의 이번 압승을 지지율이 높은 문 대통령 효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문 대통령도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청와대 비서실 그리고 내각이 아주 잘해 준 덕분”이라며 선거를 치른 당사자인 여당은 쏙 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후 “오늘 회의는 청와대와 정부 직원들을 상대로 한 회의여서 문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서 긴급히 진화했다. 추 대표는 “대통령 효과가 컸던 게 사실”이라고 인정한 뒤 “특히 대통령이 현충일 행사에 국가 유공자 자녀의 키 높이에 맞춰서 아이를 격려해 주는 모습처럼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유권자 분들을 대해 이겼다”고 말했다.‘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정국’에서 여성계는 이재명 경기지사 당선자의 사생활 논란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한 추 대표를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에 추 대표는 “이 당선자는 당의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후보였다. 후보자격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일단 후보로 결정됐으면 도와야 하는 게 당 대표의 책무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 사견을 피력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민주평화당 등 야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협치는 개방돼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개헌과 같은) 국민에게 (대선) 공통 공약으로 내건 것마저도 야당들이 협조할 자세가 안 돼 있어서 개별 정당이 국민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추 대표는 당 대 당 통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정도 힘든데) 통합은 더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연정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민주평화당에 대해 그간의 태도를 반성해야 연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취지로 비쳐졌다. 추 대표는 지난 2년 동안 역대 어느 민주당 대표가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뤄 냈다. 우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설득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냈고, 지난해 대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른 보궐선거에서도 12개 지역구 중 11개 지역을 휩쓸었다. 2년간의 대표 임기를 완주한 거의 유일한 당대표다. 지난 2008년 이후 정세균,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김한길·안철수, 문재인, 김종인 등이 당 대표를 지냈지만 추 대표처럼 2년을 꽉 채운 대표는 없었다. 그만큼 체급이 커진 추 대표이다 보니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국무총리 기용설, 차기 대선 직행설, 법무부 장관 입각설 등 설만 난무한다. 이런 성공적인 당대표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사실 추 대표의 지난 2년간 대표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한때 ‘추미애 패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청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때도 있었다. 추 대표는 “당·청을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을 상당히 부풀린 측면이 있었다”면서 “진실이 아닌 이상 묵묵히 기다렸다. 여러 현안에 대해 당·청 간의 소통이 잘 된 편”이라고 자평했다. 오는 8월 25일 전당대회 이후의 계획을 묻자 “지난 23년간 정치를 하면서 개인 진로를 언론에 대놓고 말한 적 없다”면서 “내 진로는 전당대회를 치른 이후에 천천히 생각하겠다”며 지극히 무미건조한 답변만 돌아왔다. “저는 일생 입당원서라고는 한 번밖에 안 써 봤다”는 게 추 대표의 자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으로 들어간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 당적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 민주당이 새천년민주당을 거쳐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다가 나중에 합쳐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간판을 바꾸었지만, 추 대표는 언제나 민주당이었다. 그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뚝심이 ‘임기를 채운 당 대표’의 원천이 되지 않았나 싶다. “숨가빴던 지난 2년을 반추하며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싶다”는 추 대표는 연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보수세력의 앞날에 대한 견해는 어떨까. 추 대표는 “대선 이후 1년간 야당은 전혀 반성을 안 했다. 건강한 보수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민주주의를 왜 망쳤는지 아무런 반성 없이 1년을 소진했다. 이번 기회에 보수가 물갈이를 해야 한다. 중진들도 도망치듯 떠날 게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국민이 평화를 원하면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위장 평화쇼’라며 퇴행적인 모습만 보였다”며 일갈했다. 추 대표는 이어 “김무성 한국당 의원이 202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앞서 개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큰 만큼 책임지고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jrlee@seoul.co.kr
  • 무르익는 북·일 정상회담… 아베, 총재 선거에 순풍? 역풍?

    무르익는 북·일 정상회담… 아베, 총재 선거에 순풍? 역풍?

    8월 평양보다 9월 러서 만날 가능성 의미 없는 결과 도출 땐 되레 위기 자초북·일 정상회담 개최가 갈수록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지난 12일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아베 신조(얼굴) 일본 총리의 바람에 일정 수준 화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일본 언론들은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까지 거론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15일 “아베 총리가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일 정상회담을 가급적 일찍 개최할 수 있도록 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고 전했다. 아사히는 “이는 그동안 이어진 남북, 북·중,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이 지금까지의 압박 일변도의 대북 정책을 대화 노선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일본 언론들은 앞서 13일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김 위원장이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열린 자세를 나타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었다. 회담 성사 여부에 대한 북한 측의 공식 입장이 없는 데도 벌써부터 시기나 장소 등에 대해 다양한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교도통신,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일본이 아베 총리와 김 위원장의 첫 정상회담을 올가을쯤 일본·북한이 아닌 제3국에서 여는 방안을 북한 측에 타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치권에서는 오는 9월 러시아나 미국에서의 회담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9월 11~1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의 경우, 아베 총리가 참가를 확정한 가운데 김 위원장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상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9월 하순 열리는 유엔 총회에 김 위원장을 초청한 만큼 이때를 활용할 수도 있다. 올 8월 평양 개최설도 일부에서 나오지만 아베 총리가 처한 정치적 여건 등을 감안했을 때 현실성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과 의견을 교환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무성은 북·일 당국자들이 지난 14일 몽골에서 열린 국제회의 ‘울란바토르 대화’에서 접촉을 가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연임에 성공해 2021년까지 총리직을 이어 가고 싶어 하는 아베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서둘렀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납치자 문제는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는 게 북한의 공식 입장이어서 일본 국민들을 납득시킬 만한 결과를 정상회담에서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6·13 민심] 與, DJ·YS 묘소 참배… 31년 만에 ‘민주대연합’ 복원 천명

    [6·13 민심] 與, DJ·YS 묘소 참배… 31년 만에 ‘민주대연합’ 복원 천명

    “들뜬 분위기 땐 역풍” 낮은 몸가짐 강조6·13 지방선거에서 사상 유례없는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광역단체장 당선자들이 15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김대중(DJ)·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들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DJ뿐 아니라 신한국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출신 대통령이었던 YS에게까지 ‘선거 승리’를 보고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DJ와 YS가 이루지 못한 ‘민주대연합’을 그들의 후예가 이번 선거를 통해 복원했음을 천명하는 의미의 참배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이날 참배 후 기자들에게 “이번 지방선거 승리는 낡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에 맞서 싸운 두 분(김대중·김영삼) 대통령께서 뿌려 놓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YS의 고향인 부산·경남(PK) 지역은 ‘부마사태’가 웅변하듯 원래 민주·진보 성향이 강한 곳이었지만, 1987년 DJ와 YS의 분열에 이어 1990년 3당 합당으로 YS가 보수진영에 편입되면서 한국당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랬던 PK에서 이번에 민주당이 광역단체장 3곳을 석권했고 이것은 31년 만의 민주대연합 복원으로 민주진영 안에서 평가됐다. 현충원 참배 후 민주당 지도부와 당선자들은 국회에서 ‘나라다운 나라, 든든한 지방정부 실현을 위한 국민과의 약속 선포식’을 열고 ‘낮은 몸가짐’을 강조했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에 매서운 심판을 내린 민심의 힘을 확인한 만큼 자칫 들뜬 분위기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어떠한 잡음과 비리도 용납해선 안 된다”며 “국민과 지역주민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지방공약 태스크포스(TF)를 만들겠다”고 밝혔다.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는 “압도적으로 지지해 준 우리 국민에게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보다 나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온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국민이 민주당에 압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만큼 이제는 국정운영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다. 특히 민생과 직결된 경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당 안팎에서 제기된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원내에 경제정책 TF를 설치하는 한편 오는 18일 비공식 당·청 협의를 열고 선거 이후의 대책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美보호무역 역풍에… EU·남미 FTA 순풍

    美보호무역 역풍에… EU·남미 FTA 순풍

    20년간 협상 부진… 최근 급물살 쟁점 거의 해소… 연내 타결 전망 EU, 美협상 틀어져 새 활로 개척 세계 최대 규모의 무역 공동체 유럽연합(EU)과 네 번째로 큰 무역 공동체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이 이르면 오는 10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타결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에 대한 반작용으로 약 20년간 지지부진했던 양측의 협상이 빨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AP통신 등은 13일(현지시간) 알로이지우 누네스 브라질 외교장관의 말을 인용해 “EU와 메르코수르가 오는 10월 브라질 대통령선거 전에 FTA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누네스 장관은 이날 연방하원에 출석해 “EU와 메르코수르 간에 300여 가지의 견해차가 대부분 해소됐고 이제 50개 정도가 남았다”면서 “올해 안에 협상을 끝내기 위해 양측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EU와 메르코수르는 1999년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EU 농민들이 값싼 메르코수르의 소고기와 설탕, 가금류를 수입하는 데 반대해 2004년 10월 협상이 중단됐다. 2015년 6월 EU·중남미 정상회의에서 FTA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월 21일부터 3월 2일까지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서 협상을 벌였다. 아순시온 협상에서 양측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제약 특허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 농업 등 핵심 쟁점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으나 이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정부가 FTA 협상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올해 안에 FTA 체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온다. 앞서 주앙 크라비뉴 브라질 주재 EU 대사는 지난달 “6~7월 사이에 FTA를 체결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관련, 영국 더타임스는 “EU와 미국의 무역 협상이 틀어지면서 EU가 다른 활로를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EU는 지난 4월 멕시코와 모든 교역 상품의 관세를 폐지하는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연내 합의문 작성을 목표로 양측이 협상 중이다. 또 지난해 12월 일본과 맺은 EU·일본 경제동반자협정을 내년 상반기 안에 발효시키고자 비준 절차에 들어갔다. EU의 대(對)메르코수르 수출은 2005년 210억 파운드(약 31조원)에서 2015년 460억 파운드(67조 9000억원)로 2배 이상 늘었으며, 메르코수르의 대EU 수출은 같은 기간 320억 파운드에서 420억 파운드로 증가했다. 메르코수르는 1991년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4개국으로 출범한 관세 동맹이다. 2012년 베네수엘라가 추가로 가입했지만 대외 무역 협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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