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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특검법 통과] 선거판 ‘허경영 신드롬’

    [이명박 특검법 통과] 선거판 ‘허경영 신드롬’

    ‘결혼하면 1억원, 출산하면 3000만원,60세 이상이면 월 70만원’ 새마을운동 주제곡인 ‘새나라노래’에 맞춘 공약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8번 찍으면 팔자 핀다.’는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허경영 후보의 이른바 ‘대표공약’들이다.‘BBK공방’에 파묻힌 올 대선정국에서 그는 파격적이어서 황당하기까지 한 공약들을 잇달아 내놓아 적잖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허 후보 마니아들은 ‘허 후보의 지지율이 민주당 이인제 후보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큰소리 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인기는 ‘허경영 신드롬’ 수준이다.“각종 개그프로 섭외 일순위”라는 댓글도 있지만 “어쨌든 웃겼으니 한 표 준다.”는 등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IQ 430의 ‘천재 대통령’을 외치는 허 후보는 ‘UN본부의 판문점 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허 후보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이미 ‘담판’ 지은 사안이라고 한다.‘정당제도 폐지, 국회의원 자격시험 도입’ 등 ‘혁명’에 가까운 제안도 했다. 이력은 공약만큼이나 화려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밀 정책특보’로서 새마을운동을 최초로 제안하고 방송통신대학 설립을 건의했다고 주장한다. 고(故) 이병철 삼성 전 회장의 양아들로서 삼성의 경영 방향을 자신이 제시했다고도 한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곰보 색시 보조개는 많기도 하지

    곰보 색시 보조개는 많기도 하지

    「한 여자에 두 남자」인 3각관계쯤 세상엔 흔한 일. 그런데 그 두남자가 형제사이이고 여자가 양귀비같은 미인이 아닌 곰보아가씨라면 얘기가 좀 재미있어진다. 사랑에 미치면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아뭏든 동생의 아이를 가졌던 아가씨가 형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는데-. 소꿉친구 자라서 「남(男)과 여(女)」 곰보면 어때, 동생이 먼저 유원지로 이름난 경춘(京春)가도를 달리다 마석에서 오른쪽으로 10리쯤 들어간 경기(京畿)도 양주(楊州)군의 한마을. 여기가 바로 「아더메치」한 형제지간 3각관계 치정극이 벌어진 곳. 2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에 문제의 세 남녀 집이 약 1백m 거리를 두고 마치 3각관계라도 상징하듯 3각형으로 떨어져 있다. 풍수지리로 보아도 숙명적으로 3각관계를 맺을 운명인가? 말썽난 신부 유덕자양(兪德子·26·가명)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에 얼굴 전면에 지독한 마마자국이 있는 속칭 곰보 아가씨. 말짱한 정신으로 본다면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가씨다. 이 아가씨를 사이에 놓고 고종 사촌 간인 이(李)원서씨(25·가명)와 박(朴)종운씨(24·가명)가 치사찬란한 역사를 엮은 것. 먼저 관계를 맺은 것은 유양과 박씨. 그러니까 먼저 동생과 역사가 엮어진 셈인데 지금으로부터 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마을에 살고 있으니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박씨의 어머니와 유양의 어머니는 자매를 맺은 사이. 박씨는 유양의 집을 제집처럼 자주 드나들었고 유양과는 소꿉친구이기 때문에 다정하게 지냈다. 그런데 나이가 20세쯤 되고 보면 남녀 사이란 결코 소꿉친구만일 수는 없는 모양. 이게 일이 벌어진 근원이다. 박씨와 유양은 어느덧 서로를 그리는 「남과여」가 되었고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밀회(密會)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의 씨앗·눈물의 씨앗 약혼준비중 이번엔 형이 2살연상의 여인이고 게다가 지독히 얽은 얼굴이지만 한번 정이 들고 보니 물불을 분간못하게 사랑에 빠졌다. 유양 방에서, 또는 박씨의 방에서, 마을 뒷산에서 사랑을 나누고 살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씨앗」이 잉태됐을 것은 당연한 순서. 유양의 배가 점점 불러갈 즈음에는 벌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해졌다. 처녀의 몸으로 배가 불렀으니 창피하고 부끄러운 집안 망신이지만 딸의 못난 얼굴 때문에 항상 시집보낼 걱정을 해온 유양의 어머니는 차라리 잘된 일이려니 생각하고 두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작정, 혼인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유양의 어머니에게는 그때 수양아들을 삼은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박씨의 고종사촌형인 이원서씨. 하나 있는 아들은 서울에 살림나서 살고 있고, 유양 위로 딸 둘은 출가, 오로지 유양 하나만 데리고 단촐하게 사는 처지가 외롭고 쓸쓸해서 이씨를 수양아들로 삼고 가까이 지낸 것. 이씨는 유양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잔심부름도 해주고 아들처럼 다정히 지내며 한살위인 유양을 「누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게 또 말썽일줄이야…. 수양아들을 삼아서 맺어진 누나 동생 관계라지만 처녀 총각이 만났으니 미묘한 움직임이 싹틀 수 있고 소문도 올바르게 날리가 만무하다. 이러쿵 짝짜쿵 소문이 나고보니 박씨의 마음이 고와질 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곰보 며느리를 얻는다는 것을 탐탁찮게 생각하던 박씨의 부모들에게는 더욱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것도 남이 아닌 바로 친고종 사촌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기가 찰 밖에. 판정승 형이 동생 각서받고 화촉 켜는데… 하지만 유양은 임신 6개월의 몸. 이제 와선 이도저도 못할 딱한 처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두 집안 어른들은 구수회의를 열고 이씨와 소문은 덮어두기로 결정, 그대로 박씨와 유양을 짝지어 주기로 했다. 그래 우선 약혼날을 받아 놓고 사주를 쓰고 혼인절차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신부 유양이 행방불명이 된 것. 하도 말도 많고 창피한 생각에서 유양의 어머니가 『왜 어미 속을 썩히느냐』면서 한대 쥐어박았더니 그길로 어디론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약혼날까지 받아놓았는데 신부가 증발을 해버렸으니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박씨는 유양과 고종형 이씨와의 관계를 더욱 의심했다. 『오냐! 너희 둘이 붙었구나』고 확신을 한 그는 유양과의 약혼을 취소하기로 결심했다. 사랑이 가셔버린 마음엔 증오심만 끓어 올랐다. 혼인이 취소되자 유양은 서울에서 낙태수술을 해버렸다. 여기서 일이 끝났다면 청춘남녀가 한때 철모르고 저지른 「잊고 싶은 사연」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로부터 3년남짓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가을 이씨와 유양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말썽은 또 꼬리를 문 것이다. 과거야 어떻든 간에 그동안 유양과 이씨가 누이-동생 사이를 넘어 연인이 된 것. 어차피 얼굴도 그런데다가 과거까지 가진 딸을 둔 유양의 어머니는 아예 이번에는 짝을 지어주기로 다짐하고 이씨의 부모와 만났다. 그때 이씨에게는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오고 한군데 혼담은 꽤 구체적인 데까지 진전되고 있었는데, 본인들이 좋아한다니 모든 청혼을 물리치기로하고 둘을 맺어주는데 동의했다. 단 과거 박씨와의 석연치 않은 문제를 완전히 씻어버리기 위해 박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유양의 집에서는 박씨의 집을 찾아가 딸과 이씨와의 결혼을 양해해달라고 사정, 동의를 얻는데 성공했다. 형제간이라지만 박씨와 이씨는 성(姓)이 다르고 또 박씨는 유양을 깨끗이 잊었으니 두사람의 결혼에 이의가 없음을 밝히고 각서까지 써주었다. 곰곰 생각하니 울화터져 동생은 잔치집 쳐들어가 약혼을 하고 택일을 했다. 결혼날이 닥치자 신랑 신부 집에서는 잔치 준비를 하고 친척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잊어버린 사람이라지만 조금쯤 미련이 남는 것이 사랑의 피인가. 결혼식을 이틀 앞 둔 날 박씨가 유양을 찾아갔다. 막상 만나고 보니 오가는 말이 고울수만은 없었다. 『XX같은 놈』『XX새끼』욕설이 오갔다. 여기서 박씨의 울화통이 터졌다. 신랑 신부가 식을 올리기 위해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기로 돼있었는데 새벽같이 박씨는 유양의 집을 습격, 잔치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손님들이 흩어져 도망가고 잔치는 엉망. 그러나 신랑과 신부는 무사히 박씨의 감시를 뚫고 서울에 가서 다음날 식을 올리고 유양은 머리를 얹을 수가 있었다. 3일 동안의 「허니문」을 즐긴 신혼부부가 마을로 돌아왔다. 신부는 이제까지 시댁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 살면서 시댁엘 왔다갔다 한다. 점장이의 점괘에 『돼지해가 되기전에(음력으로) 시집에 들어가면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나왔기 때문에 기다렸던 것. 날짜를 잡아서 지난 가을에 하다 만 잔치를 하고 들어갈 것이란다. <영(英)> [선데이서울 71년 2월 21일호 제4권 7호 통권 제 124호]
  • 입양아 영화 ‘마이 파더’ 다니엘 헤니

    입양아 영화 ‘마이 파더’ 다니엘 헤니

    “어린 시절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이번 영화는 이런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아 가슴이 더욱 저립니다.” ‘다비드의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외모로 인기를 얻고 있는 다니엘 헤니(28)가 영화 ‘마이파더’(감독 황동혁·제작 시네라인㈜인네트)의 주연을 맡은 소감이다. 항상 도시적이고 성공한 CEO 역할을 주로 했던 다니엘 헤니가 해외 입양아 역할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아픈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항상 연기의 걸림돌로 여겨왔던 어눌한 한국말이 극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마이파더’에서 사형수 아버지를 둔 미국 입양아 제임스 파커 역을 맡은 다니엘 헤니는 “낯선 이방인이란 느낌이 어린 시절 나를 힘들게 했다.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 입양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다.”고 출연 동기를 설명한다. 한국인 어머니와 영국계 미국인 아버지를 둔 혼혈인 그는 “자라면서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혼란을 겪은 점이 자신과 ‘제임스 파커’와 너무 비슷한 것 같아 더 애착이 가는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캐릭터 내면에 담긴 많은 감정의 교차와 따뜻한 스토리가 인상적이어서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는 것. 한편 미국 로케이션에서는 입양아 제임스 파커가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을 가족들에게 밝히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는 내용이 촬영됐다. 미국 LA 근교에서 진행된 이번 촬영에는 유명 할리우드 배우와 스태프들이 대거 작업에 참여했다. 파커를 입양한 미국 부모 역할에는 100여편이 넘는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한 노장 배우 리처드 리엘, 아이린 그라프가 캐스팅됐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나, 어셔, 제니퍼 로페즈 등 세계 최고의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등을 제작한 커먼 스레드에서 미국 로케이션의 총 책임을 맡았다. 또 토론토 국제 영화제 사무국 코디네이터 크리스티나 피오비잔을 비롯해 영화 ‘타이타닉’의 캐스팅 디렉터로 참여했던 케이사 오스몬드, 황동혁 감독의 단편 작품에서 촬영을 맡았던 피터 미사리 등이 영화에 참여했다. 영화는 현재 서울, 대전, 익산 등에서 촬영 중이며 올 하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이렇게 예쁜 아기를 어떻게 해외로…”

    “이렇게 예쁜 아기를 어떻게 해외로…”

    ‘이렇게 예쁜 아기들을’ 친부모와 헤어져 미국으로 입양된 지 26년 만인 지난달 28일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린 토비 도슨(29)이 2일 자신이 입양 전에 머물렀던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로부터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이날 복지회와 아동일시보호소 등을 둘러본 도슨은 입양차 이날 오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인 영아들의 수속 과정을 지켜보고 아기들을 직접 안아보는 등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도슨은 또 아동일시보호소에 수용된 아이를 안은 채 건강 상태나 이곳에 평균적으로 머무르는 기간, 입양 절차, 국내입양 현황 등을 꼼꼼히 묻기도 했다. 도슨은 말리 홀트 이사장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은 뒤 “나처럼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은 양부모와 생김새가 달라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기 마련”이라며 “입양아들에게 상처를 덜 줄 수 있는 국내 입양에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도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입양아 관련 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홀트 이사장은 1982년 도슨이 부산의 한 수용시설에서 이곳으로 보내져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사실을 기록한 서류뭉치를 복사본으로 건넸고, 도슨과 친아버지 김재수(53)씨는 이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한편 도슨은 상봉 직후 첫 점심식사를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잔에 술을 따라주는 등 숙소인 롯데호텔 등에서 가족들과 많은 얘기꽃을 피웠다고 김씨가 말했다. 도슨은 이날 오후 한국관광공사 명예홍보대사 자격으로 제주 중문단지 등을 둘러본 뒤 서울로 올라와 4일 미국으로 떠난다. 특히 도슨은 2일 부산에 내려갔다가 4일 아들을 환송하기 위해 상경하는 친아버지 비행기표를 직접 구입해 전하는 등 효성을 다했다고 아시아스포츠앤드엔터테인먼트 최경준 부사장이 전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왜 오랫동안 찾지 않았는지 묻고 싶어요”

    “왜 오랫동안 찾지 않았는지 묻고 싶어요”

    “생각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한 친아버지 찾기가 쉽고 간편한 데 놀랐습니다.” 한국 입양아 출신인 미국의 스키 스타인 토비 도슨(29·부모와 헤어지기 전 한국 이름 김봉석)이 유전자 검사 결과 친아버지로 밝혀진 김재수(53)씨와 28일 상봉한다.27일 약혼녀 리아 헬미와 함께 입국한 도슨은 한국관광공사에서 홍보대사 위촉장을 받고 친부로 확인된 김재수씨와 28일 오전 11시 숙소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나겠다고 밝혔다. 김재수씨는 이날 오후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김씨와 이혼한 친어머니는 상봉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도슨은 “관광공사에서 홍보대사 위촉 요청이 왔을 때 내가 도움을 요청했다.”며 “관광공사로부터 유전자 검사에 관한 도움을 얻어 친부를 찾게 돼 기쁘다.”고 소개했다. 도슨은 친부와의 상봉 소감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봤는데 대부분 질문들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잃어버렸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찾지 않은 이유를 묻고 싶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한국에 온 가장 큰 이유가 홍보대사 위촉이기 때문에 오늘 일정을 소화한 뒤 내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 “피를 보냈다가 수송 과정에 문제가 생겨 머리카락을 대신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매일 밤 뽑은 일도 있었다.”며 “많은 분들이 친부라고 주장해 친부 찾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와 기뻤다.”고 밝혔다. 도슨은 입양 이후 성장과정을 묻는 질문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양부모와 생김새가 달라 항상 튀는 존재였다.”며 “체조 수업 도중 아이들이 놀려 어머니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코리아헤리티지 입양아 캠프에 참여하면서 한국 문화와 한국 입양아들을 알게 됐고, 인생의 어느 시점에 친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도슨은 ‘김수철’이란 이름으로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지내다 세살 때인 1982년 콜로라도주 베일의 스키 강사 부부에게 입양됐다. 지난해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모굴 스키에서 동메달을 따낸 뒤 은퇴하고 현재 프로골퍼 전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언론의 조명 덕에 쉽게 친부를 찾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올림픽 동메달을 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쉬웠다고만 할 수는 없다.”며 “앞으로 토비 도슨 재단이 한국 입양아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한국 정부나 기관들이 힘을 보태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또 “친부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올 때 감정적으로 힘들었다.”며 “심정적으로 완벽하고 편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아버지를 뵙고 싶었다.”고 밝혔다. 25년 만의 아들 상봉을 손꼽아온 김재수씨는 “오늘 아들을 만나지 못해 실망이 크지만 내일 만나면 함께 회포를 풀고 싶다.”고 아쉬움을 달랬다. 김씨는 “도슨이 부산 범일동 중앙시장에서 잃어버린 맏아들 봉석이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면서 “지난해부터 내가 모는 버스 운전대 옆에 사진을 걸어놓고, 휴대전화에도 사진을 저장해 항상 봤다.”고 말했다. 임병선·부산 김정한기자 bsnim@seoul.co.kr
  • 우리소설 스웨덴서 ‘오디오북’ 부활

    우리소설 스웨덴서 ‘오디오북’ 부활

    김동인의 ‘감자’, 황순원의 ‘소나기’와 ‘학’, 한말숙의 ‘장마’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들이 스웨덴에서 ‘오디오북’으로 부활했다. 2003년 스웨덴에서 번역출판된 ‘한국단편선집’이 시각장애인과 노인들을 위한 ‘오디오 콤팩트 디스크(CD)’로 제작돼 스웨덴 각지의 도서관에 보급됐다. 스웨덴 유명 성우인 안나 되블링이 직접 녹음한 이 CD는 5시간44분 분량이다. 스웨덴 문화성은 50여년 전부터 30여만명의 시각장애인과 노인들을 위해 유명 문학작품을 오디오북으로 제작, 보급해 왔다. 동양권에선 처음으로 한국 단편소설들이 오디오북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 오디오북 제작에는 스웨덴의 교포작가 최병은(70)씨가 큰 역할을 했다. 최씨는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문학을 스웨덴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등 ‘한국문학 불모지’였던 스웨덴에 우리 문학을 알리는 일에 매진해 왔다. 오디오북의 모태가 된 ‘한국단편선집’도 그의 번역으로 태어났다. 지금까지 최씨가 번역해 현지에 소개한 우리 문학은 조병화(1993년)와 구상(1997년)의 시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수기’(1999년), 고은의 ‘선시집’(2002년) 등이 있다. 지난해에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박완서의 ‘나목’을 소개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서정주, 구상, 조병화,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등의 시화전을 현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스웨덴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씨는 스톡홀름 문단과 스웨덴 왕가, 정·관계 등에도 발이 넓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등에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은 시인이 재작년과 지난해 2년 연속 노벨문학상 유력후보에 오른 것도 이런 그의 ‘한국문학 알리기’와 무관치 않다. ‘하얀사슴’(白鹿) 등의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한 최씨는 “북유럽권에서 이제 한국문학의 진가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면서 “특히 이들 지역에 있는 수만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에게 한국문학을 읽혀 정체성을 찾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진실씨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촬영 때 자신의 집을 촬영장소로 제공하는 등 입양아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1968년 단돈 70달러를 들고 유학을 가 현지 대학에서 해양법을 전공한 뒤 석유회사 등에서 근무한 그는 자신의 소설 제목처럼 ‘하얀사슴’이 뛰어노는 연못(백록담)이 있는 제주에 핀란드의 ‘산타마을’(노마노마)을 재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전설과 허구에 불과할 뿐이지만 ‘산타마을’은 연간 6조원의 관광수입을 올립니다. 우리 문학작품에 녹아 있는 전설들을 관광상품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한자락 바람 치마에 휘감으면

    한자락 바람 치마에 휘감으면

    취재, 글 박혜란 기자 한국 사람처럼 어깻짓하기, 일본 사람처럼 걷기, 중국 사람처럼 미소 짓고 태국 사람처럼 손짓하기, 몽골 사람처럼 뒤돌아보기…. 무용가 백향주(32세)의 몸 안에서 동아시아의 몸짓과 표정과 정신이 충돌하고 조화하고 꽃을 피운다. 관음보살춤, 초립동, 무당춤 등을 완벽하게 재현해 ‘최승희 춤’의 마지막 계승자로 주목받았지만, 그는 스승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최승희는 그때, 저는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로 하여금 삶의 반려자로 무용, 그것도 동아시아 무용을 선택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집안의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국적이 다 제각각이지요.” 그의 부모님은 조총련계 재일한국인 2세였다. 그는 재일한국인 3세로 태어났고, 한국 국적을 택했다. 역사, 민족, 국가의 문제는 그에게 3인칭이 아닌 1인칭,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한국춤도 아니고 일본춤도 아니고, 대체 어느 나라 춤이냐고 따지는 이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제 춤이지요.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소통하게 하는 것, 다양한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언젠가 그의 손금을 본 이가 ‘굴곡 많은 인생’을 예언한 적이 있다. 예언처럼 유독 많은 위기와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중 세 번의 전환점은 그를 더 높고 먼 곳에 다다르게 했다. 세 번의 황홀한 성장통 “열다섯 살에 북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아마추어에서 전문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거지요. 그때 전문가의 세계란 것에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2만 명이 참가하는 콩쿠르란 게 상상이 가나요? 수개월에 걸쳐 심사가 진행되고 끝없는 경합이 벌어지지요. 문자 그대로 배틀이에요. 사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나이였죠. 하지만 그때 강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엔 한민족의 대표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결심도 대단했지요. 덕분에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따고 외국인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 최연소 입학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는 열아홉 살에 솔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 시간여 동안 한 사람이 여러 얼굴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독무는 이십대 후반에야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독무 공연 준비를 북한에서 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양아들인 김해춘 선생님께 배웠지요. 난 우리 선생님이 사람인가 귀신인가 했습니다. 연습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혀를 깨물고 하라!’ 그러시더군요. 말씀대로 혀를 꽉 깨물고 했더니 너무 아파서 정말 쓰러지지는 않게 되더군요. 그때 저는 아, 명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노력을 쏟아부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혹독한 훈련 덕분에 그 후 10년을 쉽게 넘어갈 수 있었지요.” 인연이 다하고 태어나는 곳 인생의 세 번째 전환점은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찾아왔다. 1998년 그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무용가로서 민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공연을 가졌다. “누가 부모 인생을 망치면서까지 감히 공연을 고집하겠습니까. 제가 한국 무대에 선다는 것은 부모님이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타국에서 우리말, 글을 지키고자 30년간 노력하셨지만 한순간에 딸을 잘못 가르친 사람이 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2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다정다감한 ‘변종 경상도 싸나이’ 이용권 씨(39세)와 사랑에 빠져 한국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예쁜 딸도 낳았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의 무용가로서 홀로서기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30년간의 준비를 맺음한 곳이자, 더 넓은 세계로 발돋움하는 새 출발의 거점인 셈이다. 독립을 위한 무대로 그는 비보이브레이크 댄스팀와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과 제가 가진 서로 다른 ‘코드’가 소통한다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라 기대해요. 함께 연습하며 춤의 새로운 재미를 새삼 발견하고 있어요.” 아시아인 백향주는 그의 스승들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에게 냉정한 충고를 건넨다. “한민족은 머리가 아주 비상합니다. 한국춤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추기 어려운 춤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현실은 왜 그런지 침체되어 있지요? 저는 그 이유가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든 공유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따라야 발전한다고 봅니다. 물론 좋은 부분만 이것저것 떼어와서 새로운 걸 조합해내는 건 결코 공유가 아니지요. 상대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배우고자 할 때 진정한 공유가 이루어지는 거지요. 더군다나 예술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나요? 예술가가 혼자 살고자 하면 다 죽이게 돼요. 그럼 결국 예술가도 죽게 되겠죠.” 월간<샘터>2006.10
  • “한국팬들 꾸준한 사랑 감사합니다”

    ‘와호장룡’‘영웅’‘게이샤의 추억’ 등으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중국 여배우 장쯔이가 21일 개봉하는 영화 `야연´(夜宴) 홍보차 방한했다.19일 서울 광장동 W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장쯔이는 “꾸준히 오랫동안 응원해주신 한국의 팬들에 감사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펑 샤오강 감독과 남 주인공 다니엘 우와 나란히 참석한 그녀는 ‘와호장룡’‘영웅’에 이어 무협액션물에 또다시 출연한 이유를 “중국 무협대작이 국제적인 영화장르이기에 선택했고, 무엇보다 평소 감독에 대한 신뢰가 커서 꼭 한번 같이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야연’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의 5대10국 시대를 배경으로 절대권력을 둘러싼 황실의 음모를 그린 무협서사 로맨스.2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는 중국 블랙코미디의 일인자로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이 연출해 더욱 화제가 됐다. 장쯔이는 양아들이자 어린시절의 연인이었던 황태자를 지키려 위험한 선택을 하는 황후를 연기했다.“한 캐릭터가 가진 풍부한 내면을 연기할 수 있었던 게 이번 역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밝힌 그녀는 최근 출연작들이 모두 할리우드 지향성이 강한 대작들인 것같다는 질문에는 “한국시장에 선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작은 영화, 예술 영화들에도 꾸준히 출연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2046’을 비롯해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은 ‘자스민 꽃이 필 때’ 등이 그런 작품들”이라는 설명도 보탰다. 할리우드 시장에 안착한 대표적 동양배우라는 지적에는 “지금까지 누가 날 선택해주길 기다린 적은 없었으며 늘 선택과 결정을 빨리 하는 편”이라며 “(할리우드 등으로)선택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행운을 누린 건 사실”이라고 자신을 평가했다.2001년 할리우드 액션 ‘러시아워’에 출연했으나 지난해 개봉한 ‘게이샤의 추억’을 진정한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꼽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와호장룡’ 이후 할리우드에서 출연요청이 많이 왔지만 대부분 액션물들이었다.”고 전제하고 “아시아 배우가 액션물이 아니더라도, 더군다나 모국어를 쓰지 않고서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한 작품이 ‘게이샤의 추억’이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이 안돼 그동안 연락하기가 힘들었는데, 어젯밤 환영파티에 ‘무사’의 김성수 감독이 와주셔서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장쯔이는 ‘무사’(2001) ‘조폭마누라2’(2003) 등 2편의 한국영화에 출연했다.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해외입양인도 우리민족”

    “해외입양인도 우리민족”

    참여정부 출범 초기인 2003년 10월. 역대 외교부 대사 출신들이 차지해 오던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학자 출신의 재야 인사가 내정됐다. 재외한인학회 회장,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 등 ‘필드’의 재외동포 관련 단체를 이끌고 ‘재외동포학’을 수립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이광규(75) 서울대 명예교수. 상대국(해외 동포의 대부분이 상대국 국민)을 고려해야 하는 정부 차원의 재외동포 정책과 시민 단체의 재외동포 지원은 기본 접근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우려도 나왔고, 역발상의 발전이 있을 것이란 기대도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이사장 3년 임기 내내 재외동포 정책을 둘러싸고 외교부·법무부 등 정부 부처와 재단의 불협화음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재외동포 전문가로서 역사의 아픔 속에 세계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을 보듬어내는 일들을 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24일 서울 서초동 외교센터 6층 재외동포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지난 3년의 소회를 들어봤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자면. -지난여름 국제결혼으로 해외에 나간 분들을 서울로 초청, 조국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입양아의 경우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외교부를 방문해 해외로 나간 우리의 입양아 문제를 강조한 이후 정부가 신경을 쓰면서 상당한 인식의 개선과 고국 방문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입양아들보다 더 힘들었다고 할 수 있는 국제결혼한 우리 동포들 특히 한국전쟁 시기 미군병사와 결혼한 이른바 ‘GI신부’들의 경우는 인식이 그대로다. 이들 중에 누가 개인 영달을 위해 외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을 떠났겠나. 모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미군 병사들과 결혼했다. 영어를 하고 외국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국제화가 아니다. 이들을 포용하고 이들의 외국인 남편, 그 자녀들을 우리 민족으로 감싸 안아야 그게 국제화다. 지난해 국제결혼한 여성들을 초청했는데 응어리진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을 보았다. 행사를 열려는데 “뭐가 자랑스러워 이들을 초청하느냐.”는 반대도 극심했다. 올해 미식 프로축구 하인스 워드 선수 모자 열풍을 계기로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살고 있는 국제결혼자들의 결혼 배경이나 학력, 배우자의 인종 등 겉면을 모두 걷어내고 한마음으로 포용하라고 계몽하고 설득해 왔다. 올 가을에도 2차 대회를 할 계획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재단내 동포들에 대한 연구작업이 태부족해 강화했으면 했는데 잘 안 됐다. 또 해외의 동포 단체에 그동안 추석이나 체육회 등 1회성 행사에 지원해준 돈을 목돈으로 돌릴 테니, 유대인들의 커뮤니티 센터와 같은 수익성을 담보한 동포센터 설립을 해보라는 쪽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한인 단체간 갈등 반목이 생기고, 소송까지 이어지면서 그 계획이 무산지경이 돼 안타깝다. 지난해 미국내 한인 세탁업협회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이 대표적으로 하고 있는 사업은 알다시피 식료품점, 세탁소, 미용용품 조달이다. 한국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미국 사회에서 그들의 실제 힘은 막강하고, 조국에 대한 애정 또한 누구 못지않다. 세탁업협회 대표들이 방한해 국제적인 대기업을 방문, 자신들의 세탁물 덮개에 기업 로고를 붙이겠다고 선의의 제의를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재외동포청 설립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갈등을 겪었는데. -해외동포 지원이라는 재단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정부와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나는 외교정책은 천문학이고, 동포문제는 기상학이라고 본다. 모두 하늘을 쳐다보는 학문이지만 외교는 은하계 태양계를 보고, 재단은 비가 오는지, 날이 맑은지를 본다. 충효의 문제로도 나는 설명한다. 효를 선택하다 보면 충과 배치될 때도 있고 충을 선택하다 보면 효와 배치된다. 외교부는 충을 선택하고 재단은 효를 선택한다. 외교부는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 우리 교민이 살고 있는 상대국과의 입장 때문에 교민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동포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선 이 체제론 어렵다는 논리를 폈지만 잘 안됐다. 정말 동포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회에서 동포청 또는 대통령 직속의 재외동포위원회를 설치 하자는 안을 냈는데, 나는 대통령 직속의 위원회를 원한다고 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서울의 문화재] (10) 경교장

    [서울의 문화재] (10) 경교장

    지난 12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기거하다가 서거한 경교장(京橋莊)을 찾았다. 경교장은 2층 석조 건물로 외부 벽면은 화강암과 타일을 붙이고 슬레이트에 고기비늘형 덮개가 씌워져 있는 일본식 건물이다. ●병원건물로 변신… 역사적 의미 거의 몰라 현재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쓰이고 있다. 경교장엔 약국과 간호실, 보호자 대기실 등이 있다. 이날도 수많은 외래환자들이 드나들었다. 하루에 700∼800명이 오간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는 “가끔 학생들이 단체로 오긴 한다. 하지만 개인이 역사적 의미를 알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현장에 날마다 수백명이 경교장과 백범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원일을 보기 위해 온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백범이 있던 당시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지냈고 1948년 백범과 함께 남북정치회담에 참여했던 신창균(작고)씨는 7년 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김구 선생이 돌아온 뒤 경교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애국자뿐만 아니라 이광수나 최남선 등 친일파도 선생을 등에 업고 죄를 조금이라도 지우려고 했고 입신과 출세를 위해 온 사람도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단독정부 수립문제로 백범이 이승만과 대립하고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에 다녀온 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정치자금을 가져오는 사람들도 점점 줄었다고 한다. 이런 경교장에 1949년 6월26일 수십만의 인파가 다시 몰렸다. 이날 백범은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했다. 이날 우리 민족은 국부를 잃었고, 슬픔에 잠겼다. 영결식 날인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장지인 효창공원까지 인파가 길을 메우고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백범이 서거한 뒤 경교장은 타이완 대사관저로 잠시 쓰이다가 한국전쟁 때는 의료진 주둔지로,9·28수복 후엔 미군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가 이어졌다. 휴전 후 경교장은 월남대사관으로 쓰이다가 1968년 고 이병철 회장의 맏사위가 주인이었던 고려병원이 인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백범과 경교장의 관계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건물 앞 구석에 ‘김구 선생이 서거한 곳’이란 작은 푯말이 있을 뿐 방문한 환자들도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무관심 속에 1996년 경교장은 철거 위기에 처했다. 같은 해 1월 강북삼성병원은 “경교장이 병원 한가운데 있어 병원 건물 신축이 불가능해 이전 또는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김구선생기념사업회 등 관련 단체가 강력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승만 전 대통령 머물던 이화장과 대조적 이에 병원측은 “경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아 철거가 가능하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 시 문화재위원 2명도 “현장 답사 결과 철거나 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반발이 빗발치자 서울시는 2일 뒤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경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김구 선생이 거처하면서 암살당한 사적이기 때문에 ‘경교장 이전 불가’”라고 못박았다. 오랫동안 경교장이 문화재가 못 된 건 심한 내부변형 때문이다.1998년 8월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준비위원회’와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관계자가 서거 49년만에 처음 암살 현장을 방문해 추도식을 가졌을 때, 그 곳은 이미 오래전에 ‘의사휴게실’로 바뀐 뒤였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동시대에 기거했던 이화장은 대조적이다.1982년 서울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됐고 사진과 유품 수천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승만의 양아들 이인수씨의 소유인 이곳엔 평소에도 30∼40명의 관람객이 찾아오고 관리에 필요한 돈은 서울시에서 부담, 보존하고 있었다. 경교장도 결국 2001년 4월6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로,2005년 6월13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강북삼성병원은 2001년 경교장이 속한 본관의 리모델링 계획서에 암살 현장에 ‘백범기념실’ 설치를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제기된 경교장 복원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2층엔 백범이 기거했던 방 모습을 재현한 백범기념실이 있다. 이곳엔 그의 흉상과 일생을 다룬 전시물이 있다. 하지만 모두 새 제조물일 뿐 어느 곳에서도 그의 유품은 없다. 또 강북삼성병원은 이미 1996년 10월 2층을 백범의 유품 등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라는 서울시의 권고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 바 있다. 백범 김구는 국민 모두가 독립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 하지만 경교장과 이화장은 백범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실세했고, 친일파는 득세했다는 뼈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글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11일 TV 하이라이트]

    ●글로벌 코리안(YTN 오전 10시25분) 최근 호주에서 ‘한국 어린이날’을 맞아 한인 입양아들과 동포자녀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 자리에선 한국의 정서가 듬뿍 담긴 각종 놀이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줄다리기, 이인 삼각경기, 닭싸움 등 마치 서울의 한 초등학교 운동회 모습과도 같은 풍경이다. ●다큐 여자(EBS 오후 9시30분) 청평댐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로 한참 들어가서야 맞닥뜨리는 산골짜기. 누가 이런 골짜기에 살까 싶은데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에 있는 큰아들에, 뱃속의 막내까지 총 9명의 아이들. 저출산 시대에 경종을 울릴 오순금씨네 집이다. 오순금씨의 육아일기를 엿본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오후 8시55분) 개미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초절정 엽기 여인이 나타났다.20년째 개미를 입에 달고 사는 엽기스러운 여인의 개미 사냥 속으로 들어가 본다.20년째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는 어머니. 온 몸이 굳어 버린 어머니를 정성스레 모시고 있는 충남 당진의 소문난 효자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본다. ●Dr. 깽(MBC 오후 9시55분) 유나는 달고에게 증인으로 법정에 서야 할지 모른다며 김형사가 사고 당일 자신을 만나러 왔냐고 묻고, 달고는 그럴 필요 없다며 화를 낸다. 유나는 죽은 오빠보다 달고가 더 걱정될 만큼 달고에게 진심이었다고 한다. 달고는 자신을 믿어주고 용서해줘서 고맙지만 유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고 한다. ●해피투게더(KBS2 오후 11시5분) 대한민국 대표 배우 고두심과 문소리의 숨은 친구찾기가 펼쳐진다. 어릴적 남자들한테 인기가 굉장했던 문소리. 소리를 좋아했던 남학생 중 한 명이 출연한다. 어릴 때부터 연기자가 되고 싶은 꿈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고두심. 고두심, 문소리의 친구들이 밝히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본다. ●문화지대(KBS1 오후 10시) 집에서, 거리에서 어디서든 입을 수 있고 동양인의 짧은 다리 콤플렉스까지 극복시켜 주는 ‘추리닝´. 쫀득쫀득 ‘추리닝´의 추리함에 감춰진 미덕을 찾아 그 안에 숨겨진 러브스토리를 공개한다. 죽을 때까지 등만 만들 것 같은 사람, 등 공예가 전영일. 그가 밝히는 빛의 미래는 어떤 것인지 화가 김점선이 만나본다.
  • [제1회 입양의 날] 가부장제에 ‘강요된 선택’

    [제1회 입양의 날] 가부장제에 ‘강요된 선택’

    “먹어도 헛헛하고 먹지 않아도 늘 뭐가 걸린 듯 답답했죠. 그렇게 수십년을 살았습니다.” 평생 죄인으로 살았다. 제 뱃속에서 낳은 아이를 먼 타국 땅으로 보냈기에 한이 맺혔다. 아이를 입양한 가정은 밝은 데서 박수를 받지만 제 아이를 떠나보낸 생모들은 어두운 그늘에서 한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식을 버린 매정한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의 피해자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희생자 A씨는 딸 8명을 낳아 시댁에서 갖은 구박을 받았다.9번째도 딸임을 알게 됐다. 몰래 남아를 입양했고 딸은 태어나자마자 해외로 입양 보냈다. 입양한 남자아이를 자신이 낳았다고 가족을 속였다.A씨는 자신을 찾아온 딸을 만났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B씨는 26년 전 아이 둘을 미국으로 보냈다. 남편은 주벽에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사기죄로 감옥을 가게 됐고 결국 이혼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빚과 양육의 책임은 고스란히 B씨의 몫이었다. 어느날 한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빚을 갚아주는 대신 아이들을 두고 오는 조건이었다. 삶에 지친 B씨는 재혼을 결심하고 아이들과 생이별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해외입양인들을 지원하는 뿌리의 집 원장 김도현 목사는 해외 입양의 대부분이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재혼을 하는데 왜 아이들을 두고 오라고 할까요. 남자들이 ‘처녀 장가’를 가야 위신이 깎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들을 선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죠. 가부장적인 풍조 때문에 생물학적인 관계를 끊도록 강요하는 것은 다분히 폭력적입니다.” ●타의에 의한 생이별도 많아 해외 입양은 생모 자의로 보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도 많다.70년대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의 아기 수출국’의 불명예를 안고 있었을 때 부모 의사와 상관없이 무수한 아이들이 해외로 나갔다. 40대 C씨의 경우 입양 보낸 아들이 자신을 찾아 오면서 해외입양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시절 실수로 아이를 갖게 됐고 낳자마자 입양을 보냈다. 국내 부잣집에 가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은 미국인이 돼 있었다. 재회했지만 통역없이는 말 한마디 나눌 수 없었다. D씨 역시 비슷한 처지다. 피까지 팔아 도박을 하던 남편은 아들을 두고 달아났다. 친정 부모는 아이가 있으면 D씨가 재혼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손자를 입양보냈다.2004년 아들이 연락을 해오면서 미국 입양 사실을 알았다.D씨는 “내가 보낸 것은 아니지만 죽는 순간까지 한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입양을 보낸 엄마들에 대한 다큐 제작 중” 해외 입양아들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아이를 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은 손가락질만 당했다. 입양을 강요한 것은 결국 사회였는데도 그들의 인권은 없었다. 뿌리의 집에서는 생모 10명 가량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감독은 미국으로 입양됐던 태미 추씨가 맡았다. 김 목사는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작품을 연말쯤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中 ‘새로운 고아수출 대국’

    한국이 미국에 가장 많은 고아를 ‘수출’하는 나라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그런데 그 오명(汚名)을 조만간 중국이 쓰게 될 것 같다. 지난 1991년 61명에 불과했던 중국 고아의 미국 입양이 매년 가파르게 늘어 지난 한해만 7900명 이상이 미국인 가정의 품에 안겼다고 뉴욕타임스가 23일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 정부가 한자녀 갖기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자녀를 버리는 가정이 늘자 91년 입양 관련 법률을 완화한 것이 이같은 경향을 불러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 법이 발효된 1992년 미국에 건너온 중국 고아는 206명으로 늘었고 이후 꾸준히 늘어 15년 동안 5만 5000명에 이르게 됐다. 또 미국에 입양된 거의 모든 고아가 딸이었다는 사실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은 러시아,과테말라,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인도,에티오피아 등과 함께 미국에 가장 많은 고아를 입양보내는 나라 중의 하나다.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인 고아를 입양한 경험이 있는 가정일수록 중국 고아를 많이 찾는다는 점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이것은 같은 아시아 출신인 데다 다른 인종을 키워 문화적 장벽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분석했다.이들 미국인 가정은 대부분 백인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었다. 신문은 또 90년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중국 입양아들이 이제 낯선 땅에 발을 딛는 10세 미만의 중국 입양아들의 고충을 상담해주는 네트워크까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처음엔 또래집단에서 소외된 애들끼리 놀이 집단을 만들어주는 역할에서 출발해 이제는 중국을 함께 여행하고 온라인에 후원 단체를 만드는 등 제법 큰 규모로 발전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中 ‘새로운 고아수출 대국’

    한국이 미국에 가장 많은 고아를 ‘수출’하는 나라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오명(汚名)을 조만간 중국이 뒤집어 쓰게 될 것 같다. 지난 1991년 61명에 불과했던 중국 고아의 미국 입양이 매년 가파르게 늘어 지난 한 해에만 7900명 이상이 미국인 가정의 품에 안겼다고 뉴욕타임스가 23일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 정부가 한 자녀 갖기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자녀를 버리는 가정이 늘자 91년 입양 관련 법률을 완화한 것이 이같은 경향을 불러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실제로 이 법이 발효된 1992년 미국에 건너온 중국 고아는 206명으로 늘었고 이후 꾸준히 늘어 15년 동안 5만 5000명에 이르게 됐다. 또 미국에 입양된 거의 모든 고아가 딸이었다는 사실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은 러시아, 과테말라,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인도, 에티오피아 등과 함께 미국에 가장 많은 고아를 입양보내는 나라 중의 하나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인 고아를 입양한 경험이 있는 가정일수록 중국 고아를 많이 찾는다는 점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이것은 같은 아시아 출신인 데다 다른 인종을 키워 문화적 장벽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이들 미국인 가정은 대부분 백인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었다. 신문은 또 90년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중국 입양아들이 이제 낯선 땅에 발을 딛는 10세 미만의 중국 입양아들의 고충을 상담해 주는 네트워크까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처음엔 또래집단에서 소외된 아이들끼리 놀이 집단을 만들어주는 역할에서 출발해 이제는 중국을 함께 여행하고 온라인에 후원 단체를 만드는 등 제법 큰 규모로 발전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신랑 힘세서 신부는 좋겠네

    신랑 힘세서 신부는 좋겠네

    한국 「프로·레슬링」 계의 기린아(麒麟兒) 장영철(張永哲)이 곧 장가를 간다. 四각의 「매트」를 주름잡던 왕년의 「헤비」급 챔피언, 억척스런 「셀리비트」(독신주의자)였기에 그의 이번 혼사는 대망(待望)의 「빅·게임」이 아닐 수 없다. 『덩치는 저래도 「링」밖에서는 하는 짓이 꼭 어린애인걸요』귀엽다는 듯이 「링」속의 獅子를 바라 보는 신부 全英海(26)양은 利大를 나온 체중 45kg의 「울트라·라이트」급. 결혼 D「데이」는 오는 6월 22일. 이날 하오2시 張永哲, 全英海 「콤비」는 종료예식장에서 정식 부부가 되는 「메인·이벤트」를 피로(披露)한다. 작년 9월 12일 아무도 모르게 약혼식을 올린지 만 9개월 10일만에 이들은 명실상부, 부부의 연(緣)으로 새로운 출발하게 된 것. 『처음엔 그냥 열렬한 「팬」으로 존경과 관심을 쏟았죠. 얼마를 지나다 보니까 남다른 성실성, 부드러운 인간미에 저도 모르게 인간적으로 끌려들어 가게 되었어요. 「링」안에선 그토록 무서운 사람이 일단 「링」밖으로 나오면 그보다 더 순진하고 나약할 수 가 없답니다』 신부는 신랑 자랑에 침이 마른다. 『4년전 그일 (註=장의 「프로·레슬링」에 대한 폭탄선언) 이 있은 직후 난 부산 태종대에 칩거하고 있었읍니다. 환호하던 관중도 갈채를 보내던 「팬」들도 모두 나에게서 시선을 뗀 직후라 난 환멸과 패배감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죠. 그때 「미스」全이 어머니와 함께 나를 찾아 왔읍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더군요. 난 순간적으로나마 감격했고, 그 감격은 곧 재기(再起)에로의 생명수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의 사랑의 「게임」은 대략 3「라운드」로 구분된다. 1「라운드」는 「챔피언」대「팬」의 시절. 63년부터 65년까지의 3년간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였고 그것은 또한 張永哲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그때 全양의 一家는 어머니 崔正林(56)여사를 비롯해서 네딸(정원·정숙·영매·정옥), 사위, 조카등이 모두 張의 열렬한 「팬」. 「게임」이 있을때마다 그들은 체육관을 찾았고 張이 나오는 TV앞에선 가성(奇聲)·괴성(怪聲)이 뒤범벅이 된 수라장이 이루어지곤 했다. 제 2「라운드」는 오누이 시절. 全양의 어머니는 어느날 「게임」이 끝난후 張을 집으로 초대, 아침 아들이 없던 그녀는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따라서 全양과는 「오빠」·「누이」의 관계. 이제 이들은 「여보」로 호칭되는 제3「라운드」의 「게임」을 목전에 두고있다. 신부 全英海양은 운동 구경뿐이 아니라 여고때는 직접 「핸드볼」선수로도 활약했던 맹렬(猛烈)여성. 수척한 몸매이긴 하지만 다부진「마스크」에 정신의 탄력성 같은게 엿보이는, 제격인 「선수의 아내」다. 『막상 배우자로 생각해 보니 성격이 혹 난폭할까봐 걱정이되었어요. 그러나 사귀면 사귈수록 이런 걱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읍니다. 도무지 집에 들어오면 어린애가 돼요. 온 식구를 무섭게 웃긴답니다』 張永哲이 全양과의 결혼을 경심 하게 된 것은 그들의 결혼이 자신의 선수 생활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때 부터. 「프로·레슬러」의 생명이 적당한 식사 관리와 휴식에 있다고 믿는 張永哲은 全양의 「모든것」에서 결혼생활과 선수생활의 양립(兩立)이 가능하다는 어떤 확신같은걸 얻은 것 같다. 결혼 생활이 질서와 「밸런스」를 기조(基調)로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정신 건강면에서 독신보다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張永哲의 「면(免)총각의 변(辯)」. 술과 담배를 안하고, 비교적 건실한 생활을 해 온 張은 이번 결혼이 자신으로서는 「꿈이여 다시 한번」을 꾀할 수 있는, 어떤 전기(轉機)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레슬러」의 아내를 지망한 신부 全양은 급습(急襲)한 기자의 질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내조(內助)의 변」을 털어 놓았다. -어랜애는 몇이나 낳을 예정? 『아들만 둘. (머뭇거리다가) 하지만 선수론 안 키우겠어요.「팬」으로 보는 것과 혈육으로 보는 것과는 감상眼이 근본적으로 다르거든요』 - 張선수를 무어라고 불러요? 『재근이 아저씨, 조카 중에 재근이란 아이가 있어요…』 - 결혼 후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일이 있다면? 『두사람의 체중을 똑같이 늘리는 것. 우리 재근이 아저씨의 체력 유지와 「컨디션」조절같은것도 모두 내가 해야 할 당면 과제죠 』 - 혹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가공(가공)할 사태가 벌어진텐데…. 『아무리 싸움을 해도 나에게 손찌검은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해요 때릴 데가 어디 있어야죠?』 이들은 지금 청량리 대왕상가 「아파트」에 「스위트·홈」까지 마련했다. 張永哲은 22일 결혼식을 올린 직후에 있을 국제경기에 오히려 더 신경이 써 진다고, 새 신랑답지 않은 발언일석. 1백10kg 「헤비」급과 45kg 「플라이」 급의 사랑의 대전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상상평(想像評)을 부탁했더니 張은. 『내가 항상 패자(敗者)죠』 사람좋은 너털 웃음을 터뜨린다. [ 선데이서울 69년 6/15 제2권 24호 통권 제38호 ]
  • [아듀 2005 희망을 쏜 사람들] (4) ‘홀트아동복지회’ 홀트 이사장

    [아듀 2005 희망을 쏜 사람들] (4) ‘홀트아동복지회’ 홀트 이사장

    우리 사회에는 뜻하지 않게 버려진 고아와 장애인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는 늘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선뜻 실천을 하지는 못해 반성과 자책을 하곤 한다. 올해로 꼭 50년째 ‘고아와 장애인’의 할머니이자 어머니·누나·언니로 살아온 ‘홀트아동복지회’의 말리 홀트(한국명 許滿理·70) 이사장은 그래서 더욱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50년 전 스물한 살 꽃다운 처녀 때 아버지 해리 홀트(1964년 작고)와 함께 한국땅을 처음 밟았다. 낯선 땅에서 ‘입양과 장애’라는 두 단어를 어깨와 가슴에 짊어지고, 보듬고 꼭 반세기를 묵묵히 걸어왔다. 어렵고 고달픈 생의 그늘에서도 자신보다 버려진 아이, 온전치 못한 아이들을 더 소중하게 온몸으로 맞이하며 살아온 특별한 인생이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버서 홀트(2000년 작고)마저 세상을 떠나간 뒤에는 24시간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며 홀트아동복지회를 이끌고 있다. 지난 10월 홀트아동복지회 설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감동적인 회고담으로 참석자들을 울렸던 크리스틴 러셀(52) 등 5명을 첫 입양한 이후 50년 동안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쳐 해외에 입양된 아이만 해도 9만 5000여명. 6·25전쟁의 폐허 속에 시작됐기에 초창기에는 전쟁고아와 혼혈아가 대다수였으며, 최근에는 미혼모 아이들이 많아지는 추세여서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변천사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달 일산의 자택을 찾았을 때에도 그는 어린 장애인을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다.“한국도 지난 세월만큼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입양아들이)정상적으로 자라 결혼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그동안 부산 광주 전주 등지의 고아원과 예수병원 등에서 활동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의촌 진료에도 앞장서는 등 우리 사회에 훈훈한 감동을 자주 선사했다. 현재 일산에서 입양이 힘든 고아 장애인 270명을 자식처럼 돌보고 있다. 지난 15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회장 곽재우)가 선정한 ‘올해의 굿뉴스 메이커상’을 수상했다. 김문 WE팀장 k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아·장애인 사랑 50년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아·장애인 사랑 50년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인생은 둥글다고 했던가. 그래서 가운데와 언저리가 있단다.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 기왕이면 가운데에서 살아봄이 어떨까. 문득 ‘니나 붓슈만’이란 여인이 생각난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생의 한가운데 서서 삶을 두려움 없이 온전히 받아들인다. 파란과 곡절의 인생항로, 우수와 슬픔, 그 어떤 고난도 극복하는 자기 신념이 강한 여성이다. 사회복지법인 ‘홀트아동복지회’의 말리 홀트(70·한국명 許滿理) 이사장. 스물한 살 꽃다운 처녀 때부터 동방의 나라, 낯선 한국땅에서 ‘입양과 장애’라는 두 단어를 어깨에 모질게도 짊어지고 꼭 반세기를 걸어왔다. 어렵고 고달픈 생의 그늘에서도 자신보다 버려진 아이, 온전치 못한 아이들을 더 소중하게 온몸으로 맞이하며 살아온 특별한 인생이다. 말리는 홀트아동복지회의 설립자인 홀트 부부의 딸. 지난 50년을 입양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해와 우리나라 입양 역사의 산증인이다. 아버지 해리 홀트(1964년 작고)와 어머니 버서 홀트(2000년 작고)가 떠나간 뒤인 요즘도 24시간 장애인들과 지내며 묵묵히 홀트아동복지회를 이끌고 있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 해외에 입양된 아이만 해도 9만 5000여명.6·25 전쟁의 폐허 속에 시작됐기에 초창기에는 전쟁고아와 혼혈아가 대다수였으며 최근에는 미혼모 아이들이 많아지는 추세여서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변천사를 반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에 위치한 ‘홀트아동복지타운’을 찾았다. 본관 건물 바로 옆에 ‘말리의 집’이라는 문패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었더니 5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바닥에 앉아 있다. 한 아이는 불편한 몸 때문인지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흘리고 있었고 또 다른 아이는 빵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외출 나갔던 말리가 들어왔다.“미안해요. 미국에서 친구가 와서 보내느라고 조금 늦었어요.”라고 했다. 인터뷰는 마당의 의자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50주년을 맞는 소감에 대해 “한국도 지난 세월만큼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입양아들이)정상적으로 자라 결혼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고 피력했다. 때마침 한국인 아가씨로 보이는 두 명이 지나가면서 영어로 인사한다.“어릴 적 노르웨이와 미국으로 입양 갔는데 한달 전 자원봉사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온김에 생부모를 만날 생각도 있습니다. 다 커서 저렇게 찾아올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고 덧붙였다. 또한 “저들은 한국의 말과 문화 등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합니다.”면서 “옛날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잘 놀아주고 일년에 4∼5명 정도는 본가족과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고 부연했다. 50년 세월이면 강산이 다섯번 변했다고 하자 “56년 10월3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을 때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곳곳에 총알이 박혀 있는 건물이며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정말 많았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또 서울시청 마이크로버스로 고아들을 잔뜩 실어오곤 했는데 워낙 못 먹고 며칠씩 씻지를 못해서 그런지 나이 먹은 노인네 모습과 영락없었다고 회고했다. 어떤 경우에는 버스 안에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핏덩이 영아들이 보자기나 신문지에 싸인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인큐베이터가 없어 전구로 보온을 시키는 등 응급조치로 살려보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죽은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고 아픈 기억을 되새겼다. 61년 부친이 일산 현 위치에 3만 3000여평의 땅을 사서 복지타운을 건립할 때까지 서울 효창동과 녹번동의 임시 수용시설에서 정말 고생도 많이 했단다. 지금은 전국 11개지부를 둘 만큼 시설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고 했더니 “어쩌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 때 좋은 환경의 집안에 입양 보내는 것이 중요한데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는 많이 힘들어집니다.”라고 토로했다. 결혼을 안한 이유를 묻자 “신앙심이 있으면 굳이 안해도 됩니다. 고아 장애인들이 있는데 곧 그들의 어머니가 아닙니까.”면서 “꼬마들은 자신에게 할머니 누나 언니 등으로 곧잘 부릅니다.”라며 웃는다. 하루 일과에 대해서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성경책을 놓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고 했다. 이어 전날의 일을 깨알같이 메모한다. 아침 7시 식사시간에는 어김없이 장애인들의 할머니가 된다.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손 훈련을 꾸준히 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 자리에서 일어서면 온몸에 잼과 밥풀떼기들이 너덜너덜 붙어 있을 정도. 간단히 샤워한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아 이메일을 체크한다. 요즘도 미국의 친구들로부터 격려의 메일이 자주 온다.9시에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평상의 일과를 시작한다. 저녁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줄 잼을 만들고 시간이 나면 한국어를 틈틈이 공부한다. 한국말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읽고 쓰기에는 아직도 서툴다. 때문에 영자신문이나 TV를 통해 돌아가는 세상사를 접한다.“한국인들은 정치에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고 했다. 아울러 “중국이나 필리핀을 왔다갔다 하지만 한국이 가장 빨리 달라졌습니다. 전쟁으로 아무것도 없었는데….”라고 한국의 발전상에 새삼 놀라워했다. 말리가 한국에 오게 된 연유는 아버지인 해리 홀트의 도와 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본인 자신도 평소에 불우아동을 돕는 데 관심이 많았다. 잠시 집안 얘기가 나왔다. 어머니 버서 홀트는 원래 간호 교사가 되려고 했으나 농부인 해리 홀트를 만나면서 농부의 아내가 됐다. 그러나 결혼 직후인 29년부터 대공황이 이어지자 오리건주로 이사했다. 해리는 이곳에서 목재사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었다. 그러던 54년 홀트 부부는 우연히 한국전쟁 고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우선 한국인 고아 8명을 입양하려고 했으나 당시 미 연방법에는 2명 이상 입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홀트 부부는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의회는 두 달 만에 ‘홀트법안’이라고 이름을 붙인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55년 10월12일 8명의 전쟁 고아를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해리는 한국에서, 버서는 미국에서 입양사업을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 최대의 시련은 88년 서울올림픽 때. 정부가 ‘고아 수출국’이라는 비난을 우려해 해외입양 금지령을 내렸던 것. 홀트아동복지회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한 정부가 슬그머니 금지령을 취소하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일찍부터 부모의 뜻을 이어받은 말리는 그동안 부산 광주 전주 등지의 고아원과 예수병원 등에서 활동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의촌 진료에도 앞장서는 등 훈훈한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은 혈통주의가 강해요. 그러다 보니 입양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아요. 입양은 불행한 아이나 아이를 원하는 가정을 위해 서로 좋은 일입니다. 낳은 부모나 기르는 부모나 사랑은 다 똑같죠.” 전문 장애인병원을 건립해 장애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말리는 현재 일산타운에서 주로 입양이 힘든 고아 장애인 270명을 돌보고 있다. 아울러 “한국 땅에는 부모가 묻혔고 또 자신의 청춘을 바친 곳이기에 영원한 고향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말리의 어머니는 오리건주 자택에서 사망했지만 유언에 따라 현재 일산타운내의 남편 묘소 옆에 나란히 묻혔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5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파이어스틸 출생. ▲53년 오리건주 크레스웰고교 졸업 ▲56년 새크래드 하트 간호전문대학 졸업 ▲64년 오리건대학 간호학과 졸업 ▲91년 노스콜로라도 주립대 특수교육학과 졸업(석사) ▲56∼65년 홀트아동복지회, 부산 이사벨영아원, 우정보육원, 미국 오리건 병원, 전주 예수병원 간호자문역 ▲65∼78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 ▲67∼74년 홀트일산원 원장 ▲92∼현재 나사렛대학 재활학과 교수 ▲98∼현재 홀트아동복지회 이사 ▲2000∼현재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 수상경력 국민훈장 석류장(81년), 로버트 피어상(84년) 세계성령봉사상(98년) 적십자 인동장 금장(00년) 일가상(01년) 비추미 여성대상(03년) 등.
  • 전시회 때마다 수익금 교민돕기 기부 재미화가 한정희씨

    전시회 때마다 수익금 교민돕기 기부 재미화가 한정희씨

    “남들은 ‘막 퍼준다.’고 하지만 적자만 안나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지난달 28일부터 한국에서 다섯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재미화가 한정희(52)씨. 그는 나눔의 기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스웨덴에서는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을, 미국으로 이사가서는 마약에 빠진 청소년들을 돕고 있는 김씨. “이해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죽을 때 돈 가져가나요?도움은 돌고 돕니다. 저는 남을 돕는 기쁨을 느끼면서 도움 받고 있는 셈이죠.” 한씨는 1978년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스웨덴 유학길에 올랐다. 교민들이 70년대 초반에 만든 ‘스웨덴 토요한국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입양아들과 인연을 맺었다. 아이들이 지나가면 늘 불러다 밥, 김치, 불고기를 만들어 먹였다. 생활이 어려운 애들을 위해 혼자서 김치를 무려 200㎏이나 만들어 팔기도 했다. 1983년부터는 입양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정체성 혼란을 크게 겪는다.”면서 “그래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스웨덴 부부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인 장애아를 입양한 그 부부는 아이가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등 돌보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이가 나빠졌고 이혼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서 한씨는 아이를 대신 봐주면서 부부를 설득했다. 그 부부는 위기를 넘기고 현재 13살인 아이와 잘 살고 있다. 지난 99년에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오면서 약물중독 교포 청소년을 돕는 목사들을 알게 됐다.24시간 내내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부를 결심했다. “처음엔 1000달러를 기부하고 내심 뿌듯했죠. 문제를 점점 더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섰어요.” 뉴욕에 거주하던 그는 50점의 그림을 LA로 가져와 전시회를 열었다.10만달러가 들어왔고 몽땅 기부했다. 그는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게 낫지 않냐고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마약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심지어 공부하기 위해 각성제 대신 마약을 하는 유학생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후 전시회 수익금은 자선이라는 타이틀 없이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이런 생활은 한씨에게 익숙하다. 대학교 졸업 직후 강원도에서 아이들이 신발없이 다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결혼자금으로 대학 4년동안 미대입시생을 대상으로 과외해 번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주고 돌아왔다. 혹시나 미련이 남을까봐 액수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머니한테 엄청나게 혼났죠. 지금도 저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남편이 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줘서 고맙죠. 죽을 때까지 남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6일 TV 하이라이트]

    ●대추나무 사랑걸렸네(KBS1 오후 7시30분) 두심은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미옥을 문병하고 온 뒤 심기가 편치 않다. 미옥은 두심에게 땅 문서와 도장, 서류 등을 넘겨주며 자기가 죽은 뒤에 명동이를 수양아들 삼아 사람 좀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두심은 가족들에게 말도 못하고 고민을 하는데…. ●해결!돈이 보인다(SBS 오후 7시5분) 프랜차이즈 CEO로 변신한 베테랑 연기자 선우재덕. 그는 1990년 떡볶이집을 시작해 지금까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런 그가 정신지체장애 2급인 연식이네를 돕기 위해 나섰다. 선우재덕 사장은 과연 스파게티 완전 초보 쪽박집을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박주현의 시사 업 클로스(YTN 오후 3시5분) 정부가 최근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공론화하면서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 문제는 이번에 처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인터넷 실명제 추진 때 압도적인 반대여론을 이끌었던 네티즌들이 이번에는 찬성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는 것이다. ●생방송 60분-부모(EBS 오전 10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7년 동안 ‘왕따’를 당하고, 자살까지 결심했지만 이제는 그런 따돌림을 극복하고 ‘왕따’ 당하는 학생들을 돕고 있는 김혜민양을 만나본다.‘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에게 수호천사라 불리는 혜민양에게 그간의 경험을 들어보고, 왕따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들어본다. ●굳세어라 금순아(MBC 오후 8시20분) 금순이가 가족들에게 상의도 없이 이식을 결정한 것에 정심과 노 소장은 노발대발한다. 금순은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한편, 재희는 자신이 고백한 이후에도 금순이 아무렇지 않은 듯 전화를 받아주자 내심 기분이 좋다. ●마법전사 미르가온(KBS2 오후 6시40분) 암흑전사들과의 싸움에서 아라는 점점 힘이 다해 위험에 빠진다. 다행히 미르와 가온이 돌이의 왕따 바이러스를 마법전사의 텔레파시로 이겨내고 암흑전사로부터 아라를 구한다. 호구와 돌이의 작전이 실패하자 주비는 장미를 이용해 아라를 다시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 [코드로 읽는책] 나눔/데이브 토이센 지음

    ‘아무 것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받지 않을 만큼 부자인 사람도 없습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 ‘월드비전 캐나다’의 데이브 토이센 회장이 쓴 책 ‘나눔’(윤길순 옮김, 해냄 펴냄)의 한 구절.‘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힘’이란 부제가 책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지난 30년간 르완다·에티오피아·이라크·코소보·수단·잠비아 등 전세계 분쟁지역과 재난현장을 누비며 구호활동을 펼쳐온 토이센 회장. 그는 스스로를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세상 곳곳에서 나눔과 관용, 너그러움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만나 진정한 나눔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과 구호현장에서 함께한 가슴 뭉클한 일화들을 통해 나눔의 힘과 중요성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을 잔잔하게 전한다. 지은이는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기꺼이 주려는 마음, 남을 보살피고 이해하는 단순하고 따뜻한 마음과 실천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나눔으로 이 험한 세상을 구하고 내 삶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지은이는 삶에 대한 한줄기 기대마저 짓밟힌 참혹한 구호현장에서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으키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힘을 목격한다.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도 오히려 먼저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너그러운 사람들도 만난다. 코소보 내전이 드리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지은이에게 초콜릿을 건네던 상처투성이 소녀, 아들을 죽인 젊은 군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르완다에 화해의 물꼬를 튼 어머니 등. 이 놀라운 기적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나눔의 마음이다. 물론 나눔이 세상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진정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라는 것. 특히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나누는 평범한 ‘영웅’들을 통해 나눔이 비범한 이들만의 전유물이거나 거창한 실천이 아님을, 이미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 숨을 쉬듯 나눌 수 있다면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나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갈등에 대한 지혜를 알려주고, 일상에서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한다. 해마다 번 돈의 10%를 교회 등에 기부하는 행위인 ‘십일조’가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나타내는 거부반응에 대해 지은이는 “지역사회나 국가, 세계의 고통을 덜기 위해 노력하는 자산단체들에 기부해 십일조를 실천하자.”고 조언한다. 책 말미에 실린 2가지 ‘부록’도 눈에 띈다.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4가지 ‘비법’과, 훌륭한 자선단체를 선택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5가지 요소를 통해 지은이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현실적인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자원봉사와 나눔활동 등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일깨워주고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주는 책.9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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