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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딜 지연 혹시…/‘현대·LG 형제들간 이견 노출’

    ◎“내 사업 포기못해” 이해충돌/그룹후계 등 얽힌 미묘한 알력 현대와 LG는 ‘빅딜’의 걸림돌인가. 7개 업종에 대한 5대 그룹간의 사업구조조정이 막판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은 반도체와 발전설비 분야 등 핵심분야에서 현대와 LG가 버티기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재계에서는 이를 현대의 鄭夢九·夢憲 회장과 鄭夢準 고문 등 형제간의 이해관계에서 파악하는 시각들이 있다.LG의 具本茂 회장과 具本俊 LG반도체사장 간의 이견설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현대의 경우 반도체와 철도차량에서 통합법인의 경영권을 고집하고,발전설비는 한국중공업과의 사업권 일원화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이다.그런데 鄭夢九 회장은 현대정공(철도차량),鄭夢憲 회장은 현대전자(반도체),鄭夢準 고문은 현대중공업(발전설비)의 대주주.간판기업이 구조조정의 도마에 오르면서 미묘한 관계가 엿보인다. 夢九 회장은 비교적 느긋한 편이다.그러나 夢憲 회장은 PC사업 분야를 분리한 데 이어 반도체마저 내줄 경우 입지가 약화될 여지가 없지 않다.夢準 고문도 알짜배기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구조조정 결과에 따라 로열패밀리 안의 역학구도와 후계체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이 때문에 의견조율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LG의 경우 具회장은 당초 정부고위층에게 “반도체를 내놓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具사장은 “어떻게 키운 기업인데…”라며 반발,그룹 내부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게 관측도 있다. □7대 업종 구조조정 추진내용 업 종 원칙합의 내 용 경영주체방안 반도체 2사체제 현대와 LG의 단일법인 경영권 놓고 단일법인 설립으로 현대와 LG입장 팽팽 삼성전자와 2사체제 항 공 단일법인 삼성항공,대우중공업 외자유치 ,현대우주항공 동등 지분의 단일회사, 전문경영인 영입 철도차량 단일법인 현대정공,대우중공업 맥킨지사에 종합실사 ,한진중공업이 단일 의뢰후지분결정 회사 설립 유 화 단일법인 현대석유화학과 삼성 공동법인 설립,외자유 종합화학이 30%씩 치,전문경영인 영입 지분으로 단일사 설 립,나머지 정부출자 분 외자유치 정 유 4사체제 현대정유가 한화에너 합의내용대로 인수결정 지 인수 선박용엔진 2사체제 삼성중공업의 관련부 삼성·한중·대우·한진 문을 한국중공업으로 단일법인과 현대 2사 이관,한국중공업­현 체제 검토 대중공업 2사체제 발전설비 일원화 현대와 한국중공업 현대,한중 일원화반대 일원화,방안은 추후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여당의 현주소(대치정국 이대로는 안된다:2)

    ◎與,집권당답게 정치력 키워야/매끄러운 국정운영 미흡/정면돌파·한건주의 지양/집권당 좌표설정 새로이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신여권 앞에는 국정현안이 산적해 있다. 정치개혁은 물론 경제·사회개혁까지 그동안의 적폐를 청소하지 않고는 한치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각오가 번득인다. 하지만 신여권은 집권 8개월을 맞았지만 여전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제2 건국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DJ호’를 끌고가야 할 집권당으로서 ‘좌표 설정’에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우려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순간순간 상황타개에 몰두했던 ‘야당식 정치행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명분 하나로도 ‘정면돌파’가 가능했던 야당 때와는 달리 복잡한 변수가 곳곳에 숨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력 부재로 인한 불협화음과 한건주의에 급급한 정책추진으로 스스로 여권의 권위와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재 진행형인 사정정국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짚어보자. 청와대­검찰­당으로 이어지는 ‘대화채널’이 총체적 혼선을 빚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야권을 자극한 측면이 강했다. 당 지도부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청와대가 ‘성역없는 사정’을 외치고 있을 때 국민회의 내부에서 국회 정상화를 서두르다 하루만에 ‘전면 백지화’시키는 해프닝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초기 전략부재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국세청 세도(稅盜)사건’을 정치인 개인비리와 적절하게 분리하지 못했다. 薛勳 기조위원장은 “국정문란 사건을 제대로 부각하지 못해 표적사정이니,정치보복이니 하는 역공의 빌미를 줬다”고 시인했다. 총체적인 ‘마스터 플랜’없이 사정정국을 끌고가다보니 불필요한 형평성 시비에 휘말려 정치개혁의 의지가 손상되는 우를 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설익은 발상’을 그대로 여권의 정책으로 밀어붙였다가 국정운영 능력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최근 ‘식수댐 건설 파문’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회의 金元吉 정책위의장은 지난 23일 청와대 주례보고 후 마치 金大中 대통령의 지시인 것처럼 확대 발표했었다. 환경부와 자민련 등은 “기존 팔당상수원 종합대책과 혼선을 빚는다”며 반발했고 환경단체들도 일제히 “환경오염을 선도하고 있다”고 가세했다. 급기야 청와대는 “식수전용댐은 와전된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고 불과 며칠새에 백지화됐다. 정책정당을 자임하고 있는 국민회의로서 면밀한 대책도 없이 밀어붙인 야당식 한건주의가 빚은 결과였다. 최근 기아자동차 입찰을 둘러싼 여권의 접근법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엄정 중립에 서야 할 정치권이 “삼성자동차로 갈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 개입의혹을 자초했고 공정집행자로의 능력을 의심받게 됐다. 최근 지방행정 개혁과 관련,4개 광역시 폐지 등의 개혁안을 제출했다가 서둘러 백지화시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집권당의 생명은 차질없는 국정운영이다. 그때그때 상황타개에 초점을 맞추는 야당체질로서는 안정감있게 집권당의 역할을 소화하지 못한다.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 채 청와대의 향배에만 촉각을 세우면서 집권당의 위치 설정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많다. ‘복창(復唱) 정치’와 ‘해바라기 정치’라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행태를 떨쳐 버릴 때 비로소 집권당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귀담아 들을 때다. □여권의 정책혼선 사례 ◆식수 전용댐 건설 ·과정:팔당 상수원과 별도의 식수댐 5∼6개 건설 ·결과:기존 정책(팔당 상수원 종합대책)과 마찰, 식수댐 불필요로 가닥 ◆월드컵 경기장 성명권 유치 ·과정:2002년 월드컵 경기장의 성명권을 외국기업에 팔아 자금 유치 ·결과:문화관광부의 반발로 전명 백지화 ◆그린벨트 재조정 ·과정:당안을 청와대 보고 ‘미흡 판정’ ·결과:건교부 독자적으로 작업 추진 ◆경제 청문회 증인 선정 작업 ·과정:재벌 총수 포함 등 범위 확대 ·결과:재벌 총수 배제 등 범위 축소
  • 노숙자 이대로 둘순 없다­정부대책 점검

    ◎취업 알선·복지 제공에 초점/30개 민간활동기관 지원/일자리·숙식 해결책 미흡 ‘이번 겨울에 얼어죽는 노숙자가 단 한사람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金大中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정부의 ‘동절기 노숙자대책’에 비상이 걸렸다. 추위가 닥치기 전인 10월20일까지 동절기대책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노숙자대책으로 △귀가 등 사회복귀 적극 지원 △쉼터 등 편의시설 확충 △노쇠·병약 부랑인의 사회복지시설 보호 △사회불안요소 해소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전국 5개 시·도에 종교·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30개 ‘노숙자 현장상담팀’을 운영,취업 및 귀가,쉼터 안내,응급의료,사회복지시설 입소 등의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가족과 집이 있는 노숙자 500여명에 대해서는 한시적 생계보호와 공공근로사업 참여를 통해 얼마간의 돈을 갖고 귀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노숙자의 80% 이상이 몰린 서울에서는 노숙자종합지원센터를 설치,쉼터와 상담소,급식소 등을 알선하고 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영선·배관·주차관리 등의 경험이 있는 노숙자는 교회나 사회복지시설 등의 유료봉사원 일자리를 제공,1년 후에는 600만∼700만원의 목돈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글로벌캐어’ 회원병원의 자원봉사 의료인 100명과 대학생 100명은 전담의료팀을 편성,진료 및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이같은 민간 및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숙자들의 상담 과정에서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기 때문에 급여 수준이 다소 낮더라도 숙식을 함께 해결해 주는 일자리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기간 일자리인 농촌일손돕기나 침식을 본인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 푸른숲가꾸기사업 등에 참여하는 것은 장기대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다소 힘이 들고 급여가 낮더라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가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노숙자에 대한 급식이 계획성 없이 이루어져 중복급식 등 낭비 요인이 없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아직까지 옥외급식이 이루어지는 곳도 있다. 옥외급식은 위생문제뿐 아니라 노숙자들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안겨줄 수 있다. 또 쉼터 이용자에 대한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아 노숙자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동절기 노숙자 대책의 대상과 내용 ◆심리상담 ·대상:모든 노숙자 ·내용:상담결과에 따라 귀가, 쉼터안내, 취업알선, 사회복지시설 보호 ·비고:3,020명 ◆귀가지원 ·대상:가족과 거주처 있는 사람(30∼40대) ·내용:공공근로사업 한시적 생계 보호 *귀가지원 10만원 ·비고:500명 ◆쉼터증설 ·대상:귀가 어려우나 근로능력 있는 사람 ·내용:32곳→147곳(2,035명→5,060명) ·비고:115곳, 3,025명 ◆실직 노숙자를 위한 사랑의 운동 ·대상:가정있는 30∼40대 노숙자 ­가정 해체된 사람 ·내용:교회에 영성, 전기, 주차관리요원으로 취업 ­교회가 노숙자 가정까지 보호 ·비고:500명 ◆직업훈련 ·대상: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20∼30대 ·내용:노동부 직업훈련시설업소 *훈련기간중 가구당 20만원 생계 지원 ·비고:40명 ◆사회복지시설 유료 봉사원 배치 ·대상:일정수준의 기술이 있는 30∼40대 ·내용:장애인·노인·시설 등에서 24시간 함께 생활 ·비고:100명 *현재 300명 배치 ◆노쇠·병약 부랑인 ·대상:자력보호가 안되는 상습 부랑인 ·내용:응급의료구호 후 사회복지시설에 보호 ·비고:700명 ◆건강관리서비스 ·대상:전 노숙자 ·내용:‘글로벌캐어’ 주관 의사 100명, 학생 100명으로 진료팀 구성, 진료 및 건강검진 ·비고:1,000명 ◎任仁哲 복지부 심의관/“석달간 1,600명 귀가시켰는데 다시 늘어/질병치료 최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야” “함께 고통을 나누고 밝은 사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노숙자들을 껴안아야 합니다” 노숙자 대책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보건복지부 任仁哲 사회복지심의관은 노숙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이같이 요약했다. 그는 “경제위기로 노동자에서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을 사회가 백안시하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면서 이들을 따뜻하게 껴안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숙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지난 6월 조사때에는 3,000명 정도였다. 특별지원사업을 시행하면서 1,600여명을 귀가시켰는데 9월 현재 다시 3,000여명으로 늘었다. ­동절기 대책은. ▲날씨가 추워지면 노숙하는 것이 위험하다. 귀가를 유도하고 치료도 해주고 직업도 알선해줘 한 사람이라도 배고픔과 추위에 떨지 않게 한다는 것이 대책의 핵심이다. 노숙자 쉼터에서 3,000여명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내년 봄이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노숙자들에게 시급한 것은. ▲노숙자들의 30%가 결핵이나 피부병,내분비계통의 질병을 앓고 있다. 자원봉사 의료인들의 모임인 ‘글로벌캐어’ 진료반이 1,000여 노숙자들의 건강상태를 진단하고 치료도 해주고 있다. ­장기적인 대책은. ▲노숙자가 없어질 수는 없다. 노숙자 문제를 단순한 사회현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퍼내면 다시 고이는 게 노숙자지만 한 사람이라도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주택시장 이상기류/숨죽인 매매 숨가쁜 분양

    ◎기존 시장 침체속 신규 분양만 열기/서울이어 수도권 확산 2.5대1 IMF후 기록도/“부양책 효과로 희생”“특이 양상” 신중론도 주택분양시장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부동산 경기악화로 기존 분양주택 시장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신규 분양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신규 분양주택에 대한 양도세 감면 등 정부의 부동산경기 부양대책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좀체 보기드문 것이라며 분양열기가 지속될 지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다.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신규 아파트 분양열기는 서울을 시작으로 수원 안양 등 수도권은 물론,대전 등 지방 대도시로 번지고 있다. 대형 주택업체들의 분양실적은 청약률이 손쉽게 100%,분양률이 80%를 넘어서고 있다. 삼성건설이 지난 3일부터 조합원을 모집 중인 안양 삼성아파트는 지난 22일까지 총 1,848가구 중 1,420가구(77%)를 모집했으며 대전 노은지구에 29평형과 32평형 886가구를 분양한 현대산업개발도 분양 10일만인 지난 22일 청약률 100%를 기록했다. 특히 대우건설의 수원 권선지구아파트는 청약접수 첫날 1순위에서만 모집가구(358)의 2.5배에 이르는 891명이 청약,IMF 체제이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이달 초 서울지역 8차 동시분양에서도 신도림 대림아파트(1,247가구)와 공릉동 우방아파트(494가구)가 각각 무순위 접수에서 청약률이 100%를 웃돌았다. 이에 따라 일부 주택전문가들은 “이제 분양시장이 활기를 되찾은 것 아니냐”며 성급한 진단을 내리지만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이같은 분양열기는 특정 지역,특정 대기업의 분양기록이기 때문에 전체 주택분양시장의 양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기업·금융권 구조조정이 완료된 뒤에야 분양시장은 활기를 띨 것”이라고 내다봤다. 건설교통부 秋秉直 주택도시국장은 “지역적으로 차별화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며 “지방의 주택경기가 되살아 나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지 몰라도 주택보급률이 84%에 불과한 수도권에서는 상황에 따라 주택시장이 상당히 활성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진단했다.
  • ‘美 졸부보다 자수성가형 부자 많다’/포브스誌 400大부자 선정

    ◎빌 게이츠 584억달러 1위/첨단산업·연예계 갑부 많아/평균재산 5억달러 이상 【뉴욕 DPA 연합】 미국에서 진짜 갑부로 대접받으려면 재산이 수십억달러는 돼야 한다.그리고 첨단산업은 떼돈을 버는 지름길이다. 27일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보스가 발표한 연례 ‘미국의 400대 거부(巨富)’에 따르면 갑부들의 평균 재산은 5억달러 이상이었고 연예계 거물들이 포함된 189명은 수십억달러에 이르렀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창업자인 빌 케이츠는 올해 주식시장에서 90억달러를 날리고도 584억달러(75조9,200억원)의 재산으로 최고의 갑부 자리에 올랐다.금융가인 워렌 버펫도 주식시장에서 70억달러를 손해봤지만 아직도 재산이 294억달러나 돼 2위를 차지했다. 연예계에서는 16억달러를 가지고 있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20억달러의 영화 제작자 겸 감독 조지 루카스가 포함됐다.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는 400대 갑부 명단에는 올랐지만 소득은 6억7,500만달러로 십억달러대 부자축에는 끼지 못했다. 400대 갑부 중 여성은 58명이었고 58명은 대학중퇴자들이었다.대학 중퇴자들의 평균 순 재산은 48억달러로 하버드 등 북동부 8개 명문대학 출신 부자의 23억달러를 앞질렀다. 또 상속한 재산 덕분에 거부 명단에 오른 사람은 171명이었으나 229명은 자수성가한 부자였다. 업종별로는 금융 및 투자업이 75명,미디어와 연예 오락산업 64명,소프트웨어 및 기술 27명,부동산 27명 석유 및 가스 27명이었다. 특히 첨단기술분야는 갑부가 되는 지름길.‘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은 130억달러 부자였고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은 8억3,000만달러를 벌었다.
  • 3차 입찰? 수의계약? 빅딜?/기아 향후 처리 방향

    ◎삼성 3차 입찰­현대·대우 빅딜 선호/부채 탕감땐 포드 재입찰 가능성도 기아·아시아자동차 재입찰이 유찰된 것은 응찰업체들이 부채탕감을 받은 뒤에도 부채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차 입찰때와 같은 상황이 재연된 것이다. 기아·아시아차의 부채는 소송 계류중인 것을 제외하고도 상환대상 채권이 총 15조6,000억원(공익채권포함).이 중 기아 채권단이 깎아 준 부채 원금은 2조9,000억원이지만 경과이자를 빼면 순수 원금 탕감액은 2조2,000천억원으로 줄어든다.응찰업체들은 이런 조건으로 기아를 인수하면 이자만 연간 1조원 가량된다고 주장한다. 현대 대우 삼성 등 3사는 이런 점을 인식해 추가 부채탕감과 함께 현장을 실사한 뒤 재협상을 요구하는 부대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앞으로 기아의 향방은 △3차 입찰 △지정수의계약 △재계차원의 구조조정(빅딜)중 하나로 판가름나게 됐다. 업계에서는 지난주 朴泰榮 산업자원부장관이 “2차 입찰이 유찰되면 3차 입찰을 할 것”이라고 한 대목을 근거로 재입찰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2차 유찰로 입찰 자체가 막바지에 몰린데다 시간이 많지 않아 정치권의 의중이 고려된 수의계약이나 빅딜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현대와 대우는 오래전부터 국내 자동차산업의 2사 체제를 주장하며 삼성과 기아의 ‘동시 빅딜’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빅딜은 채권단측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칠 것으로 보인다.60여개의 금융기관으로 구성된 채권단이 총 16조원에 이르는 기아 채권의 대부분을 포기할 경우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해 도산하는 금융기관이 속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아 인수에 실패할 경우,퇴출로 이어질 수 있는 삼성이 3차 입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부채 부담때문에 2차 입찰에 참가하지 않았던 포드는 3차 입찰에서 상당부분 부채탕감이 다시 이루어질 경우,적극적으로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 국민­문민정부 司正 차이/DJ ‘검찰주도 법대로’

    ◎YS ‘기획의도 곁들여’/국민정부­개혁·제도완비 지향/문민정부­용두사미의 단발성 한나라당 金潤煥 의원이 21일 사정가시권에 포착되면서 정치권의 ‘편파·표적사정(司正)’ 시비도 고조되고 있다. 여권은 ‘비리있는 곳에 성역없다’는 원칙을 재강조한 반면 한나라당은 ‘사정’을 ‘야당파괴의 일환’으로 이해,일전불사할 태세다. 여야간의 이같은 시각차는 국민의 정부에서 진행되는 사정이 문민정부의 그것과는 여러 각도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DJ식 사정’은 ‘YS식 사정’과는 달리 검찰 독립성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고 여권인사들은 강조한다.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나도 압력을 안넣을 테니 검찰도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검찰권의 남용 때문에 입은 피해를 들며 金대통령은 “이번 정권만큼은 (검찰독립을) 한번 해보자”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는 후문이다. 여권에서는 DJ식 사정은 과거처럼 ‘기획사정’이 아닌 ‘법대로 사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사정대상·목표가 ‘아래로’ 내려보내졌으며 사정 대상자의 반발이 나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검찰­여당이 사정 정보를 공유,기획 의도가 곁들여진 일사분란한 체제로 사정정국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지금은 “사정은 검찰이 주체가 되어,있는 그대로 하는 것”이라는 게 朴智元 청와대대변인의 설명이다. 법과 제도개선을 겸한 사정이냐,그렇지 않느냐는 것도 DJ식 사정과 YS식 사정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 YS정권이 초기 강력한 사정 추진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패정권으로 전락’한 것도 법·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반면 DJ식 사정은 ‘사정·개혁=법과 제도의 완비’로 보고 부패척결의 종착지를 행정규제의 과감한 철폐 등 법과 제도의 확립을 들고 있다. ‘사정의 지속’ 여부도 DJ식 사정의 특징을 가름하는 중요 요소다. YS식 사정은 집권 초기 여론 지지를 업고 ‘요란한 굉음’을 내며 출발하다 ‘용두사미’가 됐다. 하지만 정권 내내 비리있는 곳에 대해 ‘지속적인 사정’을 펼치겠다는 것이 현 최고지도부의 강력한 의지라는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재벌개혁은 국민과의 약속”/朴泰俊 자민련총재 회견

    ◎부채비율 200% 이내로 축소 반드시 지켜야/정치인 비리 철저 추궁… 유야무야 없을것 □대담=安秉峻 정치팀장 “부채가 자산의 500∼600%인 재벌기업이 수두룩합니다.연말까지 200% 이하로 내려야 하는데도 빚을 갚기는 커녕 백화점을 사려는 그룹이 있답니다. 당장 조사하라고 했지요” 자민련 朴泰俊 총재는 지난 1월13일 30대 대기업이 내놓은 5개항을 ‘재벌개혁헌법’이라고 규정한다.그런데도 최근 5대그룹의 1차 빅딜(대규모 사업교환)발표내용은 불만족스럽다는데 金大中 대통령과 인식을 같이 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전일본총리의 의원생활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金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16일 방일하기에 앞서 서울신문 安秉峻 정치팀장과 단독인터뷰를 갖고 경제문제를 포함,정치권 사정을 둘러싸고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정기국회 등 정국 전반에 대해 상세히 답변했다. ○1차 빅딜 내용 미흡 ­지난 주 金大中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 재벌빅딜을 독려하는 책임을 맡기로 했는데 추진 방향은 어떠한지요. ▲사실은 그렇게 거창한 의미는 아닙니다.시장경제에 맡긴다 하더라도 국가적이고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입이나 지도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그 끝에 대통령께서 “朴총재가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관계 부처를 독려하고 기업들과 긴밀하게 대화를 해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소 의미가 증폭된 것 같습니다.구조개혁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기업의 자율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적극적인 자세로 독려할 것은 독려하고,지도할 것은 분명하게 지도해 나갈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와 LG간에 반도체사업을 놓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1차 빅딜부터 진통을 겪고 있는데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 마련입니다.자기 이해관계만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나라 차원에서도 판단해야죠.특히 재계는 일반 국민보다 더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그런 차원에서 결심을 해야 합니다. ○기업 의견 최대 존중 ­연말까지 재벌 구조조정이 안될 경우 정부 개입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까지 결론을 못내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지요.지난 1월13일 5대 그룹이 약속한 5개항은 기업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그것을 지켜야만 구조개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부채비율을 200%로 내리기로 했는데 아직 500∼600%인 기업이 수두룩합니다.우리 기업한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 앞에 약속한 사항을 어기고 있을 때는 심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정정국으로 인해 정기국회가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자민련은 어떻게 대처해 나갈 방침입니까. ▲여권 입장에서 국민회의와 공동 대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사정 정국을 이유로 야당이 정기국회를 보이콧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무조건 국회로 복귀해 산적한 국정현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한나라당은 ‘세풍(稅風)’사건 등을 놓고 표적수사,정치보복 등 시비를 제기하고 있는데요. ▲세풍사건은 저도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그러나 듣기로는 검찰이 기업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사건이라고 합니다.국세청이라는 막중한 국가권력이 특정정당의 선거자금 모금에 악용되는 현상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곧 전모가 밝혀지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일을 정치협상 테이블에 올려 유야무야하고 넘어가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야 영수회담을 주선하거나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와의 단독회동 등 정국 정상화 방안을 모색할 의향은 없는지요. ▲국회의원들의 개인 비리 내지는 국세청을 이용한 불법 대선자금 모금부분이 문제가 아닙니까.어쩌면 야당 총재 자신이 관련되어 있을 개연성도 없지 않은 사안에 대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모양을 국민들이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국민 앞에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한 연후에 비리 관련자들은 검찰로 출두시켜 조사를 받게 하고 국회를 조속히 정상화시키는 것이 문제를 푸는 기본적인 수순이지요.그런 바탕위에서 어떠한 대화도 가능합니다.지금도 막후대화는 진행되고 있고요. ­金鍾泌 총리가 최근 내각제 추진 연기를 시사하는 듯한 언급을 했는데 내각제 공론화는 언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내각제는 국민의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정치적 토대의 하나인 동시에 우리 정치의 궁극적 지향점이 되어야 합니다.그러나 지금은 경제난이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내각제는 국민에게 약속한 제도입니다.대통령께서도 누차 언급하셨듯이 이 약속은 틀림없이 지켜지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각제 연대를 위해 한나라당 李漢東 의원을 영입할 의향이 있는지,있다면 어떠한 대우가 가능하며,최근에 만난 적이 있는지요. ▲야당 내에도 내각제를 지향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고 듣고 있습니다.그런 분들과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는 길이 모색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李漢東 의원은 민정당 시절부터 많은 부분에서 뜻을 같이 하며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평소 안부를 전하는 정도로는 교류하고 있지만 내각제 연대나 자민련 영입을 전제로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내각제 실현 확실 ­국민회의측에서 한나라당 민주계와의 민주대연합 등을 포함한 정계개편설이 나오고 있는데요. ▲여권이 막후에서지원하는 형태로 야당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 선명성 경쟁을 야기해 오히려 정국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던 지난 경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충고해주고 싶습니다.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만 그런 논의가 내각제를 봉쇄하려는 뜻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면 그것은 거꾸로 내각제 논의의 조기 공론화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원화된 공동정부로 인해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국정협의회는 어떻게 운영할 방침입니까. ▲금시초문입니다.국정협의회를 발족시키는 과정에서 다소 생각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마찰 운운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요.지난주 국정협의회는 대단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모든 현안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습니다. ­국민회의측의 정치제도 개선안,특히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대해 자민련 내부에 반대가 적지 않습니다. ▲지역감정을 등에 업고 특정지역을 싹쓸이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일견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어떤 경우든 의원 개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정치개혁안이 좌초되어서는 안됩니다.앞으로 국정협의회에서도 논의되겠지만 정치개혁은 개혁의 시작인 동시에 개혁의 끝이라고 하는 국민정서를 우리 의원들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민정책 실패 짚어야 ­金鍾泌 총리의 영향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당 장악력이 다소 미흡하며,金총리 때보다 총재실 문턱이 높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저는 정치경력이 일천하고 경험도 부족한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이 총재직을 맡고 보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그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분명한 것은 누구든 당을 장악할 수도 없고,장악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총재실 문턱이 높다는 지적은 전임자와 저와의 개성 차이같은 것도 고려해 주셔야하는 것 아닐까요. ­경제청문회를 꼭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金泳三 전 대통령 부자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 모두가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 게 도대체 누구 때문인지를 분명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특정인이나개별 사안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문민정부의 총체적인 정책의 실패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특정인이 청문회에 출석해야 하느냐,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합니다.물론 金전대통령이 5년간 최고 책임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청문회를 진행하다 보면 그 분 얘기를 들어보아야 할 부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분을 반드시 증언대에 세워야 하느냐의 문제는 전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나 국가 체면과 같은 문제를 고려해 신중히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자민련 지지율이 한자리 수에 머물고 있는데 복안이 있는지요. ▲충청지역이 중심이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시급히 전국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길입니다.앞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몇몇 지역에서 보궐선거가 예상되는데 수도권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 당의 정책기능을 보강하고 젊고 패기있는 신인을 대거 발굴해 나가겠습니다. ­자민련 역시 흠 있는 인사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그런 지적은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최근 입당한 車秀明 金學元 金基洙 의원 같은 분들은 지식이나 덕망면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하는 분들입니다.◎朴 총재 회견 후기/金 대통령 신뢰 바탕/여유있게 의견 피력/IMF 극복 의지 강해 인터뷰는 TJ(朴泰俊 총재)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에 이뤄졌다.인터뷰 약속시간을 못지킨 그는 마포 당사7층 총재실로 들어서며 “미안하다”고 말하며 환한 미소로 반갑게 대했다. TJ는 일본에 가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YS집권 후,도피해 4년반을 일본에 묻혀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유쾌한 표정이었다.입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YS는 경제청문회 출석대상자로 거론되고 있고 TJ는 집권공동여당의 실력자다. 대통령의 그에 대한 신뢰는 대단하다.매주 한번 이상 단둘이 회동을 한다. 경제개혁 현안을 논의하는 것이다.TJ의 발언은 대통령의 뜻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의 97년 대선공조는 사실 ‘朴泰俊이라는 포철신화를 일으킨 경제전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金大中 著 ‘나의 길 나의 삶’).때문에 현정권에서 TJ의 위치는 확고하다.개혁의 강력한 핵심이다.재벌의 빅딜 등을 주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동안 줄곧 자신만만·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포철신화처럼 IMF터널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의지가 읽혀졌다.
  • 고어 美 부통령 ‘클로즈 업’/클린턴 성추문 확대로 급부상

    ◎“위대한 대통령” 추켜세우며 미소/11월 중간선거 유세 모시기 경쟁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라는 속설을 새긴 뒤 출근할 판이다.클린턴이 구겨질수록 고어의 몸값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이리저리 주판알을 퉁겨봐도 악재가 안 나온다.서로 모셔가려고 난리인 이럴 때일수록 정치인의 직감이 더욱 고개숙이라 타이른다. 스타 보고서가 인터넷에 공개돼 클린턴이 세계적 망신을 당한 뒤에도 고어는 대통령 곁을 지켰다.지난 11일 조찬기도회에서 “클린턴은 위대한 대통령,위대한 친구”라고 지원사격했고 12일 오리건주 민주당 유세에서는 “클린턴의 지도력이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왔다”며 나팔수 노릇을 자청했다. 저러다 클린턴과 함께 무너지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고어의 자신감엔 근거가 있다. 고어를 2000년 대선 후계자로 지명한 클린턴은 스타 보고서 파란을 겪으며 고어에게 더욱 의존하게 됐다.성추문 조사가 시작된 뒤 고어 전문인 환경·기술정책은 완전히 손아귀로 넘어왔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클린턴은 아직 정부 수장이며 민주당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다.스타 보고서가 공개된 뒤에도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 열의 예닐곱이 “탄핵은 안된다”고 할 만큼 기본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밉보여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입장은 좀 다르지만 민주당 원내총무 리처드 게파트가 ‘사건’ 터지고 줄곧 클린턴과 거리를 둬온 것과 고어의 ‘의리’는 대비되는 게 사실.이목구비 뚜렷한 미남 부통령이 만신창이 대통령을 끝까지 감싸 안는 모습을 나쁘게 보기만 할 이는 많지 않다. 공들인 클린턴이 탄핵된다 해도 걱정없다.곧바로 대통령 직무대행이 돼 대선전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어떻게 돌아가도 화창한 앞길이다. 걸리는 것은 96년 대선자금 유용 혐의 정도.하지만 이를 문제삼는 민주당원들은 없다.오히려 11월 총선 유세에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다.썰렁한 클린턴 문전과 대조적이다. 지난 주말 태평양 서북부 순환유세에 이어 고어는 이번주 14일 뉴욕 선거자금모금 집회와 18일 뉴햄프셔주 유세장을 찾아간다.대통령 예비선거 테이프를 끊는 뉴햄프셔를 거치며 고어가 ‘준비된 대통령’감으로 완전히 자리잡을지 주목거리다.
  • 因果를 안다면/知詵 스님·백양사 주지(서울광장)

    산행을 하면서 보니 올 가을 단풍은 그렇게 곱지는 않을 듯싶다.엘니뇨 현상으로 여름내내 비가 많이 내려 이 땅 곳곳에 수해가 나더니 결국은 나무잎새마다 햇빛 공급량이 적어진 까닭인 것 같다. 농작물도 남북이 다같이 풍성한 수확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금년 가을·겨울이 풍요롭지 못하게 되니 인심도 각박해질 것 같다.가뜩이나 IMF 한파로 경제가 어렵고 실직자 문제가 심각한데 수해로 인한 피해 또한 엄청나니 예전 산행 때보다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우울한 북한 소식이나 남한 정치권의 부정 비리 인사에 대한 전례없는 사정 소식이 이 가을을 더욱 슬프게 한다. 어찌 보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세상살이로 너무도 혼란스럽고 무가치해 보이곤 한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한층 불행해지는 현실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인과응보의 모습인 것이다.의식주가 해결되면 참가치로만 살아가야 하건만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비판뒤에 실천은 없어 요즘 사회가 점점 어렵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몇 가지만 얘기한다면 첫째로 사람들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부와 권력,즉 부귀영화를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되고 유치한 인생관이 그것이다. 도덕윤리는 그만두고 간단한 공공질서 하나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대개가 개인의 영적 위안만 기구하는 데 안주하거나 신앙의 대상에 매달려 부귀영화를 비는 기복신앙으로 흐른다.아는 자와 가진 자들의 신앙에는 지적 호기심이나 고급 취미,대형 집단에의 소속감으로 흐르는 경향마저 있다. 이런 것이 나쁘다고 매도하려는 소리가 아니다.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의 현실고(現實苦)를 먼저 나서서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이다.잘못된 현실에 대해 분석과 비판은 잘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며 개혁하려는 실천력이 담보되지 않아 이 잘난 사람들은 너무 비과학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다(모른다)는 점이다.지구 온난화,이상기온,환경공해,IMF,수해,부정비리및 사회병리 현상 등 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지은 업의 필연적 결과다.그런데도 스스로 지어낸 과보를 남들에게 떠넘긴다. ○IMF·수해도 필연의 결과 비리 정치인들을 보면 인과응보가 내생에까지 가지 않고 현생에 이뤄지고 있어 ‘스피디한’ 세상에 걸맞은 법칙처럼 보인다.그들은 과보를 빨리 받아서 좋고 현정권의 더딘 개혁에 복통이 날 지경이던 서민들은 시원해서 좋다. 잘 나가던 때 죄업 많이 지은 정치인들이여,과보 받을 준비를 미리 하시라. 그간의 분단 독재 체제 속에서 지역감정 이용,각종 조작과 부정부패 등으로 일신의 영달을 일궈온 변신의 천재들은 발악같은 변명을 그치고 인과의 역사 앞에서 참회할 일이다.모든 사람들이 앞으로도 인과를 불신하면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윤회라는 것도 긴 질서와 다름 없다.과거를 반영 못한 현재,현재를 바탕하지 않는 미래는 없다.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올바른 질서(道)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예외 없는 인과의 법칙에 우리 모두가 겸허해지는 가을이 되자.
  • 엎친 ‘稅風’ 덮친 ‘舌風’/갈등정국 어디로…

    ◎서로 부담/금주 고비/여도 곤혹­정치공세로 사건본질 희석.공들여 영입한 의원 연루설.국회파행 장기화도 원치않아/야는 초조­물증 속속 드러나 대응 한계.개인비리 흘리며 ‘몸통’보호.정치보복 몰고가기 안간힘 ‘점입 꼴불견’으로 치닫는 세풍공방이 이번 주에도 계속 정가의 발목을 잡고 있다.검찰수사를 야당탄압으로 몰아가는 한나라당의 입은 거칠다.국가원수를 향한 패설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국세청을 통해 모금된 돈이 한나라당을 경유해 야당의원 10여명에게 전달된 사실을 확인한 검찰은 徐相穆 의원의 체포동의서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누가 뭐라고 하든 ‘물증으로 말하겠다’는 태도다. 검찰은 방증수사를 끝내고 이번 주부터 사건의 본론에 치중할 것 같다.개인범죄냐 조직범죄냐,누가 주범이고 종범인가,그리고 당 지도부의 사전 혹은 사후 인지 여부를 가린다는 것이다. 지난주 ‘야당 탄압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장외로 뛰쳐나간 한나라당은 정치공세만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을 계속 구사할 듯.이번 사건을 대선자금 수사로인식시키고 정치쟁점화하는 데 더욱 치중할 것이다.정치보복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불안한 표정은 어쩔 수 없다.물증이 속속 드러나는 마당에 ‘야당탄압’이라고 목청만 높일 수 없기에 그렇다.당 일각에서 슬쩍 “徐相穆 혹은 국세청장의 개인비리”라고 흘리는 이유가 그것이다.‘꼬리’는 잘라주고 ‘몸통’은 살리고 싶은 것이다. 국민회의는 복잡하다.야당의 정치공세로 사건의 본질이 희석되는 것을 막느라 여념이 없다.그런 한편 林采柱 전 국세청장과 李會昌 총재의 접촉 개연성을 들어 ‘李총재 몸통설’을 제기하는 공세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발 뻗고 잘 형편은 못된다.검찰의 저인망식 수사가 여야 의원의 개인비리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기 때문이다.중진의원 연루설이 끊임없이 나돌고 힘들여 영입해 온 의원마저 소환설이 나돌아 더욱 난처해한다.그래서 국민회의는 ‘세풍’과 같은 국가기강 문란 사건과 개인비리 사건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정기국회 파행도 부담이다.검찰의 사정(司正)이 계속되는 한 야당을 국회로 불러들일묘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내부사정을 업고 여권 내부에서 슬그머니 정치논리가 제기된다.어쩌면 여당의 정치논리와 야당의 몸통보호가 맞아 떨어지는 타협이 이뤄질 수도 있다.정가의 관측통들은 이번 주말쯤 정상화 가닥을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여야 모두 파행 장기화에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다만 세풍사건과 저질발언 시비 해법에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하는 것이 문제다.그나저나 지금은 정기국회 회기중이다.이러다 국정감사가 장님 병아리 세듯 넘어가지 않을지 걱정이다.
  • 일자리 1만6,000여개 ‘空席’/3D 업종 구인·구직 현황

    ◎불법취업 외국인근로자 자리 합치면 25만명/업주들,이직 잦고 인건비 비싸 내국인 기피 하루 4,000여명의 실업자가 속출하는 실업대란 시대에도 구인난에 시달리는 업체들이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주요 직종의 취업알선 통계에 따르면 3D 업종으로 꼽히는 외판원은 구인자 1,959명에 구직자 560명,고무·플라스틱 제조기계조작은 구인자 926명에 구직자 806명,금형·용접·판근은 구인자 6,117명에 구직자 2,594명으로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3D 업종 전체적으로는 1만6,000여명분의 일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경기도 안산 675개 업체 3,393명,수원 525개 업체 2,600명 등 수도권 6개 도시의 외국인 연수생이 2,402개 업체에 1만893명이 근무하고 있는 등 전국적으로 불법취업자까지 포함하면 23만여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취업하고 있다. 산술적으로 따진다면 3D 업종의 인력부족분과 외국인 근로자들을 내국인으로 대체한다면 당장 실업자 25만명을 해소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업률을 1.2%포인트 가량 낮출 수 있는 수치다. 정부는 이를 위해 외국인 근로자를 내국인으로 대체하면 기본금 5,000만원에 1명당 3,000만원의 운전자금을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에 연 9% 내외의 저리로 지원하고 있으나 지난 7월 말 현재 881명의 대체고용의 실적을 올린 데 그치고 있다. 정부는 또 3D 업종으로 취업을 유도하기 위해 장기 저리로 작업환경개선 지원금을 융자해 주고 있으나 그 실적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말하자면 업주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 인력난을 해소하겠다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데다,실업자들도 3D 업종의 취업을 기피함에 따라 이같은 현상이 빚어진 셈이다. 업주들은 당장 기업을 운영하기도 힘든 판에 아무리 싼 이자로 빌려준다 하더라도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등 설비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항변한다. 또 내국인 근로자들을 채용해봤자 한달이내로 70% 이상이 이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임금수준도 낮고 직장 이탈률도 낮은 외국인 근로자가 월등히 낫다는 것이다. 결국 3D 업종의 구인난을 해소하려면 실직자들 스스로 눈높이를 낮추는 것못지않게 제조업체 생산직 실직자들이 3D 업종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게 작업환경개선 지원금의 지원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등 여건을 개선하는 데 정책의 우선 순위가 두어져야 할 것 같다.
  • 가수 정태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9)

    ◎‘규제’ 뛰어넘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진솔­고단한 민중의 삶 대변/78년 첫음반부터 시련의 길/기득권 비리에 ‘민주대열’로 ‘가요 사전심의’ 정면대결/마침내 위헌판결 승리가 지난 96년 6월 어느 날 서울대 문화관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결정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출연한 가수 20여명이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특히 90년도부터 공연윤리위원회(공륜)와 정면대결을 벌이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가수 鄭泰春씨(44)의 감흥은 남달랐다. 78년 ‘시인의 마을’‘촛불’로 데뷔한뒤 인기를 끌었던 鄭씨는 시골 아저씨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가수겸 작곡가. 그러면서도 시적인 언어구사와 현실에 대한 직설적 묘사로 왜곡된 대중문화의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게 특징이다. 절실한 삶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내온 만큼 ‘노래하는 음유시인’‘운동권 가수’ 등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다양하다. 지난 4월 제9집 ‘정동진’을 낼 때까지 어느 것 하나 평탄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외로운 투쟁 끝에얻어낸 가요 사전심의 철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과 93년 두차례에 걸친 사전심의 거부 운동은 공륜을 상대로한 전쟁이었고 이 과정에서 음악 포기를 생각하기도 했다. 90년 사전심의 거부 운동은 사실상 하루아침에 불거진 것이 아니다. 두차례나 비합법 음반을 내고 사전심의 거부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자청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은 첫 음반을 낼 때부터 쌓였던 불만의 결과였던 것이다. 78년 낸 첫 음반에 대한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그 단초다. 음반자체가 통째로 심의보류에 걸렸다. 노래 ‘시인의 마을’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대목이 부정적이라는 인식을 받았다. 이미 발표된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는 핑계였다. 시 확인이 안되자 ‘전면개작지시’로 돌아섰다. 사실상의 심의 탈락이었다. 결국 레코드 사장이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꿔 심의에 통과할 수 있었다. 鄭씨는 문제의 음반에 실린 노래 ‘촛불’로 그 이듬해 문화방송 10대가수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88년 합법음반 6집 ‘무진 새노래’를 낼 때까지 전면개작지시를 받은 것이 10곡,부분개작 지시를 받은 것은 20여곡이나 된다. 음반을 낼 때마다 공륜과 끊임없는 실랑이를 벌였다. 심의에서 본래의 의도가 거듭 좌절되면서 방송에서도 멀어졌고 차츰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85년부터 부인 朴恩玉씨와 함께 ‘鄭泰春 朴恩玉의 얘기 노래마당’이란 타이틀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87년부터. “당시 청계피복노조 젊은 노조원들과 어울리면서 좀더 실천적인 활동을 찾았지요”. 87년부터 시작한 현장운동은 6·29이후 운동권 진영으로 치달았고 89년엔 전교조 지원을 위한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갖고 전국을 순회해 20만명 이상을 만났다. 이미 대중가수의 이미지는 멀어져 있었다. “물론 내가 직접 선곡해 수록한 2집음반과 국악풍의 노래만 실은 3집 음반의 반응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격변기 민주화운동의 거센 물결속에서 내가 거들 수 있는 몫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리고 90년 마침내 정면대결로 들어간다. 사전심의 철폐운동이 그것이다. 당국의 사전심의에 통과되지 못한 반민족·반민주 세력에 대항하는 노래들을 묶은 비합법 테이프 ‘아 대한민국’을 내고 심의거부와 판매에 들어갔다. “가요사상 첫 사전심의 거부였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정부의 간섭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89년 이후 해금의 분위기에서 큰 제재를 받지 않았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93년 또 한차례 정면투쟁. ‘92년 장마,종로에서’라는 제목의 불법 테이프 발매가 그것이다. 이때는 90년과는 달랐다. 문화부 지시에 따라 각 시도 경찰서로 “鄭泰春 朴恩玉 음반을 회수하라”는 공문이 돌았다. KBS 지방홀과 서울 새마을체육관 등 공공성격이 짙은 곳에선 여지없이 판매저지가 있었고 제지가 들어왔다. “테이프를 팔면서 ‘창작표현의 자유만세’란 문구를 붉은 스탬프로 찍었는데 ‘왜 빨간색이냐’면서 파란색 스탬프로 다시 찍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93년 음반은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았던 90년 음반에 비해 오히려 평이하고 서정성이 짙은데도 상황은 더욱 급박했습니다” 93년말 문화부의 고발이 있었고 그 이듬해 1월 ‘음반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서울지검 형사6부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다. 그리고 세차례의 재판이 이어졌다. 鄭씨도 맞대응했다. 그해 3월 서울형사지법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5월 위헌제청이 됐다. 그로부터 2년 1개월만인 96년 6월 마침내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난해엔 부인 朴씨와 함께 그렇게 별러오던 첫 공식 콘서트를 ‘사랑하는 이에게’란 타이틀로 6개 도시에서 열수 있었다. ◎사연들/짙은 서정성의 ‘92년 장마,종로에서’/‘아 대한민국’보다 더 핍박/시의 좇는 제도 허점 드러내 78년 데뷔곡들로 성공한뒤 국악을 도입한 80년의 새 음반 2·3집에서 거푸 외면당한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듭된 심의싸움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예상외의 반응에 부닥쳤던 것이다. 결국 관객들과 직접 마주치고 싶어 85년부터 3년에 걸쳐 전국순회공연에 나섰다. ‘鄭泰春 朴恩玉의얘기노래마당’이 바로 그것이다. 제도권 음악에 대한 회의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93년 두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종로에서’를 낸 뒤엔 더욱 실의가 컸다. 불법 테이프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판매가 막힌데다 운동권 진영의 판매망이 거의 사라져 테이프 판매는 사실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에 공륜과의 외로운 싸움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가요 사전심의에 대한 헌법 재판소의 결정이 계속 미루어진 채 결과에 대한 긍적적인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90년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의 노래말들은 그래서 절절하기가 말할 수 없다. 기득권의 비리와 정부의 폭력성을 꼬집은 ‘아 대한민국’,87년 조선대생 李哲揆군 사망사건을 담은 ‘일어나라 열사여’,기성제도권 문화의 허위의식과 비열한 사치성을 꼬집은 ‘인사동’,지하 전셋방에서 화재로 질식사한 두 어린이의 죽음을 묘사한 ‘우리들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모두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 각인된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오히려 93년 발표한 두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종로에서’는 90년의 ‘아 대한민국’ 보다는 훨씬 서정성이 짙은 편. 갓 시집온 새댁의 심정을 담은 ‘양단 몇마름’,소시민들의 메마른 모습을 관조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늙은 농부의 모습을 통해 고향의 한가로운 모습을 담은 ‘저 들에 불을 놓아’ 등 언더그라운드 포크계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 첫 비합법 음반을 냈을 때 보다 93년 두번째 비합법 테이프에 대한 관계당국의 압박이 훨씬 컸던 것은 심의의 일관성 결여와 시의에 치우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길 ▲54년 경기도 평택 출생 ▲72년 평택고등학교 졸업 ▲75년 군 입대 ▲78년 ‘촛불’‘시인의 마을’로 데뷔 ▲80년 박은옥씨와 결혼 ▲85년 ‘정태춘 박은옥’ 전국순회공연 ▲87년 문예운동 진영에서 활동 ▲89년 11개월에 걸쳐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순회공연 ▲90년 ‘아 대한민국’ 발표 ▲93년 ‘92년 장마,종로에서’ 발표 ▲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 ▲97년 5월 서울 정동 문화예술회관서 포크콘서트
  • 기아 부채원금 2조9,210억 탕감/채권단 2차 입찰조건 발표

    ◎이자 등 총 7조8,590억 감면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의 채권 금융기관들은 이들 회사에 대한 2차 입찰에서 2조9,210억원의 부채원금을 탕감해 주기로 최종 결정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두 회사의 부채원금중 2조9,210억원을 비롯,부채총액 11조8,580억원의 66.3%인 7조8,590억원을 감면키로 채권금융기관들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1차 입찰때 제시한 조건(6조5,598억원)보다 1조2,992억원(19.8%)이는 수치다. 구체적 부채탕감은 △원금면제가 2조9,210억원 △이자율 및 상환기간 조정을 통한 감면이 2조7,767억원 △보증채무 면제 2조1,613억원 등이다.이에 따라 낙찰업체는 추후 채권금융기관에 3조9,990억원만 갚으면 된다. 업체별 탕감액은 기아자동차의 경우 상환대상 채권 9조1,264억원의 66.6%인 6조826억원,아시아자동차는 상환대상채권 2조7,316억원의 65.0%인 1조7,764억원의 부채가 탕감됐다. 산업은행 朴相培 이사는 “지난 6월30일 현재 두 회사의 부채초과액은 5조1,652억원인데 2차 입찰에서 5조6,977억원을 감면했기 때문에 5,325억원의 순자산이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며 “두 회사가 조기 정상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기아 입찰사무국은 2차 입찰 의향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국내 3사와 미국의 포드자동차 등 4개사가 의향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입찰 참가 자격을 가진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의향서를 내지 않았다.
  • 기아 재입찰 “출발이 좋다”/2차 입찰 어떻게 될까

    ◎현대·대우·삼성·포드 의향서/부담 줄어 낙찰 가능성 높아 기아·아시아자동차 채권단이 오는 21일로 예정된 재입찰에서 2조9,210억원의 부채를 탕감해 주기로 10일 결정함에 따라 1차 때와 같은 유찰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게 됐다. 그동안 입찰참가업체들은 “부채 탕감액이 최소한 부채의 자산 초과분보다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이같은 요구가 이번에 어느 정도 수용된 셈이다.원금 탕감액과 이자율 및 상환일정조정을 통한 경감 효과를 합하면 5조6,900억원으로 부채의 자산 초과분을 5,325억원 넘어선다.입찰업체 관계자는 “부채 탕감의 규모는 미흡하지만 기아의 새 주인을 신속히 결정,정상화시키기 위한 채권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반겼다. 그러나 그만큼 입찰 참가를 선언한 현대 대우 삼성 포드의 4파전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1차 때에 비해 보다 ‘진지해질’ 전망이다.1차 때는 업체들이 추가부채 탕감을 노려 자동 탈락임을 알면서도 ‘조건’을 제시하거나 응찰가를 기준 이하로 제시했다. 특히 응찰가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됐다.부채 부담 완화로 응찰가를 쓰는데 다소 여유가 생긴데다 서로의 전력이 노출된 1차 입찰 결과 응찰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대동소이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업체별로는 1차 때 가장 높은 응찰가를 써냈던 삼성의 전략에 관심이 모아진다.삼성은 1차 때 2조4,000억원의 부채 탕감을 요구한 적이 있어 이번 채권단 결정을 가장 내놓고 반기는 상태. 1차 때 기아 100원,아시아 10원의 ‘터무니없는’ 가격을 써내 인수 의지자체가 의심받았던 현대는 이번에는 ‘성의있는’ 응찰을 준비하고 있다.현대 관계자는 “이번에는 액면가 이하로 쓰거나 조건을 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우는 이번에도 단독응찰키로 하고 시내 모처에서 필승 전략을 마련중이다. 포드의 응찰 여부도 주목된다.1차 때 “기아의 적정 부채는 4조원”이라고 주장하며 나머지 8조8,000억원의 탕감을 주장했던 만큼 이번 채권단의 결정을 미흡하게 여기고 있지만 다소 무리한 응찰가를 쓰는 한이 있어더라도 기아 인수에 총력을 다할 전망이다. 그러나 유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다.탕감액이 부담을 떨치기에는 아직도 과중하다는게 업체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기아 입찰사무국은 이날 의향서를 낸 4개사에 대해 11일 입찰 기준서를 전달하고 오는 21일 응찰서를 접수,28일 최종 낙찰자를 발표한다.
  • 민주열사 열전:6/尹祥源 5·18시민군 대변인(정직한역사되찾기)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몫/은행원서 노동운동가로… 광주야학 주도/5·18 鬪士 회보 제작·배포… 막힌 언로 틔워 80년 5월28일자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있었지만,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80년 5월26일 있었던 광주도청에서의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의 모습을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이렇게 그렸다.기사에서의 ‘그’는 항쟁지도 부인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尹祥源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반신이 불탄 시신으로 공개됐다.계엄군은 그를 성명불상자로 처리했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10여개의 외신기자 명함은 그가 대변인 尹祥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尹祥源은 5월 항쟁이 터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민주화의지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그리고 그가 이끌던 ‘들불야학’ 강학(교사)들과 함께 각종 유인물을 대량 제작해 뿌렸다.19일 항쟁관련 첫 호소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을 새워 지휘했다.언론이 눈을 감고 있던 당시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됐다.시민들은 항쟁의 의미를 깨달았고 투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투항적 자세를 보여온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이끈 이도 그였다.그는 각계 각층이 참가한 광주항쟁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이것은 당시 신군부와 얼어붙은 언론에 의해 규정된 ‘폭동’이 ‘민중항쟁’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데 실마리가 됐다. 대변인 尹祥源은 26일 밤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설득했다.“우리들이 싸울테니 집으로 돌아가라.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마틴브래들리 기자는 이때의 尹祥源 모습에서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양현씨의 말대로 그는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민주투사’란 수식어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尹祥源 열사는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다.어려운 살림에 중학교때부터 광주시내에서 하숙을 했지만 부모님 기대에 부응치 못했고 고등학교때는 ‘에덴클럽’이라는 질이 안좋은 서클에 가입해 술과 담배를 하기도 했다.삼수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공부보다는 연극활동과 친구들 사귀는데 1학년을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그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 선배를 만나고부터였다.복학후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친구 소개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던 전남대 2년 선배 金相允(50·하실의료기상사 대표)을 만났다.그때부터 尹祥源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대학인의 정당한 삶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金相允과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리했다.“5·18이 터지자 마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상무대 영창에서 상원의 죽음을 알았어요.그후 오랫동안 祥源이가 도청옥상에서 총을 맞고 저를 부르며 죽어가는 환시현상을 겪었습니다” 金相允씨의 회고다. 졸업후 현실에 떠밀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근무하던 은행원 尹祥源은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자신만을 바라보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그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란 편지를 부모님께 썼다.그리고 광주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하고 광주 광천공단 지역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완숙한 노동운동가가 된다. 들불팀은 야학 운영 외에도 광천공단의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으며 지역 주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그리고 이들은 5·18이 터지자 항쟁 내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尹祥源 열사는 들불에서 후일 천상(天上)의 부부가 될 박기순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전남대 휴학생이던 그녀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그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박기순씨는 선배 尹祥源이 들불의 중심이 될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몇군데가 얼룩져 있는 12월 27일 일기장에 尹祥源은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순에 대한 애타는 추모의 마음을 적어놓았다. 82년 2월,5·18 항쟁에서 살아남은 후배들은 유족들과 함께 尹祥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을 불러 혼례의 예식을 치렀다.이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黃晳暎씨가 노랫말을 붙였다.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이 노래와 함께 두 젊은 넋은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언제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공장다니며 학비 대던 동생들 모두 출가/맏아들 가슴에 묻고 부모님만 생가 지켜 尹祥源 열사는 역사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죽음은 육친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87년 광주광역시로 편입됨) 尹열사 생가.그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자란 이곳에는 부모님이 2남4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金仁淑씨(67)는 그저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아버지 尹錫同씨(72)도 몇차례나 재촉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려오자 기가 막혔지요.동생들은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낮에 공장에 다니며 야간고를 다녔는데 노동운동이라니….자식취급을 안하겠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돈을 벌어 남을 도우면 되지 않느냐고 달래기도 했지요.그랬더니 ‘그래서 몇사람이나도와주겠느냐.구조적 모순을 고쳐야한다’고 하더군요” 尹씨는 “오히려 동생들이 공장에 다니며 터무니없는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 祥源이를 부채질한 것 같다”고 했다. 尹열사 대학 시절 광주시내에서 함께 자취를 했던 남동생 정원씨는 “형은 제 갈길을 훌륭히 갔다”고 담담히 말했다.역시 같이 자취를 했던 여동생 현희씨는 “늦게나마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위안이 된다”고 했다.정원씨는 당시 조대부고 야간부에 다니며 낮에는 자전거 배달을 했고 현희씨는 야간상고에 다니며 맥주안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이들은 대학생인 祥源에게 용돈까지 주고 밤을 새워가며 시위 유인물 제작을 돕기도 한 착한 동생들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林洛平씨/“독재 뿌리뽑는게 산자들의 참된 의무” “도망갔던 사람이 무슨…” 林洛平씨(41·광주 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아주 겸연쩍어 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尹祥源 열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그지만 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18일 광주 인근 친구집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그는 尹열사의 평전 ‘들불의 초상’을 정리했다.“18일 공수부대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시내를 장악하자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으로 보았지요.27일까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林씨는 尹열사를 비롯한 들불팀이 5·18이 ‘사태’나 ‘폭동’이 아닌 ‘항쟁’ 이게끔 계기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했다.항쟁초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홍보·선전활동은 간접적인 지도부가 됐고 너나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尹열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민중적 품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원칙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고.“방년 29세 尹祥源입니다”란 첫 인사로 7·8세나 어린 들불 강학들에게 스스럼 없이 녹아들어 이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됐다고 한다.그가 뽑아대는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의 구성진 가락은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했다. “祥源이형은 5·18이 부마항쟁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결과를 뻔히 예측하면서도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를 바랐던 겁니다” 林씨는 그가 남긴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다시는 독재가 발을 못붙이게 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산자들의 참된 의무라고 했다. ◎尹祥源 열사 연보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출생 ▲63년 임곡초등학교 졸업 ▲69년 광주 사레지오고 졸업 ▲71년 전남대 정외과 입학 ▲72년 군입대.상주에서 일반하사로 복무 ▲75년 복학 ▲78년 주택은행 입사.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주 광천공단내 한남플라스틱공장 취업.들불야학 참여. ▲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 피선 ▲80년 5월19일 들불야학팀들과 함께 항쟁 호소 유인물 제작·배포 시작 ▲80년 5월25일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항전중 사망
  • 의원 출두불응에 검찰 “무리수 없다”

    ◎사전영장 청구한 다음 체포동의안 제출키로/액수 미미한 다른 정치인 불구속기소 택하기로 검찰이 휘두르고 있는 정치권 사정의 ‘칼날’을 정치인들이 국회회기 중불체포특권이라는 ‘방패’로 대응하고 나서자 이들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 수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일단 7일 출석토록 통보한 한나라당 徐相穆 의원이 아무런 설명없이 출석하지 않자 오는 9일 다시 출석해 달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차례 소환장을 보내 출석을 요구하고 계속 거부할 경우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뒤 최종적으로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제출하는 ‘정공법’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8일 소환키로한 한나라당 白南治 의원을 비롯,체포영장이 발부된 한나라당 吳世應 의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리수는 절대로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검찰이 이처럼 정공법을 택한 이유는 사정대상의 정치인이 주로 야당의원 이어서 표적수사나 정치보복이라는 비난과 정치권의 시비를 피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물론 국회 회기중 불체포특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출두하기 전에 구속하려면 영장전담 판사가 체포동의안을 국회에 보내 국회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검찰은 또 이들 정치인 외에 비리혐의가 추가로 드러난 4∼5명중 뇌물액수가 미미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불구속기소하는 방식을 택해 ‘법원의 심판’을 기다릴 방침이다. 이처럼 비리 정치인들에 대해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불구속기소하면 이들의 비리가 자연스럽게 공개되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또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정치인들이 스스로 검찰에 출두할 수도 있을 것이란 판단도 하고 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 여론을 등에 업으려는 검찰의 사정에 정치권이 언제까지 묵묵부답일지가 미지수다.
  • 발레리나 金民嬉(이세기의 인물탐구:181)

    ◎마음의 향기 뿜어내는 ‘춤 전도사’/자기혁신 끝없는 시도 ‘20세기 파격’ 베자르 설립 벨지움무드라에서 수업/舊習에 갇힌 우리 무용계 안타까움을 작품에 溶解 “무대는 내영혼의 피난처”/윤동주 그린 ‘또다른 고향’ “번뜩이는 무용언어” 好評 추상회화 절제美 배운다 ‘베자르는 나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 이는 발레리나 金民嬉의 신조다. 김민희는 대학교수이자 무용이론가이며 무용콩쿠르 심사위원, 국제세미나 질의자로서 탁월한 행정력을 지닌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그가 신처럼 여긴다는 20세기의 대표적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베자르는 지난 66년 도쿄 스포츠경기장에서 거대한 군중을 상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는가 하면 ‘가부키’에서는 47인의 사무라이를 할복자살케 함으로써 섬뜩한 피날레로 세계를 경악시킨 장본인이다. 바로 김민희는 베자르가 설립한 국제예술원 벨지움무드라(MUDRA) 출신으로 한국 무용가로서는 베자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무용가이기도 하다. 형식과 틀에 머무르기 보다 자기속에서 끝없는 혁신을 시도하는 그의 안무는 마치 자신이 베자르인듯이 언제나 신선하고 이채로운 무대를 꾀한다. 공연장에 대한 개념도 개방적이다. 극장무대만을 고집하기보다 선상(船上)이나 해변, 야외 성당 등 공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공연하여 그의 ‘춤의 창작성’이 어떤 제약이나 규격에서 탈피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침묵속에서 춤추거나 혹은 북의 리듬만으로 춤추고 토슈와 맨발을 뒤섞어 놓거나 튀튀나 발레드레스가 아닌 종이옷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만년 현역으로 뛰는 다른 무용수들과는 달리 새털같은 가벼움과 냉엄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새파란 젊은이들을 무대에 세워 춤의 완성도를 향한 감연한 정열을 불태운다. 내가 만든 춤이 과연 어떤형태의 퍼포먼스로 관객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관객의 심장의 과녁에 확실한 메시지를 꽂아야만 비로소 ‘해냈다’는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아무리 창조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안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자세로 에너지가 분출하고 감동이 우러나오는 살아있는 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안무가도 무용수도 작곡가도 아니면서 발레 뤼스를 통해 미하일 포킨과 니진스키를 길러낸 디아길레프처럼 거대한 화면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 역시 무용을 총체적 예술로서 관장하는 위치다. 초기에 선보인 ‘나의 일기’와 ‘파우스트’‘파키타’가 전통발레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92년 춤의 해에 선보인 ‘헨델을 위한 무브먼트’는 모던발레의 힘찬 도약과 현란한 파드되의 직조가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시인 윤동주의 삶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또다른 고향’은 대서사시적 무용극으로 긴 침묵과 물방울 소리, 감옥의 창살 사이로 맹렬한 뜀뛰기와 휘어지는 도약, 교묘한 리프트를 실행하는 날아다니는 육체의 행렬로써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작품은 95년 서울국제무용제에서 대상·안무상·연기상·무대미술상을 휩쓸었고 평자들은 ‘번뜩이는 무용언어와 강한 캐릭터가 꿈틀거리는 수작중의 수작’으로 평한바 있다. 무용계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김민희는 묵화와 꽃꽂이연구가로 유명한 여류원로 田聖淑씨(83)의 2남4녀중 막내. 어머니의 ‘정성의 결정체’라 할만큼 아버지를 일찍 여읜 막내딸을 위해 어머니는 아직 6살이 채 못됐을 때부터 중구 회현동에 있던 동네 무용학원에 데리고 다녔고 금란여고를 거쳐 이대무용과에 입학할 때까지 간곡한 격려와 채찍으로 딸의 성장을 지켜왔다. 대학에 입학하던 67년부터 홍정희 육완순 교수의 작품에 출연,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면서 대학재학중이던 70년에 벨지움무드라에 유학하여 요가나 명상, 파드되 클래스에서 타악기 리듬을 집중적으로 몸에 익히는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 그때 그는 ‘발레란 육체를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속과 마음속의 향기를 뿜어내는것’임을 깨달았고 베자르가 말한 ‘춤이란 댄스의 개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학에서 돌아오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허탈감과 무기력증을 극복하지 못한채 한동안 무용계에서 잠적해버렸다. 만약 그때 무드라에서 배운대로 춤추었다면 당시의 한국의 발레풍토에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우려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춤에 미치고 싶다’는 욕망과 ‘너무 늦었다’는 압박감에 시달릴때도 어머니의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충고에 따라 긴 공백을 깨고 분연히 일어나 무용계에 컴백했다. 매끄럽고 반복적이며 소박하고 학구적인 춤의 본능이 몸속에서 다시 되살아나자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안무가로서의 자신의 방향을 정하고 우리의 발레가 지나치게 구태의연하고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자신의 작품에 용해시킬 수 있었다. 그가 클래식 발레에 바탕을 둔 창작발레를 고집하는 까닭은 춤을 댄스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며 제자들에게 ‘진실한 예술가의 자세’와 ‘왜 무용을 해야하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무가로서 세계적인 이르지 키리얀과 윌리엄 포사이드의 창작세계를 분석하면서 ‘무용을 통해서 지상에서 가장 최상의 아름다움과 만나게 되는것’에 충실하게 되었다. 프랑스 신세대의 명망있는 안무가인 마기 마렝이 벨지움무드라의 동기생이고 김복희 김화숙은 이대동창이다. 가족은 사업을 하는 부군 崔勝雄씨와의 사이에 아들만 형제, 성격은 윤동주의 시처럼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편이며 구상이 끝나면 한곳에 집착하지 않고 의외성이 분출될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심이 대단하다. 무대는 ‘사람이 자기 영혼의 정확한 크기를 발견할 수 있는 이세상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신념에 따라 그의 최근의 안무는 하나의 장르에 예속되기 보다 근육의 움직임을 활용하는 이미지쪽에 치중하는 경향이다. 발레안무의 낡은 부대에 폭발적인 포도주를 쏟아붓기보다 흐르는 듯한 이미지와 태초의 빛,묵도(默禱)의 종착역에 다다를 때까지 그의 움직임은 추상회화의 생략과 절제처럼 여백의 미를 창출하는 시기다. □그의 길 ▲1967년 이화여대 무용과입학, 홍정희 발레공연출연 ▲1970­71년 국제예술원 벨지움무드라(MUDRA)장학생 수학 ▲1972년 이대졸업(발레전공) ▲1977·78년 독일 요한크랑코발레스쿨및 모나코 댄스아카데미연수 1981년 이화여대대학원 졸업 ▲1984년 하버드대 댄스센터연수 ▲1987년 창작발레 ‘나의 일기’ 공연 1988­현재 대한무용학회이사 ▲1989­현재 한양대 교수 ▲1989년 김민희발레공연 ▲1989­97년 한국발레협회이사 ▲1990년부터 해마다 ADF(아메리칸 댄스페스티발)연수 ▲1991년 한양대대학원(박사과정) ▲1991­현재 한국미래춤학회 상임이사, 전국발레콩쿠르 심사위원 ▲1993년부터 서울국제무용제참가 ▲1994­현재 한국스포츠무용철학회 부회장·한국무용협회 이사. ▲1996년 전국무용제심사위원,한국발레협회공연및 한국발레연구회 정기공연외 한국발레협회부회장, 서울국제무용제운영위원 ‘죽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사람,사람들’‘숲에서’‘우리 안에는…’외 다수 서울국제무용제연기상(93년)·대상·안무상·연기상(95년) 역서 ‘클래식 발레(기초법과 용어)’(84년)‘세계발레작품 해설집’(87년)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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