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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대선 후보경선] 美 유권자 ‘老대통령 No’

    “나이든 대통령보다는 여성이 낫고, 여성보다는 흑인 대통령이 좋다.”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일찌감치 낙점돼 느긋해하던 존 매케인 후보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국 유권자들이 흑인이나 여성 대통령보다도 ‘늙은’ 대통령에 대해 더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27일(현지시간) NBC방송과 월스트리트저널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흑인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는 응답자는 72%, 여성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는 응답은 71%로 양자 간에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70세 이상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는 의견은 61%에 불과했다. 더욱이 나이든 대통령에게는 투표하지 않겠다며 비호감을 나타낸 응답자는 29%에 달했다. 매케인 후보가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 72세.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으로 초선 대통령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매케인은 베트남전 전쟁포로로 5년간 억류돼 있으면서 고초를 겪은 데다가 지난 15년간 피부암이 4차례나 발병했던 병력도 갖고 있어 건강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의사들은 70대들이 암이나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매케인이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유권자들의 우려섞인 시선을 거두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에 따라 매케인은 지난 1997년 대선에 출마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세부내용을 다음달 공개해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지를 호소할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한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일부 당 지도부의 사퇴 요구에 강력히 반발하며 완주 의사를 분명히 했다. 힐러리는 29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가진 유세에서 버락 오바마 지지자인 패트릭 레이(민주당·버몬트주) 상원의원의 사퇴 요구에 대해 “내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이길 것 같으니까 나의 사퇴를 원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버락 오바마 의원도 이날 “힐러리가 원할 때까지 경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차베스, 콜롬비아 국경에 병력배치

    차베스, 콜롬비아 국경에 병력배치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토벌을 둘러싸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3국간 국경 긴장이 고조되면서 남아메리카가 술렁이고 있다. 3일(이하 현지시간) AP,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2일 콜롬비아 국경지대에 탱크와 병력 6000여명을 긴급 배치하는 한편 공군에 출동태세를 명령했다. 콜롬비아 주재 대사관 폐쇄 및 외교관 전원 철수 조치도 내렸다. ●대사관 폐쇄·외교관 전원 철수 콜롬비아 군대가 전날 에콰도르 영토에 진입,FARC의 2인자 라울 레예스(59) 대변인과 혁명군 16명을 사살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다. 군사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에콰도르에 콜롬비아 군대가 진입한 것을 베네수엘라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한 것이다.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도 이날 군대를 콜롬비아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콜롬비아 대사를 추방했다. 차베스는 “에콰도르의 주권이 명백히 침략당했다.”며 “우리는 전쟁을 원하진 않지만 콜롬비아를 조종하는 미 제국주의가 우리를 양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사태가 남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면서 “콜롬비아 정부가 남미의 이스라엘 같은 존재가 됐지만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FARC는 40년 이상 콜롬비아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월경을 주요 도피전술로 구사해 왔다. 여기에 차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 최대 반군인 FARC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클라라 로하스 전 콜롬비아 부통령 후보 등 반군이 억류중인 인질 석방협상의 중재에 나서는 등 콜롬비아 정부의 심기를 계속 건드려 왔다. ●美 영향력 때문에 침공 가능성은 낮아 그러나 BBC는 차베스가 실제로 콜롬비아를 침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콜롬비아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한 상태라 그의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게릴라전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수십억달러를 지원받고 있는 콜롬비아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에 원유 수출의 절반 이상을 의존하는 베네수엘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수도 키토의 260㎞ 남서쪽에 미군 공군기지가 들어선 에콰도르 역시 콜롬비아 진격은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한편 이번 사태로 지난해부터 창설이 본격화된 남미국가연합(UNASUL)이 벽에 부딪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남미 12개국을 묶는 정치적 결사체가 목표인 남미국가연합은 이달 말 창설 협의를 위한 회의를 앞두고 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데스크시각] 러드총리의 호주 ‘새판짜기’ /최종찬 국제부 차장

    [데스크시각] 러드총리의 호주 ‘새판짜기’ /최종찬 국제부 차장

    지난 13일 호주 캔버라 연방의회에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캐빈 러드 총리가 과거 애버리진(원주민) 탄압정책에 대해 1세기만에 처음으로 사과했기 때문이었다. 러드 총리는 특히 동화정책이란 미명하에 어린시절 부모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져 교회나 사회복지시설에서 길러졌던 ‘도둑맞은 세대’와 그 후손들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호주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이 자리에 초청된 원주민 대표들은 오랜 숙원이 이뤄진 것에 대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과거사에 대한 보상 문제가 걸림돌로 남아있긴 해도 일단 정부의 사과로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를 위한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깨끗한 마스크와 참신함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러드 총리의 호주 새판짜기의 한 단면이다. 그는 지난해 12월24일 치러진 연방총선에서 야당인 노동당을 이끌고 집권 자유당 총재이며 호주 사상 두번째 장수총리인 존 하워드의 5연속 집권을 저지하며 12년만에 정권교체를 달성했었다. 러드 총리는 퀸즐랜드 출신으로 11세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차 속에서 가족이 잠을 자야 할 정도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렵게 호주국립대 중국어과를 졸업한 그는 외교부 공무원과 퀸즐랜드 지방정부 관리를 거쳐 1988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베이징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그는 지난해 시드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하다. 러드 총리가 집권한 지 26일로 85일에 불과하지만 여러 면에서 하워드 전 총리와는 뚜렷이 다른 색깔을 보이고 있다. 먼저 러드 총리는 원주민들을 포함한 약자들에 대한 배려정책을 펴고 있다. 해상 난민 수용정책도 그 일환이다. 난민들을 호주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추방하는 이른바 ‘태평양 해결책’을 없앴다. 이 정책은 하워드가 보수층의 표를 결집하기 위해 사용한 강경책으로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왔었다. 그는 첫 단계로 1년이상 나우루섬에 억류돼온 미얀마인 7명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좌파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추세를 좇아 ‘작은 정부’를 추구하고 있다. 정부 지출과 총리실 및 장관실 공무원 30%를 줄이며 허리띠를 바짝 조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외교정책에서도 큰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친미 일변도의 외교노선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중시하는 등거리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는 ‘부시의 푸들’로 비난받아왔던 하워드와는 달리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기피해 왔던 온실가스감축협약인 교토의정서를 비준했고 이라크 주둔 호주군을 연내 철군시키기로 약속했다. 반면 중국과는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등 밀월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만간 중국을 방문해 장기적인 자원과 에너지 협력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동티모르와 피지 등 주변 정세의 안정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난 11일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 대통령이 반군의 기습으로 중상을 입어 정정이 갑자기 불안해진 동티모르에 호주군을 증파해 정국 안정을 돕고 있다. 러드 총리는 이밖에도 영국 여왕을 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제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임기 중에 군주제 폐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근 여론도 군주제 폐지를 찬성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워드가 만든 노동악법이 폐지되고 이민 문호가 넓어지며 자영업자에게 세금혜택을 늘려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호주 교민들의 말 속에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러드 총리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최종찬 국제부 차장 siinjc@seoul.co.kr
  • 피랍 한국인 구출 전담부대 추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과 유사한 사태가 발생하면 한국인을 구출할 군사작전 전담 부대를 국방부가 운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인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 9월 김장수 장관의 특별 지시로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재외국민 피랍사태 때 군사적 대응을 위한 연구과제를 수행 중이다. KIDA는 우선적으로 다수의 한국인이 해외 테러집단에 억류됐을 때 국회의 사전동의 없이 적절한 규모의 군사작전 부대를 파병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헌법 제60조 2항은 국군을 해외에 파병할 경우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국방부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 때 외교적 채널에만 의존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데 비판적인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면서 연구의 배경을 설명하고 “연구결과가 나오면 유관부처와 협의를 거쳐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은 아프간 피랍사태 당시 억류됐던 한국인 인질 구출을 위한 군사적 차원의 구상에 대비, 대테러 전문부대 정예요원 여러명을 카불에 파견한 바 있다.KIDA는 재외국민 피랍 시 범정부 및 국방부 합참 차원의 대응조직 보강 방안 등도 연구 중이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아프리카 항해 조심

    해적 출몰의 다발 지역이 말레이시아 말라카 해협에서 아프리카 연안으로 바뀌고 있다. 12일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2007년 세계 해적 및 해상 무장 강도(이하 해적) 발생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해적 발생 사례는 모두 263건으로 전년 대비 10%가량 늘었다. 그동안 해적의 최다 출몰 지역이었던 말라카 해협 등의 동남아시아 해역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반면 아프리카 지역은 증가했다.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 나이지리아 ‘라고스’, 방글라데시 ‘치타공’,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항’ 주변은 연간 10차례 이상의 해적 사례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라고스, 보니강, 하코트항 등에서 모두 42건의 해적 사례가 발생했다. 군복을 착용한 해적이 선박 수색을 사칭해 총격을 가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소말리아의 경우 선박 11척이 피랍됐고,150여명의 선원이 인질로 억류됐다. 두 나라에서 4명의 선원이 사망하는 등 430여명의 선원이 피해를 입었다. 해양부는 우리나라 선원과 선박의 해적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최근 해적 발생 동향과 해적 의심 선박을 발견했을 때의 조치 요령, 해적사고 관련 각국의 비상 연락망 등을 담은 책자를 다음달에 배포한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탈레반 前사령관 만수르 체포

    지난해 7월19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23명의 납치사건 주모자인 만수르 다둘라 탈레반 전 최고사령관이 파키스탄에서 마침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한국인 인질 2명의 목숨을 빼앗고 남은 21명을 44일 동안 억류했던 희대의 인질극 전모가 밝혀질지 주목된다. 파키스탄 보안 당국은 11일 만수르 다둘라가 최근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주 퀘타시의 그왈 이스마일카이 마을에서 보안군과의 총격전 끝에 다른 반군 5명과 함께 붙잡혔다고 밝혔다고 AP,AFP,BBC 등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만수르는 체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AP는 한때 만수르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며 이후 부상이 심각해 위독하다고 전했다. 발루치스탄주의 경찰서장 사우드 고하르는 이날 AFP에 “만수르가 마을의 한 가옥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이 가옥을 급습한 결과 만수르와 함께 다른 5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 미군의 공습 당시 숨진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의 동생인 만수르는 아프간 정부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레반에 의해 납치됐던 이탈리아 기자와 맞교환돼 지난해 5월 풀려났다. 그후 형에 이어 총사령관직에 오른 그는 아프간 정부와 나토군의 공격이 가장 극심한 헬만드주와 칸다하르주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탈레반의 강경 투쟁을 주도해왔다. 특히 만수르는 아프간 정부의 감옥에 수감돼 있는 탈레반 조직원들과 맞교환을 하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외국인들은 무차별적으로 납치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한국인 납치극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는 당시 아프간과 한국정부는 물론 적신월사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고 탈레반의 건재를 온 세상에 과시함으로써 탈레반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탈레반은 지난해 12월 만수르를 내쫓았다. 탈레반 최고지도자인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탈레반의 내규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며 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만수르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불복 의사를 밝혀 탈레반 지도부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한국계 加목사 2개월째 北억류

    북한에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벌이던 50대 한국계 캐나다인이 2개월 넘게 북한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 구호 활동가들은 그가 국가안보와 관련된 혐의로 체포됐다고 전했으나 구체적인 경위는 분명치 않다. 캐나다 일간 토론토 스타는 23일(현지시간) 캘거리 주 에드먼턴 지역의 목사이자 치과 기공사인 김제열씨가 북한 북동부 오지에서 치과 치료 봉사활동을 하다 지난해 11월3일 북한 당국에 구금됐다고 전했다. 김씨의 가족들은 그동안 김씨의 신변 안전을 위해 비공개 석방 노력을 벌여왔으나 사태가 길어지자 캐나다 정부에 중재를 요청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계속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다시 기미책(羈策:오랑캐를 다독이는 정책)으로 돌아갔다.1631년(인조 9) 7월, 조선의 ‘태도’와 ‘능력’을 확인한 후금은 서쪽으로 명 원정길에 올랐다. ●때 아닌 斥和·主和 논쟁 1631년 6월13일, 배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고에 불만을 품고 호차 중남 등이 뛰쳐나간 직후 입직 포수(砲手) 이덕탁(李德卓)이 승정원에 나타났다. 그는 ‘오랑캐 사신들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해 왔으니 그냥 돌려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빨리 그들을 억류하고 싸울 준비를 하라고 강조했다. 18일에는 후금군의 침략 소식에 놀라 이원익이 조정으로 달려왔다. 이원익은 당시 이미 은퇴한 데다 여든다섯의 고령이었다. 그는 인조에게, 하삼도의 군병을 동원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지 말고 어영군(御營軍)을 비롯한 서울에 있는 정병을 평안도로 내려보내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선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금군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이덕탁의 건의를 계기로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지평 심연(沈演)은 식량을 주지도, 회답사(回答使)를 보내지도 말고 후금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라고 촉구했다. 사헌부의 다른 신료들도 심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이후 오랑캐와 서로 왕래한 것은 화호(和好)를 굳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들이 이유 없이 쳐들어와 맹약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더 이상 미봉책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홍문관 신료들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들은 ‘오랑캐가 부모의 나라를 짓밟고 가도를 공격하려 한다면 갓을 쓰고서라도 달려가 구원해야 한다.’며 강약과 승패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부 신료들은 ‘조정이 아예 안주 이북의 방어를 포기했다.’고 통탄하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삼사(三司) 신료들은 이참에 후금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척화(斥和)의 길로 나아가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의 입장은 달랐다. 비변사는 ‘후금과의 화의(和議)를 언제까지나 믿을 수는 없지만, 싸우려 해도 병마가 모이지 않고 군량도 제대로 댈 수 없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후금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박로와 오신남(吳信男)을 회답사로 임명하여 심양으로 보냈다. 화친을 계속 유지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삼사 관원들은 굴욕적인 사신 파견을 당장 중지하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 훗날 대비 강화도 정비 ‘올인´ 조선이 기존의 화친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당시 후금군은 조선군이 쉽게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1629년과 1630년 이른바 기사전역(己巳戰役) 당시 만리장성의 외곽을 넘어 북경을 비롯한 명의 심장부를 유린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력이 많은 것은 물론, 실전 경험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6월28일, 후금군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철수 소식을 들은 인조는 신료들에게 강화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 인조는 후금군이 쳐들어 왔던 직후 강화도로 피란할 계획을 세웠었다. 또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삼남에 독운어사(督運御史)를 파견했다. 혹시라도 강화도의 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양곡 운반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후금군이 물러가자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재정비하려는 깜냥이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10만 군사가 먹을 수 있는 양곡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읍성(邑城)과 갑곶성(甲串城)을 개축하고, 화기와 각종 장비들을 미리 옮겨 놓으라고 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방물(方物)을 목면으로 바꿔 강화로 수송한 뒤, 나중에 군량 마련을 위한 자금으로 쓰려는 계획도 세웠다. 또 강화도 연안의 병력 주둔지에 큰 창고들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측근들을 강화도로 보내 방어 상태와 시설 등을 수시로 점검했다. 인조가 강화도 정비에 ‘올인’ 하는 자세를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선 조정에서 방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청북(淸北)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다.1631년 7월, 영유현령(永柔縣令) 정기수(鄭麒壽)가 상소했다. 그는 ‘청북은 포기할 수 없는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조정에서는 청북을 지키려 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지역에서 빼내려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청북 사람들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모두 싸우다가 죽으려는 결의가 넘친다.’며 조정의 지원을 촉구했다. 우의정 이정구는 다른 측면에서 인조의 ‘강화도 정비론’에 반대했다. 그는 서울이 팔도의 근원이며, 근원이 흔들리면 민심이 무너져 변경이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하고, 먼저 서울 서쪽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고 촉구했다. 이정구는 또한 강화도는 들어가려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요새로 정비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고, 섣불리 강화도 정비에만 몰두하면 원망이 일어나 민심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강화도 주변의 연도(沿島) 방어에도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정구 등의 경고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뿐 아니라 당시 많은 관인들이 ‘후금군은 수전(水戰)에 약하기 때문에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후금 수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집착할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후금군, 대릉하성 공략 나서 조선 조정이 위기의식 속에서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錦州)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단순히 ‘인간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당시 후금의 정탐(偵探) 능력은 탁월했다. 이미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 관인들은 누르하치의 간첩 활동과 정보 수집 능력에 경계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명 관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건주여진인은 간첩 활동에 가장 뛰어나다. 내응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아서 무너지고 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홍타이지는 ‘인간 사냥’을 통해 명의 총병(總兵) 조대수(祖大壽) 등이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산해관 바깥에 대릉하성을 비롯한 여덟 개의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후금군이 공격해 오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고 밤낮으로 독려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결심하고, 후금에 귀순한 몽골의 여러 패륵(貝勒)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명령했다. 마침내 8월5일, 홍타이지의 대군은 대릉하 부근까지 전진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내세워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콜롬비아 비극’ 로하스 풀려나다

    콜롬비아 부통령 후보였던 클라라 로하스(44)가 좌익 반군인 콜롬비아혁명무장군(FARC)에 억류된 지 6년 만에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됐다. 로하스는 억류생활 도중 좌익 반군의 아이까지 낳아 세계인의 연민을 받아 왔다. 비운의 정치인 로하스의 굴곡많은 삶은 40년 동안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콜롬비아 현대사의 비극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로하스가 10일(현지시간) 콘수엘로 곤살레스(57) 전 의원과 함께 콜롬비아 동부 정글에서 베네수엘라 특수요원에게 신병이 넘겨지면서 기나긴 억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BBC,CNN 등 외신이 보도했다. 헬기와 제트기편으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로 이동해 어머니 곤살레스 로하스와 감격의 재회를 한 로하스는 위성 전화로 석방을 중재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로하스는 “다시 태어났다.”며 자유의 몸이 된 소감을 밝혔다. 변호사 집안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대학 교수로 평탄한 삶을 살던 로하스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잉그리드 베탕쿠르와의 우정 때문이었다. 이들은 1991년 콜롬비아 외무부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정치판에 먼저 뛰어든 베탕쿠르가 ‘푸른 산소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면서 로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하스는 그녀의 보좌관이 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들은 2002년 2월23일 FARC 활동지역인 산 빈센테 델 가구안으로 유세를 가다 납치됐다. 로하스는 피랍 며칠후 석방 제의를 받았으나 베탕쿠르와 함께 풀어 달라며 거절했다. 그녀는 피랍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로하스는 그동안 두 차례 자신이 무사함을 알려 왔다.2002년 베탕쿠르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와 2003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다. 이런 로하스가 세계인의 동정을 받게 된 것은 인질 생활 도중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난해 5월 억류된 지 8년 만에 탈출한 경찰관 혼 프랑크 핀차오가 로하스가 반군 간부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이름은 엠마누엘이고 3살이며 게릴라들이 보호하고 있다고 증언하면서 확인됐다. 엠마누엘은 ‘정글 소년’이란 별명으로 자신의 생모인 로하스와 함께 내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전세계 언론기관과 비정부 단체들은 FARC에 정글 소년 등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가 인질교환 협상을 다시 시작했고 차베스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다. 인질석방협상이 무르익어 FARC는 지난 31일 로하스, 정글소년 등의 석방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결국 무산됐지만 정글 소년의 소재는 확인됐다.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와 헤어진 소년은 이름을 바꾼 상태로 2005년부터 보고타의 어린이 보호시설에 수용돼 있었다. 현대사의 비극의 산물인 이들 모자의 상봉은 며칠 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정글 소년이 어떤 표정으로 어머니를 맞을지 세계인의 이목이 벌써부터 집중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용어 클릭 ●FARC 콜롬비아 좌익반군 가운데 1만 6000명의 병력을 보유해 규모가 가장 크다.1964년 창설하면서 무장투쟁을 통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1990년대부터 우익민병대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전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약거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때무터 납치와 공갈이 주요 활동이 됐다. 현재 정글에 베탕쿠르 후보 등 700여명의 인질을 억류하고 있다.
  • 이란, 부시 중동순방 ‘딴죽’ ?

    ‘부시의 중동순방에 대한 이란의 시비걸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앞두고 이란 혁명수비대가 해상에서 미 해군 선박을 위협한 사건이 벌어져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케빈 코스그리프 미 제5함대 사령관은 7일(이하 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이란 혁명수비대 쾌속정 5척이 지난 6일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미 해군 선박 3척에 접근해 “수분 내 폭파하겠다.”는 협박성 발언과 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도발적 행위를 했다고 말했다. 미 해군이 발포 태세를 취하자 혁명수비대가 서둘러 후퇴해 무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스그리프 사령관은 미 해군선박이 이란 영해에서 5㎞ 거리에 있었다면서 영해 침범으로 인한 충돌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해 3월 영국 해군 15명이 영해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나포해 2주간 억류한 적이 있다. 미국은 즉각 반발했다. 고든 존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이란의 도발적 행동은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모하메드 알리 호세이니 이란 외부무 대변인은 “이번 일은 양측이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면서 문제가 해결됐던 과거 사례와 유사하다.”면서 오해에 따른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부시 대통령의 중동순방 직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란의 의도적인 시비걸기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8일부터 9일간의 일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바레인 등 7개국을 돌며 중동평화협상을 촉구할 계획이다.부시 대통령은 미 정부가 수년간 이란 핵위험을 과장했다는 국가정보국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이란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그는 아랍방송 ‘알 아라비야’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은 위험국가다. 우리는 이란을 다룰 전략을 갖고 있으며, 중동 국가들이 우리와 협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독선적 발언’에 심기가 상한 이란이 기싸움을 벌였다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콜롬비아 인질석방 다큐에 담는다”

    “콜롬비아 인질석방 다큐에 담는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의 인질석방 과정을 지켜볼 국제감시단에 참여한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인질석방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다룰 예정이다. 영화 ‘플래툰´ ‘7월4일생´ 등을 만든 스톤 감독은 인질석방 현장에 대한 독점 촬영권을 확보했다. 스톤 감독은 30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비야비센치오에서 AP통신 등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FARC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싸우는 농민군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요청으로 감시단에 합류한 스톤 감독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 9명으로 구성된 국제감시단과 함께 콜롬비아 인질 3명의 석방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스톤 감독은 또 “이번 인질석방 과정은 현재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것”이라며 “거기에서는 남미 현황과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등 다른 인물들도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악명 높은 마약 밀매업자로 1993년 사살된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한편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아온 콜롬비아 좌익게릴라 인질 석방은 현재까지 별 진전이 없다.AP 등에 따르면 인질을 억류중인 FARC는 30일까지 최종 일정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인질들이 언제 석방될지 불투명하다. 사회주의를 꿈꾸며 1966년 결성한 FARC는 미국 마약감시단원 3명 등 수백명을 인질로 붙잡고 있으며,2002년 콜롬비아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클라라 로하스와 아들, 콘수엘로 곤살레스 전 하원의원 등 3명을 이번에 풀어주겠다고 밝혔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김선일씨 피살 국가 과실 없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랍된 고 김선일씨의 피살에 대해 국가 과실은 없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 중앙지법 민사합의 42부(부장 박기주)는 3일 김씨의 아버지 등 유족 4명이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다 하지 못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했다. 재판부는 “증거상 테러 첩보를 전달받은 가나무역 직원들이 이전에도 팔루자 지역에 여러 차례 다녀온 적이 있고, 한 직원이 무장단체에 억류됐다 풀려난 적도 있어서 테러 첩보를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며 국가가 김씨에게 테러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는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재판부는 또 김씨의 피랍을 국가가 빨리 인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대사관 직원들이 당시 치안이 극도로 나빠 교민을 직접 방문하기보다 전화나 이메일로 현황을 파악했고, 가나무역 같은 회사의 경우 대표자와 통화해 직원의 안전 여부를 확인했던 점 등을 종합하면 국가의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세상을 뒤흔든 거짓말쟁이들

    “지난 1980년 1월 이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 억류사건때 지미 카터 대통령은 군사행동을 검토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순간 미군은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25일(현지시간) 세상을 뒤흔든 희대의 거짓말들을 소개하면서 정당화된 거짓말로 거론한 사례다.WP는 이날 ‘거짓말에 대한 진실’‘큰 거짓말, 큰 결과’ 등의 기사에서 “잘 아는 두 사람이 10분간 얘기하면 대개 거짓말 2∼3개는 한다.”고 밝혔다.. WP는 그러나 큰 거짓말은 대부분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된다면서 5개의 잘못된 큰 거짓말을 제시했다. 인류역사를 바꾼 최고의 거짓말은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리가 1938년 네빌 챔벌레인 영국 총리에게 했던 말. 당시 히틀러는 챔벌레인에게 체코슬로바키아가 국경선 협상에 나선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챔벌레인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의회에 보고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약속을 저버리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두 번째 잘못된 큰 거짓말엔 워터게이트호텔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대한 도청 사실에 대해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아무 것도 몰랐다고 우긴 것이 뽑혔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사원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세 번째 잘못된 큰 거짓말로 꼽혔다.WP 기자 재닛 쿡과 뉴욕타임스 기자 제이슨 블레어,USA투데이 기자 잭 켈리 등이 기사를 쓰기 위해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네번째 잘못된 큰 거짓말에 선정됐다. 다섯번째 잘못된 큰 거짓말로는 미 에너지 회사인 엔론이 대규모 회계부정을 통해 부채는 감추고 이익은 과도하게 부풀리다 2001년 파산한 것을 들었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후세인 “클린턴·레이건 좋아했다”

    ‘저항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인 사담 후세인(1937∼2006) 이라크 전 대통령도 스톡홀름 증후군 앞에는 무릎을 꿇었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14일 언론인인 로널드 케슬러가 집필한 ‘테러리스트 감시:다음 공격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의 내막’을 인용해 후세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소개했다. 후세인이 미군에게 붙잡힌 이듬해인 2004년 초부터 8개월 동안 매일 7시간씩 후세인을 신문했던 미 연방수사국(FBI) 수사요원 조지 피로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피로는 “후세인이 따뜻이 대해 준 수사요원에게 쿠르드족 학살과 핵무기 개발 의지를 털어놨으며, 정들었던 수사요원의 귀국 소식에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로는 책에서 “바그다드 국제공항 내에 있는 수감시설에서 후세인에게 그가 가장 즐겼던 쿠바산 시가를 함께 피우다가 이별을 고하자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인질들이 대화가 늘면서 억류한 사람들에게 동료의식을 보이는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 현상을 보인 것이다. 후세인은 “어느 누구도 나를 흉내낼 수 없어서 집권기간 행사 때 (보안에 필요한) 대역을 쓴 적 없다.”고 말했다. 또 빌 클린턴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좋아했지만 아버지 부시와 조지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는 증오를 드러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소말리아서 피랍 日선박 한국선원 1명 탈출

    지난달 28일 소말리아 부근 바다에서 해적에 납치된 일본 선박 ‘골든노리호’에 탔던 한국인 선원 2명 중 1명이 피랍 직후 배에서 탈출, 최근 귀국했다고 외교통상부가 7일 밝혔다. 탈출한 선원은 선장감독관 한모(53)씨로, 한씨는 피랍 당일 야간에 바다로 탈출, 근처를 지나던 선박에 의해 구조된 뒤 소말리아의 한 어촌으로 옮겨졌다. 한씨의 연락을 받은 외교부는 전세 비행기를 보내 지난 3일 신병을 확보,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한 뒤 5일 국내로 데려왔다고 당국자는 전했다.한국인 2명과 필리핀인 9명, 미얀마인 12명 등 23명을 태운 일본인 소유 골든노리호는 지난달 28일 소말리아 부근 공해에서 해적에 납치된 뒤 미군 함정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국인 선원 전모(48)씨는 여전히 억류된 상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한국선원 인간방패 삼았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마부노호 선원들이 귀국하기에는 열흘쯤 걸릴 것으로 보인다. 5일 전국해상산업노조연맹에 따르면 마부노호 선주 안현수(50)씨는 전국해상산업노조연맹으로 전화를 걸어 “억류 지역인 소말리아 하라레데에서 예멘까지 1600㎞나 되는 데다, 연료 부족으로 1척이 다른 1척을 끌고 운항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선장 한석호(40)씨가 배를 몰고 예멘 아덴항으로 이동 중이며, 미군 5함대 군함이 호위하고 있다. 선장 한씨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주 안씨와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마부노 1·2호는 11일, 또는 12일 예멘에 도착할 것 같다. 174일 만의 납치사건 해결에는 부산시민들의 모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외국에서 인질이 국민 모금으로 풀려 나기는 처음이다. 한 선장의 부인 김정심(48)씨는 “남편을 포함한 선원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돼 시민, 국민들과 정부에 거듭 감사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선주 안씨는 두바이에서 “소말리아 해적이 사실상 석방 합의가 된 3일 낮 12시45분쯤(두바이 현지시간)부터 공식 석방이 이뤄진 4일 오후 4시35분까지 만 하루 동안 선원들이 겪은 고통은 피를 말렸다.”고 긴박했던 순간을 전했다. 그는 지난달 28일 협상을 위해 두바이로 간 뒤 언론접촉을 피하며 협상을 마무리했다. 안씨는 “3일 오후 1시쯤 석방합의가 됐는데 미국 군함의 공격을 받자 해적들이 한국인 선원들을 땡볕에 방패막이로 세워 움직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지난달 28일) 납치된 일본 선박 때문에 주위를 포위했던 미군은 마부노호로 연료를 싣고 오던 해적을 공격하다 마부노호에 10여발 맞았고 한 선장도 머리에 파편을 맞아 경상을 입었다고 안씨는 말했다. 해적들은 납치 초기 선주가 한국인으로 나타나자 몸값을 올리려고 한국인 선원만 골라 매일 새벽 일어나기가 무섭게 구타를 했다고 전한 안씨는 “해적은 내가 자신들의 요구만큼 몸값을 준비하지 못할 형편인 것을 알자 가족과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구타했고 언론에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전화를 걸도록 했다.”고 말했다. 매일 구타에 시달리다 못한 선원들은 “배에 불을 지르겠다.”며 “차라리 죽여 달라.”는 ‘인간한계’의 상황까지 도달했다고 했다. 해적 측은 처음 3개월간 24명 전원 석방을 조건으로 500만달러(약 45억원)를 요구했으나 부족 원로, 현지 국회의원 등 안씨가 구축했던 소말리아 현지 인맥을 통한 다각적인 노력으로 몸값을 대폭 낮췄다. 납치기간의 장기화 속에 돈을 댔던 사람이 더는 자금을 대줄 수 없다고 말하자 해적도 조급해지면서 협상이 타결됐다.송한수기자·두바이 연합뉴스onekor@seoul.co.kr
  • 사르코지, 阿억류 기자 또 단독회담 구출

    |파리 이종수특파원|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모험주의적 밀실 협상’ 논란에 휩싸였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아프리카 차드의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갖고 불법 입양 혐의로 체포돼 있는 프랑스 자선단체 ‘아르슈 드 조에’ 사건 연루자 17명 가운데 프랑스 기자 3명과 스페인 스튜어디스 4명을 석방시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뇌이-쉬르-센 시장 시절 관내 유치원에 침입한 인질범을 설득해 21명의 아이들을 구출하는 대범함을 보인 적도 있다. 프랑스 언론은 이 사건을 대거 보도하며 반겼다. 특히 여권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전 부인 세실리아 여사를 특사로 파견하는 적극적 협상 외교로 리비아에 억류됐던 불가리아 의료진을 석방시킨 데 이은 ‘쾌거’라고 평가했다.그러나 야당은 체포된 이들의 석방은 환영하면서도 사르코지 대통령의 ‘밀실 외교’ 방식을 비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제1서기는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번 협상 과정을 국회에 알려야 한다.”며 “대통령의 임무가 체포되거나 억류된 사람을 직접 데려오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리비아 인질 석방 등 지난 몇달 동안 펼쳐진 비공식 협상 과정에 대한 투명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vielee@seoul.co.kr
  • [씨줄날줄] 몬테고베이 협약/황성기 논설위원

    국가간의 해양 관계를 규정하는 모법(母法) 격인 유엔의 해양법 협약은 ‘몬테고베이 협약’으로 불린다. 몬테고베이는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자메이카 제2의 도시이다.1982년 12월 이곳에서 채택됐다 해서 협약에 별명이 붙었다. 몬테고베이는 그림 같은 바다와 산호초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 1494년 콜럼버스가 상륙했던 곳이다.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생강, 럼주 등의 집산지이기도 하다.17세기 카리브 지역의 보물 같은 물자를 노린 해적들이 창궐했던 이곳에서 유엔 해양법 협약이 서명된 것은 아이러니다. 협약 101조는 해적 행위를 “민간 선박 또는 민간 항공기의 승무원이나 승객이 사적 목적으로 범하는 불법적 폭력행위, 억류 또는 약탈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해 100조는 “모든 국가는 공해나 국가 관할권 밖의 어떠한 곳에서라도 해적 행위를 진압하는 데 최대한 협력한다.”고 적시했다. 인지한 이상은 해적 행위 진압을 돕는 게 유엔 정신이지만 사실 모른 체하고 지나쳐도 그만인 게 협약이 지닌 맹점이기도 하다. 소말리아 연안에서 해적에 납치될 위기에 놓였던 북한 화물선 대홍단호를 미 해군이 구출하려고 긴급 작전을 펼친 것도 따지고 보면 몬테고베이 협약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중국 베이징에서 핵문제 협의차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도와줬다고 생색을 냈을 법하다. 납치되든 말든 미국이 모른 척했다면 끝날 일이었으니 힐의 공치사를 나무랄 일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땅이든 바다든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미국의 첨단 정보망을 감안하면 대홍단호는 납치 전부터 윌리엄스호의 감시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사일을 실은 예맨행 북한 선박을 나포했다가 국제해양법상 근거가 없어 풀어준 전력이 있는 미국의 돌변한 북한선박 구출작전은 모종의 의도를 감지케 한다. 북·미관계 훈풍설도 있을 테고 미국 주도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압박하려는 계산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미국에선 이번 사건이 연일 화제라고 하지만 북한쪽은 잠잠하다.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 분석이 끝나야 공식 반응을 내놓을 참인가 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한국인 탄 日화물선 소말리아서 피랍

    |도쿄 박홍기특파원|29일로 마부노호의 한국인 선원 4명이 158일째 억류 중인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의 아덴만에서 한국인 선원이 탄, 일본인 소유의 화학물질 운반선박이 해적의 습격을 받고 나포됐다고 교도통신이 29일 국제해사국(IBM)의 해적정보센터를 인용, 보도했다.이 선박에는 필리핀·미얀마인을 포함한 23명이 타고 있으며, 일본인은 없다고 통신은 덧붙였했다.이와 관련해 케냐 몸바사 소재 비정부단체인 ‘항해자 지원 프로그램’의 앤드루 므완구라는 “일본인 소유의 골든 모리호가 28일 인도양의 소코트라섬 앞 13㎞ 수역에서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됐다.”고 말한 것으로 중국 신화통신은 전했다.소코트라섬은 예멘 해안에서 남동쪽, 소말리아 해변에서 동쪽에 위치한 예멘 영토다. 한편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문제의 선박에 한국인이 탑승한 사실은 확인됐다.”면서 “이 선박이 긴급 구조신호(SOS)를 보낸 것은 파악됐지만 SOS의 사유가 납치 때문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hk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정묘호란의 발생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쓰시마(對馬島)와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동원할 수 있는 채널을 모두 가동하여 전쟁의 추이와 승패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과 후금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전쟁이 자신들에게 미칠 파장을 따져보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후금의 침략 때문에 곤경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점이다. 그것은 우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던 왜사(倭使)의 상경(上京)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사람들의 대일 감정은 격앙되었다. 무고하게 침략하여 처참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데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특히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등 왕릉을 파헤쳤던 일본군의 행위에 격분했다. 왜란 직후의 기록에는 일본을 가리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등장한다. 심지어 1607년(선조 40) 일본에 갔던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소지했던 국서 속에도 ‘의리상 귀국과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日은 같은 하늘 이고 살 수 없는 나라” 이 같은 적개심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직후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쓰시마는 절박했다. 경제적으로 자활할 수 없었던 그들은 조선과의 교역이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국교를 다시 열고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 쓰시마는 국교 재개를 요청하기 위해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와 요시조에 사콘(吉副左近) 등의 사절을 조선에 보냈다.1600년에는 유타니 야스케(柚谷彌介)를 다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아서 귀환하지 못했다. 쓰시마는 한편으로는 왜란 당시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의’를 표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이 국교 재개 요청을 계속 거부하면 다시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실제 1603년, 사쓰마(薩摩)에 억류되어 있다가 송환되었던 하동(河東) 출신의 유학(幼學) 김광(金光)의 보고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조선과 다시 화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화친 요청을 거부할 경우 재침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조선은 긴장 속에서 승려 유정(惟政)을 탐적사(探賊使)란 명칭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살피도록 했다.1605년 4월, 유정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화친에 대한 그의 의도를 탐지하고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조선은 이어 ‘일본이 먼저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낼 것’,‘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을 묶어 보낼 것’,‘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 등을 국교 재개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쓰시마는 조선이 제시한 요구에 신속히 응답했다. 그들은 1606년 9월,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와 범릉적을 조선에 보냈다. 국서는 위조된 것이었고, 범릉적 또한 날조된 인물들이었다. 조선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를 덮어두었다. 이윽고 1607년 조선은 강화(講和)를 위해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으로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는 출발점이었다.1609년(광해군 1)에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쓰시마와의 교역을 허락했다.1617년에는 2차 회답겸쇄환사를 보내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 세력을 소탕한 것을 축하했다. 조선이 이렇게 적개심을 억누르면서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일본측의 간청과 협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더하여 북방에서 날로 고조되고 있던 누르하치의 위협을 염두에 둔 조처이기도 했다. 누르하치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서북방과 동남방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 작용했던 것이다. ●누르하치 세력 커지자 일본과 국교재개 국교를 재개하고 교역을 허용했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의식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쓰시마에서 왕래하는 교역선의 숫자를 왜란 이전에 비해 대폭 줄였고 일본인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 특히 왜사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과거 그들에게 상경을 허용함으로써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산천 형세와 지리 정보가 모두 유출되었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조처였다. 쓰시마는 상경을 불허한 조선의 조처에 답답해했다. 그러나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묘호란의 발생은 상황에 변화를 몰고 왔다. 조선은 후금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서북방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고 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왜관(倭館)의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이 일어난 판국에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1627년 2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왜관에 통보하고 전란이 끝날 때까지 사선(使船)의 파견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쓰시마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쓰시마 도주(島主) 소오 요시나리(宗義成)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이미 파견한 선박을 회항(回航)시키는 것은 어렵고, 그럴 경우 조선이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또한 조선을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고 조총(鳥銃) 등의 무기를 원조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쓰시마는 정묘란을, 위기에 처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은 여진을 달단()이라 불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무렵부터 만주의 정세와 여진의 동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미 1592년 여름, 함경도를 점령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마을에 침입하여 그들과 군사적으로 접촉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후 달단이 더욱 강성해져 후금을 건국하고 요동을 점령하자 일본의 위기의식은 높아갔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후금이 1621년 요동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당시 나가사키(長崎)에 왕래했던 중국상인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1623년 새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후금 관련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여 보고하지 않았다고 쓰시마의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를 질책했다. 다급해진 소오 요시나리와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조선에 조총 등을 보내는 한편, 요동 사정을 탐문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이 여전히 상경을 허용하지 않자 쓰시마 측의 조바심은 높아갔다. ●“상경길 안 열면 문제 생길 것” 공갈치는 일본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쓰시마 측은 위의 전례를 흘려 조선을 압박했다. 즉 ‘전에도 바쿠후가 요동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는데, 만일 이번에 야나가와가 잘 주선하지 않으면 바쿠후가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조선과 쓰시마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627년 11월, 소오 요시나리는 에도(江戶)로 가서 정묘호란과 관련된 전후 상황을 바쿠후에 보고했다. 조선과 대륙 정세 변화에 민감했던 바쿠후는 요시나리에게 조선과 대륙 정세를 상세히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628년 11월, 쓰시마로 돌아온 요시나리는 승려 겐포(玄方)를 차출했다. 1629년 윤 2월, 겐포는 ‘조선과 대륙 정세 파악’이라는 중책을 안고 부산에 상륙했다. 요시나리는 이미 조선에 서계(書契)를 보내 겐포 일행의 상경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은 여전히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겐포 일행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경을 허용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공갈을 쳤다. 정묘호란으로 수세(守勢)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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