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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소영 칼럼] 우리는 공동체, 서로 적이 아니다

    [문소영 칼럼] 우리는 공동체, 서로 적이 아니다

    윤휴는 17세기 선비이다. 인조는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고두례를 했다. 소셜미디어도 신문도 없던 시절이니 병자호란으로 겪게 된 ‘조선의 치욕’을 윤휴는 그의 나이 20세 때, 충북 보은으로 몸을 피한 당시 30세인 송시열을 만난 뒤에야 알게 된다. 윤휴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북벌을 목표로 정한 계기다. 국사에서 북벌정책을 높이 평가하지만, 조선후기 북벌의 실체는 없었다. 효종과 숙종 등 지배층은 북벌론으로 사분오열한 양반들을 통합하고, 왕과 사대부가 사실은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을 결집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했다. 그 때문에 윤휴가 관직에 나가 ‘진짜로 북벌’을 실행하려고 하자 ‘말로만 북벌’을 주장하던 당대 노론 의 세도가 송시열과 갈등하게 된다. 윤휴의 북벌은 비현실적·모험적이라는 비판이 당대에 쏟아졌고, 현재 평가해도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백성이 지지한 북벌을 실행하고자 조직을 만들고 재원 마련을 위해 ‘호포제’ 도입을 추진하는 등 이리저리 뛴 자는 윤휴뿐이고, 왕을 포함한 다른 북벌론자들은 현실적인 한계를 주장하며 내부통치술로만 활용했다는 점은 평가해야 한다. 당시 송시열은 눈엣가시인 윤휴를 두고 “풀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고 사약이 내려지게 했다. 그 사약을 받아 든 윤휴는 “선비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인데,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단다. 1680년 윤휴를 제거한 송시열도 상복 입는 문제(2차 예송논쟁)를 둘러싸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9년 뒤 사약을 받는다. 오늘, 윤휴를 돌아보는 이유는 21세기 한국의 검찰개혁이 자칫 17세기 조선의 북벌처럼 말로만 떠들고 지지자들의 내부결속용으로 활용됐다고 역사에서 평가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검찰개혁은 지난 수십년을 담금질해온 이슈다. 무소불위한 검찰의 제자리를 찾아 주자는 검찰개혁은 여론의 공감대 덕분에 큰 추진력을 얻었고, 논란이 컸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출범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최근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 폭발로 검찰개혁의 대의명분이 훼손되고 여론의 지지도 약해지고 있다. 물론 정부여당의 환호 속에 2019년 7월 취임한 윤 총장이 곤욕을 치르는 배경에는 자업자득인 측면이 없지 않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국회에서 합의한 다음날 전격적으로 22곳이나 압수수색을 하면서 정치적 영역에 개입한 것이 검찰이었다. 이는 선출직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어긋나는 행위였다. 진보정부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노무현 정부는 대선에서 김대중 정부보다 더 많은 유권자의 표를 얻었지만, 정치세력으로서는 더 취약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새로운 시대의 ‘무녀리’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시대를 앞서갔고, 그러다 보니 친위세력을 제외하고 정치·사회적 세력을 확장하기 어려웠다. 개혁을 선점했으나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힘없는 정의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고초를 겪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비교도 안될 만큼, 보수정부와 비교해도 힘이 세다. 의회권력, 지방권력을 모두 잡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니 이제 현 정부 지지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을 끌어안고 ‘여기서 주저앉으면 퇴임 후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멈추지 않고 절차적 하자에도 ‘윤석열 찍어 내기’를 강행한다면 한국 역대 대통령의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최초로 검찰총장 직무배제를 시도했더라도, 윤 총장의 2년 임기를 보장해 새 시대를 여는 새 관행을 만들면 어떤가. 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 조 바이든은 승리 확정 후 “미국에서 (반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참담한 시기를 끝내기 시작하자”고 연설했다. 이어 바이든은 자신이 지향하는 포용의 정치, 다양성의 정치를 내각 구성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했다. ‘나와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너와 당신’도 달라지지 않는다. 진영이 다르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싶다면, 1초만 참고 그가 적인지, 공동체의 일원인지 생각하라. 우리의 토론과 갈등, 분쟁, 심지어 전쟁까지도 더 좋은 사회, 더 좋은 공동체, 더 좋은 미래를 향한 노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씨줄날줄] 가공할 모사드/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가공할 모사드/황성기 논설위원

    2007년 1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어느 호텔의 바. 시리아 원자력위원회의 이브라힘 오트만 위원장이 초면의 여성 옆에 앉아 있다. 이 여성은 우연을 가장했지만 실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공작원. 여성의 미모와 능란한 말솜씨에 사로잡힌 오트만 위원장은 둘만의 대화에 빠져들어 간다. 같은 시간, 모사드의 다른 공작조가 오트만의 방에 침투해 자물쇠가 굳게 잠긴 여행 가방을 따고 있다. 망을 보던 공작원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오트만이 방에 돌아가고 있다. 남은 시간은 1분!” 가방을 딴 공작원은 노트북에 있던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가던 오트만은 복도에 있던 취객과 부딪친다. 하지만 이 취객 또한 도주 시간을 벌게 해 주려는 공작원. 방에 있던 공작원이 가방 등을 감쪽같이 원위치시켜 놓고 빠져 나오면서 영화와 같은 이 작전은 성공했다. 시리아의 핵 개발 증거를 잡은 이스라엘은 8개월 뒤 미국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시리아의 알키바르 핵 시설을 폭격한다. 모사드는 세계 정보기관 중에서 늘 톱 5위 안에 드는 최강을 자랑한다. 로넨 버그먼은 2018년 저작 ‘누가 죽이러 오거든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Rise and Kill First)에서 1949년 창설한 모사드가 70년 역사에서 적어도 2700건의 암살 작전을 수행했다고 폭로했다. 버그먼의 취재원이자 모사드를 2002년부터 8년간 이끈 메이어 다간은 암살을 이렇게 표현했다. “2만 5000개의 자동차 부품 중 100개가 빠졌다면 운전하기 어렵겠지만 자동차를 멈추는 데는 운전수를 죽이는 게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암살이다.” 지난달 27일 이란 핵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59)가 테러 공격을 당해 사망했다. 서방 언론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이란 핵합의 복귀를 저지할 셈으로 이스라엘이 암살했다고 분석했다. 예상대로 이란의 강경파는 배후로 모사드를 지목하고 ‘피의 복수’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올해 미국의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암살 때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지만 엄포에 그쳤던 점을 감안할 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마지막 군사행동을 자초할 수 있는 이란의 보복공격이 감행될 공산은 낮아 보인다. 파크리자데 사망으로 암살된 이란 핵과학자는 5명으로 늘었다. ‘타깃 제거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모사드의 행동으로 이란 핵 개발이 더뎌진 건 사실이다. 적들에 둘러싸이고 홀로코스트 트라우마가 있는 이스라엘이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전쟁과 살육으로 보복을 불러 분쟁의 불씨를 이어 가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사드 방식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 [사설] 독일 지방의회의 소녀상 영구 보존 결의 환영한다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 의회가 1일(현지시간)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결의안을 찬성 24명 대 반대 5명으로 통과시켰다. 녹색당과 좌파당이 공동 발의한 이 결의안은 평화의 소녀상이 미테구에 계속 머물 방안을 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좌파당 틸로 우르히스 구의원은 의안 설명에서 “평화의 소녀상은 2차 세계대전 중 한국 여성에 대한 일본군의 성폭력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전쟁에서 성폭력은 일회적인 사안이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로, 평화의 소녀상은 바로 그 상징”이라고 했다. 앞서 미테구는 현지 시민단체인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가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신청하자 지난해 7월 설치를 허가했고, 소녀상은 올해 9월 말 미테구 거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독일 연방정부와 베를린 주정부에 항의하자 구는 10월 7일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베를린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코리아협의회가 행정법원에 철거 명령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자 미테구는 철거 명령을 보류했다. 이번에 통과된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의안 채택을 계기로 소녀상의 영구설치 논의가 의회 주도로 본격 시작되는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이번 결의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됐다는 점도 향후 영구설치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이번 독일 지방 의회의 결의안 채택을 보고 잘못을 크게 깨달아야 한다. 독일과 일본은 둘 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이지만 과거사 청산에서는 매우 다른 길을 걸어 왔다. 독일은 현직 총리가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등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반면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전쟁 기간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여태껏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반성은커녕 평화의 소녀상 설립 방해 외교를 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소녀상의 의미는 우르히스 구의원의 의안 설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인도 아닌 독일 의원의 이런 절규를 일본은 마땅히 부끄럽게 새겨들어야 한다.
  • 향촌동 르네상스 … 바흐가 흐른다

    향촌동 르네상스 … 바흐가 흐른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대구 역시 오래전엔 읍성이 있었던 도시였다.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 아래, 그러니까 향촌동 일대가 지금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쇠락한 도심에서 문화와 예술의 성지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새삼 이 공간에 주목하는 건 옛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향촌동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독특한 정서 때문이다. 그 시절의 이야기만 따라가도 한나절이 후딱 지나간다. 대구가 코로나19 초반의 악몽에서 회복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거리두기는 이어지고 있다. 외지인, 특히 수도권 지역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편이니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며 다니는 게 좋겠다. 먼저 향촌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피자. 그래야 왜 대구 사람들이 ‘향촌동 르네상스’를 꿈꾸는지 알 수 있다. 향촌동은 옛 대구읍성의 북쪽 성곽(현 북성로)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현 대구역 맞은편에 있다. 조선 선조 때 일본 침략에 대비해 쌓은 대구읍성이 사라진 건 1906년이다. 당시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렸던 친일파 박중양 대구군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대구읍성을 불법 철거했다. 향촌동의 최전성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였다. 헌병대 등 권부가 몰린 옛 경북도청 앞이 낮의 중심지였다면, 밤을 지배하는 곳은 향촌동이었다. 당시 대구 유흥의 중심이었던 향촌동 골목에는 사미센(일본 악기)과 일본인들의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 일제가 떠나며 쇠퇴하던 향촌동은 1950년대 한국전쟁 피란 예술인들로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전쟁 중이었지만 골목에는 바흐와 베토벤 음악이 흘렀고, 문학이 꽃을 피웠다. 당시 한 외신기자가 ‘폐허에서 바흐를 듣는다’고 썼던 기적의 공간이 바로 향촌동이었다. 오늘날의 향촌동이 꿈꾸는 모습 역시 바로 이 시기의 살롱 문화다. 피란 시절 북적댔던 향촌동은 예술인들이 떠나면서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 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던 젊은이들마저 대구 신도심으로 눈을 돌리면서 향촌동은 60대, 70대들의 공간이 됐다. 그 골목에 이제 막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보태지기 시작한 것이다.이 동네의 모양새가 참 독특하다. 좁은 골목길을 경계로 한쪽은 젊은이들의 양지, 또 한쪽은 어르신들의 성지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향촌동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복합문화공간인 ‘대화의 장’이다. 이 안에 카페 겸 펍인 대화살롱, 대화주방, 대화강당, 대화공방, 대화스튜디오 등이 밀집돼 있다. 이름에서 보듯 음식이나 장식 등이 젊은이 취향이다. 옛 한옥을 리모델링한 대화강당에서 토론 모임을 갖거나 젊은 작가들이 입주한 공방에서 여러 소품들을 살 수도 있다. ‘개화기 복장’을 갖춰 입고 인증샷을 찍으러 오는 ‘인싸’ 커플도 흔하다.대화의 장에서 50m쯤 떨어진 ‘꽃자리 다방’도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다. 화가 이중섭이 그려 준 표지화로 유명한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 발간기념회가 열렸던 공간이다. 건물도, 이름도 예전 그대로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 ‘퍼센트 14-3’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1955년 대구 군예대에서 근무하던 명배우 허장강이 이 집 안채를 세내 잠시 살았다고 한다. 아마 당시 군예대 동료였던 영화배우 박노식 등도 문턱이 닳도록 이 집을 들락거렸지 싶다. 이 카페는 수제화 골목 지나서 있다.어르신들의 중심 공간은 ‘판코리아 성인텍’이다. 이곳은 농반진반 ‘60금’ 건물이다. 60세 이하 ‘아이들’은 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영숙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겉으로는 작아 보여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수백 명의 어르신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어르신 놀이터는 해거름이면 파장이다. 오후 6시 무렵이면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집으로 가거나, 주변 공간으로 삼삼오오 사라진다. 화려한 복장의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무렵이다. 향촌동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그 좁은 골목을 따라 하꼬방(단칸 가건물)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적산가옥도 많다. 보통 적산가옥 하면 목조 주택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향촌동 일대 옛 살롱들의 대부분은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다. 숱한 기억들을 갈무리하고 있는 옛 건물들을 엿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시인 구상이 즐겨 묵었다는 화월여관(현 판코리아 성인텍), 지독히 가난했던 화가 이중섭이 생애 마지막 예술혼을 불살랐던 백록다방(현 갤러리모텔), 음악감상실 르네상스(현 판코리아 식당) 등이다. 이 건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재밌다.피란 시절 향촌동을 넉넉하게 만든 이는 구상 시인이다. 주머니가 솜털처럼 가벼웠던 예술인들은 무시로 외상술을 마셔댔고, ‘향촌동 귀공자’ 구상 시인은 이들의 밀린 외상값을 지갑을 털어 내줬다. 이중섭이 1955년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던 백록다방은 경북여고 동기인 두 인텔리 여성이 마담이었다. 둘의 빼어난 미모와 지성미는 숱한 예술인들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차와 대화는 백록에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나. 이중섭이 캔버스 삼아 그렸던 은박지는 미국산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이중섭을 흠모하던 시인 김광림이 구해 줬다고 한다. 물론 이중섭은 이때 번 그림값을 술값으로 탕진해 버렸다. 그가 전시회를 열었다는 미 공보원 건물은 아쉽게 사라졌다. 르네상스는 클래식 음악감상실이었다. 박용찬이란 호남의 갑부 아들이 1951년 1·4 후퇴 때 레코드 한 트럭분을 싣고 내려와 문을 열었다고 한다. 화가 김환기, 건축가 김중업,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 등이 즐겨 찾았다. ‘북성로 허브’가 세 든 건물은 해방 공간의 세도가 이기붕의 신혼집이 있었던 건물이다. 고딕풍으로 멋을 낸 외관이 인상적이다. 아울러 이중섭과 소설가 최태응이 묵었던 경복여관(현 의류 가게), 이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이름을 딴 청포도 다방(현 갤러리모텔 주차장), 음악다방 백조(현 아파트 공사장) 등도 안내판으로만 남은 공간들이다.대구에 가 볼 만한 일몰 전망대가 생겼다. 앞산 중턱에 있는 ‘해넘이 전망대’다. 앞산 일대의 소박한 집들과 도심의 거대한 마천루들이 붉게 물드는 장면이 제법 곱다. 입장료를 내고 올라야 하는 앞산 전망대의 해넘이가 압도적일 만큼 화려하다면 ‘해넘이 전망대’의 일몰 풍경은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준다. 해넘이 전망대 아래는 빨래터 공원이다. 이 일대 주민들의 옛 빨래터를 공원으로 꾸몄다. 빨래터 앞엔 두 그루의 수양벚나무가 있다. 지금은 잎이 졌지만 수양벚꽃이 흐드러지던 봄엔 아마 전국에서 가장 화사하고 요염한 빨래터였을 게 틀림없다. 세상 어느 남정네가 벚꽃 아래에서 빨랫방망이를 내리치는 여인네를 보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지 않았으랴. 빨래터에서 두어 블록쯤 아래에 봉준호 영화감독의 어린 시절 집이 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봉준호 생가 복원’ 운운하는 선거 구호가 등장해 여론의 질타를 받는 해프닝이 일었던 곳이다. 해넘이 전망대에서 굽어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그저 봄날의 꿈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글 사진 대구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90살 동갑내기, 70년 전 함흥의 풍경을 되살리다

    90살 동갑내기, 70년 전 함흥의 풍경을 되살리다

    김일성 사진이 걸린 공회당 2층 지붕은 날아갔고 벽은 반 정도가 아예 주저앉았다. 폐허가 된 도시지만, 사람들은 명절을 즐기며 춤을 춘다. 1955년 함경남도 중심지 함흥의 풍경이다. 최근 출간된 사진집 ‘함흥, 사진으로 보는 전쟁과 재건의 역사’ (논형)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도를 닦던 반룡산을 품은 1940년대 함흥의 모습을 비롯해 폭격을 맞아 유령도시가 된 풍경, 옛 동독이 참여한 복구 활동, 당시 북한 주민의 생활상 등 70년 전 함흥의 풍경과 생활상이 담겨 있다. 함흥 출신의 1930년생 동갑내기 신동삼(오른쪽)씨와 한만섭(왼쪽) 전 서울대 공대 교수의 공동 저작물이라 의미 깊다. 1952년 동독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된 신씨는 1955년 동독 함흥시 재건단(DAG) 통역으로 합류해 고향을 찾았다. 함흥은 B29기의 맹렬한 폭격으로 전체 건물의 95%가 파괴된 상황. 신씨는 “당시 함흥에는 모래와 점토, 그리고 인민들의 정열적인 힘만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시설계가, 건축가, 현장감독, 지질학자, 측량사, 벽돌공 등 500명의 독일 기술진이 8년 동안 여러 인프라 시설을 건설하는 장면이 책에 생생하다. 신씨는 1995년 한국 관광을 왔다가 ‘동독과 북한-1954년/62년 함흥시 재건사´를 낸 독일 작가를 40년 만에 다시 만나 자료를 넘겨받았다. 여기에 개인 소장 자료 등을 모아 사진집 ‘신동삼 컬렉션´(2013, 눈빛)을 냈다. 2018년 1월 미국에 살던 한 전 교수가 지인의 소개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씨를 만나 컬렉션에서 다루지 못한 자료 900여장을 다시 분류하고 디지털 보정 작업을 했다. 중학교 때까지 함흥에서 지낸 한 전 교수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씨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 사회상을 연구하는 사가들에게 좋은 사료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사진집에 관해 “반세기 전 떠나온 북녘 동포들에 대한 채무감에서 시작한 일”이라며 “분단된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신간] 근대 소설과 영화에 대한 단상…장두식 교수의 ‘근대를 읽다’

    [신간] 근대 소설과 영화에 대한 단상…장두식 교수의 ‘근대를 읽다’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장두식 교수가 30일 근대 소설과 근대 영화 등에 대한 단상을 담아낸 ‘근대를 읽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문학 속의 서울’의 저자인 장 교수의 새로운 근대 읽기로 우리 근대에 대한 텍스트들을 자세히 살펴본 목격담을 정리했다. 이 책은 근대 초 가장 강력한 대중 매체였던 연설의 의미, 자유연애와 신식결혼식을 디자인한 소설, 당시 영화팬들이었던 애활가들의 극장 문화, 영화배우이자 프로비평가였던 풍운아 임화의 영화에 대한 단상, 취미실익 잡지 ‘별건곤’과 광고 자체였던 잡지 ‘박문’에 대해 꼼꼼하게 정리했다. 장 교수는 “우리 근대는 ‘슬픈 근대’이다. 하지만 과거 역사가 암흑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가 긍정적이면 별이 반짝이는 밤이 된다”면서 “부정적인 과거들은 발전의 계기가 되고 현재의 반면교사가 된다. 슬픈 근대 속에 기쁜 오늘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근대는 주목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봉건시대에는 없었던 자유연애라는 사랑 방식을 보편화 시킨 것은 근대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서 형상화된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의 연애 방정식과 주체적 결혼관 등은 당대 독자들에게 근대 결혼제도를 실감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영화는 당대 관객들에게는 가장 대중적인 오락이자 예술이었다. 애활가(영화팬)가 탄생하였고 다양한 영화문화가 생성됐다. 또한 영화가 일상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스타를 추종하는 일단의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이 경성의 패션과 소비문화를 선도하게 되고, 청소년들은 영화를 통해 근대를 학습하였다. 영화가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바로 근대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문학 속의 서울’ 전편인 ‘문학속의 경성’이 수록돼 있다. 타자화된 도시 경성의 희로애락을 김동인, 조명희, 이태준, 이상, 박태원, 백석, 채만식의 작품들 속에서 읽어내고 있다.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속에 감금되었던 서울의 슬픔과 우울을 오장환, 박노갑, 박경리, 최상규와 남북한 종군 문학 작품들 속에서 추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살피고 있듯이 서울은 근대를 읽는 거대한 텍스라고 볼 수 있다. 민속원, 308쪽, 1만9500원.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사비니 여인들의 용기와 평화/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열린세상] 사비니 여인들의 용기와 평화/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모든 방을 본다면 족히 3일은 걸린다. 잠깐 루브르에 가 보았다고 할 요량이라면 최소 드농관에서 ‘모나리자’, ‘나폴레옹 대관식’을 보고 계단에서 ‘승리의 여신 니케상’을 지나 슐리관에서 ‘밀로의 비너스’를 영접하면 된다. 중간에 만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낯익은 작품들 그리고 대리석이 돼 버린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덤이다. 여유가 있어 리슐리외관에서 루벤스와 렘브란트까지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다.두 차례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했다. 첫 방문은 신혼여행 때이다. ‘모나리자’와 눈만 마주치고 1시간 만에 나왔다. 두 번째 방문은 한나절이나 있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을 따라다니는 통에 동생이 좋아하는 ‘나폴레옹 대관식’이 전시된 공간에서만 3시간을 머물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메두사의 뗏목’까지 만날 수 있는 전시실이다. 유명한 작품 앞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나폴레옹 대관식’을 보려는 관람객을 피해 한 걸음 비켜 서니 바로 옆에 걸린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의 여인들’이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인생작이 됐다. 이 작품은 로마 건국 시기 이야기이다. 인구가 곧 군사력이었던 시절,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여자가 부족했던 도시에 인구를 늘리기 위해 이웃 도시들의 여인들을 납치해 와 로마인들의 아내로 삼았다. 3년 후 여인들을 빼앗긴 사비니인들이 로마에 복수하고자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때 사비니군의 지휘관인 타티우스의 딸이자 로마 건국의 왕 로물루스의 아내가 된 헤르실리아를 비롯해 로마로 잡혀갔던 사비니 여인들이 나서서 싸우지 말 것을 애원한다. 그녀들은 모두 사비니 군인의 딸이자 여동생인 동시에 로마 군인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덕분에 전쟁은 끝날 수 있었다. 평화를 정착시켜 로마가 번성할 수 있었다고 승자의 역사로 기록돼 전해진다. 사비니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적지 않다. 루벤스에서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가 납치와 약탈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다비드는 이후 로마에 대한 사비니인들의 복수전을 다루었다. 그림은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을 배경으로 좌우측으로 사비니군과 로마군이 대치해 있고 가장 앞에 사비니군의 지휘관인 타티우스와 로마의 왕 로물루스가 칼과 창, 방패를 들고 맞서고 있다. 그 중간에 헤르실리아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많은 사비니 여인들이 아이들을 안은 채 몸을 던져 싸움을 가로막는다. 전쟁터를 기어 다니는 갓난아이의 눈에서 천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화된 로마의 ‘사비니 여인의 납치’의 야만성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작품 속에 감추어진 젠더 문제에 대한 무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비드가 여성을 평화의 아이콘으로 재창조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비드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분열을 겪고 있던 프랑스의 죄우파 대립을 염두에 두고 평화로운 중재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을 막기 위해 유럽의 이웃 국가들이 침략해 오고, 내부에서는 왕권이 사라진 자리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오는 갈등이 심각했다. 분단과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가려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로 옆 작품 ‘나폴레옹 대관식’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 결과에 왜 이리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사비니의 여인들’ 작품 앞에 서서 한반도라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터에서 ‘과연 우리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로마의 장군 로물루스, 아니면 사비니의 장군 타티우스, 아닌 듯하다. 어쩌면 사비니의 여인들과 같은 처지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상에서의 평화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수탈당하고 선택을 강요당해 왔다. 이제 분단과 냉전의 시대를 깨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외치는 사비니 여인들의 용기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 “왕이 외교부장 지각은 대중국 저자세 외교 때문”

    “왕이 외교부장 지각은 대중국 저자세 외교 때문”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26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회담에 25분 지각한 것은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며, ‘대중국 저자세 외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왕이 외교부장은 교통 때문에 늦었다고 했지만, 애당초 숙소(서울 신라호텔)에서 늦게 출발한 것으로 밝혀졌다”면 “그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한 것은 친중사대주의에 기반한 문재인 정부의 과도한 저자세 외교가 만든 ‘학습효과’의 결과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 의원은 그동안 왕이 외교부장의 지각 사례를 꼽았다. 지난해 12월 방한 때도 각계인사 100여명을 초청한 스탠딩 오찬모임에 40분 가까이 늦었지만 사과 한마디는커녕 오히려 한국을 향해 ‘미국편만 들지 말라’는 오만한 메시지를 내뱉었다는 것이다. 2017년 문 대통령의 방중 때도 왕이 부장은 악수와 함께 대통령의 팔을 툭툭 치는 모습을 보여 외교결례란 논란을 낳았지만, 당시 청와대는 친근함의 표시라고 해석했다. 지난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25전쟁을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라고 발언하고, 교과서에 북한의 남침이 아닌 ‘내전 발발’로 기재하는 등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음에도 외교부는 주한중국대사 초치는 커녕 항의 논평조차 내지 않고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고 김 의원은 비판했다. 김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모욕적인 저자세 외교로 당장 우리 국민이, 나아가 다음 세대가 누려야 할 대한민국의 미래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면서 미세먼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물었다. 코로나19 사태로 떨어졌던 중국 공장가동률이 거의 회복되었고 겨울철 난방까지 더해져 중국에서 유입되는 오염물질 총량이 늘어났다고 김 의원은 강조했다. 그는 이어 “지금과 같은 저자세 외교로 이 난제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라며 “과도한 저자세 대중외교의 근저에는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통해 2년여 전의 ‘미북 싱가포르 가짜 평화쇼’와 같은 연출을 하여 내년 4월 재보궐선거에 활용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정권 연장을 위해 국익을 팔아먹는 짓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왕이 부장은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대해 마스크를 가리키면서 코로나19가 통제돼야 한다고 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동학정신, 4·19혁명 등 오늘날 민주주의의 뿌리”

    “동학정신, 4·19혁명 등 오늘날 민주주의의 뿌리”

    국가기념일 지정 1주년 의미 되새겨기념공원 조성 외 유네스코 등재 추진한중일 다양한 시각 주제발표 이어져“동학농민혁명은 최초의 근대 정치운동이자 일제 침략에 맞선 민족운동의 뿌리.” 120여 년 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인 ‘보국안민’을 외치며 궐기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전북 정읍시와 서울신문이 2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 1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에 묻다’란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했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이날 개회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6년이 지났다”면서 “이 학술대회는 19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고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민족대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라면서 “당시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인 지 되짚어 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고광헌 서울신문 사장도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스스로 결집해 노예의 삶을 거부한 최초의 근대적 정치운동”이라면서 “이번 학술대회가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위상이 높아진 동학농민혁명을 더 깊게 조명하고 당시 동학혁명의 꿈과 지향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정읍이 고향인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축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라면서 “동학농민혁명은 25년 후 3·1운동으로 이어졌고, 또 10년 후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화항쟁도 모두 동학정신에 뿌리를 뒀다”고 주장했다. 이형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되새기는 기념공원이 내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면서 “재단에서는 공원 조성사업 외 참여자의 명예 회복을 시키는 일, 정신을 계승·발전하는 일 등과 유적들을 발굴하고 이를 세계유네스코에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김익두 전북대 교수의 ‘동학농민혁명과 문화’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미야지마 히로시 일본 도쿄대 교수의 ‘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의 ‘동학농민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 방민호 중국 옌볜대 교수의 ‘동학농민혁명시기 청군대초안과 원세개’, 조재곤 서강대 교수의 ‘일본군의 조선파병과 인력·물자 동원’, 유바다 고려대 교수의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 김원호 나라풍물굿 이사장의 ‘문화사적 측면에서 본 동학농민혁명의 문화운동 방향’, 김탁 한국학대학원 박사의 ‘동학사상의 종교적 전승-증산사상을 중심으로’ 등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글로벌 In&Out] 러시아가 존경하는 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김청풍/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러시아가 존경하는 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김청풍/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 박사과정

    최근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연구하며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항한 영웅들에 대한 기억을 후대에게 전승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되면서 소련 시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중 타향에서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았던 ‘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의 생애가 관심을 끌고 있다. 김 니콜라이는 러일전쟁 중인 1904년 11월 18일 제정러시아가 다스렸던 연해주 지역에 이주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국어 이름은 김청풍이다. 13세가 됐을 때 그는 10월 사회주의 혁명 소식을 듣게 되고, 볼셰비키에 가담해 극동 지역에 쳐들어간 일제가 지지했던 백위파와의 투쟁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후 러시아 내전이 끝나자 농업에 종사하면서 중학교에 다녔다. 1925년 10월 소련군에 입대하고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보병학교를 졸업한 후 극동 지역에 돌아가 중대장을 지냈다. 1928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1929년에는 중국 만주 지역의 군벌이었던 장쉐량의 도발로 인해 발생한 중동철도분쟁에 참전했다. 전투 경험을 쌓은 김청풍은 군인으로 성장했으며, 1938년 소련 최고의 군사학교인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1939년 소련·핀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같은 해 소련에서 진행된 대숙청에 휘말렸으나 무죄 판결을 받아 1940년 2월에 군대에 복귀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을 침략했다.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어 후퇴하고 있었으며 독일군은 그 기동력을 이용해 소련군 부대들을 포위, 섬멸하고 있었다. 참으로 시련의 시기였다. 만일 일제의 동맹국인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이겼다면 전 세계가 파시즘이라는 암흑시대에 빠졌을 것이고 한반도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다. 1941년 7월 15일 독일 육군 기갑전력의 창시자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인 구데리안이 지휘했던 부대들은 소련 서부전선군의 일부를 포위하려고 했다. 위험성을 인식한 소련군 사령부는 그 부대들을 소지강으로 옮길 것을 결정했으나 이용할 수 있는 다리가 크리체프라는 도시에 집중돼 있어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소련군 사령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크리체프로 향하던 부대를 멈추고 서쪽으로 약 4㎞ 떨어진 소콜니치라는 마을로 이동해 적의 공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청풍이 지휘했던 137사단 409보병연대의 대대였다. 김청풍의 부대는 600명과 45㎜ 경대전차포 4대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밀려오는 기갑전차 사단을 막아야만 했다. 7월 17일 오전 3시 30분 수개의 기계화보병대대, 공병부대, 수대 전차 그리고 중포(重砲)의 지원을 포함한 독일군 전투단이 공격에 들어갔다. 같은 날 오전 5시쯤 전투단의 선두 부대가 김청풍 부대와 부딪쳤다. 하지만 김청풍은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해 방어선을 뚫으려던 독일군 선두 부대를 후퇴시켰다. 김청풍 부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전투단장인 에버바흐 중령이 중포를 활용했으나 맹포격을 받은 김청풍은 이를 버티고 오전 8~9시가 돼서야 후퇴하기 시작했다. 짧은 전투였지만 4시간이나 벌어 준 김청풍 대대 덕분에 소련군의 주력은 성공적으로 소지강을 건너갔다. 크리체프에서 또 하나의 짧은 전투를 벌이고 소지강의 동쪽 기슭으로 건너가 교량을 폭파한 김청풍 대대는 독일군 명장의 부대들을 막음으로써 수많은 소련군인을 구했고 나치독일 패망에 크게 기여했다. 그 후 김청풍은 독소전쟁의 마지막 날까지 용감하게 싸웠고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해방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1946년 제대 후 극동 지역으로 돌아가 한인집단농장 농장장을 지냈다고 한다. 1976년 12월 7일 별세해 한반도에서 약 550㎞ 떨어진 비킨이라는 도시에서 군장으로 안장됐다.
  • 신분 철폐·조세 개혁… 동학농민혁명,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다

    신분 철폐·조세 개혁… 동학농민혁명,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다

    전북 정읍시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가 주관하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1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25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개최된다.‘19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문화로 본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더욱 위상이 높아진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중요성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야 하는 당위성과 방향을 살펴본다. 한중일 석학들은 김익두 전북대 교수의 기조발제 ‘동학농민혁명과 문화’를 시작으로 7개 주제에 대해 발표하고 신순철 원광대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할 계획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지침에 따라 50명 이하로 참석자를 제한하고 참석하지 못한 관계자와 시민들을 위해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한다.#동학농민혁명과 문화 문화의 세기라 불리는 21세기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논의는 이제 기존의 역사적·사상적 논의와 아울러 ‘문화적 논의’를 좀더 활성화해야 한다. 동학이 근거한 문화예술의 전통, 정체성 확인부터 시작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계승되고 변이되도록 해야 할 것인가를 다뤄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역동적으로 되살아나려면 동학사상을 부단히 확장, 심화하는 구체적인 방향과 틀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학문화의 구체적인 분야들을 어떻게 21세기 한국문화의 지평에서 재활성화할 것인지에 대한 작업이 필요하다. 동학문화가 거느렸던 전통 민속, 예능들의 구체적인 영역을 오늘날의 문화현장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활성화하고 재창조해야 한다. 이 같은 방향의 논의와 실천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가 논의해 왔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이 같은 주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동학농민혁명 연구, 나아가 한국과 동아시아의 역사 연구에 어떤 과제를 제기하는가를 논의해야 한다. 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봐야 하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심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등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철학에 관한 논의다.#동학농민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 ‘반봉건 근대화’와 ‘반외세 자주화’의 지향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을 집약적으로 설명해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근대화’가 초래한 기후·환경문제가 인류의 존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고 ‘세계화’는 싫든 좋든 국가 간 상호의존을 강화해 왔다. 이에 따라 근대적 발전에 근본적으로 회의가 제기되고 반외세라는 표현 역시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이 연결돼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어떠한 현재성을 가지는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동학농민군은 서구 열강 및 일본의 폭력적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면서도 민족이나 종교적 차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관점에서 동학농민군의 국제질서 인식, 외국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근대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가 생기는 시대, 다문화시대,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동학농민전쟁상을 구축해 가는 단서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동학농민혁명 시기 청군대초안과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는 1885년부터 조선에서 청나라의 특권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 전력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위안스카이는 조선 정부의 대응 미비로 인해 청나라의 제한된 군사력 ‘조용안’을 국가 차원 규모의 ‘청군대초안’으로 이끌어 가 성사시켰다. 조선 정부 측의 무능한 대책이 청군대초안의 첫 번째 계기였다면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추진력은 결과를 가져온 원인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특권을 한층 확대하고 위안스카이의 주체할 수 없는 정치적 야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그러나 결국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새로 출간된 ‘위안스카이전집’을 통해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일본군의 조선 파병과 인력·물자 동원 동학농민군 진압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1894년 6월 2일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 일본군의 출병은 조선 정부가 요청한 것이 아닌 일본 정부와 군부의 일방적 행위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파병 근거는 톈진조약과 제물포조약이었으나 어느 하나 조건에 부합하는 게 없었다. 일본군 출병과 조선 내 활동은 조선 정부와 전혀 협의되지 않은 독단적 행위였기에 그들에 의한 인력과 물자 동원 역시 법률적 근거 없이 진행됐다. 강제동원과 징발로 인해 해당 지역 주민들의 비협조·태업 등을 초래했고 적극적인 항쟁도 발생했다. 이에 일본은 병참선 확보와 운반력 증진을 위한 인부와 식량 징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조일양국맹약’을 조선 정부에 강제했다. 이 맹약으로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일본은 1882년 징발령 제정 이후 국외에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적용해 징발했고 이후 각국 점령지역에서 국내법을 적용해 다른 나라 물자와 인력들도 수탈했다.#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 서구 세계의 근대국가 건설은 영국혁명(1215년), 미국혁명(1776년), 프랑스혁명(1789년) 등 시민혁명으로부터 비롯됐다. 이들 혁명이 가진 공통점은 조세법정주의와 죄형법정주의를 천명하고 이를 토대로 천부인권과 평등권을 보장하며 국민주권국가 건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그런 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대체로 여기에 부합한다. 갑오개혁 정권의 군국기무처 안을 살펴보면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대체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세제도와 탐관오리 축출은 농민군의 요구와 거의 들어맞는다. 신분제도도 철폐해 농민군의 기대에 부응했다. 죄형법정주의도 정확히 천명했다. 문제는 동학농민군과 갑오개혁 정권의 토대와 동력이 달랐다는 것이다. 갑오개혁 정권은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정권이었고 동학농민군은 이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자는 충돌했고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문화사적 측면에서 본 동학농민혁명의 문화운동 방향 민중문화운동의 실천 활동은 늘 동학과 연관됐다. 민족문화를 보는 시각부터 창작 모티브까지 여러 갈래의 동학이 늘 문화운동 가까이에 있었다. 민중문화운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점차 쇠약해졌고 민족문화 개념으로 각개적으로 활동하다가 우리 시대 문화운동으로 재생의 힘을 준 게 ‘촛불광장’의 문화였다. 촛불문화의 영향으로 두 가지 영역에서 새로운 실천이 시작됐다. 하나는 동학의 신명과 공동체성에서 출발해 ‘대동신명’이라는 이름으로 진화한 얘기와 실천으로서 ‘만북울림’이다. 다른 하나는 동학적인 전개 과정의 이면에서 피워진 ‘생명꽃’에 관한 얘기와 일상문화운동에 관한 것이다. 만국의 영성과 신명과 모성성을 21세기 새로운 지평에서 융합하고 재창조하는 일에 우리의 만북울림 방식의 대동신명과 ‘정화수의례’의 영성 호출 방식은 우수한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다.#동학사상의 종교적 전승-증산사상을 중심으로 한국 신종교사에 있어 증산교만큼 동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단은 드물다.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본명 강일순)은 동학의 한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그를 보완하는 형태로 제기된 새로운 종교사상이다. 증산은 동학사상 이후 뚜렷한 방향성을 상실했던 한국 민중사상의 행방을 종교적 형태의 증산사상으로 집약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증산은 동학사상의 완성을 자신의 종교적 목표로 삼았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바로 ‘참동학’이라고 주장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건을 증산은 자신만의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증산은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의 ‘다시개벽’ 사상을 더욱 심화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후천개벽’ 사상으로 전개했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홍콩 인권운동가 방탄소년단에 감사표한 이유

    홍콩 인권운동가 방탄소년단에 감사표한 이유

    5년 전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홍콩 민주화 운동과 지난해부터 이어진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있는 홍콩의 인권운동가 조슈아 웡이 한국의 방탄소년단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조슈아 웡은 지난 1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노란 우산을 들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사진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들은 방탄소년단에 대한 공격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웡의 트위터에 네티즌들은 “홍콩 인권운동의 상징인 노란 우산을 든다는 것은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인데 방탄소년단은 대단하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견에 중국 정부가 반일운동과 반미운동을 벌여도 중국인의 아이폰 구매와 같은 소비가 끊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반박도 있었다. 게다가 방탄소년단은 세계 팬들과 소통하는 커뮤니티인 위버스를 통해 판매하는 생수의 이름을 ‘비워터’(be water)라고 지었는데 이 역시 홍콩 시위의 구호 가운데 하나다. 한 홍콩 네티즌은 중국 공산당이 진실은 제대로 판별하지 않고 홍콩 시위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공격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며 우연이든 아니든 방탄소년단이 노란 우산을 들고 홍콩 시위 슬로건을 생수 이름으로 한 것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 지지 댓글 하나당 5마오(약 90원)를 받는다고 해서 ‘우마오’라고 불리는 중국 공산당 댓글 부대를 비판했다. 앞서 방탄소년단은 한·미 우호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중국 내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미국에 맞서 한국을 도왔다는 이른바 ‘항미원조’ 정신을 내세우며 방탄소년단이 중국의 희생을 무시했다고 보도했던 중국 관영언론 환구시보는 이후 한국 언론의 선정적 보도가 논란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내조 아닌 외조, 최초의 퍼스트레이디 ‘닥터 B’가 온다

    내조 아닌 외조, 최초의 퍼스트레이디 ‘닥터 B’가 온다

    “퍼스트레이디 대신 ‘닥터 B’로 불러 주세요.” 내년 1월 백악관 입성이 확실시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질 바이든(69)에 대해 앞으로는 이런 소개말이 자리잡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돌아왔다”며 당선 일성을 내지른 바이든 당선인과 함께 질 바이든은 36년 경력의 교사이자 ‘대통령의 일하는 부인’이라는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역할 모델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다시 ‘세계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나선 미국에서 퍼스트레이디는 시대 변화에 따라 어떻게 모습을 달리하고, 여성들에게 영감의 원천과 본보기가 돼 왔는지 살펴본다.250년에 이르는 백악관 역사에서 ‘안주인’에게 으레껏 기대됐던 역할과 키워드는 가부장 제도에 충실한 보살피는 능력, 현명한 부인과 어머니, 가족 지향, 지혜로움 등이었다. 공식 석상이나 정상외교 무대에 등장할 때도 ‘패션 외교’라는 이름 아래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가십성 관심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이 1920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역사와 무관치 않게 퍼스트레이디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보다 대통령 뒤에서 그림자처럼 조언하거나 내조하는 역할을 이상형으로 쳤다. 1900년대 초반 재임했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아내 그레이스가 정치에 참견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곤 했다. 부인이 대중 앞에서 시사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했다. 미국 작가 캐슬린 크럴에 따르면 그녀 역시 “남편이 그런 것들을 나와 상의하지 않고 자유로이 결정한다는 사실이 차라리 자랑스럽다”고 밝힌 적도 있다. 비단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대중과 교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1800년대 퍼스트레이디도 예외는 아니었다.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부인 제인 피어스는 정치를 싫어하는 성정으로 인해 미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퍼스트레이디로 꼽힌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취임식 직전 막내아들이 기차 사고로 숨지자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재임 기간 내내 ‘백악관의 그림자’로 알려진 2층에 은거하며 지냈다. 시아버지가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남편인 존 퀸시 애덤스는 6대 대통령이었던 루이자 애덤스는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사석에선 백악관을 일컬어 “이 위대한 비사교적인 집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내조자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본인만의 영역을 개척한 여성들이 있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의 부인 애비게일은 남편이 헌법 기초 작업을 하는 동안 ‘여성 권한이 포함돼야 한다’고 촉구하는 당대 드문 여성 로비스트 역할을 했다. 32대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는 새로운 대통령 부인상을 제시한 선구적 인물로 꼽힌다. 정치를 시작한 남편이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지자 함께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자로도 나섰다. 백악관 생활을 끝낸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유엔 인권대사를 지내며 1946년 세계인권선언 작성을 주도했다. 지적이면서 우아하고도 검소했던 그녀는 일간지에 칼럼 ‘나의 나날’을 연재하며 친근한 영부인 이미지를 심었다. 기고·강연으로 벌어들인 7만 5000달러를 자선기금으로 내놓아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1970년대 초반 집권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의 아내에 대해 “지능은 있지만 너무 총명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부인 팻은 남편이 훗날 사임하게 되는 정치 스캔들 ‘워터게이트’ 사건의 유죄를 입증하는 테이프를 ‘불태우라’고 충고하고, 여성 평등권 수정안도 요구할 만큼 정치적 수완이 대단했다. ‘전쟁광’으로 폄하됐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대조적인 가정적 이미지로 인기가 높았던 로라 부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재선 구호를 ‘베티의 남편을 대통령으로’라고 만들었던 베티 포드, 직업난에 ‘퍼스트레이디’라고 쓰고 점술가 조언을 받아 남편 일정을 잡았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 린든 존슨 대통령의 애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자문역을 자처한 레이디 버드 존슨 등이 20세기의 대표적 영부인들로 꼽힌다. 그러나 본인 고유의 경력보다는 대통령의 조력자 혹은 정치적 치맛바람을 날리는 역할에 한정됐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은 패션 스타일과 남편 사후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재혼 등 부수적인 화제들로 이름을 남긴 경우에 가깝다. 1990년대부터는 보조적인 성 역할과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여성 리더로 자리매김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대통령과 동등한, 혹은 한발 더 나아가는 ‘야망 넘치는 정치가’로서의 영부인은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최초다. 남편과 똑같이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의 정치적 동지가 됐으며, 석사 학위를 가진 최초의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 윙’에 자신의 사무실을 갖고 건강보험 개정 작업에 관여하는 등 정치력을 확장했다.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 여론으로 인해 그녀의 인기는 한때 곤두박질쳤지만, 클린턴의 성 추문 탄핵 사건으로 인기가 반전되는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흑인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석패했지만 민주당 대선 압승 직후 오바마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직을 맡았다. 2016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에도 바이든 새 행정부의 유엔대사 발탁설이 나오는 등 정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미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인 미셸 오바마는 전통적인 영부인 역을 외면하지 않되 적극적이고 균형감 있는 역할상을 제시한 것으로 꼽힌다. 힐러리처럼 유능한 변호사 출신인 그는 시카고 대학병원 부원장을 지낸 보건행정 경력을 살려 소외계층을 보듬는 데 주력했다. 결식아동 방지 및 식생활 개선을 위한 아동결식방지건강법 주도, 소아 비만 퇴치 운동 ‘레츠 무브!’ 캠페인, 백악관 텃밭 가꾸기 등 먹거리 운동이 그녀의 성과다. 데이비드 예르마크 뉴욕대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그녀에 대해 “강인한 여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가정을 이끄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제 질 바이든은 남편의 이력과 별개인 자신만의 커리어를 구축해 가는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상을 안착시킬 것으로 보인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최근 전했다. 앞서 질 바이든은 남편이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으로 봉직하는 8년 동안 ‘세컨드레이디’ 칭호를 받았지만 36년간 교편을 잡았던 경력을 포기하지 않고 노던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노바)에서 영작문 강의를 계속했다. 학생 대부분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부통령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심지어 그녀는 함께 출근하는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학생으로 위장해 와 달라”고 부탁하거나 남편의 출장에 동행하는 전용기 안에서 시험지를 채점한 뒤 기일에 맞춰 학생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질 바이든은 저서 ‘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모든 사람이 내가 가르치는 것을 멈추고 전업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가르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노바 학장에게 채용되고 있었다”고 썼다. 그녀는 올해 대선 캠페인 기간 내내 “남편의 직업에 전적으로 의존하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오하이오대 캐서린 젤리슨 교수는 “질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21세기로 가져올 것”이라며 통상적인 내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뿌리째 바꿀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니퍼 롤리스 버지니아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녀가 (영부인의 특권을) 내려놓을 것”이라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의 남편 더그 엠호프 변호사가 최초의 ‘세컨드젠틀맨’이 돼 직장을 그만둔 것처럼 그녀는 미국 정치의 진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또 도난…뱅크시 작품 ‘훌라후프 소녀’의 자전거 사라졌다

    또 도난…뱅크시 작품 ‘훌라후프 소녀’의 자전거 사라졌다

    뱅크시의 최근 작품 ‘훌라후프 소녀’ 일부가 사라졌다. 22일(현지시간) BBC는 영국 노팅엄 주택가에 설치된 뱅크시 작품 일부가 없어졌다고 보도했다. ‘훌라후프 소녀’는 자전거 타이어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벽화 앞에 설치된 뒷바퀴 빠진 실제 자전거가 사실감을 더했다. 현지 감정인은 벽화의 가치가 작품이 설치된 노팅엄 주택가의 평균 집값 21만4000파운드(약 3억 2000만 원)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달 13일 노팅엄 로스시의 한 건물 외벽에서 처음 발견된 벽화는 이후 뱅크시가 신작임을 공식 확인하면서 ‘반달’의 잇단 표적이 됐다. ‘반달’은 예술·문화의 파괴자로 공공기물 등을 고의로 부수는 반달리즘 행위를 일삼는 사람을 뜻한다. 몇몇은 작품에 스프레이를 뿌려 훼손하기도 했다.시의회가 투명 덮개로 가림막을 설치해 작품 보호에 나섰지만,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현지언론은 주말 사이 벽화 앞 기둥에 자물쇠로 채워져 있던 바퀴 빠진 자전거가 사라졌다고 전했다. 22일 아침 벽화를 보러 갔다가 도난 사실을 확인한 방문객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 여성은 “노팅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라면서 “누군가 자전거를 훔쳐 간 거라면 매우 무례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일단 현지 경찰과 시의회 모두 공식적으로 자전거 철거를 통보받은 사실은 없다고 밝혔지만, 자전거가 도난된 것이 맞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지난 9월 통째로 사라졌던 뱅크시의 또 다른 작품 ‘분홍색 가면을 쓴 고릴라’도 애초 도난이 의심됐으나 한 달 뒤 경매장에 나왔다.활동 초기만 해도 단순 낙서로 오인당하였던 뱅크시 작품은 유명세와 동시에 강도의 표적이 됐다. 2014년에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뱅크시 벽화를 훔치려고 벽을 뜯어낸 용의자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뱅크시가 2015년 프랑스 파리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8년 파리 바타클랑 극장 비상구 문에 그린 벽화도 2019년 1월 도난당했다.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벽화는 1년 반 만인 올해 6월 이탈리아의 한 농가에서 발견돼 반환됐다. ‘얼굴 없는 화가’로 전 세계에 알려진 뱅크시는 도시의 거리와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 등을 풍자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그렸다 하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킬 만큼 영향력이 크다. 특히 유명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두는 등의 파격적인 행보로도 유명하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K1 전차’ 수출은 왜 미국 허가를 받아야 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K1 전차’ 수출은 왜 미국 허가를 받아야 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1978년 한미 양국 ‘한국형 전차’ 양해각서美 수출 반대하면 불가…1대당 5만弗 로열티무기한 약정…무기개발 약정 꼼꼼히 확인해야부품 국산화·유효기간 설정 등 대책 필요한국은 세계 11위 무기수출국입니다. 수류탄, 지뢰 등 탄약류를 넘어 고성능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명품무기가 잇따라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능 좋은 외국산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으며, 국산 무기를 낮춰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국산 무기를 개발해야 할까. ‘K1 전차’가 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22일 한국국방연구원이 발간하는 국방논단에 실린 ‘방산수출지원과 정부기관 간 약정’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 우리나라는 불안한 안보환경에 직면했습니다. 자체 전차 생산 능력을 갖춘 북한은 신형인 T62를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한국에 주둔 중이었던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주한미군 규모가 2만명이나 줄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한국형 전차’ 개발에 나섰습니다. 국방부에 전차관리사업단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당시 국내 기술력만으로는 신형 전차 개발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크라이슬러 디펜스(1980년대 이후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설계한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바탕으로 한 국산 전차 개발사업이 진행됩니다. 1986년부터 실전 배치된 이 전차가 K1 전차입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88전차’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국형 전차’ 개발에 3가지 조건 건 美 1978년 7월 한미 양국은 역사적인 ‘한국형 전차’ 양해각서에 서명했습니다. 사업 목표는 한국형 전차 시제품 2대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은 3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당시엔 이 조건들이 K1 계열 전차의 수출길을 막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서둘러 전차부터 개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을 겁니다.양해각서는 ‘K1 전차 및 그 계열전차를 수출하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습니다. 미국에 대한 적성국가가 아니더라도 기술 유출 위험이 있거나, 자국 방위산업체들이 수출에 반대하면 해외 수출은 불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어렵게 미국 동의를 얻더라도, 오랜 시간이 소요돼 협상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미 정부는 해외에 수출할 경우 완성전차 1대당 5만 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국방연구원 연구팀은 “K1 전차와 계열전차 구매에 관심을 가질만한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가격이 특히 중요한 결정요소여서 로열티로 인한 가격상승은 수출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가격 문제로 수출에 실패한 사례도 나왔습니다. ●“미국이 반대하면 K1 해외 수출 불가” 우수한 3세대 전차로 인정받은 K1 전차는 1997년 말레이시아가 추진한 7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전차 도입사업 입찰에 참여하게 됩니다. 현대정공(현재의 현대로템)의 K1과 폴란드 부마르 와벤데의 PT91, 우크라이나 KMDB의 T84가 경쟁했습니다. 현대정공은 정글이 많은 말레이시아 지형에 맞게 51.1t인 중량을 47.9t으로 크게 줄이고 적재 포탄수는 47발에서 41발로 줄이는 대신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양압장치(차량 내부 압력을 높여 화생방 공격을 방어하는 장치)를 장착한 최신 ‘K1M’을 내세웠습니다.말레이시아 측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계약이 성사되는 듯 했으나 막판에 폴란드의 PT91M에 밀려 수출이 좌절됐습니다. 연구팀은 “K1M의 탈락 원인은 성능보다는 가격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후 K1 전차 및 그 계열전차는 아직까지 수출된 적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당시 양해각서의 효력이 영구적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이 먼저 나서서 효력을 정지시킬 가능성은 ‘0%’일 겁니다. 결국 미국의 사전 동의와 로열티 지불이 계속 수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개발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 K1 전차를 구식 전차라고 여기는 분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군에서 1000대 이상 운용하고 있는 주력 전차입니다. 뿐만 아니라 105㎜ 강선포를 120㎜ 활강포로 강화한 K1A1·K1A2, 전후방 감시카메라, 실시간 전차간 정보공유, 디지털 전장관리체계 등 각종 전장시스템을 대폭 강화한 K1E1 등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K2 전차 보급이 계속 확대되면 K1 전차는 개발도상국 등에 성능 좋은 중고전차로 수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미국과 협의해 양해각서 내용을 삭제하지 않는 한 수출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을 미국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반드시 넣어야 할 항목이었는지 모릅니다.●“기술 국산화로 문제 소지 미리 없애야” 이런 사례는 K1 전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연구팀은 “기존에 맺었던 무기개발·생산과 관련한 약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관리해야 한다”며 “조율이 불가능하다면 문제가 되는 기술이나 부품의 국산화를 통해 문제의 소지를 미리 없애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약정 체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약정을 체결할 때 가급적 개조·개량품은 한국이 지식재산권을 소유하도록 하고, 외국이 지식재산권을 갖게 됐다고 하더라도 유효기간을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보유한 기술을 해외에 수출할 때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2008년 K2 전차 기술 이전 계약을 맺고 터키가 개발한 ‘알타이 전차’는 이미 우리의 경쟁 상대가 됐습니다. 연구팀은 “지식재산권을 우리나라가 아닌 수입국이 가져간다면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수출하자마자 강력한 수출경쟁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홀트아동복지회, 세종학당재단과 업무협약 체결

    홀트아동복지회, 세종학당재단과 업무협약 체결

    홀트아동복지회(회장 김호현)가 지난 19일 세종학당재단(이사장 강현화)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지난 19일 세종학당재단 12층 대회의실에서 홀트아동복지회와 세종학당재단의 업무협약식이 진행됐다. 세종학당재단은 국외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보급 사업을 총괄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한다.홀트아동복지회는 이번 협약을 통해 국외입양인 및 입양 가족, 홀트드림센터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세종학당재단 12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업무협약식에는 홀트아동복지회 김호현 회장과 신상문 입양복지본부장, 세종학당재단 강현화 이사장과 윤문원 사무총장 및 관계자가 참석했다. 홀트아동복지회 김호현 회장은 “국외입양인과 입양가족 그리고 홀트드림센터의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릴 수 있어 이번 업무협약이 뜻깊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전했다. 한편 창립 65주년을 맞이하는 홀트아동복지회는 전쟁과 가난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입양 복지를 시작으로 아동복지, 미혼 한부모 복지, 장애인복지, 지역사회 복지를 비롯해 다문화가정·해외 지원을 이어나가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크론보르성, 나오시마, 경주 경마장 부지/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크론보르성, 나오시마, 경주 경마장 부지/서동철 논설위원

    일본 세토내해의 나오시마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지추(地中)미술관과 이우환미술관, 베네세미술관이 들어서며 일약 ‘예술의 섬’으로 떠올랐다. 지추미술관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봉우리에 2004년 이름처럼 지하에 지어졌다. 주변 경관은 우리 서남해안의 작은 섬처럼 소박하기만 하다. 그럴수록 지추미술관은 그렇게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역설한다. 덴마크의 항구도시 헬싱외르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배경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크론보르성이 있다. 그런데 크론보르성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옛 부두에 국립해양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돌아가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 크론보르성의 역사적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려 박물관을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게 지었기 때문이다. 덴마크 건축가 비야르케 잉겔스가 설계한 해양박물관은 과거 선박수리소로 쓰였던 드라이도크를 활용해 2013년 완공됐다. 폐쇄된 드라이도크의 배 모양을 살리면서 벽체 쪽을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각 전시공간은 드라이도크 내부에 이리저리 이어 놓은 다리로 오갈 수 있다. 나오시마 지추미술관이 자연 경관의 조화를 꾀했다면 덴마크해양박물관은 문화유산과 어떻게 하면 이질감 없이 어울릴 수 있는지 고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21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파리의 강제 이송 희생자 추념관을 기억해야 한다. 파리의 센강은 퐁네프 다리 주변에서 갈라져 시테섬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흐른다. 한강의 중지도를 연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테섬에는 지난해 4월 대화재가 일어난 노트르담대성당이 있다. 노트르담대성당과 센강이 다시 합류하는 두물머리 사이에 1962년 세워진 추념관이 있다. 추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국민 20만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희생된 아픔을 기억한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도록 지하에 추념관이 지어진 것은 전쟁의 억압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노트르담대성당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이런 개념의 문화공간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보이지 않는 박물관’이라는 콘셉트로 지난 1월 문을 연 국립익산박물관이다. 신수진 유선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장이 설계한 익산박물관은 미륵사터의 폐허미를 해치지 않는 것은 물론 미륵사 서탑의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몸을 낮췄다. 계단을 올라야 하는 다른 박물관과 달리 이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경사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반면 경주 황룡사터에 들어선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주춧돌밖에 남아 있지 않다시피 한 이 삼국시대 절터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반감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현재의 황룡사문화관이 건축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더구나 문화관의 지상 건립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9층석탑을 비롯한 황룡사 전체 사역의 복원을 전제로 했을 것이다. 마사회가 경주에 경마장을 세우려 해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손곡동과 물천리 일대로 면적은 96만 5000㎡에 이른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및 통일신라 시대 토기가마와 숯가마가 대규모로 확인됐다. 결국 2001년 전체 부지의 97%인 85만 3000㎡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경마장 건설계획은 백지화됐다. 하지만 보문단지와 야트막한 야산을 사이에 둔 이 땅에 대한 개발압력은 지금도 거세기만 하다. 마사회는 이후 경주 경마장 부지의 매각을 추진했지만, 개발이 어려워 경제성이 없는 만큼 원매자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마사회는 경마장 부지를 정부에 기부채납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현재 경주 경마장 부지의 활용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경주는 지금 단순한 유적 관광을 넘어 새로운 개념의 문화유산 전시 및 교육, 체험 공간의 필요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상태이다. 지역 여론 역시 문화재청이 주도하는 국책 문화 시설이라면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경마장 부지가 자연 및 문화 유산을 훼손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문화유산 단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손곡(蓀谷)은 ‘창포가 우거진 계곡’이라는 뜻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는 과거 아무것도 없었지만, 손곡은 이미 ‘아트밸리’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sol@seoul.co.kr
  • 전쟁 닮은 게임… 게임 같은 전쟁

    전쟁 닮은 게임… 게임 같은 전쟁

    9·11 이후 美 청소년 전쟁 게임 인기 고조된 위기 활용 전쟁·테러 소재화법적·도덕적 제약 벗어나 공포 해소전쟁 정책 향 정치적 신뢰 고착화 2011년 5월 2일. 미 해군 특수전단 네이비실의 한 팀이 파키스탄의 저택에 은신해 있던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미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했다. 미군에게 9·11 테러 이후 주범의 사살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유희적 전쟁문화로 재구성되는 데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불과 닷새 뒤에 ‘카운터 스트라이크’, ‘쿠마 워’ 등의 밀리터리 게임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돼 배포됐다. 사실 게이머들에게 빈라덴의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게임을 통해 빈라덴의 사살을 반복해 왔다. 밀리터리 게임 문화에선 이 역사적 사건조차 기시감이 드는 ‘경험된 미래’였던 셈이다.현실은 게임 문화와 산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게임이 현실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미군들의 훈련에 활용되는 ‘아메리카 아미’(2002)나 ‘풀 스펙트럼 워리어’(2004) 등이 그 예다. ‘전쟁 게임’은 이처럼 현실과 게임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상호작용하는지를 살폈다. 밀리터리 슈팅 게임이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게 된 요인은 무엇인지, 9·11 이후 밀리터리 슈팅 게임이 설계한 디자인과 게임 전략이 미국의 군사력과 전쟁 정책에 관한 정치적 믿음을 어떻게 고착화하고 있는지 등을 집중 분석한다. 오늘날 게임산업은 경제 규모에서 여느 문화산업을 압도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9·11을 기점으로 전쟁 게임이 특히 인기를 끌게 됐다. 미국인들 사이에 위기감이 고조되자 게임 회사들은 전쟁과 테러를 게임산업의 소재로 끌어들였다. 이들이 만든 전쟁 게임 속에서 게이머는 막강한 화력을 법적·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끊임없이 난사한다. 전쟁 게임이 9·11로 초래된 충격과 공포에 대한 유희적 해독제로 기능한 것이다.게임이 재현하는 군사적 폭력이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는 비판은 ‘닌텐도 전쟁’이라 불리는 걸프전(1990) 때도 있었다. 미 국방부는 이 ‘깨끗한 군사적 개입’을 TV에 맞도록 꾸준히 다듬었고, 서구의 뉴스 매체들은 이를 전 세계로 생중계했다. 공격 차량과 로켓에 장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전쟁의 이미지들은 ‘미사일 커맨드’, ‘배틀존’ 등의 게임 속 파괴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났다. 전쟁 게임들은 미군이 치르는 전투 시나리오를 게이머의 유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활용한다. 여러 게이머가 참여하는 상호작용 플레이 방식은 헤게모니의 즐거움과 전쟁 유희 감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게임의 상업적 성공을 이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남성적이고 군사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가 정체성까지 추동해 낸다.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테러리스트에 대항하는 병사이자 게임의 서사를 이끄는 엔진이 된다. 집단적 악몽 속에서 일하며 국가적 열망을 만들어 내는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게임 속에서) 고도의 무인화된 장비와 사이보그 지상 병력에 명령을 내리지만 이런 기술은 결국 우리에게 총구를 돌릴 뿐”이라고 밝혔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동학농민군이 지향했던 세상을 묻다

    전북 정읍시는 오는 2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국가기념일 제정 1주년 기념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17일 밝혔다. 정읍시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가 주관한다. ‘동학농민혁명에 묻다’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더욱 위상이 높아진 동학농민혁명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당시 동학농민군이 지향하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이 무엇인지 되짚어 본다. 특히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정점을 이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야 하는 가치와 당위성을 살펴본다. 한중일 학자들은 김익두 전북대 교수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동학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미야지마 히로시 도쿄대 명예교수) ▲동학농민혁명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동학농민혁명시기 청군대초안(淸軍代剿案)과 원세계(방민호 옌볜대 교수) ▲일본군의 조선파병과 인력문자 동원(조재곤 서강대 교수)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유바다 고려대 교수) ▲문화사적 측면에서 본 동학농민혁명(김원호 (사)나라풍물굿 이사장) ▲동학사상의 종교적 전승(김탁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할 계획이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미중 갈등 지속되면 1차 대전 수준 재앙 닥칠 수도”

    “미중 갈등 지속되면 1차 대전 수준 재앙 닥칠 수도”

    1978년 미중 수교를 성사시켜 ‘데탕트(화해) 설계사’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미중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버금가는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신경제포럼에서 “조 바이든 차기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훼손한 중국과의 소통 채널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두 나라가 점점 대결을 향해 치닫고 있다. 외교 역시 대립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면서 “이대로 두면 말싸움이 아니라 진짜 군사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모두 뒤집는 ‘ABT’(Anything But Trump·트럼프와 반대로)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문제만큼은 전임자와 궤를 같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그는 동맹국 정상들과의 통화에서 ‘민주주의 강화’를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상황에 따라 위험을 막기 위한 공조가 필요하기는 하다”면서도 “그렇다고 해도 지금 특정 국가(중국)를 겨냥한 연대를 꾸리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신장 위구르·티베트 등) 인권 문제를 두고 두 나라의 의견이 다르다. 상대방이 민감해하는 부분은 양해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 인권 문제를 ‘이번에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벼르지 말고 상대방이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완화해 가는 편이 낫다”고 밝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에서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로나19 협력’을 명분 삼아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 뒤 바이든 당선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모두에게 “어떤 갈등이 생겨도 군사적 해법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미국 외교의 거두’로 불리는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의 패권 추구는 역사의 필연이기에 미국은 (내키지 않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상하이 학파’다. 그는 미중 무역전쟁 초기부터 “두 나라가 서둘러 화해하고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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