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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즈음 남산에 가보셨나요?

    서울의 한복판인 중구 회현동 1가에 자리잡고 있는 남산공원은 다양한 군상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남산은 도심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서울 어디서든 눈에 잘 띄지만, 정작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KBS 1TV는 13일 오후 10시 ‘다큐멘터리 3일-2007 남산 늦여름’에서 남산에 직접 가 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특별한 추억과 즐거움을 소개한다. 남산의 하루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운동을 하는 시민들로부터 시작된다.2005년 5월부터 산책로에 차량 진입을 막은 덕분에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들도 눈에 많이 띈다. 직장인 넥타이 부대는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이곳을 찾아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동료들끼리 고민도 나눈다. 주말이면 동호회 모임이나 연인들, 가족 나들이객의 발길이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남산은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다.특히,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관광객들이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남산을 많이 찾으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돌계단이나 평지로 잘 닦여진 산책로,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 이와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팔각정, 백범광장 등은 도시민들의 휴식과 여가의 공간으로 복잡한 도심 속의 편안한 쉼터가 된다. 급변하는 서울의 중심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산. 어떤 이에게는 빛바랜 과거를 회상하는 장소이고 어떤 이에게는 오늘도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다.3일 동안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남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본다.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문화플러스] 12월23일까지 ‘성찰과 비전 아카데미’

    미래사회와종교성연구원은 ‘성찰과 비전 아카데미’를 12월23일까지 서울 동소문동 인권연대 교육장, 민주화기념사업회 교육장 등에서 진행한다. 최정윤 씨알아카데미대표의 ‘시대의 빛-씨알 함석헌 생애와 사상’,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온생명과 인류 문명의 진화’, 평화예술감성연구소의 ‘행복충만 청소년-가족 숲속 마음풀기캠프’ 강좌와 체험프로그램으로 짜여진다.(02)396-2220.
  • “메뚜기 잡으러 한번 들러주세요”

    ‘메뚜기가 뛰면 친환경 쌀이 날개를 단다?’가을을 맞아 전국 농촌 들녘에서 ‘메뚜기 잡기 체험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해당 자치단체들이 지역의 청정 이미지 및 친환경 쌀 홍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경북 영덕군은 오는 18∼20일 3일간 병곡대 영리 일대 친환경 무농약 쌀 생산단지 12㏊에서 ‘메뚜기 잡기 체험행사’를 연다. 메뚜기 잡기 행사를 비롯해 허수아비 작품 전시 및 제작, 소망 풍선 날리기, 무농약 쌀 시식, 즉석 메뚜기 튀김 맛보기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준비돼 있다. 군은 즉석에서 무농약 쌀 홍보와 판매, 구매 계약으로 우수 고객을 확보할 계획이다. 경북 울진군도 송이축제 기간인 28∼30일 3일간 근남면 수산리 친환경 벼농법 특수재배단지 3.5㏊에서 메뚜기 잡기 체험 행사를 마련, 울진 무농약·유기농 쌀을 홍보한다. 인근 왕피천 EXPO에서는 친환경 농산물 직거래 장터와 고구마 캐기 수확 체험행사가 열린다. 경북 의성군도 10월11일 청정 황토쌀 재배단지인 구천면 미천리, 안계면 용기리 들판에서 메뚜기 잡기 체험 행사를 연다. 벼 수확 및 탈곡·도정 체험 행사와 2007m 가래떡 뽑기, 오리·아기돼지·미꾸라지 잡기, 소달구지 타기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곁들여진다. 경북 도내에서는 이밖에 포항시와 고령군이 다음달 중순쯤 구룡포읍 성동리, 쌍림면 하거리 친환경 농업지구 일대에서 각각 메뚜기 잡기 체험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충북 단양군은 오는 30일(잠정) 대강면 괴평리 들판에서 ‘메뚜기 잡기’ 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올해로 3회째다.1인당 참가비 6000원을 내면 마을 논에서 메뚜기를 잡고 고구마를 캐서 현장에서 구워 먹을 수 있다. 점심 밥은 덤이다. 강원 횡성군도 다음달 6일 횡성읍 반곡리 일원에서 허수아비축제와 함께 메뚜기잡기 행사를 열어 청정쌀 홍보와 함께 도시인들에게 시골 정취를 느끼게 할 계획이다. 주민과 도시민들이 함께하는 족구 및 떡 만들기 대회도 열린다. 경기 파주시는 같은 달 6∼7일 문산읍 사목리 임진각 광장에서 메뚜기 잡기 체험행사를 곁들인 ‘파주 농산물축제’를 연다. 시·군 관계자들은 “메뚜기는 우렁이농법과 오리농법, 쌀겨농법 등 친환경 벼 재배를 한 곳에서 서식한다.”면서 “메뚜기 잡기 체험 축제가 지역 홍보와 농가소득 증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밥으로 철책선 허문다… ‘통 큰 경협’

    밥으로 철책선 허문다… ‘통 큰 경협’

    지금의 거대 유럽연합(EU)은 지난 1952년 독일·프랑스 등 유럽 12개국이 창설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모태였다. 이것이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를 낳았고, 이는 다시 EU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경제통합을 수단으로 정치통합을 이룬 전형적 사례다. 10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집권시 대북정책으로 천명한 ‘남북경제공동체 협력 협정’(Korean Econ omic Community Cooperation Arran gement) 체결 구상은 즉각적으로 ‘EEC→EU’ 모델을 연상시킨다. 용어는 물론 ‘밥’으로 ‘철책선’을 허물어뜨린다는 발상 자체가 유사하다. ●한국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적용 과거 유력 대선 후보들의 대북 구상이 대부분 정치적 접근을 골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후보의 구상은 이례적인 측면이 있다. 이 후보로서는 자신의 ‘전공’인 경제를 대북정책 청사진으로 삼은 셈이다. 내용도 ‘이명박스럽게’ 저돌적이다. 벌써 400억달러의 국제협력 자금 조성 등 구체적 방안을 거론한다. 지난 2월 ‘비핵개방 3000구상’을 내놓으면서 “10년 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던 자신감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진다. 혹자는 “한국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하겠다는 뉘앙스가 풍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후보의 이런 구상은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해 온 대북경협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 후보측은 “현재의 대북경협이 일회성·일과성·소모성이라면,KECCA 구상은 시스템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처럼 찔끔찔금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경제구조를 아예 통째로 바꿔 놓겠다는 발상이다. ●북한 전면개방이 선결 과제 하지만 이 후보가 이런 포부를 펼치려면 김정일 정권이 전면 개방을 결단해야 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 경제특구가 제한돼 있는 것도 체제불안을 우려하는 북한 정권의 몸사리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이 후보의 대북정책 핵심 브레인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미간 화해무드로 평화협정이 체결돼 체제 안전을 보장받을 경우 북측이 경제성장을 위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US오픈] 페더러, US오픈 완전정복

    무대는 뉴욕 국립테니스센터 아더 애시 코트. 주연은 세계 1위의 로저 페더러(26·스위스), 조연은 3위 노박 조코비치(20·세르비아). 미국테니스협회와 남자프로테니스(ATP)가 공동감독을 맡은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은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의 대미를 장식했다. 결과는 페더러의 3-0 완승. 그러나 ‘연기 평점’에선 둘 모두 10점 만점이었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더러가 10일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우승상금 140만달러(13억 1300만원). 앞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린 US오픈 시리즈대회 종합우승 보너스 100만달러(9억 4000만원)까지 합하면 그가 이번 대회 쓸어담은 돈은 무려 22억 5000만원. 프랑스오픈을 제외하고 2년 연속 한 시즌 메이저 3승을 챙긴 페더러는 지난 1920∼25년 대회를 내리 석권한 윌리엄 틸덴(미국) 이후 82년 만에 US오픈을 4년 연속 제패한 선수가 됐다. 그러나 1968년 오픈대회가 된 걸 감안하면 사실상 대회 첫 4연패 기록이다. 페더러는 또 12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 피트 샘프라스(미국)의 14회 최다 기록에 이어 로이 에머슨(호주)과 함께 메이저 다승 2위가 됐다. 10회 연속 메이저 결승에 진출한 그의 전적은 12승2패. 개인 통산 투어 우승컵은 51개째다. ‘황제’다운 관록의 연기가 빛난 한 판.5-6,0-40의 위기에 몰린 1세트 페더러는 무려 5차례의 세트포인트 위기를 조코비치의 범실을 타고 승기를 거머쥐더니 2세트 1-4의 열세도 능란하게 극복, 두번째 반전을 일궈냈다. 무려 7차례의 세트포인트를 살리지 못하고 맥이 빠진 조코비치를 상대로 페더러는 3세트 막판 종지부 찍듯 서브게임을 빼앗으며 2시간26분에 걸친 드라마를 모두 끝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뉴욕 뉴욕’이 흘러나오는 동안 페더러는 경기 내내 굳게 다물었던 입을 비로소 뗐다.“나의 그랜드슬램대회 성과는 타이거 우즈의 그것보다 더 높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무중력 세계서 자유와 꿈 찾았어요”

    “무중력 세계서 자유와 꿈 찾았어요”

    |오스틴(미국 텍사스주) 김효섭특파원|8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인근의 버그스트롱 공항에서 보잉 727 비행기 한 대가 아름다운 꿈을 안고 힘차게 하늘로 올랐다.‘제로G(Zero Gravity)’라고 이름 붙여진 이 비행기는 우주의 무중력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수 비행기. 지상 10㎞ 상공에서 포물선 비행을 하면서 화성(지구 중력의 약 3분의1)과 달(약 6분의1), 우주공간(0)의 중력을 차례로 경험해 볼 수 있다. 예전엔 우주비행사 등 극소수의 사람들만 무중력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제로G의 탄생으로 일반인들도 우주에 나가지 않고 이를 느껴볼 수 있게 됐다. 올 4월에는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체험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별한 비행기보다 더욱 특별한 사람들은 30명의 탑승자들이었다. 엔씨소프트의 ‘우주문화원정대’ 참가자들이다. 엔씨소프트는 오래도록 간직해온 자기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장애인, 청소년들을 주로 선발했다. 슬로건도 ‘꿈을 향해 나아간다.’로 정했다. 1시간여의 무중력 체험을 마치고 땅에 발을 디딘 김보경(21·여·지체장애 4급)씨는 “짧은 시간에 진짜 우주도 아니었지만 장애의 현실을 잊고 온 몸으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김씨는 4살이 돼서야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고 지금도 보통 걸음걸이 이상으로 달릴 수가 없다. 참가자 중 최연장자인 강찬금(66) 단국대 체육학과 명예교수는 “나이가 많아도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절 항공소년단에 들어갔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하늘에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강 명예교수는 1991년 특전사 고공훈련을 받는 등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세계적 산악인 박영석(44)씨도 원정대에 합류했다.“자라나는 청소년이 꿈을 키우는 것이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에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newworld@seoul.co.kr
  • [女談餘談] ‘백’과 ‘네트워크’/김균미 경제부 차장

    연예계 최고의 ‘마당발’로 통하는 박경림이 자신의 인맥 관리 노하우에 대해 강연을 한다고 한다. 그녀가 털어놓을 비법이 어떤 걸까 궁금해진다. 주위에서 휴대전화에 많게는 수백명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다니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1년에 한번도 통화하지 않는 사람이 절반도 넘지만 선뜻 지우지도 못한다. 아깝기 때문이다. 얼마전 채용정보사이트들이 직장인과 대학생을 상대로 성공전략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NQ(네트워크지수·인맥지수)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네트워크 관리에 대한 관심이 연령에 관계없이 매우 높다는 방증이다. 네트워크를 다르게 표현하면 뭐가 적당할까. 언뜻 ‘백’,‘연줄’,‘인맥’ 등이 떠오른다.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사람들간 관계를 지칭한다. ‘백그라운드(background)’에서 온 ‘백’과 ‘연줄’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인맥보다는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백은 동원한다.’고 하고,‘인맥은 관리’하며 ‘네트워크는 구축’한다고 한다. 굳이 백과 네트워크 차이를 따지면 이를 활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인맥을 승진이나 이권 등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면 흔히들 ‘백’이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모자라 불공정 경쟁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다. 반면 사회 현안이나 문제를 긍정적으로 개선하려고 이용한다면 네트워크라고들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신정아 사건’이나 부산의 김상진씨 사건은 백과 인맥을 부적절하게 동원한 사례다. 하지만 백이나 네트워크는 솔직히 경계가 모호하고 구분 기준도 극히 주관적이다. 때문에 경계선을 넘기 쉽다. 네트워킹 능력은 분명 개인의 중요한 자산이고 키워나가야 할 덕목이다. 그렇다고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한 네트워크를 구축·유지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받기만 하는 일방적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변질될 우려가 많다. 책상에 쌓여있는 명함들을 보면서 나의 NQ지수는 얼마일지, 또 건강한지 자문해본다. 김균미 경제부 차장 kmkim@seoul.co.kr
  •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 금강초롱꽃, 외국유래 학명붙은 사연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 금강초롱꽃, 외국유래 학명붙은 사연

    어떤 물건의 모양을 꼭 빼닮아서 붙여진 식물이름이 많다. 금강초롱꽃도 그런 식물명 가운데 하나인데, 청사초롱을 닮은 꽃이 피어서 초롱꽃이고,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서 금강초롱꽃이라 부른다. 우리말 이름은 이처럼 논리적으로 잘 지어진 예쁜 이름이지만 금강초롱꽃의 학명, 즉 라틴어 이름에는 치욕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금강초롱꽃이 처음 발견된 것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시절로서 식물을 연구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전무한 시기였다. 조선총독부의 촉탁 자격으로 한반도의 식물을 연구하던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가 발견하여,1909년에 신종으로 발표했다. 처음에는 기존의 심판드라(Sympandra)속(屬)에 속하는 새로운 식물로 발표하였지만 다시 곰곰이 관찰한 결과, 이 식물은 심판드라속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속의 식물과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잎의 달리는 모양이 초롱꽃속이나 잔대속 식물들과도 달랐다. 그래서 2년 뒤에 금강초롱꽃이 속하는 새로운 속인 금강초롱꽃속을 다시 만들어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식물의 특징을 반영하여 새로운 라틴어 속명을 붙였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여기에 정치적인 의도와 사사로운 감정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초대 조선총독인 하나부사를 기리는 의미로 금강초롱꽃속의 새로운 속명, 하나부사야(Hanabusaya)를 지은 것이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식물을 연구하던 나카이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강초롱꽃의 라틴어 학명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종소명이 아시아산(産)을 뜻하는 아시아티카(asiatica)라 붙여진 것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산지를 표시하려면 한국산이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굳이 아시아산이라고 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본산이라는 뜻으로 종소명을 붙이기에는 찜찜하고, 한국산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해볼 따름이다. 금강초롱꽃은 우리나라 특산종이고, 금강초롱꽃속은 우리나라 특산속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속의 이름이 일본인 이름, 그것도 조선총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은 참으로 불쾌한 일이다. 역사성, 과학성, 합리성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 식물의 학명이므로 지금에 와서 우리 학자들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식물 연구에서도 주체를 강조하는 북한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였던 모양이다. 북한은 금강산 묘길상 부근의 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등 특산식물인 금강초롱꽃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하나부사야속을 극복한 방법은 코미디에 가깝다.1976년에 금강산이아(Keumkangsania)속을 새로 만들어 금강초롱꽃속의 라틴어 속명으로 쓰고 있는 것인데, 학명을 붙이는 국제적인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어서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금강초롱꽃은 초롱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초롱꽃속이나 잔대속의 식물들과는 달리 줄기에 나는 잎이 줄기 중앙에 4∼6장씩 모여서 달리므로 구분된다. 줄기는 높이 30∼90㎝이며,8∼9월에 피는 꽃은 길이 4∼5㎝, 지름 2㎝쯤으로 밑을 향한다. 경기도의 유명산·화악산·명지산·강원도의 치악산·오대산·설악산·북한의 금강산 등 우리나라 중부 지방의 높은 산에만 사는 희귀식물로서 세계적인 보전가치가 높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 [현장 행정] 구로구 ‘가리봉동 개명작업’

    [현장 행정] 구로구 ‘가리봉동 개명작업’

    구로공단역, 공단로에 이어 가리봉동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구로구의 공단 잔재 털어내기 행보의 하나이다. 디지털단지 조성과 대규모 재개발 사업에 이어 ‘공돌이’,‘공순이’,‘쪽방촌’ 등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가리봉동의 명칭 변경 작업이 한창이다. 구로구는 5일 과거 구로공단의 회색 이미지와 낙후되고 영세한 가리봉동의 지역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가리봉동의 명칭 변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주민 의견을 수렴한 이후 구의회 지명위원회가 조례안을 만들어 의회를 통과하면 명칭 변경은 마무리된다. 구 관계자는 “가리봉동이라는 이름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어 함부로 없앨 수는 없지만, 가리봉동이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디지털단지를 지원하는 첨단 배후도시로 바뀌는 데다 명칭 변경을 바라는 주민들도 많아 명칭 변경 절차를 밟게 됐다.”고 말했다. 가리봉동의 유래는 ‘가리’에서 찾고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으로 구로구의 전체 땅 모양이 바짓가랑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과 연관된 이름으로 보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는 가리봉동은 그동안 ‘쪽방촌’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지역간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는 서울시 방침에 따라 2003년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개발 청사진이 그려졌다. 사업시행자인 주택공사가 현재 세부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계획에 따르면 기존 가리봉동은 전면 철거된다. 개발이 완료되면 29만㎡ 규모에 호텔과 컨벤션센터, 연구개발(R&D)센터, 주상복합시설 등이 들어서 인근 디지털단지를 지원하는 배후도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구는 16일까지 공모전 홈페이지(www.planin.kr)와 우편으로 가리봉동의 새 이름을 공모하고 있다. 지역 주민에게 호감이 가며, 가리봉동의 인문·사회·문화적 환경 등이 반영되는 이름을 추천했다. 이에 앞서 지난 7월에는 공단로(구로3동 디지털단지 일대)도 ‘디지털단지로’로 명칭이 변경됐다. 공단로는 구로공단의 형성과 함께 붙여진 이름이다.1967년 수출산업공업단지로 출발해 얻은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첨단 디지털단지로 변신을 추진해온 수출산업공업단지(구로공단)는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바뀌었다.2004년에는 지하철역(1호선)의 이름도 ‘구로공단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꿨다. 공단에서 디지털단지로 변한 이곳은 현재 첨단 기업 7000여개가 입주해 대한민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려지고 있다. 구는 디지털단지로의 명칭 변경을 기념해 다음달 ‘구로문화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축하행사를 연다. 구 관계자는 “주민 대부분이 가리봉동의 명칭 변경을 희망하고 있어 조사 대상 주민의 3분의2가 찬성해야 하는 변경 절차를 통과하는 데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구로구의 명칭 변경 -2000년 12월 수출산업공업단지(구로공단)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 변경 -2004년 4월 지하철 역명 변경(구로공단역→구로디지털단지역) -2007년 7월 공단로가 ‘디지털단지로’로 개명 -2007년 9월 가리봉동 개명 추진
  • [문화마당] 베이징에 다녀와서/신경숙 소설가

    중국인민문학 출판사에서 ‘외딴방’이 번역되어 나온 것을 계기로 베이징을 다녀오게 되었다. 박완서 선생, 은희경 작가와 함께였다. 중국에 아직 한국문학이 다채롭게 번역되어 있지는 못하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에겐 일찍이 번역되어 중국 대중들에게 많이 읽힌 인터넷 소설을 쓰는 귀여니나 ‘국화꽃 향기’ 정도가 한국작가이고 한국문학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중국에서 대표성을 지니는 출판사에서 이번 베이징에 간 세 작가의 ‘그 남자네 집’‘새의 선물’‘외딴방’이 동시에 출간된 것은 뜻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이 이룬 성과이기도 하다. 겉보기에는 중국이 거의 자본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내부 깊숙이 들어가면 사회주의의 큰 통제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한 계기가 되었다. 최근 들어 한국에 중국문학이 봇물 터지듯 번역되어 나오고 작품의 질도 상당한 수준을 이루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나로서는 사뭇 새로운 경험이었다. 중국소설의 대부분(번역되어 있는 것밖에 읽을 수 없긴 했으나), 특히 비판적인 어조로 쓰여진 작품들이 당대의 중국 현실을 피하고 문화혁명 때의 시기가 초점이 되는 것이 나에겐 늘 의문이었다. 그것이 고도의 정치적 통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어내면서 의문이 풀렸다. 작가가 작품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건 작가로서의 권리이며 의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비판의 한계선을 작가의 고민을 통해서가 아니라 중국 당국이 정한다는 느낌이었다. 번역 작업이 다 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명나라 적장을 호감 있게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출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이상하기도 하다, 대국의 속이 그렇게나 좁을까, 싶었는데 그 또한 중국사회가 고도로 발달된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것을 감안하고 나니 나름의 이해가 생겼다. 세세한 이야기는 해 볼 수 없었지만 중국 태생이면서 프랑스로 건너가 불어로 소설을 쓰는 샨사라든가 미국에서 역시 영어로 작품을 쓰는 하진이라는 중국작가들을 중국내의 현역작가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샨사나 하진이 그들의 조국이랄 수 있는 중국에서 작품으로 소통되는 것이 얼마간 통제받고 있다는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몇해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오싱젠도 우리는 중국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중국내에서는 프랑스 작가로 여기고 있었다. 중국사회의 통제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특히 하진의 작품을 읽어보면 지금의 중국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많다. 이렇게 다른 나라로 나가야만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중국작가의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그동안 광대한 스케일의 중국작품을 읽으면서 가졌던 은근한 두려움이 슬쩍 삭감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새삼 그냥 단순하게 평가해서 어떤 이야기를 쓰든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고마움 같은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베이징은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었다.88년도의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베이징도 어딜 가나 건물을 신축하고 길을 새로 내느라 분주했다. 그 와중에 오래된 것들이 낡았다는 이유로 무너지고 있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대체 올림픽이 뭔데 저럴까 싶은 마음은 내 마음에 불과하지만 옛것을 마음대로 부수고 나서야 그 가치를 실감하는 건 베이징이나 서울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올림픽을 치르고 난 후에 베이징이 어떻게 달라질지 새삼 궁금해진다. 다른 건 몰라도 그때쯤엔 중국작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통제받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당대의 중국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하여 은근히 삭감된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복원되기를…. 신경숙 소설가
  • 서산서 천수만 철새기행전

    ‘2007 서산천수만 세계 철새기행전’이 10월26일부터 한 달간 세계적 철새도래지인 충남 서산시 부석면 일원에서 열린다.축제 기간에 국내외 조류의 생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천수만 생태체험관’이 들어서고 타이완, 일본, 필리핀, 미국 등 국내외 철새탐조 축제를 소개하는 ‘철새 축제관’이 새롭게 선보인다.또 철새들의 겨울나기 현장을 망원경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 탐조대’가 간월호 주변 둑에 설치되며 국화전시회, 철새사진전, 철새 우표 전시회, 오카리나 연주회 및 풍물공연 등도 곁들여진다.서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생각나눔 NEWS] 건교부, 좌측통행 교통硏에 연구용역 의뢰

    “신체 특성이나 국제관례로 보아 우측보행을 해야 한다.” “혼란만 부추길 뿐 관습으로 굳어진 좌측보행을 지켜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치원·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규칙이 좌측보행이다. 하지만 왜 좌측보행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길들여진다. 최근 좌측보행이 일제의 잔재인 데다 교통체계와 맞지 않기 때문에 보행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한쪽에서는 86년 간 굳어진 관행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제도 변경을 반대한다. 정부도 나섰다. 지난 7월 국무조정실에서 관계부처 회의를 가진데 이어 건설교통부는 교통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의뢰하는 등 공식적인 연구·검토에 들어갔다고 4일 밝혔다.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보행 처음부터 좌측통행을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제인 대한제국 규정(가로관리규칙 제6조·1905년)에서는 보행자와 차마(車馬)통행을 모두 우측으로 정했다. 그러나 1921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도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42호)을 일본과 같이 좌측통행으로 개정하면서 좌측보행이 시작됐다. 우리 정부도 1961년 도로교통법을 만들면서 보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보행자는 좌측통행을 규정했다. 이 규정은 엄격히 보면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도로의 보행 방식이다. 그러나 보도 보행 방식이나 지하철 보행통로 등 교통시설까지 확대, 관습적으로 좌측보행의 원칙이 굳어졌다. ●“좌측보행은 일제 잔재” 우측보행을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신체특성상 90% 이상이 오른손잡이라서 우측 사용 빈도가 많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편하다는 점을 든다. 보도에서 차를 마주보고 걷는 것이 긴급 순간에 차를 피하기 쉬워 교통안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꼽힌다. 또 일제의 잔재를 없애는 동시에 국제관행에도 맞다고 주장한다. 회전문·국제공항게이트 등은 이미 오른쪽으로 돌고 있다. 서울 송파구는 지난달 ‘우측보행 실천운동 세부 추진계획’을 발표하는 등 86년 만에 우측보행 부활 운동을 벌이고 있다. 관내 공공기관 계단과 출입구, 성내천 등 주요 산책로 바닥에 우측보행 표시 및 안내판을 붙일 예정이다. ●“우측보행 되레 혼란만” 일상 생활에서 굳어진 관행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없는 곳에서 우측보행할 경우 운전자는 보행자의 뒷모습만 보고 운전하게 돼 되레 불안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통 시설이 좌측보행을 중심으로 설치돼 있어 새삼스럽게 보행 방식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체 특성상 오른손잡이에게는 반사 능력이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보행자가 마주치는 경우 좌측통행이 낫다고 주장한다. 보행 방식을 쉽게 바꿔 혼란만 가져올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굳어진 행동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행산(杏山), 탑산(塔山)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은 가옥과 곡식을 불태우고 도주했다. ●영원대첩(寧遠大捷)의 실상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한인(漢人) 포로를 풀어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를 통해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우리는 20만의 대군이다. 성은 분명히 함락될 것이다. 여러 관인들이 항복한다면 높은 관작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환의 회답은 간단했다.“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공격해 왔는가? 나는 성을 사수할 것이다.” 1월23일, 누르하치는 공격을 명령했다. 후금이 자랑하는 철기(鐵騎)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방패를 손에 쥔 경보병(輕步兵)들을 비롯하여 후금군 병사들이 성을 향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20만이라고 큰 소리치는 대병력이었다. 영원성의 원숭환 병력은 대략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병력 수만 보면 승패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성으로부터 홍이포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은 정확했다. 포탄은 벽력같은 굉음을 내며 돌격해 오는 누르하치 병사들의 대열 중간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도 쏟아지는 화살 앞에 나가 떨어졌다. 후금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1월24일, 누르하치는 전차(電車)를 투입해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지만 날은 춥고 땅은 꽁꽁 얼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후금군은 희생을 무릅쓰고 돌격을 계속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흥분했다. 그는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독려했다. 홍이포의 포탄은 누르하치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스물 다섯부터 전장을 주유했던 누르하치였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명군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연전연승했다. 거기에 철기의 기동력이 더해지면서 명의 오합지졸들은 후금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1619년 사르후 전이 그러했고, 이후 줄곧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홍이포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는 후금군의 신속한 기동과 병력의 집중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숭환은 그동안 상대했던 명군 지휘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영원성을 점찍어 성벽을 수축하고 군량을 비축해온 ‘준비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러 장수들과 혈서를 써서 수성(守城)을 맹세했다. 원숭환의 탁월한 영도 아래 만계(滿桂), 조대수(祖大壽) 등 부하 장수들도 선방했다. 연이은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누르하치는 병력을 거둬 심양으로 철수 길에 올랐다. 청실록에서는 유격(遊擊) 2명, 비어(備禦) 2명이 전사하고 500명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적었다. 영원성의 승리가 남긴 영향은 컸다. 이후 후금은 함부로 산해관을 넘보지 못했다.1641년(崇禎 14) 홍승주(洪承疇)가 송산과 행산전투에서 무너질 때까지 산해관 앞의 영원을 거쳐 금주(錦州)에 이르는 요새와 성채들은 후금의 서진(西進)을 차단했다. ●전투 부상 후유증으로 누르하치 사망 1626년 8월,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윽고 후금의 버일러(貝勒)들은 홍타이지(皇太極)를 새로운 한(汗)으로 옹립했다. 그는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아들이 최고 권력자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이나 조선의 눈으로 보면 이채로운 것이었다. 무조건 장자가 계승하는 관행으로 보면 말이다. 홍타이지(1592~1643)는 잘 알려진 것처럼 훗날 제위에 올라 태종(太宗)이 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서 치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그의 모친은 몽골족 여자였다. 누르하치가 1615년 황(黃), 홍(紅), 남(藍), 백(白) 등 사기(四旗)를 확대하여 팔기(八旗)를 창설했을 때, 스물 두 살의 홍타이지는 정백기(正白旗)를 관할하는 버일러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다이샨(代善), 아민(阿敏), 망굴타이(莽古爾泰) 등 그의 형들과 더불어 ‘사대 버일러(四大貝勒)’로 불리면서 정무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수행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탁월한 전공(戰功)을 쌓았다. 특히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그가 세운 전공은 혁혁하여 누르하치는 ‘내 아들 홍타이지는 사람들이 의지하기를 인체로 치면 마치 눈과 같은 존재’라고 찬양했다. 홍타이지는 무략(武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문에도 능통했다. 홍타이지가 개인적으로 탁월한 인물이고, 추대에 의해 한으로 즉위했지만 즉위 직후 그의 위상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견 만장일치에 의해 옹립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즉위 직후 당장 그의 사촌형 아민이 삐딱하게 나왔다. 아민은, 홍타이지를 한으로 인정하지만 자신은 소속 기인(旗人)들을 이끌고 독립하겠다고 통보했다. 홍타이지는 긴장했다. 아민의 독립을 허락하면 나머지 각 기들도 전부 이탈하려 들 것이고, 그럴 경우 후금의 연맹 조직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즉위 직후 그는 아민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권력강화를 위한 홍타이지의 노력 아민을 겨우 설득했지만 홍타이지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누르하치 시대 만주족은 분권(分權), 합의제(合議制)에 기초한 전통적인 부족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각 버일러들은 자신의 권력이 왜소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당연히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들었다. 부족제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더욱이 서열상 사대 버일러 가운데 맨 꼴찌였다. 나머지 버일러들이 누르하치의 후계자로서 막내인 홍타이지를 옹립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한의 권력을 억제하고 전통적인 부족제 본래의 통치체제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백관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세 명의 형들과 나란히 앉아 남면(南面)했고, 제례(祭禮)를 거행할 때도 그들과 동렬(同列)에 섰다. 그것은 사실상 공동 집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름만 한일 뿐 실제 가지고 있는 권력 면에서는 세 명의 버일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에게 주목했다. 당시 후금 사회에는 많은 한인과 몽골인들이 있었다. 정복 과정에서 포로로 획득하거나 귀순해 온 사람들이었다. 누르하치는 한인들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들을 복속시키려고 위해 탄압을 일삼았다. 만주인들이 그들에게 약탈을 자행해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자연히 만주인들과 한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한인들은 침학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물론, 만주인 관인들을 암살하거나 우물에 독을 풀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홍타이지는 한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책을 바꾸었다. 만주인 귀족이나 관원들이 한인들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인과 만주인들을 분리시켰다. 한인들의 거주 지역에 만주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한인 관리들을 시켜 그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능력 있는 한인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홍타이지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많은 한인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한인 관료들의 경륜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홍타이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1627년 무렵,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조선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세계볼링 여자 2인조 첫 金

    한국 여자볼링이 세계선수권대회 2인조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최진아(23·대전시청)-남보라(26·서울시설관리공단)조는 3일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대회 2인조 경기에서 6경기 합계 2804점(평균 233.7점)으로 우승했다. 김여진(28·벨인퍼컴)-계민영(21·경희대)조는 2787점(평균 232.3점)으로 2729점(평균 227.4점)을 기록한 미국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해남 땅끝 마을에서 한양 남대문에 이르는 호남대로는 980리 길이다.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제7로가 바로 이 호남대로이다. 옛 선조들은 해남에서 보름 동안 걸어 한양에 당도했다. 하루 평균 65리(26㎞)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영남대로는 960리 길이지만 지세가 험준해 속도가 떨어진다. 이에 비해 호남대로는 20리 더 멀지만 평야지대가 많아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옛길은 국도 1호선과 겹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남에서 북을 향한다. 도시가 형성되고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남은 옛길은 정다운 옛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노령산맥 토박이들은 장성 갈재라 불러 노령산맥은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른다. 토박이들은 노령산맥 대신 장성 갈재라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해남을 떠난 길손이 닷새쯤 걸으면 장성 갈재를 넘어 전라북도 땅에 이른다. 갈재는 해발 276m밖에 되지 않지만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제법 험한 고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노령보 고개길이 사나워 전에는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약탈을 하여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해 방수(防守)하다가 뒤에 폐지했다.’고 적고 있다. 장성 갈재에서 내려다 보면 남으로 전남 장성군이, 북으로는 동학의 고장 전북 정읍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펼쳐진 호남평야의 끝자락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1번국도, 호남선철도 등과 함께 갈재를 넘는다. 고속도로와 철도는 터널을 통해 전남·북을 소통시키지만 1번 국도는 고속도로 서편으로 꼬불꼬불 힘겹게 고개를 넘는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의 동편으로 갈재를 넘고 있다. 서편보다 지형은 험준하지만 지름길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자연스럽게 이 길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통행이 거의 없는 옛길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숲이 우거진 곳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렵사리 갈재를 넘으면 마을 앞 커다란 당산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전북에서 처음 만나는 자연 부락인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힘든 고갯길을 넘은 길손들이 쉬어가던 주막과 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험준한 노령산맥에는 산적과 도둑이 많아 도방소도 설치됐었지만 이 역시 흔적조차 찾아 볼수 없다. 하지만 갈재에서 희미해졌던 옛길은 이곳에서 다시 모양을 되찾는다.1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에 끼고 옛길은 정읍시내를 향한다. 입암 저수지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현재 입암면사무소 자리인 천원역 터에 이른다. 역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우물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그러나 옛길은 그런대로 형체를 잃지 않고 입암초등학교 옆을 지나는 골목길로 남아있다. ●보천교 총본부 있던 대흥리에 전국 부자들 모여 옛길은 ‘보천교’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진 입암면 대흥리에서 1번 국도와 잠시 겹치게 된다. 대흥리는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교단의 총 본부를 만든 곳이다. 차경석은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산을 헌납하면 정도에 따라 사후에 벼슬을 얻을 수 있다고 해 전국에서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자가 거액의 재산과 식솔을 거느리고 이곳에 몰려왔다. 애초 입암면 대흥리는 농가 십여호로 이루어진 가난한 촌락이었으나 교세가 확장하면서 700여가구에 이르렀다. 교전인 십일전(十一殿)은 부지가 1만여평, 건평 350평, 높이가 99척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경내에는 3개의 탑이 있고 4대 문루가 있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교세를 확장해 한때 교도가 600만명에 이르렀다. 이 마을 전호남(64)씨는 “보천교가 흥할 때 대흥리는 서울이 될뻔 했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교단의 내분과 화재로 내리막 길을 걷게 됐지만 이곳에 남았던 건물을 뜯어다가 서울 조계종 대웅전을 지은 것만 봐도 보촌교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비들이 급제하려면 반드시 건넜던 과교 대흥마을을 거쳐간 옛길은 1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정읍시 시기동을 향한다. 늦더위에 오곡이 여물어가는 들판을 가로 질러 정읍시내 초입인 과교천을 넘는다. 과교는 이곳을 건너야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명소였다. 옛 모습의 과교는 찾을 길이 없고 현재는 정읍시내를 거쳐 태인과 전주시로 가는 차량들이 끊임 없이 오가는 2차선 시멘트 다리로 바뀌어져 있다. 과교를 넘어 정읍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옛길은 찾기 힘들어진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표기된 옛길은 도시 발달과 함께 사라졌다. ●최치원이 군수·이순신이 현감 역임했던 ‘태인´ 정읍시 북면을 지난 옛길은 농공단지를 지나 태인면에 이른다. 태인은 예전에는 1만가구가 넘는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여느 농촌 도시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예부터 태인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문향(文鄕)으로 꼽히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정극인이 말년을 보내며 상춘곡을 지은 곳이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무성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무성서원만은 남겨두었다. 최치원은 이곳 군수를 지냈고 이순신은 현감을 역임했다.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본적지 역시 태인이다. 이곳에는 1421년(세종3년)에 창건됐던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옛 태인면사무소 옆에는 최치원이 세웠다는 피향정이 세월의 흐름을 꿋꿋이 견디며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태인초등학교 입구 옆에 복원된 동헌도 태인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신정일 우리땅걷기본부 대표 “걸어야 사유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고가 시작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운동본부 신정일(53) 대표는 “걷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만나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옛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오랜 유산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는 옛길이 더 이상 파괴되거나 잊히지 않도록 이를 복원하고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옛길에 대한 관심이 없지만 이는 곧 우리의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장성 갈재를 넘는 옛길이 거의 사라진 것을 보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문경새재처럼 옛길을 하루 빨라 복원해야 합니다.” 신씨는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는 갈재야말로 호남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길을 복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옛길 복원과 함께 이곳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떤 관광개발사업보다 지역을 널리 알리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동원이나 객사가 있던 곳이 면사무소나 학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옛 선조들의 영혼이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실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는 옛길과 지역 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우리 땅 방방곡곡을 발로 뛰면서 기록하고 역사를 되짚어 내는 그는 “길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명성 높던 고을들이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져 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신씨는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지도 한장만 가지고도 옛길을 답사 할 수 있도록 폐허가 된 곳은 복원하고 남아있는 길은 보존하며 기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버스에 태워준 2명 납치범 돌변”

    |두바이(아랍에미리트) 류지영특파원·카불 공동취재단| “그동안 3∼4명씩 5팀으로 분산돼 움직였는데, 일부는 민가를 중심으로 12번씩이나 옮겨다녔다.” 40여일간의 억류 생활 끝에 풀려난 한국인 피랍자 19명 가운데 유경식(55)·서명화(29)씨는 31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세레나 호텔에서 피랍자 대표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잠을 못이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들은 이날 UN이 제공한 특별기편으로 아프간을 떠나 오후 11시50분쯤(이하 한국시간) 두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또 1일 오후 4시20분 대한항공 KE952편으로 두바이를 출발해 2일 아침 6시35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유씨는 “낮에는 안전하다고 해서 카불에서 아침에 출발했다. 전세버스 운전사가 아는 사람이라면서 현지인 2명을 태워 앞쪽에 앉혔는데 20∼30분 뒤 이들이 총을 발포하면서 차를 세웠다.”며 피랍 당시를 설명했다. 이후 무장한 탈레반 2명이 버스에 올라 타 한국인을 내리게 한 뒤 승합차로 나눠 태웠고, 이 과정에서 배형규 목사는 실신했다고 말했다. 인질 생활에 대해서는 “기운이 없어서 하루종일 잠자고, 다시 잤다.”면서 “사태 초반에 빨리 구출해 달라고 금식 기도를 했는데, 사흘을 안 먹으니 탈레반이 보기에 단식으로 보여진 것 같다.”고 소개했다. 그는 인질들이 억류 생활을 하는 도중 언론과의 통화에서 인질 일부가 위독하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탈레반이) ‘아프다고 해야지 구출해 준다.’고 시켰다.”고 말했다. 이지영씨의 석방 양보설에 대해선 “여자만 세 명인데 두 사람을 석방한다고 하니 남은 한 사람이 힘들지 않겠느냐.”고 반문한 뒤 “(3명이) 기가 막혀서 울었는데 (이씨가) ‘나 대신 너 가라.’고 이야기해서 김경자씨가 가게 됐다.”며 석방 양보가 사실임을 밝혔다. 배 목사와 심성민씨 살해 소식에 대해 “피랍자 가운데 나를 감금했던 집 주인이 라디오 영어뉴스를 듣게 해줘 여자 2명이 석방됐고,2명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른 피랍자들이) 충격받을까봐 내색을 못하고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누군지는 몰랐지만 젊은 사람들 가운데 반항하거나 탈주 오해를 받고 사살된 것이 아닌지 걱정했고, 배 목사는 살해된 것으로 추측했다.”면서 “(살해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한편 피랍자들이 모두 돌아온 뒤 치르기 위해 연기됐던 배 목사의 장례식은 오는 8일 경기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진다. superryu@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가 경략(經略), 순무(巡撫) 등의 운명을 결정했다. 설사 뛰어난 전공이 있더라도 엄당의 눈밖에 나면,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동림당과 연결되어 있던 웅정필(熊廷弼)과 원숭환(袁崇煥)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쟁에 희생된 웅정필과 원숭환 웅정필(1569∼1625)은 1619년 명의 대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요동경략으로 흐트러진 요동 지역의 방어태세를 수습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친히 무순 지역까지 순시하면서 요동의 형세와 후금의 동태를 파악한 뒤, 후금군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이른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제시했다. 산해관 지역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 천진(天津)과 등래(登萊) 등지의 수군을 활용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웅정필의 계책은 광녕순무(廣寧巡撫) 왕화정(王化貞)의 반대에 밀려 실현될 수 없었다. 왕화정은 병부상서 장학명(張鶴鳴)의 지원을 받았고 엄당 쪽에도 줄을 대고 있었다. 웅정필과 왕화정의 대립은 결국 동림당과 엄당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불화 속에 1622년 광녕이 함락되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지만 1625년 웅정필만 사형이 집행되었다. 참수된 웅정필의 목은 변방으로 조리돌려졌다. 광녕이 함락된 데는 왕화정의 과오가 훨씬 컸음에도 정작 웅정필만 처형된 것은 엄당의 농간 때문이었다. 당쟁, 그리고 엄당의 전횡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였다. 웅정필이 사라진 이후 나타났던 영웅이 원숭환(1584∼1630)이다. 원숭환은 명과 후금 사이의 군사적 대결, 궁극에는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격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천계 연간 명이 엄당의 전횡에 휘말려 안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후금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냄으로써 국가안보를 책임졌던 동량(棟樑)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버티고 있던 영원성(寧遠城·오늘날 요녕성 興城市 소재)을 넘지 못했고, 끝내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원숭환이 1626년 영원성에서 승리를 거두자 명의 조야는 감격했다.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연전연패했던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숭환은 일약 ‘하찮은 여진 오랑캐’ 때문에 구겨진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살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중화의 영웅’ 또한 1630년 비명횡사했다. 전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 스스로 죽였다. 후금의 반간계(反間計)와 명 조정의 당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나타난 결과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학자 옌충녠(閻崇年) 등이 중심이 되어 원숭환을 추모하고 그의 시대를 재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자못 활발하다.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도 민족의 기절(氣節)과 애국주의를 선양하려는 차원에서 원숭환 관련 사적을 정비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정도였다. ●영원성에 방어의 거점을 마련하다 원숭환은 호(號)가 자여(自如), 자(字)가 원소(元素)로 광동성(廣東省) 출신이다. 그는 1597년(만력 25) 수재(秀才)가 되고,1606년(만력 34)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원숭환은 36세 때인 1619년(만력 47) 북경에서 과거에 최종 합격하여 벼슬에 진출했다. 그가 조정으로부터 처음 임명된 관직은 복건(福建) 소무현(邵武縣)의 지현(知縣)이라는 자리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의 군수급 관직이었다. 일개 지방관에 불과했던 원숭환의 운명이 바뀐 것은 1622년이었다. 지현 재직 시의 근무 성적에 대한 고과(考課)를 위해 북경에 왔는데, 그의 능력을 알아본 어사 후순(侯恂)이 원숭환을 천계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후순은 동림당 계열이었다. 천계제는 원숭환을 병부 직방주사(職方主事)로 발탁했다. 지방관에서 일약 중앙관으로 변신시킨 파격적인 인사였다. 1627년까지 승진을 거듭한 원숭환은 이후 요서 지방의 방어 대책을 마련하여 북경과 산해관의 안전을 지키는 최일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산해관 방어를 위해 고심하던 원숭환은 영원을 주목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산해관의 현관’이었다. 요동, 요서 지역에서 육로로 산해관이나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전략 요충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더욱이 해안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바다에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이 자리잡고 있어서 배후의 지원 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을 지키려면 영원에 제대로 된 중진(重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명 조정의 관인들 가운데는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1618년 이래 거듭되었던 요동에서의 패전 때문에 병력이 격감하고 성지(城池) 등 방어 시설이 퇴락한 데다, 주민들이 이산했기 때문이었다. 영원을 방어해야 한다는 원숭환의 주장은 왕재진(王在晉) 등의 반대에 밀려 채택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를 설득하여 원숭환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었다. 손승종의 지원을 얻어낸 원숭환은 1623년 영원성 수축에 감독관으로 직접 참여했다. 그는 조대수(祖大壽)와 만계(滿桂) 등을 지휘하여 담장을 높이고, 포대(砲臺)를 개수하는 등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1624년 9월, 영원성의 수축 공사는 완료되었다. 원숭환은 이후 성 외곽의 유민들을 불러모아 농경지를 개간토록 하고, 산해관과 해로를 통해 상인들도 끌어들여 성에 대한 물자 공급도 원활하도록 조처했다. 버려졌던 영원성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살상력 뛰어난 홍이포(紅夷砲)를 거치하다 영원성을 정비한 이후 원숭환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명군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홍이포였다. 명 조정에는 일찍부터 서양의 새로운 화포인 불랑기(佛狼機)나 홍이포 등을 활용하여 후금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관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구자는 유명한 서광계(徐光啓·1562∼1633)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눈을 떴던 그는 서기(西器), 그 가운데서도 서양식 화포의 활용을 열렬히 주장했다. 천계제는 서광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로부터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다. 홍이포는 기존의 중국식 화포에 비해 사정 거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살상력이 월등했다. 영원성 전투 이전에 요동에서 벌어진 후금군과의 전투에서도 명군은 화포를 사용했지만 그 위력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 사격 후,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기 전에 후금군의 날쌘 기마대는 이미 명군 진영을 덮쳤다. 그런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면 훨씬 강력한 위력을 지닌 화포가 필요했다. 원숭환은 손승종과 상의하여 산해관에 배치되어 있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성밖이 아닌 성루(城樓) 위로 옮겨 배치했다. 원숭환은 병사들에게 홍이포를 조작하는 기술을 숙달시키기 위해 손원화(孫元化) 등을 불러들였다. 훗날 등래순무(登萊巡撫)로 활약했던 손원화는 당시 손꼽히는 화기 전문가였다. 그는 일찍부터 포르투갈 기술자들에게 홍이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손원화는 영원성의 포병들을 훈련시켰다. 원숭환의 혜안과 손원화 등의 노력을 통해 영원성의 방어 태세는 일신되었다. 1626년 1월,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성을 향해 진군했다.1618년 이후 거침없이 승전을 구가해 왔던 누르하치였다. 하지만 곧 그의 머리 위로 홍이포의 불벼락이 날아든다. 누르하치의 운명이 종착역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암스트롱 30일 한국 온다

    고환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도로일주 사이클대회)’를 7연패한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36·미국)이 방한한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암스트롱이 새달 1∼9일 열릴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투르 드 코리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30일 입국한다고 27일 밝혔다. 암스트롱은 1일 대회 개회를 선언한 뒤 자전거를 타고 동호인과 소아암 환자·가족 등 1000여명과 함께 한강변 10㎞를 달린다. 유소년 사이클 선수들을 대상으로 원포인트 클리닉도 연다. 암스트롱이 내놓은 자전거, 헬멧 등 기증품은 경매를 거쳐 수익금 전액이 한국 메이크 어 위시(Make a Wish)재단에 기부돼 암환자 치료에 쓰여진다.역대 최연소로 22세 때인 1993년 세계사이클선수권대회 개인도로 챔피언에 오른 암스트롱은 투르 드 프랑스 구간 우승 2차례를 차지하며 사이클계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996년 고환암 판정을 받고 폐와 뇌까지 번진 암을 항암 치료로 극복했으며 2년 뒤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를 유일하게 7연패한 뒤 은퇴했다. 암스트롱은 암투병 직후 1997년 나이키와 함께 암스트롱재단을 설립, 암 퇴치에 앞장서고 있다. 암스트롱은 다음달 2일 출국한다.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타이슨 게이, 男 100m 9초85 우승

    미국 단거리의 자존심 타이슨 게이(24·미국)가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의 영예를 얻었다. 게이는 26일 밤 일본 오사카 나가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85에 결승선을 끊어 데릭 앳킨스(바하마·9초91)와 세계기록 보유자 아사파 파월(자메이카·9초96)을 제치고 우승했다. ●게이,5전패 파월에 단단히 설욕 게이의 이날 기록은 지난 2005년 파월이 작성한 세계기록(9초77)에는 100분의7초 모자랐고 자신의 올 시즌 최고기록에도 100분의1초 모자랐다. 그러나 그는 이날 생애 첫 세계선수권 제패의 기쁨을 맛보며 큰 대회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날려버렸다. 특히 최근 다섯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무릎을 꿇었던 파월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점에서 기쁨이 남달랐다. 게이는 4번 레인에서 출발했지만 스타트에서 파월에게 현저히 뒤졌다. 하지만 30m 정도 남겨두고 대단한 스퍼트를 발휘해 파월을 제치고 결승선을 맨먼저 통과했다. 그는 남자 200m와 400m계주에도 출전할 예정이어서 3관왕까지 노릴 수 있게 됐다. 세계기록 보유자 파월은 3위에 그치며 큰 대회에 약한 징크스가 재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무관의 설움에 울어야 했다. 파월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았지만 5위에 그친 바 있다. 역대 세계기록 보유자 가운데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경우는 2001년 캐나다대회에서의 모리스 그린이 유일하다. ●한국육상 예상 밖 좋은 출발 한국육상은 뜻밖의 좋은 출발을 보였다. 박칠성(25)과 김현섭(22·이상 삼성전자)은 이날 오전 나가이 스타디움 주변의 2㎞ 코스를 10바퀴 도는 남자 경보 20㎞에서 각 15위와 20위에 올랐다. 레이스 직후 둘의 순위는 각 14위와 19위였지만,2위로 골인하다 실격 처리된 프란시스코 페르난도(1시간22분40초)의 재심 결과가 번복돼 한 계단씩 내려갔다. 개막 첫날 남자마라톤 풀코스(42.195㎞) 레이스에서 이명승(28), 박주영(27·이상 국군체육부대), 김영춘(24·서울시청) 등은 3명 이상 참가국의 기록을 합산해 순위를 매기는 단체전에서 7시간12분08초로 개최국 일본(6시간54분23초)에 이어 단체전 2위를 차지했다. 마라톤 단체전이 도입된 2003년 이후 첫 쾌거이며 특히 마라톤 왕국 케냐(7시간12분33초)를 꺾은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진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세 선수에게 총 50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김덕현(22·조선대)은 남자세단뛰기 예선에서 16m78을 뛰어 참가자 36명 중 8위로 12명이 겨루는 결승에 올라 27일 오후 8시30분 메달 사냥에 나선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기고] 삼각산 이름 반드시 되찾아야/김현풍 강북구청장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이 시조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삼각산이 어디에 있는 산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삼각산. 우리들이 주말이면 올라가는 산, 서울 시민의 쉼터인 ‘북한산’이 바로 삼각산이다. 본디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라 불리던 이 산은 1915년 조선총독부의 고적 조사위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경기 고양군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북한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 선조가 1000년 넘게 써오던 이름이 한 조선총독부 학자의 보고서에 의해 바뀐 것이다. 삼각산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조에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부아악은 삼각산의 옛 이름이다. 고려시대부터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역사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고려사 서희전에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강토입니다.”라고 성종에게 아뢰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도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아방강역고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우리의 수도인 서울이란 이름도 삼각산의 세봉우리를 뜻하는 세뿔(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이 세불과 서불을 거쳐 서울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던 삼각산을 일제가 말살한 이유는 이 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산의 이름을 바꾸는 것도 모자라 백운봉에 철심을 박고, 독립군의 근거지라 해 고찰인 도선사를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일제의 의도는 누가 봐도 뻔하지 않은가? 삼각산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우리민족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 중에서 가장 악랄했고 반발도 심했던 것이 창씨개명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오히려 북한산이 맞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몇몇 문헌에서 보이는 북한산이라는 명칭을 그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나오는 북한산은 산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서울 지방의 옛 이름인 한산의 북쪽지역을 가리키거나 북한산성의 약칭으로 쓰인 것이다. 그동안 강북구는 삼각산의 제이름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004년 건설교통부와 서울시 지명위원회에 명칭변경을 정식으로 요청하고, 삼각산 명칭복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2005년에는 세계 9개국 12개 도시가 참여한 가운데 삼각산 국제포럼을 개최하여 삼각산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2005년 10월에는 산림청에서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백운대를 백운봉으로 변경할 것을 발표해 우리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2004년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는 보다 명확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명칭복원에 대해 보류 결정을 내렸다. 또 삼각산은 강북구만의 것이 아닌 서울의 6개구, 경기도 3개 자치단체에 걸쳐 있다. 각 자치단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한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오는 10월 ‘삼각산 제이름찾기 추진위원회(가칭)’가 정식 발족한다. 종교계, 학계, 시민단체 등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명칭복원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심포지엄을 열고 전 국민 서명운동도 벌일 예정이다. 온 국민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면 올해 안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현풍 강북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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