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라운지] 농구대잔치 첫 준우승 돌풍 이호근 동국대 감독
지난 7일 농구대잔치 결승전. 동국대가 일으킨 ‘돌풍’은 중앙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호근(42) 동국대 감독은 내내 소리를 지르다 목이 쉬었다. 포기하지 않고 땀을 흘리는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어서였다.26점차 패배. 그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고생했어, 잉∼”이라고 짧은 한마디를 던지며 선수들을 얼싸안았다. 농구계에서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꼽히는 이 감독의 눈에선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1998년 여름 여자프로농구 신세계 코치로 가자마자 첫 우승 감격을 누린 이후 눈물이 맴돈 것은 처음이라고 토로하는 이 감독. 먼 길을 돌고 돌아와 다시 성공시대를 열고 있다.
지난해 중반부터 모교인 동국대 코치를 맡고 있다가 지난 6월 사령탑이 됐다. 대학농구 변방이었던 동국대는 이후 종별선수권 준우승, 전국체전과 2차 대학연맹전 3위에 이어 팀 사상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하며 날개를 펼쳤다. 이 감독은 “운이 좋았고, 졸업반 선수들이 묵묵히 따라줘 얻은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큰형 같은 모습으로 감싸주고 믿어주는 그가 만들어낸 조직력이 없었더라면 동국대의 비상도 없었을 터.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시절이 있기에 이 감독은 더욱 빛난다.‘깡촌’ 출신인 그는 바구니에 공을 집어넣는 게 재미있어서 키가 크다는 것만 믿고 중학교 3학년 막바지에 농구를 시작했다. 실업 현대에서 김성욱과 더블포스트를 이뤄 기아의 한기범-김유택과 겨뤘던 그는 95년 유니폼을 벗은 뒤 현대전자 영업과장으로 넥타이를 맸다.
●전자랜드 감독대행때 ‘12연패´ 아픔도
우직하게 일 잘한다고 칭찬도 많았지만 농구쟁이는 코트가 그리웠다. 지도자의 길을 결심하고, 아주 잠깐 용인대 감독을 거쳐 신세계 코치로 갔다.98년부터 2003년까지 이문규 감독을 도와 4회 우승을 달성하며 잘나갔다. 하지만 남자프로농구 전자랜드 코치로 둥지를 옮긴 뒤 쓰라림을 맛봤다. 특히 05∼06시즌 초반 덜컥 감독대행이 된 뒤 12연패를 포함해,5승29패의 초라한 성적을 냈다. 전임 감독 성적까지 합치면 전자랜드는 8승46패로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농구 인생 최대 위기였죠. 앞이 깜깜하다는 말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패에서 배운다고, 당시 경험이 이제는 큰 자산입니다.”
이 감독에겐 요즘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녀 모두가 농구 유망주로 유명하다. 아들 동엽이는 명문 용산중학교에서 허재 KCC 감독의 장남 웅이와 한솥밥을 먹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팀을 소년체전 정상에 올려놓고 최우수선수(MVP)로 뽑히기도 했던 아들은 3학년 진학을 앞두고 주장이 됐다. 농구공을 잡은 지 1년 남짓된 딸 민지도 지난 8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총재배에서 선일초등학교를 1위로 이끌며 MVP로 뽑히기도 했다.
●딸·아들도 초·중학교 선수 ‘농구가족´
운동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토록 말렸는데 그 역시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되지 못했다. 프로 때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대학에 와서는 그나마 집에 자주 갈 수 있어 미안한 마음을 덜고 있다.“요즘은 애들과 대화할 시간이 있어서 좋아요.”라는 그에게 자녀 칭찬을 해달라고 하자 “어렸을 때 조금 한다고 커서도 잘하는 건 아닙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도자 인생에서 올해가 가장 뿌듯하고 자부심도 생깁니다.”고 할 정도로 농사를 잘 지었으나 내년이 걱정이다. 주력이었던 4학년들이 빠져나가기 때문. 그럼에도 이 감독은 이번 겨울 뜨거운 담금질을 통해 돌풍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진다.“1985년 제가 2학년 때 동국대가 우승해보고 아직 우승이 없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내년에는 정상을 밟고 싶습니다.”
글 사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