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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거리 김활란식 개량한복 “물결”/유행으로 본 세태변화

    ◎6·25땐 밍크코트·귀금속 걸치면 처벌/드럼통펴 만든 첫 국산차 「시발」 등장/군낙하산으로 만든 여성속옷 “불티”/45∼50년대/붕어빵 먹고 걷는 「재건데이트」 유행/정전·단수 빈번… 집마다 양초필수품/60∼70년대/5공시절 9시 TV 「땡전뉴스」에 국민 “신물” 역사란 거창한 사건의 나열만은 아닐 것이다.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란 역사의 책갈피 속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투영일 뿐이다.우리의 현대사도 마찬가지다.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뭉뚱그리면 아마 책에 씌어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엄하게 씌어진 역사책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지 못한다.흔히 흥미거리로만 치부되기 쉬운 과거의 생활상은 이처럼 깊이있는 역사인식을 위해 더없이 훌륭한 보조수단이 된다.광복 50주년을 맞아 그 반세기 동안 생활상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보기로 한다. 1945년8월15일 일왕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터져나온 것이 가수 남인수의 「감격시대」였다.그 시대 한일관계는 곧 「너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셈이었다. 광복은 여성들의 의복에도 왔다.「김활란 스타일」의 개량한복이 거리를 휩쓴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물자가 귀했던 만큼 일본식 「몸뻬」도 사라지지 않았다.「몸뻬」차림의 여자들이 왜색을 일소하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부대 주변을 전전하는 새로운 여성층이 등장했다.이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민족의 체면을 팔아먹는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는 담화를 냈다.이 담화는 「말소」해야 할 여성을 「외인 승용차에 동승하는 여자,껌을 씹으며 거리를 방황하는 여자,괴상한 두발(파마머리)과 화장을 하는 여자」로 예시했다.요즘 이 기준을 적용하면 삼천리 강산에 남아있을 여성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 아래 6·25가 일어나자 「감격시대」를 불렀던 남인수는 다시 「가거라 삼팔선」을 지어야 했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자라」가 전우를 잃은 슬픔과 함께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면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이산가족의 아픔 그 자체였다.그 아픔은 다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이어졌다.또 전국 각지에서 임시수도로 모여든 피란민의 애환을 담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이북 출신의 이른바 「삼팔 따라지」들에게는 더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그 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판에는 사사오입,막걸리 선거,피아노 표가 판을 쳤다.시중에는 또 마카오 복지 등 사치스런 옷감이 범람해 당시 신문에는 「당신의 옷차림은 전시생활에 알맞습니까」라는 글이 실리고 「전시생활 개선법」이 만들어져 밍크목도리와 귀금속을 착용하면 처벌당하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극도의 내핍에 적응했고 이에따라 유엔군으로부터 흘러나온 「유엔잠바」와 「KJP패션」이 가장 유행하는 옷차림이었다.「KJP」란 바로 「구제품」의 약자였다. 1953년경에는 나일론이 들어왔다.값싸고 질긴 나일론은 순식간에 보급됐고 반투명의 흰 나일론으로 된 군용 낙하산 기지가 젊은 여성들의 블라우스와 속옷으로 「화려한 변신」을 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국산자동차 제1호인 「시발」이 나왔다.「시발」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뼈대에 드럼통을 펴서 씌운 차였다.엔진과 변속기 등 중요부품은 물론 미제 지프 것을 썼지만 국산화율은 50%나 됐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3월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당시 야당의 구호는 『썩은 정치 물러가라』.이에 대한 자유당의 반응은 『썩었으면 어떠냐,별 놈 다봤다』라는 한마디로 「막가는」것이었다.이같은 후안무치는 곧 이승만 자신의 외침처럼 「한데 뭉친」 국민들에 의해 4·19로 응징됐다. 4·19는 1년만에 「중단없는 전진」을 내세운 박정희의 5·16으로 물거품이 된다.「혁명정부」는 「재건」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이 때 유행하던 「재건 데이트」는 기껏 붕어빵이나 먹으며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데이트를 의미한다.그 만큼 국민들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출범 2년이 채 못된 1963년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다.최초의 국산차 「시발」이 운명을 다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한창 인기를 끌던 국산차 「시발」은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를 조립한 세단형 「새나라」가 나오자 운명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박정희 정권은 당시 국내사업가도 아닌 재일동포에게 자동차공업을 독점하는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김종필씨가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외유길에 오르며 남긴 「자의반 타의반」은 지금 고사성어의 반열에 들만한 고전이 됐다. 60년대는 아직 전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다.지금은 몇시간만 정전이 되어도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 되지만 당시는 정전이나 단수는 항다반사였다.집집마다 양초가 필수품이었고 밤에만 물이 나오는 고지대 주부들은 물을 받느라고 새벽을 밝혀야 했다. 그런가하면 70년대까지 입석버스에는 문이 두개로 차장도 둘이었다.여차장들은 저임금속에 끊임없이 수입을 가로챈다는 이른바 「삥땅」의 의심을 받으며 버스회사의 남자직원들보터 몸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래서 어느차장의 『청량리 중랑교가요』라는 외침이 『차라리 죽는게 나요』라는 절규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본격화되었다.「새마을노래」를 귀가 따갑게 듣기시작한 것도 이 때다.「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마을의 새마을회관에 높이 내걸린 스피커를 통해 국민들의 새벽잠을 깨웠다.이 노래는 어느 틈엔가 폐차 직전의 낡은 쓰레기차에서나 가끔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국민들을 더욱 옥죄어 나갔다.1975년에는 금지곡이 양산됐다.「아침이슬」은 물론이고 『자 떠나자 고래잡으러…』로 시작하는 「고래사냥」까지 묶였다.박대통령을 「고래」로 착각했던 것일까. 박정권은 마침내 「그 때 그사람」이라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울린 몇발의 총성으로 1979년10월26일 막을 내렸다.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1980년9월1일이었다.TV에서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곧 『전두환대통령께서는…』하는 「땡전뉴스」가 시작된 것도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금지인물」이 된 탤런트도 있었다.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도 이 시기에 나왔다면 금지곡이 되었음은 물론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가 보안사가 운영하는 「서빙고호텔」에서 한동안 숙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군 출신 대통령에 대한 편치 않은 국민감정은,당시 청와대에서는 영화 「사관과 신사」를 「토관과 신토」로,미당 서정주선생을 「말당선생」으로 읽는다는 우스개를 낳았다.연희동에서는 아직도 「신사불이」를 위해 수입식품을 먹지 않는다던가. 전대통령으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노태우대통령과 그 이후 시대는 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현실이다.그러나 이 시대도 불과 얼마뒤면 다시 과거사가 될 것이다.한 시대의 평가는 이처럼 공식적인 역사기록 속에만 남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세계질서의 중추역 꿈꾼다(일본 「21세기 야망」:1)

    ◎돈·기술·정보·인재… “일본은 있다”/하이테크산업에 전력투구… 초일류 유지/군사·정치 대국화로 줄달음/“슈퍼파워 재팬” 냉정한 직시로 「불행한 역사」 반복 막아야 일본이 전후 50주년을 계기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일본은 패전 50주년이 되는 19 95년을 맞아 과거청산을 「선언」하고 유엔상임이사국 진입을 적극화하는등 경제 뿐만아니라 정치·군사면에서도 강대국을 지향하고 있다.광복 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변화하는 일본과 그들의 21세기 위상을 조망해본다. 일본의 1995년을 여는 아침해는 그동안 움츠렀던 전후 반세기의 역사를 거부한다.경제적 「슈퍼 파워」 일본은 패전후 50년동안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이제는 과거 침략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며 국제정치무대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의 하루는 해가 후지산 너머로 진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빅토리아여왕의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이다.일본의 첨단기업과 연구소의 하루를 마감하는 불이 꺼지기전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는 일본 공장과 연구소의 불이 켜진다.지구촌 곳곳의 일본공장에서 세계시장을 압도하는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의 엔화는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패전의 참담한 잿더미속에서 경제신화를 창조한 일본.그러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일본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일본이란 말처럼 우리에게 착잡한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도 드물다.가까우면서도 그러나 결코 가깝지않은 나라.냉정한 이성적 판단으로 보려해도 가슴속 감정이 앞서는 나라.그러나 미국·유럽과 함께 21세기 세계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일본의 변화하는 21세기 위상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이 「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 실현이라는 전략적 선택의 성공에서 우선 찾을 수 있다.전후 일본정치의 틀을 만든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국가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성장에 집중투자하는 국가정책을 채택했다.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우산아래 매년 국민총생산(GNP)의 1% 미만만을 방위비에 지출하며 경제분야 투자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성장의 결정적 도약의 계기는 잘 알려진대로 한국전쟁이었다.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당시 중국·소련등 공산주의세력의 팽창을 막는 방패국가로 일본의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했다.미국은 이에앞서 일본군대의 광적인 팽창주의 야심과 그들을 지원했던 재벌의 유착관계가 아시아침략의 원인이었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민주화란 이름아래 이들의 해체를 단행했다.재벌해체 이면에는 사실 일본경제체제를 파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반공·보수주의로 급선회 일본을 아시아 반공국가 지원을 위한 군수기지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경제지원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본의 경제발전은 그러나 미국의 지원과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이라는 적절한 전략적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정치적 안정과 관·민협동체제 아래 정말로 열심히 일한 일본의 근면한 손과 과학적 두뇌의 기술인맥이다.그들은 선진기술을적극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럽이 지적오만에 빠져있을 때 밤을 밝히며 우수한 상품을 개발·생산해냈다. 일본은 또 미국이나 유럽이 「개인의 현재를 위한 소비」를 즐길 때 「일본이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맺다.전후 일본은 산업시설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자본부족도 극심했다.그러나 국내 저축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지며 많은 돈을 저축했다.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었던 게이샤(일본기생)들조차도 미군에게서 받은 달러를 암시장이 아니라 은행으로 갖고 갔다고 한다.일본정부는 저축된 자금을 우선순위가 높은 산업발전에 집중 투자했다.지금은 자본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은 미래를 예비하는데 있어서 저축 뿐만이 아니라 인재를 아끼는데도 탁월했다.일본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과 전쟁의 패배라는 참담함속에서도 폐허가 된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우수한 인재들을 전쟁의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다.그 방패막이 역을 맡았던 것이 일본해군의 단기 장교제도다.일본은 「단기 현역해군주계과사관」이라는 제도로 우수한 인재들을 온존시켰다.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육군 쫄병으로 징병되어 전장에서 이름없는 병사로 죽어가서는 안된다.그것은 일본의 손실이다.인재를 남겨놓지않으면 일본은 멸망한다』.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단기 해군장교로 임관했던 3천여명의 인재들은 전후 관료·기업·경제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오늘의 일본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인재를 아끼는 것은 일본의 기업관에서도 잘나타난다.일본은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보지않는다.인간을 교육을 통해 부가가치가 더욱 높은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가치창조자」로 보고 있다.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기업관을 배경으로 일본기업은 특히 역경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일본기업은 70년대 1·2차 석유위기를 맞자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로 바꾸고 하이테크화를 서둘러 경쟁력을 강화했다. 1985년 9월 22일.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진 5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가 열렸다.그 결과는 엔고의 가속화를 알리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로 나타났다.플라자 합의 직전의 환율은 1달러당 2백40엔이었다.그러나 89년초에는 1달러에 1백20엔으로 엔의 가치가 두배나 올랐다.일본경제를 이끌어온 자동차·전자등 수출기업들은 한때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그러나 일본기업들은 경영의 합리화·하이테크화에 박차를 가하며 엔고를 극복 국제경쟁력을 더욱 높였다.그러한 노력은 지금 더욱 강도를 높이고 있다.플라자 합의는 전후 40여년간 세계경제에 군림해온 「막강한 미국」의 종언을 의미한다. 일본 첨단기업들은 80년대 기술의 스승인 미국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석권했다.컴퓨터계의 거인 IBM까지도 일본전기(NEC)·히타치·도시바·후지쓰등 일본 첨단기업들의 도전으로 경영위기를 맞았다.세계의 거리에는 도요타·닛산·혼다등 일본자동차가 질주하고 있다.소니가 미국의 혼이라고 하는 콜롬비아영화사를 구입하고 미쓰비시가 록펠러빌딩을 사들인 것을 비롯,일본기업들은 엔고를 활용,「세계의 부동산」을 사들였다.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기술의 광인」들도 세계 일류를지향하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데 땀을 흘려왔다.일본은 더욱이 미국의 「정보 슈퍼하이웨이」 구상에 대응,정보분야 투자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신화는 통계지표(93년)로 더욱 분명해진다.무역흑자 1천4백억달러,해외순자산 7천억달러,1인당 국내총생산(GDP)3만3천7백64달러,외환보유고 9백90억달러,차관공여 2천4백10억달러,그 앞에는 모두 세계 최고라는 접두어가 붙는다.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세계경제의 거의 15%를 차지하고 있다.일본의 93년 GDP는 4조2천75억달러로 미국(6조2천8백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1950년 일본의 GNP는 미국의 20분의 1에 지나지않았었다.그러나 지금은 거의 3분의 2수준이며 2000년대는 미국과 비슷해질 전망이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그의 새로운 저서 「21세기 준비」에서 「일본은 기술에 의해 주도될 미래 변화에 가장 준비가 잘돼 있는 나라」라고 지적했다.미래학자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볼때 과거의 지중해 시대에서 현재의 대서양시대를 지나 앞으로는 태평양시대가될 것으로 전망하며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국가권력문제의 권위자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과거 4반세기에 걸쳐 세계경제에서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일본의 몫이 두배로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국제질서와 세계경제 게임룰을 만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세계 제일의 무역적자국과 채무국이 되며 국가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에서 빌려오지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전락했다.미국만이 국제룰을 만드는 시대는 지났으며 일본도 경제게임룰을 만드는 강대국이 됐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앞으로의 세계는 국경없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냉전의 이데올로기 전쟁시대가 끝나고 국경없는 경제전쟁시대가 도래하며 일본이 쌓은 부의 축적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일본은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에 따른 자유무역의 확대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볼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고서는 예측한다.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만 안주하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사실이다.경제력에 걸맞는 정치·군사적 영향력도 행사하겠다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이다. 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보고 있는가.우리는 일본의 실체를 감정적 판단으로 덮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기에 지나지 않는다.일본은 역사속에 존재하며 강대국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바로 보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광복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뜻깊게 하는 참다운 역사인식일 것이다.
  • “검증 거친 객관적 사관정립 급선무”(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

    ◎발제 정담/사료 발굴·생존자 증언 채록 서둘러야/미·러에 흩어진 「6·25문서」 정사 필수/정치적 시각 배제,종합분석 시도할때/「유례없는 고속성장」 긍정적 측면 부각하는 것도 필요 □참석자 김용호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서울대 정치과및 동 대학원 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 박사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 서울대 정치과및 동 대학원 졸 미국 피츠버그대 정치학 박사 서울대교수·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이종은 국민대교수 서울대 정치과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켄트주립대 정치학 박사 올해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다.그 반세기는 현실적으로 우리와 함께 해 온 당대사로서의 현대사에 해당한다.그럼에도 우리 현대사는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를 범해왔다.이른바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에 입각한 양극화 시각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해부터 현대사의 객관적 정립을 위한 장기 시리즈 「새로 쓰는 현대사」를 연재키로 했다.이에 앞서 전문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통해 오늘날 현대사연구의 동향과 문제점을 짚어 보고 올바른 역사인식의 지평을 여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김학준이사장=우리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최근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특히 1980년대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해방이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많은 업적이 나왔습니다.그런데 80년대 이후에는 좌파적 시각이 주류인 것처럼 등장했어요.이것 때문에 해방 이후 역사서술에 왜곡된 부분이 많았고 오해된 부분도 많았습니다.이제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먼저 한국현대사에 관한 서술 동향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김용호교수=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커진 배경에는 탈 냉전의 국제적 변화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에 따라 과거와 다른 여러가지 시각과 이론의 분석틀이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일별하면 아직도 총론적 연구가 많고 각론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건이나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깊은 연구는부진합니다.그리고 김이사장의 지적처럼 이제까지 현대사에 대한 분석틀이 너무 객관적이지 못했어요.객관적인 평가라는 것은 정치이념이나 시각에 맞추어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으로 정확성을 기해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종은교수=흔히 좌파적 시각은 수정주의적,우파적 시각은 전통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전통주의적 시각이나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어떠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검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있는 만큼 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 진다면 그것을 구태여 어떤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보다 사실을 사실로 보는 역사인식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이사장=저로서는 무엇보다 해방뒤 역사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사료지요.사료에 입각해 역사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그 것이 과학적인 접근의 출발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입니다.그런 점에서 볼 때 그동안 사료 발굴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사실 우리 학문 풍토에서 보면 분석을 제시하기에 앞서 주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이런 점에서 서울신문의 이번 특집이 사료발굴의 중요성을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교수=한국현대사와 관련된 자료발굴에 있어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격동기에 활약한 많은 분들의 기억을 하루 빨리 담아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지금 이 시기에 그분들의 기억을 담아두지 않으면 고령인 만큼 유실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교수=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록을 잘 남기지 않지요.그런 점에서도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증언은 중요합니다. ▲김교수=사료는 체계적으로 발굴되고 보존·정리되어야 합니다.정부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이같은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요.외국에 흩어진 많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해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또 사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많은 자료를 갖고 있는 만큼 서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김이사장=해방 이후 좌파적 시각은 북한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정권이고 남한은 외세의 앞잡이들인 만큼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라고 설명해 왔지요.그러나 최근 그런 사관이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있습니다.새로운 사료가 발굴된 결과 입니다.1991년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전후해 옛소련에서는 북한정권이 어떻게 성립되고 김일성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으며 북한정권이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었습니다.이런 자료를 종합하면 결국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출발했고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들이 드러났지요.이렇게 되니까 과거 북한이 민족사적인 정통성을 계승한 정권이라는 식의 해석은 설 땅을 잃어버렸습니다.자연히 왜곡된 시각이 교정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이렇게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료의 발굴과 정확한 진상의 파악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됩니다.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자료는 어디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김교수=미국에는 6·25 때 노획한 문서들이 연방문서처에 있습니다.북한의 정권수립 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이지요.또 트루먼기념도서관과 맥아더장군기념도서관·케네디기념도서관·존슨기념도서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러시아의 경우 외교부문서처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문서처·러시아국방부문서처·KGB문서처 등 네곳은 꼭 찾아보아야 합니다.중국에도 특히 북경대학에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이사장=이제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 연구의 한계점은 무엇이고 제기되는 문제는 또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김교수=현대사 연구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되었다는 점이지요.예를 들어 그동안 민주화 노력 과정에서 정치체제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국내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한 것 등이 이유가 되겠지요.그러나 앞으로는 긍정적인 측면도 객관적으로 균형있게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너무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 성숙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교수=그렇습니다.서구에서 2백년에 걸쳐 이룬 부국강병과 민주화를 우리가 따라잡았다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불과 40∼50년만에 어느 정도 이룬 셈입니다.그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 때문에 우리 역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지요.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 만큼 성장한 나라도,우리 만큼 민주화된 나라도 없다는 인식이 옳은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그런데 그 왜곡이라는 문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왜곡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보면 있을만한 이야기지요.왜곡된 시각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나올만한 이유는 다 있었습니다.좌경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친일 매판자본가들의 존재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또 산업화하고 부국강병하는 과정에서 소외계층이 생기고 계층간에 격차감이 생긴 결과 그같은 시각이 나온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그것을 호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오히려 그 이유를 세심히 분석해 앞날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이사장=좋은 지적이었습니다.그러면 건국 이후 우리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저는 발전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진상에 가깝지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지난날 부정 일면으로 매도하는 분석이 많았고 그 결과 우리 국민이 걸어왔던 길이 전면적으로 매도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우리가 발전론의 시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로서 우리 만큼 빨리 이같은 발전을 이룩한 나라도 드뭅니다.우리가 이런 것을 긍정하는 측면에서 지난 50년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교수=그렇습니다.우리의 지난 50년간과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나 합니다.우리와 1945년 같이 출발한 남미나 필리핀 인도 대만 같은 나라들과 비교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위치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리고 역대 정권이 자기 정권을 정당화 시키는 방편으로 선임정권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연속성보다는 단절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으나 이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긍정적이고 균형된 시각이 필요합니다.
  • “3천명 전장학살 괜찮다”/일 아베의원/남경학살 관련 또 망언

    【도쿄 연합】 일본 야당의 단일교섭단체인 「개혁」의 아베 모토오 의원(민사당)이 남경대학살과 관련해 『전쟁터에서 2천∼3천명의 학살이라면 용서될 수 있다』고 또다시 망언을 늘어놓았다. 아베 의원은 7일 중의원 세제개혁특별위 심의에서 질의를 통해 『세금사용과 관련한 문제』라고 전제한 뒤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상에게 『(남경학살에서)30만명을 학살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라고 묻고 보다 확실하게 조사해볼 용의가 없느냐고 추궁했다. 아베 의원의 이같은 발언이 계속되자 여당측으로부터 야유가 계속 쏟아지는 등 소란이 벌어지면서 나중에 아베 의원은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다』며 발언을 철회했으나 통합신당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야당진영의 역사인식도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국회 「12·12」처리 싸고 파란

    ◎야서 「불기소」 철회 요구… 3차례 정회끝 유회 국회는 대정부질문 마지막날인 4일 본회의를 열어 사회·문화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을 벌였으나 민주당이 「12·12 사건」과 관련한 정부측 답변에 격렬하게 항의,여야의원들 사이에 고함이 오가고 몸싸움까지 벌어져 세차례나 정회되는 진통을 겪은 끝에 자정을 넘겨 자동유회됐다. 민주당은 이날 하오 본회의가 정회된 뒤 의원총회와 최고위원회의를 잇따라 열어 「12·12」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처분의 철회등을 요구하고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본회의 참석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날 대정부질문 예정자 8명 가운데 4명이 질문을 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오는 7일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12·12」문제를 예산안심의및 상임위활동등 정기국회 일정과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방침이어서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한차례 공전됐던 정기국회가 다시 파행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커졌다. 민주당은 특히 재야단체등과 함께 「12·12」사건에 대한 공청회를 여는등 장외투쟁을 병행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이날 본회의는 이영덕 국무총리와 김두희 법무부장관이 「12·12」와 관련해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원들이 의석에서 일어나 집단적으로 항의하면서 모두 세차례 정회됐다. 여야는 이날 하오 본회의가 세번째 정회된 뒤 원내총무회담을 갖고 본회의의 속개문제를 협의했으나 서로 주장이 맞서 절충점을 찾지 못했다. 한편 이총리는 이날 답변에서 『12·12 사건은 검찰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범법행위를 인정함으로써 객관적 실체가 드러났다』고 말하고 『이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결단으로 판단되며 이땅에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건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사인식이며 준엄한 경고』라고 강조했다. 이총리는 이어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해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12·12에 대한 역사적 규정을 내렸고 검찰은 이에 대해 엄격한 역사적 사실과 증거에 입각한 법적 평가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총리는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결정이 미흡하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검찰이 법률적 측면은 물론 정치·사회적 측면등 국가의 장래에 미치는 영향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법률적 결정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이총리는 「5·17」문제에 대해서는 『5·17에 대한 수사가 서울지검에서 진행되고 있어 현단계에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이총리는 관련자들이 받은 서훈을 취소하라는 야당의원들의 요구에 대해 『서훈의 취소는 공적내용을 허위로 기재하거나 유죄가 확정되는 때에 한하므로 장기적으로 면밀한 검토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김두희법무부장관은 『12·12 관련자들은 통치권을 침해하고 군내 지휘계통을 문란케 하는등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으로 우리의 헌정사를 후퇴시켰다』고 규정한 뒤 『그러나 이들을 기소하면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다시 거론돼 국가분열과 대립상이 재연되고 국가의 안정은 물론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으로 판단,검찰은 심각한 고심 끝에 그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답변했다.
  • 중,일 과거문제 제기/새달 APEC서

    【도쿄 연합】 중국은 내달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비공식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과거 전쟁 문제 등을 일본에 제기할 방침이라고 교도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중국의 당가선 외교 부부장(차관)은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은 내달 인도네시아의 APEC때 있게 될 강택민 국가주석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와의 정상 회담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역사인식과 대만 문제를 의제로 제기할 방침』 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중국은 지난 89년 천안문 사건으로 국제적 고립 상태에 놓인 이래 지금까지 일본의 과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가급적 억제하는 자세를 보여 왔다. 당부부장은 이날 『중·일 관계는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으나 일부 문제에서 곤란·잡음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 중국총리의 한국방문(사설)

    이붕 중국총리가 김영삼대통령의 초청으로 31일부터 5일간 서울을 공식방문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수교2년만에 중국총리가 서울땅을 밟게된 것이다.작년 5월의 중국 외무장관에 이은 총리의 첫방한이다.우선 반가운 소식이며 환영할 일이다.한중관계의 착실한 발전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수교이후 우리는 외무장관과 대통령이 두차례나 중국을 방문한바 있다.그자체 만으로도 한중관계의 발전을 상징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것을 더욱 가속시킬 중국정상의 답방이었다.최고실력자 등소평이 서울에 나타난다면 그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일이겠지만 건강상 불가능하다면 국가주석 강택민의 방한이 이루어지기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그런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총리방한이라 할수 있다.그러나 중국의 권력구조적 특성상 총리도 준정상에 속하며 그가 행정수반으로서 방문하는 이상 그와는 별도로 주석도 곧 방한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란 점을 우리는 주목한다.중국외교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것이 특징이다.게다가 북한을 배려해야 하는 중국의 특수한 입장도 이해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에대한 배려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를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한중관계는 이미 연간 15만명의 인적교류와 1백40억달러의 무역고 그리고 각종협정등 모든면에서 중북관계를 크게 능가한지 오래다.중국의 국익차원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북한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사실을 중국은 명심해야 할것이다. 뿐만아니다.중국은 세계및 동북아적 역사인식을 정확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앞으로 멀지않은 장래에 한반도는 반드시 통일돼야 하고 될수밖에 없다.그리고 통일은 물론 통일한국을 주도하는 것도 한국일수밖에 없다.그러한 한국을 중국의 확고한 우방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국익에 절대적으로 부합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그러한 인식을 기초로 하는 올바른 한반도정책의 추구야말로 한중양국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남북한에 대한 「실리와 의리」라는 등거리의 이중잣대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한국을한반도의 단일실체로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북한의 핵포기와 개방·개혁 유도및 한국주도의 질서있고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지원은 중국이 해야할 책무다. 우리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결국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것으로 믿는다.이붕총리의 이번 방한도 그것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것이 틀림없다.성공적인 방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 민족사관확립의 중추되라(사설)

    국사편찬위원장이 10년여만에 바뀜으로써 「국편위」의 개혁과 개편에 대한 학계의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위원장의 경질과 함께 지난 6월30일자로 국사편찬위원 15명 전원의 임기가 끝나 곧 있을 새 위원의 위촉도 그동안 침체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활성화에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편위」는 민주사의 편찬을 비롯,사료수집·조사·보관및 자료간행 등을 기본적인 기능으로 하고 있다.해방되던 해 「국사관」으로 출범했으니까 반세기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올바른 역사인식은 타당한 「시대정신」을 창출해내고 그것은 그 사회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법이다.인간은 정확한 역사인식을 통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따라서 국사의 편찬과 연구를 총괄하는 「국편위」의 중요성은 실로 막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 김영삼대통령이 신임 이원순위원장에게 『국사편찬위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 바로잡기와 바로 세우기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한 당부도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국사연구가 추구해야 할 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올바른 역사관을 토대로 하는 민주사관의 정립이라고 하겠다.일제 식민지지배를 통해 왜곡되고 격하당한 우리역사의 줄기가 제 모습으로,제자리에 복원되어야만 한다.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민족사관의 확립은 더욱 절실한 명제로 대두된다. 그럼에도 최근 사학계일부에서는 진보주의라는 미명하에 근·현대사를 왜곡기술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96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의 1차 시안에서 연구팀이 제시한 용어들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정서를 배신하는 황당한 내용들이다.「제주도 4·3사건」을 「4·3항쟁」으로,「대구폭동사건」을 「10월항쟁」으로,「동학농민운동」을 「농민전쟁」으로 기술하는등 역사왜곡이 극심한 북의 사회주의시각과 유사한 관점을 보였다.검증되지도 않은 소수의 학설을 교과서에 기술하려 했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독선이요,오류다.사학계 일각의 이런 시각을 우리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없다.신임 위원장의 취임과 새 편찬위원의 위촉으로 새 모습을 보일 「국편위」는 학계의 이같은 혼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직제의 개편이나 연구위원의 확충,발간사업 확대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연구를 주도하는 핵심기관으로서 올바른 사관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사관의 기틀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믿는다.일부 좌경성향의 사학자들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연구성과와 논리로써 오류를 시정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정신대 배상 등 「진정한 속죄」 없다/일 총리 전후청산 담화 분석

    ◎“사죄” 반복… 「평화계획」 원칙만 나열/주변국 불신 씻기엔 여전히 미흡 일본정부가 8월31일 발표한 「평화우호교류계획」은 그동안 자신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과거사로부터 자유로워져 국제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일본의 전후청산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전후 반세기를 맞아 이같이 「전후청산」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일본의 과거침략행위는 그동안 일본외교의 중대한 장애물이었다.일본은 한국,중국등 아시아 주변국가들에 대해 끊임없는 「사죄외교」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와 도이 다카코 중의원의장은 최근에도 동남아시아와 중국등을 방문,사죄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사과와 보상은 받아들이는 쪽에게는 언제나 미흡한 것이었다.독일과 비교할때 일본의 보상은 너무 미흡하다는 것이 국제적 중론이다.일본사회저변에는 더욱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보수우익세력의 역사왜곡 인식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이 때문에 일본은 아시아 주변국으로부터 항상 불신을 받아왔다. 일본은 이같은 불신을 없애기 위해 앞으로 10년간 실시할 1천억엔(약8천억원) 규모의 「평화우호교류계획」에서 ▲역사분야의 연구 ▲인적교류등을 강조하고 있다.한국·중국등 아시아국가의 역사분야 연구자 지원과 자료수집 및 지적교류·청소년교류 등을 통한 대화와 상호이해촉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무라야마총리는 또 담화에서 『과거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나타내고 불전의 결의로 세계평화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그러나 그의 다짐은 일본이 지금까지 반복해온 발언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무라야마총리는 전후청산의 최대 현안인 정신대 문제와 관련,『여성의 명예와 존경에 큰 상처를 준 것으로 마음으로부터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나타낸다』고 밝혔다.그러나 그것도 과거에 수없이 반복돼온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일본정부는 더욱이 종군위안문제와 관련,「보상에 대신하는 조치」를 약속했으나 이번에도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일본에서는 최근 민간기금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으며 모금을 위한 국민운동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는 정부보상은 절대 할 수 없다는 일본의 기본방침을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영구귀국문제에 대한 지원을 빠른 시일내에 결정,실시하겠다고 밝혀 어느정도 진전된 자세를 보였다.그러나 구체적인 대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무라야마총리는 담화문에서 『아시아주변국과의 과거사를 직시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래를 이끌기 위해서는 상호이해와 신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그의 이같은 발언은 일본이 주변국가와의 미래지향적 우호관계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일본은 이같이 전후 50주년을 맞아 「평화교류계획」으로 전후처리를 끝내고 새로운 차원의 대아시아정책을 적극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청산 프로그램은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남긴 깊은 상처와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진정한 사죄와 충분한 보상없이 일본의 침략사를 일방적으로 청산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도 일부에서는 나오고 있다.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전후 한시대를 마감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의 반성·사죄와 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교과서내용 감독 철저해야(사설)

    96학년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의 개편을 위한 교육부시안이 31일 발표됐다.이 시안에 의하면 당초 학계연구팀이 마련해 논란을 빚었던 근·현대사의 용어문제가 대체로 현행교과서대로 기술토록 되어있어 우선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지난3월 「국사교육내용전개의 준거안연구」를 맡았던 연구팀들은 1차시안에서 「제주도 4·3사건」을 「4·3항쟁」으로,「대구폭동사건」을 「10월항쟁」으로,「동학농민운동」을 「농민전쟁」으로 기술하는등 역사의 진실을 북의 사회주의 사관에 근접한 왜곡된 시각으로 기술하려하는 듯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었다.연구자들의 주관을 지나치게 노출시켜 객관성이 결여되기도 했던 이같은 용어의 선택은 국민정서에 맞지않는 것이어서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었다. 역사기술에 있어서 용어의 선택이란 사실을 포괄하고 개념을 정립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때문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또한 국가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사관을 기초로 해야 한다.따라서 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결정되어야만한다.역사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은 벗어나야 하지만 균형감각을 갖추는 것이 또한 필수적이다.특히 교과서의 기술에서는 학계의 공통된 연구성과를 반영해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그런 점에서 현행교과서의 용어들을 대부분 그대로 쓰기로 한 교육부의 시안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이라고 본다. 다만 「4·19의거」가 「4월혁명」으로,「5·16군사혁명」이 「5·16군사정변」으로 바뀐 것은 그나름의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현대사는 역사적평가가 미완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사기술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된다. 무엇보다도 연구팀의 시안에서 주장했던 김일성주체사상의 서술을 완전 삭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당한 조치라 하겠다. 대학강단에서 공공연히 주체사상강의가 이루어지고 대학의 교양과목교재가 이적성의 급진좌경사상을 수록,가르치고 있는 사실들이 발견되고 있는 요즈음이다.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으로 무장한 주사파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위협하면서 우리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있는 상황이 아닌가.중고교 국사교과서에주체사상을 서술하겠다는 연구팀의 당초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어떻게 그런 발상이 나왔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교육부의 심의안은 앞으로 1종도서심의위·국사편찬위 등 3단계의 심의 검토를 거쳐 확정하게된다.그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충분한 검토작업이 있을것으로 예상된다.국사교과서란 검증되지않은 일부학자의 학설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지난번 물의를 일으켰던 연구팀의 시안을 교훈삼아 신중하고 객관적인 재편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주기를 기대한다.
  • 한승조교수,이적성교재 「한국사회의 이해」 허구성 비판

    ◎“근형대사서술 북 「조선전사」 복사판”/마르크스주의 시각서 현실진단 “오류”/“한국경제체제 신식민지적 독점자본주의” 악의적 분석/「6·25 책임」 얼버무려 김일성에 “면죄부”/사회관계 「협조」 보다 「갈등」 관계로 서시적 파악 고려대의 한승조교수(정치외교학과)는 29일 경상대교수 9명이 공동으로 집필한 「한국사회의 이해」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한국사회의 이해­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을 냈다.한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 책은 「한국사회의 이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의 마르크스주의적 이해」 또는 「한국사회에 대한 좌경운동권의 시각」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고 비판했다.다음은 한교수의 논문 요지. ▷시각과 방법의 내용과 문제점◁ 갈등과 협조가 공존하는 사회관계를 갈등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은 편파적이다.또 지배자와 피지배자,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전자가 옳을 때도 있지만 후자가 옳을 때도 있으므로 무조건 약자들 편에 서야만 올바른 사회과학이 된다는 말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대립하는 이해관계에서 중립적 입장에 선다는 것은 올바른 사회과학자의 태도가 아닐 뿐아니라 보편타당한 지식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의 기본목표나 전제에 배치된다. ○중립적입장 부당 「한국사회의 이해」는 사회과학을 부르주아 사회과학과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으로 분류하고 전자가 수구적 보수적 과거지향적인데 비해 후자는 진보적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한다.그러나 현대사회과학은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계속해왔으므로 수구적일 수가 없다.마르크스주의는 현대산업사회의 초기단계에서는 적실성을 가졌으나 산업화 중기나 후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게 됐다.따라서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주의자와 같은 시각에서 한국의 현실을 진단 처방하려고 든다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근현대사의 내용과 문제점◁ 저자들은 근대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 때문에 타협한 계층과 끝까지 싸웠던 계층의 구도가 8·15 이후 현단계의 사회구조및 지배권력의 형성과정과 그에 대한 저항운동에도 계속되고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여기에 서술된 한국의 근현대사는 좌경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사회및 역사인식 그대로다.노동자 농민계급이 주도적 역할을 한 적이 없어 보인다.무엇보다도 난감한 일은,이 책의 근현대사부분에서 서술된 역사는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전사의 역사서술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점이다. ○“필연적 전쟁” 주장 이 책은 「분단국가와 한국전쟁」이라는 대목에서 해방 8년간의 시기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을 배태시킨,그럼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삶을 조건지은 중요한 역사적 계기였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또 6·25는 해방직후 국내외에서 일어났던 좌우대립의 결과이며 남북한에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던 민족의 열망이 좌절된데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이런 시각은 한국전쟁의 책임소재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한국전쟁의 최고 주모자인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해방 8년간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실책이 바로 6·25다.6·25는 남북한 국민의 과반수에게 반공의식을 내면화하는 계기가 됐다.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좌익과격분자들이 왜 사사건건 잘못된 전략전술 때문에 실패하게 됐는가를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보수우익세력이 어떻게 해서 좌익세력을 누를 만큼 발전·강화됐는가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의 내용과 문제점◁ 「한국국가의 성격」이라는 부분에서 저자는 한국의 국가적 성격을 내국독점자본의 이익을 기본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제국주의국가 독점자본의 이익을 아울러 대변하는 종속적 파시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저자들은 그들이 거론하는 종속적 파시즘체제이건 관료적 자본주의이건 남한체제보다 북한의 국가성격에 더 적합한 개념을 가지고 어거지로 남한에다 갖다 붙이고 있다.김일성부자에게 종속된 파시즘체제는 바로 북한체제에 꼭 들어맞는 개념용어다.그런데 훨씬 더 적합한 북한에 적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거리가 먼 남한체제만 들먹이는 것은 객관적이고 성실한 학자들의 연구자세가 아닐 것이다. ○종속적파시즘 규정 한국경제체제를 신식민지적 독점자본주의체제라고 성격지우는 것은 너무 악의적이며 현실성이 희박한 분석방법이다.본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보아도 본국이 부유해지고 식민지는 더 가난해져야 한다.그런데 지난 반세기동안 반대로 한국은 급속도로 부유해진데 반해 미국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정치 경제 문화적 지배 종속관계를 가지고 식민지 여부를 말할 수도 있다.두 나라의 힘의 균형이 압도적으로 미국측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한·미간의 의존 협력관계는 한국국민측의 희망이나 요구에 의해 유지된 것이었다. 남한의 경제체제를 독점자본주의체제로 규정하는 것도 현실을 과장 왜곡한 것이다.한국에 굴지의 재벌이 있고 그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그들이 나라의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 교육을 지배하거나 조정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그들을 또 제국주의국가의 독점자본의 종속기관 또는 하청사업체라고 볼 수도 없다.이런 나라의 경제를 신식민지 독점자본주의경제라고 비방하는 것도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경제의 개혁과제로서 첫째로 재벌해체를 강조했다.재벌을 해체하고 업종을 전문화하며 국민기업으로 전환해야 하고 노동자들도 경영참여권을 가지며 경영자와 더불어 책임지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대기업을 무조건 해체하라고 주장함은 경제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주장이다.이와함께 저자가 주장하는 관료적 경제지배의 철폐와 경제민주화,재산보유세나 양도소득세를 대폭 높이는 한편 임차인을 보호하고 임차료 인상을 억제하는 방안,저임금 임금격차의 철폐와 장시간 노동등 생산직 근로자들의 소외및 농업보호정책등도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어린이와 같은 원칙론만 되뇌인 것일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과 위험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이해」는 지배이데올로기란 지배계급의 세계관을 사회구성원에게 침투시켜서 그 세계관에 동조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억제하거나 유도함으로써 그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사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또 저자는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국가안보와 발전·근대화의 이데올로기,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이데올로기,노사협조와 산업평화의 이데올로기,경제안정과 성장·국제경쟁력·정보화사회 이데올로기,교육영역에서의 경쟁 이데올로기등을 들고 있다.이것을 재생산하고 영속시키는 국가기구가 바로 교육기관 언론기관 종교단체들이며 이런 국가기구들은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동시에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방지해 국민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하고 있다.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정치·경제체제를 와해 전복시키기에 앞서서 우선 사상적 정신적으로 부정 파괴하려고 든다.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떠받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반공이데올로기,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이데올로기,경제회복과 국제경쟁력 강화의 이데올로기등을 분쇄하지 않고서 북한이 노리는 남한체제의 적화통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변혁운동 유도 ▷사회운동의 내용과 문제점◁ 「한국사회의 이해」의 한 저자는 농민운동을체제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할 것을 주장한다.그리고 투쟁을 지역적 특수성이 있는 과제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전국적인 농민 일반의 과제해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내가 보기에 민족민주운동은 정치적인 변혁운동이며 혁명활동이지 건실한 사회운동이 아니다. ▷대책과 건의◁ 이런 교수들에 대한 법적 제재나 사회적 응징은 다음 세가지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첫째 교수들을 방치 불문하는 방법이다.둘째는 교수에게 반성의 빛이 있거나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으면 재교육과정을 밟은 다음에야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방법이다.셋째는 그들을 이적행위자로 몰아서 대학에서 응징 제재하는 방법이다. 참고적으로 말해두거니와 과거에 국민윤리나 대학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한 정책과목들은 어용과목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그런 국책과목이 폐기되면서부터 이런 위험증세가 본격화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95년부터 국민윤리는 국가고시과목에서 폐기될 것이므로 좌경사상을 가진 젊은이들도 어려움없이 국가공무원으로 진출할 가능성을 열어놓게 됐다.그 결과 북한정권의 사상교육과 선전선동을 대행해주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는 대학강의및 사회교육이 고개를 들게 됐다.
  • 「전후청산 계획」에 불신만 키운다/되풀이 되는 일지도층 「망언」

    ◎53년부터 계속… 진정한 반성 “회의적”/도처에 군국주의 망령… 현정권에 부담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는 일본의 8월.많은 각료와 일본인들은 매년 8월15일을 전후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정국)신사를 참배한다.사쿠라이 신(앵정신) 전환경청장관의 「침략전쟁 부인」발언은 일본의 이러한 군국주의가 사회저변에 뿌리깊게 남아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쿠라이 전장관(자민당)은 지난 12일 『일본은 침략전쟁이라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지않았다.태평양전쟁으로 오히려 아시아는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났고 경제부흥과 민족 활성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망언은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보수세력의 전형적인 왜곡된 역사관이다.그는 자신의 발언이 한국·중국 등 아시아국가들과 연립정부내의 사회당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결국 14일 사임했다.후임에는 자민당의 미야시타 소헤이(궁하창평) 전방위청장관이 취임했다. 자민당 지도부는 연립정권의 유지를 위해 우선 사회당의 요구대로 환경청장관을 교체한 것으로 분석된다.일본언론들은 사쿠라이 전환경청장관의 발언과 사임파동이 연립정권내의 사회당과 자민당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드러낸 것이며 전후청산과 「비둘기파 정권」임을 강조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 정권에 중대한 타격으로 정권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차원의 문제가 아니다.정권이 바뀌어도 일본의 침략전쟁과 군국주의·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불과 3개월전인 지난 5월에도 하타정권때의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법상이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다.남경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다』라는 망언으로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과 반발이 있자 사임한바 있다. 일본 각료 및 지도자들의 망언의 역사는 길다.그 첫번째는 지난 53년 한·일회담때의 구보다 간이치로 일본측 수석대표의 망언.그는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한국에 유익했다』고 말했다.그후 다카스기 신이치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나카소네 내각때의 후지오 마사오 문부상(84년),다케시타내각때의 오쿠노 세이스케 국토청장관(88년)등의 망언이 계속됐다. 자민당을 중심으로한 일본의 보수·우익세력은 이같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지배의 「은혜론」을 강조할뿐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단절시키려 했던 식민지지배의 고통과 비참함에는 눈을 감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일본은 또 문제의 발언으로 주변국가가 반발을 보이면 사후해명·유감표시와 각료의 사임이라는 편리한 「이중행동」을 반복해오고 있다. 무라야마내각은 전후 50주년을 맞아 전후청산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그러나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올바른 역사인식이 없는 전후 청산은 일본이 과거사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져 다시 군사·정치대국화를 지향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국가들의 불신감만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마침내 남북정상회담 열린다(사설)

    마침내 남북의 정상이 만나게 되었다.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이다.실로 역사적인 대사건이라할 새로운 상황 전개다.우리는 어제 남북의 예비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내달 25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를 본것을 환영한다.남북간에 신뢰와 화해,협력과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획기적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신뢰구축의 전기 어제 남북접촉은 좋은 조짐이다.한번의 협상으로 매듭지은것은 북한이 과거와는 달리 남북정상회동의 실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것으로 평가된다.물론 북한의 의도나 성실성은 더 두고보아야할 것이다.그동안 너무나 여러번 속아왔기때문에,더구나 핵문제의 투명성이 현안이 되고있는 상황이므로 대북 불신이 깊은 것은 사실이다.제재를 모면하기위한 책략인지 아니면 새로운 노선의 시도인지는 앞으로 검증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정상회담이 진실로 남북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신뢰와 화해의 토대를 쌓아가자면 북한의 태도변화와 가시적인 실천이 관건이다.우리는 북한이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고 지금까지의 자세와는다른 성실한 모습을 보여줄것을 먼저 기대한다.과거와같은 속임수나 시간벌기등의 행태를 보인다면 먼저 우리국민이 용납하지않을 것임을 직시해야할 것이다.우리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국민여론의 합의가 중요한 요소임을 북한도 알아야한다.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는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최고책임자가 모든결정을 내리는 북한체제의 성격상 의지만 있다면 정상회담은 우리의 역사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을것이다.뿐만아니라 만남자체가 갖는 상징성과 역사성 또한 작지않다.무력이나 대립이 아닌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며 긴장도 해소할수가 있다.정상회담은 전쟁과 대립,불신과 반목을 거듭해온 냉전시대의 남북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신뢰 협력과 통일의 새로운 방향으로 거보를 내딛는 큰 계기가 될수있다. ○북의 태도변해야 또한 동서냉전체제가 종식된 이후에도 유일한 냉전지대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낡은 체제가 와해되는 조짐으로 볼수도 있을것이다.자유민주주의체제의 발전을 겨냥한 문민정부의체제정비가 이루어진 단계에서 맞게되는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우리가 이런 역사인식과 자신감을 가지고 주도해나가야 할것이다. ○총체적 단합필요 역사적인 중요성과 현안해결의 기대가 클수록 정부의 접근은 주도면밀하게,냉정하게 해야할것이다.핵문제,이산가족상봉,경협,신뢰구축,통일방안등 많은 과제가운데 우선순위를 두어서 완급을 가려서 대처해야할 것이다.기왕의 남북간의 합의가 충실히 이행되도록 보완해나갈 필요도 있다.핵문제를 포함하여 전후질서의 청산문제등 주변국들의 이해와 관련되는 문제들은 긴밀한 공조하에 추진해야한다.무엇보다도 우리국민의 수준에 맞는 당당하고 열매있는 회담이 되도록 준비에 중지를 모아야겠다. 정상회담은 한번으로 끝나는 축제적 행사가 아니라 남북의 문제를 논의하는 대화체제가 되어야한다.그런 관점에서 대화시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내부적 대화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남북정상회담의 국면은 위기대응에 못지않은 우리내부의 총체적 단합을 요구한다.우리내부에서 북한의 노선을 추종하는전위조직들이 대화국면을 틈타 준동할때 남북정상회담과정은 왜곡되고 저해받을 가능성이 큰것이다.이런 반대화세력에대해서는 북한에 오판을 주지않기위해서도 더욱 엄정히 대처해야한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런점에서 우리는 야당과 재야등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자제와 분별을 실천해야한다고 본다.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통상적인 국내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하지말고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는 초당적인 협력자세를 실천해주기바란다.회담에 임하는 정상을 나무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그 피해가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갈수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국론을 통일하고 국력을 모으는 데 협조함으로써 정상의 협상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정치인들의 책임있는 태도이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유례없는 대화기회를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열쇠는 국민들의 성숙한 자세다. 정상회담의 합의는 이제 천리길을 내딛는 첫걸음이다.성급한 기대나 통일환상은 금물이다.정부를 신뢰하고 확고하게 밀어주는 슬기와 차분하고 신중한자세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매를 거두도록 해야한다.
  • 한국미술사 정립 고유섭선생 재조명 활발

    ◎추모학술지 「문화사학」 창간/후학 황수영·진홍섭박사 등 우현 기일맞춰 첫 호 발행/백제∼통일신라 석탑,약식론 의거연구/개성박물관장 시설 「송도의 고적」 등 저술 우리나라 미술사를 학문으로 정립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우현 고유섭(1905∼1944년).26일로 50주기를 맞는다.이에 따라 후학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문화사학」을 창간했다.한국문화사연구회가 창간한 이 학술지는 우현을 추모하는 2편의 글과 함께 15편의 논문을 실었다. 추모의 글은 우현의 학맥을 이은 제자 황수영 전동국대총장(우현 50주기에 생각나는 일들)과 진홍섭 전이화여대교수(우현 장서 50년)가 썼다.이들은 우현의 학문세계와 학풍을 다루면서 연구활동과 관련한 일화들을 회고했다.가장 뚜렷한 학문적 업적으로는 백제와 신라,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의해 체계화 했다는 사실을 꼽았다. 이 연구결과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한국탑파의 연구」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모양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라할 수 있다.그래서 우리 미술사 연구의 역작으로 평가된다. 이 밖에도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들을 꾸준히 발표했다.이들 글은 제자들이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한국미술사및 미학론고」(1963년),「조선화론집성」(1965년),「한국미술사론총」(1966년),「송도의 고적」(1977년)등이 그것이다.그는 민족 항일기에 국내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우리 미술사를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이기도 하다. 인천 출신으로 보성고보를 나와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했다.1930년 졸업후 미학연구실 조수로 일하면서 고대미술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10여년간 근무했는데 주요 논문들은 모두 이 무렵에 쓴 것이다.특히 고려의 고도 개성의 유적과 유물에 애정을 쏟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현50주기 특집으로 「문화사학」을 창간한 한국문화사 연구회는 지난 91년 고고학및 미술사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학술단체.회장 정영호박사(한국교원대)는 창간사를 통해 『우현의 학문속에는 역사인식이 짙게 깔려있다』면서 『그의 미술사 연구는 단순한 미술사에 그치지 않고 문화사로 평가 받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이를테면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를 노래하면서 동해바다의 대왕암을 일찍이 문무왕의 능침으로 지적한 것은 역사적 안목이라는 것이다. 「문화사학」창간호에는 일본에 건너간 석탑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히는 「재일 고려석탑 2기」(정영호),「9세기 신라 석조부도의 고찰」(박경식),「금강산의 이형석탑」(김희경),「동서문화의 교류」(남석환)등 새로운 시각의 연구논문이 수록되었다.「문화사학」은 매년 6월26일 우현의 기일과 12월16일 등 2회씩 간행할 계획,한국문화사연구회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도 회원을 두고 있다.
  • 채명신장군이 말하는 「우리를 지키는 길」

    ◎“국민 깨어있어야 불행 막는다”/“유사시 나부터 희생” 각오로 뭉쳐야/군에 따뜻한 애정과 격려 절실한 때/탄광속 학살 등 공산군의 잔학행위 지금도 생생… 북 평화손짓 늘 경계를 최근 북한핵문제로 한반도 정세가 극히 미묘해 지면서 올해 6·25는 예년과 달리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6·25와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의 산 역사」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69·예비역중장)역시 이번 6·25를 맞아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나 않을까 며칠째 밤잠을 설치고 있다.채장군은 황해 곡산 출신으로 46년「같이 일하자」는 김일성의 권유를 뿌리치고 공산치하에서 1년반만에 남하,47년 소위로 임관(육사5기)한뒤 야전을 누빈 맹장.6·25 44돌을 앞두고 자그마한 정원이 깔끔하게 가꿔져 있는 용산구 후암동55 자택에서 채장군을 만났다. ­6·25 개전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당시 북한병력은 20만여명으로 한국의 2배에 이르렀습니다.공산군은 일요일 새벽 4시 주공격 방면을 의정부·개성일대로 삼고 최신형 T34전차 1백50여대를 집중시켜 남침에 나섰습니다.한국은 이 지역을 7사단이 맡고 있었으나 예하 1개연대는 온양에 위치해 2개연대만이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더욱이 5월이후 비상경계상태에 있던 군은 전쟁발발 며칠전 경계령을 해제,농촌병사들은 농번기일손돕기를 위한 휴가중이어서 전후방 병력은 평소 절반수준이었습니다.또 연대장 이상급 장교들은 24일 저녁 서울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식 축하 댄스파티에 참석,새벽녘까지 술을 마시고 취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댄스파티에 만취 특히 전방에서 새벽 6시쯤 국방장관에게 전화로 비상을 알리려 했으나 보좌관이 『장관님은 일요일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전화를 연결시켜 주지 않았으며 육군총장집에서도 『주무시고 있어 깨울 수 없다』고 전화를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사기등 의식은 어땠는지요. ▲전쟁초기 북한군의 사기가 남한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그러나 대한민국의 운이 좋아 미국이 전쟁발발 한달여만에 조속히 참전하게 됐으며 북한이 3일만인 28일 서울을 점령한뒤 이상하게 7월3일까지 더이상 남하하지않고 시간을 허송세월해 아직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미군의 참전이후 국군도 사기가 충천해 북한을 다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6·25당시 소대장과 중대장·대대장으로 직접 전투를 벌였는데 공산군에 대해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공산군은 참으로 잔혹했습니다.국군이나 민간인은 물론 동료전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북한군에 밀리다 반격에 나설 당시 대대장으로 죽령점령을 위해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치열한 격전끝에 죽령을 확보했는데 죽령터널안에서 시꺼먼 연기가 치솟으며 악귀형상을 한 사람들이 엉금엉금 기어나오고 있었어요.처참한 전쟁에 단련된 부대원들도 이들을 진짜 귀신으로 생각하고 깜짝 놀랐습니다.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니 이들은 북한군 부상병들이었습니다.터널을 야전병원 겸 유류저장창고로 사용하던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부상병이 잔뜩 있는 그 곳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터널 입구에 있던 부상병들이 살겠다는 의지로 화상을 입고 피범벅이 된채 간신히 기어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전장병들은 통곡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북진이 늦어지면 그만큼 동포들이 흘리는 피가 많아진다고 말하던 일이 생각납니다.탄광등에 갇혀 떼죽음을 당한 동포들도 엄청났습니다. ○역사교훈 배워야 ­최근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는데 전쟁을 막기 위해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될까요.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영세중립국 스위스를 침공하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스위스 국민들은 일치단결해 전쟁이 나면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울 것임을 행동으로 히틀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한마디로 스위스 국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경험으로 보아 장병정신무장의 지름길이 무엇입니까. ▲장병들이 의식은 몇시간의 정훈교육이나 높은 계급자의 훈시로 절대 전환되지 않습니다.경험을 얘기하면 4·3폭동때 처음 일선 소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자 모든 소대원의 눈빛이 적대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중대장은 이미 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밤새 기도하다 새벽녘에 『좋다.그들사이로 뛰어들자』고 결심하고 숙소를 소대막사로 옮겼습니다.아픈 병사를 보면 죽을 끓여다 주며 간호하고 잠자다 모포를 걷어차는 사람은 모포를 덮어주고 해서 친동생처럼 병사들을 대했습니다. ○「골육지정」 필요 그 결과 일주일만에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당시 중대장이 저격병을 보냈으나 몰래 신변보호를 해주던 소대원들이 그들을 먼저 쏴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습니다.그때 부대통솔은 골육지정임을 깨달았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전쟁은 병사들이 하는 것이고 병사들은 소대장·중대장을 위해 싸웁니다.그 것이 전력입니다.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 3천명도 모두 빨갱이는 아니었습니다.주동자들이 그렇게 이끌었습니다.그러나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을 돌봐줘야 합니다.월남전 고엽제후유증환자들이 보상을 받으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냉대하면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습니까.다치면 나만손해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북한의 핵이 걱정이 아니라 위기때 전방 소·중대장과 병사들이 얼마나 싸워줄 것인가를 염려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간의 정상회담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며칠전만해도 김영삼대통령에게 험담을 퍼붓던 김일성이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꾼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만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지금까지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해온 김일성이 회담을 갑자기 제의해온 것은 유엔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평화제스처로서 미국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어내자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앞으로 진전될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경계를 흩뜨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채장군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우리 민족은 모두 망하게 된다』며 국민이 단결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거듭 말했다.또한 요즘 군을 나쁜 존재로 보는 시각에 대해 0.01%만이 잘못된 사람이라면서 언론의 바른 역사인식이 전쟁을 막는데 중요하다고 몇차례씩 강조했다.노장군이 제시한 전쟁방지의길은 로마의 격언이었다.『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 6·25남침 러시아의 증언(사설)

    러시아 최대 국영TV방송인 오스탄키노방송이 최근 한국전쟁의 내막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극비자료와 기록필름을 공개하고 북한의 남침 내막을 소상히 보도했다고 한다.이 자료들은 러시아에선 처음 공개된 것으로 극비리에 추진된 남침전쟁 준비과정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자간의 구체적 협의 내용과 소련군의 역할및 중국군의 참전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날 방송 진행자로 나온 옐친대통령의 전군사보좌관이며 한국전쟁연구 권위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장군은 스탈린 개인문서고등에 보관된 극비전쟁자료를 직접 들고나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무력통일을 희망하는 김일성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장비를 제공키로 약속하는 한편 모택동과도 긴밀히 협의한 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6·25는 그들 3인이 합작해서 일으킨 범죄적 도발행위였음이 명확해진 것이다.「6·25는 북의 남침」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와 소련 인사들의 증언등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됐었다.그럼에도 북한은 시종일관 「남한의 북침전쟁」이라며 허위선전에 열을 올려왔다.뿐만아니라 구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상당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조차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그들의 교과서나 백과사전에 아직도「북침설」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국내 일부 학자와 대학생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이다.「진보」라는 미명아래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분단전후의 냉전과 열전의 책임이 북에는 없고 남에만 있으며 그 책임이 중·소에는 없고 미국에만 있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매달리고 있기도 하다.북한의 종주국이었으며 전쟁을 허락하고 지원한 러시아 역사기록의 진실을 보고도 북침운운의 그런 논리에 매달릴 것인지 묻고싶다. 북한도 이제는 더이상 날조된 「북침설」을 주장하는 억지는 쓰지말아야 할 것이다.그런 생떼는 이제 더 이상통하지 않게되었다.북침설로 민족과 세계를 우롱해온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밀자료들은 옐친대통령이 새달 러시아를 방문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그동안 가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들이 한층 더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스스로 가해자측인 러시아 대통령이면서 세계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비밀자료들을 넘겨주려는 옐친대통령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 하타 일총리 “나가노 발언 사과”/김 대통령에 전화

    ◎식민통치·침략행위도 사죄 하타 쓰토무(우전자)일본총리는 10일 하오 김영삼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나가노(영야)전법상의 망언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 하타총리는 『이번 나가노법상의 발언으로 한국국민등 아시아 근린 여러나라 국민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자신이 이날 일본의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행한 소신연설내용을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이에 대해 『총리가 국회에서 소신연설을 통해 과거식민지통치를 반성하고 내각이 새로운 각오로 새 역사인식의 토대위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평가한다』고 밝히고 『이번 나가노 법상의 발언은 우리국민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입혔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김대통령은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지향해 나가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전제,『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각료가 다시 과거사에 대한 왜곡으로 역사를 오도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우리국민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하며 올바른 역사인식과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도쿄=이창순특파원】 하타 쓰토무(우전자) 일본총리는 10일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전법상의 망언과 관련,김영삼대통령과 이붕 중국총리에게 각각 전화와 친서를 통해 유감의 뜻을 나타내고 식민지지배와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 북핵 등 긴급사태/한·미와 긴밀대응/하타총리,의회 연설

    【도쿄=이창순특파원】 하타 쓰토무(우전자) 일본총리는 10일 국회에서의 소신표명연설을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와 식민지지배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는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겠다』고 밝혔다. 하타총리는 또 『(과거침략행위에 대한) 깊은 반성위에 평화창조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미래건설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일본의 갈길이며 이를 정치신조로서 언제나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하겠다』고 강조,「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호소카와정권의 역사인식의 계승을 분명히 했다.
  • 뿌리 깊은 일 국수주의/되풀이 되는 망언의 저변

    ◎“군사주의 정당화” 보수세력 공통된 인식 일본의 군국주의 「정당화」 망언으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던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법상이 7일 사임했다.그러나 그가 사임했다고 해서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이번 사건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국제적 불신은 더욱 높아졌다. 하타 쓰토무 총리는 나가노의 망언이 심각한 외교문제화되고 야당의 정치공세가 강화되자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그의 사임은 한국·중국등 아시아국가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국내의 정치공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취임 10일만에 물러나는 나가노법상의 사임은 소수연립정권으로 불안한 출범을 한 하타정권에 중대한 정치적 타격이 아닐수 없다.더욱이 야당이 하타총리의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어 하타정권의 정국운영은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사회당등 야당은 하타정권이 헌법으로 금지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등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호소카와정권과는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가노법상은 사임했지만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에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오늘의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보수세력의 공통된 역사인식이다.나가노 법상은 6일의 기자회견에서 『남경대학살이 정말로 많은 사람을 죽인 대학살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1천명이나 2천명을 죽인것도 대학살이라고 정의할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학살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밝혀 1천∼2천명 정도만 희생됐다는 뉘앙스를 나타냈다.그러나 남경대학살은 수십만명이 희생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의 보수우익을 대표하는 산케이(산경)신문은 더욱이 6일 석간에서 「남경대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희생자수가 확실치 않기때문에 「남경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보도했다.일본교과서에 「대학살」이라고 표기된 것은 정부의 실책이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일본의 보수세력은 태평양전쟁도 식민지해방과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하다.그러나 더욱 섬뜩한 것은 일본의 두개의 얼굴이다.나가노법상이 자신의 망언을 3일만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철회하듯이 일본은 망언과 사죄라는 편리한 이중행동을 반복해오며 국민들에게 우월의식과 국수적 민족주의를 심어주고 있다.일본을 더욱 신뢰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중성때문이다. 일본은 힘이 있을때마다 밖으로 눈을 돌렸다.그것이 일본의 실체다.일본은 지금 전후 축적한 경제적 힘을 정치·군사적 영향력으로 전환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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