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佛 젊은층 일자리 찾아 엑소더스
|파리 함혜리특파원|이동통신회사 부이그텔레콤의 엔지니어인 악셀과 유명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간부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실비는 30대 초반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99년 사직서를 던지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왜냐고?
모든 것이 느려 터지고 복잡한 프랑스가 지겨워졌기 때문.
유명 도자기 회사인 빌르루아 앤드 보슈의 도쿄 지사장인 필립 자르댕(35)은 명함에 새겨진 직함을 들여다볼 때마다 눈을 의심한다. 파리에 있었더라면 60대에나 앉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젊은이 사이에 ‘엑소더스’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국내 경기 부진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더 많은 기회가 열린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고급 두뇌 유출 운운하며 프랑스의 쇠락을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글로벌 시대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인재 확보가 프랑스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
●해외 거주자 절반이 35세 이하 추정
프랑스 외무부 통계에 따르면 해외 거주자로 등록된 프랑스인은 2004년 기준 125만여명이다. 그러나 등록하지 않은 이까지 포함하면 220만명 수준일 것으로 추산한다. 또 이 가운데 100만명 정도가 35세 미만의 젊은이일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인의 해외 이주 규모는 1984년부터 90년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이듬해부터 빠르게 증가했다.2004년에는 전년보다 6만 4000명(2.4%)이나 늘었다.10년 전과 비교할 때는 39.5%가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4월 TNS소프레스가 실시한 해외 거주자 연령 표본조사에 따르면 35세 미만이 전체의 48%나 차지했다. 해외프랑스인연합회(UFE) 엘렌 샤베리아 사무처장은 “과거엔 학업이나 현장 실습을 겨냥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10년 전부터 계층의 구분이 엷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류 대학 나와도 ‘흰손’
이 조사에서 학생이 아닌 이들의 해외 이주 이유로는 문화적 경험을 쌓기 위해(47%), 프랑스를 떠나고 싶어서(45%), 해외 근무 경력을 쌓기 위해(35%), 외국어 습득을 위해(27%), 경제적 이유(27%) 등을 꼽았다. 물론 자녀 교육을 위해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이들의 해외 이주 동기는 단순한 일자리 구하기를 뛰어넘어 국제 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을 닦겠다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실업률은 9.7%이지만 젊은 층은 25%에 이른다. 불경기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일류 그랑제콜(엘리트 교육기관) 출신들도 취업이 만만치 않은 마당에 고교나 대학 졸업장 가지고는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공계는 더욱 힘들다.
고교 졸업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한 에뒤아르 쥐네(26)는 스위스의 산악 장비 전문점에서 일한다. 월 수입은 2600유로(약 304만원), 고국에서 벌 수 있는 것의 곱절 수준이다.
그는 “스위스 물가가 30% 정도 높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득”이라고 말했다.
국제무대 진출을 노려 졸업 후 곧바로 비행기에 오르는 학생도 급증하고 있다. 실제로 1999년 그랑제콜 졸업생 가운데 11%가 국외 취업을 했지만 2004년 졸업생은 13%로 늘었다.
외국 기업과 학생들을 연결해 주는 유로메드 마르세유의 아냐 디트리히는 “졸업생의 80%가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첫 직장을 찾고 있다.”며 “기업이나 정부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계획을 갖고 나가는 사례가 많다.”고 분석했다.
프랑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활의 활력과 ‘오픈 마인드’를 매력으로 꼽는 이도 많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프랑스인, 미국인’이라는 책을 낸 바 있는 작가 파스칼 보드리는 시사 주간 누벨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잘될 것부터 찾는 습관이 있는 반면 프랑스 사람은 안 되는 것부터 찾는다.”면서 “단지 프랑스를 떠나고 싶다는 이유로 미국에 오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뉴욕 가장 가고 싶은 곳 꼽혀
외무부가 추산한 거주국별 체류자 수는 미국 28만 2000명, 영국 20만 1500명, 스위스 19만 1000명, 독일 16만 8300명, 벨기에 16만 4000명, 캐나다 13만 8300명, 스페인 12만 4500명 순이었다.
특히 뉴욕은 파이낸스와 금융을 전공한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스위스는 국경을 접한 데다 프랑스어 사용권이어서 인기다.
영국은 가깝고 영어를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 지역으로 꼽힌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앵글로 색슨식 자유경쟁 문화는 젊은이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한다.
리버풀에서 직장을 구하고 있는 에뒤아르 바쇠르(26)는 “프랑스에선 지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수차례 거친 뒤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영국 기업이나 연구소에는 인터넷으로 지원하고, 전화 인터뷰를 거친 뒤 일주일이면 가부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동유럽과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떠나는 사람도 꾸준히 늘고 있다.2004년 동유럽 거주자는 2000년 대비 5.3% 늘었고, 아시아·오세아니아의 경우 같은 기간 3.7% 늘었다. 특히 중국·캄보디아·태국이 급증세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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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인들도 앞다퉈 “나가야 살 수 있다”
|파리 함혜리특파원|프랑스 젊은이들의 엑소더스는 당초 연구 및 개발(R&D) 분야의 젊은 두뇌들이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면서 촉발됐다.
프랑스의 R&D 투자가 몇 년째 답보 상태여서 연구 여건이 급격히 발전하는 과학을 따라잡지 못하고 연구소 자리 잡기도 힘들어졌다. 반면 미국·캐나다·호주 등 영어권 대학에서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프랑스 인력을 모셔가고 있다.
누벨옵세르바퇴르에 따르면 이공계 연구 인력 중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해외에서 박사후 연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은 1만 60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절반은 미국 대학에 소속돼 있다.
이공계 인력 문제를 연구하는 모하메드 하프리 박사는 “미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연구원 5명 중 1명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눌러앉는다.”며 “활발한 현지의 분위기 때문에, 혹은 돌아가봐야 마땅한 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귀국을 꺼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두뇌 유출이 가장 심각한 분야는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강했던 생물학과 화학 분야.
워싱턴에 있는 CNRS 미국 분원의 파트릭 베르니에 박사는 누벨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연구원 보수가 프랑스에 비해 크게 높은 편도 아니다. 프랑스의 이공계 인력이 미국에 눌러앉는 주된 이유는 훨씬 많은 일자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엔지니어·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해외 이주가 늘어나는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 독일 해외구직알선센터(ZAV) 통계에 따르면 2003년에는 해외 구직자가 6500명에 불과했으나 2004년 9100명,2005년 1만 1600명 등 해가 갈수록 해외 구직자가 증가하고 있다.
권위지 디 벨트는 독일에서 매년 5만여명의 젊은 학자들이 미국·스위스 등으로 떠나고 있으며 박사학위 취득자 7명 중 1명이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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