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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치구마다 풍성한 8·15행사

    새천년 첫 광복절인 광복 55돌을 맞아 서울시와 각 자치구들이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연다. 이번 행사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시민 참여형’이라는것이 특징.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행사도 많다. 서울시는 15일 오후 9시 남산 봉화대에서 통일염원 전국 봉화 점화 행사를마친 직후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불꽃놀이로 광복절을 경축한다. 성북구는 10일 오후 7시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북한어린이를 위한 ‘사랑의분유보내기’ 콘서트를 개최한다.신승훈,이정현,김현정,제이,샤크라,룰라 등12팀이 출연,공연을 펼친다. 강서구는 13일 오전 11시 우장산근린공원에서 ‘광복절 및 남북화해 기념강서구민 한마음걷기대회’를,동대문구는 15일 오전 8시부터 청량리역을 출발하는 ‘8·15 경축기념 자전거대행진’을 벌인다.영등포구는 13일 오전 7시 여의동공원에서 ‘태극기만세 달리기대회’를 가지며,성동구는 같은날 오전 7시 구민 5,000여명이 참여하는 ‘통일기원 성동구민 한마음 걷기대회’를 개최한다. 이밖에 동대문구는 14일 오후 6시 구민회관에서 ‘난타공연’을,강북구는 15일 오후 2시 구청 광장에서 ‘평화통일을 위한 청소년 락페스티벌’을 벌인다. 이에 앞서 서대문구는 10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한민족의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12·13일 오후 8시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세종문화회관과 공동으로 한마음음악회를 열기로 한 바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달리는 미술관, 시민의 ‘문화鐵’

    일상과 밀착된 친숙한 공간,삶의 진실이 꿈틀대는 곳에서 이뤄지는 전시는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쾨쾨하면 쾨쾨한대로 진솔한 삶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지금 지하철 7호선 구간에서 진행중인 ‘달리는 도시철도 문화예술관-와우 프로젝트’전은 바로 그런 현장성이 농후한 전시다.탈장소의 문제가 현대 미술문화의 주된 화두임을 감안하면 한층 구미가 당긴다. 이 전시는 서울시 도시철도공사와 문화이벤트사 인포아트코리아가 지하철 7호선 개통을 기념해 마련한 것.7호선 전동차 8량에 각각 주제를 붙여 작가들로 하여금 내부와 외부를 꾸미도록 했다.주제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공간·역사·그림’.전동차는 역사관이 되기도 하고 무도회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그런가하면 환희의 화장실 혹은 생명의 숲으로 변하기도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둘째 칸 ‘역사야 노올자’와 셋째 칸 ‘춤은 언제나즐거워’,그리고 여섯째 칸 ‘별이 떴어요’ 등이다.임옥상과 정세학이 작업한 ‘역사와 노올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관람객들이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도록배려했다. ‘별이 떴어요’는 전동차 내부에 형광색의 나무별들을 붙이고 검은 조명을 사용해 내부가 우주공간처럼 보이게 했다.서정국이 맡은 이 작품은 또 전동차 안 광고판에 별자리를 둬 우주의 모습을 한층 실감나게 했다. 동심에 빠져들게 하는 이 칸은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춤은언제나 즐거워’는 미술과 대중예술의 접목을 시도한 정연두의 작품.탱고를추는 한 쌍의 남녀가 새겨진 벽지로 전동차 안을 바르고 바닥은 마루로 꾸며실제 무도장처럼 만들었다. 한편 전동차 외부는 임옥상·정세학·배병우·강운 등의 작품으로 치장했다.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싱그러움을 안겨주는 ‘소나무 작가’ 배병우의 풍경사진.이번에 선보인 소나무 사진 또한 ‘자기완결적인’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추상적 이미지가 강한 ‘불안정한’ 구도를 띤다.달리는 도시철도 문화예술관은 평일과 토요일은 4회,일요일과 공휴일은 6회씩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인터넷(www.wowproject.co.kr)으로도 전시중.터보텍,씽커즈 등6개 벤처기업들이 후원자로 참여했다.매일 전동차 미술관에 오르고 있다는인포아트코리아 장동조 대표(42)는 “이번 전시는 미술과 대중의 소통방식을뒤집는 새로운 차원의 순수 공공미술”이라며 “현대미술과 대중의 거리를좁히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02)517-2501. 김종면기자 jmkim@kdaily.co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0일부터 광복절 행사

    새천년 첫 광복절인 광복 55주년을 맞아 애국선열의 혼이 어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서울 서대문구청(구청장 李政奎) 주최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먼저 10일 오후 2시부터 서대문독립공원내 독립관 지하강당에서 ‘한민족의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란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린다. 이날 심포지엄에선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이 ‘3·1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란 주제로 발표하고 이현희(성신여대)·송복(연세대)·김호일(중앙대) 교수 등이 참석,서대문형무소의 민족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이어 12∼13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과 공동 주최로 ‘한마음음악회’가열린다. 광복절인 15일엔 역사관 추모비 앞에서 순국선열 추도식이 있으며,이어 봉원사 주재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인 ‘영산제’가 봉행된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대한민국 우표전시회 새달 2∼7일 코엑스서

    정보통신부는 ‘2000 대한민국 우표전시회’를 다음달 2일부터 7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태평양관에서 연다고 28일 밝혔다. 올해 44회째를 맞은 우표전시회는 새 천년과 우정사업본부 출범을 기념해예년과 달리 다채로운 행사로 기획됐다.개막 행사 및 부문별 시상식과 함께입상 우표작품 설명회,인터넷 사용방법 현장교육,우표문화 강좌 등이 열리고우정본부 출범과 함께 선정된 캐릭터 ‘우정이와 온정이’의 첫 인사회도 마련된다. 또 북한우표 400여점이 전시되고 116년 한국우정(郵政)역사를 담은 ‘한국우정역사관’도 설치,운영된다. 김태균기자 windsea@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1)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국내외에서 피끓는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때로는 일제의 합방원흉들에게 단신으로폭탄을 던졌고 때론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며 독립의지를 해외만방에떨쳤다.대한매일은 이같은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과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연말까지 매주 1회씩 미·소·중·일 등 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탐방한다. 중국에서는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을 비롯한 24곳을돌아보고 임정요인 및 독립군이 걸은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또 옛소련에서는 하바로프스크 독립군 전적지 등 5곳을 살펴본다.미국에서는 전명운의사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저격현장인 샌프란시스코 등 5곳을,일본에서는 저항시인 윤동주 등이 숨진 후쿠오카형무소 등을 찾아본다.대한매일은 현장의 모습과 관련문서,생존자 증언 등을 통해 민족의 제단에 몸바친 애국선열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새롭게 정리한다. 중국의 동북3성(省)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성도(省都) 하얼빈.하얼빈은 우리 항일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의열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곳이다.일제당시 이곳은 만주와 러시아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으로 숱한 항일 애국지사들의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이곳은 또 아직도 일제의 가혹한 통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곳곳에는 일제때 세워진 러시아풍의 관공서 건물들이 여전히 옛 영화를 자랑하듯 버티고 서 있다.안 의사 의거로부터 90년이 지났지만 안 의사의의거관련 유적 역시 고스란히 남아 그 날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시내 외곽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일본 관동군 예하 731부대의 잔흔이참혹했던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하얼빈은 근대 동북아시아의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팀이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을 찾은 것은 지난 7월 8일 오후 1시.취재팀은 안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가 91년전 이곳을 향해 출발한 열차의 출발점이자 만주국의 옛 수도였던 창춘(長春)을 출발,세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취재팀을 맞은 것은 30도를 오르내리는 하얼빈의 무더위였다.열차는 3번 플랫폼에 정차했다.승객들을 따라 지하통로를 지나 취재팀이 나온 곳은 1번 플랫폼이었다.바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 근처였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안 의사는 출구쪽의 역사(驛舍)와 인접한 1번 플랫폼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의거현장에는 이곳이 안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의거현장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역무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취재팀은 전문가의 고증을 받기로했다.숙소로 돌아와 이 지역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헤이룽장성 당사(黨史)연구소 김우종소장(71)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김 소장은 “1번 플랫폼 지하통로 옆,즉 2등 대합실 출구 앞”이라며 “당시 일제가 이토의 흉상을 세웠으나 8·15후 소련군이 철거했다”고 증언했다.현재 그 자리에는 작은 화단이조성돼 있다.구내에서 안 의사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1번 플랫폼 뿐이었다. 하얼빈 시내에는 안 의사 관련 유적이 이밖에도 몇 군데 더 있다.보존상태는 대부분 양호한 것으로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우선 안 의사 의거와 인연을 맺고 있는 역으로 하얼빈역에서 15㎞ 떨어진 채가구역이 있다.이 역은 안의사의 동지인 우덕순 의사가 이토가 탄 기차가 이곳에 정차할 것에 대비,이토를 기다렸던 곳이다.하얼빈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채가구역은 러시아풍의 단층 건물 옛 모습을 그대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안 의사가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러시아 군헌(軍憲)에게 처음 신문을 받은 곳은 동청(東淸)철로국 공안국 건물이었다.하얼빈 역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대로변에서 위치한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현재는 하얼빈 철로국 공안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한편 안 의사가 이곳에서 간이신문을 마치고 이송된 곳은 하얼빈주재 일본영사관이었다.안 의사가 체포된 후 두 손이 뒤로 묶인채 쇠사슬을 두르고 찍은 사진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 일본영사관 지하감방에서 일제 관헌으로부터 가혹한 신문을 당한 항일투사가운데 남자현(南慈賢) 의사가 있다.1872년 경북 영양 출신인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전투에서 전사하자 1919년 만주로 망명,서로군정서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들과 사이토 총독 암살계획이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다시 돌아가 재만(在滿)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참여하였다.1931년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온갖 탈출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후 만주주재 일본대사를 처단하기 위해 걸인 노파차림으로 무기를 운반하다가 하얼빈시내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 체포돼 이곳 영사관 지하감방으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 의사는 감옥에서 6개월동안 단식투쟁끝에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33년 8월 22일 이곳 이국땅 하얼빈에서 순국했다.남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시내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그후 문화공원으로 불려온 이곳은 현재 하얼빈 유락원(遊樂園)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취재팀이 방문한 현장은 각종 놀이기구와수영장 등이 들어선 놀이공원으로 바뀌어 있어 어디에서도 남 의사의 흔적은찾을수 없었다. 보훈처의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 답사팀과 함께 하얼빈을 찾은 박환 수원대교수(사학과)는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는 선열들의 업적을 현창하는 일 가운데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업”이라며 “그동안 현지 촌로들의 증언에만의존하는 학술차원의 조사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현지 연구자로 답사팀에합류한 유병호교수(옌볜대학 민족연구소)는 “93년 엔벤대학에서 조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을 당시 단군을 아는 조선족 학생이 5∼6명에 불과한 것을보고 놀랐다”며 “한중우호 차원에서라도 항일독립투쟁사를 제대로 교육할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하얼빈은 안 의사의 의거관련 유적은 물론 시내 외곽에는 일본 관동군예하 731부대의 구지(舊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시내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평방구(平房區)에는 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중국 당국이 건립한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진열관 앞 100m 지점,즉 731부대 북쪽 끝에는 당시 731부대에서 필요한 전기·에너지 등을 공급한 ‘동력반(動力班)’의 대형 굴뚝이 철거되다만채 흉한 모습으로 잡초 속에 방치돼 있었다.이 앞쪽에 위치한 부대 터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현재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이곳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중국 당국에서 이곳을 역사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철거중이라고 했다. 한편 그동안 731부대의 흔적은 동력반의 굴뚝 정도만 상징적으로 남아있고나머지는 대개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취재과정에서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주민은 취재팀에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모두 같은 피해자”라며 “731부대의 지하통로가 하얼빈 시내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증언했다. 하얼빈 정운현기자 jwh59@
  • 통일시대 이렇게 준비하자/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 기고

    *고려가 우리의 첫 통일민족국가. 우리나라의 통일민족국가는 언제 출현하였나? 이 물음은 그 동안 많은 논란을 빚어왔다.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병립하던 때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남쪽의 후미진 땅에서 웅크리고 있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병탄하여 이른바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런데 이 통일은 역사적으로 볼 적에 많은 결함을 지녔다.첫째는 통일과업을 준비하면서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렸다.둘째는 대동강 북쪽 고구려의 영역을 포기하였음을 들수 있다. 첫째 결함을 따져보자.신라는 일단 고구려를 병탄한 뒤에 강고한 투쟁을 벌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였다.비록 삼국이 혈연 언어 문화 풍습 등 민족적동질성을 지녔다 할지라도 고대국가에서는 근대적 민족개념으로 재단할 수없는 한계를 지닌다.따라서 고대국가가 보편적으로 벌인 정복활동의 본질에비추어 보면 적국을 병탄하였다는 단순한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다.동맹관계의 국가와 연합해 수행한 정복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결함을 따져보자.신라인들은 반도적사고에 머물러 대동강 이북,곧 광활한 만주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적어도 그들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적극적 사고를 지녔더라면 그 영역을 모두 확보해야 한다고 의식이 작용하였을텐데 이런 기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반도를 토막내서 안주하는 데 만족하였다.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천연적 경계조차 관심밖에 두었다. 고구려 영역에서는 대조영이 당에 맞서 발해를 건국하였는데 그 정통을 고구려에 두었다.이 시대를 남쪽의 민족사학자들은 남북국(南北國)시대,북쪽에서는 남북조(南北朝)시대라 부른다.또 이 시기의 신라를 후기 신라라 부른다.이는 한 민족이 두 국가를 세워 병립하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9세기 초반 신라는 혼란기를 겪으며 후고구려(뒤에 태봉)와 후백제 등으로분열하였다.분명히 궁예는 고구려의 계승,진훤(종래 견훤으로 표기해왔음)은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한다고 선언하였다.그리하여 후고구려는 고구려의 영역,후백제는 백제의 영역에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지를 정하였다.왕건은 무혈쿠데타로 집권한뒤에 신라를 외세의 힘도 빌리지 않고 무력도 사용치 않은채 접수하였다.왕건은 고려의 정통성을 후기 신라에 두지 않고 고구려와 발해에 맞추었다.이 명분을 축적하려 발해의 유민을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왕건은 북방민족으로 중국 북쪽을 차지한 요(遼)와 남쪽 한족이 세운 국가들에,고려는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나라라고 끊임없이 강조하였으며 요동일대에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복한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명명하면서 압록강일대를 국경선으로 확보하였다.고려의 후예들은 이런 창업(創業)정신에 따라 두만강일대의 여진인을 몰아냈다. 필자의 역사관으로는,신라는 통일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두 국가를 병탄한불완전한 통합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단지 안정적 기반 위에서 민족문화를꽃피운 고대국가였음을 부정치 않는다.따라서 고려가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여 중국 또는 북방의 나라들과 충돌하거나 교류하면서 고난의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민족의식은 고려의 지도자들이단군과 동명왕을 옛 국조(國祖)로 받든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따라서 한국사에서 9세기 전반기에 완전한 통일국가가 출현하였다고 본다.이 시점이 신라의 삼국통합보다 300년쯤 뒤졌다고 해서 퇴영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
  • [사설] 대법관 임명동의 자유투표로

    국회는 10일 대법관 후보 6명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표결로 처리한다.대법관 후보들은 지난 6일과 7일의 인사청문회를 통해 대법관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점검받았다.청문회는 인신 공격성 질문을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두드러진가운데 차분하게 마무리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법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의 권위를 존중하려는 여야 의원들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판결로만 말한다’는 법관을 평가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청문회의의미는 컸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경험과 준비 부족으로 여야 의원들의 질문은깊이나 다양성에서 기대에 못미쳤다.여야가 특위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실랑이로 시간을 보낼 때부터 예상됐던 것이기는 하다.그렇다 하더라도 판결문등 기본적인 자료 검토에도 소홀했다는 느낌을 주었다.질문은 원론 수준에서 맴돌았고,답변도 형식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잦았다.특정 사안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나 논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대법관 후보로서의 소신과 철학,역사관,인권 의식 등 정작 따져야 할 대목에는 ‘함량 미달’이었다.이에 대해여야 의원들이 선거사범 재판 등을 의식해 ‘직무 유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10일의 임명동의안 표결 처리는 인사청문회의 취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실시되야 한다고 본다.지난번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과는 달리이번에는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할 만한 정치적 이유가 없다.국무총리 동의안이 부결됐더라면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 등심각한 파문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표 단속’이라는 고육책이 동원됐다.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일견 이해할 만한 측면도 강했다.그러나 대법관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정치적 파문을 고려해야 할 여지는 거의 없다.독립성이 강조되는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정치적 논리가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그런데도 민주당은 대통령이 결재한 대법관 후보자라는 점 등을 감안,동의안이 매끄럽게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한나라당은 일부 문제 후보들에 대한 반대를 당론으로 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그러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쳐졌던 후보들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름대로 논리를 내세우며 해명을 했다.이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내부의견도 마찬가지로 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최종 평가는 의원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으로 본다.의원들의 뜻을 당론으로 묶는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이번에도 자유투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인사청문회는 왜 도입했느냐는 비난에 직면하게될 것이다.
  • [사설] 부실 예고된 대법관청문회

    이틀 앞으로 다가온 대법관 인사청문회가 ‘수박 겉핥기식 청문회’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6명이나 되는 대법관 후보들을 10일간의 준비와 이틀간의질문을 통해 검증하자면 청문회 준비를 서둘렀어야 옳다.그러나 특위 위원장자리를 두고 여야가 다투다가 지난 30일 한나라당이 불참한 가운데 위원장만뽑아놓았을 뿐 증인채택과 출석요구 절차도 마치지 못했다. 증인이나 참고인이 출석을 거부해도 강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대법관은 법률에 대한 최종적 해석자로 법원의 판례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직책을 맡고 있다.법원의 판례는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법률적 잣대로 작용한다.따라서 대법관 후보는 공직 수행의 능력만 아니라 도덕성과 국가관이나역사관,인권의식 등에 대한 법철학적 검증도 받아야 한다.후보들의 법철학적인식은 주요 사건의 판결문이나 공소장을 통해 검증할 수밖에 없는데, 청문회 특위가 과연 이같은 검증 작업을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지켜 볼 일이다. 대법관 후보들에 대한 검증 작업과 관련해서 언론도 반성할 점이 있다.지난23일대법관 임명제청이 있었을 때 언론은 후보자들에 대해 ‘3대에 걸친 법조가족…효심 지극’,‘사상 첫 부자(父子) 대법관’,‘수사능력 뛰어난 소신파’ 등 칭송 일변도의 프로필만 소개했다.‘효심’이나 ‘대를 이어 대법관’이나,‘수사능력’이 대법관의 직책 수행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언론은 후보들의 주요 판결과 수사지휘 기록 등을 통해 그들의 법철학적 인식을 소개했어야 했다.대법원 판례의 직접 이해 당사자인 국민들의 의사가인사청문회에 반영돼야 하기 때문이다. 후보들의 경력과 관련,이번 청문회에서 주목되는 인사는 91년 ‘강기훈씨유서대필 사건’때 서울지검 형사1부장으로 이 사건을 지휘했던 강신욱(姜信旭) 서울고검장이다.인권단체들이 강 고검장의 대법관 임명을 반대하고 있고민주당 일각에서도 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최종영(崔鍾泳) 대법원장이하필 논란이 따를 수 있는 강 고검장을 제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법관 후보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과 사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라는 의미를지니고 있다.그러므로 각당은 인사청문회를 정략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그런 의미에서 민주당이 ‘4·13총선 재검표’에 불만을 품고 이번 청문회를 사법부에 대한 견제의 기회로 벼르는 것은 옳지 않다.그것은 본래적 의미의 사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역사란 현재 문화와 과거 문화의 대화”

    역사이론과 사학사 분야가 강한 독일에서 공부한 역사학자 김기봉씨(41·빌레펠트대 박사)가 21세기 새 역사 담론을 제시한 책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를 냈다(푸른역사,1만5,000원).김박사는 이 저서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역사 정의(定義)▲과거 이해에서 문화가 갖는 중요성▲역사학 위기의 원인 등을 다루었다.‘포스트 모더니즘 열린 역사’라 이름 붙은 그 이론의 요점을 정리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책 한권이 우리 역사담론을 지배해왔다.바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이 책은 번역본이 10종 나왔으며 지금도 강의교재로매학기 수천권이 팔린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정의로서 가장 많이 말하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표현이 이 책에 나온다.이러한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문제는,지금이 이같은 정의가 나온 60년대 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카는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했다.역사는 과학이라는 점과,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현대역사학은 바로 이 두가지 전제에서 성립했다.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직면해 이 전제는 이제 뿌리채 흔들린다. 카는 역사의 진보를 “제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하는 인간능력의 증대”라고 보고,이러한 진보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대화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으로 설정했다.그렇지만 우리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리스크 사회’라고 이름 붙인 불확실성의 시대에 산다. 우리는 능력을 확대해 생태계를 변화시킬 뿐아니라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의자연적인 부분까지도 지배할 수 있게 됐다.그렇더라도 자연 지배가 과연 역사의 진보일까에 관해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카의 역사관이 얼마나 유용하게적용될지를 새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 카의 역사관을 낡고 무가치하다고 폐기하자는 게 아니라 역사현실을 규정하는 새 문제들과 함께 그가 내린 역사정의를 재음미해 보자는 뜻이다. 인문학으로서 역사학은 위기를 맞았다.하지만 이와 관계없이,또는 그와 반비례해서 대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간다. TV드라마 ‘용의 눈물’‘허준’의 높은 시청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오늘날대학 안의 역사학은 쇠퇴하지만 대중문화 속의 역사인 ‘역사문화’는 뜨고있다. 드라마의 허준은 분명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과학으로서의 역사는 그런 허구를 문제삼는다. 하지만 대중이 역사에서 원하는 바는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처럼)과거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반성하고 현실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침,곧 역사적 교훈이다. 카는 과학으로서 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역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던졌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에 직면해 역사가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누구를 위한역사인가”이다.역사가는 무엇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란 성찰을 갖고연구와 서술을 시작해야 한다.과거를 역사로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지식)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이라는 것을 오늘의 역사가는 깨달아야 한다. 결론은,카가 내린 정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수정한 “역사란현재 문화와 과거 문화 사이의 대화”이다. 이용원기자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1)문학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는 해.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성사로어느 때보다 강한 화해 분위기가 감돌아 6.25를 맞는 감회가 유다르다. 분단극복을 포함한 민족문제의 해결은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최대 책무이며문화예술 부문은 믿음직한 선봉이 되고자 한다.남북화해의 세기에 맞는 첫 6.25를 기해 동족상잔의 치유와 회복,통일을 향한 장르별 문화예술의 성과와과제를 시리즈로 짚어본다. 상처는 대개 시간과 함께 아문다.그러나 세월이 상처의 본질까지 치유시켜주지는 않는다.상처를 근본적으로 낫게 하자면 세월의 망각에 마비되는 대신시간이 주는 거리감으로 기억을 보다 투명하게 닦아야 한다. 6·25이후 50년을 되돌아 볼 때 6·25를 다루거나 관련된 문학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드물어졌다.이같은 관심의 양적 축소는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주제가 본질·정예화한 데서 온 당연한 현상으로수긍될 수 있다.소설을 중심으로 한 6·25문학은 직접적 아픔에 압도된 50년대식 전중·전후 문학을 극복하면서 ‘이념’과 ‘분단’을 최대의 이슈로삼게 된다. 전중·전후문학은 “6·25로 인한 개인의 파탄과 가치관의 붕괴,풍속적 변모 혹은 전쟁의 극한 상황성,삶의 부조리 등을 묘사·절규한다”고 평론가김병익은 지적했다.김동리 박영준 황순원 염상섭 등 전쟁이전 활동 소설가들과 함께 전쟁을 체험하며 등단한 손창섭 오영수 김성한 서기원 이범선 박경리 선우휘 등의 전후세대 소설가들의 50년대 작품들은 6·25란 대폭발로 귀가 멀도록 멍멍해진 가운데 씌어진 것이다.목전의 미증유의 상황에 사로잡혀있어 역사적인 안목으로 차분히 응시하는 겨를 같은 것은 도저히 기대하기어려웠다.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김동리의 ‘실존무’ 염상섭의‘취우’ 손창섭의 ‘비오는 날’ 박경리의 ‘불신시대’ 서기원의 ‘암사지도’ 등은 높은 문학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6·25를 객관적·전면적으로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6·25전쟁의 직접성이 닳아지면서 이 동족상잔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이념과 끝나지 않는 전쟁의 현재로서의 분단 문제가 서서히 전면에 나선다.이때 50년대 문학은 “6·25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가 결여되며 따라서 분단에 대한현실적,미래지향적 의지를 정서적 비애로만 환치시킨다”(김병익)는 비판 앞에 놓인다.즉 역사의식의 미흡을 지적받고 있는데 장용학의 ‘요한시집’(1955) 등 몇몇 작품들은 비교적 역사의식을 지닌 작중인물을 통해 분단에 대한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그리고 상상력의 문을 넓혀준 4·19혁명과 함께 최인훈의 ‘광장’(1960)이 나왔다.‘6·25를 하나의의식화된 이념의 형태로 포착한’(김윤식) 이 소설은 6·25의 이념적 동인이되었던 양대 이데올로기의 본질과 그 현실적 양상을 ‘한꺼번에’비판하는 넓은 시야를 보여주었다. 문학이 힘을 쏟아야할 당대의 이슈들이 많아지고 반공 이념 일변도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6·25문학의 후신으로서 분단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려는 ‘분단 문학’은 활기를 잃었다.이 와중에서 이호철의 ‘판문점’(1961) 하근찬의 ‘야호’(1972) 윤흥길의 ‘장마’(1973) 김원일의 ‘노을’(1977) 등은 편협하게,분단고착적으로 굳어진 6·25,남북대치에 관한 일반 독자의 인식에 일침을 가했다.또 홍성원은 역사성은 뒤떨어지지만 6·25를 총체적으로조망하는 대하장편 ‘남과 북’을 내놓았고 불명료한 역사관점 속에서도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이병주의 실록장편 ‘지리산’이 각각 70년대 후반 완성됐다. 시간은 망각의 잡초를 무성하게 퍼뜨리지만 뜻있는 사람에겐 드디어 기억의꽃망울을 터트리도록 한다. 6·25 체험세대인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83년9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89년9월 10권으로 완간된 이 소설은 빨치산화한 민중,백성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조명하고 있다.40년 가까이 왜곡과 망각의 음지에 차폐된 역사에 기억과 평가의 햇빛을 쏘인 것이다.이 햇빛으로쑥쑥 자라난 것은 빨치산의 신화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으로 조망된 6·25당시의 역사와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투영된 분단의 현실이었다.이제 문학에서분단은 절대적으로 고착된 전제가 아니라 극복의 몸짓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변물인 것이다. 이후 미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김하기의 ‘완전한 만남’(1991)과 분단현실과 관련이 깊은 제주 4·3사태를 이야기하는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1994) 등이 있지만 탈역사적 기류의 90년대에는 이렇다할 6·25,분단문학작품이 없었다. 전쟁체험 세대가 점진적으로 이룩한 분단극복의 방향성에다 남북 양쪽을 과거 어느 때보다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시대상황을 잘 활용할 때 6·25 미체험의 신세대들도 분단문학의 순도를 한 눈금 더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재영기자 kjykjy@
  • 인터뷰/ ‘우리 역사 5천년‘ 집필 사학자 이만열교수

    중진 사학자인 이만열 숙명여대교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최근 교양역사서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냈다(바다출판사).고조선부터 대한제국 말까지의 한국사를 다룬 이 책은 부제가 ‘자주적시각으로 본 우리 민족사’이다. 이교수는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을 벗어나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에서한국사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와 관련해 쟁점이 되는 부분들을 직접거론했다. 이교수를 만나자마자 “우리 사회에서 한국사,특히 고대사를 보는 시각에 편차가 매우 큰데 그 원인이 학계에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교수는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면서 강단사학계가 연구성과를 대중에게알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시작했다.용어 자체도 어렵기 마련인 역사학을 쉽게 풀어 전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는 “시간과 정열을 바쳐 역사대중화에 앞장서면 이를 학자적인 노력으로인정하기는 커녕 탤런트적 행동으로 치부하는” 학계 풍토를 우려했다.그 결과 연구업적이 연구실에만 머물러 “사회의 역사인식은 중고교 수준을 넘지못했고,역사의식도 전근대적인 단계에 있다”는 게 이교수의 진단이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사관(史觀)에 있음을 내비치고 ‘주범’으로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을 지목했다. 유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든데다,그 가치관이 충효를 가장 중요시해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충효를 다해야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비판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지고 사회적으로는 좀더 평등한 관계를수립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역사 발전”이라고 정의하는 이교수는,충효를 기준삼는 사관으로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근대적 역사 주체의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공박은 더욱 통렬했다.한국사를 자주독립의 역사가 아니라 굴종과 예속의 역사로 왜곡한 것이 식민(주의)사관이라면서 “단지 역사를 보는 관점만이 아니고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까지 규정한다”고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식민주의사관으로 구성된 한국사가 국민에게 좌절과 실의를 안겨주었고,‘민족 냉소주의’에 물들게 했다면서 “잘못된 역사관은 이처럼 폐해가 심각하다”고 개탄했다.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고자 이교수가 책에서 거론한 쟁점은 ‘동이족’‘단군’‘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 역사 축소’‘백제의 요서 지배’‘발해의 건국 주체’ 등등이다. 이 가운데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 봉니’문제는 한사군이 실재했는지,존재했다면 그 위치가 한반도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핵심사항이다.봉니(封泥)란비밀문서를 보낼 때 상자를 진흙으로 봉한 뒤 도장을 찍은 것.평양에서는 낙랑봉니가 많이 출토돼 그동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이용돼왔다. 그러나 이교수는 “봉니가 발견된 점은 오히려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봉니를 허물어 상자를 여는 곳은 보낸 쪽(낙랑)이 아니라 받은 쪽이므로,봉니가 나오는 평양은 낙랑일 수 없다는 이론이다.사실 이 주장은 정인보가 1930년대 이미 내세웠는데 이교수가 새삼 강조하는까닭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교수는 또“임진왜란은 일본이 철저하게 패한 전쟁이므로 우리가 패배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서 그 근거를 조목조목 들었다. 단재 신채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교수는 “단재의 역사학이 방대한만큼 그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비판적·창조적으로 계승할 대목이많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중국과 고대사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단재의 고대사 검증이 현실로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고 밝혔다. 이용원기자 ywyi@
  • 수방사 어린이날 부대 개방

    육군 수도방위사령부는 어린이날인 5일 군인 및 군무원 자녀와 봉천초등학교 학생,삼성농아원 및 상록보육원 원생,소년·소녀가장 등 600명을 부대로초청,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이날 행사에서는 부대 역사관 견학,전차·장갑차 등 장비 전시,카퍼레이드 및 기념촬영,수방사 군악대의 군악연주,특공대대 장병들의 특공무술 시범 등이 펼쳐진다. 노주석기자 joo@
  • 이시하라 도쿄都지사 발언 파문

    [도쿄 AFP 연합]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67) 일본 도쿄도 지사가 한국인을 포함한 재일 외국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지칭한 발언과 관련,10일 재일 한국인들은 분노와 우려를 표명했다. 재일 한국민단의 한 관계자는 이날 “도쿄도 지사가 그같은 시대착오적인말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이시하라 지사는 지난 9일 일본 육상자위대의 한 부대 창설 기념식에 참석,“제3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잔악한 범죄를 계속 저질러 왔다”면서 “지진 등 재난이 발생할 경우 이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경고했다. 민단 관계자는 일본에서 ‘제3국인’이라는 단어는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곤 했다”면서 “우리가 잠재적 위협요소임을 시사하는 이같은 무례한 발언에 분노한다“고밝혔다.그는 “이같은 발언은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시하라 지사가 역사관을 바로잡기 바란다”면서 “이시하라 지사는 발언을 철회하고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중앙정부는 이시하라 발언에 연루되는 것을 거부했다.익명을 요구한외무성의 한 관리는 “우리는 아직 그 발언에 대한 항의를 전혀 듣지 못했다”면서 “그 발언은 지사가 한 것이며 중앙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말했다.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이라는 저서를 낸 이시하라 지사는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은 실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그동안 일본극우파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발언과 행동을 해왔다.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前언론인 정일성씨 개론서 발간

    전직 언론인인 정일성씨가 펴낸 ‘황국사관의 실체’(지식산업사)는 일본천황주의자들의 역사관을 아마추어 역사연구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개론서 수준이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터져나오는 일본인들의 ‘망언’이나,야스쿠니신사 참배,군국주의 옹호 발언 등은 그 뿌리가 모두 천황주의자들의 황국사관에서비롯한 것이다. 아직도 일본사회에 잔존해 있는 황국사관은 미국이 2차대전 후 일본의 전범처리를 위해 개최한 ‘도쿄재판’에서 천황을 처단하지 않고 살려둔 탓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메이지유신을 연구한 것을 계기로 저술한 것으로 천황제 확립 과정과 황국사관의 탄생 배경,도쿄재판,보수주의자들의 망언,82년 일본 교과서파동 등을 다루고 있다.값 1만원.
  • [오늘의 눈] ‘3·1절’을 ‘독립절’로 바꾸자

    어제는 새 천년 들어 처음 맞는 ‘3·1절’이었다.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그리고 독립유공자·시민·학생 등이 ‘3·1운동’ 81주년 기념식을 갖고 그날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3·1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지 9년째인 1919년 3월1일 거족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의거이다.위로는 민족대표에서부터 아래로는 초동급부,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지역적으로도 국내는 물론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만 두달 동안 전국 212개 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110만명이참가했으며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피검자는 46,948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날의 ‘만세시위의거’를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러나과연 ‘운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3·1만세의거는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비폭력적 방법으로전개한 항일 투쟁임이 분명하다.그런데도 이를 마치 ‘새마을운동’ ‘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운동’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마땅히 ‘3·1만세의거’ 또는 의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3·1만세시위의거’로 고쳐 불러야 한다.1926년의 ‘6·10만세운동’ 역시 같은차원에서 ‘6·10만세의거’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만세시위의거’를 ‘운동’으로 불러온 것은 해방 후 학계의 식민사관과 독립운동가 진영의 몰역사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지금까지 나온 역사 서적은 전문서나 대중서 할 것 없이 거의 ‘운동’으로표기돼 있다.심지어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3·1운동’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3·1절’ 역시 명칭 개정을 재고해야 한다.현 ‘3·1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다른 국경일,즉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은 모두 그날의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는 반면 유독 ‘3·1절’만 날짜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3·1만세의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인 날이니 ‘독립절’ 또는 ‘만세절’로 고쳐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區 명품·명소 관광상품화 ‘봇물’

    서울지역 각 자치구들이 지역 특성을 담은 명소·명품 등의 관광상품화에 주력,눈길을 모으고 있다. 세계화 추세에 발을 맞추는 한편 서울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적 이벤트를 앞 두고 세수확대의 여지가 큰 관광산업의 붐을 조성,국내외 관광객을 적극 유 치하기 위해서다. 아직 고궁 등 역사유적을 제외하면 서울시내에서 관광수요를 크게 창출하고 있는 명소는 이태원 관광특구(용산구)와 인사동(종로구), 압구정동 로데오거 리(강남구) 등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치고 있다. 지역명품 역시 발굴·개발이 더뎌 지금까지 관광상품으로 명성을 확보한 것 은 지난해 명품으로 지정돼 1년동안 7t가량을 생산한 노원의 삼해주와 동대 문구 경동약령시의 한약재,송파구 산대놀이와 중랑구의 먹골배 정도다. 이런 가운데 최근들어 각 자치구들의 명소와 명품 개발경쟁이 갈수록 치열 해지고 있다. 강동구는 최근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대대적으로 확장·정비했으며 강서구는 동의보감을 저술한 의성(醫聖) 허준의 자취가 남아있는 구암공원 일대를 대 대적으로 개발,한의학의 성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은평구는 해외 한인들의 거점이 될 한민족역사관 조성에 나섰고 서대문구는 서대문형무소를 ‘역사의 현장’으로 단장,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 악구는 신림동 순대마을을,마포구는 조선시대 천주교 포교의 수난사를 간직 한 절두산 성지를,영등포구는 한국정치의 중심인 국회의사당을 관광명소화하 기로 하고 눈길을 끌 묘책을 준비중이다. 이밖에 4·19묘역(강북구)과 육군박물관(노원구),88 서울올림픽의 현장인올 림픽공원(송파구) 등도 관할 자치구들이 관광상품화에 주력하고 있는 대표적 명소다. 그러나 이같은 관광명소들이 제대로 관광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이벤트의 개발과 교통·쇼핑 등 편의시설 확충,고증을 통한 정확한 역사 재 현 등 보다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상당수 관광명소들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에는 아직 이 르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라며 “지역 특성이 물씬 풍기는 독자적인 명소 ·명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남북한은 고구려를 왜 다르게보나

    ‘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국내 고대사학계가 열띤 논쟁을 벌였던 지난해 북한에서는 해방 이후 북한역사학계의 고구려 연구를 집대성한 ‘고구려사’(전3권)가 완간됐다.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손영종(73)교수박사가 집필한 이 ‘고구려사’가 지난 90년 첫 권(270쪽)이 나온 이래 97년 2권(239쪽)에 이어 지난해 마지막 3권(239쪽)이 북한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에서 출간된 것. 이 책들은 지난해말 북한서적 전문출판사인 서울의 백산자료원에 의해 복사본으로 출간됐다.총748쪽 분량의 방대한 규모인 이 책은 북한이 펼쳐온 지난 반세기 동안의 고구려사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한편 지난해 8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51) 교수가 고구려사 전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고구려사 연구’(사계절)를 출간했다.거의 비슷한 시기에출간된 이 책들은 남북한 학계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어 남북한 고대사학계의 인식차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물론 이들 두 책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데는 무리가 있다.우선 손영종의 책은 북한학계의공식견해를 반영한 통사(通史) 형식인 반면 노 교수의 책은순전히 개인차원의 연구성과이자 고구려의 정치·제도사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책은 역사관은 물론 역사서술 형식·내용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우선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의 신빙성 문제의 경우 두 책 모두 초기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지만 시각은 전혀 딴 판이다. 손영종은 고구려 건국연대를 삼국사기(BC 37년)보다 200년 이상을 끌어올린,BC 277년이라고 주장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대폭 받아들인다.반면 노 교수는 고구려 건국연대는 삼국사기를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다. 이른바 ‘부(部)체제설’을 두고서는 견해가 완전히 정반대다.노 교수는 “3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에서는 부체제가 계속됐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손영종은 “고구려는 이미 건국초기 중앙집권 국가였다”면서 이를 부정하고 있다. 또 귀족연립정권 성립여부와 관련,노 교수는 “고구려는 6세기 중반 이후 멸망때까지 왕권이 약화되고 유력귀족들이 회의체를만들어 권력을 나눠 가진귀족연립정권기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손영종은 “이같은 주장은 일제 어용사가들이 고구려의 강대성·선진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고의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손영종은 ‘고구려사’ 3권에서 “남한 역사학계에서 근대적 실증주의 역사학자 등으로 호평받고 있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1)는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왜곡·말살시킨 어용식민학자”라고 규정하고 이들에게서영향받은 이병도(李丙燾) 학계(學系)의 남한학자들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와 관련,한 역사학자는 “고구려·발해사 등은 대다수 유물·유적과 자료가 북한지역에 남아있기 때문에 이 분야 연구는 북한의 연구성과가 남한보다 한 수 위”라면서 “특히 식민사관 극복과 관련한 북한학계의 노력은 남한학계가 본받아야할 대목”이라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北고대사학계 2세대 대표 50년 서울대 재학중 월북 지난해 ‘고구려사’ 전3권 출간을 완료한 손영종(孫永鐘·73)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실장은 북한 고대사학계 2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80년대 이후 남한학자들의 논문이나 단행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왕성한 연구활동으로 국내학계에서도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주전공 분야는 고구려·발해사.지난 80년에는 조희승과 ‘발해수공업사’를함께 썼고,박영해와 공동집필한 ‘조선통사’를 지난 87년에 출간했다. 1928년 부산 태생으로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3학년 재학중이던 50년 10월인민군에 입대,자진 월북한 손씨는 지난 90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사 초청 학술행사 참석차 일본에 들렀다가 40년만에 아내와 외아들 경한씨(京漢·50·변호사)를 극적상봉,화제가 됐었다. 정운현기자
  • 서대문구, 관광객 본격유치 나서

    서대문구(구청장 李政奎)가 잇따른 국제행사를 앞두고 본격적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신촌지역은 생각보다 개발가능한 관광자원이 많은 편이다.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이미 테마관광 코스로 자리잡은데다,밀집한 대학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학가 문화가 많은 시선을 끌고 있다. 이와 함께 북아현동의 명물로 떠오른 웨딩드레스거리도 내·외국인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들어서는 연희동 일대가 ‘차이나타운’조성 예정지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신촌기차역 주변 의류상가에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이하루 평균 200∼300명씩 찾아오는 등 새로운 외국인 쇼핑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서대문구는 이에 따라 관내 관광자원을 보다 널리 알리고 내·외국인 관광객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오는 17일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 ‘외국인 안내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신촌역 현장민원실 안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공공근로자 등을 이용한 자원봉사센터 형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영어·일본어·중국어 회화가 가능한 인력을 2∼3명 배치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외국인을 안내하도록 할 방침이다.운영효과를 보아 10여곳으로 안내소를 늘릴 계획도 세우고 있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도 신촌의 관광지역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포구 상암동에 들어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숙박·쇼핑시설만 제대로 갖추면 기대 이상의 부수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대문구는 이를 위해 지난해 4∼6월에 모집한 20개 민박신청가구 외에 상반기 안에 30가구를 추가로 모집하는 등 올 한햇동안 모두 500가구를 확보하기로 했다.한국 방문의 해 및 월드컵대회 기간중 찾아올 외국인 관광객들을민박가구를 통해 소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음식맛을 이용한 관광객 유치 전략의 하나로 지난달 20곳을 선정한 ‘맛집’도 연내에 100곳으로 늘려나가는 한편,6월말까지 7억6,800만원의예산을 들여 연세대 앞과 신촌기차역 앞 공중화장실을 정비할 방침이다. 서대문구 관계자는 “신촌지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장관 10명의 애독서

    새 밀레니엄을 맞아 사회의 각 분야마다 새로운 실천을 위한 첫발을 힘차게 내딛고 있다.사회전반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각 부처 장관들의 관심 영역은 어느 때보다 궁금증을 끈다.급변하는 지식·정보화시대를 이들은 어떤 마음자세로 맞으려 하고 있을까.이를 알아보기 위해 대한매일은 주요 장관으로부터 애독하는 책을 추천받았다. ?미래의 결단(Managing in a Time of Great Change)(피터 드러커) 미국 일본 등 거대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예측하고 있다.정부 재창조의 방향도 암시해,21세기의 지도계층에게 유익한 지침서라 할만하다.[강봉균 재정경제부장관]?팡세(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로 알려진 팡세는 모순에 차있는있는 존재의 불완전성의 심연을 성서의 입장에서 해명하면서 그리스도의진리를 변증론적으로 탐구해 낸 명상록이다.이 책은 나의 인생고뇌에 대해많은 깨달음을 주었을뿐 아니라 그후 인생 역정에서 사고의 지침이 됐다.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목민심서(정약용) 목민관이 갖춰야 하는 덕목을 잘 알려준다.부패가 극에달했던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상황과 민생문제를 수령의 책무와 결부시켜 고발하고 있다.국민이 재난을 당했을때의 공직자 처신에 대해서도 말한다.행정을 수행하다가 답답하거나 부하직원들에 대한 지침을 내릴 때 이 책을 펼친다.[김정길 법무부장관]?처칠에게서 배우는 리더쉽(스티븐 헤이워드) 영국수상이었던 처칠의 리더십을 통해 리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리더의 기본적 자질과 조건을 경험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최고 경영자나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공직자의 대민관계 리더십이 한층 높게 요청되는 요즘 공직자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김기재 행정자치부장관]?메가 챌린지(한존 나이스비트) 지식기반사회의 변모하는 모습을 문화 경제 정치 등 3분야에 걸쳐 전망한다.새 시대의 주역은 아이디어와 호기심을 갖춘 개인이며,정보통신의 발달은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활용되는 새로운 민주사회를 만든다고 주장한다.미래사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라면’(류시화)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여생을 비춰볼 수 있도록 돕는 잠언시집이다.인생을 새로 설계하거나 결심을굳히는데도 좋은 명약이 된다.“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어요.그래서 난 때로는 인생이라는 것이 힘들며,우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님을알았어요”란 잠언시를 읊으며 삶의 지향(志向)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가다듬어 본다.[김성훈 농림부장관]?What will be (마이클 더투조스) 사이버의 새로운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미래서.저자는 사이버 시대를 맞아 국가와 개인,기업이 각각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제시한다.또 미리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가 각각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판가름날 것이라고 경고한다.[남궁석 정보통신부장관]?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좌·우 이념의 대립을 겪고 남북분단이라는특수상황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복지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정방향을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차흥봉 보건복지부장관]?독일 국민에게 고함(요한 고트리프 피히테) 숭고한 인류애와 투철한 역사관,확고한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저자의 강론과 절규는 마음에 안정을 주고용기도 불어넣어 준다.나라의 어려움을 방관하는 지식인의 허물을 꾸짖으며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심이 나라를 망친다는 경고도 새겨들어야 하는 경구다. [서정욱 과학기술부장관]?싯달타(헤르만 헤세) 싯달타(석가)가 구도자 시절 거친 세상을 헤매면서반성과 사유를 통해 득도(得道)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또 서양 물질문명에 대한 동양 정신세계의 중요성도 강조한다.이 책은 청소년이던 나에게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줬고,아직도 그때준 감동을 잊을 수 없다.[이건춘 건설교통부장관]정기홍기자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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