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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盧대통령 “단기부양책 없다”

    盧대통령 “단기부양책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7일 17대 국회 개원 축하연설에서 집권2기 국정운영의 방향으로 경제·민생 회복에 무게중심을 실었다.노 대통령은 특히 ‘경제위기론’과 관련,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경제불안 심리를 차단하는데 주력했다.또 ‘독재의 망령,권력의 들러리’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경제·민생회복 노 대통령은 내수부진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결코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올해 무역수지 흑자 200억 달러 전망,외환보유액 1600억 달러(세계 4위),상장기업 이익률 97년 이래 최대치,부채비율 선진국 수준 하락 등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재계의 적극적인 투자 약속,노사간 무분규 선언,노사정지도자회의 가동 등도 우화적 환경으로 추가했다.‘3대 해외악재’인 중국 쇼크,국제유가 급등,미국의 금리인상 등도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비정규직 처우 향상을 비롯해 중소기업 대책 마련,재래시장 지원,실업률 감소와 청년실업 해소를 통한 빈부격차 완화,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보강 등을 거론해 ‘분배’에도 비중을 뒀다. ●“과장된 위기론이 진짜 위기 불러” 노 대통령은 지난 89년 재계와 언론이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개혁 저지를 위한 ‘총체적 위기론’을 들고 나왔고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증시부양과 건설투자 확대책을 내놓아 결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했다.노 대통령은 2000년에도 ‘제2의 IMF위기설’이 대두돼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고 실제로 경기하강을 가속화시켰다고도 했다.노 대통령은 “경제위기설이 무리한 대책을 낳고 그것이 진짜 위기를 불러오는 악순환을 반복해선 안 된다.”면서 단기부양책을 쓰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독재의 망령 살아나지 못할 것” 노 대통령은 모범적 선거문화 변화와 시민참여,밀실공천 폐지 등을 들어 17대 국회를,4·19혁명 이후의 5대 국회와 6월항쟁 뒤의 13대 국회에 빗대어 ‘국민의 국회’,‘시민의 국회’로 규정했다.노 대통령은 과거 정부가 국회를 권력의 들러리로 전락시켰다면서 발췌개헌,4사5입개헌,3선개헌과 유신,3당 합당 등을 예로 들었다. 이어 17대 국회에서는 “억압과 저항으로 얼룩진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고,다시는 독재의 망령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한나라당을 의식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또 “당과 국회를 지배하는 일은 없다.”면서 “대통령은 헌법적인 틀 속에서 정당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한강의 기적’ 론/손성진 논설위원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은 1960년대 초 유일민·일표 형제가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수십년 동안 일민 형제처럼 성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강철교를 건너와 젊음을 불살랐다.그렇게 해서 ‘한강의 기적’은 이루어졌다.‘기적’을 이끈 지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1000불 소득,100억불 수출’을 내걸고 한국을 단기간에 중진국에 올려놓은 업적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새마을운동,경부고속도로 건설,수출드라이브 정책,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상징되는 그의 경제 치적은 개발도상국 지도자중 으뜸이다.5·16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82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640달러로 20배나 불어났다.수출은 4000만달러에서 150억달러로 수직 상승했다.이 기간 한국은 연평균 9.3%의 고도성장을 구가했다.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 매우 호의적이다.최근 한 방송사가 분야별 ‘영웅’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9%가 박정희를 정치분야의 영웅으로 꼽았다. 그러나 다른 평가도 있다.그의 고도성장 정책은 빈부·지역격차 확대,경제력 집중,천민자본주의의 만연 등 폐해를 낳았다.가치관의 혼돈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병리적 현상도 고속성장의 후유증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무엇보다 18년 독재로 민주주의를 정체시킨 것은 최대 실정(失政)이다.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형성된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가 IMF사태의 원인이라고까지 말했다.국민을 절대빈곤에서 구한 사람도 박정희지만 쓰러뜨린 사람도 그라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말살시켰다.’고 그를 비판했다.주돈식 세종대 석좌교수가 ‘소떼를 빨리 몰고 가려고 쌍권총에 채찍까지 든 카우보이’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이 지난 29일 열린우리당 당선자 워크숍에서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다.”고 발언,재평가 논쟁의 불길을 다시 댕겼다.박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서 배울 점은 분명 있을 것이다.그러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으로 그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한강은 ‘기적’의 이면에 ‘억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서울온 ‘컬러 퍼플’ 원작자·인권운동가 앨리스 워커

    “미국 정부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는 곳을 순례하는 마음으로,우리가 가진 공동의 인간성을 증언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작가로서 세상의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에 한국을 많이 배우고 싶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 원작자로 퓰리처상 수상자이자,‘21세기 여성주의를 꽃피웠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권운동가 앨리스 워커(60)가 25일 한국을 방문했다.자신의 책 번역출간 기념 및 평화운동 행사와 관련,‘문화세상 이프토피아’ 초청으로 방한한 그녀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주창한 ‘우머니즘(womanism)’과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한 소견을 털어놓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주장하는 용어로 백인 여성들의 페미니즘보다 더 깊고 심오하다.”고 ‘우머니즘’을 소개한 그는 “우리는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으로부터도 억압받았는데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우리 나름의 생각을 전하려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서는 “부시가 있는 백악관 앞에서 25명과 함께 반대시위를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는 경험담을 들려준 뒤 “석유 때문에 벌어진,창피하고 토할 것처럼 말할 수 없이 나쁘고 불필요한 전쟁”이라고 반대 의견을 밝혔다. 자기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고난의 성장기’를 들려주기도 했다.아프리카 남아공화국처럼 인종차별주의가 구조화된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그녀가 자라며 체험한 불평등의 세계는 자연스레 그녀를 인권운동가로 성장하게 했다.17세때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인권운동에 참여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따라다녔다는 그녀는 ‘오늘의 워커’를 키워낸 가장 큰 힘은 어머니였다고 강조했다.“정원을 보아라.모든 색의 꽃이 있는데 그 중 어떤 꽃도 다른 색의 꽃보다 우월하지 않다. 인간도 마찬가지다.”라는 어머님의 속삭임은 오늘의 그녀를 만든, 부드럽지만 무서운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자신의 대표 작품인 ‘컬러 퍼플’과 관련 “20년전만 해도 페미니스트들이 이론에만 치중한 채 영성·몸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한 탓에 의도적으로 몸의 기쁨과 중요성을 달과 댄스 등의 비유로 그렸다.”면서 “작품의 의미는 근친상간·가정 폭력 등 쉬쉬하는 문제를 대화의 장으로 끄집어 낸 데 있다.”고 자평했다. 평화 운동을 하다 알게된 뉴욕 신학대의 현경 교수로부터 한국과 한국여성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어 꼭 와보고 싶었다는 그녀는 “한국 여성들은 관계하고픈 사람과 관계하고 결혼하고픈 사람과 결혼하는 등 자유롭고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건넨 뒤 “한국 남성들이 여성들에 깃든 여신의 모습을 보기를 바라며,그것을 볼 수 없으면 평등하고,서로 존중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외국인 노동자 등 한국인의 인종차별에 대한 상황을 듣고는 “슬프다.”며 “한국이 가진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용납될 수 없으며 이런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속 문제점을 알리고 교육하는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다. 워커는 새달 7일까지 이화여대·부산대 등에서 ‘자연·영성·여성성’‘여성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등의 주제로 강의를 한다.(02)717-9247,9215. 글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
  • 中, 작년 탈북7800명 北送 美 난민위원회 밝혀

    중국이 지난 한해 동안 7800명,매주 평균 150명의 탈북자를 강제 송환했다고 민간 인도주의단체인 미국난민위원회(USCR)가 24일 밝혔다. USCR는 이날 공개한 ‘2004년 세계난민연구’에서 중국은 지난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아니면 탈북자를 북한으로 추방하지 않겠다.’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과 약속했으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UNHCR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USCR는 중국이 이처럼 북한주민들을 강제추방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10만명 정도가 중국에 숨어 지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북한으로 추방된 탈북자들은 징역·강제노역 등의 처벌을 받는데 남한사람이나 기독교 신자들을 만난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기도 한다고 USCR는 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1190만명의 난민이 있고 지난해에만 112만명의 새로운 난민이 발생했다.동아시아 지역의 난민은 2002년 87만 5000명에서 지난해 95만 5000명으로 늘었다. USCR의 정책분석관인 베로니카 마틴은 특히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 실태와 중국내 소수 이슬람 교도들과 티베트 주민들의 정치·종교적 의사 표시를 억압하는 탄압실태를 집중 거론했다. 장택동기자 taecks@˝
  • [반론] 가족 규정 이분법적 사고 버려야/송혜림 울산대 가정복지 교수

    서울신문 5월20일자 ‘열린 세상’에 임옥희 여성이론문화연구소 공동대표의 “두 얼굴의 ‘건강가족법’”이라는 글이 기고되었다.이 글은,보건복지부가 제정한 ‘건강가족법’에 따르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가족만이 정상가족이며 건강가족이라는 점,한부모가족·독신가구·동성가족 등은 병든 가족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혼하려는 사람은 건강가정사의 이혼삼담을 반드시 거치도록 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했다. 먼저 지난 2월 의원입법으로 제정된 법은 ‘건강가족법’이 아니라 ‘건강가정기본법’이다.이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이름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 많은 오해를 해 왔다.내용에 관한 근본적인 오해는,건강가정은 바로 아들·딸 낳아 기르는 정상가족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건강가족이라는 발상은 건강하지 못한 가족(한부모가족·독신가구·동성가족 등)을 병든 가족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지만,법 그 어디에서도 ‘정상가족’운운하며 특정한 형태의 가족을 명시한 바 없다.오히려 그러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특정 유형의 가정을 건강하지 못한 가족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또 법에서는 혼인과 출산을 의무로 규정하지 않는다.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일 뿐이다.그리고 이혼상담과 관련된 건강가정기본법의 취지는,이혼 예방을 위해 이혼전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이혼조정을 내실화함과 동시에,이혼할 가족에게 자녀양육·재산·정서 등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오해하는 바와 같이 이혼상담을 의무화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법의 내용을 왜곡하는 이러한 오해는 건강가정기본법이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는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 같은데,사실 이 법은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 증진 조항 등을 법 전반에 걸쳐 강조해 양성평등이 기본이념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그런데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 있으랴.근본적으로 우리 모두 양성 평등의 길로 가야 하는 이 때,불평등과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찬 ‘가족’ 또는 ‘가정’을 거론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구시대적이며,그 글에서 지적하듯 19세기적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러나 ‘건강가정’의 구현은 여성발전기본법의 기본이념 중 하나이며,여성부 제1차 기본계획의 성과와 심화발전 과제에서도 건강한 가정의 구현이 비중있게 다루어져,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왜 그토록 건강가정을 폄하했는가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나는 이 사회가 느리지만 평등에 익숙해지는 데,양성평등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기여가 크다고 믿는다.그리고 건강가정기본법에서 양성평등이 중요한 이념인 한 나는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그러나 가정은 양성평등이라는 관점 하나만으로 접근하기에는 다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가족·가정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일상적인 의식주생활과 자원관리,세대 간 관계,부모됨,여가,공동체 생활문화,교육,양육,경제,소비,개인-가족-사회로 이어지는 생활의 경험,시민의식,일과의 조화 등 복합적인 내용을 담은 연속적 생활세계이며 문화이다.그래서 평등과 민주성,평화,복지,안정,삶의 질,균형,자율성과 같은 이념의 조화 속에 ‘건강성’을 이해해야 건강가정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리고 법이 지향하는 바,양성평등,세대간 존중,생활의 균형,사회적 지향성을 조화시키는 건강한 가정을 위해 함께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송혜림 울산대 가정복지 교수˝
  • 김남주 10주기 시선집 발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라고 노래하며 ‘영원한 혁명’을 꿈꾼 시인 김남주(1946∼1994).그의 서거 10주년을 기려 시선집 ‘꽃속에 피가 흐른다’가 창비사에서 나왔다. 엮은이는 1974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고인이 ‘잿더미’ 등 8편의 작품을 투고했을 때 주간으로서 편집실무를 맡았던 염무웅 영남대교수.고인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마음의 부채’를 지닌 염교수는 발문에서 고인의 시들이 어떤 경로로 묶여졌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시인의 험난한 인생역정을 살핀다.신산한 가족사가 밴 고인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김남주 문학의 원천은 바로 몰락하는 농민현실이고 그 현실에 맞서 힘들게 삶을 이어가는 아버지 어머니이다.”라고 밝힌다. 선집은 ‘잔소리‘‘하하 저기다 저기’‘여자는’ 등 20년 만에 햇빛을 보는 시 세편을 포함, 120편의 작품을 골라서 시인의 삶을 따라서 초기작,옥중시편,출감 후 등 6부로 나누었다.소박한 초기시부터 건강한 민중의식을 날카롭게 녹인 작품 등 시인의 모든 작품 세계가 살아 숨쉰다.그 속엔 억압과 모순의 현실에 맞서 시인이 “자기 몫의 희생을 자기 시대의 역사에 아낌없이 헌납”한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선집에 대해 염교수는 “세월을 뛰어넘어 나의 굳어진 감성과 메마른 육신을 쑤시고 들끓게 한다.”며 “김남주의 불꽃 같은 삶과 찬란한 시세계를 교향악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그리고 이를 통해 김남주가 살아보지 못한 21세기의 타락을 뒤엎는 예술적 항체가 형성될 수 있다면….”이라는 바람을 전한다. 이종수기자˝
  • 계간지 ‘시평’ 여름호 아시아의 저항시인 특집

    “(전략)우리들은 함경도 남자와 여자/착취자의 반항에 대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온 조선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 차례 봉기에/피를 쏟은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고개를 처박고 염치없이 진지를 적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민족시인 누구인가가 썼음직한 이 시는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 시인 마키무라 고( 村浩·1912∼1938)가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 쓴 ‘간도 파르티잔의 노래’라는 시다.그가 이 시를 썼을 때는 고작 열 아홉살이었으며,어릴 때부터 ‘고치(高知)현의 천재’로 불렸던 이 소년작가는 그러나 ‘군국 일본’에의 맹종을 거부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 여섯에 정신병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이 시는 당시에 빛을 보지 못하고 출판사주가 기름종이에 싸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가 죽은지 25년 만에야 세상에 내놓았다.일본의 시인 사가와 아키(佐川亞紀)는 그를 두고 ‘반전과 아시아 침략 반대를 관철한 시인으로,일본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전한다. 시전문지 ‘시평’ 여름호는 마키무라 고를 비롯,항일 중국시인 따이왕수(戴望舒)와 히우 로안,프랑스에 저항한 베트남의 부 까오 등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저항시인들의 시편을 묶은 특집을 꾸몄다.그 시편에 드러나듯 전란에 휩싸인 지난 세기의 아시아 대륙은 살육과 착취,억압과 강탈이 이어져 어둡고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도 시인들은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진 나의 손바닥으로/이 광활한 대지를 어루만진다/이 쪽은 이미 잿더미로 변했고/저 쪽은 피와 진흙뿐이다(후략).” 이 시는 중국의 시인 따이왕수가 1942년 일제에 의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뒤 자신이 겪은 중일전쟁의 기억을 담아낸 항일시로,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렇듯 거칠 것 없이 내닫는 일본의 침략 행보였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심지어는 일본 내에서조차 저항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3년 전의 여름/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3000개의 뼈를 보았다/반 세기 전 그 마을에 일본 군대가 와서/마을 사람들을 벼랑 아래 모아놓고 총살시켜(중략)/나는 가끔 생각한다/그 뼈를 부러워하고 있어서/내가 살해당할 때도/그랬으면 좋겠다(후략).” 전후 세대로,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시인 도쿠히로 야스요(德弘康代)는 이렇게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양심으로 통렬한 자기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의 저항시도 처절하고 강인하다.“(전략)들판 가운데 흰 비석에/당신이 열사라고 써놓았다/당신을 그리며 나는,당신!동지!라고 불러본다/수 만의 마음중 일편단심이라고.” 베트남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시는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웠던 ‘시인 전사’ 부까오의 ‘도이산’이라는 시다.시편은 지난 세기 저항시들이 의도를 앞세워 포기해야 했던 문학적 미감(美感)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는 순수이면서 동시에 이념일 수 있고,싸움이면서 또한 화해이기도 하다.최근 다시 군국화하는 일본,그리고 모든 강대국에 대해 아시아인이 이 시에 담아 보내는 메시지는 ‘화해 그리고 끝없는 저항’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盧 “기득권·원한 버리고 상생”

    제24주년 5·18기념식이 18일 광주 5·18국립묘역에서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등 여야 지도부와 17대 국회의원 및 당선자들이 대거 참석해 역사적 의미를 기렸다. 특히 이날 행사는 탄핵소추안 기각으로 복귀한 노 대통령은 물론 17대 총선에서 ‘여대야소’ 정국으로 재편된 이후 처음으로 여야 의원과 총선 당선자들이 대거 한자리에서 모여 화합과 상생 정치의 의미를 다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분열을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이제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열어야 하며,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명실상부한 통합의 길로 나아가자.”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억압하고 배제하고 일방통행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생각과 습관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권위주의 시절의 기득권과 향수도 버려야 하며 고통과 분노,증오와 원한도 이제 뛰어넘어야 한다.”며 “용서하고 화해해서 하나가 되자.”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묘역 순례를 마친 뒤 안주섭 국가보훈처장에게 “5·18묘역이 전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장이 되고 교육체험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중앙정부도 5·18 정신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우리당에서는 천정배 원내대표 등 국회의원과 총선 당선자 100여명,한나라당에서는 김덕룡·김문수 의원을 포함한 당선자 18명 등이 참석했다. 박정현기자˝
  • 한나라 탄핵 ‘자중지란’

    여권이 탄핵의 기각 또는 각하를 전제로 빠르게 향후 행보를 준비하는 동안 한나라당에서는 자중지란이 일었다.10일 상임운영위에서 원희룡 의원이 ‘탄핵 인책론‘을 제기한 게 기폭제다. 원 의원은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총선을 치르는 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근본적인 입장을 정해야 한다.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하거나 각하한다면 국민들에게 백배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절차적 비용이 들어가고 국민의 혈압을 오르게 한 데 대해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니냐.특히 탄핵 때문에 억울하게 고배를 마신 낙선자들에 대한 책임도 있으므로 당내 숱한 이론에도 불구하고,억압적으로 강행한 데 대한 정치적 책임도 분명히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원 의원의 발언은 즉각 반발을 불렀다.김무성 의원은 “판결이 나기도 전에 항복을 하자는 거냐.말은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라고 질책했다.이강두 정책위의장도 “지금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결과를 담담히 기다리면 된다.”고 거들었다. 원 의원의 발언은 탄핵안 판결 이후 예상되는 당내 강경 기류를 의식한 때문으로 분석된다.일부 소장파 의원 사이에서는 “탄핵안 판결이 난 뒤 당내 강경파들이 강한 반발을 주도,대국민 사과 자체가 봉쇄당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었다. 박진 의원과 박세일 당선자 등 당내 중도성향의 의원들도 잘못된 국정운영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를 전제로,“국회도 탄핵으로 인해 국민을 불안하게 한 데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탄핵 판결 이후 한나라당이 한차례 책임론에 휩싸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지운기자 jj@˝
  • [열린세상] 서울 잔디광장 유감/김철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 시청 앞 광장이 지난 1일 새로운 모습으로 개장했다.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1900평에 달하는 잔디밭이었다.도심 한복판에 대규모의 녹지가 마련되어,시민들이 모여 놀고 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실제 개장 이후 많은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소풍을 즐기고,직장인들이 산책을 하고,아이들이 분수 주변에서 뛰노는 것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흐뭇함도 잠시,서울시는 ‘하이 서울 축제’가 끝나는 10일부터 서울광장 잔디밭 출입을 당분간 통제하기로 했다.또 매주 월요일을 ‘잔디 휴식의 날’로 정해 광장 잔디의 보수와 보호에 나서겠다고 밝혔다.축제 기간 동안 60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다녀갔고 이에 따라 잔디의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잔치가 벌어졌다고 신이 나서 놀다간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잔디 망가뜨린 죄인이 된 꼴이다. 잔디 광장의 훼손은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다.서울광장에 깔린 잔디가 ‘켄터키 블루 그래스’인가 뭐라는 미국산 종으로 아무리 강한 생명력을 지녔더라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밟고,뛰는 데야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탓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광장이란 원래 사람들이 모이는 곳,모여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그들의 함성과 몸짓이 허락되는 해방의 공간이기 때문이다.더군다나 ‘하이 서울 축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서울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찾아주기 원했던 것 아닌가. 시청 앞 광장은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서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1987년 6월 시민들과 ‘넥타이 부대’가 모여 독재타도를 외쳤던 곳이며,이한열군을 살려내라는 울부짖음이 퍼졌던 곳이 바로 그곳 시청 앞이다.15년이 흐른 2002년 6월 월드컵 때에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여 붉은 티셔츠를 입고,‘대∼한민국’을 외쳤던 공간이다.이처럼 큰 의미를 지닌 시민의 광장에,잔디 망가진다고 사람들 막는 것은 큰 문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일이 꼬였는가.이번 서울광장의 잔디 해프닝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서울시의 졸속 전시 행정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이 사업이 정말 서울시 발전의 장기적 청사진 속에서 추진되었는지 이명박 시장에게 묻고 싶다.서울광장은 애초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추진되었던 것이다. 첫째,광장을 잔디로 만드는 데 대한 충분한 논의와 시민적 합의가 없었다.서울시가 광장 조성사업을 현상 공모하여,2003년 1월에 뽑은 당선작은 ‘빛의 광장’이었다.이것은 2003개의 LCD 모니터를 바닥에 설치하는 설계안이었다.그런데 이 ‘빛의 광장’안이 이런저런 이유로 유보되더니 슬그머니 ‘잔디 광장’으로 변신한 것이다.그 과정에서 시민단체나 사용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생략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둘째,잔디 광장의 조성 과정도 졸속이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힘들다.특히 5월1일 ‘하이 서울 축제’에 개장을 맞추려다 보니 잔디가 충분히 뿌리를 내릴 시간이 없었다.잔디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려면 보통 45일 정도가 필요한데,25일 정도밖에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전시행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서울시가 규정한 광장 사용 규제와 사용료는 민주항쟁과 월드컵 등을 통해 시민들이 만들어온 광장의 ‘자유’와 ‘힘’을 억압하는 것으로,광장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서울광장이 시장의 업적이나 도시의 그럴듯한 장식물로 이용돼서는 곤란하다.광장은 전적으로 시민들의 것이어야 한다.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 복원 사업,강북 뉴타운 사업,그리고 서울 광장 조성 사업 등에서 강한 뚝심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추진력이 강한 것과 밀어붙이기는 구별되어야 한다.1970년대식 밀어붙이기 개발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 붕괴가 바로 밀어붙이기식 건설과 고질적인 ‘빨리빨리 병’ 때문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서울시의 각종 사업을 지켜보는 것은 자동차와 시멘트의 도시 서울이 문화와 생태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정도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이다.서울의 모습을 바꿔나갈 때에는 천년을 내다보는 도시 계획이 필요하다. 김철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 [8일 TV 하이라이트]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오후 10시35분) ‘사진토크 찰칵’에서는 찰칵 엄정화의 누드 사진을 최초로 공개하고,배우 공효진의 일상을 사진으로 들여다 본다.또 ‘즉석 랭킹 점점 작게’에서는 이웃의 심리를 엿본다.여대생 100명에게 던지는 스타들의 기상천외한 질문.단계가 갈수록 대답의 수가 점점 작아져야 한다. ●씨네24(낮 12시25분) 아일랜드의 한 수녀원에서 네 명의 여성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억압과 착취를 기록한 ‘막달레나 시스터즈’를 소개한다.미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킬 빌 2’.주인공 더 브라이드와 빌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개성 있는 액션과 스토리를 풀어간다. ●애니토피아(오후 9시10분) 한국의 단편 애니메이션 속에서 그려진 가족의 풍경들을 들여다본다.그러나 이 단편들에서 그려진 가족의 풍경들은 모두 행복하지만은 않다.부모가 모두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몹시 드물다.‘애니를 만나다’코너에서는 선화예고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팀 또기로딱의 ‘찻잔 속의 바다’를 상영한다. ●성인가요베스트30(오후 10시15분)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어버이날 특집으로 구성된다.iTV 사옥에 야외 특설무대를 마련하여 인천,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독거 노인들을 초청하여 따뜻한 식사 속에 흥겨운 잔치 한마당을 선사한다.현철,김부자,오승근,현숙,배일호,조항조 등의 인기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한다. ●그것이 알고싶다(오후 10시55분) 지난 달 16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코엘류 감독은 사퇴를 선언했다.그러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그의 사퇴가 남긴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흔들리는 한국 축구가 2002년 월드컵 4강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계승하여 발전하기 위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알아본다. ●애정의 조건(오후 7시50분) 금파를 만나 은파 사정을 다 들은 윤택은 혼자 살아가려는 은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돼 금파에게 은파 거처를 알리지 못한다.한편 만득과 현실은 사귀는 사람이 인사온다는 애리 말에 음식하고 청소하느라 분주하다.때마침 화장실 청소하러 온 윤택과 범수에게도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 ●찔레꽃(오전 8시5분) 수철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고,경수는 수옥을 찾아가 모든 것을 알린다.경찰서에서 수철을 만난 수옥은 준서 사건이 수철이 한 것임을 알고 절망한다.준서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수옥은 준서에게 원망을 털어놓는다.준서는 팔은 잃었지만 수옥과 결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
  • 모두가 얼짱·몸짱 나만은 ‘마음 짱’

    “굵고 짧은 무다리(중략) 저주받은 내 육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6일 오후 서울 신촌기차역 앞 가로공원 노상무대.여성 무용수가 온몸을 부여잡으며 “내 똥배가 도저히 용납 안된다.”고 절규하자 길가던 시민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나 둘 멈춰섰다. ●성형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장면 연출하자 심각 무용수는 ‘몸짱’이 되겠다며 천으로 온몸을 친친 동여매고,가짜 코를 얼굴에 갖다 붙였다.웃으면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무용수가 성형의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장면을 연출하자 심각해졌다.퍼포먼스를 지켜보던 이화여대 2년 이모(21)씨는 “외모에만 집착하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 섬뜩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마련한 ‘내 몸의 주인은 나-No 다이어트,No 성형’ 캠페인의 한 장면이다.‘얼짱’ ‘몸짱’의 유행 속에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실을 빗댄 행사다.여성민우회 여성환경센터 정정희(55) 간사는 “최근 체중을 줄이기 위해 위 절제수술을 받은 젊은 여성이 심장마비로 숨지는 등 외모지상주의의 폐해와 사회적 낭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면서 “사회적으로 획일화된 외모만을 요구하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다양한 개성과 자신감을 회복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여성민우회는 가두 캠페인과 성명서·논평 발표,지역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마련 등 운동을 계속 펴나갈 계획이다. ●획일적 외모지상주의는 사회적 억압 차은주(44)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상담원 대표는 “여성의 외모에 대해 일정 수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사회적 억압”이라면서 “외모 콤플렉스로 스트레스를 받거나,무리한 다이어트·성형수술 후유증으로 고민하는 젊은 여성의 상담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차 대표는 “무리한 다이어트와 성형은 영양불량,전신무력감,피로증상에서부터 무월경,무배란,골다공증,심장마비,피부괴사,경련쇼크,심리장애 등의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이날 행사는 ‘국제 노 다이어트 데이’(INDD·International No Diet Day)를 기념한 것으로 올해가 두번째이다.‘INDD’운동은 1992년 영국의 반(反)다이어트 운동가인 메리 에번스 영이 과도한 다이어트로 죽어간 여성을 추모하며 시작,현재 전세계 12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이오덕 지음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 국민이 보여준 뜨거운 응원 열기는 전무후무한 사회현상이었다.많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역사학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용암처럼 분출된 이 집단 신명의 배경과 의미를 분석하는 이론들을 내놓았지만 표면적인 현상 진단을 넘어 그 근원까지 파고드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우리말 지킴이로,어린이 문학가로 한평생을 살다 지난해 8월 세상을 떠난 이오덕씨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터져나온 국민의 함성을 ‘해방’의 소리로 보았다.오랜 기간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신명나는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같은 기쁨의 소리를 다시 찾고,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이 책은 이씨가 그해 여름 ‘붉은악마’의 함성을 계기로 쓴 1200장 분량의 글 26편을 묶어 펴낸 미발표 유고집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억압 구조의 뿌리를 ‘그릇된 교육’에서 찾는다.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구조와 무한경쟁체제를 부채질하는 학벌위주의 입시제도야말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억눌러온 틀이라고 지적한다.또 글쓰기나 말하기,듣기 등 모든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주입식 교육을 강조하는 실태에 대해서도 개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육을 바꿔야 할까.그는 학벌위주의 망국풍조를 하루빨리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학벌이 깨지면 입시경쟁이 무너지고,학교 폭력이나 왕따 같은 문제도 차츰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그러면서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아이들이 게으르다고? 세상에 게으른 아이가 어디 있었던가? 만약 게으른 아이가 있다면 병이 든 아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믿고,아이들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지닐 때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음을 마지막 유언으로 전해주고 있다.1만 2000원. 이순녀기자 coral@˝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춘곤증을 확 깨워줄 색다른 영화 2편

    춘곤증을 확 깨워줄 색다른 드라마 2편을 소개한다.30일 나란히 개봉하는 일본 거장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2001년작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과,스페인에서 날아온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두 작품은 이래저래 공통분모를 갖는다.인간내면에 숨겨진 내밀하고 기발한 욕망을 섹스코드를 빌려 경쾌한 어조로 풀어낸,아주 독특한 연애담들이라는 점.소규모 배급망 탓에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막내릴 여지도 크다는 점.끝으로 하나 더.일단 보기만 하면 틀림없이 산뜻한 기분으로 극장문을 나설 것이란 사실이다. ●동성애 다룬 스페인 영화 ‘엄마는‘ 유럽영화를 지루하고 어려운 관념의 이미지틀에 가둬놓고 있었다면 이 영화를 계기로 그만 해방돼도 될 듯싶다.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화제작 ‘그녀에게’에서 발레리나로 나왔던 레오노르 와틀링이 상큼한 이미지로 코믹드라마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띄워 올린다. 제목에는 사실과 오해가 반반씩 들어 있다.엄마가 여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란 암시는 ‘사실’.어감으로는 왠지 페미니즘 영화 냄새를 풍기지만 그렇진 않다.엄마의 동성애 때문에 세 딸이 빚는 해프닝을 그렸으되 성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공박하지는 않는다. 아빠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엄마 소피아(로사 마리아 사르다)가 생일파티에서 폭탄고백을 한다.스무살이나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짐짓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론 경악한 세 딸들이 엄마의 여자애인을 떼놓기 위해 별의별 아이디어를 다 짜낸다. 영화는 소심한 둘째딸 엘비라(레오노르 와틀링)에게 무게중심을 옮겨,엄마의 동성애가 빚은 가족간의 갈등과 개개인의 혼돈을 여러 각도에서 투영해낸다.물론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다.출판사에 다니는 엘비라는 인기작가 미구엘과 사이가 점점 좋아진다.하지만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해 갈팡질팡한다.사랑의 취향이 유전될 수 있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에 자신 속에도 있을지 모를 동성애 기질을 애써 찾고 또 부정하기를 거듭한다.세 자매들 중에서도 유독 소극적인 엘비라를 이야기의 축으로 세운 건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매사에 주눅들어 살던 엘비라가 뜻밖에 마주친 갈등을 딛는 과정에서 보기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다.여주인공의 초라한 내면세계를 유쾌한 시선으로 이끌어낸 점에서는 심리드라마 같기도 하다.또 보수이미지를 대변하는 캐릭터인 엄마가 오랜 사회금기인 동성애에 빠진다는 설정은 성(性)을 단순한 코미디 소재로만 끌어들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농담 속에 알쏭달쏭 진담이 섞인,독특한 질감의 유럽산 코믹드라마다. 스페인 출신인 와틀링은 이 영화로 최근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에서 깜찍한 외모로 사랑받는 오드리 토투의 국내팬층을 앗아갈 것 같다.이네스 파리스,다니엘라 페허만 등 스페인의 두 여성감독이 공동연출했다. 황수정기자 sjh@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붉은 다리‘ ‘나라야마 부시코’(1983)와 ‘우나기’(1997)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거머쥔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78) 감독의 2001년 작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30일 개봉된다. 팔순을 눈앞에 두고도 영원한 현역 정신을 자랑하는 거장의 이번 작품은 ‘포르노적인 상상력’에 팬터지라는 옷을 입힌,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버티는 40대 가장 요스케(야쿠쇼 고지)는 자신이 묻어둔 금부처를 찾아서 가지라는 ‘거리의 철학자’ 다로(기타무라 가주오)의 유언에 따라 교토의 바닷가 마을로 내려간다.그가 붉은 다리 옆에 있는,보물을 숨겨뒀다는 2층집에 사는 이상한 여인 사에코(시미즈 미사)를 만난 뒤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영화는 팬터지와 우화의 세계로 접어든다. 이따금 몸에 물이 차오르고 그 때마다 성욕이 발동하는 병에 걸린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는 이 고통을 절도행각으로 누르고 있다.이를 알게 된 요스케는 임시 선원으로 일하며 그녀가 사인을 보낼 때마다 달리기선수보다 더 빨리 달려가 섹스로 달래준다.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달래주고 서로에게 위안을 받는다. 정사 도중 사에코의 몸에서 분수처럼 뿜어나오는 장면이나,그 물이 계단을 지나 수로를 타고 강으로 흘러들면 물고기떼들이 몰려오는 기상천외의 상상력에서 이마무라 쇼헤이만의 저력이 느껴진다.조금 황당해보이는 기발한 상황 설정 속에는 ‘성장 신화’를 향해 질주하느라 메말라버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을 풍자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21세기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별로 없어요.”(사에코)나 “자본주의 사회는 감옥과 같아.말없이 일만하는 바보를 원해.”(요스케) 등의 대사에 현실을 향한 감독의 시선이 녹아 있다.실직 뒤의 구직난,아내의 생활난 불평, 구직 독촉에 시달리는 요스케는 일상에 억압받는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감독은 그 탈출 방법으로 ‘욕망의 힘’을 강조한다.“욕망에 충실하는게 진짜 삶이야.”라거나 “요즘 인간은 다 병자야.진정한 욕망을 외면한다.”“쫀쫀하게 굴지 말고 욕망에 충실해.” 등의 대사가 곳곳에 포진하면서 원초적인 에너지를 회복할 것을 강조한다.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웃음을 더하는 것도 이마무라 쇼헤이의 연륜이 빛나는 대목이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사설] 여성 선량, 맑은 정치가 소명이다

    4·15 총선에서 여성 당선자 비율이 헌정사상 최초로 두 자릿수를 돌파했다.여성 의석 38석,13%는 16대 때 16석,5.9%의 두 배가 넘는 비율이다.이는 과거 세계 181개국 중 103위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의 여성 국회진출 수준을 생각할 때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노동자,농민,장애인에서부터 의사,교수,변호사,언론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은 당선자들의 부단한 자기연마 노력과 사회 헌신을 짐작케 한다.첫 지역구 출마에서 거물급 1당 중진을 무너뜨리거나 3선의원이 2명이나 등장하고 최연소 당선자를 낸 것은 선거 운동 면에서도 일부 남성을 압도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당선자들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여성정치세력화 투쟁과 여성 후보에게 거는 국민들의 각별한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여성계는 여성전용구제 논란 등 우여곡절 끝에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를 관철,28석의 의석을 확보했다.또 많은 기존 여성의원들은 활발한 의정 활동과 깨끗한 정치로 높은 의정 성적표를 받아 국민의 돈독한 신뢰를 샀다.결과적으로 국민들은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여성 당선자들에게 부패와 거리가 먼 맑은 정치,민심의 소재를 바로 읽는 민생 생활 정치,소외되고 억압받는 약자를 위한 평등 정치를 주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보 66명중 10명에 불과한 낮은 지역구 당선율 등 만족스럽지 못한 측면도 많다.그러나 앞으로 좋은 의정 활동으로 국민 앞에 다가선다면 상황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부디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초심을 잃지 말고 맑은 정치,희망의 정치 실현에 앞장서주기 바란다.˝
  • [사설]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 말라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 60차 유엔인권위원회 총회에서 추진중인 북한인권결의안에 정부가 기권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남북관계 등을 고려,고심끝에 내린 결론으로 일단 이해한다.하지만 지난해 같은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때 불참한 데 이어 올해에도 기권함에 따라,전세계가 우려하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동족인 우리만 외면하는 셈이 됐다. 정부 관계자는 기권방침을 정한 첫째 이유로 남북관계 손상 우려를 꼽았다.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후속 6자회담이 예정돼 있고,금강산관광,개성공단 추진 등 남북관계가 어렵사리 진전기미를 보이는 때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설명이다.원활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라는 정부 입장을 이해하나 북한의 인권상황을 언제까지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결의안은 “고문,공개처형,정치범 처형,강제수용소,집회결사의 자유억압…”등 조직적인 인권침해가 북한땅에서 자행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강제송환되는 탈북주민들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혹독한 처벌을 받는 데 대한 우려와 처벌완화도 촉구하고 있다.이같은 유엔의 지적에 대해 객관적인 검증절차가 필요하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그렇더라도 인권은 그 자체로서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 만큼 북한 당국은 유엔과 많은 나라가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정부는 기권하되 총회의장 발언 등을 통해 우려를 표명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럴바에는 당당히 표결에 임하는 게 낫다.진정한 남북관계는 자유,인권 등 인류공통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함께 넓혀나갈 때,비로소 흔들림 없는 토대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고자 한다.˝
  • 소추위 ‘색깔론’ 제기 파문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공개변론이 열린 9일 소추위원측이 노 대통령의 직접 출석을 요구하며 “노 대통령 발언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연상시킨다.”며 색깔론을 제기,파문이 일고 있다. 소추위원측 이진우 변호사는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 당시 5공 청문회를 하면서 전임 대통령에게 폭언을 했고,부산시장 선거 때는 ‘내게 법,법 하지 말라.나에게는 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볼셰비키 혁명이 정치는 하부구조에 근거한다는 철학에 기반하는데 이런 발언도 결국 그런 것 아니냐.”며 불씨를 지폈다.이에 대해 대리인단 이용훈 변호사는 “소추위원측은 신성한 헌재를 모독하고 있다.”면서 “탄핵심판은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지 정치공방의 장이 아니다.”라며 반발했다. 재판이 끝난 뒤 이 변호사의 볼셰비키 발언이 사전에 계획됐는지,돌출발언인지를 기자들이 묻자 박준선 변호사는 “사전에 준비한 발언”이라면서 “노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부적절해 노 대통령이 가진 철학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며 노 대통령에 대한 ‘사상검증’ 필요성을 제기했다.박 변호사는 총선을 앞두고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지적이 나오자 “색깔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느냐.자유민주주의 수호가 대통령의 첫째 의무”라고 주장했다.하광룡 변호사는 “노 대통령이 ‘공산당을 합법화해야 진정한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우리가 색깔 의혹을 제기하는 건 안 되는가.”라고 반문하며 “‘수구’ ‘꼴통’이라는 말도 쓰는데,색깔론 제기를 금기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리인단은 공식 논평을 내 ‘비열한 색깔론 공세’라고 비난했다.대리인단은 “소추위원측은 헌재를 시대적 색깔론과 대통령 흠집내기의 장으로 악용한다.”면서 “노 대통령은 민주화가 미흡하던 시절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무차별 단속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밥을 못 먹게 하는 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소개하고 “생존권을 억압하는 악법은 개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덧붙였다. 구혜영기자 koohy@˝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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