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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 “권력 입맛에 맞는 견해 강요 안 돼” “학생에게 종북 사상 가르치면 안 돼”

    정부가 3일 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을 확정 고시하자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반대 입장을 제기한 반면 보수 성향 단체는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 470여개 단체가 연대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의 회원 100여명은 이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확정 고시를 비판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에서 전국 2300여곳 고교 중 3곳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고 나머지 고교에서는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고 밝힌 것을 놓고 “2000개가 넘는 오류가 발견됐고, 일제 식민지배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서술한 교학사 교과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등 10여개 단체가 모인 ‘항일 독립운동가 단체 연합회’도 광화문광장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앞서 초·중·고교 퇴직 교원 10여명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총 656명의 퇴직 교원들이 기명으로 참여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사실상 정치권력이 역사 해석을 독점하고 입맛에 맞는 견해를 국민들에게 강요하겠다는 것”이라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자유청년연합, 자유통일연대 회원 등 10여명이 정부서울청사 정문 우측에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종북 사상을 가르치는 생산기지가 되면 안 된다”면서 국정교과서가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교과서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중록 신문방송학과 교수 등 대구대 교수 11명은 “경제발전의 토대를 만들고 과거와 미래의 올바른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국정교과서에 의한) 국론 분열을 종식하고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 수 있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수묵’ 틀을 벗다

    ‘수묵’ 틀을 벗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함께 깊어 가는 가을에는 묵향이 진하게 풍기는 수묵화가 제격이다. 전통적 수묵화도 좋지만 전통에서 출발해 동시대의 감성으로 재탄생한 현대적 수묵을 선보이는 전시들이 발길을 모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 갤러리에서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작가들이 전통적인 수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회화와 설치작품을 보여주는 ‘당대 수묵’전을 열고 있다. 전시에는 김선두, 김호득, 조환 등 한국 작가 3명과 중국 작가 웨이칭지, 장위가 참여한다. 전통 수묵에서 출발했지만 기존의 재료와 방법, 주제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이미지를 추구해 온 작가들은 저마다의 화법으로 수묵화의 새로운 미학을 제안하고 있다. 김선두는 수묵과 채색, 선과 형상 간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을 통해 삶의 감동을 표현한다. 투박한 닥종이의 느낌이 살아 있는 장지에 색을 칠하고 이를 여러 겹 중첩한 뒤 색이 우러나오도록 하거나 칼로 문양을 오려 낸 다음 그 위에 자연을 화사한 수묵 채색으로 담아낸다. 할미꽃에서 자연의 거친 힘을 보았다는 그의 작품 ‘별을 보여드립니다-붉은 땅’은 붉게 표현된 바탕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듯하다. 작가 김호득은 “먹으로 정신과 물질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40년 넘게 검은 먹과 씨름해 왔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먹과 묵의 어둠과 깊음이 주는 다양함을 찾기 위해 꾸준히 탐구해 왔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먹으로 그어 내는 일필휘지로 하얀 여백 위에 검은 먹의 자취를 힘차게 표현한 작품 ‘겹-사이’ 연작을 선보였다. 1980~90년대 수묵 인물화와 도시 풍경을 그리며 전통 회화가 무엇인지를 고민한 작가 조환은 수묵의 기본이 되는 먹을 다시 바라보자고 마음먹었다가 아예 그것을 “버리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그는 먹과 붓 대신 용접기, 철판과 같은 비수묵적 재료를 집어들고 수묵의 오묘한 세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철로 만든 거친 황톳빛 나룻배와 대형 병풍처럼 글을 새긴 철판 설치작품을 내놓았다. 배는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를 갈 때 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고, 녹슨 철 병풍에 쓰인 글은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이 쓴 반야심경 구절을 철판에 페인트로 임서하고 오려 낸 것이다. 중국인 작가 두 명은 중국 현대미술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85년 이후 급속하게 변화한 현대 중국 사회에서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해 온 인물들이다. 장위는 1991년부터 오른쪽 검지 끝에 물감이나 물을 묻혀 종이 표면에 남기는 지인(指印)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흰색 종이에 물을 묻혀 올록볼록 요철처럼 만든 작품과 붉은색 물감을 옅게 만들고 무작위로 찍어 나간 작품을 선보인 그는 “이전의 중국화 제작 방식은 현대사회에서 갈 곳을 잃게 됐다. 전통적인 재료를 가지고는 예술의 근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 붓과 먹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작가 웨이칭지는 별로 가득 찬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사(社)의 로고 위에 자신의 서명을 적고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기를 정상에 꽂은 작품과 스포츠 상표 퓨마의 로고와 자동차 재규어의 상징 이미지를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전통적인 수묵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동시대와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서양문화의 급격한 유입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과 사회적 요소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시와 미시:한국과 대만 수묵화의 현상들’은 한국과 대만의 동시대 수묵화를 조명하고 있다. 각각 고유하면서도 서로 동질적인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갖는 두 나라 작가들의 작품에 담긴 역동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동아시아 공통의 오랜 역사를 갖는 수묵화 분야에서 각각 역사적·지리적 차이를 바탕으로 발전한 특유의 흐름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신영상, 김호득, 김희영, 임현락, 정용국, 리이훙, 리마오청, 양스즈, 황보하오 등 9명의 작가가 출품한 수묵화 37점이 전시된다. 오는 22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world 특파원 블로그] 中, 아무리 日과 관계 험악해도… 외교무대 ‘中→日→韓’ 호명 속내는

    지난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의 공동 기자회견은 동시 통역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리 총리 통역 때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리 총리는 계속해서 ‘중·일·한 3국’이라고 말하는데 통역사는 고집스럽게 ‘중·한·일 3국’이라고 바꿔서 전달했다. 일부 국내 언론은 통역사의 호명 순서를 리 총리의 실제 발언으로 여기고 중국이 한국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보다 앞세웠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중·일 3국이 동시에 참여하는 외교 행사에서 중국의 호명 순서는 예외 없이 ‘중→일→한’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리 총리는 물론 중국 외교부, 관영 매체, 경제지, 심지어 해외에 서버를 둔 반중국 매체들도 이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아무리 험악해도 한국이 일본에 앞서 호명된 적은 없다. 사실 이번 3국 정상회의의 공식 명칭은 ‘한·일·중 정상회의’다. 주최국인 한국을 맨 앞에 두고 차기 개최국과 차차기 개최국을 차례로 붙이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도 공식 순서를 무시하고 습관대로 ‘한·중·일 정상회의’라고 썼다. 호명 순서는 부르는 사람 마음이지만, 일본보다 중국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우리 저변에 깔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언론도 습관대로 ‘일·중·한 정상회의’로 표기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서방 언론 대부분은 ‘중·일·한’으로 썼는데, 영국 BBC 기사에서는 ‘일·중·한’으로 돼 있었다. 한국이 ‘말석’인 것은 마찬가지다. 호명 순서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중·일 3국의 협력 사업을 위해 4년 전 서울에 설치된 국제기구 명칭이 ‘3국 협력 사무국’이 된 이유가 각 나라가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해 결국 국가명을 붙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외교에서 호명 순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베이징 외교가에선 ‘미·중’이 아닌 ‘중·미’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진정한 친중파라는 소리도 있다. ‘중·일·한’ 또는 ‘일·중·한’으로 굳어진 외교 언어에서 가운데 자리를 꿰차는 길은 국력을 역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야당·학계 반발에 교육부 이틀 앞당겨 고시… 국회 올스톱 위기

    야당·학계 반발에 교육부 이틀 앞당겨 고시… 국회 올스톱 위기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고삐를 한층 강하게 죄고 나섰다. 오는 5일로 예정됐던 국정화 관련 확정고시(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를 이틀 앞당겨 3일에 하기로 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역사·교육학계 등의 반발을 정면돌파하겠다는 뜻이지만, 더욱 심한 반발을 부를 게 불 보듯 뻔하다. 교육부 관계자는 2일 “국정화에 따른 혼란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자는 차원에서 확정고시 일정을 당겼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12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발표하면서 “11월 2일까지 의견을 받은 뒤 이를 정리해 11월 5일 확정고시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갑작스런 교육부의 일정 변경은 강력한 정책 추진의지를 보이기 위한 청와대 주도의 결정으로 해석하는 관측이 많다. 교육부 고위 관계자는 “고시 확정을 앞당기는 것은 법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다”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확정고시가 되면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달 중순까지 집필진을 구성한 뒤 이달 말부터 본격적으로 교과서 집필에 착수할 계획이다. 국사편찬위는 20∼40명 규모의 집필진을 구성해 내년 10월까지 완성본을 제작한 뒤 2017년 3월부터 일선 교육현장에 교과서를 보급한다는 방침이다. 가뜩이나 곳곳에서 일고 있는 국정교과서에 대한 반대는 한층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실무작업이 속도를 낼수록 반대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는 오는 14일 광화문과 서울광장 등 도심에서 열릴 민주노총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를 비롯한 진보 쪽 시민·사회단체 등의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들은 당일 집회에 10만명 이상이 모일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재정 경기도교육감과 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은 이날 청와대 앞 국민신문고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했다. 경기·인천교육감은 오전 8시쯤부터 “대통령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절대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습니다”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앞에 놓고 15분씩 번갈아가면서 1시간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사설] 한·일 정상, 점진적 관계 개선 위한 첫발 뗐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의 첫 정상회담은 너무도 어렵게 성사된 만남치고는 감동 있는 드라마를 보여 주지 못했다. 한·일 정상회담의 걸림돌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와 관련, 아베 총리의 그릇된 역사관은 예상했던 대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다만 두 정상이 1시간 이상의 밀도 있는 논의 끝에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양국 간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어렵사리 한·일 관계 정상화의 첫발을 뗀 만큼 이제는 일본 측이 성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올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지만 두 나라는 오히려 최악의 국면을 이어 갔다. 지난 50년간 꾸준히 발전해 온 양국 선린 관계는 최근 몇 년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크나큰 골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제는 그 골을 메워야만 한다. 두 정상이 위안부 문제를 가능한 한 조속히 타결하기로 합의한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말자는 다짐이자 약속으로 해석하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에 위안부 문제 타결이라는 낭보가 전해진다면 그보다 뜻깊은 국교 정상화 50주년 이벤트가 없을 것이다. 밀도 높은 협의로 성과를 내야만 한다. 물론 그동안 9차례의 국장급 협의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위안부 문제가 급거 이견을 해소하고 타결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이 마무리돼 사과나 보상을 할 이유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너무도 완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털어내지 못한다면 양국 관계는 언제라도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일본 측은 알아야만 한다. 박 대통령도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가 양국 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지 않았는가. 두 나라 간에는 공유할 가치와 협력의 공간이 널려 있다는 사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확인됐다. 북핵 문제에 대해 양국 및 한·미·일 3국 협력을 계속해서 강화하기로 합의했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우리가 참여 결정을 내릴 경우 협력하기로 했다. 정치 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활발했던 인적 교류의 확대 필요성에도 두 정상은 공감했다. 안보,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이 협력할 일이 쌓여 있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서 진정성 있는 자세만 보여 준다면 양국 관계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격으로 순항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두 나라는 구동존이(求同存異·차이를 인정하고 같음을 추구한다)보다는 동주공제(同舟共濟·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넌다)의 관계가 돼야만 한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 차이를 빠른 시일 내에 최대한 좁혀 같은 배를 타고 동북아 평화협력 체제 구축을 위해 손을 맞잡아야만 한다. 양국 관계가 과거사에 발목이 잡히는 한 협력의 길은 멀어질 것이다. 이번 첫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정상 간 만남은 계속되겠지만 어제의 다짐을 아베 총리가 이행하지 않는다면 신뢰는 깨질 수밖에 없다. 일본 측의 전향적 입장 전환을 촉구하는 이유다.
  • 깊어가는 가을, 현대적 수묵의 다양성에 취하다

    깊어가는 가을, 현대적 수묵의 다양성에 취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함께 깊어 가는 가을에는 묵향이 진하게 풍기는 수묵화가 제격이다. 전통적 수묵화도 좋지만 전통에서 출발해 동시대의 감성으로 재탄생한 현대적 수묵을 선보이는 전시들이 발길을 모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작가들이 전통적인 수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회화와 설치작품을 보여주는 ‘당대 수묵’전을 열고 있다. 전시에는 김선두, 김호득, 조환 등 한국 작가 3명과 중국 작가 웨이칭지, 장위가 참여한다. 전통 수묵에서 출발했지만 기존의 재료와 방법, 주제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이미지를 추구해 온 작가들은 저마다의 화법으로 수묵화의 새로운 미학을 제안하고 있다.  김선두는 수묵과 채색, 선과 형상 간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을 통해 삶의 감동을 표현한다. 투박한 닥종이의 느낌이 살아 있는 장지에 색을 칠하고 이를 여러 겹 중첩한 뒤 색이 우러나오도록 하거나 칼로 문양을 오려 낸 다음 그 위에 자연을 화사한 수묵 채색으로 담아낸다. 할미꽃에서 자연의 거친 힘을 보았다는 그의 작품 ‘별을 보여드립니다-붉은 땅’은 붉게 표현된 바탕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듯하다. 작가 김호득은 “먹으로 정신과 물질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40년 넘게 검은 먹과 씨름해 왔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먹과 묵의 어둠과 깊음이 주는 다양함을 찾기 위해 꾸준히 탐구해 왔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먹으로 그어 내는 일필휘지로 하얀 여백 위에 검은 먹의 자취를 힘차게 표현한 작품 ‘겹-사이’ 연작을 선보였다.  1980~90년대 수묵 인물화와 도시 풍경을 그리며 전통 회화가 무엇인지를 고민한 작가 조환은 수묵의 기본이 되는 먹을 다시 바라보자고 마음먹었다가 아예 그것을 “버리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그는 먹과 붓 대신 용접기, 철판과 같은 비수묵적 재료를 집어들고 수묵의 오묘한 세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철로 만든 거친 황톳빛 나룻배와 대형 병풍처럼 글을 새긴 철판 설치작품을 내놓았다. 배는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를 갈 때 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고, 녹슨 철 병풍에 쓰인 글은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이 쓴 반야심경 구절을 철판에 페인트로 임서하고 오려 낸 것이다.  중국인 작가 두 명은 중국 현대미술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85년 이후 급속하게 변화한 현대 중국 사회에서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해 온 인물들이다. 장위는 1991년부터 오른쪽 검지 끝에 물감이나 물을 묻여 종이 표면에 남기는 지인(指印)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흰색 종이에 물을 묻혀 올록볼록 요철처럼 만든 작품과 붉은색 물감을 옅게 만들고 무작위로 찍어 나간 작품을 선보인 그는 “이전의 중국화 제작 방식은 현대사회에서 갈 곳을 잃게 됐다. 전통적인 재료를 가지고는 예술의 근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 붓과 먹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작가 웨이칭지는 별로 가득 찬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사(社)의 로고 위에 자신의 서명을 적고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기를 정상에 꽂은 작품과 스포츠 상표 퓨마의 로고와 자동차 재규어의 상징 이미지를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전통적인 수묵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동시대와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서양문화의 급격한 유입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과 사회적 요소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시와 미시: 한국과 대만 수묵화의 현상들’은 한국과 대만의 동시대 수묵화를 조명하고 있다. 각각 고유하면서도 서로 동질적인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갖는 두 나라 작가들의 작품에 담긴 역동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동아시아 공통의 오랜 역사를 갖는 수묵화 분야에서 각각 역사, 지리적 차이를 바탕으로 발전한 특유의 흐름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신영상, 김호득, 김희영, 임현락, 정용국, 리이훙, 리마오청, 양스즈, 황보하오 등 9명의 작가가 출품한 수묵화 37점이 전시된다. 오는 22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다시 태어난 ‘동양의 햄릿’

    다시 태어난 ‘동양의 햄릿’

    ‘복수란 무엇인가.’ 서사예술의 화두 중 하나다. 복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단 가을마당 네 번째 작품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4대 비극 중 하나인 ‘조씨고아’(趙氏孤兒)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조씨고아’는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춘추시대 역사적 사건을 중국 원나라 때 작가 기군상이 연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18세기 유럽에 소개돼 ‘동양의 햄릿’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중국에선 천카이거 감독이 2010년 ‘천하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2013년엔 CCTV에서 41부작 드라마로 방영돼 드라마 부문 대상과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극은 조씨 가문 300여명이 살육되는 멸문지화 속에서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삭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희생하는 비운의 필부 ‘정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권력 쟁취를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도안고와 그에 맞서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놓는 ‘한궐’, ‘공손저구’ 등 의인들의 살신성인이 비장미를 더한다. 정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끝에 살아남은 고아 ‘정발’을 20년간 키우며 복수의 칼을 간다. 고전 재해석의 귀재, 고선웅이 연출을 맡았다. 4년 전 희곡 ‘조씨고아’를 읽고 원작의 연극성과 묵직한 주제에 반해 무대에 올릴 결심을 했다. 그는 “중국 원나라의 잡극(雜劇·가극 형태의 희곡)이 제가 생각하는 연극의 원형에 가장 가깝다”며 “잡극의 특성을 살려 최소한의 무대로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극성을 강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이 생기기 전 중국 사회에서 용인됐던 복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복수란 무엇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장두이, 임홍식, 하성광 등 중견에서 노장까지 실력파 배우들이 복수의 대서사시를 이끌어 간다. 4~22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동아시아 시민들의 역사 인식 공유 위한 지혜 모아야 할 때”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 세 나라의 시민사회 관계자들이 먼저 만났다. 지난달 31일 일본 오키나와국제대학에서 ‘전후 70년, 동아시아 평화를 오키나와에서 생각하다’를 주제로 이틀 동안 열린 ‘역사인식과 동아시아평화포럼’ 주최 국제포럼에 한·중·일 세 나라의 연구자, 교사, 시민사회 활동가 등 200여명이 참가해 최근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가진 역사 대화의 결과물인 2권의 공동 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이후 제3단계 역사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조만간 세 번째 공동 역사교재의 구체적인 기획에 들어갈 예정이다. 또한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헤노코 이전 건설이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반대의 뜻을 함께 밝혔다. 국제포럼은 2002년 중국 난징에서 첫 포럼이 열린 이후 세 나라가 돌아가며 14년째 계속하고 있다. 올해 포럼에 한국 측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참여연대평화군축센터, 전국역사교사모임 등 25명의 참가단을 꾸렸다. 한국 측 기조발제에 나선 이지원 대림대 교수는 “유엔인권이사회는 역사교육을 ‘문화적 권리’의 문제로 설정하고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수용할 것과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료와 다양한 방법론, 그리고 비판적 사고와 역사해석의 다양성 등을 제공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저항운동이 국제 행동으로 번져 나간 까닭과 한국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세계사적 보편 가치에 어긋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민화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국제협력부장은 “한국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고, 일본은 전쟁가능국가 내용을 담은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를 발표하는 등 동아시아 각국 정부는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는 패권주의로 갈등하고 있다”면서 “각국의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시민들이 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지혜와 실천 의지를 모으는 노력이 더더욱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중·일 정상회의] 한·중, 北관계 감안 ‘북핵’ 낮은 언급… 아베는 일본인 납치 문제 적극 거론

    1일 제6차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담긴 대북 메시지는 지난 회의보다는 분명해졌다. 하지만 각국 정상의 기자회견 발언만 떼놓고 보면 한·중 정상의 메시지는 다소 ‘밋밋’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8·25 남북합의 이후 개선된 남북 관계와 최근 북·중 관계 복원 움직임이 이어지는 상황에 한·중이 북한에 대한 자극적 표현을 피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동선언문에서 3국 정상은 북핵 개발 및 북한의 추가 도발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표현은 2011년 제4차, 2012년 제5차 회의 선언문에는 없던 표현이다. 하지만 회의 이후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선언문 내용을 반복하는 수준에서 ‘북한 비핵화’를 언급했고, 중국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북한’이란 단어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31일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북핵 문제 등에 관한 ‘전략적 소통 강화’라는 의례적 수준의 언급만 했다. 양국이 이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한다는 내용도 덧붙였지만 사실상 구체적인 방법이나 향후 계획은 담지 않았다. 한·중 정상이 사실상 특별한 대북 메시지를 내놓지 않은 데에는 최근 남북, 북·중 관계 변화가 감안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남북은 지난 8·25 남북합의 이후 최근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순조롭게 마무리하며 당국 간 회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도 지난달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이 참석한 이후 북·중 관계 개선 메시지를 계속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 구태여 한·중 양국이 북핵 문제를 전면화하기에는 시급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해 공동선언문에 포함되지 않은 ‘일본인 납치 문제’까지 언급하는 등 적극성을 보였다. 한·중이 일본에 ‘역사 직시’를 강조한 데 대해 납북 문제로 화제를 돌리려는 전략적 발언으로 풀이된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한·중·일 공동선언에 ‘역사 직시’ 담지만… 해석은 동상이몽

    다음달 1일 열리는 한국·중국·일본 3국 정상회의의 공동선언에 “역사 직시”라는 표현이 담긴다고 교도통신이 29일 보도했다. 한·중·일 3국은 정상회의의 공동 문서를 발표하기로 방침을 굳혔으며 여기에는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한다’는 취지의 문구를 반영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와 난징 학살 등의 역사 문제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한·중·일 3국은 정상회의의 공동 문서에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을 재확인하고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노력한다는 의지를 반영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통신은 이날 전했다. 또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속도를 내자는 내용도 반영하기 위해 합의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 소식통의 발언을 인용해 “공동 문서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작성 자체가 큰 성과”라고 전했다. 과거사에 대한 인식 격차를 좁힌 것이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 상황을 봉합했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분위기다. ‘역사 직시’에 대한 해석과 입장이 상반된 탓으로 3국이 제각각 해석하는 ‘동상이몽’이 우려된다. 일·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난징 학살’과 남중국해 갈등에 대한 입장과 시각도 양측의 차이가 크다. 일·중은 정상회담 개최 일정을 확정해 발표하지 못하고 있지만 1일 개최를 놓고 양국이 최종 조율 중으로 알려졌다. 위안부 등 한·일 간 현안에 대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양국 정상회담 전날인 1일 회담을 갖고 최종 조정하기로 했지만 타결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이 마무리됐다는 입장이다. 일본 국민의 기부금과 정부 자금을 투입해 시작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도 도의적인 차원일 뿐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 당국자는 “일본에서는 ‘한국을 위해 해 주면 좋지 않은가’ ‘이 정도 일본이 양보하면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나 여론이 없으며 있다 해도 아주 작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국내 여론 등을 구실로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지는 않겠다는 말로 이해된다. 아사히신문은 이에 대한 한·일 간 인식 차가 여전히 크다고 진단하면서 “총리에게 양보 자세는 없다”는 고위 관료의 발언을 전했다. 도쿄신문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측 자세가 불투명하며 정상회담의 난항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김소월의 시 ‘부모’에 대한 한 생각-자의식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김소월의 시 ‘부모’에 대한 한 생각-자의식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자의식에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우리네 시인들 중에 소월만큼 그 시를 노랫말로 많이 징발당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을 7·5조의 정형률과 토속어에 담아 절절하게 노래한 것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사 100년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소월은 '한국인의 심상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후대의 평자들에게서 받았다. 가곡과 가요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그의 시 중에 '부모'라는 작품이 있다. 1968년 세상에 선보인 이래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 노래는 이제 가요로서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명곡이 되었다. 우선 이 시를 먼저 한번 감상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김소월 시 '부모' 전문 (노랫말에는 원문 맨 끝의 '알아보랴'가 알아보리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운율상의 문제로 수정한 것으로 보이며, 뜻에는 별 차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이 시를 노래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노랫말을 듣는 순간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소월의 시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제목 '부모'가 시사하듯이 '효심'에 초점을 맞춰 풀이한 것이 대세인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풀이이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는 함축적인 말에서 부모를 알기 위해 내가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입히고 키우셨겠는가라는 것을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김소월 전작 시집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정음사)에서> 또는 1920년대라는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를 사는 한 천재시인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운명론을 아프게 토로한 시'라는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런 해석들을 할 만한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소월이 첫 연에 제시한 저 '공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저 공간은 천지사방이 칠흑의 어둠으로 싸여 있는, 호롱불 하나가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며 만들어내고 있는 한줌의 원초적인 공간이다. 그것도 낙엽지는 소리만 우수수 들려올 뿐인 겨울밤의 시공간이다. 이 같은 원초적인 시공간 안에 두 모자는 마주 앉아 있고,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는 스스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쩌다가 생겨나서 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걸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아니었을까? 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아이가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존재론적인 질문- 아, 내가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17세기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한 저 원초적인 질문, '이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란 물음과도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다음에 한 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한 것은 그 물음에 지금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한 말이리라. 그래서인지 아이는 어머님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려 한다는 다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소월은 자신의 어느 시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시작(詩作)의 가치 여하는 적어도 그 시작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여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의 가치 여하를 식별하기는, 곧 시작을 비평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위 시 '부모'의 음영은 짧은 두 연이 지닌 단순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웅숭 깊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닐까? '효심'이라든가, 옛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음영이라 할 수 있을까? 기나긴 겨울밤에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는 존재론적 자의식에 눈을 뜬 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 그저 그런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대시인이 된 것이다. 위의 시에 구사된 시어들 속에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다. 정말 평이하기 짝이 없는 낱말들로 소월은 이처럼 웅숭 깊은 음영의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소월을 천재시인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작가 김동인은 “소월의 시는 시골 과부라도 넉넉히 이해할 것이었다” 라는 찬사와 함께 “조선말 구사의 귀재-그것이 우리의 시인 소월이었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의 이런 해석이 시인의 마음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고, 그런 음영을 깔아놓은 시인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음영이 풍부한 시일수록 명시가 된다는 점에서, 소월의 '부모'는 걸작이라는 이름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소월의 저물녘은 참으로 스산했다. 스물 안팍의 5,6년 동안 불꽃처럼 맹렬히 시를 쏟아냈던 소월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간 후 조부의 광산업을 돕다가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해,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심한 가난과 실의 속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시골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1934년, 그의 가슴에 '부모'의 시상이 처음으로 심어졌던 계절인 12월 24일이었다. 향년 33세. 4남 2녀를 둔 그의 자손 가운데 손녀와 증손녀가 남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손녀는 성악가 김상은으로, 몇해 전 그의 증조 외할아버지의 시로 된 노래를 모아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문화유랑기]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문화유랑기]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김소월의 시 ‘부모’...아이가 던진 '존재론적 물음' 우리네 시인들 중에 소월만큼 그 시를 노랫말로 많이 징발당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을 7·5조의 정형률과 토속어에 담아 절절하게 노래한 것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사 100년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소월은 '한국인의 심상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후대의 평자들에게서 받았다. 가곡과 가요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그의 시 중에 '부모'라는 작품이 있다. 1968년 세상에 선보인 이래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 노래는 이제 가요로서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명곡이 되었다. 우선 이 시를 먼저 한번 감상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김소월 시 '부모' 전문 (노랫말에는 원문 맨 끝의 '알아보랴'가 알아보리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운율상의 문제로 수정한 것으로 보이며, 뜻에는 별 차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이 시를 노래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노랫말을 듣는 순간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소월의 시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제목 '부모'가 시사하듯이 '효심'에 초점을 맞춰 풀이한 것이 대세인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풀이이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는 함축적인 말에서 부모를 알기 위해 내가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입히고 키우셨겠는가라는 것을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김소월 전작 시집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정음사)에서> 또는 1920년대라는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를 사는 한 천재시인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운명론을 아프게 토로한 시'라는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런 해석들을 할 만한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소월이 첫 연에 제시한 저 '공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저 공간은 천지사방이 칠흑의 어둠으로 싸여 있는, 호롱불 하나가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며 만들어내고 있는 한줌의 원초적인 공간이다. 그것도 낙엽지는 소리만 우수수 들려올 뿐인 겨울밤의 시공간이다. 이 같은 원초적인 시공간 안에 두 모자는 마주 앉아 있고,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는 스스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쩌다가 생겨나서 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걸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아니었을까? 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아이가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존재론적인 질문- 아, 내가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17세기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한 저 원초적인 질문, '이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란 물음과도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다음에 한 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한 것은 그 물음에 지금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한 말이리라. 그래서인지 아이는 어머님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려 한다는 다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소월은 자신의 어느 시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시작(詩作)의 가치 여하는 적어도 그 시작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여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의 가치 여하를 식별하기는, 곧 시작을 비평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위 시 '부모'의 음영은 짧은 두 연이 지닌 단순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웅숭 깊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닐까? '효심'이라든가, 옛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음영이라 할 수 있을까? 기나긴 겨울밤에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는 존재론적 자의식에 눈을 뜬 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 그저 그런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대시인이 된 것이다. 위의 시에 구사된 시어들 속에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다. 정말 평이하기 짝이 없는 낱말들로 소월은 이처럼 웅숭 깊은 음영의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소월을 천재시인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작가 김동인은 “소월의 시는 시골 과부라도 넉넉히 이해할 것이었다” 라는 찬사와 함께 “조선말 구사의 귀재-그것이 우리의 시인 소월이었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의 이런 해석이 시인의 마음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고, 그런 음영을 깔아놓은 시인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음영이 풍부한 시일수록 명시가 된다는 점에서, 소월의 '부모'는 걸작이라는 이름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소월의 저물녘은 참으로 스산했다. 스물 안팍의 5,6년 동안 불꽃처럼 맹렬히 시를 쏟아냈던 소월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간 후 조부의 광산업을 돕다가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해,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심한 가난과 실의 속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시골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1934년, 그의 가슴에 '부모'의 시상이 처음으로 심어졌던 계절인 12월 24일이었다. 향년 33세. 4남 2녀를 둔 그의 자손 가운데 손녀와 증손녀가 남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손녀는 성악가 김상은으로, 몇해 전 그의 증조 외할아버지의 시로 된 노래를 모아 음반을 내기도 했다. 내로라 하는 수많은 가수들이 부른 소월의 명작 '부모'-. 그런 기분으로 다시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동영상 www.youtube.com/embed/XhSHtm2KGGE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열린세상] 역사교육의 정상화에 부쳐/홍성걸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열린세상] 역사교육의 정상화에 부쳐/홍성걸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중고등학교 역사교육이 비정상적 상황에 부닥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특히 근현대사 부분의 교육이 종북성향을 보이거나 우리의 정치 경제적 성과를 비하하는 모습을 고발하곤 했다. 이제라도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 미래 세대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책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교육 정상화의 첫 번째 방법으로 교과서의 국정화를 선택했다. 국정교과서로의 회귀에 대한 찬반양론은 누구라도 가능하고 건설적인 반대라면 얼마든지 서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금의 반대론자들의 근거는 이성적이고 논리적 토론과 타협의 범위를 크게 벗어났다. 반대의 가장 두드러진 근거는 친일 및 독재의 미화 가능성이다. 박 대통령의 부친인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것이 친일파라는 것이고 유신독재를 했으니 그 시기를 미화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려는 우려로서 그쳐야 한다. 국정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특정 인물이나 시기를 미화한다면 그것을 그냥 두고 보겠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를 가능성만 가지고 형사 처벌하자면 동의하겠는가? 두 번째 근거는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한다는 주장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하나의 교과서를 쓴다고 해서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교과서 집필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우리 세대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세월과 함께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천착(穿鑿)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한다고 하여 이 정부가 교과서를 직접 쓰는 것도 아님은 물론, 앞으로 역대 정부의 국사편찬위원회가 다양한 이념과 가치관을 가진 많은 학자를 모아 합리적으로 편찬해 간다면, 그래도 국가가 역사해석을 독점했다고 하겠는가? 세 번째와 네 번째 근거는 선진국 중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과 과거 우리의 국정교과서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탄생했다는 점이다. 선진국들의 역사교육은 다양한 문제를 토론식으로 진행하여 학생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 대부분 교사에 의한 일방적 지식 전수와 암기식 수업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실제 채택되고 있는 7종의 역사 교과서들은 다양성보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경도되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학교에는 테러에 준하는 위협이 가해져 결국 채택을 취소했다. 이것이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다양성인가? 지금 교육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입각한 역사 해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이다. 과거 박정희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를 정권 홍보와 정당화에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와 지금은 민주주의의 발달 수준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야권과 역사학 교수들의 반대만 보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는 국정화의 부작용으로 지적되고 있는 정권 홍보나 미화를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국정화 반대는 논리적 합리성을 결여했다. 야권은 대통령이 우리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간다고 비난한다. 필자가 보기엔 국정화 자체가 사회를 양분한 것이 아니라 국정화를 반대하기 위해 야권이 동원한 친일 독재 미화 프레임이 사회를 양분하고 있다. 필자는 국정화가 역사교육의 비정상을 정상화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교과서와 상관없이, 역사교육 시간이 아니어도 일부 교사들이 역대 대통령을 폄하하고 천안함 용사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의 성취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사들이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미래 세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톡!톡! talk 공무원] ‘1년에 200일 이상 갇혀 사는 남자’ 김기원 인사혁신처 시험출제과 사무관

    [톡!톡! talk 공무원] ‘1년에 200일 이상 갇혀 사는 남자’ 김기원 인사혁신처 시험출제과 사무관

    “아이고, 말씀 마십시오. 철통입니다. 보안에 관한 한 말이죠.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힐 테니까.”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5층 접견실에서 만난 인사혁신처 시험출제과 김기원(49) 사무관은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심리학 박사인 그는 “흔히 생뚱맞다고 보는데 인사 업무야말로 심리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며 “산업심리학 전공이기 때문에 핵심인 공직적격성평가(PSAT) 시험과 관련해서는 알맞은 업무”라고 말했다. 시험출제과에서 ‘전문관’으로 일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묻자 거침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갔다. 대학교 시간강사를 전전하던 2002년 12월 직원 공모 소식을 들은 지인이 “당신한테 딱이야”라고 권유해 응시했다고 한다.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각종 시험을 앞두고 격리돼 지내야 하는 것이란다. 지난해 시험 출제 관계자들과 합숙한 날만 211일이나 된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관은 “합숙하는 건 감옥에 들어간 것과 다르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경기 과천시 중앙동 정부청사에 자리한 국가고시센터 모양새도 감옥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정방형인 데다 한가운데 정원을 갖춘 게 그렇다. 침실 빼고는 폐쇄회로(CC)TV 천국이다. 방호원들이 시시때때로 센터 안팎을 순찰한다. 김 사무관은 “예전엔 센터 위치까지 비밀에 부쳤는데, 하도 발달한 정보망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뚫려 온라인 등 여기저기 떠다닌다”고 말했다. 합숙하러 센터에 들어갈 땐 먹을거리, 입을거리 등을 여행용 가방에 잔뜩 싸야 한다. 길게는 4주 정도 일절 바깥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출제위원은 소주를 챙겼다가 압수당하기도 했다. 김 사무관은 “처음에 위촉할 때부터 주의 사항을 미리 알려 주기 때문에 몰랐을 리 없는데, 아마 워낙 술을 즐기는 분이라 슬쩍 떠봤던 것 같다”고 되뇌었다. 한때 탄산음료마저 반입 금지 목록에 포함됐다. 그래서 어떤 출제위원은 “밥을 한데 모아서 알코올을 생산하자”는 기발한 발상(?)도 내놨다는 후문이다. 더러는 “여태껏 살면서 이렇게 오래 술을 끊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웃더란다.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휴대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물론이다.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듯 신분을 확인한 뒤 핸드스캐너로 몸수색까지 거친다. 합숙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밀이다. 김 사무관은 “남은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낼 때도 보안업체 직원을 동원해 말려서 가루로 만든다”고 말했다. 역시 문제 유출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자 고육책인 셈이다. 그나마 국가고시센터가 생긴 2005년 이후엔 훨씬 나은 편이다.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 입주했던 땐 기막힌 사연이 쏟아졌다. 시험지를 인쇄하고 봉투에 넣는 작업도 이곳에서 했다. 한 봉투에 35장씩 들어가는데,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라 혹시 잘못될까 걱정돼 직원들끼리 번갈아 손으로 헤아리고도 모자라 저울에 무게를 달아 봉인했다. 김 사무관은 “시험출제과 근무를 자원한 여성 사무관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마치 차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외부 업체에서 가져온 설비를 가동하느라 더워서 웃통을 벗고 일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식당 아주머니, 여성 타자수와 함께 주방에서 재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문제지에 오류가 나타날까 우려해 점 하나까지 직원들끼리 돌아가며 입으로 일일이 읽어 점검해야 한다. 한 과목에 많게는 B4용지 20쪽이다. 따라서 꼼꼼한 손길이 필요한 업무다. PSAT의 경우 3개 영역(언어수리·자료해석·상황판단)마다 출제위원이 13명씩 붙는다. 단 1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토론을 벌여 전원 합의된 후에야 통과된다. 만약을 대비해 전년도 합격자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 모순을 찾고 의견을 내게 한다. 시험출제과 입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공무원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글 사진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알고 싶은 문화유산 뉴스들/전범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옴부즈맨 칼럼] 알고 싶은 문화유산 뉴스들/전범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최근 지나간 과거,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논쟁들이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역사를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은 현재와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국가 간, 세대 간, 정치 집단들 간에 같은 역사적 결과를 놓고 다른 역사적 이해가 스며들어 있는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과거를 놓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에 대한 논의는 보다 다양하고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공개적인 평가를 통해 보완되고 발전돼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문적인 작업과는 별개로 일반 시민들이 역사에 대한 이론이나 맥락들을 잘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흐름을 관통하면서 그 맥락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친숙한 방식으로 과거가 우리에게 남겨 준 문화유산들을 사례별로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보통 문화유산에는 기념물에서부터 건조물, 유적지 등이 포함된다. 무형문화유산 및 기록유산 등도 중요한 우리의 역사적 유산이다. 이들에 포함된 과거는 지금의 우리를 반추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자양분이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가까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음에도 유네스코라는 국제기구에 의해 발표되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목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가 내재된 문화유산들을 등재시키는 방식으로 국가별 문화의 다양성을 소개하고 알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규모에 따라 국가의 문화적 우수성이 비교되고 우열을 평가하는 일이 종종 연계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결과물들이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고 접해야 하는 문화유산들은 더욱 많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알아야 할 과거의 모습은 보기에 아름다운 유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모습들이 균형 있게 포함돼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고 알고 싶고 알아야 할 문화유산들에 대해 언론의 더 깊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국내 언론들은 문화 소재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공간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가령 어느 곳에 맛집이나 구경거리가 있고 어느 곳을 여행하는 것이 즐겁다는 방식으로 문화 뉴스의 공간화가 이루어진다. 반면 문화 소재 뉴스를 시간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공간적으로 산재해 있는 문화유산에 내재된 시간적 숨결을 짚어 나간다거나 또는 우리의 문화적 가치나 정신을 구성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좀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론의 문화 소재 뉴스는 역사적 결과물들이 갖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층위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서울신문의 경우 그동안 소개한 문화유산이나 문화 소재 뉴스 보도를 살펴볼 때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는 문화 소재 소개를 비롯해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공연, 문화축제, 장소 탐방, 신간 소개 등이 많은 편이었다. 서울신문이 문화유산 이야기라는 시리즈 기획특집을 온라인 서울신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제공해 왔지만, 그럼에도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시공간적 심층적 접근은 부족해 보인다. 다양한 기획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역사서 소개나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들을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있게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기회도 만들었으면 한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 ‘암초에 만든 인공섬’ 국제법상 영해 인정 안 돼

    27일 미국 구축함 래슨함의 진입으로 긴장이 한층 높아진 남중국해 갈등의 핵심은 중국 고유의 영해인가, ‘항행(航行)의 자유’가 있는 공해인가로 압축된다. 각국은 국제법으로 해안선에서 12해리(약 22㎞)를 영해로, 200해리(370㎞)까지를 배타적경제수역(EEZ)으로 지정할 수 있다. 영해는 바다의 영토로, 해당 국가가 수중과 상공에 대해서도 고유의 지배권을 갖는다. 즉 영해와 그 상공을 지나가는 비행기, 선박은 해당 국가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내수가 아닌 영해일 경우 외국 선박은 연안국의 안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항해할 권리, 즉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을 국제법으로 보장받는다. 중국은 본토 연안에서 1000㎞ 떨어진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 군도, 베트남명 쯔엉사 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에 대해 역사성을 들어 영해라고 주장한다. 가장 먼저 발견해 이름을 붙였으며 2000년 전부터 관할했다는 게 중국 측의 주장이다. 반면 미국 등은 역사적 경위에 기초해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유엔 국제해양법(UNCLS)에 어긋난다며 스프래틀리 군도 주변은 공해라고 반박해 왔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이곳에 대해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암초를 메워 인공섬 7개를 건설하고 인공섬 주변 12해리 이내를 영해라고 주장하면서 남중국해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특히 수비 환초와 파이어리크로스 환초에 활주로를 건설한 중국이 미스치프에 세 번째 활주로를 건설 중이라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지난달 15일 보고서가 나온 이후 중국은 이 일대를 군사 기지화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암초에 시멘트를 부어 넣어 만든 인공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또 이 인공섬 주변을 영해라고 하는 주장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국제법상으로는 암초나 인공섬을 기점으로 영해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유권이 인정되는 섬이냐, 아니면 단순 암초냐 하는 구분은 섬에 식수가 나와 거주가 가능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다. 화산 활동이나 융기 작용 등의 지각변동으로 섬이 생겨나 진짜 섬으로 인정받게 되면 그 섬을 기점으로 주변 12해리 이내는 영해가 된다. 중국이 건설한 인공섬들은 이런 영유권을 인정받는 ‘진짜 섬’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미국 등은 주장한다. 미스치프 환초와 수비 환초는 만조 때 물에 잠기는 암초다. 암초를 기점으로 영유권을 인정하면 항행의 자유는 무너져 버린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필리핀 등 인접국들은 “그동안 전 세계의 배들이 자유롭게 항해하고 그 상공을 비행기들이 지나다니던 지역에 중국이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우리 영해니까 우리한테 허락받고 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법적인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영해권이 설령 존재한다 해도 이번 미군 함정 통과로 무해통항권이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군 함정 통과가 일회성 작전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도 무해통항권을 근거로 지난달 초 미국 서알래스카에서 12해리 이내인 알류샨열도 근처에 자국 군함을 통과시킨 바 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함정 진입 만지작 美, 미사일 시위 中… G2 ‘남중국해 평행선’

    함정 진입 만지작 美, 미사일 시위 中… G2 ‘남중국해 평행선’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에서 최근 전자전 부대와 항공병 등을 동원한 미사일 발사 훈련을 강행하며 사실상 미군을 겨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앞서 미 태평양함대 스콧 스위프트 사령관(해군 대장)은 23일(현지시간) 남중국해 인공섬 12해리(약 22㎞) 이내에 진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AP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일본 도쿄의 외교 소식통들은 25일 “미국 함정들의 진입은 시간이 언제냐가 문제일 뿐”이라며 “함정 진입에 대해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 “함정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앞으로 1~2주가 고비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대처하기 위해 잠수함에 대함미사일을 다시 장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미 해군연구소(USNI)가 전했다.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조성에 반대하는 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는 베트남, 필리핀 등은 군사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등 관련 국가 간의 대립이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과 미국은 외무·방위성 간 협의를 마친 데 이어 지난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측근인 가와이 가쓰유키 총리 보좌관 겸 자민당 의원을 미국에 보내 백악관 관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가와이 보좌관의 말을 인용, “두 나라는 중국의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를 우려하며 국제법을 통한 평화적 해결에 같은 입장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19일 일본 요코스카항에 미국 7함대 이지스함 ‘벤폴드’가 배치되는 등 지난 6월 ‘챈설러스빌’에 이어 올 들어 2대의 이지스함이 추가 배치된 것도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억지력 확보 차원으로 해석된다. 미·일 및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 군도, 베트남명 쯔엉사 군도, 필리핀명 카라얀 군도) 암초에 시멘트를 부어 넣어 인공섬을 만들고 이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며 공동 대응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또 “남중국해 바다와 하늘의 통항 자유를 막기 위한 ‘바다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반면 중국은 이 인공섬에서 12해리 이내는 역사적으로 중국 영해라고 주장하며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베트남, 필리핀, 호주 등에 군수물자 및 기술 등을 제공하는 내용의 협의를 가속화하는 한편 국방장관의 방문을 준비하는 등 국방 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안보법제의 통과로 일본 자위대의 역할 및 활동 범위가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다음달 베트남을 방문해 풍꽝타인 베트남 국방장관과 회담한다.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에서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인공섬을 만들어 군사 거점을 구축하는 것을 논의하고 방위 장비 취급 등 방위 능력의 향상을 위한 ‘능력 구축 지원’ 추진 등에 관해 협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26일부터 여는 제18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5중전회)에서 국방개혁안과 함께 긴장 수위가 고조되는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을지 주목된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특파원 칼럼] 중국의 검정, 한국의 국정/이창구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중국의 검정, 한국의 국정/이창구 베이징 특파원

    중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국정일까 검정일까.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여서 당연히 국가가 역사책을 도맡아 기술하는 국정 체제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모든 교과서가 검인정 체제이며 검인정의 주체도 중앙정부가 아니라 성과 직할시 정부다. 검인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선택할 권리는 학교에 있다. 산둥성 고교생들은 문·이과 구분 없이 3년 동안 한 권의 역사 교과서를 배우지만, 바로 아래에 있는 장쑤성의 문과 학생들은 1년에 두 권의 역사 교과서를 떼야 한다. 교과서 검인정을 규정한 법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의무교육법’ 제38조를 보면 “교과서는 국가 교육 방침과 수업 표준에 맞게 저술되어야 하고 유관 국가기관의 관료와 심사 당사자는 교과서 저술 및 편집 업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돼 있다. 교육부와 검인정 관련자의 교과서 저술 개입을 법으로 차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내용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과제’인 1989년 톈안먼(天安門) 시위 및 유혈 진압에 대한 내용은 중·고교 교과서는 물론 대학 서적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티베트와 신장(新疆)의 독립운동은 테러로 규정될 뿐이다. 법에 규정된 교과서 집필의 자유는 껍데기일 뿐 집필자들은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만 쓰고 있다. 지난 6월 톈안먼 사태 26주년을 취재하면서 베이징대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때 이 사건을 배웠냐고 물은 적이 있다. 허베이성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은 “교과서에서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후이성 출신 학생은 “책에 ‘소요 사태가 있었다’고 딱 한 줄 쓰여 있었지만, 역사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비교적 많이 말씀해 주셨다”고 했다. 사태 당시 희생자를 가장 많이 낸 베이징대에서도 어느 교수는 “당시 많은 선배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어느 교수는 “서방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의 국가 전복 기도”라고 매도한다고 한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한 대학원생은 “자신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경제 규모가 세계 2위인 중국은 자신을 ‘대국’(大國)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중국을 ‘거대한 시장’으로만 여길 뿐 중국이 보여 주는 가치와 의식을 배우려는 경우는 드물다. 중국이 진정한 대국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숨 막히는 획일화일 것이다. 모든 결정과 해석은 공산당 지도부가 내릴 테니 국민은 ‘닥치고’ 돈만 벌라는 획일화 말이다. 돈을 향해 달려가는 획일화는 정치·사회·이웃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을 낳았고 이는 소수 공산당 지배층이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 토양이 됐다. 비록 중국이 경제적으로 한국의 숨통을 쥐고 있다고 하나 우리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게 바로 사고의 다양성이다. 다양하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중국에서 살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중국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바꾼다고 해도 저항할 중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정으로 전환한들 변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국정 회귀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 입맛대로 역사를 쓸 것이라는 우려를 넘어 우리가 애써 쌓아 온 다양한 가치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window2@seoul.co.kr
  • 원로들 내세운 與… 집필진 앞세운 野… 국정화 대리 공방

    여야가 22일 원로와 교과서 집필진을 각각 내세운 간담회를 갖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혈투’를 이어갔다. 여당은 원로를 내세워 지지층을 대상으로 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반면, 야당은 교육 현장 관계자들의 입을 빌려 여론전을 확산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들 간담회에는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가 각각 참석해 행사의 무게감을 더했다. ●與, 송복 교수 등 초청… “現교과서는 독극물” 새누리당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회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등 원로 학자들을 초청해 ‘올바른 역사교육, 원로에게 듣는다’라는 주제의 간담회를 가졌다. 송 명예교수는 검인정제도가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검인정)을 갖고 역사를 서술하도록 했는데 가장 나쁜 결과를 갖고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행 역사교과서를 ‘독극물’에 비유하며 “학생들이 독극물을 계속 받아 마셔야 하는 상황”이라고 비난했다. 국사학계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했다. 송 명예교수는 “국사학계는 진화되지 않은 ‘갈라파고스 학계’나 다름없다”고 말했고, 박 명예교수는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단순히 이념적 카르텔이 아닌 이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명예교수는 “비상 당원대회를 열고 당부터 이론 무장을 해야 한다”고 독려하기도 했다. ●野, 집필진 간담회 열어 여당 논리 반박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 저지특위는 ‘한국사 교과서 대표 집필진에게 듣는다’라는 주제의 간담회를 가졌다. ‘천재교육’ 대표 집필자인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정부·여당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데 발언 대부분을 할애했다. 주 교수는 “주체사상에 대해 서술하도록 교육과정에 명시한 것은 교육부다. 안 쓰면 불합격이 된다”면서 현행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현행 고교 역사교과서에 유관순 열사 내용이 누락됐다는 교육부 홍보 동영상에 대해 “중학교 3학년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고 반박했다. 권내현 고려대 교수는 “과거 우리 사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면 일본은 ‘국정교과서를 쓰는 한국이 검정교과서를 쓰는 일본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면서 “이 같은 논리가 다시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결국 국정화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촉발시키고, 우경화의 연쇄로 국제적 갈등도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오늘의 눈] ‘이순신 전적’ 23승0패 vs 13승3패/김학준 사회2부 부장급

    [오늘의 눈] ‘이순신 전적’ 23승0패 vs 13승3패/김학준 사회2부 부장급

    ‘23전 23승.’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 불패 신화다. 하지만 사학자 백지원은 저서 ‘조일전쟁’(임진왜란)에서 16전13승3패로 규정지었다. 전장으로 가는 도중 우연히 조우한 소규모 일본 함선이나 항구에 정박한 빈 배를 격침한 것은 해전에 포함시키지 않고, 전투 의지를 지닌 10척 이상 함선끼리의 전투를 해전으로 간주했다. 백씨는 또 구체적인 사료를 들어 그동안 승전으로 알려진 웅포해전과 장문포해전은 사실상 이순신의 패배로 판단했다. 백씨는 “이순신도 사람인 이상 싸울 때마다 이길 수 없는데 과거 정권이 이순신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 전공을 부풀렸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이순신은 전공을 떠나 탁월한 지혜와 인품, 애민정신 등으로 볼 때 진정한 영웅”이라면서 “그에게 덧씌워진 우상의 더께를 이제는 벗겨 낼 때가 됐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인 선조는 요즘 각종 사극에서 난타당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날 국정 교과서에서 선조는 난을 극복해 묘호에 ‘조’가 붙은, 제법 괜찮은 왕으로 배웠다. 그러나 ‘징비록’을 비롯한 역사서에서 선조는 ‘비겁하고 간교한 소인배’로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가 신의주까지 달아난 뒤 중국에 망명을 요청하자 한 신하가 “필부조차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 하는데 군주가 자신의 안위만 도모한다”고 질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 이후 역사 연구·해석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는 정권과 보수세력에게 불리한 것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고, 도움이 될 만한 사안은 부풀리는 도구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검인정 체계 도입으로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보장된 이후에는 과거에 자신이 없는 세력에게 불편한 진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다양성이 팩트를 저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팩트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전제가 되고 있다. 여당과 보수학자들이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좌편향과 자학사관이다. 하지만 교과서를 읽어 보면 과거에 비해 북한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한 것은 사실이나 전체적 맥락에서 옹호라고 보기는 힘들다. 적확성·균형감 등이 결여된 부분이 더러 있지만 검인정 교과서의 장점을 포기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며, 수정이 가능한 부분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정이 진행돼 왔다. 자학사관 문제도 그렇다. 독일은 각 주에서 자율적으로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를 기술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뼈아픈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두 번의 실수를 경계하자는 성찰이다. 누구도 이것을 자학사관이라 하지 않는다. 문정왕후와 함께 조선을 망친 대표적 왕비로 꼽히는 민비를 “제 한 몸 바쳐 나라를 구하려 한 국모”로 묘사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학생들에게 패배감을 심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끄러운 역사를 덮거나 미화하면서 어떻게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수 있을까. kim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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