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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은희 별세, 신상옥 감독 곁으로…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삶

    최은희 별세, 신상옥 감독 곁으로…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삶

    배우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92세.최은희씨의 가족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 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마음의 고향’(194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등으로 김지미, 엄앵란 등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오른 최은희씨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거장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최은희씨는 1954년 결혼했다.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이후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후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씨는 1978년 1월 혼자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믿지 못할 재회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북한 당국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최은희씨는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 영화제 수상 기록이다.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신임을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한다. 이 때 기회를 틈타 미국 대사관에 진입,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영면하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 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신상옥 결혼부터 北납치까지 ‘영화같은 삶’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신상옥 결혼부터 北납치까지 ‘영화같은 삶’

    배우 최은희(92)가 지병으로 별세했다.고인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16일 “어머니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귀국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이날 오후 6시 서울성모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입관은 오는 18일 오후 3시 이뤄질 예정이다. 발인은 19일 이뤄지며, 장지는 안성천주교 공원묘지로 결정됐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엄앵란, 신성일 병원비 전액 부담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해”

    엄앵란, 신성일 병원비 전액 부담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해”

    신성일이 아내 엄앵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지난 20일 방송된 MBC ‘사람이 좋다’에서는 배우 신성일이 5번의 항암치료와 25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은 이후 전남 광주 인근의 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이날 신성일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번 암 치료비를 엄앵란 씨가 다 계산했다. 몇천만원 나왔다. 액수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아들이 ‘아버지가 입원하는 그날로 엄마가 카드를 주셨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정초에 오랜만에 (엄앵란에게) 전화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딸 강수화 씨는 “엄마가 엄청 좋아하셨다. ‘왜 감사 인사가 없나’ 기다리시더라”고 말했다. 신성일은 “기회를 봐서 해야지, 아무때나 하나. 그래서 설날에 전화했다. ‘고맙소’ 했더니 ‘웃기는 소리 하네’라고 말하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강수화 씨는 엄마 엄앵란이 생각하는 신성일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큰 아들”이라고 설명했다. 강수화 씨는 “엄마는 ‘신성일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엄마 말 그대로다. 작은 방에 병원비도 없이 초라하게 죽는 모습 못 본다고 하신다. 본인 남편이니까 책임져야 한다고 하신다. 돈 꾸러 다니면서 병원비 대고 자식들한테 손벌리는 모습 못 본다면서,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고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사진=MBC ‘사람이 좋다’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사람이 좋다’ 신성일 엄앵란 딸 강수화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이 좋다’ 신성일 엄앵란 딸 강수화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이 좋다’ 신성일 편이 전파를 탔다.20일 방송된 MBC ‘사람이 좋다’에서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신성일과 아내 엄앵란, 딸 강수화의 일상이 그려졌다. 이날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딸 강수화는 “(아버지가) 보디빌더도 나갔다. 삼각팬티 입고 몸을 만들어 마라톤도 했다”며 과거 신성일의 모습을 회상했다. 이어 “엄마가 만날 걱정했다. 운동하다 큰일 난다고. (아버지는) 옛날부터 영화배우는 살찌면 안 되고 몸을 가꿔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엄앵란은 “(신성일이) 부지런한 것은 아무도 못 따라간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개 끌고 뒷동산 갔다가 음악 듣고,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쫓아가나. 저는 좀 게으른 편이다. (신성일이) 좀 일찍 일어나라고 했다. 저희는 죽어도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강수화는 “엄마는 숨쉬기 운동만 한다. 두 분이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스타였다. 각자 생활습관이 다르다. 각자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멋있게 살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신성일, 요양병원서 폐암 투병 중...엄앵란 병원비 부담

    신성일, 요양병원서 폐암 투병 중...엄앵란 병원비 부담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배우 신성일이 출연한다.51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으며 많은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다. 마라톤과 헬스 등 온갖 운동을 섭렵하고 술, 담배를 멀리했는데도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으로 육체적, 심리적 충격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현재 그는 5번의 항암치료와 25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은 후 전남 광주인근의 한 요양병원에 머무르고 있다. 생존율이 20%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빠르게 호전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신성일은 1964년 세기의 커플로 불리며 배우 엄앵란과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계속된 영화 제작 실패로 별거 아닌 별거를 시작하며 부부관계는 더욱 틀어지기만 했다. 특히 엄앵란은 신성일의 숱한 스캔들과 폭탄 발언으로 인해 한때 집 밖에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의 비난에도 자신의 남편이었기에 결코 신성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엄앵란은 신성일이 암 선고를 받던 날 말없이 병원비를 부담했다. 대한민국이 다 아는 별거부부인 신성일과 엄앵란은 평생의 동지로,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다. 신성일이 지내는 요양병원을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막내딸 강수화는 투병 생활을 시작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동네방네 자랑하는 아버지를 보며 새삼스레 신성일의 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왜소해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행동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신성일의 이야기는 20일 오후 8시 55분에 방송되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사진=M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신성일 팔짱 낀 젊은 여성의 정체는? ‘궁금증 폭발’

    신성일 팔짱 낀 젊은 여성의 정체는? ‘궁금증 폭발’

    배우 신성일과 함께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여성의 정체에 관심이 쏠렸다.최근 방송된 TV조선 ‘별별톡쇼’에서는 배우 신성일과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여성에 대해 패널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김대오 기자는 “신성일 씨와 다정하게 레드카펫을 밟은 여성이 눈길을 끌었다. 팔짱까지 낀 이 여성은 배우 황수정 씨에 버금가는 외모를 자랑했다. 그만큼 이 여성의 정체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고 말했다. 당시 취재진의 질문에 신성일은 “외손녀 박지영”이라고 밝혔다. 이어 TV조선 문화연예부 백은영 기자는 신성일과의 통화 내역을 공개했다. 신성일은 전화연결을 통해 “외손녀면 외손녀지 그것에 대해서 무슨 이런저런 말이 필요하냐. 신인 배우도 같이 갈 수도 있지 그게 뭐 그렇게 화제가 될 일이냐”며 여성의 정체에 대해 손녀임을 언급했다. 이에 변호사 손정혜는 “엄앵란 부부 사이에는 1남2녀가 있다. 장녀는 미국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딸의 성이 박 씨가 될 수 없다. 막내 딸의 경우 유모 씨와 결혼 후 이혼했기 때문에 딸이 박 씨일 수 없으며, 아들 또한 강 씨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의 성은 박 씨가 될 수 없다”며 손녀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 이후 신성일의 아내 엄앵란은 “누군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 중에는 그런 아이가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성일의 측근은 “박지영은 오래 전에 수양딸로 삼은 사람의 딸로,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외손녀는 맞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TV조선 ‘별별톡쇼’ 방송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신성일 손녀, 엄앵란 “우리 가족 중 그런 아이는 없다” 반전

    신성일 손녀, 엄앵란 “우리 가족 중 그런 아이는 없다” 반전

    신성일 손녀를 엄앵란 측이 부인했다.신성일 손녀로 알려진 박지영 씨는 지난 1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신성일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했다. 그는 ‘신성일의 외손녀’로 소개됐으며 신성일 역시 모 지상파 방송프로그램 리포터가 “옆에 계신 분은 누구야”고 묻는 질문에 “손녀 박지영이다”고 답했다. 그러나 16일 오후 한 매체는 영화계 인사의 말을 빌어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1남 2녀 중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보도했다. 또 엄앵란 역시 “우리 가족 중 그런 아이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매체는 영화계 원로의 말을 빌어 “신성일에게 수양딸이 한 명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엄앵란 가족들도 모르는 이 의문의 여성을 신성일이 직접 외손녀라고 했다면 수양딸의 자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해 ‘신성일 손녀’의 정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신성일 측 관계자는 “신성일 씨에게 수양딸이 있다. 박지영 씨는 그 분의 딸이기 때문에 신성일 씨의 수양손녀가 맞다”고 전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기덕 감독 별세, 누구? 엄앵란 “톱스타로 만들어 주신 분”

    김기덕 감독 별세, 누구? 엄앵란 “톱스타로 만들어 주신 분”

    1960년대를 풍미한 영화계 원로 김기덕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김기덕 감독은 7일 별세,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엄앵란은 8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기덕 감독은 내 영화 인생의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면서 “남편 신성일 씨와 내게는 인생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애도했다. 엄앵란 신성일은 1964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맨발의 청춘’으로 인기 스타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톱스타로 군림했다. 고(故) 김 감독은 196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5인의 해병’(1961)으로 데뷔해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1964), 공상과학(SF) 괴수영화 ‘대괴수 용가리’(1967), 스포츠영화 ‘영광의 9회 말’(1977)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김기덕 감독은 공연윤리위원회 영화·비디오 심사위원을 비롯해 대종상 집행위원과 심사위원장, 서울예술대학 학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제1회 대종상 신인감독상(1962), 옥관문화훈장(2003)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안숙영 여사와 아들 김영재·영기, 딸 은아씨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3호실이며, 발인은 9일 오전 11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기덕 감독 폐암 투병 중 별세…향년 83세

    김기덕 감독 폐암 투병 중 별세…향년 83세

    ‘맨발의 청춘’을 비롯해 1960년대 대표적인 흥행작들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이 7일 오후 3시 2분 별세했다. 향년 83세.김 감독은 지난 4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데뷔해 16년 동안 6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1964)을 비롯해 ‘용사는 살아 있다’(1965), ‘124 군부대’(1970) 등의 전쟁영화,‘친정 어머니’(1966) 등의 가족드라마, ‘대괴수 용가리’(1967) 같은 SF 괴수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영화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연출작인 스포츠 영화 ‘영광의 9회말’ 이후에는 서울예술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예술대학 학장,동랑예술센터 총감독,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한민국예술원 연극·영화·무용 분과회장을 맡았다. 1962년 제1회 대종상 신인감독상(1962)을 수상했고,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안숙영 씨와 아들 영재·영기 씨,딸 은아 씨 등 2남1녀가 있다.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발인은 9일 오전 11시.02-2227-7500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맨발의 청춘’ 김기덕 원로 영화감독 별세

    [부고] ‘맨발의 청춘’ 김기덕 원로 영화감독 별세

    ‘맨발의 청춘’, ‘대괴수 용가리’, ‘남과 북’ 등으로 유명한 김기덕 원로 영화감독이 9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83세. 고인은 1960~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감독이다. 20년 가까이 70여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고인은 1961년 전쟁물 ‘5인의 해병’으로 데뷔했다.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맨발의 청춘’(1964)이다. 당대 최고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아 뒷골목 깡패와 외교관 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다. 같은 해 신성일, 엄앵란이 세기의 결혼식을 올려 더욱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SF ‘대괴수 용가리’(1967)는 고인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각인한 작품이다. 일본의 괴수물 고질라를 한국화하며 특수효과 기술을 전면적으로 도입한 이 작품은 크게 흥행했고 해외에도 수출됐다. 제1회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입회했으며, 2015~2016년 연극·영화·무용 분과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안숙영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9일 오전 11시, 장지는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 (02)2227-7556.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신성일 “폐암 3기 투병…애인이 호적상 부인보다 소중하다”

    신성일 “폐암 3기 투병…애인이 호적상 부인보다 소중하다”

    최근 폐암 3기를 판정받고 항암치료 중인 배우 신성일이 “호적상 부인보다 애인이 더 소중하다”며 자신의 여성편력에 대해 고백한 인터뷰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신성일은 17일 조선일보에 “종양크기가 5㎝ 이상 크기라서 방사선과 약물치료로 암 덩이를 축소시켜야 수술이 가능하다”면서 담배를 끊은지 35년이 됐고 공기 좋은 시골에 살지만 폐결핵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전과 7년간 매일 어머니 영정 앞에서 기도를 올릴 때 피우던 향 때문에 폐암이 발병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난 57세 때부터 엄앵란과 독립해 살았다. 독립하려면 나처럼 집이 두 채쯤 돼야지. 그런 능력을 갖춰야 그럴 수 있지. 그게 아무나 되는 줄 아느냐”며 방송에서 밝힌 애인에 대해서는 “그 친구는 대구에 직장이 있는데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자신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솔직하게 말한 것? 남자들이 말 못할 것을 대신 했지. 대체로 배운 여인들도 내 말에 동의한다”면서 “물론 방송에 나와 떠들어 손실을 봤다 광고가 끊기고 비난과 공격도 받았다.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부인 엄앵란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는 지적에는 “자기(엄앵란)는 방송에서 ‘신성일이가 바람 피워 고생했다’는 식으로 얘기를 안 했나. 부부 관계에 대해서는 남들은 알 수 없는 게 있다. 지금껏 나는 애인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인은 내게 삶의 활력을 줬다. 내게는 호적상 부인보다, 사랑을 나누고 취향이 맞고 대화가 되는 애인이 더 소중하다. 지금 함께하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엄앵란과는) 영원한 부부다. 스스로 각자의 존재감을 인정해준다”고 밝혔다. 신성일은 과거 방송에 출연해서도 “나는 바람둥이가 아니라 로맨티스트다. 난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순간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신성일은 엄앵란 또한 자신과 같은 로맨티스트라면 어떨 거 같냐는 시청자의 질문에 “내 인생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난 주어진 이 시간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라면서 애인이 있다고 말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드라마 같은 사랑… 송송 커플 “가족 간 만남이기에 신중”

    드라마 같은 사랑… 송송 커플 “가족 간 만남이기에 신중”

    또 한 쌍의 톱스타 커플이 탄생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연인으로 나와 만인을 사로잡았던 배우 송혜교(35)와 송중기(32)가 오는 10월 부부의 연을 맺는다. 두 한류 톱스타의 갑작스러운 백년가약 소식에 국내는 물론 해외 팬들의 반응도 뜨겁다.두 배우의 소속사 블러썸엔터테인먼트와 UAA는 5일 동시에 보도자료를 내고 “송중기와 송혜교가 10월 마지막 날(31일)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밝혔다. 송혜교는 이날 팬카페 ‘해바라기’에 “(송중기는) 호흡이 잘 맞는 동료, 친구로 작품이 끝난 뒤에 연락하며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보냈다”면서 “미래를 함께해도 좋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밝혔다. 송중기 또한 팬카페에 글을 올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들었다. 빨리 가느라 지금껏 보지 못했던 풍경과 가치와 사람을 제대로 보면서 지혜롭게 잘 걸어가겠다”며 “멋진 배우로서,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으로서 살아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3살 터울의 연상·연하 커플인 두 사람이 만난 건 지난해 KBS 2TV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다. 연인 사이로 나와 ‘송송 커플’로 불린 두 사람은 이 드라마로 KBS 연기대상을 공동 수상하고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드라마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두 사람의 열애설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최근까지도 두 사람은 이를 부인해 왔다. 이에 대해 소속사는 “결혼은 개인뿐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다 보니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에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때까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야 입장을 전하게 됐다”고 뒤늦게 해명했다.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 외신들도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앞다퉈 전했다. 지난달 발리에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제일 먼저 포착한 중국 시나닷컴은 양측의 입장과 함께 그동안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을 내보내며 특필했다. 이날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서는 한한령(한류 제한령)을 뚫고 ‘송중기·송혜교 결혼’이라는 해시태그가 오전에만 3억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핫이슈 순위 1위를 차지했다. 2008년 영화 ‘쌍화점’으로 데뷔한 송중기는 여리고 순한 외모에 남자다움을 갖춘 새로운 이미지로 아시아 여성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2012년) 등에 출연하며 꽃미남 배우로 인기를 모았고, 이후 태양의 후예로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전지현, 김태희와 함께 동시대 ‘트로이카’ 여배우로 꼽혔던 송혜교는 1996년 교복 모델로 데뷔했다. 1998년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2000년 ‘가을동화’로 스타덤에 올랐다. ‘올인’(2003년), ‘풀하우스’(2004년), ‘그들이 사는 세상’(2008년) 등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잇따라 흥행하면서 아시아 최고의 여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하게 됐다. 드라마 속 상대 남자 배우와의 열애설도 끊이지 않았다. 이들처럼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춘 뒤 연인 관계로 발전, 결혼까지 이어진 예는 적지 않다. 원조는 영화 ‘로맨스빠빠’ 등에 동반 출연해 1964년 결혼한 신성일·엄앵란 부부다. 1993년 결혼한 최수종·하희라 부부, 1994년 차인표·신애라 부부, 1995년 이재룡·유호정 부부도 드라마에서 만나 결혼에 성공했다. 1998년 영화 ‘연풍연가’에서 만난 장동건, 고소영은 12년 뒤인 2010년 결혼했다. 2015년 강원도 정선에서 깜짝 결혼식을 올린 이나영·원빈 부부와 지난 1월 화촉을 밝힌 비(정지훈)·김태희 부부는 같이 나온 작품은 없지만 스타 부부로 화제를 모았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신성일 폐암 3기, 1982년 담배 끊었는데..‘현재 상태 봤더니?’

    신성일 폐암 3기, 1982년 담배 끊었는데..‘현재 상태 봤더니?’

    원로배우 신성일(80)이 폐암에 걸린 것으로 확인됐다. 28일 한국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신성일은 지난 26일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폐 조직 검사를 받은 결과 폐암 3기로 진단받고 통원 치료에 들어갔다. 배우협회 사무국장은 “지난 23일 지방의 병원에서 폐암으로 진단받고 서울에 올라와 대형 종합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으셨다”며 일단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로 종양의 크기를 줄인 뒤 수술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신성일은 1982년 담배를 끊었으며 경북 영천의 자연 속에서 건강관리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부인 엄앵란이 2015년 12월 TV 건강프로그램 녹화 중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수술을 받고 회복되는 과정을 옆에서 내내 지킨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맨발의 청춘’, ‘초우’, ‘별들의 고향’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최근까지도 각종 영화계 행사에 참석하고 TV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신성일 폐암 3기 “방사선 치료 중” 엄앵란 “믿기지 않는다”

    신성일 폐암 3기 “방사선 치료 중” 엄앵란 “믿기지 않는다”

    배우 신성일(80)이 폐암으로 투병 중이다.28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신성일은 최근 심해진 기침으로 한 종합병원에서 폐 조직 검사를 받은 결과 1개의 종양이 발견돼 폐암 3기를 진단받았다.병원 측은 당장 수술보다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로 종양의 크기를 줄인 뒤 수술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신성일은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고 당분간 통원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앞서 신성일의 아내인 엄앵란도 2015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 암 재발을 막는 호르몬 치료제를 복용하면서 자택 요양 중이다.엄앵란은 매체를 통해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편이 폐암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면서 “의사들이 남편이 삶의 의지가 강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고 있다. 내가 유방암을 극복했듯이 하루속히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수많은 주연을 맡았고 영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알랭 드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배우 엄앵란과 결혼, 숱한 화제를 뿌렸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마이웨이’ 강신성일 “과거 애인 존재, 아내 엄앵란도 알았다” 고백

    ‘마이웨이’ 강신성일 “과거 애인 존재, 아내 엄앵란도 알았다” 고백

    배우 강신성일이 자신의 사생활 논란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15일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는 배우 강신성일이 지난 2011년 논란이 됐던 자서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강신성일은 1964년 배우 엄앵란과 결혼하며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당시 4000여 명의 하객이 몰릴 만큼 이들의 결혼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하지만 2011년 출판된 강신성일의 자서전에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담기며 논란이 일었다. 그는 출간 기념회 현장에서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강신성일은 “책을 내고 보니 옛날 죽은 애인 사진도 나오니까 (출간 기념회) 사회자가 ‘지금도 애인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말하면 될텐데 그 때 눈 앞에 한 여인(아내)의 얼굴이 딱 나타났다. 그 여인에게까지 내가 거짓말을 해야 되겠나”라며 당시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이유를 공개했다. 그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의 신의를 지키고 그 사람한테까지 거짓말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아내가 (애인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데 (거짓말을 하면) 아내하고 나하고 인간적인 신의가 허물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배우 방성자 총격 사건

    [그때의 사회면] 여배우 방성자 총격 사건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활동한 방성자라는 배우가 있다. 1939년생이다.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김지미와 엄앵란, 그 후에는 당시의 트로이카 윤정희·문희·남정임의 벽을 넘지 못한 조연급 배우다. 방씨가 배우로서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총격 사건 때문이다. 1972년 1월 27일 자 사회면은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달 14일 서울 마포구 방씨 집에서 방씨가 도둑을 권총으로 쏴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유명한 여배우가 총을 발사했다는 것만으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데 사실은 방씨가 아니라 같이 잠을 자던 공군 병사 함모씨가 총을 쏜 것이었다. 한밤중에 함씨가 총을 쏴 도둑을 쓰러뜨리자 방씨가 “당신은 도망가라.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겠다”고 말했다. 동거하는 애인을 위해 살인미수죄를 뒤집어쓰려 한 방씨의 거짓말은 사건 발생 2주 만에 탄로 났고 애정행각도 세간에 알려졌다. 함씨는 큰 기업가의 아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 2세였다. 방씨보다 다섯살 연하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중퇴하고 돌아와 공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결혼해 미국에 살던 아내와 두 아들을 둔 유부남이었다. 방씨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 감독의 눈에 띄어 1960년 ‘애수에 젖은 토요일’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다. 이 사건은 재벌 2세의 일탈 말고도 여러 가지 파문을 일으켰다. 권총은 예비역 육군 대위였던 함씨의 형의 것으로 방씨에게 건네진 것으로 드러났다. 함씨는 병사의 신분으로 여배우와 동거를 할 만큼 근무지를 멋대로 이탈했다. 아버지가 당시 이모 공군 준장에게 뇌물을 주고 당번병으로 근무하도록 청탁을 한 것이다. 재벌가 아들의 허술한 군복무가 도마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이 준장은 처벌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방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함씨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만 항소해 벌금형으로 감형받았다. 함씨의 아버지가 준 뇌물은 작은 집 한 채 값이었는데 선고유예를 받았다. 정작 총을 쏘고 뇌물을 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웠다. 방씨는 기자들에게 “그이를 사랑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또 “이 사건을 아름답게 봐주느냐, 추하게 봐주느냐 하는 것은 기자 여러분의 양심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 말 때문에 당시 “아름답게 봐 주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다. 방씨는 사건 이후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 뒤 1989년 영화 ‘잡초들의 봄’에 출연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행적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정이랑, ‘SNL8’ 엄앵란 논란 사과 “부끄럽지만 몰라서 저지른 잘못”

    정이랑, ‘SNL8’ 엄앵란 논란 사과 “부끄럽지만 몰라서 저지른 잘못”

    개그우먼 정이랑이 엄앵란 패러디 논란과 관련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tvN ‘SNL 코리아8’에 출연 중인 정이랑은 4일 자신의 SNS에 “저의 잘못에 대한 사과의 마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이곳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며 장문의 글을 올렸다. 정이랑은 “어제 ‘SNL 코리아8’을 통해 방송된 엄앵란 선배님의 성대모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편해하고 계시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누군가를 표현해낸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제가 그 부분을 간과했습니다”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이어 정이랑은 “잘 몰랐다는 걸로 저의 잘못이 면피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방송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욱 조심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엄앵란 선배님께도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거듭 사과했다. 앞서 3일 방송된 ‘SNL8’의 코너 ‘불후의 명곡’에서 정이랑은 엄앵란을 패러디한 김앵란으로 등장했다. 정이랑은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르며 “가슴 이야기를 하면 부끄럽다”, “잡을 가슴이 없다” 등의 발언을 했다. 거미로 분장한 안영미 역시 “잡을 가슴이 없다는 대목에서 공감했다”, “정말 여자 가슴의 한이 느껴지는 무대였다”고 거들었다. 해당 발언은 엄앵란이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바 있기에 문제가 됐다. 엄앵란은 지난해 말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러한 아픔이 개그 소재로 등장했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엄앵란의 유방암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작진 측 설명이다. ‘SNL8’ 관계자는 “이번 시즌8 초반부터 정이랑 씨가 김앵란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생방송 코너에서도 엄앵란 씨의 개인사를 모르고, 노래 가사를 정이랑 씨 본인의 이야기에 빗대어 애드리브를 하다가 오해가 생겼다”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 사과 드리며 재방송 분에서는 해당 장면을 삭제 조치했다. 앞으로 더욱 주의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하 정이랑 사과 전문> 안녕하세요. 정이랑입니다. 저의 잘못에 대한 사과의 마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이곳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어제 ‘SNL’을 통해 방송된 엄앵란 선배님의 성대모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편해하고 계시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누군가를 표현해낸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제가 그 부분을 간과했습니다. 잘 몰랐다는 걸로 저의 잘못이 면피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방송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욱 조심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엄앵란 선배님께도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경솔한 언행으로 불편하셨을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정이랑, 엄앵란 유방암 비하? ‘SNL8’ 측 “개인사 몰랐다” 사과

    정이랑, 엄앵란 유방암 비하? ‘SNL8’ 측 “개인사 몰랐다” 사과

    ‘SNL8’ 측이 정이랑의 엄앵란 유방암 비하 논란에 대해 사과를 전했다. tvN ‘SNL코리아 시즌8’ 관계자는 4일 “이번 시즌8 초반부터 정이랑 씨가 ‘김앵란’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생방송 코너에서도 엄앵란 씨의 개인사를 모르고, 노래 가사를 정이랑 씨 본인의 이야기에 빗대어 애드리브를 하다가 오해가 생겼다”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 사과 드리며 재방송 분에서는 해당 장면을 삭제 조치했다. 앞으로 더욱 주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3일 방송된 ‘SNL8’의 코너 ‘불후의 명곡’에서 정이랑은 엄앵란을 패러디한 김앵란으로 등장했다. 정이랑은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르며 “가슴 이야기를 하면 부끄럽다”, “잡을 가슴이 없다” 등의 발언을 했다. 거미로 분장한 안영미 역시 “잡을 가슴이 없다는 대목에서 공감했다”, “정말 여자 가슴의 한이 느껴지는 무대였다”고 거들었다. 해당 발언은 엄앵란이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바 있기에 문제가 됐다. 엄앵란은 지난해 말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러한 개인적 아픔이 개그 소재로 등장했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엄앵란의 유방암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작진 측 설명이다. 엄앵란의 유방암 사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여성의 신체에 대한 비하가 웃음의 소재가 되는 것 역시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을 듯 하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SNL8’ 이세영 성추행 논란 이어 엄앵란 모욕? 정이랑 “가슴이 없어요”

    ‘SNL8’ 이세영 성추행 논란 이어 엄앵란 모욕? 정이랑 “가슴이 없어요”

    ‘SNL8’이 이세영 성추행 논란이 식기도 전에 배우 엄앵란에 대한 묘사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3일 방송된 tvN ‘SNL 코리아8’에서는 그룹 마마무가 메인 호스트로 출연해 코너 ‘불후의 명곡’을 꾸몄다. 이날 크루 정이랑은 배우 엄앵란 분장을 하고 등장해 마마무 화사와 노래 대결을 했다. 정이랑은 노래 가사에 가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엄앵란 성대모사로 “나는 잡을 가슴이 없어요”라고 우스꽝스럽게 말했다. 이를 들은 크루 안영미는 “가슴이 없다는 거. 개인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엄앵란의 가슴이 없다는 발언은 단순히 가슴이 작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엄앵란은 지난해 말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 한 쪽 가슴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엄앵란은 MBC ‘휴먼다큐 사랑’에 출연해 해당 수술에 대해 “겨드랑이 안쪽이 감각이 없다. 몸 한쪽이 떨어지니까 슬프고 기분 나쁘고 기죽는다”고 심경을 전한 바 있다. 이번 정이랑의 콩트는 유방암으로 인해 가슴 한쪽을 절제해야 했던 고통을 겪은 엄앵란을 개그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를 알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앞서 지난주에는 ‘SNL8’ 크루 이세영이 호스트로 출연한 B1A4 멤버들의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듯한 행동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며 성추행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세영은 현재 출연을 중단하고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있는 상태다. 사진=tvN ‘SNL8’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 美 카네기홀 공연 김장실 의원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 美 카네기홀 공연 김장실 의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지난 3일(현지시간) 전 세계 예술가들이 ‘꿈의 무대’로 꼽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 구슬픈 한국의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객석을 가득 메운 60~70대 한국 동포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쏟아내듯 펑펑 울었다. 카네기홀을 ‘눈물바다’로 만든 사람은 바로 김장실 새누리당 의원이다. 전문 아티스트가 아닌 공연자가 120년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카네기홀에서 ‘솔드 아웃’(SOLD OUT·매진) 스티커를 받으며 ‘대박’을 터트린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지난 20일 김 의원과 만나 공연 기획 단계부터 성황리에 마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 중간중간 부르는 김 의원의 노래와 이야기가 함께 버무려져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김 의원은 “노래는 귀를 열게 하고 노래에 담긴 의미는 가슴을 적신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오래전부터 공직사회와 정계에서 대중가요로 시대를 말하는 노래꾼이자 이야기꾼으로 유명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는데. -국내 대중 가수 중 패티김, 조용필 등 최정상 가수들만 무대에 섰다. 전문적인 성악 훈련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가 선 것은 처음이다. 전 세계 국회의원 중에 누가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할 수 있겠나. 기록을 찾아봐야겠지만 없을 것 같다. →발상 자체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성사됐나. -우연히 부산의 한 방송국에 출연해 ‘부산과 대중가요’를 주제로 얘기하다가 노래를 했다. 성악을 전공한 방송 진행자가 ‘대중가요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 해박하고 노래가 직업 가수 뺨친다’며 그 자리에서 뉴욕에 있는 공연 기획자인 박준식 제이삭(JSAC) 대표이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지난 7월이었다. 이어 8월 초 한국을 방문한 박 대표와 식사를 같이 하다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3곡 불렀고 박 대표가 이에 만족해 공연이 성사됐다. 한국인의 가슴을 촉촉히 적셨던 히트 가요를 선곡해서 그 노래가 가지는 시대정신이 무엇이고, 당시에 일어났던 정치적 사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얘기했다. 거기에 노래를 만든 가수와 작사가, 작곡가, 음반 제작자와 팬들 사이에 있었던 뒷얘기를 통해 연예사적 재미를 더했다. 재미없는 노래에 재미있는 ‘당의정’을 입혀 관객들 입에 솔솔 녹도록 했다. →(인터뷰 도중 때마침 박 대표가 ‘매진’ 딱지가 붙은 공연 포스터를 들고 오자) 박 대표가 직접 공연 기획 과정을 말씀해 달라. -(박 대표) 제이삭은 뉴욕에 있는 공연 기획사다. 처음에는 카네기홀 공연이 연 2회도 힘들었는데 7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연 26회로 늘었다. 현재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 KBS 교향악단 등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단의 해외 공연은 대부분 저희가 맡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김 의원과의 미팅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제가 가장 반대했다. 카네기홀은 1년 전에 미리 대관 신청을 받는데 특히 올해는 개관 125주년이어서 대관 검열이 아주 까다로웠다. 그래서 김 의원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거절할지부터 고민했다. 식사 자리에서 김 의원이 대뜸 노래의 스토리를 얘기하며 직접 3곡을 불렀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놓고 열창을 했다. 특히 ‘동백아가씨’에 대한 사연을 들었는데 음악과 내용의 연결고리가 너무 좋았다. 광복 70주년이기도 해서 ‘이거다’ 싶었다. 미국 이민자 중에는 이산가족이 많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왔는데 영주권도 없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 한국인이 몇십만명 된다. 이들은 한국에서 부모님이 위독하거나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아도 못간다. 그렇게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이 많다. 또 2~3세대 자녀들은 1세대들과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를 알 길이 없다. →카네기홀 측의 승인을 어떻게 받았나. -(박 대표)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도 한국 최고의 공연장이라고 까다로운데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 같은 음악가들이 초연을 한 125년 역사의 카네기홀이니 얼마나 뻣뻣하겠나. 게다가 아티스트도 아니고 강연을 하겠다고 하는데…. 카네기홀 측에서 ‘이 사람 아티스트냐’고 물어봐서 ‘아티스트는 아닌데 노래를 잘한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카네기홀 측도 공연이 망해 명예가 실추될까 봐 주시한다. 전문 아티스트 기록이 없으면 무대에 서기 어렵다. 그래서 그냥 대중가요가 아니라 ‘강연과 콘서트’로 콘셉트를 잡았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이 되고 전쟁을 거쳐 다시 휴전이 된 모든 과정을 영문으로 번역해 기안을 올렸고 결국 승인받았다. →어떻게 매진이 됐나. -(박 대표) 공연 열흘 전 첫 언론 보도가 나갔는데 사무실 업무가 마비됐다. 이민 1세대, 1.5세대 등의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우리가 외국계 회사인 줄 알고 ‘아이 니드 코리안 토크쇼 티켓’(I need Korean Talk Show ticket·한국인 토크쇼 티켓이 필요합니다)이라며 간절한 목소리로 안 되는 영어를 더듬더듬 써 가며 전화를 걸어왔다. 돈을 받아선 안 되겠다 싶어서 40달러의 티켓 비용을 무료로 전환했다. 카네기홀 측에서는 공연 일주일 전에 홍보 포스터가 다 나갔는데 어떻게 무료로 하느냐며 반대했다. 우리가 완강하게 밀어붙이자 카네기홀 측에서 ‘공연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제가 카네기홀에서만 170회 공연을 기획했는데, 매진된 건 처음이다. 아티스트들은 각성해야 한다. 하하.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 -공연 초반부에 관객들이 점잖게 앉아 있길래 다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카네기홀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한국인이 막걸리 마시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젓가락을) 두들기는 60~70년대 정감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공연 내용은 어땠나. -해방 이후 70년을 10년 단위로 끊어서 보면 그 시대에 발생한 정치·사회적 사건에 시대정신이 드러난다. 1940년대는 아무래도 해방의 기쁨보다 더 큰 게 없다. 식민 지배가 30년이 넘었고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하니 독립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방이 됐다. 얼마나 기뻤겠나. 해방을 기뻐하는 노래가 막 쏟아져 나왔다. ‘사대문을 열어라’ ‘울어라 은방울’ 같은 노래들이다. 가장 상징적인 노래는 ‘귀국선’이다. 일본에 동포 230만명이 살고 있었고 중국에 200만, 기타 수십만명이 외국에 살고 있었는데 귀국선은 귀환 동포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주요한 통로였다. 그 배를 타고 돌아오는 이들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다시는 빼앗기지 말고 잘 살아 보자는 욕구가 있었다. 그런 욕구가 가사에 잘 표현돼 있다. →1950년대에는 어떤 노래가 상징적인가. -한국전쟁보다 더 1950년대를 특정 짓는 사건은 없다.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 유엔군과 국군은 6중, 7중으로 포위당해 독 안에 든 쥐처럼 죽을 지경으로 집중 타격을 받았다. 한국 지형은 동고서저형이어서 육로 철수가 어려웠다. 그래서 흥남부두에서 해상 철수를 했다. 자유를 잠시 맛본 이북 사람 수십만명이 ‘우리도 데려가 달라’고 했다. 대규모 수송선을 수백척 동원해서 무기를 버리고 군인 10만명, 민간인 9만 8000명을 태우고 내려왔다. 그때 많이들 헤어졌다. 부산에 홀몸으로 내려온 여성분에게서 피란 중 가족과 헤어진 구구절절한 사연를 들었다. 손잡고 같이 타자 했는데 서로 타려고 밀치고 당기다가 밀려서 아이 손, 마누라 손 놓고 ‘어디 갔노, 어디 갔노’ 찾다가 어디 가 버렸는지 몰라 펑펑 울고…. 그 감정을 잘 표현한 노래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다. 또 부산에서 울다가 죽을 순 없으니까 국제시장에서 장사하고 구두도 닦으며 살았다. 오며 가며 눈이 맞았던 경상도 처녀하고 정을 주고 살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헤어졌던 부모, 형제, 처자식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서울로 떠났다. 그러면 경상도 처녀가 가지 말라며 붙들고 늘어진다. 서울 가면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은데, 차창 밖으로 보니까 정들었던 경상도 아가씨가 울고 있고…. 그런 사나이의 복잡한 심경을 잘 표현한 노래가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승만 정부가 사사오입, 발췌개헌을 하면서 계속 권위주의 정부로 치달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후보로 신익희 선생이 나섰는데 1956년 5월 5일 오후 5시 5분 서울역에서 출발한 호남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정권 교체의 꿈이 사라지고 허망한 상태가 됐다. 그때 손인호 선생의 ‘비 내리는 호남선’ 노래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았다. 신 선생 부인이 너무 억울해 그 노래를 작사를 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그런 풍문이 노래 판매를 촉진시켰다. →1960년대의 대표곡은 무엇인가. -경제 개발로 산업화가 본격화돼 촌에서 빈둥빈둥 놀던 사람들이 도시로 와서 출세를 많이 했다. 출세를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계층 상승’이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거나 고시에 합격하거나 좋은 집안과 혼인을 맺는 것, 3가지가 전통적인 출세 방식이다. 조선시대 500년간 쌓여 왔던 계층 구조가 일제시대 때 반쯤 파괴됐고 한국전쟁으로 계층구조가 거의 다 파괴됐다. 특히 1960년대에는 남자가 출세를 하면서 그렇지 못한 여인과 간격이 많이 벌어졌다. 출세한 남자는 도시의 좋은 집안에서 얼른 낚아채 가 버린다. 그러면 시골 보리밭에서 사랑을 나누고 백년가약을 맺었던 여인과는 멀어진다. 이런 식의 이별이 워낙 많았다. 1960년대 초·중반의 영화와 소설, 대중가요, 라디오 드라마의 60~70%가 서울로 간 남자는 출세해서 예쁜 집 규수를 얻고 시골에서 사랑했던 여인은 버림받고 그 여인은 사회적 장벽으로 인한 거리감 때문에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을 다뤘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의 전형적인 도식이다.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와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동백아가씨’가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왜색조라며 노래가 나온 지 1년도 안 돼 방송금지가요가 됐는데도 20만장이 팔렸다. 3년 뒤인 1968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음반 제작 금지를 당했는데도 200만장이 팔렸다. 음반을 낸 지구레코드사 고 임정수 사장의 얘기다. 한국 가요 사상 가장 히트한 노래가 동백아가씨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장실 의원은 김 의원은 국내 문화·체육계의 대부 격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과 정치특보 등을 지냈다. 문화관광부 예술국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까지 역임했다. 이후 예술의 전당 사장에 임명돼 문화 공연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대한장애인농구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2014년 인천세계휠체어농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김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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