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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커스 투데이-새 대통령 확실 ‘타보 음베키’

    ‘포스트 만델라’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도자 타보 음베키(57).2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압승함에 따라 오는 14일 하원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거친 뒤 16일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하는 형식적인절차만 남겨놓고 있다. 신중하고 온화한 이미지의 음베키는 투사의 감성과 테크노크라트의 명철함을 동시에 갖췄다.교사출신의 부모 모두 투철한 반(反)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활동가.아버지 고반은 지난 64년 넬슨 만델라와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은 저명한 투사였다. 음베키 역시 10살때부터 빈병을 주워다 자금을 대고 청년 그룹에서 활동해온 소년투사였다.ANC는 그에겐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정부가 ANC활동을 불법화한뒤 추방돼 90년 귀국할때까지 30여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추방기간 동안 영국 서세스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ANC런던 지부에서 근무하며 각국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은 그의 외교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때 공산주의를 추종하기도 했지만 그의 기본 경제 철학은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성장위주 정책.42%의 흑인 실업률,그리고 만연한 범죄를 해결하는것이 그의 과제이다. 앨 고어 미 부통령과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부주석을 초청,경제협력관계를 정립하는 등 남아공 경제개발에 진력하고 있다. 만델라의 카리스마를 따라가지 못하는데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너무 민감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음베키를 94년 부통령과 97년 ANC당수에 지명,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뒷전에 물러난 만델라는 “나는 타보가 이 늙은이보다 훨씬 더 이 나라를 위해 일을 잘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해왔다. 차기 퍼스트 레이디가 될 부인은 남아공의 여성개발은행 국장인 자넬레.둘사이에 자녀는 없다. 김수정기자 crystal@
  • 포커스 투데이-국제사법재판소 수석검사 루이스 아버

    “밀로셰비치의 전범 기소는 게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반드시 체포해 법정에 세우고 말겠다” 27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대통령과 4명의 유고 정치지도자및 군 사령관을 전쟁범죄혐의로 기소한 유엔 국제 사법재판소(ICTY)의 수석 검사 루이스 아버(52).인류성을 말살한 무자비한 전범 용의자에 대해서는 어떤 자비도,사면도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96년 리차드 골드스턴의 뒤를 이어 수석 검사직에 오른 그녀의 이미지는 강직 그 자체다.‘대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정치적인’ 접근법도 무시한다.밀로셰비치의 기소로 코소보 사태의 외교적 해결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는 그녀에겐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그녀는 지난해 말 코소보남부 지역의 알바니아계 주민 학살 사건 이후,나토측의 유고 공습이 이어지는 현재까지 수하 40명의 검사를 총동원,증거를 모아왔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아버는 국제적인 명성못잖게 고국에서도 강직한 법조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장 크레티엥 캐나다 총리는 최근 캐나다 대법원장의제1후보로 그녀를 꼽고 아버가 캐나다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캐나다 호텔 체인 소유주의 딸로 태어난 아버는 온타리오주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사로 재직했고 또 토론토 요크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캐나다 시민자유협회 부회장 시절엔 죄수들의 투표권 운동을 벌이는 등 인권운동에서는둘째가라면 서러운 맹렬 여성.세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姜基遠 여성특위 위원장

    얼마 전 터키의 한 여성 의원이 이슬람교식으로 ‘차도르’라고 부르는 스카프를 머리에 쓴 채 의회에 출석했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박탈당했다는 외신 뉴스를 보았다. 터키는 이슬람교 국가이면서도 일찍이 건국의 지도자 케말파샤 때부터 획기적인 개혁조치를 많이 취해 환골탈태의 노력을 계속해온 현대적인 국가로 알고 있다. 이 구체적인 사건에 관하여는 자세한 내용을 더 알아 봐야겠지만 원래 개혁적인 정신으로 시작한 ‘차도르 벗기’정책이 이제 와서 혹시라도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자기 몸 꾸미는 자유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표현을 제한하는식으로 운영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여 착잡했다. 꼭 이 뉴스 때문이라기보다 평소부터 우려하는 것은 세계 각 나라에 엄존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 침해,인권 모독적 관행이다.여성 성기(性器)를거세 하는 풍습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고,어떤 나라에서는 여성의 지참금이 적다고 결혼했다가 쫓겨나는 여성이 한 해에 수천명이나 되며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죽는 관습도있다.그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많은 나라에서 남성은 아이를 만들거나 담배나 피우며 빈둥거리고,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의 경제적인 생존 관련 모든 노동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생활비 확보 책임까지 전담하고 있다. 아직도 여성에게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그 타당성 여부를 논의중인 나라도 있다.정도문제가 있긴 하지만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인권침해 관행을 들자면 세계적으로 끝이 없다. 이와 같은 뉴스나 사례에 접할 때마다 몸 속에서 솟구치는 좌절과 동정과분노,동병상련식의 심정적 고통을 느낀다. 이는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리라고 확신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여성이 억압받고 상처받고 짓밟히고 신음하며 살아갈때 우리는 하나의 여성과 인간으로서 무심할 수 없고 편안할 수도,행복할 수도 없다. 이 고통의 원천을 없애지 않고는 우리 자신의 문제가 끝날 수가 없다는 점에서도 세계는 하나이고,작은 지구촌이라는 표현이 실감이 난다.
  • 이희호여사 청와대 근황 소개

    “주방 직원들이 모양새 내는데 치중,과일살을 너무 많이 깎아낸다” 대통령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는 이처럼 ‘소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청와대안주인으로서의 근황을 전했다. 어느새 1년 넘게 청와대 생활을 한 이여사다.그는 중앙일보 26일자 회견에서 퍼스트레이디의 적극적 역할론을 폈다.즉 “국가지도자의 부인도 국익에도움이 되고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청와대 생활이 “사저 생활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솔직히털어놓았다.특히 “대통령과 얘기할 시간이 이전보다 없지만 ‘이 말은 꼭전해드려야겠다’ 하는 얘기는 편지를 써서 전해드리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여사는 앞으로의 활동방향도 공개했다.즉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돕는 일 외에도 소외된 분들을 지원하고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일 등을 위해 활동해나갈 것”이라는 요지였다. 이여사는 ‘가신(家臣)’이나 친·인척의 국정 관여에 대해 대통령의 당부가 있느냐는 질문에 “친인척이나 형제들 문제는 오히려 야당생활할 때보다더 힘이 든다”며 “‘사람도 가려서 만나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고항상 말씀한다”고 전했다.“지난 20일에도 미국에서 잠시 들른 막내(弘傑씨)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사람만나는 것 조심해라’고 당부했다”는 비화를 소개했다.이여사는 이밖에 “대통령이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남에게 일절 말하지 않지만 대신에 몇 시간씩 서가를 뒤적이며 사색에 잠기거나글을 쓰고 메모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며 김대통령의 근황도 전했다.
  • 對北 강성발언뒤 康통일‘곤혹’

    강인덕(康仁德) 통일부장관은 요즘 곤혹스런 표정이다.그의 최근 대북 ‘강성발언’에 대해 일부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지난 19일 이화여대 정보과학대학원 여성최고지도자 특강이 빌미가 됐다.당시 강장관은 “김정일(金正日)정권은 인류역사의 진운을 봐서는 남아 있을수 없는 정권이며,붕괴되거나 변화돼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파문이 일자 통일원 당국자는 21일 “특강내용이 거두절미됐다”고 하소연했다.장관 발언을 강의 전체의 맥락에서 봐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이설명은 일면의 설득력을 갖는다.하지만 장관의 어조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측의 ‘햇볕 일변도’ 노선에도 불구,좀처럼 북한의 대남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데 대한 실망의 표시라는 해석도 있다.이에 대해서도 강장관 측근인사들은 펄쩍 뛴다.북한의 실상을 잘 모른 채 대북 포용정책을 쓰고 있는게 아니냐는 국민 일각의 의구심을 해소하려는 어법이었을 뿐이라는 설명이었다.때문에 다른 추측도 나온다. 대북 정책 추진과정에서 통일부가 힘있는 부서들에 의해 소외된 데 대한 불만이 간접 표출됐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구본영기자 kby7@
  • 金대통령 ‘충효사상의 현대적 해석’ 기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충효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국내 모영자신문과자매지인 경제신문 14일자에 기고했다.지난 3월18일 유교지도자들과 오찬에서 행한 ‘충효사상을 오늘에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연설을 기초로정리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이 기고문에서 “지난날의 충효는 임금이 임금답지 않아도 신은 신다워야 했고,부모는 부모답지 않아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일방적관계였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개인의 인격과 사회계약사상을 토대로 한 오늘날 민주주의의 도덕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이 연장에서 오늘의 충의 대상은 국가가 아닌 국민이며,헌법에도 국민이 주권자임을 명시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효도 이제는 부모와 자식 사이가 상호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격적 관계로 발전돼야 가능하다고 역설했다.그런 점에서 “젊은 과부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 개가하지 않고 일생을 희생하거나 젊은 여성이 가난한 부모 봉양과 형제 교육을 위해 화류계에 투신하는 일을 효라고 권장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특히 주목되는 대목은‘사회적 효’다.정부가 자식들의 세금을 받은 예산으로 노인들을 보살피는 등의 복지정책을 펴는 것을 효로 연결시켰다.
  • 국민회의 ‘젊은층 수혈’ 밑그림 윤곽

    金大中대통령이 23일 젊은 층 수혈의 대상으로 시민단체,전문지식인,신지식인,벤처기업인 등을 거론한 것은 향후 영입인사의 대상을 구체화한 것으로받아들여진다.이들 그룹은 국민회의가 21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육성하고,전국정당화를 위해 영입 노력을 기울이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영입작업의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국민회의 지도부는 金대통령의 이같은 구상에 대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鄭均桓사무총장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가야 한다”며 당위론을 폈다.鄭東采기조실장은 “젊고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항용 있었던 일로 대통령의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라며 “15대 총선에서도 다양한 그룹에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수혈받았다”고 강조했다. 사실 국민회의가 15대 총선에서 배출한 의원 79명 가운데 41명이 초선 의원들이다.특히 재야 운동권,법조계,언론계,학계,노동계,기업경영,연예 방송,군,여성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수혈된 초선 의원만 30여명에 달한다.재야 운동권 출신의 金民錫 金榮煥의원,언론계 출신의鄭東泳 鄭東采의원,법조계 출신의 辛基南 千正培 秋美愛의원,학계 출신의 金翔宇 柳宣浩의원,노동계의 方鏞錫의원 등이 그들이다.기업인 출신의 丁世均의원과 방송인 출신의 鄭漢溶의원 및 김한길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따라서 15대 총선에서 수혈된 인재군을 보면 앞으로의 영입대상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집권여당으로서 수혈의 폭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야당에 비해 여당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가 용이하다는 이점 외에도 대상 그룹의 범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과거에는 그 대상이 재야 운동권과 전문지식인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그러나 金대통령이 밝혔듯이 수혈 대상이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독창성을 가진 신지식인,젊고 유능한 벤처기업인,최근 우리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시민 사회단체로 확대될 전망이다.당내부에서는 젊은 층 수혈이 최근 청와대 비서실 개편에서 알 수 있듯이 진행형이며 전당대회와 16대 총선을 앞두고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젊은 신진 개혁세력’시민단체 주역들 급부상

    金大中대통령이 ‘젊은 신진 개혁세력’에 대한 영입 구상을 밝히면서 시민단체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정부측에 재벌개혁을 촉구하는가 하면 소액주주운동등을 통해 기업의 경영 투명성 제고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특히 파행국회시국회의원 세비반납운동을 벌이고 국정감사에서 의정감시의 안테나를 세우는등 외곽에서 정치권의 개혁에도 앞장서 왔다. 시민단체들은 金대통령의 구상과 관련,두가지 반응이다.시민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긍정적인 면과 시민운동의 순수성 훼손을 우려하는 지적도 만만찮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갖고 있는 개혁성 때문에 여권은 ‘수혈 대안세력’으로 매력을 갖고 있다.특히 시민단체들을 이끌고 있는 ‘젊은 지도자’에게 관심이 많다.여권에서는 벌써 ‘젊은 지도자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스크린작업에 나서고 있다. 자천타천 ‘영입’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각 시민단체의 리더들에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사무처장 朴元淳변호사,孫赫載협동사무처장,曺喜嚥 성공회대교수와 경실련의 柳鍾星사무총장,李弼商고대교수가 있다.또 환경연합의 崔冽사무총장,녹색운동연합의 張元 대전대교수 등이 있다. 정치개혁시민연대의 孫鳳淑공동대표와 한국시민단체협의회의 徐京錫사무총장,한국 YMCA 李南周사무총장이 거론된다.여성단체연합의 李景淑,池銀姬,申蕙秀 공동대표와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金在玉사무총장,흥사단의 朴聖圭사무총장,한국유권자운동연합의 金秉準집행위원장 등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崔光淑 bori@
  • [제2공화국과 張勉](2)-국토건설사업(下)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국토개발이라는 고유목적 외에도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증대,산업활성화,국가 인재충원제도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적,제도적 파급효과를 거두었다. 국토건설사업본부(이하 본부)는 중앙청 서남쪽의 목조 2층 건물에 자리잡았다.민(民)과 관(官)이 함께 참여한 이질적인 집단이지만 당대 엘리트를 모은 데다 대우도 좋아 본부는 활기차게 돌아갔다.본부 간사이던 朴敬洙씨(69·작가)는 “월간 ‘사상계’에서 받은 봉급이 일반직장인보다 훨씬 많았는데본부는 그 두배 정도를 주었다”고 회고했다. 본부가 처음 한 일은 국토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지휘·감독할 일꾼을 뽑는 것이었다.국무원사무처(총무처 격)는 ‘병역을 마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국토건설추진요원(이하 건설요원)을 공개 모집했다.석달 동안건설현장에서 근무하고 나면 국가공무원 4∼5급이나 지방공무원 3∼4급으로임용한다는 조건이었다.말하자면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것인데 이는 해방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모집공고가 나자 대졸자 ‘1만수천명’(당시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증언)이지원했다.그 무렵 전국에 대학이 63군데,대학생 정원이 9만7,819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합격자는 사무직 1,614명,기술직 452명 등 모두 2,066명이었다.여성도 21명 포함됐다. 건설요원들은 61년 1월9일부터 교육을 받았다.교육장에는 종교인 咸錫憲과朴鍾鴻 서울대 교수 등 당대의 지성들이 나와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이들은 2월27일 중앙청광장에서 수료식을 가진 데 이어 각 군(郡)에 15∼17명씩 배치돼 3월1일부터 현장근무에 들어갔다. 국토건설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커다란 성과를 불러왔다.건설현장에는 배고픈 국민들이 새벽 5시쯤부터 몰려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섰다.하루 일을 끝내면 이들은 품삯으로 돈과,쌀·보리·비누·광목 같은 물건을 섞어 받고 만족한 표정으로 귀가했다.품삯에 현물(現物)이 포함된 까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이 사업의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잉여농산물을 품삯으로 지급하면서도 다른 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계산했다.쌀·보리는 정미소에서 찧었고 면화는 방직공장에 보내 광목으로가공했다.유지(乳脂)는 비누로 만들었다.따라서 건설현장에 나온 국민은 구하기 힘든 생필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정미소나 방직공장·비누공장 등은 가동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그만큼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은 정교했다고평가해줄 만하다. 국토건설사업은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나갔다.일부 지역에서 잡음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3월30일 농림부는 25일까지의실적을 공개했다.2만6,089정보에 조림(造林)을 해 계획의 50%를 달성했으며,산·바닷가의 흙·모래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고자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는 사방(砂防)사업도 목표의 51%인 2만8,958정보를 끝마쳤다. 국토건설사업은 이같은 업적말고도 공무원 공채의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당시는 공개 채용 없이 기관장이 발탁해 쓰면 시일이 지남에따라 자동 승진하는 구조였다. 정헌주옹(84)은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잡았다“면서 그 뒤 일반기업체에도 퍼져 나갔다고 회고했다.또 “공채가 공고되자 61년 들어 대학가에서 시위횟수가 크게 주는 등 사회안정에도 큰몫을 했다”고 강조했다. 첫 공무원 공채는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이는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이었고 그 뒤 숭전대총장·부총리를 역임한 李漢彬의 논저 ‘사회변동과 행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전부총리는 건설요원 채용이 “관료제에 새로운 사회세력,특히 젊은이들을 흡수하는 기본적인 통로로서 활용됐으며 이 젊은이들은 점진적으로 승진해 관료제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활력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공무원 공채 1기’는 5·16쿠데타 후에도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우리 사회 정·관계,경제계를 주도하는 인물로 성장했다.鄭寅用전부총리,金泰鎬국회의원(내무장관 역임),崔同燮전건설부장관,金昌甲전교통부차관,朴進球울주군수들이 ‘1기 출신’이다. 그러나 장면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는 바람에끝을 맺지 못했다.사업을 이어받은 쿠데타세력은 61년 말 “연인원 2,500만명을 고용해 계획의 94%를 완수했다”고 공식발표했다.장면정부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그 과정은 安京模전교통장관(82)의 증언에서 분명해진다.안옹은 본부 기술부 차장으로 일하다 5·16세력에게 불려가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브리핑했다.이후 같은 업무를 계속하다 64년 교통부장관,67년 수자원개발공사사장으로 발탁돼 소양강댐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등을 직접 건설했다. 60년대 국토개발의 주역인 안옹은 “장면정부도 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할 수있었다”고 단언하고 그 근거로▒정부 의지가 굳건했고▒미국이 적극 지원했으며▒사업에 참여한 관료들이 능력을 갖추었음을 들었다.그는 쿠데타세력이 국토개발에 성공한 것도 장면정부의 사업계획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張勉총리의 생애▒1899년 8월28일=인천세관에 근무하는 張箕彬과 黃누시아 사이에 장남으로출생.본관 玉山,호는 雲石▒1906년=인천성당 소속 박문학교 입학▒14년=수원농림학교 입학▒16년 5월20일=金商集의 딸 金玉允과 결혼▒17년=수원농림 졸,서울 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학과 입학▒20년=청년학관 수석 졸업,도미▒21년=뉴욕 맨해튼가톨릭대 입학▒25년=맨해튼대 졸업(교육학),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로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시복식’에 참석 후 8월 귀국▒29년=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에 전념▒31년=동성상업학교 교사 시작▒36년=동성 교장으로 취임(광복 때까지 근무)▒46년=민주의원·입법의원으로 피선▒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 당선,9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12월 맨해튼대에서 명예법학박사 받음▒49년=초대 주미대사 부임▒50년=6·25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에 큰몫▒51년=2월에 제2대 국무총리 취임,11월 제6차 UN총회 한국수석대표▒52년=총리 사임▒55년=申翼熙 趙炳玉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최고위원 피선▒56년=민주당 후보로 부통령 당선.9월에 피격,경상▒59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60년 3월15일=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낙선▒4월22일=李承晩 규탄하며 제4대 부통령직 사임▒7월29일=서울 용산 갑구에서 국회의원 당선▒8월19일=국무총리 인준▒8월23일=1차 조각 마치고 내각 출범▒61년 3월1일=국토건설사업 기공▒5월16일=쿠데타로 정권 빼앗김▒이후=신앙생활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거,국민장으로 포천 가톨릭묘지에 안장됨■張勉은 누구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張勉이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그는 4월혁명의 결과로 태어난 제2공화국의 총리였다.尹潽善대통령이 있었지만 내각책임제였기에 제2공화국을 장면정부라고 부른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훌륭한 인격자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무능하고 나약했다”는 평도 따른다.이는 5·16세력이 조작해 전파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장면은 어떤 사람인가.장면은 부모 양쪽 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세례명 요안인 그는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해 이후 해방 전까지 신앙인·교육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다[연표 참조].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면모는 5·16이 나자 피신처로 선택한 곳이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그만큼 그의 신앙심은 남다른 측면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장면은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였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길을 택했다.따라서 그가 이끈 민주당 신파 출신 중에는 기나긴 朴正熙시대에도뜻을 굽히지 않고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유난히 많다.金大中대통령을비롯해 金相敦 鄭一亨 鄭憲柱 金判述 金應柱 吳洪錫 등이 그들이다. 해방 후 장면은 미 군정하의 민주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한다.건국 직후 열린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법통(法統)을 인정받은 것과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6·25때 UN군 파병에 큰몫을 한 것은 그를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케 했다.그 결과 제2대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너무 성장한 그를 李承晩이 견제하는 바람에 1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퇴한다. 그후 야당지도자로 변신해 55년 창당한 민주당의 최고위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됐고 56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됐다.부통령 시절인 1956년 9월28일 장면은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범의 저격에 왼손을 맞았다.그런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민주당 최고위원인朴順天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때 지켜본 장박사의 모습은 태연자약했고 너무도 의연했다”면서 거인다운 풍모를 소개했다. 4·19혁명 후 제2공화국을 맡은 장면은 8개월23일 만에 쿠데타를 만나 정권을 빼앗긴다.교과서에 나오는,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그는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회고록 표현)이라며 신앙생활에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서거한다.李容遠
  • ‘독립선언서’ 100종 넘는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선언하노라…”. 흔히 ‘3·1독립선언서’ 또는 ‘기미(己未)독립선언서’로 불리는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이다.그러나 이 선언문의 원제(原題)는 그냥 ‘선언서(宣言書)’다.‘3·1’ 또는 ‘기미’ 등의 수식어는 다른 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위해 후에 붙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외 독립진영이나 개인이 선포한 각종 항일선언·격문(檄文)·포고문(布告文) 등은 100여 종이 넘는다.그 가운데 형식과 내용면에서 격식을 갖춘 ‘선언서’는 대략 17종 정도다.[표 참조] 이 가운데 흔히 알려진 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이 결성한 재일본청년독립단 명의로 선포된 ‘선언문’(일명 ‘2·8독립선언문’)이다.이 선언문은 한 달 뒤인 3월 1일 국내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서의 모태가 됐다.가장 늦게 선포된 것은 1922년 3월 1일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의 李鍾一사장과 종업원 일동 명의로 선포된 ‘자주독립선언서’로 흔히 ‘제2의 독립선언서’로 불린다.한편 독립선언서 선포시기는전체 17건중 14건이 1919년(기미년) 3월에 집중돼 있다.이는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선언서가 선포된 후 만세의거가 확산돼 각계에서 선언서 선포가잇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선포지역은 만주·노령(露領,러시아령) 일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일본에서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각각 선언서를 선포한 바있고,국내에서는 경남 하동(河東)과 함북 경성(鏡城) 등 지방에서도 선언서를 선포했다. 또 독립선언서 작성·선포 주체별로 보면,3·1독립선언서처럼 민족대표·지도자 명의로 선포된 것이 9건,종교집단 3건,여성계 1건,청년단체 2건,노동계 1건,지방유지 1건 등이다.이 가운데 선언서 기초자나 작성자가 알려진 것은 대한독립선언서(趙素昻),2·8독립선언서(李光洙),3·1독립선언서(崔南善)등 3건뿐이다. 또 대부분의 독립선언서는 순한문 혹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고 있으나 1920년 2월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유일하게 순한글로 작성됐다.이는 한자에 익숙치 않은 여성들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에 표기된 기년(紀年) 가운데는 ‘단기(檀紀)’를 사용한 것이 9건,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준으로 한 ‘대한민국 기원’이 4건,그리고 ‘서기(西紀)’로 된 것이 2건,기타 기년 표기가 없는 것도 2건이나된다.
  •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제회의/주요 참석자 명단

    [26일]▒개회 기조연설자:제임스 울펜손 세계은행총재▒정치지도자회의: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전코스타리카대통령,펠리페 곤살레스 전스페인총리,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일본총리,피델 라모스 전필리핀대통령,포울 슐루터 전덴마크총리▒특별강연:아마르티아 쿠마르 센 케임브리지대교수,조지프 스티글리츠 스탠퍼드대교수▒학술회의:장 미셸 세베리노 세계은행부총재,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지메이슨대 교수,돈 오버도퍼 전워싱턴포스트지 기자,밍신페이 프린스턴대 교수,유종근 전라북도지사,스리람 아이어 세계은행 태평양지역한국국장,장하성 고려대교수,윌든 벨로 필리핀대교수,마리 팡게스투 캘리포니아주립대 경제학박사 [27일]▒학술회의:임길진 한국개발연구원(KDI)국제대학원장,다니엘 카우프만 세계은행수석고문,로버트 클릿가드 하버드대경제학박사,이진순 KDI원장,로널드매클리 하버드대 국제발전연구소 연구위원,이학용 고려대교수 겸 한국경제학회 회장,스티븐 해거드 캘리포니아주립대교수,윌리엄 더글러스 조지타운대교수,김중수 경희대 국제대학원장,김금수 한국농사회연구소장,박훤구 한국노동연구원장,카리 타피올라 국제노동기구 사무부총장,린 윌리엄스 미철강노조전위원장,박원순 참여연대사무처장,리사 베네클라센 아시아재단 여성정치국장,강문규 한국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락사마나 수카르디 인도네시아 개혁연대,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구나 스탈셋 주교·노벨상위원회 위원,토머스 세계은행 경제개발원(EID)원장
  • 장전항 앞바다 선상 토론회

    개신교 지도자와 정치인 학자가 북한의 장전항 앞바다에서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개신교인 금강산 단체방문의 이틀째인 23일 오후 8시 봉래호 선상에서 ‘교회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주제 아래 시사평론가 정범구 박사의 사회로 토론회가 펼쳐졌다. 발제에 나선 이재정신부(성공회대 총장)는 “국민의 정부가 취해온 햇볕정책은 국제적으로도 신임을 받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일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군사력 증강보다는 남북이 함께 지고 있는 막대한 국방경비를 줄임으로써 해결될 수있다”고 강조했다. 이신부는 이어 “국민적 합의를 기초로 평화와 화해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정신 아래 교회는 북한의 복음화를 내세우기 앞서 북한의 형제 자매들과 진실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누는 실천을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아직도 우리와 휴전상태에 놓여있는 북한이 군사시설인 장전항을 개방한 것은 커다란정책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아직도 통일문제에 대해 냉소적이고 수구적 인식을 바꾸려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사덕 국회의원도 “최근 북한의 인구가 250만이나 줄었다는 언론 보도는‘사랑’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따르는 1,000만 기독교인이 대단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면서 “통일정책 논의이전에 기독교인들은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북녘바다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토론이었던 때문인지 방청석의 열기도 뜨거웠다.한남대 신윤표교수는 “통일을 위한 밀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참회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강릉의 한 여성 참석자는 “북한의 삼림복구를 위해 묘목 보내기 운동을 전국민적으로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정치권과 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그동안 북한을 원수처럼 대해야 한다고 주입시켜 놓고 이제 와서 ‘동포가 굶주리는데 기독교인들은 무얼했느냐’고 묻는 것은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주장과함께 “기독인들의 통일열망과 사랑을 제대로 엮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교계지도자들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朴燦
  • “평화중재자 永眠” 세계지도자들 애도

    [암만(요르단) 외신종합] 고(故)후세인 요르단 국왕의 장례식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등 세계각국 지도자 수십명이 참석한가운데 8일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엄숙하게 거행됐다. 장례식은 회교율법에 따라 후세인왕이 타계한 지 24시간을 넘기지 않은 이날 오전 10시 30분(한국시간 오후 6시 30분) 시작됐으며 후세인왕의 시신은5시간여의 국장절차를 마친 후 부친과 조부가 묻힌 시내 왕가 묘지에 안장됐다. 이날 장례식에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조지 부시,지미 카터,제럴드 포드등 3명의 전직대통령이 나란히 참석,각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또한 와병중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고 이스라엘도 에제르 와이즈만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포함한 대규모 조문단을 참석시켰다. 아랍권에서도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자치정부수반,에스마트 압델 메기드 아랍연맹사무총장등 많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암만·예루살렘 외신종합]▒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암만시내는 수십만명의 애도인파가 빽빽히 거리를 메우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등 일대장관을 연출.▒철저히 전통 회교율법에 따라 치러진 탓에 이번 장례는 전세계 회교연구가들에게 좋은 교재거리가 될듯.여성은 장례행사에 철저히 참여가 금지돼 미망인인 누르왕비마저도 공식행사에 참석치 못하고 9일 별도의 추모행사에 참석할 예정.▒‘세계 평화의 중재자’직함에 걸맞게 후세인의 장례식이 거행된 암만은 8일 세계각국 정상들의 도착으로 때아닌 세계정상회담장같은 분위기를 연출. 리비아 조문단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달라 이븐 압델 아지즈 왕세자가 가장 먼저 도착한데 이어 오후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폴 니루프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게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이 도착.(회교율법에 따라 치러진 후세인왕 장례식 절차) 후세인왕의 장례는 회교율법에 따라 왕 임종 뒤 24시간을 넘기지 않은 8일오전 10시 30분(한국시간 오후 6시 30분)시작됐다.다음은 시간대별 장례진행 상황. 10시 30분:공식 조문객들이 암만시내 왕궁 곳곳에설치된 공식 영결식장에입장.회교율법에 따라 여성은 입장금지. 오후 1시:덮개가 열린 왕의 관이 메카를 향해 대관실(戴冠室)에 안치됐다.압둘라왕에 이어 왕자들,고위관리들 순으로 왕의 시신에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오후 2시 20분:압둘라왕 주관하에 외국조문객들을 위한 별도의 장례절차가왕궁내 함자 빈 압둘 무탈레브 모스크에서 열렸다. 오후 2시 51분:압둘라 왕이 다시 한번 기도를 주관한 뒤 8명의 군인이 관을 후세인왕의 부친과 조부가 뭍혀있는 왕가묘지로 운구.회교율법에 따라 사향(麝香)을 바른 왕의 시신은 흰 천에 싸여 안치됐다.안장식이 끝난 뒤 5일간공식 조문기간 시작.
  • 지난 1000년 최고인물 獨구텐베르크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일까. 최근 B.바우어스 등 두 쌍의 미국 언론인 부부가 낸 저서 ‘1000년,1000명의 인물:1000년을 만든 사람들’(고단샤 아메리카출판사)은 금속활자를 발명한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를 꼽았다. 지난 1000년간 역사의 변화를 이끌었던 영향력에 따라 1,000명의 순위를 매긴 이 책은 금속활자로 지식혁명을 일으켜,종교개혁과 근대사회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점을 1위 선정 이유로 밝혔다.또 서구인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C.콜럼버스와 근대서구사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종교개혁의 지도자 마르틴 루터를 각각 2,3위로 꼽았다. 2차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20위,그를 패배시켰던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37위로 조사됐다.여성중에서는 영국의 최전성기를 열었던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31위,동양인중에는 ‘인도독립의 아버지’ 간디가 12위로 가장 높게 랭크됐다.1000명중 아시아인은 5%에도 못미친 50명 이하,여성은 15%에 불과했다.20세기 사람은모두 136명으로 미국의 인권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56위),원자탄생산을 지휘한 J 오펜하이머 박사(80),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237),엘비스 프레슬리(352) 등이 포함됐다.李錫遇 swlee@
  • 金大中 대통령 訪中­이모저모

    ◎김 대통령 부부 ‘도라지’ 열창/강 주석도 중 민요 ‘夕歌’ 불러/격의없는 대화… 회담 1시간 길어져/이 여사,여성교류 확대 기대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중국 국빈방문 이틀째인 金大中 대통령은 12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정상회담◁ ●金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이날 오전 인민대회당동대청에서 가진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공식수행원이 모두 참석하는 확대회담으로 나눠 진행됐다. 정상회담은 당초 45분으로 예정됐으나 양국 정상이 흉금을 털어놓고 개인신상에 관한 말까지 주고 받는 바람에 무려 1시간 가까이 늦어지는 ‘마라톤회담’으로 진행됐다. 장주석은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金대통령은 연세가 나와 동갑내기인데도 훨씬 젊어보인다”고 金대통령의 건강미를 찬상했다고 林東源 외교안보수석이 전했다.이를 받아 金대통령은 “나는 감옥생활이 6년이고 연금 및 해외망명이 10여년이어서 인생의 단절이 있었다고 볼 때 그 기간만큼은 늙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장주석의 웃음을 유도.장주석은 “金대통령은 재야시절 세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중국사람들의 오랜 벗”이라고 친근감을 표시. ○강 주석 안내 의장대 사열 ▷공식 환영식◁ ●이에 앞서 金대통령은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 인민대회당 북대청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장쩌민 국가주석의 영접을 받았다. 金대통령이 인민대회당에 도착하자 예포 21발이 발사됐으며 장주석은 현관까지 나와 金대통령을 반가운 표정으로 맞았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의 안내로 사열대에 올라 의장대의 경례를 받으며 애국가와 중국국가 연주를 들었다. 국가연주가 끝난뒤 金대통령은 중국 의장대장의 우렁찬 사열준비 보고를 듣고 장주석과 함께 붉은 카펫을 따라 이동해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 환영식은 약 10분간 진행. ▷친분인사 오찬◁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상회담을 마친뒤 부인 李여사와 함께 숙소인 댜오위타이 18호각으로 중국내 친분인사 13명을 초청,과거 야당시절을 회고하며 오찬을 함께 했다. 金대통령은 인사말에서 “야당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걱정하고 도와준 좋은 친구들을 대통령이 돼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과거의 ‘은혜’에 감사의 뜻을 표시. 이날 오찬에는 우리측에서 徐錫宰 한중의원외교협회장,李榮一 한·중문화협회장,朴晟容 한·중우호협회장이 배석. ○강 주석 제의 받아 이중창 ▷국빈만찬◁ ●金대통령은 부인 李여사와 함께 이날 저녁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장주석 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장주석과 흥에 겨워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등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만찬도중 金대통령과 장주석은 포도주를 곁들이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때로 호쾌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고.그러다 한즈핑(韓芝萍)의 노래로 7번째 중국의 민요인 ‘저녁노래(夕歌)’가 연주되자 장주석이 식사를 하다말고 즉석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만찬뒤 종업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저녁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음이 높아 따라 부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것. 그러자 金대통령은 “여기서 다시 하라”고 청했고,장주석은 즉석에서 노래반주를 요구한뒤 ‘직업가수 수준’에 가깝게 저녁노래를 열창. 이어 장주석은 金대통령에게도 노래를 청하자 부인 李여사와 함께 마이크를 잡고 지휘자에게 “무슨 노래를 할까요”라고 묻고는 지휘자가 청한 도라지를 李여사와 함께 역시 즉석에서 ‘이중창’을 했다. 노래를 끝낸 金대통령은 영어로 작별인사를 한뒤 헤어졌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은 훌륭한 분으로 인간적으로도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정립됐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양국 평가◁ ●우리측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중국의 외교적 형식이나 수사를 감안할 때 ‘상당한 성공작’이라고 평가. 金대통령과 장쩌민 주석간 회담도 자세히 뜯어보면 ‘총론’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정상은 큰 원칙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관계부처나 기관끼리 협의토록 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베이징에서 정상외교 말고 별도의 장관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도 이같은 외교적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중정상회담이 끝나자 주장자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발표문을 내고 “양국관계와 공동관심사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교환을 통해 광범위한 공동인식에 도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 그는 ‘협력적 동반자관계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양국관계에 진일보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해석.그는 그러나 “이것이 동맹관계는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대통령 부인 동정◁ ●李여사는 이날 오전 중국의전국 부녀연합회를 방문,펑 페이윈(彭佩云) 주석 등 연합회 간부들과 환담. 李여사는 이 자리에서 “이번 중국방문을 계기로 양국 여성단체와 여성지도자들이 서로 교류를 좀더 활발히 해 우의를 증진하고 공동의 가치를 확대시켜 나가자”고 당부.
  • 유럽 68세대 “새 정치 실험”

    유럽에 새 물결이 일고 있다. 60∼70년대 반 체제운동을 주도했던 ‘68세대’가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신,유럽 정치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젊은시절 유럽의 정신 세계를 압박하고 있던 권위주의에 도전했던 이들은 이제 금리인하,고용창출,공공지출 확대를 통한 성장추구 등을 내세우며 기존 정책들을 뒤엎고 있다. 젊은 혈기 탓에 ‘실패한 혁명’을 맛보아야 했던 이들의 성공 여부가 주목된다. ‘68세대’의 주체와 성격,미래를 진단해본다. ◎혁명은 지금도 진행중/30년전 佛서 깃발 올린 개혁성향 좌파/佛·獨·英·伊서 집권… 변신에 관심 집중 유럽의 ‘68혁명’ 세대들이 정치무대에 전면 포진,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기성 질서의 저항세력으로 대별됐던 좌파적 색채의 68세대는 30여년이 지난 지금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신,유럽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실패로 끝난 혁명’의 뒤늦은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68혁명의 진원지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우선 꼽을수 있다. 68시위가 발발하자 외무부 관리였던 그는 이에 동조하여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당에 입당,정치인으로 나섰다. 죠스팽 내각의 장클로드 게소 교통주택장관 등 공산당 소속 4명의 관료는 시위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다. 68세대의 강세가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는 독일·대다수 각료들이 68세대다. 세계 최초의 환경정당으로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은 전적으로 ‘68세대’가 만든 정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사민당 총재인 오스카 라퐁텐 재무,요슈카 피셔 외무,오토 실리 내무,위르겐 트리틴 환경장관 등이 선두주자. 특히 슈뢰더와 실리는 역시 68세대들이었던 독일 적군파들의 변호사를 자임했다. 프랑스로 넘어가 68시위를 주도했던 다니엘 콘 밴디트는 현재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재무,로빈 쿡 외무,잭 스트로 내무,피터 멘델슨 무역장관 등도 68세대의 기수들. 브라운은 68년 당시 글래스고대학 급진학생노조 회장이었고 스트로는 전국학생연맹 의장이었다. 제3의 길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 총리도 같은 범주에 든다. 좌익 민주당 소속의 마시모 달레마 이탈리아 총리도 60년대 말 좌익 청년시위를 주도했던 골수 사회주의자로 올리비에로 딜리베르토 법무장관과 함께 이탈리아 68세대를 대표한다. ◎좌파정권 정책과 전망/고용확대·성장추구·복지강화 초점/금리인하·정부지출 확대 불가피… 이전 정책과 상충/각국사정 복잡·다양… 정책 협조·성공에 부정적 시각 유럽연합(EU) 좌파정권들은 고용창출과 공공지출 확대를 통한 성장추구,복지정책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전의 우파정권들이 내년 1월1일 출범 예정인 유로화(유럽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펴온 공공부채 및 재정적자 감축정책 등 기존 정책들과는 상충되는 점이 많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경기부양과 실업자를 축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공공지출을 늘려 나가겠다고 종전 정책를 뒤집었다. 마시모 달레마 이탈리아 총리도 경기회복을 위해 재정적자 확대를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각국 지도자들이 주장한 금리인하는 종전 정책을 기본부터흔들었다. 과거 우파정권들은 강한 유로화를 위해 현금리 고수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들의 새로운 정책이 착근에 성공할 지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국 지도자들의 입지강화를 위해 자국민용 정치적 발언이라는 분석이다. 뒤젠베르크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EU 지도자들의 발언은 금융정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동안 활성화된 유럽의 자유시장경제제도와 각국의 다양한 국내 사정도 이들 연대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던지게 한다. 우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각국 입장의 교통정리가 급선무다. 그러나 모두 고만고만해 서로가 어느누구도 교통경찰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68세대는 ‘또다른 실패’를 맛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8세대의 정의와 변천/68년 佛 학생·반체제운동 주도/기성세대 거부 유럽·美 젊은층 지난 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과 6월의 반체제운동을 주도한 대학생과 젊은층,이들에 동조해 시위를 벌이거나 청년문화를 이끌어갔던 당시 유럽과 미국 등지의 20∼30대를 68세대라 일컫는다. 전후 경제적 풍요 속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체제에 도전,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프랑스는 2차대전의 폐허에서 완전히 재기,경제적으로는 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완고한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지만 교회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보수화된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 집단이었던 셈이다. 운동권 학생은 물론 노동자,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학생조직으로는 ‘프랑스학생연합(UNEF)’‘3·22운동’ 등이,노동자단체에서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프랑스민주노조연맹’‘프랑스 교원노조(FEN)’가 그리고 정치단체로는 베트남위원회 등이 참여했다.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를 비롯해 트로츠키주의자,마오저뚱주의자,체게바라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뛰어들었으나 내부적 통일성은 없었다. 이후 변질 과정을 겪게 되지만 오늘날의 생태주의,여성 권리와 남녀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하는 페미니즘,반전·반핵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범사회적 저항운동과 문화운동의 기수가 됐다. ◎68세대 탄생 당시 주요 사건 ▲62년 2월8일=프랑스 우익 폭탄테러 발생.시위대 8명 사망 ▲63년 11월22일=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64년 8월7일=미군 통킹만 보복공습 ▲65년 4월17일=미 대학생 1만5,000명 백악관 앞에서 반전시위 ▲66년 4월=마오저뚱(毛澤東)문화혁명 시작 ▲66년 11월=미니스커트 돌풍 ▲67년 7월27일=미 주요 도시 최악의 인종폭동 ▲68년 4월4일=마틴 루터 킹 피격 사망 ▲68년 5월30일=프랑스 총파업 ▲68년 8월22일=소련,체코 프라하 침공 ▲69년 4월28일=드골 프랑스 대통령 사임 ▲69년 11월15일=워싱턴서 25만명 반전시위 ◎70년대 신좌파와의 차이/70년대,공산주의와는 다른 진보적 반체제 운동/90년대,노동자 권익보호 등 정치정책노선 치중 68세대가 주도한 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의 ‘신좌파’(New left)운동은 반체제운동이었다. ‘진보’를 뜻하는 좌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당시 모든 인습과 제도에 저항했다. 그러나 권력 장악이 목표였던 정치적 좌파(구 좌파),즉 공산주의 노선과는 다른 다분히 이념적·이상적인 것이었다. 신좌파운동의 대표격인 68년 프랑스 5월운동은 드골 정부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배격해 일어났고 미국의 학생민권평화운동은 베트남전으로 드러난 추악한 자본주의체제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는 체코 반체제운동은 소련 동유럽의 전통적 좌파가 대상이었다. 반면 90년대 말부터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새 조류는 30년이 흐른 지금 주역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신좌파(New New left)’로 불릴 만큼 노선엔 차이가 있다. ‘좌파 정당’들의 새로운 ‘정치정책노선’으로 70년대 이후 환경·여성·반핵·지역자치운동의 신사회운동으로 계승된 기존의 신 좌파운동과는 대별된다. ‘개량적 좌파정책’,‘중도좌파’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자본주의 장점을 취하면서 직업교육 의료혜택,연금제도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보호하겠다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제3의 길’이 대표적 예다.
  • 梨大의 ‘김활란賞’ 밀어붙이기/李志運 기자·사회팀(오늘의 눈)

    ‘회(灰)칠한 무덤’은 거짓의 상징이다.무덤을 치장하기 위해 하얀 횟가루를 뿌려대도 무덤은 무덤일 뿐이다. 지난 3일 이화여대 학생문화관에서 열린 ‘金活蘭상 제정 설명회’가 그랬다.상 제정을 반대하는 학교 안팎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자리였지만 무덤에 회칠하려는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화여대측은 지난달 14일 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뒤부터 이같은 작업을 계속해왔다. 지난달 28일에는 총학생회 간부들과 간담회를 열었다.金박사의 일대기를 주제로 70여장의 사진과 업적 등을 실어 ‘여성의 빛,김활란’이란 99년판 포토 다이어리도 만들었다.학교측은 다이어리와 함께 金박사의 자서전을 동문과 사회지도층에 보낼 계획이다. 설명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됐다. 동문과 교수·학생 2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상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金모 전 교수는 “지금은 친일이니 애국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 이화인이 하나가 되어 기쁘게 상을 제정할 때”라고 운을 뗀 뒤 “金박사가 친미(親美)인사일지언정 절대 친일인사는 아니었다”면서 “당시의 상황도 모르면서 친일논쟁을 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총동창회의 한 인사는 “당시 어쩔 수 없었던 金박사의 고뇌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金박사를 친일파로 단정한 학생들의 행동을 철없는 짓이라고 규정했다.행정학과 2학년의 한 학생은 “金박사가 만일 친일을 거부하고 은둔했다면 지금의 이화가 있었겠느냐”고 말해 여러 교수들의 박수를 받았다.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꼽히는 春園 李光洙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친일행위를 했을 뿐 사실상 친일인사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설명회의 분위기는 ‘친일 불가피론’으로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여성지도자’,‘선각자’ 등의 호칭으로나,어떤 논리로 치장을 해도 친일행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는 일.‘횟가루를 뿌리려는’ 학교측의 노력이 차라리 안쓰러워 보였다.
  • 金活蘭賞 제정 유감/李志運 기자·사회팀(오늘의 눈)

    이화여대가 초대 총장인 金活蘭 박사의 이름을 따 국제적인 상을 제정하겠다고 발표,세간에서 말이 많다. 원인은 金박사가 친일 인사였다는 점 때문이다.“세계적인 상을 만든다면서 왜 하필 친일 인사의 이름을 땄느냐”는 것이다. ‘又月 金活蘭 상(Hellen Kim Award)’으로 이름 붙여진 상의 취지는 좋다.이대측은 탄생 100주년을 맞는 내년 5월 학문이나 사회봉사,정치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어 인류사회와 여성지위 향상에 공헌한 국내외 여성에게 첫상을 준다는 계획이다.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상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이미 해외 유명인사 200여명을 포함,600여명의 추천인을 확보했다.상금도 5,000만원(외국인 5만달러)으로 대학이 주관하는 상으로서 적은 규모가 아니다.동문과 학부모 등이 모금한 20여억원을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설명이다.기금은 앞으로 100억원까지 늘릴 계획이다. ‘21세기,세계의 이화’로 발돋움 하기 위해 “세계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만큼 스케일도 크고 의욕도 돋보인다. 친일 전력으로대내외적으로 거부감을 주었던 金박사에 대한 학교측의 입장도 나름대로 정리를 한 듯 했다.비록 한 때 일제를 돕긴 했으나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가로,여성운동가로,민간외교가로 평생을 조국에 헌신했던 공로를 인정하자는 논리다.한국이 낳은 ‘20세기의 세계적 여성지도자’임이 분명한 만큼 ‘총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자서전을 통해 “남의 귀한 아들들을 죽는 길에 나가라고 권고했으니 형벌을 달게받겠다”고 회개한만큼 이제 용서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설사 우리 국민 모두가 金박사의 친일 전력을 용서하고 그 인물됨을 총체적으로 평가했다고 하자.그러나 전 세계를 포화속에 파묻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2차대전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사람을 외국인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있다.새로 제정되는 상이 ‘세계적인 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사민당 웃지만… 赤·綠 연정 산넘어 산/슈뢰더의 독일시대

    ◎지도부 시큰둥… 녹색당 정책과 마찰/기민·기사당과 大聯政은 “공약 위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사민당(SPD)이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다.정권을 단독으로 인수할 수 있는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해법은 다른 정당과 연합하는 방안. 우선 떠오는 상대는 녹색당.사민당은 선거전에서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하겠다”고 공언해왔다.더구나 녹색당은 선전하면서 사민당과 손을 잡으면 연방 하원에서 의석이 과반수를 넘는다. 그러나 막상 선거결과가 나오자 사민당 지도부는 녹색당과의 연정 구성에 시큰둥하다.한마디로 손을 잡는데 걸림돌이 있다는 얘기다. 녹색당은 특히 △휘발유값 3배 인상 △북대서양 조약기구 해체 △원자력발전소의 ‘즉각’ 폐쇄 △일부 마약의 합법화 등 사민당이 수용할 수 없는 정책들을 고집해 왔다.슈뢰더는 수차례에 걸쳐 녹색당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촉구했었다. 사민당이 택할 수있는 다른 카드는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대(大)연정’을 구성하는 길.이같은 기미를 알아채기라도 한듯 기민당과 기사당 지도부는 ‘연정 협상의 문은 닫혀있지 않다’면서 ‘사민당이 먼저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이라고 흘리고 있다. 그러나 걸림돌은 있다.유권자와의 약속 위반이라는 정치 도의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사민당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과 ‘대연정’을 구성하는 사태가 일어 나지 않도록 구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사당(PDS)의 의회 진출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었다. 또 있다.기민당의 자매 정당인 기사당이 ‘대연정’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기민당이 사민당과 손을 잡기 위해서는 기사당과의 협력관계를 포기해야 하지만 2차 대전후 50년동안 운명을 함께 해온 터이고 보면 ‘대연정’의 길도 험난하기만 하다. ◎슈뢰더의 정책방향/복지·외교 등 ‘강한 독일 만들기’ 펼듯 게하르트 슈뢰더 정부는 대내적으로는 중·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유럽과 미국 등 서방 진영과 동반자 관계수립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신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뭐니뭐니해도 400만명에이르는 실업자 군단을 감축하는 작업.기민당은 이미 선거전에서 10.3%의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법인세 인하와 임금 부대비용 삭감 등 기업의 투자환경을 개선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목청을 높여왔다.공급위주의 해결책이다. 반면 사민당의 슈뢰더는 일자리 공유를 해법으로 제시해 왔다.주당 35∼38시간의 근로시간을 30시간까지 단축해서 일자리를 나눠갖자는 것이다.고용확대를 위해 노·사·정(勞社政) 3자 연대 가능성이 관심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富)와 사회정의의 조화를 강조해온 슈뢰더는 또 중·저소득층에 유리한 세제개혁을 단행할 것같다.소득세의 최고와 최저세율을 각각 4%포인트씩 낮추고 법인세율은 47%에서 단계적으로 35%로 내리겠다고 밝혔다. 저소득층의 복지를 염두에 두는 방안이다.선거기간 최저 및 최고 소득세율을 11.9∼14%포인트,법인세는 빠른 시일안에 35%로 내리자는 세제개혁안을 제시했었던 기민당의 정책과 쉽게 대비된다. 군사 및 외교 정책에서는 독일의 입지를 굳힐 게 확실시된다.유럽과 미국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협력하는 ‘대서양주의’를 출발선으로 삼을 것이다.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유럽과 미국의 관계 재정립을 모색할 게 분명하다. 유럽내에서도 친 프랑스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영국과의 양자 연대나 영국 및 프랑스와의 3자연대를 모색해 제 색깔을 내려할 것이다.특히 내년은 독일이 유럽연합(EU) 의장국이 되는 해인 만큼 EU 고용창출협정 체결 등을 통해 외교역량을 한껏 과시하려 들 것으로 전망된다. ◎슈뢰더는 누구/‘독일의 블레어’… 상점견습생서 21세기 리더로 독일의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는 게하르트 슈뢰더(54)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독일 정계의 신세대 정치인으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1944년 나치병사였던 부친의 유복자로 태어나 편모 슬하에서 다른 4형제와 가난하게 자랐다.17세 때 상점 견습생이 되었으나 야간학교를 다니며 대입자격시험에 합격,명문 괴팅겐 대학 법과에 입학.76년에 변호사가 되었다. 야간학교 재학중이던 63년 사민당에 가입했고 정열적인 활동력과 정연한 논리,탁월한 언변으로 78년 사민당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유조스)의 의장에 선출됐다. 80년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래 86년 니더작센 주의회 사민당 원내의장,90년 주총리 등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면서 편향된 이념에서 벗어나 사민당의 온건파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뛰어난 용모와 화술 등 탤런트적 이미지로‘신(新) 중도’‘제3의 길’을 역설해 변화를 원하는 독일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성편력도 화려해 지난해 9월 세번째 부인과 이혼한 뒤 20세 연하의 기자 출신 도리스 쾨프(33)와 네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녹색당의 피셔/세계 첫 환경정당… 거리투사서 정계스타로 사민당의 연정 첫번째 상대로 꼽히는 녹색당은 70년대에 결성된 세계 최초의 환경정당.83년 총선에서 27석을 얻어 연방 하원에 진출한 제3당.통일후에는 옛 동독의 민주화운동 시민그룹 ‘동맹 90’과 통합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넓혔고 94년 선거에서는 49석을 얻었다. 지지기반을 넓히기위해 대중적 이미지를 심으려는 온건파들과 당초의 정강을 고수하는 강경파들간의 알력이 있다.올초만해도 12∼13%에 달했던 지지율이 북대서양조약기구 해체 등을 요구하면서 선거 직전에는 5∼7%까지 떨어졌다. 녹색당을 이끄는 인물은 요시카 피셔 녹색당 하원 원내의장(50).환경정당을 정치의 중심무대로 끌어 올린 3선 의원.학력은 고교 중퇴가 전부. 60·70년대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다가 70년대말 제도권으로 들어 왔다.극좌파가 나치만큼 비인간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자동차 공장 노동자,야간 택시기사 등으로 일하며 틈틈이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도강’했다.81년 녹색당에 입당했고 연방 의원과 헤센주 환경장관을 2차례 역임했다. ◎콜 16년 집권 마감/‘통독의 거인’ 역사속으로…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나게 될 헬무트 콜 총리(68)는 독일 통일 달성과 함께 유럽 통합을 이끈 ‘유럽 정치계의 거인’이었다. 1930년 세무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5세때 2차대전 종전을 맞았다.프랑크푸르트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법률,정치학을 전공했으며 58년에는 문학박사가 됐다. 59년 라인란트 팔츠주(州)의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69년에는 주 총리,그리고 73년에는 기민당 총재로 선출됐다.82년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붕괴되면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사퇴하자 전격 뒤를 이었다. 통일후 계속된 높은 실업과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이 16년만에 총리에서 물러나게 했다.가족들의 외부노출을 극도로 꺼려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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