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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고 싶은 서울길’ 문화관광 상품화

    ‘걷고 싶은 서울길’ 문화관광 상품화

    서울시는 12일 서울성곽길, 서울둘레길, 한강주변길, 지천길 등 1876㎞에 이르는 서울의 각종 길을 하나로 묶어 ‘걷고 싶은 서울길’로 패키지화한다고 밝혔다. 공원·산·하천이 연결된 312개 노선 1492㎞, 그린웨이·디자인서울거리 등 시책으로 조성된 156개 노선 143㎞, 역사문화 탐방코스 66개 노선 241㎞ 구간 등 모두 534개 노선이다. 시는 이 길들은 내년 상반기까지 현장 조사를 거친 뒤 중복되거나 보행환경이 불량한 곳 등을 추려내 ‘걷고 싶은 서울길’ 전체 노선을 정할 방침이다. 최광빈 푸른도시국장은 “외국의 경우 미국 보스턴시에 9개 공원들을 연결하는 20마일의 에메랄드 네클리스와 캐나다 밴쿠버시의 140㎞에 이르는 그린웨이 시스템 등이 있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 “서울 시내 길을 지역이나 주제에 따라 4∼10㎞ 규모로 재조정해 나들이 상품 또는 문화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시는 특히 지난해 연결된 북한산~북한산길,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청계천길 등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길을 집중 개발할 계획이다. 특히 오는 10월말 버티고개 등 생태통로가 완공되면 남산~서울숲~한강까지 이어지는 명품길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경허, 30살 아래 한암과 知音이 된 까닭은

    경허, 30살 아래 한암과 知音이 된 까닭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겠는가. 한암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지음자(知音者)가 되리오.” 한국 근대 선(禪)의 중흥조인 경허(1849~1912) 스님이 해인사를 떠나면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제자 한암(1876~1951) 스님에게 건넨 전별시의 한 구절이다.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라는 지음. 경허 스님이 30살 아래인 한암 스님에게 그토록 지극한 마음을 숨김 없이 내비친 이유는 무엇일까. 불가에서 유명한 ‘선문촬요’를 편찬한 경허 스님은 범어사에서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고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정혜(定慧)를 함께 닦으며 도솔천에 함께 생(生)하며, 어느 때 함께 길이, 도반이 되어 정각(正覺)을 이루자.” ‘무계무율’의 독특한 조사선을 고수했던 경허 스님은 만공, 한암, 혜월, 수월, 성월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선승을 숱하게 배출했다. 불교계에선 이 제자들이 없었다면 한국의 선 불교가 지금처럼 부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걸출한 제자들 중에서도 법제자 한암 스님에 대해 유독 ‘지음자’라는 표현을 쓰며 극찬했던 경허 스님은 과연 한암 스님에게 어떤 뜻을 품었던 것일까. 경허 스님과 한암 스님, 또 한암 스님과 같은 법제자인 만공 스님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선 불교를 짚는 흥미로운 자리가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암사상연구원이 오는 1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서 여는 ‘한암사상연구 학술회의’가 그것이다. 지금껏 알려진 경허 스님의 제자들에 얽힌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풀어 한국 선 불교의 현주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한암 스님은 선승이었지만 경학에 밝고 계율을 지키는 선승이었다.”며 “경허 스님이 한암 스님을 지음으로 여긴 것은 그가 당시 제자들을 포함해 조선 선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승가사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윤 대표는 특히 “경허 스님이 주색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선승이라면 한암 스님은 계정혜와 인격을 겸비한 전형적인 선승이었다.”며 “경허 스님은 자신의 무애행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도 자신의 법과 안목을 높이 산 한암 스님을 특별하게 봤을 것”이라고 정리했다.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오대산 불교문화의 근간인 한암과, 덕숭산의 뿌리인 만공은 근대 선의 비조, 경허의 법제자로 각각 일가를 이룬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면서도 “한암이 전통 계승적인 고풍 재현과 전 승려들의 승가상 재정립에 힘썼다면 만공은 정신 혁명적인 선 유일주의로의 개혁과 엘리트 중심의 선 순결주의에 의한 불교 정화를 추구하는 차별성을 분명히 보인다.”고 두 법제자를 비교했다. 김 교수는 “지금 불가에는 자기 문중, 자기 큰스님 중심의 역사 해석과 편견이 심하다.”며 “경허 스님의 두 법제자가 지닌 차별성을 통해 역사성을 드러내면서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학술회의에서 시도될 ‘경허집’ 분석도 큰 관심을 모은다. 몇 년 전 발견돼 오대산 월정사에 기증된 한암 스님의 경허집(1941년판)과 만해 스님이 정리한 경허집(1943년 선학원판)을 처음으로 비교 분석해 경허·한암 두 스님의 선 사상과 사제 관계를 집중 조명하게 된다. 한편 학술회의가 끝난 뒤 있을 토론회는 발제자와 논평자, 청중이 모두 자유롭게 참여하는 열린 토론으로 진행된다. 경허·한암 스님 시절의 선풍과 지금 한국 불교의 차이점을 놓고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질병 관통한 한국인의 몸 보건 의료사로 본 시대상

    해방기와 한국전쟁은 근현대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격동의 시기로 꼽힌다. 정치체제와 사회통치를 둘러싼 이념·사상의 충돌과 그로 인한 깊은 상흔은 ‘비극의 소용돌이’로 불리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 시기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 반추와 회고의 물결이 도도하지만 격동기 질병·위생에 대한 연구며 돌아보기는 불모지대로 남아 있다. 그런 가운데 그 전대미문의 혼란기를 질병과, 위생, 의료의 관점에서 돌아본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끈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낸 전우용씨가 낸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해방을 맞은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 격동기를 관통해 온 한국인의 삶과 몸, 질병에 대해 꼼꼼하게 들춰내 흥미롭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이 땅에선 급격한 인구이동과 결집이 반복됐고 그 흐름은 온갖 질병의 창궐과 유행·확산을 동반했다. 통계로 보자면 해방 후 1년 동안 230만명 이상의 해외거주 한국인이 고국으로 돌아왔고 정부 수립을 전후해 1950년 초까지 제주도와 여수·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무려 80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 페스트, 콜레라, 두창,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했고 1948년 태어난 신생아 44만명 중 40%인 18만명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저자는 해방 후 한국의 ‘3대 망국병’이라고 불리는 성병과 결핵, 마약중독의 만연을 당연히 사회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폭격으로 700만명 이상이 살 곳을 잃었던 한국전쟁기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 한 미국 군의관은 한국을 “책에서만 보던 질병의 왕국”이라고 표현했고 미군 간호장교는 “복부 총상을 당한 한국군을 수술할 때는 위속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징그러운 기생충을 꺼내야 했다.”고 증언했을 정도이다. “질병과 전쟁이 서로를 부추기며 대다수 사람들을 죽음 가까운 곳에 몰아넣었던 시대에 사람들은 더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저자. 그는 “현대인은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과 생활습관, 주변환경을 살피고 교정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할 때 해방이후 한국전쟁기까지의 보건의료사는 현대한국인의 탄생사라고 할 만하다.’고 결론짓는다.1만 5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수도권 둘레길, 올레길 안 부럽네!

    수도권 둘레길, 올레길 안 부럽네!

    제주발 올레길 열풍이 수도권 지자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그냥 걷는 길이 아니다.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나 산과 공원, 들판, 하천 등을 연계한 다양한 테마 코스들이다. 수원시는 광교신도시 조성에 맞춰 60㎞의 둘레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광교산 자락을 따라 20㎞의 산둘레길과 원천저수지 등 호수 및 하천을 따라가는 40㎞의 물둘레길로 이뤄진다. 이미 조성된 화성 ‘성곽순례길’은 200년 전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성곽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녀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인기다. 이 순례길은 경기도청 후문 앞 팔달산 진입로에서 시작해 서남암문(화양루)~서장대~화서문(서문)~장안문(북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창룡문(동문)~동남각루까지 5.4㎞ 거리다.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주올레길 1개 코스의 절반가량인 2~3시간 정도. 길이 험하지 않아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경기도 제2청은 2012년 완공을 목표로 북한산을 따라 의정부~양주~고양 25㎞를 연결하는 둘레길을 조성한다. 이 길이 조성되면 월 평균 42만명가량이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경기도2청은 보고 있다. 또 북한산둘레길의 도봉산구간(26㎞)은 이달 말 개통 예정이다. 앞서 일부는 지난해 8월 조성돼 개통됐다. 이번 도봉산구간이 완공되면 북한산 둘레길은 전체 70㎞에 이른다. 지난해 11월 개장한 경기 가평 올레길은 가평군 연인산과 청평면, 북면, 상면, 하면 등지에 10개 코스 128㎞로 이뤄졌다. 전체 코스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4시간 정도.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사단법인 제주올레로부터 ‘올레’ 명칭 사용 승인을 받았다. 파주시 ‘심학산 둘레길’은 해발 192m의 심학산에 조성된 6.8㎞ 걷기 코스다. 자유로와 인접한 산 사이로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등 전망이 그만이다. 관악산과 청계산 일대에 조성된 ‘과천 숲길’은 도시탐방, 역사문화탐방 등의 주제로 13개 코스를 갖추고 있다. 또 숲길과 갯골길, 옛길, 바람길 등 4개 코스가 있는 시흥시의 ‘늠내길’과 3개 코스의 군포시 ‘군포 수릿길’도 주민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한편 국토해양부는 최근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내 친환경 산책 탐방로인 ‘누리길’ 조성 구간으로 10곳, 155㎞를 선정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동해안권 4개 시·도 “타이완 관광객 함께 유치합시다”

    경북·부산·울산·강원 등 동해안권 4개 시·도가 타이완 관광객 유치를 위해 손을 잡고 뛴다. 이들 4개 시·도로 구성된 ‘동해안권 관광진흥협의회’는 1~4일 타이베이에서 타이완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 홍보 설명회와 여행사 방문 ‘세일즈콜’ 등의 홍보 마케팅에 들어갔다. 이번 설명회는 최근 방한 관광객 증가 추세에 따라 수도권과 제주도에 집중돼 있는 타이완 관광객을 동해안권으로 유치하기 위해 마련됐다. 1일에는 현지의 한국 대표부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한국관광공사 타이베이 지사 등을 방문해 타이완의 관광 정책, 관광 인프라, 관광 추세 등에 대해 청취하고 타이완 관광객 유치를 위한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2일에는 메이저급 여행사인 웅사·광복·동남여행사를 찾아 동해안권 관광 자원의 우수성과 대표 관광 상품에 대한 홍보 활동과 함께 상호 교류를 위한 세일즈콜을 실시한다. 특히 한류 여행, 체험 여행, 에코 여행, 역사문화 여행, 축제 여행, 먹거리 등 6개 테마를 집중 홍보한다. 이 가운데 경북도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 체험 여행,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안동국제탈춤축제, 영주풍기인삼축제 등을 중점적으로 알리기로 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하늘억새길 연내 완료·투자박람회 개최”

    “하늘억새길 연내 완료·투자박람회 개최”

    신장열(59) 울산 울주군수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간직한 영남알프스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의 산악관광 활성화를 이끌겠다고 19일 밝혔다. →영남알프스가 가진 개발 가치는. -동남권의 대표 산악관광자원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7개의 봉우리로 이뤄졌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가 녹아 있는 자원을 활용해 국내 최대의 ‘산악관광 1번지’로 개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악관광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한다. →산악관광 개발사업 진척도는. -울산시와 울주군이 지난해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데 이어 올해부터 추진협의회를 구성,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을 목표로 10대 선도사업을 선정했고, 이 가운데 하늘억새길 등 일부 사업은 연내에 완료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 산악관광 1번지에 대한 기대 효과는. -영남알프스는 울산뿐 아니라 경북 청도군, 경남 밀양시·양산시와도 접해 전국적인 관광지로 뜨고 있다. KTX 울산역 개통 이후 수도권 등 전국 관광객이 급증했다. 산악관광 개발이 완료되면 생산유발 효과 7630억원, 소득유발 효과 2100억원, 부가가치유발 효과 1670억원, 고용유발 효과 3500여명 등을 예상하고 있다. →개발사업의 걸림돌은. -대규모 민간 투자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민간투자사업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동이 심해 외적인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민간자본 유치 전략은. -영남알프스 일대는 고속도로, KTX, 국도 등 원활한 교통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민간자본이 자연스럽게 투자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민간에서 사업 제안을 받아 행정적 지원 또는 제3섹터 개발방식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대기업과 관광개발기업 등을 대상으로 한 투자유치 협의와 투자박람회도 준비하고 있다. →논란을 빚은 케이블카 설치 해법은. -케이블카는 그동안 환경훼손 등의 논란을 벗고, 이제는 친환경적 시설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케이블카 설치 기술이 상당히 발전해 자연환경 훼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영남알프스 일대 지역민들도 케이블카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환경단체 등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친환경적으로 설치할 계획이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영남 알프스’ 산악관광 1번지로 만든다

    ‘영남 알프스’ 산악관광 1번지로 만든다

    가지산, 신불산, 영축산 등 해발 1000m 이상 7개 봉우리가 울산 울주군, 경남 양산시·밀양시, 경북 청도군을 휘감아 형성된 ‘영남알프스’. 수려한 산악 경관을 간직한 ‘영남알프스’가 올해부터 국내 최대의 ‘산악관광 1번지’로 개발된다. ●울주군과 공동개발 업무협약 울산시는 울주군과 공동으로 영남알프스를 국내 산악관광 1번지로 육성하기 위한 ‘산악관광 마스터플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2019년까지 총 5361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산악관광 개발사업은 4대 추진전략에 28개 세부사업으로 추진된다. 4대 추진전략은 ‘접근성 개선’ ‘체류기간 연장’ ‘프로그램 다양화’ ‘화제성 창출’ 등이다. 울산시는 접근성 개선을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와 관광안내판 구축 등 통합안내 체계를 구축하고, 휴양소와 유스호스텔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산악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물이 맑은 작괘천 주변을 정리해 억새길, 산악 레포츠장, 산악안전체험장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또 프로그램 다양화 아이템으로 관광마을 지정과 탐방 프로그램 개발 등을 추진하고, 숙박시설의 다양화와 선(SUN) 마을 조성, 등억관광단지 조성 등도 함께 진행한다. 이와 함께 가지산과 고헌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예술 체험권, 배내골 중심의 ▲산악레저 및 연수 체험권, 신불산과 간월산 일대의 ▲가족형 휴양 체험권, 영축산 일대의 ▲산악특화 및 극기 체험권 등 4개 공간 권역으로 나누어 개발한다. 사업비는 민자 4796억원을 투입하고, 나머지 564억원은 국비와 시비로 각각 충당할 계획이다. 김석명 울산시 사무관은 “KTX 울산역 개통 이후 울산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마스터플랜을 차질 없이 추진해 영남알프스 일대를 국내 산악관광 1번지로 육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시는 경남 양산·밀양, 경북 청도 등 지자체 및 낙동강 유역환경청, 양산국유림사무소 등 관계 기관과의 유기적 협조체계도 구축했다. 영남알프스에도 제주의 올레길 같은 ‘명품 길’이 조성된다. 간월재 억새 평원을 지나 천황산 사자평으로 이어지는 억새 물결을 따라 하늘 억새길이 만들어진다. 영남알프스 산자락을 휘감는 둘레길도 생긴다. ●6월 하늘 억새길 첫 삽 하늘 억새길은 ‘산악관광 10대 선도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다음 달 착공해 오는 10월 준공한다. 억새길은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 천황산 사자평을 하나의 길(26.9㎞)로 묶는다. 가을철 은빛 물결의 억새 장관을 보며 완주하는 데 20시간가량 소요된다. 1구간은 죽전마을~영축산~신불재로 이어지는 8.1㎞ 코스로 6시간가량 소요된다. 등산에 가까운 오르막길이 있지만, 신불산 능선 일대의 억새 물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신불재~간월재~배내봉으로 이어지는 5.9㎞의 2구간은 4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다. 가을철 주말마다 하루 3만명가량이 찾는 이 구간은 앞으로 영남알프스의 대표적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3구간(5.9㎞)과 4구간(3.6㎞)도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관광객에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또 둘레길은 내년에 착공해 2012년에 완공할 예정이다.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가천저수지~자수정동굴나라~천전마을~양등마을~송락골~비단못~선필마을~박달재 65㎞ 구간에 걸쳐 조성된다. 이 길은 산허리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상까지 오르기 어려운 사람이나 여유롭게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오동호 울산시 행정부시장은 “하늘 억새길과 둘레길은 전국에 새로운 울산의 이미지를 심어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울산 시민들에게는 이 길이 또 하나의 자긍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종교유적 관광상품 개발 바람

    종교유적 관광상품 개발 바람

    지방자치단체들이 종교문화 체험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농촌체험 등 생태와 녹색을 테마로 관광상품을 개발하던 지자체들이 종교로까지 눈을 돌린 것이다. ●충북, 종교체험관광지 충북도는 천주교와 손을 잡고 국비 등을 지원받아 진천군 백곡면 ‘배티 성지’와 음성군 감곡면 ‘매괴성당’을 종교체험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배티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터와 천주교 순교자 무덤이 있는 도지정 문화재로, 한국 가톨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도는 내년부터 5년간 총 250억원을 투입해 이곳에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묵상과 침묵기도를 할 수 있는 피정센터, 순교박해박물관, 둘레길, 각종 편의시설 등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충북도 문화예술과 조경순씨는 “천주교가 자체적으로 배티 성지 활성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할 정도로 배티 성지는 종교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며 “순례성지의 국제적인 명소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충북도는 또 2014년까지 30억원을 투입해 매괴성당 일원에 체류형 주거시설 12곳, 팔각정 등 휴게시설, 교육관 등을 건립하기로 했다. 매괴성당을 잠깐 보고 가는 곳에서 하루 이상을 묵었다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매괴성당은 1896년 설립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해마다 20만명 이상이 찾고 있다. ●충남, 템플스테이 플러스 원 충남도는 지난해 시작된 ‘템플스테이 플러스 원’을 대표 관광상품으로 키우기로 했다. 이 상품은 사찰 체험을 하면서 인근 관광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7300여명이 참여했다. 아울러 늘고 있는 전통사찰 체험객들을 잡기 위해 차별화된 템플스테이를 만들고 있다. 충남도는 올해 1억원을 투입, 도내 8개 사찰과 함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보강하고 관광명소와 연계된 상품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도는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솔뫼성지와 조선시대 말 천주교신자 3000여명이 처형된 서산 해미읍성, 1866년 병인박해 때 안토니오 주교 등이 순교한 보령 갈매못성지 등 주요 천주교유적지를 인근 관광지와 묶어 관광 코스로 개발 중이다. 논산시는 강경읍 소재 개신교 유적지 5곳과 천주교 유적지 1곳을 인근 문화유적지와 연계된 1박 2일 코스의 역사문화 탐방코스로 만들고 있다. ●관광자원 활용가치 커 지자체들이 종교자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관광자원으로 활용가치가 있어서다. 외지인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 종교 유적지에 시설을 확충하고 차별화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조금만 투자하면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부 종무2담당관실 안승섭 사무관은 “정부가 특정 종교 유적지의 관광상품화를 지시할 수는 없지만 지자체가 해당 종교와 협의해 수립한 계획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적극 지원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장충체육관 50년만에 리모델링

    장충체육관 50년만에 리모델링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경기장인 장충체육관이 개관 50년 만에 복합 문화체육시설로 탈바꿈한다. 장충체육관은 ‘박치기왕’ 김일(1929~2006) 선수의 프로레슬링 경기와 한국 프로 복싱 제1호 세계챔피언 김기수(1939~1997) 선수의 경기가 열린 추억의 스포츠 요람이다. 또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선출돼 ‘체육관 선거’의 산실로 불리며 오명을 날리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중구 장충동 2가에 있는 장충체육관을 체육 경기뿐만 아니라 뮤지컬 및 콘서트와 같은 공연이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라고 26일 밝혔다. 시는 236억원을 투입해 체육관을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1만 1373㎡ 규모로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연내 설계를 마치고 내년 4월 착공해 2013년 10월쯤 완공할 계획이다. 리모델링이 마무리되면 면적은 3074㎡, 관람석은 590석 늘어나 총 5248석이 된다. 리모델링되는 장충체육관은 지난해 12월 현상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구중운’(坵中雲·조감도·산언덕에 자리 잡은 구름)을 형상화한 건물이다. 1층에는 주경기장과 운영지원시설, 2~3층엔 관람실과 서비스시설, 지하 1층엔 복합문화시설, 지하 2층엔 보조경기장과 헬스장 등이 들어선다. 주경기장에는 각종 문화 공연을 열 수 있도록 이동이 가능한 수납식 좌석 1528개가 설치된다. 지붕은 지난해 중국 상하이 엑스포의 영국관과 비슷하게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환봉을 촘촘히 심어 고슴도치 모형으로 설계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 필리핀의 원조를 받아 문을 열었으나 시설이 노후화하고 경기장 바닥 길이가 36m로 협소해 체육경기(연간 71일)보다는 일반 행사(연간 169일)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시는 리모델링을 통해 바닥 길이가 55m로 19m 늘어나면 핸드볼(경기장 규격 48x24m)을 포함한 모든 실내 구기종목의 경기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는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와 직접 연결해 체육관으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안승일 문화관광기획관은 “장충체육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고려해 이전하기보다는 고품격 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이 같은 사업 계획을 짰다.”면서 “인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성곽 코스 등과 연계해 스포츠 관광명소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봄나들이 갈까 앱으로 스마트하게~

    몸이 근질근질할 때다. 주말마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자연을 만끽할 나들이 목적지도 고민이다. 인터넷를 검색하면 정보는 많지만 눈에 쏙 들어오지 않아 헤매기 일쑤다. 하지만 스마트족이라면 봄 나들이 고민은 끝.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앱) 하나면 당신의 봄도 스마트해진다. 강력 추천 앱은 한국관광공사가 개발한 ‘대한민국 구석구석’. 우리나라 전국의 관광정보를 두루 담았다. 한국관광공사가 여행 전문가와 펴낸 ‘365 여행’ 책자 1권을 앱으로 제작해 알찬 수준이다. 국내 3만여개 관광지 검색, 추천코스, 숙박 및 교통 정보와 대표 명소 사진과 동영상도 제공한다. 모든 여행 정보마다 ‘1330 관광 안내전화’로 연결돼 안내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아이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모두 쓸 수 있다 서울 나들이를 선호하는 알뜰 스마트족이라면 서울시가 개발한 ‘렛츠 서울트레킹’이 안성맞춤이다. 도보여행 전문가가 추천한 숲길, 하천길, 역사문화길 등 ‘서울의 걷기 좋은 길’ 120곳의 정보가 담겨 있다. 스마트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자신의 이동 경로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앱인 ‘서울 문화 즐기기’는 주변 극장과 미술관, 박물관 등 문화시설과 공연, 문화재 정보를 알려준다. 여행의 풍취에 빠진 애주가라면 ‘길따라 술따라’ 앱이 제격이다. 300여종의 전통주 정보뿐 아니라 술 빚은 장소와 재료를 중심으로, 해당 지역의 술도가에서 빚은 이색 전통주를 소개한다. 스마트폰으로 술병 상표를 촬영하면 전통주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정보도 알 수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봄꽃 축제도 앱을 통해 한눈에 찾아보자. ‘봄꽃 나들이’ 앱은 전국 150곳의 봄꽃 축제지와 여행 정보를 알려준다. 지역 맛집에서의 별미 체험은 여행의 필수 코스. 대표적인 앱인 ‘윙스푼’은 서울 강남과 강북 소재의 맛집뿐 아니라 제주도 등 전국 지역별 맛집을 소개한다. 요리 테마별로, 식사 비용, 주차 가능 여부 등도 알수 있어 편의성이 높다. 또 인크로스가 출시한 ‘TV 맛집’은 23개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맛집 위치와 메뉴, 가격 등 8000여개의 콘텐츠를 제공한다. 내 주변 맛집 찾기, 지역별 맛집 찾기 등 검색 기능도 다양하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원조 한류’ 조선통신사 역사관 문열다

    ‘원조 한류’ 조선통신사 역사관 문열다

    조선시대 공식 외교사절로 일본 땅에 ‘조선 바람’을 몰고다닌 것으로 알려진 조선통신사가 부산에서 되살아난다. 부산시는 21일 동구 범일동 자성대공원에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개관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한·일 간 우호와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비롯해 국서교환과 함께 조선춤·인삼재배술·한의학 등 조선의 문화와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통신사 역사관 건립은 한·일 평화와 우호의 상징이었던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고, 부산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관광 브랜드로 개발하고자 추진됐다. 총사업비 35억원을 들여 자성대공원에 부지 850㎡, 전체 면적 578㎡에 지상 2층의 규모로, 영상홍보관, 휴게 및 전시공간, 상설전시실, 행사마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09년 설계안 공모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올해 3월 완공됐다. 그동안 전시물 설치, 영상물 제작 등 개관을 위한 준비작업을 해 왔다. 역사관 1층은 ▲관람객을 맞이하는 ‘환영의 공간’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 행로 및 한일교류를 위한 현재의 노력까지를 보여주는 ‘3D 영상홍보관’ ▲통신사의 정의 및 역할, 삼사 임명식 등을 패널과 영상 등으로 전시한 ‘전시공간’으로 꾸며졌다. 2층은 관람객들이 조선시대의 통신사가 돼 행로를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영가대 집결, 해신제 제문 등을 보여주는 ‘조선을 떠나다’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 가는 뱃길, 일본에 도착한 통신사 퍼레이드 등을 모형과 화려한 빔영상으로 재현하는 ‘만남’ ▲상륙한 통신사 일행에 대한 환영과 접대, 통신사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여정’ ▲한·일 의학교류, 조선어 배우기 등 일본에서 조선문화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일본 내 조선의 문화’(한류) 등으로 구성된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관람료는 무료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경주 새달 ‘야간 시티투어’ 시작

    ‘천년고도’ 경주에 문화의 ‘불야성 시대’가 열린다. 경북 경주시는 새달 1일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야간 시티투어’를 처음 실시한다고 30일 밝혔다. 매주 금·토요일 운영되며, 오후 6시 30분 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해 3시가 동안 안압지와 첨성대, 김유신 장군묘, 보문단지 등 경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유적을 탐방하는 코스로 짜여져 있다. 특히 이 코스에는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돼 낮에는 구경할 수 없는 경주 고유의 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4~5월에는 벚꽃과 유채꽃을, 7월엔 연꽃을 즐길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에게 유적지의 역사·문화와 배경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용 요금은 사적지 입장료를 포함해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 3000원, 어린이 1만 1000원이다. 한편 경주시는 낮에 신경주역 등을 출발해 고적지를 순회하는 ‘시티투어’도 연중 운영하고 있다. 코스는 모두 4개. ▲1코스는 매일 오전 8시 50분 신경주역을 출발, 보문단지∼불국사∼분황사∼김유신 묘∼박물관∼대릉원∼첨성대를 돈다. ▲2코스는 화·목·토·일요일 오전 10시 20분 출발해 괘릉∼석굴암∼문무대왕릉∼감은사지~보문단지를 ▲3코스는 매일 오전 10시 불국사관광안내소를 출발해 보문단지∼포석정∼천마총~첨성대석~석굴암~불국사를 ▲4코스는 토·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출발해 보문단지∼무열왕릉∼독락당∼옥산서원~양동마을을 운행한다. 요금은 야간 시티투어와 같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조계사, 정부·여당 출입금지 팻말 치웠지만…

    조계사, 정부·여당 출입금지 팻말 치웠지만…

    ‘산문’(山門) 앞의 정부와 여당 인사 출입금지 팻말이 사라졌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은 지난 29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앞에 설치된 ‘출입금지’ 팻말을 치웠다고 30일 밝혔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이 템플 스테이(사찰 체험) 예산 삭감안 등을 강행 처리하자 조계종은 정부, 여당과의 접촉을 거부하며 전국 25교구 본사 등 모든 사찰에 일제히 출입금지 팻말과 현수막을 내걸었다. 조계종 측은 “총무원장 스님의 지시로 팻말을 철거했다.”면서 “그러나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출입 금지 조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팻말 철거를 정부와의 화해 모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조계종 측은 “자성과 쇄신 5대 결사라는 더 큰 틀의 방향을 잡은 데 따른 후속조치”라고 덧붙였다. 앞서 28일 혜총 포교원장은 청와대를 찾아가 청불회 회원들과 법회를 가졌다. 같은날 경북 의성 고운사에서 열린 전국 25개 교구본사주지협의회에서는 일부 참석자들이 “본사를 운영하다 보면 정부(인사) 등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종단 지침 때문에 애로가 많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불교계 시민단체인 교단자정센터는 “노선 전환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들은 사부대중들에게 혼란과 오해를 줄 수 있다.”면서 “총무원이 초심으로 돌아가 자주 선언과 5대 결사의 핵심을 다시 쥐고 절치부심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서울 성북동에 한옥마을 조성

    서울 성북동에 한옥마을 조성

    서울 성북동에 새 한옥마을(지도)이 조성된다. 계동의 북촌마을이 원형대로 보전한 곳이라면 성북동은 한옥을 새로 짓고, 전용 주거지로서 재정 지원을 받는 곳이다. 서울시는 성북동 226-103 ‘성북 2구역 주택개발 사업’ 부지 7만 5000㎡ 일대에 테라스하우스 등 4층 이하 저층주택 410가구와 한옥 50여채를 지을 계획이라고 29일 밝혔다. 이곳은 전체의 93%가 낡았어도 문화재 주변 지역이라는 이유로 개발이 제한된 곳이지만, 이번 ‘결합 개발’을 통해 낡고 불량한 주택을 정비하는 새로운 유형이 될 수 있다. 또 산비탈을 활용해 한옥을 짓기 때문에 자연 친화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서울시는 4층 이하의 저층 주택과 한옥 위주로 이뤄진 이번 정비 사업이 고층 아파트 일변도로 이뤄진 주택 재개발 사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성북동 한옥마을을 인근 서울성곽과 만해 한용운 선생이 거주한 ‘심우장’과 연계해 서울의 대표적 역사문화마을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북촌 등 경복궁 주변을 중심으로 한정된 전통마을 체험 지역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또한 사업 구역이 북한산 도시자연공원과 인접해 자연녹지가 풍부한 데다 인근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이 있고, 고려대와 성신여대, 국민대, 서경대 등의 대학과 가까워 주거지로 인기를 끌 것이라고 시는 전망했다. 서울시는 앞으로 한달간 정비사업안에 대한 주민 의견을 들은 뒤 사업 계획을 확정할 방침이다. 이건기 서울시 주택기획관은 “한옥을 미래 자산으로 육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2018년까지 250여채의 한옥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군위 ‘삼국유사 테마’ 도시로

    군위 ‘삼국유사 테마’ 도시로

    인구 2만여명의 초미니 자치단체인 경북 군위군이 역사·문화·관광 중심 도시 도약을 위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시대별 역사·문화 콘텐츠를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나선 것이다. 군은 올해부터 2016년까지 국비 641억원 등 총 1374억원을 투입해 의흥면 이지리 일대 143만㎡ 터에 ‘삼국유사 가온누리(세상의 중심)’를 조성할 방침이라고 29일 밝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시대~고려시대까지의 신화, 문학, 설화, 놀이, 장소 등 다양한 콘텐츠와 문화사업을 접목한 문화관광단지로 조성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컨셉트는 크게 세 가지. ▲삼국유사의 영혼을 담은 ‘으뜸누리’ ▲삼국유사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얼쑤누리’ ▲삼국유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아름누리’ 등 3개 공간이다. ‘으뜸누리’에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모든 고대국가의 역사를 감상할 수 있는 삼국유사 역사체험관 및 이야기 학교가 들어선다. 놀이마당, 수경공원, 먹거리촌이 들어설 ‘얼쑤누리’에서는 삼국유사 문학관 및 콘텐츠 마당놀이, 관람객 휴양놀이, 야외 카페 등 먹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 ‘아름누리’에는 삼국유사 콘텐츠센터와 국제교류관, 문화 콘텐츠 창작 마을 등이 들어선다. 군은 또 올해부터 2017년까지 일연(1206∼1289)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인 인각사(고로면 화북리) 복원에도 나선다. 사업비는 113억원. 천년고찰 인각사는 신라 선덕왕 12년(643)에 원효가 창건했으나 이후 사찰 내 상당수 건축물이 훼손 또는 소실됐다. 군은 극락전과 명부전, 요사채, 시주문, 일각문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2013년까지 82억원을 들여 군위읍 서부리 옛 군청사 및 군수 관사 부지에 ‘군위 역사문화 테마공원’을 조성, 조선시대 역사·문화를 재현한다. 아울러 80여년 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해 네티즌들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된 중앙선 화본 역사(驛舍·산성면 화본리), 관사 2개동 복원 및 정비 사업도 벌인다. 군은 또 내년부터 3년간 국비 92억원 등 132억원으로 군위읍 용대리 김수환 추기경의 옛 생가 일원에 ‘사랑과 나눔’ 공원도 조성한다. 군위 용대리는 김 추기경이 다섯살 때 부모를 따라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해 군위초교 5학년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장욱 군수는 “군위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곳”이라며 “이러한 사업을 통해 민족의 역사·문화를 재조명하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은 물론 관광산업과도 연계하겠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WHO&WHAT] 독재자의 만찬

    [WHO&WHAT] 독재자의 만찬

     ‘민주’(民主)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독재’(獨裁)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 단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고 과장된 논리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에게도 ‘독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사정권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일궈냈다는 자부심,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장수 독재체제(북한)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 등 우리는 독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닥친 ‘재스민 혁명’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간 그래온 것처럼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과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고, 이젠 국제사회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가상 인터뷰 ‘WHO&WHAT’의 이번 주인공은 역사 속 인물들이다. 이름 자체가 공포가 되고, 금기어가 됐던 이들. 현대 정치사를 피로 물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 그 자체였던 네 명의 독재자들을 만찬장에 초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재스민 혁명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독재돼지 나폴레옹(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식당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살아생전 서로 배신의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도 있었고, 서로 ‘사상적 동지’로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시간도 서먹한 분위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바로 튀어 나온 듯한 이들은 같은 자리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셋, 군복을 입은 사람이 셋이었다. 앞에 이름표를 놓을 필요조차 없이 얼굴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뚱, 사담 후세인. 인류 또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엔 자기자신의 안위와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찬 이미지만 역사에 남긴 공통점을 가진 이들. 한 사람만 있어도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20세기 정치가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만찬 자리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전성기 시절 국내외 정치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을 역량을 과시했던 이들에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강타하고 있는 ‘쟈스민 혁명’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만찬의 주제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재’인데 말이다.  네 사람의 만남에 적합한 사회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화 전문가나 학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통제하기엔 늘 역부족이기 마련. 결국 메이너 농장의 절대권력자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독재자 돼지)에게 어려운 역할을 부탁했다. 1945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농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능력이라면 참석자들도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사람이 돼지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능수능란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얘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늘의 메뉴●  애피타이저 - 당신은 떳떳한가  메인 디시1 -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버렸을까  메인 디시2 - 당신은 부패했나  디저트 - 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애피타이저> 당신은 떳떳한가.   →나폴레옹 인간 세상 최고의 독재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기쁘다. 나야 동물 100여마리 거느리는 수준이지만, 당신들은 수백만명에서 수억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한 손에 좌우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이기도 많이 죽였고…. 당신들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무자비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20세기 이후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당신들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부터 묻고 싶다.   히틀러 정당성을 묻는거냐.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원해서 적합한 위치를 맡았을 뿐이다. 내가 총통이 됐을 때 4500만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3800만명이 찬성했다.(히틀러는 1934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 1시간 만에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하고 최고사령관 직까지 합쳐 그 자리에 오른 다음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내가 그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다. 정당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왕들과는 평가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 중에서도 네로나 헤롯 같은 사람이 있었고, 나름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면서 그 권력을 조금 더 쓰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 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성공시킨 레닌이 직접 지목한 정당한 후계자다.(실제로는 레닌이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편지를 공개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뿐만아니라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과 역사기록을 조작했다.)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심지어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 러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독재고 뭐고 간에 아예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총과 칼로만 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소 몇 년 이상 유지한 사례가 얼마나 될지 지난 100년 간을 꼽아봐라. 처음엔 그렇게 잡더라도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는 게 정치다.   →나폴레옹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악인으로 이름을 남긴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듣다보니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요새 연설을 통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논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얘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하고, 최근 전 세계 최고 관심사인 ‘쟈스민 혁명’에 대해 들어봤나.   마오 내용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기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청년이 분신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 불과 석달 만에 이렇게까지 커지다니. 벌써 두 나라(튀니지·이집트)의 정권이 뒤집혔고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도 내전이 한창이지 않은가. 난 ‘공산당’을 알리고 ‘혁명 동지’를 모으기 위해 10만여명을 이끌고 1934년 370일 동안 1만 5000㎞를 걸어야했다.(마오는 12개의 지방을 지나고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넜다. 마오의 짐은 두 장의 담요와 홑이불, 외투 한 벌, 책 몇 권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도 15년 이상 지나서야 중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작 석달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보다 완벽한 혁명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히틀러 거기엔 100% 동감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수단이 있었으면 내가 연설을 일부러 석양무렵에 하면서 다양한 무대장치를 동원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능력이라는 얘기가 정설이다.) 아! 물론 난 연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후세인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딱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서 쟈스민인지 뭔지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아랍에는 ‘하마’라는 게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리아의 하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났는데, 정부는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시피 했다.(2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는 그 숫자를 본보기 삼아 일부러 널리 공포했다.) 그 이후 ‘하마’는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반항에 대한 응징을 뜻했다. 아랍권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던 반 체제 인사들은 힘을 잃었고, 일반인들은 조용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아랍권을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왕정이든 사회주의 체제든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물론 무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영TV와 신문을 장악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뇌시켰다. 나름 치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폴레옹 후세인 당신과 카다피가 유난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세인 카다피와 나는 소위 말하는 ‘역경의 자식들’이다. 전통적인 아랍사회가 혈통과 명문을 높이 떠받드는 점이 가장 큰 타도의 목표가 됐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랍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시되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카다피의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뭐 사실 이 만찬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합의나 계급은 무시하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지워버렸다.  <메인디시1>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외면했나.   →나폴레옹 슬슬 본격적인 식사로 들어가보자. 여러분은 다들 수십년에 걸쳐 자기 나라는 물론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독재는 총칼 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선행돼서 가능했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통치스타일이 변하면서 서서히 독재자가 돼 가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말은 자꾸 바뀌고, 점점 잔혹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안듣게 되었는데.   스탈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내 목표는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내 뜻에 복종해야 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배신하려 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도 내 목표량에 미달했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모든 농민들이 국가 소유의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은 재산을 내주는 대신 땅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다.) 결국 나는 그들을 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철저하게 복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히틀러 난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대부분 다 지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는 본인의 증오 이외에 ‘독일 국민들에게 잘 통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솔직히 내가 세운 모든 계획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었는데, 바로 전쟁에 졌다는 것이다. 난 거창하게 세계정복 같은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가 받을 수 있을 걸 받자고 얘기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전쟁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프랑스 양강으로 구분돼 있던 유럽 내에서 독일의 정당한 위치를 인정해 달라는 권리찾기에 가까웠다.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독일 사람들은 1933년부터 2차대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제3제국을 이끌던 시기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여기 다른 ‘실패한 독재자’들과 함께 앉아있지 않을거다.   마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이 필요했다.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면 당연히 원동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밑에서부터 나온다. 히틀러는 그것을 외부(유대인)에서 찾았고, 나와 스탈린은 노동자·농민을 앞세워 인민의 적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공공의 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연히 사회적 결집력과 추진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난 1950년대 중반에 무조건 억누르기만 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금방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마오는 헝가리에서 검열 완화 이후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모든 의견’을 허용하는 대신 ‘공산당의 입지를 굳히는 의견’만을 허용했다.) 고작 6주간 ‘백화제방·백가쟁명’(쌍백) 정책을 펼쳤는데 불온성을 이유로 잡아들인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   →나폴레옹 뭐 결국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국민들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적인 독재자들로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인 것들 같은데. 국민들이 언제 돌아서는 것을 느꼈나.   스탈린 독재에 대한 대중의 영합은 독재권력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힘들어지면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삶의 질에 만족하면 그 권력을 지지하지만 그게 안 되면 외면하는 게 국민들의 속성이다. 내 영향력이 다소간 줄어든 것도 ‘산업화’라는 당면과제가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총과 칼이나 숙청, 강제노동 등을 동원하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 (스탈린은 꾸준한 생산력 증대를 원했고, 만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런 것이 독재자와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독재자에게 불리한 점이다. 독재자는 국민들이 실망하면 이를 되돌리기가 군주보다 훨씬 힘들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에 영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최저였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히틀러 이번 아랍혁명이 ‘빵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식량값 폭등 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원래 독재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조금이라고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 입장에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은 별 의미가 없다. 독재자가 “5년 후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가 뚜렷하게 정책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방하는 제3제국이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찾아오는 거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재정권들이 망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건 왕정 아래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권을 잡으려는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소리친다. 결국 삶에 찌들어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이 약속한 삶은 만들어낼 수 없다.   후세인 아랍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지독재’라는 희한한 형태가 있어 국민들이 모두 돌아서는 시기를 간단히 전망할 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왕권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의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삶은 다른 나라보다 풍요롭다. 일자리도 주고 의식주 걱정도 없다. 대학도 보내준다. (아랍의 왕조 체제에서는 가진 자의 수가 극히 제한돼 있고, 이들은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띤다. 이들은 국부를 독점하는 만큼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럼 이 상황을 뒤집어서 민주화가 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가진 자의 수가 늘어나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난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기회가 생긴다.”는 생각만 한다. 결국 ‘기회’라는 게 어느 순간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을 뛰어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메인디시2>당신은 부패했나.   →나폴레옹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로드 액튼 경이 말했다. 독재와 관련된 경구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독재자는 부패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부패가 독재의 종착점인가.   히틀러 진정한 목표가 있는 독재자는 부패할 시간이 없다. 난 채식주의자에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가끔 맥주를 마시기는 하지만, 내 뒤를 아무리 캐봐라. 내가 부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심지어 난 평생 두 여자(의붓여동생의 딸인 겔리 라우발, 최후를 같이 했던 에바 브라운)만을 사랑했고, 한명이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만약에 지금 세상처럼 청문회가 있다면 난 무조건 100% 무사 통과다. 오로지 위대한 제3제국을 세우겠다는 목표 이외에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제3제국이 부패해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탈린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이 나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딸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내 가족들조차도 화려한 옷이나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스탈린은 부인을 잃은 후 스베틀라나를 사실상 ‘어린 퍼스트레이디’로 대접했고, 자식 중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 오로지 대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내가 평생을 생각했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윈스턴 처칠의 부관들은 스탈린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철두철미하고 명석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최근 아랍권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이나 아들, 측근들이 부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후세인 당신도 자식 간수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후세인 독재자는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결국에 믿을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각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절대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용서 받는다. (후세인의 큰아들 우다이는 공식 행사에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싸움을 벌이는 등 난폭했다. 정신박약아라는 설도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 카다피 모두 가족이 문제였고 자식한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결국 ‘부패’의 진정한 원인은 독재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독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1인 중심적인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마오 아무리 독재라도 권력은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갖추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으로 대놓고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게 부패한 거다. 난 솔직히 주지육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기구를 갖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의 문화혁명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홍위병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고 갈라져 사라져갔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표를 갖고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을 오로지 지키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건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저질이라고 생각한다.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저기 앉아있는 후세인이 대표적인 인간들이다.  <디저트>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나폴레옹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카다피가 계속 버티고 있다. 심지어 쟈스민 혁명이 곧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쟈스민 혁명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히틀러 국민을 장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사로잡았다면 카다피한테는 TV로 보여지는 강력한 모습과 반미 감정몰이가 결정적인 힘을 줬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정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저렇게 폐쇄정책을 고집하겠나. 밖에서 국민들이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 바깥세상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지금까지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결국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럴듯한 꼬임이나 세뇌만으로 할 수 있던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 결국 총과 칼을 통한 억압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혁명이 실패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번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마오 그래도 중국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리비아가 여러 개의 부족이라서 마지막 한 고비를 넘을 원동력이 부족한 것처럼 중국 역시 민족이 다양하고 워낙 지역도 넓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아직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들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기대할 여지가 남았다는 얘기다. 특히 연안지역만 개방해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조금씩 열어가면서 개방과 통제라는 두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 같은 경우에는 특정지역만 열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에 경제적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체제붕괴를 피하기 힘들다.   후세인 내가 보기엔 미국이 얼마나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군사적,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절대적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미국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솔직히 대량 살상무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달아서 억지로 쫓아낸 것 아니냐. 이번에도 이집트에는 개입 안하고, 리비아에만 개입하려고 꼼수를 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민주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를 독재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나폴레옹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당신들에게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스탈린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평양 시민들을 기억하나. 그 원조가 바로 나다. 내 시신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백명이 깔려 죽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방부처리된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문객의 일부가 바리케이드에 부딪히거나 밟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오 내가 죽은 후 숱한 변화 속에서도 난 중국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톈안먼 광장에 걸려있는 내 초상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오가 죽은 1976년 그의 문화혁명으로 쌓인 불만이 폭발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한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책임연구원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 “제국식 총력전, 식민지에 폭력 메커니즘 남겨”

    “제국식 총력전, 식민지에 폭력 메커니즘 남겨”

    ‘식민지 근대화론’ ‘한국적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 ‘식민지 근대’(Colonial Modern)는 비슷해 보이지만 온도 차가 제법 크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식민지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한국적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은 말 그대로 한국이 근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을 식민 시기라고 본다. 식민지 근대는 앞서 두 관점 모두 ‘근대는 정상이었으되, 식민지가 일탈적 상황’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출발한다. 식민지 자체가 이미 근대였다는 주장이다. 식민지 근대 개념을 내놓은 윤해동 한양대 교수(사학)가 오는 25일 이 대학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가 주최하는 ‘2011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강좌 시리즈’ 첫 타자로 나선다. 화려한 강사진이 최근의 인문학 열기와 맞물려 시선을 끈다. 윤 교수는 이 자리에서 ‘예(礼)로부터 피(血)로의 이행-동아시아 식민주의의 근대적 성격’을 발표한다. 윤 교수가 지적하는 대목은 이렇다. “제국에서는 총동원 체제가 전후(戰後) 복지국가 모델로 전환하는 토대가 됐다. 이는 총력전 체제의 제국적 변용으로 근원적인 식민주의 청산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1·2차 대전 당시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은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고 국민을 동원했다. 그 동원의 대가로 서구 열강은 전쟁 뒤 자국민에게 복지국가를 안겼다. 덕분에 열강의 국민들은 수준 높은 복지를 누렸고,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은 잊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피식민국가였다. 피식민국에게 남은 것은 총동원 체제가 갖고 있던 폭력적인 메커니즘뿐이었다. 그렇다고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복지’를 선물할 능력도 없었다. 남북한에 지금도 남아 있는 총동원 체제의 잔재를 윤 교수는 이와 연결지어 해석한다. 단순히 식민 지배가 불법이고 문제가 있었다고 시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이후에까지 이어지는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와 김백영 광운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다. 4월에는 김규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사학과 교수가 ‘제국 대 민족-제국의 모순과 씨름하는 일본 지식인들, 1919~1945’, 9월에는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식민지 통치성과 검열’, 10월에는 리투 비를라 캐나다 토론토대 사학과 교수가 ‘법, 계약과 경제적 인간의 배열: 자유주의 통치성의 식민지적 계보’, 11월에는 스티븐 레그 영국 노팅엄대 지리학과 교수가 ‘규모와 식민지 통치성: 전간기 인도에서의 민주주의, 전제주의와 권한 이양’을 주제로 각각 발표에 나선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성철스님 조명 학술포럼

    성철스님 조명 학술포럼

    내년은 퇴옹 성철(1912~1993) 스님의 탄생 100주년이다. 성철 스님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는 학술포럼이 올해부터 3년 동안 열린다. 성철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은 15일 “오는 2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퇴옹 성철의 100년과 한국 불교의 100년’이라는 주제로 첫 학술 포럼을 갖는다.”고 밝혔다. 이 포럼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해마다 3, 5, 9, 11월 넷째주 목요일에 포럼을 열 예정이다. 내년 주제는 ‘퇴옹 성철과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우치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성철 스님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인 2013년에는 ‘퇴옹 성철과 한국 불교의 미래’를 다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인사]

    ■법무부 ◇고위공무원 승진 △국적·통합정책단장 성락승◇부이사관 승진△출입국정책단 출입국기획과장 이복남◇서기관 승진△출입국정책단 출입국심사과 김진영△〃 체류관리과 김정도△〃 체류조사과 이상호△국적·통합정책단 정보팀장 안규석△서울사무소 관리과장 양차순◇서기관 전보△출입국정책단 체류조사과장 김민수△인천공항사무소 출국심사국장 이종옥△서울사무소 이민특수조사대장 정수동△청주보호소장 이우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경영기획실장 김정섭 ■대한상공회의소 ◇승진 <팀장>△기업지원 정관용△노사인력 박재근△아주협력 신해진◇팀장 전보△감사 윤의진△정보화서비스 김기태△기업정책 강석구△산업정책 이경상△규제점검1 손세원△규제점검2 황동언△해외조사 이헌배△품질혁신 임철△국제표준 이영준
  • [열린세상] 문치(文治)와 무치(武治)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 문치(文治)와 무치(武治)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무치와 문치가 그것이다. 무치는 칼이나 총을 든 무인이 다스리는 정치이고, 문치는 붓을 든 문인들이 다스리는 정치이다. 물론, 고대 도시국가에서 직접 시민의 의견을 들어 나라를 다스리거나 신라의 화백(和白)제도처럼 구성원의 만장일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 이런 방법으로는 통치가 어려워진다. 덜 발달된 고대 사회에서는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저개발국가에서는 이 방법을 선호한다. 힘의 차이에 따라 통일도 되고 분열도 되겠지만, 대체로 무치는 분할통치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봉건제(封建制 )와 장원제(莊園制)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나라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 힘으로만 밀어붙이기 어렵다. 국가 구성원의 종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며, 관습이 다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는 일정한 이념이나 고도의 정치기술이 필요하다. 즉, 붓을 든 문인들이 필요해진다. 분할통치보다는 군현제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선호했다. 그래서 무치에서 문치로 전환하거나, 무치와 문치를 조화롭게 병행하는 방향으로 정치체제가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 무치와 문치 중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 일장일단이 있다. 무치는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일사불란한 통치가 가능하고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분란의 소지가 많고 독재가 만연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문치는, 문화는 발달시킬 수 있으나 문약해져서 힘 있는 나라에 굴종해야 하는 약점이 있다. 한편, 무치를 하는 데는 군사력을 길러야 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공업을 장려해야 하고, 외국과 무역을 활발히 해야 한다. 무역 중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것은 해적질이다. 영국이나 일본이 일찍부터 해적질을 일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문치는 사회 안정을 위해 농업을 중시하고 쇄국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더구나 문치사회에서 군대를 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 문치체제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국가안보는 국방보다는 외교에 의존하게 되고 군사력이 약하다 보니 주체성에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런데 문치의 장점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어 무력만으로 이를 억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비들은 각자 마음을 수양해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착해지면 정치는 저절로 잘되고 사회질서도 저절로 잘 유지될 것으로 믿었다.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이 그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맹자’의 성선설에 기초한다. 사람의 착한 마음은 하늘에서부터 품부 받은 것이라 한다. 이를 성(性)이라 한다. 그런데 성은 뒤에 인욕(人慾)이 작용해 착한 마음을 나쁜 마음으로 바뀌게 하기 쉽다. 그러니 ‘경’(敬)을 해 착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국왕을 비롯해 선비 개개인을 성인(聖人)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도학정치(道學政治)로 나아가게 했다. 이른바 도덕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상공업은 인욕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제해야 하고, 자연친화적인 농업을 주업으로 하게 되었다. 이에 산업이 피폐해지고 근대화하는 데 늦었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문치주의, 도학정치 구도가 바뀐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서구화의 일환으로 제3공화국에서는 주업을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일거에 바꾼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이윤추구가 정당화되었다. 그래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결과 공동체가 무너지고, 공해가 심해지며, 인간성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동양의 도덕성을 폭넓게 수용해 경제 개발과 도덕성을 겸비하는 제3의 체제를 고안해 볼 만하다. 여기에는 문치와 무치가 균형있게 조화된 근대국가의 건설이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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