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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선거에 돈 왜 필요한가(사설)

    대학가에 선거철이 다가왔다.전국 각대학에서는 이달중에 내년도 총학생회장을 뽑는 선거가 예정되고 있어 선거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중이다.일부 대학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의 자격여건을 강화,평균학점의 상향조정·수강학기의 제한등을 규정하여 부적격한 학생회장의 출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이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한 변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환영할만 하다. 사실 지금까지 대학가의 선거는 교육목적의 학생선거답지 않게 거의 금권이나 폭력이 판을 치는 타락선거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기성 정치판의 혼탁한 선거가 무색할 정도로 비리와 악습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지연과 학연,서클에 따라 향응을 베풀고 매수하는등 대학생으로는 할 수 없는 온갖 타락상을 보여왔다.총학생회장 선거에 수천만원의 선거자금을 뿌린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알려져있는 실정이다.그런 막대한 자금은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그돈을 들여 총학생회장에 당선된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기성 정치권에서도 「깨끗한 선거」「돈 안드는 선거풍토」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3월 선거법을 개정했다.그야말로 수십년의 구악에서 탈피한 「선거혁명」을 이룩한 것이다.그런데 가장 진취적이고 이상적인 대학사회에서 돈에 의한 선거가 계속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자는 열정에 가득찬 대학생들이 구시대의 작태에 연연해 있다면 이야말로 모순당착이 아닌가. 서울대총학생회는 올해 총학생회장선거부터 선거비용을 8백만원이하로 제한토록 했다고 한다.아예 한푼의 돈도 쓰지못하는 철저한 대학 공영제 선거를 하면 어떨까 싶다. 아무튼 우리는 서울대 총학생회의 「선거비용 제한제」를 크게 환영하면서 이 제도가 다른 대학에도 확산되고 종내에는 돈을 전혀 쓰지않는 순수한 교육차원의 모범적인 선거가 되기를 기대한다.학생 스스로의 이런 자정노력이 그동안 혼탁과 금권으로 얼룩졌던 대학가의 선거풍토를 일신시키고 깨끗하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와함께 학생회장선거에서 자주 등장하는 폭력행위도 추방되어야 한다.폭력이란 가장 반지성적이고,비이성적인 행위가 아닌가.얼마전 어느 지방대학에서는 조직폭력배가 학교구내에서 입후보자를 폭행하고 등록서류를 탈취한 사건도 있었다.자유당정권시절에나 볼수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작태이다. 대학은 순수하고 투명한 지성의 산실이다.그곳에서 실시되는 학생회장선거도 순수하고 지성적인,그리고 명예로운 행사로 치러져야 할 것이다.
  • 군은 그 「자리」에 있다/이재근(서울광장)

    군인으로서 더러 열등의식을 느껴본적이 있느냐에 대해 장교 48%,하사관67%,병은 64%가 그렇다고 응답했다.장교의 88%,사병의 71%가 언제나 또는 때때로 군복무에 보람을 느낀다.사병의 경우 학력수준이 높을수록 보람감은 낮아진다.고졸이하는 77%,고졸은 75%,대학중퇴 또는 대학재학자는 68%,대졸이상은 41%만이 보람을 느끼고 있다.어느 사회학자가 설문조사한 우리 군인들의 직업적 자부심의 정도다.몇년전의 조사지만 그만하면 의무병역으로서의 우리 군 장병들의 사기는 유지돼있다고 볼수있다.누가 뭐래도 우리 군은 국방안보의 의무를 다하며 항상 「그 자리」에 서있다. 지난 주초였다.한 사병의 총기난동사건이 있던날 저녁,사고지역과 인접한 다른 부대의 사격장 근무사병인 막내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총기사건 뉴스에 놀라있던터라 군말없는 안부 닥달에 아이는 『아무런 이상없다』며 태연해했다.역시 그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연이어 터진 크고 작은 군관련 사고에 걱정이 태산같지만 그래도 우리 군이 어떤 군대인가. 그간 몇가지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을 놓고 군의 기강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무엇이 군을 그같은 무질서한 조직으로 비치게끔 했는지 국민들은 매우 참담한 심정이었던게 사실이다.그것이 혹시 지난 1년여간의 군 개혁작업과 「바로 서기」과정에서 생긴 무사안일속의 기강해이라면 그 또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그래서 군 책임자를 질책하고 장교와 하사관들의 전반적인 자질을 탓했다.버릇없이 자라 군에 적응치 못하는 이른바 신세대 사병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했고 군 당국의 냉철한 진단과 처방을 요구하기도 했다.그리고 이윽고는 군내부의 기강과 사기에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는 바깥사회의 온갖 일그러진 모습들을 돌아보며 자책한 바도 없지 않았다. 일컬어 「지존파」참극에 온보현사건,세금횡령사건과 증인보복 살인사건의 와중에 성수대교 붕괴,관광유람선 침몰사건등 어처구니없는 사건 사고들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과없이 그대로 군사회에 젖어들었을 것이다.사고내기 얼마전 바깥사회에 나들이 갔던 범행사병은 가정사정으로 「끼니도 찾아먹지 못한채」마음 상해서 귀대했다.그렇다고 범행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 무렵의 세태가 또한 어지러웠음을 어른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직업군인으로서의 장교와 하사관을 제외한 모든 사병들은 입영전에 이미 성인이었다.모두들 제나름대로 하나의 인격체인 것이다.그런점에서 사병들은 그 개개인이 모두 바깥사회의 반영이다.그들은 대부분 의무복무기간의 군생활을 자신의 가정이나 사회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군조직은 그들을 통제할 수는 있어도 흔히 말하듯이 「개조」할수는 없다.촉망받던 동료장교의 주검을 바라보며 『군경력이 1년도 안되는 사병을 가리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한 어느 장교의 말은 신세대 장병들의 행태에 관한한 정확한 표현이었다. 군이 사회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하위체계라고 볼때 군대사회와 그 군사회의 배경 또는 환경으로서의 바깥사회는 직접적으로 연결될수밖에 없다.따라서 상위개념으로서의 일반사회가 건강하고 활기넘치면 하위체계로서의 군의사기와 군기는 확고하게 유지되지 않을수 없다.확실한 것은,요즘의 의무사병들은 영내 생활에서도 그 자신이 결코 바깥사회를 벗어나지 않고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몸은 군에 있으되 마음은 밖에 나가있다.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다.사병들의 이른바 장교길들이기의 잠재의식적 연원은 여기서 찾아질수 있다.이 점을 파악하면 거꾸로 장교들의 사병길들이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생활에 불만을 가진 사병이 탄약고에서 수류탄을 꺼내 내무반에 던지려할때 그 사병의 머릿속에 부모가 떠오르면 그는 결국 범행을 저지른다.그러나 소·중대장의 얼굴이 떠오르면 수류탄을 던지지 못한다』어느 예비역장성의 경험담이다.지휘관은 사병과 골육의 정(골육지정)을 나눠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지휘는 아버지처럼,통솔은 어머니처럼」이라는 지휘 통솔요령이 있다.위로부터의 지휘는 합법적 권위로서 할수있지만 전체로서의 통솔은 인격으로 해야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동안의 사건·사고를 위요한 군에 대한 질타와 가편은 이쯤해두자.그리고이제부터 군 조직·제도의 효율화및 경쟁력 제고노력과 함께 사회와 군대­민·군관계의 재정립등을 통한 강군육성책을 논의할 때이다.국방안보의 보루로서의 군의 경쟁력은 근본적으로 민·군의 협조체제가 얼마나 자발적이냐에 달려있고 이는 곧 민·군간의 신뢰관계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수있다.민·군관계를 개선하는 이상의 효율적인 군 사기진작책은 달리 없다고 본다.
  • 소유와 향락의 욕심 버리자/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일요일 아침에)

    ◎반세기에 걸쳐 계속돼온 도덕성 붕괴 사람의 목숨을 너무 업신 여기는 끔찍한 사건들과 여기저기 떼죽음을 부른 어처구니 없는 사고들이 잇따르면서 우리사회의 도덕성 회복 문제가 도처에서 크게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도덕성이 큰 혼란에 빠진 것은 결코 근래에 생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반세기 전인 해방 직후에 이미 우리나라의 도덕성은 심각한 징후를 보였다. ○자유와 방종의 혼동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여 폭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외국과의 통신이 어려움을 기화로 이력을 속여서 요직에 취직하는 사람도 있었다.세칭 일류대학 교수들 가운데도 일본인의 책을 우리말로 옮겨서 자기의 「저서」로서 출판한 사람이 있었다.좌익과 우익의 싸움은 무자비 했고,이기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같은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필자는 도덕적 혼란을 막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법학에서 윤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나 이러한 나의 전공 변경에 대해서 많은 친구와 선배들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윤리」나 「도덕」은 이미 낡은 유물이며 윤리학은 쓸모가 없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윤리 또는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근 40년동안 살아온 셈인데,몇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의 주장은 외면을 당할 때가 많았다.근본적 문제는 사회 구조의 모순에 있는 것이며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보수주의자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시각조차 있었다. 근래에 와서 사회구조의 중요성과 아울러 윤리의식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분위기가 일어난 것은 우리나라 윤리적 상황의 크나큰 진전이라고 생각 된다.그리고 요즈음은 이력을 속이고 취직하는 사람도 줄었고 남의 책을 베껴서 자기의 저서로 둔갑시키는 학자도 거의 없다.이러한 점으로 볼때 우리나라의 윤리적 상황은 조금씩 좋아져 가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삶 포기하는 젊은이 그러나 반세기 전에 비하여 몹시 나빠진 측면도 있다.반세기 전에는 자신의 앞날을 비관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요즈음 젊은이들 가운데는자신의 앞길을 암담하다고 비관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미리 포기하려 드는 젊은이들이 많다.바로 이점에 오늘날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해방 직후에는 온갖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체로 내일을 밝게 내다보았다.이제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풀렸고 장차 모두가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일제의 식민지 신세보다는 나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자신의 앞날을 밝게 전망했던 까닭에 아무도 자신을 포기하고 막가는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이들은 비록 의식주 문제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앞날을 암담하게 내다보는 경향이 현저하다.아무리 애를 써도 인생의 패배자를 면할 길이 없다고 비관하는 것이다.그렇게 비관하는 이유는 소유의 극대화 또는 향락의 극대화를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한국의 가치풍토에 있다.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졸부의 심리와 서양의 물질 문명의 피상적 수용 등이 상승작용을 하여 현재 한국에는 소유의 극대화 또는 향락의 극대화를 삶의 최고의 목표로서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우리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재물과 누릴 수 있는 향락의 기회는 일정한데 비하여 그것들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심에는 한도가 없다.따라서 사회 경쟁은 치열하게 되고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만이 소망을 이룰 수 있을 뿐 다수의 패배자는 좌절에 빠지게 마련이다. ○내면 가치의 중요성 이러한 실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우리나라 대학의 입시제도이다.우리나라의 대학은 소유의 극대화 또는 향락의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 인생 경쟁의 제일 관문에 해당한다. 도덕성과 관계된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소유와 끝없는 향락을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그릇된 가치 풍토를 청산해야 한다.삶의 최고 목표로서 적합한 것은 돈과 권력 또는 향락과 과소비 따위의 외면적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과 인격,사랑과 우정,자유와 평화,학문과 예술 등 내면적 가치의 세계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실천,생활에 반영해야 한다. 우리가 저 그릇된 가치관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교육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있어야 하고,둘째로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분배의 제도를 개선해야 하며,셋째로는 사회적 모방의 대상이 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이것은 결코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그러나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는 더욱 아니다.
  • 골키퍼 없으면 실점 당연하다(이동화칼럼)

    골기커 잇따라 터지는 대형사건·사고마다 나름대로 구체적 원인들이 적시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개혁실종과 기강해이라는 사회적 방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번번이 듣게 된다.우리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꼭꼭 죄어 있어야 할 나사들이 도처에 풀어져 있거나 떨어져나가고 없다는 얘기다.이래서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발전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최근 가장 충격과 파문이 컸던 성수대교 붕괴사고만 하더라도 온갖 고질적 비리와 기강해이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공사 내정가 유출과 담합에 의한 입찰,적당주의적인 설계과정,하청과 재하청을 거듭하는 가운데 부실하게 진행되는 시공과정,형식적인 감리와 준공검사,그리고 그 이후의 유지관리과정등 어느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 잃고 못고친 외양간 부실과 부실이 이어지고 겹치는데 그 결과가 나쁜 것은 당연하다.특히 공직사회의 무사안일과 풀어진 분위기는 막을 수도 있는 대형참사를 방치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성수대교사고 이전 언론에서 한강다리의 안전문제를 계속 제기하자 대통령은 수차에 걸쳐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에게 직접전화를 걸어 안전문제를 점검했고 이때마다 『문제 없음』이라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때문에 사고가 난 직후 이시장은 인책해임되었고 사법처리문제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다.그러나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약효가 있겠는가.대형사건·사고가 날 때마다 장관인책,관계자구속,벌칙강화위주의 대응이 있었지만 유사한 사건·사고의 재발을 막지는 못했다.구포역 열차사고와 서해페리사고,아시아나항공기사고등이 연달아 일어났을 때 충격과 자성의 소리가 드높았지만 성수대교사고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는 듯이 또 발생했다. 이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마저도 제대로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인책이나 즉흥적 대책발표로 어려운 국면만 넘겼을뿐 진짜로 사고가 안나도록 하는 문제에는 어느 누구도 별로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형사고가 난 이후 6개월이나 1년까지라도 사고당시의 대책을 점검하는 부서가 있어 대통령지시사항 하나라도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챙겼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수대교사고의 경우 대통령이 시장에게 전화를 하는등 이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다면 당연히 비서실이나 점검기능을 맡은 부서에서 실무적으로 상황을 추적했어야 되고 두번이상씩이나 같은 지시와 관심이 되풀이되었다면 현장확인까지 별도로 거쳤어야 마땅하다.국정의 최종점검기능이 부실하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정신차려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축구경기에서 골키퍼가 없다면 쉽게 실점(실점)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개혁프로그램 나와야 모든 사람,특히 공직자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할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강이라면 앞에 말한 것들도 기강해이와 직결된다.납짝 엎드려서 눈치나 보고 할일은 안 하면서 일이 생기면 남의 탓만 하는 이런 기강을 갖고는 원할한 국정,원할한 행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분위기는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고 병사가 장교를 길들이다 못해 사살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다.최근의 열차탈선사고와 중진의원이 소속정당을 꺼리낌 없이 비난하는 일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이제 분위기를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그러려면 기강을 바로잡는 개혁프로그램이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든 일관성있게 추진되도록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그러려면 진행이야 해당부처에서 해나가도록 해야겠지만 기획과 점검,그리고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힘과 능력이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지금처럼 개혁적 발상과 지시가 있더라도 이를 구체화시키고 진전여부를 살피는 기능이 미약하거나 없어서 중도에 흐지부지되고 만다면 오히려 혼돈과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필요 인력·예산 늘려야 예를 들어 대통령이 『장관은 발로 뛰라』든가,『부녀자가 밤길을 마음놓고 다닐 수 있게 하라』는 다분히 구호성이지만 개혁마인드를 갖지 않고는 시행이 어려운 지시를 했을 때 보좌진이나 개혁기능을 맡은 부서에서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일이 있다.이 지시가 나온 배경과 현실적 상황을 살피고 지시내용을 보다 구체화시켜야 할 것이며 계속 부서에서 진행시키고 있는 내용을정밀하게 점검해나가야 그나마 어느정도의 효과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인력과 예산이 없는데 일일이 어떻게 챙기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런 인력과 예산을 늘려야 한다.
  • 화차 탈선… 중앙선 한때 불통/어제 새벽 덕소∼도농역서… 긴급복구

    선로 보수를 하는 철교 위를 화물열차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달리다 탈선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 이후 전국 철도 교량에 대한 정밀진단과 이에 따른 보수작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발생,철도 종사자들의 적당주의와 안전 불감증을 드러냈다. 1일 0시15분 쯤 중앙선 청량리 기점 13.5㎞인 덕소역∼도농역 사이의 백운철교 위에서 시멘트를 싣고 제천역을 떠나 망우역으로 가던 제 2444호 화물열차(기관사 이병선)가 탈선했다. 사고로 중앙선의 상·하행선이 이 날 하오 6시까지 불통됐으며 화물열차 24량 중 기관차를 포함한 8량의 열차가 부서지고 궤도 1백m가 심하게 파손됐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원주 보선사무소 직원들이 백운교의 낡은 침목 28개 중 16개를 바꾸다 열차가 진입하자 미처 레일을 침목에 고정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났다.보선원들은 새벽 0시부터 3시까지 작업할 예정이었다. 철도청 조사결과 원주 보선사무소와 망우역은 침목교체 사실을 도농역에 알렸으나 도농역은 연락을 받고도 열차를 세우지 않았다. 사고가 나자 철도청은 철로보수 복구반 1백여명과 기중기 2대를 투입했으나 단선 구간이어서 복구 작업이 늦어졌다.철도청은 상하행선 85회 열차 중 불통된 40여회의 열차를 청량리∼용산∼조치원∼제천으로 이어지는 충북선으로 우회시켰다.또 덕소∼제천역까지 임시 열차를,덕소∼청량리역간은 버스 7대를 운행하고 있다.
  • 10월이 간다(외언내언)

    10월의 마지막 주말이다.1994년도 열달이 지나갔다.그 중 10월은 끔찍했다.날벼락치듯 강타한 사건이 4천만을 허탈하게 만든 달이었다.생각해보면 이 달만 그랬던 건 아니다.지난 열달동안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자연에 의한 재해,사람에 의한 재앙으로 편한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또 금년의 현상만은 아니었다.육해공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사건사고 현상에 사람들은 매우 자조적이 되었고 『이제 남은 건 다리다』하며 사위스런 예언을 하기도 했다.그러자 과연 예언대로 다리까지 붕괴되었다.정신차리기 어렵게 꼬리를 무는 총체적 수난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괴로운 상처는 우리 모두가 사막보다도 황폐해진다는 점에도 있다. 원망과 비난만 쏟아놓으면 책임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간다는 듯한 분위기.그러나 오늘날 일어나는 사회적 추락의 현상은 우리가 총체적으로 저질러온 공동의 실패다.아무도 완벽하게 무죄한 사람은 없다.하다못해 방관한 허물이라도 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가 지닌 가장 큰 불행은 무차별적인 학대행위다.이 심각한 사태에도 성숙한 대응을 보여주지 못하고,한다는 일이 내각 불신임안을 내세워 그걸 결행한답시고 몇시간씩을 쏟아부어가며 표결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등 사태를 희화화하는 정치권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포함하여 일제히 돌던질 「남」을 찾기에 바쁜 사람들의 자학증과 자기모멸의 나날로는 아무 일도 수습이 되지 않는다. 1994년도 이제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이 날들로는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무리지만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엔 모자라지 않은 세월이다.그런 날들을 더 이상 이 땅을 사막처럼 황폐화시키는 일에만 써버리지말고 한가지씩만이라도 확실하게 수습해가야 한다.각자가 자기 일만 완벽하고 고품질하게 하면 된다.우리가 못하는 일은 바로 그일이다.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이 그것이다.
  • 청와대/“돌부처 푸대접” 루머에 시달린다

    ◎“기독교장로 김 대통령이 옮겨 대형사고 빈발” 억측/6공때 관저 지으며 이전… 온존상태 기자단에 공개 청와대가 돌부처를 둘러싼 악성루머에 시달리고 있다. 루머의 내용은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경내에 있는 불상을 딴데로 옮기는등 푸대접을 했기 때문에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것.성수대교 붕괴사고에 이어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건이 터지면서 남부지방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라고 한다. 이같은 루머는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지난 26일 호주에서 발행되는 파이낸셜 리뷰지가 확인절차도 없이 이를 사실인 양 보도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처음 반응은 어처구니없다는 정도였다.지난해에도 이런 루머가 불교계일각에서 돌았고 결국 사실이 아님이 해명됐다.그러나 외국신문에 루머가 사실인 양 보도되고 수석비서관들마다 『그게 사실이냐.그러면 안된다』는 걱정전화에 시달리는 상황이 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됐다. 마침내 청와대는 27일 출입기자단에게 이 불상을 공개했다.대통령관저뒤로 1백m쯤 산등성이 쪽으로 올라간 곳에 두평가량 돼 보이는 누각이 있고 그안에 불상은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평소에는 출입기자들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안내판에는 이 불상이 서울시 지정문화재 제24호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쯤에 제작된 것으로 적혀 있다.석굴암의 본존불상과 같은 양식.경주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때 데라우치총독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이곳에 남기게 됐다.불상의 높이는 1m10㎝가량.가부좌를 한 좌불이다. 대통령관저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큰 불상이 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알려지면 이번에는 기독교쪽에서 들고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어렵고,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난처한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불상은 처음 현재의 대통령관저자리에 있었다.지난 89년 노태우 전대통령이 새로 관저를 지으면서 자리를 옮겼고 그 뒤에는 그저 그자리에 한결같이 앉아 있다.
  • “넌 아직 할일이 많잖아” 통곡/박용현 사회부기자(현장)

    ◎숨진 무학여고 이연수양 고별미사 『연수야,어린이같은 순수함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불같은 정열로 그림을 그리던 너.지금 간다는 건 너무 억울해.넌 아직 할일이 많잖아』 성수대교붕괴 참사로 꽃망울을 터뜨려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난 이연수양(17·무학여고2년)의 고별미사가 열린 23일 상오8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천주교회.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시작한 급우 김유지양(17)은 이내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삼켰다.소리없이 흐느끼던 어머니의 어깨는 더욱 심하게 떨렸고 주위사람들도 연신 눈물을 훔쳤다. 영안실에 안치돼있던 이양의 시신을 성당안으로 인도해온 동생 성규군은 누나의 영정과 십자가를 가슴에 꼭 부둥켜 안은채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미사를 집전한 나원균 주임신부는 노란 국화꽃 사이에 잠들어 있는 이양의 시신 앞에 향을 피우고 성수를 뿌렸다.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분노를 담고 있었다. 『이양의 죽음은 결코 불의의 사고가 아닙니다.이 시대,이 사회의 부정비리와 무책임이 빚어낸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습니다.우리가 올바른 정치,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때에만 연수양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신부는 『주일마다 이자리에서 기도하던 연수양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게됐지만 연수의 모습과 깨끗한 마음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사는 30여분만에 끝났다.줄곧 부인을 부축하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딸을 지켜보던 아버지 이식천씨(46)도 나신부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끝내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이씨 부부가 딸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하기 위해 주저앉을 듯한 발걸음을 옮겨 영구차에 오르자 차량행렬은 장지인 경기도 용인군 천주교 묘지로 떠났다. 하늘은 이양의 영혼을 맞이하려는 듯 티없이 맑았다.남아있는 친구들이 작별인사를 했다. 『주님 품에 안긴 한마리 양처럼 편안히 쉬거라.부디…』
  • 숨진 서울교대 여학생 시신 기증

    ◎이승영양 어머니,평소 딸 뜻다라 고대병원에/“하늘나라서 선생님 꿈 이뤄라” 친구들 오열 『승영이도 생전에 못다한 사회봉사의 꿈을 이루게 되어 기뻐할 것입니다』 16번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숨진 이승영양(20·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년)의 유가족이 평소 이양의 뜻에따라 오는 24일 발인 직후에 고려대 의료원에 시신을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한다. 이양은 지난 17일부터 동대문구 장안동 안평국민학교에서 교생실습을 시작,불과 닷새만인 21일 만원버스를 타고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교단으로 향하다 꽃다운 나이에 변을 당했다. 22일 상오 이양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성동구 화양동 건대부속 민중병원 영안실에는 어머니 김영순씨(46·서초구 반포본동 한신상가아파트)등 유가족과 교인·친지 등 1백여명이 찾아와 이양의 못다한 뜻을 기렸다. 남편의 1주기를 불과 20여일 앞두고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딸을 잃은 김씨는 밤새 이양의 영정을 끌어안고 울어지친 모습이었다. 김씨는 『승영이가 아빠를 무척 따랐어요.돌아가신 뒤로는오히려 줄곧 저를 위로하느라 「아버지가 계신 곳은 어떤 곳일까」를 되묻곤 했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양의 아버지인 고 이정식대령(당시 47세·육사 26기)은 육군 군수사령부 작전처장으로 근무하던중 지난해 11월14일 과로로 순직,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양은 1남1녀중 맏딸로 아버지가 혼자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방학이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부산에 내려가 밀린 빨래를 하고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드리는 등 효심이 지극했다. 때문에 아버지가 갑자기 숨졌을때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 눕기도 했으나 곧 슬픔을 가누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며 평소 소망인 교사가 되어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다. 또 틈만 나면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와 동생 상엽군(19·경문고 3년)에게 『만일 내가 죽을 경우 시신기증을 통해 마지막 사회봉사의 길을 걷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해왔다. 영안실 한쪽 귀퉁이에 수습된 빛바랜 헝겊가방과 필통,5학년2학기용 사회·자연 교과서와 교생지도안들이 한 예비교사의 이루지못한 꿈을 보는듯 쓸쓸하게만 느껴졌다.그러나 죽어서 봉사의 길을 걸은 이양의 영정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시인 미당 서정주(이세기의 인물탐구:61)

    ◎팔순에도 샘 솟는 시정… 문단의 거봉/새로운 언어­독특한 깊이로 감동의 운율빚어/어릴적 가난­방랑 벽이 창작욕이 밑거름으로/“내 숨결 그칠 때까지 시어 더듬고 또 더듬겠다” 1948년 선문사가 발행한 미당의 두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김동리 발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의 유일한 정신상의 재보로서 쌓아왔다. 그의 뇌락불기한 인격과 자유분방한 시혼은 그 처녀시집 「화사집」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그「비늘을 번득인」바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적어도 이 땅에서 시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이 혹성의 찬연한 광망과 위치에 등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평자들이 미당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용되는 명평이다. 「뇌락불기」란 「마음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남에게 구속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당의 문학적 족적은 광활하고 높고 깊다. 그리고 훨훨 나는 그의 두루마기 차림처럼 시에 관한한 무장무애하고 무소불위하다. 지금은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서 있지만 미당의 지난 세월은 가난과 슬픔과 방황과 방랑벽으로 그 인생의 절반이 혹독하게 얼룩져 있었다. 어릴 때는 당시를 배울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만14세 되던해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서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적이 있고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다가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으로 또 한번 퇴학을 당했다.다시 서울로 올라와 극예술연구회 연극배우노릇, 마포 도화동 빈민촌에 입주하여 넝마주이 행색으로 쓰레기를 줍기도 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교장이며 존경하는 스승인 석전 박한영을 만나 안암동 개운사에서 능엄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릴때는 당시배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곡량주식회사 연길지점에서 경리과직원이 되는가 하면 김좌진장군과 이승만대통령의 전기집필,「옥루몽」등 옛소설 번역으로 생계를 잇다가 인촌 김성수 집안과의 인연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 학예부장을 지내는 등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이 깊고 다양하기만 했다. 이토록이나곡절이 심한 방만한 생활덕분에 한때는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치고 생명의 존엄을 체험하고 나서야 미당은 비로소 삶에 대한 의욕과 생명의 활기가 몸속에 용솟음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광주 무등산 자연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무렵 「무등을 보며」「학」「상리과원」같은 명품을 연달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시들은 끊일줄 모르는 시심과 계류와도 같은 운율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마치 가을 한낮 거문고 소리처럼 청랑한 운기로 흥취와 운치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이다. 그의 탁월한 시업은 과거로의 관념적 도피나 신비주의에 탐닉한 시절이 있었고 영원의 생명에 대한 명상으로 온자하고 정밀한 내면을 구축하면서 「육체적 인간의 본원적 충동을 순화시켜 어느 순간엔가 숭고한 정신적 표현의 극에 도달」한 것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최근 「시와 시학」지에서 시인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싶은 시」로 추천한 「무등을 보며」는 명편중의 명편으로 미당이 아직 38세이던 19 53년 「현대공론」에 발표한 것이다. 그때 이 시를 읽은 젊은 이들은 「구구절절 감명을 사로잡는 명구」라든지 「화살처럼 꽂히는 충격」으로 이를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여름 산같은/우리들이 타고난 살결/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수 있으랴/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미당의 주옥같은 시들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단지 그가 낳는 시마다 절륜의 절창으로 평가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창의성 있는 언어구사와 독특한 깊이와 지혜, 상당량의 시편이 그릇 큰 시인의 구비조건이라면 20세기 우리 시인 가운데서 이러한 조건을 가장 보기좋게 구비한 이로 미당」을 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과연 언어를 부리는 장인적 기술에서나 직관과 상상의 능력에 있어서나 만인이 칭송하는 대가의 반열에 선 그는 한국적 릴리시즘의 탁월한 정형을 만들어냈고 안주를 모르는 시정신으로 한국의 운치와 위엄을 어느 시에서나 감동적으로 증명해 왔다. 해인사 체류시절 미당을 사로잡은 소쩍새 울음소리는 그에게 불치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음향으로 다가와 저 유명한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벌써 일본여선생을 흠모하는가 하면 불혹의 나이때도 때때로 여난을 겪게 되어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는/삼천 사발의 냉숫물」은 미당을 엿보게 하는 낭만시인의 일면이기도 하다. ○속과 선을 아는 성품 만년의 그는 인생을 관조하는 허허로운 마음과 가족을 거느린 가부장적 자세를 빌리고 있으나 「속도 알고 선도 아는 복합적인 성격」과 대체로 괴팍과 까다로움이 승한 편이다. 그 한 예로 70년대 초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청으로 영국시인 스티븐 스펜더가 한국에 왔을때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미당은 취중이었는지 한국의 정상다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팡이를 휘둘러 「TS 엘리엇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외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인 고은이 한때 주란과 폭소버릇으로 위아래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처음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어지로운 헛웃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가족회의끝에 그를 공덕동에서 추방하고 「고은출입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다. 그의 풍류는 나무와 돌과 침향(심향)과 글씨 그림외에도 난취미가 으뜸이다. 지난 70년 25년간 살아온 공덕동을 떠나 관악산밑 사당동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택호를 쑥 봉자 마늘 산자를 따서 봉산산방으로 붙여놓고 그는 한동안 나무심기와 난수집에 주력했다. 시암 배길기와의 광동보세며 삼중당 일력에 자필 시를 써주고 받은 제주한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류시인 김양식과의 중국춘란에 얽힌 대화는 난향같은 일화다. 당시만도 그가 지닌 서른분쯤의 난들은 「겨우 여중 2학년 정도의 잎만 여남은게 솟아올린채 꽃필날이 아득하기만 한데」 난화부재의 겨울날 김양식이 불쑥 전화를 걸어 「대만에서 구해온 중국춘란이 아주 썩좋게 한송이 피었다」고 자랑삼았던 모양이다.이때 미당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웃하나가 명주바지를 입으면 여러 가호가 두루 따뜻한거라는데 나도 그 푼수니 염려말고 잘 만끽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김양식은 가족들과 휴가를 가게되니 「그 사이 며칠만 돌보아주시며 즐겨보시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당은 그제서야 눈이 번쩍 띄게 반가워했고 비록 빌렸을 망정 책상위에 난을 놓고 보고 또 보고 난향을 맡으며 「시의 감동이란 것도 내 생애에서 항용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내가 소유하는 것에서보다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감동으로 시를 쓴 것이 많았다」고 한 산문에 적고있다. ○커피보다는 맥주 즐겨 그의 정열과 의욕은 식을 줄을 몰라 한때는 영어단어를 하루에 수십개씩 외는가 하면 70년 초반부터는 세계를 두루 일주하며 끝없는 여행길에 오르더니 최근엔 세계의 산봉우리를 높이순으로 1천6백여개나 줄줄이 기억해내는 독특한 취미를 보이고 있다. 미당은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그 시작은 그의 방창앞에 심은 소나무처럼 청청한 천뢰의 소리를 잃지 않는 기상이다.요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커피보다는 맥주」를 권하고 제자들이 마련한 시낭독회나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9일에는 송파문화원에서 열린 국선문학회에 나와 「국선(국선)」이란 모임이름을 지어주고 후배들의 회장추대를 극구 사양하여 주변을 송구스럽게 했었다. 이제 자기자신을 홀연히 내쳐버리는 무집착의 상태에서 그의 최근의 시들은 글맛이 한층 무르익어「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다. 산다는 것이야말로 사변의 연속이었던 시대를 거치면서 일찍이 김동리가 지적했듯이 미당은 지금도 「내 숨결이 아주 내 육신을 떠날 때까지는 더듬어보고 또 더듬어」 새로운 시에 대한 분방한 광망을 접어두거나 조금도 늦추려들지 않는다. ▷연보◁ ▲1915년 5월18일 전북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출생.서광한씨와 김정현여사의 2남2녀중 장남 ▲1929년 부안 줄포보통학교 졸업.서울 중앙고보 입학 ▲1931년 전북 고창고보2학년 편입,권고자퇴,서울 상경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 「벽」당선 ▲1936년 시전문지 「시인부릭」편집인겸 발행인 ▲1941년 처녀시집 「화사집」(남만서고)1백부 한정판 출간 ▲19 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문교부산하 예술과 초대과장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2년 광주 조선대학 부교수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 ▲1955년 미국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1960년 동국대 부교수 ▲1961년 제1회 5.16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5년 서울 신문회관서 회갑연 ▲1976년 미당시를 주제로한 시화전 서울서 제주까지 6개월간 전시 ▲1977년 한국문인협회 회장 ▲1979년 동국대 정년퇴임,대우교수로 대학원 강의 ▲1980년 동아일보 문화대상 개인상부문 본상 「귀촉도」「서정주시선」「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안 잊히는 일들」「늙은 떠돌이의 시」「산시」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전5권) 「서정주 시선집」(전2권)등 시 8백여수와 「서쪽으로 가는 달처럼」등 산문집과 여행기가 있음.
  • 어떻게 이런 사고가…(사설)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날벼락인가.천재지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끔찍한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할 말조차 잊을 정도다. 무너진 성수대교는 건설된지 불과 15년밖에 안됐다.게다가 이 다리는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안전도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 왔었다.다리를 이용하는 시민들조차도 늘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그런 찰나에 마침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공사가 부실했고 안전관리가 소홀했길래 이처럼 엄청난 참변을 빚게했단 말인가.이러고도 우리들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아직도 이런 원시적인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이만저만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고는 일어나선 안될 사고였다.우리 사회의 기강이 총체적으로 해이되지 않고는 이런 참사는 일어날 수가 없다.정확한 사고원인은 정밀조사를 거쳐 곧 밝혀지겠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사고의 일차적인 원인은 최근들어 통과차량이 급증하면서 노후된 교량이 하중을 이기지 못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다리의 안전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도 이를 방치 내지는 숨겨온데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이 다리는 완공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정밀 안전진단을 받은 일이 없었다.그런데도 그동안 서울시 당국은 안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안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느니,점차 보수해 나갈 계획이라는 등의 말로 일관해 왔었다.그뿐 아니다.며칠전엔 시민들의 제보로 4번째 교각의 이음새 부분에서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도 이를 쉬쉬해 왔다고 한다.더욱이 사고전날 밤 보수작업을 하려다가 비 때문에 작업을 미루고는 차량통제등 안전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하나같이 분통이 터지는 일뿐이다. 이번 사고는 한마디로 당국의 무사안일한 행정이 빚은 예견된 사고였다.어째서 그런 엄청난 위험이 도사린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대로 방치했다는 말인가.아무리 공직사회에 무사안일 풍조가 팽배했다 해도 이래선 안된다.위험을 미리 감지했다면 응당 차량은 물론행인의 통행까지도 금지시켰어야 했다. 대한토목학회에 따르면 현재 한강다리 17개중 11개가 안전도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당국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한강다리 전체에 대한 정밀안전진단과 긴급보수작업을 시급히 실시하기 바란다.이번 사고의 원인과 문제점들도 정확히 밝혀내 위법사항이 드러나면 설계와 시공회사는 물론이고 감리·감독·관리부서에 대해 책임을 철저히 묻도록 해야할 것이다.
  • “책임자 엄중 문책하라”/“경악”… “분노”… 시민의 소리

    ◎당국은 출퇴근길 안전 보장 못하나/등교길 어린학생 애꿎은 죽음 울분 성수대교의 참사 소식에 경악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행정당국의 무사안일한 태도에 분노를 터뜨렸다.시민들은 또 이번 사건의 책임자들을 엄중 문책하고 한강 다리 모두를 재점검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고영원(37·장훈고교사)=한마디로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다.행주대교 붕괴 등 그동안 여러차례 사고가 있었고,TV 등에서도 한강다리의 안전이 위험 수위에 있다고 보도했는데도 안일한 행정으로 일관한 당국 등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최근 인천구청과 세무서의 비리 등도 무책임한 행정에서 비롯된 것이다.더욱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 학생들이 애꿎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울분을 누를 길이 없다. ▲송혜진(34·여·회사원·강서구 등촌동 630)=15년밖에 안된 다리가 무너진다는게 정말 어처구니 없다.평범한 시민의 출퇴근 길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과연 계속 살아야할까라는 생각도 해봤다.정말 정부 당국에 대한 불신을 지울 수 없다.이런일이 사후에 몇몇사람을 인사조치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관계 당국과 업체들이 똑같이 내부모 내 자식이 다니는 길이라는 절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김현문(43·일흥운수 택시기사)=택시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한강 다리 대부분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마 기사들만큼 이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그런데 서울시내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성수대교가 무너졌으니 어떻게 당국의 발표를 믿겠는가.또 40t이 넘는 트럭이 한대 지나가면 승용차 10만대가 지나간 것과 같은 충격을 준다는데 평소에 규정을 무시하고 달리는 트럭을 통제하는 것을 보지못했다. ▲이주한(24·건국대 섬유공학과 3년)=사고소식을 처음 접하고 번뜩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다리를 지나가지 않고 있을때 사고가 나 다행이라는 것이었다.유족들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이제 어느 다리를 믿고 강남북을 오갈 수 있겠는가.정말 한심한 생각뿐이다.정부당국은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밝혀내고 또다른 사고의 가능성을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즉시 마련해 시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양미경(31·주부·서대문구 홍은동48))=언제 어느곳에서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세상이 온 것 같다.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야 하겠는가.이번 사고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떤 식으로 발뺌을 할지 궁금하다.잘못을 저지르는 공무원만 있고 책임지는 공무원은 없으니 이런 사고가 계속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영남(45·개인사업·중랑구 묵1동)=집과 직장을 오가기 위해서는 매일 영동대교를 지나다녀야 한다.다리를 지나다 어쩌다 정체라도 할 경우에는 무척 유동이 심하다고 느낌을 받았다.혹시 사고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곤 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다.지금부터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안전대책을 마련,시민들이 마음 놓고 통행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교량 안전관리 어떻게 하나/6명이 8개다리 점검 맡아/20년이상 교는 토목학회서 정밀진단/20년이하는 4개사업소서 분기별로 한강에 설치된 교량에 대한 안전점검은 크게 정밀점검,분기별점검,일일점검으로 나뉘어 실시되고 있다. 마포·잠실대교등 준공된지 20년 이상된 교량은 서울시가 대한토목학회에 용역을 줘 정밀진단을 실시하고 있다.20년이하인 나머지 교량에 대해서는 성수대교를 관리하고 있는 동부사업소등 4개의 사업소에서 1년에 4번씩 분기별로 독일에서 들여온 교량점검차를 이용,안전점검을 실시하고 동시에 도보순찰대를 이용,매일 육안으로 다리의 안전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의 이같은 한강다리에 대한 안전점검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이번에 참사를 빚은 성수대교는 지난해 12월 서울지역 전체 교량에 대한 교각안전점검을 한 결과,양호한 것으로 드러났다.
  • 북,우리기업에 「방북커미션」 요구/“초청장 경신… 1백만불 내라”

    ◎삼성·현대·대우등과 북경서 협상중 북한이 최근 북한진출을 준비중인 국내 38개 기업 중 일부와 접촉,이미 발급한 방북초청장을 재심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하고 초청장 경신에 필요한 커미션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측은 지난달초 남측 기업인들과의 접촉창구를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로 일원화하고 중국 북경에 사무소를 설치,현대·삼성·대우등 국내 대기업들과 초청장 경신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등 주요기업 소식통들은 7일 『북한이 최근 우리 기업인들과의 접촉창구를 고려민족발전협회로 일원화하고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총회장을 통해 이미 발급한 방북초청장을 재심하겠다는 입장을 국내 일부 기업들에 통보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한 업계 소식통은 특히 『일부 기업이 초청장 경신에 필요한 커미션으로 북한측으로부터 1백만달러 정도를 요구받았다는 루머가 기업인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원의 한 당국자도 이와 관련,『고려민족발전협회는 북경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삼성·현대·대우등 대기업을 포함한 국내 기업들과 접촉,초청장경신을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확인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북한이 초청장 재심을 통보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면서 『특히 초청장경신에 필요한 커미션을 요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통보 받은적 없다 그러나 삼성물산·(주)대우·럭금상사 등과 같은 대그룹의 종합상사들은 북한으로부터 무효 통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북경 채널을 통해 북한과 거래하는 일부 중소기업들이 그러한 통보를 받았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대기업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며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초청장경신 통보의 저변/외화난 타개·핵­경협 연계정책 우회 속셈/한국기업 경쟁시켜 대북투자 촉진 유도 북한이 최근 국내 대기업들에 대한 방북 초청장 재심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은 당면한 외화난을 완화하면서 남한 기업들의 대북투자를 촉진시키려는 양면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움직임은 북한이 최근 남한 기업인들과의 접촉창구를 중국 북경 소재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로 일원화하면서 우리 업계와 정부측에 포착됐다.북측이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에 대한 외자유치가 원활치 않자 이 협회를 9월초 노동당에서 정무원 산하조직으로 개편해 북경 현지에서 우리 기업측과 접촉하면서 기왕에 발급한 초청장들을 정비할 뜻을 알려 왔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김달현 전국가계획원장 명의의 초청장을 비롯해 박경윤 금강산국제총그룹 등 여러 채널로 38개 업체에 초청장을 내준 바 있다. 북측의 이같은 움직임은 우리 기업의 경쟁심리를 교묘히 부추겨 정부가 설정하고 있는 핵·경협 연계정책을 우회하려는 속셈이라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이는 북측이 우리측 개별기업과 접촉하면서 『핵문제는 곧 타결될 것』이라면서 투자를 서두를 것을 종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초청장 재발급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실제로 북경 현지에서 북측 중개인들을 접촉한 일부 업체들이 북측으로부터 초청장 재발급에 대한 커미션을 요구받았다는 소문이 업계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정부당국은 이에 대해 『북한이 초청장 재발급에 대해 우리 기업에 거액의 커미션을 요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면서 대북 진출에 관한한 업계가 과열경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다시 말해 『대외 신용도 등 북한의 투자여건을 감안할 때 우리측이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미국이나 일본 등 서방기업들도 쉽게 진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 “갈데까지 간 군기문란” 충격/사병의 「소대장 길들이기」 파장

    ◎구타·면전모욕 등 공공연하게 저질러/상급자들 문책우려 미온처리도 문제/사병 고학력시대 맞춘 지휘체계 확립 필요 지난달 27일 발생한 군장교무장탈영사건이 지휘관을 포함한 대량구속수사로 확대되면서 이 사건의 배경인 군기강의 난맥상과 지휘체계의 문제점이 백일하에 드러나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군당국이 이 사건과 관련해 해당부대인 육군 53사단 해안4대대장과 사병등 29명을 구속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짐으로써 이른바 「소대장길들이기」 등 군내 하극상이 실제상황임이 재확인됐다. 육군합동조사단의 조사에 따르면 문제의 53사단 13,14중대에서는 소속 상병·병장 등 고참소대원들이 새로 부임하는 초급장교인 소대장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물먹이는」 공공연한 군기문란사태가 빈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소대장실에서 화투놀이를 하거나 소대장에게 반말을 쓰는 정도는 약과였다.상급지휘관이 부대를 방문할 때 소대장의 군화를 감춰 당혹케 하거나 심지어 소대장을 구타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고참병들이 담합해 소대장에게 반말을 쓰도록 하급자에 강요하거나 이른바 「소대장길들이기」기간으로 3개월을 설정했다는 사실들이 밝혀져 국민들을 아연실색케 하고 있다.이같은 뒷얘기들은 군내부에서 군기문란이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다수 군관계자는 이같은 극단적인 하극상상황이 전군에 일반화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이번에 문제가 된 부대는 해안에 소초와 분초를 끼고 있는 사단이어서 타부대에 비해 군기강이 상대적으로 해이해질 소지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군내부를 잘 아는 다른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군 전체에 팽배해 있는 기강문란상황중 빙산의 일각이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즉 사병들이 신임장교와 하사관들을 거꾸로 「군기잡는」 어처구니없는 하극상이 여타부대에서도 벌어지고 있거나 일어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책임이 구속된 일부사병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대대장 등 상급지휘관들이 보신에 급급,사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 기인한다는 점이 그 개연성을 높여준다.이와 함께 초임장교들의지휘능력부족도 이번 사태를 가져오게 한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사병들의 40%가량이 전문대졸이상으로 장교들이나 하사관들보다 학력이 오히려 높은 경우가 많은 등 시대상의 변화에 발맞춘 군지휘체를 확립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군당국이 이번에 대대장까지 구속한 것은 이같은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달 27일 사건발생직후부터 이들을 차례로 구속해놓고도 이를 쉬쉬해온 군당국의 태도도 문제다.지금까지 군이 비판받아온 여론눈치보기,축소·은폐의 전형이 아니냐는 것이다.
  • 만취 경관 러시안 룰렛게임/동료쏴 숨지게

    【제주=김영주기자】 각종 강력사건의 빈발로 민생치안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야간근무·방범순찰근무를 담당한 경찰관들이 파출소안에서 술을 마시고 권총으로 「러시아룰렛」게임 장난을 하다 동료를 쏘아 숨지게 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30일 상오 0시55분쯤 제주도 서귀포경찰서 무릉파출소 1층 방위병 타격대대기실에서 이 파출소 김성진순경(23·제주시 화북1동)이 술에 취한 채 38구경 6연발권총에 실탄을 넣고 동료들에게 「러시안룰렛」게임을 하다 곁에 있던 고상림순경(25·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왼쪽가슴을 쏘아 숨지게 했다. ◎제주경찰청장 경고/서귀포서장 등 해임 경찰청은 30일 제주도 서귀포경찰서 무릉파출소에서 발생한 총기사고와 관련,지휘책임을 물어 최기호제주경찰청장을 경고조치하고 오병탁서귀포경찰서장을 직위해제하는 한편 후임 서귀포경찰서장에 한근보제주경찰청 경비과장을 발령했다. 경찰은 또 권총을 쏜 무릉파출소 김성진순경을 구속·파면하고 서귀포경찰서 방범계장 오용숙경위와 무릉파출소 부소장 김춘부경장을 징계,무릉파출소장 조화정경사를 직위해제한뒤 징계하기로 했다. 제주경찰청 경비과장에는 대구 수성경찰서 이철생 총경 승진후보를 발령했다.
  • 멸망의 원인(백제를 다시본다:30·끝)

    ◎한강유역 뺏긴뒤 서남부에 고립/의자왕,초기 전승에 자만 실정 거듭/대당외교 실패… 많은 충신 귀향보내/18만 나당연합군 침공때 동원가능 병력은 5천명 부소산성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노라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진다.1천3백년 전 이곳에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3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서기 660년 당의 침략군이 신라와의 사전협약에 따라 서해로부터 금강 하구에 소리없이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뒤 사비도성을 유린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이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란 없다.백제 멸망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역사적 인과관계에서 볼 때 우리들은 많은 멸망원인을 열거할 수 있으나 이를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이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랄까가 매우 좁았다.즉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로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백제가 기대를 건 잠재적인 동맹세력은 고구려였으나,양국은 다만 해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이었다.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것은 한 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하지만 백제는 결코 신라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와의 국경전쟁에서 헛되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내부사정은 차츰 악화되어 갔다.의자왕이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만 해도,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는 인간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성품이었고,국가중흥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왕태자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해동의 증자라는 평까지 듣던 의자왕이었다. ○신라 포위 못벗어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결행한 신라 침공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마침 642년 평양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군국의 대권을 장악했는데,의자왕은 그와 손잡고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백제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신라의 서해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화성군)의 목을 죄는 한편 신라의 낙동간 방면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경북 합천군)을 함락하여 경주를 가까이서 위협했다.이같은 전과는 의자왕의 경탄할 만한 기민성과 결단력에 힙입은 바 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자왕의 인간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전투에 잇따라 승리한 의자왕은 어느 덧 자만심에 빠져 만기를 독재하는 통치스타일로 기울어졌다.사태를 더욱 악화시긴 것은 왕비 은고의 지나친 권력욕이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여 정림사탑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는데,거기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설명하여 『의자왕이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아낙네(왕비)를 너무 믿어 형벌이 오로지 충양한 사람에게 미쳤다』고 했다.양심적인 재상인 성충이 옥사하고 흥수가 귀양을 간 것도 이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또한 해방 직후 부여에서 우연히 탑비가 발견됨으로 해서 그 실재가 확인된 대좌평 사택지적의 정계은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충신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임자 같은 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비 권력욕 지나쳐 무엇보다도 의자왕이 범한 큰 과오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당은 신라측의 끈질긴 한반도 개입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 화평관계를 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의자왕은 이같은 권고를 거듭 묵살했다.652년 이후 백제는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백제를 치기로 한 신라와 당 양국간의 비밀협상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절박한 때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바야흐로 백제 상공에는 잔뜩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었으나,의자왕은 전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서기 660년 여름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은 백제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백일하의 날벼락이었다.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국경선 깊숙이 나타났을 때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사대 5천명이 고작이었다.이 결사대는 사흘동안 황산벌(충남 연산)에서 신라군과 처절하게 싸운 끝에 전원 옥쇄했다.한편 13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금강 동쪽 기슭에 상륙,7월 11일 신라군과 합세했다. 드디어 12일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공격에 나섰다.연합군은 도성 동쪽 20여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의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했다.적군의 강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이에 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왕권을 대행했으나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이윽고 연합군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부소산성을 포위하자 절망에 빠진 지배층과 백성들이 떼지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다.그리하여 부소산성 정상에는 나당 연합군 깃발이 나부끼게 되었다. ○부흥운동 무위로 그러나 백제는 그 뒤 3년간 더 살아 꿈틀거렸다.국왕의 항복결정을 거부한 지방주둔 병력이 왕족 복신의 지휘 아래 총집결하여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다.이들은 한때 사비도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주류성(서천 한산 혹은 부안으로 짐작됨)과 임존성(예산 대흥)이 당시 부흥운동군의 일대 거점이었다. 663년 가을 백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이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3만대군을 보냈다.그러나 왜군은 백강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포착되어 네차례의 접전 끝에 섬멸되고 말았다.당시 불에 탄 왜선 4백척에서 뿜어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중 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왜군 격파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일제 공격으로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백제부흥운동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가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이식되어 그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했다.지난해말 세상에 공개된 금동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화로,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망국의 군주/의자왕 중국 북망산에 묻힌듯/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병사 우리가 고대사에서 만날 수 있는 큰 비극을 꼽자면백제패망을 다룬 AD660년의 기사가 그 하나일 것이다.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옛 이야기와 더불어 아련히 들려오는 사비도성의 황급스러운 말발굽소리는 백제사가 간직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붙잡혀 2만여 백제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 망국의 군주는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당에서 병사한 것으로만 되어있다.이는 의자왕과 휩쓸려 포로가 된 왕자 부여릉(AD615∼682년)이 당에서 남긴 비교적 소상한 활동기록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이 물음에 해답을 던져줄 가능성은 있다.의자왕의 신하로,또 왕자 부여릉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흑치상지(AD630∼689년)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9년에 발굴된 이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왕자 부여융이 주군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또 묘지명은 AD677년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었을 때 흑치상지는 속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다만 41줄 1천6백4글자나 되는 묘지명 새김글씨에 의자왕 기록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는 당나라 왕후장상들의 묘역 북망산을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다.북망산에서는 백제유민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 말고도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유민인 천생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이로 미루어 의자왕의 무덤도 북망산 묘역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백제 최후의 군주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한·중학계의 협력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학계는 북망산 한쪽에 묻혀있을 의자왕 묘지명을 찾아야할 큰 역사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경찰은 무얼하고 있는가(사설)

    「지존파」의 집단살인극에 대한 악몽이 채 가시기도전에 이번에는 부녀자 연쇄납치 살해·성폭행·강도사건이 발생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훔친 택시에 변조된 번호판을 달고 부녀자 6명을 차례로 납치한 범인은 이들을 성폭행하거나 심지어 2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이 「광란의 범죄」를 지켜보면서 시민들은 분노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이번 사건의 특징은 범인과 아무런 원한도 관련도 없는 시민들이 살해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운 나쁘게 그시간에 문제의 택시를 탔다는 우연성만으로 희생된 맹목적인 살인인 것이다.지난번 「지존파」살해사건도 마찬가지였다.살인의 구체적 동기가 없이 『무작정 죽이려했다』는게 자수한 범인의 말이다.더구나 살해대상을 자기의 나이대로 38명으로 정했다고하니 이 무슨 해괴한 광기인가.맹목적살인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지존파」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 연쇄납치사건도 우리사회에 만연한 인명경시풍조와 살인불감증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생각된다.도덕과 건강한 상식으로 지탱되던 우리사회의 한구석이 왕창 무너져내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감마저 든다. 이번 사건에서 범인은 8월28일쯤 20대 여자승객을 납치하려다 실패한 이후 한달동안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연속적으로 범행을 되풀이 해왔다.그러나 경찰의 검문에 단한번 걸리지 않았다고 하니 경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간다. 게다가 늘상 지적되었던 경찰의 공조체제가 이번에도 허점을 드러내 범인에게 더많은 범행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세번째 피해자인 권모씨가 납치된뒤 김제경찰서는 지난 6일쯤 범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독자적 수사를 벌여오다 20여일이 지나 뒤늦게 지명수배한 것으로 알려졌다.범인체포의 공을 다투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이때문에 마지막 세차례의 범행은 막을수도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국민들이 『무서워서 외출도 못하겠다』고 할 정도가 되었으니 체감으로 느끼는 민생치안은 「부재」인 셈이다.대낮에 차로 납치되고 아무 이유없이 끔찍한 주검으로 끝나는 사건이 빈발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은 당연하지 않겠는가.정부는 연초 생활개혁10대과제를 선정하면서 「민생침해 범죄소탕」을 세번째 순위로 올려놓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치안이 이 지경으로 국민들의 불신을 받게되었으니 참으로 심각한 사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경찰은 강력사건에 대비해 민생치안을 위한 체계확립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장비의 낙후나 인력의 부족을 구실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튼튼한 민생치안의 확립으로 실추된 경찰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 범죄의 특성(신세대범죄 왜 흉악해지나:중)

    ◎거의 반인륜·충동적 범행/공동체의식 없고 「극단적 이기」 팽배/이유­대상 불분명… 막연하게 분풀이 최근들어 발생하는 20대 범죄는 크게 「패륜범죄」「사회저항형 범죄」「충동범죄」「보복범죄」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이들 범죄 가운데 80년대 중반부터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 사회저항형범죄다.이유나 대상도 없는 「분풀이식 사회저항형 살인」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생한 연쇄납치살인사건도 똑같은 유형이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사회의 교육기능과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패륜범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핵가족화로 전통적인 효자상이 무너지고 가족간의 불화에서 발생하는 대표적 범죄유형이다.평등사상이 잘못 반영돼 부모 형제도 이해타산 관계로 변질되면서 가족의 살상도 서슴지 않는 패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5월 19일 새벽 서울 강남에서 발생한 대한한약협회 서울지부장 박순태씨부부를 살해한 장남 한상씨(23)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씨는 93년 8월 미국유학을 떠나 어학연수를 받던 도중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2천만원을 잃고 승용차 구입등으로 돈에 쪼들리자 귀국,1백억원대에 달하는 재산상속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했다. 살해방법이 너무나 끔찍해 경찰이 박씨를 진범이라 발표했을때 많은 국민들이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붕괴,물질만능의 비뚤어진 의식등이 어이없는 폐륜범죄로 이어졌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92년 10월 24일 거실에서 잠자고 있던 아버지(50)를 공기총으로 살해하고 시체를 묶어 시멘트벽돌 4장과 함께 쌀자루에 넣어 한강에 내다버린 김진태씨(26·무직·절도등 전과9범)의 경우도 무너진 가족관계에서 빚어진 범죄로 분류된다.중3때 절도를 저질러 소년원에 갔다온 김씨는 이후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고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사회저항형 범죄」는 그러나 불특정 다수등을 상대로 자신들의 그릇된 한풀이를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이번 「지존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사회에 대한 비뚤어진 불만,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인간을 잔혹한 범죄꾼으로 만들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범죄는 범의와 범행간에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돼 사회불안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91년 10월 훔친 프라이드 승용차로 서울 여의도 광장을 질주,2명을 숨지게 하고 21명의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김용제씨(21)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국민학교 다닐 때 칠판글씨가 안보여 공부를 못했고 졸업뒤에도 직장마다 취직한지 한달도 채 못돼 내쫓겨 세상이 싫어졌다는 김씨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보니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었다. 김씨는 『국민학교때 어머니만 가출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음독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전문가들은 어릴때부터 상처받은 영혼이 성년이 되어서도 치유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의 교육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충동범죄」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경쟁심리가 이들의 인내력을 빼앗아간데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팽배와 윤리교육의 부재등이 복합돼 감정폭발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21일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 모식당에서 이모씨(23·방위병)등 친구들과 술을 마신 김지훈씨(21·종업원)는 자리를 끝내고 택시를 잡으려다 정우진씨(20·재수생)를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먼저 택시를 잡으려 나와 있었는데 정씨가 가로채려 했다며 인근 포장마차에서 흉기를 들고와 휘두른 것이었다. 공중전화를 오래 건다고 시비가 붙어 생기는 「공중전화 살인」,술집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일으키는 「우발적 살인」등 이러한 충동범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밖에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발생한 영등포 「불출이파」행동대장 오일씨(23)피살사건에서 드러나듯 다른 조직과 이권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조직간 보복살인」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20대 범죄가 빈번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격적·폭력적인 것이 적극적이고 「사내답다」는 우리사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문화적 풍토와 무관치 않다고 한결같이 지적한다.실제로 지난해 발생한 1천20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20대가 저지른 사건이 3백57건(35%)으로 가장 많았다.또 같은 기간동안 살인을 포함한 강력범죄도 전체 1만4천5백27건 가운데 20대의 범죄가 5천5백30건(38%)으로 가장 많아 20대 범죄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사회인으로 나서는 20대들에게 가족구성원들과 사회 주변의 모두가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갖고 건전한 가치관을 갖도록 지도하는 길만이 그들과 사회를 범죄에서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제언한다.
  • 전 전대통령 「국민께 드리는 말씀」 요약

    ◎“「12·12」는 사회 평온… 쿠데타 아니다” 주장/전 총장측이 먼저 자의적 부대 출동/보안사,내전 막으려 대응병력 동원 90년대도 반이 지나고 몇년 안있어 21세기를 맞이하게 되는 이 시기에 제가 70년대의 「12·12사태」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12·12는 박정희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된 「10·26」사건과 관련해서 용의자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범인은 대통령을 제거한뒤 자기계열의 군부세력을 이용해서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정권을 탈취하려 했습니다. 김재규 스스로 털어놓고 확인한 이러한 「3단계 혁명계획」은 10·26의 성격이 내란사건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정씨는 김재규와 동향이며 호형호제하는 친밀한 관계로 김재규의 추천으로 참모총장이 되었고 10·26 당일에는 범행장소인 안가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접해 있는 50m의 지척거리에서 수분에 걸쳐 수십발의 총성이울렸는 데도 평생 총격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그가 대수롭지 않은 오인사격으로 생각했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건직후 김재규로부터 대통령의 유고사실을 알게 됐으면 육군참모총장 직책을 맡고 있는 정씨로서는 우선 그 엄청난 사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진상과 경위를 알아보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김재규를 의심하면서도 그와 같은 차를 타고 그가 하자는대로 황급히 현장에서 벗어났습니다. 육군본부로 이동한 뒤에도 군과 휴전선의 이상동향을 알아보고 일단 긴급상황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면 곧바로 정상적 조치들을 취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범행현장 별채에서 김재규를 대기하고 있었던 사실과 그 곳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김재규의 지시대로 대통령권한대행(국무총리)과 상관인 국방부장관에게도 수시간 동안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김재규의 내란계획이 실패로 판단될 때까지는 사태추이를 살피며 김재규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계엄사령관이 된 뒤에는 『박대통령의 서거는 애석하지만 국가와 국민전체의 불행은 아니다』고 김재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쿠데타를 해서라도 막겠다』고 정치적 저의를 드러냈습니다. 내란사건에 대한 수사는 바로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목적이었습니다. 소장이 대장을 연행했으니 「하극상」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나 이 사건은 수사담당자가 범법용의자를 조사한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범인이 권부의 한 축인 중앙정보부장이었다는 사실,관련용의자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바로 용의자 수사를 위한 영장발부권자(계엄사령관)였다는 사실등 통상적 방법과 순리적 절차에 따라 용의자를 연행·수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밟는 절차에 하자가 있었지 않나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고 사전재가가 나기 전에 정총장을 연행한 것도 시비가 될 수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미리 연행계획을 보고한 바 있고 처음에는 재가가 난뒤에 정총장을 연행할 계획이었습니다.재가에는 국방부장관의 배석이 필요했으나 국방부장관은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로 출두를 지시했음에도 두차례나 도피·잠적함으로써 그 시간 만큼 재가가 늦어진 것입니다. 합수부측이 처음부터 쿠데타 목적으로 전투병력을 출동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정총장을 연행할 때에는 수사관과 수사관을 돕기 위해 합수부에 이미 배속돼 있던 헌병들만 동원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다른 부대가 출동하게 된 것은 국방부장관의 도피잠적으로 군지휘계통에 공백이 생긴 가운데 정총장 계열의 일부 지휘관들이 먼저 군통수체계를 무시한채 자의적으로 부대를 출동시킨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정총장측 지휘관들은 합수부와 대통령 경호부대인 30경비단을 향해 포격을 명령했는데 이는 청와대와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총리공관등이 있는 특정지역까지 사정권에 포함시키는 위험천만한 만행이었습니다. 서울 중심가에 미사일 발포까지 명령한 저들의 난동에 대해 보안사령부는 무고한 시민들의 피해를 예방하고 사태가 내전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대응병력을 출동,난동지휘관들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김재규의 10·26내란사건 관련 용의자를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충돌사건」일 뿐입니다. 12·12사태 다음날에도 대통령께서는 건재하셨고 헌정질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행정부·국회·사법부나 국민생활에 아무런 변화나 영향이 없었습니다.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러한 사태를 「쿠데타」라고 하거나 「군사반란」이라 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당시 우리의 생각은 순수했고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정당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몇몇 개인의 자의가 아니라 필연적 인과에 따라 굴러가며 10·26이라는 반인륜적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12·12의 결단에 힘입은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승화·장태완씨,전씨측 「석명서」 반박/“계염사령관 불법 체포… 분명한 반란행위”/대통령 경호병력 사전결제없이 교체/정/무단 서울진입 무장병력 진압은 당연/장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은 15일 하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쌍용아파트 자택에서 전전대통령측이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 대해 『반성은커녕 지금까지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 『법정 말고는 어디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내가 가만히 있으면 저들의 뻔뻔한 거짓말을 인정하는 꼴이 돼 말문을 털어놓는다』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전대통령측은 우선 정전총장의 내란방조의혹에 대해 김재규가 육본벙커로 오는 도중 차안에서 박정희전대통령의 시해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따지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그날 하오7시20분쯤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와이셔츠차림으로 뛰쳐나오며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다급한 김에 김부장에게 「외부소행이냐 내부소행이냐」를 물었으나 김부장이 「나도 정신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고 해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당시 신군부측은 정전총장이 차안에서 김재규와 앞으로 계엄이 내려질 경우 어떤 부대를 동원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상의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차안에서 김부장이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이 내용에 대해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야 하고 계엄령을 내려야 할 텐데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본 것은 사실이다.일국의 대통령이 돌아가신 비상상황에서 사후수습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보안을 지켜야 하지만 참모총장으로서 동원가능한 부대를 염두에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전전대통령측은 시간을 끌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기회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흉계다.김재규와 육본벙커로 돌아오자마자 전군에 비상을 걸어 북한의 남침에 대비토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또 자체방위력이 없는 육본을 방어하기 위해 9공수에 출동을 명령했다.전방부대는 북한병력의 움직임에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양평에 있던 20사단에 대해 서울로 이동할 준비를 시켰다.장태완수경사령관을 불렀는데 1시간후쯤 육본벙커로 왔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그날밤 11,12시무렵 김비서실장으로부터 범인이 김정보부장이란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해 듣고 김진기헌병감에게 체포토록 명령했다.수사관들을 차출하는등 준비에 1시간가량 걸렸을 것이다.체포한 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신군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김재규와 한통속이었다면 왜 나와 사이가 좋지도 않던 보안사령관에게 수사토록 했겠는가. ­전두환전대통령등 12·12관련자들의 행위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당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수습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계엄사령관이다.전두환의 합수부도 따지고 보면 법에 명시된 기관이 아니라 대통령 시해범 색출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참모총장의 권한중 일부를 위임해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들이 언제 전두환일파에게 참모총장의 공관을 무력으로 점령해 계엄사령관을 체포할 권한을 줬느냐. 그것도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던 헌병대병력을 자기들 수하의 부대로 교체하고 사전결재를 9시간이나 미루고 감금상태에서 사후결재를 한 것이 어떻게 합법이냐. 또 12·12사태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장재향군인회장(63·종합11기)도 전전대통령의 석명내용에 대해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면서 『지휘계통 없이 불법적으로 서울시내에 들어온 무장병력은 당연히 진압해야 하며 이 진압행위를 반란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치군인들의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1개분대이상 규모의 무장병력이 서울시내에서 돌아다니려면 24시간이전에 참모총장의 사전승인을 얻어야 하고 반드시 헌병과 함께 다녀야 한다』면서 『수경사령관은 통보가 없는 병력에 대해서는 즉시 연행하거나 포획·사살하도록 임무가 부여돼 있다』고 당시 임무를 설명했다.
  • 청산돼야할 구시대 유물(사설)

    「주사파」라는 암세포의 전이상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또다시 일깨워준다.고교생들을 선동하는 친북 잡지사가 적발된데 이어 이번에는 고교생들을 상대로 주사와 반미를 학습시키고 각종 시위현장에 극렬행동대원으로 활용해온 조직이 적발되었다. 우리의 고교생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흡수력이 민감한 그 세대의 특성과 함께 진학압박에 억눌린 매우 독특한 집단이다.그들을 상대로 고도로 훈련된 조직이 접근하면 백발백중 빠져들 게 분명하다.그런데도 간헐적으로 「걸려드는」 소물들만 겨우 검거하는 것이 우리 현실인 듯하다.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어느 분야 어느 부위에 주사균과 암세포의 침윤과 전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아내어 과감히 절제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창궐하는 속도보다 너무 뒤처진 단속으로 주사파에 대한 내성만 강해지고 급기야는 불감증적 현상까지 만연한 것이 현실이어서 고교생들까지 어처구니없는 이념의 올가미에 걸리게 된 것이다.다행히 사회전반의 분위기와 인식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합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다.수업거부가 찬반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부결된 전국 교육대학생들의 경우나 파업 무기만을 전횡하는 노조집행부에 반대하여 차별되기를 원하는 노조원들의 확산 따위가,의식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미로 보이는 것이다.이런 계제를 살려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돌이킬 수 없도록 피폐화하고 그럼으로써 주사파의 침투경로를 제공해주어온 모든 불법 시위행태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바로잡는 일대작업을 벌여야 한다.그런 뜻에서 우리는 서강대의 「총장 비난 대자보」에 대한 징계회부 논의를 예의 주시한다. 학칙과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학교와 학생 사이에 있어야할 도의적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회복하는 본격적인 반성의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특히 운동권의 중심이 되어온 구시대유물의 「대자보문화」 폐해에 대해서는 일대 반성의 청산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집단의 정명성 뒤에 숨어 무책임하게 행사해온 그 문자의 폭력이 끼친 폐해는 민주화시대의 기여를 무산시킬만큼 심각하다.아무 거증도 하지 않으면서 인신공격과 무고를 하고 흠집을 내는 일을 거듭해오는 동안 체질까지 변질된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은닉매체들의 정당하지 못한 역할이 우리에게는 이제 필요없다.그 낡은 무기들이 여기저기서 여전히 흉기노릇을 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서강대의 대자보 징계논의는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정정당당한 것 이외의 어떤것도 용인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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