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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황제 증손자 이혜원씨 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위촉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손자 이혜원(본명 全惠源)씨가 문화재청 산하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고궁박물관 측은 혼례·국장의례 등 황실의 생활·문화사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 해석하고, 박물관에 소장된 대한제국 당시의 황실 유물 정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씨는 의친왕이 타계한 195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은 슬하에 13남 9녀를 두었는데, 이씨는 그중 9남인 고(故) 이종의 장남이다. 의친왕은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보다 손위였으나, 일제가 그의 반일을 두려워해 어린 영친왕을 순종의 후계자인 황태자로 책봉하고, 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억류해 일본 귀족과 혼인을 시키는 등 비운을 겪은 주인공이다. 의친왕은 이후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강제소환되는 등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에 협력하기를 거절했다. 이런 의친왕을 할아버지로 둔 이씨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을 맞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탄압 때문에 아버지 성 대신 할머니의 전(全)씨 성을 사용해야 했다.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이씨는 별도의 연구실을 두고 생존해 있는 황실 후손들을 만나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사진자료, 황실생활과 가족사에 대한 증언 등을 수집, 정리하게 된다. 박물관측은 이들 자료는 고증을 거쳐 추후 연구자료집으로 발간하기로 했으며,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6·25전쟁때 北서 포로생활 美 참전용사 히노조사·브라운씨 방한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억류됐다 풀려난 미국의 퇴역 군인 2명이 52년 만에 ‘포로 석방로’였던 ‘자유의 다리’를 다시 건넜다. 5일 미 군사전문 성조지에 따르면 6·25 전쟁 때 포로생활을 했던 호세 히노조사(75·샌 안토니오 거주)와 빌리 브라운(72·휴스턴 거주)은 최근 6·25 참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50여년 전 북한군에 붙잡혀 포로생활을 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당시 포로 석방로였던 경기도 파주시 소재 자유의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재연했다. 1951년 7월 상병 계급으로 비무장지대 인근 ‘펀치볼’ 지역에서 북한군과 전투 도중 포로가 된 히노조사는 억류 2년여만인 1953년 8월 자유의 다리를 통해 집으로 향하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후 베트남전에도 2번이나 참전한 그는 “50여년 만에 처음 이곳을 찾았다.”며 “마치 당시 북한군 포로에서 석방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브라운은 히노조사보다 석달 늦은 1951년 10월 포로로 붙잡혔다가 역시 1953년 8월 석방됐으며, 혹독한 포로생활에 대한 아픈 기억때문에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얘기를 일체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브라운은 “포로가 되자마자 북한군이 전투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앗아 몸에 걸친 것은 얇은 천으로 된 상·하의 뿐이었다.”고 말했다. 또 “두달 뒤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해 12월12일 새 옷을 받기 전까지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며 “내 생에 그런 추위는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이들이 다시 찾은 자유의 다리는 휴전협정 조인 이후 북한군의 포로가 됐던 국군과 유엔군 1만 2700여명이 석방됐던 통로 역할을 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불법조업 중국어선 4척 어민들이 잡아 해경에 넘겨

    인천 연평도 어민들이 1일 북방한계선(NLL) 남방 180m 해역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 4척을 7시간동안 억류하다 인천 해양경찰서로 넘겼다. 해경은 중국 선원을 영해 및 접속수역법 위반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다. 인천 해경에 따르면 연평도 꽃게잡이 어선 30여척은 이날 오전 10시50분쯤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북서쪽 0.4마일 지점에서 중국 어선 4척을 에워싸고 연평도로 예인해 왔다. 중국 어선은 30∼50t급 형망어선으로 선원 25명이 타고 있었다. 연평도 어선들은 이날 조업을 나갔다 중국 어선이 보이자 선박 통신망을 이용, 실력행사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한꺼번에 조업구역을 벗어나 NLL 남방 180m 지점까지 쫓아가 중국 어선을 붙잡았다.NLL 남방 2마일 해역은 해군조차 접근이 제한된 곳이다. 해군은 어선의 집단행동을 감지하자마자 고속정 4척을 투입했지만 동시에 움직이는 30척을 막지 못했다. 어민들은 한때 중국 선원을 강제 억류하고 해군의 인계 요청을 거부했었다. 중국 어선의 ‘싹쓸이 조업’으로 극심한 꽃게 흉작이 계속되자 어민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인천지역 꽃게 어획고는 2002년 1만 4281t(1180억 4000만원),2003년 6547t(829억 7000만원), 지난해 1390t(292억 8000만원)으로 2년 전에 비해 10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 어선들이 남북 상황을 악용,NLL을 넘나들며 꽃게 등 어족자원을 싹쓸이하기 때문. 낮에는 NLL 위쪽에서 조업하다 밤에 해군의 감시를 피해 한계선을 넘고 있다. 최율 연평어민회장은 “해경이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면서 “앞으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중국 어선에 대해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日외상 “시베리아 억류 한인피해자 지원 검토”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구혜영기자|독도 및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본 정부의 고위인사가 ‘시베리아 억류 한국 피해자’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자발적인 지원의사를 언급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2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무라 외무상이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와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의 지원 문제를 관계 부처와 협의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언급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공조 분위기 확산으로 번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치무라 외무상의 언급은 이날 외무위원회에서 곤노 아즈마(일본 미야기 1구 소속) 중의원이 지난 1945년 종전 이후 시베리아에 억류된 한국인 피해자의 지원요청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나왔다. 이에 따라 한·일협정 당시 제외됐던 전후 한국인 피해자 지원 문제도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곤노 의원은 이와 관련,“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큰 진전”이라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치무라 외무상의 발언은) 향후 사태해결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의원 회의 당시 한국에 대한 전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곤노 의원의 질의에 대해 마치무라 외무상은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됐고 법조문에도 전·후 관련 별도 조항은 없다는 식으로 일단 단호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 이병주 회장은 “향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 병사 유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인 전몰자 참배와 위령비 건립, 피해자 보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고 한국 정부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문제는 지난 1945년 8월 종전 이후 60여만명의 한·일 양국 출신 징용자들이 4년여 동안 시베리아 지역으로 압송,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제징집과 강제노역 등에 따르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koohy@seoul.co.kr
  • 戰後 피해자도 보상 재론 여지

    지난 22일 일본 중의원외무위원회에서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한 마치무라 외무상의 언급으로 일본의 과거사 정책에 ‘긍정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마치무라 외무상의 발언은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로 급랭기를 맞은 시점에서 나온 일본측 고위인사의 언급이라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과거사 문제의 최우선 원칙이 배상에 앞서 ‘사죄와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우리의 입장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한국인 전후 피해자에 대해 차별정책으로 일관해온 일본정부의 시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유골봉환 문제와 피해자 지원에 대한 합의 이후 양국 정부는 사할린 거주 피해자 실태조사를 벌이고 한국인 유골봉환 문제에 대해서도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문제의 경우 현재 일본측은 지원에 관한 법안을 심의중이고 매년 시베리아 묘지 참배와 위령비 건립 등에 100여억원을 지원하는 등 과거사 현안 중에서도 비중있게 다루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일본측은 한국인 피해자들이 요구해온 공동 참배와 위령비 건립 등에 대해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해 왔다. 최영호 부산 영산대 교수는 “마치무라 외무상의 언급은 지난 1965년 한일협정 당시 ‘1945년 8월15일 이전 피해자’로 국한했던 보상범위 문제에도 재론의 여지를 남겼다.”고 해석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혹한·배고픔에 韓人 1000여명 목숨 잃어”

    “혹한·배고픔에 韓人 1000여명 목숨 잃어”

    “동토(凍土)의 땅에서 떠도는 동료들의 원한을 이제야 풀려나….”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마치무라 외무상의 대답을 전해들은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朔風會)’ 이병주(81·인천 계양구 오류동) 회장의 첫마디였다. 삭풍회는 1945년 8월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강제징용됐다가 종전과 동시에 구소련군에 의해 전쟁포로로 억류된 뒤 시베리아 지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피해자들의 모임이다. 대부분 80대 고령자들로 1990년 창립 당시 60여명에 이르던 회원이 지금은 30여명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26일 “1944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부족한 병력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인 청년을 강제징집해 최전방에 배치했지.”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관동군에 편입된 사람들은 소련군 공격수로 배치된 뒤 1945년 8월9일 소련군의 침공으로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면서 60여만명이 무장해제당했다. 이 회장은 “소련 점령군의 전쟁포로가 돼서 극동·중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등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분산수용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조선인은 약 3500명에 이른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중부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탈곡기 공장에 배당됐다.‘노르마(책임할당제)’ 100% 달성이라는 미명하에 벽돌·시멘트공장과 벌목작업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피해자들은 영하 50도나 되는 추위와 극심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채 억류 첫해인 1945년 6만여명이나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회장은 “여름에 끌려온 바람에 반팔 옷으로 그 매서운 추위를 당해야 했고 죽과 귀리빵으로 연명했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1948년말, 전후 복구공사를 끝낸 소련군의 송환조치가 시작돼 2300여명의 조선인들도 악몽 같던 소련땅을 벗어났다. 그러나 정착금과 노역의 대가는 한푼도 없었다고 한다.1990년 소련과 국교를 맺을 때까지 시베리아 억류자들은 “우리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말도 떳떳하게 할 수 없었다고 이 회장은 하소연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보상을 위한 법안을 심의하고 있고 매년 시베리아 현지 묘지 참배비와 위령비 건립을 위해 지원하고 있지만 똑같은 아픔을 겪었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해 왔다. 지난해 6월에는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소송을 벌여놓고 있다. 이 회장은 “조국에서도, 가해국에서도 버림받았던 우리의 청춘을 위해서라도 죽은 동료들의 묘비라도 세워줬으면 좋겠다.”며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이 회장은 다음달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의 과거청산 촉구를 위한 국제협의회’에 참가해 마치무라 외상을 만나 과거청산의 진정한 의지를 보여달라고 촉구할 계획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이라크서 시체 70여구 발견

    |바그다드 |지난주 수니파 무장세력에 억류됐다 피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50여구가 바그다드 인근 마다인의 티그리스강에서 인양됐으며 바그다드 북서쪽 한 마을 축구 경기장에선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시신 20여구가 발견됐다.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50여구의 시체를 티그리스강에서 인양했으며 우리는 이들의 신원과 이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범죄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그러나 희생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인질로 잡혀 언제 시신으로 발견됐는지에 대해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앞서 지난주 시아파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은 수니파 무장세력들이 마다인에서 시아파 주민 100여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라크 보안군 4개 대대가 마다인에 진입했을 때 인질들이 발견되지 않아 이라크 정부의 정보 능력에 의문이 제기됐었다. 마다인은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으며 시아파와 수니파가 뒤섞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한편 20일 바그다드 북서쪽 하디타 마을 축구 경기장에선 20여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발견됐다고 한 이라크 기자와 현지 주민들이 전했다. 택시 운전사인 우사마 라우프 등은 이날 총성을 듣고 경기장 안에 들어가 보니 19구의 시체가 유혈이 낭자한 채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이라크인 기자와 주민들은 현장에서 19구의 시체를 확인했으며 모두 사살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 印·파키스탄 ‘크리켓 외교’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크리켓 외교’가 무르익고 있다. 두 나라간 크리켓 시합을 계기로 사실상의 정상회담이 이뤄지고 있어서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초청으로 16일 인도로 건너가 함께 시합을 본 뒤 만찬 등 정상회동을 갖는다. 크리켓 대표팀간의 경기를 관전하기 위한 3일간의 짧은 친선 방문이지만 최근 양국간에 부는 훈풍 속에 다양한 현안들을 논의하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만남이다.17일엔 인도 주요 지도자들과의 면담도 예정돼 있다. 싱 총리는 지난 10일 “무샤라프 대통령 및 그 가족에게 크리켓 대항전을 보러 오라고 초청했다.”면서 “어떤 문제도 논의될 수 있다.”고 열린 자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평화협상 등 관계 정상화가 급물살을 탈 것이란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카슈미르 영토분쟁 등 3차례 전쟁을 치르며 견원지간이었던 두 나라가 최근 전면적인 관계 정상화 노력을 보이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인도 정부는 무샤라프 외에도 파키스탄 크리켓 팬 1만여명에게도 비자를 발급, 우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인도는 14일 자국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파키스탄 죄수 24명을 석방했으며 지난달 파키스탄은 조업중 영해를 넘어온 죄목으로 억류해왔던 500여명의 인도 어부들을 석방했다. 또 양측이 나눠갖고 있는 카슈미르를 왕복하는 버스 운행을 지난 7일 1947년 이후 처음으로 재개하는 등 긴장 완화조치를 넓혀나가고 있어 서남아의 역학관계 변화도 예상되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CIA, 유럽서 테러용의자 불법납치 논란

    미 중앙정보국(CIA)이 유럽에서 테러 용의자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하고 고문했는지를 유럽 국가들이 조사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신문은 특히 CIA가 고문이 가능한 나라로 용의자를 데려가 수개월씩 감금하는 ‘용의자 인도작전’을 공공연히 벌여 현지 법을 어겼음에도 외교면책 문제와 신원확인의 어려움 때문에 기소에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유럽 시민권자나 유럽에 사는 아랍권 출신들로 테러 용의자들과 이름이 비슷하거나 이슬람 급진단체에 소속됐다는 이유 등으로 납치됐다. 일부는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지금까지 실종된 사람도 있다. CIA는 테러리즘을 막기 위한 효율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각국 정보당국의 묵인하에 이뤄졌다고 주장하지만 유럽의 검찰 당국은 주권과 인권 침해라며 수사에 착수했다. 2003년 2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이집트 출신의 급진 이슬람 성직자 아부 오마르가 납치됐다. 오마르는 1997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건너온 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맹비난했다. 오마르의 가족은 그가 납치됐다고 주장했으나 이탈리아 대테러 당국은 수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4년 4월 오마르가 부인에게 전화했다. 자신은 납치돼 이탈리아 북부 미군기지에 있으며 카이로로 이동 중이라고 말한 사실이 가족을 감시중인 이탈리아 경찰에 포착됐다. 마피아 및 정치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한 아르만도 스파타로 검사가 CIA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이집트의 정보요원이 배후에 있음을 알고 수사를 맡았다. 이탈리아 야당 의원들은 베를루스코니 정권에 진상을 요구, 파문이 확산됐으나 당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또 2003년 12월 아랍 출신으로 독일 시민권자인 칼레드 마스리는 부인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국경 검문소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억류된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5개월간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알카에다 용의자인 칼리드 마스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마스리는 2004년 5월 풀려났다. 독일 경찰은 그의 말을 의심했고 부인은 다른 여자와 달아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진술에 일관성이 있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그를 태운 비행기가 CIA 소속의 운송회사로 확인됐다. 독일 검찰은 납치사건으로 간주, 마케도니아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스웨덴에서는 2001년 말 이집트 국적을 가진 거주인 2명이 두건을 쓴 CIA 요원에게 카이로로 납치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의회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탈북 국군포로 中서 억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 한만택(72)씨가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가 최근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다고 중국내 북한 소식통들이 10일 밝혔다. 한씨는 이달 초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延吉)에서 조카와 만나기 위해 한 호텔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북한 소식통들은 “한국의 가족들이 한씨의 북한 생존 사실을 알고 수개월의 노력 끝에 기획 탈북을 결행했다.”며 “그가 북한으로 압송될 경우 극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고령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세 때문에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외교경로를 통해 중국 당국에 한씨 억류 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한씨 억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중국에 신병인도와 함께 인도주의적 처분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송환되지 않은 국군포로 500여명 가운데 지금까지 42명이 북한을 탈출해 귀환했다. oilma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3)하멜의 여정-­제주서 나가사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3)하멜의 여정-­제주서 나가사키까지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해양을 통한 제국 건설에 몰두하면서 서세동점의 기세로 밀어닥친 그 때 우리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조금만 생각을 고쳐 먹었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은 지금도 남는다. 하멜표류의 교훈도 그 중의 하나이다. 1628년, 일본 나가사키(長岐)로 향하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 일행 3명이 부산 근처에 표착했으니, 이 중 1명이 훗날 조선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던 박연이다. 박연 표착 25년 뒤, 같은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다.1653년(효종 3년) 암스테르담을 출발한 스페르웨르호가 바타비아와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에 밀려 이 해 8월15일 제주도에서 파선한 것. ●조선에 표류한 하멜일행 탈출 성공 선원 64명 중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표류한다. 이듬해 이들은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 뒤인 1654년에 다시 전라도로 분리, 이송된다. 그동안 사망자가 14인이었으며 생존자는 22인이었다.1666년 9월에 전라좌수영 소속의 하멜 이하 8인이 읍성을 탈출하여 작은 배를 타고서 극적으로 ‘조선 탈출’에 성공한다. 나가사키를 경유한 이들은 1688년 7월 네덜란드로 귀국함으로써 13년의 조선생활을 끝낸다. 바로 이들에 의해 하멜표류기가 출간되면서 ‘금단의 땅 조선’이 서구에 널리 알려진다. 이 하멜 표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이들 집단을 통하여 어떤 구체적인 서양 과학기술을 알려고 했거나 이들의 정보를 역추적하여 세계정세를 탐구하려 했다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군부대에 배속된 하멜 일행이 약간의 전투술 전수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되나 세계정세 판단을 위한 조선 조정의 관심은 확인되지 않는다. 서양인 대집단을 13년간이나 데리고 있었으나 그들로부터 세계동향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계인식이 아닐 수 없다. 하멜은 조사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파견한 박연을 만나며, 이후에 여수 좌수영 등으로 분산되기 전까지 계속 박연이 통역을 담당했다. 이로 미뤄 박연을 통해 충분히 서양의 지식정보를 빼낼 수 있었음에도 그러한 시도는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중국 사신이 하멜 일행을 접하는 일은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이들을 훈련도감 소속 군인으로 배치한 것으로 미뤄 북벌에 대비한 군사적 대응으로 활용하려 한 인상은 준다. 박연과 하멜은 암스테르담에서 바타이유를 거쳐서 나가사키로 향하다 표류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멜 일행은 조선 체류 중 끊임없이 일본행을 꿈꾼다. 결국은 배를 구하여 규슈의 히라도(平戶)를 거쳐 나카사키로 들어가는데 일본인들은 그들이 네덜란드인임을 금세 알아차리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들을 체포해 13년간이나 하릴없이 억류했던 조선과는 대비되는 조치였다. 이들이 나가사키에 당도했을 무렵 만에는 네덜란드배 다섯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들은 곧장 네덜란드 상관(商館)에 당도, 지휘관 빌렘 볼거에게 안내된다. 그리하여 꼭 13년 28일 만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방을 향해 열려진 창구였다. 하멜의 조선표착 시점보다 훨씬 이른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했으며,1549년에는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가고시마(鹿兒島)에 발을 내딛는다. 이후 100여년 간 무역과 가톨릭 포교가 이루어지나,17세기 중엽 도쿠가와 바쿠후(德川 幕府)에 의하여 기독교가 탄압받는 쇄국이 단행된다. 주목할 것은 쇄국은 쇄국이되, 바늘 구멍은 열어놓은 쇄국이었으니 서방과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 하고 있던 셈. ●日 바쿠후, 포교 금지하고 무역만 허용 오직 장사에만 종사하며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인들만 일본 거류가 허용되어, 이른바 난학(蘭學)을 꽃피웠다. 서양 의술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생물, 지리학 등 다양한 근대 학문체계들이 이 즈음 난학으로 정리된다. 젊은이들이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江戶), 심지어는 머나먼 동북지역에서도 몰려들어 ‘난학의 길’이 활짝 열린 것. 하멜이 일본에 거류하는 상관을 찾아 귀국할 수 있었음은 또한 이같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어도 하멜을 통하여 서세동점의 긴급한 상황을 재빨리 읽었어야 옳았다. ‘하멜표류기’는 조선 땅에 남긴 서양인 최초의 족적이자, 조선을 세계에 알린 ‘스테디 셀러’였다. 표류인 하멜과 조선의 첫 만남, 첫 거래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에 반해, 조선을 탈출한 하멜의 기록은 수백년간 서양인의 인구에 회자되면서 열강들이 입맛을 다시게 하는 근거자료로 보급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많은 하멜들이 찾아들었던 나가사키는 당시 어떤 여건이었을까. 예쁜 전차가 오가는 나가사키 중심통에 데지마(出島)가 있다. 말이 섬이지 도심에 포위되어 있다. 유심히 보면 바다 수로가 데지마 옆으로 흐르고 있으며 그 수로는 가까운 바다로 연결된다. 데지마는 1636년 그리스도교의 포교 금지를 목적으로 만든 인공섬. 서방을 통하여 무역 등의 이득은 취해야겠고, 문을 열자니 기독교 포교가 두려워 궁여지책으로 만든 출구였다. 나가사키라고 쉽게 말하지만 고작 손바닥 크기만 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운동장 규모의 땅에 상관 건물을 짓고나서 다리를 놓았다. 바쿠후는 외국배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에게 풍문보고서(風說書)를 내게 하고, 번역 내용을 바쿠후 중심 인물들이 돌려보았으니 세계 정세의 변화를 개괄적이나마 시시각각 첩보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속의 불빛처럼 창구 하나만큼은 분명히 열어놓았던 셈. 어쩌면 일본이 서방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닫지 않았던 그 ‘바늘구멍’이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두 주자로 나서게 하는 결정적 기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꽃피운 난학, 메이지유신 토대 돼 네덜란드인들의 종교와 무역의 분리는 바쿠후의 정책과 일치하였다. 오로지 무역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바쿠후로부터 독점권을 얻게 된다. 이후 200여년 동안 이곳은 일본 유일의 해외무역 창구가 된다. 나가사키를 둘러보면 주변에 국제도시다운 면모를 지닌 도시들이 즐비함을 알 수 있다. 히라도는 일본이 대륙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했을 때부터 중심지였으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거점항이었다. 히라도 남동쪽의 도자기로 유명한 아리타(有田) 북쪽에는 도자기 수출입항으로 명성을 얻었던 이마리가 있다. 이곳 도자기는 19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명성을 얻어 유럽 도자기문화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해탄이 보이는 가라쓰(唐津)도 빼놓을 수 없다. 지명이 말해주듯 중국과의 교역으로 번영한 항구도시다. 나가사키현의 사세보는 일찍이 1886년 해군기지가 들어선 이래 군항도시로 번창했다. 지금도 일본 자위대와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으니 이래저래 외국과의 관계를 떼놓을 수 없는 곳.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100만평 규모의 하우스보텐스로 아시아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일본이 이미 많은 양의 정보를 직수입하여 서양을 이해하고 있었던 시절에도 우리의 서양을 향한 입장은 여전히 폐쇄적이었다. 훗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개화문명을 부르짖었음은, 비단 외국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난학’같이 장기간 축적된 서양문명의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해상 문물교류로 갈린 두 나라 명암 나가사키에서 외국과의 관계를 확인할수 있는 유적은 무수히 많다. 흡사 서양인 거리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라비엔, 영국 무기상인 토머스 글러버의 자택, 고색창연한 돌길인 오란자자카, 포르투갈인의 기술로 완성된 아름다운 다리인 메가네바시(眼鏡橋), 무역상사의 의사로 일본 여인과 결혼한 독일의사 시볼트기념관, 일본 최초의 무역상사를 세운 료마의 흔적, 일본 최초의 사진가인 우에노 히코마의 묘소, 그리고 수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나가사키 가스테라 등이 그것이다. 중국 무역항답게 중국의 흔적도 숱하게 흩어져 있으니, 나가사키짬뽕이나 푸젠성(福建城) 사람들이 세운 소후쿠지(崇福寺), 중국의 국부 손문의 유허지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15세기부터 규슈 일대를 드나들던 포르투갈인에게 입수한 조총을 자체적으로 모방, 개발해 엄청난 무기체계로 발전시킨다. 그 조총을 손에 쥐고 자신만만하게 임진왜란을 일으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7년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조총을 미워하기 전에 그 조총이 어떤 바닷길을 통하여 입수, 개발됐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옳았다. 서방의 급격한 이입을 두려워한 바쿠후의 폐쇄정책은 1868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데지마는 바늘구멍 같은 숨통으로 역사의 소명을 다하였다. 일본은 미국 페리의 강요에 의해 전면 개방되지만, 적어도 데지마 같은 바늘구멍을 오랫동안 열어두었고, 수백년 전통의 난학으로 대비해 왔기 때문에 서방문명에 대한 일정한 저항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흡사 숫처녀가 백주 대낮에 겁간 당하는 식의 급격한 개항을 강요당했던 우리와는 여러 모로 대비된다. 옛 데지마를 복원시켜 놓은 건물 앞에서 지난 수백년을 돌이켜보자니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은 정교한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왜 선조들이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에 집착했던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역사에 흔적을 남긴 숱한 ‘하멜’들이 바로 데지마와 연관을 맺고 있음을 고려할 때, 바다를 통해 세계로 열린 천혜의 출구를 완벽하게 닫아버렸던 지난날 우리의 해양관을 어찌 비판하지 않을 것인가. 취재협조 학술진흥재단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 펄벅 평전/피터 콘 지음

    펄벅 평전/피터 콘 지음

    ‘펄벅평전’(피터 콘 지음, 이한음 옮김, 은행나무 펴냄)을 읽으면서 펄 벅(Pearl S. Buck)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설인 ‘대지’의 또 다른 주인공을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펄 벅의 80 평생은 소설의 주인공 왕룽일가의 일대기만큼이나 파란만장하고 거친 것이었다. 왕룽일가는 펄 벅이 평생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서 살며 만난 평범한 중국인들의 전형이었고, 그의 몸속 깊이 체화된 채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유전자 같은 것이었다. 오래 전 ‘대지’를 감동적으로 읽으며 책의 저자가 미국인이라는 점에 놀랐고, 어떻게 한 외국인 여자가 격변기 중국의 모습, 그것도 표피가 아닌 속살의 모습을 그토록 사실적으로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이번 평전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요, 작가로서의 명성에 가려진 사회운동가 펄 벅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한 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 펄 벅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그는 1892년 미국에서 태어나자마자 선교사인 부모와 함께 중국에 건너와 40여년간 거대한 대륙에서 펼쳐지는 격변기의 풍랑을 몸소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1934년 일본의 침략으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치솟으면서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두 나라를 모두 사랑하고 가슴에 품었지만 한 평생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살아간 ‘파란 눈의 동양인’이었으며,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문화적 이중초점’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지’의 주인공들, 즉 평범한 중국인들은 그의 인생, 특히 작품활동과 사회운동에 강력한 유전자로서 작용했다. 관습처럼 행해지던 여아살해를 피해 살아남으면 전족의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고, 성장하면 남편과 아들에게 단순한 일꾼이요 종 노릇을 넘기 어려웠던 중국 여성들의 고난은 그를 훗날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인도한다. 또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가족을 팽개친 채 전도에만 열중하는 아버지와 그로 인해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어머니, 지체아인 딸, 인종차별적인 개신교 선교사들의 모습도 그의 머리에 그대로 각인된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작품활동과 함께 왕성한 인권운동을 펼친다. 일곱명의 아이를 직접 입양해 길렀고, 미국 내 소수민족의 인권 개선, 버려진 아이들을 돕기 위한 여러 기구들을 설립 운영했다.1950년에 설립한 웰컴하우스,1964년에 세운 펄벅재단이 이같은 활동의 중심이 됐다. 특히 펄벅재단(후일 ‘펄벅인터내셔널’로 바뀜)은 아시아 10여 나라에서 미국인과 동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2만 5000명에게 의료혜택과 교육기회를 제공해왔다. 또 동서협회 설립, 잡지 ‘아시아’ 발행 등 동서문화 이해와 교류에 적극 나섰으며,1940년대엔 악명높은 중국인 이민배제법 철폐운동,2차대전 때는 일본계 미국인 억류정책에 대한 강력한 항의운동을 펼쳤다. 이는 그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서 살며 동서양간 몰이해의 폭을 조금이나마 좁혀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같은 인종적 몰이해에서 얼마나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정책과 행위들이 표출됐는지, 그는 몸소 체득해온 터였다. 이같은 활동은 상당수의 미국 보수층 백인들의 반발을 샀다. 적극적인 인권활동은 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반공산주의 발언으로 좌파의 불신을 받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FBI의 적대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평전엔 펄 벅의 사회활동 안쪽에 숨은 인간적인 내밀한 삶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중국에서 성장하면서 광신적인 아버지 아래서 겪었던 외로움과 소외감, 조개 속 모래알처럼 불편했던 첫 결혼생활과 이혼, 지체아로 낳은 아이를 키우던 고통 등. 그는 고독하고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 노심초사하면서도 당당하고 때로는 독선적일 정도로 일에 몰입한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자식에게 얽매여 있고, 온갖 마음의 상처들을 곱씹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펄 벅은 이같은 개인적 삶의 내밀한 모습들을 그가 죽기 직전 낸 자서전에서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 ‘나의 세계’에선 자신의 부모는 물론, 첫번째 및 두번째 남편인 로싱 벅과 리처드 월시의 이름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문화일대기’라고 지칭한다. 일반인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왜곡되어 있던 당시 중국과 미국의 분위기와 문화, 인물들이 펄 벅과 함께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격변기의 중국과 미국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십년 동안 그녀의 집과 활동본부 역할을 한 필라델피아 북부 벅스 카운티에 있는 그린힐스 농장은 지금 펄벅인터내셔널 본부이자 펄벅기념관 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펄의 침실엔 비단옷, 도자기, 서예작품 등 중국 물품들이 유리상자에 담겨 있는데,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19세기 중국 여성들의 뭉개진 발을 담던 전족신 한 쌍이다. 펄은 평생 이 ‘아름다운’ 물품을 가까이 두고서 권력이 약자에게 일상적으로 어떤 고통을 가하는지 끊임없이 되새겼다고 한다. 펜실베이니아대 영문과 교수이자 펄벅인터내셔널 위원장인 지은이 피터 콘은 평전 집필에 대해 두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펄 벅의 진면모와 활화산 같았던 그의 생애를 되살려내기 위해, 또 하나는 제니퍼 경 콘이란 딸을 얻게 해준 개인적 빚을 갚기 위해서다. 제니퍼 경 콘은 20년 전 김경림이란 이름으로 영양실조와 온 몸에 염증이 난 상태로 그의 삶 속에 들어왔고, 지금은 대학졸업 후 요리사이자 작가로서 뉴욕시에 있는 한 재단에서 집 없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 한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이집트·이스라엘 해빙 무드

    중동의 정치 무대가 급속히 바뀌고 있다. 5일 이집트가 지난 8년간 스파이 혐의로 구금해온 이스라엘의 아잠 아잠을 석방하고 이스라엘이 불법 국경침투 혐의로 지난 8월 이후 억류해온 이집트 대학생 6명을 석방한 것이 이처럼 급변하는 중동의 정치 정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40년 가깝게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사망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 성공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추진하는 가자지구 이스라엘 정착촌 철수정책 등이 이같은 변화를 부른 배경이다. ●이집트대사 이스라엘 복귀 할듯 아잠의 석방으로 이집트가 지난 2000년 철수시킨 이스라엘 주재 대사를 다시 이스라엘로 복귀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외교부의 한 고위관계자도 이날 공영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집트 대사가 머지않은 장래에 텔아비브로 복귀할 것이라고 말했다.2000년 팔레스타인의 2차 봉기 이후 급속히 냉각됐던 양국 관계가 다시 정상화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다음주 중 이스라엘산 원료를 일정 비율 이상 함유한 이집트 상품을 미국에 무관세 수출할 수 있게 하는 제한산업지대(QIZ) 협정에 서명하기로 합의했다. QIZ 협정이 출범하면 이집트·이스라엘 관계는 정치·외교를 넘어 경제 분야로까지 개선의 폭을 넓히게 된다.2000년 팔레스타인의 2차 봉기 발발 이전 한 해 6000만달러에 달했던 양국간 교역 규모는 4년 만에 2500만달러 수준으로 급감했지만 QIZ가 출범하면 첫해에만 현재의 3배에 달하는 7500만달러의 교역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관계가 개선된다고 해서 복잡한 팔레스타인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중동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재자 역할을 떠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 팔 죄수 조기석방 계획 이집트는 가자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 철수 이후 가자지구에 대한 치안 유지를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역시 이같은 이집트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또 현재 수감 중인 7000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죄수들 가운데 상당수를 감형, 조기 석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동 평화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는 마흐무드 압바스에 대한 간접 지원으로 읽혀진다. 최근의 상황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지만 지금 중동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세진기자 yujin@seoul.co.kr
  • 이집트·이스라엘 죄수 교환석방

    |카이로 연합|이스라엘은 5일 국경 침투와 테러모의 혐의로 억류해온 이집트 학생 6명을 석방했으며, 이집트도 간첩죄로 복역 중인 아랍계 이스라엘 장기수 아잠 아잠(41)을 전격 석방했다. 양국의 죄수 교환 석방은 양국 관계의 급진전을 반영하는 획기적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조치는 아흐마드 아불 가이트 이집트 외무장관의 이스라엘 방문 4일 만에 단행됐다. 양국의 죄수 교환 석방은 지난달 11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망 후 새롭게 조성되고 역내 평화무드 확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리엘 샤론 총리실은 아잠의 석방과 관련, 샤론 총리가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집트 학생 석방을 약속한데 대한 호혜조치라고 설명하고, 양국 관계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아라파트 수반이 사망한 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관계 뿐 아니라 이집트·이스라엘 관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철수 후 가자지구 치안유지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맡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국경 병력을 증강하기로 이스라엘과 합의했다. 이집트·가자지구 국경에 이집트군 병력을 증강 배치하는 것은 25년간 지켜온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국 관계가 극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스라엘 일간 마리브는 양국 관계가 급속히 개선됨에 따라 이스라엘 관리들은 샤론·무바라크 정상회담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中연행 탈북자7명 입국

    지난 9월27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미국 국제학교에 진입한 뒤 중국 공안에 연행됐던 탈북자 7명이 두달여 만에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당국자는 5일 “중국 공안당국에 억류돼 있던 탈북자 7명이 외교당국간 협의를 거쳐 최근 국내에 입국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외교소식통도 “이들 탈북자가 몇차례로 나눠 최근 제3국으로 향했고 모두 한국행을 원해 현재 한국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英여배우 “인권만큼 중요한건 없어”

    |런던 연합|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국의 원로 여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27일 영국 최초의 인권정당인 ‘평화진보당’을 창당했다. 레드그레이브는 이날 런던의 한 호텔에서 법률가, 학자, 언론인, 인권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진보당 창당식을 거행했다. 참석자들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와 러시아, 영국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유린 행위를 규탄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아들이 억류돼 있는 아즈마트 베그는 이날 연설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인권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도 인권에 대해 말하고 인권옹호에 전념하는 정당이 없다.”고 성토했다. 레드그레이브는 “인권옹호만을 목표로 활동하는 평화진보당의 등장으로 이 나라 인권운동단체들이 더 큰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쉬어가기˙˙˙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 비밀리에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는 타이거 우즈와 엘린 노르데그렌이 미국 해안경비대의 입항 규정을 어겨 요트 안에 발이 묶이는 곤욕을 치렀다. 해안경비대는 “우즈 부부가 탄 요트 프라이버시호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항에 들어오려다 규정 위반으로 입항이 거부됐다.”고 15일 밝혔다. 규정에 따르면 미국령 항구에 입항하는 선박은 적어도 4일전에 신고를 해야 하지만 프라이버시호는 이를 따르지 않았던 것. 프라이버시호는 조사를 받았고, 우즈 부부는 3시간 30분 동안 억류되는 수모를 당했다고.
  • “비글리 시신 바그다드외곽에 버려”

    |바그다드 연합|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살해된 영국인 케니스 비글리(62)의 시신이 지난 8일 바그다드 남부 외곽에 버려졌다고 무장세력 관계자가 12일 밝혔다.익명의 이 관계자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를 추종하는) 무장단체에 납치돼 3주여 동안 억류돼 있던 비글리는 지난 7일 바그다드 남서부 35㎞ 라티피야에서 참수됐다.”면서 이같이 말했다.이라크 주재 영국 대사관은 그러나 비글리의 시신이 어디에 투기됐는지 모른다고 밝혔다.비글리는 지난달 잭 헨슬리와 유진 암스트롱 등 미국인 2명과 함께 바그다드 소재 집에서 무장 세력에 납치됐으며,헨슬리와 암스트롱은 앞서 살해됐었다.
  • 피랍 미국인 이라크서 또 참수

    한동안 주춤했던 이라크 무장단체들의 외국인 인질 참수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다. 요르단 출신 테러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무장단체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가 이라크에서 최근 납치한 미국인 1명의 목을 베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20일 한 이슬람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9분짜리 이 비디오는 총기를 휴대하고 복면을 한 남자 5명이 지난 16일 납치된 미국인 기술자 유진 암스트롱을 참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유일신과 성전은 지난 5월과 6월 미국인 닉 버그와 한국인 김선일씨를 납치,살해한 단체다. 아랍에미리트의 회사 ‘걸프 서플라이스 앤드 커머셜 서비스’ 직원인 암스트롱은 지난 16일 바그다드 자택에서 동료인 미국인 잭 헨슬리,영국인 케네스 비글리와 함께 납치됐다. 무장단체 조직원들은 비디오에서 암스트롱을 살해하기 전 낭독한 성명에서 미국과 영국이 억류하고 있는 모든 이라크 여성 수감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24시간내로 다른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테이프에서 암스트롱은 김선일씨나 버그와 마찬가지로 오렌지색 옷을 입고 눈가리개를 한 채 뭐라고 애원하는 모습이었다. 워싱턴의 한 미국 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암스트롱의 것으로 확인된 시체가 발견됐다고 밝혔으나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외신들은 성명서를 낭독하고 암스트롱을 칼로 살해한 사람이 알 자르카위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성명을 낭독한 한 무장대원은 때때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직접 거명,“개”라고 부르며 추가 인질 살해를 경고했다. 이들은 앞서 지난 18일 48시간내로 여성 수감자들을 전원 석방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현재 이라크에서는 프랑스인 기자 2명과 이탈리아 여성 구호단체 요원 2명, 터키인 10명 등 외국인 10여명이 인질로 잡혀 있다. 이밖에 이라크군인 18명도 최근 납치됐다.지난 17개월 동안 이라크에서 납치된 외국인은 100명이 넘는다. 한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암스트롱 살해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기 직전 이들(무장단체)과는 절대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자국 국민에 대한 참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대이라크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김균미기자 외신 kmkim@seoul.co.kr
  • [국제플러스] 伊여성 2명 이라크서 피랍

    |바그다드·로마 AFP 연합|구호기관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여성 2명이 7일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이라크인 2∼3명과 함께 무장괴한에 납치됐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이탈리아의 라이 우노 TV는 구호기관에서 일하는 20대 후반 이탈리아 여성 2명이 납치됐다고 전했으며 ‘바그다드를 위한 교량’이라는 단체도 소속 여성 직원 2명이 이라크에서 억류됐다고 확인했다.이라크 현지 경찰은 이 단체가 위치한 거리 일대를 봉쇄했다.이 지역 주민은 무장괴한이 3대의 차량에 타고 도착해 납치극을 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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