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 묵은 상식 깬 ‘슈뢰딩거의 고양이’
여기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이 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촬영된 이 사진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등이 한 자리에 모인 것과 같은 의미”라고 평가한다.3년마다 열리는 ‘물리학과 화학을 위한 국제 솔베이 기구’에서 모인 이 해의 참석자들은 명단만으로도 ‘경이와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의 새 지평 열어
1927년은 탄산나트륨의 제조법을 발명한 솔베이의 기부로 1911년 시작된 솔베이 기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로 평가된다.
마리 퀴리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어빈 슈뢰딩거, 헨드리크 로렌츠 등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 속 등장인물 중 10명은 노벨상 수상자이다. 대부분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과학 법칙’을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법칙’,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로렌츠의 ‘힘 방정식’ 등 이들의 연구성과는 바로 현대물리학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이 회의를 통해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을 나누는 기점이 된 ‘양자역학’의 탄생을 공식화했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뉴턴의 법칙 등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제안됐다.1905년 아인슈타인이 ‘상대적 역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공론화됐다.
원자, 분자, 소립자 등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적 대상에 적용되며 고전물리학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은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인과법칙을 따르고 우연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달리 ‘확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자역학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슈뢰딩거가 아인슈타인과 논쟁을 하면서 양자상태를 설명하고자 고안한 사고(思考) 상황이다.
고양이가 갇혀 있는 상자 안에는 독가스를 뿜는 가스총이 설치돼 있다. 이 가스총은 방사능 측정기와 연결돼 있으며, 방사능 물질의 원자핵이 붕괴하면 방사능 측정기가 감지해 가스총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일반적 상식과 경험에 비춰볼 때, 현실에 존재하는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 상태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두 가지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자를 열기 전 이 고양이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거나 ‘절반만 살아 있다.’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미해결 문제들 해법 제시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00년 가까이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지난해 호주 퀸즐랜드대 정현석 박사를 비롯한 공동연구팀이 빛을 이용해 증명하면서 엄연한 사실이 됐다. 원자나 분자, 레이저 펄스로 이뤄진 빛에서는 이같은 중첩 현상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분석이다.
양자역학은 이같은 사실을 이용해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의 해법을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컴퓨터와는 전혀 다른 양자컴퓨터가 대표적인 예다. 양자컴퓨터는 ‘지름길’을 가도록 상황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컴퓨터가 검토해야 하는 엄청난 양의 답 중에 정답만이 살아남도록 양자중첩 상황을 조작하면 현재 컴퓨터로 수백년 이상 필요한 암호도 불과 몇 분만에 풀어낼 수 있다. 반대로 암호 체계에 양자중첩을 활용하면 끊임없이 해킹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다.
1982년 양자컴퓨터의 개념을 처음 주창한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양자역학을 처음 생각해 낸 아인슈타인조차 죽는 순간까지 고전물리학이라는 상식을 벗어버리길 거부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이론적인 예측을 실험으로 증명하며, 서서히 상식을 깨 나가고 있다.‘상식’의 개념이 수천년 동안 세상을 지배해온 고전물리학에서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현대물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올 날도 머지 않았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