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승진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경사-경위 가는길 병목현상
‘치안은 경사 이하 경찰관들이 담당한다.’는 말이 있다.전체 경찰관 9만1742명중 7만9066명이 경사 이하이기 때문이다.최근 들어 하위직 경찰관들의근무의욕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간부 승진길이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또 간부들중에는 ‘총포경’(총경을 포기한 경정)과 ‘조진조퇴(早進早退)경’들이 늘고 있어 조직 불균형이 우려되고 있다.이래저래 경찰의 입직(入職)구조에 대한 재조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연말연시 일선 경찰관들은 시험 공부중
해마다 대학 수능시험이 끝나는 이맘때면 일부 경찰관들은 본업을 뒤로 한채 진급시험 공부에 여념이 없다.
서울 Y경찰서 방범과 이모(40)경사는 이달 초부터 오후 5시 퇴근과 동시에컵라면으로 저녁식사를 간단히 때운 뒤 인근 독서실로 달려간다.내년 1월로예정된 경위 진급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올해 경위시험 3수생인 그는 가족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이를 악물고 밤을 새워가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아침 5시쯤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잠깐 새우잠을 잔 뒤경찰서에 출근한다.그는 순찰중일 때도 틈만 나면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열심히 외운다.
서울 4년제 S대 법학과를 나와 1993년 경찰에 입직한 그는 “가족들에게도미안하고 또 근무중 시험공부에 매달리느라 시민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지 못해 솔직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서도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기동대 근무 경쟁자들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소연했다.
경위시험 4수째인 서울 K경찰서의 외근경찰 김모(41)경사는 오전에 ‘눈도장’만 찍고 오후부터 인근 고시원에서 책과 씨름한다.김씨는 “다행히 마음씨 좋은 상관을 만나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서 “내년 1월까지 아예 집(경기 수원)에 가지 않고 고시원에서 지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북 S경찰서의 정원은 모두 500여명.이중 경사계급만 180여명이며 현재 독서실과 고시원 등에 파묻혀 진급시험에 열중하고 있는 경사만 30여명에 이른다.이들은 방범,수사,교통분야의 현장에서 일하는 최일선 경찰관들이다.관할구역의 한 파출소장 김모(36)경위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현상이지만시험준비를 하는 부하직원들에게 차마 많은 일을 시킬 수도 없는 처지”라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어떡하나 하고 솔직히 걱정도 된다.”고털어놓았다.
경찰청 관계자는 “3년전 5000여명 안팎이던 경위,경감,경정 등의 진급시험 응시자가 지난해에는 7000여명으로 늘었으며,경위시험에 응시한 경사가 3년전 3559명에서 5000명 가까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간단히 말하면 경사에서 경위로 진급하는 길목에 심한 병목현상이 생기고있기 때문이다.
매년 신규 경위 임용자는 400명 안팎이다.이 가운데 경찰대학 졸업생 120명과 간부후보 52명 등 170여명은 매년 고정적으로 경위에 임용된다.반면 오랜 인사적체와 또 IMF이후 명퇴자들이 급감하다보니 경사들에게는 상대적으로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지난해의 경우 경찰대와 간부후보 졸업생 임용을 제외한 경위시험(115명 모집)에 경사 4860명이 지원했을 정도다.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1980년대 후반부터 경찰대 출신과 간부후보 출신들이 우선적으로 임용됐고 또 IMF들어 퇴직자들이 현저히 줄다보니 진급구조에 전체적으로 병목현상이 생기고 있다.”면서 “앞으로 파생될 문제점 등을감안할 때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말했다.
●문제점과 대안은.
요즘 경찰내부에는 ‘총포경’과 ‘조진조퇴경’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총경을 포기한 경정은 일선 경찰서에서는 과장급,지방경찰청에서는 계장급이다.사실상 핵심 실무자다.그런데 진급을 포기해서인지 윗사람의 ‘영’이 잘 안 통한다는 얘기가 비일비재하다.‘조진조퇴경’은 고시나 경찰대 출신 등으로 일찍 진급했으나 총경이나 경무관 진급벽에 막혀 40대 중·후반에 그만두는 사람이다.그러다보니 경찰에 있을 때 제2의 진로를 모색하는 등 경찰직업을 징검다리로 여길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생긴다.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전문가들을 통해 연구논의가 일부 됐던 것으로 안다.”면서 대안중의 하나로 “전국 52개에 이르는 경찰행정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턴십제도를 도입하거나 경찰대 졸업생을 경위가 아니라 경사로 1계급 내리는 것도 방안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문기자 km@
★인사적체원인/경찰대 존폐논란
“경찰대가 양질의 인재를 경찰로 끌어 들이는 등 나름대로 역할을 했습니다.그러나 이제 경찰대 존폐 문제를 고려할 때가 됐습니다.”
간부 승진에 실패한 일선 경찰관의 얘기가 아니다.총망받는 경찰대 2기 출신 경정조차 “경찰대를 대체할 만한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당연히 경찰대를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대 출신들이 공개적으로 경찰대 존폐를 고민할 정도로 경찰대는 ‘경찰인사 동맥경화’의 핵으로 떠올랐다.
경찰대 출신 경위 이상 간부는 모두 1937명.경찰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간부후보생 출신 1342명을 이미 앞질렀다.아직 경무관 이상 고위직에 오른졸업생은 나오지 않았지만 총경 20명,경정 295명,경감 530명,경위 1092명을배출했다.
경찰대 출신들의 급격한 증가로 전체 경찰관 9만1742명의 87%를 차지하는순경∼경사 계급의 ‘승진 박탈감’은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
경찰대 출신들도 위기를 피부로 느낀다.‘경찰의 꽃’인 총경 자리는 한 해 50∼60개가 생기는 반면 경찰대 출신 경위는 120명씩 쏟아지고 있다.총경승진 절반을 경찰대 출신에게 배려해도 대부분의 졸업생은 경정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경정을 단 이후 11년 동안 총경에 오르지 못하면 계급정년에 걸리기 때문에 많은 경찰대 출신들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퇴직할 위기에 처해 있다.총경직을 꿰찬 1기 선두주자들조차 40대 초반이어서 비록 경무관 이상의 자리에 올라도 50대 초반에 퇴직할 가능성이 높다.
승진 메리트가 없어지고 조기퇴직 현상이 퍼지면 경찰대는 우수학생 유치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으며,폐지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경찰대 선배가 한 사무실에서 후배를 상사로 모시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며,앞으로는 더욱 심해져 경찰 전체의 위계질서도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경찰대 출신들 사이에서는 “후배가 경찰청장이 되면 경무관 이상 선배 참모는 모두 옷을 벗자.”는 미래의 불문율이 회자된다.경찰대 위기 타개책으로 정원 축소,대학원 설립을 통한 새로운 입직구조 개발,계급정년 연장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뚜렷한 대안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이창구기자 window2@
★외국에선
경찰 입직제도는 전세계적으로 3가지로 나뉜다.
프랑스 일본 등은 한국처럼 순경시험,경찰대,간부후보생 등 특성에 맞게 다원 입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반면 영국과 미국은 고졸자 이상을 대상으로하는 순경시험만으로 경찰관을 채용한다.독일과 홍콩은 고졸자를 상대로 비간부를 모집하고,대졸자를 상대로 간부를 모집하는 2원 입직제를 채택하고 있다.
경찰 인사시스템은 각국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선진국 경찰은 한국 경찰처럼 과도한 인사경쟁을 벌이지는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선진국 경찰관은 사회적인 위상이 높고 보수도 많아 굳이 승진할 필요성을느끼지 못한다.철저한 직업공무원제로 정년이 보장되며,전문화가 이루어져어느 분야에서 일하느냐가 승진보다 훨씬 큰 관심사다.반면 한국 경찰은 어떤 업무를 담당하든지 목표는 승진이다.
‘경찰의 천국’ 영국은 특별승진제를 운영하고 있다.순경 가운데 소수정예를 선발,특별교육을 실시해 초고속승진을 보장하고 기획업무를 맡긴다.그러나 고속승진 대상자나 경사로 퇴직하는 경찰관이나 모두 1인당 GNP의 2.7배의 수입을 보장받기 때문에 대다수 경찰관은 승진에 별 관심이 없다.일본도경찰의 업무를 일선 경찰관이 맡는 경험기능과 간부가 담당하는 기획기능으로 나누고 있으며,간부와 비간부의 차별은 거의 없다.
모든 경찰이 승진에 목을 매는 풍토를 개선하려면 인사시스템의 변화는 물론 경찰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도 변해야 한다.
이창구기자
★엘리트주의 집착말아야
우리나라 경찰조직은 전통적인 피라미드형이며 지극히 계층적이다.군대처럼 11개나 되는 계급이 있으며,경찰관들은 진급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해 간부·비간부를 막론하고 심각한 승진경쟁을 벌이고 있다.특히 비간부의 승진기회는 철저히 차단됐다.
특별채용도 극소수의 상위직을 전문성에 의거해 다른 부처로부터 채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엘리트 확보정책으로 이루어졌다.고시합격자의 ‘경정 특채’도 전문성과는 관계가 없고,간부후보생들의 경우에도 전문성 때문에 ‘횡적유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매년 120명에 이르는 경찰대 졸업생들의 ‘경위 특채’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다.경찰수사권 독립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국보위 시절에 급조한 비전없는 경찰간부 채용제도일 뿐이다.
경찰대학은 일부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에서 오는 폐해가 더 크다.간부·비간부 출신간의 위화감 조성,의사소통의 단절,과도한 특혜로 인한 특권의식,출신성분에 따른 집단파벌 조성 등의 문제점은 경찰 이미지 개선과 같은 추상적 긍정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특히 상대적으로 배타성이 적었던 다른 간부집단에까지 파벌조성 분위기가파급된 점은 경찰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문제의 시발은 경찰간부후보생 제도로부터 시작된 엘리트주의적 인사관리로볼 수 있으며,경찰대학은 이를 결정적으로 구조화시켰다.
경사 이하 하위계층과의 뚜렷한 2원 계층화가 진행돼 하위층은 수단적지위로만 전락하고,경찰대 출신을 주축으로 한 엘리트 집단은 자기 목적적 집단으로 형성됐다.엘리트 집단과 비엘리트 집단간의 양극화가 극복되지 않으면조직의 효율성은 크게 떨어진다.
지휘체계의 이완으로 인한 조직관리의 난맥상도 자명하다.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선에서 직접 법을 집행하는 대다수 비간부 경찰공무원의 자질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어 경찰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간부직으로의 지나친 횡적유입을 막아 비간부의 승진기회를 확대해야 하며,계급의 수를 줄여 경찰조직을 보다 평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경찰관들에게 직위보다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보환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