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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희로씨 귀국 3일째 이모저모

    권희로(權禧老·71)씨는 귀국 3일째인 9일 서울에서 자신의 가석방을 도와준 시인 구상(具常·81)씨,배명인(裵命仁)·정해창(丁海昌) 전 법무부 장관,영화 ‘김의 전쟁’ 제작자 한갑진(韓甲振)씨를 차례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했다. ?경주를 떠나 오전 10시 서울에 도착한 권씨는 박삼중(朴三中)스님과 함께서울 여의도 구상 시인 자택을 방문했다. 권씨는 “석방을 위해 도움을 줘 고맙다”면서 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불편한 구씨의 건강상태를 염려했다.또 지난 81년 경기 시흥시 농협에서일어난 살인사건에 연류돼 17년째 복역중인 구씨의 양아들 최재만(崔在萬·41)씨를 걱정했다. 하얀 모시옷을 입고 권씨를 맞은 구씨는 “고희를 넘긴 나이에 너무 열정적으로 움직여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다”고 화답한 뒤 권씨에게 중광스님의 연꽃그림과 자신의 시집인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를 선물했다. ?권씨는 이어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협력제도 연구모임’(대표 李健介·자민련의원) 소속 국회의원들을 만나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당초 국회 귀빈식당에서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박실(朴實)국회 사무총장이 “외부 병력이 국회에 들어올 수 없고 신변안전을 책임질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외부로 장소가 변경됐다. 권씨는 의원들에게 “국정을 맡은 여러분의 환영을 받게 돼 영광스럽다”면서 “자신이 일본 야쿠자 두목을 살해한 것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따른 항거였다”고 밝혔다. ?권씨는 곧바로 서울 강남구 역삼동 배명인 전 법무부 장관사무실과 서울서초동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 사무실을 차례로 방문,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후 6시에는 ‘김의 전쟁’을 제작한 서울 중구 필동 한진흥업 한갑진회장 집에서 권씨의 배역을 맡았던 탤런트 유인촌(柳仁村)씨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권씨는 “영화 덕분에 나의 항거가 한국 국민들에게 알려졌다”고감사의 뜻을 전한 뒤 야쿠자 두목살해와 인질극을 벌였던 당시를 회상하며이야기 꽃을 피웠다. 조현석기자 hyun68@
  • ‘헤어진 혈육’ 인터넷서 찾는다

    인터넷을 통한 혈육찾기가 활발하다.자식을 입양시킨 부모나 친부모를 찾는입양아들을 위한 홈페이지가 지난 1일 인터넷 공간에 첫선을 보였다. 한국복지재단 산하 어린이 찾아주기 종합센터의 홈페이지 http://www.findparent.or.kr에 들어가면 애타게 부모와 자식을 찾는 사람들의 사연과 신상이 일목요연하게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돼 있다. 이 사이트에는 하루 평균 400여명이 접속하고 있다.이미 자식을 찾아달라는 사연 300건,부모를 찾아달라는 사연 150건이 올려져 있다. 부모·자식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부모찾기’와 ‘자녀찾기’ 목록에 들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의 신상과 사진을 올려 놓을 수 있다.신청인이 입력을 마침과 동시에 데이터베이스에 자동 저장된다. 특히 이 사이트는 한국의 친부모를 찾는 해외입양아들에게 유용하다.무작정 한국에 와서 친부모를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해외 입양아들을 위해 다음달에는 영문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미 40여명이 자원봉사자가 되겠다고 나섰다.이들은 해외입양아가 국내에머물 수 있도록민박을 제공하고 통역도 해줄 예정이다. 복지재단의 한 관계자는 “인터넷을 통해 혈육을 찾은 사람은 아직 없지만국내외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어 많은 결실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美입양아들 뿌리찾기 나서

    미국 입양아 25명이 12일 새벽 미국인 양부모 및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태어난 고향,한국을 찾았다. 뉴욕 교포들이 만든 한국계 입양아 지원단체인 ‘무궁화재단’(이사장 박재용·49)이 입양아들에게 뿌리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한국 방문을 주선했다. 음악에 빼어난 재능이 있는 베스 메이코(14·여)의 한국 이름은 강수연.85년 7월 서울 종로구 창신2동 639의 15 가정집 문 앞에서 생년월일이 적힌 쪽지와 함께 발견돼 같은해 12월 미국으로 입양됐다.함께 방문한 양부모 메리와 존 메이코씨 부부는 “딸에게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면서 “부모들도 딸의 뿌리인 한국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82년 6월 미국으로 입양된 에이미 셰어(17·여)는 “왜 한국에 왔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꼭 와봐야만 할 것 같았다”고 웃었다.이들은 20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경주,포항제철 등을 돌아보고 2박3일 동안은 서울에서민박을 하면서 고국을 느끼게 된다. 전영우기자 ywchun@
  • ‘클론’의 남성미 대형무대서 뽐낸다

    10대 댄스그룹 틈에서도 기죽지않고 당당한 ‘아저씨 댄스그룹’ 클론.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남성미를 마음껏 발산할 대형 무대를 마련한다. 6월12·13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개최되는 ‘비 스트롱(Be strong)콘서트’.그리스 신화의 야누스와 메두사를 차용한 공연 컨셉이 재미있다.두개의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클론이 지닌 두 이미지,‘관능’과 ‘익살’을 동시에 보여주고,‘돌아와’의 여성보컬 김태영은 긴 손톱분장과 기괴한 화장,뒤엉킨 가발머리로 메두사의 악녀적인 이미지를 대변한다. 고대 그리스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둥과 성화대,피라미드식 유리조형물로 무대를 꾸며 마치 신들의 제의를 엿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낼 계획. ‘꿍따리 샤바라’‘돌아와’‘펑키 투나이트’등 신나는 댄스곡과 함께 클래식을 리메이크한 ‘사랑과 영혼’,입양아들의 고통과 아픔을 그린 ‘버려진 아이’로 기존의 클론과는 다른 성숙한 면모를 과시한다.‘부채질 춤’을 비롯한 화끈한 춤솜씨도 이참에제대로 보여줄 각오다. 팬서비스차원에서 마련한 다양한 부대행사도 눈길을 끈다.구준엽·강원래와 똑같은 머리모양을 한 관객은 무료로 입장시키고,공연중 가장 눈에 띄는 관객을 뽑아 ‘열혈관객상’을 시상한다.공연전날에는 해외입양아 500명을 초청해 특별시연회를 연다.20일 대구를 시작으로 매주말마다 전국순회공연 예정.(02)737-2723. 이순녀기자
  • KBS주부프로 ‘아침마당’-해외입양아 혈육찾기

    KBS 아침주부프로 ‘아침마당’이 해외입양아 혈육찾기의 창구노릇을 하고있다. 97년 시작된 ‘아침마당’의 혈육상봉코너 ‘그 사람이 보고싶다’에서 잃어버린 가족찾기에 1만3,000명이나 신청하고 벌써 100명이상이 가족을 찾게되자 해외입양아들의 요청도 계속 밀려들고 있다.올해들어 벌써 5명의 해외입양아가 부모와 상봉했다.TV의 막강한 힘은 해외입양아 찾기에 빛을 발하고있다. 지난 1월,제시카라는 12세의 뉴욕에서 살고 있는 소녀의 사연은 감동을 안겨줬다.입양아 제시카는 96년 국내에도 소개됐던 입양아프로 ‘제시카의 용서’의 실제 주인공.양모는 제시카의 엄마를 찾아주기 위해 직접 ‘아침마당’에 출연했고 결국 생모를 찾았지만 신분노출을 염려한 생모는 제시카를 만나지 않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양모 린다 웰버여사의 간곡한 청으로 두 모녀는 결국 만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양모는 오는 7월23일부터 3일간 LA에서 제1회 한미입양아 및 입양가족연합회총회(KAAN)를 열 계획이다.미국 전역의 입양아와 가족 및 전문가 등을 초대,입양아출신인워싱턴주 상원의원 폴 신이기조연설을 한다. 또 지난 3월에는 72년,프랑스로 입양된 박순자씨(37)씨 3남매가 이 방송을통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만났다.3남매는 ‘엄마’란 단 한마디의 한국어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난 4월28일 프랑스 파리의 현직경찰인 양현준씨(25)가 ‘네살때 부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하나의 단서와 사진을 들고 출연,1주일 후 5월5일 부모와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아침마당’이 이룬 성과다. 요즘엔 미국인 아버지가 20년전 헤어진 한국의 딸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오기도 하고,다음 주에는 페루입양아의 부모찾기가 방송될 예정이다.“해외입양아들의 경우 기억이 없어 신청자 숫자에 비례해서 찾는 케이스는 적지만 보람은 크다”고 김성응주간은 말한다.그는 앞으로 해외입양아들에 대한 특별한 기획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허남주기자
  • 白凡 재조명:2­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 사상/“민족만이 영원할 뿐”/열린 민족주의 바탕 인류의 평화 역설/문화의 힘 드높은 ‘아름다운 나라’ 소망 백범이 바라는 한국의 미래는 아름다운 문화국가였다.그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높은 문화의 힘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힘과 가치를 강조했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사랑의 문화평화의 문화로 우리와 인류전체를 잘 살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범사상은 이러한 문화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백범연구가들은 분석한다.그의 사상은 ‘백범일지’ 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 잘 나타나 있다.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을 두루 포용했다.그의 종교·사상은 민족애로 수렴됐다.백범일지에서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민족만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백범은 독립운동과 해방후 민족통일 노력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민족주의는 저항 민족주의였다.그러나 저항 민족주의는 식민통치라는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민족과 민족관계,국가와 국가관계는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족주의의 최대 과업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다.피압박 국가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세계평화의 기본적인 전제다”라고 말했다.백범의 민족주의는 이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르다.자유의 존중과 독재의 배격을 강력히 내세운 민주적 성격을 담고 있다.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열린 민족주의다.백범의 민족주의를 종족관념 또는 저항 민족주의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백범 민족주의의 원류는 열린 민족주의다. 백범은 보편성을 갖는 민족주의와 함께 자유의 소중함을 강조했다.그는 백범일지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다”라고 표현했다.백범이 말하는 자유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야 한다’는 주권재민 사상과 연계된다.“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렸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온다”고 백범일지는 강조하고 있다.자유 아님의 대표적 예는 계급독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로 보았다.소련식 공산당을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는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독재를 막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범의 민족주의·자유주의·문화주의는 각각 별개의 사상이 아니다.큰 틀속에 하나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백범 사상의 이상은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화의 힘을 통한 인류의 평화라 할 수 있다.그 이상을 실현하는 열쇠는 자유의 보장이다. 세계는 그의 이상대로 문화의 힘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백범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中國 피난처·臨政청사 복원 金九 선생이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있던 중국의 자싱(嘉興)은 우리에겐 잊혀진 도시였다.그가 일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듯이 자싱은 우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망각의 도시가 아니다.金九 선생이 숨어있던 집이 유적으로 복원되며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백범은 19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이후 일본경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상하이(上海)에서 서남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자싱으로 피해왔다.그는 자싱에서 추풍청(저보성)씨가 마련해준 집에서 은신했다.그곳은 추씨의 수양아들 별채였다.백범은 일본 정탐꾼이 자싱까지 오자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했다. 중국정부는 96년 백범이 약 2년간 숨어있던 두 곳을 복원해 유적지로 지정·관리하기 시작했다.자싱에 있는 백범 유적지는 메이완 거리에 있다.2층 건물 현관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한자로 쓴 녹색간판이 붙어 있다.백범이 당시 접견실로 썼던 1층 벽에는 백범과 그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추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2층에는 침대와 옷장 등이있다. 하이옌에 있는 피난처는 주쟈루이씨 집안의 별장이었다.주쟈루이씨는 백범을 하이옌으로 피신시킨 추씨의 장남 펑장(鳳章)의 부인이다.펑장씨는 자신의 부인을 백범의 부인으로 위장시켰다.대나무숲 속에 단장돼 있는 유적지에는 백범의 흉상과 함께 ‘김구 피난처’라는 한자 간판이 있다.전시실에는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추풍청,주쟈루이 등의 경력과 활약상을 담은 각종 사진과 자료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해외독립운동 구심점이었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도 93년 복원됐다.청사는 26년부터 7년동안 사용했던 3층 연립주택이다.삼성물산 등의 지원으로 61년만에 복원된 청사는 1층 회의실·접견실·부엌,2층 국무령 집무실과 직원사무실,3층 요인숙소 및 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실과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했던 책상·의자 등 집기와 비품이 갖춰져있다.3층 전시실엔는 尹奉吉 의사의 의거장면 등 독립운동관계 사료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는 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후 일제의 탄압과 추적공세가 강화되자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다 40년 충칭(重慶)에 정착했다.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충칭의 청사도 95년 복원됐다.중국은 백범이 경계한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민족사랑을 높이 평가,그의 발자취를 복원했다. ◎국민의 힘으로 기념관을/과거 집권층 왜곡­평가절하 탓/애국혼 깃들일 곳 없이 반세기/26일 종합계획 발표… 내년 기공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다.그러나 사후 반세기나 지났지만 그의 국내 발자취는 여전히 망각의 역사속에 묻혀 있다.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은 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기념관도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鮮于鎭 상무이사는 “기념관 건립과 발자취 복원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그의 위업을 왜곡하고 평가절하했던 집권층과 잘못된 사회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협회는 그러나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金泳三 전 대통령 집권때인 96년 8월14일에는 발기인대회도 열렸다.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金九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담당 비서관까지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기념사업협회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이후 기념관 건립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金대통령은 金九 선생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어 기념관 건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鮮于이사는 말했다. 그러나 건립기금과 장소선정 등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鮮于이사는 “국민성금과 정부지원으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러나 IMF시대의 경제난 때문에 성금 모금운동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그는 말했다. 장소도 문제다.金九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을 선정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고 기념사업협회측은 말한다.기념사업협회는 金九 선생 서거 49주년인 6월26일에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예정이며 서거 50주년인 내년에 기공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기념관은 총건평 1,200평의 지상 3층 건물로 구상되고 있다.1층은 유물 전시실,2층은 자료실·도서실·사무실,3층은 국제회의장·소회의실·영사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 건립은 金九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민족교육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실현돼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그들은 범국민운동을 펼치고 정부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金九 선생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앤드류 잭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4)

    ◎미 영토 확장 크게 기여한 전쟁영웅/개척농민 유복자로 변호사·의원·대법판사도/귀족정치서 대중정치시대 연 첫 서민대통령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미국의 7대 대통령(1829­1837) 앤드류 잭슨은 미합중국 정치문화에 ‘대중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이른바 ‘잭소니안시대’을 전개시킨 대통령으로 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6명의 전직 대통령이 버지니아,매사추세츠 등 동부 출신의 대농장주 후손으로 좋은 정규교육을 받은 ‘신흥귀족’ 출신이었던데 반해,그는 가난한 개척농민의 유복자로 통나무집(log cabin)에서 태어났으며 정규학교라고는 문턱도 밟아본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첫 ‘서민대통령’으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어 대통령에 오른 잭슨은 대통령직 자체를 ‘최고의 지위’라기 보다는 ‘일할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그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시킨 대통령으로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강인함 또는 단단함의 상징인 히커리나무에 비유되어 ‘올드히커리’(Old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올드 히커리’ 애칭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67년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의 시골에서 태어난 잭슨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의 병사로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됐다.성질이 급하고 거친 그는 싸움질을 일삼아 아들을 목사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정도 였다. 장로교 목사로부터 가까스로 글을 깨친 그는 14세때 독립군 민병대에 가담,소년병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잭슨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이듬해 영국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그러나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구두를 닦으라는 영국군 장교의 명령에 불복,그로부터 칼로 머리를 맞아 깊은 상처를 얻게 됐다.그는 평생동안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온 그는 솔리스베리의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공부를 시작,20세때인 178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테네시주 내슈빌로 옮겨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96년에는 새로 주로 승격된 테네시주의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됐으며 이어 상원의원,테네시 대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호전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1812년 미합중국의 선전포고로 영국과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였다.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잭슨은 인디안과의 전투에서 연승,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중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서남부 전체 미군의 지휘권을 얻게 됐다. 잭슨은 플로리다 펜사콜라 전투에서 승리,플로리다를 장악했으며 15년 겨울,뉴올리언스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군과 미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사령관을 포함한 2천600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미군은 단지 8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이었다. ○영군과 전투서 대승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로 기록된 뉴올리언스의 승전은 영국민에게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그동안 군사력 열세에서 유럽 강대국들에 소극적 대응을 해오던 미국은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게 됐던 것이다.지금도 뉴올리언스 시가지 한복판에는 포효하는 말에 탄 그의 동상이 높이 서있다. 이같은 그의 업적은 그를 자연스레 1824년 새로 태어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부상시켰다.잭슨은 1차투표에서 승리했으나 과반수에 미달했고,2차투표에서 정치적 흥정에 의해 존 퀸시 아담스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그러나 잭슨은 4년후 다시 도전,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됐다. ○첫 암살대상자 기록도 잭슨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하면 가까와질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율의 관세제도를 개혁,관세율을 낮추었으며 예산절감을 통해 연방예산의 잉여분을 주정부에 골고루 이월할 것을 제안했다.따라서 그는 연방정부가 공공복지사업이나 건설사업 등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반대했다.정부의 지나친 부채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까지 주장했다.이같은 국민편에 선 통치는 그의 재선을 무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잭슨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많은 시행착오도 일으켰다.친구들을 요직에 등용,‘주방내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특히 그는 이혼녀인 부인 레이첼을 따라다니는 악의적 소문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그 문제로 대통령이 되기전까지 많은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곤 했다.그는 또 1935년 실패로 돌아갔지만 암살기도가 발생,역대 미대통령 가운데 처음 암살대상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영토의 확장 ▲귀족정치에서 대중정치로의 전환 ▲연방정부의 부채청산으로 건전재정 확립 ▲부패한 연방은행의 규제제도 확립 등이 꼽히고 있다.대중정치의 확립은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서 잭슨은 42명 가운데 비교적 높은 8위에 랭크되고 있다.그는 69세 대통령을 퇴임하여 자신의 농장인 내슈빌 교외의 허미티지에서 78세로 숨을 거둘때까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잭슨 유적지 ‘허미티지’/평생 가꿔온 사저… 테네시주 내슈빌 위치/55만평에 정원·교회·농장·후손들의 집도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유적지로 지정된 ‘허미티지(Hermitage)’는 잭슨이 평생을 가꿔온 사저로 컨트리뮤직으로 유명한 테네시주의 주도,내슈빌에 위치해 있다. 외딴집이라는 의미의 허미티지는 55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에 잭슨과 그 가족이 기거하던 맨션을 중심으로 부인 레이첼을 위해 만든 정원과 교회,후손들의 집 등 각종 부속건물과 농장으로 돼있다.비지터센터 뒤에 위치한 맨션에는 잭슨 생존 당시의 실내장식과 함께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18세기말∼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터는 잭슨이 내슈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1804년부터 조금씩 구입해 모은 것으로 오늘날의 형태가 갖춰진 것은 대통령 재임중인 1833년 무렵이며 37년 대통령 퇴임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허미티지는 워싱턴 교외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사저인 마운트버논과 함께 미국내 대통령문화 보존의 한 본보기로 유명하다.1889년 애미 잭슨에 의해 창립된 허미티지부인회에 의해 보존되고 운영되고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이 부인회는 내년 2월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애미 잭슨은 자식이 없던 잭슨 대통령 양아들의 아들인 잭슨3세의 부인이다.그녀는 45년 잭슨 사망후,수십년 동안 역사적 장소가 일부는 팔려나가고 퇴락해가는데 안타까움을 느낀 끝에 허미티지부인회를 결성,유적지키기에 나섰던 것이다. 30년 앞서 결성된 마운트버논부인회와 함께 허미티지부인회는 남자들이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부인들의 힘으로 문화유적을 지켜낸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 3당후보 첫 합동토론회 이모저모

    ◎경제위기·지역감정 놓고 열띤 공방/이회창­“경제파탄 정경유착 탓” 김 후보 겨냥/김대중­‘국가 부도사태’는 한나라당에 책임/이인제­‘우리가 남이가’ 지역감정을 부채질 대통령 후보등록이 시작된 26일 밤 동아일보와 뉴스전문 케이블 TV인 YTN주최로 열린 3당후보 합동토론회에서 IMF긴급지원요청등 경제현안과 지역감정 및 차기정권에서의 개혁 방안을 놓고 세 후보가 열띤 공방을 벌였다. ○…토론회 최대이슈는 경제위기였다.세 후보는 ‘국가부도사태’의 책임소재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총리와 부총리 출신 3명,장관 출신 22명,청와대 고위간부 출신이 8명이나 있는 한나라당이 나라를 맡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를 선공했다.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책임을 속죄하는 뜻에서 신한국당을 떠나 국민정당을 만들었다”고 전제,“한나라당은 절반의 책임을 냉혹하게 져야 하고 국민회의도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두 후보를 겨냥했다.이에 대해 이회창 후보는 김후보의 ‘20억+α’를 거론,“경제파탄에는 정경유착이라는 배경이 있다”며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을 누가 받았느냐”고 따졌다.이인제후보에 대해서도 “정치인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모신 분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꼬집었다.그러자 김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잇따라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의 부정한 돈으로 기여한 3천억원의 재산을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나는 버림받은 아들이어서 물려받은게 없지만 대표와 총재,후보를 물려받은 양아들이 더 책임이 있다”며 이회창 후보를 동시에 맹공했다. ○…정치현안 토론에서 이인제 후보는 최근의 지지율 하락과 관련,“20%대에서 당선권인 40%를 넘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자신감을 보이면서 “신성한 (국방)의무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격의 문제”라고 이회창 후보 가족의 병역면제를 꼬집었다.김후보는 “지지도가 회복상태”라면서 “70만 군인의 표를 감안하면 현재 지지도보다 5%는 더 높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김윤환 공동선대위원장의 경남지역 필승대회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발언을 한데 대해 이회창 후보는 “비영남 후보이기 때문에 결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고 적극 해명했다.이에 대해 김후보는 “영남후보는 안되고 비영남후보면 된다는 생각은 역시 법률대가다운 발상”이라고 반박했다.이인제 후보는 “한분은 ‘우리가 남이가’를 해야 되는 분이고 다른 한분은 ‘우리가 남이가’를 안해도 되는 분”이라고 이회창 후보와 김후보를 비난했다.차기정권에서의 개혁에 대해서는 이회창 후보는 “정치보복은 이 땅에 없다고 이미 약속했다”면서 “법적 문제가 있으면 국법에 따라 처리하지 정치권에서 왈가왈부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그러나 김후보와 이인제후보는 집권하면 국가부도사태의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후보는 “표적사정은 반대하지만 국정을 망친 책임은 따져야 한다”면서 국정청문회 필요성을 제기했고,이후보는 “국정파탄의 책임은 배임으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박찬호 특수(외언내언)

    박찬호 선수는 분명 ‘한국의 우상’이자 ‘국민적 영웅’이다.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박찬호때문에 살맛이 난다’고 할만큼 그는 우리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청소년들의 우상인 세계적 스타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그러나 박찬호 귀국을 앞둔 ‘박찬호 모시기경쟁’은 보기에 민망하고 볼썽사납기만 하다.각 기업체마다 팬사인회다 신제품발표회다 ‘박찬호장학회 출범준비모임’에 이르기까지 방송사들의 출연교섭도 숨막힐 정도다.그가 묵을 특급호텔은 박찬호의 하루 일과를 팬들에게 알려주는 ‘박찬호 전화’를 설치하는가 하면 박찬호관련 TV를 24시간 방영하고 전문요리사에다 경호원까지 딸린다.국민적 영웅에 대한 극진한 환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지나친 상혼이 건강한 한 젊은이를 망쳐놓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우리의 상술은 누군가를 막론하고 상대방이 ‘반짝’ 튀기만하면 물실호기로 달려들어 이용하다가도 조금만 주춤거리면 언제 봤느냐는듯이 차갑게 등을 돌린다.그러나 미국의마이클 잭슨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는 국민들이 스타로 만들었고 키웠으며 그들이 지켜왔다.프레슬리의 경우는 죽은지 만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대적인 추모행사와 특수가 그치지 않으면서 마치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청소년의 가슴에 영원한 우상으로 심어지고 있다.스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수 없으며 스타이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원칙을 투철히 실천시키는 셈이다.세계적인 스타를 만들기까지는 그만한 공과 시간이 걸린다.또 이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선 더많은 사랑과 정성이 요구된다.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이미지’를 오래 지키는 일이다.마운드에 나오면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해마다 입양아들의 모임인 미국 뉴저지의 세종캠프를 찾는 박선수는 본성적인 선량함과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낱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아니라 어쩌면 내년 시즌에도 마운드에 등판하여 우리의 꿈을 성취시켜줄 희망의 등불이다.검은 상혼과 속된 돈으로 더럽히지 말고 겸허한 인간미와 선량한 예지를 우리 모두 소중히 지켜줘야 한다.
  • 몽골 어느 탈북자의 삶과 고백(흑룡강 7천리:9)

    ◎노동·농사·목부… 고독한 이방인/“자본주의가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에 고향을 뛰쳐 나왔디요 외몽골·소련을 거쳐 구라파로갈 타산으로…”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들이 꽤나 되는 모양이다.탈북자라고 부르는 북한 동포들의 중국 월경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식량난으로 허덕이는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요즘의 탈북은 설득력을 갖는다.그런데 중국 보다 살기가 좀 나아서 밥술이나 먹던 시대에도 탈북자가 있었다.금을 캐는 노구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한우씨(62·가명)가 그런 장본인이다.그것도 두차례에 걸친 탈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지금도 떠돌아 다니는 신세다.내몽골에 처자가 산다고 얼버무릴뿐 가족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다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대륙에서 살아온 힘겨운 시절만을 털어놓는 것으로 일관했다.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목소리를 낮추었다.그가 살아온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신분노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선땅이 가까운데서 온 작가선생이라 내레 믿고 얘기합네다.내 이름을 구태여 알라고는 하지 마소.수소문만 하면 형제들이 조선에 살지 않갔수.어디 살던 아무개가 중국에 산다는 것이 소문나면 좋지 않을 것입네다.내레 처음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화물차를 탔으니까,고향이 어디쯤이라는 것은 짐작하실 거우다.선생도 그쪽 사람들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소리 들었디요.내 가족들은 죽지나 않았는지…” 그는 1961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무작정 화물열차를 탔다.화물차에 숨어 꼬박 이틀을 달려 어느 역에 닿았다.지금 생각하면 아성이었다는 것이다.중국말을 모르는 지라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밥을 빌어 먹었다.그리고 걸어서 하얼빈에 온 그는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화물차에 올랐다.열차는 쉬지도 않고 하루낮 하루밤을 달린 끝에 내몽골 하이라얼(해라이)에 도착했다. 중국은 당시 살기가 어려웠다.나무껍질과 같은 먹을수 있는 것이라면 다 먹었던 이른바 대식품시대라서 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다.주린 배를 움켜 쥐고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잘 수 밖에….그러다 경찰에 잡혔다.조선인민군 정찰병으로 권투에도 능했던 그였지만,석탄차를 타고온 주제 꼴은 말이 아니었다.자신이 보아도 의심을 받기 딱 좋았다.붙잡히고 나서 곧바로 수용소로 직행했다.그러나 수용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식량난이 극심해서 죄수가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그는 수용소에서 만난 몽골족과 함께 탈출한 뒤 말을 훔쳐타고 외몽골로 들어갔다.조선인(북한인)넷에 몽골족 둘을 합해 일행은 여섯이었는데,몽골족 도움으로 조선족들도 모두 몽골족 차림을 했다.중국에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떼지어 들어가던 시절,그는 왜 탈북자가 되었는가.그의 말을 들어보면 탈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가족들 죽지나 않았는지…” “외몽골과 소련을 거쳐 서구라파로 들어갈 타산을 댔디요.자본주의가 하도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네다.지금은 부자로 사는 남한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네다.여하간 호기심이 많아서리 고향을 뛰쳐나왔디요.중국과 몽골공화국은 다 같은 공산국가고 우호 인방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내몽골 들어가기가 쉬웠드랬습네다.순라병은 그림자도 없고 철조망 서너 가닥을 늘여 놓았더라 이겁네다.” 그는 일행과 초원 풀더미속에서 잠을 청하다 또 붙잡히고 말았다. 하이라얼 감옥에서 꼬박 두달을 살았다.그리고 나서 추방을 당했다.그를 기다린 곳은 함경도 아오지탄광이었다.그래도 하루 쌀 300g을 배급받았다. 북한은 당시 중국에 비해 사정이 좋아 노동개조를 받는 죄수에게도 쌀을 주었다.요즘 북한과는 천양지판이었으나 그는 또 탈북을 꿈꾸었다.1961년이 돌아오고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오지를 탈출했다.두만강을 건너 도문에 와서 화물열차를 탔다.그래도 있던데가 좋았는지,다시 하이라얼에서 내렸다. ○아오지탄광서 또 탈출 그는 배가 무척 고팠다.자신도 모르게 식당 앞을 서성거리다 식사를 하던 노년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짓 발짓으로 식사를 구걸했다.여인은 측은한 눈길을 주면서 얼결에 말을 걸었다.조선말이었다.내몽골에서 조선말을듣는 것은 엄동설한에 불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모든 사연을 실토하고 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그 여인은 당시 쉰 살의 조선족이었는데,몽골족 남편과 산다고 했다.이름은 이영숙,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내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묻습데다.내 거절할 이유가 없었디요.하이라얼에서 90리가 떨어진 그 집을 따라 갔더니,몽골족 남편이 양자를 삼겠다고 제의를 해왔디요.그분은 자기 이름을 투린자라고 소개합데다.촌의 당서기고 해서 사는 것도 그만했디요.몽골 초원에서 당서기 양아들로 사니끼니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모처럼 좌정을 하게 되었다 이겁네다.” ○넓은 초원서 3년을 목부로 몽골 유목민들은 양자를 두거나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을 해운으로 여기기 일쑤다.그래서 여남은 살을 먹은 소년을 소나 말,양 따위와 바꾸어 데려다 키우는 경우도 있다.이는 초원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의 하나인데,온정을 베푼다는 의미도 지녔다.‘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양쪽 모두가 손해볼 것이 없는 양속인지도 모른다.어떻든 초원에서 석 삼년을 목부로 살았다.그러는 동안 몽골말도 배우고 짐승을 방목하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이웃에는 28가구가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었으나 가난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초원에 겨울이 오면 유목민들은 정거생활에 들어간다.그 때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우물이다.그래서 이한우씨는 목축을 하면서 우물을 파는 일에 매달렸다.우물을 파서 돈도 제법 번 일이 있다는 그는 노다지 소문을 듣고 흑룡강상류로 들어왔다고 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독한 이방인으로 초원을 잊지 않았다. “몽골 노래가 왜 음이 길고 높은지 아오? 망망한 초원엔서 방목을 하다 보면 고독할 때가 많디요.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길고 구성지게 부르는 겁네다.”
  • 하이든 오페라 「사랑의 승리」 무대 오른다

    ◎23∼28일까지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서 공연/대곡중심 탈피 오페라의 다양한 면모 선봬 고전주의 대표적 작곡가 하이든(1732∼1809)의 오페라 「사랑의 승리」가 23일부터 28일까지 6일동안 서울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광인성악연구회(회장 박성원)가 주최하는 이 공연은 유명한 대곡중심의 오페라 무대를 탈피,음악애호가들에게 오페라의 다양한 면모를 선보이려 기획한 공연. 「사랑의 승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페라 부파이다.유럽 오페라 부파가 대개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오해」를 극 전개의 필수축으로 끼워놓고 전개되는 귀족들간의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얼치기 양아들(빌로도)을 아름다운 처녀 로지나와 결혼시키려는 귀족부인 바로네사와 로지나의 연인 에리코 백작,바로네사의 연인 에르네스토 남작,하녀 리제타 등이 등장한다.빌로도와 로지나를 결혼시키기 위해 꾸며내는 갖가지 해프닝과 오해가 희극적으로 전개된다.결국 로지나와 백작의 사랑이 지켜진다는 줄거리. 로지나역에 소프라노 오혜숙 고선미 고신애,바네로사역에 권혜영 허정림 김영진,리제타역에 손현 공영숙 이진호,에리코역에 테너 최태성 김성백 강항구 에르네스토역에 테너 박성원 장세완 고세환 빌로도역에 베이스 조성문 김명지 손철호,마지노역에 바리톤 양재무 이숙형 정인관이 출연한다.연출 유희문.511­3488.
  • 「한국 입양아」 정보 한 자리에/유니텔·GKL 홈페이지 개설

    ◎친부모 찾기·한국발견 등 내용 다채/각종 이벤트·모국방문사업도 추진 한국입양아들에게 모국의 소식을 전해주고 전세계 한국입양아단체들간의 정보를 교류하기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된다. 삼성데이터시스템의 PC통신서비스 유니텔은 최근 한국내 입양아 단체인 GKL(회장 김동식)과 공동으로 한국입양아를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사진·주소 http://www.adoptee.com)를 개설,서비스에 들어갔다. 「우리는 하나,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설된 이 홈페이지는 ▲입양관련 뉴스,국내외 채용공고 등을 싣는 「게시판」 ▲국내외 입양아 관련 행사나 입양아및 단체의 활동을 내용으로 하는 「이벤트&활동」 ▲친부모를 찾기 위한 공고나 경험등을 알려주는 「만남의 공간」 ▲한국의 뉴스나 문화·전통을 소개하는 「한국발견」 ▲입양아들의 토론장인 「포럼」 ▲한국에서의 연수나 유학을 소개하는 「한국유학」 ▲국내외 입양기관 정보나 관련기사를 소개하는 「협회/기사」 등으로 이뤄졌다. 유니텔과 GKL은 이 홈페이지를 통해 친부모 찾기,입양아 온라인 예술제 등 각종 이벤트를 벌이는 한편 입양아들의 모국방문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지난 50년대부터 지금까지 해외로 나간 한국입양아들ㅇㄴ 공식적으로 14만여명에 이르며 이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현지에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이들중 일부는 모국방문이나 국내외에서 작은 모임을 만들어 친부모찾기운동을 펼치고 있다.〈김환용 기자〉
  • 해외동포·입양아에 민족혼 심는다/국비 유학생 매년 50여명 초청

    ◎대학·대학원과정… 대상·수혜범위 점차 확대 내년부터 해외동포와 입양아가 국내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교육부는 해외동포 및 입양아에게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국내 대학 또는 대학원에 국비유학생으로 초청,학자금과 생활비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우선 내년에 외국에서 초·중·고 12년 교육과정을 마친 동포를 대상으로 50명을 뽑을 예정이다.인원은 국가별로 배분되며 전체의 20%인 10명가량은 민족교육의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입양아로 선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교육부는 현지 공관장의 추천을 받아 내년 3월까지 학생을 선발,먼저 4월부터 시작되는 국내 대학의 어학코스에서 1년간 모국어 적응능력을 기르도록 할 방침이다.이 기간에 학생에게 학자금을 포함해 1인당 연간 7백50만원가량의 지원금이 주어진다. 교육부 관계자는 『초청학생이 교육과정을 마친 뒤 돌아가 현지의 민족지도자나 한국어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라며 『앞으로 대상자숫자와 수혜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설/한민족 동질감­정체성 확립 기회로 교육부가 해외동포 및 입양아를 국내 대학에 국비로 초청키로 한 것은 그들에게 민족 동질감을 심어주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정도로 잘 살게 된 만큼 교민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한국어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벗어보려는 뜻도 담고 있다. 우리 사회는 몇백만명을 헤아리는 해외동포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그동안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왔다.교민청 신설 방안 등도 이런저런 이유로 보류됐다. 특히 해외 입양아에 대한 배려는 성년이 되어 뿌리를 찾으려는 그들에게 생부와 생모를 수소문하는 일을 거들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미국에서 입양아들이 양부모와 함께 매년 「코리안 캠프」를 차리고,유럽에서도 입양아들의 모임이 결성될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큰 만큼 이번 조치는 교민사회와도 격리돼 모국을 접할 길이 없었던 입양아들에게 값진 기회가 될 것이란 평가다.〈한종태 기자〉
  • 판소리 명창 조상현(이세기의 인물탐구:106)

    ◎타고난 성음 거침없는 연기력 객석 압도/전통고수보다 「시대의 향」담긴 음악 주장/“국악을 대중가까이…” 매년 수십차례 공연 이 시대 걸출한 인물의 한사람인 명창 조상현.타고난 성음에 거칠 것 없는 연기력은 어느 무대에서나 흥청거림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의 목은 묵직한 철성을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동편이나 감칠맛이 넘실대는 서편제와는 다르다.억세면서도 바닥이 고르게 다져진 우람장중한 힘과 정한이 배분된 강산제소리로 장시간 소리를 질러도 갈수록 목이 터서 유려한 가슴의 소리를 울리는 것이 특징이다. 훤칠한 체구에 두둑한 배짱,사나이다운 기백이 전신에 서린 조상현을 가르켜 일찍이 국악계의 대부이던 정권진은 「몇십년만에 한번씩 나오는 희한의 득음」으로 찬사한 바 있다. ○변화무쌍한 소리 구사 실제로 오음과 육률을 임의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평성으로 하다가 위로 튀는 목이며 목청을 좌우로 헤쳐가며 힘차게 내는 걸쭉한 반 수리성은 중상성을 낼 때도 세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혼자서 일인다역을 감당하는 「심청전」 「춘향전」 「수궁가」 완창에서 장(우조) 한(만조) 화(평조) 원(계면조)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고 아니리 발림에 능란하다.그중에서도 향청의 창고직이,감관과 색사를 두루 잡아들이는 「춘향전」의 「어사출도」장면은 「만장의 폭포가 쏟아지듯 웅건장대한 자진몰이」로 현란하게 말을 엇붙이고 장단을 가지고 놀면서 시원한 통성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그가 즐겨 부르는 「심청전」중 맹인잔치에서 심봉사가 청이를 만나 눈뜨는 장면 역시 평계면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을 토해내는 진계면으로 넘어가는 대목은 일품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0년5월 도쿄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일본공연에서 히다치노미아(상융궁) 일왕자부처를 비롯,전현직 장관·중참의원 등 1천700여관객이 만장한 가운데 장중한 공연이 끝나자 10여분간의 뜨거운 박수갈채로 심봉사로 분한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고초가 부녀상봉과 개안이라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장단은 중모리에서 빠른 자진모리로,창조도 애원성을 담아 관객이 눈물을 적시는슬픈 대목인데도 청승푸념이 범람하지 않는 영출한 기량에 일본신문은 한같이 「관객의 심금을 울린 명무대」로 호평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중에서도 그가 특히 「심청전」에 애착을 갖는 것은 그가 살아온 지난날이 애통비절과 가난의 파란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난 전남 보성군 결백면 오호리는 강산제의 원가인 회천면 금천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부친 조기원씨는 순천일대를 주름잡던 한량에다 광폭의 주란으로 그는 하루도 가정불화가 그치지 않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다행히 부친이 못 배운 것을 한하여 3남2녀중 막내인 그만은 유독 서당에 보내주었다.6살때부터 동몽선습에서 대학·소학을 배우고 율포중에도 진학했다.그러나 어릴 때부터 「강산제의 정한어린 노랫가락」을 들으면서 소리에 눈뜬 그는 협률사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될 것을 결심,12살되던 해 인근의 유명한 정응민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보성고를 졸업할 때까지 꼬박 7년을 하루 10시간이상 강산제소리인 춘향가·수궁가·심청가를섭렵했고 20세되던 해 광주로 나가 「적벽가」의 박봉술 명창을 사사,한때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그는 「나를 당할 명창이 누구냐」는 식의 호기와 만모로 군복무중에는 군예대를 만들어 전방을 휩쓸고 광주의 극장을 누비는등 객기만만의 시절을 보낸 적도 있다. ○가난과 객기의 젊은시절 그러나 목포문화방송의 국악프로를 맡아 출연하던 무렵 그곳에 들른 박녹주명창이 『지방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란 이유로 그를 수양아들을 삼았고 그때부터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명창의 자택에 머물면서 문밖출입이나 사람만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의 학습시기를 거쳤다.그리고 이제까지의 타성이던 떠는 소리(발성),입안소리(함성),비성과 횡성을 말끔하게 씻고 그는 비로소 명창서열에 들어섰다. 71년 국립창극단에 입단,잘 생기고 떡벌어진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만조와 평조,판소리장단을 두루 꿰뚫자 청중은 그를 환호해 마지않았고 73년 국립창극단 「수궁가」를 필두로 그가 주역으로 나오는 공연은 관객이 3층 복도에까지 차는 이변을 빚었었다.「TBC향연」에 나가면서 삼성 이병철회장의 눈에 띄어 각별한 사랑을 받는등 서울공연 4년만에 집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이로 인해 가정이 파탄이 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자택은 양천구 목동아파트,부인 이숙정 여사와의 사이에 2남이 있다. ○80년대 장극무대 휩쓸어 옳은 말을 잘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탓에 82년 국악향상을 위한 국립창극단 오디션에 모순점과 부정이 개입됐다는 이유로 이에 앞장서 항의하다 자진사퇴해버렸고 그후 KBS창극단무대를 통해 「멀 있는 국악을 대중 가까이 끌어들인 개척자」를 자처하여 텔레비전 화면에 가장 자주 비치는 국악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사나이다운 광활한 성격에 비해 술·담배를 입에 대지 못하는 그는 국악의 대중화라는 이름 아래 모든 창극에서 주역을 휩쓸면서 86년 파리 퐁피두문화센터에서의 「조상현 춘향전완창」, 89년 예향 광주에 시립국극단을 창단,「심청전」 유고·헝가리순회와 「아리랑」 구소련순회 등 70여개국을 도는 화려한 소리의 여정을 펼쳐나갔다.매해 수십차례의 공연을 끊임없이 가지는 중에도 「전통판소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선이 아니라 당대의 향취와 후대를 동반할 수 있는 음악을 지키려는 것」이 그의 의지다. 중국 악서에 나오는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춤을 보면 그 나라의 덕을 알 수 있다(문낙지정 관무지덕)」는 구절을 성취하려는 그는 요즘도 1주일중 사흘은 광주에서 보내고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 서울판소리보존연구회의 판소리강습, 3년전부터는 전국판소리명창대회를 직접 주관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는 완강한 젊음과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판소리 옛예인의 단아단정하며 오로지 전통을 지켜나가는 소극적 이미지가 아닌,사나이의 호방과 웅장청원으로 새로운 판소리명창의 인상을 새긴 그는 지금 대광입신의 경지에서 거장다운 절창을 펼치면서 판소리무대의 「영원한 젊음」으로 우뚝 서 있다. □연보 ▲1939년 전남 보성출신 ▲51∼58년 율포중재학중 명창 정응민사사,보성고 졸업 ▲58∼60년 광주국악원서 박봉술 「적벽가」 사사 ▲60년부터 명창 박녹주문하사사 ▲71∼82년 국립창극단원,주역 ▲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후계자지정 ▲73∼75년 판소리보존연구회 사무국장,판소리의 전승보급 ▲74년 남원 전국명창대회 1등 ▲76년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부문 대통령상 ▲78년 한국국악협회 상무이사 ▲80년 「수궁가」 완창발표(국립극장대극장) ▲82년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 ▲83년 「수궁가」 완창발표(서울 문예진흥원대강당,부산 가톨릭센터) ▲84∼95년 전남대 국악강사 ▲86년 「춘향전」 완창발표(파리 퐁피두문화센터) ▲89년 광주시립국극단창단 ▲90∼현재 광주시립국극단 서울공연 「놀보전」(호암아트홀)을 비롯,창극 「아리랑」 구소련순회,「놀보전」 「심청전」 유고·헝가리순회 등 매해 수십회공연 ▲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지정 ▲94년 전국판소리 명창대회 주관 〈현재〉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광주시립국극단단장 〈수상〉 대한민국국악대상(82년) 한국방송60년 방송유공자문화포상 대통령상(87년) 무등문화상(89년)
  • 소설 「태백산맥」 법정 선다/검찰,저자 조정래씨 기소키로

    ◎2년여 검토… “보안법 위반” 결론/“한국 최고소설” 평가… 재판 주목 소설 「태백산맥」이 출간된지 10년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선다.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여부를 수사해 온 검찰은 저자 조정래씨(53)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불구속 기소키로 방침을 정했다. 서울지검의 고위관계자는 30일 『그동안 법률적 검토를 거친 결과,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조만간 불구속 기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출간 때부터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 시비가 재연될 전망이다. 지난 86년 첫 출간돼 89년 10권으로 끝을 맺은 「태백산맥」은 무려 4백여만부가 팔려 나간 베스트셀러로 「분단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시비에 본격적으로 휘말린 것은 지난 94년 4월.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명지대 교수)와 한국전쟁참전총연맹 등 8개 단체가 작가 조씨와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김언호씨를 국보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면서부터이다. 경찰은 당시 조씨를 한차례 불러 조사한 끝에 ▲이승만정권을 친일세력 집권정부로 묘사 ▲농지개혁 소작 쟁의를 미화 ▲빨치산을 인민해방전사로 묘사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표현한 점 등을 들어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었다. 검찰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2년여 동안 사법처리를 미뤄왔다.문단 인사들이 선정한 「한국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등 발간 당시부터 엄청난 화제와 반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90년 9월 대검 공안부도 자체 조사 결과 이적성은 인정된다고 판단하고서도 사법처리를 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동안 혐의는 인정되지만 처벌은 하지 않는 「기소유예」와 「불구속 기소」 방안을 놓고 저울질해 오다 최근 기소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검찰의 관계자는 『혐의사실이 워낙 명백하며 기소유예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조만간 조씨를 불러 조사한 뒤 기소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은호 기자〉
  • 사랑의 화신(외언내언)

    6·25를 겪은 세대는 헤스대령을 기억할 것이다.추위와 굶주림속에 죽어가고 있는 전쟁고아 수백명을 미공군 전투기 17대를 동원시켜 인천에서 제주도로 후송했던 은인이다.「전쟁고아의 아버지」로 칭송됐던 그의 행적은 전쟁이 끝난 뒤 「전송가」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해 주었다. 전란후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고아들의 해외입양이 성행했다.그래서 「고아 수출국」이란 불명예스런 이름까지 얻었다.한때 정상아의 해외입양을 금지시키려 했으나 국내 입양이 원활하지 않아 법안이 폐기된 일도 있다.국외입양은 지금도 해마다 2천명가량 되며 이에 비해 국내입양은 그 절반수준.그것도 친자녀가 없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입양은 친자녀가 있는 경우가 더 많다.또 정상아가 아닌 장애자도 꺼리지 않는다.캔턴시에 거주하는 「한국 입양아의 대부」 와이젠드씨는 15명의 자녀중 둘은 친자식이고 13명이 입양아.이중 5명은 맹아등 신체장애자다.참으로 인간사랑이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있는 고귀한 삶이다. 장애자인 입양아의 치료를 위해 예편하는 주한미군 토머스 소령의 얘기는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다.승진도 보장돼 있으며 2남1녀를 둔 가장이 정들었던 20년의 군복을 벗기로 한 이유가 장애입양아의 치료 때문이라니.더구나 미국에서 외톨박이가 될 양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누나가 될 여자아이도 입양시켰다니 마치 성자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양아들의 골수백혈병 치료를 위해 전 재산을 다 내놓겠다며 울먹이던 성덕 바우만군 양부모의 며칠전 모습도 떠오른다. 토머스 소령의 인간사랑을 보면서 우리들은 부끄러움이 앞선다.우리가 얼마나 이기심에 가득차 있는가,남을 돕고 사랑하는 일에 얼마나 인색하고 완고한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그것도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동서양의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있다.인습과 전통의 차이도 존재한다.그렇다 하더라도 이기심의 충일에 반한 이타심의 실종을 우리는 고쳐야 할 것이다.
  • 파리 7대학 한국학 과장 최승언 교수(세계속의 한국인:5)

    ◎「한국학 불모지」서 한국어 심기 15년/69년 석사취득후 도불… 학부부터 다시 공부/정식교수론 단 한명… 불 교육계에서도 인정/부친은 문학평론가 최재서씨… 누님도 미서 한국학 가르쳐 서울과 파리의 거리는 1만4천여㎞(8천7백12마일).비행기를 타고도 14시간을 쉬지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머나먼 거리다. 그런 파리에서 두나라 사이를 가깝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면서 프랑스와 세계에 한국을 심는 사람이 있다.파리7대학의 한국학과 최승언(50)학과장.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파리시내를 수놓은 지난 19일 파리동쪽에 위치한 파리7대학의 강의실.12명의 프랑스 학생의 파란눈은 최교수의 한국어강좌에 집중됐다. 최교수가 「너」와 「당신」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자 「합니다」와 「하십니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파비앙 뷔트군(20)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를 『희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뷔트군의 말처럼 한국은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 희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직은 먼나라다.88서울올림픽과경제성장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지리적 괴리만큼 아직도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 3개월이상 머물려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체류증에 국적을 「북한」으로 기재해 발급해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수업태도 진지 이런 한국의 불모지 프랑스에서 최교수는 외롭게 한국과 한국어를 심어 나가고 있다.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몇군데가 있지만 모두 더부살이를 하는 상태다.동양학연구소(INALCO)에서는 일본·한국학과이고 리옹대학과 보르도대학에는 한국어 강좌만 개설돼 있을 뿐이다. 파리7대학 한국학과는 독립된 과로서는 유일한 교육기관이고 현재 한국인 정식교수는 최교수 혼자다.그의 실력은 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프랑스 교육계에서도 그대로 인정받고 있다. 파리4대학의 로제총장이 아는 한국인 교수의 이름은 최교수밖에 없고 파리7대학의 드동데 문과대학장은 『최교수의 실력은 탁월하다』고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그의이런 실력은 남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역정에서 비롯된다.최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대학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서울대불문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69년 프랑스에 도착해 툴루즈대학에서 3년동안 박사과정을 밟다가 다시 대학교 학생생활로 불어를 처음부터 공부했다.학위만 받으면 열리는 순탄한 대학교수의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바닥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서울대 교수직 사양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교수의 강의를 듣고 노트 필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논문을 쓰고 불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프랑스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괴심 때문에 대학교 학부생활을 다시 하게 됐다』고 최교수는 설명한다.요즘도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박사논문을 써내 당당히 대학교수가 되는 적지않은 유학생들에게도 그의 이런 「용기있는」 행동은 귀감이 될 것 같다. 예비교수에서 대학생이 된 그는 프랑스학생들과 함께 밤새워 공부하고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면서 학사와 석사·박사학위를 받아냈다.지난 79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파리에 도착한지 꼭 10년.그만큼 그의 학위는 노력과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를 완벽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불문학자 가운데 한사람이다.또 이런 실력이 프랑스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동료 프랑스인 교수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다. 최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뒤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초빙됐으나 개인적인 이유등으로 서울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지난 82년부터 이국땅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이런 보기드문 경력등으로 파리교민사회에서 그는 「기인」으로 꼽힌다.교수로서의 권위보다는 학자로서의 「최교수」일 뿐이다.번드르한 각종행사에 초대받아도 가지 않고 교수로서의 직업에만 충실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런 행동에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부친 최재서(1908∼1964)씨의 영향이 많았던 듯하다.최교수는 주지주의적 비평을 시도,한국문학사에 과학적 비평방법을제시한 최재서씨의 4남2녀중 막내이다.바로 위 누님 양희씨(62)도 미국 캔버라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어학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학생유치 적극 활동 그의 수업법은 독특하다.언어학이나 문학을 가르치기 보다는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예를들어 『설렁탕 한그릇 주세요』라는 표현이 학생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한다.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입에서는 한국어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최교수는 학생들의 문학이나 언어학적 소질이 자신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어 이해능력을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둔다.이를 테면 학생들의 소질에 날개를 달아주는 보조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을 배우려는 학생들의 숫자가 88서울올림픽이후 한때 30여명까지 올라가 한국학 붐이 잠깐 일어났었으나 오래지않아 시들어버렸던 일도 있었다.그래서 단 2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바로 옆의 중국학과나 일본학과 학생의 숫자가 1백명정도씩으로 북적대는 점을 감안하면 프랑스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장서 2만3천권 소유 그래서 최교수는 적극적인 학생유치에 나서 동양학부 학생들에게 2개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상대적으로 학위받는 데 많은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도 하는 등 학생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런 노력탓에 이제는 한국학을 배우는 학생은 1학년에 30여명을 비롯해 모두 60여명.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한국학을 부수적으로 배우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 최교수는 안타까워한다. 동양학을 배우는 학생들의 최대관심은 동양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에 있고 그다음이 경제대국인 일본이다.최교수는 『경제력이 학생들마저 불러모으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학의 전파는 국력과 직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최교수가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에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이 있다.한국학과는 유일하게 자체 도서관을 갖고 있고 소장 장서만도 2만3천권에 이른다.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올해부터는 한국국제교류재단측이 한해에 5만달러씩(약 4천만원)지원,큰 도움을 주고 있다.5명의 학생들에게 1인당 5천달러씩의 장학금도 줄 수 있는 부유한 학과가 됐다.국립인 프랑스 대학에서 장학금은 거의 생각할 수 없어 한국학과의 장학금은 앞으로 한국학 희망자들을 더욱 늘어나게 할 것으로 최교수는 기대한다. 최교수가 파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한국인 입양아 문제다.한국인 입양아는 프랑스에만 모두 1만명 가까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한국인 입양아들이 한국학을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어왔지만 3년전부터 부쩍 늘었다. 이제는 프랑스인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의 모습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한학년에 3∼4명씩 된다.프랑스인 부모들이 『너의 모국은 한국이니 한국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한다는 것이다.모국찾아주기의 배려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영어를 배울 때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어려서 입양된 학생들의 경우 이런현상은 심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전문가 양성” 자부 최교수는 이들에게 경제학이나 지리학등을 복수전공으로 택하도록 권유한다.한국학과 경제학을 함께 공부하면 프랑스에서는 한국경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3백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득실대는 프랑스에서 한국을 공부하면서 취업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한국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프랑스인 한국전문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면 한국과 유럽의 거리는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최승언 교수 신상메모◁ ▲45년 서울출생 ▲63년 경기고등학교 졸 ▲67년 서울대 불문학과 졸 ▲69년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69년 프랑스 툴루즈대학 박사과정 ▲73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학사 ▲75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석사 ▲79년 툴루즈대학 문학박사 ▲80∼81년 서울대 조교수 ▲82∼88년 파리7대학전임강사 ▲88년∼현재 파리7대학 한국학과장 ▲역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강좌」
  • “교포2세 모국 방문운동 펴자”/윤성균(공직자의 소리)

    최근 국제교류의 추세가 그 주체와 내용에서 다양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중앙정부가 나서 경제 교류에 무게를 두었었다.그러나 최근에는 지방정부·기업·국제기구·민간단체 등이 교류와 협력의 전면에 나서는가 하면 교류의 내용도 경제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까지 확대되는 것이 국제적 추세다. 국제사회에서 자치단체의 맹활약은 당혹스러울 정도다.미국이나 일본·중국의 자치단체는 지난 90년초 앞다투어 서울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다소 늦긴 했지만 지방화시대를 맞아 자치단체의 국제무대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을 세웠다.지난 9월 일본 도쿄,이번에는 미국의 뉴욕에 사무소도 설립했다.내년 2월에는 프랑스 파리에도 국제화재단의 해외 사무소를 설치한다. 지난 3일부터 12일까지 정태수 내무부 차관을 모시고 뉴욕사무소의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각국 자치단체의 진출상황과 미국의 지방자치 등을 둘러보며 짜임새있는 해외진출 전략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특히 국정지표로 제시된 세계화를 효율적이고 내실있게 추진하려면 우리 교포들에 대한 특단의 방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화전략이 국가·지방자치단체·국민 등 모든 국제교류의 주체들이 세계 제일이 되는 전략이라면,해외교포를 국가적으로 지원해 활용할 경우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느꼈다. 교포사회에서 흔한 일이지만 미국 어느 중소도시의 한인 사회를 예로 들어 보자.1세들은 현지에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나 이질적인 문화에서 오는 소외감 등으로 고국에의 향수를 지닌 채 살고 있다.2세나 입양아들은 현지생활과 문화에 어느 정도 동화됐지만 불행히도 고국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한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나 자료,고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이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갖가지 자료를 제공하고 조상이나 뿌리를,그리고 고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더 많이 개발된다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치단체별로 2세나 입양아들을 대상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운동을 펴면 어떨까.고향에서 우리 문화와 예의범절을 가르쳐주고 전통가정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조국을 충분히 이해하는 교포들이 나중에 세계 여러 나라의 각 분야에서 활동할 때 세계화의 뿌리도 단단히 내릴 것이다.국가나 자치단체는 해외 교포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는 작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줄어드는 조선족(두만강 7백리:20)

    ◎연변자치주에 85만… 주인구의 39% 차지/20년대엔 80.5%선… 광복이후 급격히 감소/60년대 한족들 대거 이주… 조선족마을 “점령”/인구증가율 가장 낮아 소수민족 전락… 한족동화 가속 백두산 줄기의 푸쿠리산에서 발원하여 먼 물길을 달려온 두만강.중국 길림성 훈춘시 경신향 방천촌을 왼쪽에 끼고 막 돌아내려오면 러시아 땅에 이른다.그 두만강 하류 오른쪽은 북한의 함북 은덕군 두만강시다.그러니까 두만강물이 하구로 흘러흘러 내려와 3국 국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 두만강물이 하구를 벗어나면 동해를 만나고,이내 염분 섞인 바닷물에 동화되어 버린다.나는 중국쪽 국경지대이자 두만강 하구 방천촌 국경초소에서 저 멀리의 동해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연변의 조선족 미래를 생각했다.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조선족은 넓은 바다에 버려진 좁쌀 한알에 불과한 창해일속이라는 생각을….조선족이 비록 연변땅에 못자리판을 이루었을 지라도 어디까지나 소수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껴야 했다. ○한족인구 1천여명 오늘날 연변 자치주의 조선족 숫자는 85만4천4백6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이는 전체인구의 2백13만8천3백97명과 대비하면 고작 39.5%에 지나지 않는다.조선족의 비율이 한껏 높았던 지난 1926년 80.5%와 비교하면 천양지판이다.조선족의 비율은 광복과 더불어 급격히 떨어져 1948년 63.3%,19 79년 40.6%를 기록했다.지난 70년대까지 한족이 단 1가구도 살지 않았던 숭선진에 지금은 1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이는 한족의 번창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 마을이 한족마을로 뒤바뀐 사례도 허다하다.화룡시 숭선진 하천과 원봉,노과진 치마대,닥화진 차창고산과 차창,용정시 평정 등은 조선족 마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한족들이 주인으로 들어앉았다.그 속에는 쌀의 뉘처럼 조선족들이 더러 끼어있지만,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낼 정도로 동화하고 있는 것이다.말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일 뿐 주내에서도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한족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뼘은 내려온 듯 싶은 코를 훌쩍훌쩍 들어마시는 아이들이 버글대고 있다.그러나 조선족마을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 마저거의 뚝 그쳐버릴 정도가 되었다.왜 그런고 하면 조선족에게는 아이를 둘씩 낳아도 좋다는 생육우대정책을 거들떠 보지도 않기 때문이다.그저 아이 하나면 만족하는 경향이다.오히려 하나밖에 낳지 못하도록 정책으로 묶여있는 한족들은 아이들을 무 뽑듯이 쑥쑥 낳아 슬하에 자녀들이 주렁주렁하다. 한족들에게 아이 하나를 낳도록하는 산아제한을 중국에서는 계획생육이라고 부른다.이 제도는 도시에서 강력하게 적용되어 혼쭐이 날 때가 많다.지난해 요령성 단동시(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한 옛 안동)정부의 한 고위간부가 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가 큰 피해를 당한 일이있다.그는 10만원의 벌금을 물고 부부의 공직은 물론 당원자격까지 박탈당했다.그러나 연변 산골에서는 계획생육제도를 무시하기 일쑤다.따라서 아이를 낳고도 호적에 올리지 않은 이른바 망류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다산하는 조선족 줄어 연변에서 한족이 늘어나는 또 다른 요인은 외부인구의 유입이다.지난 1960∼63년까지 북경의 중앙정부 정책에 따라 산동성에서 지변청년(변방에 나가 살기를 지원한 젊은이 그룹)들이 대거 연변에 들어왔다.그들은 자리를 잡고 친척은 물론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들여 화룡시 장살령의 경우 한 마을에 1백가구나 되는 산동사람들이 살고 있다.또 문화대혁명시기에 장춘과 같은 대도시에서 하방한 지식청년들도 아예 연변에 자리를 잡고 눌러산다.그들도 물론 가족들을 연변땅으로 데려왔다. 조선족들의 한족화는 옛날에도 있었다.화룡시 덕화진 용연촌 허치영은 일찍 상투를 자르고 호복을 입어 10㏊의 밭을 얻었다고 한다.광복전에 화룡의 이영춘은 한족의 양아들로 들어가 부자가 되었다.그러나 일제통치하에서는 한족이 조선족에 동화되는 사람이 많았고 조선말도 열심히 배웠다. 조선말을 잘못 배워 망신한 호족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재미있다.왕수찬이라는 지주가 살았다.그는 조선족 소작인에게 돈 많고 위풍당당한 사람이 자기자신을 남에게 소개할 때 조선말로 무엇인가를 물었다.소작인은 『고토리 올시다』라고 가르쳐주었다.그 한족은 조선족 소작인을 만나면 의레 『고토리올시다』라는말로 거드름을 피웠다.그래서 조선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왜냐하면 「고토리」는 함경도 방언으로 어른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족들이 많다.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백금촌이나 삼합등지의 한족들은 말 뿐 아니라 집과 음식까지도 조선족 풍습을 따르고 있다.하지만 조선족들이 한족에 동화될 차례가 되었다.한족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그 동화속도가 빠르고 해괴망측한 꼴도 종종 보게되었다. ○한족학교에 자식 보내 평정촌에 사는 곽해부(51)라는 한족의 형은 장춘에서 돈으로 여자를 사와서 아내로 맞았다.그 이후 형이 죽자 곽해부는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한족들에게 형수를 아내로 품에 끼고 사는 것은 별 흉이 아니다.그런데 요즘 조선족 사회에도 사촌형수 정도를 아내로 맞는 일이 가끔 있는 모양이다.몇년전 백금촌의 이종혁(45)은 친구와 아내를 맞바꾸는 새 풍속을 만들어냈다.두 집이 지금은 연길에서 사는데,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서로 친하게 내왕한다는 것이다. 조선족과 한족 사이의 통혼은 아직 흔치 않다.특히 한족처녀와 결혼하는 조선족총각은 손을 꼽을 만큼 적다.용케도 조선족이 한족 며느리를 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그런데 일상의 풍습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심했다.이를테면 시아버지가 낮잠 잘 요량으로 목침을 베고 누워있노라면 그 위를 한족 며느리가 예사로 넘어다닌다는 것이다.처녀들은 심심찮게 한족 총각들과 짝을 짓는다.조선족 처녀들의 변명을 들어보면 허풍은 떨고 까닭없이 여자를 깔보는 조선족 남자들보다 한족남자가 더 좋아서라고 말한다. 어떻든 연변의 조선족들은 줄어들고 자아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어느 나라에 살든,또 환경이 열악하든 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세계각지의 중국화교들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마음이다.특히 인구증가율은 중국 전체의 각 민족 가운데 가장 낮다.다음 세기의 연변은 요령성이나 흑룡강성처럼 잡거구가 될 것이다.?
  • 한·중 선린우호 증진 계기로/이붕총리 방한의 의미

    ◎외교부장 수행 이례적… 「북핵」 논의/원자력협정 추진… 중국에 「원진」시장 진출 가능 이붕중국총리의 첫 방한에 대해 정부는 두나라간의 선린우호 관계를 발전시킬 특별한 계기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중국과 북한이 제2의 밀월시대를 열고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방한에 대한 정부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이총리 방한의 중요성」이란 별도의 자료를 낼 정도다. 중국의 총리는 외국여행시 정상외교를 수행한다.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출되는 자리이고 당서열이 2위이긴 하지만 실권을 행사하는 행정부 수반이다.서열 1위인 국가주석과의 관계도 상하관계라기 보다는 다른 업무영역에서 협의·협력하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대통령제에서의 총리와는 격이 다르다.김영삼대통령과의 회담도 정상회담이 된다. 그의 방한은 때문에 중국이 남북한에대해 최소한 등거리외교를 할 것임을 확인해주는 상징성을 갖는다.특히 내년으로 예정된 강택민국가주석의 방한까지 고려하면 한­중관계는 이제 무르익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번 방한에서는 드물게도 전기침부총리겸외교부장이 수행할 것으로 알려졌다.여기에 30여명의 경제인들이 수행한다.동북아정세에 대한 논의와 경제협력이란 두개 의제 모두를 심도있게 우리정부와 논의하겠다는 시사이다. 이는 경제교류와 협력이란 제한된 관계에서 출발했던 한­중관계가 포괄적동반자관계로 격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이러한 관계의 격상에 대해 정부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상의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 화해·교류·협력 분위기를 확산시키게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특히 김일성 사후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한다는 점은 북한의 대남정책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총리의 방한기간중 양국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지역의 최대현안인 북한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접점을 모색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어떤 선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최소한 한반도비핵화의 이행을 촉구하는 선은 될 것으로1여겨지고 있다.제네바에서의 미국과 북한의 회담을 통한 북한핵문제의 해결 합의와는 별도로,서울에서의 한­중정상의한반도비핵화 강조는 미­북 합의의 실천력을 높이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총리의 방한을 통해 한­중 두나라는 경제협력관계의 구조 고도화를 추진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두나라는 우선 항공협정을 공식체결한다.또 원자력협정의 체결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원자력협정은 사실상 우방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중국이 경제협력과 관련해 한국에 거는 기대치를 가늠하게 해준다.원자력협정이 체결된다면 중국의 원자력발전시장에 국내기업의 진출이 가능해지고 북한 경수로 지원에 중국의 참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대통령은 통일된 한국을 전제로 한국과 중국,일본의 상호협력을 통해 이 지역을 세계경제의 중심지화 한다는 외교철학을 갖고 있다.그 중심지에서 통일한국은 통일이 갖는 역동성과 우의로 새로운 신문명을 창조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한반도를 세계문화의 중심지를 만든다는게 김대통령의 한반도구상이다.이총리의 방한은 그 구상을 한단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될것이다. ◎이붕 어떤 사람인가/사천성 출신 66세… 주은래의 양아들/88년부터 총리로 재임… 세차례 방북 중국 개혁개방의 완급을 조정하는 중국행정부의 최고 수반이자 중국 최고핵심인물의 한 사람. 중국의 국무원총리가 여타 국가의 총리와는 달리 국정전반을 장악하는 실권총리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의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5년임기로 선출돼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중국총리의 이같은 지위에 따라 우리나라는 의전 관례상 A급총리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번에 이총리를 국빈으로 대우키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66세로 사천성 성도출신의 이총리는 88년 국무원총리에 처음 선출된뒤 93년 3월 전인대에서 5년 임기의 총리로 연임됐다.총리로 재선직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와병설·실각설이 나돌기도 했던 그는 경제 및 주변국과의 관계안정에 큰 비중을 둔 정책을 펴왔다. 이총리는 연안 자연과학원과 장가구공업전문학교를 나온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유학했으며 귀국후 발전소 소장과 북경시 전력국장,국무원 전력공업부장,국무원 부총리등을 역임했다. 혁명열사 조세염의 외조카이자 주은래의 양아들이라는 연줄에 힘입어 80대 중반 소위 「혁명제3세대」의 떠오르는 별로 불리며 총리까지 올랐다. 이총리는 80년 4월 전력우호방문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래 85년 10월에는 국무원 부총리 및 당정대표단장 자격으로,91년 5월에는 총리자격으로 방문하는등 세차례의 방북경력을 갖고 있다. 하얀 얼굴에 안경을 쓴 이총리는 조자양의 개혁정책이 인플레를 야기하고 사회적 불안정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며 조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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