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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현필 작가, 전라도 천년 역사소설 ‘은행나무 숲’ 출간

    장현필 작가, 전라도 천년 역사소설 ‘은행나무 숲’ 출간

    장현필 작가가 전라도 정도 천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룬 창작 역사소설 ‘은행나무 숲’을 발간했다. 전라도 백성의 우수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 군주가 백성을 대해야 하는 덕목까지 현대인의 판타지로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한다. 개경 만월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암투로 시작된 이 소설은 무능한 권력자와 부패한 관리들의 민낯을 속 시원하게 보여준다. 1000년 전에 백성들을 통해 무능한 권력자와 부패한 관리들의 이중성을 실감나게 말하고 있다.이 책은 한 편의 동화 처럼 드라마적인 재미와 감동이 있다. 역사적 사실위에 창작의 신선함도 있다. 스토리가 스토리를 밀어주는 구성의 힘도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전라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읽으면 가슴에 남을 소설이다. 주인공 지혜가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구하고 강조장군의 정변으로 현종이 등극하는 과정, 거란침입으로 몽진시 백성을 통해 얻는 현종의 깨우침, 사회적 약속을 통해 얻는 주인공 지혜의 삶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장 작가는 개성에 있는 고려 궁궐 만월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성 만월대는 수년 전부터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복원작업을 하다 3년전에 중단됐으나 최근 다시 시작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만월대 발굴과 복원에 많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평양을 가는 시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커 보인다. 한반도 천년의 역사는 전라도 천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려건국, 삼별초항쟁, 조선건국, 호남사림, 임진왜란부터 판소리역사, 시서화예술, 동학, 여순사건, 근대 민주화운동, 현대정치사까지 한반도 역사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역사를 작가 장현필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영화, 다큐멘터리, 소설 등으로 말하고 있다. 장 작가는 2년 전 ‘왜교성을 품은 달빛청춘’ 을 통해 임진왜란을 영웅 중심이 아닌 가련한 백성과 의병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소설을 썼었다. 많은 논문을 통해 검증된 스토리 속에 픽션의 재미와 감동을 준 작품으로 청소년들과 장년층에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은행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말하는 나무 중에 대표적인 수종이다”며 “함께 물들고 함께 태어나는 은행나무 잎처럼 천년을 살아온 백성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 미래의 지혜를 알아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김영록 전남지사, 여순사건유족회 위로하며 ‘화해 상생’ 제안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9일 여수시 문수청사에서 여순사건 관련한 여수·순천시 등 5개 시군 민간인유족회와 순직경찰유족회를 만났다. 김 지사는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미래를 위해 ‘화해와 상생의 길’을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이날 민간인유족회 등과의 만남은 김 지사의 제안으로 마련됐다. 김 지사는 이 자리에서 “올해 70주년을 맞는 ‘여수 순천 10·19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에서 발생한 아픔이고 상처다”며 “진실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 등을 위해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도 차원에서 국회의원, 시군, 도·시군의회, 시민단체 등과 힘을 모아 특별법안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황순경 민간인유족회 여수시회장은 “여순사건 관련 유족들은 하루라도 빨리 특별법이 제정돼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정병철 순천시민간인유족회장은 “순천을 방문했던 평화순례단의 요청에 의해 화해 차원에서 경찰충혼탑을 참배한 바 있다”며 “여순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났는데 이제 서로 화해하고 상생의 길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용원 여수시경우회 회장은 “민간인유족회와 순직경찰유족회가 좋은 방향으로 가려 한다”며 “현재 민간인유족회에 비해 관심과 지원이 저조한 것이 아쉽지만 서로 용서하더라도 역사는 바로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남중옥 여순사건 여수시순직경찰유족 대표는 “70년 세월이 흘러가서 이제는 화해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지만 전체 회원의 중지를 모아 결정할 사항이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정학히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도는 여수·순천시 및 지역사회단체 등과 함께 이달부터 12월까지 전국학술대회, 추모문화제, 창작오페라 등을 계획중이다. 도올 김용옥 강연회와 자전거 전국순례대행진 등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는 등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또 희생자 유해 매장지 안내판 설치 등 유적지 정비, 추모 배지 제작, 동부지역 6개 시군 여순사건 위령제 개최 지원 등에 나서고 있다. 민족의 아픔과 치유를 공유해야 할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의 역사 현장 교류도 추진할 계획이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시내각을 이끈 조르주 클레망소는 말했다.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겨 놓기엔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전쟁에는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한 지휘관들에 대해 클레망소가 진저리치며 한 말이었다. 한국의 장군들에게도 흔히 적용되는 경구다. 조갑제씨가 쓴 전기 ‘박정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순사건 때 반란군으로 체포되자 남로당원이라며 200여명의 명단을 건네 처형을 면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가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한 육군 9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의 일화다.9사단은 3군단(사령관 유재흥 중장)에 배속돼 3사단과 함께 강원 인제군 현리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서울 점령을 위한 5차 공세(춘계공세)에 실패한 후 중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현리에서 북쪽으로 12㎞ 떨어진 소양강 건너엔 대규모의 중공군이 집결해 있었다. 4월 27일 9사단 신임 사단장이 부임했다.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불과 5년 만에 장군이 된 최석이었다. 최석은 부임하자마자 심지어 ‘뽀마드’까지 상납을 요구하며 참모들을 들들 볶았다. 참모부는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나뉘어 암투했다. 다음은 정훈부장 이용상의 목격담. “당시 헌병대장 김시진은 최석의 ‘밥’이었다. 어느 날 최석의 입에서 ‘살아 있는 싱싱한 것…’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김시진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강릉으로 차를 몰아 싱싱한 생선회 두어 접시와 초장을 푸짐하게 장만해 사단장 막사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헌병대장이 얼굴에 초장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살아 있는 생선 먹고 싶다고 했지, 죽은 생선 먹고 싶다고 했나. 눈치도 없는 놈이 헌병 한다고….’ 군대 안에선 유명한 ‘생선 사건’이다.” 며칠 뒤 박정희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출근하지 않더니 사단 의무부장으로부터 진단서를 끊어와 대구 집으로 정양을 가겠다고 우겨 9사단을 떠났다. 일촉즉발의 전투부대가 아니라 개그무대의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로부터 10여일 뒤인 5월 16일 오후 4시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오후 5시 30분 소양강을 도하한 중공군 선발대가 오마치(오미재)에 도착하고 대대 병력이 주변을 장악한 것은 17일 새벽 5시였다. 오마치는 상남리, 방내리, 율전, 창촌, 하진부로 이어지는 7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유사시 퇴각로였다. 군단장 유재흥의 주재로 이날 오후에야 열린 작전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하진부로 ‘퇴각’. 유재흥은 정작 중요한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은 사단장들에게 맡긴 채 급히 경비행기를 타고 하진부로 ‘탈출’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최석은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다음은 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이 회고한 ‘7군단의 패주 장면’.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19일까지 방태산을 넘어 창촌 광원리 을수재를 거쳐 집결지인 하진부에 도착한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25일 7군단을 해체했다. 유재흥에게는 ‘다른 보직을 찾으라’며 전선에서 내쫓았다.해체된 유재흥의 부대는 3군단만이 아니었다. 개전 초 유재흥의 7사단은 덕정, 의정부, 창동 등 서울로 이어지는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사흘 만에 북한군에 내주고 궤멸했다. 이승만은 그런 유재흥을 2군단장으로 영전시켰다. 미8군에 배속되어 북진했던 2군단은 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내달려 2연대와 7연대 일부 병력이 압록강변의 벽동, 초산까지 진출했다. 당시 선봉 2연대 연대장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학살자로 유명한 함병선 준장이었다. 2군단의 허장성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덕천 영원의 산악지역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2연대를 시작으로 7연대, 6사단, 8사단이 차례로 무너졌다. 7군단 전체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이 전사했다. 군단은 해체됐다. 하지만 유재흥은 육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1957년엔 합참의장이 됐다. 그의 군 생활은 4·19혁명과 함께 끝나지만, 5·16쿠데타와 함께 그의 인생 2막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태국·스웨덴·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이수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한 박정희는 일본육사 3년 선배인 유재흥을 끔찍하게 챙겼다. 이승만은 광복군은 배제하고 일본군 출신을 중용했다. 재임 중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고 백선엽(일제 만주군관학교)과 송요찬(일본군 지원병)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역시 모두 비전투병과여서 전장 경험이 없고 전투에는 무능했다. 대표적인 게 참모총장 채병덕이었다. 도발 가능성을 번번이 묵살했던 채병덕은 남침 당일, 새벽 2시까지 술에 절어 있었다. 미국 관리들이 이승만에게 “왜 저렇게 뚱뚱하고 둔한 장군을 총장에 임명했소”라고 물으면 이승만은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가지지 못한 기민함이 있다오”라고 대답했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 출신 최고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경찰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임명한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 15명은 모두 일제의 검사, 경찰 간부, 일본군 출신이었다. 홍순봉과 문봉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고 김종원(오장), 이성우(대위)는 헌병 출신이었다. 1960년 3·15 마산의거 때 ‘배후는 공산당’이라고 발표했던 치안국장 이강학은 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김종원이었다. 일본군 자원입대자로,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여순사건 때부터 잔혹한 민간인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다. 빨치산 토벌대였던 23연대장 시절 그의 부대가 지나간 자리엔 빨치산이 아니라 민간인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런 김종원을 이승만은 총애했고 김종원은 충성을 다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때 그는 예하 부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의 합동조사단을 습격하도록 했다. 그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선고받자 이승만은 특사로 3개월여 만에 석방했다. 이후 경찰로 옮긴 김종원은 전북, 경남, 경북, 전남 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치안국장이 되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일으켜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 육사 8기생들의 평가도 있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노병들의 증언’ 중에서)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부하에게는 가혹했고 전투에는 비겁했다.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전투에선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하던 ‘똥별’들, 그 연면한 전통은 지금도 군사주권 환수엔 반대하며 자주국방은 외면하고, 골방에서 댓글 공작이나 지휘하고, 내란 수준의 계엄령이나 모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발본해야겠지만 이들은 수구언론, 수구정치권과 함께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다. 논설고문
  • 여순항쟁 70년 반목 어루만진다

    전남 여수와 순천시 등 동부지역 6개 시·군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출범했다. 27일 여수시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에는 여순사건 발생 70주년을 맞아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지역 시민·사회·노동·환경 등 70개 단체 회원 100여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다음달 18∼21일을 여순항쟁 관련 희생자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여순 10·19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로 했다. 70년 만에 최초로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 ‘좌우합동위령제’와 ‘여순 10·19 특별법’ 제정 국회토론회도 가질 계획이다. 전국 학술심포지엄, 특별법 제정 촉구 범국민 서명운동 및 청와대 국민청원 운동도 벌인다. 1개월 내 20만명 이상을 목표로 한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여순항쟁 기념사업위원회 출범 “특별법 제정하라”

    전남 여수와 순천시 등 동부지역 6개 시군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출범했다. 27일 여수시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에는 여순사건 발생 70주년을 맞아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지역 시민·사회·노동·환경 등 70개 단체 회원 100여며이 참여했다. 이들은 다음달 18∼21일을 여순항쟁 관련 희생자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여순 10·19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로 했다. 70년 만에 최초로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 ‘좌우합동위령제’와 ‘여순 10·19특별법’ 제정 국회토론회도 가질 계획이다. 전국 학술심포지엄, 특별법 제정 촉구 범국민 서명운동 및 청와대 국민청원 운동도 벌인다. 1개월 내 20만명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종단별로 추모예배와 미사, 법회도 여는 등 40여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진압 명령에 항명해 진압 군인들과 맞선 과정에서 전남동부지역과 경남 서부 등 33개 지역, 1만 1000여명의 주민들이 군경토벌로 학살된 사건이다. 박정명(64·한국예총 여수지회장) 기념사업위원장은 “여순사건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발생한 가슴 아픈 희생인 만큼 반드시 역사적 재해석이 필요하다”며 “70년간 이어진 갈등과 반목을 끝내고 화해와 상생의 길로 가야한다”고 밝혔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신민호 전남도의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신민호 전남도의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70주년을 맞은 여순사건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전라남도의회가 ‘여순사건 특별법’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신민호 전남도의원(더불어민주당· 순천6)이 대표 발의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건의안’이 26일 전남도의회 제324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건의안은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은 물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제대로 된 보상을 위해 ‘여순사건 특별법’을 하루속히 제정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또 여순사건 피해자 유가족의 실질적인 지원을 위해 희생자 명예회복·보상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희생자 위령사업과 희생자·유족에 대한 보상절차를 조속히 시행되도록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여순사건은 해방 후 이념갈등 시기인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출동지시를 거부하며 정부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1만여명의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비극이다. 제주 4·3사건은 2000년에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여순사건 특별법은 2001년부터 수차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됐는데도 아직까지 계류 중에 있다. 신 의원은 “특별법 제정 등 관련 절차를 이행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하기 위해 건의안을 발의했다”며 “11대 전남도의회 건의안으로는 최초로 대표발의 해 지역구 현안 해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여수시, 여순사건 기념사업 시민추진위 구성

    전남 여수시가 여순사건 70주년을 맞아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발걸음을 떼고 있다. 시는 여순사건 7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 구성을 계획하고 있다.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시민 중심의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구성 규모는 유족회, 경우회, 시의회, 종교계, 학계, 문화예술계, 보훈·시민단체 등 20여명이다. 시는 각 단체들에게 추진위원회 구성제안서를 발송하고 이달 말까지 실무회의와 조직구성 등을 마칠 계획이다. 추진위 참여와 구성이 원활히 이뤄지면 추진위는 이달 말 출범한다. 이후 8월부터 추모사업 추진과 지역민 명예회복, 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 활동을 하게 된다. 여순사건 70주년 기념사업 예산은 1억 4600만원으로 지난 3월 확보된 상태다. 여기에 여순사건 지원 조례도 4월 시의회를 통과했다. 여순사건 추모사업은 권오봉 여수시장의 공약이기도 하다. 권 시장은 매년 9~10월 기념행사와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겠다고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취임사에서 여순사건 기념사업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고 아픔도 치유해 나가겠다고 밝힌 권 시장은 지난 6일 월간업무보고회에서도 기념사업 추진 의지를 밝혔다. 권 시장은 “여순사건 70주년 되는 해에 여순사건 지원 조례도 제정돼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기념사업 예산도 확보된 만큼 경건하게 사업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과거사 해결 ‘한 걸음’] 여순사건 진상규명·특별법 급물살 타나

    국방부가 여순사건 관련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등에 대해 노력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이어 국가기관 두 번째로 여순사건에 얽힌 억울한 희생을 인정한 사례여서 향후 정부 대응이 눈길을 끈다. 2001년부터 네 차례 국회에서 발의만 되고 무산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다. 전남 여수 주둔 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령을 거부하며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당시엔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 동부권 주민 1만 1131명(1949년 전남도 발표)의 목숨을 앗아 간 비극으로 알려졌다.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불리다가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를 2043명으로 확정·보고하면서 명칭을 바꿨다. 4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지난달 국방부에 여순사건으로 순천지역에 무고한 희생이 없었는지,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에 대한 국방부 입장이 무엇인지를 물은 데 대한 회신이 지난 2일 도착했다. 국방부는 “여순사건에 대한 위원회 조사 결과를 존중하며, 과거 불행한 역사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특별법 제정에 대해 “과거사 정리법 개정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며, 법 제정 내용에 따라 국방부도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국민 눈높이에 걸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통해 완전한 청산으로 사회통합과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기조에 맞춰 더욱 애쓰겠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4월 특별법안을 발의한 정인화(민주평화당 광양·곡성·구례) 의원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으로 내몰렸던 민간인 관련 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정부부터 입장을 전향적으로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국회 통과를 기대했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염상진과 염상구를 만나다 -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염상진과 염상구를 만나다 -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중략)...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의지헐디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태백산맥 1권, 248p) 소설 태백산맥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의 하나다. 김범우 집안의 가복(家僕)이자 일자 무식꾼인 문서방은 공산당과 빨갱이를 ‘대놓고’ 말하고 있다. 문학과 영화에서조차도 빨갱이와 공산당을 ‘대놓고’ 말하기 힘든 시절이었던 1983년 9월, 소설 태백산맥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4년간의 자료조사와 6년간의 집필 끝에 원고지16,500매에 달하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시대와 이념의 금기(禁忌)를 정면으로 다룬다.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애써 외면하였던 우리 현대사의 한 면을 과감히 드러낸 작품, 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으로 가 보자. 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은 이러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우익 군경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 와중에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심해지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많은 피해를 입는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안에 대한 소작인들의 반발은 날로 극심해진다. 이럴 즈음 1950년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좌익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고, 이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전쟁이 고착화되자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은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빨치산 대장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결국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소설 태백산맥의 강렬한 주제와 메시지를 다시금 곱씹을 수 있는 공간이 벌교에 위치한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2008년 11월에 개관한 태백산맥 문학관은 자리 선정도 제대로다. 소설 첫 시작 장면인 현부잣집과 소화의 집이 있는 벌교 제석산 끝자락에 터를 잡아 개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관은 소설 태백산맥이 땅속에 묻혀있던 역사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산자락을 파내서 특이하게 설계된 건물로 세워졌다. 문학관은 총 1층과 2층으로 나뉘는 데, 연면적이 1,375.8㎡에 이르며 건축면적만으로는 979.7㎡에 달하는 넓이다. 이곳에는 작가 조정래의 육필원고 등 증여 작품을 포함하여 159건 719점이 전시되어 있다. 따라서 소설 태백산맥의 독자들에게는 작품의 깊이를 더더욱 음미하고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건물 내부는 총 6개의 마당으로 구역이 나뉘어지는 데, 첫째 마당에는 태백산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자료조사, 집필, 작품의 탄생을 알린다. 둘째 마당에는 16,500매에 달하는 작품의 육필 원고를 셋째 마당에는 작품을 둘러싼 이적성 시비와 논란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넷째 마당에는 작가 조정래의 문학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다섯째 마당에는 문학 사랑방이 있으며 여섯째 마당에는 작가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라면 한 번은 방문해도 좋을. 2. 누구와 함께? - 태백산맥의 배경을 이룬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벌교 버스터미널 지나자마자 좌회전(150M 지점) 4. 감탄하는 점은? - 태백산맥의 육필 원고와 치열한 작가의 고민의 흔적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 한산한 편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작가의 육필 원고. 건물이 지닌 건축학적 아름다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벌교는 꼬막정식이 유명하다. 원조수라상꼬막정식, 외서댁 꼬막나라, 제석꼬막회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tbsm.boseong.go.kr/main.ph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낙안읍성, 보성 녹차밭, 순천만 정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라면 의미가 있는 장소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장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소설의 재미를 뛰어 넘어 우리 민족 역사가 건너온 질곡의 세월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허석 순천시장 후보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허석 순천시장 후보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허석 더불어민주당 순천시장 후보가 올해 여순사건 70주기를 맞아 4일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은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여수 주둔의 국군 14연대가 출동 지시를 거부하며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전남동부지역 주민 1만 1131명(1949년 전남도 집계)이 무고한 희생을 당한 일이다. 허 후보는 “여순사건은 좌우익을 떠나 광복 직후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남동부권의 선량한 시민들이 희생된 참사였다”며 “제주 4·3항쟁과 연계된 사건인 만큼 하루 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규명은 물론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제대로 된 보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허 후보는 “피해 지역인 전남동부지역 지자체는 물론 시민단체, 중앙정부를 망라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70주년이 되는 10월 19일 이전에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암울했던 시절 여순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히려 숨죽이며 살았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방부가 국회에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을 부인하는 의견을 낸 사실이 알려져 정치권은 물론 지역정가에서 보다 높은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달 순천대 교수 77명도 성명을 통해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과 특별조사기구 설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문재인 정부와 국회에 요구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순천대학교 교수 77명,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순천대학교 교수 77명,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여순사건 발발 70주기를 맞아 순천대학교 교수 77명이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순 사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순천대학교 교수 일동’은 23일 순천대 박물관 회의실에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과 특별조사기구 설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문재인 정부와 국회에서 처리하라고 주장했다. 이들 교수들은 지난달 27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민족적 분열과 갈등의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통일과 세계적 도약의 희망찬 미래를 확신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어 세계사적 전기를 맞아 ‘불행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냉전체제의 산물’인 여순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지난달 전남도의회에서 의결된 ‘여수순천 10·19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지원사업에 관한 조례’가 의미 있는 선례가 될 것이다”며 “미래의 주인이 될 청년 학생들에게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재차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순천대 여순연구소장 최현주 교수는 “이번 성명서 발표는 비극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지역민의 상처를 하루빨리 치유하고자 하는 교수들의 역사적·사회적 소명의식과 교육자적 책무에서 비롯된 것이다”면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움직임이 학계나 전문 연구기관으로 파급돼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밝혔다. 최 소장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해 여순사건을 학문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각종 간담회와 학술대회 등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방부 반대로 제대로 심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 지역 시민단체, 유족회 등과 협의해 국방부에 공개토론회 등을 제안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4·3과 한 몸인 여순사건, 더는 모른 척 말아야”

    “4·3과 한 몸인 여순사건, 더는 모른 척 말아야”

    올 70주년인데 진상규명 못해 원혼들 아직까지 잠 못 들어 특별법 17년째 국회서 표류 지역 정치인들 무관심 서운“제주 4·3은 인정하고, 여순사건을 모른 척한다는 건 모순입니다. 이 두 가지 희생은 같이 움직이는 같은 사건으로 4·3이 없었으면 여수에서 군대 파병 명령도 없었던 거죠.” 이영일(60)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은 22일 “빨치산 집단의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던 여순사건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며 “현재까지 진실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원혼들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대에서 고향이 전남 여수라는 이유로 ‘빨갱이’ 소리를 들었던 그는 1995년부터 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를 내는 등 여수·순천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있다. 그는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자 당시 이승만 정부는 여수에 주둔한 국군 14연대에 출동을 지시했고, 이 중 남로당 신분들이 있었지만 군인들이 같은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며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여수·순천·구례 등 전남동부지역 주민 1만 1131명(1949년 전남도 집계)이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를 2043명으로 확정, 보고한 바 있다. 2011년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여순사건 63주년 합동위령제’를 지원하고, 추모사를 통해 유족과 시민들에게 사과까지 했다. 지난해 광주고법은 일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보고서를 증거로 채택하고, 유족에게 손해배상하라는 판결도 내렸다. 이 소장은 “우선 전남 시·군 지자체들은 물론 전남도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며 “최근 여수시와 전남도가 처음으로 조례를 만든 것을 계기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했다. 이 소장은 “여순사건특별법이 2001년부터 네 차례 국회에서 발의됐는데도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제주 4·3을 진압하고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군대는 부당한 행동이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학살 명령에 복종한 일은 정당한 것이냐”며 “당시 군인들이 제주도로 진압을 나갔을 경우 훨씬 더 큰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전남교육청과 협조해 공동수업하고, 역사 답사도 기획하는 이 소장은 “순천 등 지역 정치인들의 무관심이 서운하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여순사건, 4·3사건 처럼 풀어지나

    여순사건 발발 70주기인 올해 여순사건 지원 조례가 여수시의회에서 통과됐다. 제주도 4·3사건 처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등을 위한 위령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지 주목된다. 3일 여수시에 따르면 여순사건 위령사업 지원 조례는 지난달 29일 제184회 여수시의회 임시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정식명칭은 ‘한국전쟁 전후 지역민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다. 시는 1억 46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지역민의 명예회복과 상생·화합을 위한 7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념사업은 모든 유가족과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가칭 여순사건 명예회복사업 시민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매년 개최되는 추모행사도 민간인 희생자 유족과 군·경 희생자 유족이 용서와 상생의 분위기 속에서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이날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 마련된 ‘제주4·3과 여순항쟁 희생자 70주기 합동분향소’에 김유화 여수시장 예비후보가 찾아 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전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수지부가 설치해 시민들을 맞고 있다. 김 후보는 “여순사건도 ‘4·3사건’처럼 풀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며 “그동안 국회에서 수차례 무산됐던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돼 희생자와 가족들의 아픔이 조속히 치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중현 민예총 여수지부 사무처장은 “지역의 수많은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여전히 여순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삶과 자연의 결정적 순간, 짧은 언어 긴 여백에 담아

    삶과 자연의 결정적 순간, 짧은 언어 긴 여백에 담아

    “시란 행간과 여백을 통해 더 많은 것을 표현하며, 이 표현되지 않은 침묵과 함축이 내부로부터 어쩔 수 없이 리듬을 생성시킨다.”이시영(68) 시인이 지난해 펴낸 산문집 ‘시 읽기의 즐거움’에 쓴 말이다. 최소한의 언어가 거느린 여백. 그 침묵과 함축의 공간에서 스며 오르는 시적 감흥와 리듬은 그의 열네 번째 시집 ‘하동’(창비)을 미리 내다본 듯하다. 올해 시력 48년을 맞는 시인이 ‘호야네 집’ 이후 3년 만에 펴낸 새 시집에는 “인생과 자연의 결정적 순간”을 그대로 결빙한 2~4줄의 단시들이 자연이 생래부터 터득한 이치와 범속한 세상사의 속살을 꿰뚫는다. ‘대추나무에 대추들이 알알이 달려 있다/스치면서 바람만이 그 노고를 알 것이다’(노고) ‘형의 어깨 뒤에 기대어 저무는 아우 능선의 모습은 아름답다/어느 저녁이 와서 저들의 아슬한 평화를 깰 것인가’(능선)1990년대부터 단시 실험에 골몰해 온 시인의 새 시편들에는 순수한 감정이 생동한다. 특히 시 ‘무제’(‘겨울 속의 목련나무에 꽃망울이 맺혔다/세상엔 이런 작은 기쁨도 있는가’)를 두고 시인의 오랜 지기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시를 잊고 삶을 얻은 것”이라며 “큰 이야기에 묻힌 작은 이야기들의 귀환을 정성스레 갈무리하려는 시인의 뜻, 바로 그 근처가 산화(이시영 시인의 호) 단시의 둥지”라고 짚었다. 시인의 시선은 일상의 찰나에만 머물지 않는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즉결처분된 매형의 죽음을 돌아보며 국가의 폭력을 건조한 어투로 상기시키는가 하면, 1970년대 고은 시인과 그를 감시하던 형사까지 함께 둘러앉아 먹던 아우죽(시 ‘아욱죽’)을 그리워해도 본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에서 ‘하얀 헬멧’의 품에 구조된 생후 3주 된 아기의 숨결(인샬라!)까지 굽어살피면서, 관심글로 지정한 세월호 유족 어머니의 트윗을 그대로 시(2014년 9월 19일)로 들여보내는 등 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며 통증을 공유한다. 동화작가 권정생, 김남주 시인 등 동료 문인들의 죽음 앞에서 삶의 자세를 다시 곧추세우는 시편들은 문학과 시대 앞에 염결한 시인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새벽 전화를 받고 고려병원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황달이 퍼져 샛노란 눈빛의 김남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개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부탁한다. 남은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마라!” 그의 숨이 끊어지고 난 뒤 병실 복도에 나와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다고!’(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생각함)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新국토기행] 전남 여수

    [新국토기행] 전남 여수

    전남 여수(麗水)는 명칭 그대로 ‘아름다운 물’의 도시다. 바다가 비단결처럼 출렁이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시작점이다.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는 아름답기로 이름난 여수에 갈 수 없음을 ‘동국이상국후집’에서 애절하게 노래했다. 조선시대에는 1479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돼 500년간 수군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던 선열들의 얼이 가득 담긴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반도의 도시답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365개의 아기자기한 섬으로 천혜의 자연 어장이 형성돼 사계절 수산물이 넘쳐 난다.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 1960~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단지가 조성돼 근대화에 기여했다. 1998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 등 3곳이 통합 여수시로 출범해 새 역사를 맞고 있다. 인구 30만명으로 전남 최대 도시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성공 개최를 기폭제로 인기 그룹 버스커버스커가 노래한 ‘여수 밤바다’가 히트하면서 제2의 관광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볼거리 ●동백꽃비·기암절벽·희귀 수목 어우러져 그림 같은 ‘오동도’ 멀리서 바라보면 오동잎처럼 보이는 데다 오동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오동도라고 불린다. 동백섬으로도 유명한 여수의 상징이다. 붉은 동백이 꽃비처럼 떨어지는 한 폭의 풍경과 194종의 희귀 수목,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오동도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만큼 운치가 있다. 오동도는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돼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오동열매를 따 먹으러 날아든 봉황을 본 신돈이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 내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아리따운 여인이 도적 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에서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해 겨울부터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신우대가 돋아났단다. 이런 연유로 동백꽃을 ‘여심화’라고도 부른다. 동백과 더불어 곳곳에 있는 신우대는 이순신 장군이 잘라 화살로 사용했다. 해마다 200여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지역의 대표 명소다. 또한 2.5㎞에 이르는 자연 숲 터널식 산책로는 동백이 지는 날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걷기에 좋다. ●기암괴석 절벽 위 ‘향일암’서 바라보는 천하절경 일출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은 한국의 4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로 남해의 일출은 천하절경이다. 연말연시 전국에서 몰려오는 많은 사람이 떠오르는 해와 함께 희망을 염원하는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원통암으로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윤필대사가 금오암으로 바꿨고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 41년(1715년) 때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했다. 손수건만 한 햇볕이 스며드는 일주문 같은 첫 석문을 지나면 다시 돌계단을 오르고 뒤로는 금오산, 앞으로는 돌산의 푸른 바다와 하늘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행의 덤이다. 향일암은 금오산의 기암괴석 절벽에 있다. 산의 형상이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금오산으로 불린다. 산 전체를 이루는 암석 대부분이 거북이 등 문양을 닮아 향일암을 금오암 또는 거북의 영이 서린 암자인 영구암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과 싸웠던 승려들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2009년 12월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주변 건물이 모두 소실됐으나 재건됐다. ●스릴·생동감 동시에 만끽하게 해 준 ‘여수해상케이블카’ 국내 처음으로 바다 위를 통과하는 해상케이블카는 지난해 12월 개통 이후 70만명이 찾을 정도로 대박이 났다. 1000만명 관광객을 목표로 한 여수시는 해상케이블카가 성공하면서 목표를 1300만명으로 상향 조정할 정도다. 아시아에서는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에 이어 네 번째로 만들어졌다. 자산공원과 돌산공원 사이 1.5㎞ 바다 위 80m 상공에 만들어졌다. 이 중 700m 구간은 바다 위를 통과한다. 오동도 등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스릴감과 함께 발밑에 펼쳐진 바다의 생동감을 경험할 수 있다.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털 캐빈 10대(5인승)와 일반 캐빈 40대(8인승) 등 총 50대가 운행되고 있다. 아름다운 여수항과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돌산공원 ‘놀아정류장’ 전망대에서는 여수항과 다도해·여수 도심을 관망하고, 자산공원 ‘해야정류장’에서는 여수신항과 엑스포장·여수 밤바다를 만끽할 수 있다. ●아찔한 해안 절벽 ‘금오도 비렁길’ 따라 펼쳐진 쪽빛 남해 바다를 횡단하는 아찔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비렁길을 걷노라면 쪽빛 남해의 비경에 넋을 놓게 된다. 비렁은 벼랑(절벽)의 여수 사투리로 남면 금오도 함구미마을에서 장지마을까지 해안 절벽을 따라 개설된 총연장 18.5㎞의 탐방로다. 2010년부터 공사를 시작, 지난해 12월 완공했다. 총 5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2011년부터 매년 30만명 이상 찾는다. 금오도까지의 1시간 뱃길은 곳곳에 보이는 각가지 섬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색다름을 선사한다. 군데군데 나무 틈새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관광객들은 눈부신 아름다움이 생각나 다시 찾곤 한다. 보조국사 지눌이 비둘기 세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날아든 이곳에 터를 잡고 절을 세웠다는 옛 송광사 절터도 눈에 띈다. ●분수·화염·레이저 등 활용 오감만족 쇼 ‘여수세계박람회장’ 2012년 해양관광의 메카를 꿈꾸며 개최한 박람회장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당시 인기몰이의 주역이었던 ‘빅-오(BIG-O)쇼’가 최고의 볼거리다. 지난 4일 개막해 11월 초까지 운영되며 1시간 동안 워터스크린, 분수, 화염, 레이저, 안개 등을 활용해 오감을 만족시키는 화려한 멀티미디어 쇼다. 해마다 변화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15만여명이 찾아 지역 관광 핵심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미래해양과학콘텐츠로 구성된 박람회 기념관,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파이프오르간과 전망대가 설치된 스카이타워, 다양한 해양생물과 매력적인 쇼가 가득한 아쿠아리움, 저렴하고 편안한 엑스포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세계박람회 개최 기간 동안 가장 높은 인기를 끌었던 여수 아쿠아플라넷은 지상 4층 높이에 연면적 1만 6400㎡, 6000t급 수조를 갖추고 있다. 벨루가와 바이칼 물범, 남미 물개 등 280여종 3만 3000여 마리의 해양생물이 있다. 인근에는 만성리 바닷가를 끼고 도는 2㎞의 여수해양레일바이크가 가족 단위 휴양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 노동자들을 동원해 자연 암반을 뚫어 조성된 마래터널과 여순사건 당시 부역 혐의자로 몰린 125명이 희생된 형제묘 등 유서 깊은 장소도 만날 수 있다. ■먹거리 ●달지도 짜지도 않은 깊은 맛의 밥도둑 ‘게장백반’ 남해안 대표 수산도시 위상에 걸맞게 싱싱한 먹거리 또한 넘치지만 여수의 별미는 게장백반이다. 여수게장은 너무 달지도 짜지도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깊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여수게장은 돌게장백반, 게장백반, 꽃게장백반 등 종류도 다양하다. 돌게장백반은 돌게를 고추장 양념에 비빈 양념게장이다. 간장게장은 갖은 채소를 듬뿍 넣어 정성스레 끓인 것이다. 된장게장은 토속 음식인 된장으로 맛을 냈다. 칠게장은 갈아 만든다. 돌게는 돌과 비슷한 색깔을 지녀 눈에 띄지만 살도 단단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여수 봉산동에는 내로라하는 게장백반집이 즐비하다. 어느 집을 찾아가도 맛집이 따로 없다. 집집마다 양념이 달라 개성이 있고 전문성이 있어 후회 없이 맛볼 수 있다. 여수 특유의 한 상 가득한 밑반찬들과 함께 먹으면 맛만 좋은 게 아니라 푸짐한 인심까지 느낄 수 있다. ●막걸리 식초 효과… 집 나간 입맛 찾아 주는 ‘서대회무침’ 서대회무침은 1년 이상 발효시킨 막걸리로 만든 천연식초를 사용해 비린내가 적고 담백한 맛이 빼어나다. 막걸리 식초의 새콤한 맛이 어우러져 미식가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남해의 청정해역인 여수 여자만과 봇돌바다에서 주로 자망으로 어획된다. 여수에서는 귀한 손님에겐 예를 갖춰 서대회를 대접한다. 그만큼 맛이 깊고 풍부하고 귀한 맛이기 때문이다.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새콤달콤한 서대회무침은 잃었던 입맛을 돋워 주는 별미다. 임금님 수라상까지 오른 귀한 음식으로 여수연안 해변과 남산동 수산물특화시장, 풍물시장, 국동, 여서동의 식당거리 등에서 서대의 참맛을 볼 수 있다. ‘서대가 엎드려 있는 개펄도 맛있다’고 할 만큼 서대는 맛있는 생선으로 맛이 담백하고 부드러워 어린이나 노인들이 먹기에도 적당하다. 또 칼슘·철 등의 함량이 높아 골다공증 예방, 조혈 작용을 해 건강기능성식품으로 손색이 없다. 혈전, 심근경색, 뇌 기능 보정에도 작용해 학습 발달에 탁월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톡 쏘는 아삭함에 홀리는 ‘돌산 갓김치’ 돌산 갓은 여수의 대표 특산물이다. 돌산 갓으로 담근 김치는 갓에 일정량의 파와 고춧가루, 마늘, 생강, 멸치액젓과 생새우를 함께 갈아 만든 양념을 섞어 버무려 숙성한다. 갓 특유의 톡 쏘는 향취와 젓갈의 짭짤함이 삭아 입맛을 돋우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깊은 맛이 있다. 여수 어디에서나 눈에 보이는 돌산 갓김치는 돌산에서 시작된다. 돌산의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알칼리성 토질이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낸 수작이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문 돌산에서 남해의 해풍과 함께 키워 낸 돌산 갓은 크기와는 달리 섬유질이 부드럽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뛰어나 그 색다른 맛이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돌산 갓이 알려지게 된 것은 30여년 전부터다. 짭짤한 해풍과 황토, 온화한 기온이 만들어 낸 돌산 갓은 봄에는 봄동 갓, 여름에는 김치 갓, 겨울에는 김장 갓으로 나뉜다. 우리가 먹는 돌산 갓김치는 대부분 봄에 생산되는 봄동 갓이다. 항산화작용을 가져 노화를 억제한다고도 알려진 무공해 건강식품으로 성인병과 악성빈혈 예방, 허약 체질 개선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아파도 숟가락 들게 하는 ‘장어구이·탕’ 여수의 대표적인 스태미나 별미 음식이다. 지역 장어요리 전문점에서 사시사철 맛볼 수 있다. 우거지장어탕은 담백하고 고소하며, 들깻가루를 넣어 장어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화롯불에 굽는 장어구이는 양념과 소금구이 두 종류다. 쫀득하면서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 장어의 흰 속살은 죽어 가는 병자도 벌떡 일어서게 한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된장·겨자소스와 찰떡궁합 ‘갯장어 회·샤부샤부’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갯장어 회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는 갯장어 샤부샤부는 여름철 으뜸 보양식이다. 갯장어는 5월부터 11월에 많이 잡힌다. 살에 촘촘히 칼집을 넣어 잔가시와 함께 된장이나 겨자 소스 등과 함께 먹으면 풍미가 일품이다. 살이 단단한 갯장어 회는 오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배어난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순천에 故손양원 목사 두 아들 순교 표지판 제막

    순천에 故손양원 목사 두 아들 순교 표지판 제막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고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동신 형제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표지판이 전남 순천시 황금로 패션상가 거리에 세워졌다. 동인(당시 24세)·동신(19세) 형제가 총살당한 자리다. 30일 순천시 등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기독학생 활동을 하다 같은 또래의 좌익 학생들에게 체포돼 고문을 받던 중 친미주의자로 오해받아 그해 10월 21일 총살당했다. 폭 60㎝, 높이 120㎝의 표지판에는 두 형제가 독립운동 후손으로 좌익에 반대했던 국가관, 총살당한 배경 등 당시의 좌우익 대립으로 인한 피해 등이 기록돼 있다. 그동안 손 목사의 순교 신앙은 기독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와 오페라, 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소개됐지만 두 아들의 순교에 대해 조명이 이뤄진 것은 처음이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고 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세상에 큰 울림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50년 9월 여수시 둔덕동에서 자신이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하고 순교했다. 순천시 기독교 선교역사박물관은 동인·동신 형제의 순교와 여순사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지역의 역사성을 정립하기 위해 순교지 표지판을 제막하게 됐다. 순천 중앙교회 임화식 목사는 “이번 제막식은 67년 동안 묻혀 있던 청년 순교자들의 귀한 믿음의 유산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손 목사님의 원수를 용서한 사랑과 동인·동신의 희생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빈농 아들로 태어나 230만여㎡ 농장 일군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김문이 만난사람] 빈농 아들로 태어나 230만여㎡ 농장 일군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아무리 큰 거목도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낸다. 어떤 시련도 묵묵히 참아낸다. 캄캄한 어둠 앞에 있더라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하며 새 아침을 기다린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그렇게 크고 자란다. 거목처럼 외롭게 살아온 한 사람의 처절한 외침을 들어본다. “저에게는 세 가지 굶주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배를 곯았던 굶주림, 두 번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사랑마저 새어머니에게 빼앗겨 가족 사랑에 대한 굶주림, 마지막이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 그것입니다. 저는 육신의 배고픔과 사랑의 굶주림, 그리고 배움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 가지 굶주림을 넘치도록 채웠습니다.” 그랬다. 운외창천(雲外蒼天)이다. 구름 너머에는 항상 파란 하늘이 빛나고 있음을 기다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실패를 겪었음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결국 구름 걷히고 파란 하늘을 만났다. 시골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땅에 배추밭을 일군 신화를 만들어 냈고, 전남 강진의 척박한 땅에 여의도 면적에 가까운 기름진 농장을 가꾼 주인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장학회와 농촌문화재단을 만들어 숨은 일꾼들을 발굴해 도움을 주는 기부 실천자로 살아가고 있다. 김용복(81) 영동농장 명예회장이 주인공이다. 강진 농장의 실질적 운영은 아들에게 맡기고 현재 사재를 몽땅 털어 설립한 장학재단과 복지문화재단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가 살아온 대강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렇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했다. 먹고살기 위해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출발해 야간 대학을 나왔다. 그러다 베트남전 때 미국 빈넬 회사에 보급행정 기능공으로 지원해 5년간 번 돈으로 땅을 사며 재산가가 된다. 그렇지만 첫 사업으로 시작한 회사에서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회사를 정리하고 파산한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로 훌쩍 떠난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막에 배추를 심어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얻었고 ‘석탄 산업 훈장’을 받았다. 지난 18일 서울 면목동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팔순의 나이지만 또렷한 말투에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척박한 사막에 씨를 뿌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합니다. 작으나마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 사회, 우리 국가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성과를 사회에 돌림으로써 제가 입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실패를 거친 그에게 어쩌면 돈의 의미가 남다를 수 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고 구린내가 난다.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면 향내가 나고 비료가 돼 죽어가는 생명도 살린다”는 표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생을 마감하고 저세상으로 갔을 때 하느님께서 ‘용복아 너는 이승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예 저는 흙농사, 사람농사, 그리고 사랑농사를 짓다가 왔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복 장학재단’ ‘한사랑 농촌문화재단’ 등 다양한 장학과 후원의 일들을 펼치면서 현직 판사, 대학교수, 의학 박사 등 사회 인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낮은 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실수투성이의 삶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우리의 후배들은 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 우리 후배들이 헤쳐나가야 할 장구한 미래에 저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는 소박한 생각들이 작은 거름이나마 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는 질곡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두 가지 꿈을 항상 떠올렸다. 첫째,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 그들이 성장해서 국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장학사업이다. 두 번째, 건실한 농부였지만 땅이 없어서 항상 소작농의 서러움 속에서 힘겹게 살았던 아버지를 위해 논과 밭을 사들여 실컷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3년 음력 5월 5남매 중 막내로 강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산이라야 논 두 마지기(400평)가 전부일 만큼 가난한 농부였다. 어머니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났고 7살 위의 형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1950년 3남매의 자녀가 있는 여인과 재혼을 했다. 가뜩이나 가난한 집안에 식구가 더 늘어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등록금을 넉 달씩이나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눈물, 콧물이 범벅인 채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부산역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며 배고파 울고, 외로워서 울고, 서러워서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미군 병사를 우연히 만났다. 중학교 때 배운 영어를 떠올려 ‘나는 촌놈이며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배가 고프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미군은 범일동 소재 미군부대로 데려가 하우스보이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멸시를 받는다. 서울 등지에서 피란 내려와 일하는 어른들한테 ‘전라도 놈이지 너는, 물에 빠진 놈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평생 칭찬받는 전라도 사람, 모범적인 전라도 사람이 반드시 되겠다’고 다짐했다. 부산에서 3년 동안 하우스보이를 하면서 모은 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3남매를 데리고 온 새엄마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겨 찬밥신세가 됐다. 다시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갔다. 전남도청 앞을 걷다가 미군 지프차를 발견하고 다가가 ‘부산에서 하우스보이로 3년 동안 일하면서 영어와 운전기술을 배웠다’라고 말했더니 차에 타라는 대답과 함께 육군보병학교 상무대 군사고문단에서 수송부 통역원으로 취직돼 13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9·28 서울수복 후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는 영등포에 있는 미군 45공병단 수송부 트럭운전수로 일하다가 육군 운전병으로 자원입대해 1958년 만기제대했다. 이듬해 결혼한 그는 미 빈넬회사 서울지사장 운전수로 취직했으며 1960년 건국대 야간대학을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다. 6년 뒤 베트남 파견 기술자 모집에 응시해 캄란만에서 일을 했다. 그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받은 첫 월급 350달러를 강진군수에게 보내 고향의 불우한 환경의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이후에는 월급의 80%를 부인에게 보냈다. 1973년 베트남에서 귀국한 그는 서울 창동에 국제수출 포장공업사를 창업했다. 그러나 공장에서 숙식하던 직원 5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2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간 그는 실뱀장어를 양식하는 일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경기도 성남에서 한 그릇에 150원하는 설렁탕 장사를 했다. 그러던 1979년 2월 친지인 전 사우디아라비아 노무관의 도움으로 리야드 남쪽의 한 농장으로 가게 됐다. 달랑 삽 4자루를 들고 사막에 도전했던 것. 이때 다들 불가능하게 여겼던 배추와 무 재배를 시작했다. 때마침 주변에 있는 경남기업 아파트 건설현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첫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사막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라면 하나로 두 끼니를 때우면서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악전고투를 겪으며 500㎏을 첫 수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15만명의 한국 일꾼들에게 김치를 제공하게 됐고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두 번째 꿈인 한국에서 큰 농장주가 되기를 실현해나간다. 여러 친지에게 버림받은 땅을 구입해 차근차근 농경지를 조성했다. 1982년 강진군 신전면과 도암면 일대의 미완성 간척지를 매입한 뒤 70만평의 현대식 벼농사 농장을 가꾸며 오늘에 이르게 됐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남기는 일은 사진에 맡기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일어나는 일,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물에 대한 느낌은 삶의 기록으로, 인생의 참모습으로 영원히 남기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에게는 앞으로 할 일이 많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이 이미 시작한 장학사업을 통한 인재발굴이다.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그때의 일’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매년 선발해 지금까지 160여명이 혜택을 봤다. 2004년에는 사재 100억원을 출연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농업발전에 기여한 숨은 일꾼들을 돕고 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남아 있는 부동산을 처분해 불우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덕은 고독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또한 덕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용복 회장은 193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인생을 출발했다. 나중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주한 미군 제7사단 행정도서관 관장 보좌관(1960~1963년), 주한 미8군 사령부 교육처장 보좌관(1963~1965년), 주베트남 미 빈넬회사(미 국방성 기술용역회사) 보급 행정감독관(1965~1968년) 등을 지냈다. 이후 국제 수출포장 공업사 대표(1970~1972년), 사우디아라비아 영동농장대표(1979~1989년), 건국대 총동문회 건국장학회장, 건국대 총동문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영동농장 회장, 재단법인 용복장학회 설립자, 재단법인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설립이사장, 도산아카데미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막에 승부를 걸고’ ‘그때 처절했던 실패가 오늘 이 성공을 주었다’ ‘흙농사, 사람농사, 그리고 사랑농사’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 등을 비롯 중국어판 자서전을 출간했다. 석탑산업훈장(1982년), 내무부장관 표창(1983년), 페스탈로치상(1995년), 도산경영상(2009년), 농업기업부문 인간상록수(2012년) 등을 수상했다.
  • 둘로 나뉜 한국 현대사, 어떤 책 읽어야 할까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한국사에 대한 조명이 학자마다, 사관마다 다르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된 책을 훑어보는 수밖에 없다. 최근 나란히 나온 역사서를 통해 역사의 씨실과 날실을 꿰맞춰 볼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친일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한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민족문제연구청년모임·정운현 지음, 책보세 펴냄)는 친일 문제 100선을 꼽고, 저자가 쉽게 대화하듯 답을 덧댔다. ‘친일청산’의 구체적인 뜻부터 친일행적에 대한 판단과 북한의 친일청산 해법, 친일파의 공과론, 현대판 친일파 이해 등 다양한 의문점을 풀어준다. ‘두 개의 한국 현대사’(임영태 지음, 생각의길 펴냄)와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현대사’(남정욱 지음, 시대정신 펴냄)로 현대사 집필의 차이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 ‘두 개의 한국 현대사’는 상식과 비상식, 진실과 왜곡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현대사를 직시하고 비판한다. 한국사 교과서 사건, 광복절 논쟁, 국정원 대선개입 등 결정적 사건을 골라 한국사의 흐름을 정리했다.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현대사’는 보수 시각과 궤를 같이한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을 반란·폭동으로 설명하고 5·16군사정변을 ‘군사혁명’라면서 근거를 내세우는 등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일제·전쟁속 나환자 사랑에 헌신한 목자의 삶

    일제·전쟁속 나환자 사랑에 헌신한 목자의 삶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받아들이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환자들을 돌보다 생을 마감한 사람. 손양원(1902~1950) 목사의 삶은 민족주의자나 성자, 나환자의 친구 등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삶의 폭과 깊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사랑’이다. 좌우 경계를 넘어 오직 신의 편에 섰던 그는 한평생을 낮고 그늘진 곳에서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 그의 삶을 한 편의 동화와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성탄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KBS 1TV에서 25일 밤 10시 방영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은 성자나 위인이 아닌 인간 손양원의 행적과 내면을 들여다본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만세운동을 이유로 다니던 중학교에서 쫓겨났다. 일본 도쿄의 중학교로 유학을 떠나 학업을 계속한 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순례자와 같은 목회를 시작했다. 1926년 부산 감만동교회에서 나환자를 위한 삶을 꿈꿨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나환자들이 있는 전남 여수 애양원에 부임했다. 나환자들의 상처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들이는, 가족들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낮췄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른 기간만 제외하고 순교하는 날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총으로 쏜 원수 청년을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고, 결국 그를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2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손 목사는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두고 피란을 갈 수 없다며 교회에 남아 있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의 48년간의 짧은 삶은 그 자체가 용서와 사랑, 구원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과 60여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을 증언해 줄 이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여수 애양원에서 그에게 세례와 학습을 받은 나환자 노인, 손양원의 마지막 순교 상황을 목격한 유일한 증언자, 그의 두 아들이 여순사건으로 희생될 당시 목격자 등의 인터뷰를 담아냈다. 손 목사의 희생적인 삶은 숭고했으나, 그 딸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제작진은 그의 맏딸인 손동희씨의 회고록을 통해 가족이 감수해야 했던 말 못할 고통도 되짚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문화마당] 우리 집 안방의 언론과 언론파업/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우리 집 안방의 언론과 언론파업/신동호 시인

    옛날 신문지에서 풍기던 휘발유 냄새는 왠지 새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 손에 전달하기 전에 나는 갓 배달된 냄새로 세상을 읽었다. 흑백사진 속의 현장들은 대문 밖 일들에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신문을 펼쳐든 아버지는 또 얼마나 근사했던가. 하루종일 작은 가게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아버지였지만 세계와 소통하는 듯 보였다. 그 풍경이야말로 어른들의 영역이라 여겼고 지금도 나는 버릇처럼 신문을 펼쳐든다. 그 안에 진실과 새것이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고백하자면, 대학생이 되어서 운동권이 된 것은 1980년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그해 봄의 기억은 온통 걱정이던 어른들의 얼굴이다.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지나온 아버지는 특히 더했다. 불안한 아버지의 등 뒤에서 건너본 신문지 1면. 폭동, 간첩, 내란과 같은 단어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나 대학에서 만난 1980년 5월의 진실은 너무나 기가 찼다. 계엄철폐를 외치던 학생들을 향한 발포,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과 벌인 끔찍한 전투. 어렵게 들어간 학보사를 그만두고 나는 금서였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었다. 활자와 전파를 매체로 진실을 보도하는 저널리스트, 기자의 꿈도 그때 접고 말았다. 진실의 그릇이라고 끊임없이 언론을 짝사랑하면서 동시에 의심하는 악습까지 얻었다. 그로부터 삼십 몇 년이 흘렀다. 지금도 정부는 나치독일의 괴벨스같이 언론을 장악하려 하고 기자들은 견디다 못해 파업을 하고 있다. 거짓말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기술로 괴벨스는 히틀러의 환심을 샀다. 언론을 정치에 이용한 최초의 인물로, 괴벨스는 대중들의 증오를 한없이 가중시켜 결국 국가를 파멸로 몰아갔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이런 행동이 2012년 서울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을 통해 보는 것을 경계하라 했다. 현대사회는 안방에서 세계와 삶을 본다. 보는 삶에 현혹되면 나의 삶은 세계의 부산물에 불과해지기 쉽다. 가난할수록, 지식이 충분하지 못할수록 활자와 매체에 더 지배되고 거짓에 더 노출된다. 마그리트는 그래서 보는 것보다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식을 쌓은 기자의 양심이 중요한 건 이런 까닭이지 싶다. 알 기회가 없고 언론이 진실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범부들에게 우리 언론이 괴벨스와 다르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다. 흥미 경쟁으로 치닫던 ‘경마저널리즘’과 뉴스 결정권자가 취사선택하여 내용을 왜곡하는 ‘게이트키핑’은 시청자를 우매하게 만들었다. 없는 사실을 생산하고 쟁점을 만들어 대중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몰아가는 언론의 모습은 독자를 지치게 만들었다. 권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소위 진보언론들조차 이런 행동을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언론의 위기는 정부의 탓만도 아니다. 여기에 디지털의 발전이 극적으로 더해졌다. 디지털 문화가 가져온 쌍방향성, 다방향성은 단일한 시선에 대한 도전이며 기성 언론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이다. 이제 안방에서 몇몇 아버지들은 스스로 세상을 읽고 뉴스를 생산한다. 소셜네트워크 안에서는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 복합적인 시선이 시시각각 부딪친다. 등 뒤에서 아버지의 신문을 넘겨보던 아들도 나름대로 자기의 시각으로 가세하며 사건의 생산자가 곧 뉴스의 생산자인 경우도 많아졌다. 기성의 언론은 다종다기한 시선과 경쟁해야 하는 이 상황을 억지로 외면하고 옛 향수에 젖어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국민들은 여전히 언론이 우리의 안방에 진실을 전달해 주길 바란다. 서로 각자인 세계를 연결하고 분석하며 그 의미를 집어낼 수 있는 이들은 기자들이다. 관청이 먼 서민들의 입이 되어 줄 이들도 그들이며 저 깊숙이 감춰진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것도 그들뿐이다. 하루빨리 기자들이 제자리에 돌아와 진실과 새것을 알려주면 좋겠다. 그때 나도 아들 앞에서 위엄 있게 신문지를 펼쳐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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