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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國保法 대폭 손질해야

    국가보안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겠다고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제네바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석한 외교통상부장관도 국보법 개정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이로써 국보법 개정은 움직일 수 없는 정부의 방침으로 굳어졌고개정작업도 속도가 붙을 것 같다. 정부가 출범 초부터 국보법 개정을 거론해 왔지만 너무 시일을 끈 느낌이다.남북 분단상황과 변하지 않은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 그리고 그에 따른 국민 보수층의 정서를 감안해 국보법 개정에 대한 여론형성을 기다렸기 때문일것이다.그러나 시일을 끄는 바람에 유엔 인권위가 국보법으로 인한 인권침해에 대해 두 차례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사면위가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을내걸고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정부의 체면을 구겼다. 국보법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국보법은 그동안 국민의 인권침해와 관련해 숱한 논란을 불러 왔다.먼저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며 모호한 조항이 많아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또한 역대 독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의사표시를 국보법을 악용해서 억압해 온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국내적으로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가 진전됐고,세계적으로도 인권이보편적 가치로 존중되는 시대가 됐다.또한 정부 차원에서 북한을 주권을 지닌 국가로 지칭하는 마당이며 빈번한 남북교류는 물론 금강산 유람선이 다니는 상황이다.시대의 진전에 발맞추기 위해서도 국보법은 대폭 손질돼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남북교류협력법과 충돌한다.그 결과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이 국민들을 혼란하게 하기도 한다.따라서 북한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와 국민 일반의정서가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국보법을 손질하는 데 있어 북한을 이롭게하는 행위 전반을 처벌하던 법 구조를 ‘우리의 안보를 명백히 해치는 행위’에 한정해 처벌하는 구조로 바꾸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유엔인권위가 인권규약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찬양·고무죄’ ‘불고지죄’와‘통신·회합죄’ 등은 폐지해야 마땅하고,법 조항의 모호한 용어도 명확히해서 유추·확대해석을 막아야 한다. 정부는 남북환경과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국보법을 대폭 손질함으로써 국민의 인권을 한층 더 보장하고 대북 포용정책에도 추진력을 보태기 바란다.
  • [김삼웅칼럼]화해와 용서의 미학

    어느날 자공(子貢)이 “종평생(終平生)할 수 있는 준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떤 말이 있습니까?”묻자 공자는‘기여호(其如乎)하라’고 가르쳤다. “용서하라”는 말이다.기독교의 정신도 ‘사랑과 용서’다. 불교를 비롯해모든 종교의 정신이 표현의 차이일 뿐 ‘사랑과 용서’를 본질로 한다. 3월1일 5·18민중항쟁 부상자와 유족 220여명이 광주항쟁 당시 진압부대인제3공수특전여단을 방문해 ‘화해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이 부대는 광주항쟁때 도청 최종진압을 맡았던 부대다.그때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이 학살됐는지는 잠시 접어두자. 같은 날 전남·경북대생 220명이 상대편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기 위해 입교했다.이번 교류 학생들은 1년간 동일한 학칙을 적용받게 되고 기숙사 무료제공과 등록금 전액 면제혜택을 받게 된다.두 대학 학생들은 “영호남 화합디딤돌 될래요”라고 합창했다. 얼만전 영호남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모여 화합과 친선의 자매결연을 하고 언론사에 TK·PK·MK 등 지역갈등을 조장하는용어를 삼갈 것을 요청했다. 지난달 25일金大中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신안군 하의도 생가를 방문한 대구와 충북·강원지역 노인복지대학 노인들이 金대통령의 생가를 복원할 수 있도록 성금모금의 뜻을 밝혔다.노인들은 “하의도를 방문했으나 金대통령의 생가가 복원되지 않아 볼거리가 전혀 없어 실망스러웠다”며 관광객들이 섬을 찾았을 때 생가라도 보고 갈 수 있도록 복원을 위한 작은 정성을 모으기로 했다고 한다. 오는 6월에는 임진왜란 당시 한·일 양국 장군들의 후손 20여명이 서울에서 ‘화해의 만남’을 갖는다.이 행사에는 우리측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5대 후손과 서애(西涯) 유성룡의 14대 후손,일본측에서는 왜군 총지휘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어(宇喜多秀家)의 15대 후손과 경남 사천성 전투의 왜장 시마쓰 요시히로(島津修久)의 14대손 등이 참석한다.일본은 지난해 10월8일 金大中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처음으로 문서를 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金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통해 포용론과 화해정책을 펴고 있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판문점으로 ‘소떼’가 올라갔다.17명의 장기수도석방됐다.玄勝鍾전국무총리가 “나는 일본군 장교였다”는 부끄러운 과거를고백하면서 용서를 빌었다.李會昌한나라당 총재는 ‘상생(相生)의 정치’를제창했다. 화해와 공존의 정치를 의미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국가적으로나 국민에게 겪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다.망국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과정에서 숱한 죽임과 억압,대결과 갈등을 빚었다.이념싸움과 노선투쟁·지역대결과 내부갈등이 그치지 않았다.이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찢기고 갈라지면서 원(怨)과 한(恨)을 남겼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친일파 문제를 비롯해 독재청산,의문사와 각종 의혹사건 등 청산하고 밝히고 정리해야 할 ‘역사의 빚’이산적해 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원수는 잊기 어렵지만은혜는 쉽게 잊는다는 말이겠다. 원도 많고 한도 많은 민족이기에 최제우 선생은 일찍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제창했던 것이다.20세기 원한의 매듭을 모두 풀고 새 천년을 맞았으면 한다.더구나 지금은민족의 대시련기다.민족적 시련과 대결을 화해와 용서로 풀고 남북과 동서가 공생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햇볕정책을 통해 북을 포용하고 지역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동서가 화합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새 세기,새 천년의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나갔으면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들,기득권자들이 참회할 것은 참회하고 용서받을 일은 용서받아야 한다.또한 정치인들이 적대의식과 지역감정에서 해방돼 화해와 용서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국민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네루)라고 하지 않던가.전직 위정자들을 포함,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에게 위해를 가한 인사들은 이 기회에 참회하면서 국난극복에 동참했으면한다. 물론 인간적 동정이나 용서와 역사적·사회적 평가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또 원칙없는 온정주의로 쉽게 잊고 용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그렇지만 화해와 용서는 인간의 환치할 수 없는 불변의 가치이고 삶의 미학이 아닐까. 주필 kimsu@
  • 재일교포 인권운동가 徐勝씨“모국방문중 사면·복권돼 기뻐”

    ‘비전향정치범’으로 19년동안 형을 살다 지난 90년 석방됐던 재일교포 국제인권운동가 徐勝씨(54·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교수)가 최근 한국을찾았다.서씨는 지난 71년 동생 俊植씨(인권운동사랑방 대표)와 함께 이른바‘재일교포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비전향정치범’으로서는 최초로 석방됐다. 그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서울대 안에 지하조직을 만들어 군사훈련 반대와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반대를 배후 조종했다는 것. 조사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받던 중 ‘살아서는 도저히 고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고문기술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의 석유를온몸에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몇 차례의 수술끝에 겨우 ‘사람모습’을 되찾았지만 “원자탄으로 타들어간 들판처럼 타 문드러진 나의 얼굴”이라는 서씨의 표현처럼 그의 얼굴은 아직도 흉한 모습이다. 이번 그의 방한은 지난 94년 일본에서 나온 옥중기의 한국어 번역판 ‘서승의 옥중 19년’(김경자 옮김,역사비평사)출간이 계기가 됐다.출국 전날인 지난달 27일 서울대 호암관에서 그를 만났다. ▒방한 목적과 소감은. 옥중기 출간을 기념하고 서울대학과 ‘한·일간의 법과 정치제도 비교연구’라는 공동프로젝트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28일은 내가 출소한 지 꼭 9년째 되는 날인데 한국 체류기간중 3.1절 특사로 나의 사면·복권이 이뤄져 더욱 기쁘다. ▒비전향정치범 출신으로서 이번 비전향장기수 17명의 추가석방을 어떻게 보나. 옥중에서 만났던 ‘선배’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반가워 봉천동 ‘만남의 집’을 찾아가서 만나봤다.이제 늙고 병든 그들에게 남북한 당국의 선처가 있기를 바란다. ▒‘옥중기’는 언제,어떻게 집필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94년 일본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친구의 권유로 병실에서 오른쪽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에 담기 시작했다.옥중에 있을 때 집에 보낸 편지,가족의 면회기록 등을 참고해 옥중생활을 재구성한 것인데 더러 희미한 부분은 출소자들을 인터뷰해서 보충했다. ▒94년 일본에서 ‘옥중기’를 냈을 때의 반응은. 그동안 약 5만부(5쇄)가 판매됐다.독자의 편지만을 모아 다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석방된 후 뭘 하고 지냈나. 석방직후 일본에서 타이완(臺灣) 정치범 출신 모씨를 만나면서 동아시아의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97년 타이완에서 개최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심포지엄과 이듬해 제주도에서 개최한 ‘제주4·3’ 심포지엄은 모두 이같은 취지에서 조직한 것이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남북의 분단,중국과 타이완의 분단,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갈등 등 ‘분단문제’를 집중 연구할 계획이다.금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주한미군범죄를 주제로 제3회 국제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서씨는 출소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지난해부터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 재직중이다.
  • 특별기고-환경문제와 위험사회/문석남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산업화는 인류의 생활조건을 크게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왔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수반한 것도 사실이다.더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방치할 수 없게끔 세계적인 관심이 고조되면서 1992년 세계 정상들이 국제회의를 소집하여 채택한 것이 이른바 ‘환경과 개발에관한 리우선언’이다. 이 선언의 기본정신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고,지속 가능한개발을 위해서 환경보호를 개발 과정의 중요한 일부로 간주하며,개발의 권리는 개발과 환경에 대한 현세대와 차세대의 요구를 공평하게 충족할 수 있도록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학자 ‘올리히 벡’은 산업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고,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위험사회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환경문제가 심각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인간의 감각체계를 무력화시키고 산업적 진보에 대한 확신과 합의를 붕괴시키며,전체 사회구성원을 공포의 공동체 내에 평준화시킴으로써 일상생활의 건강과 ‘삶의 질’은 물론 전체 사회체계와 기능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상태로 치닫게 된다. 한국의 경우도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예외가 아니다.우리들은 이미 광양만화공단지,안산의 시화호,온산지역의 환경오염과 낙동강 폐놀유출사건 등을계기로 환경문제가 곧 생존에 직결된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게됐다.그리고 공기,물,토양 등이 날로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 위주의 개발독재는 자연환경 보존을 소홀히 했고,국민의 환경의식과 환경운동을 독재적인 방법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한국의 생태계 훼손과 환경오염은 산업화 정도가 비슷한 여타의 나라들에 비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한국 사회도 위험사회로의 진입을 예고하는 여러 형태의 징후군이 표출되고 있다.이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정부와 산업체,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연대적으로 귀속되지만 정부와 산업체의 책임이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않을 수 없다. 우선 정부 환경정책의 미숙이다.정부에는 환경부가 있지만 환경문제에 관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워 국민의 공감을 살 수 있는일관된 정책을 추진한 적이 거의 없다.오염을 예방하고 제거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근본대책없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임기응변식의 미봉책으로 대처해온 것이 환경정책의 현주소다. 산업체도 환경문제에 관한 사회적 책임과 기업윤리를 성실히 준수해야 한다.환경정화시설에 투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의 준칙을 무시하고 벌과금으로 대체하는 악습과 감시망을 피해서 오염물질을 불법방출하는 무책임하고비윤리적인 산업체는 국민의 이름으로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환경단체와 시민들이 연대하여 심각한 환경오염 유발업체를 패쇄시킨 선진국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시민들도 이제는 스스로 환경오염의 유발자라는 새로운 환경의식으로 거듭나야 한다.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민이 환경오염의 유발자임에는 틀림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염 책임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거나 집단이기주의에편승하여 타 지역으로 피해를 전가하려는 왜곡된 환경의식은 공동체의 연대책임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이시작되고 21세기의 한국은 환경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사회의 위협에서 반드시 해방돼야 한다.그리하여 환경이 복지권으로 보장되고 문화적 다양성이 꽃피는 환경친화적 문화국가의 면모를 갖춘 사회상(社會像)이 이룩되기를 기원한다.
  • 국민의식수준과 詩의 관계

    새해를 맞았는데도 사람들 마음이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작년 한 해 너무나 고생스러워서 그런 걸까.우리를 강타했던 IMF상황에 대해서는 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분석이 이루어졌다.접근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라는 것,그리고 우리나라의 개별적 사안이 아니라전 지구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라는 인식에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야를 넓혀 살펴보면 이 문제는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노선과 연관되어 있으며,복잡하게 얽혀 있는 탈(脫) 근대이데올로기들의 각축전과도 관계되어 있다.그러나 20세기를 지배했던 민족국가들의 상호경쟁과 냉전이데올로기 대신 어떤 이데올로기가 등장할지 아직은 미지수다.대부분의 서구학자들은 ‘근대가 끝났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의 종말은 서구 이야기이지 우리 이야기는 아니다.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의 청산’이 아니라 ‘근대의 심화’이다.우리 사회어느 분야도 모순을 드러낼 정도로 심화된 근대적인 합리적 이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그런 형편에 우리 사회 안에서는 무책임한 서구 추구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수한 ‘탈근대’ 담론들이 밀어닥쳐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하는 맥락의 발생을 억압하고 뒤틀었다.이 ‘포스트’ 유령들은 특히 문학계를 비집고 돌아다녔다. 한 나라의 문학은 국민이 확보하고 있는 정신 수준의 지표이다.참된 문학정신은 사회가 지금 무엇을 요청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우리나라의 순수문학이 지금 우리 사회가 얼렁뚱땅 진도를 떼어먹은 심층 근대성을 발생시키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소설보다도 시 쪽의 성취가 훨씬더 뚜렷해 보인다. 심층 근대성이란 아주 간단히 끊어 말하면 ‘자아의식’,즉 ‘내가 누구인지,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의식’으로 구성된다.그런데 그 의식은 현대 철학자들이 누누이 보여준 것처럼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따라서 현대사회에서문학,그 중에서도 ‘시’는 단순한 ‘읽을 거리’나 ‘감상적 오락거리’가아니다.그것은 한 나라 의식의 정수이다.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최고 수준의 언어는 언제나 치밀한 분석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시 전문 월간지 ‘현대시’의 지난 1월호에는 시인들의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가 실려 있다.시인들은 무관심과 홀대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근대성만 쫓아다니느라 부실해진 조국의 정신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그러나 대중도,비평가들도 시를 외면하고 있다.시인들은 시가 돈이나 명예가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우리 사회가 자신의 부박함을 극복할 수 있는가장 확실한 정신적 인프라 가운데 하나를 내팽개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심화된 근대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눈먼 장님처럼 세계의잔칫상의 부스러기나 구걸해 먹게 될 것이다.또 돈을 벌 수 있다한들 이제밀어닥칠 21세기의 문화의 파도 앞에서 어릿어릿 뭐가 뭔지 모르고 헤매는‘문화적 백치’가 될 것이다. 시에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시인들이 고독 속에서 써내고 있는 시 속에 21세기가 선택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 있다.한국 시인들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시들을 써내고 있다.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7회)-’해방전후사의 인식’

    역사는 늘 권력을 잡은 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권력자는 때로 역사를 왜곡해 왔다.그 결과 세계사의 적지 않은 부분이 정직하지 못한 역사로 얼룩져있다.한국의 현대사도 독재권력에 의해 왜곡됐다.그러나 엄혹한 독재상황에서도 민족의 일그러진 역사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식있는 지식인들의 행동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낸 것도 진실을 밝혀 역사의 시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데 작은 동력이 되고자 하는 시도였다.송건호 선생 등 12명이 쓴 이 책은 1979년 10월 15일 한길사에서 펴냈다.당시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책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독재권력은 해방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려운 시대의 어둠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했다.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내기로 했다”고 그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송건호 선생은 ‘8·15의 민족사적 인식’이라는 글에서 분단의 비극을 안타까와 했다.민족의 비극이분단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분단의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남북갈등과 막강한군사력의 대립으로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 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그는 친일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부끄러운 현실과 분단을 권력유지에 이용하는 독재권력을 비판했다.“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는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라며 대중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건호 선생의 글을 비롯한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해방후 역사현실을 식민사관이나 독재권력의 ‘분단고착화’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분단을 악용하는독재권력,친일파 숙청작업의 좌절 등 해방전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썼다.그것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에 나올 때는 유신독재가 말기현상으로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며 비극적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책이 나온 다음날 부마사태가 터졌다.유신정권의 억압이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이다.불안한 긴장 속에 책은 빠르게 팔려나갔다.열흘만에 초판 5,000부중 4,500부가 팔렸다.사회과학서적이 그것도 500쪽이 넘는 책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10월26일 궁정동의 총성으로 비극적인 막을 내리며 이책도 비운을 맞았다.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출판물이 군의 검열을 받게됐다.당연히 군 당국은 이 책을 판매금지시켰다. 김언호 대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79년 10월 28일 문공부로호출됐다.‘당신을 구속해야 하지만 처음이니까 관용을베풀겠소.다시는 이런 책 내지 마시오’라고 계엄사에서 파견된 한 문관이 말했다”. 판매금지 사유는 현실 왜곡·부정이었다.그러나 현실을 왜곡한 것은 책이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책을 현실 왜곡·부정이라는억지 이유로 ‘금서’로 규정하는 현실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었다. 이 책은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짧은 민주주의 실험때 판매금지에서 해제됐다.민주주의 실험은 강경 군부의 등장으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그러나 ‘광주의 비극’과 그 이후의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결실을 맺었다.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에 눈을 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을 찾았다.베스트셀러가 됐다.80년대 30만부나 팔렸다”고 김언호 대표는 말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민족적 자각이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고양되는 시대였다.깨어있는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모든 비극의 근원적 원인은 민족의 분단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분단현실은 남북의 군사대결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었다.친일파들은 반공이데올기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했다.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민족의 양심을 파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독재권력은 분단을 권력유지에 악용했다.독재로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다.의식있는 지식인들은 친일파와 독재권력이 이러한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을 분단으로 합리화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독재정권은 집권동안 이러한 역사인식을 박제하여 낡은 역사의 창고에 강제로 묻어두려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도 무너지고 그들이 왜곡했던 역사의 진실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한 때 판매금지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해방전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시대를 올바르게 정리해야 그 이후의 역사도 정직하게 씌여진다.정직한역사를 통해 역사의 시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 ‘99문화를 여는 사람-소설가 은희경

    9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큰 수확으로 꼽히는 작가 은희경씨(40).두번째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가 7주째 소설부문 베스트셀러1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전북 고창출신인 은씨는 95년 등단 이후 3년여 동안 장편소설 ‘새의 선물’과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등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의 소설은 흔히 사랑소설 혹은 연애소설로 읽힌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주제 역시 사랑이다. “혹자는 저를 연애소설 작가라고 합니다.하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상투성’,그로 인해 초래되는 진정한 인간적 소통의 단절이에요.” 은희경은 흔하디 흔한 사랑의 주제를 기존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도전적인방식으로 다룬다.그에게 있어 사랑은 고상하고 감상적이며 가슴 아린 그런것이 아니다.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순정은 더욱 아니다.‘타인에게 말 걸기’에서 이미 “사랑은 천상의 약속일 뿐”이라고 선언했듯,은희경식 사랑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낭만성을 뒤엎어 버리는 ‘순정의 아이러니’로서의 사랑이다.‘마지막 춤은…’에서 주인공 진희는 세 명의 남자에 동시에 끌리는 자유분방한 사랑을 선보인다. “제가 소설에서 그리는 사랑은배신과 반칙이 횡행하는 무규범의 사랑입니다.이를 통해 이 사회에 통용되는획일화된 가치와 허위의식을 비판해보자는 것이지요.우리 사회의 숱한 억압과 금기에 의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사랑,그 억압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움을 얻는 사랑이 제가 추구하는 사랑의 본모습입니다” 은씨에 의하면 사랑의 가장 커다란 병균은 사랑에 대한 환상이다.그는 사랑에 관한 이 치명적인 환상을 없애기 위해 사랑을 상대로 위악적인 실험을 벌인다.올 안에 펴낼 단편소설집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과 경(輕)장편소설‘꿈속의 나오미’는 모두 그 연장선상에 놓인다. 그는 한때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냈다.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에는 비문(非文)이 거의 없다.올해는 문장교본이 될만한 단편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써볼계획이다. [작가 은희경씨는] ●전주여고,숙명여대·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95년 중편‘이중주’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제10회 동서문학상,제22회 이상문학상등 수상
  • 문익환목사 삶의 흔적·문학작품 모은 전집 출간

    문익환 선생의 삶은 거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이다.분단과 독재를 배경으로 펼쳐진 장대한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았다. 그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다.통일을 염원하는 뜨거운 민족애는 차가운 냉전의 벽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는 열정으로 나타났다.그는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는 큰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독재의 현실이 너무 갑갑했다.그래서 독재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에 끝없이 도전했다.민중을 억압하는법을 깨면서 살았다.그러나 어둠의 밤이 영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그는 찬란한 역사의 아침을 믿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작품을 모은 ‘문익환 전집’이 11일 출판된다.‘통일맞이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회’가 발간하는 그의 작품 하나 하나에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불행한 시대 자유인’의 삶이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 담겨 있다.사계출판사는 타계 5주기를 맞아 12권의 전집을 800질 한정본으로 발간한다고 밝혔다. 제1권과 2권은 시인으로서의 문익환 선생을 조명한다.3권부터 5권까지는 통일을 향한집념과 발자취 및 민주화 투쟁 과정을 담고 있다.6권은 수필이다.7권에서 9권까지는 투옥기간에 가족과 지인에게 보낸 옥중서신,그리고 파스요법등 그가 창안한 민중의학으로 꾸며져 있다.10권과 11권은 신학자이며 목사였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12권은 설교문으로 구성돼 있다. 늦봄 문익환은 1918년 북간도 용정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시인 윤동주와는 고향에서 초등·중학교를 같이 다녔다.그의 생애에서 윤동주는 언제나 ‘별’이었다.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어둠을 뚫고 찾아오는 아침과 조국광복을 믿었듯이 그도 민주주의와 통일시대가 올 것을 믿었다. 윤동주가 마음의 별이었다면 그를 70년대 반독재투쟁에 나서게 한 것은 장준하였다.그는 3권에 실린 ‘역사를 보는 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장준하의 죽음을,아니 그의 마음을,그의 뜻을,그의 나라사랑·겨레사랑을 땅에 묻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그의 시체를 땅에 묻으면서 저는그의 죽음 앞에 맹세했습니다.“네가 하려다가 못다한 일을 하마.” 그는 신학교후배인 장준하와의 약속대로 반독재투쟁의 한가운데 섰다.그의 활동은 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민주구국선언’으로 하나의 절정을 이루었다.그는 선언문을 기초했다.명동선언은 유신독재에 대한 도전이었다.‘7·4공동성명 이후의 민족문제’라는 글은 절박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긴급조치 1호가 발동된 74년 1월을 김지하는 ‘죽음’이라고불렀다.학원의 외침마저 침묵해 버렸다.이 암흑기에 누군가 민족의 진로를염려해서 할 말을 했다는 기록만이라도 남겨야 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그가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은 분단의 현실이었다.그는 모든 문제의 뿌리는 분단에 있으며 민주화와 민족통일은 다른 과제가아니라 하나라고 인식했다.그리고 통일이 민족문제 해결의 완결편이라고 생각했다.“동학 농민혁명에서부터 70·80년대 인권운동에 이르는 민족의 수난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모든 과제들을 한꺼번에 푸는 일은 통일입니다”라고 ‘역사를 보는 눈’에서 지적했다.통일은 그러나 평화적이고 민족 주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의 글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자주적 통일 제단에 하나의 벽돌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그는 마침내 분단의벽을 넘었다.1989년 3월25일.문익환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한국뿐만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깜짝 놀랐다.그는 88년 그믐날을 명상으로 지샌후 89년첫 새벽에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 마지막 줄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라고 끝맺으며 방북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김구 선생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기분으로 북한에 왔다고 도착성명에서 밝혔다.그는 북한에서도 “북은 자유를 남은 평등을 향해서 궤도수정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강조했다.그의 논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앤서니 기든스 교수의 ‘제3의 길’과 맥이 닿아 있다.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기독교 신앙과 시는 힘의 원천이었다.그는많은 시를 썼다.쉰이 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가 거의 40%를 차지하는구약성서를 번역하다 뒤늦게 시인이 됐다”고 밝혔다.신경림 시인은 작품해제에서 “그의 가장 치열한 시 정신은 민족현실을 아파하는 시,통일을 염원하는 시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문익환은 10여년 동안의 옥중생활 중에도 많은 시와 산문을 썼다.그의 옥중서신은 바깥 세상을 향한 ‘희망의 종이 비행기’였다.그의 글은 쉽고 명료하다. 행동하는 구약 신학자였던 그는 독재권력과 제도권 언론으로부터 많은 탄압과 비난을 받았다.그러나 권력과 제도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다양한 삶을 살았다.그래서 그는 ‘생의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李昌淳 cslee@
  • 東亞를 껴안고 통일로 가자-특별기고

    지금은 변혁의 때다.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한 세기가 지나가고 있 다.아니,한 백년이 아니다.한 천년이 지나가고 있다.산업사회가 새로운 정보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이런 때 우리는 역사의 올곧은 흐름을 적극적으로 운 용하여 총체적 개혁을 이룩할 의지와 비전과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그렇지 않고서는 21세기 문턱에서 퇴출당하게 될 터이다. 20세기는 탈냉전으로 그 막을 내리고 21세기는 정보화(디지털 혁명)로 그 막을 올리고 있다.세계는 모두 냉전 이후의 21세기로 진입하고 있는데,유독 한반도만 20세기의 부끄러운 유제인 냉전체제에 갇혀 있다.냉전체제를 끊임 없이 재생산해내야만,그들의 기득권을 계속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이념적 러 다이트(Luddite)들이 한반도 남과 북에 아직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차이를 증오하여 거침없이 차별한다.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이나 집 단은 초전박살낼 것처럼 덤빈다.그들에게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협 력,관용은 부덕(不德)의 소치일 뿐이다. 21세기 정보화가 요구하는 가치는 개인의창발력과 추진력,조직,경영의 투 명성,인간관계와 집단관계에 있어서 개방성과 관용,그리고 약자들과의 연대 성 등이다. 이같은 가치를 무시하는 개인과 기업과 국가 역시 21세기 역사로부터 퇴출 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라.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불신하고 증오해온 지 반세기를 넘겼다.남쪽은 동과 서로 갈라져 서로 불신과 반목을 해온지 이 미 오래되었다. 동서로,남북으로 갈라서 대결해온 이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를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어떻게 해야 동서를 껴안고 남북을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시급한 것은 한반도를 불신과 죽음의 대결장으로 끊임없이 만들어 온 냉전적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청산하는일이다.왜 그것이 필요한지 먼저 남북 간의 형편을 보자.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간에는 적대적 상호주의 정책이 줄곧 관철되어 왔다. “이에는 이,눈에는 눈”으로 남북이 서로 병신 만드는 일에 전력을 쏟아왔 다. 북이 남의 눈을 치면,남은 북의 눈을 반격한다.서로 눈을 치고 이를뽑아내 는 냉전적 대결을 거듭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적대적 상호주의 관계가 적대적 공생관계의 모습으 로 악화되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의 수구냉전 세력과 북의 강경냉전 세력은 겉으로 서로 가장 미워하면서 도,위기국면을 조성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로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일을 해 왔다. 명시적으로는 가장 적대적이면서도,결과적으로는 남북 각 체제 안에서 자기 들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켜 온 것이다.이른바 ‘총풍’같은 사건의 깊은 뜻 도 이같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시각에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비극이다.왜냐하면,남과 북의 수구냉전세력은 역설적으로 기존의 남북간의 냉전 불신과 냉전 대결을 더 악화시키면서 서로 상대방을 안으로 결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역설적으로 이적행위를 해 온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이 통일을 외치면,남은 즉각 그것을 적화통일로 인식하 게 돼 있고,남이 통일을 외치면 북은 그것을 대번에 흡수통일로 받아들인다. 불신의 비극이다.통일의 소리가 높아질수록,남북간의 불신과 증오심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비극에 더하여 남쪽은 그간 동과 서로 갈라졌다.동서 간의 불신과 불화의 근본원인은 지난 날 군사독재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가 대구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 경상북도 도지사는 호남분이었다.우리 는 그분을 훌륭한 도지사로 우러러 보았다. 군사독재가 들어서면서,그들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짐짓 동과 서를 갈라 서로 미워하게 하는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게다가 군사통치의 기 본틀 역시 냉전체제의 틀이었다.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차별,억압하거나 포섭 해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서간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냉전 대결과 동서 불신 은 군사통치하에서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때다. 개혁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까닭은 바로 이같은 냉전 패러다임을 관용과 열림과 투명성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야만 우리는 21세 기에서 세계 중심국가로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이 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반개혁세력이 냉전세력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있으면서,개혁전선을 짐짓 흐 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랴.개혁은 혁명과 달리 합법적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시간이 걸리고 인내심이 요구된다. 게다가 반개혁세력은 그 조직력에 더하여 그럴듯한 반개혁 논리를 교묘하게 확산시키고 있다.무엇보다 개혁이 어려운 것은 가급적이면 반대 세력도 설 득·포용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개혁 몸통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다. 혁명과 달리,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만큼,개혁은 동과 서를 껴안고,남과 북 을 포용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그렇게 하려면 개혁이란 새의 날개는 크고 튼 튼해야 한다.그래야만 동과 서,남과 북,남과 여,노(老)와 소(少)를 모두 껴 안을 수 있다. 그런데 날개만 길고 튼튼하면 될까? 독수리 날개에 참새 몸통이라면,그 개혁의 새가 과연 날 수 있을까?날개가 클수록,몸통도 그만큼 크고 튼튼해야 한다. 개혁의 몸통은 무엇인가?개혁의 비전과 철학과 신념을 확실하게 몸으로 체 득한 중심세력을 말한다. 개혁 몸통은 잡다한 인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잡다한 인물은 개혁의 날개로 포용되는 것이지,개혁 몸통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유기적 연대를 이뤄낼 수 없는 두 세력간의 동거체제가 몸통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동거는 날개 안에서 이뤄내 야지 몸통 속에서 이뤄질 수 없다. 튼튼한 개혁 몸통이 있을 때,비로소 뚜렷한 개혁 비전이 세워지고,그 비전 에서 합리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다듬어져 나오게 된다. 이 프로그램이 나오면,재능있는 온갖 테크노크라트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세력도 설득하여 프로그램 집행에 참여시켜야 한다. 하지만 어 디까지나 개혁 몸통이 개혁의 중심과 균형과 방향을 올곧게 잡고 나가야 한 다. 새해를 맞아 과연 지금 개혁의 중심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탈냉 전의 역사적 요청에 부응하여,열린 사고,투명한 관리,관용의 지도력을 발휘 하여 동서를 껴안고 남북 화해를 추진할 시스템이 과연 존재하는가? 과연 집권당이 이 몸통의 구실을 해내고 있는가?과연 청와대가그 구실을 해내고 있는가?과연 내각이 이 시스템같이 작동하고 있는가? 개혁의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날지만,보다 높고 멀리 날려면,좌우의 큰 날개 를 효율적으로 관리해낼 튼튼한 몸통이 있어야 한다. 새해를 맞아 개혁 몸통의 구축을 위해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튼튼한 개 혁 몸통을 가진 새가 길고 큰 날개로 동서를 껴안고 남북 화해와 통일로 저 높은 21세기 하늘을 힘차게 날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 북한 인권의 허상/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은 흔히 인권감시의 사각지대로 비유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일 올해 세계인권선언 50돌을 맞아 인류의 진정한 권리보장이 국제적으로 요구되면서 북한인권에 대한 비판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 4월 국제사면위원회가 북한 인권유린 실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50차 유엔인권소위원회도 북한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 국무부가 12월15일 발표한 연례보고서도 북한을 전세계에서 인권상황이 가장 나쁜 국가중에 하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북한인들의 자유정도는 이라크,쿠바,수단과 함께 세계최악이며 191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기본적 정치적권리,시민자유,자유언론이 존재하지 않고 시민생활이 억압되는 가장 탄압적인 국가로 꼽았다. 그동안 북한의 인권문제는 정권의 폐쇄성 때문에 국제적 관심밖에서 맴돌았고 정확한 실상이 은폐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식량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졌고 탈북자들에 의한 북한의 절망적인 인권상황이 고발돼 열악한 북한 인권실태가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됐다. 북한의 인권실태는 金日成사후 더욱 악화된 가운데 초법적인 살인과 인간 실종이 빈발하고 있으며 고문과 강제수용등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는 현재 10여개 정치범 수용소에 약 20만명이 정치적 이유로 갇혀 있으며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과 실종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유엔회원국이자 국제인권규약 비준국이면서도 87년이래 10년이 넘도록 인권보고서 제출자체를 거부하는 등 국제적 의무를 저버리다가 97년 8월 국제인권규약에서 탈퇴까지했다. 바로 이같은 북한의 열악한 인권수준으로 말미암아 최근들어 북한내부에서 金正日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반체제 성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는 북한이 사회주의 민주화를 통한 인권문제를 개선,주민들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주민들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인간적 대우를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 민주화가 북녘땅에서 하루속히 실현돼야 함을 강조한다.
  • 세계인권선언 50돌/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세계인권선언이 10일로 50돌을 맞았다. “인류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로 시작되는 전문(前文) 및 30조로 된 이 선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인권의 국제적 규범이 되어왔다. 제2차 대전의 산물이기도 했던 이 선언은 지난 66년 유엔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각기 채택함으로써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를 양분한 동서냉전체제와 세계도처의 독재정권 출현으로 시민들은 그들의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생존권까지 박탈당하기도 했다. 공산주의국가에서의 인권은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고,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정권 아래서는 국가안보와 사회안전이라는 통치도구의 희생물이 되었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지구촌 곳곳의 지역분쟁,종교적 대립,인종적 갈등으로 자유·안전권은 물론 생존권과 복지권이 위협받기 일쑤였다. 캄보디아,르완다,보스니아 등지에서는 수만명이 짐승처럼 죽음을 당했고 바로 지난해만 해도 117개국에서 고문이 자행되었으며 55개국에서 약식 처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도 지킬 수 없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연명하는 세계인구가 15억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지 50돌이 되어도 인류의 진정한 인권보장은 멀기만 하다. 몇해 전만 해도 인권침해국가로 분류됐던 우리나라는 이제 자유국가로서 인권존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법적·제도적 개선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권법 제정을 위한 막바지 조율작업도 그 사례의 하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과거 엄혹했던 독재정권시절의 인권침해 유산이 그대로 널려 있다. 분단의 특수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은 더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독재투쟁 과정에서,아니면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학생운동을 하다가 혹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사인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한다.이같은 인권침해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에서부터 진정한 인권존중의 국가 건설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이와 함께 세계 최악의 인권침해 국가의 하나로 지목받고 있는 북한은 이제 주민들에게 최소한 인간의 존엄권과 생명권,그리고 행동자유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 金允聖 대검공보관(인터뷰)

    ◎작은 친절로 더 가까이 있는 검찰 거듭 날터/민원인 환경개선 배려/‘도우미 벨’제도 호응얻어 “지금까지 우리 검찰은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인식돼왔습니다. 국민을 억압하고 감시·감독하는 존재로 각인됐던 것입니다” ‘검찰바로 알리기’운동을 관장하고 있는 대검찰청 金允聖 공보관(부장검사)은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서는 검찰이 되기 위해 친절운동을 펼치게 됐다고 말했다. 金공보관은 이번 운동이 구호성이나 일과성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세부실천계획을 세워 작은 친절부터 시작,검찰이 거듭났음을 알리겠다는 얘기다. 실제로 검찰은 직원들에 대해 친철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접촉에서의 친절’이 우선이다.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 맨 먼저 “감사합니다”나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다시 안내하는 등 전화친절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金공보관은 “민원인의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원실에 각종 잡지 등 읽을 거리를 비치하는 것에서부터 민원인 전용 컴퓨터를 설치하는 등 이용에 편의를 도모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민원인이 직접 검찰 간부와 통화하여 애로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도우미벨’제도를 일부 청에서 시행,민원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얼마 전 춘천지검에서 도우미벨 제도를 적용,바로 시행한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부인을 상습적으로 구타하여 복역하던 남편이 출소,다시 폭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을 도우미벨로 접수해 그날 남편을 구속한 사례가 실제 있었다. 金공보관은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당사자들의 의식과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감찰부에서 직원들의 행동을 수시로 점검,점수를 매기는 것도 그 일환이다.
  •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6권 잇따라 출간

    ◎중편소설로 문학출판 활로 연다/이윤기 ‘진홍글씨’ 김채원 ‘미친상의 노래’ 등/장·단편에 대한 상대적 소외감 덜고/90년대 거품제거… 문학본질에 더 접근 침체된 국내 문학출판의 활로를 중편소설로 연다. 도서출판 작가정신이 ‘소설향 시리즈’란 이름으로 6권의 중편소설집을 내놓았다.‘소설향’이란 소설의 향기 또는 소설의 고향이란 의미로 붙여진 말.이윤기의 ‘진홍글씨’,김채원의 ‘미친 사랑의 노래’,이순원의 ‘해파리에 관한 명상’,윤대녕의 ‘장미창’,배수아의 ‘철수’,조경란의 ‘움직임’ 등이 그 이름에 값하는 책들이다. ‘노블레트’로도 불리는 중편소설은 장편소설보다 짧고 단편소설보다는 긴 소설을 가리키지만 그 한계는 뚜렷하지 않다.중편소설의 분량은 보통 200자 원고지 250∼300장 정도.멜빌의 ‘빌리 버드’,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콘라드의 ‘어둠의 속’ 같은 친숙한 외국작품들이 모두 중편이다.하지만 우리문학의 경우 중편소설은 상대적 무관심 속에 소외돼온 측면이 없지않다. 이번에 나온 ‘소설향 시리즈’는 중편소설이라는 출구를 통해 90년대 우리 문학의 거품을 걷고 문학의 본질에 한발 다가서게 한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소설향 시리즈’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98 동인문학상 수상작가인 이윤기씨의 ‘진홍글씨’.남성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여성억압적인 현실을 문명사적 시각에서 비판한 작품이다.여성문제에 관한한 자각적이고 선진적인 의식을 지녔던 남편이 ‘가부장제의 종’으로 전락하면서 이야기는 본궤도에 오른다.남편의 배신을 계기로 주인공인 어머니는 여성이라는 성의 비극에 눈뜬다.그는 마침내 고대 여인국의 여전사인 ‘아마존’의 충실한 후예가 될 것을 선언한다.활을 쏠 때 시위에 걸린다고 오른쪽 유방을 잘라냈다는 잔인한 무인족속.그 길을 걷는 주인공에 대해 작가는 적극적인 해석을 내린다.“아마존의 오른쪽 젖 자르기는 병원의 무영등(無影燈) 아래서 벌어지는 현대의 매스텍터미(유방절제수술)가 아니다.그것은 모성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남성의 노예노릇을 거절하겠다는 피눈물나는 선택의 산물이다” 한편 작가정신측은 매달 한 두 권씩 신작 중편소설을 꾸준히 펴낼 계획이다.한수산 윤영수 은희경씨 등의 작품이 곧 나온다.
  • 배설의 상해 복역(대한매일 秘史:6)

    ◎더위·모기떼 시달리며 3주간 혹독한 옥고 치러/판사 “한국민 선동” 판결.英 군함으로 상해 이소/한국인들 연일 몰려오자 형무소 면회 아예 금지/영어 공판기록 번역 대한매일 한달반 연재 4일째인 6월18일(1908년) 판사 보온은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禁錮)형을 선고했다.또한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하며 350파운드의 보증금(피고 200파운드,보증인 150파운드) 납부를 판결했다.판사는 문제된 논설 3건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봉기를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정했다.그러므로 앞으로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격분했다.어떤 사람은 돈 4천환을 가지고 와서 배설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했고,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한국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는 배설의 처벌로 그들의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미국의 한국교포들이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을 보더라도 그런 위험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영국 총영사관 부근에 경찰관을 순회시키는 등의 예방조치를 취해달라는 편지를 일본측에 보냈다. 배설을 어디에 수감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서울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었다.편법으로 호텔이나 집을 세내어서 감금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 당국이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그렇다고 일본인 관할 하의 형무소에서 복역케 한다면 영국이 배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었다.마지막으로는 배설을 상해로 호송,그곳의 형무소에서 복역케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었다.그러나 배설을 어떻게 상해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이 난관이었다.당시 인천­상해간 정기 배편이 없고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배설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가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코번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로 직접 싣고 갈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을 보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외무성은 이를 받아들여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 클리오(Clio)호를 단 한 사람의 죄인 배설을 상해로 호송하기 위해 급히 인천으로 파견했다.배설에게는 6월18일 오후에 금고형을 언도하였으나 상해로 싣고 갈 군함이 올때까지 일단 석방,이틀 뒤인 6월20일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이에 따라 배설은 20일 오후 4시 총영사관에 출두,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5시20분 발 인천행 기차를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배설이 서울역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많은 군중들이 서울역에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상해로 가는 낡은 군함을 탄 이후부터 배설의 고생은 시작되었다.배 안의 생활은 이미 복역 기간이었다.더욱이 상해 형무소에 들어간 후에는 밤이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팔다리를 격렬하에 휘저어대며 방안을 거니는 것으로 겨우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배설은 자신을 「온정적으로 처리」한다면서 상해로 이송,복역하도록 결정한 판사가 원망스러웠다.판사가 감옥의 혹독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고 출옥 후 일본의 영국인 발행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실은 옥중기에서 밝혔다. 배설의 상해도착 소식을 들은 상해거주 한국인들은 연일 면회를 왔다.형무소 당국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재소자들의 면회마저 금지시켰다.감옥의 3주간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없이 느리게 갔다.그가 출옥한 날은 7월11일이었다.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은 국한문판과 한글판에 배설이 상해로 떠나던 바로 그날인 6월20일부터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무려 한 달 반이 넘도록 연재되어 배설이 돌아온 뒤인 8월7일까지 실렸다.영어로 진행된 공판 내용을 번역하여 거의 완벽하게 게재하였다.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피고의 주장과 변호인 크로스의 변론,증인들의 증언 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 고어,말聯 민주화시위 두둔 눈길

    ◎“美는 말聯의 민주·개혁 외침에 귀기울여/韓·泰 등은 억압국가 보다 위기대처 훌륭”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참석 중인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의 행보가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17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는 마하티르 총리를 빗대 노골적으로 비방하는가 하면 민주화 시위를 적극 두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안와르 전 총리 부인 아지자 이스마일을 만나는 등 마하티르 총리 심기를 뒤틀어 놨었다. 고어 부통령은 콸라룸푸르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은 민주 및 개혁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한국·태국에서 동유럽·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들이 자유를 억압받는 국가들보다 위기에 더 훌륭하게 대처해왔다”며 장기집권하고 있는 마하티르 총리를 직접 겨냥했다. 앞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구속중인 안와르 부인을 만나 “그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라며 “정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마하티르의 정적(政敵)인 안와르를 추켜세웠다. 마하티르총리가 가만있을 리 없다. 마하티르는 안와르 문제는 내정 문제라며 즉각 반격했다. 각료와 아시아 국가지도자들도 마하티르를 거들고 나섰다. 라피다 아지즈 통상장관은 고어의 발언에 대해 “일생동안 들어본 연설중 가장 혐오스럽다”고 깎아내렸다. 고촉통(吳作棟) 싱가포르 총리와 수린 피추안 태국총리도 상대국의 감정에 대해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측면 지원했다. 미 정부 인사들의 ‘돌출 행동’은 마하티르가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헤지펀드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면서 비난한 것에 대한 의도있는 계산이라는 게 아시아적 분석이다. 인권으로 무장한 미국의 ‘창’이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는 마하티르의 ‘방패’를 뚫을지 두고 볼일이다.
  • APEC 참가 앨 고어/말聯 민주운동 간접지지

    【콸라룸푸르 베이징 AP AFP 연합】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은 16일 정치개혁 확대와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의 17년 집권 종식을 촉구하는 말레이시아의 민주개혁 운동에 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고어 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하루전 세계 재계지도자들과 모임에서 연설을 통해 미국은 ‘용감한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개혁의 외침을 경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태국과 한국에서 동유럽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유를 억압받는 국가들 보다 경제위기에 더 훌륭하게 대처해왔다”고 평가했다. 고어 부통령은 또 장 크레티엥 캐나다 총리와 같이 안와르 이브라힘 전 말레이시아 부총리의 재판을 둘러싼 불편한 심기를 노출,마하티르 총리와 개별 회담을 거부했다.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막바지 투쟁과 폐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8)

    ◎‘1910년 國恥’로 끝내 스러져/재판·옥고 등 일제 탄압 裵說 36살나이로 타계/꿋꿋이 필봉지킨 梁起鐸 소유권 통감부이전되자 통한의 광고 낸뒤 퇴사 1904년 창간이후 일제배척과 국권회복에 앞장선 대한매일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6년여만에 결국 스러진다. 대한매일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는 사장인 裴說을 두차례 재판받게 하고,지면을 실질적으로 이끈 梁起鐸을 구속·기소했으며,배설의 후임사장에게서 신문을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을 부렸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양기탁이 떠나는 그날까지 결코 붓을 휘거나 붓끝을 돌리지 않았다. 배설은 1907년 10월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사재판정에서 ‘대한매일의 논설이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한매일의 논조는 강경해지기만 했다. 1908년 4월29일 일제가 신문지법을 개정,외국인 발행의 신문이라도 발매금지·압수할 수 있도록 하자 그날 ‘百梅特捏(백매특날)이 不足以壓(부족이압) 一伊太利(일이태리)’논설을 실었다.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매특날)가 100명 있더라도 이탈리아 하나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이 논설은,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일제의 음모는 거듭됐다. 1908년 6월 배설을 두번째로 법정에 세웠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스티븐스 포살사건’을 비롯한 반일 보도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치한 영국 고등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 열린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을 언도받았다. 배설은 상하이에서 복역하지 않을수 없었다. 논조를 주도하는 양기탁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기소했다. 이 재판은 양기탁의 무죄로 끝났다. 그는 대한매일에서 일한 뒤로 치외법권지역인 사옥에서 생활함으로써 일제의 검속을 피할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총괄처리하면서 일제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할 리 없었다. 또 배설­양기탁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영국측 반발도 한몫을 했다. 그후 대한매일에는 어려움이 잇따랐다.창간이후 울타리 노릇을 한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우느라 심신을 소모했고 상하이에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심장확장’이 원인이 돼 서른여섯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설은 숨지기 전날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은 영원케 해 한국인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기렸다. 그 가운데 5월5일자 대한매일 1면에 실린 박은식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天遣公來又奪公(하늘이 보내 공이 오더니 다시 빼앗아갔네) 歐洲義血灑溟東(유럽의 의혈인이 조선의 어둠을 씻고자) 翩翩壹紙三千里(삼천리 곳곳에 신문을 뿌렸네) 留得芳名照不窮(꽃다운 이름 남아 끝없이 비추리)’ 배설은 가도 양기탁은 남았다. 대한매일의 필봉은 배설 사후에도 꿋꿋함을 지켰다. 1909년 10월26일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해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대한매일은 거사·체포·재판·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安의사가 밝힌 ‘저격 이유 15가지’를 그대로 실은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배설 사후신문사 소유권은 영국인 萬咸(Alfred W. Marnham)에게 넘어갔다. 배설은 2차재판을 앞둔 1908년 5월27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만함으로 바꾼 바 있다. 배설이 타계하자 그가 소유권을 승계했고 일제의 압력에 못견딘 그는 1910년 5월1일 통감부에 신문사를 넘겼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6월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를 李章薰으로 바꾸었다. 이날 양기탁은 대한매일에 광고를 싣고 퇴사했다. 기자들 대부분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은 두달여 연명하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라는 국치(國恥)를 맞아 종간한다.
  • 조선일보 사상시비 중단 촉구/전국연합 등 3개 시민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언론개혁통신연대 등 3개 재야·시민단체 소속 회원 50여명은 6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집회를 갖고 “조선일보사와 극우세력은 마녀사냥식 사상시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최근 월간조선 11월호에 게재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崔章集 고려대 교수 논문의 사상성 시비와 관련,“조선일보사가 사상검증이라는 허울 아래 崔교수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인신공격을 저지르는 데 분노한다”면서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언론폭력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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