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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가협회 조경희 이사장 별세

    수필가협회 조경희 이사장 별세

    조경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이 5일 오전 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87세. 1918년 인천시 강화읍 태생인 고인은 언론인 겸 수필가로 활동하며 여성계와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화여전 문과에 다니던 1938년 잡지 ‘한글’에 수필 ‘측간단상’이 당선돼 등단한 그는 이듬해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이어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부산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1980년 한국일보 부국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여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71년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이끌어왔으며,1974년 창간한 계간 ‘수필문예’는 ‘한국수필’로 이름을 바꿔 현재 격월간으로 발행되고 있다.1979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지냈고 1984년 여성 문화인으로는 처음 예총 회장에 당선됐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정무 제2장관에 발탁돼 여성 권익 향상에도 힘썼다.13개 시·도 가정복지과장을 일제히 국장으로 승진 발령해 안팎의 화제를 모았고,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건립에 필요한 예산 500억원을 끌어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예술의전당 이사장,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모스크바 국제펜대회 한국 대표 등 최근까지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문화예술계에서의 다양한 업적에 힘입어 한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본상, 프랑스예술문학공로상, 은관문화훈장, 한국수필대상 등을 수상했고, 지난달 7일에는 올해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홍춘희(개인사업)씨, 딸 성미(미국 거주)씨, 손자 기두(해군대위)·기돈(대한항공)씨가 있다. 발인은 9일 오전 8시30분,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02)929-6699.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性역’ 허문 딸들의 반란] 출가외인 옛말…기혼여성 지위 인정

    여성도 종중회원으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은 전통적인 종중과 가족의 관념을 바꾼 획기적인 판례다. 종중에 관한 첫 판례가 형성된 지 47년 만에 판례가 변경된 것은 호주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가족·친족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인정한다는 뜻이다. 특히 출가외인으로 불리던 기혼 여성들의 지위를 확립해 주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 앞서 2년간에 걸쳐 학계와 시민사회의 의견을 모으고 사법사상 처음으로 대법원 공개변론을 실시하기도 했다. 유림과 여성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법원은 의식조사를 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종중회원을 성년 남성으로 한정하는 데 일반인의 69.7%, 대한변협과 법대 교수의 64%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대법원은 남성만을 종중 구성원으로 하는 종래의 관행은 가부장적, 대가족 중심의 가족제도와 농경중심 사회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근대 이후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가 증대된 사회환경과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남아선호 사상과 가계계승 관념이 쇠퇴하면서 딸만을 자녀로 둔 가족의 비율이 증가하고, 딸을 아들과 함께 족보에 올리는 것이 일반화되는 상황에서 종원인 여성이 종중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종중도 출현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또 1980년 개정된 헌법에서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평등을 기초로 성립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되는 등 일련의 민법과 가족법 개정안에 맞추기 위해서는 여성의 종중원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종중을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종원간의 친목을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종족단체로 본 대법원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관습은 출생에서 비롯되는 성별 특징을 이유로 여성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다.”고 판시했다. 별개의견을 제시한 대법관 6명은 종중이 우리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을 들며 전통문화와 현대 법질서의 조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종래 관습법에 따라 원고들의 청구를 배척한 것은 잘못이지만, 종중재산 분배에 관한 분쟁이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재판일지 ●1958년:대법원 “종중 구성원은 성인남자” 판례 성립 ●2000년 4월:용인이씨 사맹공파 후손 여성, 종중회원 확인소송 제기 ●2001년 3월:수원지법 1심, 원고패소 판결 ●2001년 12월:서울고법 2심 항소기각 ●2003년 12월:대법원 사상 첫 공개변론 ●2005년 7월21일:대법원 “여성도 종중 구성원” 판례 변경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목소리의 마술사’가 있다. 반세기 동안 격동의 현대사를 ‘목소리’ 하나로 관통했다. 질곡의 50년 세월속에 가느다란 성대의 떨림으로 감동과 추억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연출했다. 타고난 ‘천(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쥐락펴락했다. 암울했던 1960∼70년대, 라디오의 ‘연속방송극’과 ‘추억의 영화’ 등 무려 1000여편에 출연했다.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얼굴없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 주변에서 이꼴저꼴 다 보면서 연설과 다큐멘터리 대역(代役) 등을 해 흥미진진한 야화도 간직하고 있다. ●‘여자의용군 예술대’ 자원입대 고은정(70)씨.1954년 12월 KBS 성우 공채 1기로 출발,50년 ‘목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단막극을 직접 쓰고 출연까지 했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모호텔 정원에서 만났다. 먼저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름 아닌 6·25에 참전했던 것.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0년 11월 어느날. 수도여중 3학년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고은정은 친구들과 모여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대열에 합류하는데 우리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며칠 뒤 고은정은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막사는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 자리). 때마침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가칭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됐다. 고은정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외출허가가 떨어졌다. 이때 가족들이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어떻게 외출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귀대했다. 그런데 동료 3분의1가량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어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별도의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당도했다.(관련자료에 따르면 50년 9월 여군교육대가 부산에서 결성됐으며, 군부대와 병원 등의 위문을 위해 군악 및 예술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번 0995862 육군 제대 부산에 도착한 예술대원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 이브때 고은정은 면회 온 목사의 도움으로 십수권의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워낙 책을 좋아한 데다 병원위문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숙소 앞에 ‘소공녀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그러던 51년 2월 부대에서 휴가를 다녀오란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지난번 도움을 받은 목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때마침 목사는 제주도의 피란민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은정도 목사와 함께 떠났다. 도착했더니 돌아올 여객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목사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복귀를 하지 못했다. 고은정은 관계요로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전한 뒤 그해 2월 제주 오현중에 설치된 피란민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 고씨는 “얼마전 육군에 확인해 보니 군번도 있고 제대처리돼 있었다.”면서 당시 입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눈다고 귀띔했다. # 에피소드 1. 74년 8월14일이었다.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 더빙을 하느라 밤을 새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고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했다. 고씨는 의사 동생과 함께 갔다. 육 여사는 진작 보고 싶었다며 “조국을 위해 고생이 많은데 부탁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고씨는 “서울신문에 다니던 오빠가 필화사건으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고씨는 육 여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단골로 등장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들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TV 전원이 꺼졌다.8·15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피격사건’이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육 여사 다큐멘터리에 더욱 많이 출연하게 됐다. 박근혜씨가 영부인 역할을 맡을 때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는 고 선생의 목소리가 엄마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뒤 연말마다 청와대에서 금시계를 보내왔다. ●대통령 부인들과 자주 만나 # 에피소드 2. 5·16 직후였다. 동아방송에서 ‘천일야화’라는 대담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김종필(JP)씨를 초청했다. 시간이 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찾아나섰다. 점퍼차람의 한 사람이 방송실 입구에서 “나를 찾는 겁니까.”하고 말했다. 인사를 하자 JP는 “고 선생은 골라쓰는 단어가 아주 달라요.”라고 했다. 인연이 돼 나중에는 JP자택에서 부인과 자주 만나게 됐다. “80년대 초반 민정당 창당대회 때 권정달씨의 부탁으로 봉두완씨와 사회를 같이 보게 됐지요.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정치 언저리에 맴돌게 된 것 같아요. 여성계 대표라는 명분으로 종종 청와대에서 이순자·김옥숙 여사와 식사도 했지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마침 우리 아들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8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노태우 후보측에서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이종찬씨도 함께 있었다. 노 후보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노씨는 “고 선생, 어떻게 하면 목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종찬씨는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고씨는 “소염제를 먹고 당분간 필담으로 대화할 것”을 주문한 뒤 연설 때 5만,10만 관중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자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상대로 감동을 시킬 것을 권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오히려 장점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어 노 후보가 여성정책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자 “이제와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은들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까지 애처가라는 소문만 잔뜩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전직 대통령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설득력은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현대적 감각에는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0분 동안 113개의 언어가 틀릴 정도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나라에선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고씨는 “스피치는 공인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한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출강에 여전히 방송활동 고씨는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고흥숙.‘흥’자 돌림이다. 막내동생이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흥길(성남시 분당갑)씨. 오빠 고흥욱(72)씨는 청와대 출입을 오래한 기자출신으로 현재 LA에 산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걸어와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는데 무슨 일이냐.”고 뜬금없이 물어 “아냐, 길은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겠지.”하고 대답했단다. 어머니는 5남매를 남겨놓고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54년 교통사고로 일찍 명을 달리했다. 새어머니는 5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 현재 94세로 분당 아들집에서 산다. 고씨 자신은 59년에 결혼, 이듬해부터 연년생으로 자식 넷을 낳았다. 함께 지내는 둘째딸(44)을 제외하곤 다들 결혼했다. 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해 고비를 맞았지만 요즘은 서울예대 장로신학대 출강과 극동방송에서 매일 10분짜리 방송 등을 하며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사를 쓰고 있어요. 여름방학 때는 밀린 대본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일생을 담은 모노드라마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36년 서울 출생 ▲ 51년 제주 피란민학교에서 수도여자중학 졸업 ▲ 54년 수도여고 졸업, 숙명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KBS 성우공채 1기 ▲ 56년 최초 연속방송극 ‘청실홍실’ 성우 ▲ 58년 연속방송극 ‘산너머 바다건너’에서 상하이 여자 ‘미라’역을 맡아 주목받음. ▲ 이후 ‘장희빈’‘고운정 미운정’‘왕비열전’‘대동강은 알고 있다.’‘불꽃의 소리’‘113수사본부’등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000여편 출연. ▲ 77년 드라마 ‘대니할머니’당선으로 방송작가 데뷔. ▲ 97년 고은정언어예술원 개원 ▲ 98년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 2000년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저녁노을, 사랑의 계절, 두고온 언니에게 등. ■ 소설작품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 상훈 국민훈장동백장(2000년)
  • “황우석 교수님 윤리문제도 함께 해결하세요”

    “황우석 교수님 윤리문제도 함께 해결하세요”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게 멋있는 것은 광고 속 얘기일 뿐이다. 이런저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러번 그 광고가 패러디된 것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일단 연구 자체가 놀랍다. 거기다 난치병을 해결할 수 있다는 휴머니즘에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는 국가경쟁력 담론까지 따라 붙으니 ‘배아줄기세포연구’는 이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이런 판에 ‘윤리’ 어쩌구 하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서울대 법대 박은정 교수가 그랬다. 과학기술부 세포응용연구사업단 윤리위원장인데다 6년여 동안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지만 “이제껏 본격적인 인터뷰는 거절해 왔다.”고 말했다. 겁이 나서가 아니다. 자기 발언이 자칫 ‘기술 대 윤리’라는 전통적 이분법으로 비춰지기 싫어서다. ●자본의 힘에 생명공학연구 흔들릴까 우려 박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의 힘과 여기에 흔들리고 있는 생명공학연구자들에 대한 우려다.“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구의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되면 과학자들 스스로 연구를 중단한 뒤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연구성과와 한계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구자들이 그런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아요.” 박 교수는 그 원인으로 바로 바이오산업을 염두에 둔 특허권을 지목했다. 특허를 내는 데는 보안유지와 속도경쟁이 필수다.“근본적으로 생명공학 분야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정보를 다룬다는 점에서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특허는 원래 발명에 대한 것 아닙니까?거기다 특허라는 것은 어떤 형질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포는 형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비판은 물론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다.“어쨌든 배아는 인간 생명의 잠재력”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희소자원인 난자를 적출하는데는 여성의 건강 문제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자신의 논의가 과학기술 발달의 뒷다리를 잡는 것으로 비춰지길 원하지 않았다.“과학기술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배아복제는 인간생명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이라는 이유로 권장되기보다 최소한으로 억제돼야 합니다. 동시에 과학자들 스스로 이 문제를 먼저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게 차라리 앞으로의 연구를 진행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생명공학 기술이 제일 앞선 만큼 윤리문제도 자생적으로, 주도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을 누차 반복했다. ●배아보호법 여성계 요구 반영되지 않아 올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생명윤리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가장 큰 문제는 배아보호법 제정과 같은 여성계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아 난자 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 영역이 세세하게 나눠져 있고 각 영역마다 기술 발달 속도가 다르다는 생명공학의 특성을 무시한 채 ‘생명윤리법’에다 통째로 다 밀어넣은 것도 문제입니다. 기술발달에 따른 기민한 대응이 어려워진 것이지요.” 생명과학이 각광받으니 너도 나도 발을 뻗어대고 있는 정부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생명윤리법은 ‘윤리심의위원회’를 설치토록 하고 있는데 처음 안과 다르게 부처 장관이 7명이나 위원으로 참가하더군요.” ●유럽선 황교수연구 윤리적 측면서 의심 그러나 구체적으로 황 교수 연구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는 말을 아꼈다. 이유는 박 교수가 얼마전 ‘Bioethics,Research Ethics and Regulation(생명윤리학, 연구윤리와 규제)’을 영어로 펴냈다는데서 짐작할 수 있었다.“유럽 연구자들을 만나면 내놓고 말을 안한다뿐이지 황 교수 연구의 윤리적 측면을 굉장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미 윤리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영어로 책을 썼습니다.”이렇게 된 바에야 우리가 먼저 나서서 윤리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자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박 교수의 전공은 법철학. 배아에 관심을 가진 것은 80년대말부터다.“처음에는 장기이식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90년대 초반에 배아 관련 논문을 썼습니다. 그때만 해도 먼 미래에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썼는데 불과 10여년 뒤 현실화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인터뷰 말미에 종교가 뭐냐는 질문을 던져봤다.“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종교적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다.”라며 싱긋 웃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대비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폭발적인 관심을 끈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다. 그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꼽는다면 ‘상업화’에 유리하다는데 있다. 이는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줄기세포 연구는 원래 난치병 치료차원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끌어왔다. 줄기세포는 일종의 어미세포다. 평상시에는 그냥 평범한 세포지만 일정한 자극이 있으면 사람 몸을 구성하는 각 부분으로 변해서 자라난다. 바꿔 말하면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이상한 부위를 진단한 뒤 줄기세포에서 그 부위에 적절한 세포를 뽑아내 병든 세포를 대체한다면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줄기세포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체(adult)줄기세포이고 다른 하나는 배아(pluripotent)줄기세포다. 성체줄기세포는 평상시에는 신체의 어떤 특정한 부위에 잠잠하게 있다가 그 부위의 세포가 상했을 경우 이를 대체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배아줄기세포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최초의 세포 덩어리에서 얻어낸다. 즉, 신체의 모든 부위로 발달해 나갈 가능성을 안고 있는 세포다. 이 지점에서 두 줄기세포의 효용성은 큰 차이가 난다. 성체줄기세포는 기본적으로 배아줄기세포와 같은 윤리논란에서는 비켜나 있다. 그러나 얻기도 힘들 뿐더러, 얻는다 해도 양이 적고 보존이 어려운데다 다양한 세포를 얻지 못한다. 성체줄기세포 연구 역사가 30여년에 이르는데도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데는 이런 점이 작용했다. 반면, 배아줄기세포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세포를 얻어낼 수 있는데다 난자 기부자를 구하고 난자를 수정된 상태로만 만들 수 있으면 많이 생산해낼 수 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바로 이 대목에 위치하고 있다. 황 교수는 체세포를 난자에 주입해 전기충격을 가한 뒤 증식시켰을 뿐 아니라 증식 성공률까지 한껏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스피박 넘기/스티브 모튼 지음

    ‘등 따습고 배부른 부르주아 아주머니들의 투덜거림’. 고차원적 이론 비판에서든 저급한 인상비평 수준이든 페미니즘 비판에서 끊이지 않는 단골 메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정작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측면이 크다. 9·11테러 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미국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르카’를 벗어던진 여성 아나운서가 방송을 진행토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사례는 있다. 몇해 전 논란이 됐던 여성계의 ‘박근혜 지지’ 문제도 있었고, 공창제와 같은 현실적 접근은 아예 무시한 채 추진한 집창촌 일제단속도 있다. 이것의 문제점은 질문을 조금만 진전시키면 금방 드러난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여성해방인가?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이면 다 오케이인가? 고마워해야 할 성매매 여성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을 ‘현실은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라 부르나? 현실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무시한 채 시선을 오직 여성에게만 고정시킬 경우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스트 가야트리 챠크라보르티 스피박을 본격적으로 다룬 ‘스피박 넘기’(스티브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앨피 펴냄)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스피박은 흔히 ‘포스트 식민주의 페미니스트’로 불리는데 인도 출신 여성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동시에 스스로의 표현대로 ‘사회주의 이상과 식민유산 사이에’ 갇힌 인도의 역사적 경험 탓도 있다. 이런 부분에서 공유할 대목이 많아 국내 학자들의 이런저런 글에 곧잘 인용되지만 정작 스피박 관련 책은 거의 없다.2년여전 나온 ‘다른 세상에서’가 전부다. 마르크스적인 접근법에다 데리다의 해체이론, 페미니즘 이론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렵기 때문이다.‘스피박 넘기’는 이를 쉽게 풀어주고 있다. 스피박 이론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스피박 스스로 자신에게 붙은 ‘포스트 식민주의’ 딱지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서구 백인 중심의 포스트 식민주의란 식민주의의 또 다른 변형일 수 있다는 반전이다. 이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올린 여성들의 울타리도 부정한다. 지난해 모 일간지를 통해 진행된 스피박과 한국의 한 여성학자간 대담이 초점에서 어긋난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원서와 달리 출판사가 스피박 ‘넘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마침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가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이화여대에서 열린다.90여개국에서 2500여명이 참가해 2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매머드 행사다. 우리 여성학은 혹시 서구 백인의 이론에 매몰돼 지금 이 땅의 현실은 외면하는 지적 태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피박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까막눈 어머니들한테 ‘말의 힘’ 배웠죠”

    “까막눈 어머니들한테 ‘말의 힘’ 배웠죠”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은 다부진 ‘단발 소녀’였다. 처음엔 조금은 쉰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혹시나’했다. 고음의 또렷한 소리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것이었다. 지난해 3월 ‘대통령 탄핵무효 촛불집회’.10만여명을 거침없는 말로 ‘녹여버린’ 그 사람이었다. ‘국민 사회자’ ‘거리의 사회자’ 최광기(37·여)씨. 이 별칭은 탄핵무효 촛불집회 이후 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떠오른 스타는 아니다.3·8여성대회를 비롯해 안티미스코리아대회, 월경 페스티벌, 대한민국 여성축제 등 여성계 행사는 물론, 인권 콘서트, 노래판 굿 꽃다지 등 1000여개의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진행한 전문 사회자다. 최근에는 공중파 방송에도 고정 출연하고 있다. ●탄핵 무효 집회후 ‘국민사회자’로 그가 사회자로서 겪은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행사를 마련했다.23일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열리는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사람들’ 콘서트다.‘광기 쇼쇼쇼’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행사는 거리 행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책으로 엮은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린다.“시와 노래, 유쾌한 말로 한번 땀나게 놀아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땀내 나는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자는 것. 그는 “철거민, 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 장기수 등 다양한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10년 동안 ‘얘기꾼’에 매달렸던 것은 거침없고 신명나는 얘기를 함께 나누다 보면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희망의 씨앗을 던져줄 수 있었던 것은 ‘솔직하고 진심어린’ 태도였다. 그는 “말로 기교를 부리면 언젠가 드러나지만 진정어린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다. 시인 이문재씨는 이런 그를 두고 “겉말과 속말 사이의 거리가 아득해진 세상에서 겉말과 속말이 같아서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였다.”고 평했다. 최씨가 말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것은 덕성여대 4학년 때 철거민 여성들을 위한 어머니 학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까막눈 어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남편과 싸운 이야기, 쌀 떨어진 이야기 등 내놓고 하기 어려운 얘기들을 서슴지 않는 어머니들을 보고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솔직하고 진심어린 말이 서로를 하나로 묶어준다는 것을 알았지요.” 전문 사회자로 나선 것은 10년 전.93년 도시빈민 문화제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은 뒤 95년 민주노총 창립대회 전야제에서 7시간 동안 행사 진행을 맡았다. 사람들은 거침없고 솔직한 말에 웃고 울었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는 “비아냥거리고 경솔하고 함부로 하는 말이 판치고 있지만 거창한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했다. ●진심어린 말이 사람을 움직여 요즘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겼다. 방송에서 사람 사는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나가는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해보고 싶다는 작은 꿈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얘기꾼’을 자처하는 최씨에게도 건강은 항상 걱정이다. 목을 너무 많이 써 성대결절이 진행되고 있고,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 수준이다. 왼쪽 눈의 시력도 갈수록 약해지는 심각한 상태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마이크를 놓을 생각은 아직 없다. 지금도 한 달 평균 10차례의 크고 작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97년 결혼해 남편과 아들, 딸 남매를 둔 그는 요즘 건강이 더 좋지 않다. 그래도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 남은 목소리까지 죄다 뱉고 싶어한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둘째 아이 가질 확률 높다

    둘째 아이 가질 확률 높다

    “일이냐 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분법적 선택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우리 기혼 직장여성들의 현실이다. 게다가 저출산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일부에서는 ‘저출산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원인’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직장에 간 엄마들이 모두 가정으로 돌아와 살림만 한다면 출산율이 높아질까. 최근 여성계에서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분담 등 가족 내 성평등(Gender Equality)이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는 학설이 발표됐다. 한국여성개발원 박수미 연구위원은 최근 보건복지포럼을 통해 가정내 성평등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을 밝혔다. 쉽게 말해 남편이 가사를 도와주는 집일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것이다. 박 연구위원은 “개도국에서는 성평등 수준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게 나타나지만 경제성장을 이룬 선진국에서는 성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게 나타난다.”면서 “여성의 경제활동이 전반적인 출산율을 낮추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일부만 보는 단편적인 사고”라고 말했다. 박 위원이 설명한 학설은 소위 ‘페미니스트 역설(feminist paradox)’이란 이론이다.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확산되면 일정기간 동안 출산율이 떨어지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면 다시 출산율이 상승하는 U자형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다. ●한국 저출산 성평등의 과도기가 원인 성평등과 출산율의 상관관계는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이지만 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연구 대상이 돼 왔다. 이론상으로 우리나라는 성평등 수준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중간한 단계로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극히 낮아진 과도기로 해석할 수 있다. 비슷한 결과는 다른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004년 발표된 미국의 한 논문(Torr&Short 2004)에 따르면 부부의 가사노동 분담과 둘째 아이의 출산율은 앞서 말한 페미니스트 역설과 같은 U자 곡선을 그렸다. 미국에 거주하는 맞벌이 부부의 가정을 조사해 발표한 이 논문은 부부의 가사분담률에 따라 가정을 ‘전통적 가정’‘중간 가정’‘현대 가정’으로 구분했다. 이중 가장 높은 출산율을 보인 가정은 여성 가사 부담이 54% 이하인 ‘현대 가정’으로 81%가 둘째 아이를 가졌다. 여성의 가사 부담이 84% 이상인 ‘전통적 가정’도 74%의 출산율을 보였지만 현대 가정 보다는 출산율이 낮았다.‘중간 가정’은 55%만이 둘째 아이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의 인식변화 사회보다 늦어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회적 변화에 가족 제도의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 현상에서 기인한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사회적 변화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지만 가정 내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가사 분담은 고스란히 여성에게 남게 돼 여성들이 출산을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실제 남성의 가사 참여율이 높은 프랑스, 스웨덴, 영국 등의 출산율이 1.5∼1.9를 유지하는 반면 남성의 가사 참여가 극히 저조한 스페인, 이탈리아, 한국, 일본 등의 출산율은 1.35미만으로 극저출산국으로 분류된다. 박 위원은 “이상적인 출산은 부부가 원하는 만큼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부부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면서 “출산과 양육에 대해 부부와 사회가 함께 고민할 때 저출산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길섶에서] 자서전/우득정 논설위원

    10여년간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살며 이따금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던 60대 초엽의 여성계 인사 한분이 갑자기 술집으로 호출한다. 여전히 씩씩한 걸음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생맥주집으로 들어서더니 앉기가 무섭게 “동생, 나 자서전 내기로 했어.”라고 선언하듯이 내뱉는다. 내 얼굴에 나타난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을 본 듯 “남은 30년을 위해 지나온 날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자식과 손자·손녀들에게도 좋은 유산이 될 것 같기도 하고…”라며 나중에 문장 손질을 해달라고 한다. 그러곤 자서전 집필을 결심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한다. 올해 초 현역에서 은퇴한 뒤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으려 했지만 머릿속에 소음만 무성할 뿐 줄거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인생 1막이 정리되지 않았으니 2막의 스토리가 제대로 전개될 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만 자서전을 쓰라는 법이 있어? 내 삶에도 교훈될 만한 일이 많다고. 자손들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유산이 어디 있겠어.”말하는 품새가 말릴 단계는 지난 것 같다. 한편으론 ‘자손들을 위한 평범한 사람의 자서전’-흥미있는 발상 같기도 하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사회플러스] 법무부 감찰위원장 김상근 목사

    법무부는 13일 외부인사 7명을 감찰위원으로 위촉하고 첫 감찰위원회를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초대 감찰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상근(66·반부패국민연대 회장) 목사가 내정됐고 법조계 및 학계, 경제계, 언론계, 여성계, 시민단체 인사들이 위촉될 예정이다.
  • ‘처제·형부 강간사건’ 진실은?

    ‘처제·형부 강간사건’ 진실은?

    얼마전 소주 두 병을 마신 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형부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처제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서로 동의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형부가 나란히 법정에 섰다. 하지만 법원은 “피고인이 처제의 술 취한 상태를 이용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확실히 단정하기 어렵다.”며 형부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고, 이에 여성계가 크게 반발하는 등 거센 논란이 일었다. 과연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며, 법원의 무죄 판결은 타당한 것이었을까. MBC ‘PD수첩’은 12일 오후 11시5분 강간죄를 둘러싼 현행법과 수사 과정의 문제점 등을 진단하는 ‘강간죄를 개혁하라’를 방영한다. 제작진은 매년 25만여 건이 발생한다는 강간사건 가운데 경찰에 신고되거나 여성단체에 상담되는 건수는 고작 10% 미만이며, 그 중 고소로 이어지는 사건은 극히 드문 우리나라 강간사건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또 무엇이 강간 피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사례를 통해 짚는다. PD수첩은 앞서 언급한 ‘처제-형부 강간 사건’의 무죄 판결에 따른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강간사건 피해자 여성의 사례와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통해, 경찰·검찰·재판부에 여전히 남아 있는 남성주의적 시각도 꼬집는다. 또 무죄 판결이 났던 판결문을 미국의 현직 판사와 형법학 교수에게 의뢰, 판결의 타당성도 짚는다. 제작진은 “외국에서는 피해자가 설사 동의를 했더라도 술에 취한 상태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심증적으로 죄가 있다고 판단돼도 이를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제작진은 강간죄 개혁운동 등도 소개하며, 우리의 강간죄 관련 법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이제 ‘미아리 텍사스’ 는 그만…”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집창촌에서 지난달 27일 일어난 화재로 성매매여성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강북구 미아동 주민들이 ‘미아리 텍사스’라는 호칭을 두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주민들은 “정작 미아동에는 ‘미아리 텍사스’가 없는 데도 수십년동안 습관적으로 쓰이다 보니 지역 이미지가 손상되고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31일에는 각 언론사에 “‘미아리 텍사스’ 또는 ‘미아리 집창촌’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 달라.”면서 “‘집창촌’이라는 용어도 ‘집결지’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경찰도 ‘집창촌’이라는 용어가 성매매의 뜻을 포함하고 있어 종사하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보고 ‘집결지’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로 했다. 경찰청 이금형 여성청소년과장은 “윤락가나 창녀촌 등 기존 용어를 순화하려고 집창촌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최근 여성계에서 이 역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 집결지로 대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인권위원장 조영황씨

    인권위원장 조영황씨

    노무현 대통령은 31일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장 후임에 조영황(64)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임명했다. 차관급인 국무조정실 기획차장에 유종상(57) 국무조정실 주한미군대책추진기획단 부단장, 정책차장에 최경수(52) 사회수석조정관을 임명했다. 청소년보호위원장에 최영희(55·여) 내일신문 부회장을 임명했다. 최 청소년보호위원장은 20여년간 노동·여성·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활동에 참여해 온 대표적 여성계 인사로 청소년보호위원회 출범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등 청소년 보호업무에 대한 애정과 경험이 풍부하다고 김 수석이 설명했다. ●조영황 위원장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공소유지 담당변호사를 맡기도 한 원로 인권변호사.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회장,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위원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피해법률지원본부장 등 시민단체에서도 다양하게 활동했다. 청렴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신망이 두텁다.2000년에는 고향인 고흥군 법원의 판사를 지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남 고흥 ▲서울대 사법대학원 수료 ▲사시 10회 ▲법무법인 신화 대표변호사 ▲국민고충처리위원장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0)전국의 길지 (상)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0)전국의 길지 (상)

    ●정북창의 십승지론 지난 호를 읽은 정감록 산책의 독자들이 인터넷상에서 한바탕 격론을 벌였다. 어느 독자는 전라도의 십승지는 지리산 하나가 아닐 거라며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그에 대해 누구는 전라도에 길지가 여럿인 것은 사실이지만 십승지는 지리산 하나뿐이라고 못 박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감록에는 전국 각지에 산재한 수십 개의 길지가 일일이 언급돼 있고, 전라도에도 길지가 물론 여러 군데 있다. 그런데 십승지란 최상의 조건을 갖춘 열 곳의 길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대부분은 경상도에 위치한다. 충청, 강원, 전라도에도 몇 개의 십승지가 있지만 전라도 몫은 지리산 하나다. 어떤 독자는 난리가 일어날 때 십승지로 피난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는 정감록에 딸린 ‘북창비결’을 언급해가며 십승지 무용론을 폈다. 북창비결은 흔히 북창 정렴(1506∼1549)의 저술로 본다. 유·불·선에 두루 능통했다고 하는 정렴이 과연 북창비결의 저자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십승지에 관한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았다.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쓸데가 있기도 하고 쓸데가 없기도 하다.” 설사 십승지에 들어가더라도 효과가 반드시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북창은 “내 자손들은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 지어다.”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십승지를 총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한다. 하지만 북창은 “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이 깊은 곳 섬에 숨어라.”고도 했다. 요컨대 북창비결은 길지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았으나 정감록의 십승지론을 근원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궁기’가 있다 열째 십승지는 태백산(1567m)이다.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태백시 경계에 우뚝 솟은 태백산.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정상에 우뚝한 영산이다. 태백산은 소백산과 더불어 십승지의 자궁 노릇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남사고 역시 내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정감록을 보면 이심은 이렇게 말했지. 곡식 종자는 삼풍(三豊)에서 구하고 인종(人種)은 양백(兩白)에서 구한단 거야. 양백이란 태백산과 소백산이지.‘남격암’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랬지. 여러 산들 중에서 소백산(小白山)이 으뜸이라고 말이야. 장차 금강산 서쪽,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되고,9년간의 수해와 12년간의 병화가 있다고 보았을 때 오대산 남쪽에서 길지를 찾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남격암’에서도 북쪽의 땅들은 좋지 못하다 했고, 정북창도 충청도와 강원도는 살 수가 없고, 경기도 동쪽에서는 어육(魚肉)이 난다고 말했거든. 바로 그런 위기의 시절에 태백산과 소백산이 사람을 살린단 말씀이야.‘경주이선생가장결’을 보더라도 비슷한 말이 있고,‘토정가장결’에도 역시 똑같이 돼 있어. 달리 말해 정진인(鄭眞人)의 백성은 소백산과 태백산 밑에서 나온단 예언이야. 두 말할 나위 없이 십승지(十勝地) 중에서도 특히 2산의 기운을 직접 받는 곳이 단연 으뜸이지. 신기하게도 ‘택리지’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와.2산은 고래로 3재(수재, 화재 및 풍재)가 없기로 이름나서 국가에서 사고(史庫)를 두었다고 했거든. 태·소백산은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살기라곤 전혀 없거든. 난 특히 소백산을 사모했지. 소백산 아래 말을 내려 절을 올리며 이렇게 인사를 드렸었지.‘이 산은 정녕 사람을 살리는 산이옵니다(此活人山也).’ 글 가운데서도 난 태·소백산이 피난에 제일가는 땅이라고 밝혀두었어.‘정감록’을 읽어보면 태·소백 사이에 예전에 행세하던 양반들이 복고한다, 후세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2산 사이에 자손을 숨겨야 한다고 했는데 모두 내 말에서 비롯된 걸 거야.” 남사고의 편지를 읽고 헤아려보니 ‘정감록’이란 비결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태백산과 소백산에 얽힌 신화와 전설, 남사고를 비롯한 예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점차 수렴되어 정감록이란 예언서를 일궈낸 게 틀림없다. 얼핏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남사고의 편지글은 쉴 새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정감은 이런 말을 했어. 이 난세를 당하여 궁궁(弓弓)이 가장 이롭도다. 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시겠나? ‘경주이선생’에 보면 그 답이 있네. 지도(地道)를 얻어 병진(丙辰)에 금강산(金剛山)에서부터 기운을 바라보고 근원을 찾아 헤매다 어느 새 삼척부(三陟府)에 도착한다고 했어. 거기서 신(辛)·술(戌)의 방위를 따라 오십천우이(五十川牛耳) 사이를 향했더니 태백산(太白山)이란 거야. 태백산에서 백여 리 바깥을 바라보면 깊은 숲 속에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크고 작은 궁기(弓基)란 걸세.‘토정가장결’에도 역시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네. 이 어찌 실없는 말이겠는가? 모름지기 인간 세상에서 몸을 피하는 데는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다고 정감록은 말하네. 오로지 양궁(兩弓), 궁궁 또는 활활이 가장 좋다는 거야. 바로 그 궁기가 태백산 아래 백여 리 지점에 있다 하네. 이 아니 좋을손가?” ●강원도의 길지 최고의 길지인 궁기는 태백산에 가까운 곳에 있다! ‘남격암’은 태백산 밑 강원도 영월 정동 방향의 상류를 가리켜 어지러운 일이 생겼을 때 종적을 숨길 만하다고 했다. 그 곳이 혹시 궁기란 말인가? 이상한 일이지만 영월의 정동 상류는 수염 없는 사람이 먼저 들어가면 소용없다고 했다. 방향이 정동인데다 상류라면 양기가 극히 성한 곳이다. 남성에게 적합한 길지란 말인데 ‘수염 없는 사람’이란 승려, 환관, 아이, 또는 여자라 부적절하단 말이다. 한편 ‘피장처’에선 정선을 길지로 지목하기도 한다. 정선은 높은 산에 파묻힌 모습이 무릉도원과도 같다고 했다. 한편 정선은 지형이 험준해 방어에 유리한 곳이라고도 한다. 남자 한 사람이 관문을 충분히 지킬 만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감록이 말하는 길지는 피난지다. 그러나 정선의 경우는 천연의 요새란 점에서 이채롭다. ‘남격암’엔 백두대간의 본류에 해당하는 강원도 산간의 길지가 두어 개 더 있다. 명산 오대산(五臺山,1563m)과 상원산(上元山)이 그렇다. 상원산은 비교적 덜 유명한데, 정선군 북면과 북평면에 걸쳐 있으며 적설량이 무척 많은 곳이다. 금강산에서 태백산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또 몇 군데 길지가 있다.‘남격암’은 “평평(平平) 울울(蔚蔚)”이 가장 길하다고 했다. 북평, 평해, 울진, 울산 등을 가리킨 것 같다.‘피장처’에도 강릉, 삼척, 평해, 울진이 숨기에 좋다 한다. 이밖에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보미산(補彌山)과 유량산(有良山)도 길지로 거론됐다. 이쯤에서 다시 남사고의 편지를 계속 읽어 보자.“과연 ‘두사총비결’에도 태백산의 지맥들이 길지로 언급돼 있네. 홍천군에 가면 약수산이 있지. 삼봉약수로 꽤 유명한 곳이야. 양구군 동면의 대아산은 또 어떻고? ‘피장처’에선 낭천읍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대미촌과 소미촌이 있다고 했네. 깊고 궁벽한 곳인데 경치가 아주 그만일세. 그 부근에서 오시동, 칠천동, 흑어연, 청하산을 찾아도 좋네. 숨어 살 만한 곳이지. 그밖에 양평과 철원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에 또 하나의 길지가 있어.‘피장처’에선 어영창 동쪽 기슭에서 물길 따라 30리를 들어가면 된다고 했어. 대개 두 물이 모여드는 곳에 길지가 많지.‘화악노정기’에선 낭천에 있는 광현에서 남쪽으로 물길 따라 15리를 내려가면 산이 머리를 돌이키는 곳이 있는데 손씨 6형제가 피난할 곳이라고도 했어. 이렇듯 오대산 쪽에서 서울을 향해 서쪽으로 나오다가 어느덧 춘천에 이르게 되지. 춘천에서도 기린곡은 가장 깊고 궁벽해 난을 피할 만 하네. 춘천과 낭천이 만나는 곳에 불곡이란 곳도 있어. 역시 한 세상의 풍파를 피하기에 최고라네. ●동굴로 연결된 신선세계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신선세계도 있다는 군.‘북두류노정기(北頭流路程記)’에 자세히 나와 있지. 강원도 평강읍(平康邑)으로 흘러드는 구곡천(九谷川)이 있지 않나. 물길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면 청화산(靑華山)이 나오지. 거기서 태산 골짜기 40리를 휘감아 들어가게. 그러면 눈앞에 천장폭(千丈瀑)이 버티고 있네. 폭포수에 뛰어들어 머리로 물길을 뒤집어쓰고 두어 걸음만 들어가 보게. 한 석굴(石窟)이 나올 걸세. 그 석굴은 길이가 10리라네. 이 석굴을 걸어 지나면 드디어 명랑한 한 세계가 펼쳐지네. 동네 입구엔 5장이나 되는 높은 비석이 위용을 뽐내고 있지. 신선계는 상대(上臺)와 중대(中臺) 그리고 하대(下臺)로 나뉘는데 170여 호가 여기 산다네. 모두 6개 마을이야. 예부터 조선의 숱한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동경해온 이상세계라네. 한 때 나도 그 곳을 찾아 나섰으나 아쉽게도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네. ‘피장처’에도 흡사한 이야기가 있어. 들어보겠나? 소양강 물길을 거슬러 얼마를 올라가면 한줄기 물길이 골짜기 입구에 있는 어느 바위 벽 사이에서 용솟음쳐 쏟아지는 곳이 있네. 재빨리 나무 사다리를 구해 바위틈으로 기어들어가게.20리쯤 바위 밑을 꾸불꾸불 파고들면 마침내 눈앞이 트이고 한 동리가 나온대. 이 마을엔 생선과 소금이 귀해 속세의 사람들은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있긴 해. 태백산 아래 있다는 궁기나 물밑 동굴로 이어지는 신선세상은 좀체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아주 난점이야. 정말 그런 이상세계가 있기나 한지, 솔직히 말해 나도 모르겠어. 오죽이나 세상살이에 지쳤으면 백성들은 그런 위안거리를 만들어냈을까. 생각할수록 백성들이 가엾기도 하고 영특하게도 생각되네.” ●영남의 길지들 “소백산에서 힘차게 뻗어 내린 몇 개의 산줄기는 다시 영남에 수많은 길지를 만들어 놓았다네.‘남격암’은 우선 조령(鳥嶺,548m)부터 말하고 있네. 조령이라면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아니겠나. 새재라고도 하고 문경새재라고도 부르지.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영남이라는 이름도 실은 조령과 큰 관련이 있네. 소백산의 아들에 해당하는 죽령(竹嶺,689m)과 조령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영남 아닌가. 영남은 상고 적에 신라 1천년의 중심이었지. 그밖에 ‘남격암’은 영천을 길지라 말했는데 일리가 있어. 영천은 한민족의 영산인 소백산에 가까워. 북쪽엔 보현산(1124m), 서쪽엔 팔공산(1193m), 동쪽의 운주산(806m)이 에워싸며 높이 솟아 있고, 남쪽엔 금박산(432m), 구룡산(675m), 사룡산(685m) 등이 버텨 있어 포근히 감싸인 분지라, 과연 영천은 명당이로고. ‘남격암’은 수산(首山)을 길지라 말하기도 하네. 영양군에 있는 수산 말일세. 있잖은가? 저 유명한 17세기 조선 여성계의 거인 안동장씨부인의 남편 이시명도 바로 그 수산(首山)에 숨어 살았다고 하지 않나. 이 수산(首山)을 요샌 수비산(首比山)이라 부른다며? 선비가 숨어 살며 힘을 기를 만한 곳이 또 있네. 역시 ‘남격암’에 적혀 있지만 금오산(金烏山)이 아주 그만일세. 영남 팔경의 하나인 이 산 아래 유명한 채미정이 있다네. 이 정자야 물론 영조 때 후학들이 건립했다고 하지만 본디는 야은 길재 선생이 숨어 살며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지. 금오산이 있는 선산군은 인재의 보고라네. 조선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나온다 하고 다시 그 절반이 선산에서 출생한다 하지 않던가. 아직도 시비는 끊이지 않고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 역시 금오산 기슭에 서 있다네. 말을 하면 끝이 없네. 남쪽으로 뚝 떨어져 오늘날 경상남도 산청군에도 길지가 있어. 조선시대 단성현 북면과 동양면 등은 경치가 절승하고 산골이면서도 남강을 거슬러 생선과 소금이 모여드는 곳이라 사람이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네.” ●충청도의 길지 남사고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국의 길지는 태백산 또는 소백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지의 절반 이상은 2산에서 사방 200리 이내에 집중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경상도 단성이나 강원도 춘천처럼 2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길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은 멀리 2산에 연원을 두되 각기 제 나름으로 명산의 칭호를 누릴 만큼 위엄을 충분히 갖춘 경우다. 남사고는 그 점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그럼, 그러하고 말고! 길지를 결정하는 조건이 바로 그런 것이네. 우선 충주의 월악산을 보게나. 이 산은 ‘피장처’에도 기록된 곳이지만 소백산의 친자식이나 다름없네. 제법 가까이에 있단 말씀이야. 충청북도 충주와 제천·단양에 걸쳐 있는 월악산은 신령스럽기 한이 없다네. 임진왜란 때 왜병이 가까이 오자 번개가 일고 천둥이 쳤어. 그 바람에 산 아래 송재, 덕산 등 마을엔 왜병이 전혀 침입하질 못했어. 이렇게 땅의 기운이란 대단한 걸세. 속리산(1058m)도 꽤 영험하지. 이 산은 소백산에서 서남쪽으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미 그 자체가 명산이야.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괴산군(槐山郡)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市)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을 광명산이라고도 하고 소금강산이라고도 하지 않나.‘남격암’에선 뭐라 했던가? 보은(報恩)의 속리산 아래 증항(甑項) 부근은 난리를 당할 때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땅이라고 했어. 하지만 대대로 보존할 땅은 아니라고 했거든. 왜냐? 일조량이 적어 농사가 어렵기 때문이야. 그런가 하면 ‘남격암’은 속리산과 더불어 계룡산을 손꼽았지. 계룡산이 명산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알려져 있고 백소장이 이미 설명한 바라 나로선 말을 아끼고 싶네. 속리산이나 계룡산은 말이지. 이미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참 멀리 떨어진 곳이야. 거기서 서남쪽으로 계속 치닫다 보면 산세가 매우 엷어져 지맥이 끊어지다 시피하게 돼. 약해진 용맥은 충청도 바닷가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네.‘남격암’이 일컬은 내포(內浦)의 비인(庇仁)과 남포(藍浦)가 그런 곳이야. 내포는 들이 넓고 산이 야트막해 정다운데다 바다가 가까워 물산이 풍부해. 진정 살기 좋은 곳일세. 이러한 길지는 자손만대 영구히 머물 만한 참으로 귀한 땅이야. 속리산과는 사뭇 다른 곳이라네.” 남사고의 안내를 받아 ‘정감록’의 길지를 하나씩 헤아려 보니 곳곳에 명당이요, 명당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이곳 아니면 절대 안 될 곳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호남과 경기지방의 길지 순례는 다음 호에서 계속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호주제 47년만에 폐지

    호주제 47년만에 폐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호주제 폐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민법 개정안을 처리,2일 열릴 본회의에 넘겼다. 법사위는 그러나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안은 위헌성 여부를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법사위는 2일 오전 전체회의를 다시 열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은 뒤 처리키로 했다. 법사위는 이날 민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을 실시해 찬성 11, 반대 3, 기권 1표로 가결했다. 법사위 소속 열린우리당 의원 8명 전원과 한나라당 주성영·김재경 의원,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찬성표를 던진 반면 한나라당 장윤석·주호영·김성조 의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위원장인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은 기권했다. 민법 개정안은 여야 의원 과반수의 지지를 받고 있어 2일 본회의에서도 큰 이변이 없는 한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여성계의 폐지 압력을 받아온 호주제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을 뒤로하고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전망이다. 법사위 법안심사소위가 정부안을 기초로 마련한 개정안은 현행 민법 중 호주제 관련 규정을 삭제하는 한편, 동성동본 금혼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의 재혼 금지기간 조항을 삭제했다. 또 15세 미만의 양자를 입양할 경우 호적에 친생자(親生子)로 기재해 법률상 친자와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친양자제도를 새로 도입됐다. 이와 함께 부부 합의시 자녀가 어머니의 성과 본을 승계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은 호주제 폐지에 따른 새 신분등록제도 준비를 위해 유예기간을 거친 뒤 오는 2008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한편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와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이날 회담을 열고,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 등 3대 쟁점 법안을 4월 국회에서 다루기로 합의했다. 주식백지신탁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도 다루기로 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호주제 위헌여부 3일 결정

    헌법재판소는 3일 오후 2시 대심판정에서 호주제를 규정한 민법 781조 1항과 778조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여성계와 유림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법무부의 민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헌재는 크게 합헌, 위헌, 한정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합헌 결정은 암묵적으로 ‘호주제 폐지가 위헌’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반면 호주제가 헌법상 남녀평등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지면 민법 개정안 처리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새 신분등록안 ‘1人1籍 가족부’] 사실상 단일안 나오기까지

    [새 신분등록안 ‘1人1籍 가족부’] 사실상 단일안 나오기까지

    호주제 폐지 이후 기존 호적을 대체할 새 신분등록 방안으로 ‘가족부 형태의 1인1적제’가 사실상 확정됐다. 대법원과 법무부가 절충한 셈이다. 대법원은 1인1적제, 법무부는 가족부제를 내심 지지해왔다. 양측이 사실상 단일안을 도출했지만 이 과정에서 알력도 적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배우자 부모에 대한 공시 범위 등 미세한 부분을 놓고 조정이 되지 않아 개별적으로 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양측은 지난해 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가 새 신분등록제도 검토 의견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각각의 안을 놓고 내부 검토를 해왔다. 대법원이 먼저 안을 확정해 이달 10일 1인1적제를 내놓았다. 본인을 중심으로 국민 모두가 각자의 신분등록부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신분등록부에 부모와 자녀, 배우자는 이름과 주민번호만 기재되고, 형제 자매는 아예 기재하지 않게 했다. 같은 날 법무부는 ‘신분등록제도 개선위원회’를 발족, 논의를 시작한다고 했으나 내심 가족부제를 지지했다. 가족부제는 ‘기준인’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의 신분등록부를 갖게 하는 것. 여성계 등에서는 ‘호주’를 ‘기준인’으로 이름만 바꾼 것과 다름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초에는 호적사무의 주부 부처인 대법원 안대로 확정될 듯이 여겨졌지만 17일 국회 공청회에서 의외로 대법원 안에 대한 우려가 잇따라 제기됐다. 형제와 배우자 부모 등이 포함되지 않아 전통적 가족관계를 해체할 우려가 있다는 것. 결국 양측은 한발짝씩 물러서 합의안을 도출했다. 대법원은 공시사항을 확대하는데 합의했고, 법무부는 1인1적제를 받아들였다. 국회는 양측의 신분등록제안을 놓고,2월중 공청회를 열 계획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혼인중에도 재산분할 허용

    혼인중에도 재산분할 허용

    이혼할 때가 아니라 혼인 중에도 부부가 재산을 분할해서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산하 가사소년제도개혁위원회는 14일 공청회를 열어 이같은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개혁위는 오는 28일에 전체회의에서 최종안을 마련해 대법원장에게 민법을 개정하도록 건의할 예정이다. ●결혼전 형편에 맞게 재산계약 체결 남편 A(57)씨는 2000년 6월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냈다. 사업을 하던 A씨는 모든 재산을 아내 명의로 해놓아 별거 후 생계가 막막했다. 그러나 법원은 “외도한 남편에게 가정파탄의 책임이 있다.”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별거로 가정은 해체됐지만, 법적 부부란 이유로 재산도 전혀 나눌 수 없었다. 개혁위는 A씨처럼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재산을 분할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개혁위는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재산 관리를 하되 다양한 형태의 부부재산계약 표준안을 마련해 결혼 전 남녀가 표준안 내용을 변경해 형편에 맞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안도 채택했다. ●가정해체 촉진 비판도 이같은 안은 재판 이혼에서 판사의 재량에 따라 재산을 분할하던 방식을 수정, 당사자들의 계약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여서 여성계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재산분할을 쉽게 함으로써 가정이 빨리 깨질 수 있다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양정숙 변호사는 “혼인 중에도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게 하면 재산권을 갖지 못한 배우자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회규 강남대 교수는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가정파탄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은 절반씩 나눠야” 개혁위는 혼인 중 취득한 재산과 배우자가 상속·증여받은 재산도 재산의 증가, 유지에 기여한 경우에는 분할할 수 있도록 했다. 재산분할은 절반을 원칙으로 하고 형평에 맞게 다른 비율로 분할할 수 있게 했다. 양 변호사는 “분할 비율을 절반으로 하면 전업주부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재산형성에 여성의 기여가 더 큰 경우도 있어 가감할 수 있는 규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혁위는 배우자가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하거나 부부가 사는 주택을 처분하는 경우에는 배우자의 동의를 얻도록 부부재산제도 수정안을 제시했다. 정상규 대전지법 판사는 “부동산을 부부공동 명의로 등기하는 경우에 등록세·취득세 등을 감면해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을 외형상으로도 부부 공동의 명의로 소유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장하진 여성-여성계 대표적 진보학자

    장하진 여성-여성계 대표적 진보학자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여성학자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를 지향하는 여성정치세력시민연대 대표를 지냈다. 진보적 여성계에 발이 넓은 학자로 꼽힌다.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추진력을 지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대학 재학 시절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 최영희 내일신문 사장과 함께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렸다. 남편 김홍명(60) 전 조선대 총장과 2남.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김영란 첫 여성 대법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김영란 첫 여성 대법관

    그랬다. 분명 우리 사회의 한 획을 그었다. 여성계에서는 이 시대의 리더로 여긴다. 젊은 판사들에겐 개혁의 상징이다. 여고 시절에는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 학교지 ‘매순’에서 뉴스보도부 기자로 활약했다. 지금도 글(판결문)을 씀에, 스트레스를 푼다. 스스로 머리를 쥐어짠다고 표현한다. ●“서른살까지 외모 자신없어 독서 열중” 그는 서른살까지 외모에 자신이 없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대신 독서에 푹 파묻혔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흠뻑 빠져 세번을 읽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물론이고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같은 어려운(?) 책과의 씨름이 그저 좋았다. 만화책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주위에서는 첫 여성검사가 되라고 했다. 하지만 판사의 길을 걸었다. 비록 몸은 왜소했지만 사회의 소수와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올 8월이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법관이 탄생했다. 파격이라는 단어와 함께 세상이 그를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는 항상 ‘첫’이라는 접두어가 따라다닌다. 지난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청사 8층. 김영란(48) 대법관의 집무실. 그는 “신문에 와이드 인터뷰는 잘 안 하는데….”라며 입을 열었다. 단발머리에다 수수한 옷차림, 얼핏 대법관이라는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듣지 않으냐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는 수줍은 듯 웃기만 한다. 섬마을 선생님 같은 느낌도 들었다. 주위의 높은 기대와 언론의 여러 부추김 등으로 어깨가 무겁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임명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달라는 많은 분들의 뜻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맡은)사건도 많고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다. 일주일에 몇 건 정도 사건을 처리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대외비라고 하면서 “그냥 수십건이라고 표현해달라.”고 주문했다. 판결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기에 집에까지 일보따리를 들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우선 (우리나라 대법원이)사건배당이 워낙 많습니다. 연간 본안 접수건수가 1만 8000건 정도되지요. 판결하고, 또 판결문을 정리하기에 바쁩니다. 아쉬운 것은 (대법원에서)전원합의제가 한달에 한번밖에 안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종심인 대법원 만큼은 전원합의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현재 사법부의 개혁방향으로 독일과 미국식 모델이 거론되고 있지만 미국식이 더 현실적이라고 했다. 독일식처럼 전문 재판부를 만들자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전문성 속의 함정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은 상식이며 국민들의 가치관이 반영돼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대법원’하면 우리 사회의 대표적 보수조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개혁의 기치를 내세운 그의 보폭이 그리 넓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는 “법이란 우리 사회의 뒤에서, 어느 정도 보수적일 필요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물론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도 안 되지만, 합리적인 보수에 가깝도록 설득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다른 사회 조직과는 달리 보수 조직으로 볼 수 있지만 논리를 가지고 접근하면 언제든 문은 열린다.”면서 “그 논리 또한 우리 사회가 계속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문득, 보수적일 수도 있는 동료 대법관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점심 때면 구내식당에서 같이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고 저녁 때에도 가끔 어울린다고 했다. 지난 16일에는 대법원장 공관에서 송년모임도 가졌단다. 이런 날에는 술잔도 오고가면서 일반인들처럼 농도 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분위기까지 이어진다며 웃었다.(자신은 술을 못한다.) ●강금실前장관과는 여고·대학 동기 그는 “여성만이 가진 독자적 몫이 있다.”면서 그 몫은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판결할 때에도 피고의 입장에서 세심하게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자주 한다. 또 스스로도 ‘남자 판사들과 잘 지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사형제는 긍극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대신 흉악범들을 사회와 격리시키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겠지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100% 그 사람의 몫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범죄자들에게 보복적인 극형보다는 사회에서 격리된 채 지내며 고통을 느끼고 또 참회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 관련, 그는 “기본적으로 형법으로 가든, 보안법을 개정하든 그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면서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처벌할 수 있느냐 없느냐, 즉 죄의 유무를 따질 수 있는 장치가 중요한데 정치권에서는 상징적·이념적 논쟁에 얽매여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이라도 기술적으로, 실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평소 호주제 폐지를 주장해온 그는 “사실 올해 안으로 폐지될 것으로 생각했다.(호주제 폐지는)국민 공감대가 많이 형성돼 있다.”면서 “헌재에서 위헌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폐지는 시기만 남아 있는 셈.”이라고 했다. 또한 호주제가 폐지되면 일부에서 가족이 와해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성매매 방지법을 둘러싸고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저해가 되고 있다고 운운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지요. 거꾸로 얘기하면 반인륜·반도덕적인 행위로 경제를 살린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이 국가경제를 살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이웃과 성매매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이중적 성의식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성매매방지법을)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경기여고·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강 전 장관 퇴임 후인 최근에도 몇번 만날 만큼 친분이 두텁다. 그는 강 전 장관을 가리켜 “조용하면서도 변화를 가져오는 어떤 힘이 있다.”면서 나름대로 사회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여고시절 김 대법관이 문예활동과 뉴스보도부 기자로 있을 때 강 전 장관은 음악에 심취했단다. 전교생들 앞에서 교가를 지휘하는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82년 국내 첫 판·검사 부부 탄생 부산에서 1남 4녀중 3녀로 태어난 그는 3살 때부터 글을 터득했다.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여러차례 상을 받을 만큼 문학적 소질도 뛰어났다.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다. 서울법대 2학년 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고 4학년 초인 1978년 3월 최종 합격했다. 그는 1982년 강지원 변호사(당시 검사)와 결혼, 국내 최초의 판·검사가 부부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남편으로서 강 변호사에게 몇점을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요즘에는 아주 훌륭하다.”며 웃는다. 비록 그는 대법관 신분이지만 집에서는 학부모이자 어머니로서 대한민국 여성이 겪는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했다. “저의 좌우명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살아가는 데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지만 소수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을 더욱 이해하는 일에 앞장설 생각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56년 부산 출생 ▲75년 경기여고 졸업 ▲78년 제20회 사법시험 합격 ▲79년 서울대법대 졸업 ▲81년 서울민사지법 판사 ▲83년 서울가정법원 판사 ▲86∼92년 서울지법 동부지원, 부산지법, 수원지법, 서울지법 남부지원, 서울고법 판사 ▲93∼98년 대법 재판연구관 ▲99년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2000년 사법연수원 교수 ▲2003년∼2004년 대전고법 부장판사 ▲2004.8∼대법원 대법관 km@seoul.co.kr
  • ‘한국판 FBI’ 신설 검토

    ‘한국판 FBI’ 신설 검토

    검찰이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비슷한 법무부 소속의 특별수사기구의 설치 방안을 검·경이 구성한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에 제시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또 치안감과 치안정감도 검사 지휘대상에 새로 포함시키기로 하는 등 검·경 수사권 조정을 놓고 해묵은 이견차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2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송광수 검찰총장과 최기문 경찰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자문위원회 첫 회의에서는 양측이 제시한 35개 안건에 대해 협의에 들어간다. 이날 발족되는 자문위는 학계·법조계·시민단체·언론계·여성계 등 외부 인사 12명과 검·경 내부인사 2명 등 모두 14명으로 구성됐다. 핵심 쟁점은 검사만 수사 주체로 인정하는 현행 형사소송법 195조의 개정으로 경찰을 수사 주체로 인정하는지를 놓고 검·경의 신경전이 재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검·경의 위상 관계도 집중 논의된다. 경찰은 상호협력 관계로 재정립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검찰은 치안감 및 치안정감도 검사 지휘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검찰의 수사 지휘권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긴급체포때 요구되는 검사의 ‘사후승인제도’에 대해서는 양측이 합의안을 마련, 자문위원회에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안은 검사의 사후승인제도는 긴급체포의 남용을 막기 위해 유지하되 석방때 필요한 검사의 사전지휘제도는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현재 검사가 갖고 있는 변사자의 검시 권한 문제도 검·경이 접전을 벌이는 쟁점의 하나다. 경찰은 검시 권한의 이관을 주장하고 있지만 검찰은 부정적이다. 시민단체측 자문위원들은 보건복지부 산하의 별도의 검시기구를 설치하는 제3안의 방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검·경은 지난 9월 ‘수사권 조정협의체’를 구성한 뒤 5주 내에 논의를 마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3개월이 넘도록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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