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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대비한 과기처의 핵심기술개발 정책(국정탐방)

    ◎G7프로젝트로 과기선진화 발진/11개 주요과제 내용/첨단반도체 등에 3조7천억 투입/2천년까지 산·학·연 공동으로 개발 탈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국제사회 주도권 장악의 수단이 종래의 군사력 위주에서 경제력 위주로,그리고 근원적으로는 기술력 위주로 바뀌고 있다. 특히 다가오는 21세기에는 과학기술이 단순히 경제를 회생시키고 산업경쟁력을 키우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생존·번영과 국민 복지수준의 향상을 주도하는 필수적인 원동력이 될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의 주요관심도 핵심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의 후진국 이전을 기피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개발된 기술에 대한 선진국들의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기술보호주의가 극명하게 표면화되고 있다. 그예로 OECD는 정부의 기술개발 지원을 국제무역질서를 왜곡시키는 원인이라고 규정,이의 규제를 검토하는 과학기술정책 실무위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유엔환경개발회의는 지구환경보전이라는 명분을 이용,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기술및 통상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같은 선진국들의 움직임은 일본을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후진국을 선진국대열에 올려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과학기술의 차단을 통해 그 의지를 실현하려는 국제적인 행동으로 이해된다. ○기술보호주의 대응 G7프로젝트는 이같은 국제기술환경에서 우리의 자존과 독립 자율을 지키고 나아가 우리가 7대기술선진국으로 진입할수 있는 원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립된 범국가적 기술개발사업이다.G7프로젝트는 또한 국제수지 적자로 회생여건이 불투명하던 90년 우리경제의 활로개척과 국제경쟁력 회복의 근본적 대책으로 지적됐던 기술개발 명제에 부응하는 길이기도 했다. 올해부터 2000년까지 정부·민간협동사업으로 추진될 핵심선도기술개발과제 G7프로젝트는 초고집적반도체 개발등 11개과제로 구성돼 있다. 즉 「현재 경쟁력이 있는 산업기반을 토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세계 최고수준으로 도약할수 있는 기술분야」에서 ▲96년까지 2백56메가D램개발및 97년까지 주요반도체장비및 소재국산화의 기반조성을 목표로 하는 초고집적반도체 개발 ▲96년까지 정보통신용 교환기 개발및 2001년까지 종합정보통신망 기술개발을 목표로 한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 개발 ▲93년까지 시제품 개발과 94년까지 양산화를 목표로 한 고선명TV(HDTV)개발 ▲97년까지 2∼3개의 신물질제품 개발을 목표로 하는 신의약·신농약기술 개발이,선진국에서도 아직 전면적인 실용화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시작하면 21세기에 선진국과 경쟁이 가능한 기술분야에서 ▲98년까지 통합생산시스템(CIM)및 2001년까지 완전자동화 지능생산시스템기술을 개발해 5백%의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는 첨단생산시스템 개발이,경제산업의 발전에 대한 파급효과와 국민생활의 질적수준 향상을 위해 반드시 확보돼야 할 필수거점기술분야에서 ▲2001년까지 고기능·고효율·고부가가치의 첨단소재 국산화를 목표로 하는 정보·전자·에너지첨단소재기술 개발 ▲97년까지 생물신소재 실용화 기반구축을 위한 신기능 생물소재기술개발 ▲96년까지 50㎾급 연료전지개발및 2001년까지 석탄가스화 복합발전기술을 위한 신에너지기술개발 ▲97년까지 원자력발전소 개념설계및 2001년까지 상세설계기술 확보를 위한 차세대 원자로기술개발 ▲96년까자 시속 1백20㎞ 성능의 상업용 승용전기자동차기술개발을 위한 차세대자동차기술 개발▲97년까지 환경기반기술 구축을 목표로 하는 환경공학기술 개발등이 각기 과제로 채택된 것이다. 이들 과제는 3.2대1의 공개 경쟁을 거친끝에 산·학·연 공동연구 수행기관이 선정돼 올해 하반기 대부분의 연구가 착수됐다. ○59개 연구소 등 참여 G7프로젝트에는 1백26개 세부과제에 59개연구소,13개대학,54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향후 2001년까지 정부 1조4천7백억원,정부투자기관 5천9백억원,민간기업 1조6천4백억원 등 총3조7천억원이 투자될 계획이다. 정부는 이를 위한 재정 기반조성 대책으로 국가과학기술투자를 90년 현재 국민 총생산의 2.2%에서 2001년까지 5%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목표아래 92∼96년중 과학기술진흥기금을 1조원 규모로 조성·운용하고 국방비중연구개발투자를 91년의 3% 수준에서 2000년대초 7%수준으로 제고하며 정부투자기관이 매출액의 일정률을 기술개발에 투자토록 유도하고 있다. ◎특정연구사업 성과/82년 시작… 64CD·우리별1호 등 큰 결실/10년간 산업재산권 등 2천여건 실용화 국내 최초의 국가기술개발사업인 G7프로젝트는 10년전부터 시작된 「특정연구개발사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은 한정된 연구개발자원을 효율적으로 결집 활용하고 산·학·연간의 협동과 기술개발관련부처의 협조아래 국가발전목표에 따른 중장기 국책과제를 중점 개발해나가는 국책연구개발사업이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이 도입되던 80년대는 외국의 자본이나 기술에 의존하던 60,70년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도약을 준비하기위해 효율적 국가연구개발체제의 확립이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다.이에 정부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통폐합및 운영체계 일원화조치를 단행한데 이어 82년 새로운 연구개발사업체제로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신설,국책적 차원에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특정연구개발사업에는 82년부터 91년까지 10년동안 정부에서 5천7백30억원,민간기업에서 3천9백3억원등 총9천6백33억원이 투입돼 2천5백60건의 연구개발이 진행됐으며 올해에도 정부 1천3백억원,민간기업 7백18억원등 총2천18억원이 추가투입되고 있다. 그 결과 특정연구개발사업은 반도체 4메가D램,전자교환기 TDX와 같은 숱한 첨단·기반기술 개발성과를 이룩해냈을뿐만아니라 민간기업 기술개발투자의 기폭제역할을 수행하는등 국가연구기반 확립에 단단한 기여를 했다. 특정연구개발이 그동안 이뤄낸 성과를 통계로 보면 82년부터 91년까지 10년간 기업화완료 2백31건,기업화 추진 2백86건,국내외 산업재산권 출원 1천2백11건,국내외 산업재산권 등록 3백90건등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특정연구개발의 성과는 개발기술의 면면을 살필때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87년도의 16비트·32비트 컴퓨터 국산화와 91년도의 행정전산망용 중형컴퓨터 개발이 모두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소산이다.행정전산망용 컴퓨터는 현재 1백76대가 일선에 보급돼 주민등록 부동산 차량등록 통관업무등 민원을 우리기술로 처리해내고 있다. 또 우리나라를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반도체 생산국으로 부상시킨 반도체기술 역시 86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금성·삼성·현대 공동의 4메가D램 개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91년 16메가D램,92년 64메가D램 개발등 후속타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세계에서 6번째로 개발된 전전자교환기 TDX10은 91년과 92년 사이에 3천3백13만달러어치의 수출을 기록,앞으로 국내 수출업계의 「효자노릇」이 기대되며 신소재분야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코오롱이 공동개발한 아라미드 펄프는 석면대체용으로 연간 2백만달러의 수입대체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이밖에도 반도체도선용 리드프레임(한국과학기술원·(주)풍심금속),디스토마치료제 프라지콴텔(한국과학기술연구원·신풍제약),무공해살충제(유전공학연구소),「우리별1호」(한국과학기술원·항공우주연구소등)등이 특정연구개발사업의 결실들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미국·일본·독일·프랑스등 세계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기술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연구여건도 어렵다.따라서 특정연구개발사업중에서도 승산높은 소수의 전략기술을 선별,총력전을 전개해야만 과학기술선진7개국권을 넘볼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됐으며 이에따라 G7프로젝트가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최우선과제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국책연구 정권 바뀌어도 계속”/생존전략 차원… 별도예산 운용/김진현 과학기술처장관(인터뷰) 「김진현장관」하면 G7프로젝트를 연상할만큼 김장관의 G7프로젝트에 대한 집념은 강하다.「우리도」가 아닌 「우리만」의 독창적인 기술개발,「기술주권확립」,「전쟁에 우방은 있어도 기술에 우방은 없다」는 말들은 그가 연구현장에 갈때마다 G7프로젝트의 중요성을 강조할때 사용하는 그만의 수사들이다.김장관은 『우리만의 독창기술확보는 향후 국가생존의 관건』임을 재삼 강조하며 『이를위한 최소한의 목표인 G7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켜한다』고 말했다. ­G7프로젝트만 성공시키면 G7국가가 될수 있는것 입니까.▲솔직히 현재 우리수준에서 2000년까지 모든 과학기술분야를 G7수준까지 끌어올리기는 어렵습니다.G7프로젝트는 적어도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특정분야에서만은 세계수준의 기술을 확보,그 핵심주력기술을 축으로 해 관련기술의 개발을 선도하고 촉진해가자는 전략적인 개념입니다.선정된 11개 개발과제의 성공여부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선진국진입을 좌우하게 될것 입니다. ­후발국인 우리나라가 선진국진입을 노리기에는 선진국들의 기술보호주의가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선진국들은 자기들끼리는 똘똘 뭉쳐 핵심기술을 개발해내면서 개발기술에 대한 후진국이전은 기피하고 있습니다.또 OECD는 기술개발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국제무역질서를 교란한다며 이를 규제하려하는등 더이상의 후발국들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기술보호주의에 대처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자와 국민 스스로가 「혼」과 「생명」을 바쳐 국가기술발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그 다음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선진국기술의 철저한 모방,러시아와 같은 기술이 열려있는 국가와의 국제교류,전략적인 과제에 대한 집중적인 노력들이 경주돼야 합니다. ­G7프로젝트는 91년 첫 발표때보다 과제수도 줄어들고 예산규모도 축소돼 관심이 식어가고 있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계획단계에서 실천단계로,총론에서 각론으로 옮아가다보니 그런 느낌을 주는것입니다.정부는 앞으로 2000년까지 정부재정에서 1조5천억원,정부투자기관에서 6천억원,민간기업에서 1조5천억원등 총 3조7천억원을 투입해 과제를 성사시켜나갈 계획입니다. ­정권이 교체될때마다 과학기술정책이 바뀌던 과거 전례에 비추어 G7프로젝트의 연속성을 걱정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G7프로젝트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이라는 별도예산항목을 가진 국책연구사업입니다.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될것입니다.당장 경제기획원이 주관한 93년도 경제운용계획에도 역점사업으로 잡혀 있습니다. ­연구소통폐합,연구소인원조정등 잇따른 변화로 정작 G7과제를 수행해야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입니다.이들의 사기진작책은 있습니까. ▲연구원들이 안정된 연구분위기에서 창의적인 연구활동에 전념할수 있도록 재정지원,시설지원,복지수준 향상등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연구원들은 자신의 두 어깨에 우리의 생존과 발전이 걸려있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연구에 전념해주시기 바랍니다.
  • 유물에 담긴 조선왕조의 권위/궁·능·원 17곳 4천점 수집

    ◎덕수궁 석조전서 23일부터 상설 전시 조선조 5백년의 격조높은 왕실문화를 보존 연구할 궁중유물전시관이 오는 23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문을 연다. 궁중유물전시관이 들어설 석조전 동관은 지상 3층 건물로 연면적 1천2백47평 규모.이가운데 전시공간은 2층과 3층의 7백84평으로 순수 전시면적은 3백20평이다. 궁중유물전시관은 그동안 가려지고 왜곡되어 전해진 조선왕실의 생활상과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 공개함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세워졌다.그리고 단순한 전시기능뿐 아니라 왕실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및 사회교육기능을 갖추어 조선왕실의 역사를 오늘의 교훈으로 되살린다는데 의의를 두고있다. 전시관이 수장키로 한 유물은 그동안 5대궁과 12곳의 능·원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왕실 유물 3만6천여점 중에서 엄선한 4천여점.이가운데 각분야별 대표유물 5백여점을 상설전시하게 된다. 이 전시관의 개관은 조선왕조의 역사적 사실과 업적을 바탕으로 왕실의 생활을 깊이있게 이해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그 제도안에 투영된 사상과 예법을 살려냄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역사적 자각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전시관 설립 의도이기도 하다.전시장은 주제별로 2층과 3층에 각각 5개실씩 10개실로 나누어진다.2층 은 이론적 측면에서 역사를 개괄하고 왕실생활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3층은 왕실의 생활상을 사실적 종합적으로 이해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에따라 2층의 제1실에서 5실까지는 조선시대의 정치제도와 문화·과학·오례의등 왕실의 의례와 궁궐건축,궁중에서의 의생활과 식생활의 이모저모를 유물과 모형을 통해 알수있도록 했다. 제6실부터 제10실이 들어서는 3층에는 어진과 어보등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과 왕실의 공예품 그리고 각종 서화류의 유물이 개관 기념전의 성격으로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전시관측은 앞으로 한해에 최소한 2차례이상 기획전시실에서 주제별 특별전시를 할 예정이다. 전시관측은 전시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람객을 하루 1천5백명으로 제한하고 단쳬관람도 허용치않을 방침이다.이에따라 전시관입구에는 자동번호표부여기를 설치해 순서대로 입장시키게 된다.덕수궁입장료외에 전시관에 들어가기위한 별도의 입장료는 받지않는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8)

    ◎유년시절:6/만경대시위 지휘자 외조부로 왜곡/실제로는 고평면장 조익준이 지도/이번엔 기독교단체 주도사실 은폐 김일성의 갖가지 「회고」는 지나치게 생동감이 있어서 만6세의 어린아이같지가 않다. 그러나 만경대의 농민들이 3·1운동에 참가한 것 자체는 사실이므로 당시의 기록을 인용해보도록 한다. 「대동군 고평면장 조익준은 예수교 신자로서 성중에 독립운동이 선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3월3일 상오에 군중을 모아 시위운동을 하였는데 당중에 있는 합병 기념비를 넘어뜨린 다음 면장이 선도자가 되어 민중을 이끌고 평양을 향하여 떠났었다. ○인근농민들 합세 상오 10시쯤 하여서 보통뜰에 당도하였는데 군중이 수만을 헤아리니 왜적은 기병대와 소방대를 동원하여 무도하게 돌격을 하여왔다.그래서 부상자가 심히 많았고 어름여울에 빠진 자도 적지 않았으며 마침내 면장이하 주모자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왜병은 자기가 임용한 면장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체면손상이라 하여 면장에게 비밀히 달래면서 전과를 자백하면 석방할 터이니 개과장에 날인하라 하였으나 조면장은 준절한 말로써 거절하였다」 만경대가 있는 고평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들은 면장 조익문이 2일만에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투쟁을 벌였다.면장은 기독교인이기도 하였으므로 고평면의 면사무소·교회의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여기에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들이 평양 대동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행렬은 그 도중에 있는 마을의 농민들을 흡수하여 점점 크게 되었다.용산면도 통과하였으므로 김일성의 외가도 기독교인으로서 참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만경대와 칠골 사람들도 대열을 지어 평양으로 갔다고 한 것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때 만6세 밖에 되지 않았던 김일성 자신이 이러한 시위행렬에 참가하여 대동문까지 갔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떼를 지어 가는 어른들이 어린아이가 끼어 있는 것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고 무엇보다도 모친이나 고모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고록의 상기 문장을 보면 평양으로 가는 것보다 오히려 모친과 고모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그들이 밤늦게까지 만세를 부르는 것을 옆에서 보거나 따라 불렀을 쪽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3·1운동은 거족적인 투쟁이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모두 참가하였으므로 김일성이 만세를 불렀다 하여 놀랄 것은 없다.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3·1운동을 그가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하는데 있을 뿐이다. 이 지방의 3·1운동은 그 지휘자가 면장이면서 기독교인인 조익준이었다.그런데 1982년의 김일성 전기에는 그 지휘자가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돈욱으로 되어 있다.조익문은 은폐하고 외가를 부각시킨 것인데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교체시켰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사실의 은폐가 철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회고록에서는 이 지방의 3·1운동이 기독교인에 의하여 지도되었다는 것 자체도 은폐되었다.그리하여 만6살짜리 김일성의 「투쟁업적」만을 매우 생동하게 기술하고 있다. ○투쟁성 부각 시도 조익준의 투쟁은 3·1운동의 지방적 형태의 하나였다.그런데「김일성의 투쟁」은 앞으로 「수령」으로 등장할 인물의 시련과 투쟁과 체험으로 가득차 있다. 만6살의 어린이에게 이러한 시련과 투쟁을 「체험」하게 하는 것은 우상화작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①한국독립사 김승학편 1965년 대한홍보사간 221면
  • “남북한통일 조속실현 어렵다”/미 포린 어페어즈지 전망

    ◎독일과 달리 시간 오래 끌 요소많아/김정일권력체제 오래 지속 못할것/혼란 수반 가능… 클린턴행정부 미리 대비해야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외교전문잡지 「포린 어페어즈」는 이번 겨울호에 남북한통일전망에 관한 논문을 게재,눈길을 끌고 있다.하버드대 인구발전연구소의 객원교수이자 미국 엔터프라이즈연구소 연구원인 니콜라스 에버스타드가 「두개의 한국,통일될수 있을가」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냉전이 끝났다고 말하는것은 위험이 잠복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냉전의 마지막 페이지인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된채 양측은 중무장으로 대치해있다. 한반도는 어쨌든 통일을 향해 나가고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통일이 될것인가 아닌가는 이제 더이상 질문이 아니며 다만 언제인가하는 시간이 문제다. 분단의 평화적 해결이 10년안에 이뤄진다는 그럴듯한 주장이 있는가하면 통일로 가는 길에 폭력의 분출이 있을 것이며 또는 통일은 상당히 긴 세월이 흘러야할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통일은 독일의 통일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시간을 오래 끌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휴전선의 엄청난 병력대치상황,북한의 핵개발의혹,중국등 주변국의 한반도통일불원등이 모두 통일을 어렵게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북한쪽을 보면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세습체제를 치밀하게 굳혀나가고는 있지만 이것은 모두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구소련의 붕괴와 동구의 민주화로 북한은 경제상황이 매우 어려워졌지만 이를 극복하기위해 개혁을 할수없는 실정이다. 김일성의 시각에서 보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은 물론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왔고 중국식의 경제개혁도 천안문사건같은 정부항거운동을 촉발했을 뿐이다.따라서 개혁은 곧 체제의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게 그의 역사인식인 것이다. 김정일이 아무리 권력을 정교하게 세습받았다해도 그의 체제는 불안할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것이 뻔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북한은 핵개발의 숙원을 좀체로 포기하지 않고있고 남북한상호핵사찰도 계속 지연되고있다. 미국방성의 판단으로는 북한이 공격을 해올 경우 이에 대처하는 시간은 24시간밖에 없을것으로 보고있다.또 김일성시대의 종말이 점점 다가올수록 비무장지대를 따라 분쟁의 위험이 점증될 것으로 예상하고있다. 한반도의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주한미군을 더 감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한미안보관계의 재조정에서는 무엇보다 정보의 공유가 중요하다.지금까지는 미국이 공중정찰이나 통신감청으로 얻은 북한정보를 한국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할수가 없다. 남북한의 통일이 독일에 비해 어려운 것은 ▲북한경제가 동독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있고 ▲남한이 서독처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으며 ▲남북한은 동서독처럼 상호 교류·접촉이 거의 없었고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인 동독과는 달리 외부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미칠 국가가 없다는 점등을 들수있다. 오늘날 남북한의 궁극적인 통일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혼란이 수반될것은 거의 분명한만큼 클린턴의 새 행정부는 이에 미리 대비해야할 것이다.한국으로서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건설하고 근대적 법질서가 영위되는 사회를 이룩하는것이 통일이후의 한국민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줄뿐만아니라 동북아 국제안보의 성격을 규정짓는데도 기여하게 될것이다.
  • 러시아교과서의 「6·25남침」론(사설)

    러시아의 역사교과서가 마침내 한국전의 진상을 옳게 기술했다고 한다.국방부가 공식 확인한바에 의하면 러시아 교육부가 감수한 11학년용 조국사에 한국전이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었음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일성에게서 전쟁이 어떻게 구상되고,스탈린이 어떻게 승인했으며 실전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를 상술한,이 같은 수정으로 그밖의 왜곡내용도 바로잡혀 가게 되었다. 한국전의 발원의 나라이기도 한 러시아의 역사기술 수정은,세계의 모든 나라에게 수정의 당위성을 제공하기도 한다.최근에 확인된 것만으로도 옛 동구권 교과서들의 상당부분은 아직도 6·25를 북침으로 기술하고 있고 그밖의 많은 한국관계의 기술이 북한 편향으로 되어있었다.이 모든 기술들의 원천이 정화되었으므로 나머지 지류의 정화는 빠르게 이루어질수 있을 것이다. 외국교과서의 한국부문기술이 왜곡된 경우는 비단 소련 동구권만의 현상은 아니다.혈맹의 우방을 과시하는 서방국가들에도 한국전이 진상대로 기술되지 못한 나라가 적지않았다.전쟁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모든 기술에서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손상시키는 내용은 얼마든지 있었고 아직도 충분히 바로잡히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왜곡」의 주요 원인국인 러시아가 보여준 적극적 수정의지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같은 일이 러시아에 의해 저절로 된 일은 아니다.이미 지난 해 8월 당시의 윤형섭 교육부장관은 러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왜곡기술된 교과서의 시정을 요청한바 있었고,세미나등 학술행사를 통해 끈질긴 노력을 했기에 비교적 신속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런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이미 수교를 이룬 중국도 아직은 그 방면의 작업을 못 이루고 있는 중이다.이번 계기는 그것을 좀더 서두를수 있게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에 관한 외국교과서의 왜곡은 전쟁에 관한 기술에만 그치지않는다.전체에 대한 기술이 매우 부실하여 미국조차도 중학교의 75%가 한국에 대해 아예 기술을 안하고 있고,한 것조차도 매우 허술하다는 것이 최근의 학술회의에서도 지적되었었다. 일이 일본에 이르면 적극적 왜곡부분까지 많아서 양국사이에 상습적인 쟁점이 되고있다.여기에도 러시아의 변화는 효율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을 것이다.이제부터 중요한 일은 우리 스스로가 주도하여 외국의 교과서에도 한국관계 기술을 바로잡는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2)

    ◎출생비화/「1912년 4월15일」의 의문들/중학동차 임춘추는 14년생으로 회고/날짜도 음력·양력 밝히지 않은채 기술/태어난 곳도 만경대 아닌 대동군 칠골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변경하고 날조한다. 1989년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고 난 이후 한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틀림없이 소련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북한에서는 그가 「백두산 밀령」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우상화위해 변경 이로 미루어 보면 김일성 자신의 출생과 성장도 사실보다는 「우상화」위주로 변경되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번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나는 아버지 김형직의 맏아들로 망국 이태 후인 임자년(1912년)4월15일에 만경대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우선 김일성은 그 생일이 4월15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음력을 양력으로 고친 것인가,아니면 전혀 다른 날짜인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북한에서 발간된 역사사전에는 김일성의 사촌동생인 김원주가 1927년 9월22일에 태어났다고 하면서 이 날짜가 음력 8월27일이라고 밝히고 있다.그런데 그보다 15세 먼저 난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체 그러한 언급이 없다.이 점은 김형직이나 그의 동생 김철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봉건사회였던 조선왕조가 망한 직후 태어났다면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 밝혀야 마땅하다.이런 점에서 그의 생일이란 날짜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김일성이 정말로 1912년에 태어났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카기(고목건부)란 일본의 원로신문기자가 있었다.그는 일본 매스컴에서 북한을 「북조선­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호칭하도록까지 한 철저한 친북한파였는데 나중에는 김일성의 어용 전기를 써주기 위해 평양에 가서 직접 취재하는 열성까지 보였다. 다카기는 김일성의 내력을 알기 위하여 당시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임춘추와 만난 일이 있었다.그는 1912년생이라는 임춘추로부터 은을 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춘추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보았더니 나이는 그보다 두어 살 아래인데 김성주라는 학생이 있었다」 1912년 생인 임춘추가 다카기에게 김일성은 자기보다 두어살 아래라고 하였다면 그는 12년생이 아니라 14년생 정도로 된다.따라서 김일성이 1912년 생이라는 것도 상당한 의문을 남기게 되는 대목인 것이다.김일성은 사실은 1914년 생이면서 12년 생으로 행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냥 믿기는 힘들다. 김일성이 유일독재체제가 아직 미완성이던 1958년,북한의 역사학자 이나영은 「김일성 원수는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빈농가에서 탄생하여 그후 고향인 만경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본명은 김성주)」라고 적었다.또 1961년에 나온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도 그렇게 쓰고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해가 만약 1912년이라면 이해에 부친 김형직은 평양숭실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는 만경대에서 편도 40리 길을 통학하고 있었다. 한편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친정은 그 부친 강돈욱이 후에 장로가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그는 1906년 전에 살던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었는데 현재 칠골에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 집을 보면 그는 결코 빈농은 아니다.그는 또 하리교회와 창덕학교를 짓는데도 주동이 되었다. 한국의 풍습으로는 부인이 첫 아이를 낳을 때 친정에 가는 것은 보통 일이었다.부자집 친정에서 강반석이 첫번째 해산을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대개 친정서 출산 그러나 김일성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자기가 꼭 만경대에서 태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한 모양이다.김일성의 이름 문제도 이번 회고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김성주 이외에 김성주로도 김성주로도 표기되어 있다.또 김일성 자신은 그 어느 표기도 다 자신의 이름이라 하고 있다.예를 들면 김성주는 평양의 조선 혁명박물관에 걸려 있는 일제기록의 사진판에 보이며 김성주는 조선전사에 역시 사진판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주가 본명이라고 추측되는 유력한 자료로는 해방직후 만경대에 직접 가서 취재한 한재덕이 남긴 글이 있다.거기에는 김일성 3형제를 김성주,김철주,김영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14면 ②「김일성,조국에로의 길」고목건부저 1982년,일본,채류사간,26면 ③「조선민족해방투쟁사」리나영저,336면 ④평전 22·23면 ⑤「세기와 더불어 1」9면 ⑥「김일성장군개선기」74·75면
  • 건설사,21세기 「꿈의 프로젝트」 추진

    ◎일 이키∼대마도∼거제도 수중터널 건설/난지도 쾌적한 도시공간으로 탈바꿈/잉여농산물 등 저장 지하집하창고도 21세기에 도전하는 건설업체들의 꿈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고 수많은 좌절끝에 이같은 불가능이 차례로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의 꿈을 허황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하늘을 날아다니고 우주공간을 탐색하는 일도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과거에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었다. 더구나 건설업은 인간을 위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업종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연에 도전해야 한다.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숙명인 셈이다. 삼성종합건설이 최근 박사 9명으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토록 한 「21세기 건설공간 프로젝트」를 비롯 건설업체들은 2천년대에 대비하여 꿈같은 장기구상을 세우고있다. ○해일 등 영향 안받아 ▷한·일 수중조명터널◁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를 연결하는 첨단 교통시스템이다.일본의 이키(일기)∼대마도∼거제도를 연결하는 1백13㎞ 구간에 부체식의 수중 투명터널을 건설,각종 물자와 승객을 수송할 계획이다.바닷물 속에 투명한 터널이 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해저터널들과 구분된다.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49㎞의 도버해협 터널이나 일본의 혼슈∼홋카이도간 54㎞의 세이칸 터널은 바다 밑의 암반을 뚫어 만든 해저터널이다.반면 삼성이 구상하는 부체식 터널은 깊이 30m의 수중에 둥둥 떠있게 된다.이를 조류나 해일등에 영향받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다.강도가 높은 섬유질의 투명창을 터널 상부에 설치함으로써 승객들이 해저 풍경을 즐길 수도 있다. 이 터널로 고속전철을 운행하면 서울과 후쿠오카간을 2시간40분대에 주파할 수 있다.그렇게 되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서울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홍콩섬과 구용반도 사이에 설치된 길이 2㎞의 지하철용 수중터널이 이와 비슷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터널이 바다 밑바닥에 완전히 가라앉아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삼성은 공사비가 약 8백억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기술적 요인만을 고려할 때 오는 2010년쯤 착공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교통체증 대폭 완화 ▷경인 지하물류전용터널◁ 화물만 수송하는 지하 터널이다.따라서 지상 도로로는 사람의 수송을 위한 차량만 통행하게 된다.그만큼 현재의 교통체증이 대폭 완화될 수 있다.특히 인천항을 통한 수출입업체들의 물류(물적유통)비용이 크게 절감된다.도로와 항만의 적체로 인한 국내 산업의 연간 손실은 2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물류 전용터널의 건설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가 도시 지하 고속도로의 타당성을 검토,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2000년대 초에는 실현이 가능할 전망이다. ▷난지도 개발계획◁ 난지도를 국제무역과 정보기능,물류기능을 갖춘 쾌적한 도시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국제 정보통신망과 각종 전시장을 갖춘 무역센터,영종도 신공항을 잇는 터미널과 종합 물류단지를 조성한다. 난지도가 도심과 인접한데다 대북교류의 간선통로에 자리잡았으며 영종도신공항 및 경인운하의 계획노선과도 연계돼 있다는 입지특성을 살린 계획이다. 그러나 난지도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매립돼 있어 지반이 매우 취약하므로 매립된 쓰레기가 자연 부식되거나(약 30년)다른 매립장으로 이송(약 6년)해야 가능하다. ▷지하 농산물집하창고◁ 유통구조가 왜곡돼 빚어지는 생산지와 소비지간의 엄청난 가격차를 해소하고 잉여 농산물을 신선한 상태로 저장해 두었다가 적기에 방출,수급과 가격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미국 켄사스시티의 지하창고가 대표적인 것으로 총 50만평의 지하공간중 85%를 식품 저장창고로 활용하고 있다.이를 실용화할 수 있는 기술은 우리나라도 이미 지니고 있다. ○대도시 쓰레기 운반 ▷기타◁ 부산의 송정,거제도의 장승포를 연결하는 총 15·6㎞의 교량을 2층으로 건설,위층은 일반 차량용 도로로 아래층은 철도로 사용한다. 서울등 대도시에 쓰레기 수송을 위한 지하터널을 건설,오수와 악취의 발생 없이 쓰레기를 운반한다. 각종 전자 및 컴퓨터 기술을 활용,주택에 인공지능을 갖춘다.기존의 주택 개념에서 벗어나 편리함과 쾌적함을 동시에 지니도록 한다.현재의 홈 오토메이션을 보다 발전시킨 것으로 말하자면 인텔리전스 주택인 셈이다.
  • 조선왕실터 강화서 찾았다/서울대연구팀,1만8천평규모 유적 발견

    ◎17∼18세기 건립… 외침대비,행궁으로 축조/병인양요때 소실된 전각 등 왕실소재 확인 폐허속에 방치돼온 조선왕조의 행궁(행궁·임금의 별궁)등 왕실터가 최근 서울대 규장각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관장 한영우 국사학과교수)연구팀은 지난15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일대를 답사하고 이지역에서 1만8천여평 규모의 조선시대 왕실터를 확인했다.규장각팀이 확인한 유적은 조선왕조가 잦은 왜란·호란으로 유사시 왕실로 사용하고 국가 주요기밀문서및 자료를 보관할 목적으로 17∼18세기에 걸쳐 건립했던 행궁과 외규장각(외규장각)등 궁전건물터 등으로 돼있다. 규장각팀의 이같은 왕실터 확인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외규장각등 왕실의 소재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냈을 뿐 아니라 당국의 무관심속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수확으로 평가됐다. 이지역은 조선조 고종3년인 1866년 병인양요때 건물 내부의 주요 도서가 프랑스 수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건물들이 불에 탄뒤 페허로 방치돼있다가 1977년정부의 강화도 전적지 성역화 사업때 극히 일부인 2천7백여평만이 「고려궁지」로 복원돼 사적133호로 지정됐다. 그당시 당국은 조선시대의 자료는 고려하지 않은데다 구체적 사료없이 구전에 의존하여 고려의 대몽항전을 기념하는 「고려궁지」를 건립하는 바람에 정작 조선왕조의 왕실과 전각들은 「고려궁지」의 울타리밖으로 밀려난 채 방치돼왔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당시 이곳 지방관아건물 2채만이 복원돼있다. 규장각팀이 이번에 발견한 지역에는 조선왕조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돌계단과 주춧돌,「왕자샘」으로 알려진 우물터가 잡초속에 파묻혀 있고 돌계단 바로 위에는 일제때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기술학교건물이 모선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서있다. 한교수는 『강화도는 선사시대이래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서 각 시대의 유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조선시대에는 특히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서 왕실차원에서 대역사를 벌여 왕궁과 전각을 짓는 등 제2의 수도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그러면서 『그당시 강화도수령이 거주하던 전각은 고려궁지내에 복원돼 있는데 정작 왕실터가 내버려져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규장각측은 가까운 시일내 이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등 유적지 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강화도 문화원의 향토사연구위원인 홍재현씨(78)는 『현재의 고려궁지와 그 주변땅에는 왕실과 전각등 10여채의 건물이 조선왕조에 의해 건립됐으나 병인양요때 모두 불타버렸다』면서 『구체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일대 조선왕실터의 조사나 복원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에대해 『77년 성역화사업때 고려궁지터에 초점을 맞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했다』면서 『현재의 고려궁지터 주변에 조선왕실터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만큼 학술적 검토를 거쳐 사적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 “이러다간 공중분해”… 신당 허탈감/「불출마선언」 정가 반응

    ◎“현명한 결단… 이제 악재는 없다” 희색/민자/“외압” 주장… 대선전 영향 등 우려 실망/민주/“신당 걸림돌 소멸”… 당세확장에 박차/국민 대선정가에 돌발변수로 등장했던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이 대통령선거 불출마를 공식 선언한데 대해 민자·국민 양당은 반기는 모습인 반면 민주당은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이다.특히 직접 관련된 새한국당(가칭)은 진로가 불투명해지면서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새한국당◁ 김우중회장의 불출마선언으로 후보선정및 추대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나가야 하는 등 진로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놓이게 돼 어수선한 분위기다. 특히 자칫하면 이번 대선에 후보를 못내는 것은 물론 신당마저 중도에 공중분해되느게 아닌가하는 우려마저 대두되고 있다.채문식창당준비위원장은 이날 김회장 추대파의 한 인사를 통해 김회장의 「불출마선언」에 접하고 즉각 창당준비위 위원장단·상임고문회의를 소집,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후보 영입문제·당의 향후진로및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등 파문을 조기수습하기위해 부심하는 모습이었다. 창당준비위의 장경우대변인은 이날 심야까지 진행된 마라톤회의가 끝난뒤 『그동안 계속돼왔던 외부로부터의 후보옹립노력을 보다 열성적으로 벌여 최단 시일내에 성공시키기로 했다』면서 『운영위도 30인이내로 구성하고 분과위원장도 조속 임명할 예정』이라고 발표. 장대변인은 『1차로 발표된 조직책들이 예정된 지구당창당일정을 서두르기로 했다』고 부연. 장대변인은 그러나 김회장추대실패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갈등의 대부분이 오해·왜곡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애국·애당적 입장에서 노력했다는데 서로 이해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는 상당한 시비가 있었다는 후문. 장대변인은 『중앙당창당일정이 당초 예정보다 다소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11월초까지 국민후보추대가 안되면 대선후보를 못내고 국민운동에 전념하는 방안도 고려중』이라고 설명. 신당인사들은 『당이 깨지는 일은 없어야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어 외부인사 혹은 이종찬의원을 대선후보로 내세운뒤 국민당과 연합을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김회장의 영입추진과정에서 추대파와 반대파사이에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 이자헌·김용환·장경우의원등 추대파는 『이종찬의원 때문에 영입이 틀어졌다』며 「책임론」을 제기할 것으로 보여 창당전에 공중분해될 우려도 있다.이같은 경우 일부의원은 국민당으로 가거나 무소속으로 남을 것으로 보여진다. ▷민자당◁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이 대선불출마 선언을 공식 발표하자 『경제계 총수다운 현명한 결단』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김영삼후보의 대권레이스에 더 이상의 악재는 없을것』이라며 안도하는 분위기. 민자당 관계자들은 이날 김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출마포기를 밝힌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자 곧바로 전주로 내려가고 있는 김총재에게 무선전화로 이를 보고. 김총재와 통화를 마친 박희태대변인은 『김총재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김회장이 앞으로 어려운 우리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훌륭한 경제주역으로 역사에 길이 평가되길 기대한다』고 주문. 박대변인은 또 김영삼총재가 지난21일 김회장의 요청으로 잠시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김회장이 『대선출마를 않고 김총재를 돕겠다』는 내용의 말을 김총재에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공개. 여타 주요 당직자들도 『어려운 우리경제 형편을 감안할 때 김회장이 너무나 잘 결심했다』(이해구 제1사무부총장)『김회장이 올바른 선택을 내린데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라는등 환영 일색. ▷민주당◁ 김우중씨의 불출마선언에 대해 『외압이 작용한 것같다』면서 크게 실망하는 모습인 반면 국민당은 『잘한 결정』이라며 즉각 환영하고 나서 서로 상반된 반응. 민주당의 김대중대표는 이날 수원에서 열린 농촌지도자대회에 참석했다가 김회장의 불출마선언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서울일은 서울가서 얘기하자』며 언급을 회피했고 홍사덕대변인은 『당초부터 외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김회장 자신의 정치적 자질이 부족했다는 것』이라며 김씨의 불출마요인을 「외압」으로 모는 분위기. 박지원수석부대변인도 『민주당이 재벌의 정치참여는 반대해 왔지만 누구는 안된다는 식의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면서 김회장의 출마로 여권후보가 많아질 경우 민주당에 미칠 긍정적 효과를 볼 수 없게되자 못내 아쉬운 모습. ▷국민당◁ 정주영대표는 『김회장 개인이나 기업을 위해서 잘한 결정』이라며 치켜세우고 『그렇지 않아도 자금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대우가 자칫하면 큰 어려운 상황을 맞을 뻔했다』면서 안도하는 반응.변정일대변인도 『반양금세력결집을 위한 우국적 결단』이라며 크게 환영. 정몽준의원은 『김우중씨의 정치포기가 김영삼씨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면서 『이같은 압력의혹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말해 민자당측에 화살. 한 관계자는 『그동안 김우중씨의 출마가 국민당의 대선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고 걱정했던게 사실』이라며 『이제는 범반양금세력이 대동단결하는게 급선무』라고 말해 영입에 박차를 가할 것임을 시사.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6)

    ◎“김형직이 반일·공산운동 접목” 주장/“감옥에서 선진사상 배웠다” 날조/대한국민회를 적색단체로 기술 김일성을 본격적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한 1968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저자 백봉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창시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적어도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3·1운동이 있은 1919년 이전에 조선국민회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멀어져 그러나 김일성의 유일독재가 한층더 악화되어 그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것으로 되어 나가자 김형직에 관한 왜곡도 극단을 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그의 부친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김형직이 아들로부터 제공받은 방향전환의 활동무대는 중국료령성관전현홍통구회의이다. 그런데 김형직이 언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직은 옥중에서 러시아사회주의10월혁명의 소식을 듣고 이것으로 혁명적 신조를 굳히고 선진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그 결과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민주해방운동의 방향을 구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전번 졸고에서 김형직은 평양감옥에 투옥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그때 필자가 제공한 이유이외에도 김형직은 1919년의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이 일본기록에 나오고 있다.전과자같으면 할수 없는 일일 것이다.이런 점과 그후 그가 갑자기 졸부로 된 점을 감안해 보면 옥고를 치렀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에 일단 따르고 김형직이 평양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옥중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된다.공산주의자란 없었던 그 때까지 그는 주변에 공산주의자를 「동지」로 두고 있었지 않았다.그에게는 당시 공산주의서적도 있을 리 없었다.「옥중」으로서는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세기와 더불어」는 김형직에게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새로운 사실」을 양산하고 있다.그 날조항목을 여기에 열거해 놓는다. 1)「아버지는 1916년에 방학을 이용하며 간도에 다녀왔다.무슨 줄을 타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간도를 거쳐 상해에 가서 손문의 국민혁명파와도 연계를 맺었다」 이런 말은 북한주민도 처음 듣는 말이다.아마도 이것은 김형직을 「부르주아민족운동」도 국제적규모로 경험한 인물로 조작하기 위한 허구일 것이다. 2)㉠「그해(1919년­인용자)여름에 우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할머니는…혼자소시로 뇌이는 것이었다.『아라사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이번에는 퍽이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아버지가 무산동회의(1918년 11월)를 소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평안북도의 조선국민회 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연락원들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파괴된 국민회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며 광범한 무산대중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활동방침을 밝히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였다」 ㉠㉡㉢의 글은 이런 차례로 김일성이 말한 것을 발췌하여 실었다. 그런데 1919년의 일인 ㉠은 의당 ㉢에 직결해야 하는게 1918년의 청수동회의 문제를 그 중간에 삽입하고 있다.이것이 ㉡이다.이 세가지 문장은 문맥의 앞뒤가 바뀌어진 매우 부자연한 글로 되어있다. 김일성은 마치 소설과도 같이 부친을 1917년 가을에 평양감옥에서 「출옥」시켜 놓고 그해 11월에 「청수동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옥중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부친이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울 방침을 제시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거의 앞뒤 안맞는 내용 그러나 「옥중에서 혁명적 신조를 굳힌 아버지」를 막바로 그해 11월의 청수동회의에서 「무산민중」을 조직하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북한의 어용학자가 보더라도 너무 무리한 작업으로 보인 것 같다.이 때문에김일성은 이번 회고록에서 1917년11월의 청수동회의이후 부친에게 다시 만주와 러시아를 방황하도록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였다.로씨야에서는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무산대중이 주인으로 된 새 세상이 왔다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가 하면 신생로씨야가 백파도당들과 14개국 무력간섭자들의 공격으로하여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동한 세부와 사실들로 엮어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연해주에 갔다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회고록은 이런 복종을 깔아 놓은 다음 아래와 같은 문장을 가져 온다. 「아버지는 1919년 7월,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필연성을 논증한데 기초하여 8월,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독립운동단체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나라 반일민족주의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역사에 실재하는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상해임정의 지시를 받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국민회에 대한 사료가 김일성의 손에 들어오자 이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단체로 변해버린다.김일성은 이 날조의 주역으로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갖다 앉히고 있는 것이다. 〔주해1〕조선전사16,29면 이후 〔주해2〕같은책 동면 〔주해3〕졸저 김일성평전 35면 〔주해4〕「세기와 더불어!」23면 〔주해5〕같은책 44면 〔주해6〕같은책 45면 〔주해7〕같은책 동면 〔주해8〕같은책 45면 〔주해9〕같은책 48면
  • 「남한조선로동당」 간첩사건을 보고/전문가 좌담

    ◎“남북대화” 미소뒤의 적화음모 일깨워/북,“개방” 외쳐도 통일전선전략 불변/주사맹신 운동권·재야 정신차려야/통일 앞둔 시점… 대공경계심 고삐풀지 말길 「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은 우리사회에서 점차 무르익고 있는 평화통일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남로당사건이후 최대규모의 간첩사건인 이번 사건이 우리사회에 던져준 문제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할지 등을 장수련통일원 통일연수원교수·고영환북한연구소 연구원(전 북한외교관)·구로다 가쓰히로 일본산케이신문 서울특파원등 3명의 대담을 통해 알아본다. ▲장수련교수=이번 사건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공산주의의 속성을 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공산주의의 속성은 한마디로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집단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일부 국민들이나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서구적인 합법정당의 개념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공산당이 정당이 아니라 폭력집단이라는 사실은 역사속에도 잘 나타나 있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주고 있습니다.교훈의 하나는 공산주의는 겉으로는 미소를 띠며 속에는 음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 양면성은 7·4남북공동성명 발표때나 최근 남북합의서 체결때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이면에서는 남침땅굴을 파고 이번 남한조선로동당사건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서구공산당과 달라 북한이 제의한 고려연방제 또한 남한공산혁명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후진국을 공산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형식과 내용이 다른 양면전술이었던 것입니다.이번 사건을 비롯한 최근 일련의 간첩사건은 공산주의의 양면성이 잘 드러났으며 우리정부의 민주발전노력을 악용한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또한 사건을 미리 막지 못한 정부의 책임은 크지만 근본책임은 일부 몰지각한 유사 민주주의자에게 있습니다. ▲고영환연구원=저는 이번 사건이 놀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그런 짓을 않으면 북한은 이미 북한이 아니라는 것이죠.북한이 안고 있는 난관을 뚫기 위해 쓰는 방법으로 몇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경제적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주민동원을 더욱 심하게 하는 것이나 일본·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그 하나이고 다음으로 대남공작 같은 것입니다.이번 사건에서 북한지도자들에게는 남한이 북한보다 더 위기에 있는 것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릅니다.거물급 간첩으로 이번 사건의 총책인 이선실은 김일성과 단둘이 만나 남한에는 정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사실 이번 사건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축시나 깃발을 보면 그들이 발붙일 토양이 많다는 생각이 들고 난관의 돌파구는 더욱 남한혁명 뿐이라고 여기게 할 것입니다. ▲장교수=미국의 어느 학자는 「공산주의는 파리」라고 했습니다.더러운 곳에 붙어 사는 파리를 공산주의에 비유한 것이지요.다시 말하면 서식처를 제공하지 않으면 공산주의도 헛것이라는 겁니다. 공산주의에 먹혀들 수 있는 소지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이것은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과제입니다. ○사회 면역성 부족 ▲구로다 가쓰히로특파원=저는 고영환씨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한국의 민주화나 개방정책으로 볼때 이번 사건은 놀랄 것이 없다는 얘기지요.문제는 한국도 민주화 됐듯이 북한도 변했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한국국민들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동안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은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변화는 표면적인 적일 뿐이지요.이번 사건에서 새삼 느낀 것은 남한의 진보적·반정부적 운동은 결코 북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또 하나는 그런 조직이 있더라도 면역성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한국사회는 이번에 적발된 간첩단의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을 면역성이 있다고 봅니다. ▲장교수=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운동권학생들을 만나보면 지금도 사회주의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면역성이 약한 것이지요.그것은 우리가 47년동안 제도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해 유지해왔지만 밑바탕정신을 제대로 이식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고연구원=북한 주민들은 통일방법이란 무력남침과 남한사회혼란에 따른 정부전복 등 2가지 방법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따라서 남한의 날조극으로 발표된 버마 아웅산사건이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있어서도 뒤늦게 북한이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대남공작부서가 똑똑치 못해 실수했다』는 적대적인 대남 비판을 일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반면 남한사회내에서는 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 등 북한의 소행을 파헤쳐 밝혀도 일부인들은 이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이번 간첩단사건에 각계의 많은 사람이 포함된 것도 이같은 사회분위기가 조직원 포섭에 좋은 토양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정부측발표를 국민이 의심하면 이는 북한이 좋아하는 것이죠. ▲구로다특파원=간첩사건을 보면서 저는 간첩을 보내는 북한은 제쳐두고 남한에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그 이유는 6·25전쟁책임이나 대한항공기폭파사건등 북한의 도발행위를 남북합의서채택등 마주앉는 자리에서 따지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이번에도 모신문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설문대상자의 40%가 간첩단발표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저는 이같은 자세가 간첩단사건 이상으로 심각한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장교수=맞습니다.북한이 겉으로 대화를 제의해오는 것은 무력혁명을 위한 지하조직을 보조세력으로 키우는 이면에서 행하는 상층통일전술의 일환입니다.남한내 의심계층을 이용한 지하조직구축과 대화제의라는 그들의 통일전선전술을 극복할 또는 역이용할 전술이 남한에서는 시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회체질 개선 역점 ▲고연구원=74년 2월 제가 대학2학년때 김일성은 『남조선 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격해지고 박정희대통령이 간암으로 죽어간다는 소리가 있으니 이때 사회주의 대건설에 나서자』고 대대적인 사회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렇듯 북한은 남한사회분열을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 학생들사이에선 국가보안법을 없애라는 주장이 많습니다.그런데 북한의 형법은 『김일성머리뒤에 혹이 있다』는 사실만 말해도 일가족이 사라지는 악법입니다.체제비판은 커녕 이런말만 해도 극형에 처해지는 악법은 한마디 지적도 않고 남한내에 암약하는 간첩을 막는 법을 왜 없애라고하는지요. 저는 우리 한국은 지금 통일을 위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앞에 두고 있다고 봅니다.그런 좋은 상황에서 한국사람들은 불필요한 논란을 벌이면서,이 좋은 순간에 허리띠를 풀려고 하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구로다특파원=이번에 구속된 사람 대부분이 젊은층으로 소위 지식인을 자처한 사람이 많습니다.그런데 왜 이들이 혁명의 전위대에 앞장섰는지를 나름대로 볼때 한국의 젊은 지식층에는 김일성컴플렉스가 있는 것같습니다.이는 북한이 깨끗한 사회라는 환상과 민족의 정통성논란등에서 마치 김일성이 우월해보이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봅니다.그러나 인간이 생활하는 사회의 행복도는 객관적·절대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북한주민들이 더 행복하게 산다」는 잘못된 감정적·상대적 평가는 버려야 할것입니다. ○기성세대 책임 통감 ▲장교수=이런 사회풍토가 나온데는 기성인들의 책임도 큽니다.자본주의는 땀을 많이 흘려야 잘사는 사회입니다.즉 깨끗한 사회풍토가 돼야하지 노력없이 대가만 많이 받는 사회에서는 불신풍토가 만연합니다.그것은쉽게 체제불만과 연결되는 것이죠.저는 권력보다는 재력에 의한 피해가 더욱 우려된다고 봅니다.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평등사회가 조직원들이 발붙일수 없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고연구원=제가 보는 관점에서 남한에서는 북한을 더욱 알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정부나 정당이나 학교등에서 과장이나 왜곡은 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북한 실상을 좀더 알리고 확산되면 불신은 사라지고 4천만이 국론을 모으는 방향으로 애를 쓸 것입니다. ○민족주의 편승,암약 ▲구로다특파원=이번 사건도 「늑대와 소년」을 보는 식이 돼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한가지 제언을 하겠습니다. 한국에는 민족주의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김일성은 이같은 민족주의에 편승,남한내 지하조직망을 쉽게 포섭해갔습니다.자기과시욕이 있고 기성관념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이 부르짖는 민족주의가 쉽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한국내에서는 민족주의라는 큰 명제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장교수=좋은 말씀인데 그에 덧붙이자면우리 젊은이들은 자기가 사는 곳은 교과서적 자유민주주의를 하라고 외치면서도 북한의 사상은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학문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도 당부하고 싶습니다.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

    ◎전기마다 다른 “증조부 애국투쟁”/“셔먼호 막으려 강을 가로질러 밧줄 맸다”/「조선전사」까지 언급 안하다 최근에 “창작”/생생하게 본듯 기술… 「혁명적 가정」 선전 「김일성이 자신의 가계를 우상화하기 위해 우리 역사 자체를 날조·왜곡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신당지기로 밝혀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에 나온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종전보다 한술 더 떠 허황된 역사를 꾸몄다는 사실이다.김일성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의 묘를 봐주는 신당지기였으나 나라와 향토를 열렬히 사랑하는 분이었다.미제침략선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두루섬에 정박하고 있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집집에 있는 밧줄을 다 모아 강건너 곤유섬과 만경봉 사이에 겹겹이 건너 지르고 돌을 굴리면서 해적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셔먼호가 양각도 밑에까지 기어들어 대포와 총을 쏘아대면서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물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줄달음으로 평양성에 들어갔다.그때 성안사람들은 관군과 함께 나뭇단을 가득 실은 마상이 여러척을 연결시켜 불을 지르고 셔먼호쪽으로 띄워내려보내며 배도 해적들도 모조리 수장해버리었는데 증조할아버지도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렇게 금방 보고 온 것 같은 임장감이 넘치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경대 앞의 곤유섬을 지나 또 그 앞의 두루섬에 정박했을 때 김응우가 촌사람과 함께 곤유섬과 만경봉 사이에 밧줄을 건너 지르는 일을 했다는 말은 분량이 방대하기로 유명한 조선전사에도 단 한마디 언급이 없다.거기에는 이런 서술이 있을 뿐이다. 「해적선이 대동강에 기어든 이래 그의 동태를 경각성 있게 주시하시던 김응우선생님…」 ○12년후 영웅으로 주시란 지켜 본다는 말인데 해적선이 올라 오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김응우가 봉우리와 섬 사이에 밧줄을 치는 영웅으로 둔갑하기 위해서는 이 조선전사가 발간된 후 다시 12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던것이다. 셔먼호가 칩입한 것은 김일성이 이러한 말을 한 1992년부터 계산하면 무려 1백26년이나 되는 아득한 옛날의 일이다.그가 태어나기 42년 전의 이야기이기도 하는데 그의 할아버지조차 이 사건이 있었을 때 태어났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증조 김응우는 1878년에 31세로 죽었다.셔먼호사건 당시 그는 19세였는데 가령 조부가 그 이전에 태어났더라도 다섯살을 넘지 못할 연령일 것이다.금방 보고 온 것 같은 김일성의 말은 조부,부친을 제쳐두고 도대체 누구에게 들었겠는가.김일성의 「혁명적가정」이란 그 창시자부터 이 모양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이러한 날조를 날조라고 분석비판할 권리가 없다.그들은 「김일성혁명력사 연구실」에 가서 혁명전통학습의 일환으로 학습강사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그 강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가정은 100여년간에 걸쳐 대를 이어 오면서 나라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워온 위대한 혁명적 가정이다」 화제를 김일성의 가계로 돌리겠다. 그의 증조부 김응우는 이상과 같은 「혁명적가정」의 시조이지만 한편으로는 북한의 최대 관광지인 김일성의 「만경대 고향집」에 살기 시작한 시조이기도 하다. 평양 중성리에 살고 있었던 김응우는 1860년대에 평양 지주 이평택의 묘지기가 되어 만경대에 왔는데 「만경대 고향집」이란 이평택의 상당집이 중심이 되어 증설된 초가집이다. 김응우는 윗대와 같이 계속 독자를 두었다.그러나 김응우의 아들 김보현은 이보익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다.3형제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그 동생 김형록·김형권이고 3자매는 이번 회고록에서 그 이름이 처음 공식적으로 밝혀진 김구일녀·김형실·김형복이다.김보현과 이보익은 만경대의 평범한 농민으로서 해방후까지 살았다. ○만경대집의 시조 김형직의 3형제중 만경대에 남은 것은 차남인 김형록 뿐이었다.회고록에 의하면 그의 처 이름은 현양신인데 이명영교수는 현양심으로 표기하고 있다.이교수에 의하면 이들 부부 사이에는 영주·원주·창실·원실 기타 2명 합계 6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 성원들 중 북한에서 「혁명가」라고 선전하고 있는 인물은 김보현의 3남인 김형권과 김형록의 차남인 김원주 2명이다. 김형권은 모종의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에 대한 객관적인 활동경력이 입수되지 않고 있다.그는 만주에서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이 딸의 이름은 회고록에서 영실이라고 밝혀져 있다.해방후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녔지만 한국전쟁 때 폭사했다 한다. 김원주는 해방전 강선제강소의 소년공이었고 역시 모종의 사회운동을 한 모양이다.그는 57년에 병사하였다 한다. 이외에 김일성의 동생 김철주가 있는데 그는 본문에서 다시 연구할 것이다. 이상을 보면 김일성의 소위 「혁명적가정」이란 증조 김응우와 부친 김형직을 빼면 그리 대단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다. 「조선전사13」 1980년 발행 76면 같은책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 선생」1984년 발행 7면 「김일성원수 혁명력사 학습제강」(상급반용) 1982년 조총련 중앙발행 15면 「4인의 김일성」이명영저 일본 성갑서점발행 235면 「세기와 더불어」92면 「력사사전」참조
  • 제각각 민생공약(미 대선 열전현장:2)

    ◎“50년래 최악” 경제회생책 공방/부시,정부지출 억제·감세정책 제시/클린턴,“군사비 삭감·고소득층 증세”/페로는 “기업경험 살려 적자 줄이겠다” 미연방정부는 최근 미국의 극빈자수가 3천5백만명이라고 발표했다. 전체인구의 14.2%에 이르는 이 수치는 지난 1년동안 2백10만명이 늘어난 것이다.4인가족 기준 연간수입이 1만3천9백24달러,한화로 환산하면 한달수입 90만원 이하인 집을 극빈가정으로 계산한 이 통계는 1964년 이래 가장 나쁜 상황을 나타낸다.8월말 현재 실업률도 7.6%에 이르고 있다. 타임지의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미국민의 60%가 이번 선거전의 최대쟁점은 「경제」로 보고 있다.「대외정책」2%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는 각종 통계보다 더 심각하다.파산이 속출함으로써 빌려준 돈이 걷히지 않아 문을 닫는 은행이 최근들어 연간 2백∼3백개에 이르고 있다. 미국경제에 이상이 있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도 지금 미국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그러나 그 증상과 원인에 대한 해석은 제각기 다르다. 극빈자 통계가 나오던 날 빌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새로운 극빈자 통계와 관련,『부시행정부가 초래한 오늘의 경제는 50년래 최악』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화당 정권이 지난 전당대회에서 내놓은 정책은 현재보다 더 나쁜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은 『이런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전제하고 『불경기는 가계수입과 극빈자 통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돼있다』고 코멘트했다. 집권 공화당의 일관된 논리는 현재의 인플레율이 30년래 최저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산업투자를 위한 은행대부 금리도 최상의 조건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세계 전면적인 불황의 영향이지 정부의 시책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부시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불황속에서도 최근 수출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91년 하반기부터 실질 경제성장률이 완만하긴 하나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적절한 정책의 효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각때문에 지난 8월 휴스턴 전당대회에서도 공화당은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새로운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정부지출의 억제와 감세정책이 그나마 눈에 띄는 것들이었다. 소비촉진을 위해 모든 납세자에게 일정률의 소득세를,투자촉진을 위해서는 자본이득세를 감면해주고 예산적자를 줄이기 위해 복지부분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10%씩의 예산삭감정책을 펴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민주당은 공화당이 투자촉진이란 이름아래 자본이득세와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정책을 계속해 부익부 빈익빈현상을 심화시켰으며 이의 결과로 중산층이 계속 축소되고 빈곤층을 확산시켜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켜 놓았다고 주장한다. 클린턴 후보는 또 공화당이 집권 12년동안 무모한 군사비증액과 정책실패로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클린턴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중산층에 10%의 감세조치를 하는 대신 연소득 20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에 대해서는 증세정책을 펴겠다고 말한다. 또 군사비를 줄이는 대신 교육훈련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쪽의 시각에 다같이 비판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다.부시에 대해서는 이미 해오던 정책때문에 경제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같은 정책을 되풀이하겠다는 것은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지 경제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그러나 공화당의 우파들은 부시가 88년 선거공약을 깨고 90년 민주당의회의 압력을 받아 증세정책을 받아들여 공화당 정책에 실효가 없었으므로 정책을 보다 우파적으로 강화해야 된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클린턴의 공약 또한 그럴듯한 비결은 있으나 무슨 돈으로 그많은 간접자본 투자를 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따른다. 로스 페로 후보는 그의 정책구상을 반영시키기 위해 재도전에 나섰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의 정책이 과연 어떤 것인지 내놓은 일이 없다.▲세제개혁을 통한 공정성 확보 ▲일본통산성과 유사한 정부·기업간 전략협력기구 설치가 그나마 그가 제시한 구체적 정책대안이다. 정책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기업경영 경험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채무국이 된 미국의 국가재정을 정상궤도로 돌려놓겠다고 한다.최근 그는 재정적자를 어떻게 줄이겠느냐는 질문에 『휘발유세를 올려 보완하겠다』고 답변했다가 자동차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지탄을 받은 일이 있다. 초반의 「페로돌풍」은 기성정치제도에 대한 그의 도전이 변화를 바라던 미국의 전반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 새로운 정책이 아니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색깔차이가 점차 엷어져 가고 있는게 역사적 추세이고 부시와 클린턴이 모두 당내 중도파를 대표하고 있어 세상을 보는 눈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작은 정부라는 이름 아래 강자를 대변하는 공화당과 사회정의라는 간판으로 큰 정부론을 펴는 민주당간의 이념적 뿌리는 아직도 남아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를 보고(신고 김일성 자서전연구:1)

    ◎연재를 시작하며/역사의 고비마다 갈이입은 「사상의 옷」/통일 앞두고 그의 정체 정통하게 알아야/52년 40세때 초간후 수없이 개작/이번엔 “이민위천이 좌우명” 주장 김일성은 이번 80회 생일에 「세기와 더불어」란 회고록을 냈다.그가 태어난 1912년 무렵부터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다는 1932년까지를 2권으로 나누어 회고한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앞으로 1932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또 해방후 1992년까지를 구분해 합계 십몇권 정도 나올 것이 예상된다.제1권이 3백61페이지이므로 적어도 5천페이지 정도되는 방대한 김일성 일대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여느 공산국가 독재자들과는 달리 자기의 「전기」를 즐겨 출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출판하기만 하면 그것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보급하는데도 열심이다. 그는 또 유달리 꺾어지는 해의 생일을 중시하여 이 때 공식전기를 출판한다.이 전기들은 다음과 같이 시대가 내려 올수록 그 분량이 방대하게 되는 특성도 있다. ○62년엔 중공계 숙청 1952년(40세 생일)「김일성장군의 전기」1권 68면.1972년(60세 생일)「김일성동지 작전」1권 8백60페이지.1982년(70세 생일)「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3권 합계 1천5백페이지. 이상을 보면 그가 50세 생일을 맞은 1962년에는 공식전기가 나오지 않았다.52년의 전기가 나온 후 북한에서는 남로당파·소련파·연안파·국내파들이 모두 숙청되었으므로 김일성은 62년에는 중공계 항일빨치산이었던 그와 그 일당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키는 「공식전기」를 출판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일당조차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취급하는 아량은 없었다.그는 1967년에는 식민지시대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박금철 등을,그리고 69년에 그와 가장 가까운 빨치산시대의 전우인 최광등을 숙청하였다. 이 숙청과정인 1968년 그는 자기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였는데 이 두권짜리 책이 또 대폭적으로 내용이 바뀌어 나온 것이 72년 전기인 것이다. 김일성유일독재는 1980년 제6차당대회에서 김일성부자 독재체제로 굳어졌다.김일성자신뿐이 아니라 김정일의 「충성」과 「효성」도 반영된 것이 82년 전기로 된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 그의 우상화작업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얼마든지 은폐하고 왜곡하며 날조한다.그는 해방직후부터 일관되게 그렇게 해왔다.46년 김일성의 기요과장이었던 연안파의 고봉기는 그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은 일이 있었다. 「보고문이나 회의록 같은 건 다 앞으루 역사적 문건으로 남겨야 할 거니까…이제라두 늦지 않았으니…없는 건 만들어 놓구 또 있다 하더라두 기록이 잘못됐거나 한 건…다 고쳐 놓을 필요가 있단 말이요.해방전의 자료들두 그렇지,필요한 것만 남겨두구 필요찮은 건 다 없애치우는게 좋잖을까?」 이와같은 은폐·왜곡·날조 같은 행위는 그의 전기가 새로 나올 때마다 첨가되어 현재의 우상화된 김일성이 생겨 났다.실상을 제쳐두고 허상만 요란하게 선전하는 이러한 우상을 위하여 북한의 당원들과 대중들은 갖은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또하나의 이유는 그 유일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김일성의 사상정신적 억압수단이 바로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이기 때문이다.그의 전기는 혁명전통의 핵심자료로 되어 있다. 1986년 5월31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건설의 역사적경험」이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의 위업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당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옳게 계승해나가는 것입니다.우리 당이 계승하여야 할 혁명전통은 주체의 혁명전통입니다….혁명전통을 계승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전통의 순결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오직 우리 당이 이룩한 주체의 혁명전통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승발전시켜 나가며 이 밖에는 그 어떤 다른 「전통」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민정신 개조 수단 한때 우리 당안에 기어들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항일빨치산의 전통만이 혁명전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느니,혁명전통의 폭을 상하좌우로 넓혀야 한다느니 하면서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오가잡탕을 섞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그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과 인연이 없는 것을 들고 나와 혁명전통과 뒤섞어 놓으려고 한 것은 혁명전통을 거세하고 자기들의 종파적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책동이었습니다.앞으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흐리게 하거나 말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김일성이 「주체의 혁명전통」이니,「혁명전통의 순결성」이니 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사상과 그 자신의 행적을 말하고 있다.「주체」란 다른 중공계 항일빨치산이 갖고 있었던 사상은 아니며 「순결성」이란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지닐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10년에 한번씩 나오는 김일성의 공식전기란 그의 사상과 행적을 서술한 책이다.따라서 김일성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나가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이 전기에 실린 자신의 사상과 행적을 철저히 옹호하고 그 내용대로 알아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식전기들에 반영된 그의 사상과 행동이란 전기마다 달라서 거기에는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예를 들어 52년 전기에서의 그의 사상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에서도 최악의 사상인 스탈린주의였다.7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라는 그가 창시했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었다.그런데 8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사상이 주체사상인 것처럼 되어 있다.김일성은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자신의 사상을 바꾸어 나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러한 전기들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기와 더불어」도 그 사상은 다시 달라지고 있다.머리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는 것이다. 「이민위천,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한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생활의 본령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교하는 대신 「이민위천」사상을 가져와서 이와 동일시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주체의 원리를 자신의 「정치적신앙」이라고까지 하였다. 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국가들이 붕괴되어 가는 길위에서 그는 이제 사상을 「신앙」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그는 현재 주체의 원리와 혁명전통으로 북한주민을 세뇌시킨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세뇌된 사고를 김일성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유도하고 있다.이러한 현실이 김일성의 입으로 나온 것이 앞의 말이 아닌가 싶다. 사상 뿐 아니라 김일성의 행적도 전기마다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다. 현재 한반도에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통일은 몇년 후에 현실로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압도적 다수가 내다보는 근미래이다. ○“정치적 신앙” 강조 그런데 한국국민은 지금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북한체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로 지내고 있다.김일성만을 알고 따르는 북한주민과 김일성의 정체를 거의 모르는 한국국민이 다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 양측 주민이 서로 상대방의 사상과 행동에 정통하여야 할 것이다.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국민의 책임이 무겁다.한국에서는 국민들이 북한체제와 김일성부자의 정체및 북한주민의 정신상태를 알아야만 그들과 대화를 하여 사상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지에서 시작되는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비판은 한국국민과 앞으로의 북한주민에게 다같이 김일성과 그 독재체제의 진상을 알리는 공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필자는 1987년에 김일성평전과 그 속편을 출판한 일이 있는데,연구를 시작한 1983년부터 이 무렵까지는 근본자료와 연구서적들이 태부족하였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는데 이 어려운 작업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진실을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의 학설도 버릴 부문은 대담하게 버릴 작정이다.다만 버릴 때는 일일이 그 이유를 열거하겠다. □주 해 ①「김일성의 비서실장」고봉기의 유서 1989년 천마사간,17면 ②「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경험」김일성,1986년 단행본,조선로동당출판사간(이하 「당간」이라고 함)1백12∼1백13면 ③「세기와 더불어 1」.1992년 4월9일 당간 2면 ④「김일성평전」 「김일성평전 속」,1987년 북한연구소간(이하 평전,혹은 평전(속)이라고 함)
  • 독립기념관이 이래서야(사설)

    충남 천안군 목천면 흑성산기슭에 우뚝 서있는 독립기념관은 민족정기의 요람이다.1987년 8월15일 광복42주년을 맞아 완공된 이 웅장한 건물은 처음부터 민족혼의 각성위에 세워진 것으로 온 국민의 정성과 뜻이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지난날의 한일관계를 왜곡,기술한데 분노한 국내외 동포 모두가 한푼 두푼 내놓은 정성어린 성금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뜻깊은 민족의 대성전이 부실공사로 인해 비가 줄줄 새고 선열들의 소중한 유품들이 훼손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보도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보도에 따르면 집중호우가 내린 지난달 26일 7개 전시관 모두 천장과 벽면을 통해 흘러내린 빗물로 얼룩이 져 있다고 한다.이 때문에 직원들은 비만오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물통으로 받아내고 바닥에 괸 빗물을 훔쳐내느라 철야근무를 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신도시의 아파트가 입주도 하기 전에 균열이 생기는 등 각종 부실공사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만 독립기념관마저 부실공사로 얼룩이 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독립기념관의 누수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완공직전에 설계와 시공에서의 문제점이 지적돼 보수공사가 있었고 90년 여름에도 또 한차례의 보수공사를 했다고 한다.그런데도 또 비가 새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로서는 정확한 원인을 진단할수 없지만 시공업체가 근본적인 보수공사 보다는 빗물이 새는 곳을 땜질하는 눈가림공사를 했다고 볼수 밖에 없다.독립기념관에는 4만3천2백91점의 귀중한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전시관에 비가 샌다는 것은 이들 사료도 훼손되거나 변질될 위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내외에서 어렵게 수집한 귀중한 사료들이 훼손 또는 변질된다면 우리민족의 자존심에 우리 스스로가 먹칠을 하는 수치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따라서 일정기간 문을 닫더라도 부실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전면적인 보수공사를 단행해야 한다. 이와함께 관람객유치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도 수립되어야 한다.88년 독립기념관을 찾은 관람객은 4백14만명이었으나 해마다 감소,지난해엔 1백79만명에 그쳤고 올들어서는 8월말까지 1백10만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산부족으로 일손이 모자라 전시유물들을 제때 제때 교체하지 못하고 있을뿐 아니라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그래서 독립기념관측은 일손을 대폭 늘려 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하고 주위 동·서계곡에 「청소년 수련장」「민속박물관」등을 세우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예산확보의 어려움때문에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한다. 민족정기의 요람인 독립기념관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수백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버틸수 있도록 정성껏 가꾸어야 하고 온 국민이 스스로 찾아 볼수 있도록 내실을 다져야 한다. 독립기념관이 단조로운 유물전시관에서 종합역사공원으로 탈바꿈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교과서부터 바로 잡아야한다(사설)

    역사적인 한중수교가 이뤄졌다.금세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던 일이 드디어 이뤄졌다.단순한 감회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일이 이뤄진 것이다.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는 하지만,마주보고 총을 겨눈 원한의 상대가,당해자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흔연한 친구관계를 맺게 된 것은 놀라운 변화이고 발전이다.한중수교는 그처럼 큰 수확이다. 어쨌든 두나라는 장한 일을 해냈다.어느 모로 보나 조그만 나라인 한국이 만리장성을 넘는 장정으로 거둔 이 성과를 우리는 소중히 여긴다.따라서 이를 훌륭히 결실시키기 위해 두나라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그리고 그 과제중의 하나로 우선순위를 앞세워야 할일은,이세국민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과 중국은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다.그것도 직접 원한관계를 맺고 있었던,「전쟁의 갈등」을 지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였다.그런 관계의 나라들이 할수 있는 최상급의 적대요소를각급 교과서에 명시해온 나라인 것이다.이같은 내용이 하루빨리 바로잡혀야 한다. 교과서의 왜곡 정도는 양국이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우리 국민학교의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세계주요국가의 국기를 기술하면서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는 싣고,중국의「오성기」는 표시하지 않아왔다.이런 것이 당장 경과조치를 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그 밖에도 「미수교국」과 「수교국」간에 개입되는 각종 변화의 사안들이 현실적 수용을 요구하며 우리앞에 다가와 있다.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중국측에도 그런 왜곡부분은 많이 있다.특히 친북한관계국가의 체제가 원인이 된 역사적 사실의 왜곡부분이 너무 많이 있다.그런 부분이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수정보완 되어야 한다.사회주의체제를 아직도 국가적 명분으로 수용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술이나 묘사가 실제 이상으로 편향 왜곡되어 왔다.6·25전쟁에 대한 표현의 경우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왜곡기술을 해온 것이,북한을 한반도의 유일 우방으로삼아온 중국의 입장이었다.이런 터무니 없는 모든 기술까지가 바로잡히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날의 교과서로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오늘의 청소년 학생들이야말로 수교를 이룩한 두나라가 실제의 우호국으로 살아가는 시대의 실제적인 주인공들이다.그들의 가소성높은 두뇌속에 적대관계가 청산되지 않은채 남아있게 하거나 잘못된 지식을 넣어놓는다는 것은 두나라를 함께 불행케하는 일이다. 또한 세계가 탈이념의 시대에 공존하면서 우호를 창출할 수 있게 되는 일은 미래의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이다.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인 중국이 아직도 이념과 체제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과 수교를 하게 된 관계야말로 미래의 인류가 원하는 평화공존의 표본일 수있다.그 실현의 관건이 될 세대에 대한 교육이 오늘 이시점의 교육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95년이후 개정될 교과서는 물론 그 이전에라도 경과조치의 보완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6·25는 미의 침략전쟁” 등 역사왜곡/중국 교과서 수정요구키로

    ◎교육부,우리도 수교맞춰 개편 교육부는 22일 중국과의 수교를 계기로 초·중·고교 교과서의 중국관련 기술내용을 면밀히 검토,현실에 맞게 수정해 나가기로 했다. 교육부는 이에따라 우선 국교 4∼6학년용 사회과 부도에 실리는 세계 여러나라의 국기중 공식 외교관계가 끊기는 중화민국(대만)의 청천백일기를 중국의 오성기로 대체하고 중·고교 사회과 교과서의 대중국 무역관련 기술내용도 「미수교로 인한간접무역」에서 「수교에 따른 직접무역」으로 바로잡을 방침이다. 교육 관련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89년 중국 초·중등학교의 역사·지리·세계사 교과서등을 분석한 결과,이들 교과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하는등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외언내언

    충남 천안군 목천면 흑성산기슭 1백20만평의 부지에 독립기념관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공된 것은 87년 8월15일.광복42주년을 맞는 날이었다.애초에는 그전해인 86년 8월15일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불과 열흘 남겨놓고 불이 나는 바람에 1년 늦추어졌다.◆독립기념관은 처음부터 민주혼의 각성위에 지어진 집이다.일본역사교과서가 지난날의 한일관계를 왜곡,기술한데 분노한 전국민이 한푼·두푼 내놓은 정성어린 성금으로 이룩된 「민족의 대성전」.코흘리개 꼬마에서부터 8순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동포 모두가 벽돌한장씩을 쌓아올린 민족정기의 요람이기도 하다.◆독립기념관은 겨레의 집,민족전통관,근대민족운동관,3·1운동관,독립전쟁관,임시정부관,대한민국관등 7개동으로 이루어져있고 수집된 자료는 4만3천2백91점.우리조상들의 웅건했던 기개를 화폭에 담은 그림과 유물,일제때 선혈을 뿌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살아숨쉬는 유품들이 망라되어 있다.◆그런데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88년에 4백14만명이 다녀갔으나해마다 20%씩 감소,지난해엔 1백79만명에 그쳤고 올들어서는 7월말까지 97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안타까운 일이다.◆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산부족으로 일손이 모자라 전시유물들이 제때제때 교체되지 못하고 있을뿐 아니라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그래서 독립기념관측은 일손을 대폭 늘려 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하고 주위의 동·서계곡에 「청소년수련장」「민속박물관」「첨단과학관」등을 세우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예산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거의 포기한 상태.독립기념관이 단조로운 유물전시관에서 종합역사공원으로 탈바꿈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번역대중소설/현실감위기 극복의지 결여

    ◎임진영·설준규씨 분석·비판글 잇따른 발표/세련된 기법으로 욕망 대리충족/흥미위주 그쳐 주체적사고 배제/인기비결로 자본의 문화지배력 신장 꼽아 출판가를 휩쓰는 번역대중소설로 인해 문단에 순문학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있는 가운데 대중번역소설들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들이 잇따라 발표돼 눈길을 끈다. 국문학자 임진영씨(연세대강사)는 최근 발간된 「민족문학사연구」제2호에 「즐길수 있는 지식과 공포의 세계」를,그리고 설준규교수(한신대 영문과)는 다음주중 출간될 「창작과비평」가을호에 「잘 팔리는 번역소설의 상업성과 문학성」을 발표,최근 잘 팔리는 과학소설·심리스릴러물 등 미국대중번역소설에 대해 이례적으로 집중거론하고 있다.이들의 글은 비단 번역대중소설의 문제점 뿐만아니라 이같은 소설들의 긍정적인 측면과 사회와의 관련도 밝히는 진지한 탐구로서 대중번역소설의 위세를 무시할수 없는 현실적 여건을 실감케하고 있다. 90년이후 국내 전체 문학시장의 과반수는 번역문학작품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양들의 침묵」「쥬라기공원」「시간의 모래밭」등 미국번역대중소설들은 베스트셀러 소설부문에 꾸준히 오르고 있는 실정.이러한 추세는 탈정치적인 시대 분위기와 출판사의 광고공세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설준규교수는 「잘 팔리는 번역소설‥」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이 과학기술의 윤리성문제를 다소 비판적으로 제기,현대과학소설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신속한 장면전환으로 독자의 주체적인 사고가 끼어들 여백을 소거해버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작품이 표방한 주제를 양념거리 정도로 격하시켰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이 소설이 주장하는 효과와 실제 묘사와는 간극이 있는 작품으로 『이런저런 소설적 장치를 통해 엽기적 살인범에 독자의 감정을 이입시킴으로써 그 살인범이 저지르는 윤리적·제도적 일탈행위를 독자가 간접체험하는 것으로 한몫 본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앤 타일러의 「종이시계」가 평범한 결혼생활의 위기를 다루면서도 그 위기를 감상적인 소설적장치를 통해 우회해버림을,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역사주체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로봇에게 위임할 정도로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해 맹목적인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음을 설교수는 각각 비판했다.그는 번역대중소설의 대체적인 경향으로 ▲기발한 착상 중심의 흥미위주▲표방된 주제와 작품의 전체적 의미 사이에 간극 존재 ▲독자의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의 유보 조장 ▲작품의 현실연관성의 희석화·왜곡 등을 꼽았다. 한편 임진영씨는 「즐길수 있는 지식과 공포의 세계」에서 이같은 번역대중소설의 인기가 자본의 문화지배력이 신장되고 문학의 현실대응력이 약화된 시기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그는 번역대중소설들이 종래의 대중소설보다 기법면에서 세련되고 세계관이나 소재도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상업논리에 따라 현실을 현상적·국부적으로만 반영하고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임씨는 이러한 소설이 주목할만한 독자층을 형성하게된 우리시대의 문화적 배경으로 ▲시각문화의 범람 ▲무반성적 탐닉과 함께 흥분과 자극의 요소로서의 지적·비판적 사유도 필요로 하는 소비사회적 경향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이 점차 의미를 잃어가는 세태 등을 들었다.그는 그러나 이같은 우리시대의 문화적 상황에서 『번역대중소설이 소비성 문학상품으로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반영하는데 뛰어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욕망을 비웃으면서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문학의 몫』임을 강조했다.
  • “조선근대화 앞당겼다” 일 주장은 허구

    ◎독립운동사연,광복 47돌 기념 일 한반도침략과정 다각분석 세미나/총독부는 경제약탈위한 군정조직/문화콤플렉스 풀려 민족문화 말살 광복 47주년을 맞아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을 정치 경제 문화 사회등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학술심포지엄이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조동걸 국민대교수)주최로 오는 12일 상오10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열린다. 최근 종군위안부문제가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고 PKO법안 통과로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안팎으로 높아가는 것과 때맞춰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은 특히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진행된 한반도 침략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오늘의 상황과 비교,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 또 일제36년이 조선의 근대화 및 자본주의화·공업화를 앞당겼다는 일본 및 외국학계의 일부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일제의 침략논리에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 실체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가한 김운태씨(단국대 초빙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수탈조직과 기능」이라는 제목의 미리 제출한 발표문에서 『일제의 대한침략은 군사적 지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지배체제의 구축과 경제적 침투,전래의 「정한론」에 근거한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문화적 침식등이 유기적으로 관련돼 자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일본천황제 국가권력체제의 군사적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그것을 배경으로 급속히 성장한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질,일본인의 전통적 대한식민주의 침략논리와 문화적 콤플렉스등을 일제침략과정의 특이성으로 들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본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왜곡시키고 외래자본주의의 예속화를 심화시켜 한국경제의 파행성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며 그 「근대화」기능도 일제의 식민정치에 필요한 범위내에서만 허용되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재정정책」에서 국민대 최태호교수는 『총독부 재정정책은 시종 식민지 대중의 부담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들의 목적달성만을 위해 가혹한 대중수탈정책으로 일관되고 있다』며 이를 제1기(1910년대 재정독립계획과 수탈기반조성기),제2기(1920∼30년대 전반까지 15년간 관업재정의 강화와 수탈기반확충기)그리고 제3기(중일전쟁∼제2차대전까지 전시재정과 군사비 수탈기)로 나누고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일제하 식민문화정책」에서 일제 강점기의 문화정책은 한 마디로 「민족문화말살정책」이었으며 이는 한반도정책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던 침략­동화­아시아에로의 기지구축을 위한 동원이라는 일관된 일본민족 숙원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제의 문화정책을 무단통치기(1919년까지),한국문화가 본격적인 일본의존적 개화파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사이비 문화통치기(1919∼1936)그리고 동원정책기(1937∼1945)로 나눠 분석하고 특히 일본인 학자에 의한 한국문화 연구목록의 방대함과 그 수준등을 예로 들면서 일제식민문화정책의 치밀성을 지적하고 있다. 신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한국민족이 근대적 부국강병체제를 수립하는데 있어 일본보다 뒤늦기는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력적으로 전개해 오던 자주근대화운동과 정책들이 일제의 침략으로 중단됐다가 해방과 함께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극복하면서 비로소 근대화를 추진,민족적 대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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