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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5)공자의 도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5)공자의 도

    나는 공자의 ‘논어’를 여러 번 읽고서 공자의 도는 이 세상을 보는 종합예술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왜냐하면 ‘논어’에는 상충적인 것같이 보이는 공자의 언행들이 여러 군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의 생각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꿰뚫고 있음)하다고 그의 제자 증삼(曾參)에게 술회하였다. 공자는 이 일이관지의 내용을 밝히지 않고 그냥 외출했다. 증삼이 되묻지 않고 긍정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증삼에게 물었다. 이에 증삼은 그것은 ‘충서(忠恕=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타인들에 대하여 자기를 미루어 생각함)일 뿐이다.’라고 단정했다. 과연 공자의 도를 하나로 종합하면 충서일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증삼의 해석은 공자의 도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일 뿐이라고 여겼다. 공자의 도는 증삼의 해석보다 훨씬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의 유교사상이 너무 주자학의 창을 통해서 이해된 의리지학적(義理之學的) 공자 보기로 좁혀진 것에 늘 안타까움을 느껴왔다. 공자의 도는 노자나 석가나 예수의 도처럼 이미 스스로 진리에 이른 자의 가르침이 아니고, 부단히 깨닫기를 원하는 자의 정신적 탐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세상이 ‘어진 마을’(里仁)이 되게끔 끝없이 탐구하고 고뇌하고 모색한 자유로운 영혼의 순례자와 같다. 단정적으로 증삼이 술회한 ‘…뿐이다.’와 같은 그런 표현을 공자는 사용하기를 무척 꺼리는 공부인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정치의 요체를 설명함에서 공자는 ‘족식(足食=경제적 풍족), 족병(足兵=전쟁 억지력), 민신지(民信之=국민의 신뢰)’라고 언급하였는데, 우선순위를 되묻는 제자 자공(子貢)에게 먼저 국방을 버리고, 그 다음에 경제를 버리고, 마지막 남는 것이 국민의 신뢰라고 언급했다. 이 구절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제자 염유(由)가 인구가 많을 때에는 정치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공자는 먼저 국민을 부지(富之=부하게 만듦)하게 하고, 이어서 교지(敎之=가르침)라고 대꾸했다. 부국강병의 상징인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에 대하여 공자는 인자(仁者)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관중이 자기 주군을 죽게 한 제 환공을 따라 벼슬하였기에 공자의 제자들은 지조를 죽음보다 중시해야 할 도덕군자가 아니라고 그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뒤에 맹자는 누가 그를 관중의 인물에 비유하면 화를 냈다. 자기를 부국강병적 패도의 상징인 관중에 비유하는 것은 자기의 왕도사상을 모욕하는 것으로 맹자는 생각했을 정도다. 공자는 관중의 부국강병정책으로 중국이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에 점령당하지 않고, 중국문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소인배가 조그만 절개를 지키는 것과 관중의 언행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중의 소행은 무왕의 은나라 정벌에 항의하면서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 숙제의 절개와 다르지 않는가? 백이 숙제의 지조를 높이 산 공자가 관중의 주군 배신과 부국강병을 매우 격찬했다. 공자의 진면목이 무엇일까? 또 공자의 초점 불일치의 사고방식을 하나 더 소개한다. 공자는 자신있게 ‘사람이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대단한 인본주의의 신념이다. 그런 그가 은나라 3인의 현자가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음을 침통하게 말했고,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덕행이 출중한 안연(顔淵)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요절했고, 염백우(伯牛)는 문둥병에 걸려 괴로움을 당했음을 그는 보았다. 여기서 공자는 비통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했고, 덕인이 반드시 행운을 받는 것이 아님을 보고 자신만만한 그의 인본주의가 알 수 없는 천도 앞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도 다 한가지 사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증삼은 세상을 인의로 세우기 위한 도덕적 사명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고, 안연과 자공은 스승의 사상을 전혀 다른 스타일로 이었다. 공자는 안연에 대하여 거의 도를 터득했으며 ‘누공(屢空)’했다고 언명했고, 자공에 대하여는 천명을 받지 않았으나 재산을 불렸고 그의 예측은 현실적으로 자주 적중했다고 기술했다. 저 ‘누공’의 개념을 주자학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쌀 궤가 자주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양명학은 ‘마음을 허공처럼 자주 비웠다.’고 읽었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 속에 이미 주자학과 양명학의 두 가지 뿌리가 잠재하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겠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극기하여 예를 회복함)의 의미도 주자학에서는 승기지사(勝己之私=이기심을 이김)로 해석하고, 양명학에서는 진기즉무기(眞己卽無己=참 자기는 자기를 없애는 것)로 읽고 있는 것도 공자사상이 이미 당위사상과 무위사상으로 각각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자공은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적 이재능력과 외교능력이 탁월하여 많은 실용적 업적을 낳았으므로 공자도 그를 은나라의 비싼 제기(祭器)인 호련(瑚璉)에 비유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이렇게 보면 공자의 도는 쉽게 하나의 개념으로 집약이 잘 안 된다. 공자의 도에는 증삼의 도덕적 당위유학의 흐름이 있고, 안연의 자연적 무위유학의 갈래도 있고, 자공의 실용적 기술유학의 계열도 있다. 전자의 두 가지는 맹자유학에 수렴되고, 후자는 별도로 순자유학으로 이어진다. 공자의 도는 어느 한 곳으로 정의되지 않고 열려 있다. 주자학적 통로인 당위유학으로서만 공자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여기에 기원한다. 자극적인 언설을 좋아하는 요사이 사람들은 ‘논어’를 읽으면 너무 싱겁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강력한 메시지도 없고 흔드는 깃발도 없으며 맹물 같은 맛으로 별로 주목이 안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맹물 같은 밋밋한 맛이 바로 공자의 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술은 술로서만 쓰이고, 커피는 커피로서만 쓰인다. 그러나 자연수 같은 맹물은 모든 음식 만들기에 다 쓰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공자의 도가 그런 맹물 같은 쓰임새를 지녔다고 여긴다. 도가 자연수 같아야 인간의 생각을 흥분시키지 않고 모든 일에 다 적용되는 지혜를 일군다. 그래서 나는 ‘일이관지’한 공자의 도를 ‘중화’(中和)라고 여긴다.‘중화’의 도를 공자는 ‘군자가 천하의 일에 대하여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으며, 의(義)를 따른다.’는 말로써 표현했다. 주희는 이 의를 도덕적 당위로 읽었지만, 나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도덕적 당위는 이미 어떤 선의지적 결의로 무장된 상태를 말하므로 ‘중화’의 참 뜻에 맞지 않다. 더구나 공자는 스스로 ‘절사(絶四=네가지를 끊음)’라고 술회하지 않았던가? ‘무의(無意=자기 멋대로 함이 없음), 무필(無必=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결의가 없음), 무고(無固=고집이 없음), 무아(無我=아상이 없음)’가 ‘절사’의 내용이다. 이런 ‘절사’의 인품이 어찌 도덕적 당위의 법을 미리 고집하겠는가? 자연수와 같은 맹물의 도가 곧 ‘중화’다. 위의 ‘절사’는 아중심적 사고가 없고, 불변적 최고를 고집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적의 것을 도로서 간주한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공자의 도는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서 최적의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고(maximum)는 경직되어 있으나, 최적(optimum)은 아주 유연하다. 시대적 상황에 최적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맹자는 공자의 정신이라고 불렀고, 그런 정신을 시중(時中)이라고 명명했다. 그렇다. 나는 공자의 ‘일이관지’한 도가 증삼이 지적한 ‘충서’라기보다 오히려 ‘중화’와 같은 ‘시중’이라고 보고싶다.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논어 ‘학이’편의 첫 구절인 ‘배우고 시습(時習)하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시습’은 입시 공부하듯이 ‘때때로 익히면’으로 해석되기보다, 오히려 ‘시중’의 지혜를 공부하기 위하여 ‘자기 시대를 익히면’으로 해석돼야 하지 않겠는가? 도를 탐구하는 이가 어찌 입시 공부하듯이 그런 복습을 즐겁다고 했겠는가? 더구나 ‘논어’의 다른 구절들과 뜻이 다 회통되어야 한다. 공자의 유명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의 구절도 이 ‘學而時習’과 연관되어야 한다. 흔히 ‘온고이지신’을 ‘옛 학문을 익히고 새 학문을 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는 모든 학문은 다 옛것이다. 학문의 지식은 다 지나간 것을 정리하는 것이지, 현재진행형의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 지식은 오래되었건, 근접과거의 것이건 다 지나간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새 것은 각자가 살고 있는 시대상황이다. 그래서 ‘온고지신’은 옛 지식을 새 시대의 상황에 잘 비추어 어느 것이 새 시대에 최적의 지혜로 적중한지 면밀히 검토하고 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 시대에 적중한 최적의 도가 도덕적인지, 실용적인지, 또는 자연적인지 잘 검토해 보는 것이 ‘학이시습’의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절사’의 공자정신과 부합한다.‘시중’은 시대의 적중한 ‘중화’의 정신문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의 도는 한가지만을 외곬으로 고집하는 그런 교조적 원리주의가 아니다. 공자의 도는 매우 자유스러운 사유의 유연성을 도의 생명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세기적 주자학으로 공자를 읽으면, 지금의 시대에는 안 맞는다. 그는 참으로 학문하는 성인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나간 학문의 지혜와 새로운 시대의 상황을 늘 동시에 사유하는 길이 도를 공부하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지나간 학문만 골똘히 공부하고 새 시대를 사유하지 않으면 그 학문은 맹목적이고, 시대를 알기 위하여 부단히 사색하되 경험적 학문의 축적이 없으면 그 사색은 대단히 공허해진다고 ‘논어’에서 공자가 설파했다. 나는 주자학을 넘어서 공자의 유교가 한국정신문화의 교조적 업을 반성하게 하는 데 새로운 자양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공자 안에 적어도 세 가지의 도가 있다고 본다. 조선조는 그 세 가지 중에서 유독 한가지만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점에서 우리는 편협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데스크시각] 거꾸로 가는 전교조(2)/손성진 사회부장

    같은 제목으로 쓴 지난번 칼럼(2005년 11월11일자)에 이런 줄거리의 댓글을 누군가 달았다.‘우리 애가 다니는 학원에서는 한달에 두번 정도 전화로 애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고 취약한 점, 강한 점을 설명해주어 정말 돈이 들더라도 학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작은애 학교 선생님은 어떤 애가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고 도장을 그 애 머리를 향하여 던졌다.’ 이 글을 썼을 학부모는 그러면서 경쟁을 통해 (자질이 부족한) 교사들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고 나쁜 점 하나씩만을 보고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었다. 교원평가에 반대하는 전교조가 이 학부모에게 어떤 대답을 들려줄지 궁금하다. 전교조는 교원평가제에 이어서 차등성과급 지급과 방과후 학교에 반대하는 데도 선봉에 나서고 있다. 아마도 이념적인 편향성을 이유로 전교조를 싫어하는 교사들도 전교조 교사들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을 게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는 비전교조 교사나 전교조 교사나 한마음 한뜻이기 때문이다. 평가제나 성과급제를 반대하는 전교조에, 전교조 간부를 지낸 청와대 비서관이 쓴소리를 했다고 전교조가 거센 역공을 펴고 있다.‘교사들의 이익만 대변해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다.’는 그의 표현은 아마도 국민의 십중팔구는 동의할 것 같은데 말이다. 전교조의 고립은 ‘명예로운 고립’이라는 억지식 논리를 편 어떤 이의 글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학부모와 학생과 함께해야 할 교사가 고립되는 것이 명예롭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면서, 상대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대립과 갈등은 교육 문제에 이념을 대입시켜 이분법적인 사고로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기득권 수호라는 이면의 목적을 이념으로 가리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혁적인 정책을 도리어 시장주의와 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반박하는 게 아닐까. 전교조의 이념과 이상(理想)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이념 문제를 따지는 것도 신물이 나지만, 그 이념과 이상과도 다른 엇박자 주장을 펴기 때문에 전교조는 거꾸로 간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이념과 이상을 좇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또 하나의 이익단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전교조에 등을 돌리고 있다. 학생의 머리에 도장을 던지는 한 교사의 일로 교사 전체를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질이 떨어지는 교사들을 솎아내고 걸러내서 교사 전체의 자질을 향상시키려면 평가제와 성과급제는 필요하다. 덮어놓고 반대만 하는 태도가 교차점을 찾을 수 없는 이념 투쟁과 다를 게 뭔가. 교사들은 프로 의식이 부족하다. 학부모들에게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학원 교사들이 더 낫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야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학원 교사들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친절하게 상담도 해준다. 프로야구나 축구선수들은 한해 한해 성적에 따라 연봉이 올라가거나 깎이면서 경쟁력을 키운다. 정말 연봉이 깎이지 않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운동선수들도 발전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성과급제다.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개혁적인 전교조의 이념과 어울린다. 학교에도 경쟁 원리가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자유주의식이라고 배척하는 이념 매몰적 논쟁은 그만두자. 경쟁 없는 학교가 협동농장과 다를 것은 없다. 전교조 자유게시판에 이런 글이 눈에 띈다.“전 5년간 기간제교사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전교조가 기간제교사를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정교사의 이권을 위해 일한다는 겁니다. 다른 교원단체보다 인권이니 진보적이니 하지만 전교조는 말뿐이었습니다. 교직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할 뿐 정작 약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전교조의 기득권화, 가식적 모습, 진보를 가장한 권위주의 배타적 성격, 정식교사가 된 후 더욱 이런 점을 많이 느낍니다.” 귀담아 들어야 할 목소리다. 손성진 사회부장 sonsj@seoul.co.kr
  • 어이없는 ‘하늘이시여’

    어이없는 ‘하늘이시여’

    TV드라마의 ‘춘추전국시대’인 요즘 시청률 30%를 넘는 드라마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 SBS 주말드라마 ‘하늘이시여’(연출 이영희, 극본 임성한)는 지난해 9월 첫 전파를 탄 뒤 지난 2월 말부터 시청률 30%를 웃돌며 인기를 누려 예외다. 방송 전부터 ‘버린 딸을 찾아 며느리로 삼는다.’는 파격적인 소재로 논란을 빚은 만큼, 이에 대한 관심이 시청률에 반영된 것 같다. 그러나 제작진이 시청률을 너무 의식해서일까.SBS의 효자 드라마로 떠오른 이 드라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초반에는 주인공인 분장사 ‘자경’이 계모의 동생인 삼촌 ‘청하’와 사랑하다가 주위의 반대로 헤어진 뒤 방송국 앵커인 ‘왕모’와 새롭게 커플이 됐다. 자경이 어울리지 않는 왕모와 어렵게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왕모의 계모인 ‘영선’의 힘이었다. 자경은 바로 영선이 예전에 사랑했으나 억지로 헤어진 애인 ‘홍파’와의 사이에서 낳아 버린 딸이었던 것. 자경을 찾은 영선은 참을 수 없는 모성애를 발휘,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경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파격인데 최근에는 영선이 홍파와 뒤늦게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자경의 친부모인 그들이 다시 얽히고 설키면서 결국 자경의 시부모가 된 것이다. 이어 영선과 홍파, 자경의 비밀을 왕모가 알게 되면서 극의 긴장감은 더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영선과 자경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경 계모의 친구 ‘소피아’가 갑작스럽게 죽는다. 그동안 극중 양념 역할을 했던 소피아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일까. 앞서 홍파를 싱글로 만들기 위해 그의 부인 ‘은지’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것과 맥을 같이해 씁쓸하다. 드라마를 너무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만들어낸 것. 자경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11일 방송에서 왕모의 동생 ‘슬아’가 “친언니와 오빠가 결혼한 거야? 그럼 오빠라고 해야 해, 형부라고 해야 해?”라며 울먹이는 상상신으로 이어진 데 이어 17일 방송분에서는 자경이 계모 ‘배득’ 때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더욱 뒤틀린 앞날을 예고한다. 드라마의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극중 기자인 왕모가 취재하는 과정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브리핑 장면 등이 방송돼 국정홍보를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같은 무리한 설정들은 드라마가 당초 50부로 기획됐다가 시청률을 의식해 4차례에 걸쳐 85회로 늘어나면서 횟수를 채우기 위해 자극적인 요소들을 억지로 만들어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종영까지 6회 남은 ‘하늘이시여’가 일그러진 가정의 화합을 그린 드라마로 평가될지, 시청률에 좌지우지돼 씁쓸한 논란만 남기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가슴속 그림 한폭] 정화수 같은 ‘나만의 여인’

    [가슴속 그림 한폭] 정화수 같은 ‘나만의 여인’

    ‘정화(淨化):(더럽거나 불순한 것을 없애고) 깨끗하게 함.’ 눈가에 세줄로 난 주름살이 부드러운 인상을 만든다. 대화 중 계속 무언가 모자란다는 듯 힘주어 말한다.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의 특징은 ‘정화’하려 하는 모습이다. 단어가 조금 추상적인가. 그는 무엇이든 몸을 사리지 않는단다. 그것이 스스로 깨끗이 삶을 사는 것이라 믿는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화’하려 그림과 대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방에도 걸려 있는 최종태 화백의 테라코타 작품과 대화한다. 굳이 제목을 말하라면 무제 시리즈의 한 작품. 실상 그는 연작 모두가 한 작품으로 느껴진다고. 그도 그럴 것이 모두 희미하게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작품과 대화합니다. 그 여인의 얼굴은 연극 연습 중에는 햄릿의 오필리아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반성할 때는 또 다른 내가 되기도 하죠. 벌써 소장한 지 10년도 넘었군요.” 매일 같은 얼굴을 보면서 여러 상대역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건 배우이기 때문이겠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조명과 각도에 따라 천 가지 표정이 있더군요. 꼭 나의 상상 때문은 아니고, 이목구비를 희미하게 나타낸 기법이 오히려 더 많은 얼굴들을 만들어낸다고 봐야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더 많이 본다? “난 모든 예술이 이 그림처럼 안 보이는 부분을 보여 주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제가 TV에서 연극으로 중심을 옮긴 이유도 거기에 있었죠.TV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 주죠. 하지만 내게 연기란 2∼3개월간 도(道)를 닦는 것이고, 그 과정은 안 보이는 가치들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는 기반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누구나 해도 배우는 누구나 할 수 없죠.” 누구나 당신과 같이 예술을 통해 자신을 ‘정화’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예전에 톨스토이의 홀스토메르라는 작품을 할 때였죠.IMF시절이었는데 한 남자가 전화를 했더군요. 사업이 망해서 자살하기 직전 나의 연기를 보았는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그 순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씻어낸 거죠.” 마지막 질문. 안 보이는 가치도 좋지만 관객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최종태 화백은 작업과정 자체를 구도라 여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내 연극도 내 안의 표현하고픈 ‘결핍’을 채우고 나를 정화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관객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관객을 위해 재미를 억지로 덧입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고픈 ‘결핍’이 있는 관객 단 한명. 제가 바라는 최소한입니다. 나의 ‘적자 연극’은 계속됩니다. 그건 이성적 이유가 아닌 믿음이자 사명감입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미스· 東亞建設 김은정(金恩廷)양 - 5분 데이트(53)

    미스· 東亞建設 김은정(金恩廷)양 - 5분 데이트(53)

    거미줄로 짠 투명헝겊이 어떻게 생겼을까. 「미스 · 東亞建設 」 김은정(金恩廷)양의 얼굴은 반들반들 빛나는 고운 투명 헝겊에 싸인 것 같은 느낌. 『대학에서 전공한 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친구들 보기에는 섭섭한 모양이에요. 』 이대(梨大) 체육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잠시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무용체육 강의라는 것이 체력(體力)에 부쳐 그만두고 동아건설(東亞建設)에 입사(入社)한 것이 8개월전 1백 80명 응시자중에서 뽑힌 3명속에 들었던 것이다. 『이런 직장이라는 데가 보고 듣는 것이 많아서 여성적(女性的)으로는 손해 보는 점도 있더군요. 한편 인간(人間)성장에 도움이 된다고는 느껴져요 』 사업가 집안의 6남매중 3녀. 『 아마 어머니께 중매가 많이 들어오는가봐요. 권에 못이겨 선도 몆번 봤어요. 이런 일이란 억지로 되는건 아니라고 믿거든요. 시집 갈 때 되면 다 가게 마련 아닌가 싶어요.』 46년생의 「 영 · 미스」답게 여유만만한 결혼관(結婚觀)도 펼쳐 보인다. 취미는 음악감상. 그리고 낙서. 좋아하는 색깔은 첫봄에는 어디서나 보는 빛깔. [선데이서울 69년 10/12 제2권 통권 제 55호]
  •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그 무렵 퇴계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중병을 퇴계 자신은 ‘극병(劇病)’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퇴계는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감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퇴계의 심정은 퇴계 자신이 쓴 ‘도산기(陶山記)’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신유년(辛酉年)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다 이루어지니, 비로소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라고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루헌이라고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이라고 현판을 내붙였다.…(중략)… 나는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으므로 비록 산중에 살아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항상 속이 울적하고 숨을 조절하기 힘들다.…” 자신의 표현처럼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었던 퇴계’. 그러한 퇴계에게 20여년 만에 두향이가 인편으로 붙여온 빙기옥골의 백매화분은 퇴계의 지친 심신을 쇠락하게 만드는 청량제(淸凉劑)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심정은 ‘도산기’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하면 감개가 저절로 생긴다. 그러면 곧 책을 던지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난간에서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社)를 찾기도 하며, 혹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하며,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걸어 다니며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 한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 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 그루가 놓여 있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한다. 이따금 얻는 것이 있으면 다시 반기어 흐뭇함에 음식도 잊어 버린다. 혹 틀린 것이 있으면 벗을 찾아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속으로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끄집어내어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며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다. 산새가 즐겨 울고, 초목이 우거지고, 바람, 서리 차가워지고, 눈과 다리 싸늘하게 빛을 내니 사시(四時)의 경치 서로 다르고 흥취 또한 끝이 없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불거나 비가 너무 오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때 어느 날 나가지 아니함이 없다. 나가면 이러하고 돌아오면 또 이러하다. 이것이 한가롭게 병을 조섭(調攝)하는 하염없는 일이다.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
  •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유생은 황급히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금 선생으로부터 열정의 물을 떠오라는 분부를 받고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뜰로 나온 길이었다. 도산서당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중간의 한 칸인 완락재(玩樂齋)에 퇴계는 거처하고 있었다. 완락재 앞에는 여느 집의 대청마루와 같은 기능을 가진 암서헌(巖栖軒)이란 넓은 마루방이 있었다. ‘완락재’란 이름은 퇴계가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고, 몸소 제자를 가리키던 암서헌이란 마루방의 당호도 주자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갖지 못하였더니 바위에 깃들어 살자 조그만 효험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라는 글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었다. 퇴계는 언제나 완락재에 기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고 암서헌에서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지금은 휴식시간, 서당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숙소에 유하면서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완락재. 주자의 말처럼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곳’, 주자철학의 성실한 계승자이자 주자철학의 가장 소중한 해석가였던 퇴계.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숲이 맹자와 주자를 거쳐 마침내 해동의 이퇴계에 의해서 성리학적 이치가 완성된 바로 그곳 완락재. 이 완락재에 대해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공경을 주로 함은 의리를 길러 모으는 공력이 있네. 잃지도 억지도 기르지도 않는 이치를 차츰 통달하여 나가서 주렴계의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르게 되니, 천년 이어내린 즐거움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퇴계의 시속에 나오는 ‘천년 이어 내린 즐거움’, 즉 천년 이어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바로 완락재에서 되새겨 퇴계는 바로 이곳에서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유생은 서당 서북편 부엌에 물동이를 놓아두고 방금 떠온 우물물을 종지에 담아 퇴계가 머무는 완락재로 다가갔다. “물을 떠왔습니다.” 퇴계는 서탁 위에 책을 놓고 안석을 벽에 세우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놓고 가거라.” 한번 독서에 열중하면 스승은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선생님” 조금 전 노인으로부터 분매를 받아왔으므로 유생은 선뜻 물러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무슨 일인가.”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하여 가져왔나이다.” “그게 무엇이냐.” “바로 이것이나이다.” 유생은 분매를 조심스럽게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1. 연합국의 독도 한국영토 판정과 독도 반환 1943년 11월 미국·중국·영국 등 3대 연합국 수뇌들은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전 후 연합국정책을 담은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빼앗은 타이완과 팽호도,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모든 다른 지역에서 일본을 축출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서 연합국은 1945년 7월26일 포츠담에서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의 이행과,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임을 공약했다. 일본은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9월2일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일본정부와 그 승계자가 성실히 수행할 것을 확약했다. 이에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과 일본 항복문서를 통해 일본에 구속력을 갖게 됐다. 연합국은 1945년 9월2일 국제법상의 기관으로서 연합국최고사령부(SCAP)를 설치, 구 일본제국이 1894년 1월1일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합국은 한반도를 일본에서 제외해 반환시키고,1946년 1월29일에는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제3항에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 주한 미군정에 이관시켰다. 한국이 독립하면 즉각 인계인수하도록 한 것이다(지도 (1) 참고).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SCAPIN 제1033호를 발표,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일본 어부들의 접근을 막으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명백히 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 총회는 당시의 영토(독도 포함)와 주권을 승인했다. 독도도 다른 영토와 함께 대한민국 주권에 속한 영토로 공인받은 것이다. 2.‘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독도는 한국 영토 연합국은 일본을 1952년 독립시키기로 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키로 했다.1950년에는 강화조약의 ‘준비작업’으로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 합의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본문 해석이 모호하거나, 차이가 발생할 경우 지침(조약법에 대한 빈협정)이 되므로 매우 중요한 합의였다. ‘연합국의…합의서’는 제3조에서 “연합국은 대한민국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한국 섬들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했으며, 그 섬에는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했다(지도 (2) 참조). 만일 강화조약 본문에 모호한 점이 생기면 준비작업인 이 합의서가 해석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조약초안 작성 때의 일본의 독도 침탈을 위한 로비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은 처음 미국이 작성했는데,1∼5차 미국 초안까지는 합의서에 따라 독도를 명백하게 한국 영토로 명기했다. 그러나 제5차 미국 초안을 본 일본 임시정부가 미국인 고문 시볼드를 내세워 맹렬한 로비에 들어갔다. 로비의 미끼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넣어주면 독도를 미국 공군의 기상관측소와 레이더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독도는 원래 무주지였고 한국에는 독도에 대한 명칭조차 없으며,1905년 한국정부와 국민의 항의를 전혀 받음이 없이 새로 편입된 일본영토라고 거짓 근거를 붙였다. 이에 미국측은 일본측의 로비를 받아들여 제6차 미국 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 영토에 포함시켜서 연합국에 회람시켰다. 영국·호주·뉴질랜드 등은 제6차 미국 초안에 반대했다. 한 나라의 국가이익을 위해 연합국의 합의를 위반해서 독도의 소속을 옮기면 동아시아에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었다. 미국측 내에서도 전문가들은 독도가 한국영토이므로 한국 영토로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난처해진 미국은 7·8·9차 초안에서는 아예 독도 명칭 자체를 한국과 일본의 영토에서 모두 누락시켜 버렸다. 조약 초안에 ‘독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국측은 이에 반발, 독자적으로 1·2·3차 초안을 작성하고,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당황한 미국측은 영·미 합동 초안을 작성하자고 영국측에 제의하여, 결국 수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영·미 합동 초안이 단일안으로 작성됐다. 여기선 ‘독도’ 명칭 자체를 누락시키고 애매모호하게 처리해 본회의에 상정해 채택시켰다.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본문에서 ‘독도’ 명칭이 누락된 배경이다. 4.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 명칭 누락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은 연합국의 대 일본강화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기술했다. 독도는 그 밖의 모든 섬과 함께 기술되지 않았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 일본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영토 조항 안에 명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강화조약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귀속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1952년 5월 ‘대(對)일본평화조약’상의 지도를 발간했는데 독도(죽도)를 일본에서 제외된 조선영토로 표시했다(지도 (3) 참조). 그러다가 1952년 4월28일 일본 재독립을 전후해 일 외무성은 강화조약 2조에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제주·거문·울릉도만 기술되고 독도가 빠진 것은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묵인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통치 평화선 선포)을 발표하자, 일 정부는 열흘 후 평화선 안에 있는 독도(이른바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이렇게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은 시작됐다. 5.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 일본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섬 이름에 독도가 누락돼 있어 독도는 일본이 포기하지 않은 일본영토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주장은 광범위한 반론과 비판을 받았다. 한국정부의 공식적 비판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독도영유는 모도(母島)인 울릉도 영유국가의 영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주변에 거의 3000개 가까운 섬들이 있는데, 이를 모두 조약문에 쓸 수 없으므로 일본 방향의 대표적 섬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만 든 것이었다. 제주도의 일본 방향에 우도(牛島)가 있는데 조약문에 제주도만 기술돼 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의 국제법상 ‘부속도서론’에 입각한 해석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해석했다. 신어업협정 이전까지 대부분의 세계 지도들에서 ‘Dokdo’로 표시했다. 일본은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 아님을 세계에 내보이려는 노력에 집중하게 되었다. 6.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한국영토 연합국의 독도에 대한 판정과 정책은 1945년 1월29일부터 1952년 4월28일까지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하나의 일관된 합의에 의거한 것이었다.1894년 1월1일을 기준으로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영토 야욕으로 침탈 또는 편입한 모든 땅은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여 원주인에게 반환된 것이 연합국의 합의와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일제가 영토탐욕으로 1905년 1월28일 한국에서 침탈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수립되어 연합국(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인계인수한 그날부터 독도의 영유국가는 대한민국이고, 이 사실은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공인받았다. 연합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호도한 것으로는 이미 1948년에 확립된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합국이 1951년에 ‘독도는 일본영토’로 강화조약 본문에 기술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경우 독도는 이미 연합국의 판정에 의해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대한민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토이며,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한 국가가 아닌 제3국이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독도는 이미 국제법상 1948년부터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승인과 동의가 없이는 독도는커녕 독도의 돌멩이 하나도 일본은 물론이요 연합국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같이 독도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표현했을 경우에는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해석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억지인 것이다. 그것도 진실을 추구해서가 아니고 거짓 근거로 미끼를 만들어 로비를 해서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한 것으로는 기존의 한국 독도영유권이 부정될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의 ‘부속섬론’에 의거한 반박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독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문에서 명칭 누락과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국제법상으로 명명백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상)독도영유권-역사가 말한다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상)독도영유권-역사가 말한다

    지난 4월 ‘독도 대치’를 계기로 한국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동해 배타적경제수역(EEZ)경계획정 협상에 임한다. 오는 12·13일 도쿄에서 6년 만에 개최되는 5차 한일 EEZ협상은 독도 영유권을 기저에 깐 한판 외교전쟁이 될 전망이다. 신용하 독도협회회장으로부터 우리땅일 수밖에 없는, 독도를 기점으로 EEZ협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논거들을 세 차례에 걸쳐 듣는다. 독도는 역사적 권원(權原)에서 누구의 영토인가? 1. 한국의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원 독도영유권 문제에서 맨 먼저 고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누구의 땅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국제법에서도 마찬가지다.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원(historical title)을 밝혀야 영유권의 최초의 국제법적 근거가 밝혀진다. 한국은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동해의 해상 소왕국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문헌상 명료하게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우산국이 울릉도만으로 구성된 소왕국이 아니라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다 포함한 해상 소왕국이었다는 사실의 확인이 필요한데,‘세종실록지리지’(1432년 편찬),‘동국여지승람’(1481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만기요람’군정편(1808년),‘증보문헌비고’(1908년) 등에 비교적 명료하게 기록돼 있다. 이때 조선왕조는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호칭했다. 일본은 18세기에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로, 독도(우산도)를 ‘송도’(마쓰시마)라고 불렀다.‘만기요람’군정편에서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길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皆) 옛 우산국 땅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기록했다. 이 고문헌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모두’ 옛 우산국 땅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우산도(독도)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도’의 명칭 자체도 ‘우산국’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일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2. 일본 고문헌도 “독도는 한국영토” 일본 정부는 일찍이 일본에서 최초로 독도(송도) 명칭을 든 일본고문헌으로 1667년 편찬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를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정작 이 보고서를 보니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국경은 은기도(隱岐島·오키섬)를 한계로 한다는 내용이다. 일본 최초의 독도관련 고문헌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1905년 2월까지 일본의 모든 고문헌과 고지도들은 모두가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한 것은 단 1건도 없다. 지난 2006년 5월12일 일본 고이즈미 정부 내각회의는 1954년 이후 한국의 독도 영유는 ‘불법점거’이며, 일본은 늦어도 17세기 중반 ‘독도영유권을 확립’했고,1905년 내각회의가 독도영유권을 ‘재확인’의결했다는 결정서를 국회답변 형식으로 의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억지이고 거짓이다. 시마네현에 사는 어부 2명이 조선 울릉도와 독도에 월경하여 고기잡이할 허가장을 신청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1618년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1656년 “송도(독도)도해면허”를 내준 일이 있다.‘도해면허’(渡海免許)는 외국에 월경하여 건너갈 때 내어주는 허가장으로 요즈음의 ‘여권’과 비슷하다. 일본 영토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가는 다른 나라인 조선영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 일본 도쿠가와 막부도 1696년 독도는 한국영토로 재확인 뿐만 아니라 1696년 1월28일 도쿠가와 막부 정부는 대마도주의 울릉도 독도 논쟁에 대한 조선의 항의를 받고 조사한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의 울릉도 독도 출어를 금지했다. 일본측은 이같은 내용의 외교문서를 조선정부에 보내왔었다.(사진1) 사실상 울릉도 독도 영유권 문제는 이때 종결된 것이다. 4. 일본의 명치유신 정부도 울릉도·독도를 조선영토로 재확인 1868년 1월 수립된 명치유신 정부도 마찬가지다. 명치정부 태정관(총리대신부)과 외무대신은 조선과의 신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1869년 12월 조선 부산에 외무성 고위관리를 파견할 때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부속(朝鮮附屬)이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 조사하도록 훈령했다. 그 조사보고서가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제목으로 ‘일본외교문서’제3책에 수록돼 있다.(사진 2) 이 일본 관찬 공문서는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과 외무대신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령이었음을 잘 인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더욱 결정적인 일본정부 공문서 자료가 있다.1876년 일본 내무성은 근대적 전국 지적도 작성을 위해 각 현에 자기현의 지도를 작성해 올리라고 훈령했다. 이 때 시마네현 지사가 동해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그 외의 1도 독도(송도)를 시마네현에 넣어 그릴까 빼고 그릴까, 영토의 넣고 뺌은 중대 안건이어서 현지사가 결정할 수 없으니 내무대신이 결정해 달라고 품의했다. 내무성은 약 5개월간 조사한 후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조선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문제는 극히 중대 안건이므로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게 최종 결정을 품의했다. 당시 일본 국가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 우대신(총리대신에 해당) 이와쿠라 도모미(岩倉見視·명치유신의 최고 지도자)는 1877년 3월20일 “울릉도(죽도)와 그 외 1도 독도(송도)는 조선영토로서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이니 그렇게 심득하라.”는 요지의 결정서 훈령을 3월29일 내무성에 보냈다. 태정관의 이 훈령은 4월9일자로 시마네현 지사에게 하달됐다.(사진 3) 이것은 결정적인 자료다. 일본의 근대정부도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이 면밀한 조사 검토 끝에 독도·울릉도는 일본영토가 아님을 공문서 훈령으로 명확히 결정해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관청에까지 훈령을 내린 것이다. 이 밖에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 지도, 수로지 등에도 증거는 다수 있다. 5. 일본의 1905년 독도침탈의 불법성과 무효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러시아 군함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일본 해군 망루를 독도에 1개, 울릉도에 2개 세우기로 했다. 마침 이 무렵 일본 시마네현 어업가 나카이(中井)란 자가 독도 부근 수역에 풍부한 강치(물개의 일종)잡이 독점이권을 한국정부로부터 얻기 위해 독도 대부신청서를 작성, 일본 중앙정부에 대행을 신청했다. 이는 ‘나카이 사업경영개요’(1910) 등에 잘 기록돼 있다. 이에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 기회에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고 억지 전제하고 일본에 ‘영토편입’해 침탈하려는 야욕을 갖게 됐다. 내무성은 그 섬이 ‘무주지’가 아니라 ‘우산도’란 이름의 조선영토라는 의견을 냈으나 해군성과 외무성은 러·일전쟁 수행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처음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키고 이름도 ‘다케시마’(죽도)로 호칭한다고 결정했다.1903년 나카이가 이 섬에 고기잡이 나간 일이 있으므로 이것을 선점(先占)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당시 국제법은 영토 편입의 전제로 (1) 무주지와 (2)무주지인 경우에도 그 주변 관련국에의 조회와 국제적 고시를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은 완전 불법이었고 무효였다. 왜냐하면 1903년 당시나 1905년 이전에 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독도의 소위 ‘영토 편입’을 한국 정부에 조회(照會)하지도 못하고 ‘국제고시(告示)’도 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0년 칙령 제41호로 지방관제 개정을 하면서 울릉도를 종래 강원도 울진군 소속에서 독립시켜 ‘울도군’을 신설했다. 또 울도군수를 임명해 행정구역을 울릉도와 독도(석도)로 발표하고 중앙 관보를 통해 각국 공사관에 보내 국제고시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거의 1개월간 고심 끝에 꾀를 내어 중앙 관보고시는 못하고 한국과 각국 공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시마네현의 현 ‘관내고시’(管內告示)를 하도록 했다. 고시일자가 1905년 2월22일인데, 이것이 현재 일본이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고시가 아니기 때문에 무효다. 일제는 러·일 전쟁을 1905년 9월5일 승리로 종결하자마자 같은 해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1월에는 대한제국 외무부를 폐지하고 내정도 지배했다. 일제가 독도침탈 사실을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알게 한 것은 외교권을 완전히 강탈해 간 다음인 1906년 3월28일. 울도군수는 놀라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에 영토편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즉각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중앙정부 참정대신과 내부대신은 일본의 독도침탈에 항의하고 부정하는 훈령을 내렸으나 외무부가 없어 일본정부에 외교문서로 전달하지 못하고, 현재 규장각에 고문서로 보존되어 있다. 독도는 1910년 한반도를 침탈한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5년 먼저 강점한 한국 땅이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날이 오면 한반도와 함께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한국의 고유 영토였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사설] 독도 기점 EEZ 설정 당연하다

    정부가 동해 배타적 경제수역(EEZ) 기점을 독도로 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당연한 결정으로 때늦은 감이 있다. 오는 12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한·일 EEZ 경계획정회담이 열린다. 일본측이 우리측 주장을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국이 미리부터 절충안을 내밀었던 과거의 사례는 옳지 않았다. 독도 기점을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억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 정부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네차례 EEZ협상에서 울릉도와 일본 오키섬을 EEZ기점으로 하자고 제안했었다. 독도를 불완전한 섬으로 보고 기점에서 뺐던 것이다. 울릉도-오키섬의 중간선을 그어도 우리 EEZ안에 독도가 들어온다는 점을 감안한 절충안이었다. 이에 일본은 독도-울릉도 중간선을 EEZ경계로 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폈다. 최근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행동으로 침해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원칙론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독도는 초목이 자라고, 경비대와 어민이 상주하고 있다. 이를 암석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우리 땅으로서 EEZ기점이 될 유인도 자격을 갖췄음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알려야 한다. 일각에서는 남해안에서 도리시마(鳥島)를 EEZ 기점으로 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나 독도는 암석인 도리시마와 다르다. 독도를 기점으로 하면 도리시마도 기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일본은 EEZ협상 타결보다는 독도를 영유권 분쟁지역으로 부각시키는 데 회담의 목표를 둘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교묘한 술수에 끌려가지 않는, 노련한 외교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여지를 싹부터 자르는 등 독도 영유권 훼손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03일 TV 하이라이트]

    ●라이프n조이(YTN 오전 8시30분) 자연 휴양림과 맑은 물이 조화를 이루는 곳 횡성. 횡성에서도 선비의 절개가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는 동치악산을 올라가본다. 동치악산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와 바위,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산의 깊이를 더한다. 이와 함께 횡성의 명물 안흥 찐빵 마을도 찾아간다. 횡성 한우 고기도 맛본다.   ●스페이스-공감(EBS 오후 10시) 허밍 어반 스테레오는 일상의 파편들을 담아낸 가사에 라운지, 하우스,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를 뒤섞은 독특한 멜로디로 기분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지난 3월 더욱 다양해진 악기 편성과 다채로운 편곡이 돋보이는 2집 ‘Purple Drop’을 발표한 허밍 어반 스테레오의 무대를 들여다본다.   ●사랑과 야망(SBS 오후 9시45분) 성균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태수는 우연히 은환과 마주치게 된다. 다방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아낀다. 한편, 미자는 매번 찾아올 때마다 눈길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시어머니가 아이소식이 없냐고 던진 한마디가 4년동안 아이를 기다려 왔던 자신에게 비수처럼 느껴진다.   ●불꽃놀이(MBC 오후 9시40분) 진화의 집 정원에서 인재는 승우와 춤을 추던 미래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온다. 당황한 미래는 인재에게 승우와 결혼할 것이며, 사랑하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한쪽에서 그 소릴 듣고 있던 나라는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는데 바로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 승우가 충격 받은 얼굴로 서 있다.   ●가치대발견(KBS2 오전 10시20분) 실물 100% 완벽재현. 스타를 닮은 밀랍인형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한류스타 이영애 밀랍인형의 가치가 공개된다. 세계가 인정하는 축구 천재, 박지성. 최고의 미드필더인 그의 몸값, 거기에 광고효과 상위 5%라는 광고모델로서의 가치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박지성의 가치도 공개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KBS1 오전 10시) 북위 56도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곳. 드넓은 평원을 메우는 초록의 대지가 여행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홀리루드 힐에서 내려다본 에든버러의 전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영국 안에 쌓은 독특한 문화의 성, 스코틀랜드로 떠나본다.
  • [열린세상] 남북관계의 현재와 미래/안병우 한신대 국사학 교수

    때때로 중국을 침입한 흉노는 말을 잘 사용하여 기동력이 뛰어났고, 전투도 잘하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과의 싸움에 패하여 사막 깊숙이 밀려난 흉노를 중흥시킨 자가 묵돌(冒頓)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單于)가 된 후 동호(東胡) 등을 정벌하여 한에 맞서는 강대한 존재로 흉노를 성장시켰다. 묵돌이 아직 흥기하기 전, 강력한 세력인 동호는 천리마를 달라고 요구했다. 흉노의 보배인 천리마를 넘겨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말을 뿌리치고 묵돌은 천리마를 보냈다. 또다시 후비를 요구하자, 격분한 신하들을 가라앉히며 역시 넘겨주었다. 묵돌을 만만하게 여긴 동호는 국경지대에 있는 불모지를 달라고 요구했다. 쓸모없는 땅이니 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묵돌은 이번에는 단호했다.“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주자고 하는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곧바로 동호를 공격하였다. 동호왕을 죽이고 마침내 초원의 패자로 등장하여, 중국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느닷없이 흉노 얘기를 하는 것은 근래 순조롭지 못한 남북관계 때문이다. 지난달 25일로 예정했던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갑자기 무산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철길 방북도 불투명해졌다.30일로 예정되었던 언론인들의 개성공단 방문도 무산되었다. 일련의 이런 현상을 두고, 남북관계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국제협약이나 관례에 어긋나는 북한의 억지 요구를 참아가면서 대북관계를 계속해야 하는지, 북한에 대해 앞으로도 지원과 협력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 핵심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일을 잘못 추진하고 관리한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상대가 있는 만큼 남북을 함께 고려하면서 비판하고, 민족의 장래가 달린 문제인 만큼 긴 시각에서 평가하여야 한다. 시험운행이 무산되긴 했지만, 남북 철도연결사업은 무려 6년이나 걸려 추진해온 의미있는 일이다.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기로 합의한 것이 2000년 7월이었고,2년 후 동해선 철도 연결에도 합의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공사를 진행했지만, 공사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다 큰 어려움은 그를 통해 오갈 사람과 물자에 관한 문제이다. 공사가 완료됐고,2년 전에 열차운행에 관한 기본합의서도 마련했지만, 기차는 ‘아직’ 달릴 수 없다. 그렇다고 연결된 철도를 다시 끊어야 하는가? 그동안 남한은 북한에 많은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해왔다. 이런 지원이 퍼주기라는 비난도 받았고, 군사전략물자로 활용될 것이라는 의심도 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내놓은 것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북한이 개방하고 제공한 금강산과 개성공단은 남한의 경제 지원이나 협력에 비해 작지 않을 것이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에 가보면, 그곳이 바로 군사분계선 북쪽이어서 제공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다. 유목민족인 흉노의 묵돌도 불모지조차 내놓지 않았는데,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제공한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남한의 ‘퍼주기’를 비난하려면, 북쪽의 ‘내어주기’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남북관계가 언제 순조로웠던 때가 있었는가. 남북관계는 장마철 날씨 같아서 순간적으로 반짝했다가 곧 흐려지곤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남북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새 과제가 제기될 때마다 남북관계는 뒤틀리고 꼬일 것이다. 맑은 날보다는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 많을 것이다. 이번 철도 시험운행 무산의 원인으로 작용한 서해안 NLL, 개성공단 입주 부진 등의 문제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과제의 해결에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난제를 만났다고 하여 남북관계를 중단하고, 이전의 대립 관계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길게 보면, 남북관계는 크게 진전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니 진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남북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안병우 한신대 국사학 교수
  • [길섶에서] 돌아온 지갑/이목희 논설위원

    고교에 다니는 둘째아이가 시무룩해서 들어왔다. 마을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렸다는 것이다. 많은 돈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물이 꽤 있었던 듯싶다. 저녁에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었으나 신고된 분실물은 없다고 했다. “기다려 보자.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돌아오는 수준이 되지 않았겠느냐.”며 달래보았다. 그러나 “기대 않는 게 좋겠어요. 누가 주웠어도 귀찮아서 주인을 찾아 주겠어요.”라고 포기하는 눈치였다. 내용물보다 아이의 사회교육을 위해 지갑이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다음날이 휴일이어서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지갑을 주웠는데….”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아이의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분 집 근처로 가니 중절모를 단정하게 쓴 여든 안팎의 노신사가 나왔다.“연락처를 찾으려고 고생 좀 했소.” 지갑에 전화번호가 없어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 서점을 통해 물어물어 연결을 했다는 것이다. 준비해간 음료수 박스를 드리니 한사코 거절했다. 억지로 맡기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신용평가기관 집중분석] “투명성·윤리성 우수해야 좋은 평가”

    [신용평가기관 집중분석] “투명성·윤리성 우수해야 좋은 평가”

    “경영실적도 중요하지만 최근엔 경영의 투명성과 기업의 윤리성이 우수해야 좋은 신용등급을 받습니다.” 한국신용정보㈜ 이혁준 책임연구원은 29일 “기업의 신용평가는 금융시장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 흐름과 분위기를 반영한다.”면서 “설령 실적이 조금 나빠도 평가대상 회사측에서 이유를 잘 설명하고 개선 노력에 대해 강변한다면 아무래도 평가가 나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용평가 절차에 대해 “기업이 신용평가를 의뢰하면 평가자료를 제출받아 서류심사를 한 뒤 실무위원회와 평정위원회에서 등급을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등급에 대해 기업이 이의를 제기하면 재심을 하지만 부당한 상향 조정 요구 등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확정된 등급은 일반에 공시된다. 제출서류는 사업자등록증과 법인등본, 경영진 이력서와 조직도, 사업보고서와 사업계획서, 결산·감사보고서, 금융거래와 지급보증·담보 현황서류 등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신용평가 수수료는 의뢰기업의 자산 규모에 따라 1000만∼3000만원이다. 이 책임연구원은 “회사측에서 간혹 상향 평가를 요구하며 억지를 부리거나 나쁜 평가를 하면 평가사를 다른 데로 바꾸겠다고 압력을 넣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신용평가사의 국내 진입 허용에 대해 “기업문화 등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에 대해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부분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 강제 동원된 거문도 생존자 증언 “비가 오고 파도가 높게 치는 날에도 배를 타고 다른 섬에 건너가야 했어.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십장’이라는 일본인들이 사정없이 우리들을 방망이로 내려쳤지. 나야 워낙 어렸지만 연세 많은 아저씨들까지 스무살도 안돼 보이는 십장들한테 얻어맞는데, 정말 비참하더라고.” 1944년 거문도 군사시설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이성화(76) 할아버지는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일본군이 매일 필요한 인원을 요청하면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서 ‘어느 집 누구 내일 나오시오.’ 하는 거야. 나가지 않으면 식량배급표를 안 주는데 안 나가고 배길 재간이 있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리 집에 남자는 나뿐이라 고기잡이도 못하고 매일 끌려다녔지.” ●할아버지, 청소년 100여명 노력동원…몽둥이질 일삼아 16세 나이에 강제 부역을 해야 했던 이성화 할아버지는 “6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본군이 섬에 머무르며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저지른 만행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1938년 5월 일제는 전국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시체제에 맞춰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7년 300만명이던 조선 내 노동가능인구를 1941년 400만명으로 늘려잡는다. 노동가능 연령대를 20∼40세에서 14∼50세로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김윤미(26) 조사관은 “생업에 피해를 받으며 무임금으로 부역에 동원됐으면서도 강제동원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군사시설들은 1944년 12월부터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걸쳐 지어졌다. 일본인의 관리감독 아래 황해도 옹진 등의 내국인 발파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동원된 100여명의 주민들은 돌을 옮기고 굴을 파는 등 단순작업을 시켰다. 거문도를 구성하는 3개 섬 중 동도에서만 9개의 터널이 발견됐다. 이중 7개는 해안가에 지어졌으며 배를 댈 수 있도록 콘크리트 접안시설까지 갖췄다. 터널은 폭 2.5∼3.0m, 높이 3m, 길이 15∼25m로 h·I·王·T자형의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 위원회 한흥수(45) 조사1팀장은 “전쟁이 났을 때 군수물자, 식량, 어뢰정 등의 보관·대피시설로 활용하거나 주변 정찰을 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王자형 터널의 경우 최고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해안가 터널은 군용정 4∼5척까지도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규모”라면서 “특히 콘크리트 벽의 두께가 30㎝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고 말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 했을 가능성”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큰 일제시대 군사시설은 제주도의 터널 300여개였다. 그러나 거문도의 시설물은 제주도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지영임 연구원은 “이번에 처음 학계에 알려진 거문도 군사시설은 일제가 한반도 자체를 전장(戰場)으로 삼으려 했음을 뜻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면에서 제주도 군사시설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서도리 불탄봉(해발 195m) 정상 근처에 있는 참호 2개는 군수물자 보관용이라기보다는 주변 정찰의 용도가 더 큰 것으로 파악됐다. 참호에서는 남동쪽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지나는 선박의 움직임 등 주변 정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콘크리트로 입구 두 곳에는 철문을 달 때 쓴 경첩이 남아 있어 유사시 공격에 대비해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찰용 참호를 지을 때에는 주민들이 위치와 형태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규동(81) 할아버지는 “우리는 중턱까지 시멘트나 목재 같은 물자를 올려주는 일만 했고 그 위로는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다.”면서 “불탄봉에 주둔해 있던 육군들이 직접 짓고 포탄을 숨기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돌로 만든 80m 이상 전쟁용 방어벽도 건설 한 주민은 “일주일에 2∼3차례 수송용 비행기가 진해에서 물자를 날라 왔고 1944∼45년 사이에 함정 6∼7대가 항상 정박해 있었다.”고 증언했다.“해안가에 막사를 짓고 일본군과 기술자 100여명이 생활을 했지. 권총을 찬 해군이 군수물자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게 권총을 보여주며 나를 귀여워하기도 했어. 나중엔 일본군이 집단 이질에 걸려 일본인 대위가 친구집에서 매실즙을 마시고 나았다고 들었어.”(70세 원용삼 할아버지) 가운데 섬인 고도 거문리의 회양봉 중턱에서는 돌을 쌓아 만든 높이 60∼80㎝의 방벽이 발견됐다. 산책로를 따라 섬의 북쪽을 두르고 있는데 눈으로 확인된 것만 80m 이상이었다. 거문리 신사터 뒤편에는 1938년 일본이 거문리에 130m에 이르는 방파제를 개축했다는 기념비가 있다. 1904년 일본군이 매설한 해저 케이블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직경 약 1㎝의 구리선을 수십가닥 엮어 만든 케이블은 광복 전까지 일본군이 통신용으로 사용했다. ●일본식 건물, 신사(神社)터…황민화 등 일제 잔재 그대로 현재 거문도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어업·양식업에 종사하거나 낚시꾼을 상대로 하는 민박·식당업을 하고 있다. 하루 두번 관광객과 주민을 실은 배가 오갈 뿐 조용한 모습이다. 그 속에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도에는 일본식 건물의 흔적이 많다. 고도는 원래 주민들이 살지 않던 곳이었으나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일본인 거주지역이 됐고 현재는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있는 중심지다. 일본인들이 거문도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로 1897년 원양어업장려보조법을 만들어 국가차원에서 어업이민을 장려했다. 김윤미 조사관은 “연중 어장이 풍부하고 지리적 요충지인 거문도는 일본인을 이주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활용하기에 최적의 섬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1942년에는 87가구가 이주해 346명의 일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250가구 이상 살았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일본인이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소학교 3곳과 신사 터도 그대로 남아 있다. 비석만 흉칙하게 남은 200여평 넓이의 신사터는 현재 헬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도 소학교를 다닌 원용삼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10장의 카드를 주고 한국말을 사용하면 친구에게 카드를 뺏도록 해 카드의 개수가 적으면 마구 때렸어. 정월 초하루와 해군이 출격하기 전날엔 동네사람들을 모아 억지로 신사참배도 시켰지.”라면서 60여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글 사진 거문도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하필 거문도에 왜 지었나 거문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중간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와 부산의 사이에 있지만 거리로 따지면 일본에 더 가깝다. 거문도∼부산이 198㎞인 반면 거문도∼규슈는 161㎞밖에 되지 않는다. 예부터 일본∼중국, 여수·부산∼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이 풍랑을 피하거나 식수를 얻는 중간 기항지로 이용한 이유다. 이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열강들은 호시탐탐 거문도를 점령할 기회를 노렸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885년 ‘거문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국해군은 거문도에 무단으로 침입해 2년 동안 점령했다. 그래서 거문도에는 영국군이 만든 국내 최초의 테니스장과 영국군 묘지가 남아 있다. 일본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거문도에 해군과 육군을 1개 중대씩 배치했다. 그러다 1944년 말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이미 미군이 일본 오키나와까지 치고 들어가 있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일제는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거문도를 본국과 한반도를 잇는 초계기지 겸 병참기지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도와 서도 사이 내해(內海)의 물결이 잠잠하고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활용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비슷한 시기 제주도에 건설된 군사시설은 지하갱도 300여개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제주대 지영임 연구원은 “제주 해안가 갱도는 길이가 40∼60m에 이르며 함정을 출격시킬 수 있는 추진장치도 발견됐다.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제주도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오락프로그램 ‘상상 마이너스’?

    ‘비슷한 오락프로그램은 가라.’ 지상파방송 3사가 최근 부분개편 등을 위해 파일럿 형태의 예능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사나 타사의 기존 포맷과 비슷한 프로그램을 양산, 시청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다루는 소재나 형식에서 차별화가 없을 뿐더러,MC들의 겹치기 출연까지 늘어나 지상파들의 아이디어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MBC는 27일 사투리를 소재로 한 파일럿 프로그램 ‘언어공감 사오정’을 방송했다. 전국의 다양한 지역민들이 사투리로 문제를 내면 패널들이 정답을 맞히는 코너 등으로 꾸며졌고, 지방 출신의 연예인들이 출연했는데 이는 어디선가 본 듯하다. 바로 MBC가 사투리 돌풍을 일으키겠다며 지난 1일부터 방송한 ‘말(言)달리자’와 소재와 형식이 거의 같다. 당시 예능프로그램이 사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비슷한 프로그램을 또 내놨다는 점에서 소재 빈곤을 느끼게 한다.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신설한 ‘동안클럽’과 ‘검색대왕’은 각각 KBS의 ‘비타민’,‘상상플러스’ 등과 내용이나 포맷이 거의 비슷하다.‘동안클럽’의 건강 진단 및 퀴즈나 ‘검색대왕’의 MC 순간캡처, 화제의 동영상 등이 기존 프로그램들과 다르지 않다. 또 일밤의 다른 코너 ‘돌아온 몰래카메라’는 과거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억지스러운 설정과 출연진 수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방송계 관계자는 “몰래카메라가 14년 만에 부활했으나 출연진이 예전만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코너의 매력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SBS ‘일요일이 좋다’의 새 코너 ‘둥글게 둥글게’도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답을 맞히는 내용이 동심(童心)을 소재로 한 MBC ‘전파견문록’과 흡사하다.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송됐다가 정규 편성돼 16일 첫 전파를 탄 SBS ‘김용만의 TV종합병원’도 KBS ‘비타민’이나 SBS ‘맨투맨’ 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KBS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는 MBC ‘사랑의 스튜디오’와,MBC ‘일요스타워즈’는 예전 ‘유쾌한 청백전’‘명랑운동회’ 등과 비슷하다.‘일요스타워즈’는 결국 시청률 저조로 새로운 프로그램인 ‘일요스타워즈-전화받으세요’로 교체됐다. 지상파들의 예능프로그램의 차별화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시청률에 급급한 편성이 이뤄지거나, 기존 인기 프로그램을 답습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참신한 예능프로그램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설] 北, 남북관계마저 깨려 하나

    북한은 어제 남북 열차 시험운행 무산 책임이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남측이 열차 운행에 걸었던 기대를 전세계가 알고 있다. 북측의 주장은 적반하장일 뿐이다. 북측은 특히 “우리 식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핵 때문에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압박하는 강도를 높이고 있다. 그마나 남북 경협이 북측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관계마저 이렇듯 경색시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 북측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의에 진전이 없는 것과 시위대의 인공기 소각 등 남측 정세불안을 시험운행 중단 이유로 들었다. 남북 열차운행 합의는 NLL과 무관하게 이뤄졌다. 이런 식으로 까탈을 부리면 남북관계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남측 정세불안 거론도 억지라고 본다. 북측은 철도 시험운행을 취소한 지 하루만에 남북 경제협력추진위를 6월초 제주도에서 열자고 통보해왔다. 남측 정세불안이 심각해 열차 시험운행이 어려울 정도라면 제주도 대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경협의 과실만 따먹고 근본적인 남북 화해·협력을 외면한다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북측이 남측 군부를 강력히 비난하고 나선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북측 군부가 군사보장 합의를 꺼림으로써 열차운행이 무산되었음에도 책임을 남측 군부에 뒤집어씌우고 있다. 열차운행 취소를 넘어 남북 군사당국간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양측의 자제가 필요하다. 남북 경협과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약속을 수시로 깨고, 책임을 떠넘기는 북측의 행태를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 북측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경공업·지하자원 협력과 철도공사용 자재 추가지원이 늦어질 것임을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
  • [씨줄날줄] 쇼소인의 보물/이용원 논설위원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절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이다. 왕실 행정을 맡은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이 ‘창고’에는, 서기 8세기 이래 전해내려온 각종 물품 8000여점이 보관돼 있다. 이처럼 풍부한 유물을 소장했으면 일반에 널리 알리고 자랑도 하련만, 일본 왕실은 매년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소장품 60∼70점을 일시 공개할 뿐 일반인은 물론 학자들의 접근조차 일체 차단한다.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다. 쇼소인 소장품 가운데 신라 물품으로 유명한 것이 ‘신라촌락문서’(신라장적)이다.1933년 발견된 이 문서에는 8∼9세기 청주 일대 마을 4곳의 생활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각종 수치가 적혀 있다. 예컨대 ‘사해점촌(沙害漸村)’은 주민이 10가구에 142명이며, 노비는 9명이다. 마을 크기는 둘레가 5725보(步)에 이르고 소 22마리와 말 25마리를 길렀다. 또 뽕나무 1004그루에 잣나무 120그루가 있었다. 이같은 기록은 통일신라 시대 농촌 주민의 삶과 국가의 수취 체제 등을 상세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가치를 갖는다. 쇼소인 소장품에는 신라 물품이 적지 않게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인다.‘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일지사 간)를 펴낸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쇼소인 물품의 대부분이 일본이나 중국(당시의 唐)산이 아니라 신라 제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일본 학계는 이를 부인하느라 바빴다. 가령 한국 땅에서 출토된 신라의 거울·주전자·유리잔과 쇼소인이 소장한 그것들이 재료·형태·문양 등에서 같더라도,‘한·일 양국이 각각 유사한 물건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본다.’라거나 ‘신라 땅에서 나온 물건이 당나라 제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식의 억지 논리를 내세운다. 고대 일본이 선진국인 통일신라의 문물을 직수입한 사실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쇼소인 소장 ‘대방광물화엄경’을 통일신라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본 궁내청이 엊그제 밝혔다. 일본에 없던 닥나무 한지를 사용한 데다 그 힘찬 필체가 신라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게 그 이유이다.‘쇼소인 보물’은 일본뿐만 아니라 고대의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 일본 왕실이 쇼소인의 문을 활짝 여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생각나눔] 大學총학 ‘외유성’ 해외 탐방 논란

    한양대 총학생회의 해외 명문대학 탐방 행사가 ‘외유’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에서 “세금으로 해외여행을 하는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자 다른 쪽에서 “비운동권 총학에 대한 운동권의 억지스러운 문제제기”라고 받아치는 등 정치판 이전투구와 흡사하다는 지적이다. 한양대 총학생회는 2003년 해외교류위원회라는 산하단체를 만들고 그해 여름부터 6∼9일 일정으로 해외 명문대를 방문, 현지 학생들과 교류하는 행사를 열어왔다.20명 정도가 참석해 2003년에는 서유럽,2004년 중국·일본, 지난해 싱가포르·홍콩 등에 다녀왔다. 올해에는 8월 중 인도 등 제3세계 국가를 탐방할 예정이다. 총학은 자체 예산 외에 학교측으로부터 해마다 3000만∼5000만원을 지원받아 왔다. ●등록금인상 합의하자 불만 커져 하지만 총학간부 외에 토플 점수 등으로 일반 학생들을 함께 선발했던 2003년과 달리 2004년부터 총학과 단과대 학생회 간부만 탐방을 다녀오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게다가 총학이 격렬하게 벌이던 올해 등록금 투쟁을 슬며시 접고 지난 8일 당초 9.3%를 인상하겠다는 학교측 안에서 소폭 낮아진 7.87% 인상안에 합의하면서 총학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커졌다. ●“해외탐방비 장학금으로 돌려야” 지난 14일 ‘짱난다’라는 아이디의 한 학생이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학생회비를 받아 운영하는 해외교류위원회가 등록금 인상으로 어려워진 학생들의 경제적 사정을 감안한다면 외유성 해외탐방을 접고 관련 비용을 장학금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총학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그래도 총학측의 해명이 없자 아이디 ‘Aragon’은 “자비가 아니라 학교 돈으로 해외여행을 간다면 국비로 산업연수 간다는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국회의원의 행태와 다를 게 뭐냐. 해명하지 않는 모습도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한양대 신재웅(23·정치외교 3년) 총학생회장은 “이제까지 예산사용 내역과 결과보고가 없었던 점, 또 총학 간부들만 갔던 점도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일반 학생 선발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측도 불끄기에 나섰다. ●“올해엔 일반 학생도 선발 추진할 것” 한양대 학생처 관계자는 “행사가 리더십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 있고 첫해 토플로 일반 학생을 뽑았을 때 왜 영어로만 뽑느냐는 의견도 있어 2004년부터는 총학만 데리고 갔다. 올해엔 일반 학생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고려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최근 5년 동안 비운동권에 총학을 내준 운동권 학생회측이 공연히 트집을 잡기 위해 이런 글을 올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담은 글을 올리기도 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총학만의 특권의식 자체가 도덕성 차원의 문제인데 비운동권과 운동권 사이의 논란으로 번지는 것은 학생들의 기본적인 윤리의식 결여를 드러낸 결과”라면서 “본질을 비껴가는 정치판의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女談餘談]고독의 영토를 위하여/황수정 문화부 기자

    지난 주말, 적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밀쳐뒀던 번다한 생각의 잔가지들을 말끔히 한번 잘라내 보리라, 며칠을 별렀던 두시간이었다. 욕심이 과하단 걸 알면서도 시집이며 산문집이며 책도 두 권이나 챙겼다. 하지만 기차에서의 계획은 시쳇말로 ‘꽝’이 됐다. 옆자리 대학생들의 수다로 일관한 휴대전화 소음이 서울에서 대전이 가깝도록 이어졌다. 언제부턴가 출퇴근길 광화문 대로의 횡단보도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사물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남녀노소 없이 신종병기처럼 불끈 거머쥔 휴대전화들. 분초를 다툴 일이 저리들 많을까, 우울하고 민망한 살풍경같아 내 손의 병기를 가방 속으로 슬며시 밀어넣곤 한다. 휴대전화의 첨단능력이 나날이 찬미의 대상이 되는 판에 이 무슨 뒷북 감상이냐고 핀잔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고독해지려야 고독해질 여지가 없는, 침묵을 저당잡힌 세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안쓰럽다. 자기와의 내면대화에 갈수록 서툴러지고 있는 책임을, 단발성 전방위 소통창구인 첨단문명들에 돌려버린다면 그건 억지일까. 최근 한 광고기획사의 면접조사 결과가 흥미로운 뉴스였다. 요즘 중·고생들은 회초리보다 휴대전화 뺏기는 걸 더 두려워한다는 조사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몇달전 중학생 조카에게서 들은 우스갯소리가 현실이었던 셈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건 ‘악플’(악의적 댓글), 악플보다 더 무서운 건 ‘무플’(인터넷에 올린 글에 답글이 없는 것), 무플보다 더 무서운 건 휴대전화 없는 세상? 밖으로의 소통에만 목마른 삶을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실다운 논쟁이 없는 것도, 그릇 큰 논객이 사라진 것도 모두 고독과 침묵을 거세해버린 문명 탓은 아닐까. 어느 시인의 말대로 고독한 이들의 영토가 시(詩)라면, 문학이 시들고 있는 현실 또한 그 때문은 아닐까. 혐연권만큼이나 ‘혐통권’도 똑같이 존중돼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휴대전화 금통(통화금지)구역은 언제쯤이나 생길까. 사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고독의 영토를 돌려줄 시간이다. 황수정 문화부 기자 s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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