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여관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한류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화북천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의혹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기업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212
  •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차 정릉천 따라’ 편이 추석 다음날인 지난 14일 성북구 정릉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추석 연휴 주말을 북한산의 맑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정릉천에서 보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 집결, 경국사에 들어가 고찰의 향기를 즐겼다. 주말이라 문을 열지 않는 명원민속관(한규설 가옥)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릉천변은 1950~1970년대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하며 살던 ‘문예촌’이었다. 화가 이중섭·박고석·한묵·박세원·김병기, 소설가 박경리·박화성·박연희·박계주·최정희·계용묵, 시인 고은·조영암·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작곡가 금수현·김대현, 극작가 차범석, 시사만화가 김성환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린 주부 참가자들에게 피로를 씻어 주는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정릉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 가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고, 담벼락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과 책 표지가 길손을 안내한다. 그러나 ‘보국문로 29가길 11’이라는 도로명주소판이 붙은 집엔 서글프게도 ‘박경리’ 문패가 아니라 ‘서울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낯선 대안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서울시가 예산 부족으로 매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가자들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을 자꾸 서성거렸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속 댄스장이자 고급 요정이었고, 한때 신혼여행지였던 옛 청수장을 개조해 사용하는 북한산탐방안내소에 들어가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북한산 정릉골은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된 뒤 2007년 내부순환도로 국민대입구 램프가 추가 개통되기 전까지도 백악산~보현봉 자락이 장벽처럼 막아서서 개발의 손길을 거부하는 청정의 숲이었다. 청수장으로 대표되는 정릉유원지는 추억과 안식의 공간이었다. 정릉천을 따라 청수장으로 가노라면 경국사가 나타난다. ‘경국사적기’에 따르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봉 아래에 있다고 해서 청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릉의 옛 지명이 ‘살을 에듯 추운’ 사을한리이고, 정릉천이 청수라고 불리고, 청수장이 정릉유원지의 랜드마크가 된 배경에는 모두 청봉이라는 자연 지명의 힘이 작용했다. 청암사는 1546년(명종 1년) 문정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라고 개명했다. 1669년(현종 10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흥천사, 봉국사와 함께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지정돼 부흥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정릉이라는 능이 사라졌다가 26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능을 지키는 3개 원찰의 이름이 모두 바뀌는 변고를 겪었다. 봉국사는 본래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사였지만 현종 때 ‘나라를 받든다’는 봉국사로 개명해 명맥을 이었다. 또 1409년 정릉이 정동을 떠나 정릉동으로 이장됐을 때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신흥사로 개창, 원찰로 삼았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이름을 바꿨다.조계종 본산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처음 묻혔던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17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태조가 죽은 지 9년 만에 능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고, 1510년 유생들이 이단을 없애 버린다며 불을 질러 폐사의 비운을 맞았다.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종 이방원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만 모시고, 계모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의 앙갚음에 정릉동 정릉은 황폐화했다. 172년이 흐른 1581년(선조 14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받고자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 정릉의 위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았다. 1669년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종묘에 배향되고, 능의 위상을 되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소낙비가 내려 정릉골을 흠뻑 적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준 ‘세원우’라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사실상 첫 왕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흥천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흥천사는 조선 첫 왕비와 마지막 왕비가 동시에 깃든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정릉의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박고석이었다. 1955년 정릉에 자리잡은 박고석을 따라 부산 피난 시절 삼총사를 이뤘던 이중섭, 한묵이 가세했고, 청수장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이중섭이 죽자 유골은 삼등분됐는데 일부는 일본의 부인(이남덕)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시인 구상에 의해 망우리 묘지로 갔다.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뿌려졌다. 북한산행의 기점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되다가 1945년 해방 뒤 민간인이 인수해 사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엔 특수부대 훈련 숙소로 사용됐다. 그 후 고급 요정 ‘청수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댄스홀로 등장한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 4월 2일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에 편입됐다. 개축 공사를 거쳐 2001년부터 북한산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유럽풍 카페를 연상케 하던 청수장 본관만 남겨 두고 등산로와 맞닿아 있던 담과 부속 건물은 허물어 아담한 정원으로 꾸몄다.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 살던 박경리(1926~2008)는 1965년부터 2002년까지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서 1969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원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삶의 터전이었다. 이웃사촌 박고석이 삽화를 그린 ‘노을진 들녘’은 1961년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총 250여회를 이어 나갔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한 뒤 대표작 토지 1부 집필에 들어갔다. 정릉은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고통도 담긴 곳이다.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정릉 집은 차라리 유배지였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선생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수수께끼는/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뼈가 으스러지게/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아 참, 그 얘기는/저승에나 가서 풀어놔야지/그 끔찍한 사실들을/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정릉시대의 쓰라린 편린이다.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 2017년 간)에 실린 김형국의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문학’에 따르면 “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 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 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썼다. 실제 통영 박경리기념관 선생의 묘소에는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2차 서울의 문학3(윤극영의 반달)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21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탈북민 등 복지사각 해소…성동 복지플래너가 간다

    서울 성동구는 다음달 30일까지 ‘제2차 복지사각지대 발굴 전수조사’를 한다고 29일 밝혔다. 대상은 탈북민 135가구, 고시원·찜질방·여관·반지하 같은 열악한 주거 환경 거주 가구, 임대아파트 임대료·관리비 장기 연체 가구 등이다. 동 복지플래너가 직접 방문해 생활실태·건강상태 등을 조사하고, 성동구의 전반적인 복지서비스를 안내한다. 구는 올 1~2월 1차 전수조사 때 복지사각지대 주민 277명을 찾아내 지원했다. 구는 그간 복지사각지대 주민 발굴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아왔다. 고시원 원장, 슈퍼마켓 대표, 어린이집 교사 등을 중심으로 주민이 주민을 살피는 ‘주주살피미’를 도입, 자신의 일을 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주민을 발견하면 동주민센터 등에 알리도록 했다.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성동이웃살피미’도 마련했다.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를 맺으면 언제 어느 때든 1대1 채팅으로 어려운 이웃을 신고할 수 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정부와 자치구에서 수많은 복지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여전히 복지사각지대에서 기본적인 생계를 위협받는 주민들이 있다”며 “복지사각지대 발굴망을 촘촘히 구축, 단 한 명도 소외됨 없는 복지 성동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전쟁의 상처 안고 살아가는 60년대 ‘인간 군상’을 엿보다

    전쟁의 상처 안고 살아가는 60년대 ‘인간 군상’을 엿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8회 서울의 영화3(이만희 감독의 귀로)’ 편이 지난 24일 중구 정동과 서소문동 그리고 서울역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지난달 27일부터 시작한 혹서기 야간투어 프로그램의 마지막 다섯 번째 순서였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평소보다 한 시간 빠른 오후 5시 집결지인 시청역 2번 출구에서 출발했다. 먼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정동 전망대에 올라 영화의 주요 무대 중 한 곳인 정동과 덕수궁 일대를 조망했다. 이어 정동제일교회~배재학당역사박물관~고려삼계탕~시위병영 터~호암아트홀을 차례로 둘러봤다. 가톨릭 성지로 거듭난 서소문역사공원은 칠패시장과 만초천, 처형장의 옛 흔적을 품은 곳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서울역 고가도로에서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서울역의 황혼을 지켜본 뒤 서울역 광장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영화 귀로와 유형유산인 고려삼계탕, 서울역 고가도로, 서울역 광장 등 모두 4곳이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영화의 주요 현장에서 영화보다 더 재미난 영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참석자들은 흥미진진한 60년대 미스터리 멜로드라마에 숨을 죽였다.한국영화사의 거장 이만희(1931~1975) 감독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이었다. ‘인간 이만희’의 삶은 온통 전쟁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에 참전, 통신병으로 5년간 복무한 그는 “내가 가진 기억은 군대와 영화밖에 없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으면 직업군인으로 살았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연출작 51편 중 11편이 전쟁영화였으며 멜로물에도 전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켰다. 소설가 김승옥은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전진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는 압축적인 헌사를 묘비명으로 바쳤다. 전쟁영화 감독 역이 가장 앞에 놓인 것처럼 그의 영화에 담긴 휴머니즘, 시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와 생동감 넘치는 묘사는 모두 전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대표작으로 ‘마의 계단’(1964), ‘만추’(1966), ‘귀로’(1967), ‘휴일’(1968) 등을 꼽지만 그의 진정한 대표작은 1963년 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다. 이 전쟁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그는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됐다.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년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충족시킨 인물이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가 개발한 기존 장르를 활용하면서도 재해석했고, 대사로 설명하기보다는 영상과 분위기로 영화를 느끼게 했다. 전쟁영화도, 멜로드라마도, 액션스릴러도, 시대극도 자신의 스타일로 창조한 스타일리스트였다.이만희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1960년대 한국영화를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대중 지향의 장르영화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미학과 예술성을 개척했다. 영화 ‘귀로’는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눕게 된 남편(김진규 분)을 돌보던 아내 지연(문정숙 분)의 망설임과 선택에 관한 영화다. ‘가부장제 현실과 자유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실존적 고투를 벌이는 여성 캐릭터’라고 평가할 만하다. 영화는 우연히 알게 된 젊은 남자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심리와 도시의 풍경이 맞물린 감각적인 멜로드라마다. 이상과 현실, 권태와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몸부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육교, 가로등, 거리의 시계, 서울역 광장을 통해 여주인공의 결핍과 욕망을 대사 없이 상징적으로 화면에 담았다. 영화에는 남편이 있는 이층 방으로 연결되는 계단, 연인과 함께 밤을 보내는 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언덕 위에 있는 성당까지 이어진 돌계단 등 세 종류의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들은 욕망과 죽음 혹은 구원과 파멸을 은유한다. 또한 이 계단들은 삶과 죽음, 허상과 실상을 구획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허상의 삶 너머에는 아득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 계단 숏들의 미세한 변주는 지연의 심리 변화와 이 부부의 관계 변화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 계단 전후에 반복되는 사건들이 배치된다. 반복과 차이의 구조는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기차역에서 신문사로 가는 길에 나오는 건널목에서는 기차가 지나가고, 육교를 걸을 때 대형 시계가 보인다. 또 핸드백은 이별을 예감하게 한다.1960년대 후반 서울의 모습이 영화를 통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가와 육교 그리고 지하도는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 건조물들이다. 이 시기 도로와 교량 건설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서울은 차량을 위한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아현고가도로는 준공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도심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외곽으로 쫓겨났다.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타고 싶지만 막상 타고 보면 답답하다”고 여주인공은 말한다. ‘귀로’에서 여주인공은 남편의 심부름으로 ‘잔설’이라는 제목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신문사에 전달하기 위해 경인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다. 서울역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동하기 위해 스쳐 가는 곳이다. 남편의 소설 원고를 신문사에 전달하기 위한 주기적인 외출이 그녀를 숨 쉬게 한다. 그녀는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기차를 타고 신문사로 간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외출은 그녀에게 ‘짧은 여행’이다. 기차는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한다. 인천과 서울을 왕복하는 지연의 동선은 세 번에 걸쳐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기본적으로 그녀의 동선은 기차~서울역~육교~신문사로 이어지고 돌아오는 길은 그 역순이다. 이 동선에 남산 야외음악당과 서울역 근처의 성당을 산책하는 것이 가끔 낄 뿐이다. 그녀는 서울의 거리를 걷는 여성 산책자다. 그녀의 집은 정주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속에 사로잡힌 폐쇄의 공간일 뿐이다. 서울 나들이는 실존의 이유를 찾는 여정이다. 그녀는 존재는 도시의 군중 속에 있다. 서울 도심의 유일한 철도건널목인 서소문건널목은 하루 평균 560회가량 열차가 지나다니는 전국 통행량 1위 건널목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전통적인 처형장이었지만 천주교 역사에서는 순교성지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순교자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한국 교회의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다.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를 배출한 국내 최대이자 세계적인 성지다.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서소문은 도성과 마포, 용산을 잇는 관문이자 조선시대 1번 국도인 의주를 잇는 중요한 문이었다. 서소문과 그 서쪽 약현 사이 저지대를 가르며 안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만초천이 한강으로 흘렀는데 그 유역을 따라 시가지가 발달했다. 군자창, 만리창 등 관영창고가 위치했고, 칠패시장과 소의문 밖 시장이 서로 이어졌다. 종로시전, 이현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을 형성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우리나라 왕성 5부 안의 애오개는 서강으로 가는 길이고, 약고개는 용산으로 가는 길로서 곡물이 폭주하고 수레가 부딪치고 사람이 어깨를 부딪는 곳”이라며 번잡한 시가지로 묘사했다. ‘귀로’의 여주인공이 서울역에서 세종로 신문사로 가는 길에 건넜던 그 서소문건널목에는 아직도 사람과 열차가 분주하게 지나다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차 망우리 ■일시 및 집결장소: 8월 31일(토) 오전10시, 망우역 1번 출구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영화 불황’ 1980년대… 반공영화 외피 두른 ‘짝코’, 실제는 분단영화였다

    ‘영화 불황’ 1980년대… 반공영화 외피 두른 ‘짝코’, 실제는 분단영화였다

    198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수식한 문구는 ‘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침체 국면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20년간의 길고 어두운 터널은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80년대는 우리 영화가 맞이한 가장 암울한 시간이었지만, ‘방화’(邦畵)라는 이름을 떨치고 ‘한국영화’로 탈바꿈하는 쇄신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 연재는 1980년대 전반기 영화계의 상황과 어려운 상황에도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임권택의 영화 작업에 관해 살펴보려 한다.●‘에로영화’가 판친 방화의 시대 1980년대는 우리 영화를 ‘방화’로 부르던 시대였다. 일본에서 ‘외화’(外畵)와 구분해 자국영화를 지칭하기 위한 ‘방화’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곧잘 사용됐고, 1990년대 초반까지도 쓰였다. 한국에서 사용한 방화라는 말 역시 단순히 국산영화를 지칭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한국영화를 호명하던 방화의 어감은 우리 영화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하는 좀 더 자기 비하적인 표현이었다. 영화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계와 그 영화를 냉소하고 자조하면서, 언론들은 외국영화에 주도권을 내주고 줄곧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한국영화를 꼬집으며 그렇게 불렀다. 관객들 역시 성우들의 후시녹음 목소리로 상징되는 완성도 낮은 우리 영화를 방화로 부르며 불신과 멸시를 담았다. 1980년대 초중반 영화계는 1970년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신정권이 구축한 통제정책이 승계되었고, 한국영화는 여전히 외화수입쿼터의 대체물로 취급받았다. 1981년도 영화시책에서 당국은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00편 내외로 설정하고, 등록된 20개의 제작사가 각 4편 이상을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 그리고 2편 이상의 ‘우수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또 대종상에서 최우수·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 외화수입쿼터 1편을 부여했다. 이처럼 영화제작은 산업 자체의 동력을 만들지 못했고,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1, 87, 97, 91, 81편으로 채 100편을 넘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980년대는 단관 개봉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영화문화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1년 공연법 개정으로 300석 미만 소극장의 자유로운 설립이 가능해지자, 영화소극장도 빠르게 등장한 것이다. 덕분에 대형 스크린을 보유한 기존 개봉관과 부도심에 새로 들어선 소규모 영화관으로 관람 문화가 재편됐다. 한편 1980년 12월부터 방영된 컬러 방송으로 컬러 TV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가정용 비디오의 인기가 극장 흥행을 잠식해 갔다. 1984년 VTR 보급 대수가 50만대를 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80년대는 ‘안방극장’이 제대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그랬듯, 한국의 극장가 역시 대형영화와 저예산영화로 생존책을 모색했다. 전자는 ‘닥터 지바고’(1965), 70밀리 영화 ‘벤허’(1959) 같은 대작 외화의 리바이벌 상영이, 후자는 괴기·무협·코미디 장르들이 역할을 맡았다. 관변축제인 ‘국풍 ‘81’을 위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섹스, 스크린, 스포츠로 국민들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느슨해졌고, 기다렸다는 듯 1980년대를 상징하는 에로티시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소극장 그리고 대여용 비디오 시장의 붐이 에로영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애마부인’은 1980년대 에로영화, 나아가 당시 한국사회의 영화문화 자체를 대변했다. 1982년 서울극장 한 관에서 넉 달이나 상영한 이 영화는 31만의 관객을 동원한다. 성적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에로티시즘 장르는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토속에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토속에로영화들은 해외영화제의 관심과 수상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 상업성이 절대적인 목적이었고 비디오 시장과 맞물리며 시리즈로 양산되었다. 전자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1983),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받은 ‘씨받이’(임권택, 1986)라면, 후자는 ‘뽕’, ‘산딸기’, ‘변강쇠’ 등을 들 수 있다.●‘짝코’ 어떤 계기로 기획되고 만들어졌나 한국영화사의 가장 우울했던 시기, 임권택은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의 한 명이었다. 1970년대의 그는, 제작자에게는 외화쿼터용의 우수영화를 안겨주고 영화진흥공사에는 국책영화를 척척 만들어주는 감독이었다. 여러 영화학자들에 의해 한국 ‘분단영화’의 기원으로 평가받는 ‘짝코’ 역시 기획의 외관상으로는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반공영화였다. 이는 1980년 관제영화제인 19회 대종상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고, 이듬해 20회 대종상에서 반공영화부문 특별상을 재차 받았던 것에서 증명된다. 제20회 대종상영화제부터 우수반공영화상을 특별부문으로 변경해 역시 외화수입쿼터 1편을 부여하기로 했는데, 반공영화가 부족하자 마침 개봉을 못한 ‘짝코’에 다시 기회가 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1983년 뒤늦게 개봉해 일반 관객들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한국영화의 불황이 극에 달한 시기,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왜 반공영화라는 외피를 두른 ‘짝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실제 영화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짝코’의 영화화를 위해 임권택과 송길한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바로 시대적 배경과 자기 성찰에 있었다. 그들이 이 영화의 기획에 착수한 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좌절로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시점이다. ‘서울의 봄’의 대학생 시위대들이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이 ‘빨갱이’로 둔갑되었던 바로 그때다. 임권택의 증언에 의하면 1980년은 “혼란기에 빠져든다고 해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 온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던 시기다. 그는 이후 협업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송길한 작가를 처음 만나 기존의 국책반공영화를 벗어나고자 마음먹고, 그의 개인사와도 연결되는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둘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 종군작가 김중희의 단편소설을 거의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전투경찰 송기열(최윤석)과 빨치산 부대 대장 짝코(김희라)의 30년에 걸친 비극을 세련된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열강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멸시켜 가는지 보여준다. 송기열은 평생을 바쳐 짝코를 추적하지만 결국 둘은 오갈 데 없는 부랑아들이 모이는 갱생원에서 만난다. 이미 노인이 된 둘의 비극은 갱생원에서도 계속된다. 송기열은 무장공비 이력의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해 짝코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짝코는 몰래 수은을 먹여 송기열을 죽이려고 한다.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송기열은 기어코 짝코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사회는 거리의 경찰들조차 무장공비라는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송기열은 짝코와 함께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과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리를 잡은 짝코는 숨을 거두고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다. 사실 이 장면은 그들이,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육신이 결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함을 보여준다. 열차 속 송기열은 아주 짧은 회상으로 아내와 아들과의 단란했던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둘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자신들의 처지를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게 된다. ●“한국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영화” 임권택은 영화를 통해 송 경사와 짝코가 국가의 꼭두각시였고, 더 나아가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북한은 열강들의 장기 알에 불과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와 영화 본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두 차례의 검열을 통해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삭제됐다. 바로 다음의 두 장면이다. 6·25 특집 TV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전쟁이 열강들의 국지전 시험장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갱생원을 도망 나온 송기열과 짝코를 만난 경찰이 망실공비가 뭐냐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는 검열 후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전자의 경우 TV에서 6·25 프로그램이 잠깐 나온 후 이를 본 짝코가 송기열에게 “저 사람들 말이 진짜라면 말이시… 나나 거그나 불쌍한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는 장면만 남았다. 후자는 “망실공비?”라는 대사는 지워진 채 경찰의 입 모양만 남았다. 이는 “망실공비도 몰라”라며 송기열이 애처롭게 반응하는 대사에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권택은 촬영은 했지만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 당국의 검열에 순응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 대목의 아쉬움을 표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우리는 장르영화 그리고 국책영화로 단련된 그의 연출 내공을 짐작하게 만든다.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두 해 연속 반공영화상을 휩쓸며 국책 반공영화로서 인정받았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전북소방본부 여인숙 긴급 화재 점검

    전북소방본부가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주 여인숙 화재’를 계기로 이달 28일까지 도내 여인숙 168곳을 대상으로 긴급 소방안전점검을 실시한다. 소방안전점검 중점 사항은 여인숙 용도·규모에 따른 소방시설 설치 여부, 소방차 진입 가능 여부 등이다. 도소방본부는 점검 결과에 따라 필요한 기초 소방시설을 수요에 맞게 보급할 예정이다. 전북소방본부에 따르면 2014년부터 5년 동안 도내 여관 및 여인숙 화재는 모두 8건이었으며 원인은 휴대용 가스버너 등 화기 취급 부주의였다. 마재윤 전북소방본부장은 “소규모 건축물인 여인숙은 소방시설이 없어 불이 났을 때 진화에 어려움이 있다”며 “여인숙과 같이 화재에 취약한 시설도 두루 살피겠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또 붙잡힌 ‘대도’ 조세형, 징역 2년 6개월 선고

    또 붙잡힌 ‘대도’ 조세형, 징역 2년 6개월 선고

    출소한 지 1년도 안돼 다시 징역형 선고한 때 ‘대도’로 불렸지만, 잡범으로 전락한 때 ‘대도’(大盜)라 불렸던 조세형(81)씨가 또 다시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 민철기)는 22일 절도 혐의로 기소된 조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조씨는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서울 광진구, 성동구 일대 주택에 침입해 500만원 상당의 달러와 위안화, 100만원 상당의 백금 반지, 50만원 상당 금목걸이 등 현금과 귀금속을 훔친 혐의를 받는다. 조씨 측 변호인은 그동안 재판에서 “여죄를 자백하는 등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다”며 “기초생활수급비 중 여관비 50만원을 내고 나면 14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고령에 생활고를 못 이겨 범행했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부는 “조씨의 자백을 비롯해 각종 증거를 종합하면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사전에 도구를 준비하는 등 계획적인 범행이었고, 상습적으로 주택에 침입했다”면서 “다만 출소 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점과 조씨가 반성을 하고 있으며,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조씨는 1970∼1980년대 부유층과 권력층을 상대로 전대미문의 절도 행각을 벌여 ‘대도’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절도로 상류사회의 단면이 폭로되면서 ‘의적’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1982년 구속돼 15년간 수감생활을 한 그는 출소한 뒤 선교 활동을 하는 등 새 삶을 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01년 일본 도쿄에서 빈집을 털다 붙잡혀 다시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2005년에는 서울 마포구에서 치과의사 집을 털다 덜미를 잡혔고, 2010년에는 장물 알선으로 다시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2013년에는 70대의 나이에 노루발못뽑이(속칭 ‘빠루’) 등을 이용해 강남 고급 빌라를 털다 실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5개월 만인 2015년 용산의 고급 빌라을 털다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출소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폐지 주우며 생계유지”…노인 생명 앗아간 전주 여인숙 화재

    “폐지 주우며 생계유지”…노인 생명 앗아간 전주 여인숙 화재

    19일 오전 4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의 한 여인숙에서 불이 나 객실에 있던 투숙객 3명이 숨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객실 11곳 중 3곳에서 여성 2명과 남성 1명 등 70∼80대 노인으로 추정되는 시신 3구를 각각 발견했다. 사망자는 여인숙을 관리하는 A(82)씨와 투숙객 2명으로 확인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숨진 투숙객들은 매달 일정 금액을 여인숙에 지불하고 사는 장기투숙자들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폐지와 고철 등을 주우며 생계를 꾸려왔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한 주민은 “여인숙 앞에는 항상 폐지나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며 “(숨진 투숙객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폐지를 주우러 다녔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여관은 1972년 지어져 시설이 매우 낡았고, 화재 과정에서 건물 일부가 무너졌다. 전북소방본부 관계자는 “객실 등에 있던 부탄가스통이 화재로 터지면서 폭발음이 크게 들린 것 같다. 현재까지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경찰과 소방당국은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추가 매몰자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굴착기와 인명 구조견 등을 동원해 현장을 수색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그 섬에 가면 배 이름조차 대한·민국·만세더라

    그 섬에 가면 배 이름조차 대한·민국·만세더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일본 여행 금지 분위기도 여전합니다. 피치 못해 일본을 가더라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에 일정액을 기부한 뒤 가겠다는 이들이 생길 정도입니다. 아마 광복절을 앞두고 이 같은 반일 분위기는 더 뜨겁게 달아오르겠지요. 이 흐름에 호응하는 여행지는 어디일까요. 나라 안에 비교적 덜 알려진 항일 명소들을 찬찬히 되짚어 봤습니다. 태극기의 섬, 항일의 섬으로 불리는 전남 완도 소안도는 그 여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휴가철에 가볼 만한 섬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항일의 뜻을 되새기고 피서도 겸할 수 있는 여행지라면 소안도가 제격이지 싶습니다.완도 화홍포항. 소안도까지 가는 배가 정박해 있다. 뱃전에 ‘민국’이란 이름이 크게 써 있다. 무슨 뜻일까. 맞은편에서 오는 배 이름을 보다 무릎을 친다. ‘대한’이라 써 있다. 그럼 ‘만세’도 있을까. 당연히 있다. 화홍포항과 소안도를 오가는 카페리는 모두 세 척. 배 이름은 각각 ‘대한’ ‘민국’ ‘만세’다. ‘항일의 섬’으로 가는 배는 이처럼 이름마저 ‘애국적’이다. 섬에 들면 먼저 ‘항일의 섬, 해방의 땅 소안도’라고 적힌 푯돌이 여행객을 맞는다. 면소재지인 비자리까지 가는 해안도로에는 무궁화꽃이 즐비하다. 섬 내 모든 집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그것도 일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왜 이 섬은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갖게 됐을까. 소안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지도(현 당사도) 등대의 역사부터 살펴야 한다. 1909년 1월, 대륙 진출 야욕이 극에 달한 일제는 수탈한 미곡 등 물자들을 안전하게 실어나르기 위해 자지도에 등대를 세우고 일본인 등대수를 배치했다. 쌀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등대를 세우는 노역에 강제 동원됐으니 그 분노가 오죽했을까.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 달이 채 안 된 2월 24일, 마침내 섬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소안도 주민 7명이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 기기를 파괴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지도 등대 습격사건’이다. 주민들의 기개를 보여 준 이 사건은 고스란히 1920년대 소안도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소안도의 부속섬 중 하나인 자지도에 얽힌 이야기 한 자락. 몇몇 섬 주민과 홍보책자 등에 따르면 자지도의 옛 이름은 항문도(港門島)였다. 육지로 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섬이라는 뜻이다. 한데 사람 몸의 “거시기한 부위”를 떠오르게 한 탓에 자지도(者只島)로 바꿨으나 이마저 “발음하기가 거시기혀서” 1982년 현재 이름인 당사도로 바꿨다.소안도 주민들의 항일운동은 1920년대 절정을 이뤘다. 당시 6000여명의 섬 주민 가운데 800여명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일제에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수많은 항일운동가도 배출했다. 정부 건국훈장을 받은 20명을 포함해 무려 89명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이 작은 섬에서 나왔다. 과목해변의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서 소안도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송내호(1895~1928) 선생 등 항일운동가의 부조와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앞의 항일운동기념탑과 복원된 ‘소안사립학교’에도 항일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제 소안도의 볼거리를 말할 차례다. 소안항에서 비자리 쪽으로 가다 보면 제법 큰 규모의 저수지와 만난다. 주민들이 ‘원안’이라 부르는 호수로, 작은 섬 죽도를 끼고 섬 일주도로를 내면서 형성된 일종의 내해다. 호수 주변으로 달목공원 등 쉼터가 조성돼 있다. ‘원안’을 끼고 좌회전하면 월항리가 나온다. 월항리 해안가에 노랑무궁화 자생지가 있다. 노란 꽃잎이 인상적인 꽃으로 멸종위기종 2급이다.소안도는 완도에서 약 18㎞ 떨어져 있다. 본섬 소안도와 부속섬 당사도, 횡간도 등으로 이뤄졌다. 소안도는 동쪽으로 청산도, 북쪽은 완도, 서쪽은 보길도와 각각 인접해 있다. ‘섬의 숲’이 감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본디 남쪽과 북쪽 2개 섬이 떨어져 있었으나 길이 1.3㎞의 사주(과목해변)로 연결돼 하나의 섬이 됐다.부속섬인 당사도는 가기가 쉽지 않다. 본섬에서 사선을 빌리거나 섬사랑호를 타야 하는데, 전자는 값이 녹록하지 않고, 후자는 섬 주민조차 배시간이 헷갈릴 정도로 드물다. 당사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은 맹선리 물치기미다.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고갯길인 이른바 ‘빤스고개’ 인근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물치기미 전망대에 서면 당사도는 물론 보길도와 복생도 등 바다 위에 뜬 이웃 섬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소안도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곳이다. 미라리 상록수림(339호)과 맹선리 상록수림(340호)이다. 수령 300년 안팎의 후박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들이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소안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은 가학산이다. 고도 359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산에 오르려면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육지의 600~700m 높이의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품이 든다. 고도가 낮다고 절대 얕봐선 안 된다. 산 정상에 서면 섬의 남과 북이 길다란 과목해변을 통해 이어진 장면과 마주한다. 소안도 홍보 책자 등에 어김없이 1순위로 등장하는 풍경이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까지 눈에 잡힌다는데, 짙은 해무 탓에 그런 행운은 없었다. 미라리로 가는 고갯마루에 ‘운동장 쉼터·약수터’가 있다. 이곳 조금 위쪽으로 가면 가학산 등산로가 나온다. 표지판이 작아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풍경 좋은 암릉 전망대가 몇 곳 나온다. ‘인증샷’ 찍으며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 보면 정상까지 얼추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일주산행의 경우 맹선리 쪽을 날머리로 삼아야 하지만, 오가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원점회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려올 때 길이 미끄러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글 사진 완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완도 화홍포항에서 소안도행 카페리가 오전 6시 40분(하절기)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노화도(보길도)를 거쳐 소안도까지 간다. 여름철 성수기에는 22항 차로 확 늘어난다. 소요시간은 50분이다. 뱃삯 1인 7700원, 승용차 2만원. 이웃한 보길도와 묶어서 둘러보길 권한다. 윤선도원림(명승 34호) 등 볼거리가 많다. 소안에서 노화(보길도)까지 뱃삯은 1인 1700원, 승용차 8000원. 배시간에 맞춰 마을버스가 섬 구석구석을 오간다. 화흥포 매표소 555-1010, 1099 소안도 매표소 553-8177. →먹을 곳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 식당들이 몰려 있다. 1인분 식사를 팔지 않는 곳이 많다. 특히 저녁 때는 일찍 문 닫는 곳이 많아 예약을 해두는 게 좋다. 소안도맛집(555-9966), 해변식당(553-7740) 등에서 1인 백반, 육개장 등을 낸다. →잘 곳 과목해변 동남펜션(553-0770), 미라리 미라펜션(552-4711) 등의 시설이 비교적 나은 편이다. 비자리에 여관이 몇 곳 있다.
  • 입주 2년 차 하남 부영APT 입주민들 ‘여관생활’

    입주 2년 차 하남 부영APT 입주민들 ‘여관생활’

    입주 2년 차인 경기 하남 미사강변지구 부영아파트 입주민들이 시공사의 자체 하자보수(리콜)로 생활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27일 입주민들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2017년 10월 지상 24~29층 1104가구로 준공했으나, 입주 초기 부터 하자로 인한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거실·주방·침실에 깔린 바닥재에서 들뜸 현상이 나타나, 지난 6월 부터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바닥재 교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입주민 전체가 공사기간 동안 순차적으로 숙박시설을 이용하거나 친인척 집 신세를 져야하는 상황이다. ㈜부영주택 측은 숙식비로 4인 가구당 약 70만원을 지급하고 있으나, 반드시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 입주민들은 “바닥 교체공사를 하려면 가구 등을 모두 들어내고 2박3일간 여관생활을 한뒤 영수증을 제출해야 숙식비를 받는다”면서 “주민들이 시공사에 적극 대응해 숙식비 뿐 아니라, 배상금도 받아야 하는데 향후 분양받아야 할 임대아파트에 살다보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못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영주택 측은 “지난 6월부터 거실마루 자재불량에 대해 자발적 하자보수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에따른 이사비용 등도 실비정산으로 보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입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기 위해 빠른시일 안에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조치중에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경기도는 동탄지구 부영아파트에서 부실시공 민원이 들끓자, 2017년 10월 이 아파트에 대해서도 특별점검을 한 결과 총 39건의 지적사항을 발견하고, 페널티로 벌점을 부과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민·관·은행 손잡고, 강동 재개발 이주민 전월세 고민 해결

    민·관·은행 손잡고, 강동 재개발 이주민 전월세 고민 해결

    서울 강동구가 천호1재정비촉진구역의 환경 정비 사업과 관련, 주민들의 안정적인 이주를 돕기 위해 전·월세 상담에 나선다. 해당 지역에 고시원, 여관 등에 거주하는 1인 가구와 홀몸 어르신이 많아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는 데 어려움이 클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에 강동구는 구청 직원과 공인중개사, 우리은행 직원 등 민관은 물론 금융기관까지 함께 손잡고 전·월세 물건 정보와 전세자금 대출에 대한 맞춤 상담을 진행한다. 홀몸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주민은 희망하면 직접 자택을 방문해 상담을 도와준다. 저소득 주민에게는 부동산 중개수수료도 지원할 예정이다. 강동구는 2012년부터 고덕시영아파트를 시작으로 삼익그린 1차, 둔촌주공아파트 등 재건축 단지 이주 대상 주민들을 위해 3000여건의 전·월세 상담을 이끌어왔다. 구 관계자는 “주민들의 사정에 맞는 맞춤형 전·월세 상담 서비스를 통해 해당 지역에 사시던 분들의 재정착을 도우려 한다”며 “앞으로도 주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발굴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도쿄올림픽조직위 객실 ‘싹쓸이’… 관람객 방 못 구해 ‘숙박 대란’

    도쿄올림픽조직위 객실 ‘싹쓸이’… 관람객 방 못 구해 ‘숙박 대란’

    조직위, 경기장 주변 4만 6000개 가예약IOC·각국 올림픽위에 제공 물량 선확보 숙박 명부 확정까지 일반 예약은 ‘스톱’ 호텔 문의 전화 곤혹… 예약 불가 안내문 “입장권 팔며 호텔 선점 이해못해” 분통 초대형 유람선 해상호텔 활용 주장도일본 지바현에 사는 여성 A(26)씨는 내년 7~8월 도쿄올림픽 기간 중에 묵을 방을 구하기 위해 도쿄 시내의 한 호텔에 전화를 했다가 “빈 객실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A씨는 다른 호텔들에도 줄줄이 전화를 돌렸지만 사정은 똑같았다. 그가 호텔 예약을 시도한 날은 올림픽 종목별 입장권 추첨 결과가 나온 지난달 20일. ‘당첨’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남들에게 뒤질세라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는데도 방을 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그토록 원했던 체조경기 티켓을 구한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2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2020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이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현지에서는 벌써부터 ‘숙박 대란’이 나타나고 있다. 호텔을 예약할 수 없는 사람들도 애가 타지만, 물밀듯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객실이 없다”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는 호텔이나 여관들도 곤혹스럽다. 대회 개막까지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이렇게 된 것은 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이 각 경기장 주변에 있는 호텔 객실 약 4만 6000개에 대해 통으로 ‘가예약’을 걸어 놓은 탓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나 각국 올림픽위원회, 경기별 연맹 관계자 등에게 제공할 객실 물량을 충분히 확보한다는 목적이지만, 정작 일반 관람객들은 방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조직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숙소를 확보하는 대회 관계자들도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예약은 필요가 없게 될 전망이지만, ‘완벽한 준비’를 모토로 내건 조직위 측은 필요한 객실수를 정확히 파악할 때까지는 가예약을 풀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사히신문은 “약 200개 국가에서 오는 대회 관계자들의 숙소 확정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언제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올림픽인 만큼 일본 내 먼 지역에서 오는 경우도 많을 텐데 경기 입장권을 팔면서 호텔은 자신들이 다 선점하고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배구, 체조, 사이클, 테니스, 수영, 양궁 등 여러 종목의 경기장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 고토구 아리아케 지구의 ‘도쿄베이 아리아케워싱턴 호텔’의 경우 전체 830개 객실이 모두 대회조직위에 의해 입도선매돼 있다. 이 호텔에는 입장권 당첨 결과 발표 당일 100통 이상의 전화가 걸려온 이후 지금도 하루에 수십통씩 같은 전화가 온다. 객실 1000개 규모의 다른 호텔은 어차피 불가능한 예약 문의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지난달 21일부터 일본어, 영어, 한국어 등으로 ‘올림픽 기간 중 예약은 받지 않고 있다’는 안내문을 게시했다. 또 다른 호텔도 당분간 대회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의 예약은 받지 않을 방침이다. 이곳 관계자는 “어떻게든 대회 관계자들의 숙박 명부가 확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직위는 올림픽 기간 중 도쿄도,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 등 수도권 1도3현에 약 1000만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몇년간 관광객 폭증으로 수도권의 호텔·여관 객실수도 급격히 증가해 30만개 수준에 이르지만 올림픽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초대형 유람선 등을 요코하마 등 항구도시에 정박시켜 해상호텔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호텔업계 전문가 무라카미 미노루는 “올림픽만을 위해 숙박시설을 늘리는 것은 대회가 끝난 뒤 공급 초과로 이어지는 문제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신칸센으로 1시간 이내에 있는 군마현과 시즈오카현 등으로 올림픽용 숙소의 범위를 확장하는 업계 프로모션 등 다양한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법서라] 고작 6일 누린 ‘납북어부 재심’ 무죄 기쁨…‘과거사 원칙’ 저버린 검찰

    [법서라] 고작 6일 누린 ‘납북어부 재심’ 무죄 기쁨…‘과거사 원칙’ 저버린 검찰

    [편집자주] 전국 최대 법원과 최대 검찰이 몰려 있는 서울 서초동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는 법조계는 이상한 일이 참 많습니다. 법조의 뒷이야기와 속이야기를 풀어드리는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약칭 ‘법서라’를 토요일에 선보입니다. 오는 25일 취임하는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내겠다는 한 어부가 있습니다. 이 어부는 박정희 정권 당시 간첩 누명을 뒤집어 쓴 채 50년을 살아오다 최근 재심심판을 통해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한 검찰이 항소를 제기하면서 지난한 재판을 다시 이어가야 합니다. 어부는 “검찰이 스스로 정한 원칙과 약속은 지켜달라”면서 새로이 검찰조직을 이끌어갈 신임 검찰총장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실질적으로 불법구금·가혹행위가 인정될 수 있는 경우 법원의 재심개시결정을 존중하여 즉시항고를 제기하지 않고, 재심 무죄 선고시 일률적인 상소를 지양하고, 유죄 인정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상소를 제기하지 않는다.”- 2019년 6월 27일 대검찰청 ‘과거사 사건 관련 후속조치’ 中 위 문장은 ‘과거사 재심 사건에 대해선 새로운 증거가 있지 않은 한 상소하지 않겠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달 27일 전국 검찰청을 지휘하는 대검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과거사 재심사건 업무 매뉴얼’을 마련했습니다. 과거 검찰이 일부 과거사 사건에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문무일 현 검찰총장이 직접 사과한 데 따른 변화입니다. 검사는 재판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과거사 사건은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 진술이 많기 때문에 검찰도 적극적으로 ‘무죄 가능성’도 찾아내겠다는 취지죠. 군사 독재정권 시절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던 이들에게 필요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과거사를 반성하겠다고 외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 벌써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간첩 누명은 쓴 6명 가운데 이미 5명이 세상을 떠난 ‘제5공진호 납북 어부’ 재심 이야기입니다.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검찰은 즉각 항소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말뿐인 원칙과 약속이었느냐”고 절망했습니다. ■납북된 18살 막내 선원…불법감금·고문으로 ‘간첩’ 누명 1968년 5월, ‘제5공진호’ 막내 선원 남정길씨는 조업 도중 동료 5명과 함께 북한에 납치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남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사 독재정권의 ‘간첩몰이’였습니다. 정보과 형사들은 남씨 일행을 한달 동안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해 ‘납북 피해자’에서 ‘간첩’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당시 남씨의 나이는 고작 18살.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들은 1969년 징역 1~3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검찰 공소장엔 “피고인들이 1968년 5월 24일 12시경 제5호 공진호에 승선해 경기도 연평도 근해 해상에서 어로작업 중, 선장인 김창록이 북괴 지배 하에 있는 지역인 안골에 들어가야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으니 안골에 들어가서 어로작업을 할 것을 제의하자, 피고인들은 모두 이에 찬동했다”면서 “반국가 단체인 북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했다”고 명시됐습니다. (남씨 일행은 군사기밀 누설 관련 혐의로도 기소됐지만, 당시 법원은 ‘북괴 구성원들에게 강요된 행위’라며 이 부분에 국한해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유죄 판결의 핵심 근거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의 자백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스스로 고기잡이를 위해 북한 영해에 들어간 사실을 인정했고, 법정에서도 유사하게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받아낸 진술은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고, 고문 경찰은 법정까지 나타나 어부들을 지켜보며 심리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 속에서 경찰, 검찰, 법원, 누구도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남씨 일행은 평생을 반공법을 위반한 간첩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50년 만에 무죄 판결 “고문, 가혹행위에 의한 진술은 증거능력 없다” 그렇게 50년을 억울함 속에서 살아온 남씨는 원곡 법률사무소를 만나 이미 세상을 떠난 납북 어부 5명의 유가족과 함께 지난해 7월에야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지난 3월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고, 4개월 만인 지난 1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1부는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심 재판부는 “장기간 불법구금과 광범위하게 이뤄진 가혹행위, 협박, 회유 등으로 인해 피고인들이 경찰 진술뿐만 아니라 검찰 및 법정에서의 진술까지도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추단되거나, 적어도 그 임의성에 강한 의심이 든다”고 밝혔습니다. (‘임의성이 없는 진술’이란 허위진술을 강요할 위험성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진술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라는 점이 인정되기 때문에 1968년 경찰 조사나 법정에서 나왔던 진술 역시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의미죠.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납북됐다가 1968년 10월 인청항으로 귀환한 뒤 11월 군산경찰서로 이동해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은 사실 ▲군산경찰서 소속 수사관 등이 무허가 여관에서 자백을 강요하면서 구타, 물고문, 잠 안 재우기 등으로 강압적인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요의 진술서 등을 작성한 사실 ▲검찰 조사와 공판기일(법정)에서도 고문 경찰관이 배석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사실 등을 기록에 의해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50년 만에 이뤄낸 명예회복이었지만, 남씨의 동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가장 모진 고문을 당했던 기관장 박남주씨는 징역을 마치고 2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남씨 본인도 고문 후유증으로 뇌출혈이 생겨 말이 어눌하고 거동이 불편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무죄 결과를 받아든 남씨는 “50년의 세월 동안 누구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었는데 이제 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됐다”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이제 겨우 1심이 끝났지만, 대검이 불과 한 달 전에 ‘과거사 원칙’을 발표했기 때문에 남씨 측은 사실상 재판이 끝났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행보를 남씨 측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법원의 무죄 판결에 불복한 것입니다.■검찰의 항소 “재판부가 법리 오인…법정에서 진술은 유효” 1968년 남씨 일행을 재판에 넘겨 유죄를 이끌어내고, 51년이 흘러선 이번 재심 공소유지를 맡은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지난 17일 ‘납북어부 사건’ 재심 무죄 판결에 대해 항소했습니다. 6일 만입니다. 앞서 설명 드린 ‘임의성’, 즉 강요에 의한 진술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 재판부가 법리적으로 오인을 했다는 취지입니다. 군산지청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대검에서 규정한 ‘과거사 원칙’의 방향과 취지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해도 법정에서 고문받은 건 아니잖아요? 일부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일부는 인정했습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진술했다고 판단되기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재판부가 그 부분에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검찰 입장에선 유사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도 유죄로 인정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대로 포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경찰 단계에선 고문을 받았더라도, 재판 단계에서까지 고문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냐는 취지입니다. 실제로 검찰은 재심심판에서도 이 같은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서울신문이 확보한 검찰 변론재개 의견서에 따르면 검찰은 ‘피고인 등이 그 공판 과정에서, 수사기관에서 받은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심리적 억압상태 때문에 자유롭게 진술하기 어렵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거나 그런 의심을 할 만한 사정을 찾아보긴 어렵다’며 혐의를 자백한 당시 법정 진술의 증거능력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그 근거로 1969년 당시 공판 조서를 제시했습니다. 조서를 살펴보면 남씨 일행은 고기잡이를 위해 북한 해역으로 넘어간 사실이 있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대부분 ‘맞다’는 취지로 대답한 내용이 나옵니다.재판장 : 연평도에서 고기잡이가 여의치 않아 선장인 김창록의 제의로 군사분계선 넘어 황해도 구월골에 고기잡이를 간 사실이 있는가요남정길 : 예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재판장 :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면 북괴에 납치된다는 사실을 몰랐던가요남정길 : 그런 위험성은 인식하였읍니다만 고기를 못 잡으면 보수를 못 받게 되니까 설마 붙잡히지는 않을 터이지 하는 요행수를 믿고 고기 잡을 목적으로 선장의 지시에 따라 그곳에 넘어가서 조업을 한 것입니다검찰은 남씨 일행이 법정에서 경찰의 고문을 폭로하기도 했다며, 이는 강요받아 진술하는 상황이 아님을 방증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재판장 : 군산에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말도 했다는데 어떤가요피고인1 : 그런 말은 전혀 한 일이 없는데 군산경찰서 정보과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거짓 진술했습니다재판장 : 군산비행장의 비행기 대수가 500대쯤 금년에 들어왔다는 말을 했든가요피고인2 : 이북에서는 그런 말을 묻지 아니하여 말한 사실이 없는데, 군산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 배 안에서 그런 말이 있었는데 왜 말한 일이 없다고 하느냐면서 고문을 하기에 할 수 없이 그런 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변호인의 반격 “고문 29일 만에 열린 재판, 자유로운 환경이었다고요?” 남씨의 변호를 맡은 원곡 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검찰의 입장이 충격적”이라고 탄식부터 내뱉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서 겨우 29일이 지나 공판이 열렸는데, 그들이 고문당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고문으로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는데,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는데, 법정에서 제대로 된 진술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진 않았겠죠. 또 누군가는 혐의를 인정하고, 누군가는 용기를 내 고문 사실을 밝혔겠죠. 그렇다고 이미 짓밟힌 상태에서 한 법정 진술을 꼬투리 잡으며 ‘너네 그때 자백했으니까 지금도 유죄야’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에 억압된 환경이 아니다’라는 검찰 주장에 대해서도 남씨 측은 적극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검사가 일부 부인 취지, 고문 폭로라고 언급한 진술들은 현재 재심심판절차에서의 유무죄 판단대상으로 삼는 공소사실과 관한 군사기밀누설과 관련된 진술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공소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고문 관련 진술을 하면서도 수사기관이 작성한 수사서류의 진정성립과 진술의 임의성은 다투지도 않는 등 강한 의심이 듭니다. 심리적 억압상태 때문에 자유롭게 진술할 수 없다는 사정은 명백합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무죄 판결을 통해 어부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검사가 제출한 의견서의 내용만으론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없애는 검사의 적극적인 입증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은 상급법원이 자신들의 주장을 다시 판단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어부라서 무시하는 건가요” 항소와 상고, 즉 상소제도는 형사소송법 체계의 기본입니다.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는 행위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만큼은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이미 수십 년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지 않고, 적극적으로 구제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 변호사는 “일반 사건이라면 이해한다. 검사도 법률가인데, 당연히 자기 주장이 있고 고집이 있으니 법률 판단을 더 받아보고 싶겠다”면서도 “그런데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검이 매뉴얼까지 만든 것은 ‘무조건 대법원까지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자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어 “국가도 할 말은 있겠지만, 국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니까 적어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한 ‘우리가 물어뜯진 말자’는 취지 아니었냐”고 덧붙였습니다.남씨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고 합니다. 무죄 판결을 받아들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했지만, 검찰 항소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재판에 다시 뛰어들어야 합니다. 항소 소식을 듣고 “유학생 사건은 자체적으로 조사까지 해주면서, 우리 사건은 고작 어부라서 무시하는 거냐”고도 말했다고 합니다. 동료들을 떠내보내고서 외로움도, 허망함도 큰 탓이었을 겁니다. 오는 25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새로 취임합니다. 윤 신임 총장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회 서면질의 답변서를 통해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 전쟁범죄 등 반인권적인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의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제5공진호 납북 어부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를 비롯한 국가권력의 피해자들은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취업 미끼 4억 가로챈 전 항운노조 간부 구속

    울산해양경찰서는 취업을 미끼로 10명에게 4억 4000여만원을 받아 가로챈 전 부산항운노조 항업지부 반장 백모(56)씨를 사기 혐의로 검거해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고 18일 밝혔다. 해경에 따르면 백씨는 2016년 5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울산과 부산지역 구직자 10명을 상대로 “부산항운노조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속여 총 4억 45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백씨는 자신을 부산항운노조의 높은 자리에 있다고 소개한 뒤 1명당 적게는 3000만원에서 많게는 7000만원까지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울산과 부산지역 회사원이나 자영업자 등이다. 이들은 아들이나 조카를 취업시키려고 백씨에게 돈을 건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실제로 취업이 된 사람은 없었다. 백씨는 2016년 10월 항운노조에서 퇴사해 취업을 시켜줄 능력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백씨는 항운노조 재직 당시 지부장 선거 준비를 하며 큰 빚을 지게 됐고, 빚을 갚으려고 범행을 시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유흥비나 생활비로도 돈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백씨는 2018년 4월쯤 피해자 6명을 대상으로 한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출석 요구에 불응하고 1년 2개월간 경남·경북·부산·울산 등을 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했다. 수사망을 피하려고 휴대전화와 인터넷, 카드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울산해경은 피해자 4명을 추가 확인해 지난 1월부터 수사에 착수, 폐쇄회로(CC)TV 300곳을 탐문하는 등 백씨 동선을 추적해 부산의 한 여관에서 검거했다. 해경 관계자는 “취업 사기 행각이나 불법 관행을 뿌리 뽑으려고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며 “취업을 빙자해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수백 송이 꽃 놓고 숨죽여 우는 할머니…그들 울음 대신 토해 냈다, 난 작가니까”

    “수백 송이 꽃 놓고 숨죽여 우는 할머니…그들 울음 대신 토해 냈다, 난 작가니까”

    “사람들은 제주도로 간다니까 ‘4·3 얘길 쓰겠구나’ 그러던데,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여기서 살다보니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관광객 입장에서 보면 그냥 아름다운 섬이지만, 가는 동네 골짜기마다 학살터거나 폐허가 된 마을이에요.”요양을 위해 찾은 섬에서도 소설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름도 없이 ‘누구누구의 자(子)’라고만 적힌 애기무덤을. 수백 송이의 꽃을 땅에 늘어놓고 어린 아이들 혼을 극락으로 보내는 의식과 소리 죽여 우는 두 할머니를. ‘거기 제주에서도 또 심연을 보았으리라’(김형중 문학평론가)는 후배 문인의 추측처럼 자연스럽게 소설이 나왔다. 최근 경장편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현대문학)을 펴낸 임철우(65) 작가 얘기다. 소설은 작가의 분신인 듯한 ‘한’이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제주로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평화롭기만 한 이곳에서 한의 새 식구 유기견 ‘망고’는 마임을 하듯 허공을 보며 춤을 춘다. 한의 꿈에는 반복해서 어린 삼 남매가 등장한다. 그 말을 듣고 머뭇거리며 한을 찾아온 이웃의 윤씨 할머니는 한의 집터에 관한,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연을 털어놓는다. 공식 희생자만 1만 4232명, 미신고자와 미처 파악되지 못한 수까지 헤아리면 2만~3만명에 이르는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의 월산리를. 그 와중에 엄마를 애타게 찾다 사라진 몽이 삼 남매가 있었다고 말이다. 1980년 5월 16일부터 열흘간의 광주를 그린 다섯 권짜리 소설 ‘봄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넘어 세월호 참사까지 거슬러 올라간 전작 ‘연대기, 괴물’ 등 작가는 시대의 아픔을 그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보도연맹 사건의 풍파가 휩쓸고 간 고향 마을(전남 완도), 부친의 좌익 전력으로 인한 연좌제,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영문과 학생으로서 ‘짱돌 몇 개밖에 던지지 못한 멍에’가 고스란히 녹아든 탓이다. 제주4·3을 그린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환상적인 공간을 그렸던 대표작 ‘백년여관’에서도 제주4·3의 그늘은 짙게 드리웠었다. 그러나 살면서 본 4·3은 조금 달랐다고 작가는 털어놨다. 지난 9일 전화로 만난 작가는 “이곳 공기랄까, 사람들 내면, 감정의 결들이 은연 중에 좀더 보였다”며 “자료나 상상력만 가지고 쓰는 게 두려웠는데, 내려와서 살다 보니까 조금은 써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의 눈에만 몽이 남매가 보이는 까닭은, 한 또한 ‘아파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총살당했다. 삼 남매의 둘째인 몽희가 자꾸 뒤돌아보는 한의 두 눈 속에서 텅 빈 구멍을 발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당신도 우리처럼 ‘아파하는 마음’이로구나.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아파하는 마음들’이구나. 그러기에 당신 또한 오래도록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살아왔구나.’(64쪽) 한과 비슷한 생애를 살아온 작가의 눈에 4·3이 들어온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개 도둑’으로 등단한 지 38년. 20여년 붙잡았던 교편(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을 놓고 ‘쉬자’며 내려온 곳에서도 쓰고 있는 이유는 뭘까. “누가 물으면 나는 ‘절실하니까 쓴다’ 그래요. 4·3을 와서 보면, 사람들의 고통과 한,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프거든요. 나는 작가니까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가슴에 안고 사는 거죠. 작가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할 수 없는 말, 토해낼 수 없는 울음 같은 걸 대신 해줘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울음은 참을 수 없는 것이어서, 소설가도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다음 소설도 제주에 관한 것일 텐데, 이야기가 고이면 토해 내겠다”고 작가는 말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명예기자가 간다] 임대주택도 힘겨운 주거 위기가구… ‘MH마포하우징’ 통해 재기 발판

    [명예기자가 간다] 임대주택도 힘겨운 주거 위기가구… ‘MH마포하우징’ 통해 재기 발판

    경제 불황으로 인한 생활고로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아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 가정들이 있다.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 중 먹고 입는 것은 주위 도움으로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가족이 모여 쉬고, 먹고, 잘 곳을 마련하는 것은 쉽게 해결하기 어렵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제공하는 주거복지가 어떠한 복지보다 중요한 이유다. 우리 주변에서 홍수·산불 같은 재난이나 재건축·재개발 등으로 인한 강제 퇴거, 가정 폭력으로 인한 가족 해체로 갑자기 머물 공간이 없어진 가족들도 보게 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시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그게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A씨(41)의 네 식구는 고시원에서 생활하다 지난해 6월 아내와 어린 두 딸과 함께 내몰리듯 나와야 했다. 밀린 월세가 8개월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후 10개월 동안 여관과 찜질방 등을 떠돌던 A씨 가족에게 지난달 처음으로 새집이 생겼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마포구에 무상 임차한 빈집을 마포구가 민간과 함께 개보수해 A씨 가족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A씨 가족은 6월까지 무상, 7월 이후에는 저렴한 가격에 머물며 공공 임대주택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마포구가 주거 위기 가구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거소를 마련해주고 공공임대주택 등을 지원하는 ‘MH마포하우징’ 사업의 1호 주택이다. 마포구에는 고시원과 옥탑, 지하층을 포함한 약 2670곳에 4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공공 임대주택을 신청한 마포주민은 2000가구가 넘었지만 420가구만 입주했다. 공공 임대주택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포구는 벼랑 끝에 몰린 주거 취약 가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올해부터 ‘MH마포하우징’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거주 위기 가정의 주거 안정을 위한 임시거소 운영, 공공 임대주택 입주 예정인 저소득 주거 취약 가구를 위한 자금 융자, 자체 매입 임대주택 운영 등 총 3개 사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자체가 직접 주택을 사들여 공공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최초다. 현재 4가구가 ‘MH마포하우징’ 임시거소에 입주했다. 마포구는 올해 말까지 20채, 2022년까지 94억원의 예산을 들여 95채의 임시 주택을 마련할 계획이다. ‘MH마포하우징 사업’을 통해 주거 취약 계층이 꿈과 희망을 되찾기 바란다. 김주형 마포구청 복지행정과 주무관
  • 스마트폰·지갑·기념품… 日 쌓여가는 관광객 분실물 어쩌나

    스마트폰·지갑·기념품… 日 쌓여가는 관광객 분실물 어쩌나

    스마트폰·화장품 등 해외 배송 어려워 호텔에선 ‘평점 테러’ 때문에 전전긍긍 대형 여행가방 등 보관 장소 확보 애로지난해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119만명. 10년 전의 4배에 가까운 규모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관광객이 늘어나다 보니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감당 불능 수준으로 증가하는 관광객 분실물들이다. 일본 전역의 호텔, 열차, 버스, 식당, 백화점 등에서는 하루에도 수만개씩 주인 잃은 스마트폰과 지갑, 의류, 기념품 등이 발견된다. 이미 자기 나라로 돌아간 손님들에게는 국제우편으로 물건을 부쳐 주어야 하지만, 이게 보통 애를 먹이는 일이 아니어서 곳곳에서 한숨이 나오고 있다. 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쿄 분쿄구에 있는 ‘경시청유실물센터’에는 약 90만점의 물건이 원래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숙박업소나 상업시설 등이 보유한 것을 빼고 도교 관내 파출소·경찰서를 통해 접수된 물량만도 이 정도다. 도쿄 도시마구 이케부쿠로에 있는 사쿠라호텔의 경우 시계, 지갑, 의류 등 한 달에 80점가량의 분실물을 객실 등에서 습득한다. 80% 이상이 외국인이 흘리고 간 것이다. 해외에서 주인이 연락을 해 오면 수신자 부담으로 택배를 발송해 준다. 그러나 미국 등지에는 운송비 착불 조건으로는 배송을 해 주지 않는 곳이 많은 데다 물품의 종류 등 걸리는 게 많아 관련 직원들이 진땀을 흘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와 같이 리튬전지를 포함하는 제품은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수량에 제한이 있다. 액체류·스프레이류 등이 많은 화장품 파우치를 해외에 보낼 때도 문제가 많이 생긴다. 악명이 높기로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대여한 휴대용 와이파이 에그도 만만치 않다. 에그 대여업체에 직접 반납을 해야 하는데, 업체들이 운송비 착불로는 수령을 거부하기 때문에 호텔 직원 등이 직접 들고 가서 돌려주는 경우가 허다하다.분실물이 많이 나오기로는 숙박시설 외에 열차, 버스, 렌터카 등 교통편들도 만만치 않다. 도쿄 하네다공항 근처에 있는 렌터카업체 타임스카의 경우 분실물의 절반 정도가 외국인들이 놓고 간 것이다. 귀국편 출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공항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차 안에 물건을 빠뜨리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나마 호텔이나 렌터카는 고객정보를 등록하기 때문에 주인을 찾기가 쉽지만, 열차나 백화점 등에서 주운 물건은 많은 경우 분실물센터로 직행한다. 하지만 귀찮은 가욋일을 발생시켰다고 해서 짜증을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손님은 왕’의 정신으로 최대한 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하면 인터넷 등에서 ‘평점 테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사카 주오구 번화가에 있는 호텔더플래그의 관계자는 “투숙객 명단을 바탕으로 주인에게 신속히 연락하고 희망할 경우 수신자 부담을 조건으로 돌려보내는데, 한 주에 2~3건 정도”라면서 “우리 호텔에 대한 (별점 등) 여행사이트의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정중히 대응하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에 말했다. 2017년부터 여행자 분실물 국제배송 사업을 시작한 오사카의 물류회사 오에스에스는 외국인 관광객의 분실물이 호텔, 여관 등 전국 숙박시설에서만 연간 1000만개 이상 나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전국 1000여개 숙박시설과 계약을 맺고 분실물을 외국에 보내는데 지난해에는 한 달에 수백 건이었지만, 올해에는 1000개에 이른 달도 있었다”고 말했다. 분실물이 늘면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보관 장소다. 특히 최근에는 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알기 어려운 대형 여행가방이 많아지면서 공간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이 때문에 경시청은 최근 경찰관서 이외에 백화점, 철도회사 등의 시설 20곳을 새로운 보관 장소로 확보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냄비밥 먹고 여관방 돌던 21살 연습벌레 비상한다

    냄비밥 먹고 여관방 돌던 21살 연습벌레 비상한다

    변방에 머물러 척박한 훈련 환경 속 맹훈련 2015년 세계선수권 7위로 한국 최고 성적 “광주서 5위 이상 올라 올림픽 입성 목표”한때 박태환의 수영 경영이나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이 그랬듯 한국 다이빙은 오랜 시간 변방에 머물러 왔다. 척박함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림픽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다이빙은 국제수영연맹(FINA)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 결선에는 근접도 못했다. 2009년 로마대회 권경민·조관훈의 남자 10m 싱크로 6위가 지금까지의 최고 성적이다.다이빙은 타 수영 종목보다 더 높고 더 깊은 시설이 필요하다. 훈련 환경도 무척 열악했다. 대표팀 선수들은 지방의 여관방을 전전하며 냄비 밥을 끓여 먹고 일반인들과 섞여 훈련했다. 체력 트레이너의 체계적 관리도 2014년 들어 처음 받을 수 있었다. 알을 깨고 삐죽 부리를 내민 게 권경민·조관훈이라면 우하람(21)은 껍질을 더 깨고 한국 다이빙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선수다. 그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과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은메달 3개와 동메달 4개를 수확했다. 우하람은 부산 사직초등학교 1학년이던 2005년 방과후 수업으로 다이빙을 처음 접했다. 다이빙은 물에 뛰어드는 순간 ‘공포와의 싸움’을 극복해야 한다. 사직수영장의 깊이 5미터 다이빙풀에 처음 뛰어들 때 구명조끼를 입었던 우하람은 만 14세이던 중학교 2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 정도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12일 개막하는 광주대회는 그가 출전하는 네 번째 세계선수권이다.우하람은 첫 출전이던 2013년 바르셀로나대회에서 10m 플랫폼을 제외하고 꼴찌에 가까운 기록으로 줄줄이 예선 탈락했다. 그는 “다이빙대에 감도는 공기부터 달랐다. 당시 세계 다이빙대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게 무섭고 부끄러웠다”고 돌아봤다. 그때 자극받은 우하람의 두 번째 세계선수권은 달라졌다. 2015년 카잔대회에서 우하람은 3m 스프링보드에서 한국 다이빙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개인전 결승에 진출했다. 여기에서 받아낸 7위는 한국 다이빙의 세계선수권 개인전 사상 최고 성적이다. 그는 당시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비로소 태극마크가 지닌 책임감과 무게를 절실히 느꼈다”고 털어놨다. 우하람은 1년 뒤 리우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나 홀로’ 출전, 10m 플랫폼에서 한국 다이빙 역대 처음으로 상위 12명만 나가는 올림픽 결선 무대(상위 12명)를 밟았다. 최종 순위는 11위로 당시 18세였다. 네 번째로 ‘빛고을’에서 맞는 세계선수권은 지난 세 차례의 대회에 비춰볼 때 우하람에게 더욱 각별하다. 그는 “이번 대회 목표는 종전 개인전 7위를 넘어 최소한 5위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FINA 그랑프리 3m 스프링보드 등 2관왕을 일궈낸 컨디션을 이번 광주 대회에 맞춰 끌어올렸다. 벌써 5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싱크로 성적도 넘본다. 이 모든 게 내년 도쿄올림픽 입성을 목표로 한 전진이다. 세계선수권 개인전은 결선 진출로, 싱크로는 메달 획득으로 올림픽 티켓을 배분한다. 3일 광주에 입성하는 권경민 다이빙 코치는 “하람이의 장점은 입수 타깃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전까지의 동작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아는 경기 센스”라면서 우하람의 네 번째 세계선수권대회를 기대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구해줘2’ 김영민, 역대급 반전 엔딩에 안방 충격 “들켰네?”

    ‘구해줘2’ 김영민, 역대급 반전 엔딩에 안방 충격 “들켰네?”

    ‘구해줘2’ 김영민이 의문의 살인사건 범인으로 드러나며, 안방극장에 충격을 안겼다. 역대급 반전을 선사하며 최대 변수로 떠오른 김영민. 그의 각성은 종점을 향해 달려가는 엄태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난 20일 방송된 OCN 수목 오리지널 드라마 ‘구해줘2’ 14회에서 읍내 여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지선 부. 그의 죽음을 조사하던 형사들은 지선 부와 시비가 붙었고, 망가진 여관 CCTV에 마지막으로 찍혔던 민철(엄태구)을 용의자로 특정해 수배령을 내렸다. 민철은 지선 부와 시비가 붙었다. 민철의 발길질에 그는 계단에서 굴렀다. 하지만 바로 여관을 빠져나가 그곳에 채 5분도 있지 않았던 민철. 그럼에도 전과 기록은 그를 용의자로 만들었고,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런 그를 도운 사람은 다름 아닌 파출소장 필구(조재윤). 현장을 조사하다 여관에 민철이 왔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됐고, 형사들을 따돌리고 민철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민철에겐 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경석(천호진)의 신앙공동체 계획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 경석은 마을 사람들과 단체로 신앙공동체를 만들 땅에 방문했다. 모두가 곧 지어질 것이라 믿고 있는 타운하우스를 생각하며 들뜬 가운데, 그는 신앙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지만 헌납할 돈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차용증까지 들이밀며 수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철우를 협박한 미끼였던 지선 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경석. 그 순간, 마을 사람들과 신나게 어울리던 철우(김영민)와 눈이 마주쳤고, 웃고 있지만 어딘가 살벌해진 그의 눈빛을 본 경석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적중했다. 지선 부가 살해당했던 지난 밤, 여관 CCTV를 망가뜨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호(손보승)였고, 그를 이용해 알아낸 사실은 지선 부의 방에 침입한 사람이 바로 철우라는 것.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른 철우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었다. 되레 자신의 범행이 모두 하늘의 뜻인 양 “악한 자여, 신의 뜻으로 심판되었고, 처형되었다”라고 읊조렸다.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영선(이솜) 앞에서는 다시 천사 같은 성직자로 돌아온 철우. 아드망에서의 기억이 모두 떠올라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저만 믿어요. 앞으로 영선씨가 힘들어할 일은 없을 겁니다”라는 확신을 줬다. 또한, 경석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곧 만들어질 신앙공동체를 위해 역으로 그를 이용하기로 한 두 사람.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민철이었다. 영선이 돌아가기만 기다리던 민철은 혼자 남은 철우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를 것이란 예상을 깨고, “내가 좀 부탁할게. 영선이 그냥 좀 내버려 둬라”라며 사정했다. 전과 같지 않은 그의 태도에 전세가 역전됐다고 느낀 철우는 거짓말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선이 “모든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오빠를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히 둘은 있어요. 주 아버지와 바로 저예요”라고 고백했다고. 잠시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던 민철은, 그러나 곧 그의 거짓을 눈치챘다. 영선은 한 번도 민철에게 오빠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단번에 표정을 바꾸며 “나한텐 오빠라고 한번 하던데. 오버했네. 내가. 그죠? 들켰네?”라며 소름 돋는 웃음을 터뜨린 철우. 역대급 반전의 순간이었다. 철우의 악랄함은 어디까지 향할까. 또다시 새로운 적을 만난 민철은 폭주하는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구해줘2’ 14회는 케이블, IPTV, 위성을 통합한 유료플랫폼 시청률에서 가구 평균 2.9%, 최고 3.4%(닐슨코리아, 전국기준)를 나타내며 자체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한편 ‘구해줘2’는 오는 27일 종영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웃음 나르는 황새, 어둠 밝히는 팔색조…고찰에 안긴 예술, 솔숲에 깃든 기백

    웃음 나르는 황새, 어둠 밝히는 팔색조…고찰에 안긴 예술, 솔숲에 깃든 기백

    충남 예산군이 들썩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4월 초 개통한 예당호 출렁다리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가 놓였습니다. 다리 길이는 402m, 얼마 전까지 호수에 설치된 국내 최장 출렁다리였던 충남 청양군의 천장호 출렁다리(207m)보다 2배쯤 길지요. 다리는 걸어서만 건널 수 있는 보행교로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 꼬박 8분이나 걸립니다. 예당호 출렁다리는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그 말인즉 저수지에 피어오르는 아침 물안개를 감상하거나, 초여름 햇빛을 온몸에 스미게 하거나, LED 조명이 반짝이는 다리에서 저녁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넘이 후의 출렁다리는 특히 감탄을 자아냅니다. 다리에 색색의 조명이 들어오고 조명의 반영이 예당호를 빛으로 채웁니다. 무지갯빛 예당호 출렁다리를 걸으며 청청한 여름으로 들어갑니다.예산에 여행할 장소가 하나 더 늘었다. 지난 4월 6일 개통한 길이 402m, 주탑 높이 64m의 예당호 출렁다리가 그것. 예당호 출렁다리는 ‘호수에 설치된 가장 길고 높은 주탑 출렁다리’로 한국기록원(KRI)의 공식 인증을 받았다. 5월 26일 기준 방문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예산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다. 예당호 출렁다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예당호부터 짚고 넘어가자. 예당호는 ‘내륙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큰 저수지다. 예당호를 보고 “여기가 바다야?”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 둘레가 40㎞, 마라톤 풀코스 거리에 육박하고 면적은 약 10㎢, 서울 여의도의 3배가 넘는다. 50여년 전에 예산과 당진을 걸친 평야에 물을 대고자 조성된 저수지는 오늘날 국내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예당호 출렁다리 앞에 선다. 숨을 훅, 들이쉰다. 오른발을 디디니 평지와 다름없는 듯하다. 왼발을 내려놓으니 기우뚱,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다시 오른발을 디디면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흔들리는 다리에 맞춰 발에 리듬이 실린다. 폴짝폴짝 뛰며 다리의 성능을 시험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예당호 출렁다리는 현수교다. 64m 높이의 주탑에서 주케이블을 늘어뜨렸고, 주케이블에서 384개의 행어가 내리뻗었다. 발을 디디면 출렁다리는 흔들리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그렇다고 안전성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리는 초속 35m 강풍과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떡없고, 몸무게 70㎏의 성인 3150명이 동시에 건널 수 있도록 설계됐다. 다리 상판 양옆은 나무 데크, 가운데는 촘촘한 철판이라 아래가 훤히 보이지 않는다. 담력이 약한 사람도 아찔함을 즐기며 건널 만하다. 다리는 예당국민관광지와 예당호 북쪽을 잇는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온 신경을 발에 집중하기도 잠시, 시선은 점점 발끝에서 먼 곳으로 나아간다. 주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예당호는 서정적인 풍경을 그린다. 나무의 초록빛 그림자가 수면에서 춤을 추고 바다 같은 저수지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예당호 북서쪽의 수상좌대, 출렁다리 북쪽 끝과 맞닿은 수변 산책로 역시 온화하기 그지없다. 예당호 출렁다리는 걷는 재미만큼 바라보는 운치도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본 출렁다리는 새하얀 황새가 날개를 펴고 착지하는 듯한 모양새다. 다리는 예산의 군조(郡鳥)인 황새를 형상화했다. 주탑은 황새의 몸과 머리를, 주케이블은 날개를 나타낸단다. 조망 포인트는 문화광장 벽천수로를 마주한 채 오른쪽 나무 데크를 오르면 나타나는 언덕. 소나무 군락 사이에 새하얀 다리가 들어차 구도가 그럴싸하다. 예당호 출렁다리의 밤은 낮보다 휘황하다. 일몰 후부터 밤 10시까지 다리 상판에 색색의 LED 조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늘이 시퍼런 청빛으로 물드는 순간을 신호 삼아 붉은색, 파란색, 보라색,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무지갯빛 조명이 다리를 수놓는다. 사람들은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에 바쁘다. 밤의 조망 포인트는 낮과 다르다. 문화광장 전망데크에 서면 기다란 다리를 비교적 적은 왜곡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다리 조명이 예당호에 데칼코마니 무늬를 그린다. 불빛이 번져나가는 수면은 이글거리는 태양 같기도, 번쩍이는 네온사인 같기도 하다. 예당호 출렁다리가 그린 빛의 그림 위로 예당호의 밤이 깊어간다. 예당호 출렁다리는 관광지의 기능에 충실하다. 물자 대신 사람들의 웃음을 나른다는 이야기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다리의 길이만큼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흔들리는 다리, 때 이른 더위, 자신의 일상, 대화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다리의 끝에 닿을 때까지 옆 사람과 말을 섞는다.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예당호 풍경에 무시로 감탄한다. 무서움을 떨치려 손을 맞잡고 휴대폰으로 서로를 담는다. 예당호 출렁다리를 찾은 사람들은 다리가 세워진 이유를 증명한다. 옆 사람과 눈 맞추고 손잡을 시간,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좀더 많이 필요하다고 일러준다. 다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은유한다. 402m의 길이만큼 우리는 좀더 가까워지리라.●간결한 아름다움… 700년 고찰 수덕사 수덕사는 예산10경 중 제1경에 해당하는 고찰이다. 백제 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었다.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 양식이 잘 드러난다고 하여 국보 제49호로 지정됐다. 대웅전은 간결함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의 대웅전은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채 나무의 오랜 색만 남았다. 대웅전을 감상하기에 적절한 위치는 앞보다 옆이다.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이 옆에서 보아야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이 빚은 간결미, 700여년 세월에 빛바랜 배흘림기둥이 시간이 깊어질수록 아름다운 것의 모습을 보여 준다. 수덕사에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흐른다. 수덕사에 딸린 비구니 스님의 도량, 환희대에 머무른 김일엽 스님, 만공 스님에게 스님이 되길 거절당한 신여성 나혜석, ‘문자 추상’(문자를 형상화해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대표되는 예술세계를 구축한 고암 이응노 화백 등이다. 일주문 근처의 초가집은 수덕여관, 이 화백의 부인이 운영하며 화백이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 수덕사 풍경을 화폭에 옮겼던 곳이다. 수덕여관 옆은 이응노를 비롯해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선미술관이다.●윤봉길 의사의 기개가 어린 충의사 “대한 독립 만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상하이 점령을 축하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폭탄이 터진다. 폭탄을 던진 이는 예산 청년, 윤봉길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예산군 덕산면, 지금의 충의사 일대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윤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농민독본’을 편저해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와 농민운동에 힘썼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농민들의 무지를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의사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지만 풍경이 근사한 곳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다. 충의사 홍살문을 마주한 채 왼쪽으로 걸어가면 아담한 연못을 지나 묘소로 가는 산책로가 나온다. 묘소 일대가 울울한 솔숲이라 잠시나마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의사의 일대기를 유품, 사진, 디오라마 등으로 전시한다. 의사의 유품 50여점이 가장 큰 볼거리다. 맏아들에게 남긴 편지, 4·29 의거 전 김구 선생과 정표로 맞바꾼 회중시계, 의사의 피땀이 묻은 손수건,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복제품 등에 독립을 향한 의사의 절절한 의지가 묻어난다.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4·29 의거 이틀 전,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남긴 유시 중 일부다. 의사의 바람대로 충의사에는 입구 양옆부터 태극기가 나부낀다. 개인의 안위 대신 나라를 구하는 것을 택한 의로운 청춘의 이야기가 예산에 있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 서울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비봉교차로, 당진영덕고속도로 당진분기점을 거쳐 예산수덕사IC교차로에서 ‘보령, 홍성’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평촌삼거리에서 ‘예산, 예당국민관광지’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예당관광로를 1.7㎞가량 따라가면 예당호 출렁다리다. 예당국민관광지에 공영주차장이 있다. →맛집 : 예당저수지 주변에 예산 별미인 어죽과 붕어찜 음식점이 많다. 예당저수지 동쪽의 대흥식당(335-6034)은 어죽 맛집이다. 별미식당(337-6363)은 수덕사 앞의 산채정식 전문점이다. 산채더덕정식, 산채비빔밥 등 산나물 위주의 건강한 한 상을 차린다. 신창집(338-2357)은 삽교 거리의 10여개 곱창집 가운데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돼지곱창 전문점이다. →잘 곳 : 리솜스파캐슬(330-8000)은 덕산 온천수가 공급되는 스파리조트이다. 400여개 객실에 대규모 스파 시설을 갖췄다. M펜션(331-3123)은 예당저수지에서 도보 5분 거리다. 객실 통유리 창으로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삼각산 품에 안긴 효자마을… ‘응팔’ ‘둘리’ 덕에 더 정겹네

    삼각산 품에 안긴 효자마을… ‘응팔’ ‘둘리’ 덕에 더 정겹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회 삼각산과 쌍문동’ 편이 지난 18일 쌍문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지하철 4호선 쌍문역 3번 출구 앞에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남정현 가옥에서 ‘분지’의 작가 남정현(87)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참가자들이 미래유산의 현장이자 작가의 집필 모습을 직접 둘러볼 수 있도록 집안까지 개방했다. 2016년 방영 당시 20%대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 쌍문시장과 감포면옥을 기웃거리면서 식지 않는 드라마의 여운을 느꼈다. 함석헌기념관에서 반독재 민주운동가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을 곱새겼다. 기념관은 선생이 만년에 6년간 살던 집을 개조한 서울미래유산이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향을 증명하는 둘리뮤지엄을 거쳐 덕성여대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덕성여대 캠퍼스에는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연과학대, 예술대, 중앙도서관이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올라 있다. 삼각산을 품은 3채의 붉은 벽돌 건물이 눈부셨다. 서울도시문화지도사 김은선 해설사가 쌍문동의 어제와 오늘을 열정적으로 들려줬다.오늘의 북서울을 이루는 도봉구와 강북구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포함된 성저십리(성 밖 십리) 지역이며, 노원구와 중랑구 일부는 경기 양주에 속했다. 도봉구 쌍문동은 경기 양주군 노해면 쌍문리였다. 노해면은 일제강점기 노원과 해등촌을 합쳐 만든 의미 없는 합성 지명이다. 쌍문동이라는 지명은 효자 계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두 개의 효자문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지역 내 효문중·고교도 효자마을이라는 지역정체성을 강조하려고 지었다. 2007년 쌍문동이라는 지명이 촌스럽다고 하여 효문동으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주민투표에서 부결됐다고 한다. 쌍문동은 서울과 강원도~함경도 동북지방을 잇는 길목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한양과 전국을 연결하는 10개의 큰 길이 있었다. 한양~의주 간 1070리길이 의주1대로라면 한양~경흥 간 2110리길은 경흥2대로였다. 이 길을 통해 함경도의 북어와 땔감과 약재가 유입됐고, 함흥차사와 김종서의 여진정벌군이 오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주요 간선도로의 경유지와 거리, 경유 지역을 정리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 중 정리고(程里考)에 따르면 경흥대로는 동대문에서 15리 떨어진 수유현과 32리길 누원을 지나 금화현~금성현~영흥부~함흥부~북청부~길주목~회령부~경원부~경흥을 거쳐 최북단 서수라까지 장장 2190리길이 이어졌다.동북방을 오가는 길의 한양 쪽 마지막 쉼터는 안암동 보제원이었고 다음 쉼터인 누원점(다락원)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북서울 일대에 역이나 여관은 없었다. 관원이나 상인은 보제원이나 다락원에서 서울을 들고나는 마지막 여정을 챙겼다. 북서울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기보다 물품과 봉수(熢燧)가 지나가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 누원점에는 난전 단속을 피하려는 서울상인들이 진을 친 동북방 제일 큰 시장이 열렸다. 정조6년(1782년) “어상이 왕래하는 요충지 누원점의 매점매석이 심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남아 있을 정도다. 현재의 지하철 1호선과 7호선 환승역 도봉산역이 누원점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서울창포원과 평화문화진지(대전차방호벽), 다락원체육공원, 서울YMCA다락원캠프장 등이 옛 영화를 말해 준다. 북서울 일대는 고려 남경(南京)의 후보지였다. 고려 숙종(1101년) 때 오늘의 서울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려고 후보지를 물색한 결과 노원, 해촌, 용산, 북촌 일대가 꼽혔다. 고려사에 “노원역, 해촌, 용산 등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봤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상계주공아파트가 들어선 노원은 마들평야라고 불리던 노원역 일대이고, 해촌은 창동 일대이며, 면악의 남쪽은 경복궁 뒤 청와대 지역이다. 조선의 도읍지는 고려 남경 터를 계승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북서울에는 경흥대로 노선을 흡수한 경원선 등 세 갈래의 철도궤도가 부설됐다. 1910년 착공, 1914년에 개통된 경원선은 용산역을 출발해 왕십리~청량리~창동~의정부를 거쳐 원산까지 223㎞를 달렸다. 경춘선과 금강산철도도 건설됐다. 기차역이 생긴 창동은 서울교외 관광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봄에는 우이동 벚꽃놀이, 가을에는 도봉산 망월사 단풍놀이가 유행하면서 우이동 관앵(觀櫻)열차와 망월사 하이킹열차가 각각 운행했다. 경성역에서 창동역까지 50분 거리여서 한적한 시골동네에 관광 인파가 북적였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서울 너른 들에는 전재민과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한 난민수용소, 이주정착촌, 저소득층 임시거주지가 집중 조성됐다. 1970~80년대 들어 도봉지구와 창동지구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고 상계·중계·창동지구의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아파트 숲으로 빠르게 변해 갔다. 인구가 폭증하면서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한 데 이어 1988년 노원구, 1995년 강북구가 따로 살림을 차렸다. 노원구 중계동 ‘104마을’은 1967년 도심개발 당시 철거민들의 집단이주 정착지 흔적이다. 1985~1987년 세상을 놀라게 한 상계동 철거민 투쟁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무허가주택 세입자들이 재개발사업자와 건설사, 가옥주인 조합원들과 충돌한 도시빈민 투쟁사로 기록됐다. 삼각산은 서울의 뼈대를 이루는 조상산(祖上山)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를 이루는 ‘세 개의 신령한 뿔’이 삼각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산을 북한산이라고 부른다. 조선 말까지 멀쩡하던 지명을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 이마니시 류가 ‘북한산 유적조사보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면서 지명이 변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3년 영문도 모르는 정부가 삼각산을 포함한 서울 북쪽지역을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게 결정타였다.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지칭하면 안 되는 이유는 삼각산은 산의 이름이지만, 북한산은 산의 이름이 아니라 땅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옛 지명 한양(漢陽)은 7세기 신라 때부터 이 지역의 지명인 한산(漢山)이라는 땅의 남쪽, 한강(漢江)이라는 강의 북쪽에 있는 양지바른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를 풍수지리학에서는 ‘산남수북지’(山南水北地)라고 풀이한다. 북한산이란 한산의 북쪽 지역을 이르고, 남한산이란 한산의 남쪽 지역을 이른다. 산 이름 삼각산을 제쳐 두고 지역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산의 영험함과 정기의 상실을 초래한다.삼각산 깊고 너른 품에 안긴 쌍문동은 효자마을이라는 정체성에, ‘아기공룡 둘리’ 애니메이션과 ‘응답하라 1988’ 드라마로 명성을 얻었다. 1983년 쌍문동에 살던 김수정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둘리는 쌍문동을 넘어 도봉구의 마스코트가 됐다. 지역의 대표 캐릭터답게 둘리뮤지엄, 둘리스토리공원, 둘리미니어처공원이 건립됐다. 거리와 역, 버스정류장, 담벼락엔 온통 둘리 그림과 조형물로 채워졌다. 우이천변엔 둘리가 발견된 곳 표지판도 세워졌다. 도봉구는 2011년 만화주인공 고길동씨와 둘리를 구성원으로 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했다. 2015년 11월 6일부터 2016년 1월 16일까지 tvN에서 방영된 ‘응답하라’ 시리즈의 3번째 후속작 ‘응답하라 1988’은 조용한 동네 쌍문동을 다시 화제의 전면으로 불러냈다. “너무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는 동네,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정겨운 이름 때문에 드라마 무대로 쌍문동을 캐스팅했다”고 담당PD는 말했다. 만약 2007년 효문동으로 동명을 바꿨더라면 드라마의 무대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세 개의 뿔’ 삼각산의 기운이 쌍문동의 뒤를 받치는 듯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