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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쩌민의 인민복/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일본을 방문중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6일 아키히토(明仁) 일황(日皇) 주최 궁중 만찬에서 ‘인민복’차림으로 참석해 일본측을 긴장케 했다.일본측은 중국측 관계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차림’에 대해 조심스럽게 타진했으나 “별 의미가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장주석은 28일 와세다대에서 “일본은 정확한 역사관으로 국민과 청년을 계도해야 하며 군국주의의 사조와 세력이 거듭 대두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사실 인민복은 1911년 청(淸)왕조를 거부하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을 건국한 중국혁명의 선도자 쑨원(孫文)이 처음 착용한 복장으로 그의 아호를 따 일명 중산복(中山服)이라고도 한다.그후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등샤오핑(鄧小平)등 중국지도자들은 물론 인민들도 즐겨 입었었다.반제국주의,사회주의혁명과 평등의 상징이었던 인민복은 최근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청바지를 선호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서서히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체험한 역사의 증인’이라고 자처한 장주석이 해외여행에서는 잘 입지 않던 인민복을 입은 것은 따지고 보면 와세다대 연설의 예고편이었다.국가지도자의 만찬복식은 이처럼 외교무대에서 무언의 웅변으로 작용한다. 진한 감청색의 인민복 차림으로 일황과 건배를 하는 장주석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우리 생활한복의 국제무대 진출을 생각해본다.세계적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 무슨 한복타령이냐 할지 몰라도 남북화해의 회담이나 모임에서 다함께 한복차림으로 만난다면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남쪽은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강조한 생활한복으로,북쪽은 고구려 냄새가 물씬 나는 복식을 입고 나온다면 그 만남의 절반은 성공할 것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한반도주변 4강이나 제3국인에게도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외교무대의 만찬이나 파티때도 정통한복이나 품위있는 생활한복 차림으로 나선다면 ‘한국의 메시지’를 말(言)이전에 먼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 두렵거든 바른 길을/金三雄 주필(특별시론)

    수명의 사형수중에는 16세 소년도 떨며 옆에 서 있었다.“아플까요?”라고 소년이 묻자 “아니야,전혀 아프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부드럽게 소년을 감싸주며 ‘프랑스만세’를 외친 마르크 블로흐는 맨 먼저 쓰러졌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역사가이며 소르본대학 교수를 지낸 58세의 블로흐는 나치병사들에 의해 이렇게 처형되었다.“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느 것인가요?”란 첫마디로 시작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역사를 위한 변명’의 저자는 독일패망을 목전에 두고 리옹 근처의 벌판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접었다. 역사란 무엇에 쓰는가,역사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효용가치란 자장면 한그릇보다 못할지 모른다.블로흐는 그 명제를 완성하지 못한채 비명에 갔지만 역사에 대한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남긴다. 이와 관련,‘시간은 세계사의 심판관’(헤겔)이란 말은 명언이다.시간이 축적되면 역사가 되고 역사를 쪼개면 시간이 된다.신을 믿지않고 종교를 부정하더라도 시간과 역사만은 믿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과 역사만큼 진실과 거짓,정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판별해주는 심판관은 다시없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통곡도, 백이숙제의 원망도 시간이라는 역사가 모두 해결해주었다.단종의 절규와 사육신의 분노도 시간이 모두 들어주었다.천도(天道)마저 침묵한 사마천의 아픔,백이숙제의 억울함, 단종과 사육신의 피맺힌 한을 천도를 대신하여 시간이 풀어주고 역사가 옳게 평가했다. ○당대사를 보라 당장 우리시대의 당대사를 살펴보자.나라를 판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매국노와 변절자들이 ‘친일파’로 지탄받아 후손들이 조상을 원망하면서 살고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일삼던 살인자들은 떳떳하게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반면 그들에 저항하여 몸을 던졌던 분들은 ‘민주열사’로 대접받는다.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역사가 눈멀었다고 하겠는가.아직 친일파와 양민학살 세력이 활개치고 있지만,그들은 명분과 국민의 눈총에서 점차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시간은 한국사의 심판관이기도 하다. ○대한매일의 역사관 ‘生의 권력의지’를 필생의 중심개념으로설정한 니체가 시간의 가치를 탐구한 것은 당연하다.그는 인간의 삶의 시간성을 동물의 무시간성과 구별하여 “그대곁을 지나가는 가축을 보라.저들은 내일이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고락에만 매달려 있으니 곧 그들의 순간의 일편(一片)에만 매달려 있기때문에 우수도 권태도 알지 못한다”고 개탄했다.그러면서 니체는 인간의 숙명적 기능을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아는 것’이란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시간과 역사의 가치를 잊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권력을 탐하거나 물욕에 빠지는 사람,퇴폐행각을 즐기는 부류,곡필아세를 명예로 착각하는 지식인이 너무 많다.이런 현상은 시간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순간의 쾌락과 동물적 포만을 즐기려는 반시간 반역사적인 ‘인간모독’이다. 1세기전 국운이 바람앞의 촛불과 같았을 때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맡았던 선각자들은 국권수호에 온몸을 던졌다.이들은 지사적 순결주의, 도덕주의, 순교주의까지 지닌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룩한 언론인들이었다.이들의 한결같음은 항일구국운동가,정론언론인,바른 역사학자라는 일체성이다.아마 이들이 믿었던 신이 있었다면 ‘역사’또는 ‘역사법칙’이 아니었을까. 당시 많은 권력자,지식인들이 시류를 좇아 매국의 대열에 설때 이들 선각들은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역사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白凡의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법칙의 준거라 할 것이다. 역사를 흔히 대하장강(大河長江)에 비유하지만,역사는 모든 오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썩는 강물과는 다르다.역사란 받아들일 것은 받고 배척할 것은 배척하면서 종국에는 반드시 바르고 옳게 회귀하는 것이 역사,그 대하장강의 법칙이고 엄숙성이다. ‘역사’가,그 평가가 두렵거든 진실과 정도를 걸으라.이는 바로 ‘대한매일’이 추구하는 역사관이며 마르크 블로흐가 꿈꾸었던 ‘역사의 쓰임새’이기도 하다.
  • 계간‘인물과 사상’ 진중권씨 ‘김일성과 박정희,황장엽과 조갑제’

    ◎극우파·전체주의자는 한배에서 나온 형제/한국적 민주주의·조선식 사회주의 닮은점 많아/오제도 변호사·황장엽씨 의형제 ‘어울리는 만남’ 전북대 강준만교수가 펴내는 계간지 ‘인물과 사상’(개마고원 펴냄) 8권이 나왔다. ‘출판의 언론화’,‘1인 저널리즘’을 표방하며 지난 96년 10월 첫권이 나왔으니 창간 두돌을 맞은 셈이다. 이번 호에서는 진중권씨(베를린 자유대 박사과정)의 ‘김일성과 박정희,황장엽과 조갑제’가 눈길을 끈다. 진씨는 황장엽씨와 월간조선 편집부장 조갑제씨의 글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주체’의 조국 김일성의 조선식 사회주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황씨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이론가,조씨는 박정희 대통령 신봉자라는 것이 진씨의 설명. 진씨는 “시위와 파업은 인민에게 큰 손실을 줄 뿐아니라…폭력적으로 지도권을 장악할수 있다…폭력을 쓰는 자에 대하여는 폭력을 적용해야 하며 총살까지 해야 한다”(황장엽),“60∼70년대의 한국은 서구와 사회발전단계가 다르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할수 없고…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제한해야 한다”(조갑제)는 글에서 주체사상의 전체주의적 역사관과 박정희의 파시스트적 역사관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한다. 진씨는 “이처럼 극우파와 전체주의자들은 한배에서 나온 형제이기 때문에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변호사와 황장엽씨가 의형제를 맺은 것은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어울리는 만남”이라고 꼬집었다. 이번 호에는 또 참여연대가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기 위해 개혁대상인 한나라당과 손을 잡는 것은 제도 만능주의라며 참여연대의 제도결정론을 비판한 ‘김대중 정권을 어떻게 지지하고 비판할 것인가’(강준만),영어공용화 논쟁과 관련,먼 미래에는 민족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되는 이중언어사회가 될 것이라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고종석)도 실려 있다. 강 교수는 머리말에서 “한국에선 이데올로기 이전에 연고주의가 모든 걸 결정한다”며 “인물 자체를 개입시켜 평가하고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1차적인 힘인 연고주의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해 인물과 사상의 무게중심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제시했다. 그는 이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지독한 권위주의를 버리고 자성해야 한다”며 “내년 초에 나올 9권부터는 수구기득권 세력에 속하는 지식인들의 위선과 기만 폭로에 주력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방향을 소개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사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5일 개관했다.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현장이 역사의 배움터로 단장하고 문을 연 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 강점기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해 수형시설로 사용되다가 지난 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후 88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92년 독립공원으로 꾸며졌다. 일제는 이곳에 의병장에서부터 독립운동가·항일투사를 무수히 투옥하여 한민족의 혼을 짓밟았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파란곡절의 현대사와 함께 수많은 반독재 민주인사·학생·통일운동가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흉악범·경제사범·보안사범 등도 거쳐갔으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범 金九 선생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이곳에 수감돼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柳寬順 열사는 이곳 지하감방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사이토(齊藤) 일본총독을 사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姜宇奎 의사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일제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감옥과 사형장,망루 등과 역사전시관으로 이루어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일제때 고문과 취조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옛 보안과 건물을 최근 보수한 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변천과정,일제때 전국 형무소 현황,항일저항사,옥중시설,고문실 등을 영상과 밀랍인형 및 각종 모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애국선열의 넋을 후손들이 기리는 한편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시절을 되새겨 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산 교육장이다. 국민 모두 순례의 발걸음을 디디고 애국심을 다지는 성지로 계속 가꾸어 가야 겠다. 나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역사 유적으로 전세계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듯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일제의 만행을 우리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증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
  • 大韓每日申報/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민족운동사와 언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국언론사의 측면에서 이 신문은 몇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1904년 7월18일 창간돼 1910년 5월21일 일본 통감부에 팔리기까지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 민족지였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총 6면에 4개면은 영문,2개 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으나 이듬해 8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분리했고 1907년 5월에는 한글전용 신문을 새로 발간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발행부수도 당시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부수를 합한 것의 2배가 넘는 1만부를 기록했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항일 구국의 선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조약의 강제체결,高宗의 헤이그 밀사 파견과 퇴위,구한국 군대해산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것은 물론 고정란을 두고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기사와 사설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당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음을 증언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성격은 발행인 裴說(Ernest Thomas Bethell)이 영국인이어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일본측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도 기인하지만 신문발간에 참여했던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 우리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 裴說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梁起鐸은 전무·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의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항일논조를 주도했다.부친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관여했던 그는 한학의 바탕에 양학문을 접목하고 동학당과도 관련을 맺었던 우국지사였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이후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한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던 朴殷植은 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신교육 구국,사회관습 개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섰고 나중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했다.또 朴殷植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丹齋 申采浩는 민중계몽을 위한 사설과 함께 ‘독사신론’등 역사관계 논문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상고사’의 주체적 민족주의 사관은 이때 싹텄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일원으로서 민족과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배들의 꿋꿋한 기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 金 대통령 訪日 결산­성과와 전망

    ◎21세기 韓·日 파트너십 새장 열었다/‘감정의 20세기 매듭’ 큰 진전/日 올바른 역사관 정립 시급 金大中 대통령의 이번 방일 성과를 보는 한·일 두나라의 시각은 매우 긍정적이다.金대통령을 수행했던 崔相龍 고려대교수도 “한달전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라며 “한일간 새로운 장을 여는데 충분한 여건을 갖췄다”고 전했다. 그렇다고해서 곧바로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무엇보다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두나라 국민의 공감대와 확고한 실천의지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金대통령이 10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일본정부의 책임있는 사람외에 다른 사람들의 한국관련 언급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것도 이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국민감정에 따라 춤춰온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군대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어떻게 정리되어가느냐가 관건이다.金대통령도 “위안부 문제는 결코 잊지않고 있다”고 말했다.적절한 향후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다.진정한 매듭은 양국 후손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으로,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고치는 일이다.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도 “결국 최종 해결점은 이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번 일본 방문은 남북관계,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반도 주변 4강외교의 하나로 봐야한다.金대통령의 지난 6월 미국 방문에 이어 앞으로 예정된 중국과 러시아와 더불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따라서 일본의 6자회담 및 한·일 자유무역지대 설치 제의에서 보듯이 한반도 주변 4강의 인식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과제이다.金대통령이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 자유무역지대 설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일본의 유엔에서 역할 증대 등 아시아와 세계 속에서의 한·일간 협력도 이 틀 속에서 조화를 찾아야 가능하다. 한일관계는 이러한 테두리 속에서 ‘감정의 20세기’를 매듭짓고 ‘이성의 21세기’를 맞아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일성과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親日의 군상:7­2/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현실 비관… ‘대세 순응주의’ 빠져 민족 외면/日·中·美 유학한 대표적 선각자의 한사람/105인사건 연루뒤 ‘친일전향’ 조건 출옥/日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 끝내 반성 안해 좌옹(佐翁) 尹致昊(1865∼1945년·창씨명 伊東致昊)는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그는 조선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중국·미국에서 유학한,당시로선 드문 식견가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그의 친일 행적보다도 친일 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尹致昊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尹雄烈(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본관은 해평(海平).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尹致昊의 첫 유학지는 일본.1881년 일본의 신문물 견학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이 계기였다.그는 조사(朝士) 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나이는 17세로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신사유람단 따라 日 시찰 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로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였다.그는 여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이 시절 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 인사,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 슬프다.조선의 현상이여,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이러했다. 1883년 5월 그는 초대 주한 미국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하지만 개화파 인사들의 급진적 개혁론에는 찬동치 않는 입장이었다.그러나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갑신정변 실패 후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885년 상하이로 간 그는 현지 미국 총영사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다.이 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미션 스쿨로 그는 여기서 3년반 동안 수학했다.그러나 원치 않았던 상하이생활 초창기 그는 한동안 술과 여자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그의 방탕한 생활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막을 내렸다.상하이에서 3년반을 보낸 후 그는 청나라를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으로 비유했다.반면 일본은 그에게 ‘동양의 한 도원(桃 園)’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그가 강대국 미국·러시아를 제치고 친일로 나선 데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러일전쟁 무렵 그는 ‘황인종단합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자들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족패배주의에 빠져 尹致昊가 친일로 나선 것은 ‘105인사건’(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계기다.한일병합 2년 뒤인 1912년 일제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인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었다.그는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13일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출감했다.출감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민족의 동화(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다”(‘매일신보’,1915년 3월14일) 그가 변절한 직접적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그러나 그 내면에는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개화기의 尹致昊 연구’의 저자 柳永烈(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변신한 尹致昊의 친일 행보를 따라가보자. 1919년 ‘3·1만세의거’ 직전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그리고는 의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경성일보’,1919년 3월7일)라며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가 선전하던 ‘조선독립불능론’‘투쟁무용론(無用論)’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친일논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과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의 회장을 맡는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선전에 주력했다.당시 그는 민족개량·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일제 통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다. ○학병 참가 전국 순회 강연 그의 친일은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7일)을 계기로 강도를 더해갔다.총독부 주최 시국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합당한 조치’라며 환영하였다.또 그해 7월 ‘황국신민화’의 실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로 선정돼 창립총회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때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징병제에 이어 1943년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조선 학도들에게도내지(內地·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매일신보’,1943년 11월18일)며 학도들의 출진을 촉구하였다.이같은 공로로 45년 2월 그는 일본 귀족원의원에 선출돼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일본 귀족’ 반열에 올랐다. “…(일제하)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사망(1945년 12월16일) 2개월 전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이다.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 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만 것이다. ◎尹致昊 일기/60년간 쓴 일기 시대상 상세히 담아/사생활도 솔직히 기록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는 한말의 선각자 尹致昊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년간에 걸쳐 기록한 개인적 메모.초창기 일기는 한문·국문으로,1889년 12월 이후부터는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청국·미국 등 해외유학 시기의 ‘일기’에는 당시 그 나라의 발전상과 시국 상황,그리고 그곳에 체류중이던 한국인들의 동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국내 체류기인 1883∼84년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이 목격한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활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특히 일제 강점기 그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의 입장과 국내 지식인들의 동향 등도 담고 있다. 이‘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특히 尹致昊 인물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한 사람의 ‘일기’치고는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자신의 행적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尹致昊 일기’에 나타난 親日 어록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오,축복받은 일본이여!동양의 파라다이스여!세계의 정원이여!”(1893년 11월1일)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의 게양을 반대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1919년 10월1일) “일본은 동양에 있어서 백인 지배의 마력(魔力)을 깬 데 대하여 모든 황인종의 영원한 감사를 받을 만하다” (1941년 12월26일) “우리는 조선의 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에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3년 5월12일)
  • 위안부의 恨달랠 예술한마당/역사관 개관준비위 15일 용인 희원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개관 준비위원회(위원장 宋月珠스님)가 마련한 ‘광복 53주년 8·15 예술한마당’ 공연행사가 15일 하오 7시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앞뜰의 전통정원 희원에서 무료로 펼쳐진다.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함께 생활하고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원장 혜진 스님) 옆에 세워질 종군 위안부 역사관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열리는 이 공연에서는 시인 高銀이 집필한 창작판소리 ‘접동새’를 명창 안숙선의 창으로 들려주며 대금명인 이생강이 나라잃은 슬픔을 담은 노래 ‘목포의 눈물’을 대금으로 연주한다. 창작판소리 ‘접동새’는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성노예가 돼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구한 사연과 해방후에도 고향과 가족을 찾지 못하고 이역만리를 떠돌아야 했던 망향의 한을 접동새의 피맺힌 울음으로 표현한 작품. 이어 무용가 이정희(중앙대 무용과 교수)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야 했던 위안부들의 슬픈 사연을 현대무용으로 풀어낸다. 이밖에 서도소리 명창 박정욱씨,바리톤 최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최익환과 서울풍물단의 무대도 마련된다.
  • 민주열사 열전:1­1(정직한 역사 되찾기)

    ◎재조명의 의미/이제 ‘민족대통합의 빛’으로/60년대이후 319명 희생/진상규명·바른 평가 과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질식할 듯한 독재체제의 폭압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던 민주열사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노동현장에서,학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다.때로는 분신과 투신으로,단식투쟁으로, 시위로 독재정권과 악덕 기업주들에 항거했다.그들의 위대함은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이익이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던 사회풍토 속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이다. 민주열사들은 비겁의 사회에서 진정한 용기를,억압의 구조에서 영원한 자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열사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할복했다.대학생이던 그는 “숭고한 피를흩뿌려 이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말자”며 노동운동에 나섰다.그리고 거대한 구조악 앞에 번민을 거듭하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 이슬이 되기 위하여”란 말을 남기고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많은 목숨들이 이렇게 스러져 갔다.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없는 의문사와 고문사도 적지않았다.주위의 외면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민주열사’들도 많았다.그들은 비록 이름없이 죽어 갔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부활됐다. 전국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가 집계한 6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열사는 319명.분신·투신·할복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는가 하면 고문과 사건 조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또 오랜 운동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고문 후유증,불의의 사고 등으로 숨진 열사들도 있다.노동운동 와중에 92명,학생운동 과정에 60명이 숨졌고,처형이나 옥중사망,출옥후 사망자도 103명에 이른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제외하고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여전히 미미하고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金三雄 친일문제연구회 회장(서울신문 주필)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법적·도덕적 예우와 진상규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서둘렀어야할 역사적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그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희생당한 열사와 유족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민주열사 의문사에 대한 망각은 정의의 망각”이라며 반드시 진상규명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도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없다”고 강조했다. ◎李富榮 의원 인터뷰/“전과기록 없애 명예회복부터”/피살자 진상조사위 구성… 특별검사 둬야/과거·현재·미래 묶어 민족정통성 확고히 여야 정치권의 개혁그룹과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이 추진되고 있다.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李富榮 의원(한나라당)에게 특별법 추진의 의미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李의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부인 孫守珦씨는 고(故) 張俊河 선생의 비서였다. ­민주열사 명예회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적으로 폭력,독재가 횡행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선열들을 받드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고 통일된 조국의 주체가 되려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확립,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세가지 시대적가치를 고양시켜야 된다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이 시대에 당연히 논의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전과기록을 우선 없애야 합니다.또 민주화에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훈포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고문에 의했건,암살당했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위를 만들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어야 합니다.심지어 10여년전에 의문사한 사람의 사인규명이 되지않아 가족들이 유골을 묻지 못하고 집에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진 사례도 있는데 국가공권력이 외면하고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정부라면 당연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특별법은 언제쯤 제정되리라 예상하십니까. ▲연내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봅니다.올 정기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야지요.이는 새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이런 일부터 여야의 벽을 깨야 합니다.실제로 여야 의원들 사이에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여당에도,야당에도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대화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의견도 있는데요. ▲우리 현대사는 아직도 독립운동 흐름과 친일파 흐름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족 정통성을 세우느냐,못세우느냐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물려줄 것이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민주열사 명예회복이 지금의 세계화 추진과 맞부딪치는 것도 아닙니다.자기 정체성 확립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 묶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기고/고난·희생은 위대한 유산/張琪杓 신문명정책硏 원장 한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옥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그래서 사필(史筆)이 강해야 민족이 강해진다”고 설파하셨다.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으며,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국민이라야 참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민족정체성 확립 시급 지금 우리는 IMF사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신적 빈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오늘의 이 시기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의 전 부문에 걸친 총체적 위기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서구 근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8·15해방 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민족적 수치이자 민족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해방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일만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군사독재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더 없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한 3·1 운동을 비롯하여,4·19혁명,군사독재 반대투쟁,민주노동운동,부마항쟁,광주항쟁,6월 민주항쟁 등은 민족의 위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민족적 전통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난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더욱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분신자결과 고문사가 특별히 많았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이후 분신자결한 사람이 69명이나 되며 할복자결, 투신자결,고문사 등을 합하면 무려 226명이나 된다.전세계 어떤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수십년간 1,000여명의 ‘양심수’가 계속되어온 나라도 유례를 찾을 수 없거니와,특히 이념 문제 때문에 4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나라도 없다.한없이 가슴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그동안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민족도약의 밑거름이 되게 하는가는 후세 사람의 몫이다. ○왜곡 현대사 논의 물꼬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H.카)라는 말이 있다.역사란 과거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행위이다.그러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역사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져야 바른 역사를 쓸 수 있다.특히 민족정기가 훼손될 만큼 무시되고 왜곡되어온 한국현대사를 ‘역사의 장’에 올리는 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 바그너 ‘오페라 서곡들,기타’(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7)

    ◎리하르트 바그너/서쪽으로,서북쪽으로/파시즘 선구자로 숭배 유태인 몰살의 음악/서로 흐러던 문명사조 북향시키려던 노력들/베토벤 교향곡 ‘확장’ 오페라속으로 신화화/망상의 평화 꿈꿨으나 엷기만한 희망의 흔적 1.발할라,유태인을 혐오하는 천재를 환영하다… 1883년 2월13일 베니스에서 바그너가 사망하자 신문은 그런 부고를 냈다. 발할라는 그의,4일 동안 연속 공연되는 총 16시간짜리 대작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신들의 궁전. 독일신화의 주신(主神) 보탄의 딸 발퀴레들이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영웅들을 이곳으로 데려온다. 보탄은 그들에게 날마다 주연을 베풀며 마지막 ‘악과의 전쟁’에 대비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신들이 승리할 수는 없다. 신들과 악의 세력이 모두 멸망하고 새로운 인간의 세상이 열린다. 그래서 ‘반지’ 4부의 각 제목은 전야제 격인 ‘라인의 황금’(라인의 황금을 지하세력 난장이가 탈취하면서 세상의 질서가 뒤흔들리는 ‘사건 발단’),첫째날 ‘발퀴레’, 둘째날 ‘지그프리트’(미래의 주인인 지상의 ‘인간영웅’ 이야기)에 이어 마지막날이 ‘신들의 황혼’이다. 그렇게,그런채로 발할라가 천재­바그너를 환영한다.‘유태인 혐오’는,무슨 소린가? 식인종이었던 자들을 교육시켜 사회를 주무르는 장사꾼으로 키웠다… 유태인 종족에 대해 바그너는 그렇게 극언했다. 그리고 사망 40여년후 그는 악명높은 히틀러 파시즘의 선구자로 숭배되고 그의 음악속으로 수백만의 유태인들이 몰살한다. 2.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명은 태양의 동쪽에서 태동,서쪽으로 그 중심지를 옮겨갔다. 뒤늦은 문명이 앞선 문명을 보다 빠른 기간에 배우고 여력을 계승­발전에 투여한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에서 문명이 만개하고 로마에서 위대한 건축물을 이룬다. 문명의 주역은 그후 프랑스­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바뀌었다. 동에서 서로… 바그너는 독일문명의 세계 주도를 위해 그 흐름을,거대하게 북향(北向)시킨다. 그의 음악은 그래서 음악사상 가장 거대한 폭으로 흐른다. 물에서 태어나 가장 강렬한 욕망의 불길을 태우다가 다시,물의 평정으로,죽음으로회귀하려는 필생의,그리고 전 생애에 걸친 음악. 그러나 당대와 후대의 바그너 예찬자들은 그의 음악에 평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그너 자신은? 그는 소망했지만,소망을 성취할 수 없었다. 각 민족에게는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것들을 선진­미개의 틀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요는,주류 문명에 대응하는 방식. 바흐는 ‘독일속으로’ 더 흔들리면서 더 명징한 종교음악을 세웠고,독일을 종교음악의 본산지로 세웠다. 괴테는 그리스­로마의 문명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독일문학을 이룩했고 베토벤은 자신의 불행과 독일의 열정을 음악사적인 낭만주의로 전화시켰다. 브람스 또한 북(北)독일의 우울을 음악의 보편적 심오함으로 담금질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영국과 프랑스의 학문적 업적을 독일적으로 종합,독일의 후진성을 혁명성으로 변혁시켰다. 바그너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복원을 꿈꾸면서 이탈리아 코믹 오페라 형식(사랑의 금지)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형식(리엔치)을 기웃댔지만 처음부터 북행(北行)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게,서북 쪽으로. 그 결과는무엇인가? 문명의 야만을 치유하기 위한 생체실험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으나,위대한 실패로 끝난. ‘베토벤의 교향곡 세계를 오페라 세계로 심화­확대시키자’. 바그너의 음악적 꿈은 그랬다. 베토벤이 오페라를 단 한편 남겼으므로,그리고 그렇게 그의 ‘교향곡세계’가 ‘보이는 것’의 음악적 응축이었으므로,그것은 타당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일찍 북쪽의 광포하고 웅대한 신화로 꿈의 내용을 채운다. 3.웅대한 규모는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고 ‘야만의 신화’는 신화의 성스러운 야만화를,그리고 역사관의 반동화를 초래한다. 야비한 사기,불륜 행각과 과대망상의 천재 행각이 오페라 ‘속으로’ 신화화 하고 그 신화음악이 오페라 ‘밖으로’ 나와 다시 바그너의 현실세계를 미화,영웅화하는,악순환 고리가 반복 심화된다. 예찬자들은 열광하고,그러나 바그너로서는 ‘마음의 지옥’이었던 그 악순환의 고리. 그러므로,그의 음악은 그가 그 지리한,고통의 생체실험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육(肉)의 고행으로까지 밀어부치는 대목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도대체 어디까지니이까.어디까지 음악의 육욕을,탐닉해야 하니이까.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음악의 살속’을 파고 든다. ‘끝까지’가 지리하고 심오한 반복을 낳고 ‘파고 듦’이 음악을 이제껏 가장 극단적인 반음(半音)사용으로, 사랑의 환희의,몰아의 황홀경의,그렇게 ‘사랑의 완성을 위한 죽음’의 정황으로 치닫는다. 물의 죽음에서 물의 죽음으로… 그러나 그 과정은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극단의 불의 경지. 그것으로 물과 불의 구분 자체가 극복되는 경지이다. 4.반프리트. 망상에서 평화로운 곳. 혹은,망상으로 평화로운 곳. 바그너는 만년의 저택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숱한 거장들이 바그너를 ‘망상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연주한다. 그러나,예술가는 망상에서 평화롭지 않으면 망상으로 평화로울 수 없다. 흥분은 금물. 루돌프 켐페의 음반은 한마디로 바그너 ‘반지’ 작곡 생애에 바치는 진정한 반프리트이다. 오페라 ‘방황하는 네델란드인’(1841)서곡,‘탄호이저’(1845)서곡 및 1막 일부,‘뉘른베르크의 명가수’(1867) 1막,3막 서곡 및 일부,그리고 ‘신들의 황혼’(1874) 서주­‘새벽’과 ‘지그프리트의 라인여행’등 수록곡은 켐페의 ‘독일 정통’ 연주를 통해 ‘바그너 선언’,‘정체성과 전통 발견’,그리고 ‘평정의 갈구’로 재설계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바그너의 진정한 소망의 골격을 보는 것이다.가장 중요한,이 모든 것이 종합되는 ‘지그프리트 장례행진곡’은 등장하지 않고 각 곡 도처에 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위대한 망상의 흔적이 (아직)아니고 상상력 풍부한 희망의 흔적이다. 바그너 사망 한달 후 마르크스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어느 쪽?
  • 日 차기총리 외교·역사관 ‘우려’/自民 총재 3후보 분석

    ◎오부치­신사참배 의원모임 회장 역임… 맹신자 수준/가지야마­한반도 통일 반대 시사… 미 인종차별 발언도/고이즈미­입각후 전범 사당에 제사… 셋중 진보적인 편 【도쿄=姜錫珍 특파원】 일본 열도가 차기 총리가 될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로 달아 오르며 이웃나라의 관심도 뜨거워지고 있다. 24일 치러질 선거에 출마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외상,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郞) 후생상 등 3명의 후보가 저마다 서로 다른 외교정책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 세 후보들의 행적과 발언들은 향후 일본의 외교정책을 가늠케 해준다.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후보는 고이즈미 후생상.‘후생 국무대신’ 자격으로 태평양전쟁 전범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지만 입각 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관한 한 오부치 외상은 맹신자격이다.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패전 50주년을 맞아 ‘반성과 사죄’의 뜻을 담은 총리 담화를 내던 95년 8월. 연립 정권이었던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부치는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다 97년 9월 외상에 임명되면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단지 ‘외국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장 투쟁파’,‘강경 보수’로 불리는 가지야마 전 관방장관은 오부치 외상보다 한술 더 떠왔다. 최근의 사례로 97년 8월 관방장관이던 그는 ‘타이완(臺灣) 유사 사태는 가이드 라인이 말하는 주변사태’라고 말했다. 타이완 문제에 일본이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중국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96년 8월에는 “남북한 통일되면 한국은 피폐해진다”,“(한반도가 통일되면) 일본에 영향이 없을 리 없다. 대량의 난민이 온다. 위장 난민도 있다. 거기에 무기가 공여되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통일을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었다. 급기야 당시 金太智 주일 대사에게 사죄했고 당시 한국의 집권당으로부터 ‘언동에 국제감각을 갖추라’라는 따끔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특히 가이후 내각에서 법무상이었던 90년 9월에는 외국인의 불법 취업과 관련,“(미국에서) 검은 것(흑인)이 들어가 흰 것(백인)들이 쫓겨 나듯” 운운해 미국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뒤집어 쓴 적도 있다.
  • 인촌강좌 통해본 金 대통령 국정철학/드러난 특징

    ◎“강인한 민족저력이 발전動因”/민주­시장경제와 햇볕정책 현실적 접목/뚜렷한 역사관 통해 문화적 역량 평가/높은 교육열 토대로 21세기 비전 제시 30일 金大中 대통령의 고려대 ‘인촌(仁村)기념강좌’ 특강은 金大中 대통령의 통치철학이 뚜렷한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줬다.특히 민족의 저력 속에 국가의 내일을 설계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현실적이다.우리 민족의 저력을 강연의 화두(話頭)로 삼은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金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 진단에 앞서 “20세기는 조직적이고 단합된 일사분란한 힘이 필요한 시대이나,우리 민족은 이러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먼저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않고 “우리의 문화적 역량과 교육수준은 두뇌 정보시대인 21세기에 더 유리하다”는 비전을 제시했다.한강의 기적을 넘어 태평양의 기적을 만들자는 자신감을 이어간 것이다. 대통령의 ‘진화론적 발전사관’을 엿보게 하는 대목으로,21세기에 대비한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이날 제시한 金대통령의 국가비전이 과거와는 구분된다. 민족의전통속에서 보편적 특성을 찾아내고,이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접목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햇볕정책에 기초한 대북 교류협력 정책은 이를 구체화한 국정운영의 두 축이다. 오래전부터 金대통령은 “우리에겐 삼국시대 때부터 민주의 전통이 있었다”고 강조해왔다.특강에서 “민족의 시대가 가고 경제적 국경이 없는 세계화 시대에 분단국가로 남은 것도 억울하다”고 토로한 대목도 마찬가지다.즉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이 정권을 포장하기 위한 구호나 국민의 협력을 구하는 선전성 문구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국정철학이 착근할 수 있는 토양은 개혁의 성공에 있다는 점을 金대통령은 분명히했다.올 한해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 △공기업 개혁 △노동의 유연성 확보 3가지를 마무리하겠다는 확실한 개혁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지역주의 만큼은 이 정권에서 끝장을 내겠다”는 약속도 총체적 개혁의 하나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개혁에 고통과 저항이 따른다는 것을 잘알고 있다.국민의 적극적인 협조와이해가 필요조건이다.정부의 개혁이 이상(理想)이 아닌 ‘현실론’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그는 여러 저서에서도 “정도전,조광조,서제필 등 역사상 많은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태평양의 기적도,경제개혁도 국민의 기대 부응과 협조속에서 이룩하겠다고 金대통령이 강조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 ‘한지붕 두가족’ 불협화음/홍콩 반환 1년

    ‘동방의 진주’ 홍콩이 7월1일로 중국에 반환된 지 꼭 한돌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홍콩 차이나의 1년’은 세계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록 법적으로는 ‘1국가 2체제’로 자유분방한 영국식 정치환경이 보장됐지만,역사적 주권 귀속이 주민들에겐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직 ‘생부모’(중국)보다는 150년을 함께 생활해온 ‘양부모’(영국)쪽에 더 마음이 쏠린 그들이었다. 더욱이 때마침 밀어닥친 아시아권 경제위기에서 홍콩도 예외가 아니다.변혁의 물결로 소용돌이치는 홍콩의 오늘을 진단해 본다. ◎급속 中國化 부작용… 국제 비즈니스센터 위상 흔들/개혁세력 선거 승리… 시민 상당수 “英領시절 그립다” 홍콩이 50년 시한부인 특별행정구라는 지위로 중국에 귀속된 지 어언 1년. 사회주의 체제하의 12억 본토인과 시장경제하의 650여만 홍콩인들이 ‘한지붕 두가족’처럼 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1국 2체제’구도는 겉보기엔 순조롭게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질적인 체제의 접목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변화의 방향은‘탈(脫)영국 중국화’로 요약된다. 홍콩은 더 이상 동서양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하던,과거의 ‘동양의 진주’가 아니다. 올들어 홍콩거주 영국인들의 ‘엑소더스’도 가속되고 있다. 반환 이전 3만1,400여명을 헤아리던 영국인들이 현재 2만7,000여명으로 줄었다. 중국 정부의 음양의 간섭으로 서구식 자유주의도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문제는 급속한 ‘중국화’과정에서 장점보다는 부작용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 통치의 강점이었던 ‘법의 지배’가 약화되는 대신 인치와 연고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영국령일 때보다 한층 무질서해진 교통질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중국어 전용이나 서구적 질서의 실종은 그렇찮아도 위기국면인 홍콩경제의 주름을 깊게 하고 있다. 금융·무역 등 국제 비즈니스센터로서의 홍콩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있는 까닭이다. 다수 홍콩인들의 불안감도 증폭되고 있다.최근 홍콩대 사회과학원의 여론조사가 이를 입증한다. 주민 대다수가 영국 통치를 그리워하는 역설적인결과가 나온 탓이다. 이는 지난해 9월 주권반환 100일에 즈음한 홍콩정부의 여론조사 결과와는 극히 대조적이다. 당시엔 주민의 80%가 “‘홍콩 차이나‘가 더 안정되면서 번영할 것”으로 내다봤다. 요컨대 홍콩과 중국이 협연하고 하고 있는 ‘1국 2체제’교향악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는 셈이다. 중국 귀속후 처음 실시됐던 지난달 입법회(의회)선거에서도 이 여론이 반영됐다. ‘홍콩발전민주연맹’ 등 친중국계는 불공정 시비 속에 간선제로 뽑는 의석을 독식,억지로 다수파가 됐다. 하지만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직선제인 지역구 20석중 15석을 석권,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이 결과는 중국 귀속 이후 상황에 대한 홍콩인들의 강력한 불만표출로 받아 들여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동거체제가 벌써 삐걱거리고 있는 징후인 것이다. ◎홍콩은… 홍콩은 홍콩섬과 대륙의 구룡반도,그리고 부근의 240개의 조그마한 섬들로 되어 있다. 모두 합해 면적은 1,067㎢. 제주도가 1,845㎢이니 제주도의절반보다 조금 큰 편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동서양간 경제교류의 징검다리로 보물과 같은 존재라 해서 흔히 ‘동방의 진주’로 불린다. 그러나 157년전만 하더라도 홍콩섬은 불모의 땅이었다. 고작 해적의 소굴에서 ‘동방의 진주’로 변신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1841년 아편전쟁의 와중에 홍콩섬에 영국군이 처음 진주했고 이듬해에 아편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할양된다. 18년후 2차 아편전쟁이 4년만에 매듭지어지며 구룡반도와 스톤 캐터스섬이 영국 영토가 된다. 그리고 1898년의 의화단 사건을 수습하면서 영국은 란타나오섬을 비롯한 200여개의 섬들을 또 넘겨받는 대신 할양기간을 99년으로 조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며 홍콩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영국이나 중국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실제로 중국정부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했던 조약들이 평등하지 않다면서도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79년 반환협상을 시작했고 84년 협상에서 역사적인 ‘97년 홍콩반환에 관한 공동성명’에 조인하면서 97년 7월1일 157년만에 본래의 중국 땅이 되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누가 이끄나/董建華·陳方安生 1국2체제 실험 주도/李柱銘 민주당수 “개혁세력의 희망봉”/통화전문가 任志剛 경제 조타수 역할 ▲둥젠화(董建華·61) 행정장관=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부터 가장 많은 스폿라이트를 받았던 인물. 지난 1년동안 톈안먼(天安門) 사태 추도행사를 보장하고 입법회의 선거를 실시하는 등 유화 정책을 많이 썼다.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으로서 앞으로 4년간 ‘1국 2체제’실험을 주도해나갈 인물이다. ▲천팡안성(陳方安生·58) 행정총리=둥젠화 행정장관 아래 홍콩의 관료들을 이끄는 제2인자. ‘홍콩의 대처’로 불린다. 영국 통치시절 홍콩 번영의 반석이라 할 깨끗한 행정관료 조직을 중국 귀속 이후에도 별 흔들림없이 잘 지켜내고 있다는 평이다. ▲스투화(司徒華) 지련회 주석=홍콩 민주 운동 단체의 대부격인 ‘애국민주운동을 지원하는 홍콩시민들의 연합회’(약칭 지련회)주석. 톈안먼 사태 기념 촛불시위 등을 주도. 중국의 인권탄압상을 국내외에 알리며 홍콩시민의 민주화 교사역을 하고 있다. ▲리주밍(李柱銘·60) 민주당 당수=5월24일 홍콩이 중국이 반환된 후 처음 치러진 입법회 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귀속 전 최대 정당인 민주당의 수장. 이번 입법회 선거에서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지역구를 휩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수호자’인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당연히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측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조셉 얌(任志剛·50) 홍콩 재정사 금융관리국 총재=아시아 경제위기를 통해 급부상한 통화정책 전문가. 지난해 10월 미국 달러에 대한 홍콩달러 가치 하락 압력이 거세자 하룻밤 사이에 홍콩 이자율 280% 인상을 단행,환율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주역이다. 홍콩 경제 순항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달라진 것들/北京語 배우기 열풍… 모르면 2류시민/“아편전쟁은 침략전쟁” 中 역사관 주입/영국紋章 사라지고 紫荊化도안 사용 홍콩 특별행정구의 거리에선 이제 그 흔하던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왕관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동상은 물론 우표에 찍힌 여왕 흉상도 사라져 버렸다. 대신 특별행정구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꽃(紫荊花 자형화)도안이 행정특구 깃발에서부터 경찰제복에 이르기까지 뒤덮고 있다. 지난해만해도 어색하던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의 보통화(普通話 베이징 표준어)의 사용도 자연스런 일이 됐다. 영국 통치 시대 홍콩에선 영어와 광둥어(廣東語)만을 사용해 보통어는 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선 보통화 교육이 필수가 됐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보통화를 배우려는 공무원과 직장인들로 학원은 계속 호황이다. 영국 치하에서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면 2류 시민이 됐던 것처럼 이제 매끄러운 보통화 실력없이는 설땅이 좁아지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가 개정된 것은 물론이다. 중화민국은 타이완(臺灣)으로 격하됐고,역사는 영국의 식민지배적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관으로 대체됐다. 예전 영국령 홍콩 시절 교과서에서는 아편전쟁이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어났다고 기록했지만 이제는 본래 모습대로 침략전쟁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공휴일도 달라졌다. 6월 두번째 토요일부터 시작되던 ‘여왕 탄신 기념일’연휴는 지난해로 홍콩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 10월1일부터 3∼4일간 이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수립일이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뒤덮는 불꽃놀이 속에 가장 성대한 축제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7월1일 이전까지 법원의 최종 판결은 영국의 추밀원에서 결정했으나 이제는 홍콩에도 최종심 법원이 설치돼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거리의 외환 환전창구에선 인민폐(중국돈)를 바꿔주고 있고 인민폐를 홍콩돈처럼 받는 상점도 늘고 있다. 물론 ‘베이징 바람’이 점점 거세질 수록 ‘홍콩 차이니즈’들의 정치적 참여와 비판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중국화는 어쩔수 없는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경제/불황 주름살/1분기 마이너스성장 실업률 15년래 최악 중국 반환 1주년을 맞는 홍콩이 요즘 우울하다. 홍콩의 버팀목은 단연 경제. 꼭 영국과 결별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마침 닥친 아시아 경제위기에 휩쓸리며 어려움을 격고 있다. 90년대 들어 5%대의 경제 성장율을 유지해 왔으나 올들어 1·4분기에는 -2%를 기록했다. 경제가 침체되다 보니 실업률도 최악의 상황이다. 1.4분기 실업률은 4.1%. 최근 15년이래 가장 높은 것이다. 96년의 실업률은 2.8%,지난해 2.5%였다. 지난해 중국 귀속을 앞두고 불안심리가 팽배하면서 오르기만 했던 부동산 가격과 주식의 폭락은 사뭇 심각하다. 주가는 1년 전보다 절반 아래로 떨어졌고 부동산도 40∼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홍콩 경제가 자랑하는 고정 환율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홍콩 달러가 실제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면서 수출 경쟁력이 탄력을 잃고 1년 내내 붐비던 관광객마저 발길이 뜸해졌다.중국에 편입되면서 11%나 줄었던 관광객이 올들어 24%나 더 감소했다. 재무장관격인 도널드 창(曾蔭權) 재정사(財政司)는 지난 17일 올 경제성장률 3.5%의 달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년간경제 전망도 어둡다고 털어 놨다. 버팀목인 경제가 허약해지자 홍콩 사회가 흔들린다. 실제로 최근 홍콩대학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콩장래에 대한 불신도(不信度)도 지난해 9%에서 25%로 늘어났고 신뢰지수는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세계최고의 컨테이너 수송능력과 첵납콕 신공항 등으로 요약되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중심지 홍콩. 그러나 싱가포르와 상하이(上海)가 홍콩의 자리를 맹렬히 추격하는 상황에서 ‘동방의 진주’가 얼마나 더 ‘제 색깔’을 유지할지, 의구심이 커가고 있다.
  • 서울시스템 정보문화대상 수상/정보문화의 달 기념식

    ◎25개 기관·개인 포상 제11회 정보문화의 달 기념식이 8일 KOEX(한국종합전시장) 4층 국제회의실에서 金鍾泌 국무총리 서리와 裵洵勳 정보통신부 장관을 비롯,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金총리 서리는 치사에서 “우리 경제 살리기는 정보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며 “정보문화의 달 행사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정보화를 통해 21세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대전환을 이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기념식에서는 ‘정보문화상’과 그동안 정보통신 발전에 기여한 국가기관 및 산하단체,대학,연구소 등 모두 25개 기관 및 개인에게 ‘정보화 유공자 포상’이 수여됐다. 정보문화 대상은 서울시스템(주)이 받았다. 한편 기념식이 끝난뒤 21세기 정보사회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제2회 정보화 추진 종합전시회’ 개막식이 KOEX 1층 태평양관에서 열렸다.11일까지 열리는 종합전시회는 전자정부관 국가경쟁력관 국민생활관 지방자치단체관 정보통신역사관 등 모두 7개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으며 125개 품목이 전시된다.
  • 方基中 연세대 교수 역사학대회 발표논문 요지

    ◎分斷史學 극복 ‘대등통일’ 전제돼야 역사교육연구회(회장 李範稷)가 주관하는 제41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서울광진구 건국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다.29일부터 시작해 30일까지 계속될 이번학술대회의 주제는 ‘통일과 역사교육’.다음은 연세대 사학과 方基中 교수가 발표한 논문 ‘통일문제와 한국사학의 과제’의 요지다. 남북한은 분단모순과 민족모순에서 비롯된 체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분단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통일국가와 사회체제를 수립해야 한다.역사학계에서도 현대 한국사학의 성격을 통일문제와 관련해 살펴보고 ‘통일사학론’의 진전을 위한 논점과 과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양체제 모두 불구의 발전 한반도의 분단은 이질적인 사회구성을 수반한 체제적 분단이자 민족모순의 산물이다.이러한 분단의 이중적 체제대립성은 분단형성 과정에서 배태됐다.분단이 장기화하면서 그 체제적 이질성은 정치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문화양식과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심화됐다.바로 이 분단모순에 의해 남북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불구적인 발전을 겪었고,이제는 남북 모두 체제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휴전협정에 기초한 준(準)전시상태라는 긴장관계에 기반을 둔다.그런 만큼 민족통일에 관한 일반원칙은 이같은 분단구조의 현실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고 현실성 있게접근해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이미 합의된 통일의 일반원칙,즉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대등통일 원칙을 남과 북 양측에서 재확인하고 이에 부합하는 실제적인 정책과 여론조성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민족연대의식과 호혜주의에 입각,남북이 당면한 체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협조해야 한다.그리고 통일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한 전제로서 남북 각기 대등통일관에 부합한 민주주의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남북의 한국사학은 상호 대립적인 남북 양체제의 이념과 사상을 담지한 분단사학으로 전개됐다.여기서 분단성은 반공이념과 반제(反帝) 혁명이념에 입각한 남북의 지배적 역사인식의 이질성을 뜻한다. ○남북한 역사인식 이질적 상호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는 양자는 역사관과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면서 결과적으로 분단체제의 유지와 흡수통일론의 유포에 기여하고 있다.한편 남한사학 내의 극우반공주의 역사인식과 진보적 역사인식 사이의 이질성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남한사학의 경우 반공적 역사학·역사인식의 공세와 순(純)경제적 관점의 근대화론의 유포는 심화되는 반면,문화주의사학의 개방적·통일지향적 역사인식은 완화되고 있다.이러한 분단사학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단사학’ 극복의 일반원칙으로서 민족공존의 원리에 기초한 대등통일이라는 민족통일의 일반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또한 통일사회를 전망하는 민족통합의 역사이념으로서 평화적·개방적·민주적 민족주의인 ‘열린 민족주의’를 수용해야 한다. ○통일지향 역사교육 강화를 우리는 이 ‘열린 민족주의’에 민주주의 이념을 적용한 ‘민족적 민주주의’를 통일을 위한 역사이념으로 삼을 수 있다. 통일에 대비하는 학계의 노력은 북한사학과의 학술교류 논의로 대표된다.남북학술 교류를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계의 ‘통일사학’ 논의와 남북 학술교류를 전담하는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이 긴요하다.또 남북을 포괄한 현대사연구를 활성화하고 통일지향의 역사교육 특히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텅빈 국회… 마음은 지방선거에/具本永 기자·정치팀(오늘의 눈)

    11일 하오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이 진행된 국회본회의장.李揆成 재경장관등 경제부처 장관들의 답변이 시작되자마자 의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급기야 자칫 출석의원수가 의사정족수를 밑도는 상황이 우려됐다.그렇찮아도 재적의원(현재 2백93명)의 5분의 1선인 개의정족수를 가까스로 넘겨 본회의가 열린 터였다. 사태가 이쯤되자 金守漢 국회의장이 습관처럼 의원들의 ‘자성’을 촉구했다.金의장은 “질의한 의원들조차 장관들의 답변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등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더욱이 상당수 참석의원들조차 서로 귀엣말을 주고받는 등 마음은 콩팥에 가 있는 듯했다.국민 절대다수가 영향권에 든 실업대란에 대한 정부측의 대책이 ‘보고’되고 있는데도 선량들에겐 6·4지방선거 등이 더 큰 관심사인 듯했다. 맥빠진 본회의장 풍경은 12일 사회·문화 대정부 질문시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정부측 답변을 듣기 위해 하오 2시30분 본회의가 개회될 참이었으나 예정된 시간엔 의원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책상위의 명패들만 휑뎅그렁하게 자리를 지켰다.의원들의 늑장으로 20여분이상 개회가 지연된 것이다. 과정상의 우여곡절이 있지만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다.이른바 진화론적 역사관이다. 그러나 이번 임시국회의 풍속도는 그같은 신념에 회의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선량들의 행태가 10여년전 기자가 처음으로 국회 취재에 나섰을 때에 비해서 하등 달라지지 않은 탓이다.그 나마 여야간 상이한 시국관을 상대측에게 설득하려는 진지함마저 당시 보다 엷어진 느낌이었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정치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삶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는’ 소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과정일 것이다.이번 임시국회의 파행상은 그러한 정치본연의 메카니즘과는 한참 동떨어진 모습이다. 때문에 국회 스스로 달라지지 못한다면 여론이 이를 강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즉 공영방송 등을 통한 본회의장 생중계가 좀 더 활성화되고 의정활동과정이 낱낱이 공개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 세계 5대제국 흥망의 역사/유아사 다케오 지음(화제의 책)

    ◎제국 흥망사 되돌아 보며 미래 가늠 인류 역사상 제국의 지배는 세계 곳곳에서 무자비한 파괴를 동반해왔다.아울러 대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그렇다고 이것이 대국의 역할을 과소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거대 제국이 세계에 질서를 강제하고 역사의 큰 틀을 만들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면 왜 지금 ‘대국의 흥망’이 문제인가.오늘날처럼 시대를 읽기 어려울 때,과거 제국의 흥망사를 되돌아 봄으로써 미래를 가늠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에서다.일본 니가타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인 유아사 다케오(湯淺赳男)가 펴낸 이 책은 세계사의 흐름을 요령 있게 정리,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이 책에서 다루는 세계 5대제국은 로마·중국·비잔틴·이슬람·유럽이다.우리는 대국의 흥망 하면 먼저 로마제국을 떠올린다.로마제국의 몰락은 곧 유럽과 서아시아의 고대 그 자체의 몰락을 의미할 만큼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지은이는 비잔틴은 세계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점과 시점에 놓여 있는 만큼 결코 호사가의 호기심 속에 가둬 두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펴 눈길을 끈다.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제국은 용케 멸망을 피한 로마제국의 노인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비잔틴제국은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를 제공한다.비잔틴 제국은 동유럽 특히 러시아 문명의 주요한 수원(水源)이 되었으며,중세 서유럽에게는 문명의 메트로폴리스와 같은 존재였다.국가와 문명은 마치 종유석처럼 세월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탄생과 성장, 절정과쇠퇴를 겪는 일종의 생명체다.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 흥망성쇠의 드라마를 온전하게 엿볼 수 있다.일빛 8천원.
  • 봄꽃구경 나들이/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장(굄돌)

    한밤의 산사태와 같이 밀어닥친 IMF한파에 모든 사람들이 짓눌려 머리가 멍멍한 상태가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 해도 자나깨나 신문과 텔레비전의 이런저런 소식은 더욱 우리 머리를 후려친다.답답하고 울화가 치밀던 차에 머리식히기 ‘봄꽃감상 나들이’를 하자는 존경하는 어느 노선생의 말씀에 눈딱감고 동참하기로 하였다. 모처럼의 나들이인지라 설레임을 안고 아침 일찍 승차하였다.차창 밖은 안개와 황사현상으로 시계가 나빴지만 간간히 아련한 복사꽃과 청순한 배꽃이 스쳐지나가 찢어진 마음을 달래주었다.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침 저녁으로 그윽한 山寺(산사)를 거닐고 역사와 문화를 되새기는 유적지 순례를 하였다. 굽이굽이마다 한맺힌 민초들의 이야기를 실은 유유한 섬진강을 따라 양안을 둘러친 병풍산에는 산벚꽃이 듬성듬성 수놓여 우리를 반겨주었고,쌍계사와 백양사 길목의 화사한 벚꽃과 山水(산수)는 마음 속의 시름을 모두 씻겨내렸다.이번 나들이는 국학에 해박한 노교수가 관광안내자가 되어 가는 곳마다 유적과 문화를설명하고 처처에 관련된 시와 시조를 낭송,해설하여 한껏 정취를 돋구었다.그렇다.이것이 문화관광이요 역사관광이 아닌가!또한 차분한 머리식힘 나들이가 아닌가! 그런데 첫날 숙소인 온천장에 도착하자 중년여인들이 탄 버스가 노래와 춤으로 출렁거렸다.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성인들의 관광이나 나들이는 춤과 화투판,그리고 고성방가로 범벅이 되어 주위 청소년들에게 낯뜨거운 경우를 자주 목격하곤 하였다.이러한 관광행태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 해소나 한풀이가 될지는 모르나 이러한 짓들이 후세에 뿌리내릴까 심히 걱정스럽다.선인들이 즐긴,자연과 더부는 濯足會(탁족회)나 명소유람의 風流(풍류)전통은 어디로 갔는지. 관광철이 다가온다.저 높은 산 맑은 물의 정다운 산하를 거닐면 한많은 서러움과 어지러운 세상의 울분도 삭을 것이다.머리를 식히고 새출발을 하기 위하여 역사문화 나들이는 어떨지.
  • ‘眞景시대’ 사상·예술 총제적 조명

    ◎중국풍 탈피 ‘고유의 색’ 태동∼개화 분석/식민사관이 왜곡한 조선성리학도 재해석 우리 역사에서 진경시대(眞景時代)란 무엇인가.조선왕조 후기 우리 문화가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며 발전했던 1657년 숙종대에서부터 1800년 정조대에 이르는 125년간을 일컫는 말이다.진경문화는 영조 51년의 재위기간 동안 절정을 누렸다.최근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펴낸 ‘진경시대’(전2권)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진경시대의 사상과 문화,예술 등을 총체적으로 다룬 첫 연구서란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등 관련학자 10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며 개국한 나라다.그런 만큼 조선 전기에는 문화 전반에 중국풍이 만연했다.그러나 율곡 이이에 의해 조선성리학이 창안되면서 문화전반에 걸쳐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는 운동이 전개됐다. 율곡의 평생지기인 송강 정철은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서막을 장식했고,간이 최립은 독특한 문장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의 선구가됐다.그런가 하면 창강 조속에 의해 조선의 고유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조속은 인조반정에 참여하기도 했던,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했던 선비화가.그는 반정(反正)성공 후에는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사생해 내는데 몰두했다.이 때 쓴 시와 그림은 진경시와 진경산수화의 한 단초가됐다.진경산수화의 경향은 자연스럽게 조선 풍속화의 출현으로 이어졌다.조선후기 풍속화는 중국 회화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생활모습과 풍속·풍물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진경산수화와 함께 우리 회화의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준다.진경시대에는 초상화에 있어서도 조선적인 도상관(圖像觀)이 확립되는 양식적인 변화가 뚜렷했다.숙종대를 전후한 진경시대전기의 초상화에서는 중국식의 채전(彩氈)이 사라지고,그 대신 의답(椅踏)이나 바닥에 조선의 단아한 화문석 돗자리가 등장했다.이는 요란하고 화려한 채전이 조선의 현실에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성리학의 검박한 기풍과도 어울리지 않았기때문이다. 조선후기 문학운동사의 한 흐름으로 주목할만한 것이 중인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운동이다.위항문학운동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한시단(漢詩壇)에 중인 출신의 시인군이 대거 참여하면서 본격화된 것으로 18세기 정조대부터 문학운동의 대세를 이뤘다.이 위항문학인들은 새로운 시대사상인 북학사상을 수용,사대부계층을 대신하는 시대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정조는 100여년 동안 사회를 주도해온 진경문화의 바탕 사상인 조선성리학이 사회적 기능을 다했음을 간파했다.청조 고증학을 받아들이려는 북학운동이 일어나자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개편하고 학문활동의 터전을 마련해주는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진경문화는 ‘문예군주’정조의 치세하에서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하고 북학문화로 이어졌다. 조선성리학은 종종 조선후기의 사회발전을 저해하고 사대주의를 조장하는 피폐한 사상이라는 식으로 매도되기도 했다.이는 조선시대를 파당과 당쟁의 역사로만 기록한 왜곡된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다.이 책은 이런 점을 직시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성리학과 그것에 뿌리를 대고 있는 진경문화에 대한 이해가 절실함을 웅변해 준다.
  • “우리조상은 곰 아닌 인간/일제가 熊族을 곰으로 비하”(조약돌)

    ◎초등교사 교과서 정정訴 ○…인천 M초등학교 교사 李충선씨(56)는 6일 “우리민족의 조상을 곰에서 환생한 웅녀로 묘사한 초등학교 교과서의 단군신화 내용은 식민사관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며 교육부를 상대로 교과서 일부정정 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 李씨는 소장에서 “‘호랑이와 곰가운에 곰이 웅녀가 됐다’는 내용은 ‘한단고기’ 등 역사책에 나오는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라는 부분을 사람의 집단인 부족 명칭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제가 각색한 대로 단순히 동물로 해석해 놓은 것”이라면서 “동물에서 우리 역사가 비록됐다는 역사관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송두리째 뽑는 것이므로 그대로 가르치면 안된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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