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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나폴레옹 손자의 롤러코스터 인생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나폴레옹 손자의 롤러코스터 인생

    괴제 나폴레옹 3세/가시마 시게루 지음/정선태 옮김/글항아리/560쪽/2만 8000원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작은 키, 한 손을 재킷 안에 넣은 특유의 포즈와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 내려온다. 프랑스와 별 관계도 없는 나라 국민들은 나폴레옹 양주를 마시고 나폴레옹 과자점에서 사온 간식을 먹으며 그 옛날의 영웅을 가끔 생각한다. 열정이 가득했던 젊은 날의 나폴레옹이라도 기대하거나 상상하기 어려웠을 광경이리라. 그러나 나폴레옹 3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선조의 덕을 본 능력 없는 손자쯤.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에 대해서 조금 아는 이들이더라도 평은 후하지 않다. 바보이거나, 독재자이거나. 잘 봐준다고 해봐야 분에 넘치는 선대의 명예를 탐낸 평범한 남자를 넘어서지 못한다. 프랑스 역사에서 제2제정(1850~1880)은 뚜렷한 발전의 시기다. 이 시기는 새로운 프랑스의 태동기라 할 만하다.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생활방식도 변화했고, 대규모 산업이 발전하면서 금융조직도 덩달아 활발하게 돌아갔다. 대형백화점, 극장,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3세를 다시 평가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 역할을 자처한 프랑스 전문가인 저자는 나폴레옹 3세의 이름 앞에 ‘괴제’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인물, 그러나 미화할 수는 없는 독재자. 이 책의 결론이다. 나폴레옹의 첫 부인 조세핀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오르탕스와 나폴레옹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낳은 아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외손자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비범한 운명을 깨달은 남자. 그는 결코 잘생기진 않았지만,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꽤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이 프랑스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그는 일찍부터 권력싸움에 뛰어들어 황제가 될 길을 닦는다. 저자는 54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그의 고군분투를 상세히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몰락은 급격했다. 흥청망청 방탕하게 즐기던 황제는 급기야 외교실패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불러오고, 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제2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거의 말이 없고 글로 써서 남긴 것은 더욱 없는 탓에 업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나폴레옹3세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듣는다면, 다른 남자가 생각나겠다.
  • [2030 세대] 1987년의 6월과 1989년의 6월/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2030 세대] 1987년의 6월과 1989년의 6월/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한국의 1987년 6월과 중국의 1989년 6월만큼 자국에서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달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1987년 6월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끝내 성취해낸 영웅적인 달로, 2년 전에는 30주년 행사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그날은 오랜 독재와의 투쟁을 끝내고 마침내 대한민국이 참된 민주국가로 들어섰다는 민주화 세력의 승전기념일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하지만 중국의 1989년 6월은 전혀 달랐다. 그달은 톈안먼광장에서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무참히 쏴죽인 그런 달이고, 중국 정부가 결코 인민에게 민주화의 기억을 소생시키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은폐하려는 그런 달이다. 아마 이웃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비슷한 사건으로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하는 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빚었을까? 운동가들의 절실함이 차이점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가 한국 현대사보다 더욱 비극적이면 비극적이었지 딱히 그 질곡의 크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톈안먼에 핏자국을 남긴 학생들도 1980년 광주의 시민만큼 절실했다. ‘87년의 6월’과 ‘89년의 6월’을 가른 차이는 결국 두 가지로 종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외부세력, 즉 미국의 개입 여부였다. 당시 미국은 신군부를 억제할 수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는 교육받은 광범위한 도시 중산층의 유무였다. 한국에서는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팽창한 도시 중산층이 ‘넥타이 부대’로 뛰쳐나와 정권에 최종적 타격을 입혔지만, 중국은 여전히 대다수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성장을 염원하는 극빈층 농민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당대 중국은 민주주의 역량이 미약했고 권위주의 세력의 역량은 너무나 강력했다. 하지만 톈안먼 사건 이후 30년간 중국도 비슷한 변화를 겪으며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폭발적 경제성장과 도시화, 대미 의존도의 증가 등이 최근 중국이 겪은 변화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박정희 시대부터 전두환 시대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일과 대동소이하다. 온전히 일대일로 등치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지금 100만명씩이나 운집한 홍콩의 시위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한국이 가진 자산 중 하나가 갑작스럽게 각광받을 수도 있다. 바로 시민저항의 전통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노동쟁의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몇몇 네티즌들은 불법으로 영화 ‘1987’을 내려받아 보는 상황이다. 물론 억압적 중국 국가 질서 아래에서 이 같은 움직임이 어느 정도 크기로 분포하고 있는지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무역전쟁이라는 외부 충격과 내부 반발이 중국을 거세게 압박하는 지금, 1987년 6월의 기억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칠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아는가, 그리하여 1989년 6월의 기억도 살아날지.
  • 역사 원로 18명 “약산 김원봉, 당리당략 이용되는 현실 통탄”

    역사 원로 18명 “약산 김원봉, 당리당략 이용되는 현실 통탄”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이후 불거진 ‘김원봉 논란’에 대해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광복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지난 12일 성명을 내어 “약산 김원봉이 당리당략에 이용되는 현실을 통탄한다”고 보수진영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원웅 광복회장과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종찬(전 국정원장) 우당장학회 이사장, 이부영 여운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원로 18인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빛나는 항일 영웅이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며 “그를 역사의 양지로 불러내는 것이 평화의 한반도를 향한 도정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이 집결했다’고 말했다”며 “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추진됐던 ‘국정 역사교과서’조차 기술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원로들은 “대통령의 발언은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이념과 관계없이 단일대오를 구축한 사실을 상기시켜 우리 사회 통합의 당위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정치권 일부와 보수 언론은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북의 전쟁 공로자에게 헌사를 보낸 대통령’이라고 반응을 보이며 ‘구태의연한 색깔론 프레임을 다시 등장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광복 후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던 약산 김원봉을 철지난 이념논쟁으로 외람되게 인구에 회자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외로운 사나이가 찾아간 삼각지… 눈물의 비표 새긴 애창곡 되다

    외로운 사나이가 찾아간 삼각지… 눈물의 비표 새긴 애창곡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7회 서울의 대중음악1(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편이 지난 8일 용산구 한강대로와 원효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지하철 삼각지역 안 기타를 치는 배호(1942~1971) 좌상 앞에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서울의 5번째 노래비 ‘돌아가는 삼각지’를 둘러보고 배호길을 따라 왜고개 성지~아모레 퍼시픽 사옥~용산전자상가를 걸었다. 임진왜란 때 당사국 조선을 제쳐 두고 명나라 심유정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화의를 맺은 심원정 터~유서 깊은 용산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범죄심리학의 개척자 장병림 가옥~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원삼탕, 창성옥, 경의선숲길공원까지 2시간 30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배호의 노래를 포함해 6건의 서울미래유산이 즐비했다. 1978년 타계할 때까지 원효로에 거주한 박목월 시인을 기리는 목월공원과 청노루힐 옛 자택 구경은 덤이었다. 이준섭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차분하고 깊이 있는 해설을 들려줬다.대중가요 가사에 투영된 서울은 서울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노랫말은 특정 시대, 특정 장소, 특정 시각에 대한 경향성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영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대중가요에 나타난 서울의 길’에서 “대중의 경험과 욕망을 통해서 걸러진 서울을 보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서울을 소재로 한 노래를 통해 서울에 대한 당대인의 꿈과 희망 혹은 불안과 좌절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은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진 야누스적 도시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대중가요의 소재로 활용되는 이유는 근대성이 가장 잘 체현된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유정 단국대 교수는 ‘서울 노래를 통해 본 서울의 풍경’에서 대중가요는 “당대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통해 당대인의 시각과 정서를 헤아릴 수 있다.서울을 노래한 대중가요는 몇 곡이나 될까.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의 ‘대중가요에 녹여낸 서울 100년’ 자료에 따르면 가수 710명이 1141곡의 서울 노래를 불렀다. 이 중 제목에 ‘서울’이 포함된 노래만 544곡이었다. ‘명동’이 85곡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한강 70곡, 서울역 55곡, 남산 40곡 등의 순이었다. 가수별로는 각각 14곡을 부른 나훈아와 이미자가 1위를 차지했다. 작사자로는 31곡을 지은 반야월이 돋보였다. 박춘석이 가장 많은 22곡을 작곡했다. 1930년대 대중가요의 3대 키워드는 ‘서울’, ‘한강’, ‘종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지명을 노래 제목에 처음 사용한 최초의 노래는 1929년 발표된 랑소희의 ‘서울마치’였으나, 1932년에 발표된 이애리수의 ‘자라메라’ 노랫말에 ‘종로네거리’가 등장하는 등 내용상 최초의 서울 노래로 평가받는다. 궁궐과 관청 그리고 지배계층과 상권이 몰려 있는 종로는 한양천도 이래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위상이 쇠락했다. 1950년대에 나온 현인의 ‘서울야곡’이나 나애심의 ‘미사의 종’이 그렇듯 해방 이전까지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된 명동과 충무로 일대 남촌이 대중문화의 주 무대로 주목받았다. 대중가요 가사의 중심지가 1920년대 종로에서 1930~40년대 명동·충무로로 옮겨 갔다가 1950년대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광화문, 종로, 남대문, 서울역 일대로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1960년대 대중가요에서 주목할 것은 노랫말이 서울 사대문을 벗어나 사대문 바깥으로 뻗어나갔다는 점이다. 서울의 양적 팽창이다. 1967~68년에 발표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공원’,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이 대표작이다. 이른바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이 가요계에 진출하면서 과장되고 서구화된 서울의 모습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명동과 무교동에 머물던 대중문화의 중심지가 종로로 중심 이동했으나 1979년 혜은이의 ‘제3한강교’를 시작으로 윤수일의 ‘아파트’,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문희옥의 ‘사랑의 거리’ 등으로 흐르면서 1980년대 대중가요의 주 무대는 강남으로 강을 건넜다. 서울 노래는 1973년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1982년 이용의 ‘서울’, 1988년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등이 맥을 이었다.1968년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뒤 건설된 입체교차로가 시민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새 서울’ 건설의 상징물이었다. 전차의 궤도와 전깃줄이 사라지면서 고가도로와 육교가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중 삼각지 입체교차로가 군계일학이었다. 장르는 트로트지만 세련된 재즈 스타일을 선보인 배호의 창법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지하 8층까지 내려가는 공포의 저음’과 ‘바닥까지 끌고 가서 밀어올리는 절절함’이 불후의 곡을 탄생시켰다. 이 노래는 1963년에 만들어졌지만 1967년 입체교차로가 들어선 뒤 창작한 노래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작곡가 배상태는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로 가던 중 삼각지에서 한 사내가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취입할 가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은 일화도 남겼다. 당대의 인기가수 남일해는 연습만 했고, 금호동은 퇴짜를 놓았다. 유망 신인가수 남진도 여의치 않자 무명가수 김호성이 녹음까지 했지만 음반을 내지 못했다. 배상태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배호의 허름한 전셋집을 찾았다. 건강이 악화돼 거동조차 힘들던 배호는 녹음을 사양하다가 쓸쓸한 분위기가 자기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다면서 가래를 뱉어 가면서 병상에서 녹음을 강행했다. 5년 묵은 곡이 배호를 만나서 빛을 본 셈이다. 서울에는 모두 9개의 노래비가 있다. 서울 노래비 1호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이며 1995년 광화문 세종로공원에 세워졌다. 2호는 반야월 작사, 이해연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 서 있다. 3호는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인데 1997년 마포구 도화동 마포근린공원에 세워졌다. 4호는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며, 강북구 번동 북서울꿈의 숲에 있다. 5호는 2001년 용산구 삼각지에 세워진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다. 6호는 2008년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앞 벽면에 있다. 7호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다. 2008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등진 작곡가 이영훈 1주기를 맞아 정동길과 정동교회가 바라보이는 덕수궁 돌담길 앞에 세워졌다. 8호는 1965년 발표된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을 기려 2010년 영등포 타임스퀘어광장에 세워졌다. 9호는 의료사고로 숨진 신해철을 기리고자 2015년 북서울꿈의 숲에 벤치 형태로 건립됐다. 넥스트3집 수록곡 ‘세계의 문(유년의 끝)’이 새겨졌다.배호는 1981년 MBC특집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로 선정됐고,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국민가수 10인’에 올랐다. 전국 방방곡곡에 배호의 노래비 7개 있다. 서울 삼각지(돌아가는 삼각지)를 비롯해 경기 양주(두메산골), 경북 경주(마지막 잎새), 강원 강릉(파도), 인천 중구(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충남 보령(두메산골), 전북 정읍(잘 있거라 내장산아) 등이다. 전국에 배호사랑연합회가 활동 중이고, 올해도 제23회 배호가요제가 열려 언제 어디서나 배호의 노래가 애창되고 있다. 혹자는 그 이유를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눈물의 비표(秘標)’가 노래에 새겨진 때문이라고 푼다. 삼각지를 품은 용산은 13세기 몽골군 침입 때 병참기지, 16세기 임진왜란 때 일본군 주둔지를 거쳐 19세기 임오군란 때 청군 주둔지였다. 20세기 들어 전승국 일본인 마을, 철도기지와 군사기지에 이어 해방 이후 미군기지였다. 한반도를 유린한 외세의 각축장이자 침략 통로였고, 150년간 외국 지배세력이 머문 특수한 곳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단절과 망각의 도시다. 이처럼 용산에는 식민지 근대에 대한 불편함이 온존한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에세이집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서 “용산은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라고 지적하면서 “참담하고 역동적인 모더니티의 장소로서 용산은 다시 성찰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용산이 가진 과도한 산문성의 이면을 설명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8회 서울의 문학2(박완서의 나목) ■일시 및 집결장소: 6월 15일(토) 오전 10시 4호선 회현역 7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현대제철 환경 개선 위해 조업정지” “조업정지 10일이면 9000억원 손해”

    “현대제철 환경 개선 위해 조업정지” “조업정지 10일이면 9000억원 손해”

    행정심판 제기한 현대제철, 사과문 발송 경북도 포스코 상대로 행정처분 검토 중“현대제철 환경 개선 위해 조업정지시킬 것” Vs “조업정지 10일이면 손해가 9000억원!” 충남도와 현대제철이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한 당진제철소 용광로 브리더(안전배기밸브) 문제를 놓고 환경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제철은 12일 안동일 사장 명의로 충남도지사, 당진시장, 지역 시민사회단체 대표, 주민 대표 등 93명에게 사과문을 발송했다. 현대제철은 사과문에서 “당진제철소는 지역사회와 국민들로부터 관심과 기대를 받았는데 환경문제 거론으로 실망시켜 죄송하다”면서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만큼 건설 당시 초심으로 돌아가 친환경제철소가 되도록 모든 역량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사과문은 충남도가 지난달 30일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 10일간 조업정지(7월 15~24일)를 명령한 뒤 나온 것이다. 도는 같은 달 2일 환경단체 등과 당진제철소를 상대로 합동 점검을 벌여 100m 높이 고로의 맨 꼭대기에 설치된 브리더를 열어 여과 없이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한 사실을 적발하고 조업정지 처분을 했다. 브리더는 압력밥솥처럼 고로에 폭발위험 등이 있을 때 압력을 빼는 안전배기밸브로 평상시 열면 불법이다. 조업정지가 내려지자 현대제철도 지난 7일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처분 취소 및 집행정지 행정심판을 제기하며 맞불을 놨다. 구기선 도 환경보건과장은 “경북 포항과 전남 광양에 제철소를 둔 포스코에도 브리더 문제가 있다”면서 “충남도가 앞장서 투쟁의 물꼬를 트겠다”고 말했다. 충남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충남은 미세먼지 배출량 전국 1위,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는 단일 사업장 중 대기오염물질 배출량 전국 1위다. 현대제철은 사과를 했지만 조업정지를 피하기 위해 행정심판을 지속하고 패소에 대비해 행정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관계자는 “당진제철소에서 한 달에 쇳물 40만t을 생산하는데 10일간 조업을 안 하면 쇳물이 굳어 복구까지 3개월이나 걸린다. 이 기간 손실액이 강판 매출액을 포함해 9000억원 안팎에 이르러 우리 기업에는 ‘사망선고’나 다름 없다”고 호소했다. 현대제철이 행정심판에서 패소해도 행정소송까지 제기하면 조업정지가 계속 유보되는 만큼 소송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 경북도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고로 정비작업 중 정상적인 상황에서 브리더를 개방한 사실을 확인하고 조업정지 처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져 철강업계와 지자체 간 갈등이 계속될 전망이다. 당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글로벌 In&Out] 스탈린, 일본, 그리고 한국의 해방/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스탈린, 일본, 그리고 한국의 해방/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1945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분기점이 된 해이다.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 후 실시한 만주 공세작전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며 한국은 해방되었다. 미국 등 연합국과의 약속을 지켜 만주 공세작전을 실시하였으며 한국 땅에서 청진 상륙작전을 비롯한 일본군과의 전투를 몇 차례 벌인 소련은 한반도 해방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만주 공세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스탈린이 전후 아시아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봤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남기지 않은 인물의 생각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라도 일본과 전쟁 준비 중이었던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해방 직후의 한반도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엿볼 수는 있다. 이번에는 이 부분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자료와 사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하는 사실은 스탈린이 자라난 시대적 배경이다. 1904년 2월 9일 새벽,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군이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었던 러시아 함대를 습격하고 태평양함대를 봉쇄시킴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되었다. 러시아는 태평양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유럽의 발트해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보냈으나 그 함대는 1905년 5월 말 쓰시마 해전에서 전멸당했으며 ‘쓰시마’라는 단어는 이후 러시아어에서 완전한 실패, 또는 국치(國恥)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넘겨줬으며 당시 26세였던 주가슈빌리(스탈린)를 비롯한 러시아 젊은이들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된 후에도 일본을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일본 관련 자료를 많이 읽었다. 최근 러시아공산당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가 스탈린 도서실의 서적들을 스캔하고 온라인에 올렸다. 그 책 중에 아일랜드 출신인 오콘로이가 1936년에 쓴 ‘일본이라는 위협’(The Menace of Japan)이라는 책의 러시아어 번역본이 있다. 일본을 비난하는 이 책에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멸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 등을 묘사한 단락 옆에 적색 연필로 적힌 ‘못된 인간들’, ‘나쁜 놈들’ 등 스탈린의 친필 표기가 있다. 이런 메모를 통해 스탈린이 일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1941년 4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소련의 지도부는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으나 최근에 많은 연구자가 이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소련의 대일참전 직전인 1945년 6월 말~7월 초, 중화민국 행정원장인 쑹쯔원(宋子文)이 중소 관계와 전후 안보 문제 등을 논의하러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스탈린과 만났다.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쑹쯔원이 몽골 독립 문제를 언급하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고 해도 완전히 패망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일본은 강력한 민족이다. (중략) 일본은 무릎 꿇게 해도 시간이 지나면 독일과 똑같은 짓을 할 것이다”. 이 회담에서 쑹쯔원은 한국문제를 언급했고 신탁통치에 대한 스탈린의 의견을 물었다. 스탈린은 ‘외국 군대를 사용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나 그래도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면 그 목적이 한국의 독립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쑹쯔원은 이 시점에서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스탈린은 이 문제는 후견을 통해서 해결될 것이라고 했고 중국이 나중에 한국을 병합시킬 생각이 아닌가 쑹쯔원에게 물었다. 쑹쯔원은 당황하면서 한국인과 중국인은 차이가 많고 역사도 달라서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답했다.
  • 위기의 화웨이 “우리는 낙관하고 자신한다”

    위기의 화웨이 “우리는 낙관하고 자신한다”

    美 제재에 자신감… 구체적 대안 안 밝혀미중 무역전쟁이 기술 분야 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로 창사 후 최대 위기에 직면한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화웨이의 샤오양(邵洋) 최고전략책임자(CSO)는 11일 상하이 신국제엑스포센터에서 개막한 정보기술(IT)·가전 박람회인 ‘CES 아시아 2019’ 첫 기조연설자로 나서 “우리는 낙관하고 자신한다. 더욱 아름답게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샤오 CSO는 “모든 큰 기술 변혁은 용감한 자에게는 게임과 같다”면서 “이 잔혹한 경쟁에서의 승리자는 시대의 강자가 돼 새로운 역사의 무대 위에 설 수 있고, 실패자는 신구 교체 속에서 도태해 퇴장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구체적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는 상황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화웨이가 대외 환경 악화 속에서도 사업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샤오 CSO는 지금은 화웨이에 어려운 시기가 아니라 가장 좋은 시기라는 런정페이(任正非) 창업자의 최근 발언을 언급하면서 5세대(5G) 이동통신과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향후 사물인터넷(IoT) 분야의 중심 기업으로 부상하겠다는 구상도 공개했다. 샤오 CSO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모든 기기가 통합되는 방향에서 화웨이가 그 중심에 서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 “많은 가전업이 화웨이 중심의 생태계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화웨이는 스마트폰과 같은 핵심 상품 외에 일반 가전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웨이는 앞선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5G 네트워크 구축 분야를 선도했지만 미국 정부의 제재로 미국 기업들로부터 반도체 칩과 운영 프로그램 등을 조달하기 어려워지면서 독자 생존의 시험대에 올랐다. 따라서 이번 행사에서 화웨이가 구체적인 활로를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렸지만 샤오 CSO는 이날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 이후 어떻게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을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 올해로 5회째를 맞는 ‘CES 아시아 2019’는 세계 최대 가전 쇼인 CES를 주최하는 미국의 전미소비자기술협회(CTA)가 주최하는 아시아 지역 행사로 550여개 참가 기업 중 중국 기업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번 행사에는 스폰서로 참여하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30여개의 한국 기업이 참여하지만 소규모 전시 공간 또는 미팅룸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개별적 제품 시연과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람회는 13일까지 열리며 올해는 5G, AI, 자율주행차 및 커넥티드카 등 첨단 자동차 기술, 증강·가상현실(AR·VR), 로봇 등 분야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금녀의 벽’ 허문 미군 첫 女 보병사단장...블랙호크 조종사 출신 ‘경단녀’

    ‘금녀의 벽’ 허문 미군 첫 女 보병사단장...블랙호크 조종사 출신 ‘경단녀’

    미군 사상 최초의 여성 보병사단장이 탄생했다. 군의 여러 분야에서 ‘금녀의 벽’이 허물어졌으나 보병 지휘관은 여전히 여군이 넘볼 수 없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10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미 캘리포니아 주방위군(CNG)은 제40 보병사단장에 블랙호크(UH60) 헬기 조종사 출신 ‘경단녀’인 로라 이거(사진·54) 준장을 임명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거 준장은 전역하는 마크 말랑카 소장의 지휘봉을 이어받아 약 1만명의 병사를 이끄는 야전 지휘관이 됐다. 1986년 미 육군에 입대해 캘리포니아주립대 학군단(ROTC) 조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이거 준장은 3년 만에 헬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해 블랙호크 헬기 의무대 조종사로 활약했으나 아들을 출산하고 육아 문제 등으로 미 육군에서 퇴역하면서 한동안 경력 단절을 겪기도 했다. 이후 다시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으로 돌아온 그는 2011년 제40 전투비행여단 부여단장으로 이라크에 파병됐으며 험지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2016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역사상 네 번째 여성 장군이 된 이거 준장은 지난해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의 미 북부사령부 태스크포스팀 지휘관으로 옮겨 가 주목받았다. 이거 준장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에서 대대·여단·사단 지휘관을 모두 맡아 유리천장을 깬 첫 여성으로도 기록됐다. 그가 이끄는 제40 보병사단은 1917년 창설돼 1·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전통의 부대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지에도 파병됐었다. 이거 준장은 2016년 진급 당시 인터뷰에서 “여성으로서 군은 다른 어떤 직업도 필적할 수 없는 기회를 내게 제공했다. 여성은 군대 내에서 소수임이 분명하지만 내가 맡은 모든 임무에서 대부분의 남성 동료와 부하, 상급자들은 나를 지지하고 존중하며 조언해 줬다”고 말했다. 이거 준장은 또 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 소장으로 제대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언급했다. 이거 준장의 사단장 취임식은 오는 29일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로스알라미토스 합동 훈련기지에서 열린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로맨티시스트 무왕의 정원… 1500년 만에 깨어나는 서동요

    로맨티시스트 무왕의 정원… 1500년 만에 깨어나는 서동요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의 신수도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두고 맛동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유명한 신라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30대왕 무왕(재위 600~641)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 기이편은 무왕의 남다른 출생부터 왕위에 오르는 과정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전한다. 그의 모친은 과부로 궁의 남쪽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해 무왕을 낳았고, 무왕은 어려서부터 마를 팔아 가족을 부양해서 서(맛)동이라 했다. 신라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서 위와 같은 서동요를 유포시켜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백제로 돌아와 공주의 지참금과 그동안 모았던 큰 재력으로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다른 면모를 소개한다. 그는 법왕의 아들로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 즉위 이후 십수차례에 걸쳐 신라와 전쟁을 벌였고, 중국 수와 당나라에 적극적인 조공 외교를 펼쳐 고구려를 치도록 공작했다. 국토 곳곳에 전쟁용 성곽을 쌓았고, 사비성의 궁궐을 수리했으며, 국가 사찰인 왕흥사를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토목 건설 사업을 일으켰다. 이름에 걸맞게 부국강병을 꾀해 쇠락하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적인 왕이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역사서들은 같은 인물의 모순된 양면을 그리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동은 사랑을 위해 적국의 수도까지 잠행하는 희대의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무왕은 조국을 위해서 처가 나라인 신라를 끈질기게 공격하는 냉철한 제왕이다. 어찌 장인인 진평왕을 공격할 수 있는가 등의 이유를 들어 삼국유사의 기록을 허구적 설화로 치부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정원을 만들고 절경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삼국사기의 말년 기사들은 철혈군주 무왕이 로맨티스트 서동으로 다시 회귀했음을 보여준다. 상충되는 두 역사서가 모두 사실이길 바란다면, 이 정도로 절충해서 이해하고 넘어가자. 서동의 고향으로 알려진 익산은 부여, 공주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역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익산에는 왕궁리, 왕평뜰, 고도리, 궁성로 등 지명이 전하고, 무왕이 창건했다는 제석사와 미륵사 터, 왕궁 터, 그리고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쌍릉이 남아 있다. 남겨진 유적의 거대한 흔적들만 보아도 무왕의 호방한 뜻과 걸출한 기상이 보인다. 이를 토대로 익산이 일시적인 백제의 수도였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었다. 입증할 기록도 남아 있다. 일본 교토의 사찰인 쇼오렌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백제의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왕궁)로 천도하여 새로이 사찰을 경영했다”라고 적혀 있다.기록은 계속된다. “639년 큰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화를 입어 불당과 7층목탑, 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탔다.” 무왕이 새로이 경영했다는 사찰은 왕궁리 궁평마을에 위치한 제석정사(제석사)이다. 1993년부터 발굴 조사해서 ‘제석사’라는 명문이 쓰인 기와를 발견했고, 여러 건물 터도 찾아냈다. 가람 전체를 관통하는 남북 중심축 위에 정문-목탑-금당-강당 터들이 위치하고 그 외곽을 회랑과 승방들이 감싸는 모습이다. 모두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이다. 제석사는 불타기 이전인 600~630년 사이에 창건됐고, 무왕의 익산 천도도 그 시절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 사찰이면 수백 승려들이 거주하고, 수천의 신도들이 출입하게 된다. 주변에는 시장이 형성되고 민가들이 들어선다. 목탑지의 아래층 기단은 2m가 넘는 높이다.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솟은 목탑은 당시 초고층 건물로, 신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천도를 위해서는 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도시의 기반시설이 필요하다. 왕실이 운영하는 제석사는 익산 천도를 위한 중요한 선행 시설이었다.●제석사지·왕궁리유적… 455m 길이 운하형 연못 수도 익산의 중심은 왕궁이었다. 현재 ‘왕궁리유적’이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불리지만, 1989년부터 발굴 조사 결과 확실한 백제의 왕궁 터임을 확인했다. 일대는 넓은 평야지대지만, 남북으로 길게 솟은 언덕을 찾아 그 위에 터를 잡았다. 남북 490m, 동서 245m의 완벽한 직사각형 궁성을 쌓고 그 안에 여러 전각을 지었다. 조선시대 경복궁 면적의 4분의 1 정도로 일시적인 행궁으로 쓰기에는 충분한 규모다. 무왕 이후에 익산은 결국 수도의 지위를 잃어 왕궁은 폐지되고 사찰로 바뀌었다. 지상에 남아 있는 구조물은 ‘왕궁리5층석탑’이 유일한데, 사찰로 바뀐 백제 말 작품이라는 설과 고려 초라는 설이 팽팽하다. 왕궁 건물 터 위에 사찰 건물들을 세웠고, 그 시기 사찰에 필수적인 회랑이 없는 등 특별한 기능의 사찰이었다. 무왕이 사후에 익산쌍릉에 모셔짐에 따라 그의 명복을 비는 왕실 원찰이었다는 주장이 그럴싸하다. 뒤편의 볼록 솟은 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가운데 정상부에는 큰 정자를 세워 경치를 감상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말굽형 환수구를 파서 운하 형태의 기다란 연못을 만들었다. 폭은 3~7m, 전체 길이는 455m에 달한다. 정원에 물을 공급하는 집수시설인 동시에 자체로서 훌륭한 조경시설이 되었을 것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판 곡수로는 더욱 창의적이다. 환수구에 연결된 지류로 조성된 물길이며, 전체 길이 685m에 달한다. 마치 커다란 물결과 같은 모양으로 조성한 곡수로는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조경시설이다. 기이한 동식물을 키우고 독창적 정원을 만들어 경치를 즐겼다는 무왕의 풍류와 창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단한 정원유적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의 창건 설화는 특별하다. 무왕 부부가 왕궁 인근의 사자사로 행차할 때 연못에서 미륵3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탁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늪을 메운 후 3곳에 각각 불당과 탑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이 공인을 보내 공사를 도왔다니 당연히 왕비는 선화공주일 것이고, 당탑을 3곳에 세웠다니 통상적인 사찰 3개가 연립된 초대형 규모였다.●20년간 보수한 미륵사지석탑 주인은 사택왕후 오랜 기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미륵사의 전모가 드러났다. 4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의 절터는 동아시아 최대로 추정한다. 3개의 당-탑, 다시 말해 3개의 사찰이 나란히 놓여 동-중-서의 3원을 형성했고, 각원은 회랑으로 분리됐다. 중원에는 목탑을 세웠고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을 세웠다. 중원의 목탑을 비롯해 목조 건물은 물론 동원의 석탑도 조선 후기에 이미 사라졌다. 다행히 서원의 석탑은 반파된 부분이나마 기적적으로 남았다. 6층 일부까지 남았음에도 현존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커서 국보 중의 국보인 미륵사지석탑이다. 이 석탑은 기둥과 보 등 수천개의 부재들을 정교하게 깎아 조립한, 마치 목탑과도 같은 석탑으로 백제계 석탑의 원형이다. 일제기인 1915년, 붕괴 직전의 석탑에 185톤의 시멘트 덩이를 발라 흉측하나마 응급 보존공사를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999년, 응급용 시멘트마저 수명을 다해 완전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하게 된다. 정교한 조사와 연구 끝에 드디어 2019년 5월 재조립 공사를 마쳤으니 꼬박 20년이 걸려 문화재 보수 정비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석탑의 원형이 7층인지 9층인지 아직 결론을 못 냈다. 1993년 확정된 결론 없이 동원에 높이 27.7m의 9층 석탑을 세웠다. 세부적인 모습도 어색하고, 전체 석재를 기계로 가공하여 정교한 백제건축의 미를 잃어버렸다. 20세기 최악의 문화재 복원이라는 오명까지 쓴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이번 보수정비에는 엄격한 원칙들을 세웠다. 추론 복원을 하지 않고, 직전 모습인 6층 일부까지만 복원 보수한다. 문화유산의 진정성을 최대한 존중한 결과다. 총 1627개의 부재 가운데 원래의 것을 최대한 보강 활용하여 재사용률을 81%까지 높였다.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출현했다. 여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지적의 따님으로…가람을 세우시고…”라 새겨져 있다. 미륵사의 주인공이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다시 여러 가설이 등장했다. 왕비가 여럿이라는 설, 선화와 사택의 역할 분담설 등. 익산 쌍릉 중 대왕릉의 재발굴조사 결과 그 주인공이 무왕일 확률이 대단히 높아졌다. 현재 소왕릉 발굴 중인데, 제발 이 주인이 선화공주이기를 고대한다. 1500년 전, 무왕의 도시와 건축을 재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료와 다소 황당한 설화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실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진실은 품고 있다. 미완성 복원된 미륵사지석탑이 아직은 부분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세기의 만남’에 그친 북미 담판… “비핵화 정의부터 합의해야”

    비핵화 방식 이견에 북미 협상은 제자리 北, 연말시한 제시… 美, 화물선 압류 ‘팽팽’ 전문가 “북미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나야” ‘세기의 담판’이었던 6·12 1차 북미 정상회담이 12일로 1주년을 맞는다.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상 처음 만난 북미 정상은 두 손을 굳게 잡으며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 시대를 열었다. 특히 북미는 양국 간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세기가 넘는 북미 불신의 역사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차 정상회담 이후 북미는 구체적 실무협상에 속도를 내지 못했고 이는 지난 2월 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로 이어졌다. ‘일괄 타결이냐, 단계적 접근이냐’라는 비핵화 방식의 이견으로 북미 대화는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1차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뿐 아니라 새로운 북미 관계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9일(현지시간) “1차 북미 정상회담은 북미가 60년 넘은 불신의 벽을 뛰어넘는 정상 간 역사적 첫 만남이었다”면서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 뒤로 1년간 숨고르기를 하고 있지만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차 회담에서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비핵화, 미군 유해 송환 등 4개 항에 전격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 유해만 일부 송환됐을 뿐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교착상태에 있던 북미 대화가 지난해 9·19 평양 3차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어졌지만 이내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후 수개월간의 진통 끝에 지난 1월 미 워싱턴DC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이어 두 정상은 260여일 만인 지난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하노이 정상회담은 ‘결렬’이라는 아픈 결과를 맞이했다. 비핵화 방식을 놓고 미국은 일괄식 해법을, 북한은 단계적 해법을 고집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지난 3월부터 북미의 네 탓 공방이 이어지던 중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12일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처음으로 북미 협상 입장을 밝히면서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올해 말을 대화 시한으로 못박으며 미국에 ‘셈법을 바꿀 것’을 촉구했다. 북한은 특히 5월 4일과 9일 잇따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미국의 협상 방식에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도 석탄 불법 운송 혐의로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호를 압류하는 등 기존 대북 제재를 유지하면서 ‘선(先) 비핵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미 조야는 1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해 ‘북미 간 신뢰를 강화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해리 카지아니스 미 국익연구소 국장은 “1차 정상회담 이후 ‘화염과 분노’라는 핵전쟁 위협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이 이뤄지는 위험한 시기와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 큰 성과”라면서도 “북미 관계가 한 발 내디디려면 북미 모두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비핵화에 대한 정의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소식통은 “비핵화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비핵화 첫 단추인 비핵화 개념과 정의를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북미가 먼저 비핵화 개념을 합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를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협상이 차례로 이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당신이 몰랐던 ‘진짜 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당신이 몰랐던 ‘진짜 영웅’ 이야기

    임부택 소장부터 딘 헤스 대령까지나라를 지킨 위대한 6·25 전쟁 영웅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은 3년간 이어지며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9일 국방부와 국가기록원 등에 따르면 민간인 24만 4663명이 사망하고 학살당한 사람도 12만 8936명에 이르렀습니다. 부상자와 행방불명자 등을 모두 포함하면 99만명이 희생됐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군 13만 7899명, 유엔군 3만 7902명이 전사·사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흘린 피를 잊지 않기 위해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했습니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영화 속 전쟁 영웅, 스포츠 영웅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6월을 맞아 여러분이 잘 모르는 전쟁 영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세월이 지나 잊혀졌지만,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그들의 영웅담을 전합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매달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이달의 6·25 전쟁 영웅’을 참고했습니다. ●6·25 전쟁 첫 승리 주역 ‘임부택 육군 소장’6·25 전쟁 영웅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이가 바로 임부택(1919.9.24~2001.11.13) 육군 소장입니다. 그는 국군경비대 창설 멤버로, 중사 계급으로 교관을 맡아 사병(병사와 부사관) 군번 ‘1번’(110001)을 받았습니다. 이후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기로 소위 임관을 했습니다. 임 소장은 1950년 1월 6사단 7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포착하고 강원 춘천 소양강변 인근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준비태세를 갖췄습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그의 예측이 적중해 열세의 화력으로도 춘천으로 향하는 북한군을 3일간 막아냈습니다. 이는 개전 초기 큰 혼란에 빠졌던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곧바로 수원으로 진격해 국군 증원부대와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할 계획이었지만, 임 소장을 포함한 장병들의 악착같은 방어로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그는 다음달인 7월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공격으로 섬멸해 6·25 전쟁 첫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공로로 7연대 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 영예를 안았다고 합니다. 1951년 4월 6사단 부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는 경기 양평 용문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도 반격해 2만명을 사살하고 3500명을 포로로 잡아 전쟁 최대의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1953년 7월 11사단장으로 있었던 임 소장은 ‘휴전전투’로 불리는 ‘삼현지구 반격 작전’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해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팽덕회)가 임 소장을 제거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전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2차례 받는 등 모두 17개 훈장을 받았습니다.1961년 5·16 쿠데타 당시 1군단장으로 있었던 임 소장은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내전에 대한 우려와 ‘국군끼리 충돌하지 말라’는 윤보선 대통령 공문이 상부에 전달되면서 나서지 못했고 얼마 뒤 군복을 벗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1월 11사단에는 그의 투혼을 기리는 뜻에서 ‘임부택 장군실’이 마련됐습니다. ●공군 역사를 새로 쓴 ‘김신 공군 중장’김신(1922.9.21~2016.5.19) 공군 중장은 우리 공군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분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으로, 대를 이어 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다음날인 6월 26일 이근석 대령 등 10명의 공군 장교와 함께 미군으로부터 ‘F-51 머스탱’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미국은 F-51 전투기 인수 조건으로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를 원했습니다. 당시 중령이었던 김 중장은 10명 중 유일하게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어 ‘국군 첫 전투기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일행과 쉬지 않고 훈련해 7월 2일 전투기를 이끌고 귀국했고, 휴식도 없이 바로 다음날인 3일부터 출격해 강원 묵호·삼척지구, 서울 영등포·노량진지구 전투 등에서 적 부대와 탄약저장소를 맹렬히 공습했습니다. 1951년 10월에는 한국 공군 단독출격 작전도 주도했습니다. 특히 대령으로 제10전투비행 전대장을 맡은 뒤에는 미 공군이 수차례 출격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 군수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 요충지였습니다. 그는 “적의 극심한 대공포화 위협을 감수하고라도 고도를 낮춰 폭탄을 투하해야 한다”며 목숨을 건 공격전술을 도입했고, 1952년 1월 15일 3번째 출격에서 승호리 철교 폭파에 성공했습니다. 한국 공군의 새 역사를 쓴 김 중장은 1962년 공군참모총장을 마친 뒤 제9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고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나라를 지킨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김영옥(1919.1.29~2005.12.29) 미국 육군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제대 후 자영업을 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며 자원입대해 대위로 군에 복귀했습니다. 김 대령은 주로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하다 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 때 직접 부대를 지휘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특히 1951년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참전해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1951년 서울 탈환 뒤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마련한 전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6월 ‘철의 삼각지대 전투’를 수행하다 중상을 입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됐지만, 치료를 받고 다시 전선에 복귀하는 투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52년 9월 미국으로 복귀할 때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우리 정부는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서울 수복 후 태극기 휘날린 ‘박정모 해병대 대령’‘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박정모(1927.3.20~2010.5.6) 해병대 대령은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당시 해병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으로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는 소대원들과 새벽에 공격을 감행해 치열한 교전 끝에 서울 중앙청(당시 정부청사)으로 들어가 옥상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립니다.이후 1951년 전쟁 최대 격적지였던 ‘가리산지구 전투’에서 최종 목표인 957고지를 야간 기습공격으로 탈취했고, 연합군 총반격 작전인 ‘리퍼 작전’에도 기여했다고 합니다. ‘도솔산지구 전투’에서는 24개 목표 중 적의 최후 방어선인 제9목표를 일주일 만에 탈환하는 공로도 세웠습니다. 정부는 박 대령에게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한국 공군의 아버지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딘 헤스(1917.12.6~2015.3.3) 미국 공군 대령은 6·25 전쟁 당시 우리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제6146군사고문단’ 책임자로, 한국인 전투기 조종사 양성을 진두지휘한 인물입니다. 한국 공군이 최단 기간에 ‘싸울 수 있는 군대’로 거듭나게 된 것은 헤스 대령의 공로가 매우 컸습니다. 그는 F-51 전투기로 1951년 6월까지 1년간 무려 250회를 출격하는 초인적인 활동으로, 개전 초기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1·4 후퇴’ 직전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악화됐을 당시 적이 눈앞까지 닥친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안고 수송기에 태워 950명의 전쟁 고아와 성인 80명을 제주도로 안전하게 대피시키기도 했습니다. 전후에도 그는 제주도를 찾아 전쟁고아들을 돌봤고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2017년 3월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됐습니다. 우리 공군은 그를 ‘6·25 전쟁 중 한국 공군의 아버지’로 기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文대통령 ‘김원봉 발언’에…“이념 갈라치기 말라” vs “대한민국 정체성 파과”

    文대통령 ‘김원봉 발언’에…“이념 갈라치기 말라” vs “대한민국 정체성 파과”

    여야는 7일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것을 두고 극명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문 대통령은 약산 김원봉 선생의 월북 전후 행적을 구분해 공은 공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애국에 대한 통합적 관점을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를 이념 갈라치기로 활용해 대통령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을 퍼부은 차명진 전 의원의 입장은 자유한국당의 공식 입장인가”라며 “그렇지 않다면 지난번처럼 면죄부 주기식 징계로 막말 경쟁을 부추기지 말고 이번 기회에 차 전 의원을 당에서 영구히 축출하길 요구한다”고 했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도 “독립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월북했다는 이유 하나로 공적을 폄훼 당하고 비하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한국당 등이 반발하는 것은 김원봉과 같은 이들을 때려잡던 노덕술류 친일파들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항변하는 것이며 자신들의 뿌리가 친일파에 있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도대체 대통령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 정체성 파괴 ‘역사 덧칠하기’ 작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며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문 대통령의 국민 분열·갈등 유발이 도를 넘어섰다”고 비판했다. 민 대변인은 “문재인 정권의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자유대한민국을 지킨 유공자와 그 가족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고문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어떻게 6·25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의 수많은 무덤 앞에서 북한의 6·25 전쟁 공훈자를 소환해 추켜세울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이는 호국영령에 대한 모독이고 국민에 대한 도발”이라고 말했다. 민주평화당 김정현 대변인은 “김원봉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지하는 게 옳다”며 “역사의 공과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청와대 “김원봉 역사적 평가는 학계에서 해야 될 문제”

    청와대 “김원봉 역사적 평가는 학계에서 해야 될 문제”

    청와대 관계자는 7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을 언급한 것과 관련해 “추념사의 핵심 메시지는 ‘애국 앞에서 보수 진보 없다.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서 통합으로 가자’는 것이고, 그런 통합의 사례로 김원봉 선생의 역할을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날 ‘북한의 6·25 전쟁 공로자 즉 전쟁 가해자에게 대통령이 헌사를 했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원봉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학계에서 해야 될 문제”라고 답했다. 관계자는 “임시정부도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통합을 통해 구성됐고, 백범일지에 보더라도 김구 선생께서 임시정부에 모두 함께하는 대동단결을 주창한 바가 있다. ‘통합된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그런 점을 종합적으로 보고 이해해달라”고 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다가 해방 후 월북한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과 관련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는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고,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애국이다. 기득권에 매달린다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가 아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선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라며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보훈”이라고 강조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손학규 “文대통령, 김원봉 언급으로 이념갈등 부추겨”

    손학규 “文대통령, 김원봉 언급으로 이념갈등 부추겨”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7일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언급한 것과 관련 “김원봉 서훈 논쟁이 있어 왔고 당시 자리가 현충일의 국립현충원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언급이었는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은 자기 생각과 신념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고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손 대표는 “김원봉 선생에 대한 개인적 존경이 있다고 해도 그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었고, 북한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또 김일성으로부터 6·25 공훈자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라며 “그 뒤에 숙청당했다는 것이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6·25 전쟁에서 희생된 젊은 장병이 안장된 곳에서, 그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 국민이 묵념하는 자리에서 이런 사람을 좌우 통합의 모범으로 인정했다”며 “대통령에게 국민통합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회통합을 말하려다 오히려 이념 갈등을 부추긴 것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 대표는 “대통령의 연이은 분열 지향적인 발언에 국민은 불안해하고 있다”며 “3·1절 기념사에서의 빨갱이 발언, 5·18 기념사에서의 독재자의 후예 발언 등은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사회통합에 역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날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고위직을 역임하고 훈장을 받은 분을 언급한 것은 호국영령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념 갈등을 부추기지 말고 역사 인식을 바로 갖기를 당부한다”고 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예멘 청년의 삶이 담긴 모카커피 한 잔

    예멘 청년의 삶이 담긴 모카커피 한 잔

    취향 따라 즐기는 커피의 종류와 가격도 천차만별. 주변에선 상당한 지식을 갖춰 풍미를 즐기는 마니아도 적지 않다. 그 ‘커피의 세계’에선 여전히 비싸다는 푸념이 흔하다. 신간 ‘전쟁 말고 커피’는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드는 커피 값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넌픽션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인 모카항 커피회사 대표 목타르 알칸샬리가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에서 마약과 술에 절어 살던 예멘 이민자 청년. 그는 어떻게 ‘세계 3대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 블루 보틀의 파트너가 됐을까. 책은 목타르 알칸샬리의 모험담을 씨줄로, 커피와 예멘을 날줄로 엮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커피 시장이 방대한 규모로 성장하기까지는 세 단계의 역사를 거쳤다. 1900년대 초 진공포장 기술과 인스턴트커피 제조공법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지만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커피의 산지와 고유의 풍미를 살린 로스팅법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어 종전의 대기업 체인점이 아닌 독립적인 가게 형태를 띤 로스터 물결이 커피 시장을 대체했다. 예멘은 최초로 야생커피를 재배하고 지금 우리가 즐기는 형태로 우려내고 수출한 커피의 본향이다. 하지만 잇따른 내전과 외교적 혼돈 탓에 예멘은 커피 본향에서 멀어지고 철저하게 잊혀져 갔다. 우연히 자신의 고향 예멘이 ‘원조’ 커피 수출국이었음을 알게 된 목타르 알칸샬리. 예멘산 커피 수입상으로 변신한 그는 내전이 한창인 예멘으로 떠났다. ‘예멘의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예멘의 명품 커피를 팔겠다’. 그 원대한 꿈을 키워 세운 모카항 커피회사의 커피는 2016년 미국 전역의 블루 보틀 매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2017년에는 ‘커피 리뷰’로부터 21년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인 97점을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모른다는 커피산업에서 제외됐던 예멘 커피에 모카라는 이름을 되찾아 준 주인공 목타르 알칸샬리. 이 넌픽션은 그의 성공담 전개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블루보트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으로부터 ‘천사가 노래하는 듯한 맛’이라는 극찬을 받은 그의 예멘 모카커피. 저자는 그 커피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멘과 세계 다른 국가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촉매제로, 예멘의 문화는 물론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담아낸 문화상품.’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효율적 사업’이었던 한국인 해외 입양

    ‘효율적 사업’이었던 한국인 해외 입양

    해외에 입양된 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적잖다. 출생에 얽힌 비밀만큼 극적인 설정을 찾기 힘든 까닭이다. 반면 해외 입양인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낮은 편이다. 입양인을 소재로 하는 픽션에는 흥미를 갖지만 실제 입양인들의 애환을 외면하는 건 어쩌면 해외 입양에 숨겨진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해외 입양은 생각보다 역사가 길지는 않다.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70여년간 약 20만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됐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숫자다. 특히 한국 아동의 대부분은 미국인이 입양했다. 보스턴칼리지 역사학과 부교수로서 미국 역사 속 이민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저자는 한국의 해외 입양이 한미의 특수한 역학 관계에 따른 ‘전쟁의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은 ‘일민주의’(一民主義)를 국가 정책으로 내세운 당시 이승만 정부로선 배척해야 하는 이방인이었다. ‘튀기’, ‘사생아’라는 딱지 때문에 온갖 차별을 겪은 한국 혼혈 아동을 강력하게 원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던 미국은 그에 걸맞은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아동 구호에 힘쓰는 미군의 활동은 미국이 ‘인정 많은 세계의 아버지’라는 모습을 구축하는 데 딱 들어맞았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의 계층적 관계는 강화되었고, 한국이 미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었다. 저자는 이외에도 ‘기독교적 미국주의’에 입각해 한국 아동을 입양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국 아동 입양이 한국과 미국의 사회복지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입양이 어떻게 ‘효율적인 사업’으로 발전했는지 등 입양의 역사를 세세하게 짚는다. 저자는 서문에서 “미혼모들과 그 자녀들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사회 구조를, 나아가 일반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이 책에서 작은 영감이라도 얻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한국당 “문 대통령의 김원봉 헌사, 귀를 의심”…김원봉 누구길래

    한국당 “문 대통령의 김원봉 헌사, 귀를 의심”…김원봉 누구길래

    자유한국당이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원 추념사에 발끈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현충월원을 ‘살아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지칭하며 “여기 묻힌 한 분 한 분은 그 자체로 역사이며 애국이란 계급이나 직업, 이념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에게는 사람이나 생각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며 대립하던 이념의 시대가 있었다”며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으로 창설한 광복군을 소개하고,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끈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면서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귀를 의심” “반국가적 망언” 현·전 의원들 비판 한국당은 문 대통령이 이런 광복군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설명한 뒤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덧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추념사”라면서 “6·25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이 정부에서 김원봉에게 서훈을 안기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보훈처를 넘어 방송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펼쳐지고 있다”면서 “여기에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그는 “6·25 전사자들을 뒤에 모셔두고, 눈물로 세월을 견딘 가족들을 앞에 두고, 북의 전쟁 공로자에 헌사를 보낸 대통령이 최소한의 상식의 선 안에 있는지 묻고 싶다”며 “청와대와 집권세력이야말로 가장 극단에 치우친 세력이라 평가할 만하다”고도 했다.이만희 원내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았다는 김원봉을 콕 집어 언급한 데 대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대통령의 언급이 김원봉 등 대한민국에 맞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까지 서훈하기 위한 이 정권의 분위기 조성용 발언은 아니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차명진 전 의원도 페이스북에 “김원봉이 누구인가. 김일성 정권 권력 서열 3위,6·25 남침 최선봉에 선 그 놈”이라며 “이보다 반(反)국가적, 반(反)헌법적 망언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현충일 추모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썼다. “내가 더이상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라며 “한국당은 뭐하나. 이게 탄핵 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투사…이념 떠난 평가 필요 김원봉 선생에 대한 정치적·역사적 판단이 엇갈리는 부분은 있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항일단체 단장으로 그려졌던 그는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일제는 김원봉 선생을 두고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아직 그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데는 해방 뒤 월북한 행적 탓이 크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숙청됐다. 한국당은 김원봉 선생이 “6·25 남침의 공으로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았다”면서 그를 기리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김원봉 선생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당시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잡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테러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상황이 있었다고 전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닌, 1945년 해방 전 행적을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한편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과 관련해 “좌우합작을 이룬 임시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좌우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고 애국에 뜻을 모으자는 취지”라면서 “애국을 위해 낡은 이념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의미인데 거꾸로 이를 문제삼아 다시 이념 공세에 나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논평에서 “문 대통령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며 광복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며 “약산 김원봉의 월북 이후 행적을 끌어들여 광복군 운동 자체를 색깔론으로 덧칠하는 일이야말로 역사 왜곡”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고의 독립투사조차 포용하지 못했던 뼈아픈 배척의 역사를 이제 뛰어넘을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내고 문 대통령이 ‘통합’을 강조한 데에 공감한다면서 “배는 좌현과 우현의 노가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룰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우현이 손을 놓고 있어 대한민국호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라며 “경제가 어렵다며 전국을 돌며 정부를 흔들고 있는 한국당은 본인들이 그 주범임을 깨우치고 이제라도 통합 대한민국으로 함께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 아이언맨, 진짜 지구 구한다…기후변화와 싸우는 연합체 발표

    아이언맨, 진짜 지구 구한다…기후변화와 싸우는 연합체 발표

    영화 '아이언맨'으로 인류를 구원했던 '그'가 이번에 또다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CNN 등 현지 주요언론은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54)가 아마존이 개최한 ‘리:마스'(re:Mars)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깜짝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리마스는 세계적인 IT 기업 아마존이 매년 인공지능(AI), 우주탐사, 로봇공학 등 미래산업을 주제로 개최하는 콘퍼런스다. 지난 4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등장한 다우니는 특유의 입담으로 관객들의 큰 웃음과 관심을 받았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그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역사와 아이언맨 수트의 진화 그리고 마약 중독으로 암울했던 자신의 과거를 농담을 섞어가며 연설해 큰 호응을 얻었다.다우니는 "나는 11년 동안 흥미롭고 상징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서 "스타크 캐릭터가 마음에 든 것은 전쟁의 수익자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이 모여 미래 기술을 토론하는 자리에 다우니가 등장한 것은 뜬금없지만 그 이유는 연설 말미에 밝혀졌다. 바로 '풋프린트 연합'(Footprint Coalition)의 출범이다. 오는 2020년 4월 공식 출범할 예정인 풋프린트 연합은 새로운 '악당'인 기후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우니는 "나는 '탄소발자국' 악몽의 거물로, 기후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남보다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했다"면서 "로봇과 나오 테크놀로지 기술로 10년 안에 지구를 완전히 청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탄소발자국은 사람의 활동이나 상품의 생산, 소비 과정을 통해 배출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이산화탄소로 환산한 총량을 말한다.  현지언론은 "풋프린트 연합이 구체적인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아이언맨이 진짜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문 대통령 “기득권 매달리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 아니다”

    문 대통령 “기득권 매달리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독립과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에는 보수와 진보의 노력이 함께 녹아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올해는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는 해다. 지난 100년, 많은 순국선열들과 국가유공자들께서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다”면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추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저는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보수와 진보의 역사가 모두 함께 어울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누구나 보수적이기도 하고 진보적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안정을 추구하고, 어떤 때는 변화를 추구한다”면서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득권에 매달린다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문 대통령은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뜻깊은 날 미국 의회에서는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로 공식 인정하는 초당적 결의안을 제출했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과 번영의 토대가 되었으며 외교, 경제, 안보에서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청해부대 최영함 입항 행사 도중 정박용 밧줄 사고로 숨진 고 최종근 하사를 애도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또 한 명의 장병을 떠나보냈다”면서 “국가는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 최종근 하사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늘 부모님과 동생, 동료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계신다. 유족들께 따뜻한 위로의 박수 보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유족들께 국가의 의무를 다하겠다. 유공자 가족의 예우와 복지를 실질화하고 보훈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는 노력을 계속하겠다”면서 “국가유공자와 유가족들이 자부심을 가질 때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내년은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유엔 깃발 아래 22개국 195만 명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4만여 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면서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가장 큰 희생을 감내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정부는 2022년까지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 안에 ‘추모의 벽’을 건립해 미군 전몰장병 한분 한분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한미동맹의 숭고함을 양국 국민의 가슴에 새길 것”이라고 말했다.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씨줄날줄] 슬픈 다뉴브강의 아리랑/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슬픈 다뉴브강의 아리랑/박록삼 논설위원

    어린 시절 헝가리를 떠올리면 왠지 못살고 배곯는 나라인 듯했다. 1970~80년대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면서 그런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에 인구 절반이 숨졌으며 14세기 오스만제국, 15세기 합스부르크 왕가, 19세기 오스트리아, 20세기 소련 등 역사 내내 주변국의 침략과 지배가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끝자락 더벅머리 아이의 짧은 소견과 달리 문화유산도 많고 자부심이 큰, 역사의 시련을 고비고비 뚫고 나온 나라였다. 1956년 10월 23일 20만명이 넘는 헝가리 노동자, 대학생들은 스탈린 동상을 끌어내리는 등 소련군 철수, 정치활동 자유, 민주주의 등을 요구하며 소련군을 국경 바깥으로 몰아내는 ‘헝가리 민주혁명’에 성공했다. 혁명정부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 중립국 선언, 복수정당 허용 등 개혁 정책을 표방한다. 하지만 혁명 일주일 만에 소련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1만 2000명 안팎의 시민들이 소련군 총탄에 희생됐다. 시인 김춘수(1922~2004)는 처참한 학살에 대해 ‘…/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중)라며 서늘한 추모를 바치기도 했다. 또한 이에 앞서 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 참상을 몸으로 겪은 전쟁터이자 나치와 함께했던 참전국이었다. 패전 직전 헝가리 민병대는 유대인 수천 명을 다뉴브 강가로 끌고 가 신발을 벗게 한 뒤 총을 쏴 강물 속으로 떠밀었다. 그 흔적은 강가에 나뒹구는 60켤레의 빈 신발로 형상화돼 참담한 기억을 현재적 의미로 남겨 두었다. 모든 역사를 다 기억하며 말없이 흐르는 다뉴브강에 유람선 전복으로 헝가리인 2명과 한국인 사망자·실종자 26명이 보태졌다. 지난 3일 저녁(현지시간) 수백 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참사가 난 다뉴브강 머리기트 다리 위를 메웠다. 그리고 30분 남짓 동안 서툰 발음으로 이어진 그들의 ‘아리랑’ 가락이 다뉴브강의 출렁거림 사이를 애잔히 넘나들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죽음에 대한 애도였다. 그 장면을 영상으로 본 한국인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가사의 뜻도 모르건만 슬픔의 북받침과 간절함을 아리랑 가락에 담았다. 그 기운이 다뉴브강 바닥에 닿은 걸까. 다음날 희생자 3명이 가족 곁으로 찾아왔다. 슬픔의 다뉴브강엔 슬픔을 이겨낼 인류애가 흘렀다.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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