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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의 지속과 변화의 미래(사설)

    대통령이 미래지향의 개혁을 언급할 때마다 지레짐작으로 「국면전환」이라는 해석이 뒤따르고 그에대한 부연설명이 가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김영삼대통령이 지난 8일 신경제추진회의에서 국제화와 미래지향에 필요한 개혁을 역설한 것을 두고 일부언론은 물론 여당인 민자당내에서도 사정개혁의 국면전환이다,원래의 기조에 변함이 없다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그런가 하면 대통령이 「기득권층」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다고 해서 예민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가능하면 올바로 이해하려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다.그러나 이런 과정이 결과적으로 개혁의 방향을 오도하거나 혼선을 일으키는 것은 개혁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 9개월에 가까운 개혁과정을 통해 시종일관 지속적인 개혁,체제정비를 통한 총체적 국가경쟁력강화라는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접해온 국민대다수의 입장에서 볼때 문민정부의 개혁론이 그렇게 난해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그런데도때마다 다른 뜻풀이가 나오는 것은 수용자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예컨대 개혁은 통치의 명분일뿐 언젠가는 권력측의 필요에 의해서도 일과성으로 그치게 되고 말 것이라는 과거식 권력행태를 생각할수 있다.그러나 이런 시각은 정경유착의 단절선언과 제도화노력으로 빗나가고 말았다.다음으로는 개혁에 따르는 고통을 들수 있다.금융실명제실시에 따라 나돌던 김융대란설이 대표적인 예라 할만하다.그역시 빗나갔다.개혁의 명분에는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고 개혁을 그만하자고 주장할수도 없으므로 개혁의 부작용을 과장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보통사람들의 시선도 있다. 역사상 개혁에는 낡은 질서에서 이득을 얻던 사람들의 필사적인 저항과 반발이 있었다.이들은 개혁자를 헐뜯을 틈만 생기면 그때그때 교묘한 논리와 선동으로 대중심리를 장악하려 한다.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이 이런 까닭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같은 교과서적 역학관계의 도식을 갖고 오늘의 현실을 대결적구도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그럴 징후가 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다만 오늘의 개혁은 정권적차원이 아니라 국민적과제로 파악되어야 하며 사회지도층일수록 함께 하는 개혁의 도수관으로서 역할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이다.현실의 불만을 개혁탓으로 왜곡하는 심리는 경계해야한다. 「미래」를 말하면 부패척결은 이제그만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요컨대 개혁은 지속되는 것이고 미래는 변화된 것이어야 한다.그리고 지금까지 이룬 개혁을 지키며 미래로 나가기위한 길은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통한 자기혁신 뿐인 것이다.
  • 고대 한·일 관계:하(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1)

    ◎“6백70년경 일 주민 80∼90%가 백제인”/“서명왕은 스스로 백제인 자처”/최재석교수,「문화전파한 도래인=백제인」 입증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백제인의 일본건국」학설에 뼈대를 세웠다면 여기에 살을 붙인 사람은 최재석 고려대명예교수이다.사회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최교수는 신라의 가족제도를 연구하다『일본 고대사를 연구하지 않고는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해 뒤늦게 고대사 연구에 뛰어든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88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 최근까지「백제의 대화위와 일본화 과정」「일본 고대사연구 비판」「통일신라·발해와 일본의 관계」등 3권의 저서를 잇달아 내놓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이와 함께 일본측 사료와 일본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철저히 분석해 거꾸로 한국고대사를 밝히는 독특한 방법론으로도 유명하다. 최교수는 김성호씨의 학설가운데 비류백제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지만 백제인이 5세기초 대거 위열도에 건너가 일본왕국의 기초를 닦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로부터 관리·장군·기술자등이 건너온 사례(물론 일본측은 이를 백제왕이 바쳤다거나,귀화한 것으로 왜곡 표현하고 있다)가 수없이 나온다. 이 가운데 문화·생활부문만 보아도 응신 14년(403년)에 옷만드는 여자가,16년에 학자 왕인이 건너와 옷만드는 법과 전적류를 가르쳐 각각 그 분야의 시조가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또 맷돌 만들기,저수지 파기,배 만들기등을 3국에서 온 한인들로부터 배웠다고 적어 당시 3국의 문화·생활수준이 일본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위왕이 백제인을 자처한 사실은「일본서기」서명왕때의 기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당시 대화왜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백제천」,왜왕의 거처를「백제궁」,서명이 죽은 뒤 안치된 장소를「백제대빈」이라고 부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백제천이 흐르는 땅에 세운 백제궁에서 살고,죽어서는 백제대빈에 안치된 서명.그 자신이나 백성들은 그를 백제왕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난 87년 동경대 인류학과 가쓰로 하니하라교수는「일본초기 이주자 수의 대체적인 산출」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그는 이 논문에서 서기 700년 무렵 일본열도 내에서의 원주민과 이주자의 인구비율을 1대9 또는 2대8로 추정했다. 최재석교수는 일본 사서에 기록된 외국인 이주사례를 샅샅히 뒤져 「이주자=백제인」임을 밝혀냈다.즉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670년 당시 백제인이 총인구의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백제인이 인구의 대부분이었고 왕이 백제인임을 스스로 내세운 나라,문화수준이 낮아 각종 학문·기술을 백제로부터 배웠던 나라가 바로 고대 일본이었다는 것이 최교수의 주장이다.
  • 일기도의 고려교/박성수 (일본속의 한국문화:8)

    ◎김방경장군이 1274년 왜병 섬멸한 곳/여몽연합군,대마도 이어 공격… 1천명 몰살/일제때 「원구순국비」 건립… 고려군존재 은폐 일기섬은 일본인들도 가보았다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절해의 고도다.그러나 그곳에 고려교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라 대마도에 간김에 들러보기로 했다. 고려교가 있다는 곳은 일기섬 북단의 가쓰모토(승본)항.그곳 향토사가 중상사행씨의 안내를 받아 먼저 산성에 올라갔다.본시는 대마도에 있는 백제산성이 아니었나 생각했는데 안내판에는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치기 위해 전초기지로 사용했다고만 적혀 있었다.이름하여 승본산성.이 산성에서 북쪽바다를 바라보면 대마도가 보이고 세섬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주고 있는 가쓰모토항이 내려다 보인다.우리나라 기록인 「고려사」에는 이 항구를 삼즉포라 이름하고 있는데 위구의 소굴로 치부하고 있다.하늘은 푸르고 오징어잡이배가 힘차게 열을 지어 출항하는 광경이 어쩐지 왜구가 떠나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1274년 음10월 여몽연합군 9백척이 이 항구를 쳤다.그 상륙지점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해서 내려가 보았다.시내 한복판 길가에 「문영지역 원군상육지」라는 표석과 이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전몰기념비가 서 있었다.물론 대마도의 경우와 같이 1백년전 일제침략자들이 세워놓은 최근작이었다.바로 그 옆에 신공황후를 모셨다는 성모궁이 있어 이 지역 일대가 대한침략의 성지처럼 되어왔던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왜 그들이 고려군을 빼고 몽고군(원군)만 이곳에 쳐들어 왔다고 한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조선은 약하다고 선전해 놓았는데 그렇게 약한 조선군(고려군)이 여기까지 쳐들어 왔다고 하게 되면 곤란했을 것이다. ○왜장 평경륭 영웅화 그래서 몽고군만 쳐들어온 것으로 하면 그런 모순이 없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명치정권이 여몽련합군을 원구니 원군이니 하여 고려군의 존재를 말살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항구로부터 차로 2∼3분 걸리는 고려교로 달려갔다.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자칫하면 사진도 못찍게 될까 걱정이 돼서 먼저 사진을 찍고 중상씨의 설명을 듣기로 했다.작은 구름이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문영지역 고려교 고전장」이라는 표석이 서있었다.대석이 없어서 약간 기울어진 것같았으나 바로 이곳이 우리 김방경장군이 적을 쳐서 전멸시킨 장소라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오랫동안 위구에 시달리기만 하다가 적을 응징한 자리.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고려라는 이름.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그런데도 우리 국사책에 지워져 없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 고려교 표석의 유래는 7백년전 지금은 없는 이 다리위에서 고려군과 왜군이 싸워 1천명의 왜군이 쓰러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 있다.「고려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자. 『몽한군 2만5천,우리 군사 8천 그리고 선장 수부등 6천7백명이 전함 9백척에 나누어 타고 단숨에 합포(지금의 마산)를 떠나 대마도를 치고 일기섬에 이르니 왜병이 해안에 진을 쳤다. 아군이 그들을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더니 다시 와서 싸우므로 몽고군이 쳐서 1천여명을 죽이고 이어 적을 쫓았다.이때 중군 김방경은 효시를 뽑아 소리를 크게 질러 호령하니 왜가 겁을 먹어 달아났다.왜병은 크게 패하여 시체가 산더미와 같았다』 김방경의 전공은 너무나 컸다.그래서 『몽고군이 잘 싸운다고 하나 고려군에 비길손가』하는 탄성이 나왔던 것이며 이곳에서는 그뒤 이 싸움을 고려교 전투라 치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치정부는 이 싸움을 신성고전장이라 이름을 바꾸고 고려군과 맞서 싸우다가 자진한 평경륭을 영웅화하였다.아울러 이때 같이 죽은 1천명의 시신을 기려 신성 천인총이라 하였고 신성 언덕위에 신사까지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고려교 표석옆에는 지금도 「원관순국충혼비」가 서있고 꽃다발이 생생한데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문영의역 신성고전장(현지정사적). ▲천인총­문영11연10월14일(1274)에 몽고군이 내습하여 상륙하였다.수한대 평경륭은 1백여기로 이틀동안 싸웠으나 원군이 너무 많아 전멸당하였다. ▲신성신사(평경륭의 묘)경륭은 고전끝에 자신의 거관인 신성에 패주하여 다음날 최후의 일전을 시도하다가 일주 모두가 성내에서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몽고군 1만명 익사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몽고군의 수탈과 삼별초의 항전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던 민식초목지실의 시대였다.그런 속에서 3만여명의 목수들이 징발당해 단 5개월만에 9백여척이나 되는 전선을 만들어 냈으니 스스로 일본정전같은 큰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군사들은 물론 목수들까지 극도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특히 목수들은 몽고군의 횡포와 강압에 격분한 나머지 불양선함을 만들어내 몽고군이 타고 가다가 모두 수장되기를 바랐다.고려군은 이 사실을 알고 태풍이 불자 재빨리 튼튼한 배에 올라타서 대부분 생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몽고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라 1만3천여명이 물귀신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따라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때 불어닥친 바람은 신풍이 아니라 고려목수들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고려교와 신풍의 왜곡된 현장 일기도는 아직도 안개속을 헤매는한일관계처럼 시정되지 않은채 오늘을 살고 있다 할 것이다.
  • 여몽연합군 일 정벌(일본속의 한국문화:7)

    ◎“원구 3만명에 결사항거” 표석 곳곳에/대마도주 종조국,“80기로 맞섰다” 용전 과장/일제 군국주의자들,증오심 부추기려 미화 13세기말,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백여년전인 1274년에 몽고군과 고려군이 연합하여 대마도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우리는 이 사건을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이라 부르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통상 문영·홍안의 역이라 부르고 있다.이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은 대마도와 일기도 그리고 북구주의 박다였다. 여기서는 사건을 좀 더 강하게 원구의 내습이라 부르면서 곳곳에 표석을 세워 그날의 참화를 잊지 않도록 환기시키고 있다.심지어는 위령비에다 신사까지 세워서 이날 이때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말썽 많은 동경 한복판의 정국(야스쿠니)신사와 같은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1274년에 도해 대마도 서해안에도 위령비와 신사가 있다고 해서 오늘은 그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소위 원구라는 호칭은 우리가 하는 위구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 하겠으나 일본은 단 한번 당한 침략인데도 곳곳에 기념물(?)을세워 놓고 있는 반면 우리는 수없이 당한 위구였는데도 단한곳 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만일에 우리가 위구고전장이라고 해서 절을 세운다고 가정하면 전국 도처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사찰 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그런데 왜 일본에는 이런 곳을 만들어서 요란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일까.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대마도에서는 제사를 지낸 뒤에 서북쪽 바다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행사가 반드시 있다고 하며 수년전에는 원구700주년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는 소문이다.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제잔재이며 이 잔재때문에 일본인들은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속의 한국문화를 솔직하게 시인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시신 두토막… 묘2개 엄원(이즈하라)에서 원구고전장이 있다는 소무전(고모타)마을로 가자면 이 섬의 진산인 백악산을 넘어가야 한다.백악산도 백두산이란 우리 민족고유어에서 유래하고 있다.도중에 차는 어동총이라는 곳에 잠시 머문다.「어동총」이란 무엇인가.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공격하였을때 항전하다가 죽은 제1대 도주 종조국의 무덤인데 그가 두 토막이 나서 시체가 두군데 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중의 하나가 이곳의 오동총이라고 하니 듣기에도 소름이 끼친다.비문에는 종조국공어동총이라 새겨 놓았으나 그 옆면에는 자신이 없는 듯이 『종조국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부기해놓고 있다. 다시 차는 고개를 넘어 해안에 닿는다.멀리 바다 건너에는 우리나라의 남해안이 바라보이고 작은 어선들이 항구에 들어선다. 항구에 들어서는 어선들이 마치 옛날 왜구들이 우리나라를 약탈하고 돌아오는 장면같이 느껴져 섬찢했다.물론 필자의 시대착오이긴 했지만 이 마을에다 지어놓은 소무용국신사와 또하나의 종조국어동총을 보는 순간 갑자기 지난날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다가섰다. 왜 그랬을까.바로 이 신사와 동체묘가 일본군국주의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이 섬 사람들은 7백년이나 지난 일을 기억할리가 없는데 명치유신 이후 이나라에 군국주의가 되살아나더니 케케묵은 신공황후라는 귀신의 삼한정벌설이 대대적으로 등장하는가하면 원구고전장 같은 곳이 만들어져서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 시작했다.바로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본시 원구란 말은 없었고 명치유신이전에는 「이국합전」정도로만 불렀었다는 사실을 상기할때 원구고전장이란 말자체가 근대적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또 그보다 더 뚜렷한 증거는 이 신사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이다.하나는 일제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원구분전지도」라는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관광협회에서 만들어 세운 「원군침공요도」라는 안내판이었다.앞의 것은 한마디로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한 문구로 가득차 있는데 반해 뒤의 것은 매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원구분전지도. 문영 11년 10월15일에 원군 3만여명이 선수를 서로 맞대고 쳐들어와 대마도를 포위하였다.수호대 종조국은 겨우 80여기로 그들과 싸웠으며 의용전사한 도민이 부지기수였다.적들은 살아남은 노유부녀들을 붙잡아서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새끼를 꿰매어 뱃머리에 엮어서 매달았으며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였으니 그 참상은 눈뜨고 볼수 없는 일이었다.적의 선봉은 그 나라의 중죄인들로서 이름하기를 생권군이라 하였으며 악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종조국은 일기당천의 용사들을 지휘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죽음에 임해서도 그는 눈을 부릅뜨고 적을 응시하며 쓰러졌다.종조국의 동생 마지윤도 함께 쓰러져 충사하였으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군은 오지 않았으니 오호라 슬프도다.명치29년 11월2일 종조국에 특지를 내려 종2위로 삼으니(천황의) 성은이 고골을 적시고 전국이 감읍하였다」 ○태풍에 배침몰,철수 누가 읽어 보아도 소름이 끼치는 글이요 제1대 도주 종조국의 용전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그러나 그때 종조국은 결코 일본천황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또 그런 종조국에 종2위라는 작위를 내린 해가 명치29년,즉1896년이었다.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바로 그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관광협회에서 만들어 세운 안내판의 글귀는 담담하기만 하다. 「원군침공요도 문영지역 ­문영11년10월에 고려군을 포함한 3만여명의 원군은 먼저 대마와 일기를 공격하고 10월19일 박다만에 이르러 이튿날 상륙하기 시작하였다.일본군은 주로 구주의 무사들이었는데 원군이 장궁독시와 철포와 같은 신식무기로 싸운데 반하여 일본 무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1대1로 싸울줄밖에 몰랐다.그래서 대패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 원의 군선이 거의 다 침몰하고 1만3천명의 군사를 잃고 고려로 철수하였다.이것이 문영의 역이다」 일제말기에 「신풍」이라는 자살부대를 만들어 10대 청소년들을 몰살시킨 역사를 일본인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원구때의 신풍이 다시 불지 않는 조작된 역사란 사실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런 역사 왜곡의 현장을 그대로 둔채 살아가고 있는 일본인들.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수 있단 말인가.
  • 박 전대통령 14주기 추도식 엄수

    ◎어제 10·26… 유족 등 1천여명 참석/JP,“혁명가 답게 세상 떠난분” 견해 피력/현직각료·청와대측선 아무도 참석안해 10·26 14주년을 맞아 박정희전대통령에 대한 추도식이 26일 상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됐다. 3공 인사들의 모임인 민족중흥회 주관으로 진행된 추도식에는 지만·근영남매,사위인 한병기전유엔대사 등 유족과 김종필민자당대표 등 각계 인사 1천여명이 자리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그러나 기념사업회를 둘러싸고 근영씨와의 갈등설이 나돌고 있는 맏딸 근혜씨는 지난해에 이어 불참했다. 이날 행사는 5·16에 대한 문민정부의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첫해에 이뤄져 많은 관심을 모았으나 여느해처럼 차분한 분위기속에 진행됐다. 반면 일부 참석자들은 김영삼대통령이 5·16을 「역사를 후퇴시킨 사건」이라고 규정한데 대한 간접적인 불만을 표시해 눈길을 끌었다. 김종필대표는 『박전대통령에 대해 허튼 평가를 내린 사람도 그 어른이 일궈놓은 토양위에서 숨쉬고 있다』고 박전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꼬집었다.그는 이어 『우리나라에는 그 어른을 모르고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전제,『혁명이 필요할때 혁명가로 나오셔서 혁명을 일으켜 혁명가다운 방법으로 이 나라를 세워놓고 혁명가답게 세상을 떠난 분』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김대표는 『정계에 남아 제대로 여러 일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이 송구스럽다』고 심경의 일단을 내비친뒤 『정계에 남아 보람만은 나눠가질 수 있도록 뒷받침할 것』이라고 정계은퇴의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남덕우전총리는 추도사에서 『요즘 시류에 편승해 각하에 대한 터무니없는 왜곡과 낭설이 유포되는 사례가 있다』고 전제,『개발독재니 관료적 권위주의니 해외에서 빌려온 이론으로 박정희시대 18년에 대해 부정적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한국 학계의 불모성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백남억민족중앙회장은 『중국에서조차 각하의 국가경영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도 이나라에서는 순리와 당위가 역행하고 있다』면서 재평가를 촉구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영삼대통령을 비롯,최규하 전두환노태우전직대통령과 이만섭국회의장 등이 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또 신현확전총리,박준규전국회의장,민관식·김진만·장경순전국회부의장,최각규전부총리,김계원·홍성철전대통령비서실장,김재춘·신직수전중앙정보부장,오치성전내무부장관,김용식전외무부장관,오탁근·김기춘전법무부장관,노재현전국방부장관,유혁인전청와대정무수석,이종근·구자춘·김영광·김효영·박세직·김길홍·조용직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그러나 황인성총리를 비롯한 현직 각료와 청와대측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경제계 인사로는 박용학전무역협회회장 등이 유일하게 자리했다.
  • 고대 한·일 관계(온가족이함께 읽는 우리역사:19)

    ◎“백제유민이 4세기에 일본 건국”/강력한 수군 앞세워 규슈지방 등지에 진출/80년 연구 진전… 일선 임나일본부설 고집 우리의 고대사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 가운데 하나가 삼국과 위의 관계이다.삼국과 가야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왜와 정치적·문화적으로 밀접한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실체는 오랫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채 한·일양국(또는 양국의 사학자들)은 각기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만 한일 고대사를 해석해왔다.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역사학을 먼저 도입한 일본측이 적극적으로,또 공격적으로 고대사를 왜곡한 반면 국내 사학계는 방어에 급급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야마토(대화)조정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에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백제·신라·가야를 2백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측이 내세운 대표적인 억지이론의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측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지난 79년부터 82·90년 3차례 개정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백제­위관계」에 대한 서술 변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운데 82년판과 90년판이 큰 차이를 보인 점은 유의할만한 사항이다. 79년판에는 『4세기 중엽 백제가 남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국가로 발전』(19쪽)했으나 고구려가 북중국의 전진및 신라와 연맹해 압력을 가하자 백제도 남중국의 동진,바다건너 왜와 연결해 이에 대항하였다』(23쪽)고 밝혔다.이후 『한반도안에서 고구려·신라가 협격하게 되자 백제가 일본 지역에 구축하였던 세력도 약화됐다』(25쪽)고 서술했다. 이에 비해 82년판 교과서에서는 『백제는 4세기 중엽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산둥지방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23쪽)고 써 양국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라기 보다는 백제가 왜에 세력이 미쳤음을 표현했다. 90년판에는 훨씬 적극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산둥지방과 일본에까지 진출하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38쪽)고 왜에의 진출을 부각시킨데 이어 『삼국중 왜와 가장 긴밀한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는 백제였다.이는 다수의 백제유민이 규슈지방등지에 진출하여 국가건설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41쪽)고 밝혀 백제가 일본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같은 서술은 80년대 진행된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일부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바지했다」라는 표현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그들은 「백제 유민이 일본국을 직접 건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발해 2백년사」 책으로 나왔다

    ◎송기호교수,서울신문 연재 글 정리 「발해를 찾아서」 발간/만주­연해주 현지답사… 민족자취 서술/인접국들 역사왜곡 바로잡는 지침서 될듯 우리는 발해를 우리역사의 한부분이라고 배워왔다.그러나 고구려의 옛장수 대조영이 세웠다는 사실등 몇가지를 제외하면 발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잊혀진 역사였던 셈이다.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발해가 위치해 있던 만주와 연해주가 그동안 우리에게는 갈수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송기호교수(국사학과)가 펴낸 「발해를 찾아서」(솔출판사간)는 중국과 구소련과의 수교 이후 그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자는 역사학계와 언론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는 최초의 성과이다. 「발해를 찾아서」가 나오게 된 근원은 지난 19 90년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서울신문사는 중국과 구소련의 문이 열리자 발해유적조사단을 구성했다.송교수는 바로 이 조사단의 일원으로 만주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모두 네차례에 걸쳐 만주와 연해주를 찾아 발해의 역사를 추적했던 것.송교수는 그 답사기록을 서울신문에 92년9월부터 지난 7월까지 30회에 걸쳐 「발해2백년사 현장탐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그 글들을 정리, 이 책을 냈다. 「발해를…」은 우리에게 잊고있던 발해를 다시 일깨워주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그것은 우리가 발해사 연구에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던 사이 인접국들의 역사왜곡이 심각하기 때문이다.중국은 발해 유적과 유물에 접근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70년대말 본격화된 발해연구를 통해 「발해는 속말말갈주이 세운 당왕조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또 러시아 역시 발해사를 소련 원동의 소수민족인 말갈족의 역사,나아가서 러시아 역사의 한부분으로 파악하려하고 있다. 이 책의 머리부분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에서도 송교수는 이 문제를 낙관하지 않는다.만주에는 발해 역사의 현장이 널려 있지만 교과서에서 배워온 것처럼 우리역사의 전유물로 인정하기에는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송교수는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발해의 역사에서 차분하게 한민족의 숨결을 찾으려하고 있다. 송교수는 발해건국자 대조영이 처음으로 도읍했다는 동모산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오르고 흑수말갈의 고향을 찾아 그들의 후예인 나나이족을 만나는 등 만주와 연해주의 유적 곳곳에서 우리 민족의 체취를 확인하는 과정을 감격속에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이 책은 또 충실한 지도와 다양한 원색사진을 함께 실어 발해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과 함께 점차 늘어날 이 지역에 대한 답사여행의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다. 송교수는 『앞으로의 발해연구는 북한과의 협조가 필연적』이라면서 『가까운 시일내에 북한지역의 발해유적답사가 이루어져 이 책을 증보할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밝혔다.
  • 미국인 울리는 연극 「켄터키 서클」

    ◎“인디언여인 납치 아내로” 부끄러운 과거 조명 미국 2백년 역사의 실체를 리얼하게 조명한 한편의 연극이 요즘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켄터키 서클」이란 이름의 이 작품은 미국인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진단하고 그에 따른 망각의 심리적·사회적 위험성을 신랄히 꼬집은 역사극이다.지난해 LA 케이퍼 포럼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5개의 LA드라마 비평부문상을 휩쓴데 이어 올해 퓰리처상까지 수상하면서 미국인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공연시간 6시간 30분짜리 9막극으로 1백여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이 작품은 지난 9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데 이어 이달 말부터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예정으로 있다.워싱턴 공연때는 매회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기록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뉴욕공연이 가까워지면서 브로드웨이 주변에서는 극장주들이 「켄터키 서클」이 가져다 줄 「흥행선물」에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다. 작품의 무대는 1775년 켄터키주의 크림버랜드.­개척자로 정착한 로웬가문의 한 족장이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르키족의 한 신부를 유괴해 불구자로 만든 뒤 자신의 아내로 만든다.그로부터 15년뒤 이 교활한 족장은 포로가 된 신부에게 그들의 구애시절에 대한 달콤한 기억들을 거짓으로 꾸며 들려준다.­「켄터키 서클」은 이처럼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기억의 왜곡을 묘사하면서 전개된다. 그후 로웬가문은 체르키족에게 천연두균을 퍼뜨려 그들의 땅을 빼앗고는 그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그러다가 로웬가문은 뜻하지 않게 부유한 땅주인 탈버츠가문과 땅문제로 불화를 겪게 된다.결국 이들의 반목과 불화가 또다른 왜곡의 씨앗인 1861년 남북전쟁의 배경이 된다는게 대강의 줄거리다. 작품의 구성이라야 개인적·역사적인 기억의 왜곡들이 시대적인 상황들과 맞물리면서 파생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엮어나간 것으로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내용 또한 관객들에게 낭만적인 분위기나 통쾌한 기쁨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개척시대부터 익숙해져온 미국인의 추한 얼굴을 계속 들춰냄으로써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철저한 역사인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진지한 주제접근과 과거는 묻어두고 앞만 보고 달리는 미국인의 도피주의를 신랄히 꼬집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새로운 역사인식의 체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은 역사가 어떻게 개인과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재조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종전의 다른 역사극들과 차원을 달리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따라서 이달말 브로드웨에서의 「켄터키 서클」공연은 최근 침체에 빠져있는 미국 연극계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케 하는 동인이 될 것으로 연극평론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 미래지향 야당과 국정감사(사설)

    문민정부를 상대로하는 국회의 첫 국정감사가 오늘부터 시작된다.13개 상임위별로 22개 기관에 대해 20일간 벌이게 되는 이번 국감은 새로운 의정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왜곡된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변화와 개혁의 시대에 우리의 국회도 이제는 뭔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정감사에서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주기를 당부한다. 김영삼대통령이 국회연설을 통해 달라지는 국회와 새로워지는 정치를 역설하고 큰 정치를 강도높게 주문함으로써 정치일신에 대한 국민적요구는 그 어느때보다 커지고 있다.때마침 민주당의 이기택대표가 과거문제에 대한 집착보다는 경제활성화에 역점을 두겠다는 새로운 노선을 천명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번 국감이 그 실천적현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국정감사는 우리 헌법에 고유한 의회의 대정부견제기능을 행사하는 과정이다.국정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새로운 입법과 예산심의의 자료로 삼고 행정부의 시정을 감시비판하며 세정을 시정하는 기능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감은 한건주의,폭로전술,정치공세 등으로 본래의 기능은 고사하고 정치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비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큰소리로 호통이나 치고 파행을 일삼거나 언론보도에만 만족하는 구태를 더이상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정치개혁은 이러한 정치권의 한국병을 스스로 고치는데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러한 노력은 이번 국감과정에서 가시화되어야 한다. 이번 국감은 6공과 새정부를 동시에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또한 현재의 국회구성이 지난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정치권의 근본문제를 직시해야 한다.할일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통한 자기혁신이다.여당이 문민정부의 역사성위에서 미래로의 전진을 위한 과거단절에 당당해야 한다면 야당은 과거집착을 벗어난 미래지향에 진취적이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야당이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보다 능동적으로 시도할 것을 기대한다.과거집착은 더이상 야당의 선명성을 부각하고 당리를 가져다 주는 카드가 아니다.오히려 스스로의 앞길을 묶는 족쇄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야당의 선명성은 투쟁일변도의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담한 개혁성과 합리적이고 정교한 정책대안의 차별성에서 확보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나마 국회운영의 노선이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소리지르는 야당에서 생각하고 고뇌하는 야당으로의 과감한 변신이 수권정당의 신뢰라는 보다 큰 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진지한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이번에야말로 국감다운 국감이 되도록 야당이 선도할 것인지 주시한다.
  • 군 「정치 불관여」 선언/권 국방 특별담화

    ◎“「국민의 군대」로 거듭 나겠다” 건군 45주년을 맞아 국군은 앞으로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군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국민의 군대」가 될 것임을 선언했다. 권영해국방부장관은 2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국방부및 합참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한 「건군 45주년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을 통해 ▲국민의 군대로서의 위상정립 ▲정의로운 군의 구현 ▲역사의식에 투철한 군 ▲자주국방태세의 확립등 군의 4대지표를 제시했다. 권장관이 군의 위상을 밝히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한 것은 새 정부들어 처음있는 일이다. 권장관은 특별담화문에서 『이제 우리는 군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났던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에게 충직한 군대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우리 국민은 과거처럼 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장관은 『국민은 군이 오직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제,『군은 더이상 정치인의 것도,군 지도층의 것도,직업군인들만의 것일 수도 없다』면서 「국민의 군대」로 거듭 태워날 것을 천명했다. 권장관은 또 『과거 한때 군이 공익과 도리에서 벗어나 지연이나 학연 또는 특정이익을 앞세우는 일부 집단에 의해 질서가 왜곡된 적이 있다』면서 『군인은 사사로운 이익이나 집단적 이해를 초월,공익과 정의를 사고와 행동의 준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장관은 『과거의 잘못으로 군내에는 상호불신과 냉소주의가 나타나게 됐으며 군의 단결이 약화되는 일이 있었다』고 시인하고 『이제 우리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조직을 결성하거나 온정에 이끌려 공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정의로운 군의 실현」을 위해 군내 사조직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 “언론은 자정으로 도덕성 회복을”/오 공보처,심포지엄서 강조

    ◎정부비판의 기준을 공익의 논리에 둬야 오인환공보처장관은 25일 『변화와 개혁의 흐름속에서 언론만이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며 『이제 언론도 권력·자본·부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오장관은 이날 관훈클럽과 한국언론학회가 춘천 세종호텔에서 개최한 제5회 최병우기자 기념심포지엄에 참석,『언론이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회복과 함께 자기혁신을 이뤄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하고 『지금이 언론의 자정운동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말했다. 오장관은 이어 『이 시대의 언론인은 역사의식을 외면할 수 없으며 공익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해야 한다』면서 『이같은 기능을 잘 수행하려면 우선 스스로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장관의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혁과 언론의 이중잣대=이제 우리 언론은 발전의 걸림돌로 인식되어온 권력·자본·부패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진지한 자기성찰을 가져야 한다. 언론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자정을 통한 도덕성 회복과 자기혁신을 이뤄나가야 한다. 변화와 개혁의 역사속에 언론만이 열외의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언론의 자정운동은 언론자신을 위해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오보에 따른 인권침해,자원낭비,상업주의,선정주의등은 외부의 간섭없이 언론 스스로에 의해 해결돼야 한다. 우리 언론은 정부에 대해 「정부는 항상 나쁘고 언론은 항상 옳다」는 부정적 의식을 갖고 있다.이는 언론은 항상 무오류의 성역에 머물면서 문제점 투성이인 정부를 비판해야 하며 언론이 정부를 제대로 감시못하면 정부는 국민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할 것이라는 전제아래 나온 것이다.그러나 문민정부는 과거정부와 다른 잣대로 재야 한다. 언론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정부를 원하듯이 정부도 독자와 시청자로부터 신뢰받는 언론을 원하고 있다. 언론은 정부를 재는 잣대와 권력층을 재는 잣대를 따로 갖고 있으며 개혁을 재는 잣대도 「총론에는 찬성,각론에는 반대」의 이중기준을 갖고 있다.언론이 개혁에 대한 견제기능을 발휘한다는 취지에서 매일같이 개혁의 각론을 문제삼아 집중적으로 보도할 경우 국민들은 자칫 개혁의 본질을 잊거나 개혁을 왜곡되게 인식할지도 모른다.이같은 이중잣대는 언론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하나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언론의 기준이 자본의 논리보다 공익의 논리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또 언론의 견제·비판기능과 평가기능은 역사의식이란 관점에서 파악돼야 한다. 이런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도 우선적으로 스스로의 개혁,즉 자정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 신문기업의 소유및 경영구조로부터 편집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 약국 휴업과 TK정서/최암 전국부기자(오늘의 눈)

    신정부 출범이후 최근 대구에서 빚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몰락하는 TK의 생트집」으로 치부하는 등 말이 많다. 지난 8월 동을보궐선거에서 무소속후보의 압승과 경부고속철도 대구역사 지상화 결사반대에 이어 약국휴업조차 이지역 약사들이 앞장서 주도하자 TK정서와 연관지은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본질은 이곳 사람들의 이해성과 인내성이 몰라보게 약해진 때문이지 이른바 신TK정서와는 결코 무관하다는 느낌이다. 약국휴업 사태를 주도하면서 여론의 질타로 곤죽이 되고 있는 대구·경북지역 약사들은 하나같이 『약사들의 권리를 지켜주지 못한 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소위 「보리문둥이」라 불리는 지역민들의 외고집이 문제를 확대시켰을뿐 신지역감정과는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이 지역민들의 최고 현안인 고속철도 지상화 문제는 사실 지역발전의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기존 경부선의 도심 관통으로 대구의 남·북발전이 크게 불균형을이루고 있는데 고속철도까지 지상으로 건설된다면 이에따른 각종 민원과 부작용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게 대구사람들의 생각이다.특히 대구시가 장기적으로 추진해 오던 도시계획사업의 전면 수정은 물론 도시기반시설의 재건설 및 보완이 불가피해 엄청난 예산낭비와 시민불편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대구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주장이며 요구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들은 이같은 반대의 명분을 도외시한채 부산지역과 비교하면서 몰락하는 대구지역 인맥,탈권력에 대한 지역감정으로 몰아 대구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있다. 30여년간 정권창출지의 권부로 지칭되면서 TK란 지역분파성의 대명사까지 얻게된 대구.그러나 권부라는 화려한 지칭과는 달리 지역개발과 산업 경제구도는 전국 3대도시에서 밀려나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대구 동을보선 결과를 두고 합리적인 민의의 승리라 치하했던 사실을 되새겨 고속철도·약국휴업 문제 등 지역현안을 보다 합리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해법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문민정부출범으로 민의가 왜곡되지도 않지만 다수의 압력에 또 다른 민의가 고개를 숙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 개혁은 전진을 위한 자기정비다(사설)

    김영삼대통령의 어제 국회연설은 민주화되고 있는 정치의 새 모습과 선진미래를 향한 전진의 비전을 국민들이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따지고 보면,실로 30여년만에 우리도 의정속에서 국민이 키운 국정최고책임자가 여야의원들의 부담없는 예우를 받으며 국정운영의 포부와 방향을 밝히는 장면을 보게된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나아가 「변화와 개혁,그리고 전진」에 담긴 대통령의 미래와 세계를 향한 거시적인 안목과 의지는 더 큰 국민적 공감과 희망을 주리라 믿는다. ○권위주의 규제로부터의 탈출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세부적인 시정의 내용보다는 국가운영의 큰 방향과 원칙,그리고 철학을 제시하는 기회로 파악되어야 한다.연설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대통령의 의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며 시정방향은 앞으로의 국정운영을 통해 정책으로 구체화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연설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은 먼저,민의를 존중하고 국회의 위상을 높이는 대통령 국회연설의 새로운 관행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지난날의 대통령들이 혹은 국회경시사고때문에,혹은 정통성과 체제시비 때문에 국회에 참석하는 것조차 꺼리거나,문제가 되었던 비정상적인 관행이 청산된 것은 뚜렷한 발전이다.우리는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문민정치의 새로운 전통으로 뿌리내리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대통령의 이번 국회연설의 내용은 미래지향의 개혁철학을 체계화하고 있다.이번 연설의 제목을 결정하면서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에다 「그리고 전진」이라는 대목을 직접 붙였다고 한다.그것은 일과성이 아닌 지속적인 개혁과 아울러 미래와 세계를 향한 「전진」을 또하나의 초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전진을 위한 자기정비가 개혁이라는 말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있어 개혁이란,방만했던 과거에 기초한 오늘의 현실에 대한 과감하고 도전적인 접근이자 그 극복이다.대통령은 『저는 온갖 형태의 권위주의적 규제와 제한을 풀었다』고 강조했다.지나간 한 시대의 권위주의적 제도와 규제와 관행과 모든 제한으로부터의 적극적 탈출이 바로 개혁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과거 청산하고 화해의 미래로 우리는 개혁의 방향이 어디까지나 선진국의 위상을 갖는 신한국의 미래를 건설하는데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그런 점에서 경제회생과 신경제5개년계획의 추진,그리고 과거에 대한 화해와 체제의 안정및 강화를 분명히 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과거와 현재를 싸움붙이면 미래를 잃게 된다」는 영국 처칠수상의 말을 미국 케네디대통령이 인용한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과거의 피해자이면서 과거를 청산하되 과거에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한 대통령의 말은 변화와 개혁을 선도해온 문민대통령으로 할말은 해야한다는 자신감과 용기의 표현이며 대담한 화해와 안정의 의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일부현상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청산의 노력이 과거 캐기로,자유민주주의체제의 강화와 발전을 위한 개혁의 참뜻이 이상한 진보로 왜곡되는 빌미가 차단될 것이다.역사상 개혁의 과정에서는 피해를 보는 극소수 수구기득권자들이 불만과 반발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기려는 노림수가 있게 마련이다.또 미지의 경험을 수반할 새로운 제도의 실시에는 심리적인 불안이 있을 수 있다.따라서 제도개혁의 단계로 접어든 시점에서 대통령이 밝힌 개혁의 바탕위에 안정과 화해로 나아가는 기조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다. 경제회생을 위한 실명제의 미래지향적 운영과 비밀보장을 밝힌 대통령의 뜻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이미 권위주의적 질서를 확고한 문민질서로 개혁한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진도약의 관문이라 할 금융실명제의 제도 자체는 물론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로 가는 선진적 실명문화의 정착에 국민적 동참이 있어야 한다. ○실명·재산공개,개혁의 핵심 금융실명제에 대한 강고한 의지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정치개혁과 정치의 일신을 강도높게 주문한 사실이다.부정없는 선거혁명의 제도화를 포함한 정치관계법의 제도개혁과 미래로 나아가는 큰 정치로의 근본적 전환은 우리 정치의 숙제이며 개혁의 성패를 가름하는 관건이다.30년이상의 정치생애를 정치권에서 보낸 대통령이 취임일성으로 정치자금을 받지않겠다고 선언한 정치개혁의 의지를 절감하게 한다. 국가자원을 쓸어넣다시피하는 낭비구조의선거와 국민여론을 과거지향의 낮은 차원으로 오도하는 낡은 정치의 한국병을 수술하지 않고서는 신한국을 위한 국가경쟁력은 확보할 수 없다.부패와 타락선거를 혁파하고 정당의 자생력을 높이며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방향의 선거법,정치자금법,정당법 등의 관계법개정에 정치권은 존립을 건 결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기회만 있으면 전직대통령을 증언대에 불러내려는 구시대정치를 청산하고 국민의 힘을 결집하는 생산적인 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보다 선명해졌다.건강한 민주주의와 활력이 넘치는 자본주의가 꽃피는 선진국이며 새로운 문명의 모델을 이룩하는 세계문명의 중심이다.민족의 독립과 민주화를 이룩한 도덕적 힘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적인 저력을 문민시대에 새롭게 발휘해야 한다.자신감과 긍지를 갖고 앞으로 나가야겠다는 각오와 자세를 대통령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해낼수 있는 민족』이라는 연설 끝맺음으로 강조했다고 할것이다.
  • 러 교과서 「6·25북침」 수정

    ◎남·북한 실상 반영… 소 참전 첫 게재 【모스크바 연합】 러시아 교육부는 전면적인 교과서 개편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전쟁·남북한체제·역사등에 관해 내용을 왜곡기술한 기존의 교과서를 모두 폐기키로 하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새로운 교과서를 편찬한 것으로 11일 밝혀졌다. 러시아정부가 70여년만에 모든 교과서를 근본적으로 개편하게 된것은 기존의 교과서 내용이 공산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한 정치성을 띠고 있어서 이데올로기 대립이 종식된 지금 2세 교육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새로 편찬된 10,11학년용 역사·사회·경제·지리과목 교과서는 남북한의 실상을 사실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특히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북한의 공식적 입장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1학년용 역사교과서인 「최근세사」의 경우 남북한관련 항목(167∼173P)을 보면 한국전쟁 부분에서 기존의 「북침」에 관한 내용을 완전 삭제하고 그 대신 북한군이 전쟁시작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유엔이 북한의 침략을 규정한사실을 기술함으로써 6·25가 북한에 의한 계획적인 전쟁임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구소련과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부인해온 소련군의 참전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 공직자 재산공개를 말한다/긴급좌담

    ◎“권력이 바로 돈·명예이던 시대 끝났다”/직전에 사퇴한 사람도 조사해야/실사는 보복차원 안되도록 공정히/공무원평가도 업적위주로 전환을 ▷참석자◁ 손봉호 정사협회장 박동제 행정쇄신위장 금융실명제에서 재산공개로 이어지는 개혁의 파고가 드높다.7일 단행된 공직자 재산공개는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순.「권력=돈」,그리고 「권력=명예」라는 광복이래 우리 사회를 줄곧 지배해온 왜곡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평가에 이의가 없다.이번 재산공개는 공직이 치부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지극히 초보적인,그러나 타성에 젖어 어느 누구도 선뜻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손봉호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단체연합(약칭 정사협)」회장(서울대 철학과교수)과 박동서 행정쇄신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의 대담을 통해 재산공개의 의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문제점및 보완책등을 진단한다.. ▲손교수=공직자 재산공개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지금까지 김영삼정부가 단행한 제도적 개혁가운데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양대 축입니다.권력과 돈,명예가 일체화되다시피한 상황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만족스럽지 못한 면이 없지 않지만 획기적인 조치입니다. ▲박교수=정치와 행정,국가발전 전체를 놓고 볼 때 권력과 연결된 불로소득은 암적인 요소입니다.일소해야 한다는 비판은 늘 있었지만 미미한 수준에 그쳐왔습니다.이번 재산공개는 김영삼정부가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민반발로 불가피 여기에는 향상된 국민의식과 87년 6월항쟁 이후 급진전된 민주화,김영삼씨의 대통령 당선이 커다란 원인을 제공했다고 봅니다.과거 야당에서 오랫동안 민주화투쟁에 앞장섰고 또 정치자금을 썼겠지만 개인적으로 치부를 하지 않은 김대통령의 경력상의 특징이 이같은 과감한 조치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합니다.뚜렷한 소신과 투쟁경력·가치관·행동양식이 배경이 된 것 같습니다.언론에 재산을 공개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과거 권력을 통한 부패가 시정되지 않은데 대한 국민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손교수=지방의회의원들의 반발이 있고 은폐의 여지를 많이 남겼으며 부정이 있는 공직자가 이미 대거 사표를 낸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과거의 잘못이 모두 드러나기는 어렵습니다.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사전에 공직에서 물러난 사람도 조사해야 합니다.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빠져나갔을 수 있습니다. ○부정인상 씻는 조치 국민들이 공직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당분간은 부정적일 겁니다.그들의 재산이 국민 평균보다 많아 도덕적으로 「시원찮은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전망입니다.이번 재산공개는 그러한 공직사회의 부정적인 인상을 씻기 위한 불가피한 과도조치입니다.또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입니다.그러나 이번 조치로 공직자들이 떳떳하게 본래 가져야 할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입니다.조선시대 후기부터 몸에 밴 법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을 동일시하지 않는 습성이 사라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번 재산공개를 보고 개인적으로받은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아직 물갈이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새정부 출범후 숙정이 많이 된 군의 평균이 낮고 사법부와 외무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또 노른자위자리를 거친 사람의 재산이 많습니다.따라서 개혁이 형식 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변호사가 돈많이 생기는 자리라는 것 또한 새삼스럽습니다. ○물갈이 아직 불충분 ▲박교수=실명제와 겹쳐 시행됐기 때문에 현공직자는 물론 앞으로 공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권력을 통한 축재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전망입니다.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 자체에 만족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고의 시발점이 될 겁니다. ▲손교수=앞으로 윤리위는 국민감정을 고려해 고액자부터 재산형성과정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상속및 부인으로부터 증여받은 재산도 조사해야 하고 탈세여부도 추적해야 합니다.「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선을 넘어서는비도덕적인 부분은 철저히 파헤쳐야 합니다.부모의 재산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자녀명의의 재산은 조사해 탈세의혹을 밝혀내야 합니다. ○소명기회도 주어야 ▲박교수=그러나 재산이 많다고해서 무조건 의심해서는 안됩니다.등록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충분한 소명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관이 비밀리에 예금과 부동산을 추적하는 일은 인권침해에 속합니다.또 생활비 보완을 위해 상가등을 구입한 경우등을 규탄해서는 안됩니다. 경제가 불안했던 시절 은행에 예금만 하고 애국자라 생각하며 가만히 참고만 있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위축된 공무원을 모두 범죄자로 보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재산이 많다고 매스컴이 도둑질한 듯한 인상을 주도록 보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당사자들이 어필할 수 있는 구제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손교수=보복적 차원이 되지 않도록 공정한 실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모든 잘못을 밝혀내려면 끝이 없습니다.한도를 정해 국민정서에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 선에서 끝내야 합니다.그 시대에 으레 할 수 있었던 일까지 지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지난 재산공개 때의 여론재판은 불가피했다고 생각합니다.여론재판의 형식을 빌리지 않았으면 이번 재산공개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국회의원들은 결코 그런 법을 통과시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박교수=김대통령의 정치지도력 덕분입니다.5공때 국회 내무위에 재산을 공개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거절당했습니다.그러나 이번에는 「인치」「인민재판」등 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도 김대통령이 선도한 탓에 분위기가 조성돼 국회에서도 일사천리로 통과됐습니다.앞으로 남은 것은 정치관계법령입니다.내년 상반기중에 통과되기만 해도 대성공입니다. ▲손교수=재산공개가 햇빛을 보기까지에는 여론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정치관계법령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러나 국민들은 아직 정치관계법령의 필요를 절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국회처럼 개혁이 불가능한 집단이 없습니다.여론이 보다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재산공개결과를 보고 느낀 점 가운데 또하나는재산세를 올려야 한다는 겁니다.세제가 잘못돼 자꾸 부동산에 투자합니다.경실련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재산세는 미국의 30분의1에 지나지 않습니다.수억원짜리 땅에 부과되는 세금이 자동차 한 대에 매겨지는 세금보다 적습니다.상속세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나라처럼 상속세가 적은 나라가 없습니다. 이번 재산공개는 진정한 질서회복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다만 공직사회의 매력이 떨어져 엘리트들이 공직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날까 조금 두렵습니다. ▲박교수=재산형성과정에 문제가 있는 공직자는 교체돼야 합니다.공직에 몸담고 있는 기간동안 재산이 늘었다면 당연히 물러나야 합니다.권력을 이용해 얻은 정보를 돈과 맞바꾸는 사례는 일체 없어져야 합니다.전별금·떡값·전관예우등 평상시에 갖다주는 돈도 근절돼야 합니다.이번 재산공개는 민과 관의 관계가 대등하게 바뀌는 구조적 개편의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손교수=관료사회가 경직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그렇게 되면 공직자들이 무사안일에 젖거나 까다로워져국민들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실개입 차단 중요 ▲박교수=차제에 말을 꺼내자면 공무원에 대한 평가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현재 공무원평가에는 성실성·청렴성등 상사들의 정실이 개입될 소지가 많습니다.일반 비즈니스맨처럼 업적에 근거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행정쇄신위에서는 올해안에 새로운 평가방법의 골격을 확정해 반드시 관철하려고 합니다. ▲손교수=정사협에서는 앞으로 재산공개에 따른 제보를 받는 문제를 검토할 계획입니다.이와함께 현재 진행하고 있는 촌지추방운동에 대한 국민적 호응도를 높이기 위해 예를 들어 정직하게 운영되는 기업에는 「정직마크」같은 것을 나눠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혁에 있어 절호의 기회입니다.김영삼씨와 같은 대통령이 나오기는 역사적으로 어렵습니다.이런 개혁의지를 가진 사람이 지난해 대선같은 엉터리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 21차 한일의원련 총회 오늘 개최

    한·일양국 새정부출범 이후 첫번째인 제21차 한일의원연맹합동총회가 2일 상오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된다. 개회식은 김윤환한국측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이만섭국회의장과 황인성국무총리의 축사,나웅배간사장의 기조연설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양측의원들은 이어 안보외교,경제과학기술,사회문화,재일한국인 법적지위 향상 등 4개분과위별로 회의를 갖고 북한핵,무역역조시정및 기술이전,인적교류 확대,과거사 정리문제등에 관해 집중 논의한다. 우리측은 과거사 정리문제와 관련,종군위안부와 사할린 교포를 위한 공동기금의 설치,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부분의 완전한 시정등을 요구할 방침이다.또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향상을 위해 일본정부가 특별법을 제정해줄 것을 촉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총회에서는 특히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구축을 위해 우리의 한글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의원들로 구성된 「21세기위원회」가 공식으로 발족된다.
  • 세제개편 좀더 과감했어야(사설)

    93년도 세제개편안은 금융실명제 조기정착을 위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광범위하게 손질된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실명제가 실시되지 않았으면 그 개정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을 소득세와 상속·증여세,그리고 법인세 등의 세율인하를 비롯하여 13개 세법을 개편,9월 정기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이번 세제개편안은 그 범위가 넓은 점과 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을 위해 교통세를 신설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현행 세제는 상속·증여세 등 일부 세목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세율이 높아 과세자료의 양성화를 오히려 저해하는 사례마저 있다.금융거래에서 실명제가 실시되지 않아 예금을 이용한 위장·변칙 상속과 증여를 가려내기가 힘들자 이러한 누수현상을 감안하여 세율을 높게 책정해 놓고 있다.그 결과 세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조세체계만 왜곡시킨 면이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그같은 변칙적이고 탈법적인 세금탈루현상이 원천적으로 봉쇄됨에 따라 세법의 왜곡현상을 시정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또한 각종 세율인하를 통해서 과세자료와 세원의 양성화를 촉진,실명제의 조기정착을 지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이번 세제개편안은 바로 실명제의 성공적인 정착을 유도하는 한편 세제의 고유기능인 재정자금 확보라는 두가지 요건을 충족하려는 데 과녁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실명제와 세수확보라는 두가지요건을 충족하려다 보니 세율인하가 미흡한 것 같다.금융실명제는 역사적인 일대개혁이다.이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한두해 재정적자도 감내할 수 있다고 본다.재정적자를 중기채권으로 충당하거나 불요불급한 세출억제로 재정적자를 줄인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세율의 확대인하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실명제의 가시적인 효과를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소득세 인하 폭을 개정안의 1∼3% 포인트에서 5%포인트 정도로 늘리고 법인세의 경우는 2% 포인트에서 3% 포인트로 과감히 확대하기를 우리는 제의한다.부가가치세는 개정안이 세율인하없이 한계세액공제제도만을 도입하고 있으나 세율을 2% 포인트 정도 내리고 한계세액공제한도는 줄이는 것이 조세체계면에서 합리적이다. 국고를 맡고 있는 재무부로서는 세수측면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때문에 세율인하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세제개편안은 앞으로 국회심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향후 입법부의 심의과정에서는 세수보다는 금융실명제 정착에 비중을 높게 두어 세율인하를 비롯하여 각종 면세점과 공제제도의 조정,조세감면의 축소 등 세법에 대한 전반적인 개정이 있기를 기대한다.
  • 전 전대통령 대 국민 발표 전문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새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계신 이때,제가 새삼 재임중의 일에 관해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게 된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 일기가 불순하여 농사마저 어려워져서 농민 뿐만아니라 많은 국민의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터에,그동안 정부가 두번이나 바뀐 6∼7년전의 일이 또 다시 시비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대해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평화의 댐 건설은 제가 현직에 있을때 대통령으로서 정책판단을 하고 결정했던 일입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난 수년간 국회의 본회의와 관련 상임위원회,특히 1988∼89년의 국회특별위원회 등에서 되풀이 다루어졌고 더러는 일부 정당차원에서의 조사도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평화의 댐 축조에 관계했던 공무원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고있으며,저 자신도 1989년 12월의 국회증언에서 말슴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정치권과 언론등에 의해 다시 평화의 댐에 관한 의혹들이 잇따라 제기되었고,저 스스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결과 많은 사실들이 왜곡인식되고 있으며,이것이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현상을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른척 할 수 만은 없고,또 그것이 저와 관계된 사안인 만큼,이 기회에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하게 된 경위와 배경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역사를 돌아볼때,조선왕조 선조임금때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고,율곡 이이선생이 10만양병을 제창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비록 국고가 다소 축이 나고 민생이 어려워졌을는지는 몰라도 왜적의 침입을 받아 수년간 전국토와 백성이 유린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파적 입장때문에 『침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잘못 보고한 통신부사의 말을 따른 결과 엄청난 국난을 자초한 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10만의 군사를 길러 대비했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침략을 당했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영세중립국도 군대는 갖고 있고,수 백년간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나라들도 만일의 외침 가능성에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53년 휴전이래 북한의 전면남침이 없었다고 해서 40년동안 매년 국가예산의 3분의1을 방위비에 투입하여,북한의 전면전도발에 대비하도록 한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판단이 단순히 「세금의 낭비」를 가져왔다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한나절 싸움에 이기기 위해 1천일에 걸쳐 군사를 기른다』(양병천일 용어일일)고 했는데,9백99일동안은 전투가 없었다고 해서 공연한 정성과 시간을 투입했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국방문제는 본질상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이 금강산주변의 산악지대에 길을 닦고 도수터널 공사를 하는 등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국내외 관계기관으로부터 처음 입수한 것은 1986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어 같은해 4월에는 북한의 방송이 금강산 발전소계획을 확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뒤 저들이 댐 공사의 착수를 공식 발표한 10월까지 수개월동안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면밀히 주시,분석한 결과 금강산댐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드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첫째 그들이 전력과 산업용수 확보를 위해 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화력발전소를 만들거나 다른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전력생산단위가 3∼4배 높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댐이 완공되면 그들 주장대로 산업용수 확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댐 건설로 인해 금강군등의 농경지가 수몰되어 22만t 정도의 미곡감산이 예상되는 바,이것은 채산성이 안맞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경제성도 채산성도 없는 댐을 만들기 위해 그 험준한 지역에 인민무력부 주도 아래 수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해서 난공사를 강행하는 뜻은 분명히 군사적 목적 때문이며,그것은 우리에게 곧 수공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10만 병력의 상호감축을 제의했는데,이것도 감축된 병력을 댐공사에 투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으며,실제 그들은 5만명을 초기공사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가 하는 사실과,또 그들이 우리에게 기상천외 하고 악랄한 도발과 위협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 해 왔는가 하는 점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일입니다. 6·25는 물론 1·21사태,남침용땅굴,아웅산 암살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 등 전쟁광이나 할 수 있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바로 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전과가 있는 북한이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인다면,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 따져보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위에 열거한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기는 커녕,모두가 우리의 자작극이라고 덮어 씌워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서둘러 착공한 금강산댐이 인위적으로 폭파되거나 사고로 무너질 경우 한강수계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그들의 선의를 믿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설혹 「수공의도가 전혀 없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1백% 확실한 것이 아니고,다만 1%의 의심이라도 남는다면,그리고 그 1%가 우리의 생존권에 위협이 된다면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대응책을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는 북한공산집단이 방송등 그들의 선전매체를 통해 『서울올림픽을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되풀이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고위당국자들이 「금강산댐을 만들어서 비상시에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시내에서 물에 잠기지 않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다」「남조선 것들이 올림픽한다고 우쭐대지만 금강산댐만 만들어 놓는 날에는 서울이 물바다가 될것」이라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귀순한 북한관리들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10여일 전에 귀순했다는 북한군 장교도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이 인민무력부에 대해 인민군의 전투 준비완성에 큰 몫을 할 금강산댐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귀순한 것은 제가 이미 퇴임하고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권안보를 위해 금강산댐의 수공가능성을 조작했다」고 비난 받는 저를 변명해주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에 와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여러 이점들을 지난 몇년간 헛되이 흘려 보냈다는 반성이 있지만,어쨌든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선진국 도약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울올림픽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 우리의 시대적 과제요 국민적 합의였습니다.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1986년에서 올림픽 때까지의 그 엄청났던 민족적 열의와 고조된분위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그라져 버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그때 우리는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연달아 반쪽 올림픽으로 치른 국제올림픽 관계자들도 혹시나 서울올림픽마저 북한의 방해때문에 실패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불안해 했습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가 붕괴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북한의 호전적이고 경직된 자세는 변함이 없지만,1986∼87년 당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이라는 찬사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던 우리와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열세에 몰린 나머지 극도의 초조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운이 뻗어 오르던 그 소중한 시기에,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침략기도를 사전에 봉쇄하지 못해서 전쟁이 일어날까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안보를 확고히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최악의 상황,있을 수 있는 모든 위협의 가능성까지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부가금강산댐에 관해 처음 발표할때 2백억t이라고 한 것은 정보입수 초기에 댐건설 현장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지형자료등을 토대로 계측한 그 지역의 용적의 최대치라고 이해했으며,나중에 외국전문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와도 일치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북한이 겉으로 내세우는 건설목적과 규모야 어쨌든 일방적 댐건설이 공유하천이용에 관한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일인 만큼 정부로서는 공사를 중단하라고 여러차례 촉구하였습니다. 금강산댐이 그들 주장대로 전력과 산업용수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우리 쪽에서 전력을 공급하는등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는 대안도 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우방 여러나라는 물론 국제연합과 세계 대댐 학회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일방적이고 무모한 댐건설을 중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제의를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하였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을 각오하고 금강산댐 공사현장을 폭격할수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피하게 정부는 대응댐의 축조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측이 공사에 관한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있어서 그 시점에서는 댐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등을 모두 추정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따라서 우리측도 대응댐에 관해 실무자사이에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응댐 공사를 2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자는 데는 쉽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1단계로는 우선 북한이 3억t 정도 가물막이 공사를 끝냈을때의 위력에 대비하는 규모로 댐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984년 홍수때의 수량 9.4억t과 북한의 가물막이댐 3억t을 합쳐 12.4억t 정도의 수량이 될 것인바,이에 대응하는데에는 평화의 댐 5.9억t과 화천댐등 기존댐의 수위조절 저수량 7억t을 합친 12.9억t으로서 최소한의 응급책은 된다고 계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단계공사는 금강산댐의 최종적인 규모를 확인해가면서 그들의 공사 진도에 맞추어 추가하여 순차적으로 추진할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1단계 공사가 끝난 상태로 있는 평화의 댐이 물을 담고있지 않은 모습으로 있어서,일부에서는 「막대한 국민성금을 삼긴채 쓸모없이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라고 비판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만,덩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것 자체가 평화의 댐의 본래의 「쓸모」인 것입니다. 발전을 하거나 산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라 유사시 북으로부터의 수공을 막는 일종의 「방벽」의 성격이 그 1차적 기능인 만큼 일반적인 댐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 대전 엑스포 현장에서도 몇시간의 호우로 인해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었고,서울의 한강변은 몇년에 한번씩 홍수가 져 큰 물난리를 겪는것이 우리 실정인 것입니다. 1984년 홍수때에는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소양댐이 범람하고 파괴되더라도 수문을 열지않고 버텨야 하느냐,아니면 서울이 물바다가 되더라도 수문을 열어야 하느냐하는 심각한 기로에 섰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2백억t이 아니라 수억t만 더 쏟아져내려와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으로부터 2백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70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서울이 마비될 정도의 피해를 입게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단계 공사를 조기에 착공한 것은 북한이 초기에는 5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1986년 가을에는 15만명의 투입을 결정하는등 공사를 급히 서두르는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동향은 단기적 군사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곧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를 갖게 한 것입니다. 당국의 분석으로는 3억t 정도의 저수량인 가물막이 댐은 북한이 5개월 안에 만들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따라서 정부로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우기이전에 최소한 10억t 안팎의 수공만이라도 막을 수 있는 5.9억t 규모의 1단계 댐을 조기착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 잘못 알려져 있듯이 공사를 하다가 흐지부지 중단된 것이 아니고,예정했던 1단계 공사는 당초 계획대로 1988년 6월에 완공된 것이며,현재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북한쪽의 공사진도에 따라서는 2단계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이 서 있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화천댐등 우리의 기존댐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평화의 댐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그것은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수공에 대비해서 우리의 댐들을 모두 비워놓고 있어야 하는데,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은 평화의 댐을 만드는 비용보다 더 많을 뿐 아니라 화천댐은 수공을 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지질학적 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듣기로는 지난해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금강산댐에 관한 교시를 발표하고 건설사령관인 인민무력부장에게 군병력의 집중투입을 지시하는등 직접 공사를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강산댐과 수공위협의 가능성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댐이 지금은 우리의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서,또 평화의 댐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에 와서는 실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때의 일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지난 일을 오늘의 상황과 기준에 서서 따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단임의 실현으로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부이양을 이룩하는 것이 저에게 부하된 최대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에서 지켜왔고 또 실천하였습니다. 평화의 댐 건설을 착공할 당시 저로서는 잔여 임기를 불과 1년 남짓 앞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시국이 다소 어려웠다고 하더라도,있지도 않은 북한의 위협을 날조해가면서까지 1년 남은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고 부도덕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저는 믿고 있고 또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6·25때 「맥아더」원수가 막료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일도 있듯이,최고결정권자는 국가의 이익과 백년대계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부분적 진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의 판단에 구애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사항도,모든 정보보고와 판단자료를 제가 검토하고 심사숙고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지시한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간절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1988년과 1989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기회에도 호소한 바 있습니다만,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은 모두 저에게 물어 주시고,이제는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미래를 지향하면서,보다 살기 좋고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데 매진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재임중 과오도 많았고 부덕하고 불민한 이 사람이지만 그 점만은 국민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성도 없는 금강산댐을 빨리 만들라고 오늘도 인민무력부장을 다그치고 있는 김일성 부자가 그 대응댐을 만든 전직 대통령의 「저의」를 거듭거듭 따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안타깝고 답답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덧붙여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제가 재임중에 정부와 공직자가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입안되어 어떻게 실행되었든,그것은 최종보고받고 결정하고 지시한 것은 대통령이었던 저였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비록 퇴임한 후인 지금에 와서도 모두 저에게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보고,건의와는 다른 내용의 결정을 내린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두환씨 감사원 회신(전문) 1,본인은 1993년 8월16일자 귀원의 「평화의 댐 감사관련 질문서를」를 받고 본인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대응방법에 대하여 원로들과도 의견을 교환한 바 있습니다.그런데 법률적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준 분들은 대통령 소속하에 있는 감사원이 대통령의 정책결정의 배경·경위와 타당성에 대하여 직무감찰을 하는 것은 헌법 제97조와 감사원법 제24조의 규정내용에 비추어 볼때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헌정사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선례가 된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귀하도주지하고 계시겠지만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행하여 지는 것이 원칙이며 평화의 댐에 관련된 정책결정 역시 관련 부처에서 작성된 문서로써 행하여 졌습니다. 따라서 귀원의 감찰활동상 필요한 자료와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보관중인 관련문서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는 지난 수년간 국회차원에서도 다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 또다시 세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칫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대통령으로서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한 배경과 경위에 대하여 모든 국민에게 아는대로 설명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별첨한 「평화의 댐에 관하여」는 이러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황병태 주중한국대사/장정연 주한중국대사/양국대사 인터뷰

    ◎황병태 주중한국대사/“여행자유화 우선 이뤄져야” 『그동안 양국간에 이뤄진 일이나 변화들을 보면 한중수교 1주년이 아니라 5주년쯤 된것 같다.교역규모나 정치외교·문화교류 등 전반적인 협력관계가 수십년간 지속돼온 선린우호국과 같은 수준이 됐다』 황병태 주중대사는 일본과 40년간 끌어 오고 있는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만 해도 중국과는 이미 「공동연구 착수」라는 합의를 끌어냈고 중국과 북한이 10여년간 밀고 당겨온 독립운동가 유해송환문제를 우리가 벌써 실현한 사실이 양국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중수교 이후 가장 두드러진 협력분야는 역시 경제라고 보는데…. ▲그렇다.올해 양국간 무역액은 1백억∼1백10억달러로 예상되고 있으며 한국의 무역흑자도 지난해 7억달러에서 올해는 1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대중국투자도 종전의 임가공 위주에서 이제 그 규모가 억달러를 넘는 등 점차 대형화하고 있다.중국 농산물의 소나기 수출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은게 사실이지만 이는 우리의 농업구조조정으로 대처할 문제다.무말랭이나 고사리,누룽지 따위가 좀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조정관세 등을 거론하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게 된다. ­중국과 남북한간 3각관계는 어떻게 정립돼가고 있나.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비핵화,평화통일,남북대화라는 3가지 원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우리의 입장과 맞아떨어진다.최근 북한의 핵문제에서 보여줬듯 북한과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다.그래서 남북한간 왕복외교(셔틀 디플로머시)를 펼 수 있는 나라도 중국밖엔 없다.그 중국이 남북한간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등소평이후 중국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전망은. ▲앞으로는 교조적인 이념투쟁이 사라지고 대신 국정수행능력이나 경륜에 따라 국가관리자가 결정될 것 같다. ­중국 지도자들은 김영삼대통령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나. ▲중국이 요즘 배금사상·부정부패 등으로 골치가 아픈 때문인지 김대통령의 청렴정치에 아주 깊은 인상을 갖고 있다.군인도 아닌 민간출신이 어떻게 40년간의 부패구조를깨부수는 용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현재 계획중인 사업은. ▲우선 양국간 여행자유가 이뤄져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다소간 문제가 있더라도 중국을 특정지역국가에서 해제토록 노력할 생각이다.연변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경제·문화적 지원을 비롯,한국상공인협회 결성,한국학교 설립,한국센터빌딩 건립 등 그야말로 할 일이 태산같다. ◎황병태 주중한국대사/“우호관계 한반도 평화 기여” 장정연 주한중국대사는 21일 『지난 한햇동안 신뢰감을 바탕으로 양국간 정치·경제등 여러 부문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며 한중수교 1년을 맞는 감회를 피력했다. 수교 1주년을 3일 앞두고 이날 명동 중국대사관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회견에서 장대사는 『항공협정등 일부 현안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부임후 1년을 맞는 소감과 지난 한해에 대한 평가는. ▲지난 1년간 양국관계는 크게 발전했다.정치면에서 양국간 신뢰감이 두터워져 과거에 쌓인 불신이 사라졌다.경제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작년 교역액은 82억달러였으며 지금도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올해말에는 1백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이같은 양국간의 선린우호관계는 한반도는 물론,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두 나라간에 현안이 있다면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항공협정·2중과세방지협정·문화협정등 아직 체결을 못한 것들이 있다.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만간 해결방안이 도출되리라 본다.사실 국가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남북한과 모두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중국의 입장은. ▲우리는 남북한 관계는 우선 당사자간의 문제라고 본다.남북사이에 대화가 잘 진전되면 관계개선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남북한 어느 쪽도 대신할 수는 없다. ▲세계에서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하나밖에 없다.대만은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며 주권국가가 아니다.이런 입장에서 한·대만간의 비공식관계유지와 경제협력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다만 한중수교 원칙에 따라 정부차원의 관계는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택민주석의 연내 방한 가능성은. ▲중국 국내 사정이 바쁘기 때문에 어렵다.한국만 방문하지 않는게 아니라 금년에는 아무 나라에도 못간다. ­최고 지도자 등소평의 건강상태와 관련해 여러가지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강택민주석이 얼마전 일본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붕총리의 건강은 회복세에 있고 등소평선생의 건강은 아주 좋다고 밝힌 바 있다.
  • 문민시대의 광복 마흔여덟돌(사설)

    광복절 아침이다.마흔여덟돌이다.상해 임시정부요인 다섯분 선열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모신지 닷새만이다.서른두해만에 참다운 문민정부가 세워진지 반년만이다.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옛 총독부건물과 한때 청와대본관으로 불리던 그 총독관저를 헐어버리기로 대통령이 결단하고 국민들이 합의한게 바로 엊그제이다. 다시한번 챙겨보는 이 일련의 새로운 일들로 하여 광복 48돌 아침은 새삼 감개가 짙지않을 수없다. ○미완성의 광복 48년전의 광복은 글자그대로 우리에게 빛을 복원해줬다.질곡과 압박에서 해방되었고 감겼던 눈이 틔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미완의 것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아직도 그것은 미완의 장으로 남아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지상의 환희였다.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국토의 단절과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윽고는 동족전쟁의 시련과 비극으로 연결됐다.광복의 오늘이 아직도 미완인 것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적 대결과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부수고 판문점을 열어 민족을 한 띠로 묶는 과업으로부터 「광복의 완성」을 시작해야한다. 하긴 이 역시 쉬운일이 아니다.서울에서 판문점,평양까지 통일기원 인간띠잇기운동이 제의됐어도 저쪽은 외면이다.그러니 이제 미완의 광복은 북쪽 당국자들의 인간성회복과 그쪽 동포들의 인권회복으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 다시 서른두해만의 문민정부를 얘기할지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민족으로 살아왔는가를 새삼 새기지 않을 수없다.온통 권위주의색채의 군사문화가 지배한 지난 30여년은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이 항상 의문의 대상이었고 그에따라 민족의 정체성마저 회의를 느낄 지경이었다.문민정부가 값지고 소중한 것은 그런 끊임없던 의문과 회의가 주권자의 판단과 선택으로 완전히 해소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돌아오신 선렬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민족으로 살아왔는가는 고국에 돌아오신 다섯분 선열들이 말없이 증언한다.그러나 그 어른들은 못난 후손들을 책망하기보다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할 것이다.선열들을 안장하면서 후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교훈을 새겨야 했는가.비록 때늦은 봉환이었고 아직도 많은 어른들이 이역땅에 누워있지만 국민들은 이번 임정요인의 봉환을 통해 이렇게들 합의했을 것이다. 첫째 임시정부의 연면하고 정당한 법통을 새 문민정부가 실질적으로 승계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정신과 법통성계승을 확인검증한 첫 가시적조처였다고 할수있다. 둘째로 민족정기와 자긍심을 바로 세우는 획기적 계기였다는 사실이다.일제하 국내외 독립투쟁에서,특히 임정요인들의 활약상은 얼마나 우뚝하고 찬연한 것이었던가.앞으로 완성될 광복사는 나라가 쇠했을때 이를 구하고자 감연히 일어서 싸웠고 죽어서도 죽지않고 민족의 정기로 살아남은 이 어른들에 의해 더욱 빛날 것이다. 다음으로 선열의 봉환은 과거 친일의 잔재를 일소하는 계기도 되었다는 점이다.나라를 빼앗겼음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광복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살게했다는 사실이 아닐수 없다.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으나 이들은 일제하에서 쌓은 배경으로 흔들림이 없었다.일제잔재 청산의 대상들인 것이다. ○다시 쓰는 현대사 지금은 국립묘지에 편히 잠드신 선열 박은식선생은 그 명저 「한국통사」의 서문에서 『국혼은 살아있다』고 썼고 그것은 이제 그의 비명의 한 구절이 되어있다.말그대로 국혼은 살아있어 분단속에서도 민족은 살아숨쉬고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문민정부는 살아움직인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광복현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과거의 사실이 진실로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작업은 역사학자의 본령만은 아니다.그것은 전 민족의 몫이어야 한다.지나간 근 50년동안 타의에 의한 광복을 자의에 의한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우리에겐 역사에 대한 강요된 논리나 주장을 감연히 거부할 용기도 부족했다.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지적한바 「제2의 광복운동」으로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역사탐색으로서 「있었던 그대로」,「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실상을 찾아내어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일에 나서야한다.그리하여 국사를 비롯한 모든 교과서에 광복현대사 굽이굽이마다 왜곡되고 굴절된 민감한 부분을 새로 쓰고 이 사실과 함께 문민시대의 의미와 미래지향의 정신을 넓고 깊게 투영시켜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광복의 의미를 되살리고 완성하는 길은 이 시대의 정신이기도 한 변화와 개혁의 성공을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통일을 성취하는 일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다.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때 애국선열들이 시작한 광복운동은 비로소 대단원을 이루게될 것이다. 모든일의 성취가 결국 사람에 달렸다면 국권상실과 민족분단의 지난 세기를 민족번영과 통일의 새로운 세기로 바꾸는 책임 역시 국민에게 있다.그런 점에서도 2년후에 맞을 광복 50주년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역정에 한 획을 긋는 해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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