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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 재난과 문화재, 재산권과 시민권/이재연 사회2부 기자

    [오늘의 눈] 재난과 문화재, 재산권과 시민권/이재연 사회2부 기자

    지난해 봄 영국 런던에서 짧게 어학 공부를 했다. 중심지인 러셀스퀘어 바로 길 건너의 5층짜리 학원 건물은 빅토리아 양식으로, ‘200년이 다 돼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라며 학원 자랑이 대단했다. 하지만 역사 따위와 별개로 일상은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내부 인테리어·시설을 거의 원형대로 보존한 탓에 계단은 가파르고 엘리베이터는 겨우 4명이 들어서면 꽉 찼다. 무엇보다 건물 전체에 에어컨이 없었다! 기상이변으로 때 이른 고온현상이 찾아왔지만, 사람 열기로 후끈한 교실에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켜는 것뿐이었다. 불평할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다 같이 감수해야지. 그래도 우린 자랑스러워”였다. “런던에는 이런 건물이 많다”는 설명까지 곁들여서. 하루는 수업 중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렸다. 즉시 선생님 인도 아래 학생들이 일어나더니 일사불란하게 비좁은 계단을 타고 대피했다. 우왕좌왕하거나 뭉그적대는 기색도 없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하는 화재대피훈련. 오리엔테이션 때 “놀라지 말고 줄 맞춰서 건물 바깥으로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예외는 없으니 반드시, 꼭 나오라”는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막상 닥치니 귀찮았다. 구시렁대며 빠져나왔더니 눈앞 풍경이란. 반별로 일렬로 맞춰 서 있고, 살수차를 끌고 온 소방관들은 학생들과 ‘1, 2, 3, 4…’ 머릿수를 세고서 대피 인원이 맞는지 교사마다 일일이 확인을 했다. 연습이지만 실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소방훈련 때 건물 안 모든 인원을 5분 안에 대피시켜야 하고, 모두 대피했다는 확인 보고까지 마쳐야 한다”고 했다. 100년 이상 오래된 건물이 많은 영국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상황이 낯선 외국인에게 한 소방관이 윙크하면서 “런더너들에게는 시내 건물 85%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던 350년 전 런던 대화재의 트라우마가 세대를 지나도 생생히 전수됐다”며 “그래서 학교 재난 교육부터 철저하다”고 알려 준다. 태풍 ‘차바’로 부산의 대표적 부촌 해운대 마린시티가 바닷물이 넘쳐 초토화됐다. 조망권과 집값 하락을 이유로 일부 주민·상인들이 반대하면서 애초 3m였던 방수벽이 1.2m까지 낮아진 게 주원인이라고 한다. 부산시가 이곳에 높이 7m짜리 방파제를 예산 665억원을 들여 지을 예정인데 ‘주민 스스로 반대한 무방비 지역에 왜 혈세를 투입하느냐’는 반론도 만만찮은 것 같다. ‘불편하기 짝이 없던’ 런던 생활과 영국인들이 불쑥 생각났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송파구 ‘한성백제’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주민 반대로 불투명한 상황이다. 왕궁·성터 등 역사적 고증이 불충분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결국 논란은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로 귀결된다. 이미 20여년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집값 인상 혜택을 못 봤는데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방 행정은 어림없는 시대다. 하지만 재산권을 중심에 놓은 시민권의 범위 혹은 그 정당성의 경계에 대해 우리는 항상 큰일을 치르고 나서야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이웃과의 동거, 과거와의 동거를 택하는 격 높은 시민, 설득 잘하는 정부가 부럽다. oscal@seoul.co.kr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연극·뮤지컬

    [이주의 문화 레시피] 연극·뮤지컬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김은성 작가의 신작. 뜻밖의 사고로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슬픔에 빠져 절필했던 소설가가 3년 만에 다시 펜을 잡고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통해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 남은 이의 부채 의식 등 우리 사회가 가진 깊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27일~10월 22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전석 3만원. (02)708-5111. ●뮤지컬 ‘곤투모로우’ 고종 재위 당시 역사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개화기 조선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김옥균, 홍종우 등 혁명가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누아르’ 뮤지컬.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의 ‘도라지’가 원작이다. 이지나 연출, 김수로, 김민종, 김무열 등 출연. 10월 23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 6만~13만원. 1577-3363.
  •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동심과 휴식, 그 뒤엔 평생 ‘관람용’으로 살다 죽는 동물들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동심과 휴식, 그 뒤엔 평생 ‘관람용’으로 살다 죽는 동물들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된 지금, 동물원은 여전히 신기하고 재밌는 곳이다. 호랑이·사자 등 맹수부터 해양 동물까지, 책이나 텔레비전 또는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동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마치 다른 세계에 당도한 듯한 신기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동물원의 존재가 한없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동물보호단체는 동물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거나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행위 자체가 동물학대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생생한 교육이 되고 어른에게는 작은 휴식을 가져다주는,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본성과 자유를 박탈당한 공간, 동물원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자. ●동물원의 오랜 역사 인류의 농경사회가 시작된 뒤 인간은 더욱 높은 생산성을 위해 동물의 힘을 필요로 했다. 농경사회의 발달로 소유물의 개념이 생겨난 뒤 인간에게 동물 역시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더 나아가 권력의 상징으로까지 변모했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은 기원전 3500년경 고대 이집트 수도였던 히에라콘폴리스의 동물원이 꼽힌다. 히에라콘폴리스 지역의 한 터에서만 코끼리와 원숭이, 하마 등 112종의 동물 뼈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지역이 고대 이집트 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인 만큼 동물원은 지배계층의 향락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원전 275년 로마에서는 동물끼리 시합을 하거나 전투사와 동물이 싸우는 쇼가 인기를 끌었고, 15세기 들어 유럽에서는 동물의 사육과 전시를 동시에 하는 현대 개념의 동물원이 선을 보였다. 18세기에는 동물을 끌고 지방 곳곳을 순회하며 보여 주는 서커스단이, 19세기 중반에는 상업적인 수익을 위한 동물원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동물원의 진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처참하고 잔혹한 문화를 낳았다. 야생에서 살아가도록 태어난 동물들의 경우 인간에게 포획당한 뒤 비좁은 우리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기 일쑤고, 일부 야생동물은 태생과 다르게 아예 동물원 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관람용’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인간의 호기심과 소유욕은 더 많은 동물의 감금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멸종되거나 멸종위기를 맞이해야 하는 동물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전쟁터에 버려진 동물원부터 옥상 동물원까지 한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인식한 노예제도는 거의 사라졌지만, 하나의 동물이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은 여전히 팽배하다. 마치 물건처럼 동물을 돈으로 사고팔거나 돈을 받고 이를 공개하는 행위 역시 그러한 인식이 낳은 결과 중 하나다. 국적을 막론하고 동물과 동물원이 상업적 수단으로 인정받으면서 동물원의 수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는데, 그중에는 인간에게 포획돼 갇힌 것도 모자라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싸움에 휘말려 종말을 맞이한 곳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위치한 동물원이다. 2007년 개장한 칸유니스 동물원은 가자지구 내에 위치한 5곳의 동물원 중 한 곳이다. 170만명의 주민에게 즐거움을 주던 이 동물원은 얼마 전 ‘세계 최악의 동물원’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폭격과 이에 맞선 무장 조직 하마스의 전쟁으로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동물들이 그대로 방치돼 상당수가 굶어 죽은 것이다. 동물원 곳곳에는 죽은 동물의 사체가 미라처럼 굳은 채 버려져 있는데, 가자지구의 동물원 5곳 중 또 다른 한 곳인 알비산 동물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내전으로 버려진 이 동물원의 동물들은 극심한 배고픔과 트라우마에 몸부림쳤다. 내전과 굶주림에 지친 원숭이 한 마리가 이미 죽어 부패가 진행된 또 다른 원숭이 동족 사체 곁에서 넋을 놓고 있거나 일부가 무너진 우리 안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자의 모습 등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슷한 참상은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국내 한 지방 백화점의 옥상 동물원을 담은 동영상 한 편은 인간의 호기심과 욕심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 주면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옥상 동물원은 백화점 등 쇼핑센터가 고객 유치를 위해 제공하는 볼거리로서 현재도 유통업계에서 자주 활용되는 마케팅 방식 중 하나다. 당시 공개된 동영상은 좁은 옥상 동물원의 우리 안에서 사슴 한 마리가 머리를 찧거나 흔드는 행동을 반복하고 자신의 분변을 먹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것을 좁고 단조로운 공간에서 동물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일으키는 정신병적 증세라고 단언했다. 동물보호단체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국내에는 관련 법조항이 없어 처벌도 어려운 실정이다. ●동물권 그리고 동물원의 미래상 동물에게도 인권과 유사한 ‘동물권’이 있다. 호주 철학자 피터 싱어가 제시한 개념인 동물권은 동물이 그저 실험용이나 식량, 향락을 위한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되며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식 습성을 무시한 환경의 동물원에 사는 동물이라면 동물권을 침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물원의 아픈 현실은 여전하지만 동물권의 확대와 함께 유의미한 움직임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5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물원은 동물과 역사적 건축물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동물원 폐쇄를 결정했다. 대신 이곳에 친환경 생태공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은 “동물들이 자연이 아닌 건물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면서 동물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내겠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국내에서도 전주동물원이 동물들의 서식환경을 고려해 생태동물원으로 탈바꿈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동물의 습성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이를 통해 다방면에서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무작정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시 생명체인 동물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 채 호기심으로 소유하려 한다면, 그것은 동물을 향한 ‘갑질’에 불과하다. 동물원이 동물 삶의 종착지가 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겠다. huimin0217@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인간은 창살 속 동물 앞에 떳떳한가

    [송혜민의 월드why] 인간은 창살 속 동물 앞에 떳떳한가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된 지금, 동물원은 여전히 신기하고 재밌는 곳이다. 호랑이‧사자 등 맹수부터 해양 동물까지, 책이나 텔레비전 또는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마치 다른 세계에 당도한 듯한 신기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동물원의 존재가 한없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동물보호단체는 동물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거나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행위 자체가 동물학대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생생한 교육이 되고 어른에게는 작은 휴식을 가져다주는,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본성과 자유를 박탈당한 공간, 동물원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자. ◆동물원의 오랜 역사 인류의 농경사회가 시작된 뒤, 인간은 더욱 높은 생산성을 위해 동물의 힘을 필요로 했다. 농경사회의 발달로 소유물의 개념이 생겨난 뒤, 인간에게 동물 역시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더 나아가 권력의 상징으로까지 변모했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은 기원전 3500년 경 고대 이집트 수도였던 히에라콘폴리스의 동물원이 꼽힌다. 히에라콘폴리스 지역의 한 터에서만 코끼리와 원숭이, 하마 등 112종의 동물 뼈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지역이 고대 이집트 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인 만큼, 동물원은 지배계층의 향락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원전 275년 로마에서는 동물끼리 시합을 하거나 전투사와 동물이 싸우는 쇼가 인기를 끌었고, 15세기 들어서 유럽에서는 동물의 사육과 전시를 동시에 하는 현대 개념의 동물원이 선을 보였다. 18세기에는 동물을 끌고 지방 곳곳을 순회하며 보여주는 서커스단이, 19세기 중반에는 상업적인 수익을 위한 동물원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동물원의 진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처참하고 잔혹한 문화를 낳았다. 야생에서 살아가도록 태어난 동물들의 경우 인간에게 포획당한 뒤 비좁은 우리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기 일쑤고, 일부 야생동물들은 태생과 다르게 아예 동물원 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관람용’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인간의 호기심과 소유욕은 더 많은 동물들의 감금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멸종되거나 멸종위기를 맞이해야 하는 동물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전쟁터에 버려진 동물원부터 비좁은 옥상 동물원까지 한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인식한 노예제도는 거의 사라졌지만, 하나의 동물이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은 여전히 팽배하다. 마치 물건처럼 동물을 돈으로 사고팔거나 돈을 받고 이를 공개하는 행위 역시 그러한 인식이 낳은 결과 중 하나다. 국적을 막론하고 동물과 동물원이 상업적 수단으로 인정받으면서 동물원의 수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인간에게 포획돼 갇힌 것도 모자라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싸움에 휘말려 종말을 맞이한 곳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위치한 동물원이다. 2007년 개장한 칸 유니스 동물원은 가자지구 내에 위치한 5곳의 동물원 중 한 곳이다. 170만 명의 주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던 이 동물원은 얼마 전 ‘세계 최악의 동물원’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폭격과 이에 맞선 무장 조직 하마스의 전쟁으로 수천 여 명의 주민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동물들이 그대로 방치돼 상당수가 굶어 죽은 것이다. 동물원 곳곳에는 죽은 동물의 사체가 미라처럼 굳은 채 버려져 있는데, 가자지구의 동물원 5곳 중 또 다른 한 곳인 알-비산 동물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내전으로 버려진 이 동물원의 동물들은 극심한 배고픔과 트라우마에 몸부림 쳤다. 내전과 굶주림에 지친 원숭이 한 마리가 이미 죽어 부패가 진행된 또 다른 원숭이 동족 사체 곁에서 넋을 놓고 있거나, 일부가 무너진 우리 안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자의 모습 등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슷한 참상은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해 국내의 한 지방 백화점의 옥상 동물원을 담은 동영상 한 편은 인간의 호기심과 욕심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면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옥상 동물원은 백화점 등 쇼핑센터가 고객 유치를 위해 제공하는 볼거리로서 현재도 유통업계에서 자주 활용되는 마케팅 방식 중 하나다. 당시 공개된 동영상은 좁은 옥상 동물원의 우리 안에서 사슴 한 마리가 머리를 찧거나 흔드는 행동을 반복하고 자신의 분변을 먹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것을 좁고 단조로운 공간에서 동물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일으키는 정신병적 증세라고 단언했다. 동물보호단체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국내에는 관련 법조항이 없어 처벌도 어려운 실정이다. ◆동물권 그리고 동물원의 미래상 동물에게도 인권과 유사한 ‘동물권’이 있다. 호주 철학자 피터 싱어가 제시한 개념인 동물권은 동물이 그저 실험용이나 식량, 향락을 위한 도구로 쓰여져서는 안되며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식 습성을 무시한 환경의 동물원에 사는 동물이라면 동물권을 침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물원의 아픈 현실은 여전하지만, 동물권의 확대와 함께 유의미한 움직임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5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동물원은 동물과 역사적 건축물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동물원 폐쇄를 결정했다. 대신 이곳에 친환경 생태공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장은 “동물들이 자연이 아닌 건물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면서 동물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내겠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국내에서도 전주동물원이 동물들의 서식환경을 고려해 생태동물원으로 탈바꿈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동물의 습성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이를 통해 다방면에서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무작정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시 생명체인 동물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 채 호기심으로 소유하려 한다면, 그것은 동물을 향한 ‘갑질’에 불과하다. 동물원이 동물 삶의 종착지가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다. 사진=ⓒerinassan / 포토리아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7살 딸에게 ‘소총 AR-15’ 사용법 가르치는 아빠 논란

    사망자 49명을 포함 무려 100명의 사상자를 낸 올랜도 참사의 후폭풍이 거센 가운데 최근 어린 딸에게 소총 AR-15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아빠의 모습이 영상으로 공개됐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는 7살 소녀가 AR-15를 사격하는 영상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7살 소녀가 거쉬 컨츠먼에게 AR-15 사격법을 가르치다'(Seven-Year-Old Little Girl Shows Gersh Kuntzman How To Shoot AR-15)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영상에는 한 소녀가 소총을 사격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소녀 뒤에서 사용법과 사격법을 자상하게 가르치는 사람은 놀랍게도 아빠다. 이 영상은 2년 전 촬영된 것으로 다시 유튜브에 공개된 것은 제목에 포함된 거쉬 컨츠먼의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이다. 미국 뉴욕데일리뉴스 기자인 컨츠먼은 지난 15일(현지시간) AR-15를 직접 사격해 본 후기를 기사로 내보냈다. 컨츠먼은 "올랜도 참사로 야기된 총기 소지에 관한 주요 논점 중 하나는 AR-15같은 강력한 소총 판매"라면서 "직접 사격해 본 AR-15는 매우 끔찍하고 위협적이며 마치 바주카포를 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평했다. 이어 "사격 후 타박상을 입었으며 적어도 1시간 동안 일시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AR-15가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위협적인 무기임을 설명한 것. 곧 유튜브에 공개된 이 영상은 7살 소녀도 쏘는 총이라는 사실로 컨츠먼 주장을 반박한 셈이다. 이른바 ‘테러리스트 소총’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AR-15는 우리에게 익숙한 M16 소총의 민간용 버전이다. 총기제조사인 아말라이트가 1958년 개발한 AR-15는 정확도와 살상력이 뛰어나 사냥용으로 인기가 높으며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 약 400만정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강한 살상력 때문에 민간용의 경우 기능이 일부 제한돼 있으나 간단한 개조를 통해 자동사격과 30발 들이 탄창을 장착할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미국 내 6개 주는 AR-15의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테러범인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오마르 마틴(29)이 사용한 총기는 당초 보도된 AR-15가 아닌 이와 유사한 성능의 시그 소어 MCX(Sig Sauer MCX)로 알려졌다. 딸에게 사격법을 알려주는 이 영상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나 미국 내에서는 찬성하는 의견도 많다. 테러와 각종 위협에 대응하는 최고의 방어능력을 일찌감치 자식에게 교육시켜 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 많은 사람들이 총기 소지에 찬성하는 이유는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억압받았던 역사적 트라우마와 다양한 민족이 혼합된 문화에 기인하는데 총기 소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문제의 영상을 아동학대급으로 비난하고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미국이 총기 소지 자유국?… 수정헌법 2조 ‘무장 권리’의 함정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미국이 총기 소지 자유국?… 수정헌법 2조 ‘무장 권리’의 함정

    미국에서 또 한번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12일 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한 게이 클럽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범인을 포함해 총 50명이 사망했다. 이는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사망자 수인 32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동성애자를 겨냥한 혐오범죄인지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기획 테러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총기 규제와 관련한 논란에 또다시 불을 지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총기 규제를 둘러싼 미국 내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에서도 총기 소지의 찬반 여부는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핵심 이슈 중 하나일 정도다. 미국의 상당 세력들이 총기 소지에 찬성하는 이유는 다양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억압받았던 역사적 트라우마다. 공권력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와 국왕, 상비군으로부터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대비책이 무기 소유의 권리와 민병대였던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혼합된 문화 역시 미국이 총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피부색부터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융화되는 과정에서 논쟁과 이견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조된 불안감을 상쇄하고자 등장한 도구 중 하나가 총기인 셈이다. ●무장 도구는 주법 따라 달라… 총기류 불허하기도 많은 외국인이 미국을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로 인식하는 근거는 헌법에 있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 1조는 ‘종교와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청원의 권리’ 이며, 제2조는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 즉 무장의 권리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 국적을 소지한 미국 국민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있도록 무장하는 행위가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사실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용어가 주는 ‘함정’이 있다. 무장할 수 있는 권리에 해당하는 ‘무장’에 반드시 총기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수정헌법을 포함하는 연방법과 각 주마다 각기 제정한 주법에 따라 법률을 집행한다. 무장의 권리는 연방법에 해당되지만, 법적으로 허용하는 무장의 도구, 즉 무기의 종류는 주법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A주에서는 총기 중에서도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총기류만 무장이 가능한 도구로 인정하는 반면, B주에서는 무장의 권리를 인정하기는 하나 총기류는 일절 사용을 불허하는 대신 전기 충격기나 가스분사기 등의 도구만 허가하는 것이다. 국내를 예로 들자면 호신용 전기충격기 혹은 작은 주머니칼을 휴대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제재를 받지는 않는데, 이 역시 큰 의미에서 무장의 권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국가는 헌법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장’이라는 범위와 정의가 국가마다 다를 수 있으며 미국의 경우는 주마다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수정헌법 제2조가 가진 진짜 의미는 총기를 가질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라고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단체들은 다소 다른 목소리를 낸다. 총기 소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세력 중 대표적인 단체는 미국총기협회(NRA)다. 올랜도 클럽 사건이나 버지니아공대 사건 등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에 불이 붙었는데, NRA는 이때마다 총기 소유의 정당성을 적극 대변해 왔다. NRA는 수정헌법 제2조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주창해 왔다. 수정헌법 제2조는 곧 총기를 포함한 무기 소유권과 맥을 같이하며, 개인이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절대적인 기본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NRA 주장의 저변에는 총기 사용을 불허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가 총기 소지를 허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피해보다 더 크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총기에 희생된 미국인, 전쟁 사망자 수 넘어서 반면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기에 의한 사상자 수의 증가를 근거로 내세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1968년 이래 총기로 인한 모든 미국인 사망자 수가 미국이 역사상 참전한 모든 전쟁 사망자 수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또 올해 상반기까지 총기로 인해 사망한 미국인은 3만 5000명에 달하며, 30여년 사이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총기 소지 허용의 목소리와 규제 강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상충하는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일명 ‘묻지마 범죄’와 허술한 총기 관리로 안타까운 목숨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당장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보긴 힘들지라도, 수정헌법 제2조를 포함해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이에 따른 적정한 대응을 펼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huimin0217@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미국이 정말 ‘총기 소지’ 자유국가라고?

    [송혜민의 월드why] 미국이 정말 ‘총기 소지’ 자유국가라고?

    미국에서 또 한 번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시간으로 12일 밤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한 게이 클럽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범인을 포함해 총 50명이 사망했다. 이는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사망자 수인 32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동성애자를 겨냥한 혐오범죄인지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기획 테러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총기 규제와 관련한 논란에 또 다시 불을 지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총기 규제를 둘러싼 미국 내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에서도 총기 소지의 찬반 여부는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핵심 이슈 중 하나일 정도다. 미국의 상당 세력들이 총기 소지에 찬성하는 이유는 다양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억압받았던 역사적 트라우마다. 공권력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와 국왕, 상비군으로부터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대비책이 무기소유의 권리와 민병대였던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혼합되어진 문화 역시 미국이 총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피부색부터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융화되는 과정에서 논쟁과 이견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조된 불안감을 상쇄하고자 등장한 도구 중 하나가 총기인 셈이다. 이후 총기 소지와 관련한 이슈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미국을 오가야 하는 수많은 외국인에게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됐다. ◆美 수정헌법 제2조가 가지는 진짜 의미 많은 외국인이 미국을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나라로 인식하는 근거는 헌법에 있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 1조는 ‘종교와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청원의 권리’ 이며, 제2조는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 즉 무장의 권리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 국적을 소지한 미국 국민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있도록 무장하는 행위가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사실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용어가 주는 ‘함정’이 있다. 무장할 수 있는 권리에 해당하는 ‘무장’에 반드시 총기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은 수정헌법을 포함하는 연방법과 각 주마다 각기 제정한 주법에 따라 법률을 집행한다. 무장의 권리는 연방법에 해당되지만, 법적으로 허용하는 무장의 도구 즉 무기의 종류는 주법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A주에서는 총기 중에서도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총기류만 무장이 가능한 도구로 인정하는 반면, B주에서는 무장의 권리를 인정하기는 하나 총기류는 일체 사용을 불허하는 대신 전기 충격기나 가스분사기 등의 도구만 허가하는 것이다. 국내를 예로 들자면 호신용 전기충격기 혹은 작은 주머니칼을 휴대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제재를 받지는 않는데, 이 역시 큰 의미에서 무장의 권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국가는 헌법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장’이라는 범위와 정의가 국가마다 다를 수 있으며 미국의 경우는 주마다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수정헌법 제2조가 가진 진짜 의미는 총기를 가질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라고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단체들은 다소 다른 목소리를 낸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총기 소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세력 중 대표적인 단체는 미국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NRA)다. 올랜도 클럽 사건이나 버지니아공대 사건 등이 발생할 때마다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에 불이 붙었는데, NRA는 이때마다 총기 소유의 정당성을 적극 대변해 왔다. NRA는 수정헌법 제2조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주창해왔다. 수정헌법 제2조는 곧 총기를 포함한 무기 소유권과 맥을 함께하며, 개인이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절대적인 기본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 NRA 주장의 저변에는 총기 사용을 불허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가 총기 소지를 허용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보다 더 크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반면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기에 의한 사상자 수의 증가를 근거로 내세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1968년 이래 총기로 인한 모든 미국인 사망자 수가 미국이 역사상 참전한 모든 전쟁 사망자 수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또 올해 상반기까지 총기로 인해 사망한 미국인은 3만 5000명에 달하며, 30여 년 사이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총기소지 허용의 목소리와 규제 강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상충하는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일명 ‘묻지마 범죄’와 허술한 총기 관리로 안타까운 목숨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당장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보긴 힘들지라도, 수정헌법 제2조를 포함해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이에 따른 적정한 대응을 펼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 fotofabrika /포토리아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사설] 아베, 전범재판 역사까지 뒤집겠다니

    일본 집권 세력인 아베 신조 총리와 자민당의 몰(沒)역사관과 역사 왜곡 행태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패전의 역사를 손보겠다고 나섰다. 자민당 창당 60주년을 맞아 아베 총리 직속으로 ‘전쟁 및 역사인식 검증위원회’를 출범시켜 청일전쟁부터 미 군정까지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2차대전 전범 재판인 극동국제군사재판, 다시 말해 도쿄재판도 포함돼 있다. 말이 좋아 검증이지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고 미화하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도쿄재판은 뉘른베르크재판과 함께 2차대전 전후 처리의 양대 축이다. 침략전쟁을 지휘한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 28명이 기소돼 재판 도중 죽거나 정신 이상이 생긴 3명을 제외한 25명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범국인 일본의 정·관계 및 군부 인사들의 전쟁범죄 책임을 엄중하게 물은 것이다. 결국 도쿄재판을 검증하겠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도쿄재판은 승전국에 의한 ‘정치적 단죄’에 불과하다”는 우익들의 그릇된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긴 아베 총리조차 정부 대변인이던 관방장관 시절 A급 전범에 대해 “일본이 주체적으로 재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강변했으니 그들의 그릇된 인식을 미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민국을 비롯해 일제 침략전쟁의 최대 피해자들인 아시아 국가들도 도쿄재판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피해 당사자들을 배제한 채 진행된 도쿄재판은 침략 전쟁 수괴인 히로히토 일왕과 일본 정부를 면책시키고 개인의 책임만 물은 ‘형식적인 재판’에 불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라도 역사적 단죄가 이뤄져야 한다. 검증위원회 출범은 아베 정권의 끝없는 역사 도발의 연장선이다. ‘공부 모임’에 불과할 뿐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뻔하다. 역사를 왜곡해서라도 패전국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이른바 ‘정상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속셈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일본은 역사 왜곡에 대한 국제사회의 냉혹한 시선을 외면해선 안 된다. 가까스로 개선의 첫발을 뗀 한·일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상들끼리 합의한 위안부 문제 해결은 미적거리고, 오히려 침략의 역사마저 지우려는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 [비즈 in 비즈] 안에서 제 평가 못 받는 해양강국 유감

    [비즈 in 비즈] 안에서 제 평가 못 받는 해양강국 유감

    지난달 30일 우리나라는 ‘세계 해양 대통령’이라 불리는 국제해사기구(IMO)에 첫 한국인 사무총장을 56년 만에 배출했습니다. 주인공인 임기택 부산항만공사 사장은 다음날 주요 중앙일간지 1면을 장식하며 일약 스타가 됐습니다. 런던발 낭보가 전해지던 그날 저녁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내부 알림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투표 결과를 지켜보며 짜릿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한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로 모두 힘들었는데 희망을 본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실제 우리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합니다. IMO는 전 세계 해운·조선업의 기술과 안전규범을 총괄하고 해양 환경보호·물류·보안 등 국제규범을 제·개정하는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해운·조선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향후 주력 수출 품목인 우리나라 해운·조선 분야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블루오션으로 꼽히는 해상 e-내비게이션, 극지 개발, 해양 생물다양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업 기회를 가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해양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땠을까요. 전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적한 정부 내 ‘임기택 니까짓게’ 발언을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해양을 바라보는 국내외 시각은 판이하게 다른 느낌입니다. 해외에서는 조선·해운·항만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을 최고로 꼽으며 세계 10대 해양 강국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수부에 따르면 조선 분야는 2013년 수주액 기준 세계 1위(411억 달러), 해운은 미국·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을 제치고 5위(8300만t), 부산항은 컨테이너항만 물동량 기준 5위(1769만 TEU)로 주요 지표들이 최상위권입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해양 관련 이슈들이 저평가되거나 우선순위가 사회간접자본, 부동산, 금융 등에 밀려 해양 정책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해양 정책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해당 부처의 역량 부족이거나 미래 먹거리인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육지 중심 사고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등 잊을 만하면 터지는 해양 안전사고로 인한 정부 정책 불신 등 국민적 트라우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IMO 사무총장 선출을 계기로 정부를 비롯해 해양에 대한 일그러진 인식을 바꾸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이슈&논쟁] 지역감정 조장 발언 제재 추진

    [이슈&논쟁] 지역감정 조장 발언 제재 추진

    주요 선거 때마다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 등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방안이 추진돼 찬반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새누리당 진영 의원은 특정 지역·사람을 비하하거나 모욕할 경우 최대 2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와 별도로 새정치민주연합도 같은 취지의 입법 절차를 밟고 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혐오표현은 이미 형법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으로 처벌 가능하며,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종북’ 등 혐오표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싸움과 사회적 분열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주장한다. 지역감정 조장 발언 제재 입법화를 둘러싼 찬성과 반대 의견을 들어봤다. [贊] “사회적 분열 막기 위해 입법 필요” 박지웅 법무법인 민본 변호사 독자들도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폄하발언이 어떤 자리에서건 한번씩은 오가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지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다. ‘빨갱이’, ‘종북’ 역시 마찬가지다. 약간의 진보적인 사회 방향에 대한 의사를 내비치면 ‘빨갱이’, ‘종북’이라고 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다. 분단 60년,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의 한 단면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표현 중 숨 막히게 하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면 ‘종북’과 ‘지역감정’이다. 특정 정치·사회적 행위에 대해 종북이라 낙인찍으면 합리적인 논의는 끝나고 감정싸움만 남는다. 지역색도 마찬가지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최근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지역 폄하 발언, 분단사회의 감정을 악화하는 종북 발언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일베(일간베스트의 줄임말) 등에서의 혐오표현들이 일반인에게 끼치는 사회적 악영향이 심히 크다는 것이다. 나아가 선거에서의 특정지역에 대한 폄하발언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은 새누리당 진영 의원에 의해 발의됐다. 필자는 입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한다. 우선 ‘종북’ 또는 ‘지역감정조장’의 표현행위가 갖는 차별적 언행 내지는 혐오표현을 통해 얻고자 하는 사회적 분열의 해악은 심히 크다.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우리 헌법 제21조 4항에서는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고 있다. 표현행위가 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넘어, 사회 공동체의 통합적 질서를 해하는 경우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표현행위보다 중요한 민주주의·공화주의적 사회질서를 지켜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의 국가들이 ‘혐오표현’이 인종·민족·국가적 갈등과 세계대전 참사의 주범이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해서 규제를 하고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공직선거에서의 종북·지역감정 발언은 선거구민 유권자의 눈을 가린다. 지역과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해 온 괜찮은 공직후보자 역시 종북이나 지역감정의 논쟁 프레임에 갇혀버리면 선출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러한 표현행위에 대한 처벌이 현행법상으로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이미 사적으로 특정인을 지목한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형법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으로 처벌한다. 다만 형법은 정치인이나 공적 관심사에 대한 비판행위를 명예훼손이나 모욕으로 함께 처벌하고 있어서 문제다. 새로운 입법은 혐오표현으로서 해악이 큼에도 특정 대상을 지목하지 않아 처벌을 회피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아 온 혐오 표현행위에 대해서 제재를 가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미진했던 논의를 진전시키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표현의 자유 위축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명예훼손이나 모욕행위에 대한 형벌을 두고 있지만 이번 입법으로 실제로는 처벌되지 않을 표현임에도 과거의 선례들에 따라 시민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 또 표현은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혐오표현의 대상과 범위의 문제 역시 분명하게 규정돼야 한다. 어떠한 표현이 혐오표현인가 명확히 규율하지 않으면 법률 명확성 원칙 위반으로 위헌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온갖 트라우마로 뒤덮인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발언들이 이제 힘을 잃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가장 좋은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에 따라 이와 같은 표현행위가 힘을 잃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 정도의 제재를 가하는 것은 사회의 합리적인 선택이자 결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역분열·이념대립이란 사회적 질병에 필요한 것은 상처를 아물게 할 연고이지, 상처를 덧나게 할 손톱은 아닌 것이다. [反] “표현자유 침해 소지… 처벌 무리”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역감정 조장발언에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특정 지역이나 사람을 비하하거나 모욕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다음에 설명할 국제인권기준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선결되지 않는 한 폐기돼야 한다. 우리나라가 가입한 유엔자유권규약의 유권해석기관인 유엔자유권위원회는 2011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반논평 제34호를 통해 명예훼손 규제 등에 대해서 “진위 판명이 불가한 명제에 대해서는 규제가 적용되어서는 아니 되며 형사처벌은 특히 그러하다”고 밝혔다. 진위 판명이 불가한 명제란 바로 견해와 감정의 표현을 말한다.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편 유엔자유권규약의 제20조는 ‘인종,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을 선동하는 발언(이하 인종차별선동발언)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감정이나 견해의 표명에 대한 민형사적 규제는 지양되어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인종차별선동발언은 규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감정 조장발언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기 이전에 첫 번째로 모욕죄부터 폐지돼야 한다. 우리나라 모욕죄는 검찰이 기소에 개입해 최고 징역 1년까지 부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제도다. 이는 감정표현에 대한 형벌규제에 해당되며 앞서 언급한 유엔자유권위원회의 일반논평 34호를 정면으로 위반한다. 모욕죄는 타인에게 분노할 자유를 파괴한다. 둘째, 혐오표현 규제를 형사벌로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자유권규약 20조를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인종차별선동발언에 대해서만 형사벌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무관한 지역혐오표현 규제를 형사벌로 만들면 일반논평 34호를 위반한다. 셋째, 우리나라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차별발언이 차별행위로 이어질 ‘명백하고 임박한 위험’이 있는 표현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인종차별선동발언 외의 감정표현에 대한 규제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해석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감정표명에 대한 민형사 규제 모두에 반대하는 일반논평 34호를 감안하면 혐오를 드러내는 모든 표현을 비형사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해석해서도 안 된다. 유엔자유권규약이 특별히 인종차별선동발언에 대한 규제를 요구한 이유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이 인종학살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인종차별을 선동하는 발언은 실제 차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장애인 학생을 계속적으로 장애를 사유로 놀린다면 장애인 학생에 대한 차별행위로까지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참고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32조는 이미 ‘누구든지 장애를 이유로 학교, 시설, 직장, 지역사회 등에서 장애인 또는 장애인 관련자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비하를 유발하는 언어적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되어 있고 우리는 이를 디딤돌로 ‘차별표현의 차별행위로의 전환가능성’ 이론을 따라 규제 대상을 확대해나갈 수 있다. 넷째, 차별금지법을 동시에 또는 먼저 제정해야 한다. 차별행위 자체도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 못하면서 차별표현을 금지한다는 것은 헌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절도를 금지한 후에야 ‘절도를 선동하는 발언이 절도라는 불법적인 해악을 발생시킬 위험이 높아 규제한다’는 논리가 세워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치적 신념에 따른 차별 또는 지역출신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 자체가 없다. 최근에 호남인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기업이 알려졌었지만 아무런 법적 제재수단이 없었다. 그런데 ‘호남인을 채용하지 말라’는 말부터 제재하는 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 [허준규의 캠핑 액티비티] (6) ‘섬 백패킹’

    [허준규의 캠핑 액티비티] (6) ‘섬 백패킹’

    십년 전, 전남 장흥 천관산 연대봉에서 막영한 날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 노력항 일대의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점점이 박힌 크고 작은 섬들이 부분집합으로 환원되고, 금당도 생일도 금일도 조야도 등 발아래 부챗살처럼 펼쳐진 섬은 더이상 일인칭 단수가 아니었다. 비약이겠지만, 그러므로 섬을 찾는 ‘나’는 연대와 유대의 매개로 섬을 바라본다. 시인 정현종이 그의 시 ‘섬’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결국, 보통의 사람들이 섬을 찾는 이유는 그리움 또는 절망의 시대의 피난처, 혹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서울과 경기, 수도권에서 섬 백패킹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은 단연 인천이다. 더 정확하게는 옹진군에 산재한 수많은 유·무인도가 멀지 않다. 잘 알려진 대로 굴업도를 비롯해 덕적도와 소야도,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자월도, 승봉도, 영흥도 등 무려 100여개의 섬들로 뱃길이 열려 있다. 수심이 낮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해수욕과 갯벌 체험을 하기도 좋은 환경인 데다 인천항이나 대부도에서 2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편리한 접근성 덕분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국을 강타 중인 ‘메르스 정국’에도 6월 둘째 주말, 인천 연안여객터미널과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은 백패커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인천 굴업도·덕적도 등 100여개 섬, 뱃길로 열려 있어 방아머리선착장을 빠져나간 배는 서해중부 연안의 점점이 박힌 섬들 사이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바다색은 한려해상이나 다도해의 청자색, 코발트블루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게다가 하늘까지 뿌옇다. 늘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겐 심드렁하게 여겨지는 풍경이겠지만, 모처럼 회색 도시를 떠난 여행자들에겐 그마저도 고맙다. 두어 시간 남은 여정, 선상에서부터 여행자들의 섬 백패킹은 막이 올랐다. 덕적면 소야도행 배를 놓친 필자는 행선지를 정할 겨를도 없이 막배인 자월면 대이작도 소이작도 승봉도행 배에 올랐고 1시간 30분 뒤, 한 무리의 단체객들과 함께 승봉도에 내렸다. ●갯벌 체험·해수욕 하기 좋고 인천항서 2시간이면 도착 선착장에서 해안가를 따라 걸으니 ‘나의 고향 승봉도’라는 머릿돌이 반기는데, 늘 그렇듯 섬에 들어서면 시간이 늦게 간다. 산에 들 때와는 또 다른데, 마음은 어느새 평온해지고 발걸음은 한 박자 두 박자 더디 가는 것이다. 슬로시티가 섬에 유난히 많은 건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다로 둘러싸이고 육지와 떨어져 있다는 물리적 거리, 격리된 채 고립감을 느끼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섬은 원초의 갈망이 빚은 관념이 지배한다. 그래서인지 사회역사적 배경 따위는 생략된다. 시쳇말로 ‘멍 때리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고립과 유폐된 것들을 잇는 그 무엇, 바다 위 망망히 떠도는 아련한 그리움들이 피어오른다. 어느 한 지점,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섬에서 본 풍광은 지극히 나만의 세상을 보여 주는 그림이 되고, 그 여정은 더욱 개인적인 것이 된다. ●“세월호 트라우마·메르스 공포 떠나 섬에서 망중한 즐기며 힐링” 이일레 해변에서 만난 한 커플을 필자의 사이트로 초대했다. 경기 광명에 사는 전국자동차노련 산하 지회 상근자인 박두진(40)씨와 매일노동뉴스 기자인 김미영(38)씨는 “세월호 이후에 처음 배를 탔다. 세월호 때도 그렇고 지금은 메르스로 온 나라가 난리통인데, 정부의 대응을 보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섬에 오니 살 만하다”며 섬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물 울타리’에 갇혀 외따로 떨어져 있지만 섬에 머무르는 시간만큼은 힐링이 된다는 뜻이다. >>백패킹 하기 좋은 인천연안 섬 5곳 승봉도:작아서 더 아름다운 섬이다. 걸어서 섬을 둘러보는 데 3시간이면 충분하다. 이일레해변은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낮다.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조금 저렴하고 느리게 가거나, 인천연안부두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으로 비싸고 빠르게 가는 방법이 있다. 쾌속선의 경우 레인보우호가 1시간, 대부고속페리가 1시간 30분 걸린다. 덕적도:물이 깊디깊어 ‘큰물’이라고 불리는 섬. 덕적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인천항에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름드리 숲을 품은 서포리 해수욕장과 밧지름해수욕장 그리고 자갈해변이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이작도:대이작도에는 풀치 또는 풀등이라고 불리는 모래섬이 있다. 이 섬은 밀물이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가 썰물 때서야 속살이 드러난다. 곱디고운 모래가 완만히 깔려 있다. 물이 빠지면서 생긴 작은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망중한을 즐겨도 색다르다.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간다. 장봉도:선착장 가까운 곳에 용암해변이 있고 물이 빠지면 진회색 융단이 펼쳐져 게와 조개를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 왼쪽으로 조금 가면 한돌해변의 희고 고운 모래밭이 있고 그 뒤로 소나무숲이 짙게 그늘을 만들어 야영하기 좋다. 가는 길은 삼목선착장(세종해운)에서 신도를 거쳐 들어간다. 굴업도:섬 백패킹의 성지로 불리는데, 가장 높은 덕물산(138m)을 비롯해 연평산, 개머리언덕 등 해발 100m 대의 구릉이 남북으로 연결된다.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한다.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덕적도~굴업도 노선은 홀수일과 짝수일에 따라 운항 노선이 바뀌는데, 홀수일을 권한다. 홀수일에는 덕적도에서 굴업도까지 1시간, 짝수일에는 2시간이 걸린다. 짝수일에는 덕적군도의 여러 섬을 들렀다 굴업도에 들어가기 때문에 운항 시간이 더 걸린다. 승선권 예매는 island.haewoon.co.kr. 인천시민은 상시 50% 할인된다. 캠핑협동조합 대표 jkhuh7875@gmail.com
  • 유승민 “서민 편에 서는 새 보수로”…野 환영

    유승민 “서민 편에 서는 새 보수로”…野 환영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성장과 복지의 균형 발전을 기반으로 한 ‘중(中)부담-중복지’ 정책 추진을 제시하며 세금·복지 문제 공론화를 위한 여야 합의기구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의 정치적 좌표로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는” ‘새로운 보수’를, 대야 관계에 있어선 진영 논리를 창조적으로 파괴하자는 ‘합의의 정치’를 제안했다. 유 원내대표는 8일 취임 후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붕괴 위험이 커지고 있다”며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나누면서 커 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10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양극화 해소’를 지적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찰을 높이 평가한다는 언급도 나왔다. 그는 공무원연금 개혁과 관련해 “지난해 국가 결산에서 총국가부채 1211조원 중 53%인 644조원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충당부채였다”며 “국회가 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134조 5000억원의 공약가계부는 더이상 지킬 수 없는 점을 반성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단기 부양책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등 현 정부 정책 기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특히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원칙, 법인세가 성역이 될 수 없는 원칙, 재벌 처벌의 형평성 확립 등을 강조하며 ▲재벌 개혁 동참 ▲청년 일자리 전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대기업 하청 단가 인상 ▲보육정책 재설계 등 ‘공정한 고통분담·공정한 시장경제’를 제시했다. 집권 여당 원내대표로선 말하기 어려운 파격적 고백도 있었다. 그는 “역대 정권마다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 역할만 해 왔다”, “여야 포퓰리즘 경쟁이 국가 발전에 큰 피해를 줬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세월호 실종자 9명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한 후 통합과 치유의 길로 나가자고 역설했다. 그는 “세월호를 인양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고자 최선을 다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지키고 가족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며 “평택 2함대에 인양해 둔 천안함과 참수리 357호에서 적의 도발을 잊지 못하듯 세월호를 인양해 우리의 부끄러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당 김무성 대표는 유 원내대표의 연설에 대해 “아주 신선하게 잘 들었다”면서도 당의 방침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김 대표는 중부담-중복지 문제와 재벌 개혁, 조세 형평성 원칙 등에 대해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하자는 뜻으로 한 얘기이기 때문에 꼭 당의 방침이라고 볼 수 없다”며 “국민 모두의 컨센서스(동의)가 형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유 원내대표가 자신의 정치철학과 개인 소신을 담아 그동안 해 온 얘기를 재차 언급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여 당·청이 대립각을 세우는 모양새를 피하고자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은 이례적으로 공감과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유은혜 새정치연합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을 통해 “우리나라의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준 명연설이었다”고 밝혔고, 박완주 원내대변인은 “유 원내대표의 합의의 정치 제안에 공감한다”며 “박근혜 대통령 공약가계부의 실패 선언,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 고백은 집권 여당 대표로서 용기 있는 진단”이라고 평가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다음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문 전문. 제332회 국회(임시회) 교섭단체대표연설문 2015년 4월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 승 민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합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정의화 국회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그리고 이완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여러분! ●세월호... 그리고 통합과 치유 1년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2학년 허다윤 학생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여 오늘까지 엄마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윤이의 어머니는 신경섬유종이라는 난치병으로 청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내 딸의 뼈라도 껴안고 싶어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다윤 양과 함께 조은화, 남현철, 박영인 학생, 양승진, 고창석 선생님, 권재근씨와 권혁규군 부자, 이영숙씨... 이렇게 9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피붙이의 시신이라도 찾아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슬픈 소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희생자 295명, 실종자 9명, 그리고 생존자 172명을 남긴 채 1년 전의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의 가슴에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분노를 남겼습니다.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 우리 정치가 이 분들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인양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지난 1년의 갈등을 씻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저는 정부에 촉구합니다. 기술적 검토를 조속히 마무리 짓고, 그 결과 인양이 가능하다면 세월호는 온전하게 인양해야 합니다. 세월호를 인양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지키고, 가족들의 恨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평택 2함대에 인양해둔 천안함과 참수리 357호에서 우리가 적의 도발을 잊지 못하듯이, 세월호를 인양해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월호 인양에 1,000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막대한 돈이지만, 정부가 국민의 이해를 구하면 국민들께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동의해 주실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통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 국민이 함께 희생자를 추모하고, 생존자의 고통을 어루만져 드려야 합니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배상 및 보상 등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는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정치권은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통합과 치유의 길에 앞장서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 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통합과 치유를 위해 정부와 국회가 함께 나서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에서 사망한 자식의 유해와 시신을 데려가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지금이라도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천안함, 5.18민주화운동 등 우리 역사의 고비에서 상처를 받고 평생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 분들의 고통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 비로소 국민의 마음이 열리고 통합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나누면서 커간다 :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야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은 오랜 세월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견인해왔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유지와 발전에도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남북분단과 군사대치 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지켜왔습니다. 이제 새누리당은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합니다. 심각한 양극화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갈수록 내부로부터의 붕괴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건전한 보수당의 책무입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이 보수의 책무이듯이, 내부의 붕괴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것도 보수의 책무입니다. 새누리당은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겠습니다.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습니다. 빈곤층, 실업자, 비정규직, 초단시간 근로자, 신용불량자, 영세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장애인, 무의탁노인, 결식아동, 소년소녀 가장,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 -- 이런 어려운 분들에게 노선과 정책의 새로운 지향을 두고, 그 분들의 통증을 같이 느끼고, 그 분들의 행복을 위해 당이 존재하겠습니다. 10년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습니다.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던 그 분의 통찰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나누면서 커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오늘의 이 변화를 통하여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자유시장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쳐 한국경제 체제의 역사적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국가안보 만큼은 정통보수의 길을 확실하게 가겠습니다. 새누리당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면서, 저는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의 최근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은 ‘경제정당, 안보정당’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의당은 ‘미래산업정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급식, 보육은 물론 심지어 의료, 교육, 주택까지 보편적 무상복지를 고집하던 야당이 드디어 성장의 가치, 안보의 가치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환영합니다. 저는 진보정당의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총선과 대선의 득표용 전략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변화 속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고민과 진정성이 담겨 있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진영을 넘어 합의의 정치로... 여와 야,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변화를 보면서 저는 ‘진영의 창조적 파괴’라는 꿈을 가집니다. 진영을 벗어나 우리 정치도 공감과 공존의 영역을 넓히자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 동안 우리 정치는 여야 진영 간, 보수 진보 진영 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진영은 그 본질이 독재와 똑같습니다. 진영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내부 구성원들에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데, 어느 당, 어느 진영의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소신은 집단의 논리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진영의 논리에 빠져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았고, 이는 국민의 눈에 어처구니 없는 정쟁으로 비쳐졌습니다. 여당 시절 추진했던 FTA, 연금개혁을 야당이 되니까 반대하는 일, 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에서 여야가 당론투표를 강요하는 일, 역대 정권마다 여당이 정부와 청와대의 거수기 역할만 해오던 일,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진영싸움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내대표가 된 이후 가급적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의원님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구속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보수와 진보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오늘 보수와 진보는 머리를 맞대고 공통의 국가과제와 국가전략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영싸움을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시작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들은 합의의 정치를 통하여 정책을, 입법을, 예산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합의의 정치를 해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과열경쟁을 자제하기 위해서도 합의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시장’에서 정치의 본능은 득표입니다. 표 때문에 우리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죄수의 딜레마’처럼, 그 동안 여야의 포퓰리즘 경쟁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반복되었고, 이는 국가재정, 국가발전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역대 대선과 총선에서 각 정당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들이 그 생생한 사례들입니다.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지만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하려면 합의의 정치가 필요합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우리 국회가 진영의 논리와 포퓰리즘 경쟁에서 벗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시작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많고, 국민은 우리 정치를 다른 눈으로 평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노력이 진정한 정치개혁이라고 믿습니다. 성장과 복지, 안보와 통일,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일자리와 노동, 교육, 보육, 의료, 연금 등 합의의 정치가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어려운 문제, 아주 인기 없는 정책일수록, 그러나 국가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일수록 우리는 용기를 내어 통큰 합의를 해야 합니다. ●공무원연금개혁 몇가지 중요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4월 국회의 최대 현안인 공무원연금개혁이 그 첫 번째 시험대입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역대 정권이 모두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한,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공무원의 고통분담이 수반되는 일이니 당연히 득표에 도움이 안되는, 인기 없는 개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국가장래를 위해 지금 꼭 해야만 하는 개혁입니다. 지난 2년간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 중에서 저는 공무원연금개혁에 도전한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이념의 문제도, 정쟁의 대상도 아닙니다. 야당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군사작전 하듯이 추진하려는 것도 아니고, 20년전 김영삼 정부때부터 추진해왔던 것입니다. “급하게 졸속으로 하지 마라” — 이런 정치적 수사로 개혁을 지연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도 추진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것을 야당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 발표된 「2014년 국가결산」에 따르면 총국가부채 1,211조원 중 53%인 644조원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충당부채였습니다. 앞으로 공무원연금에 얼마나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미래세대에게 엄청난 빚을 떠넘긴다는 것을 야당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공은 우리 국회에 넘어와 있습니다. 당사자인 정부와 공무원이 해결하지 못한 개혁을 국회가 마무리해내야 합니다. 공무원들과 국민들의 성숙한 고통분담 의식, 거기에 여야간 합의의 정치가 보태지면, 역대 어느 정권, 어느 국회도 못했던 개혁을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새정치민주연합에게 호소합니다. 문재인 대표님과 우윤근 원내대표님께 호소합니다. 야당이 경제정당을 말하려면 이번 4월 국회에서 공무원연금개혁에 동참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고 의견제시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 국민대타협기구와 같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해당사자에게 최종결정 권한까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결정은 주권자인 국민의 대의기구인 우리 국회가 하는 겁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노무현 정부 임기 중인 2007년에 그 어려운 국민연금개혁을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국민연금개혁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생생히 지켜보셨던 문재인 대표께서 이번 공무원연금개혁에 합의해 주신다면, 국민들은 경제정당의 진정성을 평가할 것입니다. 여야 모두 공무원연금개혁이 지금 9부 능선까지 왔다고 인정합니다. 마지막 한 달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 중요한 개혁이 또 무산된다면 19대 국회는 여야 가릴 것 없이 국민의 지탄을 면할 수 없고 국민의 정치불신은 극에 다다를 것입니다. 합의의 정치로 공무원연금개혁이 꼭 성공하도록 의원님들의 동참을 호소드립니다. 공무원연금개혁 이후 공적연금의 강화가 이슈가 될 전망입니다. 국민연금의 경우 2007년 고통스러운 개혁을 단행했고,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는 기초연금 때문에 진통을 겪었습니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것은 기여율 인상 없이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오히려 국민연금의 경우 연기금자산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개혁으로 수익률을 제고해서 연금고갈시점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이 국민부담을 줄이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금과 복지 두 번째 사례는 세금과 복지 이슈입니다. 세금과 복지 이슈만큼 정치적 휘발성이 강한 이슈도 없을 것입니다. 소득세 연말정산 사태에서 우리는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세금을 올린 정당은 재집권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정치권의 금언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 연설을 쓰면서 2012년 새누리당의 대선공약집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공약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저희 새누리당의 공약이었습니다. 문제는 134.5조원의 공약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이 반성합니다. 저는 지난 4월 1일 정부가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복지재정 효율화 방안」을 발표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3조원의 복지재정 절감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점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예산 대비 세수부족은 22.2조원입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권은 국민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세금과 복지의 문제점을 털어놓고, 국민과 함께 우리 모두가 미래의 선택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 일은 공무원연금개혁보다 더 어렵고, 인기는 더 없지만, 국가 장래를 위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세금과 복지야말로 합의의 정치가 절실하게 필요한 문제입니다. 서민증세 부자감세 같은 프레임으로 서로를 비난하는 저급한 정쟁은 이제 그만 두고 여야가 같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의 출발은 장기적 시야의 복지모델에 대한 합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의 복지는 ‘低부담-低복지’입니다. 현재 수준의 복지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에 크게 부족합니다. 그러나 ‘高부담-高복지’는 국가재정 때문에 실현가능하지도 않고, 그게 바람직한지도 의문입니다. 高부담-高복지로 선진국이 된 나라도 있지만, 실패한 나라도 있습니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를 보면 저출산-고령화로 인하여 앞으로 50년간 기형적 인구구조라는 재앙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복지제도를 더 확대하지 않고 그대로 가더라도, 앞으로 복지재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中부담-中복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이는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태리 같은 유럽 국가들보다는 낮지만, 현재의 미국, 일본보다는 다소 높은 수준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결코 낮은 목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최근 여야간에 中부담-中복지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국민의 동의를 전제로 이 목표에 합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中부담-中복지를 목표로 나아가려면 세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무슨 세금을 누구로부터 얼마나 더 거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증세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년간 22.2조원의 세수부족을 보면서 증세도, 복지조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부담은 결국 국채발행을 통해서 미래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비겁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부자와 대기업은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금을 떳떳하게 더 내고 더 존경받는 선진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세의 형평성이 확보되어야만 중산층에 대한 증세도 논의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최근의 여야 대표연설은 대부분 우리 국회가 세금과 복지 문제에 관한 대타협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지난 2월 우윤근 원내대표님도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는 새누리당 의원님들의 동의를 구하여 세금과 복지 문제에 대한 여야 합의기구의 설치를 추진하겠습니다. 정부도 세금과 복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보육 개혁 복지지출 중에서 보육 분야는 현실적 어려움이 큽니다. 여야 합의기구가 출범하면 이 문제도 여야가 함께 풀어갑시다. 0∼2세 보육료, 3∼5세 누리과정, 0∼5세 양육수당을 합친 올해 보육예산은 10조 2,500억원으로서, 급식예산 2조 5천억원의 4배입니다. 최근의 지방재정법 개정 과정에서 보았듯이 보육재원의 조달을 둘러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은 심각합니다.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제정된 이래 지난 24년간 보육은 계속 확대되어 왔고, 박근혜 정부는 0∼5세의 모든 영유아에게 소득에 관계없이 보육지원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보육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지원은 확대되었으나, 이 정책이 저출산 해소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제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더구나 최근 보육시설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사고들을 보면서, 0세 영아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월 77만 8천원이 지원되는데 집에서 키우면 월 20만원이 지원되는 모순을 보면서, 또 어린이집, 유치원과 가정이라는 보육공동체의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보육정책의 재설계가 절실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공동체는 아이를 낳고 잘 키우는 문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4월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대로 지방재정법을 개정하고 정부가 합의했던 5,064억원도 동시에 집행하며, 영유아보육법도 개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보육정책에 대해서는 우리 국회가 진지한 토론과 대안의 모색에 여야가 함께 착수할 것을 제안합니다. 정부도 앞으로 보육정책과 예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현실성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성장의 가치와 성장의 해법 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경제성장은 오랫동안 보수의 의제였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소득주도형 성장, 포용적 성장’을 말했을 때, 저는 이 새로운 변화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야당이 성장의 가치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습니다. 보수가 복지를 말하기 시작하고, 진보가 성장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우리 정치의 진일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성장의 해법입니다. 복지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데, 성장은 돈을 어떻게 버느냐의 문제입니다. 성장의 해법은 복지의 해법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KDI가 발표한 장기거시경제 전망에 따르면 현재의 3.5%의 잠재성장률은 2050년대에 1.0%로 추락합니다. 더 비관적인 전망에 따르면 2040년대부터 1.0% 이하로 추락하여 2060년대부터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합니다. 대한민국이 성장을 못하는 나라, 저성장이 고착화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적 대재앙입니다. 성장을 못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게 어려워집니다. 성장을 못하면 일자리와 소득이 줄어들고, 서민 중산층이 붕괴되어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국가재정도 버티기 힘들어 복지에 쓸 돈이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통일비용을 부담할 재원이 없습니다. 앞으로 100년간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는 경제성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극화 해소 못지 않게, 성장 그 자체가 시대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2100년까지 한국경제가 성장을 못하는 것은 경기변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장을 뒷받침하는 노동, 자본, 기술 등 세 가지 요소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펀더멘털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성장의 원인에 대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대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못한다면, 한국경제는 20세기의 성취를 21세기에 다 날려보내고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저성장은 이렇게 고질적이고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문제인데,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성장전략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예외 없이 집권 초반의 경제성적표를 의식해서 반짝경기를 일으켜 보려는 단기부양책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성장잠재력 자체가 약해져서 저성장이 고착화된 경제에서 국가재정을 동원하여 단기부양책을 쓰는 것은 성장효과도 없이 재정건전성만 해칠 뿐이라는 KDI의 경고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가재정 때문에 공무원연금개혁의 진통을 겪으면서, 별 효과도 없는 단기부양책에 막대한 재정을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건전한 국가재정은 그 동안 한국경제를 지탱해온 최후의 보루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1997∼98년의 IMF 위기와 2008∼09년의 금융위기도 그나마 국가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단기부양책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IMF 위기처럼 극심한 단기불황이 찾아오지 않는 한, 단기부양책은 다시는 끄집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장기적 시야에서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데 모든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일은 한 두가지 정책수단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뼈를 깎는 개혁을 단행해야 합니다. 자본, 노동, 여성, 청년, 교육, 과학기술, 농어업, 제조업, 서비스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혁명적인 변화의 최종 목표는 우리 경제의 경쟁력 강화이며, 성장잠재력 확충입니다. 가장 중요한 몇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재앙은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0∼5세 보육예산을 늘리는 정책만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집 구해서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아이가 자라서 나보다 더 잘 살 거라는 희망을 드려야 합니다. 보육, 교육, 노동, 일자리, 주택, 복지 등을 포괄하는 종합대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저출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인력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청년, 여성, 장년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여성이 더 이상 경력단절을 겪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정년후 장년층의 재고용을 촉진하는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청년일자리를 위해서 정부는 ‘청년일자리 전쟁’을 하겠다는 각오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해서 청년의 고용률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자리는 삶의 문제입니다. 사회 문턱에 갓 들어선 청년들에게 실업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정부, 공기업, 정부산하단체부터 청년일자리 늘리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정부는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청년일자리를 늘려 달라고 호소하고 청년고용에는 인센티브를 줘야 합니다. 청년창업에 대한 국가지원도 대폭 확대하고, 크라우드펀딩법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도 조속히 통과되어야 합니다. 청년들이 취업하기를 원하는 서비스산업의 발전을 위해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관광진흥법, 국제의료사업지원법도 조속히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중소기업의 청년고용에 대한 임금보조를 확대하고, 중소형 공장이 밀집한 지역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재양성은 성장의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할 분야이고 국가의 명운이 걸린 분야입니다. 부가가치가 높은 과학기술주도형 성장으로 가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일관된 국가R&D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분야입니다. 연구개발예산의 총투자액은 확대하되 민간이 하지 못하는 분야를 국가가 담당해야 합니다. IMF 위기 이후 누적된 문제로 고장난 국가R&D시스템은 근본적인 진단후 수술이 불가피합니다. 과학기술교육의 혁신과 이공계 우대 정책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제조업이 더 강해져야 관련 서비스산업이 같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전자,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제조업의 위기는 지금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이들 주력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중소기업 분야에서도 벤처만 우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잘하고 있는 업종과 기업들이 더 잘 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한계기업은 과감하게 퇴출시켜 새 살이 돋아나도록 하고, 잘하는 기업에게 자원이 배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공정한 고통분담, 공정한 시장경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성장의 해법은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고통스러운 개혁입니다. 성장을 향한 개혁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희생만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공정한 고통분담, 공정한 시장경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합의의 정치가 필요합니다. 노사정 대타협이 바로 그런 합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이 시간까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정책 못지않게,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 등 이중구조를 해소하고 고용안정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정책은 우리 사회의 공정성과 양극화 해소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되어야 합니다. 정부와 공기업은 지금 추진 중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더 확실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30대 그룹과 대형 금융기관들도 상시적 업무에 일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재벌도 개혁에 동참해야 합니다. 재벌대기업은 지난날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으로 오늘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재벌대기업은 무한히 넓은 글로벌 시장에서 일등이 되기 위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분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일가 친척에게 돈벌이가 되는 구내식당까지 내주고 동네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끄러운 행태는 스스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단계를 벗어나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의 아픔을 알고 2차, 3차 하도급업체의 아픔을 알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존경받는 한국의 대기업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정부는 재벌대기업에게 임금인상을 호소할 것이 아니라, 하청단가를 올려 중소기업의 임금인상과 고용유지가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재벌정책은 재벌도 보통 시민들과 똑같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재벌그룹 총수 일가와 임원들의 횡령, 배임, 뇌물, 탈세, 불법정치자금, 외화도피 등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 보통 기업인들과 똑같이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검찰, 법원은 재벌들의 사면, 복권, 가석방을 일반 시민들과 다르게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공정한 고통분담과 공정한 시장경제는 결국 복지, 노동, 경제민주화, 법치로 귀결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증세, 中부담-中복지의 시회안전망, 비정규직 대책, 청년일자리,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대책들이 성장의 해법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정부는 성장잠재력과 상관없는 단기부양책이 아니라 사회적 대타협에 필요한 곳에 예산을 써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아직도 임기가 3년 가까이 남아있는 박근혜 정부가 이상과 같은 근본적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정부가 단기부양책보다는 노동-금융-교육-공공의 4대 부문 개혁을 말하고 2017년까지 잠재성장률 4%대 진입을 목표로 ‘3년의 혁신으로 30년의 성장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점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3년내의 성과에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잠재성장률을 4%대로 높이는 일은 3년의 개혁으로는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 3년 동안 그 다음 정부가 후퇴시킬 수 없는 개혁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정부는 공무원연금개혁에서 시작하여 세금과 복지, 노동, 보육과 교육, 청년일자리, 그리고 성장 등의 분야에서 개혁의 인프라를 제안하고, 우리 국회는 합의의 정치로 국가의 장래를 준비하는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야당이 제시한 소득주도 성장론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정한 속도의 최저임금 인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지출의 확대는 빈곤과 양극화 해소라는 차원에서 동의합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지출 확대가 저소득층의 소비를 늘려 내수 진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2100년까지 저성장의 대재앙이 예고된 우리 경제에 대하여 이 정도의 내용을 성장의 해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소득주도 성장을 정치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성장의 해법이 없었던 것은 지난 7년간 저희 새누리당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녹색성장과 4대강 사업, 그리고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왕 야당이 성장이라는 시대의 가치를 얘기한다면, 여야가 그 해법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합의의 정치로 성장을 위한 지난한 개혁의 길로 함께 가자는 점입니다. ●사회적경제 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최근 많은 국민들께서 사회적경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을 주며 양극화 해소와 건강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에 도움을 주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농어촌공동체회사 등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영역도 돌봄, 보육, 교육, 병원, 신용, 도시락, 반찬가게, 동네슈퍼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中부담-中복지를 목표로 나아간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복지수요를 국가재정이 모두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일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와 정부가 세금으로 만드는 일자리는 늘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경제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에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으로서,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해왔던 선진국들도 사회적경제가 발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경제는 정치적 오염과 도덕적 해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회적경제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일은 여야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 19대 국회가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제정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가계부채라는 시한폭탄 경제 분야의 마지막 주제로 저는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경고합니다. 작년말 가계부채는 1,089조원을 기록했습니다. 국민 1인당 평균 2,150만원이며, 가계부채가 GDP의 75%입니다. IMF 위기때는 기업들의 과도한 부채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대규모 도산사태와 대량해고가 발생했고 양극화가 심화되었습니다. 지금은 가계부채가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LTV(주택담보대출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의 완화와 금리인하는 가계부채의 증가속도를 높여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가계부채는 개인이 원금과 이자를 갚는 게 당연한 원칙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 경제 전체의 리스크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정부가 정교한 대책을 수립해 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지난번 두 차례에 걸친 안심전환대출은 은행과 정부의 부담으로 원리금 상환능력이 있는 일부 계층에게만 혜택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상환능력은 없고 부실의 위험도는 높은 한계선상의 가계부채에 대책의 우선순위를 둘 것을 촉구합니다. ●국가안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성장, 복지와 함께 안보, 통일은 우리의 4대 국가 아젠다입니다. 올해는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광복과 함께 분단이 된 70년 전의 슬픈 역사는 분단을 허물고 통일과 진정한 광복을 이룩해야 하는 역사적 과업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은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대북정책이 쌓여서 통일정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통일 이전에 북한의 개혁 개방, 북한경제의 발전, 북한체제의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북정책이라는 주장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북한은 그런 이성적인 대북정책이 통하지 않는 상대입니다. 문제의 핵심에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있습니다. 지난 4월 2일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이란과 국제사회의 역사적 합의가 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란보다 핵무기 개발이 훨씬 앞선 북한의 핵문제는 조금도 진전이 없이 악화되어 가기만 합니다. 2012년 12월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 이후 우리 군은 북한이 노동미사일이나 스커드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한 핵미사일을 이미 실전배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우리 국민들은 언제 우리를 향해 날아올지 모르는 핵미사일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싸드(THAAD) 요격미사일의 배치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과연 우리 손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킬 생각을 갖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핵문제를 압박과 유도의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1994년의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합의,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 2012년 미국과 북한의 2.29 합의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북한은 그 때마다 약속을 깨고 핵개발은 계속되었습니다. 북핵문제를 현명한 외교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당연히 경주하되,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북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억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 합니다. 저희 새누리당은 북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국방능력을 갖추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최근 안보정당을 내세운 새정치민주연합에게 묻습니다. 싸드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야당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대안을 갖고 있습니까? 행여 북한이 핵공격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보정당은 한마디 말로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북핵과 싸드, 천안함 폭침, 북한인권법, 테러방지법 등 국가안보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과 행동이 있어야 스스로 안보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야당을 비판하려고 거북한 질문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늘 말로는 ‘국가안보는 초당적으로 대처한다’라고 하면서, 서로 생각의 차이는 너무나 큰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19대 국회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19대 국회가 국민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국민에게 내일의 희망을 드리기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저는 매일 이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집니다. 저는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고 싶었습니다. 15년전 제가 보수당에 입당한 것은 제가 꿈꾸는 보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지난 15년간 여의도에 있으면서 제가 몸담아보지 않았던 진보 진영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훌륭한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 분들의 생각 중에 옳은 것도 많고, 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좋은 생각, 옳은 생각을 가진 선량들이 모인 이 국회가, 우리 정치가 왜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불신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가 하나의 해결책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제 말씀을 마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순수한 욕망, 뜨거운 눈빛… 영화 ‘순수의 시대’로 돌아온 연기파 배우 신하균

    순수한 욕망, 뜨거운 눈빛… 영화 ‘순수의 시대’로 돌아온 연기파 배우 신하균

    학창 시절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제임스 딘의 고독한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소년. 친구들과 함께 영화 보러 다니는 게 취미였던 그는 영화배우를 꿈꿨고, 2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 중 한 명이 됐다. 팬들은 ‘연기의 신’이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비틀어 ‘하균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바로 연기파 배우 신하균(41)이다. 지난 25일 만난 그는 이 별명에 대해 “너무 민망하다. 제발 그 단어만은 쓰지 말라”며 웃으며 손사래 쳤다. 그가 새로 들고 나온 영화 ‘순수의 시대’(새달 5일 개봉)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다. 데뷔 이후 첫 사극인 데다 멜로 및 액션 연기의 폭도 가장 크다. 그가 맡은 장군 김민재는 자신의 사랑을 순수하게 지키는 인물로 4차원의 엉뚱한 캐릭터나 광기 어린 사이코패스 등 기존의 역할과도 거리가 멀다. “뭔가 가득 차 있거나 완벽한 인간에게는 매력을 잘 못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딘가 결핍되고 안쓰러워 보이는 캐릭터를 많이 맡았죠. 저 역시 그렇고요. 이번에 맡은 김민재는 제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고 무엇보다 트라우마가 있는 남자가 사랑의 감정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영화 ‘순수의 시대’는 조선 건국 초기인 1398년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손에 넣은 제1차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정도전의 사위인 김민재와 정도전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인 김진(강하늘) 등 허구의 캐릭터를 더해 야망으로 혼탁한 시대를 거스르는 한 남자의 순수함을 그렸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영화는 멜로에 좀 더 방점을 찍은 분위기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에 휩싸인 김민재는 어머니를 닮은 기녀 가희(강한나)에게 흔들려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허망한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장면만 봐도 민재는 출세를 위해 달려온 사람은 아니에요. 현실에서 사랑에 올인하는 것은 드물지만 출구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민재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됐어요. 원초적인 욕망을 좇는 시대에 민재는 자신이 믿는 순수한 욕망을 추구한 거죠.”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한국판 ‘색, 계’로 불렸던 만큼 노출과 베드신이 많이 등장한다. 평소 운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그는 7개월가량 운동 및 식이 조절을 통해 체지방을 27%까지 낮췄다. “체력과 지구력이 떨어져 촬영장에서 불쑥불쑥 신경질이 나기도 했죠. 하지만 민재가 안쓰러워 보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더 컸어요. 노출이 민망하지만 영화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이라도 해야죠. 민재가 대사 표현을 잘하지 않는 데다 정사 장면에도 각각의 콘셉트가 있어 ‘몸의 대화’로만 표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군 제대 후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순수한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순수하지만 광기 어린 유괴범, ‘지구를 지켜라’에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엉뚱한 청년, ‘예의없는 것들’에서 벙어리 킬러 등을 맡았다. ‘브레인’ ‘미스터백’ 등의 최근 드라마에서는 까칠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로 변신했다. “늘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 장르에 주안점을 두고 작품을 고릅니다. 특히 영화적 상상력이 풍부한 역할을 좋아하는 편이죠.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 때는 캐릭터가 너무나 독특한 나머지 연기에 스트레스를 받아 살이 80㎏ 가까이 찌기도 했었어요.(웃음)” 철두철미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플라모델 조립을 좋아하고 만화 탐독을 즐기는 아기자기한 취미를 가졌다. 스타보다 배우를 꿈꿔 온 그의 연기 철학은 ‘전달자’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연기란 정해진 틀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품마다 진심을 담고, 인물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려내려고 노력하죠. 관객들이 항상 배우 신하균의 1년 뒤, 5년 뒤 모습을 궁금해했으면 좋겠어요.”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현실로 다가온 ‘마이너리티 리포트’] (6) 전문가 대담

    [현실로 다가온 ‘마이너리티 리포트’] (6) 전문가 대담

    서울신문은 ‘현실로 다가온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리즈를 통해 미국과 영국, 한국의 범죄예측 기술의 현주소는 물론, 치안 확보와 사생활 보호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짚어봤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범죄예측 시스템의 전망’을 주제로 한 전문가 좌담을 끝으로 시리즈를 마친다. 좌담은 임용환 경찰청 생활안전과 과장(총경), 이창훈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원장,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소속)가 참석한 가운데 지난 20일 본사에서 진행됐다. 전문가들은 범죄예측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부작용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영·미처럼 테러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는 데다 수사당국 사찰과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가진 국내에서 사회적 합의 없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범죄예측 시스템은 자칫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치안 당국이 사용하는 범죄 예측 기술은 무엇이고 기술 수준은 어디까지 왔나. -임용환 과장 2005년 범죄위험지수, 2009년 지오프로스(지리적 프로파일링 시스템) 등을 도입했다. 지오프로스는 범죄 종류를 9개로 분류해 범죄 종류·특정 시간대별 ‘핫스폿’(범죄 위험이 높은 지역)을 예측해 등고선 지도로 나타낸다. -이창훈 교수 국내 범죄예측은 기술적으로 뒤지지 않지만, 학문적 연구·분석은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범죄 데이터를 수집할 때 단순한 사건 발생 장소, 시간 등만이 아닌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한다. 또 범죄 데이터를 이론적인 범죄 연구에 근거해 분석한다. →범죄예측에 활용 가능한 데이터는 무엇이 있나. -이 교수 현재 경찰은 사건이 일어나면 킥스(KICS·형사사법정보 시스템) 원표에 정보를 기록한다. 하지만 피해·가해자의 생체 정보, 심리적 특징, 긴장을 촉발한 주체가 누구인지 등 범죄 분석에 사용될 만한 가치가 높은 데이터는 누락된다.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위험 요인은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 학교생활, 성장배경 등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와 있는데도 정작 범죄가 발생하면 해당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다. 개인정보보호법 등의 제한을 받고 있다. →치안 확보와 사생활 보호, 두 가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려면. -이 교수 범죄예방에 개인정보를 활용하려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전과자의 재범을 방지하는 ‘특별 예방’엔 법적 근거가 있다. 재범률이 60% 이상이라 범죄예측의 필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반인 대상 범죄 예방이다.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현재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낮은 상태다. 미국처럼 9·11테러 사태가 터지지 않는 이상 개인정보를 범죄 예방 기술에 적용시키고, 그 결과를 수사에 활용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이 출발점이다. 데이터를 ‘치안확보’에만 활용할 것이라는 두터운 믿음이 형성돼야 정보 공개가 가능하다. 추후 전문가들의 연구를 발판으로 범죄예측 기술이 활용돼야 한다. 현재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범죄 빅데이터 활용 분야에 뛰어들지 않는다. 데이터가 공개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임종인 원장 치안 확보를 위해 프라이버시 침해를 감수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다 한들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반쪽에 불과하다. 현재 전국의 지자체에서 폐쇄회로(CC)TV를 수백대씩 운영한다. 시중에 판매 중인 지능형 CCTV를 활용하면 치안 확보에도 유용하다. 하지만 프라이버시 문제 탓에 경찰은 CCTV를 광범위하게 활용하지 못한다. 수사기관은 물론, 정부에서 치안 확보라는 공익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사법기관에서 영장을 발부해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에 필요한 개인의 전화 송수신 내역을 확인해도 엄청난 비판이 잇따른다. 또 미아 찾기에 효과적인 미취학 아동의 지문 채취 작업 역시 국민과 소통 없이 진행돼 논란이 일었다. 치안 확보를 위해 개인정보를 활용하려면 실제 사례를 통한 소통과 설득이 먼저다. -한규섭 교수 미국은 9·11 이전과 이후로 국민 여론이 갈린다. ‘애국법’(테러대책법)이 나온 것도 범죄 예방을 위해 일정 부분 사생활 침해를 감수하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계기가 없었고,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치안당국이 데이터를 활용해 범죄 예측을 할 때 고충이 클 것이다. 성폭력범의 전자발찌 착용은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한국은 과거 독재 정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신뢰가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낮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영국 등 일부 국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감시해 범죄 가능성을 예측한다. 빅데이터 활용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한 교수 기술적으로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빅데이터 자체가 개인정보보호법에 묶여 산업적으로 정체 상태다. 극악한 성범죄를 빼놓고는 데이터 활용이 어렵다. 범죄 분야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빅데이터 활용은 실제 가능한 기술력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만약 카드사가 고객의 소비 패턴과 경찰의 범죄 예측 데이터를 연동시켜 범죄 위험을 알려준다면,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느끼는 고객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 교수 우범지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범죄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정인의 카드 사용 패턴만 분석해도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범죄학 전문가들은 빅데이터에 목말라 있다. 그러나 학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은 거의 없다. 결국 ‘치안 확보’라는 공익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하는데, 인식이 부족하다. →어떤 정보까지 공개할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은 있나. -임 과장 개인정보보호법상 개인정보의 제3자 제공이 제한되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킥스만 해도 수사 목적 외에는 활용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다. 현재 범죄 안전 지도를 제작하는 행정자치부에 범죄 빅데이터를 제공할 때도 원자료는 공개되지 않는다. 지도에도 주소는 전혀 표시되지 않고 공원, 도로 등만 표시한다. -임 원장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빅데이터 사업 확대 추세에 맞춰 개인정보 활용과 관련해 빅데이터 가이드라인을 만들려고 했는데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법적으로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서 새로운 법 제정이라면 모를까 가이드라인은 유효하지 않다. 지난달 전 세계 개인 정보 책임자 회의가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열렸다. 결의안의 핵심은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할수록 데이터를 암호화, 익명화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교수 한국이 빅데이터 강국으로 가려면 ‘트레이드 오프’(어느 것을 얻으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현재 빅데이터가 엄청나게 축적되고 있지만 사용하지 못한다. 공익을 위한 빅데이터 활용 사례를 만들어 국민에게 확인시켜 주면 활용 범위가 한층 넓어질 수 있다. →범죄 예측 기술을 도입할 때 우리나라에서 특히 어떤 점이 고려돼야 하나. -이 교수 ‘핫스폿’만 예를 들어도 미국은 특정 지점이 딱 떨어지게 표시된다. 그러나 국내에는 거의 모든 동네가 핫스폿으로 나온다. 워낙 땅덩이가 넓은 미국은 산간 지역 등에서 범죄가 자주 발생한다. 또 나라별로 자주 발생하는 범죄 유형도 다르다. 미국은 마약 범죄나 총기 살인 등이 많다. 우리나라는 경찰 범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살인의 60%가 술 취한 사람끼리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한 교수 미국은 길이 블록 단위로 돼 있다. 그래서 마약, 총기, 성매매 등 특정 장소에 따른 범죄 유형 데이터가 잘 축적된다. 하지만 한국은 일반 주택가에서의 범죄 데이터는 ‘0’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성매매도 유흥업소 등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불법으로 이뤄진다. 한국 상황에 맞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임 과장 우리나라 특유의 음주문화 영향으로 밤 시간대에 술 취한 사람들이 많다. 강력 사건보다 주취 폭행이 두드러진다. 반면 밤늦은 시간까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이 덜하다. 지난해 경찰청에서 범죄 순찰이 범죄 억제 효과가 있는지를 한남대 박정연 교수팀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려 했지만 어그러졌다. 학술적인 연구가 뒷받침된다면 우리나라의 특징이 잘 반영될 것 같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사진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한국 문화 깊이 자리한 국가 폭력의 트라우마

    한국 문화 깊이 자리한 국가 폭력의 트라우마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김동춘외 지음/역사비평사/440쪽/1만 8500원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아픈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반성하지 않은 폭력의 역사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실제로 질곡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와 반성하지 못한 잘못 때문에 폭력을 반복하고 피해도 늘어만 간다. 그 악순환에는 언제나 똑같은 무책임과 방관이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기 일쑤다. 신간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은 국가가 저지른 폭력과 피해를 정치사회와 연결 지어 해법을 제시해 흥미롭다. 이른바 개인, 혹은 집단들이 앓고 있는 ‘트라우마’를 의학·심리학 차원이 아닌 관계의 사회학 측면에서 들춰냈다. ‘참사 공화국’의 오명 그대로 ‘트라우마 천국’인 한국은 왜 국가 폭력이 그렇게 빈번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정색하고 따져 물은 흔치 않은 공동 저작으로 눈길을 끈다. 한국 현대사는 정치사회가 빚어낸 다양한 국가 폭력의 점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한국전쟁 당시의 집단학살,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탄압 및 그로 인한 각종 의문사와 고문 조작 사건…. 문제는 과거 그 국가 폭력이 그저 지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5·18 유공자들의 높은 자살률, 2009년 용산 참사, 24명에 이르는 쌍용차 노동자 및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 온 국민을 집단적 슬픔에 옭아맨 ‘세월호 트라우마’…. 책의 특징은 그동안 등한시됐던 국가 폭력 희생자들의 트라우마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측면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역사학자의 전유물로 갇혀 있던 한국 현대사를 보통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짚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저자들은 우선 한국 사회의 폭력문화는 계급연관적 사회현상이며 정치사회적으로 접근돼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정신병리인 폭력문화는 분단과 남북 간 주기적 적대 분위기에서 강화·유지됐고 그 외상이 국가와 국민의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주장이 도드라진다. 과거와 달리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부드러운 형태’의 폭력이 양산되는 것도 문제다. 사회적 고립과 배제, 편견과 낙인, 은폐와 부인은 한국 사회 전반에 내면화된 폭력을 통해 재생되는 새 트라우마의 대표적 행태다. 폭력의 당사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부인과 방관은 폭력 은폐와 정당화의 핵심임이 사례를 통해 명쾌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저자들은 “국가에 대한 공포심, 가족에 대한 위협, 생계 곤란 등의 이유로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못하는 국가 폭력 피해자가 많다”면서 “과거에 대한 부인을 시인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게 급하다”고 강조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열린세상] 이웃 나라를 대하는 자세/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이웃 나라를 대하는 자세/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의 발언이 다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회견 도중 “아시아 국가에는 중국,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발언을 한 것이 단초였다. 지난 8월에도 나치식 개헌을 운운하다가 호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요즘의 일본 지도부들의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 주변 국가들의 심기가 불편하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의 오랜 갈등과 치열한 분쟁으로 얼룩져 왔다. 북한의 호전성은 차치하더라도, 세 나라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오욕과 절망으로 가득 채워 왔다. 냉전이 종식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위험과 불안으로 위태위태하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따른 교역과 인적 교류의 증가에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가히 ‘험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악화돼 왔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붓고 있다. 유럽을 보자. 벌써 27개 국가가 유럽연합에 가입해 있고, 회원국 수는 더 늘어날 기세다. 평화를 향한 유럽인들의 열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느 지역보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상태에 접어들었다. 경제위기와 지역 간 불균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에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측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앞선 형태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영토분쟁과 민족주의의 배타성에 신음하는 동아시아 입장에서는 너무나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 70여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유럽과 동아시아는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두 지역 한가운데에 독일과 일본이라는 전범국가가 자리 잡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전후 처리과정에서 연합국의 군사적 지배를 받았지만 미국의 동맹국가로 거듭나면서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과 국가재건을 이루었다. 지금은 모두 국제사회의 주도적인 구성원으로 국가적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하지만 역내에서 차지하는 두 나라의 정치적 입지는 동일하지 않다. 독일은 유럽연합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맡아 왔지만, 일본은 동아시아 갈등의 핵심을 파고들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엇갈린 역사적 궤적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고 있다. 1970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유대인 기념비 앞에서 과거사를 반성했던 일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큰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있는 독일 총리의 사진 한 장, 독일의 진정성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독일인들은 전범국가라는 오명을 벗고 ‘정상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활발한 논의를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21세기 접어든 지금 일본의 행보는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 이웃 나라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일방적으로 평화헌법 개정을 논하면서 군사 대국화를 도모한다. 그 끝은 어디인가? 유럽연합이 부흥하게 된 배경에는 독일의 진정한 반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아우름으로써 협력을 위한 상호 이해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인들의 뼈를 깎는 성찰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이웃 나라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릎 꿇은 브란트처럼 진정한 반성과 성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885년 일본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와 같은 문명화를 달성하기 위해 막부체제를 종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유교사상에 물들어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중국이나 한국은 ‘나쁜 이웃’이기 때문에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의 핵심이었다.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거쳐 군국주의로 치달았고 서양세력에까지 도전장을 내밀다가 철퇴를 맞았다. 130여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다시 ‘나쁜 이웃’을 멀리 하면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이웃 나라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던 후쿠자와의 망령이 아소를 비롯한 일본 지도층 주위를 여전히 맴도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 “피해자에 화해 강요 그것은 또 다른 고문”

    “피해자에 화해 강요 그것은 또 다른 고문”

    “감히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영상만 봐도 다시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라…” 강용주(50)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은 지난 3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를 차마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 센터장은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사건 연루자로 몰려 남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고문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거짓 자백을 해야 했다. 영화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민군 출신이기도 한 그는 대신 5·18 영화 ‘26년’의 광주 시사회를 주관해 당시 생존자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화제작 ‘남영동 1985’와 ‘26년’의 교집합에 서 있는 그는 지난달 광주 서구 치평동에 문을 연 트라우마 센터의 운영을 맡아 국가폭력에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공권력 피해자를 위한 국내 첫 치유기관인 트라우마센터는 5·18 생존자와 가족 등에게 상담치료를 하는 곳이다.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가 7억 8000만원의 예산을 절반씩 지원해 운영 중이다. 개원 뒤 한 달동안 상담자 50여명을 만난 강 센터장은 “국가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영혼은 여전히 야만의 현장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광주항쟁 참가자들은 여전히 총을 든 군인에 쫓기던 기억에 고통스러워하고, 전기고문 피해자들은 고문받던 때가 떠올라 병원에서 심전도검사조차 받지 못한다고 한다. 강 원장은 “술에 취하거나 울분이 차 ‘내가 5·18 때 이렇게 싸웠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배설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전문가와 상담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로 풀어낼 때 치유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강 센터장은 “일부 정치권이나 사회가 ‘이젠 과거와 화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진실규명 등도 없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마치 깨진 손톱 위에 매니큐어 바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만적 행위라고 꼬집었다. 피해자의 근본적 치유와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국가폭력 가해자의 사과와 이들에 대한 처벌 등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 정부는 유엔의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지만 정작 협약 조항인 피해자 재활의무는 다하지 않는다.”면서 “국가가 공권력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명예회복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열린세상] 마음의 껍질과 상궁지조(傷弓之鳥)/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열린세상] 마음의 껍질과 상궁지조(傷弓之鳥)/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마음의 껍질’이란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정해놓고 일관된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일종의 고착화된 마음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껍질은 삶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과 결정을 거치면서 자기보호 차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단 두껍게 쌓이면 좀처럼 바꾸거나 벗겨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잘못된 마음 껍질에 갇혀 버릴 경우 마음 기운을 지속적으로 왜곡시켜 두뇌에 비정상적인 정보를 저장시킬 뿐만 아니라 이미 저장된 지식과 경험도 잘못 꺼내 쓰게 함으로써 삶을 실패와 좌절로 얼룩지게 만든다. 마음의 껍질은 마음이 옳다고 확신하는 착심(着心)단계에 접어들면서 만들어진다. 어느 나그네가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지게에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나무를 산 위에서 굴리면 집까지 내려올 것을 왜 힘들게 짊어지고 오느냐.”고 물었다. 이에 나무꾼은 베어온 나무를 다시 지게에 담아 산에 오른 다음 산 아래로 나무를 굴렸다. 나무꾼은 새로운 방법을 알고 행복한 얼굴이었지만 마을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조롱했다. 인생 역시 산에서 나무하는 여정과 같아서 마음이 행로를 정할 때마다 나무꾼처럼 어처구니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각자의 마음 껍질을 만들어 나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나무꾼을 비웃는다. 마음의 껍질은 삶의 역할을 키워 가면서 자기 몫을 결정하는 마음 욕구가 극대화될 때 마치 신념처럼 절대 믿음의 껍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때부터 집착이 커진 마음의 껍질은 모든 결심과정에 간섭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합리화시키는 영역 확장에 몰입함으로써 스스로를 가두는 부정적 측면이 강해진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마음 껍질을 부단히 벗겨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가난한 마음을 요구하고 있고, 불교는 비운 마음을 설파하지만 아무튼 마음의 껍질을 벗겨내야 청정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욕심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분별력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본래의 바른 마음이다. 바른 마음이 나타나면 자신의 타고난 역할과 능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됨으로써 무엇을 키우고 다듬어 나갈지를 무리 없이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상궁지조’(傷弓之鳥)란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새는 구부러진 나무만 보아도 놀란다는 말로 전국책 초책편에 나오는 고사다. 경리(更羸)라는 사람이 위왕(魏王) 앞에서 화살 없이 활만으로 새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하면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놓자, 기러기가 떨어졌다. 경리가 궁금해하는 위왕에게 “떨어진 새는 날아올 때 이미 화살에 맞아 깊은 상처가 있어 심히 느리게 날았고, 무리를 잃은 지 오래되고 과거 화살에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아 구슬피 울었기에 활시위가 퉁겨지는 소리만 듣고도 놀라서 급하게 높이 날아오르려다 오히려 떨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음을 설명한 사건에서 연유한다. 사람도 궂은 일을 당해서 마음에 깊은 껍질이 생기면, 의심과 두려움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작은 일에도 정신적 공황을 겪는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즘 사회가 너무나 혼란스럽다. 벌써부터 유권자의 표심을 얻겠다고 실천하지 못할 약속이 남발되며,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때로는 비이성적인 감성을 자극해서 국민의 정서를 이간시킨 다음 편을 만들어 적대적 관계를 심화시키는 일이 서슴없이 일어나기도 한다. 국민들은 항상 그렇듯이 주인이라는 태생적 책임 때문에 켜켜이 쌓이는 상처받은 껍질을 하염없이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편파적 껍질을 거두고 올바르고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위대한 선택을 맞이해야 한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지난날 경험했던 두려움의 트라우마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적어도 국민들의 고통스러운 마음 껍질을 녹여줄 수 있는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하늘의 엄숙한 뜻(天命)임을 알아야 한다.
  • 폭력성 뒤 구원의 이중성… “이것이 김기덕”

    폭력성 뒤 구원의 이중성… “이것이 김기덕”

    김기덕의 18번째 작품 ‘피에타’는 전형적인 김기덕 표 영화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에게 ‘이것이 김기덕 영화’라고 추천해도 될 만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간 김기덕 영화를 각별히 대해 온 베니스영화제 측도 ‘피에타’에 찍힌 감독 고유의 인장(印章)에 후한 평가를 내린 듯하다. 하지만 줄곧 보아온 사람에게 ‘피에타’가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망설일 수밖에 없다. 나흘 간격을 두고 본 두 영화 - 김기덕의 ‘피에타’와 오멸의 ‘이어도’에는 상실의 고통을 겪은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어도’는 대사를 제거한 영화다. 음악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아기 엄마는 외딴섬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한다. 대체 무엇에 관한 영화일까, 질문을 던질 즈음 영화는 예상치 못한 역사적 비극을 전한다. 그 역사를 아는 사람은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도’는 여인이 품었을 슬픔으로 안내한다. 폭력적인 상황에 눈이 뒤집혀야 함에도, 먼저 한 일은 삶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린 여인 곁에 앉는다. 그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피에타’의 어머니가 느꼈을 슬픔 또한 역사적으로 읽힌다. 두 영화는 해방 이후 온갖 이유로 죽어간 수많은 아들에게 바치는 위령 의식처럼 보인다. 아이의 죽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빼앗긴 두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하다. ‘피에타’의 어머니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는 인간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행동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마음도 없다. 문제는 ‘피에타’가 어머니(와 남자)의 슬픔에 대해 취하는 태도다. 그녀(와 그)의 슬픔에 다가서도록 하는 대신 그녀(와 그)의 행동을 기겁하며 바라보게 한다. 김기덕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끄집어내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슬픔을 폭력의 도구로 삼는 방식에 동조할 수는 없다. 일례로 인간이 인간의 다리를 부수는 건 아주 폭력적 행동이다. 무시무시하게도, 김기덕은 그 장면에서 별도 작업을 통해 사운드를 극대화한다. 폭력적 이미지와 사운드와 상상이 주는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닌 양 군다. 하지만 관객이 피해자의 고통에 이를 악물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이러한 태도의 누적은 극악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한 인간의 속죄 의식이 다른 인간에게 끝내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작용할 것이라는 걸 ‘피에타’는 짐짓 모른 척하며 끝난다. 강렬하고 찬란한 이미지를 창조하려면 부차적 인물의 경악(驚愕) 정도는 묻혀도 된다고 말한다. 두 인물의 비극에 치를 떨기를 원했다면 ‘피에타’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나는 두 남녀의 슬픔을 보듬고 싶었다. 비록 그런 태도가 위선적이라 여겨질지라도.
  • [저자와 차 한 잔] ‘유토피아의 탄생’ 주강현 교수

    [저자와 차 한 잔] ‘유토피아의 탄생’ 주강현 교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좋은 곳, 다시 말해 이상향(理想鄕)을 말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유토피아를 꿈꾼 이상향, 파라다이스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경우에도 대망(大望)을 간구하다 아쉽게도 비명에 간 아기장수 설화 등에 미완의 유토피아가 담겨져 있으며 중국풍 몽유도원도 원류의 유토피아 이야기도 산재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공간이 주어진 한국판 본격 유토피아로 ‘섬-이상향’을 능가한 공간이 있을까. “대개의 경우 유토피아 세계에서 섬이 주목되고 결정적 무대로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섬은 인류 문명의 그 무엇인가를 함의하는, 이상향적 DNA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섬-이상향’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적·중세적 기원을 지니는 장기 지속적 담론입니다.” 신간 ‘유토피아의 탄생, 섬-이상향/이어도 심성사’(돌베개 펴냄)의 저자 주강현(57·제주대 석좌교수)씨는 “이 책을 통해 우리식 ‘섬-이상향’의 특질과 그 속에 담겨진 민중의 대망체계를 탐구하려고 했다.”고 저술동기를 밝혔다. 또한 “유토피아 세계의 기본 축은 섬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고 그러한 세계사적 전통에서 예외가 아니다.”라면서 “고통스러운 현실속에서 희망의 출구를 찾고자 했던 민중들의 심성구조가 ‘섬-이상향’ 담론을 지속시켜 온 동력이었고 ‘이어도-이상향’ 담론의 형성과정에서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동서고금의 ‘섬-이상향’ 담론의 궤적을 살피는 것과 오늘날 우리의 대표적인 ‘섬-이상향’으로 자리매김한 ‘이어도-이상향’에 관한 것이다. 특히 ‘이어도-이상향’ 담론은 용암으로 치자면 바로 엊그제 화산이 폭발해 흘러내리기는 했으나 아직 굳지 않은 현대적 서사(敍事)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그는 또 실체가 없었던 전설 속 이어도가 어떻게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섬-이상향’ 아이콘으로 부상했는지, ‘섬-이상향’ 서사가 탄생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이어도 전설이 오랜 구전의 습득물인가 아닌가 하는 진실게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도(海圖)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어도라는 섬을 자신들의 심성지도에 등재시킨 제주도민의 망탈리테(심성구조)가 중요합니다. 이어도 연구는 민중의 심성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어도-이상향’을 20세기 한국에서 펼쳐진 ‘섬-이상향’ 담론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하면서 고대 아틀란티스를 꿈꿨던 인류의 ‘섬-이상향’의 DNA가 그대로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제주는 한때 독립왕국이었으나 육지 복속 이후 오랫 동안 소외를 겪었고 권좌에서 밀려난 정치인들의 유배지, 대규모 민중반란 등 20세기까지 이어진 제주민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과 역사적 트라우마가 ‘이어도-이상향’ 담론의 증폭과 확산에 일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섬-이상향 담론은 바다가 있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섬이 존재하는 한 새로운 이상향 담론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글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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