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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스승(외언내언)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TV프로그램이 있다.어느날인가 국회의원도 지낸 노련한 연기의 여자 탤런트가 노스승을 만난 장면을 끝부분만 잠깐 볼 기회가 있었다.여학교때 교장선생님이셨다는 분이신데 자막에 밝혀져 있기를 「100세」라고 되어 있었다. 「정말일까」하는 생각에 빨려들듯 바라본 화면 안에서 그분은 말씀투나 총기가 손색이 없으셨다.특히 탤런트 제자에 대한 옛기억 대목에서 『강○○씨는 능력이 있고 믿음직해서…친구들 사이에 리더…십이 있었지…』하던 말이 인상적이다.그 제자를 말하는데 그것은 아주 꼭 맞는 서술이었다.『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자손과 사신다는 대목도 또박또박 말했다.백살에도 이만큼 품위있는 노인일 수 있다면 오래 사는 것도 욕은 아니라는 위안을 실감시키시는 스승.연기도 아닌데 펑펑 울며 스승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탤런트의 스승사랑이 아름다웠다. 국립대학 정교수도 지낸 학문도 높고 관직에도 높이 올랐던 지도층 인사가 있다.그는 인천지방에서 자랐는데 그의 어머니는 무학이셨고 살림은 어려운 편이었다고 한다.그 어머니께서는 아들들이 버거우면 으레 『교장선생님께 가자.교장선생님께 여쭤보자』는 것이 입버릇이셨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교장선생님이고 그 스승의 가르침으로 아들들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신념이었다.가난 속에서도 아들 3형제를 빛나게 기를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머니의 지혜때문이었다고 중년의 아들은 지금도 감탄한다. 훌륭한 스승을 이렇게 극진히 존경하던 옛날분들 때문에 옛날에는 훌륭한 스승이 더 많았었는지도 모르겠다.자기아이 나무랐다고 툭하면 스승을 고소하는 똑똑한 엄마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훌륭한 스승도 적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촌지니 봉투 주고받기 따위로 치사해진 선생님들은 훌륭한 스승이 될수 없을 것이다. 스승의 날.그래도 「훌륭한 스승」들에 대한 기대를 우리는 버릴 수가 없다.그분들에 의해서 많은 인생이 훌륭해질 수 있으니까.〈송정숙 본사고문〉
  • “학원폭력 근절” 단호한 의지/정부 종합대책의 함축

    ◎예방에 주력… 형사처벌에는 신중 기해/교육분위기 쇄신 등 근본대책도 병행 정부가 1일 관계장관회의 후 발표한 학원폭력근절 종합대책은 어느때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학교담당 지도검사제와 학교담당 경찰제는 눈여겨볼 만하다.각 학교에 담당 검사와 담당 경찰관을 지정,폭력서클과 폭력학생을 지도·감독하고 폭력방지를 책임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공권력이 교내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가 학부모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학원폭력의 심각성 때문이다. 최근 학원폭력은 중·고등학교는 물론 국민학교와 여학교까지,대도시 중심에서 중소도시까지 확산되고 있는데다 일과성 폭력에서 반복·상습적·조직적 폭력으로 비화되고 있다. 학생들이 폭력배를 만나면 순순히 돈을 주고 피하기 위해 이른바 「안전 비상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설문조사 결과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폭력에 의해 금품을 강탈당한 학생은 42만명으로 그 피해액은 17억원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공권력이 학교폭력문제 해결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그러나 폭력예방에는 철저를 기하되 폭력학생에 대한 형사처벌에는 신중을 기하겠다는 생각이다.청소년기 한때의 잘못으로 인한 형사처벌이 오히려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는데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상습적인 폭력학생에 대해 사회봉사명령제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또 교육기관들도 학교폭력을 예방할 책임을 지도록 해야한다는 방침이다.이를 위해 각 시·도 교육청에 설치될 학교폭력추방대책반은 각 학교의 학교폭력지도상황을 점검,미흡한 학교에 대해서는 응분의 책임을 묻는 한편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부는 그러나 이같은 강력한 단속만으로는 학원폭력이 해결되지않는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홍구 국무총리가 이날 『학원폭력문제는 기본적으로 교육과 선도가 중요하다』면서 『폭력서클학생들의 문제보다 미성년자의 유흥업소 출입을 허용하는 등 오히려 어른들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한 것도 이를 증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날 회의에서는 참석자들에 의해 학교폭력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풀어야 할 숙제 몇가지가 제시됐다.그것은 ▲결손가정의 증가와 과보호 등 가정의 교육기능 약화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 ▲성적부진학생의 좌절감 ▲적성과 소질을 고려하지 않은 진로지도 ▲생활지도를 제대로 못하는 학교 ▲물질만능주의와 퇴폐주의 ▲자기 자식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학부모 ▲이웃자녀에 대한 무관심 등이었다고 한다. 정부의 학교폭력방지를 위한 중·장기대책은 이같은 문제점을 바탕으로 마련될 것이 분명하다.
  • “학교주변 폭력 근절하라”/김 대통령 지시

    ◎섬·경 등 협조 종합대책 조속 추진 김영삼 대통령은 27일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교내와 주변의 폭력사태에 대한 철저한 예방및 근절대책을 강구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김용태 내무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 초·중·고교 주변의 폭력이 확산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사복경찰관을 학교 주변에 고정배치하는등 단속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윤여전대변인이 전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학교당국등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의,중장기대책을 마련함으로써 학교폭력을 짧은 시일 안에 근절토록 하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또 박영식 교육부장관에게도 전화를 걸어 『학교폭력이 갈수록 조직화·포악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국민학교·여학교에까지 확산되고 있으므로 교육부가 교육개혁 차원에서 검찰·경찰등 유관기관과 협조,학원폭력근절대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특히 『폭력사태가 단시일내에 개선되지 않을 경우 관계공무원은 응분의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학교폭력근절에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 성악가 김자경(인물탐구:86)

    ◎오페라와 결혼한 “영원한 프리마 돈나”/“독특한 릴릭 소프라노” 50년 미 카네기홀 진출/68년 자비로 「오페라단」 창단… 정기공연 49차례/지난 10월 국내 첫 야외오페라 무대… 최근 국악에 입문 「앵두나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파랑새가 방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김자경을 낳았다」는 그 어머니는 「새소리가 어찌나 맑고 투명하던지 나의 딸 자경은 노래하는 사람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딸은 지금도 독창회 무대에 서서 「불굴의 오뚝이」「작은 거인」 「분투의 또순」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의지의 원로다.얼핏듣기엔 드세고 거센 여장부의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해맑은 미소와 화사한 「이팔청춘」의 마음씨에서 우리의 「영원한 프리마 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지난해만해도 희수기념 독창회를 비롯,올해도 불우이웃들을 돕는 호스피스 건립기금을 위한 독창회를 열었고 연말에도 자선음악회 스케줄이 잡혀있다.벌써 19번째다.지난 75년당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수운전을 하고 돋보기 없이 글씨를 읽고 쓸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신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는 맹인들의 개안수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안수술 사람은 50여명이 넘는다.「두손을 모으고 마치 기도하듯,신을 찬미하듯 혼신을 다하는 그의 노래는 진심으로 그들이 눈뜨게 되기를 비는 순수함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게 작곡가 김동진씨의 말이다. ○맹인 50명에 개안수술 만년의 그의 독창회중 가장 감명깊은 것은 4년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결혼 50주년 기념」독창회라고 할 수 있다.수많은 자선음악회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노래한 이 무대는 그의 부군이자 서양화 일세대였던 심형구화백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리움」「못잊어」「그대있음에」「청산에 살리라」등 「부군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절히 넘쳐 청중에게 찡한 감동을 안겨주었다.「나의 일생을 맡긴지 21년,2남1녀와 함께 나의 수많은 연주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이 그는 예고도 없이 떠나가버렸고 29년이란세월을 혼자서 살면서 그 파란만장한 사연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날 음악회 팸플릿에 쓴 글이다.그러나 『68년 성은 「오」씨이고 이름은 「페라」인 오페라와 결혼했고 이제는 김자경이가 오페라인지 오페라가 김자경인지 분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었다』고 일가를 이룬 예술가다운 의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자경은 경기도 개성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김영환씨와 백열소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났다.3살되던해 서울에서 감리교 신학교에 다니게 된 부친을 따라 이사,이화유치원과 이화보통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원산에서 루씨여학교를 나왔다.그는 노래 뿐만 아니라 운동에서 미술 수학 물리 화학등 못하는게 없었고 언제나 전교수석,어릴 때부터 오페라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아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도쿄여의전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그러나 도쿄로 떠나기 전날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어머니가 동생하나만 더 낳았어도 나는 성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탄한 것이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 부친은 당장 「성악을할것」을 권해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악공부는 이화여전을 졸업하던해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신인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고 도미유학길에 오르기전까지 이화여고에 임시음악교사로 취직한 것이 심형구씨를 만난 계기가 된다.도쿄미술학교출신의 「멋쟁이화가」 심형구와 「만인의 애인」이자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 김자경의 러브로맨스는 숱한 화제를 장안에 뿌리면서 41년 12월 드디어 결혼,「가정과 예술을 병행시키는 멋진 가정을 이루자」는 다짐과 함께 부군의 주선으로 김자경은 31세 되던해 오랜 숙원이던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서 세기적인 소프라노 릴리폰즈의 노래를 듣고는 자신의 음악적 자질과 소양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는 한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단한번도 의심해 본적 없던 자신의 기량이 거대한 오페라가수 앞에서 무색해진 순간이었다.「메트로폴리탄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를 자책하며 밤새도록 흐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몽사몽간에 「너는 왜 세계적인 성악가만을 고집하는가.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계무대에 세우라」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때마침 미국에 다니러 왔던 김활란박사도 「나는 릴리폰즈보다 네 목소리가 백배 더좋다」고 격려해주었다. ○31세때 줄리어드 입학 『그래,나두 해내고야 말겠다』 그는 굳게 결심하고 그 길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 서겠으며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교수는 놀라서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려면 먼저 학교측이 주최하는 오디션에서 통과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그는 7명의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벨리니의 「노르마」중 「카스타티바」를 열정적으로 불렀고 「독특한 음질의 아름다운 릴릭 소프라노」로 인정되어 195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가수들과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카르멘」에 출연,남부 60개 도시에서 80회연주를 비롯,한번 투어에 나서면 3개월이상 걸리는 전미순회공연에도 빠지지 않게되었다.그러나 좋은 일에는 흔히 마장이 생긴다고 한 것처럼 그가 「종달새처럼 푸른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며 노래부르고 있을 때」 그해 62년 여름,방학을 맞아 속초로 스케치여행을 떠났던 부군의 익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전신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등 긴 슬픔에서 헤어나기까지 실로 오랜시간이 걸렸다.그러다가 65년 봄,호화여객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일주 여행길에 오르면서 48세의 나이로 「퀸 오브 빅토리아」에 선발되자 당선 사례로 아르디티의 「일바치오」와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동안 그의 내부 깊숙이 움츠려있던 프리마 돈나의 기백과 보석 같은 기량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불굴의 투지” 여장부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계획했던 대로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그리고 그해 5월 창단기념공연으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준비하면서 티켓을 들고 각기업체와 동창 후배들을 찾아다녔다.그러나 그들의 호의와 적극적인 협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더이상 버틸 수 없이 창단 3년만에 문을 닫는 위기를 맞는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으나 「죽을 결심으로 뛰어들면 안될 일이없다」고 다시한번 자신을 일깨웠다.그때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진 고초와 수난과 시련」을 거치면서 후원회와 고정관객 확보로 그의 오페단은 서서히 기반을 잡아나갔다.오페라단창단 만27년에 정기공연 49회,4년전부터 이사장직에 머물면서 지난 10월에는 1만2천명을 수용하는 잠실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레하르의 3막 오페라 「메리 위도우(즐거운 과부)」로 국내 처음 야외오페라를 해냈고 내년도 제50회 「카르멘」 캐스팅을 위해 최근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호는 심설,「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이루어진다(정신일도 김석가투)」는 그의 신조는 여전히 손수 차를 몰고 지난봄에는 한양대대학원 국악과에 입학,새로 우리「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줄기찬 한 흐름속에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우뚝선채 음악성취 뿐 아니라 그늘지고 병든 이들에게 「이세상의 빛」을 실천하는 「천사」이며 그들을 위한 그의 목소리는 시들줄 모르는 「영원한프리마 돈나」로서 우리시대에 찬연한 빛을 발한다. ◇연보 ▲1917년 경기도 개성 출생 ▲40년 이화여전 졸업 ▲41년 제1회 독창회 ▲48∼50년 미 줄리어드음악학교 성악전공,「라 트라비아타」주역,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51∼58년 미남부 60개 도시순회공연,귀국독창회 ▲58∼83년 이대성악과 교수 ▲60년 오페라 「오델로」주역 ▲62년 국립오페라단 부단장 ▲65년 유럽지역 성악교육시찰 ▲68년 김자경오페라단창단,단장.베르디 「춘희」이후 49회 공연 ▲75년 제1회 「김자경 가곡의 밤」,국제음악인대회(IMC) 참가 ▲79년 김자경 오페라 관현악단창단 ▲81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82년 한·미수교1백주년 기념독창회(워싱턴 케네디센터) ▲86년 김자경 오페라단 소극장 청소년부 창설기념 「노처녀와 도둑」 공연 ▲87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88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91년 결혼 50주년기념 독창회 ▲93년 홍난파선생 추모독창회 ▲94년 희수 독창회 ▲95년 호스피스 건립기금마련 독창회(19회),한양대대학원 재학중,김자경 오페라단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상·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74년)·중앙일보문화대상(76년)·국민훈장 석류장(83년)·세종문상(87년)·프랑스 문화예술훈장(92년)·문화공로패(93년)
  • 중하위권대 경쟁 치열할듯/서울 5개고 가채점 조사

    ◎수능성적 평균 10점이상 하락 예상/1백60점이상 상위권 「가뭄의 콩」/명문B여고 1백70점이상 “전무” 22일 실시된 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지난해와 비교해 입시전문기관이 예상했던 7∼8점보다 3∼4점가량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상위권 여학생들의 점수가 많이 하락할 것으로 조사됐다. 또 예년에 비해 중상위권 수험생들이 대폭 줄어든 반면 1백30점대를 밑도는 중하위권에 집중돼 있어 이들간의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분석됐다. 23일 서울신문이 서울의 강남북 5개고교(여학교 1개교 포함)에서 무작위로 1개반씩을 선정해 수험생별 가채점 성적을 분석한 결과,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포항공대등 명문대 합격률이 높은 서울 강북 K고의 경우 중상위권 학생들의 수능점수가 평균 10∼12점 정도 낮아지는 등 5개교 모두 지난해보다 점수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K고 조사학급의 경우 지난해에 비해 서울대나 연·고대등 상위권 학과에 지원가능한 수능 성적 1백50점이상의 상위권 학생수가 지난해보다 10명이 줄어든 3명으로 집계됐다. 서울 강남지역 B고교의 한 학급도 지난해보다 평균 8∼10점이상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으며 1백60점이상의 상위권 학생수는 지난해의 절반수준인 4명으로 파악됐고 1백30∼1백59점대의 중위권 학생수는 10명 늘어난 24명으로 드러났다. 이 학급은 수능점수 1백60점대 1명,1백50점대 1명등으로 집계됐으며 1백30점이하가 전체의 80%를 웃도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 강남 B여고는 지난해 한 학급에 1백70점이상인 학생이 5명이나 됐으나 이번에는 1백60점이상이 2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1백50점대 이상의 상위권이 1∼2명에 불과하고 중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1백40∼1백50점대는 거의 없다. 이와함께 강북의 명문 D외국어고교도 한 학급 평균 1백70점 이상은 지난해의 13명에서 2명으로 줄었고 1백60점대도 18명에서 8명으로 크게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 오늘 지구의 날/환경보호 민·관 “한마음”

    ◎중·고 30곳 「글로브학교」 지정/시민들은 하천오염 지도 제작 배포 22일은 「지구의 날」. 갈수록 찌들어 가는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이 날을 맞아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환경보호활동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교육부는 이날부터 오는 99년까지 서울 한성과학고등 전국의 중·고교 15개교씩 모두 30개교를 선정,지구환경학습 및 관찰활동(글로브 활동) 학교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김숙희 교육부장관은 21일 아시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와 한·미 글로브 활동 이행약정을 맺었다. 글로브학교는 자국의 기후 및 대기오염도등 환경관련 사항 등을 학생들이 직접 측정해 미해양대기청(NOAA)에 보내면 각국의 환경정보를 종합·분석한 뒤 인터네트를 통해 글로브참여학교에 영상자료를 제공해 주는 과학프로그램이다.올해 안에 전세계 50여개국 1천여학교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교육부는 한성과학고를 시작으로 글로브학교를 해마다 늘려 내년에 서울·부산·광주·대전과학고등 4개고교,97년에 8개 과학고등 99년까지 중·고교 15개씩 30개 학교를 글로브학교로 선정,운영할 방침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이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제작한 수원·울산·제주 등 3개지역의 하천오염지도를 발표했다. 지난해 10월부터 6달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된 이 지도는 지역 하천의 오염도 지도와 오염원 지도등 두 종류로 각 지역에서 시민과 대학생·교수·각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수질오염감시단이 직접 하천의 수질을 측정하고 하천 주변의 수질 오염원을 조사해 만들었다. 조사대상 하천은 수원지역은 수원천,황구지천,서호천,원천천과 이들의 3개 지천이었고 울산지역은 태화강,동천강,회야강등 3개 하천,제주지역은 제주시의 상수원인 외도천 유역이 중점 조사됐다. 경실련은 이들 하천오염지도를 토대로 지역별 수질오염 시민감시단의 폐수배출 감시운동을 강화하는 한편 지도를 관공서및 각급 학교·시민단체 등에 나눠 줘 수질개선을 위한 정책자료와 교육·홍보용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22일 하오2시 서울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에서는 환경단체 소속 회원과 시민 등 모두 1만5천여명이 참가하는 「서울 푸르게,한강 푸르게」라는 주제의 제1회 녹색환경축제가 열린다. 이날 행사에서는 수중 쓰레기 줍기및 여의도 강변 걷기대회,풍물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어떤 공무원의 아내(송정숙칼럼)

    최근에 남편이 중앙부처의 주요간부인 한 현직공무원 아내의 방문을 받았다.단순한 문안이어서 흔쾌히 반길 수 있었다.그는 전에도 몇번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이 근처이므로』 찾아뵙겠노라는 말을 했던 터이므로 직장을 가진 전문직 여성쯤으로 알고 가벼이 만났다. 그는 대학때 가정학을 전공하여 결혼전까지는 여학교에서 가정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였다.전직이 교사이니 지금『일하고 있는곳』도 그에 준하는 사무직이려니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 그에게서 들은 말은 좀 의외였다.그는 어떤 여성월간지의 외판일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아주 밝고 기쁜 얼굴로 그는 그말을 털어놓았다.그 잡지가 젊은 주부였던 그에게 매우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잡지에서 본사직영의 외판사원을 공모할때 기꺼이 지망하여 10년 넘게 그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초기에는 모르는 사무실 같은데도 무작정 들어가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한부 한부씩 독자를 개척했다는 이야기며 그렇게 사귄 독자와 아직도 십년지기처럼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몇년전 남편의 유럽지역공무원유학에 동반하기 위해 그일을 2년쯤 떠난적은 있지만 남편의 유학이 끝나 돌아온 뒤에도 잡지사의 「배려」로 그 외판일에 복귀하여 오늘까지 계속해온다는 이야기도 했다. 현재 그의 남편은 부이사관 승진순위가 1순위에 이르러 있는 매우 성실한 공직자다.이 승진순위가 결정될 때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만큼 부 내에서 평판이 좋은 공무원이다.이른바 국제화에 적응할 수 있는 외국어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실력있는 공직자다.그런 공무원의 아내가 기꺼운 마음으로 잡지 외판일을,그것도 여러해동안 해왔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다. 『다시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일은 기회가 지나갔고,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까 집에 죽치고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그리고 이일이 살림에도 도움이 되었어요.그래서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고 일했어요.처음에 제가 이일을 하겠다고 하니까 사흘만 하면 못하고 「나가떨어질거라」고 점쳤었던 윗분들이 저를 참 좋아하시게 되었어요.그분들이 오랫동안 아주 잘해주셨어요.전 이일이 재미있어요.또 아이들을 늦게 둬서 이제 겨우 중학교 고등학교가 시작되었으니 생활에 보탬될 일을 계속해야 하거든요』 아이들은 아들들뿐이고 중요한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남편이 집안일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집안일은 남에게 맡기지 않아왔다.살림을 남의 손에 맡기면서까지 할만큼 수입이 좋은 일도 아니다.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일이 당연하고 만족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탁자위의 읽던 신문들을 주섬주섬 덮었다.전국에서 전이된 암세포처럼 드러나고 있는 세도기사가 그득그득 실린 신문이다.그런 신문을 읽으며 알고 있는 공무원들의 죄없어 보이던 얼굴을 떠올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면서 「혹시 그 진실하고 성실해 보이는 얼굴들 뒤에도 이런 부패의 진면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해보던 참에 그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얼른 신문을 덮은 것은 이 순진한 공무원부인에게 그런 것을 들킬 것 같은 가책때문에 나타난 반사적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날 아침에 한친구의 전화도 받았었다.숙맥처럼 순직한 대학교수인 그 친구는 전에 없이 치열한 말투로 공무원에 대한 비난을 질펀하게 퍼붓고는 『…이눔의 땅을 뒷발에 묻은 뭐 털듯이 털고 떠나야 하는건데 무슨 미련이 있다고 못그러는지…』하고 한탄을 했다.그런 그와 끝내는 함께 서러워져서 서로 내던지듯 전화를 끊었었다 철야작업을 하면서도 전혀 불평도 하지 않으며 부숭부숭하게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열정적이게 일하는 공무원을 나는 많이 안다.세도들의 기사는 그들 모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의심을 하게 했다.그런 신문을 한 공무원아내의 방문이 쓸어덮게 한 것이다. 나로 하여금 이렇게 의심쟁이가 되게 만든 세금도둑들이 치가 떨리게 밉다.사랑하는 이 땅을 「뒷발에 묻은 뭐 털듯이 털고 떠나고싶다」고 저주하다가 마침내는 분통을 터뜨리며 울먹울먹하는 교수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공들여 사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맥이 풀리게 만든 이런 부정공무원들이 너무 분노를 부른다.그 뿐인가.모든 사람들에게서 흰눈의 냉소를 받으며 의심과 비난의 눈길을 당하는 그 많은 성실한 공무원들의좌절도 그들은 만들었다.나쁜 사람들. 그러니 어쩔 것인가.그것들을 찾아내어 도려내고 새살이 돋아나게 하는 일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않은가.아무런 신념의 흔들림도 없이 『세상에는 좋은 분들이 참 많고 그런 분들을 독자로 개척하여 사귀게 만든 이 일이 참 좋다』며 찾아와 준 공무원아내의 방문은 참으로 큰 위안이었다.한때나마 알고있는 많은 좋은 공무원까지 의심을 한 옹졸한 소견이 부끄럽다.깊이 사과한다.
  • 택시 골라타기·호신용품 휴대/여성들 방범 자구책비상

    ◎귀가길 여학교앞 학부모 장사진/총포사에 가스총 구입문의 쇄도/생산직 여사원들 야근 기피 늘어 야간근무 기피현상,택시 골라타기,호신용구 휴대바람,여학교 앞의 학부모 문전성시 등등. 최근 일어난 「지존파」 연쇄납치살인사건,택시 연쇄납치강간·살인사건,군장교 탈영사건,세무 공무원 거액 횡령사건 등으로 사회적 불안·공포심리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특히 여성들 사이에 심야귀가길 안전을 꾀하려는 자구책이 다양하게 마련되고 있다. 「경찰·군인·공무원마저도 믿을 수 없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으며 「나도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데 따른 새로운 풍속도이다. 요즘 여성들은 자구책으로 귀가시간을 앞당기거나 밤늦게 택시타기를 꺼려하는등 소극적인 대처방법에서부터 호신용 가스총·전자총 휴대방법까지 나름대로의 묘안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기업체 생산부서의 여성사원은 되도록이면 야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눈에 띄게 뚜렷해졌으며 할 수 없이 밤늦게 일을 마친 여성들은 전철이나 버스 운행이 끊어지면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이용했던 일반택시를 기피하고 부담스럽더라도 모범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다. 또 방향별로 여럿이 어울려 택시를 타거나 다소 돌아가더라도 승용차를 가진 사람의 신세를 지는 등 「심야택시 공포증」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양대병원 간호사 김모양(24·관악구 신림동)은 『3교대 근무를 해야하는 병원특성때문에 하오10시쯤 일을 마치고 집에 간다』면서 『요즘에는 택시잡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운전사 나이와 인상을 뜯어본 다음에 나이 많고 점잖아 보이는 기사를 골라 택시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또 대학수학능력시험 50여일을 앞두고 있는 서울시내 각 여고의 자율학습이 끝나는 하오9시를 전후한 교문앞 풍경도 이같은 우려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성동구 행당동 무학여고 3학년 교사들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교문밖에서 자녀를 기다리던 학부모들이 60∼70명선이었으나 요즘에는 1백명 이상으로 불어나 학부모들의 불안심리가 그대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밖에 종전처럼 호루라기나경음기등 비상을 알릴 수 있는 호신용구 정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가스총·전자총 등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중구 을지로 6가 L총포사 주인 이기훈씨(47)는 『요즘들어 가스분사기나 전자충격기에 대한 구입문의가 하루에 15∼20건정도 들어와 평소보다 3배가량 늘어났다』면서 『이 가운데 직접 찾아와 사가는 손님들도 꽤 된다』고 털어놨다.
  • 「명성왕후 시해 칼」 발견/국제한국연 최서면원장,일 신사서

    ◎칼집에 “단칼에 늙은 여우 살해” 문구/낭인들 자백담긴 보고문도 찾아내 1895년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민비)시해 만행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칼과 범행에 동원된 일본인 낭인들의 자백이 담긴 일본재판소의 보고전문이 발견됐다.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원장(67)은 22일 『1895년10월8일 당시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삼포오루)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낭인중 한명인 후지가쓰 아키(등승현)가 명성황후를 건청궁(경복궁)에서 살해할때 사용한 칼을 일본 규슈(구주)에 있는 한 신사에서 발견했다』고 밝히고 칼의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 제일의 칼 제작자 다다요시(충길)가 만든 이 칼은 길이 1m20㎝로 칼집에는 「일순 전광 나 노호」(한 칼에 늙은 여우를 살해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후지가쓰의 호인 「몽암」이 새겨져 있다. 최원장은 이날 『관련사료에 민비시해의 일본측 암호명이 「호수」로 나타난 점을 감안하면 칼집에 새겨진 「늙은 여우」는 민비를 지칭함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민비시해후 일본으로 돌아가 규슈지방의 한 신사에 이칼을 헌납한 후지가쓰는 공범들과 함께 히로시마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이후 절에서 잠시 은거하다 나온뒤 여학교를 세우는등 교육자로 활동하다 8·15해방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민비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을 신문한 히로시마재판소의 구사노(초야)검사장이 당시 법무대신에게 보낸 1895년11월9일자 보고전문은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구로다 기요다카(흑전청륭·강화도조약체결당시 일본측 전권대사)관련 문서중에서 발견됐다. 특히 이 전문에는 『민비시해의 하수인을 찾던중 히라야마 이와히코(평산암언)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당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이들이 시해범인 것을 알고서도 일본 수사당국이 무혐의로 풀어주었고 또 정부수뇌부가 범행을 배후조종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 전문에는 『후지가쓰등이 시해당시 명성황후처럼 보이는 여자가 많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이에 모두 옷을 벗긴뒤 유방을 살펴 명성황후 나이인 44세정도의 여자를칼로 베어 살해했으며 이를 저지하다 일본인 관리의 총을 맞고 쓰러진 궁내부대신 이경식을 다시 칼로 베었다』고 돼있어 당시의 무참한 살육상과 시해사건에는 낭인뿐아니라 일본인 관리들도 개입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최원장은 이에대해 『내년으로 다가온 민비시해 1백주년을 맞아 지난달 자료수집차 일본을 방문,당시 시해때 동원된 낭인들의 후손으로부터 만행때 사용된 칼이 신사에 보관돼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끝에 칼과 관련자료를 발견했다』며 『지금까지는 민비시해때 일본인 부랑아들만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신문기자인 아다치겐조(안달겸장),교육자인 사사도모쿠사(좌좌우방)등 당시의 일본 지식인층과 외교관·군인등이 함께 저지른 극에 치달은 만행』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 주한공사 미우라 고로는 독일·프랑스·러시아의 삼국간섭(1895년5월)이후 친러정책을 지향한 명성황후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낭인과 군대를 동원,같은해 10월8일 상오7시쯤 민비를 시해했다.
  • 성신여대,「피가로의 결혼」 공연/25일 국립극장… 서현석교수 지휘

    성신여대 음대가 오는 25·26일 하오7시30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한다.지난 89년에 이어 두번째인 이번 오페라 공연은 성신여대 관현악단과 합창단이 협연하며 서현석교수가 지휘를,오영인교수가 연출을 맡았다.서교수는 국내 유일의 관악연주단체인 서울 윈드 앙상블의 지휘를 맡고 있다. 「돈 지오바니」,「마적」등과 함께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인 「피가로의 결혼」은 다른 오페라에 비해 많은 출연진들이 나서 음악적인 앙상블을 이룰수 있는 작품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성신여대는 이번 공연에서 여학교라는 특성때문에 남성 주역들은 학교 또는 외부강사를 위촉했다.또 다른 음악대학보다 늦게 출발한 만큼 관객들에게 보다 좋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올초부터 의욕을 갖고 연습에 임했다.때문에 학생들로만 출연진들이 구성된 일반 음악대학이나 먼저 출발한 어느대학보다도 수준이 높은 공연이 될 것이라는 학교측의 설명이다.문의 920­7277∼8.
  • 오늘부터 「명작발레」 공연/8일까지/리틀엔젤스회관서

    어린이날을 맞아 온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명작발레공연이 꾸며진다.국내유일한 직업발레단인 유니버셜발레단이 4일부터 8일까지 서울 리틀엔젤스예술회관 무대에 올리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졸업무도회」. 「동물의 사육제」는 서커스단의 천막안을 배경으로 동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나가면서 갖가지 동물들의 특징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한다.사자,암닭과 병아리,당나귀,거북이,수족관의 물고기,뻐꾸기등의 행진이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백조가 등장,유명한 「빈사의 백조」선율이 흐른다.「졸업무도회」역시 비엔나의 어느 여학교에서 벌어지는 졸업파티에서 초대받은 사관학교졸업생들과 여학생이 어울리는 발레극으로 전세계 발레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는 작품.
  • 묶은 머리/땋은 머리/홍콩 헤어스타일 복고바람

    「촌티나는 스타일」이라고 도시의 패션계는 물론 시골에서까지 거의 버림 받아오던 땋은 머리와 묶은 머리 스타일이 다시 유행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주로 동양권에서 오랫 동안 유행하다 거의 사라졌던 이들 두가지 머리장식이 다시 주목되고 있는 것은 최근 홍콩에서 열린 한 의상발표회 때 이같은 머리 스타일이 선보인뒤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긴 머리를 빗어내리고 윗부분을 묶었을 때 이를 묶은 머리라 했다.이에 반해 땋은 머리는 용모를 단정히 하기 위해 머리를 세갈래로 갈라서 한가닥으로 엮는 방식으로 교풍이 엄한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산발을 막기 위해 땋은 머리를 강요 하기도 했었다. 이번에 다시 등장한 묶은 머리와 땋은 머리는 옛 방식과는 다른 면이 없지 않다. 과거에는 두가지 방식 모두 머리채를 꽁꽁 묶는게 특징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느슨하게 묶거나 땋아서 늘어뜨렸다.그래선지 모델들이 걸어갈때 흔들거리는 머리모양이 아주 매혹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7)

    ◎유년시절:5/“7세때 3·1운동 참여” 우상화 극치/“총탄속에 짚신 벗어들고 독립만세”/온가족이 함께 육탄투쟁한듯 기술/생부 투옥때 면회내용도 날조 투성이 김일성이 만6세때 만경대에서 행동했다는 「사적」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군함바위:만경대 집 건너편 산 밑에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다.김일성은 이 바위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같이 탄 아이들에게 대장칼을 휘두르며 『원수 왜놈들을 베어버리자』고 돌격명령을 내렸다.그들은 만경봉 아래에 있었던 일제의 해각까지 돌격하였다.그래도 그는 부친을 투옥한 「왜놈」에 대한 증오를 삭일 수 없었다. ○“평생의 감명” 회고 ②김일성이 평양감옥에 부친을 찾아가서 면회했다는 이야기는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므로 이것을 발췌해 놓는다. 우리가 들어간 면회실은 햇빛조차 잘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아버지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어머니더러 잘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상해서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얼굴 목 손 발 할것없이 살이란 살은 온통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다. 『네가 그새 컸구나.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예,아버지도 집에 빨리 돌아오세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불굴의 모습에서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었다.아버지의 상처는 항일혁명투쟁 전기간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18년 가을에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필자는 김일성이 김형직의 감옥살이를 1919년이라 했다가 16년으로 변경한 후 17년이라고 다시 고친 사실을 앞에서 지적하였다.그런데 면회 갈때의 나이까지 몰랐던 그가 회고록에서는 면회실에서의 회화내영까지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런데서 이 면회극은 역시 창작이라고 밖에 볼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의 어린이들은 이런 식으로 「원수에 대한 증오」와 「김부자에 대한 효성」으로 자체를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유년시절 우상화의 하이라이트는 만7세때 그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이다.「회고록」에서는 일부러 「독립만세의 메아리」라는 1절을 설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여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언한 다음,「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시위대열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수만명 시위 주장 만경대와 칠골 인민들도 대열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우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 시위에 나섰다.떠날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열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이던 나도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열에 끼어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비슷이 따라 잡을수가 없었다.그래서 어떤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열을 따라갔다.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적들은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시켜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그러나 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수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보통문 앞에서도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양철통 두드렸다” 이날은 내가 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본 날이며 우리민족의 유혈을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어린 나의 가슴도 분노로 끓어 번졌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가 또다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양철통까지 두드리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었다.나도 형복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있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①무지개 비낀 만경봉 110∼119면 ②「세기와 더불어1」 30∼33면 ③같은책 36∼37면
  • “누가 시집 안가겠다나”(박갑천칼럼)

    상허 이태준(상하 이태준)의 단편 「결혼」에 나오는 주인공은 S.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하기 두어달 전에 혼담이 나온다.상대는 서울 재상가의 자손으로 일본가서 법률공부한다는 사람.재산가이기도 하다.그 말을 끄집어낸 어머니에게 S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시집가겠다나』 이 말은 「시집 안가겠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그런데도 제 방으로 건너가 수틀 잡은 손이 떨린다.아니,수틀이 떨린다.이럴 때의 「안가겠다」는 「가겠다」는 의사의 보다 강도높은 표현이랄 수 있다.한데,여학교가 아니라 대학을 나오고도 몇년이 지나도록 시집안간 요즘의 노처녀 딸들은 그 어머니가 꺼내는 혼담에 이렇게 대꾸한다. 『누가 시집 안가겠다나』 이 말은 「가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다.그러면서도 잡고 있는 커피잔이 떨리기는 커녕 여유있는 웃음을 흘린다.이런식 표현의 「가겠다」는 「안가겠다」는 의사표시보다 더 밉살스럽게 들리는 것이 어머니의 귀.딸자식의 이 「누가 시집 안가겠다나」로 고민에 빠진 어머니(아버지까지도)들이 많아져 가는 세상이다. 얼마전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이 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미혼남녀·기혼부인 1만1천2백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는데 「결혼하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좋다」는 항목에 11%가 응답한 것으로 나타난다.주목되는 것이 여성쪽 반응.「안하는 것이 좋다」에 14.1%가 찬성함으로써 남성(7.6%)보다 2배정도 부정적 시각임을 보여준다.이보다 앞서 행해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의 조사결과는 조사대상이 젊었던 만큼 더 놀라운 숫자.「결혼을 꼭 할 필요는 없다」에 10대 여성은 60%,20대 여성은 54.9%가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10대·20대의 생각이 고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생각이 그렇다는 것뿐 여건따라 세월따라 대부분은 결혼행진곡을 밟게 될 것이다.그렇기는 해도 노처녀 직업여성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고(35세이상 독신녀는 85년 3만7천명에서 90년 7만6천명=통계청 발표),그런 딸을 둔 어버이 마음에는 그늘이 드리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수의 철인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결혼하라,후회할 것이다.결혼하지 말라,후회할 것이다.결혼하든 안하든 후회할 것이다』.약여하게 풍기는 비관론.오늘의 지각결혼 내지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이같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때문이라 할 수야 없겠다.여성의 경제적·사회적 능력향상 등 시대적 변화와 더 연관되고 있다하면 몰라도. 결혼에 후회만 따르는 건 물론 아니다.이승을 이어가야 할 섭리의 뜻이 또 결혼 아니던가.인간의 참모습은 결혼않은 위인보다는 결혼하며 사는 범인쪽에서 찾아지는 것 아닐지.
  • 그리운 옛친구/김금지 연극배우(굄돌)

    그동안 살기 바쁘고 힘들고 내가 신경 써줘야 할 식구들.그러니까 내 아이들 남편 가게식구들,또 진돌이 똘똘이 쭈쮸들 때문에 여학교때 친구나 국민학교 때 친구들을 정식으로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가끔 연극공연때,여학교때 같은반이었던 친구들이 분장실로 찾아오면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안돼 「반갑다」란 말만하고,손 마주잡고 몇번 흔들고 헤어지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언제 팍 퍼질러 앉아 친구들과 옛날얘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내나이 또래가 즐기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큰마음 먹고 지난주에 여고동창들이 모이는 곳을 갔었다. 처음이라 손님처럼 어설픈 웃음을 띄면서 들어서는데 마흔명쯤되는 친구들이 『야! 금지왔다』하더니 그동안 가끔 만났던 김문자가 『금지야! 임광자 찾아봐!』하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 반가워서 『임광자 왔어?어디?어디?』하면서 국민학교 4학년때 단짝이던 예쁜 얼굴을 찾느라 두리번 거렸다. 곧이어 『나야!』하고 임광자가 나섰고 우리 둘은 이내 얼싸안았다. 국민학교 3학년때 전학해 낯설어하던 나를 임광자는 포근하게 감싸주었고 둘은 그림자 처럼 붙어 다녔었다. 그러다가 뭐가 삐죽했는지 학년바뀐뒤에는 멀어졌는데 몇십년동안 가끔 『임광자는 뭘하고 있을까? 나를 생각할까?』생각했었다.어쩌다 만나는 동창들에게 소식을 물어보면 대학졸업후 결혼해서 곧바로 미국이민을 갔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토록 보고싶던 광자를 이 자리에서 만나다니! 난 복권추첨된 기분으로 마주앉아 40년의 세월을 뛰어넘느라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고 광자는 『미국에서 내내 신문이나 잡지에 너 나오면 남편에게 『내 친구야! 친한 친구야! 했었어? 꿈에서도 너 봤어!』했다. 굉장한 대접을 할수 있을줄 알았는데 광자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결국 『남편이야기』가 고작이었다.내 책 한권 받아들고 그 애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후 난 지난주 내내 행복했고 슬펐다.내가 그리워 했던 만큼 나를 생각했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서러운지……. 괜히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조씨들 종노릇 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고… 나 내친구 임광자 만났단말야』하는데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졌다.
  • 그것은 강제로 당한 일이다(사설)

    징용을 피해서 시골에 숨어 있었던 아버지 아저씨들의 이야기나 「정신대로 끌려갈까봐」혼기도 안된때 억지로 시집보내진 고모나 이모,언니이야기는 우리네 집안마다 다 있다.여학교에 다니던 딸을 억지로 데려다가 결혼시켰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아주머니들이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그때의 한을 옛이야기처럼 예사로 하고 있다. 그런 일반론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가운데서 실제로 강제로 끌려가 「필설」로 다할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당사자들이 증언도 하고 있다.이렇게 많은 증언과 증거와 정황이 있는데도 종군위안부 문제가 『강제성을 띠었었다는 내용을 뒷받침할수 없다』는 것이 이번에 일본정부가 발표한 조사자료의 내용이다. 언중에 종군위안부는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며,가혹행위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가 감춰져 있다.그러니까 지금 촉구되고 있는 전쟁중 식민지 민족에게 가했던 강제행위에 대한 보상의 문제는 아직도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인것같다. 일본정부가 이름붙였듯이 이것은 「종군 위안부 진상조사」다.진상조사란,그것이 어떤 진상이든 가해측과 피해측의 진술이 충분히,다함께,형평하고 공정하게 조사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그러나 이것은 가해자가 스스로의 허물을 최소한으로 축소해서 작성해놓은 것만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피해자의 피해내용을 판단하고 있다.그런것은 『진상』일수 없다. 하다못해 양심있는 일본의 시민들이 찾아낸 자료들이라도 참고로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수 있다.일본의 여성단체가 펴낸 「종군위안부 증언집」에만도 어떤 명목으로 「조선의 딸」들을 끌어냈는지 증언되어 있고,어떻게 비참한 상태로 끌려와 얼마나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 취급속에 유린되었는가가 진술되고 있다.그 진술들이 모두 가해 당사자들이 술회한 것이다. 이런 명백한 증언과 기록도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상일수 있는가.자료로 모아졌다는 1백27건중에 경찰청과 노동성것은 단 한건도 없다.그것도 우리에게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그칠만큼 위력이 있었던 일본의 경찰에 의해 조선은 다스려졌었다.징용이건 정신대건 「칼찬 순사」들이 나타나 끌고 갔었던 것을 우리는 다 기억하고 있다.절묘하게 증거를 인멸했거나,어떤방향과 어긋나기 때문에 채택이 안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종군위안부문제는 민간단체가 한일일 뿐 정부로서는 아는바가 없는 일이라고 잡아떼던 일본정부가 이만큼이라도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한 것은 진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긴하다.그러나 일본군의 민간에 대한 피해행위를 단속하기 위해 부득이해서 위안설비를 갖추게 했다는 식의 어떤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이번 발표가 갖는 의미인 것같다. 우리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이런식으로 진을 빼가며 상대가 지쳐서 손을 들기를 꾀하는 그 집요함이다.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별로 득이 될것은 없을 것이다.증인은 아직도 너무 많고 언제 어디서 은폐되었던 자료들이 튀어나올지 알수 없는 일이다.인정할것은 인정하고 치를것은 치르고 끝내는 일이 훨씬 현명한 일임을 충언해둔다.
  • 「보훈의 달」의미 되새기는 「호국 할머니」오금손여사(이사람)

    ◎「반공강연」 22년간 4천61차례/독립군 유복녀… 「군번없는 간호장교」로 6·25 참전/“「무조건 통일」 주장하는 젊은이들 안타까워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우리들입니다.더욱이 북한의 집요한 남침위협속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참혹상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독립군 유복녀로 태어나 광복군생활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오금손여사(62·대전시 중구 산성동 우성아파트 107동 910호)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거리낌 없이 나부끼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무조건 「통일」「통일」하는데 저들을 잘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다.하기야 국민의 70%가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북한공산당의 잔학상이나 기만성을 알 리가 없겠죠』 그래서 그런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아침 일찍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 집을 나서는 오여사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게만 보인다.오여사가 젊은 가슴을 향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3월 대한상이군경회로부터 호국의식계도 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오여사는 호국강연을 그때부터 22년동안 모두 4천61회나 했다. 『저는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유복녀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오흥삼)는 제가 태어나던 해 왜놈들에게 체포돼 행방불명 되셨고 어머니(이봉녀)는 저를 낳은지 1주일만에 왜경들에게 끌려간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저는 14살때까지 중국군 장군의 수양딸로 자라다 15살때인 1944년3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덕씨를 따라 독립군본부에 들어가 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오여사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그러나 서울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던가 봅니다.당시 청진동에서 순천병원을 개업한 양근섭씨가 오갈데 없는 저를 양녀로 삼아 1년후에 개성간호전문학교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스무살이 되던 1949년3월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오여사는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안가서 하늘과 땅이 통곡한 6·25가 터졌다. 『그때 저를 비롯해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24명이 모두 간호장교(소위)로 자원입대했습니다.군번은 없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팔뚝에 배치부대이름인 「백골부대」란 문신을 새겼습니다』 야전병원엔 연일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의약품이라곤 다이아진과 압박대 뿐이었다. 휴전무렵 금화지구전투에서 오여사와 친구 한명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인민군부대에는 1백50여명의 양민들이 불잡혀 있었다.인민군들은 한 여학교 교사를 국방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면도칼로 가죽을 벗겨 살해했다.오여사의 친구는 국방군의 위치를 대지 않는다고 젖무덤을 도려내 살해했다.붙잡힌 양민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갔다.오여사도 손톱과 발톱 이빨을 모두 뽑혔다. 오여사는 54년봄에 서울로 왔다.냉차장사·화장품장사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돈이 조금 모이길래 윤락여성과 탈선청소년들의 선도일에도 간여했다. 오여사는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 82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내려갔다.그곳에 「독립군 정양원」을 건립,상이군경과 독립유공자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90년 11월 호국영령들이 묻힌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온 오여사는 지난해 7월엔 중국을 방문,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3개월간 호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거의 매일 강연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영령들이어 고이 잠드소서』 호국강연을 하기위해 발길을 돌리는 오여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1백만 관동군에 「정신대」 8만 동원/일 여성단체서 증언집 발간

    ◎조선인위안부 「기모노」입혀 위장/“군수공장 취직” 구실… 한번에 2천명씩 만주로 일본의 여성단체들이 지난 1월 개설했던 직통전화 「종군위안부 110번」에 걸려온 제보를 토대로 증언집을 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전후 책임을 확실하게 하는 모임」「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종군위안부 우리 여성 네트워크」「재일 한국 민주여성회」등 일본 여성단체들은 직통전화에 걸려온 제보 2백35건을 토대로 4개월에 걸쳐 제보자와 직접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거나 추적조사를 벌인후 그 내용을 책자(1백88쪽)로 엮어 냈다. 이 책자에 담긴 일부 증언내용은 다음과 같다(증언자들은 당시의 직책). ▲군의(78세)=1940년 관동군 사령부 조선후방부대에서 사령부의 가족과 보급감부의 진료를 담당했다. 「관동군 여자특수군속 복무규정」이라는 두꺼운 규정서는 위안부의 취급에 대해 상세히 규정해 놓고있다.여자 특수 군속이란 조선인 위안부를 말하고 있다. 규정서에는 이들에게 월 8백엔의 급료 지급과 함께 피복·침구·화장품등을 대여하도록 하고 있다.관동군 보급감부는 위안부의 「보급」업무도 맡고 있다. 철도로 여자들을 운송했다.보통 열차 한칸에 2백명씩,10칸의 화차를 통해 2천명을 한꺼번에 운송했다. 만주철도의 열차는 넓어 열차 자체가 「팡팡열차」(위안소)가 되기도 했다.국경군은 「팡팡열차」를 일정한 기간까지 두도록 명령서를 시달했다.국경의 숙박업소들은 모두 관동군의 위안소가 되어버리고 민간집까지 접수해 「팡팡 숙」(위안소)를 만들었다. 당시 전 중국 해남도까지 위안부의 수는 8만명,관동군 수는 1백만명이었다.성병에 걸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일요일 외출시에는 「돌격 1번」(콘돔)을 지급했다. ▲경비대원(75세)=1938년 중국 양자강 상류의 악주(현재 악양)에서 철도 경비부대에 근무했다. 위안소에는 일요일만 갈 수 있으며 병사 한사람이 대부분 5,6분정도 위안소에 머무를 수 있었다.위안부 한사람당 하루 20명 정도의 병사를 상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안부의 식사는 부대의 취사병이 만들어 보냈다.중국인 위안부는 중국옷을,조선인은 일본인 옷을입고 있었다. ▲통신 교육대원(73세)=나는 1944년 만주 흑용강성 부금에서 근무했다.거기에는 18∼20세의 조선인 위안부 20명이 수백명의 병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한사람의 조선인 위안부를 도망시킨 일이 있다.그녀는 경성고전 여학교를 졸업한 18세 처녀였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고관으로서 학교에서는 관동부 사령부 근무를 약속했다는 것이다.「관동군 전시 특별 여자 정신대」라고 했으나 실제로 와보니 위안부였다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마침 고열로 앓고 있어 호위헌병을 불러 「결핵」이라고 말해 해방시켰다. 조선인 여성은 경성역에서 2천명이 모여 열차에 태워져 만주의 신경에 하차 시켰다.거기서 20∼30명씩 나누어 다시 열차에 태워 각 지역으로 운송했었다. ▲국민학교 교사(71세)=1929년 8세때 부모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 전라북도에서 소학교(국민학교) 교사를 했다. 조선에서 3번째 근무지인 이리의 일출소학교에 있을 때 교장의 명령에 따라 8명의 제자(13세)를 여자정신대로서도미야마(부산)현의 군수공장에 보냈다. 당시 지시는 집안이 가난하고 몸이 튼튼한 어린이를 선발하도록 했기 때문에 수업료를 못내는 어린이 집을 방문,부모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정신대로 보내진 8명은 「심신이 모두 상처를 입어 사람들앞에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확실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종군위안부를 의미한 것으로 알았을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 겨울방학(사설)

    초중고교가 방학에 들어갔다.이미 종강을 하고 시험도 끝낸 대학에 이어 각급학교가 다 방학에 들어간 셈이다.그런대로 낮시간을 학교에 의존해 있던 때와 달라 고삐풀린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방황하기 쉬운 계절이다. 특히 겨울방학은 시작하자마자 크리스마스와 접근해 있고 연말년시의 흥청거림과 맞물려 있다.사춘기의 청소년에게 유흥과 환락의 유혹같은 것이 도처에 함정을 파놓고 대기중이고 어린이는 그 희생의 표적이 되는 위험앞에 노출된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학교조차도 안심할수 없도록 위험하고 오염되어 있다.10살미만의 국민학교 여자어린이가 수업도중 화장실에 드나드는 일조차 마음놓고 다닐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여학교에서는 방과후에 교실에 남아있는 일도 위험해서 학교측에서는 집으로 쫓아야 하고 부모들은 자식들을 등하교에 「호송」해야 할 지경이다.학교주변 폭력배의 극성은 하도 흔해서 안당해본채 초중고교 과정을 끝내기 어려울 지경이다. 더욱 가슴아픈 것은 이들 피해자가 다 우리의 자식들이듯이 그 가해자 또한 같은 또래의 우리 자식들이라는 사실이다.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비행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일도 방지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아이들이 가해자가 됨으로써 피해자가 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는 점이다. 방학은,특히 거리에 캐럴송이 넘치고 현란한 장식등이 명멸하는 이런 계절의 방학은 젊은이의 크고 작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것에의 동경을 충동하기에 절호의 기회가 된다.더구나 말귀를 알아들을수 있는 유년기부터 시작되다시피 하는 「대학입시」의 강박관념에서 일시적으로 놓여난 10대들이 억압에서의 반작용으로 겉잡을수 없이 분방해져 버린다. 그들의 그 겉잡을 수 없는 봇물을,해악으로 증폭시키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악덕한 상업주의 또한 오늘날처럼 극성스러운 시대도 없었다.이른바 「영계술집」같은 「인면수심」이 어른들중에 너무 많고 만화가게,오락실,비디오,디스코텍에 이르는 공해오염지역이 여염집 담과 맞붙어 있어서 격리가 불가능한 형편에 놓여있다. 그렇다고 「공부」로만 얽맨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어른들이 먼저 사회악을 줄이는데 적극적이어야 하고 좁게는 자식들로부터 부도덕하거나 나태하거나 부정직하다는 혐의를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그리고 독서,대화,이해심같은 어른다운 정성을 기울여 예방과 선도를 해야한다.내아이가 「피해를 당하지 않는」수준에서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피해를 예방하는 정도의 적극성을 가지고 노력해야만 한다.가장 확실한 방법은 건강하고 건전한 관심과 지식,흥미를 유도하여 자생력을 길러주는 길이다.자식을 빗나가지 않게 잘 기르는 일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이고 의미임을 거듭 생각해보아야 할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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