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양형
    2026-08-18
    검색기록 지우기
  • 6차 연장
    2026-08-18
    검색기록 지우기
  • 한동훈
    2026-08-18
    검색기록 지우기
  • 음식점
    2026-08-18
    검색기록 지우기
  • 취향
    2026-08-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252
  • 동해안 개발은 선거용 립서비스?

    “속초항 등 강원 동해안 항구를 관광 및 레포츠 중심의 미항(美港)으로 조성하겠다.”(강원도) “1조 7000억원이 넘는 재원조달도 불투명한 개발 청사진을 더이상 믿지 못하겠다.”(어민들) 강원도가 속초항 등 동해안 4개 항구를 관광미항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자 22일 어민과 주민들이 번번이 장밋빛 청사진만 남발한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도는 지난 20일 해양자원의 집적성과 가치가 우수한 속초항을 동북아 중심의 국제관광항으로 조성하고 해안경관이 뛰어난 안목, 초곡, 남애항은 어촌의 다핵성장 거점항으로 조성해 동해안의 관광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2015년까지 4개 관광항의 20개 사업에 1조 787억원, 민간투자 유치 14개 사업에 6269억원 등 총 34개 사업에 1조 7056억원을 집중투자할 계획이다. 속초항은 여객, 물류, 위락, 레포츠 등 해양복합 레저단지로 육성키로 하고 내년부터 2009년까지 4만t급 3선석을 갖추어 연간 여객 112만명, 화물 35만 4000t을 하역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안목항은 해양과학 전시관과 요트 마리나시설, 유람선터미널 등을 갖추어 도립공원과 해수욕장, 배후도시, 횟집거리 등과 연계한 해양복합 관광항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초곡항은 청정경관 등 자연·인문·역사자원을 활용한 해양체험 테마관광항으로 조성한다. 남애항은 아름다운 미항, 어촌, 먹을거리자원과 영동고속도로의 접근성을 이용한 휴양형 관광항으로 개발한다며 구체적인 계획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정부와 강원도 일선 시·군에서는 항구와 해안개발계획 청사진을 수도 없이 발표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것은 없다.”며 ”장밋빛 청사진은 더이상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강원도는 지난해 8월에도 삼척을 중심으로 한 후진·정라진·맹방·근덕·원덕에 2020년까지 1조 4500억원을 들여 해양 휴양벨트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었다. 해양수산부도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속초항의 동북아 거점항 개발, 동해항의 북방교역 최대 기지화, 주문진항의 남북교류거점 관광항, 금진·심곡항 관광개발, 수산항 개발계획 등을 발표해 왔으나 이후 흐지부지된 상태다. 어민 김동철(47)씨는 “실행하지도 못할 거창한 해양 개발계획을 주민들은 더이상 반기지 않는다.”며 “갈수록 어려워지는 고기잡이를 감안해 항·포구 준설작업과 물양장 개선사업, 방파제 보강 등 좀더 현실성 있는 정책이 아쉽다.”고 지적했다.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野 “DJ방북후 통일헌법 개헌 의혹”

    22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방북 문제와 지자체 비리 공방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DJ 방북을 여권의 5·31 지방선거 승리, 나아가 2007년 여권 재집권 음모와 연결하며 ‘신 북풍 의혹’으로 몰아쳤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초당적 지지를 촉구하며 방어막을 쳤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시중에서는 현 정권이 재집권을 위해 DJ 방북과 남북정상회담을 악용하고 연방제를 위한 ‘통일헌법’ 개헌을 준비하고 있다는 걱정이 높다.”며 공세를 폈다. 반면 열린우리당 장경수 의원은 “DJ방북을 계기로 남북 양극화 문제 해소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같은 당 김태홍 의원은 “남북경협 등 실질적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DJ에게 전권특사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며 초당적 지원을 강조했다.답변에 나선 이해찬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개인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라며 야권이 제기한 정치적 악용 가능성을 일축했다. 한나라당은 서울시 등 지자체에 대한 종합감사가 지방선거에 악용될 가능성을 집중 부각했고, 열린우리당은 ‘지자체 비리 심판’으로 각을 세웠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은 “여권이 지방권력 10년에 대한 국정조사를 주장하는 시점에 서울시에 대한 정부 합동감사가 결정된 배경이 무엇이냐.”며 선거용 ‘감풍(監風)’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여당은 지자체에 대한 강도높은 국정조사를 촉구했다.열린우리당 양형일 의원은 “토착세력과 연계된 부당한 수의계약이 넘치는 등 지자체의 부패비리 실상을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며 전면적인 국정조사를 촉구했다.오일만 구혜영기자 oilman@seoul.co.kr
  • 형량 가볍고 수사는 미온적

    지난해 7월 프랑스 법원은 어린이 성폭행 범죄자들에게 징역 28년을 선고했다. 우리나라도 최근 파렴치한 성폭행범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있지만 대체로 처벌이 약해 피해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고 장기 격리돼야 재범을 할 수 없는데 징역 3년 이하의 가벼운 처벌이 다반사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짧으면 8개월, 길어야 3년이어서 격리기간이 너무 짧다고 한 성상담소측이 주장하기도 했다. 집행유예, 기소유예 등으로 성범죄자들이 풀려나는 일도 많다. 대검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성매매특별법 위반 사범은 1만2778명인데 기소유예율이 39.4%나 됐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에게 부산지법은 5명에게만 소년원 송치 결정을 내려 피해자 가족의 분노를 샀다. 이른바 `단지 사건’으로 알려진 7세 여아 성폭행 사건에서도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부산에서는 유아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신부에게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지원 변호사에 따르면 최근 정신지체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인지능력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로 필사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있었다고 한다. 성폭행범에 대해서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우선 수사가 미온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판검사가 합의를 종용하는 일도 있고 합의하면 친고죄 규정에 따라 처벌을 하지 못한다. 피해를 수사관이나 법관 앞에서 진술해야 하는 `2차 피해’도 발생한다. 성범죄자들이 성폭행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거나 고소 취하를 요구는 사례도 잦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피해자가 고소하는 비율은 20% 안팎에 머물고 있다. 전담 여성 수사관을 늘리고 진술녹화 시설과 인력을 확충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수사기관이 성범죄자를 감시,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성년자 성폭행범에 대한 양형 기준도 없어 형량도 들쭉날쭉이다.김기용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클릭 이슈] ‘유전무죄’ 사법불신 사라지나

    “거액의 사기대출을 받는 것이 당시 관행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이유는 될 수 없으며, 부실 대출한 금융기관이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점을 감안해 책임을 엄격히 물어야 한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이 분식회계로 금융기관 3곳에서 4148억원의 사기대출과 8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불구속 기소된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밝힌 말이다. 사법부가 정치인·공무원·금융인·기업인 등이 관련된 뇌물·횡령·회계부정 등의 형사사건을 일컫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단하기 위해 재벌 사건과 중요기업의 사건을 부패전담재판부에 맡기는 등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은 감형…‘유전무죄 무전유죄’ 불러 법원은 그동안 일반 형사범죄는 엄단하면서도 재벌, 정치인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는 ‘솜방망이 판결’을 내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사법 불신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달 초 두산그룹 총수 일가는 회삿돈으로 300억원대의 비자금을 만들어 생활비와 세금납부 등에 사용했지만 1심에서 모두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검찰의 불구속 기소 결정 때 일었던 ‘재벌 봐주기’ 논란이 또 한번 일어나기도 했다. 1심에서 1000억원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4년에 벌금 300억원을 선고받았던 조양호 전 대한항공 회장은 2심에서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성실히 일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와 벌금 150억원을 선고받았다. 또 4200억원의 사기대출과 회삿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김성필 전 성원토건 회장도 “외환위기 전 서민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고, 유치원 목욕탕 등 공익시설을 기부했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1심에 비해 절반이 줄어든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정치인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지난해 11월 지난 2002년 불법대선자금에 연관된 정치인 17명의 정치자금법 위반 재판의 1·2심 선고형량을 분석했다. 참여연대는 법원이 이 가운데 4건만 실형을 선고하고 10건은 집행유예,3건은 벌금형을 선고했다며 “신망받는 법조인으로 사회에 이바지했다거나 순수한 마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감형하는 등 법원은 선처사유 제조기”라고 꼬집었다.●전담재판부 배당 등 구체적 해결책 모색 중 이런 관행에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창원지법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양형(量刑) 기준’을 마련하고 오는 27일부터 적용할 계획이다. 재판부별로 들쭉날쭉한 판결을 통일해서 온당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다. 대법원도 재벌 비리 등을 부패전담 재판부가 맡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2003년 처음 설치돼 전국 모든 고등·지방법원에 설치된 부패전담 재판부는 뇌물, 알선수재,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범죄를 주로 처리해 왔다. 부패전담 재판부는 정기적으로 재판장 회의를 열어 통일된 양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어떤 범죄를 포함시킬지 등 구체적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사법부의 변화에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중심에 있다. 이 대법원장은 지난 9일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고법 부장판사 승진자들과 만찬을 하면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오늘 신문을 보라. 화이트칼라에 대한 처벌 여론은 높은데, 이렇게 판결하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게 요원해지지 않겠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산 총수일가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진 다음날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등에서도 사회 지도층인사, 권력형 비리에 대한 엄정한 처리를 강조해 왔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도 “돈과 권력을 가진 범죄자들에게 법원이 지나치게 관대하다. 횡령·배임은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교란하는 사범이기 때문에 좀더 분명한 단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의 기업 수사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돈과 권력 앞에 ‘무딘’ 칼날과 ‘가벼운’ 방망이가 어떻게 달라질지 주목된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검·경수사권 조정 3월까지 마무리”

    오는 3월까지 검·경간 수사권 조정이 마무리되고, 국가수사구조에 대한 전면적 손질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천정배 법무장관은 1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수사권 조정문제에 긴 시간이 흘렀다. 일단 3월까지 이 문제를 해결해 4월 열리는 정기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천 장관은 이어 “수사권 조정 문제가 일단락되면, 국가수사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수사시스템을 점검하겠다는 구상은 수사권 조정 문제를 검·경간 권한 분배 차원을 넘어 국민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평소 인권을 강조해온 천 장관은 최근 논란이 된 혼혈인 문제와 관련,“올 상반기 중 법무부 인권국이 신설되면 국가인권위원회와 협력해 혼혈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인 제도·관행을 발굴해 적극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100여일 앞으로 다가온 5·31 지방선거에 대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지방의원 유급화와 기초의원 정당추천 등으로 조기과열이 우려된다. 선거사범을 ‘간첩잡듯’ 단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이에 따라 법무부는 이번 지방선거부터 선거사범을 검찰에 신고한 시민에게 최고 5억원을 지급하는 ‘검찰 신고보상금 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박용오·용성 전 회장 등 두산사건 관련자들이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서는 “검찰의 항소로 애초 생각한 양형에 근접한 형이 나오도록 노력할 것으로 본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이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엄단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오포비리 한현규씨 징역 3년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이기택)는 2일 경기 광주시 오포읍 주택조합 아파트 건설 등과 관련해 15억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로 구속기소된 한현규 전 경기개발연구원장에게 징역 3년과 추징금 11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한씨가 판교 추모공원 사업과 관련 5억원을 받은 점은 증거가 충분하지만, 정우건설로부터 받은 돈의 규모는 물증이 부족해 6억원만 인정된다.”면서 “한씨는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해 돈을 받았고 액수도 커 중형이 불가피하나, 자수를 했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양형에 감안했다.”고 밝혔다.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北, 6·15통일축전 개최 제의

    북측은 26일 6·15 공동선언 6돌을 기념해 민족통일대축전을 개최할 것을 남측에 제안했다.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정부·정당·단체 합동회의’에서 “올해 조국통일 위업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기본 담보는 온 민족의 대단합을 이룩하는데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고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보도했다.민족통일대축전 개최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해 6·15행사는 남측 당국이 최초로 참가한 가운데 평양에서,8·15행사는 서울에서 각각 열렸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사회플러스] 5개범죄 양형정보시스템 구축

    대법원이 뇌물, 살인 등 5개 범죄의 양형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한다.DB가 구축되면 죄목별 형량이 법원별로 차이가 나는 사례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4일 “뇌물·살인·사기·교통사고·도로교통법 위반 등 5개 범죄의 양형정보DB 구축을 지난해 말 끝내고 일선 법관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거친 뒤 상반기 중 시범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여야 ‘마이웨이’…사학법갈등

    개정 사학법을 둘러싸고 가파른 대치를 하고 있는 여야는 23일에도 원내외에서 서로를 압박하면서 ‘마이 웨이’를 독창했다. #무대 1 원내:“3당 국회 가동”,“본회의 저지”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비상집행위원회에서 “예산안과 파병동의안, 부동산 대책 등 시급한 국정현안은 국정마비를 초래할 사안이기에 다른 정파와 처리할 수밖에 없다.”며 ‘반쪽 등원’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면서 한나라당을 옥죄었다. 이어 한나라당의 인천 집회를 겨냥,“2주에 걸쳐 장외투쟁을 해도 국민 의견은 변화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실효성이 없고 국정만 마비시키는 투쟁은 당장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원내대표는 “원내대책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줄기차게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장외투쟁에 집중하기 위해 오늘 국회의장실 점거농성은 풀지만 여당이 본회의를 열고 김원기 의장이 사회를 본다면 본회의장을 점거, 강력 저지할 것”이라며 맞섰다. 한나라당 사학법 무효화 투쟁본부장인 이규택 최고위원이 사학법 본회의 처리과정에서 사회를 본 김원기 국회의장을 겨냥,“국회 의장실에 있어 봐야 시체실에 있는 것”이라고 의총에서 독설을 퍼부은 사실이 전해지자 의장실과 열리우리당측이 발끈했다. 서영교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은 “아니 그럼,(이규택 의원 등이)시체실에서 매일 도시락시켜 먹고 소주 갖고 들어가서 먹고 했단 말이냐.”며 분개했다. #무대 2 원외:폭설피해 현장 방문, 야 지도부 인천 집회로 그러면서도 여야는 각각 호남 폭설피해 현장을 방문했다. 열린우리당은 정세균 의장과 우상호 비서실장, 강기정·양형일·유선호 등 호남지역 의원 10여명이 전남 영암군 폭설피해 현장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피해 주민들을 위로한 뒤 불법대선자금을 환수할 목적으로 의원들이 세비에서 갹출한 금액 일부를 성금으로 전달했다. 한나라당도 호남폭설지원 대책위원장인 원희룡 최고위원이 이날 현지에 임시 사무실을 열고 상주하면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원 최고위원은 “지방자치단체별로 지원하고 의원들의 두 지역구 갖기 운동을 확대해 자매결연을 맺고 자원봉사·모금 운동 등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이날 인천시청 앞에서 ‘사학법 원천무효 및 전교조로부터 우리아이 지키기 범 국민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27일 대구백화점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 예정이다. 이날 인천 집회에는 박근혜 대표를 비롯해 의원 50여명과 사학·종교·학부모 단체 등 5000여명이 참석했다. 이종수 박지연기자 vielee@seoul.co.kr
  • 김은성前차장 징역2년 선고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김상철 부장판사는 국정원 도청과 관련,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은성 전 2차장에 대해 23일 징역2년을 선고했다.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에 대해서는 이들이 불법도청을 암묵적으로 공모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정원 불법도청으로 도청 피해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통화내용이 유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계획적·조직적·지속적인 도청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검찰이 두 전직 원장을 공모범으로 함께 기소했기 때문에 양형 등을 위해 이 부분에 대해서도 판단한다.”고 전제한 뒤 “이들이 도청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도청 사실을 몰랐다면 국회 등에서 불법감청 여부를 추궁할 때 전 원장들이 국정원 내부조사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등의 김씨 진술에 무게를 실어준 것이다.김씨는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 근무 시절(2000년 10월∼2001년 11월)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로 국내 주요인사들의 전화통화를 도청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사설] ‘구속·기소 기준 공론화하자’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엊그제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구속과 기소의 기준을 공론화해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자고 검찰에 제안했다. 문 수석은 지난 몇년새 구속 건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선진국에 비해 구속비율이 아직 대단히 높다고 지적하고, 불구속 원칙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기준 자체를 원칙에 맞게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이같은 제안을 검찰은 물론 국민 일반이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우리의 법은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해 도주 및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 한해 구속토록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동안 구속을 징벌 수단의 하나로 활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최근에만 해도 강정구 동국대 교수, 박용오·박용성 두산그룹 전 회장,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등 특정인에 대한 구속 여부가 사회적·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울러 같은 범죄에 대해 서민은 으레 구속되고 부유층·지도층 인사는 대부분 불구속으로 빠져나오는 차별 대우가 존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소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 또한 구속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검찰은 문 수석의 제안에 대해 구속·기소에는 다양한 상황과 요인을 판단해야 하므로 기준을 일일이 공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기준을 마련하더라도 개별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판단은 역시 검찰의 몫일 수밖에 없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양형기준을 만드는 것처럼 검찰의 구속·기소 기준도 객관화해야 한다고 본다. 사법절차가 투명하고 예측가능해야 실제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질 수 있다.
  • 靑, 검찰에 구속기준 제시 요구

    청와대가 30일 검찰에 구속기준을 제시해줄 것을 사실상 요구해 파장이 예상된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날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구속과 기소에 관한 딜레마’란 글에서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양형기준을 만들기로 결정했듯이, 검찰에도 지금 자체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구속 여부에 관한 내부 기준을 불구속 원칙에 맞게 보완하고 공론에 부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고 밝혔다. 문 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정상명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구속에 관한 딜레마’와 ‘기소에 관한 딜레마’를 언급했다고 소개해 이날 제안에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실려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문 수석은 “우리 사회는 불구속 원칙을 말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구속요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같이 제안했다. 문 수석은 “근래 강정구 교수 사건, 전직 국정원장 관련 사건,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 등 일련의 사건에서 구속과 불구속이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됐다.”면서 “최근 몇년 동안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 구속비율이 대단히 높은 편”이라고 지적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6) ’정감록’ 도꾼 문양해의 정신세계

    조선후기 ‘정감록’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정감록’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道) 꾼들의 종교성이 드러난다.‘정감록’을 신봉했던 사람들은 특이한 종교단체에 속해 있었다. 이런 내 주장이 어쩜 생소하게 들릴는지도 모르겠다.18세기 후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불행한 젊은 도꾼 문양해(文洋海)의 경우를 한번 알아보자. ●도(道)꾼 문양해 사건이 일어났던 정조 9년(1785) 문양해는 30대의 독신 남성이었다. 그는 본래 충청도 공주의 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체포 당시는 경상도 하동에 살고 있었다. 그의 “흉악한 계책과 역적 행위는 이미 다른 죄인들의 자백에서 명백히 드러났다.”고 했으니, 문양해는 조선왕조의 역적이었다. 그의 일생은 특이한 점이 많았다. 대개 아는 이야기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국엔 독신 남성이 거의 없었다. 문양해는 승려가 아니었으면서도 쌍계사가 위치한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에 조그만 집을 짓고 홀로 도를 닦았다. 문양해가 하동으로 옮긴 것은 계묘년(1783)이었다. 서울에 살던 그의 친척 양형이 어느 서울 양반에게서 건축자금을 넉넉히 얻어준 덕분에 문양해는 하동에 100칸이나 되는 큰 기와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충청감사와 경상감사를 역임한 홍낙순의 아들 홍복영이 바로 물주였다. 홍복영에게서 거금을 받아내기 위해 양형은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게 틀림없다. 하동에 가면 기가 막히게 좋은 명당이 있다고 했다. 그 명당을 차지하면 “세 가지 재앙이 들지 않는다.”고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 흉년, 그리고 전염병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동의 명당에 집을 짓고 내려가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하동 집은 나중에 정감록 조직의 본거지가 됐다. 수천 냥(兩) 씩이나 되는 은자(銀子)를 하동에 보내자 홍복영의 서동생(庶同生)과 4촌은 바보짓이라며 만류했다. 홍복영을 유혹하는 데 성공한 양형의 집안에서도 아내가 이사를 극력 반대했다. 홍복영과 양형이 가족 내부의 반대에 부딪혀 이주에 애로를 겪은 것과는 달리 문양해 일가는 온 가족이 하동으로 옮겨 큰 집을 차지하고 넉넉하게 살았다. 위에 기록한 대로 문양해는 쌍계사 골짜기에서 유유자적하며 은거생활을 했고, 그의 아버지 문광겸은 하동의 지하본부를 총괄했다. 문양해의 3촌 문광덕도 하동으로 옮겨 약포(藥鋪)를 경영했다. 따지고 보면 하동의 본부 건설에 앞장선 이들도 문씨들이었다. 문씨 일가가 아직 충청도 공주에 살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청년 문양해는 길가에서 신인(神人)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문양해에게 이사를 명령했다. 그래서 온 식구가 강원도 간성으로 옮겼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이 번에는 다시 경상도 하동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한다. 신인이 존재할 리 없지마는 하여튼 그랬다. 문씨들이 간성을 출발해 동남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하동으로 들어오는 동안 동행했던 배들은 모두 파손되었다. 그러나 문씨들의 배만은 무사했다. 이것을 두고 여러 말이 많았다. 사람들은 문양해와 친한 신인이 용왕에게 부탁한 덕분이라고 했다. ●문양해는 신인(神人)들의 제자?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조 9년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들 가운데 신인을 직접 만나본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문양해만은 신인을 만났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문양해는 신인들로부터 직접 글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사건의 주모자 이율은 문양해가 향악(香嶽), 노사(老師) 및 징담(澄潭)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신인에게서 글을 배운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관련자들의 진술을 간추려보면 신인 향악선생은 본래 평안도에서 태어났으나 사건 당시엔 지리산 아래 살고 있었다. 향악의 속성은 김(金), 이름은 호(灝)라 했다. 나이는 63세, 머물고 있던 지리산 속의 집은 운재(雲齋)로 알려져 있었다. 어떤 이는 그 이름이 김정(金鼎)이라고도 했다. 신인 노사는 성이 이(李), 이름은 현성(玄晟)이라 했다. 나이는 250살로 인간으로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고령이었다. 별칭은 도처결(都處決)이었다. 그의 호칭은 여럿이어서 서악(西嶽)이라고도 했고, 성거사(成居士)라고도 했다. 나이는 80∼90살가량 되었는데 특히 풍수에 밝았다. 문양해의 할머니 산소도 노사가 정해 주었다는 풍문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이야기는 노사가 땅의 임금(坤帝)이란 풍설이었다. 명지관이란 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그는 천제(天帝)의 배필로 간주되었다. 평소 노사는 학이란 종을 시켜 폐백(幣帛)을 짊어지고 다니게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신인 중의 신인이 바로 노사였다. 그는 그야말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가령 장차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어보더라도 금방 대답해 주었다. 더욱이 노사는 굉장한 정의파라서 권세를 탐하는 무리를 미워했다. 자객을 보내 그들을 찔러 죽이기도 하고, 혹은 호랑이나 표범을 보내 물어 죽이기도 했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다. 노사가 인간 세상에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면, 정조 9년 3월 문양해를 위해 7일간 초제(醮祭)를 지낼 예정이었다. 그만큼 문양해를 아꼈던 것이다.‘정감록’ 사건 가담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노사는 지하조직의 주요 간부들에게 거사에 필요한 정보를 여러 차례 제공했다. 노사와 향악 선생은 문양해와 마찬가지로 지리산 속 깊은 산중에 살았다. 그들 신인은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았다. 그러나 생식(生食)만 했던 것은 아니고 가끔은 불에 익힌 음식도 먹었다. 그밖에 지리산에는 신인 징담이 또 있었다. 그의 속명은 고경명(高輕明)이라 했는데, 그 능력이나 성격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또 다른 신인도 있었다. 문양해는 이렇게 말한다.“신인의 성은 모(茅), 별호는 일양자(一陽子)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문룡(文龍)이라고 들은 적도 있습니다.” 양형의 진술에 따르면, 이 신인은 본래 중국 사람으로 스스로를 ‘모선´(茅仙)이라 불렀으며, 나이는 40세 미만인데 틈만 나면 전국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신인 일양자는 남달리 총명해 누구보다 암기력이 뛰어났다.‘학통(學統)’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책도 단숨에 술술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지리산에 입산해 머리를 깎을 때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밖에 현도진인(玄都眞人)이라는 신인도 있었다. 진인은 그때 나이가 벌써 500살을 넘었다는데, 역시 지리산중에 살고 있었다. 그의 속세 이름은 백원신(白圓神)이라고 했다. 향악 선생을 비롯해 위에서 말한 여러 신인들은 지리산 선원(仙園)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현도진인을 제외한 네 명의 신인들만 지리산에 있다고 보았다. 신인들의 거주지는 지리산에 국한되지 않았다. 금강산이나 묘향산에도 신인들이 머물렀다. 신인이 명산에 상주한다는 믿음은 멀리 통일신라 때의 금강산 연기설에까지 소급된다. 고대 한국인들은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에 탄생하기 전에 이미 신라에 살았다고 보았다. 특히 금강산은 일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간주되었다. 고려 때 묘청 같은 승려는 이른바 8성당(聖堂)이란 개념을 도입해 명당에 불보살과 신선이 머문다고 주장했다. 문양해와 양형 등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들은 이러한 기존의 종교적 신념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양형은 이들 여러 신인과 사귐으로써 장래 운수를 점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신인을 직접 접촉한 이는 문양해 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에겐 속기(俗氣)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양해는 독신으로 지내며 여러 해째 수도생활에 전념했기 때문에 속세와 신선세계를 왕복할 수 있었다. 지하조직의 구성원들이 보기에 그는 신인들의 착실한 애제자로 장차 신인이 될 만한 잠재력이 충분했다. 사회적 신분이나 나이로 보면 문양해는 지하조직의 말단에 속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직 내에서 초월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는 현세의 복잡함을 초탈한, 훌륭한 도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몹시 과장되었거나 심지어 완전히 조작된 것일 수가 있다. 과장됐든 조작됐든 문양해가 넘나든 신비로운 세계는 많은 ‘정감록’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단초다. 한참 뒤 일이지만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어느 신종교에서도 종교성이 탁월한 어린 소년을 발탁해 일거에 조직의 핵심 간부로 임명한 사실이 있다. ●신인들의 대리자 문양해 중인 출신의 양형은 ‘정감록’ 지하조직의 서울지부 책임자였다. 가끔 그는 서울의 조직원들에게 향악 선생과 노사의 말을 전했다.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언젠가 홍복영은 그보다 구체적인 소식을 알려왔다.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거라는 위험한 소식이었다. 지리산에 있는 노사가 문양해에게 한 말을 자기에게 알려왔다고 했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나타나 있었단다. 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질 영웅들은 강원도 통천의 유(劉)씨, 전라도 영암의 김(金)씨 그리고 정(鄭)씨라 했다. 당시 정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었는데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할 거라고 했다. 해도 진인 정씨가 출현할 시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된 적도 있었다. 임자년(1792) 2월, 정진인이 먼저 거사를 일으키면 뒤이어 유씨와 김씨도 난리를 일으킬 거라고 했다. 이 소식은 양형이 문양해를 통해 지리산의 신인들과 주고받은 것이었다. 대화의 골자는 양형을 통해 서울의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난리가 일어날 장소와 시기를 둘러싸고 약간 다르게 기억한 조직원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세 곳에서 난리가 일어나는데, 먼저 2년 뒤 전라도 영암에서 최초의 반란이 일어나고 충청도 어느 고을에서 또 사건이 터진다 했다. 그러다 무신년에는 신병(神兵·정진인의 군대)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신인 정씨는 이미 13살이 되었고, 영암에서 군사를 일으킬 장수는 김씨이며, 충청도에서 떨쳐 일어날 이는 유씨라 했다. 이렇게 자기의 기억을 털어놓은 조직원 역시 모든 예언의 근원지는 노사이며 자기는 그 말을 양형에게서 들었다고 진술했다. 삼국으로 갈라진다는 노사의 예언은 구전으로 전파되면서 약간 변형되거나 와전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어떤 이는 세 영웅을 유(劉)씨, 장(張)씨 및 김(金)씨로 인식했다. 그 또한 난국을 수습할 이는 정진인으로 보았는데, 이미 진인은 “제주의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진인에게는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기도 하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했다. 정진인은 서씨와 정씨에게 명령해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잘잘못을 기록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을 연상하게 한다. 마침 당시 한국사회에는 서학 즉, 천주교가 유행하고 있어 다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정감록’ 지하조직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곧 해도에서 나올 정진인과 자기네 조직이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양형은 정진인이 이미 세 차례나 부하를 국내에 파견해 사정을 탐지하였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향악 선생이 영암의 김씨 및 서쪽 이웃(西隣)과 더불어 역모를 꾸민다고도 했다. 서쪽 이웃이란 지하조직의 서울지역 간부 이율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이율의 집이 양형의 집 서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율과 양형 등 지하조직의 핵심세력들은 신인 향악 선생, 영암 김씨 등과 함께 거병할 예정이란 말이었다. 정조 9년(을사년) 3월이 거병시기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문양해는 “대사(大事)를 3월에 치르고자 한다는 말을 제가 직접 향약 선생에게서 들었습니다.” 라고 했다. 일을 함께 도모할 사람은 물론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조직원들이었다. 문양해는 신인들이 모여서 사람을 죽일 것을 의논하기도 했고, 국가의 안위를 따지기도 했다고 증언하였다. 사실 하동에 지하조직의 근거지를 마련하자고 촉구한 이도 지리산의 신인들이었다고 한다. 장차 “임자년에 변란이 있을 것이니, 미리 피난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했기 때문에 홍복영과 이율이 하동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돈 많은 홍복영이 건축비를 전담하다시피 하게 된 데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신인들에게서 나온 예언은 모두 양형과 문양해를 통해서 조직적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양형이 옮긴 예언과 소문도 실은 문양해에게서 나왔다. 가령 1785년 봄, 영암 김씨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만 해도 그랬다.“이 예언은 본래 향악 선생이 문양해에게 들려준 것인데, 제가 문양해한테서 들었습니다.” 이것이 양형의 증언이다. 현실 세계에서 신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양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신인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신인들은 문양해가 창조해낸 가상의 존재였다. 그들이 써주었다는 편지며, 예언, 사주 등도 실은 문양해가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양해는 종교적 감성이 탁월했던 만큼 자신이 직접 신인들을 만났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사기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든, 예수 그리스도든, 또는 마호메트 같은 이들도 다 신비체험을 하지 않았는가. 문양해의 영적 체험 역시 그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상에서 신인들을 대리했고, 그가 지어낸 말이 ‘정감록’ 조직에선 진리로 수용되었다. 서울지부 총책 양형도 상당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면 하동의 지하본부 건설자금을 댄 양반 홍복영은 양형에게 내적으로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양형에게 편지를 보낼 때 홍복영은 ‘소자(小子)´를 자칭했고,‘선생님´이라며 양형을 깍듯이 받들었다. 이렇게 된 데는 또 다른 숨은 사정이 있었다. 신인 향악, 아니 문양해가 홍복영에게 보낸 편지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편지를 보면 양형과 홍복영은 전생(前生)에 지리산 하늘에 살며 함께 비단창고를 지키다가 귀신 하나를 찔러 죽였다 한다. 그 죄로 양형은 인간 세상에 귀양 왔고, 홍복영도 20년 동안 갇혀 지내다가 비로소 이 세상에 나왔다. 이런 인연으로 둘은 현세에서도 거취를 같이하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물론 하나의 간단한 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문양해가 제공해준 종교적 설명에 따라 조직의 구성원들은 각기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 이 지하조직은 독특한 종교단체였다.‘정감록’ 도꾼 문양해는 이를테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청년 교주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판결 양형기준 벗어나면 이유 명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대법원 산하에 양형기준위원회를 두고 판사가 양형기준을 벗어난 판결을 하면 이유를 밝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양형제도 개선방안을 의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사개추위는 21일 장관급 본회의를 열고 이와 같이 결정했다. 사개추위는 법원조직법 8편에 ‘양형위원회’ 부분을 신설해 대법원 산하에 독립적 업무를 수행하는 양형위원회를 두기로 했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손지열 선관위원후보자 청문회

    손지열 선관위원후보자 청문회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21일 중앙선관위원에 내정된 손지열 대법관을 상대로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열어 직무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했다. 내년 5월 말 지자체 선거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중립성 확보가 화두로 올랐다. 여야는 각자의 입맛에 맞게 선관위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위반사례를 들어 추궁했다.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은 “선관위원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행위를 못하게 돼 있는데 최근 김헌무 중앙선관위원이 (야당쪽)시국선언에 동참했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한다면 임명권자에게 해촉을 요청하겠느냐.”고 따져물었다. 반면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 공무원이 선거에서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것을 엄중히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같은 당 김무성 의원도 “임좌순 전 선관위 사무총장이 4·30재·보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한 것은 문제”라고 거들었다. 이에 손 후보자는 “퇴직 후 본인 의사에 따라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가타부타하기 어렵지만 고위직을 지낸 분은 가능하면 직접 안 했으면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는 “직을 걸고서라도 선관위의 중립성, 독립성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비슷한 선거사범도 어떤 재판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잘 되면 80만원 벌금이고, 속된 말로 악질을 만나면 ‘배지’를 떼는 것처럼 선거사범의 양형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자, 손 후보자는 “판사들이 열심히 토론하고 논의도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절대적인 통일은 어려운 것이고, 현재 그렇게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사설] 법조인조차 형사재판 못 믿는다니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최근 밝힌 법조인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판사·검사·변호사 378명을 상대로 조사해 보니, 형사재판이 빈부·지위의 격차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답변이 무려 73%나 나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검찰이 피고인에게 인격적 모욕이나 협박을 한다는 데 77.5%, 전관 출신 변호사가 더 유리한 판결을 받는다는 데 76.2%가 동의했다. 형사재판을 진행하는 3대 축인 판·검사, 변호사들 스스로가 이처럼 형사재판의 공정성을 믿지 않으니 이래서야 어찌 법의 존엄성이 유지되겠는가. 그동안 항간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니 ‘고무줄 선고’니 하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치인·기업인에 대한 형사처벌은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는 실증연구 또한 있었다. 예컨대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연루자에 대한 재판에서 기소된 정치인 17명 가운데 실형을 받은 이는 4명에 불과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은 기업인은 22명이었는데 모두 선고유예·집행유예·벌금형을 받았을 뿐 실형 선고는 단 한명도 받지 않았다. 이런 현실이니 법조인 스스로도 형사재판의 신뢰성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사법개혁 방안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고 그 중에는 양형 기준을 제도화하는 문제가 포함돼 있다. 법원과 법무부·검찰의 의견이 엇갈려 최종안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공정한 법 집행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쪽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검·경 수사과정에서의 피의자 인권보호, 전관예우 폐지 등이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물론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이 ‘국민을 위한 사법’을 솔선하는 일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씨줄날줄] 부덕의 소치/우득정 논설위원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나 초범인데다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어 집행유예에 처한다.’ 사실 그럴까. 초범이니, 개전의 정이니 하는 것은 판사가 형량을 깎아주기 위한 핑계일 뿐 뉘우치는 강도가 높다고 형량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형사사건의 양형은 어떻게 결정될까. 법관은 먼저 사건의 생김새부터 살핀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대충 형량을 결정한 뒤 피해자와의 합의, 재범 여부 등 감경요소를 훑어본다. 마지막으로 관련 법률에 규정된 형량을 확인한다. 법에 규정된 형량보다 낮거나(작량감경) 최저형에 가깝다면 ‘초범인데다∼” 이후의 문구가 길어진다. 다만 어떤 법관이든 피고인의 재판정 태도는 반드시 참작한다. 그래서 죄가 있든 없든 법 앞에 서면 한풀 꺾이게 마련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통금에 걸려 파출소로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반성문을 써야 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성문에 반드시 포함돼야 할 단어는 ‘무지의 소치’였다. 대학교수도, 초등학력자도 파출소 김 순경 앞에서 무지한 탓에 통금을 어기게 됐다며 싹싹 빌어야 풀려날 수 있었다.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9일 도청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에 출두하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했다. 검찰측에서 언론을 통해 계속 뻣뻣하게 굴면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메시지를 흘린 탓이리라. 그렇다면 신 전 원장의 ‘부덕의 소치’는 ‘내 탓’의 고백으로 봐야 할까. 오히려 ‘네 탓’에 가깝다. 무덤까지 안고가야 할 비밀을 터뜨린 부하를 잘못 둔 죄, 보스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줄 아는 부하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을 탓한 것이리라. 이렇듯 상황에 따라 ‘내 탓’도 될 수 있고 ‘네 탓’도 될 수 있어 애매한 상황에서 ‘부덕의 소치’는 자주 동원된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과문마다 ‘모든 것이 제 덕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키히토 일왕이 궁정만찬회장에서 체면을 세워준답시고 내뱉은 ‘통석(痛惜)의 염(念)’이나 외교적인 수사에서 자주 활용되는 ‘유감’과 비슷하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본인의 의도보다 항상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10·26재선거 패배후 우리당 홈피 ‘와글와글’

    “도대체 국회의원이라고 한 일이 뭡니까.”“당이 서민을 외면하니 지지자도 당을 떠나는 겁니다.”“말 좀 가려가면서 하세요.” 10·26재선거 참패 이후 열린우리당 홈페이지 ‘누리마당’에는 당원의 고언이 쏟아지고 있다.‘새 지도부에 바란다’‘우리당 지지도 회복방안’ 코너에 당원의 호된 질책도, 대안도 줄을 잇고 있다. ●“경제가 제일 큰 문제” 55평짜리 식당을 운영한다는 한 기간당원은 “매출은 절반으로 줄었는데 부가세는 12배를 더 내고 있다.”면서 “당원인 나도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하는데 일반인이라면 열받아서 이 정권을 타도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성토했다. 일반당원 ‘lietz’는 “국민을 괴롭히는 내수 불황과 실업문제, 과열된 과외문제, 무주택 서민의 고충부터 해결하라.”고 읍소했다. ‘또또’는 “이 정부 들어 국민연금과 담뱃값, 술값 등등 해서 안 오른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면서 “국민소득은 5000달러 수준인데 정부는 2만달러에 도달한 것 같은 정책을 펴고 있다. 국회의원님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렇지도 않냐.”고 호통쳤다. ‘chamelen’은 “선거 때는 뒷짐만 지고 있던 양반들이 결과만 놓고 타인을 심판한다는 게 얼마나 꼴불견이냐.”고 질타했다.‘cjk1179’는 “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모두가 저만 잘났다고 하느냐.”면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을 게 아니라 당원과 심사숙고해 발표하고 입법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 기간당원은 ‘더 이상 슬퍼지려 하기 전에’라는 글에서 “청와대가 최선두에서 총알받이로 전전할 때 우리당 의원님들은 대통령 등 뒤에서 뒷짐지고 구경만 하지 않았냐.”며 대통령을 비판한 의원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뭐니뭐니 해도 개혁이 최고 기간당원 ‘jjslee’는 “입만 살아 있는 열린우리당이 살 길은 개혁을 이루는 일”이라면서 “이것을 못하면 누가 다음에 찍어주겠냐.”고 반문했다.‘널빤지’는 “국가보안법은 둘째치고,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얼마나 끌었느냐. 질질 끌거나, 어정쩡하게 합의하는 ‘회색’을 누가 지지하겠느냐.”고 따져물었다. 기간당원 ‘껍데기’는 “개혁법안을 통과시키면 진보 개혁세력이 다시 결집할 것”이라고 충고했고, 일반당원 ‘큰강’은 “중도보수, 중도개혁 운운하며 지지층을 넓히려는 얄팍한 꼼수는 버려야 한다.”고 촉구했다.“정동영·김근태 장관이 전면에 나서야”“강금실 전 장관을 영입해 달라.” 등의 주문도 나왔다. ●“노 대통령 고집스러운 이미지만 비쳐” 한편 당 싱크탱크인 열린정책연구원의 부원장인 양형일 의원은 이날 “기타치면서 눈물을 보였던 (대통령의)순수한 이미지는 없고 지금은 고집스러운 이미지로만 비친다.”고 대통령의 리더십 문제를 지적한 뒤 ▲이념공방 ▲청와대의 인사정책 난맥상 ▲당의 독자성 결여 등 10가지 항목으로 지지율 하락 원인을 분석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2) 파자법(破字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2) 파자법(破字法)

    한 개의 글자를 부숴 여럿으로 나누거나, 역으로 여러 글자를 조합해 하나로 만들어 비밀스러운 뜻을 알아내는 것이 파자법이다. 한자 문화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일종의 암호 생산기술이다. 이미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귀곡자(鬼谷子)라고 불린 한 기인이 만들어 사용했다 할 정도로 파자법의 연원은 깊다. 본디 뜻글자인 한자는 구성이 복잡하고 두 글자 이상이 뭉친 경우가 많아, 파자법이 생겨나기 쉬운 조건이다. 뜸뜬다는 ‘구(灸)’자만 해도, 위에는 오래라는 뜻의 ‘(久)’자가 있고 아래는 ‘불 화(火)’가 놓여 있다. 파자법으로 풀이해 보면, 사람이 불 위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뜸이란 뜻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서 나는 좀더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들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열여섯에 성인이 된다고 보았는데, 그것을 파자법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파과(破瓜) 즉 오이가 깨지는 해에 성년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엔 물론 초경이 시작된다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오이 과(瓜)자에 비밀이 숨어 있다 한다. 그 글자를 파자법으로 분석해 보면 여덟 팔(八)자 두 개가 겹친 것이란다. 요컨대 여자 나이 열여섯이면 성인이 되는 것이고, 천하절색 춘향이 이도령을 만난 것도 파과의 해였다는 주장이다. ●파자법(破字法)이란 비밀 코드 비밀을 해독하거나 생산하는 데 파자법은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예언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정감록’을 읽다 보면 글귀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기만 해선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다른 사물에 빗댄 우의법(寓意法)이나 파자법(破字法)을 적용해야만 본래의 뜻을 대강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목자(木子) 장군의 칼이요, 주초(走肖)대부의 붓이로다. 비의(非衣) 군자가 품은 뜻은 다시 삼한의 서울을 정하는 일이다. 목자가 나라를 세우는 데 주초의 계략과 정기가 기틀을 마련할 지니.”(청구비결) 흔히 조선왕조의 건국을 예언한 것으로 풀이되는 구절이다. 목자(木子)는 곧 이(李)씨로 태조 이성계를 상징한다. 주초는 조(趙)씨, 비의(非衣)는 배(裵)씨를 파자한 것이다. 조선 개국공신들 가운데 마침 조준(趙浚·1346~1405)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이 포함돼 있어, 그들이 다름 아닌 ‘주초대부’와 ‘비의군자’로 비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조선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정도전이 비결에 언급돼 있지 않아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파자법이라면 위에 살핀 경우처럼 두 글자를 하나로 묶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때로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파자법의 압권을 ‘정감록’에서 찾아보자. “선비(士者)는 관을 비뚜로 쓰며(橫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脫衣) 주변을 달리다 몸을 기댄 채(走邊橫己) 성인의 이름에 여덟 팔자를 덧붙이면(聖諱加八), 계룡산 바위가 희게 변하고 청포의 대나무가 하얗게 되며 (중략) 대중화와 소중화가 함께 망하리라.”(감결) 계룡산 바위가 변하는 것부터 시작해 중국(대중화)과 한국(소중화)이 일시에 망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글의 구조상 이런 일대격변을 일으키는 조건은 밑줄 친 부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술사들은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밑줄 친 대목을 파자법으로 풀어냈다. 우선 ‘선비(士者)는 관을 비뚜로 쓰며(橫冠)’를 사(士)의 머리 부분에 빗금을 그어 얹은 임(壬)자로 간주했다.‘신인(神人)이 옷을 벗고(脫衣)’란 대목은 신(神)자에서 보일 시(示)변을 제거해 신(申)자로 해독했다. 요컨대 앞의 두 대목은 임신(壬申)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낸 것이다. 그 해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아래 두 구절에서 해결돼야 했다. 술사들은 지혜를 짜냈다.‘주변을 달리다 몸을 기댄 채(走邊橫己)’는 주(走)변에 기(己)자를 더해 일어날 기(起)자로 해독했다. 마지막 구절인 ‘성인의 이름에 여덟 팔자를 덧붙이면(聖諱加八)’은 성인을 공자(孔子)로 보고 그 이름인 구(丘)자에 팔(八)을 합친 군사 병(兵)자로 풀었다. 두 대목을 서로 연결하면 기병(起兵) 즉,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이 된다. 임신년에 반란이 일어나면 온갖 징조가 뒤따라 일어나고 마침내 중국과 한국이 동시에 멸망하게 된다는 그야말로 엄청난 예언인 셈이다. 참고로, 청나라가 망한 것은 무신년(1911)의 일이었다. 조선왕조는 그보다 한 해 앞선 경술년(1910)에 사라졌으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셈이었다. 바로 이런 예언은 철종13년(1862)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임술민란이 일어나던 무렵 ‘감록’에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임술년(1862)을 전후해 조선에는 국내외 정세에 상당한 식견을 지닌 술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감록’을 고쳐 쓰면서 ‘임술기병’에 해당되는 구절을 파자법을 이용해 삽입했다고 믿어진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 중국의 사정도 무척 어수선했다.1851년에 시작된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 10년가량 계속되다 가까스로 마무리된 처지였다. 난리는 일단 진정됐지만 중국을 압박해 들어오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간섭이 만만치 않았다. ●파자법의 명인들 고대부터 한국의 예언서에 파자법은 자주 등장했다. 고려태조 왕건의 등극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고경참’에도 신라를 가리키는 ‘사유(四維)’ 즉 라(羅)자가 보인다. 고려 때도 이자겸이 발호하자 ‘목자위왕(木子爲王)’, 이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이 한 때 유행했다. 조선 중종 때도 그와 흡사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말이 퍼졌고, 그 바람에 개혁정치가 조광조가 희생됐다. 파자가 한국사회에 널리 유행하다 보니 점을 보는 사람들 중에도 파자법의 대가가 많았다. 아직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일부러 다 떨어진 옷을 몸에 걸친 채 수도 개성을 둘러보았다. 시내의 좁다란 어떤 골목에 발길을 들여놓았을 때 이성계는 한 노인이 점판을 벌려 놓은 것을 보았다. 마음속에 큰 야망을 품고 있던 이성계는 자신의 미래 운명을 점쳐 보기로 했다. 점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 글자나 가리키면 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을 문(問)’ 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노인은 혼비백산하며 이성계의 귀를 빌렸다.“공은 반드시 이 나라의 대왕이 되실 운세입니다.” 노인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여 경하의 인사를 아뢰었다. 이성계가 선택한 글자를 파자해 보면 ‘임금 군(君)’ 자를 좌우로 벌려놓은 모양이었고, 그래서 노인은 이성계가 훗날 임금이 될 거라고 믿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제대로 엿듣지는 못했으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본 길손이 하나 있었다. 이성계가 그곳을 떠나기가 무섭게 그 역시 노인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같은 글자를 짚었다. 노인은 역시 문(問)자를 파자했는데 결과가 아주 딴판이었다.‘문문(門門) 개구(開口)라!’ 당신은 아무래도 남의 문 앞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을 팔자인 모양이오. 부디 절약에 힘써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이쯤 되면 파자법도 어렵기 그지없다. 같은 글자도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파자법의 명인들 가운데는 후세에 이름이 전해진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의 뛰어난 예언가 남사고가 그랬다. 그는 여러 곳의 길지(吉地)를 점쳐 놓기도 했지만, 파자법을 통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이며 그 뒤의 정치적 추이를 정확히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뒷날 동인들은 주로 낙산(駱山) 밑에 거주했고, 서인들은 안산(鞍山) 아래 터를 잡았다. 낙산이라면 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이요,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일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낙산(駱山)의 낙자(駱字)는 마(馬)와 각(各)을 합친 글자이다. 말(馬)을 타고 가다 떨어(各)진 형상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분당되고 나서 초기에는 동인들이 국운을 좌지우지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제각각(各各)으로 갈라서게 될 운명이라 했다. 장차 서인의 운명을 상징한 안산(鞍山)은 그 뜻이 사뭇 달랐다. 안(鞍)자는 파자로 뜯어볼 때 바꿀 혁(革)자에 편안 안(安)자를 더한 것이다. 혁명 즉, 반정을 일으킨 뒤 세력이 안정되어 권력을 오래 유지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인들이 집권한 것은 인조반정 때인데 그 뒤 잠깐씩 몇 차례 실권(失權)한 적이 있긴 해도 조선 말까지 모든 권력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산은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다. 남사고의 예언이 들어맞긴 했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어선 곤란하다. 그는 인조반정을 언급한 적도 없었고, 서인 역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도무지 누군들 미래의 일을 제 손금 보듯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격암유록’과 현대의 파자법 어쨌든 후대의 술사들은 남사고의 예언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그런 분위기가 팽배해 최근에는 그가 저술했다는 ‘격암유록’이란 예언서가 출현해 크게 주목받기도 했다. 이 예언서는 ‘정감록’의 상이한 내용을 합성한 위에, 몇 가지 다른 요소까지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판 정감록인 셈인데,‘격암유록’에도 파자법의 자취가 완연하다. 간단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겠다. 여러 사람들이 이미 밝힌 대로 ‘격암유록’에 보이는 ‘추대읍(酋大邑)’은 세 글자를 연이은 정(鄭)자에 해당한다.‘시구(矢口)’는 지(知)자이며,‘일팔간팔(一八干八)’은 금(金)자이다.‘여자(女子)’는 호(好)자,‘팔력시월이인(八力十月二八)’은 십승(十勝)으로 풀이된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라,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격암유록’에는 현대 한국의 운명이 예언돼 있기도 하다. 파자법으로 풀어야만 되는 대목도 여럿이다. 그 하나는 6·25전쟁에 관한 것이다.‘격암유록’에는 백호(白虎)에 전쟁이 일어난다 했다. 백호란 호랑이해이면서 흰색에 해당되는 경(庚)년 즉,1950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돼 있다. 이때 “난을 피하려면 팔금산(八金山)으로 가라 했다.” 팔금산은 파자법을 적용해 보면 영락없는 부산(釜山)이다.6·25전쟁 때 부산은 안전했다. 국토가 장차 38선을 경계삼아 양분된다는 예언도 이미 나와 있었다.‘십선반팔삼팔(十線反八三八) 양호역시삼팔(兩戶亦是三八) 무주주점삼팔(無酒酒店三八)’이라 했다. 한 대목씩 차례로 살피면,“십선반팔삼팔(十線反八三八)”은 십(十)에 팔(八)을 더하면 목(木)이 되고 그 옆에 반(反)을 나란히 놓으면 板(판)자가 되는데 그것이 38선에 있다는 것이다.“양호역시삼팔(兩戶亦是三八)”이란 호(戶)를 좌우 양쪽에 늘어놓아 門(문)이 되는데, 그 역시 38선상에 위치한다는 것이다.“무주주점삼팔(無酒酒店三八)”은 주점(酒店)은 주점인데 술(酒)이 없으므로 店(점)이 된다. 끝으로,“삼자각자삼팔(三字各字三八)”이라 했다. 위에서 만들어진 석자 즉, 판문점(板門店)은 각기 8획이며 역시 38선에 위치한다고 했다. 이 예언이 1953년 휴전 성립 이전에 나왔다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격암유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목인비거후(木人飛去後) 대인산조비래(待人山鳥飛來)’란 구절도 있다. 혹자는 파자법을 동원해 이것을 한국현대정치사의 일면으로 해석한다.‘목인(木人)’은 박(朴)씨를 뜻한다. 문제는 그가 ‘비거후(飛去)’ 즉, 죽은 뒤의 일이다.‘인산조(人山鳥)’가 기다렸다 날아온다(飛來)고 했다.‘인산조(人山鳥)’는 최(崔)씨라 한다. ‘격암유록’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될 사항이 있다. 파자를 해보면 기독교적인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가령 ‘육각팔인(六角八人)’은 천화(天火),‘인언일대십팔촌(人言一大十八村)’은 신천촌(信天村) 또는 신앙촌에 짝한다.‘일양형(一羊兄)’은 한 마리(一) 으뜸가는(兄) 어린 양(羊)으로 해석되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활아자수(活我者誰) 삼인일석(三人一夕)이라.’ 했다. 삼인일석(三人一夕)이 나를 살린다고 해석되는데, 삼인일석(三人一夕)이 문제다. 사람들은 이것을 파자법으로 풀어 닦을 수(修)로 본다. 종교적 수행이란 것이다. 기독교적 취향이 강한 사람들은 ‘정감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궁궁(弓弓)’과 ‘을을(乙乙)’ 같은 오래된 용어까지 파자법을 응용해 재해석한다. 전자의 경우 궁(弓)자 두 개를 마주 바라보게 돌려놓으면 아(亞)자가 되는데 그 가운데 십자가(十)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후자도 마찬가지다. 을을(乙乙)의 경우 을(乙)자 두 개를 서로 겹쳐 놓으면 만(卍)자가 되어 불교를 상징하는 것 같아 뵈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한다. 만(卍)자의 복판을 꿰뚫는 두 개의 선은 다름 아닌 십자가(十)라는 것이다. 따라서 ‘격암유록’이 제시하는 구원은 십자가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기독교화되었고, 그에 따라 ‘정감록’ 역시 기독교적인 색채를 더하게 되었다. ‘격암유록’은 1970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맞는 말 같다. 우선 이 예언서에는 ‘철학(哲學)’,‘공산(共産)’, 그리고 ‘원자(原子)’ 따위의 현대적인 용어가 등장한다.‘서학(西學)’이니 ‘동학(東學)’ 같은 낱말도 있고, 파자법을 가지고 읽어보면 ‘박태선(朴泰善)’이란 이름도 나온다. 박태선 장로는 1970년대 후반 신앙촌 운동을 벌였다.‘격암유록’은 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삿갓과 파자법 파자법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학에까지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은 파자법의 또 다른 대가였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며 수많은 설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말끝마다 김삿갓은 파자(破字)와 동음이의어를 빌려 사회적 모순과 일상을 노골적으로 풍자했고, 민중들로부터 아낌없이 갈채를 받았다. 한 번은 방랑시인 김삿갓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도 어디를 가다 날이 저물어 어떤 집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이미 해가 중천에 솟았는데도 아침상이 들어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뜨락에서 안주인이 “‘인량차팔(人良且八)’ 하고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러자 바깥주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밥상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김삿갓은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잠시 궁리하였다. 그러더니만 김삿갓은 담뱃대로 재떨이를 두어 차례 후려쳤다.“견자화중(犬者禾重)아 정구죽요(丁口竹夭)로다!”라고 크게 외치며 김삿갓은 네 활개를 저으며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세 사람 사이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인량(人良)’을 위아래로 붙이면 밥 식(食)이 되고,‘차팔(且八)은 갖출 구(具)자가 된다. 안주인은 “식사를 준비할까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바깥주인은 ‘월월(月月)’ 곧 친구 붕(朋)자에 ‘산산(山山)’이라 했다. 메 산(山) 두 개를 포개 놓으면 나갈 출(出)자가 된다. 요컨대 “이 친구가 떠나거든!” 밥을 먹자고 대꾸한 것이었다. 지독한 구두쇠부부요, 교활한 암호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문자 속이 밝기로 세상에 으뜸이었다. 대뜸 그들의 암호를 해독했고, 이어서 ‘저종(猪種·돼지 종자들)아, 가소(可笑)롭다!”며 후딱 그 집을 나섰다. 김삿갓에 이르러 파자법은 점과 예언이란 전통적인 범주를 초월해, 오락적인 기능을 한껏 발휘하게 되었다.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꿈틀거린다. 푸른역사연구소장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