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에 현대 옷 입히니 ‘예술작품’
서양 복식을 다루는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풀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일지 모른다. 글로벌 패션 무대를 주름잡는 일본, 중국의 디자이너들은 대개 고유의 색채를 서양의 틀에 맞춰 그럴싸하게 풀어내 찬사를 받은 이들이다. 맹목적인 모방은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다. 디자이너의 경쟁력은 고유의 것, 자신만의 것을 익숙한 방식이지만 어떻게 낯선 매력을 창조해 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패션’이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유의 전통을 서양 패션에 접목시켜 온 디자이너로 ‘이영주 컬렉션’의 이영주 대표도 빼놓을 수 없다. 2000년부터 전통적 요소를 가미한 의상을 선보여 왔으니 서양 복식 디자이너로서 우리의 것을 탐하는 그의 작업은 올해로 10년째를 맞는다. 새달 2일 코엑스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리는 2009년 봄·여름 컬렉션 준비에 바쁜 그를 서울 청담동 매장에서 만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꽤 낯익은 미니 원피스가 내방객을 먼저 맞는다. ‘피겨 요정’ 김연아가 에어컨 광고에서 입은 의상이다. 연예인 마케팅을 하지 않아 옷 짓는 솜씨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이 대표는 “이 옷 때문에 (사람들로부터)요즘 얘기를 많이 듣는다.”며 웃었다. 겸손해하지만 그의 의상은 방송가와 예술계, 정계 인사들이 즐겨 입을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만든 드레스는 조수미, 장한나 등 클래식음악 스타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유명 수입 브랜드를 마다하고 그의 드레스를 찾는 이가 많은데 어떻게 전통에 눈을 돌리게 됐을까. “IMF가 계기가 됐죠. 당시 상황은 디자이너로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회의에 빠지게 했어요.” 불황 때문에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물밀듯 들어오는 해외 고가 수입 브랜드 물결 속에서 독창성, 차별화에 대한 필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는 것.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쏟아부어 한국 시장을 잠식하는 수입 브랜드와 똑같이 해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2~3년간 가슴앓이를 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홀대하는 백화점의 영업 횡포, 일부 연예인의 무분별한 수입 브랜드 선호가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할지에 대한 쓰디쓴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찾은 해답이 우리 고유의 것, 외국 디자이너가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전통의 문양, 그림, 색깔이었다. 뭔가 다른 것에 대한 절박감은 고유의 문화를 좀더 세련되게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자리잡았다. 연꽃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래 전통 조각보, 오방색, 민화 등을 활용한 ‘작품’ 같은 의상들을 선보여 호평을 받아 왔다. “옷 팔아 번 돈을 1년에 두 차례 여는 컬렉션에 다 쏟아붓는다.”는 그는 서공임 선생의 민화가 그려진 의상 한 벌을 제작하는 데 무려 1500만원을 들이기도 했다.
이번 컬렉션의 전통 요소는 한지와 묵화다. 한지에서 뽑은 실로 짠 옷감에 자연 풍경을 그린 묵화를 넣었다. 지금까지는 95%를 수입 원단에 의존했으나 이번에는 한지 섬유를 주로 사용했다. 한지 섬유는 천연 소재로 땀 배출이 잘되고 피부 건강에 좋아 친환경, 웰빙 트렌드에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모두 65벌. 은은한 색을 머금은 한지 섬유를 화폭 삼아 펼쳐진 부드러운 묵화가 의상 전체에 은근하고 우아한 멋을 깃들게 한다. “우리의 것은 촌스럽다는 그릇된 편견을 변화시키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욕심. 그는 한국적인 것을 천시하는 경향에 대해 쓴소리를 뱉었다. 특히 해외 영화제에 참석한 일부 한국 여배우가 외국 디자이너의 의상을 자랑인 양 걸치고 나오는 현실에 대해 씁쓸해했다. 그러면서 중국 유명 피아니스트 랑랑을 예로 들었다. “그가 공식 석상에 입고 나오는 의상을 보면 항상 가슴 한구석에 작은 용이 앙증맞게 수놓아져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 민족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죠. 우리에게도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년은 브랜드 창립 15주년을 맞는 해다. 여러가지 의미 있는 일들을 구상중인데 모교인 미국 FIDM과 손잡고 미국에서 회고전을 여는 것이 중요한 행사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발표했던 전통 요소가 가미된 의상들로 꾸며질 겁니다. 서양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가 디자이너로서 색깔을 더욱 뚜렷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요. 또한 한지 섬유처럼 우수한 소재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바람도 있고요.”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