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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사군의 실체(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5)

    ◎“한반도·중국 연결하는 무역중개지”/일 학자,한구사 왜곡위해 “식민통치 기구” 주장/낙랑·진번 등 4개군 존속기간 각각 달라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 한나라가 그 땅에 설치했다는「한사군」.「한사군」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한이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낙낭·임둔·진번·현토등 4개 군현을 세웠다」는 기록은 중국측 사서를 인용한 삼국유사등에도 나와 있다.그러나 이들 4개 군현은 명칭·존속기간·관할구역등에서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거쳤다. 진번군은 기원전 82년 낙랑군에,임둔군은 현도군에 각각 통합됐다.또 현도군은 기원전 75년 관할구역을 한의 통치지역내로 옮겼으며 그 지역의 지배권은 토착민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결국 4개 군현 가운데 진번·임둔군은 26년만에,현도군은 33년만에 소멸했고 다만 낙랑군만이 4백여년 유지되다 고구려 미천왕때(313년) 멸망했다. 따라서 한의 4개 군현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6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변천과정이 각각 다른 4개 군현을 한데묶어 「한사군」이란 역사용어를 만든 것은 일제하 일본학자들이었다.그들은 한국사의 흐름을「고조선∼한사군시대∼삼국시대」로 엮어 한군현의 통치가 한국사 전개에 큰 역할을 한듯이 호도했다. 그들의 억지주장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한사군」이 발전해 신라·고구려·백제로 형성됐다 ▲「한사군」의 통치범위가 남해안및 영남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미쳤다는 것등이다.심지어 「조선사의 길잡이」등 일부 역사서는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시대」에서부터 잡는등 한국사를 축소·왜곡할 목적으로 「한사군」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일본학자들의 궤변은 그러나 광복이후 국내 사학자들의 연구성과에 따라 철저히 무너져갔다. 한이 위만조선 왕조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실제 점령한 지역은 일부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한의 군현이 설치된 범위도 한정돼 있었음이 밝혀졌다.또 한군현의 역할도 한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토착민을 직접 지배하는 식민통치기구였다기보다는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무역중개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다만 낙랑·임둔·진번·현도등 한군현이 실제 설치됐던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학자간에 학설이 엇갈리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낙랑의 경우 대동강유역에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낙랑」을 고구려·부여와 같은 한민족 국가의 하나인 「낙랑국」으로 보고 있다.한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은 다른 3개군과 함께 조기 소멸했다는 것이다. 한때 「한사군」으로 불렸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 전혀 무의미하며 역사용어로도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따라서 「한사군」이란 용어는 죽은말(사어)이 돼가고 있다.
  • 공사장 진동피해 첫 배상/환경분쟁조정위

    ◎“폭약과다 사용… 주택균열”/주민에 1억지급 결정 앞으로 건설공사장의 소음과 진동등의 영향을 받는 건물의 경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있는 객관적인 자료만 제시할 수있으면 피해보상을 받을 수있게 됐다. 환경처산하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위원장 전영길)는 29일 서울시 성북구 종암1동에 사는 최병환씨등 주민 21명이 인근에서 아파트 재건축공사를 하고 있는 선경건설을 상대로 낸 재정에서 주민들이 제시한 주택의 새로운 균열과 균열확대를 피해물증으로 인정,선경건설은 해당 10가구에 대해 모두 1억2백92만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위원회는 선경건설이 아파트재건축을 위해 암반지대의 굴착공사를 허용폭약량을 초과하여 발파를 해 주택에 균열이 생기거나 전부터 있던 균열을 확대시킨 것으로 확인돼 피해배상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또 이번경우에는 피해주택이 17∼19년이 된 낡은 건물이라 피해사실이 눈에 쉽게 띄었지만 새건물의 경우에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인기관의 안전검사등의 결과로 피해가 확인될 때는배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에따라 주민들이 함께 제기한 정신적인 피해배상은 인과관계를 인정할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아 기각결정을 내렸다.
  • 한양부실 키운 억지 「합리화」/염주영 경제부기자(오늘의 눈)

    부실기업의 대명사가 된(주)한양의 「밑 빠진 독」에 상업은행이 또 다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뭉칫돈을 쏟아부을 채비이다. 한양에 대한 법정관리 준비절차로 재산보전처분 명령이 떨어짐에 따라 상업은행이 그동안 한양에 쏟아부은 9천1백억원은 이자 한푼 못받는 부실여신으로 변해버렸다.이는 상업은행 전체 수익성 자산(약 20조원)의 5%에 육박한다.은행을 골병들게 만들기에 충분한 규모이다. 그런데도 정지태상업은행장은 지난 24일 한양의 인수자로 떠오른 박부찬주택공사사장을 찾아가 주공이 한양을 인수하는데 손해가 없도록 할 것임을 굳게 약속했다.인수만 해 준다면 온갖 특혜성 금융지원을 아끼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총부채 1조9천억원의 부실덩어리를 떠넘기는 정행장의 입장이 저자세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이해가 간다.따지고 보면 상은에 한양은 더할 수 없는 악연이다.지난 86년 9월 산업정책심의회가 결정한 이른바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5년간 원금은 물론 이자도 못받는 뭉칫돈을 한양에 이미 한차례 쏟아부었다.그중 3천5백11억원이 지금도 「산업합리화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상은의 발목을 꽁꽁 붙들어 매놓고 있다.7년이 다 된 지금 이자가 2천6백억원이 붙었어도 받지는 못하고 장부에만 올라 있다. 3천5백11억원의 「산업합리화 여신」이 7년 만에,이미 부실화된 9천1백억원에다 앞으로 추가지원될 특혜성 금융을 포함,1조수천억원의 부실여신으로 바뀌는 꼴이다.상은의 발목을 잡아맨 과거의 「산업합리화 여신」은 결과적으로 부실을 키운 「불합리화 여신」이 된 셈이다. 돈만 퍼주면 부실기업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경쟁의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한양건의 「산업불합리화 여신」은 부실기업을 억지로 살리기 위해 금융을 지원하면 오히혀 부실을 더 키울 뿐이라는 경제논리를 확인해 주는 사례이다.
  • 일 기업/정신건강상담소 설치 붐(특파원코너)

    ◎업무부담·인원감축에 우울증사원 늘어 일본의 사회문제로 등장한 직장인들의 정신건강문제 관리를 위해 자체 정신건강상담소를 설치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이같은 상담제도 도입은 빠른 기술혁신,과중한 업무부담,버블(거품)경제 붕괴에 따른 인원감축 등 기업환경의 악화로 인한 「우울증」사원이 늘어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일본기업이 사원들의 정신건강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88년 노동안전법이 개정된 후부터.노동성의 87년 통계에 의하면 의사 등에 의한 정신건강관리를 하는 기업은 15%정도였으나 88년 이후 크게 늘어났다. 일본의 대표적인 위스키 메이커 산토리는 지난해 5월 정신과의사에 의한 건강상담을 처음 시작했다.산토리는 정신건강체크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프라이버시 등을 고려,상담실을 본사 길건너편에 있는 별도의 건물에 설치하고 상담사원이 서로 얼굴를 마주치지 않도록 상담시간을 조정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미쓰비시은행·도시바·후지쓰 등도 정신건강상담실을 설치하고 있다. 상담자 가운데는 캠퍼스와 현실과의 괴리로 고민하는 신입사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간관리직.중간관리직은 중역등 위로부터의 압력과 부하들의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다 노이로제와 우울증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특히 거품경제때 지나치게 비대해진 중간관리직을 감축하는 이른바 「화이트칼라의 수난시대」를 맞아 중견사원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30대부인이 중간관리직 남편의 고민을 대신 상담하는 경우도 많다.정신과의사인 세키야씨는 『중간관리직사원들 중에는 자신의 우울증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부하나 가족에게 억지로 미소를 짓는 「미소병」환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은 흔히 「회사인간」이라고 불려왔다.그들은 가정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를 위해 일해왔다.열심히 일만하면 장래가 보장되었다.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연봉제 도입,인원감축등에 의해 전통적인 연공서열및 종신고용제 신화가 흔들리면서 장래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이같은 기업환경의 변화로 정신건강상담소를 찾는 회사원들은 더욱늘어날 전망이다.
  • 말단 공무원의 「개혁」 체험기/이동일 서울 성북구청 건축과·7급

    ◎건축 비리·「편법」은 옛말 정부의 「성역」없는 개혁과 사정이 한창인 요즘 일선 공무원들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위로부터의 개혁」속에서 과거 비리와 부조리가 끊이지 않던 건축·위생등 이른바 10대 취약민원부서에서 일하는 우리 하위직공무원들은 하루하루 그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게 선배나 동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그래서 개혁은 위에서만 진행되고 있는듯 보이지만 실제 아래에서도 조용히 이뤄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인·허가업무가 많은 건축직의 경우 과거 비리나 부조리가 많은 분야로 늘 주목의 대상이었던게 사실이다. 그것은 조그만 집이든 큰 건물이든 건축에는 많은 돈이 흘러다니고 돈이 있는 곳에 비리가 있는 것이 당연시됐던 우리사회의 현실때문에 비롯됐다고 본다. 집이나 빌딩을 지을때 일부 사람들이 쫓아다니면서 돈을 줬다든지 윗사람이나 외부의 압력·청탁등이 적지 않았다든지 하는게 모두 그런것들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리」는 밖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의 20분의 1에도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어쨌든 지금 개혁의 물결속에서 우리들은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고 있다.이전에 원칙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이제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시키지도 하지도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검은 돈의 거래나 청탁·외압등도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개혁과 사정이 완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같다.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업무의 처리기준이 엄격해지고 감사가 강화된 이유도 있겠지만 국민의 일원으로서 정부의 개혁작업을 전폭지지한다는 뜻에서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최대한 주민의 편의가 보장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보이고 있다. 건축허가등을 위해 구청을 찾는 사람들도 「편법」을 쓰지 않고 모든 일을 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편법」이 통하지도 않고 쓸수도 없게끔 달라진 것이다. 대신 민원인들의 목소리는 드세져 일선공무원들의 사기를 종종 꺾곤 한다.『힘센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가는 판인데 말단공무원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억지를 부리거나 사무실에서 호통을 칠때는 비애마저 느낀다. 민주화 과정이려니 하지만 행정관청에서 해주지 못할 일을 해달라거나 법을 넘어서는 일을 강요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업무량의 폭주로 아침 8시에 출근해 밤11시 넘어 퇴근하는 날이 많아진 요즘 가끔씩 갖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얘기한다. 『옛날이 좋았다』든가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다』든가 하는 말들이다. 그러면 한구석에서 「청렴」으로 존경받는 한 고참직원이 넌지시 말한다.『어렵더라도 떳떳한 공직자로 남아 더 좋은 앞날을 만들자』고.
  • 미 상원,「북핵」 청문회 증언 요지

    ◎“북한의 핵보유 욕구 과소평가 말라”/미 목표는 「탈퇴철회·사찰수용」 등 3항/남한방위의 핵억지력 개념 포기해야 미 상원 외교위는 26일 북한 핵문제 청문회를 열고 미·북한 고위회담을 비롯,한반도 핵문제를 풀기 위한 외교적 노력 등에 관해 행정부 관리 및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었다.다음은 이날 청문회 주요 출석자의 증언요지다. ▲갈루치 차관보=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선언등 현재와 같은 노선을 왜 취하고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그러나 그 이유 가운데는 ▲상당한 양의 플루토늄의 은닉 ▲핵개발과 관계없이 이를 이용해 미국·한국·일본등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것 ▲김정일이 군부의 신임을 강화하기 위해 대미양보획득등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의 공개성명을 통한 요구를 보면 팀스피리트훈련중지,남한내 미군기지사찰,남한의 핵무기 존재,북한에 대한 핵선제공격포기,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공정성 등이다. 북한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목표는 ▲북한의 NPT잔류 ▲IAEA의 의무이행 ▲남북한 비핵화선언의 실천등이다.북한이 우리의 이러한 요구에 응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핵위협」에 대한 우려를 해소해주는 상응한 조치를 취할 태세가 되어있다.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3가지의 기본목표에 대해서는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다. ▲폴 월포위츠 전국방부차관=우리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목적으로 이를 획득하려고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비록 북한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핵억지력의 확보는 북한의 공격적인 재래식 군사력의 위험성을 더 증대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극히 위험한 이 문제를 푸는데 있어 미국의 지도력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지도력행사가 실패할 경우 동아시아,특히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고도 장기적인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려고 하는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북한이 표명한 핵선제 불사용이나 남한내 핵무기 철수확인등에 대한 우려를 충족시킴으로써 문제가 해결될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믿는다. ▲셀릭 해리슨 미카네기재단 수석연구원=북한내부에서는 개혁지향파와 군사강경파간에 노선투쟁이 계속돼왔다.특히 이들 그룹은 북한의 핵개발문제와 관련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해왔으며 지난 91년9월 부시행정부의 남한내 전술핵 철수발표로 온건파의 입지가 넓어졌으나 작년의 IAEA 핵사찰수용에도 불구,반대급부가 없어 오히려 강경파의 입장이 견고해졌다.핵개발 포기를 통한 한·미·일의 경제지원 획득및 관계개선을 주장하는 온건론자인 개혁지향파의 입지를 튼튼히 해주는 조치를 취해주어야 한다. 북한핵문제를 푸는데는 3가지의 기본적인 정책변화가 요구된다.첫째,김일성정권과 관계개선을 도모해야 한다.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크리스토퍼국무장관과 김영남외교부장과의 회담을 열어 주한미군문제와 함께 경제적·정치적 관계 정상화문제와 핵문제를 나란히 논의해야 한다.둘째는 남한이 독일식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측에 확신시켜 주어야한다.셋째,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개발 포기를 기대한다면 양국도 남한의 방위를 위한 수단으로 핵억지력 개념(북한이 재래식 군사력으로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먼저 핵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 보스니아 유엔군에 무력행사권/미 등 5국

    “공중폭격 등 모든 수단 허용” 【도쿄 연합】 사라예보 등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회교계 거주지역에 설정된 「안전지역」의 확보를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5개국이유엔보호군(UNPROFOR)에 강력한 무력 행사권을 부여하는 유엔 안보이 결의안 제출에 합의했다고 아사히(조일) 신문이 27일 뉴욕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결의 초안은 보호군의 임무에 「안전지역」 확보를 추가하는 한편 「필요한 모든 수단 행사」를 인정하고 다국적군에 의한 공중 폭격도 승인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이 안이 곧 안보이에 제출돼 채택될 경우 보호군은 제 2차 유엔 소말리아활동(UNOSOMⅡ)에 이어 강제력을 수반한 평화집행 부대의 성격을 띠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초안은 국제 평화 달성을 위해 무력 행사를 인정하고 있는 유엔 헌장 제7장에 따라 유엔보호군의 임무에 공격 억지.거점 확보.무장세력 철수 실현 등을 추가하고 무력 행사를 포함한 「필요한 모든 수단」을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여야 협상관행도 달라져야 한다(사설)

    개혁을 국회차원에서 뒷받침하기위한 여야의 정치협상이 민자·민주 당3역회담을 신호로 본격 시작됐다.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첫날 이미 구성해 놓은 정치관계법심의특위의 여야가동 원칙 합의에 우선 안도감을 갖는다.그러나 첫날의 대좌에서 보인 것처럼 정치협상에 임하는 여야의 현격한 입장차이는 벌써부터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혁의 목표에 대해서는 여야가 당대표연설을 통해 한 목소리임을 입증했으나 이를 성취시키는 방법상의 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여당이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라면 야당은 소극적이고 수세적 이다.여당은 국민적 공감을 통해 의식개혁을 이루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는 것인데 비해 야당은 법과 제도를 우선해 개혁을 이뤄 나간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정치협상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6공비리조사특위 구성과 6공청문회개최 문제이다.민주당이 과거 6공문제에 집착을 보이는 것은 이번 정치협상을 통해 이미 여당에 압도당한 판세를 뒤집고 개혁대열에 동참하는 기회로서 활용한다는 전략때문인 듯하다.그러자니 극한상황조성에도 눈을 돌리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그러한 야의 공세에 여가 신축대응하지 못한다면 개혁의 법적 뒷받침이라는 이번 임시국회의 의미는 적잖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하루가 다르게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매일매일 드러나는 과거의 적폐가 이대로 간다면 6공부터 5공에 이르기까지 뿌리깊은 비리와 부조리의 총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대통령이나 사정당국도 성역없는 수사를 다짐하는데다 성과가 나타나는 만큼 굳이 비이조사특위의 설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것 같다.또 야당이 주장하는 청문회의 비실효성도 이미 제13대 국회에서 입증된 바 있다. 정치협상에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지만 특히 이번 국회에서의 야당의 위상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우선 옛날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오늘의 여당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다.오히려 재야까지 흡수한 혁신 의지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전환되지 않은 의식으로 수립된 전략은 당략은 될지 모르지만 국민의 일반적인 인식과 정서에는 미치지 못한다.야당은 이미 합의로 도출된 개혁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시비하는 모습으로는 안된다.즉 야당자신의 체질과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야당이 볼모잡기 억지등 구태를 고수한다면 정치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할게 분명하다.여야는 지금 국민들이 정치권의 청정을 우선적인 개혁의 요체로 인식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협상의 행태와 관행 모두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야하고 그 새로운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 소설가 이제하씨(이세기의 인물탐구:27)

    ◎“글을 그림처럼”… 절제된 언어의 마술사/「환상 리얼리즘」기법 구축,무의식세계 조파/사회 선입감·통념 거부… 쓰고싶은 글만 고집/「나그네는…」 이상문학상 수상… 시인·화가로서도 경지에 꾸부정하게 걷는 비뚤어진 걸음걸이,구겨진 청회색 점퍼에 벙거지를 눌러쓴 이제하의 모습은 카뮈의 뫼르소나 사르트르의 로캉뎅 일수도 있다.그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실 때도 마찬가지다.무심한듯 생각에 잠긴 묵연은 그대로가 시적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만사에 서툴고 세련된 티를 보이지 않는것도 이 예술가의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그러나 말 하기가 싫어 억지로 하는처럼 어눌하게 굴다가도 자신의 의지와 소신을 펼때는 드물게 치열함을 드러낸다.메마른듯한 그의 가슴에 정열과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때 뿐일것 같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단순한 소설가만은 아니다.시인이자 화가이며 화가이자 소설가다.그리고 타고난 다방면의 재능을 한 수준으로 고루 이끌어 자연스러운 자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1회 학원문학상수상 그가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때인 57년 여름,정식 데뷔보다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52년 마산동중시절 이미 「학원」지에 투고하여 그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는 전국의 문학소년소녀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었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보라빛 노을을 가슴에/안았다고 해도 좋다/…아아 밀물처럼 온몸에 스며 흐르는/노곤한 그리움이여/로 전개되는 「청솔 그늘에 앉아」는 박목월 조지훈씨의 심사로 제1회 학원문학상 수상과 함께 60년대까지 중3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의 지난 시절의 이야기에서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내 이름을 불렸을때의 그 가슴의 고동을 잊지 못한다』는 감격과 홍대 조각과에 진학하여 『대학 2학년이 될때까지 학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을 들수 있다. 너무나 순진한 나머지 그는 대학이란 강의시간이나 학점에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는 장소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그의 단순함은 문학쪽에서도 언뜻언뜻 엿보인다. 「현대문학」지의 시추천 완료후 그는 다시 신문의 신춘문예와 월간지를 통해 소설데뷔 관문을 거쳤고 당시 발표한 「유원지의 거울」「흰제비의 여름」또 속물과 진정한 예술가의 대립을 그린 「유자략전」등으로 「표현수법에 있어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뛰어난 압축미」「소설로 쓰여진 한편의 예술사회학」이란 호평속에서 문단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무한한 무의식을 자극하기 위한 그의 「초현실」이나 「잠재의식」등의 기법상의 탐구는 「쉬르계열의 그림을 느끼게하는 난해성」으로 지적되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환상리얼리즘」으로 표현,이를 설명하기도 전에 한 평자가 작품과는 상관없는 지연(지연),학연을 거론하면서 「환상과 현실이라는 두 대칭이 어떻게 한 이름으로 공존할수 있는가」란 의문을 제기하여 그는 한순간 환멸감과 모멸에 빠지는듯 했다. 그는 후에 「신뢰할수 없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없는 리더의식과 옹졸한 콤플렉스로 지연·학연·인정주의 따위로 섹트를 조성하고 60년대식,70년대식으로 작가를 구분하려 든다」고 통탄해 마지 않았다.「환상리얼리즘」이란 한낱 조어가 아닌 기왕에 있어온 미술상의 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를 잠시 소설에 차용한 것이지만 그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외형적 사회의식보다 개인의 무의식세계,그들의 꿈과 악몽을 다루기 위해선 초현실주의 기법을 취할수 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옳지않은 것,속된것,뻔뻔스러움과 적당주의는 그와는 맞지 않음을 명료하게 구분짓는다. 74년 채식주의를 테마로한 「초식」발표와 함께 현대문학상이 주어졌을 때도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여 문단에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모든 문학상이 일반적으로 너무 무난히 주어지며 과열된 문협선거에 얽힌 문단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다는게 수상거부의 이유였다. 작가의 시대적 책임이니 사명이니 하는 명제란 무엇인가. 그는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것은 당대가 직접 간접으로 요구하는 유형무형의 온갖 윤리감각」이라고 말한다.예의 「모든 사람들이 물을 원할때는 불을 이야기함으로써 물에 대한 감각을 없애주는 것이○수상 거부로 큰 파문 작가의 사명이며 책임일 뿐」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고해서 작가마저 부화뢰동하고 나서면 작가 본래의 본성이 와해되고 작품은 몰개성화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과연 『쓰고싶은 것을 써서 생존이 가능한 작가는 몇사람이나 되겠는가?』를 자문하고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로 팔아 연명하는 하릴없는 날품팔이』라는것과 이에따른 자책지심을 문단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자세는 문단초기인 신촌시절에서 동숭동 팔판동 지금의 평창동에 이르기까지 시종여일 변함없는 소신을 지키는듯 하다. 신촌시절에는 그의 부인(고행자씨)이 삐에로 의상실을 경영,화곡동에 집을 산적도 있으나 부인의 사업실패로 난생처음 가져본 집을 빚잔치로 없앴고 이 때의 고생을 바탕삼아 장편 「광화사」와 중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때도 여전히 『물리적인 힘에 물리적인 힘으로맞서는 것은 문학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문학은 대결로서 당장 결판을 보는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견디고 스며들고 녹이는 작업』임을 상기시킨 저 유명한 수상연설을 남기고 있다. 『문학에서의 가장 큰 고함소리는 침묵입니다.좋은 작품을 읽고 났을때의 그 멍청히 강요당하는 침묵­』 그리고 그의 소설은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림에서의 구성 색채 주제의 형상화 과정이 그 형식만 다르게 나타날 뿐 글쓰기와 많이 닮아있음을 강조했다.이는 일찍이 시인 김춘수씨가 그의 소설 「황색강아지」를 보고 「영화적 기법을 사용한 소설」이라는 지적과도 상통한다. 군제대후 조각과를 4학년 1학기에서 그만두고 서양화과 3학년에 편입,그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델보를 비롯,뭉크와 스텡 프란시스 베이컨에 빠져있었고 영화에 대해서는 한때 소형영화클럽을 만들만큼 영화광,요즘도 시간이 날때마다 청계천에 들러 레이저디스크를 복사해온다.비디오테이프만 8백여개.좋아하는 작품은 소련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꼽고 있다.그는 한때 까마귀를 비둘기처럼 뱃심좋게 훈련시켜 돈심부름을 시켜봤으면 바란적도 있고 팔판동에 살때는 밤 10시가 넘어 총리공관이 있는 행길까지 내려가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며 딸아이와 뛰어놀기도 했다. 한번은 딸아이(슬·고2)가 좋아하는 빵을 사기위해 호텔 지하에 위치한 제과점에 가려다가 호텔 직원에게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꺼부정한,초라한 행색이 사뭇 못마땅한듯 한참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그의 가방을 가리키며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 사람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한채 「총」이라고 대답하여 혼비백산시킨적도 있다.이 사회의 선입감,오래묵은 관념에 대한 특유의 냉소가 또하나 이제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시나리오 작업이후 일간신문을 비롯,월간지등에 「이제하 영화칼럼」을 쓰고 있다.좋아하는 영화를 마음껏 보고 마음껏 평을 쓴다.물론 본격적인 평이라기 보다 객석에서의 느낌을 좀더 심층있고 사려깊게 쓰는 식이다. ○노래엔 기품 가득 그리고 때때로 젊은 시인 가수들과 어울려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평소 대화때는 꺼들꺼들 쇠된 목소리를 내지만 노래할 때의 음성은 청량한 기품이 일품이다. 그는 이제 우리문단의 중진의 위치다.그의 말대로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예술을 성취해 가고 싶어한다.그래서인지 그에게선 느슨한 기는 찾아볼 수 없다.긴장을 푼듯 방심하고 무심한 속에서 오히려 감수성의 현을 전보다 더한층 팽팽하게 당기는 자세다. 그런중에도 친구들과 다양하게 교분을 트고 있고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간혹 그가 괴벽이나 기인기질을 지닌 것이나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반듯하다.선배나 후배들에게도 따뜻하고 정중하다.어느날 갑자기 그의 달라진 환경과 연륜과 함께 갑자기 표현하는듯한 속된 구석은 근원적으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그가 지닌 예술성과 인간미는 이 시대에선 몇사람 되지않는 「비범임에는 틀림없다.그래서 그의 예술추구는 정련되지 않은 생금에도 비유된다. 그 옛날 그가 시추천을 받을 무렵 미당이그의 시를 향해 「신시쩍 나무」라고 한것처럼 도무지 「가뭄」을 타지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정」,「우리의 공명선에 잘 직통하는 그의 특수어법」은 바로 그림으로 그려진 소설,소설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연보 ▲1937년 5월20일(음)경남 밀양출생.이해동씨와 김일선여사의 3남매중 독자 ▲1946년 마산으로 이주 ▲1953년 마산 고1 시「청솔그늘에 앉아」로 제1회 학원문학상 ▲1956년 마산고졸「새벗」잡지에 동화「수정구슬」당선 홍대조각과 입학 ▲1957년 「현대문학」에 시「노을」「설야」「바다」서정주추천 신태양사 「황색강아지」당선 ▲1958년 「소설계」중편 「나팔산조」 준당선 ▲1961년 군제대후 홍대조각과 4년에서 서양화가 3년으로 편입,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손(수)」입선 ▲1964년 육십년대 사화집동인(성찬경·박재삼·박회진등) ▲1966년 연작동화 「노래하는 돌」(신아일보연재) ▲1969년 동화 「느림보의 다섯가지 수수께끼」(대한일보연재) ▲〃 문제작 「유자략전」발표로 화제 ▲1973년 첫 창작집「초식」(민음사간) ▲1974년 「초식」으로 현대문학상 수상했으나 수상거부 ▲1977년 꽁트 스케치집「새」(수문서관간)「소설문예」 창간 편집위원 ▲1978년 창작집 「기차,기선,바다,하늘」(홍성사간)월간「수상」(월간 에세이 전신)주간 ▲1979년 화랑협회 계간지「미술춘추」주간 ▲1982년 첫 개인전,개전기념시집「저어둠속 등빛들이 느끼듯이」(청하간) ▲1983년 일러스트집「사라의 눈물」(우석사간) ▲1984년 서양화 10인 소품전·문학선집 「밤의 수첩」(나남간) ▲1985년 중편「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발표(이장호감독으로 영화화) ▲1986년 동화집「노래하는 돌」(샘터간)장편「광화사」(한국일보연재) ▲1987년 장편「광화사」1·2부(문학사상간)「소녀유자」(문학사상 연재) ▲1988년 장편「소녀유자」(고려원간)장편「시습의 아내」(경남매일연재)수필집「길떠나는 사람에게」(동아간)이상문학상수상전집「임금님의 귀」(문학사상간) ▲1990년 장편「진눈깨비의 결혼」(청맥간)문학선집「포말위의 식사」(강천간) ▲91­현재 창작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외 창작들 재간.영화칼럼집「시네마천국」(우리문학사간) 이상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수상.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2)

    ◎길림시절:11/「공청」가입시기의 허구/30년에야 조직된 길림지역 공청/“26년 스스로 결성했다” 억지주장/대중국 관계변화 따라 왜곡 거듭 우리가 가령 북한 민중에게 김일성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할 것 같으면 어떤 대답을 할 것이겠는가.아마도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생각된다.『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찍이 혁명의 길에 나서신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 유례없이 간고하고 복잡한 조선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고… 조국청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시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위의 문장과 같이 거의 천편일률식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들은 김일성이 「조선혁명」을 시종일관하게 이끌어 온 타고난 공산주의자로 밖에 알고 있지 않는다. ○한때는 “가입”으로 그러나 그는 사실은 타고난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공산주의사상으로 일관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그것은 무엇보다도 공산당원이나 공청맹원으로 있었는가 어떤가하는 문제에 대한 그의 체계적인 변조작업으로 알 수가 있다. 그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가 어떤가를 헤아리는 시금석으로 되는 것의 하나가 공청에 가입했는가.가입했다면 어느 공청에 들었는가,가입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공산당에서 어떻게 처신했는가란 문제들이다.이 문제는 중요하므로 그의 언행을 해방후부터 검토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김일성은 지금은 공청을 자기 스스로가 「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해방직후부터 60년대 중반까지는 줄곧 공청에 「가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20여년간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것은 다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는 그 제1기에는 자기가 중국공산당 계통이었다고 은연중에 주장하고 있었다.연도별로 그 사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46년… 「장군은 중학 재학 중인 15세에 벌써 중공 공청에 가입하였다」 한설야의 「영웅 김일성장군」7면 49년… 「장군은 재학중인 1926년 ,15세가 된 해에 벌써 공공산주의청년동맹에 참가하여 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조선민족해방투쟁사」 3백16면 52면… 「1926년 중학 재학중에 김일성장군은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었다」「김일성장군의 약전」 그는 이상과 같이 해방후 약 10년간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전기작가들에게 자기가 공청에 가입했다는 주장을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였다. ○중공군지원 감안 그 내용을 보면 우선 한설야는 해방직후 김일성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는 말을 들어서 이 말을 그대로 그의 저서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권력을 틀어쥐게 된 김일성은 그후 얼마 안가서 중공에 몸을 담았던 일을 자기 경력에 흠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중공 공청 가맹」이란 주장을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중공 공청은 26년 당시 그 명칭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었는데 북한에서는 49년에 이것을 「공산주의청년동맹」이라고 고쳤다.중국이란 국명을 삭제하고 단을 동맹이라고 변경하여 국적불명의 공청으로 변조한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나 조선노동당의 기관지 노동신문에 게재된 52년 전기에서는 이 왜곡을 약간 시정하고 있다.이 전기는 김일성의 직접적인 검열을 받아 공포된 것이었으나 그 공포시기는 중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전쟁 시기였다.중국공산당 출신이라는 경력을 은폐할 환경이 아니었던지 그는 중국이란 국명은 여전히 삭제하면서도 「동맹」이란 날조는 「단」으로 되돌리게 하여 이 공청이 중국계통이라는 것을 풍기게 하였다. 이상 그는 해방후 약10년간은 마치 자기가 1926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한 것처럼 행세하였다.당시 「조선혁명」을 수행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출신이 중공계통임을 숨기려고 하고 있었다.그러나 김일성이 26년에 중공 공청에 가입한 사실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에 성립되었는데 이 당이 만주에 손을 뻗친 것은 22년의 일이다.진위인 등이 맨먼저 하얼빈으로 침투하여 신문을 발간하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그후 25년 11월에 오려석이 공산당과 공청단 조직을 정비하여 하얼빈특별지부를 성립시켰다.이 지부가 기반이 되어 26년 봄에는 중공북만지방위원회가 발족하게 되는 것이다.또 주순,대연지구에서는 등중하의 손으로 25년 7월에 중공 대연시지부가 만들어졌고 봉천에서는 25년 8월,임국정이 중공 봉천시제일개지부를조직하였다. ○만주위 28년 결성 만주 전역을 지도하는 만주임시성위원회는 진위인,오려석이 1927년 10월에 봉천에서 조직하였고 28년 9월에는 하얼빈에서 이 조직이 정식으로 만주성위원회가 된다.이때 왕학수가 공청단 공작을 맡고 있다. 28년 말,중공만주성위가 지도하는 지방조직은 하얼빈,봉천,심북,연변 그리고 대안,안동,무순에 있었고 그 중공당원은 합계 2백70명이었다. 중공조직이 길림에 침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30년 쯤이다. 김일성이 중국 공청에 가입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26년 당시 길림에는 그러한 조직은 없었던 것이다. ①「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혁명역사」1면 ②평전 145면이하 ③동북근현대사강 상성편 1987년 동북사범대학 간 139면 ④평전 147면
  • 독일군 해외파병 되도록 신중하게(해외사설)

    유엔의 소말리아 구호작전에 독일군이 참여토록 한 연방의회의 결정은 기본법의 개정 여부에 관계없이 독일의 외교및 안보정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결정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이같은 결정으로 독일의 정치적 사고가 군사화돼서는 안될 것이다. 독일은 이미 캄보디아에 위생병을,걸프전 당시 소해정을,보스니아에의 구호품 수송과 비행금지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한 공중조기경보기에 독일군을 파견한 바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의회의 결정은 독일영토및 나토동맹의 방위를 위해서만 독일군이 배치될 수 있다는 이제까지의 오랜 관행을 깨뜨리는 것이다. 좀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소극적 독일」은 이제 끝났다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로써 곧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더많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전쟁억지를 위해 독일군이 배치될 수는 있지만 전세계에 독일군이 배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이 점에 있어서 독일군의 보스니아 파병을 유보시킨 콜총리는 올바른 방침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군의 해외파병 문제에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한다.독일은 단지 독일이 줄수 있는 지원을 제공할수 있을 뿐이다.독일이 모든 점에서 다 책임을 떠맡고자 한다면 어떤 한가지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연방의회의 결정으로 독일은 분명 한 고비를 넘었다고 할수 있다.그러나 독일이 서방동맹의 믿을수 있는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 또 독일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외파병 문제에 있어서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 미,“북핵 다각 대책강구”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로버트 리스카시 주한미군사령관은 21일 미상원 국방위청문회 보고를 통해 북한 핵문제와 관련,『우리는 협상과 대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실패할 경우 북한에 대해 압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스카시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단기적인 대응은 그들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회원국으로 남아있도록 하는 동시에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핵사찰을 받도록 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우리의 강력한 전쟁억지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새정부 개혁정책 전폭 지지/김수환추기경 기자간담회

    ◎언론·종교계도 적극참여 긴요 카톨릭 김수환추기경은 19일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개혁정책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깨끗하게 시작하자는 차원에서 전적으로 찬성하고 지지를 보내며 언론계·종교계도 이에 적극 참여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김추기경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사견임을 전제,이같이 말하고 『공직이 깨끗해야 나라전체가 깨끗해지는 만큼 이를 계도해나가고 있는 언론도 스스로 깨끗해지려는 노력을 할때 신뢰를 받을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종교인 재산공개문제와 관련,현재의 추세라면 종교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카톨릭도 교회재정부터 공개토록 해 신자들에게 교회의 형편을 솔직히 알리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어야지 억지로 밀려서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추기경은 특히 『개혁을 추진하는 대통령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이 어느때보다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개혁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언제든 반격을 가해올 수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사제들에게도 정부를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휴일 잊은 유세전 치열/개혁·재산파문 싸고 공방전

    ◎보선 합동유세 마감 【부산·광명=박대출·이기철·진경호기자】 부산 동대갑·사하,경기 광명등 3개지역 보궐선거의 합동유세가 18일 끝남에 따라 각후보간의 우열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여야는 후보간 우열의 차가 미묘한 접전지역에서는 정당연설회등을 개최,대세를 판가름짓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어 선거전은 갈수록 뜨거워질 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보선은 정부의 공명선거가 어느때보다 강한데다 문민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한 평가의 성격이 짙어 이변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때문에 지역별로 각 후보들은 막판 악재로 작용할수 있는 금품수수,선물돌리기등을 자제하는 대신 유세를 통해 개혁성을 강조하거나 지역내 시장·출퇴근길을 누비며 악수공세를 펴는등 비교적 차분한 선거전을 치르고 있다. 또 각당은 이번 주에 실시될 취약및 전략지역에 대한 정당연설회가 승부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판단,연설회 세부일정을 마련중이다.민자당은 20일 광명,21일 사하지역에서 정당연설회를 개최할 예정이다.이날 3개 지역에서 실시된마지막 합동유세에서 각 후보들은 새정부의 개혁정책과 금융실명제실시,재산공개 파문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부산 사하국교에서 열린 사하지역 유세에서 민자당의 박종웅후보는 『김영삼대통령을 15년간 보필한 경험으로 중단없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지지를 호소했으며,민주당의 김정길후보는 『개혁은 여야의 싸움이 아닌 수구대 개혁세력의 싸움이므로 야당내 개혁인물인 나만이 김대통령의 개혁을 성공시킬수 있다』고 이에 맞섰다. 경기 광명에서 민자당의 손학규후보는 『사이비언론과 관련,소속의원이 구속됐는데도 민주당은 책임있는 공당으로서 사과는 커녕 야당탄압이라고 억지만 계속하고 있다』며 『이런 야당에 어떻게 의석을 내줄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반면 민주당의 최정택후보는 『겨우 재선인 의원이 어떻게 민자당 최고위원이자 포철회장이었던 박태준전의원에게 공갈·협박할수 있느냐』며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했다.
  • 「사정의 경제위축론」을 배격한다(사설)

    부정·부패척결을 경제와 연관시키는 논리아닌 논리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3공화국 때 부터 사정당국이 부정·부패척결에 착수하면 언제나 경제가 위축되니 조기에 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가 정치권과 재계 등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기득권층억지 논이 말도 안돼 이른바 권력형 비리나 정경유착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계층의 자기보호인 이 주장이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에서 통용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정통성을 갖지 못한 권위주의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그 돈은 정치자금 명목으로 주로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거둬 들였다.대기업들은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대형이권을 따내거나 낙하산식의 거액대출을 받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과거 사정당국이 경제부정과 비리를 수사하다 보면 거의가 그 귀결점은 권부 또는 정치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풍문이 나돌았다.그때마다 사건이 흐지부지 되거나 경제를 위축시킨다는 명목으로 권력형 비리가 봉합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6공 때만 해도 수서지구 택지 특별분양사건,건영아파트 특혜사건,정보사 땅사기 사건등 굵직한 부정 또는 비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그러나 결과는 풍문과는 전혀 다르게 단순 사기사건 내지는 일부 정치인이 관련된 사건으로 종결되고 말았다.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니냐는 소문만 난무한채 봉함됐던 것이다. ○부정척결,경제정의 실현의 길 새정부가 정경유착과 단절을 선언하고 경제부조리의 척결에 나서자 일부에서 경제위축론을 들먹이고 있다.그들의 주장대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기업이나 관련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그러나 그것이 나라경제 전체를 위축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부조리와 비리제거는 공정한 룰을 통한 자유경쟁의 틀을 형성하자는 것이다. 정경유착을 통해 각종 부정과 부패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과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분명해진다.부정·부패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원리인 자유경쟁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에 그 폐해가 무서운 것이다.부패와 부정이 판을 치는 나라치고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정착된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또 경제정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선진국 진입 역시 불가능하다.경제정의가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수록 불로소득이 만연한다.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는 일확천금과 황금만능주의로 오염되어 있다.그런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우리경제가 중진국권에 진입한 후 비틀거리고 있는 주요 원인의 하나가 거기에 있다. 부정·부패척결은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자본주의의 기본원리인 자유경쟁의 풍토를 확립하자는 것이다.김영삼 대통령이 엊그제 『부정 부패의 척결이 경제를 위축시킨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밝힌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김대통령은『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고질적인 경제성장의 장애요인을 과감히 수술해야 한다』고 밝혔다. ○금융·세무분야부터 우선해서 새정부 사정당국이 현재 펼치고 있는 금융부조리 제거와 세무비리 조사는 경제 재도약을 위한 시동이다.금융기관의 대출 커미션은 기업의 금융비용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금융비용이 과다하면 과다할 수록 그 만큼 우리상품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경제외적인 비용이 원가에 얹혀짐으로써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무비리 또한 동일하다.상품생산과 관련이 없는 부정한 돈거래가 많은 나라의 상품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국내적으로는 조세정의를 흔들어 놓는다.권력계층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사실이 이번 재산공개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금융부조리와 세무부조리를 덮어 두자는 해괴한 주장은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기득계층들의 자기보호이다.그것은 새정부의 개혁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의 움직임이기도 하다.그래서 국민들은 사정을 구실로 한 「경제위축론」을 경계할 뿐아니라 단호히 배격해야 할것이다.
  • “일의 안보리상임이사국 진출 긍정적”/공노명 신임 주일대사 회견

    ◎신한국 걸맞는 대일관계 구축에 진력 공로명 신임 주일대사(61)는 12일 현지 부임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외교관으로서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로 알고 신한국에 걸맞는 한일관계 구축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대사는 『양국은 그동안 미래지향적 관계를 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군위안부문제등 과거사가 계속 걸림돌이 돼 참다운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면서 『이제는 서로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국교정상화 30년에 어울리는 노숙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일간 현안을 열거한다면. ▲종군위안부문제,무역역조 시정,문화교류등을 들 수 있다. 종군위안부문제는 일본측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 우리 정부의 용단에 의해 해결의 실마리가 열렸다.이는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보다 밝은 양국관계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균형감각을 갖고 대응하면 쉽게 해결될 전망이다. 무역역조는 자본재및 중간소재를 일본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따라서 단시일내에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본다.특히 기술이전은 상업적 고려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 스스로의 기술개발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교류는 국민정서에 미치는 영향때문에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광복50년이 가까워 오는 만큼 좀더 자연스럽게 처리하면 대중예술을 건전하게 교류하는 길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우리 입장은. ▲개인적으로는 국제사회의 흐름이 일본에게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공헌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긍정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현재 미국뿐 아니라 일제의 지배를 경험한 바 있는 동남아 국가 국민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일본의 리더역할에 대해 90%이상의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정부는 세계전략상 미국과 일본이 축이 돼야 하지만 일본의 군사대국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누누이 천명해왔다.이를 위해서는 균형자 또는 억지력으로서 미군의 동북아주둔이 계속 필요하다. ­일왕의 방한 전망은. ▲일왕의 방한은 정치적상징성이 매우 크다.언제 이루어지느냐는 두고봐야 한다.목적에 어긋나는 의도가 개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있어야 한다.
  • 신한국창조­한·미·일관계 어떻게 펼쳐질까

    지금 세계는 첨단기술의 발달로 경제의 국제간 상호의존관계가 날로 심화돼가고 있다.그러나 그에 걸맞는 평화의 제도화는 정착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오히려 공동번영의 논리보다는 국익지향적이며 중상주의적 정책기조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상황전개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특히 화해와 협력을 가로 막는 북한의 핵개발의혹,경제와 기술우선주의의 국제관계에서 통상이 곧 안보의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신한국창조」의 깃발을 치켜든 새 문민정부에게는 이같은 도전을 극복해야할 슬기로운 전략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이에 서울신문사 정경문화연구소는 새 문민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재조명하고 향후 지향해야 할 외교·통상·통일안보 차원의 대응전략을 점검해보는 국제학술회의(9∼10일·프레스센터)를 마련했다.다음은 주제발표의 요지이다. ◎서울신문사 정경문화연 주최 학술토론/주제발표 요약/통상·무역/미의 대한·일 무역정책/자유무역 체제 존중·강화가 대세/보호주의 우려보다 협조태세를/에드워드 린컨 미 브루킹스연,연구원미국과 한국에 새정부가 나란히 들어섬에 따라 미·한·일 사이의 경제관계를 새롭게 고찰할 필요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지난 10여년은 이들 국가간에 상호시장접근과 관련한 갈등이 점증되어온 기간이었다.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이같은 갈등과 분쟁이 기존의 자유스러운 국제무역관행을 저해하면서 더욱 증폭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다.미국의 클린턴 신정부는 해당국가들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자유 무역관행과 체제를 존중하고 강화시키는 정책을 취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으며 이 논문은 이같은 언명에 바탕을 두고있다.그러나 클린턴정부의 약속이 실제화되기 위해서는 타국의 자발적인 조정작업이 요구되는데,여기에는 한국과 일본이 포함되는 것이다. 새로 들어선 클린턴정부는 12년간 지속된 공화당정권을 대체하는 만큼 국내및 국제정책 전반에 관한 광범위한 재검토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공화당때보다 보호주의적 색채가 강해질 것이라는 걱정이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손에 잡힐듯 부풀어 오르고 있으나 정작 미 신정부의 국제경제 정책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난 바 없다.오히려 우호적인 몇가지 징조가 떠올랐다.미국과 일본·한국의 동북아 제국간의 무역관계에 지난날보다 더 건전한 기반을 제공할 것이란 점에서 이같은 긍정적 사태발전에 주목하고 싶다.이 논문이 우호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짚은 대목이 막상 일본이나 한국이 머리속에 그리고있는 긍정론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나 본인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아 클린턴정부가 약속대로 정책 수순을 밟는다면 미국과 동북아제국간의 경제관계는 더욱 공고해지리라고 본인은 확신한다.그러므로 일이 제대로 시행되어졌을 때의 이득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과 일본정부는 보호주의에 대한 편벽된 염려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목표의 달성을 위한 협조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클린턴 신정부의 등장은 미국의 경제정책이 대내외를 막론하고 새로운 방향을 취할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하다.새 정책노선은 국제경제체제를 강화하는 성격을 지녀야한다.그러나 동시에 한국정부는 이같은 새 정책의 실시가 몰고올 미국의 거시경제적 변화를 사전에 짐작하고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이변화는 대미수출 신장률 저하,미 수출고의 증가,그리고 한국의 대일 적자증가 위험 등이다. 국제무역체제는 재화와 자본의 시장개방을 추구하는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장자유화의 진척에 이 체제의 관건이 걸려있다.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관련회원국 수가 많은 가트에만 의존해 시장자유화를 밀고나갈 수는 없다.이에따라 배타적인 지역그룹 형성이 시도되고 있으나 이또한 해당국들의 경제규모가 상이하는 등 효과적인 체제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동북아에서는 지역간 자유거래 모형이 최선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다.시장개방의 확대를 주목표로 설정한 가운데 현상황에서는 배타적 지역그룹이나 철저한 쌍무체제보다는 그래도 가트체제에 따르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가트체제 밖의 지역적 문제일 경우에는 현재의 아시아태평양경제회의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린턴 정부의 대아정책/동아권 집단 안보기구 창설 절실/미도 대우방 외교노선 수정 시급/차머스 존슨 미 캘리포니아대교수 냉전종식으로 구소련의 군사위협이 사라진 지금 동북아의 정세는 일본 및 한국,중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 집권 자민당을 지원해 왔던 냉전시대의 대일본외교노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 한반도에 주둔시키고 있는 미지상군도 철수해야 한다.한국군의 전투력이나 미7함대가 보유한 핵억지력은 북한의 위협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 구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대중국정책도 앞으로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게 될 위상과 민주화과정을 주시하면서 수정을 꾀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이 국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국의 입장에서 향후 이 지역에 대해 취해야 할 정책은 무엇인가. 냉전이후 세계는 빠른 속도로 국가간 경제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또한 소련과 체코연방등에서처럼 분리·독립등 사회적 분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이 두 현상은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국가간의 경제관계 확대로 각국 국민들간에는 상호연계성이 한층 높아진 반면 나라안으로는 국민들사이에 정치적 일체감이 약화됐다. 이같은 경향은 아시아의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 측면의 국가통합과 사회적 측면의 국가분화현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 지는 쉽게 판단내릴 수 없다. 다만 앞으로의 국제분쟁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벌어질 것이고 이에따라 국제적 통상관계 또한 전쟁에서와도 같은 논리를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와 안정속에 세계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적으로 국가들간에 적절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동아시아지역은 이제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시점이다. 냉전이후 지금까지 유럽의 안보체제는 다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의 안보체제는 미국과 일본,미국과 한국등 전적으로 쌍무적인 성격을 띠어 왔다. 흥미롭게도 미국의 클린턴행정부는 동아시아에 유럽안보협력위원회(CSCE)를 모델로 한 「범아시아 안보기구」의 창설을 다음달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각료회의에서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친소관계가 복잡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할 때 이에대한 아시아 각국의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우선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입장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이고 아시아에서 미군철수가 전제돼야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의 안보기구 창설은 무엇보다 어느 한 나라가 패권을 잡지 않는 상태에서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미국의 조정역할이 중요하다.한국과 베트남을 완충지대로 한 가운데 중국·일본·ASEAN이 힘의 삼각축을 이룬 안보체제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있는 지상군을 철수하는 대신 한반도의 통일을 적극 지원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통일한국이 중국의 안보와 안정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외교적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의 무역정책과 한국대응/미서 선별적 보호무역 가능성 높아/한국은 대미 신뢰감 심는데 주력을/유장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변화와 개혁을 내세운 민주당의 클린턴대통령이 등장함으로써 미국의 경제정책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경기부양책이 그 핵심을 이룰 것이다. 현재 미국 경제는 경기회복,생산성향상을 통한 국제경쟁력 제고 및 소득불균형 해소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따라서 미국은 자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강력한 쌍무적 통상압력이나 보호무역 주의적 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 클린턴정부는 과거 공화당 정권으로 부터 심각한 경제난을 상속받았다.약화된 미국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실업을 줄이고 취업을 늘려야 할 처지이다.이를 위해 클린턴정부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누차 강조했다. 이는 향후 미국의 통상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될 전망이다.정부의 적극적 시장개입은 클린턴정부의 통상정책이 과거 행정부의 시장자유화와는 달리 관리무역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무역을 기본원칙으로 하되 선별적 보호무역 주의의 성향을 띨 것이다.이같은 선별적 보호무역 주의의 대표적인 예는 최근 외국산 반도체 및 철강제품에 대한 미상무부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 예비판정에 이은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반덤핑 최종 판정이라 할 수 있다. 클린턴정부의 통상정책 방향은 그러나 향후 1∼2년간의 미 국내 경제상황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또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의 타결이 계속 지연되거나 실패할 경우 클린턴정부는 다자간 무역체제보다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지역주의에 더욱 치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협상력이 약하고 해외시장,특히 미국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UR가 실패할 경우 더욱 거세질 미국의 쌍무적 통상압력을 고려,UR의 성공적 타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UR의 타결로 인한 시장개방 확대와 국내 제도의 국제규범화는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구조 조정의 일환이란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와 함께 NAFTA의 배타적 지역주의 가능성에 대비,통상외교를 강화해야 하며 다자간 협상에 적극 참여,역외국이 당할 수 있는 불이익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특히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나 구소련및 동구국가와의 유대강화는미국시장에 치중된 한국 수출의 다변화라는 이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아·태경제협력체(APEC)를 통한 이 지역의 경제협력도 세계 경제질서의 지역주의화 또는 쌍무주의화를 견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것이다. 끝으로 한미간의 통상문제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양국의 행정부가 경제관계를 새로이 설정한다는 측면에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에 신뢰감을 심어 주는데 주력해야 하며 특히 기업환경 개선방안(PEI)등에서 합의된 사항을 성실히 이행해 나가야 한다. 이와 함께 제3단계 금융시장 개방계획의 실시시기나 내용도 국민경제 전반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해 종합적이고 설득력있게 작성해야 한다.
  • 김 대통령·언론학자 일문일답

    ◎“언론사공개 시간문제로 본다”/“신문의 소유와 경영 분리돼야” 다음은 김영삼대통령이 6일 신문의 날을 앞두고 언론학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요약이다. ▲이상희교수(서울대)=파출소에 철망을 뜯어내는 것 보면서 뭔가 크게 달라지는가 실감했다.정치란 아주 쉬운것 같다.백성 좋아하는 것 하면 모든 것이 풀어진다는 걸 본다.언론에 대해서도 억지로 협조요청하지 않아도 좋은 방향으로 기사가 나온다. ▲서정우교수(연세대·한국ABC협회장)=어제 조카들이 와서 청와대 앞길로 왔다갔다 했다.국민들이 원하는 것 작은 하나라도 풀어 놓으니까 좋아하고 감격한다. ▲김영삼대통령=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음의 부자가 된 것같다. ▲서교수=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1년쯤 가면 국민의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가속도가 붙어 모든 부분에 변화가 일것이다. ▲최창섭교수(서강대)=저수지에 괸 흙탕물을 빼내면서 맑은 물로 채워가면 곧 저수지가 맑아진다.우리 언론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독자와 광고주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언론이 정치권에 공개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제 언론도 스스로 공개해야 한다. ▲김대통령=요즘 사이비언론의 폐해가 대단히 크다.지방에서의 언론폐해가 극심하고 중앙에서도 폐해많다.여려 약점 이용해서 한다. ▲서교수=신문이 부수를 공개하면 문제가 해결된다.어떤 신문은 편집국장이 두명인데 1명이 내근이고,1명은 광고모으러 다니는 것이 주임무다.지금 청와대를 비롯해 모든 것이 바뀌어져 가고 있는데 언론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김대통령=요즘 인쇄하는 신문의 80%정도 읽지않고 내버린다고 한다.엄청난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다. ▲이교수=일본 명치시대에 언론폐해가 커 언론규제법을 제정했었으나 그부작용도 컸다.요즘 일본서는 신문사 내부의 자성운동과 독자들의 고소·고발을 통한 시민운동이 언론을 정화시켜 나간다. ▲유재천교수(서강대)=언론만이 잘못된 것 아니다.그동안 우리사회에 쌓여온 먹이사슬의 부패구조 때문이다.우리사회의 부패구조가 사라지면 사이비언론도 자연히 사라진다. ▲서교수=남의 재산은 공개하라면서 신문 스스로는 아무 것도 공개하려하지 않는다.신문의 과당경쟁으로 자원낭비가 이만저만 아니다.하루 3백만부의 신문이 읽히지도 않고 쓰레기로 버려진다.연간 1천5백억원의 낭비다.저울을 놓지않고 고기를 팔면 실정법 위반인데 언론이 그렇다. ▲이교수=신문소유형태에 문제가 있다.신문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하고 경영과 편집권 또한 분리돼야 한다.기자가 수집한 정보를 특정기업 또는 개인이 활용한다는 것은 가공할 일이다. ▲김대통령=잘못된 부분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고쳐나가자.다 공개하자면서 스스로 공개않는 것은 정통성의 문제때문이다.신문들이 과소비중의 과소비를 하고 있다.지금 우리사회는 큰 변화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명예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누구도 역류할 수 없는 변화의 물결이다.모든 부문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공개는 시간문제라고 본다.그렇게 돼 갈것으로 본다. 김대통령은 이어 이날 하오 청와대기자실에 들러 출입기자들과 환담한뒤 「신문고」를 직접 쳐 보였다.
  • 새정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7)

    ◎길림시절:6/「조선인 길림소년회」 조직설/민족주의자들이 28년경 만든 단체/“27년 결성주도”… 대조직가로 행세 김일성은 좌익문헌을 읽은 것이 자기 「혁명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봉건군벌 장작상이 지배하는 중국의 오지 길림에서 그것도 1927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김일성은 전기에서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독서조 지도 억지 그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내어 오마항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갔고 또 육문중학교에서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나중에는 몸소 비밀독서조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독서실로 만들어 거기서 좌익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그가 도서주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유층의 자제가 가는 육문중학교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구입할 리가 없고 봉건군벌이 경영하는 우마항의 도서관도 그런 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또 비밀독서조란 것도 29년에 상월선생이 한 독서모임을 자기가 조직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회고록은 이와같이 별로 좌익서적에 접하지도 읽지도 않았던 그를 대독서가로 만들어 놓았다.그 다음에는 그를 대조직가로 변신시키는 차례인데 그 첫번째가 길림소년회 결성이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 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그 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예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박일파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여기서는 길림소년회의 조직자가 「우리」로 되어 있고 김원우·박일파의 이름도 보이지만 여태까지의 전기들은 한결같이 김일성 혼자가 길림소년회를 결성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점조작 들통 조선인길림소년회는 여러가지 증거로 보면 27년이 아니라 28∼29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최형우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소년운동 지도자의 일인으로 일년유여의 시일」심혈을 짜냈다고 쓰고 있다.따라서 김일성은 28년부터 29년 5월에 퇴학할때까지 1년 남짓 소년회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또 이명영교수는 1917년생인 최진무씨가 13세가량이었을 때 길림소년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이 증언에 의하면 29년경 김일성은 길림소년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회고록은 이 기림소년회 이외에 길림에는 민족주의자가 만든 이름뿐인 소년회가 따로 있었다고 하고 있다.김일성이 참가한 소년회는 민족주의 조직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1930년 당시 길림에는 두가지 소년단체가 있었다.그 하나는 길성소년탐험대로서 공산당의 종파인 ML파의 표현단체 주중한인청년동맹 계열이었다.대장은 김일영,제1반장은 허성,제2반장은 진규삼이었으며 정미소 복흥태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고록의 상기 인용문에 나오는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란 김일성이 있었던 길림소년회가 아니라 이 길성소년회가 거점으로 한 복흥태를 말한다.그는 자기와 그 입장이 반대되는 이 공산주의 길성소년회의 거점을 제멋대로 「길림소년회의 독서실」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29년 5월에 길림소년회를 떠났는데 이 조직은 29년 11월에 길림소년탐험대라 개칭하였다.30년의 일본기록은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산하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지휘를 받는 이 소년조직에 대하여 그 본부도 구성원도 적지 않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조직의 본부는 손정도의 예배당이었다. 이 길림소년회에 대한 1930년의 일본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년회.예년 5월 제1요일을 소년데이로 정하고 운동회 등을 열고 있다.본년(1930년)은 5월4일이 마침 소년데이에 상당하므로 당일 유길학우회원 김인기,박일파의 사회로 신개문 외 야소례배당에 소년 약20명을 모아서 간단한 기념식을 행하였다. ○29년경 “회원” 증언 그후 소년데이라고 쓴 지제의 수기를 하나씩 배급하여 오후1시부터 강남공원으로 가서 과자를 일동에게 분배하여 유희를 하고 동 5시경 무사히 철수,해산하였다.」 요컨대 조선인 길림소년회란 28∼29년은 정의부,29∼30년은 국민부에 속하는 소년단체였다.김일성은 이러한 소년회에 28년 무렵에 들어가 29년경에 회장으로 되었다.그리고 만약 길림소년회가 27년에도 있었다면 그가 이해 8월경에 입회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소년회가 「27년 4월 그가 결성한」조직일 수는 없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08면 이하 ②같은 책 238∼9면 ③평전 113면 ④평전 112면
  • 무용가 이매방씨(이세기의 인물탐구:22)

    ◎날듯한 보법·절묘한 선… “타고난 춤꾼”/안으론 한·밖으론 허공 다스려 관객심혼 울려/「살풀이 춤」은 “미학의 극치·최고무작” 평가받아/옳지않은 일 못참고 욕설잘하는 자유분방한 성품 천명이고 만명이고 관중들의 오장을 속속들이 뒤흔들어놔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매방,타고난 춤꾼 신들린 춤꾼인 그의 괴팍한 성격은 무용계에서는 알아주는 막무가나다.비위가 틀리면 어른이고 제자고 눈에 보이는것이 없다.주춤거리거나 남의 눈치를 본적도 없다.한번 입을 떼기 시작하면 몇시간이건 쉬지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댄다.세상의 욕이란 욕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것이 없을 것이다.그야말로 제멋대로 살아온 자유분방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가 춤추기 시작하면 온몸으로 삼라만상을 보여주고 산천초목을 움직인다.미끌어질듯 날듯말듯 비스듬히 포개고 떼는 보법이며 무겁게 들어올렸다가 날카롭게 뿌리치는 광대한 능선,긴 날개처럼 펼쳐지는 장삼자락에는 냉혹한 귀기마저 감돌아 관객은 어느순간 전률에 몸을 떤다.아름답고 눈부신 보석같은 춤만으로도 그래서 그의 허물들은 눈녹듯이 용서된다. 마치 무당이 굿을 하지않으면 신병에 걸리듯 천수북을 앞에놓고 변죽을 울리면서 연풍대로 몸을 젖혀 엎어치고 휘돌아야만 살맛이 나는 모양이다.그중에서도 그의 보념승무는 염불장단과 굿거리 사이사이에 현란하게 두들겨대는 북춤이 일품이다.인간의 고통스러운 열정과 비애를 북가락에 실어 남도특유의 흥과 멋을 종횡무진으로 엇가른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는 아현동에있는 그의 연구소에서 한쪽 귀퉁이에 휘장을 치고 연탄불에다 냄비밥을 끓여먹었다. 결백증이 심해 돈이 오가는 풍조를 체질적으로 경멸하는데다가 재능이 없어보이면 처음부터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이곳저곳 떠도는 방랑벽,훌쩍 떠나고 소리없이 머물면서 긴 정착을 꺼리는 성격탓에 마뜩한 거처하나 마련하지 못했었다.그의 부대끼는 삶의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누이가 2년전 타계하면서 유산으로 남겨준 연구소옆 허름한 아파트가 60평생에 처음가져보는 제집일 것이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현관에 들어서면 마루한가운데 왜정시대때나 볼수있었던 낡은 싱거미싱한대가 놓여있다. ○무용복 손수지어 입어 그는 옛날부터 꼼꼼한 바느질솜씨로도 유명하다.무용발표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춤이 훼손될것을 걱정하여 복색일체를 손수 지어입는다.화장과 도련 소매부리를 재단하고 재봉틀에 누비는 귀신같은 솜씨는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룰 정도다. 정종 3병의 술실력,4,5년전까지 만해도 주정·주사가 극심하여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면 욕설을 퍼붇거나 남의 멱살을 잡기가 일쑤였다. 60년대중반 발레하는 이인범씨와 국도극장 악극단 쇼에 나간것이 말썽이 되어 무용협회가 이들을 제명처분하려던 사건은 무용계의 잊지못할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징계사실을 사전에 안 그는 술을 잔뜩 퍼마시고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으로 쳐들어가 기물을 부수는 등 광란의 주란을 부린 적이 있다. 「먹고 살자는 일인데 너희들이 내게 돈을 줬느냐 쌀을 줬느냐」 게다가 누군가가 그의 춤을 ‘기방춤’으로 격하시키려하자 「궁중무를 빼고 기방춤이 아닌것이 뭐가 있느냐? 너희춤은 양춤이냐발레춤이냐? 뿌리도없는 형식춤을 어디다대고 비교하느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막상 그의 신랄한 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오히려 한말이래 변질되지않고 원형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그의 춤』을 정명호씨(중대교수)등 여러사람이 감싸주었다. 77년 서울 YMCA강당에서 열린 그의 춤을 보고 원로언론인인 홍종인씨는 이례적으로 「속절없는 슬픔과 기쁨을 아로새겨 나가는가 하면 기쁨도 슬픔도 초월한 파탈의 경지로 솟구쳐오른 황홀」이라는 찬양의 글을 써서 세인의 관심을 모았었다. 또 여성적 미학의 극치로 칭해지는 그의 「살풀이춤」은 극도의 긴장과 절제,어둠과 밝음,괴로움과 갈등을 교차하면서 정속에 폭발을 감춘 최고의 무작으로 평가되었다. 안으로는 한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하공을 다스리는 춤.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어 슬피 끝난 일들을 차곡차곡 망각하려는 애절함을 눈물의 춤으로 승화시키자 객석에서는 조용한 흐느낌마저 파동쳤다. 「덩닥궁 덩다꿍,어깨들고 착착쿵…」 그가 제자들을 가르칠때 보면 숨쉴틈도두지 않는다.지시하고 지적한대로 선을 만들지 못하면 냅다 달려나가 욕설을 퍼붓고 북가락을 내던진다. 변덕스럽고 삐치기도 잘해서 사근사근 사람을 홀딱 반하게 하다가도 못마땅한 구석을 발견하면 살차게 뿌리치고 미련없이 돌아 앉는다.끝없는 줄담배,쪽쪽 뻗은 검지와 장지에 꼬나문 담배하며 낮으막하나 재빠른 말씨,아래로 착 내려깐 날카로운 눈매와 여성적인 걸음걸이 등등 그의 이야기는 글로 써서는 충분치 못하다.진한 사투리의 육두문자와 구성진 입타령 일본춤 스페인춤 흉내,바느질과 다림질 솜씨,무엇보다 사람의 애간장을 뒤흔들어 놓는 살풀이춤을 보고나서야만 그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된다. 지난해 어느 사석에선가 명창 김소희씨가 매방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자기예술에 혼신바쳐 『이매방동생은 남못하는 예술을 가진 사람으로써 젊어서는 정말 「개판」이었지요.누구라도 한번 걸렸다하면 밤샘 술을 마셔야하고 휘젓고 돌아다니고 욕설 잘하고,그러나 그 춤만은 현재로선 제가 아는한 전무후무한 명무라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그 춤만은 가히 당대의 명인이지요』 이른바 재주가 승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오만방자와 안하무인의 기색이 역력하지만 자신의 예술을 알리기 위해선 한자리에서도 몇십번씩 무태를 보이는 성의를 잊지 않는다. 한때는 그가 후계자를 키우지 않아 「그의 춤을 저승으로 가져가려나 보다」고 무용계가 빈정거린 적도 있으나 그는 몇몇제자를 모아 세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엄하게 그의 춤을 보존하고 전장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매방은 전라도 목포에서 태어났다.아버지 이경율씨는 목포 양동에서 싸전과 장작장사를 하는 집안으로 그는 3남2녀중 막내,부모와 형제들의 귀여움을 두루 받았으면서 어릴 때부터 여성취향이 짙어 경대앞에 앉아 춤을 추거나 화장하는 흉내를 즐겼다.『나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세살때나 또는 일곱살때,어쨌든 그 이전에 운명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집에 세들어 있던 목포 권번 기생에게 춤을 배우고 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던 집안의 할아버지벌인 이대조선생,화순의 박영구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승무검무 법고를 배웠다. ○매란방처럼 살고자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4년간은 큰형이 사업을 벌이고 있던 만주 대연과 북경에서 살면서 중국 경극의 대가인 매란방을 만났고 평생 매란방처럼 살고 싶어 본명인 「규태」를 버리고 그때부터 매방이란 예명을 스스로 지어가졌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개설,간간히 서울에 올라와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역마살이 뻗친듯 광주 대구 강릉 속초 부산 동래를 전전,형제들의 간곡한 권유로 69년,42세때 부산에서 무용활동을 하는 김명자씨와 뒤늦게 결혼하여 딸(현주·20)하나를 두고 대학 무용과에 다니는 있다. 부산에 머물고 있을때 그의 춤을 귀히 여기던 무용평론가 정병호씨와 거문고 인간문화재 한갑득씨의 권유로 77년부터 서울정착을 결심하게 되었다. 말도 탈도 많았던 들끓는 듯한 지난날,한번 움직일 때마다 수천 관중을 사로잡는 그의 춤에 매료되어 54년,서울 첫 정착때는 신익희선생의 따님인 정균씨가 동대문밖 창신동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 적이 있었고 삼성의 이병철회장은 특히 그의 「살풀이춤」을 사랑하여 자주 별장에 불러 춤을 추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요즘도 매일 하오4시부터 4시간씩 연습,이렇게 연습을 해두기 때문에 공연을 앞둔 총 리허설은 해본적이 없다. 해마다 명무전 명인전 전통무용의 밤과 수많은 해외고연에 참가하고 프랑스 렌느 페스티벌에 다녀와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럽공연은 「질색」이라고 거절한다.평생을 통해 그가 하고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 체면상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던,욕쟁이로 소문이 나고 성질이 괴팍하던 말던,방약무인하고 오만불손하다 하더라도 김소희씨의 말대로 「당대의 전무후무한 명인」,절묘한 선으로 이어지는 천의무봉한 춤솜씨 하나만으로 그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이매방일 수밖에 없을 것같다. □연보 ▲1927년 5월5일 전남 목포출생(본명(이규태) ▲1935∼39년 만주 대연에 거주.전남 무안출신 이대조선생 「승무」「북춤」사사,전남 화순출신 박영구선생 「승무」「법고」사사,전남 목포출신 이창조선생 「검무」사사 ▲1943년 목포 공립공업학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87년 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예능보유자(90년 지정) ▲1948년 명창 임방울선생 명인명창대회 「승무」(3고)첫 출연 ▲1953년 전북 군산 국악원주최 명인명창대회 「승무」(9고) ▲1953년 이매방 개인무용발표회(광주) ▲1954년 삼성여성국극단 창극출연 「승무」(7고) ▲1955년 개인무용발표회(문하생 발표 포함·광주) ▲1956년 개인무용발표회(부산) ▲1957년 개인무용발표회 「살풀이춤」(부산) ▲1959년 서울 을지로 원각사에서 개인무용발표회 ▲1962년 광복절 경축예술제 「살풀이춤」(국립극장)(도쿄∼오사카) ▲1968년 일본 대민단본부주최 광복절기념공연 ▲1970년 부산·시모노세키 자매결연기념공연(시모노세키·부산) ▲1975년 부산예총주최 「무용합동공연」(부산) ▲1977년 이매방 「보념승무」발표회(서울YWCA강당) ▲1979년 대한항공 민항 10주년기념공연(미 6개도시 교포위문) ▲1981년부터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용예술제참가(해마다) ▲1982년부터 국악대제전 한국 명무전 출연 ▲1984년 무용인생 50년 특별기념공연 「북소리Ⅰ」(세종문화회관) ▲1986년 미 한미문화센터주최 워싱턴 공연 「살풀이춤」 ▲1986년 아시안게임 축전공연 출연 ▲1987년 개인무용발표회 「북소리Ⅱ」(문예극장 대극장) ▲1987년부터 해마다 중요무형문화재공연 출연 ▲1990년 개인무용발표회 「북소리Ⅲ」(호암아트홀) ▲1988년 88서울올림픽문화예술축전 참가 ▲1989년 조선일보주최 국악대공연 출연 ▲1990년 중국·북경·연변 교민 순회공연 ▲1991년 한국·일본 무형문화재 합동공연(도쿄) ▲1992년 국악대제전 명무전 출연 예술문화대상·눌원 향토예술대상·목관문화훈장서훈 (승무) 송수남·김진홍·임이조·채향순·국수호·채상묵 (살풀이) 정명숙·유숙희·김정녀·이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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