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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된 시기를 윤지충의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이전과 신유교난이 일어난 1801년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지도층의 신분이 확연히 달라진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진산사건 이전(1784∼1791)의 지도층 인물 12명 가운데 김범우(역관)·최창현(의원)·최필공(의원) 3명의 신분이 중인이라고 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장교 출신의 이존창도 중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 가운데 최창현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양반 중심의 천주교 신도층을 평민층까지 확산시켰으며,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예배처로 제공하였다. 이 12명은 대부분 1784년에 입교했으며, 이 가운데 김범우가 가장 이른 1786년에 순교하였다.(천주교 용어로는 순교자가 아니라 증거자이다. 그가 현장에서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광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신유교난 이전 10년간의 지도자 38명 가운데 21명이 중인으로 절반이 넘었으니, 사회를 바꿔보려던 그들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의 자형 이벽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영세받은 최초의 신자는 다산 정약용의 자형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다. 그는 손위 동서이자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한 이벽(李檗·1754∼1786)의 권유로 천주교도가 되었는데, 아버지 이동욱이 1783년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자 자제군관(개인 수행원)으로 북경에 따라갔다.40일 동안 머물며 남천주교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필담으로 교리를 익히고 프랑스인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신자가 되었다. 그는 1784년에 수십 종의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상본(像本) 등을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벽은 손아래 동서인 이승훈에게 세례받은 뒤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 수표교 옆으로 이사했으며,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중인층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천주교 교리를 전하였다. 당시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이므로 외국인 신부가 없어, 조선인 신자들끼리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를 익히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10명의 가신부에게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김범우(金範禹·1751∼1786)는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종6품 한학주부까지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여 정약용의 자형인 이벽과 가깝게 지내다가, 이벽이 1784년에 천주교 교리를 전하자 그의 권면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이 영세를 베풀기 시작하자, 김범우도 이벽의 집에서 그에게 영세를 받아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영세식이었는데, 이존창·최창현·최인길·지홍 등이 함께 받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자신의 아우 이우(履禹)와 현우(顯禹)까지 입교시켰다. 그의 집은 명례방(明禮坊) 장예원(掌隷院) 앞에 있었는데, 천주교 서적이 많이 있어 신자들이 자주 모여 미사를 드리거나 설교를 들었다. 양반 이벽의 집에는 하층민들이 드나들기 어려워, 중인 출신의 김범우가 수표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을 예배처로 제공했다고 한다.1784년부터 그의 집은 명례방공동체가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밀양에 유배되다 1785년 어느 봄날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다.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을사’는 1785년, 추조는 형조를 가리킨다. 서학(西學)에 대해 비교적 온건했던 정조 시대였으므로,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대부 자제들을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의 김범우와 최인길, 두 역관만 잡아 가두었다. 그러자 권일신이 그의 아들과 함께 형조에 찾아가, 자신도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양반 자제들을 처벌하기 어려워, 잘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대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김범우는 천주교를 저버리지 않았다. 판서가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다. 잘못된 점은 모른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결국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에 소장하였던 천주교 교리서들은 모두 형조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다. 성균관 학생 정숙은 자기 친구와 친척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완전히 절교하라.”고 통문을 보냈다.1785년 3월에 돌린 이 통문이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문서라고 한다. 달레 주교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김범우는 유배된 뒤에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다가, 고문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쯤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아들 인고는 밀양으로 이사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며, 두 아우는 신유박해(1801)에 순교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고 하지만, 밀양일 가능성이 높다.‘사학징의(邪學懲義)’에 “범우가 병오년에 사학(邪學) 사건으로 단양(丹陽)에 정배되었다.”고 했는데, 충청도라고 하지는 않았다. 밀양시에 단장면(丹場面)이 있으며, 그의 묘소가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 있고, 아들도 그곳으로 내려와 산 것을 보면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인 그의 묘는 1989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져,2005년 9월 14일에 유배 220주년 및 김범우(토마스) 묘역 준공미사가 1500명 신자가 모인 묘소 앞에서 베풀어졌다. ●김범우가 살던 동네에 명동성당 들어서 1886년에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나라 안을 여행할 권리와 더불어, 건물을 짓고 서울에 거주할 권리와 소유할 권리까지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푸아넬 신부가 주도하여 명례방에 대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의 가옥은 좁았기 때문에, 윤정현의 집을 비롯해 여러 채를 계속 구입해야 했다. 푸아넬 신부가 작성한 1887년 보고서에는 “우리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울 전에는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구입해 놓은 (명동의) 대지는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요한 기본 건물들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김정동교수의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에서 인용). 그러나 이곳은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가까워,“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가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 하여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고 착공을 지연시켰다.1892년 봄에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교회 터를 평평하게 닦아놓자, 뮈텔 주교가 머리돌에 축복하였다. 코스트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898년 5월29일에 푸아넬 신부가 명동성당을 준공하였다. 그 자리의 지명이 종현이어서 한때는 종현성당, 또는 뾰죽집이라고도 불렸는데, 곧바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순교한 지 100년 뒤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바로 그 동네에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김범우는 몰랐겠지만, 순교의 피가 100배 결실을 맺은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태] 시민들 “잘잘못 가리기보다 무사귀환 우선”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데 대해 일부에서는 교회의 무리한 선교 방식을 비판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고한 인명이 억류된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반면 탈레반이 요구하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한국군의 철군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일부선 교회의 무리한 선교방식 비판 변호사 이효상(32)씨는 “지금은 피랍자들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안전하고 조속한 석방을 기원하는 것이 온당한 순서일 것”이라면서 “이들의 아프간 행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이뤄진 일이고,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일도 아니었던 만큼 성토 일색인 여론은 지나친 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국내에서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선교 활동을 했다.”면서 “본래 선교라는 것이 낙후되고 위험한 지역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하는 것인 만큼 이들의 순수한 의도까지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개인사업을 하는 이영(34)씨는 “아프간에서는 이슬람교를 포교하는 것도 불법이라던데 교회에서 너무 무리수를 둔 것 같다.”면서도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탈레반의 행동은 명백한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씨는 “정부로선 어차피 12월 철군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탈레반과 협상 과정에서 철군 시기를 조금 앞당겨 명분도 구축하고 피랍된 국민들의 생명도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장인 이모(31·여)씨는 “피랍된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이번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것”이라면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무고한 인명을 담보로 해 정치적 이득을 꾀한 탈레반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다. 회사원 진정희(30·여)씨는 “피랍된 이들도 피해자인데 대다수 사람들이 마치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욕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독교계의 무차별적 선교 활동에 반감이 있지만 교단의 교세 확장과는 별개로 피랍자들은 선의로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간에 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 일하는 원희연(29·여)씨는 “이들의 목적이나 활동은 충분히 짐작이 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위험성을 간과했다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한 셈”이라면서 “개인이 혼자 떠나는 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교회가 기획하는 단체봉사 활동의 경우 정치 상황 등을 고려해 파견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할 수 있도록 교계에서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이디 ‘고고싱’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사람들이) 무리한 선교로 위험을 자초했다는 비난들도 많지만 지금은 일단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피랍자 가족들을 위로할 때”라고 강조했다.●한국군 철군시기도 의견 엇갈려 파병반대국민행동은 “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민간인을 납치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 행위로 지탄받아야 한다.”면서 “김선일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지 심각하게 우려된다. 정부는 즉각적인 철군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자유주의연대 관계자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학교를 건설하고 있는데 탈레반이 정당하지 않은 요구를 하고 있으므로 철군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임일영 류지영기자 argus@seoul.co.kr
  • 탈레반 “구출작전땐 인질 모두살해”

    한국인 23명을 억류한 채 한국군 철수와 동료 수감자 23명 석방을 요구해온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이 석방 협상 테이블에 본격 나섬에 따라 한때 개시됐던 아프가니스탄 군·경과 다국적군의 탈레반 포위·봉쇄 작전이 풀린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아프간이슬라믹프레스(AIP)와 알자지라 방송,AFP는 22일 아프간 국방부 대변인의 성명을 토대로 아프간의 군·경과 다국적군이 한국인 23명이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프간 남부 지역에 대해 포위·봉쇄 작전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프간 국방부는 작전개시 보도가 나간 뒤 “작전이 시작되지 않았다. 전산오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부인했다. 국방부 강용희 홍보관리관 직무 대행도 “현지 동맹군 사령부 등에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다.”라고 구출작전 보도를 부인했다. 상황은 아프간 군 등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대한 포위를 마치고 인질 살해 등에 대비해 군사작전 준비에 들어갔다가 협상이 본격화되면서 봉쇄를 푼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한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이날 “우리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인 행동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인질들을 죽일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이런 경고가 있은 뒤 알자지라 방송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봉쇄작전에 투입됐던) 병력을 철수하고 있다.”고 보도, 인질 구출작전이 당초 전개됐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병력이 철수한 것으로 전했다. 한국인들의 상태와 관련, 일본 NHK방송은 이날 저녁 탈레반 대변인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납치된 한국인들은 안전한 상태에서 식사도 하고, 수면을 취하기도 하는 등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탈레반의 아마디 대변인이 “우리는 23명의 한국인을 억류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8명은 여자다. 우리는 이들이 선한 무슬림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들이 아니었다면 현장에서 처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춘규·이세영기자 taein@seoul.co.kr
  • 피로 물든 붉은사원

    파키스탄 정부군이 이슬람 급진 ‘랄 마스지드(붉은사원)’ 소속 무장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에 나서 최소 58명이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이 10일 보도했다. 파키스탄군 대변인인 와히드 아르샤드 준장은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군이 사원의 75% 이상을 장악했으며 무장세력을 완전 진압하기 위한 막바지 압박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전으로 붉은사원에서 저항하던 무장세력 50여명이 사살됐으며, 정부군 8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날 사망한 58명을 포함해 첫 총격전이 있은 지난 2일 이후 사망자수는 80명을 넘어섰다. 사원 안에는 여전히 100여명의 무장세력이 300∼4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방패’로 삼아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어 추가 인명 피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난 2일 붉은사원 소속 무장 학생들의 경찰 초소 습격으로 총격전이 벌어진 이래 8일째 대치국면이 계속된 가운데 정부군은 이날 새벽 마지막 협상이 무산되자 곧바로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 무장세력은 그동안 대정부 투쟁을 주도해온 라시드 가지 등 사원 지도자들의 사면을 요구했지만 정부측은 ‘수용 불가’입장을 밝히면서 곧바로 병력을 투입했다. 군 당국은 특수부대 요원들과 무장세력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인질로 잡혀 있던 20여명의 어린이와 여러 명의 여성은 안전하게 피신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군의 한 관계자는 “무장세력 잔당들이 여성과 어린이를 ‘방패’로 삼은 채 로켓포와 수류탄 등을 사용해 격렬히 저항하고 있는 데다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 작전의 진전이 더디다.”고 말했다. 붉은사원은 그동안 파키스탄내 탈레반 세력의 확대와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악 일소 등을 주장하면서 대 정부 투쟁을 벌여왔다. 지난 5월에는 경찰관을 감금했고, 최근에는 중국인 9명을 억류했다가 풀어주기도 했다. 한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파키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면서 “이번 사태가 인권 측면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촉구한다.”고 말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女談餘談] 기적의 약/이순녀 국제부 기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지난 3월 이슬람 무장단체에 납치됐던 영국 BBC방송의 앨런 존스턴(45)기자가 사흘전 풀려났다. 억류 114일 만에 석방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면도기를 달라고 해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렸다. 납치될 당시의 모습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라고 했다.“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는 증언에서 드러나듯 한시라도 빨리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누구나 살면서 힘들고 아픈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혈육의 죽음, 불의의 사고, 실연의 상처, 실패의 쓴맛 등 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기억이 어디 한둘일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자고나면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꿈같은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떨까. 아픈 기억을 잊게 하는 ‘기적의 약’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다. 캐나다 맥길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심장병 환자의 고혈압 치료제가 아픈 기억을 떠올릴 때 고통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논문을 최근 발표했다. 지우개처럼 기억을 몽땅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그대로 두되 감정적인 부분만 없앤다고 한다. 즉 사건의 내용은 기억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더이상 심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험이 아직 초기단계라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또 언제 상용화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약이 진짜 개발된다면 선뜻 사야 할까. 죽을 만큼, 때로는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고통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신에게 의지하든 가족이나 연인의 힘을 얻든 어떻게 해서라도 끝내 아픔과 슬픔을 견뎌낸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통과하면서 사람은 비로소 인생 갈피갈피에 숨겨진 삶의 참뜻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닐는지. ‘세월이 약’이라고 했다. 어떤 ‘기적의 약’이 자연의 치유력을 앞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순녀 국제부 기자 coral@seoul.co.kr
  • 팔서 피랍 英 BBC기자 4개월만에 석방

    “지난 16주는 내 인생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었다. 생매장을 당해 죽는 기분이었다. 석방되다니…환상적이다.” 지난 3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무슬림 극단세력에 납치됐던 영국 BBC 방송의 앨런 존스턴(45) 기자가 4개월여 만에 석방됐다.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억류기간 내내 하루 24시간 줄곧 손목과 발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로 독방에 갇혀 있었다. 라디오를 통해 BBC 뉴스를 들을 수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납치한 조직)이 나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일에 대해 말하곤 했다.”며 살해의 공포에서 벗어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의 석방 소식은 4일 팔레스타인 무장집단 하마스 측이 “존스턴 기자를 납치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이슬람 군대’가 이날 하마스 보안군에 존스턴 기자의 신병을 넘겼다. 현재 보안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전하면서 확인됐다. 하마스는 지난달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래 ‘이슬람 군대’에 존스턴 기자의 석방을 촉구해 왔으며 3일 이 단체의 거점을 공격, 공보실 관리 등을 체포했다. ‘이슬람 군대’는 지난달 24일 자살폭탄 벨트를 착용한 모습의 존스턴 기자 동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했으며 지난해 6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샬리트 상병을 납치하는 데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5)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25)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Ⅱ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을 후금과의 대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절실했던 명은 고민을 거듭했다.‘찬탈’을 자행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응징하여 상국으로서 명분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이미 바뀌어버린 조선의 현실을 수용하여 실리를 택할 것인가? 인조와 반정공신들 또한 초조했다. 반정 직후 명에 보낸 주문(奏文) 속에서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事大)를 소홀히 하고 배은망덕했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명 조정이 ‘찬탈’을 운운하자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명 조정이 만일 ‘명분’을 선택하여 인조에 대한 책봉을 거부할 경우, 집권의 정당성을 얻지 못하고 좌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명, 실리를 택하다 ‘조선 사태’에 대한 처리 방향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명 조정은 절충안을 내놓았다.1623년 8월 명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임요유(林堯兪)는, 신료를 파견하여 조선 신민(臣民)들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인조에 대한 책봉 여부를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여론 조사를 통해 ‘명에 대한 광해군의 배은 망덕’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인조반정을 ‘찬탈’로 규정하여 성토하자고 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고 인조가 명에 협조하여 후금과의 싸움에 앞장서겠다는 자세를 보일 경우,‘찬탈’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리자고 했다. 명 조정은, 당시 가도( 島)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진계성(陳繼盛)을 서울로 들여보냈다. 진계성은 조선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정(李光庭)을 비롯한 831명의 의견을 청취했다. 진계성이 면담한 사람들의 의견은 거의 한결 같았다. 그들은 ‘1619년 심하전역에서 유정(劉綎) 등이 전사하고 명군이 패한 것은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군사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이고,‘광해군은 후금과 화친했다.’고 진술했다. 또 ‘광해군이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명 사신들을 숙소에 억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반정 당일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궁궐에 방화했다.’는 소문은 유언비어임을 지적하고, 인조의 인품이 훌륭하고, 광해군은 잘 보호되고 있다고 진술했다. 예부상서 임요유는 1623년 12월8일 황제에게, 인조를 승인하여 책봉하자는 내용으로 상주(上奏)했다. 그는 진계성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광해군의 배은망덕’과 인조의 ‘충순’을 확인했다고 평가하고, 일단 인조를 국왕으로 인정하되 그가 모문룡과 합세하여 후금을 공격하여 공적이 드러난 뒤에 정식으로 책봉하자고 주청했다. 말하자면 ‘조건부 책봉’이었다. 후금의 도전 때문에 곤경에 처한 명의 현실을 고려하여 명분이 아닌 실리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실리의 크기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모문룡, 인조반정을 찬양하다 비록 ‘조건부 책봉’이지만 인조가 명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정받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은 모문룡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부하 진계성이 서울에 들어가 ‘조선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주청사 일행이 가도에 들렀을 때 모문룡은 반정의 발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명 조정에 보낸 주문에서도 인조를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끊어진 상황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가도에 머물던 모문룡의 의견은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문룡은 무슨 까닭으로 인조반정을 긍정하고 인조를 책봉하자고 했을까? 모문룡의 존재는 1620년대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사이의 관계를 결정했던 ‘아킬레스건’이었다. 한마디로 모문룡 때문에 조선과 후금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궁극에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달리 말하면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모문룡은 1621년(광해군 13년) 7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잠입하여 진강(鎭江)을 탈취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진강-오늘날의 단둥(丹東) 부근-은 전략 요충이었다. 육로를 통해 선양 등 만주 내륙으로, 수로를 통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등지로 연결될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모문룡의 진강 점령은 명과 후금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1618년 푸순성이 함락된 이후 명군은 후금군에 연전연패했다. 승전보에 목말랐던 명은 모문룡의 진강 점령을 기첩(奇捷)이라 불렀다. 마치 요동 전체를 수복이라도 한 것처럼 고무되었다. 후금은 자신들의 안마당에서 허를 찔린 것에 격앙되었다. 후금은 곧 대병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모문룡은 도주하여 조선의 미곶(彌串)으로 상륙했다. 그가 상륙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을 때 광해군은 경악했다. 광해군은 모문룡이 조선과 후금 관계에서 화근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모문룡은 휘하를 이끌고 철산(鐵山), 용천(龍川), 의주(義州) 등지를 옮겨다니며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때로는 압록강 너머의 만주 지역으로 포를 쏴대며 후금군을 자극했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군의 침략을 받을 판이었다. 실제 1621년 12월, 후금군은 모문룡을 처치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와 용천을 기습했다.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탈출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휘하 578명이 피살되었다. 그가 ‘화근’임을 분명히 입증한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이후 모문룡을 설득하여 철산 앞 바다에 있는 가도로 들어가게 했다. 그가 육지에 있는 한 후금군의 침략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간 뒤에는 가능한 한 그와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모문룡은 가도에 동강진(東江鎭)이라는 군사 거점을 마련했다. 거점을 유지하기 위해 ‘군량 보급’ 등 조선 조정에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을 내밀었다. 광해군은 최소한만 수용할 뿐 그에 대한 지원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후금과 사단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모문룡이 광해군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인조정권, 모문룡에게 코가 꿰이다 명은 모문룡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가도로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명 조정은 가도의 동강진을 후금의 서진(西進)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려면 가도에 대한 군량과 군수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천진(天津)이나 산동에서 가도로 가는 해로가 있었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은 데다 파도가 험악 했다. 자연히 명은 조선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열 받은 모문룡이나 명 조정이 조선을 손봐주고 싶어도 육로가 끊어진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집권했다. 모문룡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책봉승인’에 목을 맨 주청사 일행에게 인조반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공짜란 없는 법이다. 모문룡은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도록 애써주는 대가로 가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그는 반정이 성공한 직후 부하 응시태(應時泰)를 서울로 보내 사정을 탐색했다. 인조는 응시태를 접견한 자리에서 ‘광해군이 명의 은혜를 망각하고 모문룡의 지원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모문룡과 합심하여 이 오랑캐들을 소탕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문룡의 입장에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인조 스스로 광해군을 성토하고 자신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었다. 모문룡으로서는 표정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새 정권은 반정에 대한 명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모문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마다 엄청난 양의 양곡을 가도로 보냈다. 가도에 머물던 명의 난민들이 수시로 평안도 지역으로 상륙하는 것도 묵인했다. 자연히 후금과의 군사적 긴장은 날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자신의 집권을 승인 받는 대가로 모문룡이라는 ‘시한폭탄’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美·이란 대화 물꼬… ‘화해’의 탐색전

    미국과 이란은 28일(이하 현지시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그린존내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 공관에서 1980년 국교단절 이후 27년 만에 첫 고위급 공식 협상을 재개했다. 라이언 크로커 주 이라크 미국대사와 하산 카제미 코미 주 이라크 이란대사가 양국 대표로 참석한 이날 회담은 당초 예정된 2시간을 넘겨 4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AP,AFP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크로커 대사는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대화는 실무적이었으며, 양국은 이라크의 안정을 원한다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 이라크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의 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으며, 이란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양국은 사전에 회담의 의제를 이라크 안정화에 국한시킨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이날 회담에서 양국의 상대국민 억류문제와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 등 민감한 현안은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악의 축’에서 대화 상대로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이번 회담은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기보다 일종의 탐색전 성격에 가까웠다. 회담에 앞서 BBC는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상징적인 의미외에 드라마틱한 전기를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에서 양국이 두 번째 회담 일정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성공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크로커 대사는 기자회견에서 이란이 두 번째 회담을 제의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이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2년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온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이란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회담은 의미가 적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연말 이라크연구그룹이 보고서를 통해 이란과의 대화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도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란문제 전문가 마이클 루빈은 abc와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의 외교 변화에 대해 “미국이 이라크전에서 얼마나 실패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양국 신경전 치열 양국이 27년 만에 한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대기는 했지만 화해 기류를 조성하기까지는 풀어야 할 난제들이 많다. 회담을 앞두고 양국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란 정부는 27일 테헤란에서 미국의 이익대표부를 맡고 있는 스위스 대사를 외무부로 소환했다. 전날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국과 서방이 이란내에 조직한 간첩망을 적발했다고 밝힌 데 이은 후속 조치다. 이란은 또 지난해 말 미국 우드로 윌슨센터의 이란 태생 미국학자 할레 에스탄디아리를 체포, 기소한 것을 비롯해 4명의 미국인을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 1월 이라크 북부 아르빌의 이란 외무부 사무소를 공격, 이란 외교관 등 5명을 억류한 뒤 아직까지 석방하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걸프 해역에서 2개 항모전단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한편 회담이 진행 중이던 오후 2시쯤 바그다드의 상가지역에서 자살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나 최소 19명이 숨지고 46명이 다쳤다고 이라크 경찰이 밝혔다. 또 바그다드 수니파 사원 부근에서도 트럭을 이용한 폭탄테러가 일어나 최소 24명이 숨지고 68명이 부상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침몰→외교부 확인 19시간 걸려

    침몰→외교부 확인 19시간 걸려

    중국 다롄(大連)항에서 한국 당진항으로 향하던 국적 화물선이 중국 해역에서 중국 컨테이너선과 충돌, 침몰해 한국선원 7명을 비롯해 선원 16명 전원이 실종됐다. 13일 해양경찰청에 따르면 12일 오전 4시5분(한국시간)쯤 중국 옌타이(煙臺) 남동쪽 38마일 해상에서 제주선적 화물선 ‘골든로즈호’(3849t급)가 중국 국적의 4822t급 화물선 ‘진성’호와 충돌해 침몰했다. 사고를 당한 골든로즈호에는 선장 허용윤(58)씨를 비롯해 한국인 7명과 미얀마인 8명, 인도네시아인 1명 등 선원 16명이 타고 있었다. 해경은 중국 다롄항에서 철재코일 5900t을 싣고 충남 당진으로 향하던 골든로즈호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다롄으로 가던 진성호가 시계가 100m도 되지 않는 짙은 안개속을 운항하던 중 충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국적 진성호는 사고 후 곧바로 구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다롄항으로 ‘뺑소니성’ 입항을 했으며 사고가 난 지 7시간이 지난 뒤에야 중국 해사당국에 신고를 했다. 진성호는 사고 직후 현장에서 국제해사기구(IMO)의 협약에 따른 ‘조난선원에 대한 구조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중국 해사당국은 13일 다롄항에 억류 중인 진성호 선장과 선원 등을 상대로 구체적인 사고경위 및 늑장보고의 원인, 구조임무의 수행 여부 등을 조사 중이다. 진성호는 뱃머리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알려졌다. 12일 오후 1시58분쯤 사고소식을 통보받은 해경은 오후 5시30분쯤 중국 측에 공동수색작업을 제안했으나 중국 측은 “수색의 1차 책임은 중국에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했다고 해경은 밝혔다. 한편 해경은 오후 8시11분쯤 청와대와 외교부 등 29곳에 팩스로 사고사실을 통보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오후 8시21분 해경으로부터 1차로 팩스를 받았으나 당직실에서 (팩스가 온 것을)알게 된 것은 밤 11시30분”이라고 밝혔다. 뒤늦게 진성호의 신고를 받은 중국 측 구조본부는 사고 발생 10시간50분이 지난 오후 2시58분쯤에야 경비정 19척, 헬기 2대, 항공기 1대를 동원, 실종자 수색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인 실종자 명단 ▲선장 허용윤(부산시 동구 수정5동)▲1항사 한송복(44·부산시 연제구 거제동)▲2항사 최봉홍(51·경남 진해시 부흥동)▲기관장 전해동(58·부산시 북구 만덕3동)▲1기사 임규용(44·인천시 서구 가정동)▲2기사 하지욱(20·울산시 남구 야음1동)▲조리장 강계중(57·경남 진해시 청안동) 베이징 이지운특파원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가족들 “제때 신고만 했어도…” 분통

    가족들 “제때 신고만 했어도…” 분통

    12일 발생한 제주선적 화물선 골든로즈호 침몰사실이 우리 해양경찰청에 지연 통보된 데 이어 정부 안에서도 사고 발생 사실이 뒤늦게 공유됨에 따라 외교채널을 통한 사후 대응도 늦어진 것으로 13일 파악됐다. 중국 산둥 옌타이 해역에서 골든로즈호가 중국 컨테이너선 진성호와 충돌한 뒤 침몰한 시간은 12일 오전 4시5분(이하 한국시간)이지만, 우리 해경이 이 사실을 인지한 것은 10시간 가까이 지난 같은 날 오후 1시58분이었다. 이어 외교부가 이 사고를 확인한 시간은 이날 오후 11시30분으로 사고 발생 19시간 만이었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오후 8시20분 해경에서 1차 팩스를 받고,9시에 수정본을 받았지만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오후 11시30분”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사태 파악이 늦어져 13일 오전에야 조중표 외교부 제1차관이 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에게 전화하는 등 외교채널을 통한 대응이 가능했다는 것이다.13일 사고 선박 관리회사인 부산 동구 초량동 부광해운에는 회사관계자와 사고소식을 접한 선원 가족 20여명이 나와 애를 태우며 전해오는 구조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고 선박 선장 허용윤(58)씨의 부인 장한금(60)씨는 “지난주 군산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며 눈시울을 적셨다. 실종된 기관장 전해동(58·부산시 북구 만덕3동)씨의 형 해도(66)씨는 “15년간 배를 탔지만 배를 들이받고 상대 선박의 안전 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신고가 7시간이나 늦어지지 않았더라면 선원들을 구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국 해사국은 진성호를 다롄의 다야오환항에 억류하고 선장과 선원을 상대로 사고, 늑장보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부광해운 관계자도 “배에는 침몰시 자동으로 위급을 알려주는 시스템이 장착돼 있는데 작동을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출항전 기계에 이상이 없다는 검사서류를 갖고 있다.”며 의아해했다. 부광해운은 골든로즈호는 200만달러의 선체보험과 선원 보험에 각각 가입돼 있다고 밝혔다. ●보하이해역은 사고다발지역 골든로즈호가 침몰한 보하이(勃海) 해역은 선박 운항이 잦은 곳인 데다 안개와 파도 등 각종 악천후와 노후 선박의 운항으로 평소에도 사고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지적돼 왔다. 중국 보하이 연해지역은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후루다오(葫蘆島) 친황다오(秦皇島) 톈진(天津) 룽커우(龍口) 옌타이(煙臺) 웨이하이(威海) 등 크고 작은 항구 도시를 연결하는 각종 해로가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곳이어서 선박 충돌사고의 위험이 높은 곳이다. 베이징 이지운특파원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일본군, 印尼서 위안부 강제동원

    |도쿄 박홍기특파원|제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헌병이 직접 나서 점령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 위안소에 넘긴 사실을 담은 네덜란드 정부의 공문서가 발견됐다고 도쿄신문 및 교도통신이 11일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한 ‘협의의 강제성’을 부정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 자료인 만큼 아베 총리의 대응이 주목된다. 공문서들은 2차 대전 때 범죄 문제를 조사해 왔으며 독일에 체류중인 언론인 가지무라 다이치로가 입수한 미공개 문서 30점에 포함돼 있다. 문제의 내용은 지난 1944년 인도네시아 마젤란섬과 플로레스섬에서 일어난 집단 매춘 강요 사건 피해자의 선서 증인신문조서에 나와 있다. 네덜란드 정부의 보고서는 마젤란 사건에 대해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마젤란 사건과 관련, 이른바 ‘도쿄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1946년 5월 조서에서는 당시 27세 네덜란드 여성이 “헌병에 의해 옷이 벗겨져 위안소에 연행됐다.”는 증언이 들어 있다. 이 여성은 “저항했지만 꼼짝달싹 못하고 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여성 억류소에 수용돼 있던 목격자들의 1948년 3월 조서에는 억류소를 찾아온 일본인이 수용돼 있던 소녀들을 환자로 지정해 진료소에 수용하라고 지시했으며, 이 소녀들은 위안소로 연행돼 매춘을 강요당했다는 내용도 상세히 증언돼 있다.hk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이성량(李成梁)이 병탄을 시도하고, 광해군과 왕세자를 책봉하러 왔던 명사(明使)들의 은(銀) 징색이 이어졌던 것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대 누르하치의 건주(建州)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다.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누르하치는 초피(貂皮)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르하치가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누르하치 진영 또한 ‘조선과 명이 합세하여 협공할 것’이란 풍문에 긴장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재위(在位)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명과 건주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한, 조선 또한 양자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을 비롯해,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에서 우선 돋보이는 점은 상대방과 관련된 정보수집을 위해 노력했던 점이다. 1608년 8월, 조선 조야(朝野)는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긴장했다.1610년(광해군 2) 1월에는 허투알라 지역에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할 것’이며,‘이미 조선의 병마(兵馬)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정보 수집을 위해 노력하다 누르하치가 해서여진을 공략하여 전운(戰雲)이 감돌고, 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 일대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조선과 건주여진 또한 자칫 정확하지 못한 정보에 휘말려 위험한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변사 신료들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척후(斥候)를 제대로 하고, 간첩을 적절히 활용하여 누르하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영리한 인물을 누르하치 진영으로 보내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라도 사자(使者)의 왕래가 중단돼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1611년,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하세국(河世國)에게 6품직인 사과(司果)를 제수하기도 했다.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 등에 비해 상대방의 동향을 정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이묘(大名)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경험했기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찍부터 벌였던 왜구(倭寇) 활동과 왜관(倭館)에서 거주했던 경험 등을 통해 조선 사정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었다. 왜란 당시, 조선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조선의 지리까지 숙지했던 쓰시마(對馬島)의 일본인들이 침략군을 이끄는 향도(嚮導) 노릇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또한 인접 국가의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간첩을 활용하거나 반간계(反間計)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능력은 탁월했다. 명나라 지식인들조차 “건주여진인은 간첩활동에 가장 뛰어나서 그 내응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은 채 함락 당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문치(文治)에 치중한데다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전쟁을 몰랐던 조선의 정탐 능력이 취약했던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보 마인드’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건주여진을 조선에 비해 ‘열등한 존재’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가리켜 ‘노추(老酋)’ ‘견양(犬羊)’ 등 멸칭(蔑稱)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누르하치에 대한 정책은 유연했다. ‘무식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인륜과 이치를 내세워 사사건건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여 쓸 데 없는 화란을 부르지 말고, 적당히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기미책(羈策)을 활용하다 광해군의 정책은 기미책에 가까운 것이었다.‘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흉노(匈奴) 등 주변 민족을 대했던 방식으로, 핵심은 견제하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이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모험을 피하려 했다. 또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 회피하려 시도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처참한 상처를 입은데다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망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재위 중반까지만 해도 그같은 노력과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명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아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았던데다, 광해군 자신이 정치판을 그런대로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비변사(備邊司)에 포진했던 신료들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베테랑’들이 많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윤근수(尹根壽), 황신(黃愼)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왜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일선에서 수행했고, 명군이나 일본군 지휘부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은 그들을 자주 접견하여 변방 관련대책과 국제정세에 대해 식견과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자강책(自强策)을 마련하다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통해 누르하치를 다독이는 한편, 광해군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 마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다. 그 ‘강철 같은 기마대’를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에 들어가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개편해 각종 화포를 주조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무기 확보를 위한 광해군의 노력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일본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도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西北邊)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대외관계에 관한 한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병력 확보를 위한 근본대책으로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려 했고, 수시로 무과(武科)를 열었다. 1622년(광해군 14) 이후로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를 불러 올려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수시로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하지만 정작 강화도를 피난처로 활용한 것은 인조대의 일이었다. 1623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최후의 보루’가 자신의 유배지가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외국인은 달러 박스” 내정불안에 납치기승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 나이지리아에서 외국인 납치 사건이 봇물 터지듯 발생하고 있다. 국적, 인종, 남녀를 상관치 않고 마구 끌어가 인질로 삼은 뒤 거액을 요구하는 금품갈취형 납치극이 연일 꼬리를 물고 있다. 이달 들어 5일 만에 28명의 외국인이 납치됐다.8명은 풀려났지만 대우건설 임직원 3명을 포함해 20명은 억류 상태다. 현지 무장단체에 외국인들은 ‘걸어다니는 달러박스’로 여겨질 정도다.“나이지리아가 ‘외국인의 블랙홀’이 됐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필리핀 근로자 몸값 1000만弗 요구설 현지 외교소식통들은 “인질 대상자의 나라에 따라 요구 금액이 다르지만 1인당 수만∼수십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는 예가 흔하다.”고 말했다. 대우건설 임직원과 함께 납치된 필리핀 근로자 8명의 경우, 당초 요구액의 10배에 해당하는 1000만달러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P는 남부 산유지 중심 도시 포트하코트 경찰발표를 인용, 벨로루시 여인 1명이 전날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됐다고 6일 전했다. 외국인 납치사건, 특히 산유지 니제르 델타 지역에서 무장괴한들에 의한 납치 사건은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늘었다. 올 들어 납치된 외국인들만 95명. 한달 평균 16명씩 납치된 셈이다. 선거가 끝난 5월 들어 납치 규모가 더 늘었다. 4월에 실시된 대통령, 국회의원 및 주지사 선거가 끝난 시점과 맞물려 납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루세군 오바산조 대통령이 오는 29일 물러나고 당선자가 취임해 자리를 잡을 과도기 동안 납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관측했다. 지난해 말부터 납치활동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유도 대선을 앞둔 권력공백과 선거운동을 둘러싼 후보 진영들간 폭력충돌 등 어수선한 국내 분위기가 한몫했다. 나이지리아는 4월 일련의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 폭력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불안한 내정, 일상화된 폭력 납치 사건이 횡행하게 된 것도 폭력 사태가 일상화된 나이지리아의 불안한 내정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뒤 군부 쿠데타와 부정선거, 부패 확산의 악순환을 겪어왔다. 이번 대선에서도 야당은 “부정선거 결과에 승복 못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불안한 정정에 이어 큰 빈부 격차, 석유수입 분배를 둘러싼 골 깊은 갈등도 폭력 확산을 부추긴다. 석유산지인 니제르 델타 지역이 황금알을 낳는 부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지역주민 대부분은 하루 2∼4달러에도 못 미치는 극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석유 자원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독점하는 정치세력과 외국기업에 대한 반감이 높다. 반정부 무장단체인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 등은 산유지역인 델타지역의 분리, 석유수익금 지분 확대, 자치권 강화 등을 주장한다.●느슨한 통합, 불안한 통일 아프리카 최대인구대국 나이지리아는 북부 이슬람권과 남부 기독교권으로 나눠져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긴장 속에 MEND처럼 반정부활동의 자금조달을 위해 외국인 납치를 일삼는 조직들도 적잖다. 차기대통령에 당선된 여당인 인민민주당 우마르 야라두아 카치나주 주지사가 불안정한 내정을 얼마나 안정시킬지가 외국인의 불안해소의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건강 이상설 속에 야라두아 당선자가 오바산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미국의 이란정책 변화하나

    미국의 이란정책 변화하나

    이란의 핵 개발을 놓고 날 선 대치를 거듭해온 미국과 이란이 ‘대화 모드’로 전환할 조짐이다.3·4일(이하 현지시간) 이집트 휴양지 샤름 엘 세이크에서 열리는 이라크 재건국제회의(ICI)가 그 계기다. 국제사회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마누셰르 모타키 이란 외교장관의 회동 가능성, 나아가 실질 대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1979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점거 사건 이후 28년 동안 양국간 직접 대화는 없었다. 일각에선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최근 북한과의 직접 대화로 2·13 합의를 이끌어낸 것처럼 대(對) 이란 정책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와 회의를 공동 주재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드물게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양측, 명분 찾기 해왔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 “미국과 이란은 그 동안의 긴장 파고를 낮출 실질적 대화 모색을 위해 명분찾기를 하고 있었다.”면서, 이란이 ICI회의에 고위급 관료 파견 방침을 발표한 것은 외교 채널을 열어뒀음을 알리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이란에 대해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 문제는 물론, 이라크 민병대에 대한 무기 공급 등 배후지원 의혹을 강하게 제기해 왔다. 반면 이란은 지난달 이라크에서 스파이 혐의로 미국이 억류한 이란인 외교관의 석방, 그리고 걸프만에서의 미군 해상훈련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미, 이란 양측의 기회 샤름 엘 세이크 회의는 그동안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과 초당적 모임인 이라크 연구그룹(ISG)의 거듭된 대 이란 양자대화 요구를 묵살해온 부시 미국 행정부가 자연스레 정책수정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이란까지 극한 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하메드 알리 호세이니 이란 정부 대변인은 “회의 참석에 따른 막후 딜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ICI이벤트’가 사전 조율됐을 것이란 추측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난 주 이라크 외교 장관의 테헤란 방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와의 주말 통화, 그리고 그 직후 이란의 회의 참석 발표 등 일련의 외교채널간 흐름이 그 배경으로 읽히고 있다. 아마디네자드 정부 역시 지나친 강경 외교에 대한 국내의 비판 압력에 직면해 있다. ●부시,“조우해도, 의미는 핵…” 미국은 일단 직접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의미 확대는 차단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유럽연합(EU) 지도자들과 정상회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라이스 장관은 이란측에 이란의 우라늄 농축 활동에 반대하는 세계의 입장을 ‘정중하나 단호하게’ 전할 것”이라고 의미를 한정했다. 라이스 장관도 abc 인터뷰에서 “이번 회의는 이라크 이웃들과 관심있는 단체들이 이라크 안정화를 위해 논의하는 자리”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반 사무총장의 중재력, 또 시리아 등 이라크 주변국과 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G8(서방 선진 8개국), 유럽연합(EU)회원국이 참가하는 이번 회의의 역동성 등을 감안할 때 모종의 해법이 도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언론들은 2004년 말,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카말 카라치 이란 외무장관이 샤름 엘 세이크 회의에 나란히 앉았지만,‘외교적 잡담’만 나눈 채 헤어진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당시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北, 테러지원국 ‘18년 딱지’ 뗀다?

    北, 테러지원국 ‘18년 딱지’ 뗀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정부가 지난 30일(현지시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했으나 해제 가능성도 함께 시사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발표한 ‘2006년도 테러보고서’에서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초기조치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는 과정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명시했다. 미국이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의 해제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보고서는 북한과 함께 이란, 쿠바, 시리아, 수단 등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했다. 지난해 지정됐던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 포기 등으로 제외됐다. 북한은 18년 연속 지정됐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는 2002년 송환된 납북자 5명 등 북한 정부기관에 납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인 12명의 생사에 대해 설명할 것을 계속 요구해 왔다.”며 북한이 일본인 납치 때문에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음을 밝혔다. 또 “북한은 1970년 제트기(일본민항기) 납치에 관여했던 일본 ‘적군파’ 소속 요원 4명을 보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고서의 납치 및 적군파 보호와 관련한 표현은 예년에 비해 약화됐다. 보고서는 한국인 납북자를 포함,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 납북자에 대한 언급은 모두 삭제했다. 지난해 보고서는 “한국전쟁 이래 북한에 납치 또는 억류된 사람이 485명인 것으로 한국 정부는 추산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국 정부는 납북자 문제를 남북관계 차원에서 해결하겠다며 미 정부에 테러 관련 정책에서 이 문제를 고려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테러보고서는 이와 함께 “북한은 지난 1987년 대한항공 폭파사건 이후 어떤 테러활동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보고서에서 미국이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가능성을 시사함에 따라 올해 안에도 해제를 현실화할 수 있는 조치들이 뒤따를지 주목된다. 미국이 이번 보고서에 북한을 계속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변 핵 시설 동결 등 북한의 2·13 합의 이행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또 아베 신조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일본 정부가 납북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청한 것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외교 소식통은 “이번 보고서에 담긴 내용으로 볼 때 북한이 2·13 합의를 이행하고 납북자 문제 해결에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일 경우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무부 관계자도 이날 발표된 테러보고서가 “미 정부의 현재 대북정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려고 한다면 의회에 관련 사항을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보고서는 한국의 경우 외교통상부가 대(對)테러 협력국장을 임명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한 점 등을 부각시키며 “한국은 (테러에 대한) 단속 및 정보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 줬고, 여러 개발도상국 사법당국 관리들에게 테러에 연관된 훈련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통적으로 북한의 잠재적인 테러활동에 역점을 둬온 한국 정부는 한반도 이외 지역에서의 예상되는 테러활동으로 경계를 넓혔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또 작년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총 1만 4000건의 테러활동이 발생,2005년보다 25% 증가했으며 2만여명 이상이 사망, 사망자수도 40% 늘어났다고 밝혔다. dawn@seoul.co.kr
  • 美 “北 테러지원국 계속 잔류”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국무부는 30일(현지시간) 발표할 예정인 연례 세계 테러 보고서에서 북한을 예년과 같이 ‘테러지원국’으로 명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는 문제를 계속 북한측과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이 29일(현지시간) 밝혔다. 올해 테러 보고서에서 ‘한국 전쟁 이래 납치 또는 억류된 사람이 약 485명에 달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는 추산한다.’는 내용은 제외될 예정이다. 한국 정부가 한국인 납북자 문제는 남북간에 해결할 사안이므로, 미 정부의 테러 관련 정책에서는 고려하지 말 것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한편 국무부 테러보고서는 전 세계 테러 공격이 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내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 증가로 인해 지난해 29% 증가했다고 밝힐 것으로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미 국무부는 매년 4월 말까지 연례 테러보고서를 작성해 의회에 보고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보고서는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1970년 항공기 납치와 관련된 적군파 요원들을 계속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테러지원국 지정 이유로 밝힐 것이라고 소식통들은 전했다.dawn@seoul.co.kr
  • [사회플러스] 라오스 탈북청소년 3명 입국

    탈북한 뒤 라오스에서 억류됐던 청소년 3명이 26일 오전 무사히 한국에 입국했다고 외교 소식통이 밝혔다. 이 소식통은 “3명 모두 건강상태가 양호하며 현재 안전한 곳에서 보호 중”이라고 덧붙였다.
  • 라오스 “탈북청소년 의사존중”

    정부 당국자는 15일 라오스 당국에 억류된 탈북 청소년 3명의 처리 문제와 관련,“라오스 정부는 본인들의 의사를 존중해 인권적 차원에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 당국자는 이날 비공식 브리핑에서 최근 주 라오스 한국대사관측이 라오스 외교부 등에 확인한 결과라며 이같이 전한 뒤 “탈북 청소년들의 건강은 양호한 상태”라고 말했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위안부 강제동원 도쿄재판 자료 발견

    |도쿄 박홍기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점령지 곳곳에서 부녀자를 강제로 끌고가 위안부로 삼았던 사실을 입증하는 도쿄재판의 검찰 심문조사 등의 자료가 또 발견됐다. 도쿄재판은 지난 1946년 2차 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일컫는다. 1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발견된 자료는 도쿄재판 당시 중국·네덜란드·프랑스 등 각국의 검찰관이 일본군의 주민 및 포로 학살, 위안부 강제연행 등 만행을 증명하기 위해 낸 조서와 진술서 등으로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채택됐던 것이다. 일본 간토학원대 하야시 히로후미(현대사) 교수가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네덜란드 검찰관이 보루네오섬의 해군정보기관에 근무했던 일본군 군속을 상대로 조사해 제출한 46년 3월13일자 심문조서에는 일본인과 친하게 지내던 한 현지 여성이 일본군에 구속돼 경비대장에게 폭행을 당하고 알몸으로 서 있게 된 상황을 추궁하는 장면을 적고 있다. 현지 여성의 구속 이유에 대한 질문에 군속은 “억류 이유는 위안소에 집어넣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경비대장의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또 46년 5월16일자 심문조서에는 자바섬의 민간억류자 수용소에 있던 한 네덜란드 여성이 강제로 위안소로 연행된 사실을 증언했다. 이 여성은 “44년 1월28일 인도네시아인 경찰에 의해 다른 6명의 부녀자와 함께 일본군 포로수용소 사무소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인계된 뒤 자동차로 작은 수용소로 이동, 같은해 2월3일 의사의 건강검진을 받고서야 비로소 위안소에서 일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평일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일요일 오후에는 일본군 하사관들을, 일요일 오전에는 일반 병사들을 상대했다. 가끔 일본 민간인들도 드나 들었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밝혔다. 프랑스가 제출한 베트남 여성의 진술서에는 “일본인이 프랑스 병사와 함께 생활하던 나와 몇명을 위안소로 강제적으로 보냈다.”고 기술했다. 중국의 군사위원회행정원이 46년 5월27일 작성한 자료에는 일본군이 구이린(桂林)에서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급,‘각지에서 여공을 모집한다며 위안소로 보내 짐승과 같이 살며 일본군의 쾌락을 위한 도구가 됐다.’고 나와 있다. hkpark@seoul.co.kr
  • [Seoul In] 광견병 예방접종 실시

    도봉구(구청장 최선길) 다음달 1∼10일 동물병원에서 예방접종을 실시하지 않은 생후 3개월 이상의 모든 개, 고양이에 대해 광견병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최근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잇따라 광견병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접종 약품은 기존의 생독백신이 아닌 사독백신으로 안전성과 효과가 뛰어나고, 지속성이 3년에 이른다.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개와 고양이는 가축전염예방법에 따라 강제 억류되고 도살후 매립된다. 산업환경과 2289-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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