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역사성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남해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국물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회장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83
  • [오늘의 눈] 창경궁과 효창원/홍지민 사회2부 기자

    [오늘의 눈] 창경궁과 효창원/홍지민 사회2부 기자

    어렸을 때 근처에 동물원이 있었다. 버스로 예닐곱 정거장 거리였다. 학교에서 봄, 가을로 소풍을 갔다 하면 우이동 그린파크 아니면 동물원이었다.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나 접하던 호랑이나 코끼리 등을 직접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풍경도 생생하다. 커다란 식물원도 곁에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 몇 년 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동물원과 식물원은 없어졌다. 저 멀리 경기 과천으로 이사 갔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섭섭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찬찬히 알게 되면서 섭섭함은 자연스레 사라졌던 것 같다. 창경궁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 유원지로 꾸며지며 크게 훼손되고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창경궁은 1984~1986년 이름을 되찾았고,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제 모습도 찾았다. 문득 창경궁을 떠올린 것은 효창공원 때문이다. 조선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원래 명칭은 효창원이다. 창경궁과 마찬가지로 수난을 당했다. 일제는 1924년 일부를 공원화했고, 1940년 공원으로 정식 지정했다. 1945년에는 급기야 문효세자 묘를 지금의 경기 고양으로 옮겨버렸다. 그렇게 고난을 겪던 그곳은 해방 뒤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애국선열 묘역으로 거듭났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삼의사와 이동녕·차리석·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인을 차례로 안장하고 안중근 의사 가묘도 조성하는 한편, 1949년 자신도 이곳에 묻혔던 것. 하지만 그러한 역사성은 차츰 바래졌다. 이승만 정부 시절 효창운동장이 지척에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 솟았다. 어린이 놀이터도 들어섰다. 노인회관도 지어졌다. 육영수 여사 송덕비도 세워졌다. 요즘은 효창공원에 애국선열 묘역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2002년 백범 김구 기념관이 문을 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공원 이미지가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효창공원이 시끄럽다.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국립묘지로 승격시켜 정부가 관리하자는 취지의 법안을 대표발의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사적 공원, 근린공원으로 구청이 관리해 오던 터였다. 박수 받을 일 같은 데 지역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곳저곳에 결사반대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반대 서명 운동도 있었다. 김광진 의원 측은 그럴 일 없다고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거나 운동시설을 이용하는 데 제약을 받는 게 아니냐, 독립 유공자가 추가 안장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잦아들지 않는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거나 차제에 묘역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러한 정황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국립묘지가 혐오시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안타깝고 황당하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용산구의회가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3년 전에는 애국선열 영정을 모신 사당인 효창공원 내 의열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6대 구의회 의정 활동을 시작했던 그들이다. 애국선열들이 살아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icar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고전소설 낭독하는 이 시대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선생

    [김문이 만난사람] 고전소설 낭독하는 이 시대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선생

    전기수를 아시나요?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스토리 텔링)는 흥미롭기 마련이다. 조선후기 때 전기수(傳奇·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노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고전소설을 낭독해주는 일을 했다. 단순히 책을 보고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가락을 붙여 마치 시를 읊으며 1인극을 하듯이 소설을 낭독했다. 때문에 대부분 머릿속에 외워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말투를 실감 나게 흉내 냈다. 그러다 보면 하하 웃는 사람, 훌쩍훌쩍 우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들은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렸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심청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고전소설이 많이 등장했으며 아울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런 소설을 읽고 싶어했다. 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들이 많았던 터라 이들을 위해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시골 사랑방에서 책을 읽어주는 광경이 등장할 만큼 전기수는 서민사회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기수는 직업적으로 돈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강담사(講談師) 또는 강독사(講讀師) 등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전기수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하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우리의 전통 전기수의 맥을 유일하게 잇는 정규헌(77) 선생. 말 그대로 이 시대의 마지막 전기수인 셈이다. 28일 오전 서울도서관(서울시청 자리)에서 모처럼 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앞선 지난 22일 충남 계룡시의 자택에서 정 선생을 만났다. 그는 집에 소중히 간직해 온 고전소설을 여러 권 꺼내 펼친다. ‘사씨남정기’ 등 김만중의 소설을 비롯해 ‘춘향전’ ‘심청전’ ‘옥루몽’, 그리고 1930년대 나온 ‘삼국지’도 있었다. 대부분 표지와 속지 등은 세월만큼이나 색이 바랬다. 그의 집에는 이 같은 고전들이 30권 정도 보관돼 있다. “1960년대에는 이런 책들을 육전소설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쌀 한 되가 3전이었는데 6전을 주고 책을 사서 읽는 소설이란 뜻에서 그랬지요. 일부에서는 딱지본(딱지치기할 때 사용한다는 뜻)이라고도 했는데 그건 정석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딱지본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가 고전소설을 얼마나 애지중지 여기는지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정 선생의 앞에 놓인 고전소설은 대부분 한글로 쓰였으되 띄어쓰기가 전혀 안 된 것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이 책으로 줄줄이 읽어 나갈까. 그러자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러지 못하지만 한창 젊었을 때는 100권 정도는 달달 외웠다”고 말한다. 잠시 시연을 부탁했다. “자, ‘심청전’ 중간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여.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팔려나가는 날 아침 선인(뱃사공)들이 도착해 심청이를 데려가려고 하는 장면이지. 심청이가 읊는다. ‘여보시오 선인네들, 오늘 행선(배가 나간다는 뜻)하는 줄은 내가 이미 알거니와 부친이 알지 못하오니, 잠깐 지체하옵시면 불쌍하신 우리 부친 진짓상을 올려 잡수신 후에 말씀 여쭙고 떠나리다’, 선인들이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 ‘그리하오’ 허락하니 심청이 들어와서 눈물 섞인 밥을 지어 진짓상을 올려,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부친 귀에 들리지 않게 속으로 흐느끼며~.’ 고저장단이 있어 얼핏 창(唱) 같기도 하고 이야기 전개의 자세한 상황과 감정 묘사가 있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도 하다. 그 옛날, 글을 모르던 마을 사람들이 모여 흥미진진하게 들었음직한 광경 또한 어렴풋이 그려진다. 이에 대해 그는 “얘기책을 읽는 데는 우리만의 독특한 방법, 즉 사연에 가락을 붙여 읽었다. 이렇게 하면 음악을 즐기며 내용을 감상하고 듣는 사람에게 더욱 흥취를 돋우고 실감 나게 했다”면서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문화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지역이나 고전소설을 읽는 문화가 형성돼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 한두 명만 있어도 그들이 책을 읽어줌으로써 비록 글을 모르는 사람도 지식을 쌓고 인성을 갖추고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지요.” 당시 소설은 대부분 양서(良書)로 사필귀정, 고진감래의 철학을 담고 있어 올바른 삶을 살면 나중에 반드시 영화(榮華)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해줬다고 그는 말한다. 고전소설을 읽는 시기는 추수를 끝낸 농한기로 마을 사랑방에 모여 읽었으며 내용에 심취해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밤이 깊어지면 제사를 모신 집에서 제삿밥을 갖다주고 사랑방 주인은 고구마를 삶아 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동치미라도 꺼내 먹으며 따뜻한 정과 훈훈한 인심으로 날을 밝혔다. 또한 심청이가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빌며 인당수에 뛰어드는 대목에서는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지혜로 조조 군사를 쳐부술 때에는 통쾌하게 손뼉을 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랑방을 빌려준 주인은 방 안 가득히 앉아 있는 소설책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대·소변을 얻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다. 왜냐하면 비료가 귀했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사나흘 머물다가 다른 마을로 가는 경우도 많았지요.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이 마을 저 마을 소식도 전해주고 때로는 중매까지 서주면서 후한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정월 초에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토정비결을 읽어줬는데 서로 붙잡아 놓지 않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책을 읽게 됐을까. 고전소설 강독은 그의 부친한테 전수받았다. 부친은 충남 청양에서 주로 활동했다. 당시 고전소설 강독을 하는 사람들이 집에 자주 찾아올 만큼 부친의 활동 범위는 넓었다. 일주일에서 열흘 이상 외지로 돌아다니는 날이 많았다. 강독의 대가로 받은 것은 약간의 용돈과 명주옷 등이었다. 부친은 일흔 살까지 활동했다. 부친이 주로 읽었던 작품은 ‘삼국지’와 ‘유충렬전’ 같은 군담류였고 ‘은방울전’ 등 생소한 소설을 자주 선택해서 읽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정 선생은 8살 때 부친한테 한글을 터득하고 고전소설을 읽는 법을 몰래 배웠다. 일제강점기여서 한글을 배우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밖에 나가서는 절대 비밀로 했다. 9살이 되자 하루는 부친이 고전소설 한 권을 주면서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재미가 그만이었다. 11살 때 광복이 되자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고 동네 마을 어른들한테 불려가 책 읽는 실력을 발휘했다. 이를 대견스럽게 여긴 부친은 틈틈이 강독의 가락에 대해 지적을 해주기도 했다. “제가 책 읽는 법을 배우게 된 건 이야기 책을 아주 잘 읽으셨던 선친 덕분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실 때는 이따금 혼자서 읽어 보고 어머님 앞에서도 읽어 보았으며 이 소문이 차차 동네에 알려지면서 어머님 친구분들에게도 읽어 드리고 동네 사랑방에 가서 어른들에게 읽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칭찬하시는 소리에 무릎이 아픈 줄 모르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의 행동반경은 더욱 넓어졌다. 10리 밖 마을에서도 초청받을 만큼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게다가 11살 때 터득한 토정비결로 여러 동네 아줌마들한테 인기가 ‘짱’이었다. 지금은 TV나 라디오 등 볼거리와 들을거리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이야기 책이 아니면 전혀 세상만사를 알 수 없을 때였다. 그런 까닭에 어려서부터 귀둥이 대우를 받으며 신명 나게 책을 읽었다고 술회한다. 세월이 좀 지나자 마을마다 스피커가 설치되면서 스피커를 통해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는 책 읽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 29살 때 대전에서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잠시 책 읽는 일을 멈춘다. 55살 되던 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책 읽는 일을 시작했다. 헌 책방을 돌아다니며 고전을 뒤졌고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1인극에 출연했다. 대학에서 주최하는 세미나 등에 가서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1997년과 2003년 공주 민속극 박물관에서 주최한 아시아 1인극 대회에 초청받아 30분씩 강독을 하며 진가를 발휘해 주목을 끌었다. “고전낭독은 판소리의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판소리 무형문화재는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전기수)은 인정을 잘 안 해줍니다. 원래 동네마다 책 읽는 사람이 다 있었는데 이젠 아무도 없어요.” 5년 전쯤 전북 임실에 고전소설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지만 이미 작고했다는 소식에 안타까웠다. 이제 유일하게 혼자 남은 그는 지나온 세월을 돌이키면서 “후세에 전해주려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욕심 없이 양심껏 책을 읽었다”면서 지금이라도 후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면서 이렇게 호소한다. “요즘에는 눈과 귀를 황홀하게 현혹하는 기상천외한 오락물들이 많아 이 소중한 문화를 전수받고자 희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회 지식인이나 관계 당국의 특별한 관심이 없으면 남을 위해 음악적으로 글을 읽는 세계 유일한 이 문화가 끊기게 될까봐 애석할 따름입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정규헌 선생은 1936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청양중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인 8살 때 한글을 몰래 익혔다. 9살 때부터 아버지한테 고전소설 강독을 배웠다. 11살 때 토정비결을 터득했다. 광복이 되면서 고전소설 낭독을 본격적으로 익혔고 13살 때부터 인근 마을 등지에서 책 읽기를 했다. 29살 때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을 잡아 책 읽기를 중단했으나 55살 때부터 다시 책 읽기에 나섰다. 1997년과 2003년 공주 민속극 박물관에서 주관한 아시아 1인극 대회에 초청받아 강독공연을 펼쳤다. 이 밖에도 여러 세미나 등에 초청을 받아 고전소설 강독의 문화와 역사성을 강조했다. 2008년 2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로 등록됐다.
  • “무분별한 개발 안한다” 서울시 건축선언 발표

    “무분별한 개발 안한다” 서울시 건축선언 발표

    서울시가 20일 지속가능 건축을 위한 서울건축선언을 발표했다. 성장과 개발 논리에 따른 무분별 건축을 반성하고 역사도시, 생태도시, 천만 시민도시, 세계 거점도시로서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할 새 건축 원칙을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 시대는 건축과 도시의 패러다임을 개발에서 지속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닫힘에서 열림으로 바꾸기를 요구하고 있다”며 “이번 선언은 후손에게 더욱 아름다운 서울을 남겨 주기 위해 우리가 모두 지켜야 할 신성한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시는 또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로 공공성, 공동성, 안전성, 지속성, 자생력, 역사성, 보편성, 창의성, 협력성, 거버넌스 등 실천 방향을 담은 10개 조문을 마련했다. 시는 실제 건축에 적용될 수 있도록 건축심의 과정에 반영하고 자문기구인 건축정책위원회 활동도 강화할 방침이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해제집을 배포하는 등 민간 홍보를 강화하고 관련 건축학교도 운영할 예정이다. 승효상 건축정책위원장은 “민간 건축 분야도 시가 권장하는 심의 기준을 먼저 살피는 게 관례이기 때문에 건축선언 정신에 입각해 설계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금까지 난개발로 조화롭지 못한 도시를 만들어 왔다.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도시와 시대 정신이 담기고 관광 상품이 되는 유럽처럼 서울의 정체성이 담긴 건축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광복 68주년 의미 있는 행사 2題] 애국·진보운동 태두 조봉암 생가 복원한다

    [광복 68주년 의미 있는 행사 2題] 애국·진보운동 태두 조봉암 생가 복원한다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진보운동의 태두’로 추앙받는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누구보다 애국적인 삶을 살았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정적인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된 조봉암을 되돌아보자는 움직임이 죽산의 고향인 인천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죽산 조봉암 기념사업중앙회’는 우선 생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회는 죽산의 생가터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로 확정하고 토지 매입, 생가 건립 방안을 인천시와 협의 중이다. 시는 이 사업에 1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여기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의 의지가 담겼다. 진보주의자인 송 시장은 “조봉암은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죽산을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노동운동 원조’ 지용택(76)씨가 이끄는 새얼문화재단이 주축이 돼 동상 건립운동도 추진하고 있다. 재단은 2011년부터 시민 성금으로 7억 5000만원을 모았다. 목표액 8억원이 달성되면 동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다. 조봉암은 30세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주동자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했다. 1920년 서울로 상경,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하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한 혐의로 또다시 평양경찰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제헌의원·초대 농림부 장관이 돼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1952년과 1956년 잇따라 제2·3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차점으로 낙선했다. 그 후 진보당을 창당했으며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7월 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구한말 인천에서 감옥생활을 한 곳에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힘을 얻고 있다. 인천중구의회 전경희 의원은 김구 선생이 옥고를 치렀던 중구 내동 감리서 터의 역사성을 활용,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천 감리서는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을 살해하고 수감된 곳이다. 1911년 독립운동을 하다 두 번째로 수감된 곳도 감리서다. 인천시는 중구에서 공식 요청이 오면 이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정기홍의 시시콜콜] 진주 남강 유등의 비가(悲歌)

    [정기홍의 시시콜콜] 진주 남강 유등의 비가(悲歌)

    경남 진주시와 서울시간의 ‘등축제 베끼기 논쟁’이 진주에서 서명운동에 나서며 확산일로에 있다. 지난달 31일 진주시장의 서울시청 앞 1인 시위에 이은 후속 행보다. 지천으로 늘린 등(燈)을 두고 왜 한치의 물러섬 없이 다툼질을 할까. 논쟁은 ‘한국방문의 해’(2010~2012년)에 맞춰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서울등축제’에서 시작됐다. 진주시는 서울시에서 남강유등축제를 베꼈다며 축제를 거두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시는 상생하는 방안을 찾자고 제안했지만, 진주시는 일언지하에 거절한 상태다. 이 논쟁은 사실상 ‘유등’(流燈)에서 비롯됐다. 유등은 420년 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안팎에 군사신호를 보내거나 가족 안부를 묻는 데 사용됐다. 이후 한국 종합예술제의 효시로, 1949년 시작된 개천예술제 때부터 남강에 유등을 띄웠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전국 최우수축제로 3년 연속 지정됐고, 세계축제협회(IFEA) 피너클 어워드 금상 3개를 수상했다. 지난 2월엔 세계 3대 겨울축제인 캐나다 ‘윈터루드 축제’에 초청됐다. 우리의 축제로서는 첫 해외 진출이다. 12월에는 ‘나이아가라 빛 축제’ 참가가 확정된 상태다. 인구 35만의 중소도시로서는 긍지를 가질 만한 행사이고, 서울시에 우리가 원조란 토를 달 만한 근거는 된다. 그러나 서울시는 등을 활용한 축제가 아시아에서는 보편화돼 있고, 한국 등축제의 기원도 임진왜란이 아니라 통일신라 때라고 주장한다. 또 진주시가 모방했다고 주장하는 11개의 등도 5개를 서울시에서 먼저 전시하는 등 일반 소재의 등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서울의 지천에 등축제를 더 늘릴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진주시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만한 말이다. 하지만 서울등축제의 전반을 보면 남강유등축제의 포맷과 비슷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청계천 물 위에 설치한 등 디자인 철 구조물이 그렇고, ‘유등띄우기’와 ‘희망유등띄우기’ 등의 명칭도 엇비슷하다. 진주를 의식한 ‘첫 사례’ 자료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것도 보기에 민망스럽지만, 서울등축제에 남강유등축제를 초대하겠다는 대목에서는 ‘약육강식의 정글’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글로벌축제가 된 남강유등축제가 어찌 후발 축제에 참여하겠나. 이번 논쟁에서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양측은 피차 축제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 진주시는 역사성만 강조했지 완벽한 독창성을 갖추지 못했다. 많은 남강유등 디자인을 중국 쯔궁시 기술자들에게 맡겼다. 서울시도 베끼는 것이 이런 큰 논란을 부를지 몰랐을 터다. 창의적인 축제 콘텐츠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진주시장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초등학생이 박 시장에게 “함평나비축제도 서울에서 만들고, 한강에 유등행사를 기획할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어찌 답할 것인가. 논설위원 hong@seoul.co.kr
  • 부여 낙화암 고란사 고란초 낙석 방지 철망에 고사위기

    부여 낙화암 고란사 고란초 낙석 방지 철망에 고사위기

    “나이 드신 관람객들이 ‘옛날에는 고란초가 많았는데 왜 지금은 없죠’라고 물어보세요.” 충남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고란사 주지 탄공(49) 스님은 “20여년 전만 해도 절 뒤에 고란초가 꽤 많았는데 지금은 두세 포기밖에 남지 않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란초 ‘원조’ 고란사의 고란초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백제 멸망 시 3000궁녀가 백마강에 목숨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낙화암 위의 고란사 뒤편 절벽에 자생하는 고란초는 수학여행을 가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고란초라는 이름이 고란사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연간 25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이곳 고란초가 줄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지질조사 이후다. 교수들은 이 절벽에 균열이 생겨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뿔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깎아내고 낙석 방지용 철망까지 설치했다. 이런 환경 변화가 고란초에 독이 됐다. 햇볕에 자주 노출되자 말라 죽기 시작했다. 고란초는 길이 5∼15㎝, 너비 2∼3㎝에 포자가 점처럼 박힌 풀로 바위틈과 이끼가 붙은 곳에서 잘 자란다. 그늘과 습기가 충분해야만 한다. 이계영 부여군 문화재관리팀장은 “고란초는 강가 절벽이나 바닷가 숲 등 일부 다른 곳에서도 자라지만 원조는 고란사 게 아니냐”면서 “이를 살려 보려고 군농업센터에서 양식도 하고, 바위에 가로 90㎝, 세로 60㎝ 크기의 유리관도 설치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고란사가 매일 물을 뿌려 주기도 어렵고, 관리가 안 된다”고 전했다. 백제 의자왕이 고란사 약수임을 확인하기 위해 약수에 잎을 띄우게 했다는 고란초. 전 고란사 주지와 부여 출신 변호사 등이 모임을 만들어 이곳 고란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것을 추진하고 나섰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부여군이 천연기념물로 신청하면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조사에 나설 계획”이라며 “역사성과 문화재 가치 등이 기준이 되지만 선정이 된다 해도 천연기념물 분과위원회 심사 등이 필요해 족히 1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부여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도시의 새 심장이 된 서울광장 서울광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광장이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품은 공간이다. 도시의 광장은 마치 도시의 가슴과 같다. ‘시청 앞’이라는 한마디에 백 가지 의미가 함축됐다.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화 항쟁, 월드컵 거리 응원 등 숱한 근·현대사의 무대이자 현장이었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서울광장은 울분과 정체의 공간이었다. 시위대와 최루탄이 부딪치고, 구호와 바리케이드가 맞선 불행한 탄식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동차를 몰고 시청 앞 광장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면 비로소 서울 시내에서 운전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 8가닥의 진입로와 8가닥의 퇴출로가 뒤엉키던 교통 광장이었다. 2004년 메마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자유로운 보행 공간 ‘서울광장’으로 부활했다. 또 울분과 탄식이 작열하는 분노의 광장에서 여유와 즐김이 있는 문화의 광장, 젊음의 광장으로 진화했다. 서울시청과 서울광장의 존재는 서울의 도시 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경성부청사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경운궁의 기운을 누르면서 일본인 상업지구인 황금정(을지로)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노렸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옛 경성부 청사를 그대로 둔 채 어정쩡하게 짓는 바람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불평불만의 건물’이 됐다. 얼마 전 건축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최악의 한국 현대 건축물’ 1위에 선정됐다. 건물도 문제지만 건축 과정이 최악이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시 짓자는 얘기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 1935년 세워진 경성부민관은 오늘의 서울시의회다. 황국신민화를 부추기는 정치 집회와 위무 공연이 열리던 시민회관 용도로 지어졌다. 부민관 폭파 사건의 현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후 미군 사령부로 사용됐다. 1975년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이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묻혀 있다. 3·15 부정 선거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이 건물 앞에서 불붙었다. 1980년 태평로 확장 공사 때 옛 부민관은 대부분 잘려 나갔다. 국내 최대 규모 오피스 빌딩 중 하나인 서울파이낸스센터는 최악의 건축물이라는 불명예를 서울시 신청사에 물려준 사연 많은 건물이다. 1984년 호텔을 지으려고 공사에 착수했지만 수뢰 사건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건물주가 부도를 맞는 바람에 철골 구조로만 도심에 15년 동안 서 있었던 유령 건물이었다. 완공 전까지 수십 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고 옷을 벗었다. 싱가포르투자청은 2000년 이 빌딩을 3550억원에 인수했지만 지금은 1조원대를 호가한다고 한다. 한국프레스센터 빌딩은 1985년 서울신문사와 신문회관 자리에 지어졌다. 흩어져 있던 25개 언론 관계기관 및 단체와 5개의 주한 외국 언론기관이 입주한 명실상부한 한국 언론의 총본산이다. 경기도 가평산 화강암을 외벽에 장식하는 등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했다. 신문회관은 옛 경성일보(매일신보) 부지를 넘겨받은 서울신문사 부지 중 568평에다 정부 예산 1억원을 들여 3층짜리 건물로 지었는데 1962년 개관 당시 서울시청을 옆에 두고 국회의사당을 마주하는 태평로 길가의 당당한 건물이었다. 무교·다동 재개발사업의 하나로 지어진 프레스센터는 지하부터 11층까지는 서울신문사가 소유하고 12층부터 20층까지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갖는 소유권 수평 분할 방식이 적용됐다. 이는 훗날 맞은편 광화문빌딩(동화면세점) 소유권 정리의 선례가 됐다. >>내 이름 이렇게 태어났어요 태평로(太平路)는 일제가 기획하고 만든 대표적인 신작로다. 세종로사거리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600m의 주요 간선대로다. 세종로가 정치의 심장부라면 태평로는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부다. 도로명 통합에 따라 2010년 세종로와 합쳐 세종대로로 승격했다. 태평로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묵었던 태평관(太平館)이 있었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다. 옛 태평관이 있던 곳은 오늘의 중구 남대문로 4가 대한상공회의소 자리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남별궁(조선호텔)에 묵기 전까지 사신 숙소로 쓰였다. 이후 남별궁은 주요 사신, 태평관에는 보조 사신(差官)이 주로 묵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백관과 함께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옆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사신을 맞이하고 나서 경복궁에서 황제의 칙서를 받고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연 뒤 모화관까지 배웅했다.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東平館)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2가 인현어린이공원 일대에 있었다. 일제가 새 길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면서 일본 사신 숙소인 동평관을 딴 ‘동평로’가 아니라 중국 사신을 모신 태평관에서 이름을 따온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국 사신을 모시듯 일본인을 극진하게 모셔라’라는 풀이도 가능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태평로는 경복궁과 남대문을 직접 잇는 길을 내지 않았던 조선의 남북 간 상징 축선을 무시하고 육조거리를 보호하는 언덕인 황토 마루(세종로사거리)를 깎아내는 등 무리한 공사를 통해 만들었다. 이 길을 내느라 고종이 정사를 보던 경운궁(덕수궁) 담을 헐어내 궁 동쪽 전각들이 잘려 나갔고, 남대문 성곽도 이때 헐어냈다. 성곽을 잃은 남대문은 서울의 외딴 섬 신세가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잇는 태평로 라인에 경성부 청사(서울시청), 경성역(서울역)을 각각 지었다. 일제가 남긴 3대 건물이다. 경복궁 안에 지은 조선총독부는 민족 정기 회복 차원에서 걷어냈지만 서울시청과 서울역은 건재하다. 지금의 태평로 일부를 ‘황토현 신작로’라고 지칭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1896년 7월 여러 날의 독립신문에는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새 길을 낼 계획이 세워져 측량했다’, ‘정동에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힌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에도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길을 황토현 신작로라고 부른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1901년에는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신교(新橋)라고 불렀다. 1910년에 출판된 경성시가전도를 보면 황토현~서울시청까지를 신교통(新橋通)이라고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관보에도 고종이나 순종이 신교통을 통해 종묘에 행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일신보 1913년 8월 22일 자에는 남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태평로 확장 공사 사진이 실렸다. 1914년 태평로는 길 이름이자 동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내려온다. >>덕수궁 너만 보면 나도 아파 태평로와 덕수궁은 악연이 깊다.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세 번이나 궁이 잘려 나가는 피해를 봤다. 일제가 한 번, 우리 손으로 두 번을 훼철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도로 신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당시 경운궁 담벼락이 처음 잘려나갔다. 일제가 폭 27m, 길이 1009m의 태평로를 건설하면서 육조거리(광화문광장)의 중심과 태평로의 중심을 맞추지 않고 광화문 우측 끝 선으로 맞춘 것은 고종이 경운궁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속을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경운궁을 심하게 축소해서 민심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는 우리 스스로 덕수궁 훼손에 앞장섰다. 1961년 확장 때 덕수궁 돌담을 헐고 속이 훤히 보이는 철책으로 바꾸면서 공원화하는 우를 범했다. 1968년에는 철책마저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문(대안문)은 담장과 분리돼 확장된 태평로 안에 홀로 있다가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는데 이때 16m 뒤로 밀려났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은 일제의 상징 길인 태평로 및 일본과 각축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외국 공사관, 교회에 터 대부분을 빼앗기고 한낱 도심공원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역사책 속에 해프닝처럼 기술될 뿐이다. 일제가 태평로를 확장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경운궁과 정동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되살리려는 심상찮은 기운이 일자 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멀쩡한 경성일보를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경성부 청사를 지었다. 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단(天壇)의 역할을 하는 원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으면서 하늘과 땅의 신령들을 모시는 황궁우를 호텔 장식품으로 배치했다. 조선은행(한국은행)과 미스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을 지어 일본인 중심 상업지역으로 육성했다. 결과적으로 고종이 정궁을 경운궁으로 옮겨 몰락해 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서울의 도시 구조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작용했다. 이후 현대화 과정에서 서울의 실질적인 중심이 세종로에서 태평로를 따라 개편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j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에는 광장의 개념까지 포함됐다. 국가의례나 문화행사가 열리는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광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폭 58m, 길이 200m의 큰길이었다. 노면이 고르고 배수가 잘 됐으며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멋진 길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이나 개항 이후 방문한 백인 외교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수선전도, 조선경성도 등을 보면 육조거리의 관아는 위계에 따라 배치됐다. 의정부가 광화문 왼쪽 맨 앞자리인 현재의 광화문 열린 광장 자리에 있었고 이조, 한성부, 호조가 뒤를 이었다. 반대쪽 정부서울청사 쪽에는 삼군부,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차례로 터를 잡았다. 서울역사문화연구소 이상협 소장의 논문 ‘조선시대 육조거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의정부와 예조 등 모든 관아가 육조거리에 직각 방향으로 있으며 육조거리의 공간 구성과 관아 배치는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있는 공간 구성의 틀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조성 당시의 배치 구조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만 1900년대 전후에 촬영한 사진과 관아 그림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양쪽의 긴 담장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긴 행랑 때문에 육조를 흔히 육조장랑(六曹長廊)이라고도 지칭할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의 행정관청인 육조라는 명칭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거리 이름을 광화문통으로 바꿨다. 육조장랑은 뜯겨 나갔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 신청사를 짓자마자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 버리고 나서는 총독부 광장이라고 호칭했다. 어용 군중집회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하면서 군정청 광장이라고 불렸다. 정부 수립 기념식이 개최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육조거리로 복권되지 못하고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리를 광화문이나 광화문광장이라고 즐겨 부른다. 세종로라는 작위적 지명보다 현존 구조물인 광화문이 더 친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세 번이나 옮겨지고, 두 번이나 불탄 광화문 수난사가 마음속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1946년 해방 직후 구성된 지명위원회는 국가 중심가로의 역사성을 간과했다.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육조대로라는 지명을 원상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세종로가 100m의 도로폭을 갖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맥아더의 호언장담처럼 종전 후 서울도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기회를 잡았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은 한국인 1호 도시계획가 장훈씨가 1952년 고시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에서 광화문사거리~중앙청까지 500m 길이 도로의 폭을 기존 53m에서 100m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폭 12m에 길이 2750m이던 청계천을 폭 50m의 도로 부지로 확장해 오늘의 청계천을 있게 했다.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 숭례문광장 등 주요 광장 부지도 확보했다. 대담한 도시계획에 맞춰 건물과 토지를 매수하고 수용해야 했지만 서울시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원이 빗발치자 가건축 허가를 내줘 가건물을 짓도록 했다. 도로 확장은 1966~1979년 계획대로 실행했지만, 광장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종로사거리를 기점으로 반지름 150m의 광장이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과 광화문 우체국, 교보빌딩과 KT빌딩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건설부고시에 따라 광화문광장계획선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세종로와 태평로를 연결하는 광장계획선 안에 일부 건물이 건재하다. >>광화문의 오늘:주요 건물의 부침사 정부서울청사 옛 삼군부·예조 자리에… 개인건물은 4채뿐 광화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광화문시민열린마당·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국대사관·KT빌딩·교보빌딩·비각이 차례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와 별관·세종로공원·세종문화회관·삼보빌딩·현대해상화재·세광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폭 100m, 길이 500m의 광장구조 거리에 공공건물 5채와 대기업 건물 3채, 개인건물 4채, 문화재 1개, 공원 2곳뿐인 쾌적한 구조다. 해방 이후 육조거리를 복원하지 않은 탓에 건물들의 격렬한 부침(浮沈)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세종로를 폭 10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건물이 헐렸다. 먼저 1967년 의정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경기도청과 국제전신전화국 일부가 철거됐다. ‘서울 한복판에 웬 경기도청’이냐고 하겠지만, 옛 경기도청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성부(서울)를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화한 일제가 의정부를 헐어 내고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식민통치의 음모였다. 한 때 치안본부 등으로 쓰였다. 정부는 이 자리에 정부 제2종합청사를 지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고무된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 중심가로 구상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백지화됐다. 서울시는 이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해 광화문 시민열린 마당을 조성했다. 부지를 지킨 것은 잘한 일이지만 명칭을 의정부 광장이나 육조마당, 육조광장으로 붙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질책받을 일이다. 서울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벌어졌다. 이른바 ‘서울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외국 원조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민간 자본이 속속 건물을 지었다. 1961년 10월 완공된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쌍둥이 건물이다. 역사박물관은 이조, 미국대사관은 한성부 터다. 이 건물은 미국대외경제원조처(USOM)가 5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대고 필리핀에 건축을 의뢰해 지어졌다. 정부청사용 건물을 짓고도 280만 달러가 남자 건물을 한 채 더 지었는데 여기에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역사박물관 건물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건물로 사용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쓰이다가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쳐 지난해 448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전시 내용과 건물의 구조 등이 박물관으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KT 광화문 빌딩은 1981년 국제전신전화국 자리에 세워졌고 체신부와 함께 입주했다. 이후 잦은 정부 조직 개편으로 소관 부처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뀔 때마다 간판을 변경했다. 1998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체신청으로부터 분리, 공사가 된 이후 2002년 민영화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체신부가 갖고 있던 이 건물의 12~14층까지 3개 층의 소유권도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넘어갔다. 교보빌딩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가 등 전문가 그룹은 ‘짝퉁’ 건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일반인들은 건물 외관의 대형 걸개 글판과 시내 한복판 책방인 교보문고의 존재를 달가워한다. 왜 그렇까? 이 건물의 정체성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의 디자인을 빼닮았다는 이유다.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같은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디자인을 교보의 전국 지사 건물로 복제했다. 최근 한 건축 잡지는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리스트에 올렸다. 층수와 용도를 둘러싸고 뒤탈도 많았다. 설계 당시 40층을 계획했지만 23층에 그쳤다. 완공 단계에서 정부청사보다 낮은 17층 이하로 지으라고 행정 당국이 종용하자 당시 신용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완공 단계의 건물을 자르라면…. 내가 광화문 복판에서 배를 자르겠다”는 격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용도를 호텔로 변경하라고 권하자 “정부청사 앞에 술과 밥을 파는 숙박업소를 짓는다는 것은 나라 체면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거절한 사연도 자서전에 남아 있다. 교보빌딩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건물의 뼈대만 남겨 두고 건물 옆면 일본식 다다미 모양을 유리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짝퉁 논란에서 벗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서울청사는 1970년 옛 삼군부와 예조 자리에 들어섰고, 별관인 외교부청사는 2002년 옛 교통방송국 터에 자리 잡았다. 1966년에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전신저금보험관리국, 경찰기동대 순찰반이 헐렸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종로보건소와 광화문전화국이 철거됐다. 시민회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회관으로 지어졌지만 4·19혁명 이후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1961년 개관했다. 1972년 불타 버리는 바람에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했다. 세종문화회관 옆 17층짜리 현대해상화재빌딩은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976년 현대건설 본사로 지어져 1983년 현대건설이 계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특수를 누린 이 건물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국민당 당사로 썼다. 현대해상은 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기 직전인 1999년 이 건물을 현대건설로부터 인수했고, 2004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KT와 교보, 현대해상화재뿐이다. 그보다 엄청난 격랑을 헤치고 최고의 요지에 끝까지 살아남은 개인 빌딩 4채의 존재감이 더 빛난다. joo@seoul.co.kr
  • “수원역 과선교·환승센터 건립 등 서수원권 4개 프로젝트에 집중”

    “수원역 과선교·환승센터 건립 등 서수원권 4개 프로젝트에 집중”

    경기 수원시가 상대적으로 낙후를 면치 못했던 서수원권 개발에 주력하는 등 이 지역을 수원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기로 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11일 “남은 임기 1년 동안 추진할 주요 시책으로 수원비행장 이전, 수원역 과선교와 환승센터 건립, 호매실동 제2체육관 건립 등 서수원권 4개 프로젝트 추진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염 시장은 “이 같은 계획은 수원시 역사 이래 최대 규모로 모두 5년 이내 실행하게 된다”면서 “서수원권의 고질적인 현안사항을 반드시 해소해 현대적인 도시 기능을 접목하겠다”고 덧붙였다. 서수원권 4개 프로젝트는 수원비행장 이전, 수인선 지하화, 농진청 부지 활용 테마공원조성, 당수동 국유지 개발 등이다. 우선 수원비행장 이전과 관련, 조만간 국책연구기관인 국토연구원과 함께 비행장 이전 추진 전략을 수립, 오는 10월 군공항 이전법 시행과 동시에 수원비행장 이전 건의서를 국방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전 건의서에는 부지 활용방안, 이전 후보지역 등 개략적인 이전 방안과 이전 주변지역 지원 방안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군 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지난 3월 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10월 6일 발효를 앞두고 있다. 또 수인선 수원시 구간 3㎞를 전면 지하화해 철도 노선으로 인한 지역 단절과 소음 공해로 인한 주거환경 악화를 해소하기로 했다. 지하화 노선의 지상 공간 8만여㎡에는 공원, 도서관, 체육시설 등 주민 편익시설을 만들 예정이다. 시는 이를 위해 지난 3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추가 사업비를 시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와 함께 권선구 서둔동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 등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 부지 6개 지구 2.2㎢는 역사적 가치와 지역 여건, 시민의견 등을 고려해 활용할 예정이다. 농촌진흥청 일대는 정조 시대부터 농업발전의 메카라는 역사성을 고려해 농업테마공원과 농어업박물관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농림축산식품부와 협의하고 있다. 수원시 돔야구장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당수동 국유지 0.4㎢는 현재 시가 유상 임대해 시민농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태로 향후 매입 절차를 거쳐 웰빙문화, 체육활동 등 프로그램이 어우러진 생활문화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시는 수인선 지하화에 2500억원, 공공기관 이전 부지 매입에 1조 5000억원, 농진청 테마공원 사업에 2700억원, 당수동 국유지 개발에 850억원 등 4대 사업에 약 2조 10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민선 5기 3년! 구정의 품격] 고재득 성동구청장

    [민선 5기 3년! 구정의 품격] 고재득 성동구청장

    “좀 유명하다 싶은 조선시대 선비 이름 한번 대보세요.” 조광조, 성삼문, 이황, 기대승…. 헝클어진 머릿속에서 더듬더듬 이름을 뽑아내고 있는데 이내 말을 받는다. “그 사람들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모두 동호독서당 출신이에요.” 25일 집무실에서 만난 고재득 성동구청장은 남은 1년 꼭 성과를 올리고 싶은 사업으로 ‘동호독서당의 부활’을 꼽았다. 동호독서당은 조선시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위해 지금의 옥수동 길에다 세운 건물. 세종은 책을 좋아한 임금답게 갓 과거에 합격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비들이 오로지 책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처음 만들었다. 책에만 몰두하기 위해 처음엔 절을 이용했으나 나중에 별도로 지어진 게 동호독서당이다. 응봉을 덮어쓰고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옷과 음식을 풍족하게 제공했으나 마냥 편하게 놀고 먹는 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시험도 보고 불시에 구두시험도 치렀다. 고 구청장은 이런 제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공무원이라고 봤다. “10~20년씩 대민 업무에만 매달린 공무원들의 마음이 어떻겠느냐는 겁니다. 그냥 사막이지요, 사막. 그런 마음에서 어떻게 친절한 봉사가 나오겠습니까. 머리 식히면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잠시 다른 걸 상상해보는 시간을 주자는 겁니다.” 재충전의 기회를 주는 안식년, 안식월 개념이다. 아직 구체적 기간이나 방식 같은 걸 정하진 않았다. “직원 1명이 자리를 비우면 업무 분담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점까지 모두 고려해 어느 정도 근무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간을 주고 어떤 목표를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해야지요.” 동호독서당의 부활을 위해 봐둔 곳도 있다. 옥수동 산 1-1 일대 달맞이근린공원이다. “그렇게 클 필요도 없어요. 책 둘 공간, 책 읽을 공간, 모여 앉아 토론할 공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다만 공무원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작은 도서관 기능도 곁들일 생각이다. 주변 자치구에 비해 성동구가 공연장, 영화관, 도서관 같은 문화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했다. 사업비는 45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고 구청장은 이런 사업이 성동구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다른 곳으로 확대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물론 우리가 역사성을 지녔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강서권에도 강남권에도 이런 시설이 거점 형태로 들어서면 좋겠습니다. 아니 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도 번져나갔으면 합니다.” 서울 최다선 구청장답게 ‘행정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감사하게도 선거에서 네 번이나 선택받았습니다. 주민들에게 열심히 봉사한 것을 인정받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임기 중에는 그런 봉사를 뒷받침하려고 바삐 뛰어다녔던 공무원들을 위해 뭔가 해놓고 싶습니다. 그게 결국 대민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여의도 블로그] ‘북침’ 정확한 뜻 몰랐다면 역사교육 잘못된 탓

    동풍(東風)은 동쪽으로 부는 바람인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답을 아는 일이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시험에 나오면 맞히거나 틀리면 되니까 정도의 문제일 수 있다. 뒷날 동풍이 요즘 축약식 표현으로 ‘동·부·바’ 또는 ‘동·불·바’로 표현돼 출제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이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완전히! ‘위안부’(慰安婦) 얘기를 먼저 해 보자. 누군가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부인’ 아니냐고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일 아닌가. 그 누군가가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얼마나 자괴스러운 일인가. 분을 치밀게 하는 것은 ‘역사성의 결여’일 것이다. 위안부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지닌 역사성은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반드시! 유대인이라면 ‘홀로코스트’를 알아야 하듯. 북침, 남침이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분명, 그럴 일이다. 우리는 특히나 1980년대 이 문제로 홍역을 치렀기에 더욱 그렇다. 어느 외국 학자가 북침설을 주장하고 몇몇 국내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그 시기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큰 혼동에 빠졌다.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해 관련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까지 남침, 북침으로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남침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문서가 나온 뒤에도 일부 학자들은 남침 유도설이니 어쩌니 하는 ‘변종 학설’로 진실을 호도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뢰’의 벽에 틈이 생겼다. 남침은 어떤 역사성을 담고 있나? 북이 남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음과 그러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오가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낙을 얻어내 각종 병참을 지원받은 사실 등이다. 기습의 결과, 개전하고 단 3일 안에 당시 남한 병력의 50%에 가까운 4만 3000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서울신문이 최근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설문조사를 해 보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 이를 보도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인용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북한 침공’을 ‘북침’으로 답한 것뿐인데 웬 호들갑이냐”는 식의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북의 기습 남침’은 고정 용어, 그 자체로 알고 있어야 한다. ‘위안부’처럼. 이 표현들을 몰랐다면 이에 관한 전반적인 교육이 통째로 결여됐거나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나 더. 남침과 위안부, 어느 것이 더 어려운 단어인가?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왕실이 토지와 곡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 복원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적 121호인 사직단은 올 초 문화재청에 의해 땅의 용도가 공원에서 사적지로 뒤늦게 바뀌었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원형 회복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조선의 500년 수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종묘사직’ 가운데 경복궁 동쪽의 종묘와 종묘제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지만 대칭점에 자리한 경복궁 서쪽의 사직단은 일제시대 이후 명예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사직대제는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명운과 평안을 기원하며 땅과 곡식의 신에게 지낸 제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자취를 감췄고 사직단은 빈터로만 남았다. 1922년 일제는 종묘사직의 맥을 끊으려고 사직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해 지위를 격하했고 사직단 부속시설도 철거했다. 1932년에는 대지 일부가 교육시설로 잘려 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잦은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문이 두 차례나 옮겨졌고 그 자리에 도서관과 수영장이 신축되는 몸살을 앓았다. 문화재청이 사직단 복원에 뒤늦게 뛰어든 것은 지난해 1월. 관리 주체도 종로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문화재청 산하 사직단지킴이인 재단법인 예올은 “‘사직대제’가 ‘종묘제례’ ‘석전대제’에 이은 대표 무형문화재인데도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사직대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형식적으로 복원된 이후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에 거행되고는 있으되 지금까지 악무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전혀 다른 종묘제례의 노래와 춤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게 예올 측 주장이다. 지금은 사직단의 존재와 의미를 아는 시민도 드물다. 사직단 주변 황폐화도 심각한 문제다. 사직단 사적지 안에는 여전히 파출소, 도서관, 주민센터, 창고 등 여러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때 경희궁에서 이전해 온 황학정 앞에는 2002년 국궁전수관이 건설돼 지금도 사직단 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그나마 모습을 갖춘 것은 제단과 정문, 담장 정도다. 문화재 관련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일본식 돌담은 정리됐으나 조잡한 일본식 조경도 논란거리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사직단의 역사성 회복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명 예올 이사장도 “사직단이 주말이면 인왕산 등산객들의 집합 장소쯤으로 변질돼 컨테이너 가건물이 들어서는 등 훼손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의 의지가 없고서는 복원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복원을 추진한다는 종합계획을 마련했지만 정작 예산은 한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경희궁~사직단~경복궁을 잇는 역사로 정비 방안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 또한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된다. 사직단 복원 작업은 여전히 시민단체의 몫으로 남은 게 현실이다. 예올은 분기마다 350여명의 회원들과 주변 청소 등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오는 10월에는 사직단 역사성 회복을 위한 대규모 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서울광장] ‘끼리끼리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김종면 수석논설위원

    [서울광장] ‘끼리끼리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김종면 수석논설위원

    ‘부처님 얼굴도 세 번’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끝없는 과거사 부정과 위안부 망언에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한국은 물론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마침내 일본은 유엔 기구로부터 “범국민 차원의 위안부 문제 교육을 하라”는 권고까지 받았다. 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임을 자임하는 일본이 졸지에 국민교육이 필요한 야만국으로 전락한 셈이니 이보다 더한 수치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의아하다. 누가 일본 문화를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는 ‘수치의 문화’라고 했는가.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심각한 수준의 욕이 되는 사회라는 얘기도 괜한 소리 같다. 지금 그들이 벌이는 역사왜곡 퍼레이드보다 더 부끄럽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역사에 거짓의 말뚝을 박는 일본은 과연 행복한가. 아무리 거만의 부를 쌓아 올린들 ‘정신적 거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진정한 부자 나라라고 할 수 없다. 평화헌법을 뜯어고치고 병장기를 산처럼 쌓아 올리며 군국으로 치달은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면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왜 죽을 꾀를 내려 하는가.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려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싸구려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동묘지에서 돌베개로 잠을 청했던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 선생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일본의 무모한 ‘역사 다시 쓰기’를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 또한 역사왜곡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일본의 청맹과니 역사관을 나무라면서 우리는 정작 외눈박이 사관의 포로가 돼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한국 근현대사를 친일수구파와 반일자주파의 대결로 그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강고한 진영 논리 앞에 역사의 진실은 발붙일 곳이 없다. 증오의 수사만 넘쳐난다. 그런 와중에 종편 채널에선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이 개입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주장을 내보내고, 극우성향 인터넷 사이트에선 5·18 희생자의 영혼까지 모독하는 반인륜을 서슴지 않아 공분을 사고 있다. 민족사의 비극인 5·18의 정신과 역사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식의 배반이요, 이성의 죽음이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그 후과가 치명적인 것인가를 우리는 일본의 극우 망동에서 똑똑히 봤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과거사를 제 멋대로 요리하며 스스로 역사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따져 봐야 한다. 유엔 기구도 지적했듯 일본의 몰염치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 부재 탓이 크다.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선 고등학교에서 한국사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나마 수능시험을 위해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당연히 근현대사에 대해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 5·16과 5·18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같은 것 아니냐고 되묻는 학생도 있다는 뉴스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 근현대사는 동네북 신세다. 누더기가 됐다. 어떻게든 역사 교육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상한 상황이다. 대학들이 앞다퉈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 끼리끼리 파당을 짓는 위태위태한 가학적 역사놀이가 계속되는 한 국민 통합은 요원하다.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자기중심의 민족사든 국민사든 오로지 그 집단을 위해서만 쓰인 ‘끼리끼리 역사’는 역사로서 함량 미달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일갈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일본이 그들만의 일체감의 역사, 미망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고 우리마저 덩달아 미친 역사의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정직한 역사에 미래가 있다. jmkim@seoul.co.kr
  • [지방시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나간채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지방시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나간채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2일 광주를 방문한 국가보훈처장은 33주기 5·18기념행사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명했다. 그 하나는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 넣기는 하되 참석자 제창이 아니라 합창단이 부르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번 5월 행사 이후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닌 다른 노래를 공모해 공식적 기념노래로 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정부가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사실과 관련해 볼 때, 이전의 정부 기념식에서는 이 노래가 대통령 기념사에 이어 행사를 마무리하는 핵심이었다. 참가자 제창으로 이뤄짐으로써 기념식의 전체적 성격을 정서적으로 고양시켜 왔다. 5.18항쟁이 담은 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강한 의지를 진한 서정성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주시민에게 깊은 감명을 줬던 역사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단상의 합창단에 한정해 부르게 하려는 현 정부의 관점은 단상과 단하의 참여자가 하나로 일치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국가기구의 공식적·관료제적·권위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식 위주의 행사는 이미 구시대의 정형화된 군사문화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현대의 유연하고 자유로운 형태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이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역사적 정당성도 의미 깊은 자산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 5월 행사 후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닌 다른 노래를 공모해 공식적 기념노래로 제정하겠다는 계획인데, 이는 앞의 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5·18항쟁과 5월 운동의 30여년 역사에서 수많은 민주시민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아왔던 노래를 5월 행사 기념식에서 축출해 버린다는 것은 이 노래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발휘했던 값진 역할을 방기하거나 경시하는 결과로 평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노래는 1980년대 초에 서울대 총학생회가 조사한 대학인의 노래 순위에서 ‘아침이슬’을 누르고 정상을 차지했으며, 1983년 전국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이 노래를 그해 가장 많이 불린 저항가요로 선정할 만큼 애창된 예술작품이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물이 돼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론적으로 볼 때, 국가권력의 집행권자인 정부는 5·18항쟁에 대해 우호적이기 어렵다. 항쟁 자체가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성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18항쟁은 이미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는 항쟁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 기념식에서 지워버리거나 주변화하려는 것은 5·18항쟁의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역사성 자체를 부정적으로 왜곡하거나 폄하하는 결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을 우려한다. 따라서 이번에 보훈처장이 제시한 계획은 좀 더 진지하고 차분한 검토와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자는 5·18항쟁을 적대시할 수 없다.
  • 춘천 옛미군부대 캠프페이지 62년만에 새달 8일 개방

    62년 동안 닫혔던 강원 춘천 도심의 옛 미군부대 터 캠프페이지(54만㎡)가 새달 8일 시민들에게 완전히 개방된다. 춘천시는 6일 의암호변 도심의 마지막 알짜 땅으로 남아 있는 근화동 캠프페이지 터가 각종 녹지공간과 동물농장, 체육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된다고 밝혔다. 전면 개방은 1951년 6·25전쟁 중 비행장 건설로 닫힌 지 62년, 미군부대가 폐쇄된 지 8년 만이다. 시는 본격 개발이 이뤄지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고 본개발에 앞서 시민 여가 시설로 제공하겠다는 임시 활용 계획에 따라 개방을 결정했다. 이미 지난해부터 유채꽃, 메밀, 청보리, 귀리 등 경관 식물을 파종해 녹지공간을 조성하며 개방을 준비했다. 초지 외에 현재 주말농장과 동물농장, 원두막, 참외 및 수박밭 등의 전원 시설이 꾸며지고 있다. 지난달부터 조성공사에 들어간 동물농장에는 말과 양, 토끼, 젖소 송아지, 기니피그 등을 구입한 후 이르면 이달 말쯤부터 운영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동물농장은 캠프페이지 내 근화초교 방향으로 설치될 예정으로 청보리밭과 더불어 방문객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또 미군부대 격납고를 리모델링해 탁구장과 배드민턴장을 각각 50면씩 조성해 새달 하순부터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캠프페이지를 둘러싼 총 3.8㎞의 담장 가운데 근화동 플라타너스 거리, 춘천역 인근 성매매 집결지 등에 세워진 담장을 제외한 2㎞ 거리의 담장도 철거한다. 춘천역 앞 담장은 미술작품으로 보존, 캠프페이지의 역사성과 도시의 변화과정을 알리는 도시 상징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광준 춘천시장은 “본격 개발을 앞두고 임시로 시민들에게 휴식처로 개방하겠다는 취지”라면서 “62년 만에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역사적 의미를 살려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이슈&이슈] 새만금 행정구역 획정싸고 4년째 치열한 다툼

    [이슈&이슈] 새만금 행정구역 획정싸고 4년째 치열한 다툼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쌓아 조성된 새만금 간척지. 서울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이르는 4만 100㏊의 광활한 토지에 대한 행정구역 획정을 앞두고 전북 군산시와 김제시, 부안군이 4년째 치열한 영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들 3개 시·군이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바다가 육지로 변한 간척지를 국립지리원의 지형도상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정할 경우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군산시는 구획 설정 기준을 기존 해상경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김제시와 부안군은 새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버텨 마찰을 빚고 있다. 이에 정부가 새만금 행정구역을 결정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 그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는 방조제의 구간별 귀속지를 결정해 새만금 행정구역에 대한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안전행정부는 지난 3월 농림수산식품부가 낸 새만금 1∼2호 방조제 구간의 행정구역 결정신청을 공고했다. 안행부는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으로부터 의견을 받은 뒤 중앙분쟁조정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해 행정구역을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새만금 지역 3개 시·군은 서로 다른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미래에 노른자위 땅이 될 새만금지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다. 특히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이 정해질 경우 새만금 간척지가 대부분 군산시 몫이 돼 김제시와 부안군이 반발하고 있다. 해상경계선이 행정구역 획정의 기준으로 준용되면 새만금 전체 간척지의 71.1%는 군산시, 김제시와 부안군은 각각 15.7%와 13.2%를 차지하게 된다. 더구나 33㎞의 방조제는 94%인 28.3㎞가 군산시, 나머지 6%인 4.7㎞는 부안군 몫이고 김제시는 전혀 없다. 이 때문에 부안군과 김제시는 산업단지, 과학연구단지, 국제도시 등이 들어설 노른자위 지역이 모두 군산시 소유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한 행정구역 획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맞서고 있다. 김제시는 새만금 간척지의 행정구역 획정 기준을 국제관례인 하천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제시는 새만금 간척지를 관통하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따라 행정구역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정부에 제출했다. 김제시 관계자는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이미 사라진 마당에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하자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새만금방조제 관할은 지리·법규·역사·국가적 측면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제시는 동진·만경공구 방수제공사, 새만금지구 동서2축 간선도로 공사, 새만금 내부개발 계획 등을 고려하고 공사 목적을 달성하려면 새만금 2호 방조제를 거리상 가까운 김제가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7㎞의 해안선을 완전히 상실, 내륙도시로 전락하고 어민 3229명의 삶의 터전이 없어지는 만큼 이에 대한 보상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건식 김제시장은 “해상경계선은 일제 강점기 호남의 곡창지대 수탈을 목적으로 군산항에 유리하게 그어진 것으로 새만금 행정구역 획정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부안군 역시 “해상경계선의 합리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안군은 새만금 1, 2호 방조제 구간을 종합적인 요인들을 고려해 모두 부안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냈다. 부안군은 지리적 여건, 주민 편의, 국토의 효율성, 역사성, 기여도, 지역 간 형평 등을 종합 고려해 1, 2호 방조제를 모두 부안군 행정구역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만금사업으로 환경 파괴, 날림먼지 발생, 변산 해변 침식, 어장 폐장 등의 피해를 떠안았고 새만금 어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며 이에 대한 보상도 요구하고 있다. 부안군 관계자는 “새만금 전체의 행정구역 획정 방안이나 관리체계 마련 없이 방조제 행정구역만 결정하면 지자체 간 분쟁은 계속된다”며 양보와 종합적인 요인, 균형발전을 충분히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산시는 김제시나 부안군과 달리 국토지리정보원이 간행한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지자체의 행정구역 분쟁 사례마다 해상경계선을 적용해온 만큼 새만금지구도 이를 준용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헌재는 2004년 9월 지자체의 관할구역에 바다를 포함하고 해상경계선을 관습법으로 인정한다는 결정 이후 지자체 간 경계 분쟁 때마다 이를 적용하고 있다. 군산시는 “새만금권 3개 지자체가 각자 유리한 주장과 논리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중앙분쟁위원회가 흔들림 없이 판례와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행안부(현 안행부)가 2011년 12월 새만금방조제 구간 중 3∼4호 방조제(길이 14㎞·면적 195㏊)의 행정구역 귀속지를 군산시로 결정했다. 이에 김제시와 부안군은 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대법원에 제기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첫 변론을 진행했고 현장 검증을 통해 결정의 타당성 여부 등을 확인할 예정이다. 대법원 1부는 29일 새만금 다기능부지와 농업용지 등에 대해 현장검증을 하기로 했다. 대법원 재판부가 선거사건의 증거보전을 위한 검증 외에 사건 심리를 위해 현장검증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고전, 무대 위를 거닐다

    고전, 무대 위를 거닐다

    “난데없기는. 당신 양친께서 당신처럼 재고만 앉아 있었으면 당신이야말로 난데도 없었겠지”라는 말장난이 있고, “그대가 지나온 밤바다의 별빛은 여전히 그대 머리 위에 빛나는구나”라는 닭살 돋는 대사도 있다. “왜 늘 우리만 당해야 하는데요? 왜 우리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왜 우리 애들만 죽어야 해?”라는 가슴이 먹먹한 통탄이 있다. 인생과 생존, 존재와 자유를 관조하면서 시대의 고민과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이다. ‘라오지앙후 최막심’은 명동예술극장이 ‘명작의 희곡화’ 첫 프로젝트로 선정한 작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1946)를 한국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변형했다. 배삼식 작가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크레타섬을 1941년 연해주 얀코프스크 반도에 있는 바닷가 촌락 앵화촌으로 치환했다. 크레타는 그리스에 속해 있지만, 터키, 불가리아 등 주변국 사이에서 참혹한 분쟁을 겪던 지역이다. 배 작가는 그런 역사성을 떠올리면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나 일본의 국가 권력이 완전히 장악하거나 지배하지 못했던 지역, 경계와 변경의 공간을 찾다가 반도 언저리 촌락에 대한 기사를 봤고 번안 작품의 공간으로 선택했다”고 소개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김이문’이, 조르바는 ‘최막심’이 됐다. ‘막심’이라니 막심 고리키 같은 러시아인인가 하고 갸우뚱할 테지만 중요하지 않다. 출생의 단서는 “일생에 한 일 중에는 최고로 후회막심한 일”이라 어머니가 이름을 그리 지었다는 것 정도인데, 어차피 ‘라오지앙후’(떠돌아다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 아닌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 배경이니 당연한 이름일 수도 있다. 500쪽 가까이 되는 소설은 그야말로 철학의 성찬이요, 명문의 행렬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추천 목록에 넣지만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라오지앙후 최막심’을 무대화한 양정웅 연출가는 그 점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양 연출가는 “원작은 현란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많지만 그것을 말로 하게 되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관념과 철학을 덜어내고 인물 각자의 삶에 더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여각 주인 ‘오르땅스’, 일본인과 결혼했던 과부 ‘로사’, 로사를 사랑하는 ‘이차만’, 늙은 무당 ‘진펄댁’, 지능이 떨어지는 ‘춘보’ 등 주변인물의 비중이 원작보다 커졌다. 조르바가 ‘독점’하던 잠언들을 골고루 나누어 부여했다. 시대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치도 많다. 박향림이 노래한 ‘코스모스 향기’와 ‘오빠는 풍각쟁이야’, 최성희의 ‘이태리의 정원’ 등 옛노래가 흘러나오고, 우쿨렐레와 아코디언의 생생한 음악이 퍼진다. 의상 고증도 충실하다. 한복 바지에 양복 정장, 중국인 모자를 쓴 인물들의 행색이 이상해 보이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다.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최막심은 뮤지컬 배우 남경읍(55)이 맡았다. ‘자유롭지만 상처가 있는 영혼’ 최막심을 표현하기 위해 남경읍은 턱수염을 기르고 아코디언을 배우고 있다. 오르땅스는 방송 데뷔 40년을 맞은 오미연(60)이 열연한다. “영화를 보면서 저 오르땅스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돼야지 노력한다”는 오미연은 연습실에서도 살랑살랑 치마를 흔들고 우아한 스텝을 밟고 있다. 1960~1970년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섰던 배우 유순철(76·조선달 역), 이용이(55·진펄댁 역)도 만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고민한” 최막심의 이야기는 새달 8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2만~5만원. 1644-2003.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日의원 야스쿠니 집단 참배] 아베 ‘분란행보’에 동북아 3각외교 올스톱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행보가 동북아시아의 역내 대화를 마비시키고 있다. 특히 북핵 도발 등 한반도 위기 고조로 안보 질서가 교란되는 상황에서 아베 정권의 우경화 움직임까지 겹치며 역내 주요 축인 한·일, 중·일 대화가 장기간 파행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21일 일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등 각료 3명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이어 23일 국회의원 168명이 집단 참배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범죄자들이 합사된 곳이자 전쟁을 미화하는 시설”이라며 “신사 참배가 관련 국가와 국민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하게 하는지 (일본 고위층 인사들은)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 대변인은 식민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겠다는 아베 총리의 전날 발언과 관련, “역사 문제는 분명하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그것이 혼동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은 “새 정부 출범 후 총리와 부총리, 외상, 관방장관의 야스쿠니 참배만 아니라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며 “일본이 우리 측의 성의를 정면으로 무시한 만큼 국민 정서를 거스르며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중·일 3국 간 고위급 셔틀 교류는 속속 파행되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방일 계획이 백지화됐고, 당장 5월로 조율됐던 한·중·일 정상회담은 중·일 간 영토 분쟁으로 사실상 무산됐다. 3국 정상회담이 무기한 지연될 수도 있다. 윤 장관은 이날 한·일경제인회의 참석차 방한한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 등 일본 기업인 8명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특수한 역사성이 있다”면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토대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후루야 게이지 일본 국가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 담당상이 이달 말로 예정된 방한 일정을 취소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고무라 마사히코 자민당 부총재 등 일·중 우호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의 면담을 거절하면서 방중도 불발됐다. 일본의 우경화 수위도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오는 26일 일본해 단독 표기를 주장하는 해양기본계획 최종안을 확정할 것으로 보이고, 아베 총리가 예고한 대로 ‘무라야마 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도 수정하는 역사인식 퇴행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하며 노골적인 군국주의 부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 변화를 주시하며 대화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7월 일 방위성의 독도 영토화 내용이 담길 국방백서 발표, 8월 광복절, 9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10월 야스쿠니 신사 추계 예대제 등 역사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일정이 첩첩이 쌓여 있어 관계 회복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일관계의 상호 배려가 사라지고, 안보·경제 교류의 분리 대응 기조마저 훼손돼 안정적인 한·일 협력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5·18 상징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비, 노랫말 쓴 황석영 작가 집터에 건립

    5·18 상징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비, 노랫말 쓴 황석영 작가 집터에 건립

    5·18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탯자리에 노래비가 들어선다. 황석영(70) 작가가 백기완(71)씨의 ‘묏비나리’란 시를 개작했고 당시 전남대생이던 김종률(55)씨가 곡을 붙인 노래다. 광주 북구 운암2동 주민들은 5·18 33주년을 맞아 황 작가의 집이 있었던 현 광주문화예술회관 자리에 노래비를 건립하기로 했다고 21일 밝혔다. 서슬 퍼런 1980년대 신군부의 눈을 피해 제작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역사성을 보존하고 가치를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다. 황 작가가 살던 집은 북구 북문대로 60번지로, 2층 서재는 광주 문화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황 작가는 1986년 이 집이 문예회관으로 수용되기 직전까지 약 6년 동안 광주에서 활발한 민중 문화 활동을 펼쳤다.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1987년 2월 북구 망월동 시립묘지에서 열린 한 쌍의 결혼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으로 불렸다. 광주민주화운동 때인 1980년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하다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당시 30)씨와 1979년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3학년에 다니다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21·여)씨의 영혼결혼식이었다. 노래비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다음 달 공사를 시작해 10월에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희로애락 속 인간의 옷장

    속옷, 도포, 장옷, 수의…. 사람이 아무리 잘났건 못났건 누구나 한번쯤은 밟아 나가야 할 일생의 과정들이 있다. 물자가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 그 과정에 맞춘 옷들은 미리미리 준비해 놓았다. 갖춰 놓고 그걸 버리기보다 다시 쓰기 위해 또 세심한 손길로 손질돼 전해져 내려왔다. 집안에서 어른들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이 그냥 물건이 아닌 이유다. 이렇게 전해져 오는 물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운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마련한 ‘근대 직물 100년’(The memory of fabric)전이다. 박물관은 경기여고 100주년기념관에 자리 잡고 있다. 여고 동문 중심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런 옷가지들, 그러니까 300여 동문이 낸 4300여점의 유물을 갖추게 됐다. 첫 개관전의 주제도 근대 복식이었고 개관 10주년전도 근대 직물이 됐다. 이번에 나온 것은 복식 200여점, 직물 50여점. 모두 어떤 용도에 맞게 정성스럽게 만들었고, 그 용도에 쓰일 날을 기다리며 오랜 세월 보관됐고, 다음 세대에 쓰이기 뒤에 다시 한번 묵혀졌던 것들이다. 그래서 기증자 가문과 얽힌 스토리들이 살아 있다. 너무 물자가 풍족해 물건의 역사성에 대해 무심한 요즘으로선 이채로운 전시다. 7월 19일까지. (02)3463-1336.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