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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아셨나요? 엘리자베스 1세·나폴레옹도… 어린시절 ‘性的 트라우마’를 겪었다

    아셨나요? 엘리자베스 1세·나폴레옹도… 어린시절 ‘性的 트라우마’를 겪었다

    캔디의 양팔에는 수많은 칼자국이 있다. 정신과 전문의의 눈에는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채 엉긴 핏자국을 훤히 드러내는 캔디의 행동은 성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자해의 원인이 될 법한 어떤 성적 사건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3년간 이어진 치료 끝에 그는 자신이 일곱 살 때부터 10년간 양아버지에게서 성폭행을 당해 왔다는 사실을 끄집어냈다. 성적 트라우마의 강력한 힘이 그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40대 기혼남성 토니는 혼란과 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 지하실 바닥에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자신이 왜, 언제,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됐는지 모른 채. 경련과 우울증 등을 치료할 약을 주는 간호사의 목을 부러뜨리거나 아내를 칼로 찌르는 상상을 한다. 자신에게서 동성애 성향을 발견한 뒤에는 증오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 토니의 고통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에게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았고, 후에 친척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트라우마로 토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았다. ●안전지대 없는 성범죄 성범죄에 관한 한 안전지대는 없다. 미국인문협회에 따르면 1984년 성학대 사건은 10만건에 이른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전국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여성 응답자의 27%, 남성의 16%가 각각 성학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986년 미국 보건복지부는 성학대 사건이 15만 5900건이라고 발표했다. 10여년 뒤 아동 성학대 사건만 13만 2000건에 달할 정도로 성범죄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8년 학교에 가던 초등학생을 성폭행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조두순 사건에 이어 최근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까지 충격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별법 제정이나 화학적 거세와 같은 강력한 처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친다. 더불어 성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 논의도 활발하다.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특정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특별한 ‘사고’일 뿐이며, 아동 성폭력에 대해서는 더더욱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성적 트라우마 역시 피해자들이 해결해야 할 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된다. ●美, 사회적·물질적 피해 연 503조원 추산 미국에서 30년 넘게 성학대로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섹슈얼 트라우마’(블루닷 펴냄)를 낸 정국(정신과 전문의) 의학박사는 “전문가들조차 숱한 오해와 시행착오를 낳고 있는 분야가 성적 트라우마 영역”이라면서 “성적 트라우마는 질병이 아니라 인간사의 한 단면으로, 치료가 아닌 극복의 문제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알게 모르게 상당수가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예방만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성학대의 파급력은 충격적이다.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대학 진 아벨 교수가 1985년에 발표한 아동 성폭력범의 특징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들은 주로 남성으로 15세부터 성학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들은 평균 281건의 성학대를 저지르고, 평균 117명의 10대를 성폭행했다. 이런 통계라면 성폭력범 85만명이 1억명에게 성적 트라우마를 가할 수 있는 셈이다. 성학대의 트라우마가 남기는 후유증은 강력하다. 가장 두렵고 혼란스러운 것은 회상환상이다. 뭔가 알 수 없는 이미지와 소리, 냄새, 통증, 촉감 등이 희생자를 덮친다. 저자에게 상담을 받던 켄트는 갑자기 벽을 향해 “꺼져, 내게서 뭘 바라는 거야?”라고 소리치기 일쑤였다. 다른 상담자 칼라는 “공 한 개가 계속 돌고 있다. 1, 2, 3부터 31까지, 다시 1, 2, 3, 4부터 31까지….”라면서 어지러워하더니 이윽고 팔과 다리, 남자 둘, 다시 공으로 반복되는 환영에 시달렸다. 자해를 하거나 화상을 입히는 등 자기절단과 파괴를 비롯해 우울증, 공황장애, 뒤틀린 성관계 등으로 후유증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피해자들의 후유증은 부모 등 주변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다. 인간의 고통에는 감히 빗댈 수 없지만, 사회적·물질적 피해도 엄청나다. 툴사대학 엘라나 뉴먼 교수는 성적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과 그에 따른 삶의 질 저하로 겪는 피해는 연간 4500억 달러(약 503조원)로 추산한다. 저자는 예방과 보호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성폭력이 이 정도로 만연해 있다면 극복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적 트라우마가 아무리 파괴적이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느껴질지라도, 사형선고나 불치병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30년 이상 환자 치료 경험… 구체적 조언 제시 저자는 성폭력의 피해를 딛고 일어선 여러 사례를 통해 희망을 제시한다. 양부모에게 부적절한 성희롱을 당한 엘리자베스 1세(왼쪽), 왕실 군사학교에서 성적 폭력을 겪은 나폴레옹(오른쪽) 등 성적 트라우마를 경험했음에도 위대한 인물로 거듭난 일화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책에서 주목할 것은 실제적인 조언 편이다. 저자는 성장기 성적 피해자와 성인 피해자, 부모와 치료사, 의사 등 피해자와 주변인을 세부적으로 나눠 성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조언을 쏟아낸다. 방대한 양의 조사 자료, 다양한 피해 사례와 극복기, 충실한 제언 등이 담겨 있어 632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2만 8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55년 추적… 美 7세 유괴살해범 법정에

    1950년대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7살 여자아이 유괴·살해사건 용의자가 반세기 만에 법정에 섰다. 살인죄 공소시효를 25년으로 규정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와이오밍 등 7개 주를 제외하고는 살인죄 공소시효가 없다. 10일(현지시간) 시카고트리뷴에 따르면 지난 1957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모어에서 마리아 리덜프(당시 7세)를 유괴해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잭 대니얼 매컬러프(72·본명 존 테시어)의 재판이 일리노이주 디켈브 주법원에서 시작됐다. 리덜프는 실종 다섯달 만에 집에서 160㎞ 떨어진 고속도로 옆 숲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초기 수사에서 ‘이웃집 오빠’인 매컬러프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양부모가 “(아들은) 그 시각에 입대를 위해 시카고행 열차 안에 있었다.”고 거짓 알리바이를 대줘 체포를 면했다. 영구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은 매컬러프의 전 여자친구의 증언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지난 2010년 “시카고행 열차표는 가짜”라는 취지로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리덜프의 가족들은 “55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슬픔은 지금도 여전하다.”며 재판 회부를 환영했다. 반면 매컬러프의 변호인은 “유죄를 증명할 물리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50년 전의 희미한 기억에만 의존해 판단할 수는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런닝맨(SBS 일요일 오후 6시 10분) 로맨틱 코미디 ‘걷지 말고 사귀어라’의 여주인공으로 공효진이 떴다. ‘런닝맨’에서는 그녀의 상대 배우자로 인생 첫 주연을 시도하는 이광수에게 사상 초유의 특혜를 준다. 바로 7개의 이름표다. 그렇게 공효진을 지켜주겠다는 이광수의 말과 함께 시작된 레이스. 하지만 광수는 역대 가장 모자란 남자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피쉬와 칩스(KBS1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수족관에 소품 담당 매니저로 오게 된 벤지의 조카 피지는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에 있다. 피지의 뒷다리를 본 피쉬는 충격에 휩싸이고 피지와 친해져서 진화의 비결을 알고자 한다. 한편 피쉬의 친구들은 안하무인인 피지에게 모두 등을 돌리나 피쉬 혼자 피지 편에 서게 된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장수는 청애에게 그동안 서운하게 하고 외롭게 한 것이 정말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한편 한국에 찾아온 귀남의 양부모를 통해 귀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장수와 청애. 왠지 자신과는 다르게 양부모와 너무나 편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는 그들에게 청애는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낀다. ●특집 2012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1, 2부(OBS 토·일요일 밤 9시 25분) 지난 10일부터 3일간 인천 정서진에서 진행된 ‘2012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성황리에 마무리된 공연의 생생함을 다시 한 번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키스턴 루디스카, 칵스, 더 퀘미스츠, 애시 등이 출연해 열광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드라마 스페셜-내가 가장 예뻤을 때(KBS2 일요일 밤 11시 45분) 암이 재발한 신애는 치료를 받지 않고 남은 생을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 하지만 남편 의수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들어간다. 신애가 병원에 들어가는 날, 작은 해프닝으로 옆 환자의 보호자인 정혁을 만난다. 그렇게 신애는 정혁을 만나면서 죽음이 아닌, 다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늘 푸른 인생(MBC 일요일 오전 6시 10분) 아름다운 소나무 숲과 천연기념물 왜가리를 자랑하는 경북 문경시 농암면 종곡 3리를 찾아간다. 마을에서 성질 급하기로 1등인 남편과 마음 고생이 많았던 아내의 사연부터 우리나라 올해 예산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만물박사가 들려주는 이야기까지,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 정겨움이 묻어나는 고향의 정취를 느껴 본다. ●동물일기(EBS 일요일 오전 10시 10분) 경북 성주 우경이네 집에는 애완 염소가 산다. 우경이네 가족은 태어나자마자 젖 한 번 물지 못한 채 어미를 잃은 아기염소 반달이를 집에서 보호하는 중이다. 반달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은 의욕 넘치는 네 살 우경이. 하지만 젖먹이 염소를 돌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 [기술의 시대 인간의 시대] “결혼제도 없어지고 사랑·생산·생활파트너 3명과 관계 맺을 것”

    [기술의 시대 인간의 시대] “결혼제도 없어지고 사랑·생산·생활파트너 3명과 관계 맺을 것”

    “지구촌에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그 사람은 미래학자일 것이라고들 말해요. 미래를 미리 알고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는 스스로를 ‘미래전문가’라고 소개했다. 미래를 탐구하고, 사회에 자극을 주며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 전 세계 45개 지부와 3000여명의 학자·전문가들이 속한 유엔 미래포럼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박 대표는 우리의 미래 사회에 대해 거침없는 전망을 내놓았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예측도 있지만 “농경 시대에 햄버거를 상상이나 했겠느냐.”는 그의 말은 ‘생각하면 이뤄지는’ 기술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 대표가 처음부터 미래학에 뜻을 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 승진을 위해 미래 예측 방법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이 저출산의 여파로 2300년이면 소멸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접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박 대표는 주장이 사실이 되지 않도록 하는 대안을 마련하는 데 고심했고 ‘수양부모협회’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행동하는 미래학자’로서 박 대표가 내디딘 첫걸음이다. 박 대표가 강조하는 미래사회의 ‘메가 트렌드’는 고령화, 여성성, 사회융합, 소셜미디어, 개인들의 DIY(직접 생산)경제 등이다. 그는 “‘변화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명제는 이미 진행 중”이라면서 “미래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나노산업의 발달로 우리의 의복 문화가, 미세조류와 배양육 기술의 통해 식문화가 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생활이 기술의 발전에 맞춰 편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것이다. 또 “2030년에는 인간의 수명이 130세로 증가할 것”이라면서 “고령인구를 위한 서비스 업종도 덩달아 늘어날 것”이라고도 했다. 박 대표는 “2017년쯤이면 나노 어셈블러(원자 수준에서 물질을 제조해 내는 장치)와 3D 프린터(상품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입체로 인쇄하는 장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때부터 개인이 스스로 생산해내는 제조업의 혁신이 시작될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기존 제조업이 떠나간 자리는 이른바 ‘인터넷 공장’이 자리를 잡을 것이며, 이곳에서 1인 기업들이 네트워크를 통한 조합을 이룰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더 과감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20년 뒤에는 국가를 넘어서는 경제·도시 중심 공동체로 재편될 것”이라거나 “대학들이 통폐합되고, 사이버 무료강좌를 중심으로 한 교육으로 재편된다.”, “결혼제도가 사라지고 개인은 사랑 파트너, 생산 파트너, 생활 파트너 등 3명과 관계를 맺게 될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간에는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노마드’(유목민) 생활이 일반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정보화시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2015~2020년에는 의식기술·기후에너지시대로 전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가 되면 빛의 속도로 변하는 기술에 맞춰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 예측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박 대표의 미래 예측은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일반적으로 70% 정도는 맞고 30%는 틀릴 거라고 본다. 기계와 인간이 융합되는 2030년쯤 되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게 대부분의 생각이다. 하지만 어제의 최신 정보를 바탕으로 꾸준히 업데이트한다면 가까운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 않겠는가.”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실종아동의 날’…정부 대책 마련 나섰다] 잃어버린지 16년만에 ‘母子 상봉’

    [‘실종아동의 날’…정부 대책 마련 나섰다] 잃어버린지 16년만에 ‘母子 상봉’

    세 살배기 아들을 잃어버리고 전국을 찾아 헤맨 어머니가 16년 만에 아들을 찾았다. 아들은 고교학생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1996년 8월 홍모(46)씨의 남편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식당에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들 박군을 데리고 갔다. 술을 마시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아들이 사라졌다. 갓 걸음마를 뗀 상태였다. 남편은 홍씨와 별거한 채 아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남편은 홍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후 3년간 용산구 구석구석은 물론 서울시내 보육원을 돌며 아들을 찾아다녔다. 홍씨는 아예 직장도 팽개쳤다. 아들을 잃은 고통에 남편과도 헤어졌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아들 찾기를 중단하고 재혼했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 탓에 결국 파경을 맞았다. 중증 심장질환을 앓던 홍씨는 지난 3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서울 용산경찰서를 찾았다. 그때서야 홍씨는 아들에 대한 실종 신고가 안 돼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경황이 없던 남편도 신고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홍씨는 아들이 없어진 지 16년 만에 서울 용산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다. 용산경찰서 실종수사팀은 아동시설 51군데를 돌아다니며 탐문 수사를 벌인 끝에 동작구의 한 시설에 입소했던 박군의 사진과 홍씨의 아들의 인상착의가 비슷한 것을 확인했다. 박군은 전남 신안군에 살고 있는 고교 3학년인 김모(17)군이었다. 김군은 실종 당시 충격 때문에 자기 이름과 살던 지역 등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시설에 들어가고 나서 1997년 10월 서울의 한 부부에게 입양됐다. 성도 이름도 바뀌었다. 초등학생 2학년 때 입양 사실을 알고 방황하며 가출을 반복했다. 양부모는 김군의 말썽이 계속되자 2003년 파양, 전남의 한 보육원에 맡겼다. 경찰은 양부모의 허락을 받아 김군의 DNA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했고 지난 16일 김군이 홍씨의 친자인 박군이라는 확인 공문을 받았다. 홍씨는 경찰로부터 전화로만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주 심장수술을 받은 홍씨는 “회복되는 대로 16년 만의 아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날 엄마라고 부르는데 아이 보낼땐 어찌할꼬”

    “날 엄마라고 부르는데 아이 보낼땐 어찌할꼬”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사는 김영분(53)씨는 위탁모가 된 지 벌써 9년째다. 다 키워서 입양을 보낼 때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아기가 커서 ‘엄마·아빠’라고 부르는데….” 쌓인 정을 떼 내는 것만큼 가혹한 일이 없다. 입양을 보낼 때 어떤 집으로 가는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점검한다. 그마나 위안을 삼기 위해서다. 김씨는 “이별이 예정된 아이를 키우다 보니 보낼 때마다 매번 지독하리만큼 서운함을 느낀다.”면서 “입양할 생각도 가끔 했지만 교육의 벽에 가로막혔다.”고 말했다. 두 자녀를 대학보내고 키워 내는 데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터다. 김씨는 “교육비 문제만 해결된다면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더 많이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25년차 위탁모 김계숙(63)씨는 “아이와 이별할 때마다 다시는 위탁받지 않겠다.”고 다짐면서도 사무치는 마음앓이를 달래기 위해 다시 아기를 맡아 키웠다. 위탁받아 키운 아이만 200명이 넘는다. 지난해 자신이 키워 입양보냈던 동민(22·가명)이와 동준(20·가명)를 미국에서 만났다. 반가움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미국인 가정에서 서툴게나마 한국말을 서툴게 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대한사회복지회 17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부페 웨딩홀에서 ‘위탁모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150여명의 위탁부모와 100여명의 아기가 한자리에 모였다. 위탁모 신명숙씨는 행사에서 5년 전 미국으로 입양해 보낸 은혁(9·가명)이를 최근 직접 만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기를 읽는 내내 울먹였다. 4년 동안 키운 아이를 떠나 보냈을 때 위탁모로서 느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은혁이는 신씨를 또렷히 기억했다. 은혁이의 어릴적 사진을 내보이자 양부모와 은혁이와 신씨 모두 울었다. 신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기쁜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행사에서 5년, 10년, 15년 이상 위탁모 봉사해 온 11명이 근속상을 받았다. 건강이 나쁜 아이들을 모정으로 키워낸 김영분씨 등 3명은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5·11 입양의 날] 입양아 ‘고독’을 말하다

    [5·11 입양의 날] 입양아 ‘고독’을 말하다

    암울했던 시절인 1972년 제인 정 트렌카(40)는 생후 6개월 만에 언니와 함께 미국에 입양됐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경아라는 한국 이름은 몇 번 불리지도 못한 채 지워졌다. 입양 기관은 어머니에게 “변호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미국인 양아버지는 미네소타의 금속공장에 다니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양어머니는 가끔씩 공장에 나가거나 비서일을 했다. 무엇보다 양부모는 입양된 딸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다섯 살 때였다. 유치원에 특별한 물건을 들고 가서 설명하는 행사가 있었다. 입양을 보내며 친어머니가 넣어 준 한복이 생각났다.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한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옷은요, …” 말문이 막혔다. 왜 그 한복이 특별한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서 온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친어머니가 나를 키우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죠.” 미국인 어머니는 트렌카의 질문에 침묵했다. 어머니가 등을 돌려 걸어나가는 순간 그는 입양의 아픔을 양부모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와 갈등을 겪으며 정체성을 고민하던 트렌카는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 트랙(TRACK)을 시작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해외입양인 수십명이 모였다. 이들에게 입양은 아픈 기억이었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입양의 날’을 ‘싱글맘의 날’로 바꾸자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상처만 남기는 입양을 지원할 게 아니라 아이와 어머니가 함께할 수 있도록 두리모(미혼모)를 지원하자는 취지였다. “한국인들은 흔히 아이가 어느 문화든 잘 적응할 거라고 믿죠. 어리니까요. 하지만 그건 판타지에 불과해요.” 트렌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입양인의 관점에서 트랙이 요구하는 건 두리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두리모가 아이를 포기하는 이유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고, 국내 입양은 그 다음이다. 해외 입양은 최후의 수단이다. 그는 “목표는 고아원과 입양이 사라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트랙은 해외 입양인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뿌리의 집’과 함께 11일 ‘싱글맘의 날 국제 콘퍼런스’를 갖는다. 그는 말한다. “좋은 입양이란 없어요. 차선의 선택일 뿐이지.”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인기 女가수, 알고보니 김대중 前대통령 수양딸

    인기 女가수, 알고보니 김대중 前대통령 수양딸

    중국 언론매체가 연예계 여성스타와 그들의 ‘깐띠에(干爹·양아버지)’를 다룬 기사를 게재하면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국 인기가수 손열(孫悅·쑨위에·39)의 각별한 인연을 다뤄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경제신문의 인터넷뉴스인 중국경제망(www.ce.cn)은 ‘인기 여성스타와 유명 양아버지 대해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여성 스타와 끈끈하게 맺어진 남성 명사들을 화보와 함께 소개했다. 중국경제신문은 국무원 직속 기관지다. 기사는 손열과 고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손열은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국제스타가 되기 위해 자주 한국에 가서 각종 프로그램을 녹화했는데, 한번은 정재계 모임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이희호 여사가 그를 매우 좋아했고 그 인연으로 내친 김에 김 대통령의 수양딸로 삼았다. 이는 중국 연예계 사상 최초다.” 하얼빈 출신의 손열은 <쭈니핑안(그대의 평안을 기원합니다)>이라는 노래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00년 한국 관광홍보대사에 위촉되기도 했다. 기사는 “깐띠에는 친아버지가 아닌 또다른 아버지인 양아버지를 일컫는데,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양부모 관계를 즐겨 맺는 풍속이 있다. 중국인들은 감정을 중시하는데 혈연이 아닌 관계에서는 그 존경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양아버지나 양어머니 삼는 것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양아버지가 있으면 배경이 든든해진다는 말도 있다.”고 설명했다. 즉 이 기사에서 깐띠에는 여성 연예인을 친딸처럼 아껴주는 가까운 후견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기사는 아역배우 출신의 서교(徐嬌·쉬자오·16)는 ‘장강 7호’를 촬영하면서 만난 주성치(周星驰·저우싱츠·50)와 깐띠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 서교는 장강 7호에서 남자아이를 연기하며 깜찍한 매력으로 인기몰이를 했고 주성치와도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실제로 공식석상에서 주성치를 ‘아빠’로 부른다. 또 영화배우 홍금보(洪金宝·훙진바오·60)와 범빙빙(范冰冰·판빙빙·31), 가수 이종성(李宗盛·리종성·54)과 양정여(梁静茹·량징루·34), 영화배우 장국립(张国立·장궈리·57)과 주필창(周笔畅·저우비창·27) 등의 각별한 인연도 소개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위탁 기간 짧아도 모두 내 새끼 아이냄새 지워질까 옷도 못빨아”

    “위탁 기간 짧아도 모두 내 새끼 아이냄새 지워질까 옷도 못빨아”

    32년간 121명이나 되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맡아 길러 ‘입양아의 대모’로 불리는 허명자(왼쪽·68)씨가 16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회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상을 받는다. 허씨는 양부모가 나서지 않아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는 이른바 ‘위탁모’다. 허씨는 1980년에 위탁모 일을 하는 이웃을 따라 위탁모의 길로 들어섰다. 마침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적적하던 때였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 이제는 천직이 돼 32년을 입양아들과 함께한 것. 대부분의 아이는 신생아 때 버려져 첫 돌 전에 입양이 결정된다. 몇 개월간의 짧은 만남일 때도 있지만 쌓이는 정은 양육 기간과 무관하다는 그다. 허씨는 “아이를 떠나보내는 게 힘들어 그만둬야겠다며 눈물을 훔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아이 냄새가 지워질까 옷도 빨지 못했다. 공항에 데려다 주고 올 때 눈물을 쏟다가 집을 지나친 적도 많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기쁨도 있다. 양부모들이 보내주는 아이들의 사진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된다. 입양한 아이가 자라 찾아오기도 한다. 허씨는 “입양아 캠프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쌍둥이 형제가 꽃다발을 들고 마중 나와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을 때 이 일을 하늘이 맡겼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린 자녀들이 ‘아기 때문에 외식도 못 한다.’며 툴툴댔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녀들이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한다. 지난해에는 아들 딸과 손주들, 위탁아까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허씨는 “지금 데리고 있는 아이는 나보다 남편을 더 따르고, 손자도 아이들을 동생이라며 챙긴다.”면서 “아이들 덕분에 온 가족이 똘똘 뭉쳤다.”고 전했다. 그동안 그의 품을 거친 아이들을 지금도 ‘내 새끼들’이라고 부르는 그는 “세상이 변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국내에는 입양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입양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입양을 통해 큰 행복과 사랑을 가슴으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8월부터 출산후 7일 지나야 입양가능

    올 8월부터 친부모가 신생아의 입양에 동의했더라도 출산 후 소정의 ‘숙려기간’을 거쳐야 한다. 입양도 기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뀐다. 보건복지부는 9일 이 같은 내용의 입양특례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친부모가 신생아 입양에 동의했더라도 출산 후 7일간 숙려기간을 거치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따로 규정이 없어 임신 중에 입양에 동의하면 출산 뒤 아이를 바로 입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숙려기간 동안 아동을 직접 양육할 때의 지원 내용 등에 관해 충분히 숙고하고 상담을 거친 뒤에야 입양 동의를 할 수 있다. 여성계 등에서는 현재의 입양제도가 양육보다 입양을 우선시하고 있다며 모성권 보호를 위해서라도 입양 숙려기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입양 절차도 깐깐해진다. 입양 전에 양부모의 아동학대나 성폭력·가정폭력·마약 등 범죄경력을 확인한다. 또 양부모는 입양 전 아동 양육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입양 뒤에도 1년간 입양기관으로부터 적응을 위한 상담과 교육을 받아야 한다. 입양도 허가제로 바뀐다. 양부모는 가정법원에 아동의 가족관계등록부와 양친의 범죄경력조회서, 교육이수 증명서 등을 제출한 뒤 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 또 입양한 아동이 양부모의 친자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도록 ‘친양자 지위’를 부여하게 된다. 입양 아동이 추후 입양정보 공개를 청구할 수 있는 범위도 정했다. 입양 당시 친부모의 연령과 거주지역 등은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기타 신상 관련 정보는 본인 동의가 있을 때만 공개하도록 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서로 존재도 모르던 쌍둥이, 28년 후 극적 재회

    서로 존재도 모르던 쌍둥이, 28년 후 극적 재회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각각 다른 가정에 입양돼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쌍둥이 자매가 28년만에 극적으로 만났다. 스웨덴에 사는 린 백룬드(28)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당신의 쌍둥이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미친 사람이 보낸 메시지로 생각한 백룬드는 이 글을 무시하다 혹시나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렸을 적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생후 8개월 후 스웨덴에 입양됐기 때문. 양부모에게 이 메시지의 내용을 털어놓은 그녀는 부모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양부모는 그녀를 28년 전 인도네시아의 한 고아원에서 입양했으며 가족이 있는지의 여부는 당시 입양서류가 엉성해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결국 페이스북 메시지에 응답한 백룬드는 그녀를 만났고 한눈에 자신들이 쌍둥이 자매임을 알게됐다. 백룬드는 “우리가 28년을 만나지 못했지만 오랜기간 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고 밝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얼굴만큼이나 닮아 있는 그들의 상황이었다. 둘다 똑같이 스웨덴으로 입양돼 60km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살고 있었으며 직업도 둘다 교사였다. 또 1년 차이로 같은 날에 결혼했으며 ‘유 앤 미’(You and Me)라는 같은 결혼식 음악까지 사용했다. 두사람은 최근 DNA검사를 통해 생물학적인 쌍둥이임을 확인했다. 백룬드는 “DNA 검사 결과가 중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너무 행복했다.” 면서 “인도네시아에 있을 친가족들을 찾기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잡스 마지막 말은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단음절로 된 감탄사 “오, 와우(Oh Wow). 오, 와우. 오, 와우.”였다고 미국 뉴욕타임스가 30일(현지시간) 잡스의 여동생이자 소설가인 모나 심프슨의 장례식 추도사를 인용해 보도했다. ●아내·아이들 보며 감탄사 세번 심프슨은 잡스의 생부와 생모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으로 두 사람은 20대 때인 지난 1985년 처음 만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잡스는 사망 전날 양부모가 입양한 동생 패티를 바라본 뒤 아이들과 아내 로렌을 차례로 오랫동안 쳐다보다 시선을 이들의 어깨너머로 던지며 이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프슨은 가족들에 대한 잡스의 남다른 애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잡스가 간 이식 수술 후 앙상한 몸으로 의자에 의지해 걷는 훈련을 할 당시를 떠올리며 잡스는 아들의 고교 졸업, 딸의 일본 여행, 가족과의 세계 여행 등을 목표로 고통을 견뎌냈다고 말했다. 심프슨은 잡스가 생전에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매일같이 정말 열심히 했으며 결과가 실패로 나오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또 잡스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면서 달리 자랐더라면 수학자가 됐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심프슨은 추도사에서 잡스가 아내 로렌을 만난 날 전화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정말 똑똑하고 개를 키워. 그 여자와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다는 등 잡스의 일상생활에 관한 다양한 일화도 소개했다. ●“자녀들 많이 안아주던 아버지” 심프슨에 따르면 잡스는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는 등 스킨십을 통해 애정 표현을 하는 아버지였다. 잡스는 딸 리사의 남자 친구나 에린의 치마 길이 등에 대해 걱정 한 ‘평범한 아빠’였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재산 상속’ 입양아들, 친아들이 나타나자…

    ▶원문 및 사진 보러가기 양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했던 영국 남성이 부모에게 전 재산을 상속 받았지만 최근 친자식들에 의해 모든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켄트 주에 사는 테리 말리(50)가 2003년과 2006년 각각 세상을 떠난 머리와 알프레드 롤링 부부로부터 7만 달러(1억 2000만원)을 상속 받았으나 친 아들로부터 무효소송을 당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된 말리는 15세였던 1975년. 롤링스 부부 가정에 비공식적으로 입양됐다.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성장한 말리는 늙은 부모가 눈을 감을 때까지 한집에 살면서 극진하게 모셨던 것으로 전해졌다. 롤링스 부부는 친아들 2명이 있었지만 세상을 떠나면서 말리에게 모든 재산을 넘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노년을 함께 해준 양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던 것. 부모가 사망한 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두 아들들은 유언장의 효력이 없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부부가 실수로 자신의 유언장이 아닌 상대편의 유언장에 사인을 했기 때문. 영국 고등법원은 서명이 잘못된 유언장은 성립할 수 없다며 친아들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말리는 상고한 상태다. 말리 측 변호인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유언을 받아들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서 단호하게 밝혔다. 이에 록 스타들의 전기 작가인 친아들 테리 롤링스(49)는 “유언장은 단순한 실수로 치부될 수 없다. 법의 판단에 맡길 것”이라면서 되받아쳤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잡스 “MS는 비난받아 마땅… 인간애와 인문학이 없다”

    잡스 “MS는 비난받아 마땅… 인간애와 인문학이 없다”

    애플의 공동 창업주 고(故)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가 24일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40여개 나라에서 동시에 발매됐다. 책이 나오기 전부터 잡스가 전기 집필자인 월터 아이작슨에게 직접 전기를 써 달라고 부탁했으며, 아이작슨이 2009년부터 2년간 40여 차례에 걸쳐 잡스를 인터뷰하고 그의 친구, 가족, 동료, 경쟁자 등 100여명의 주변 인물들을 만났다는 사실 등 때문에 화제를 낳았다. 민음사에서 발간된 한국판(2만 5000원)은 92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아이작슨은 시사주간지 ‘타임’의 편집장과 CNN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던 언론인. 그는 철저히 사실과 취재에 바탕을 둔 서술로 신비주의로 자신을 무장하고 세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를 조명했다. 잡스의 전기 집필을 두 번 거절했던 아이작슨은 잡스의 아내 로렌 파월을 통해 암 투병 사실을 알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잡스는 집필 과정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사전에 보여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에 선뜻 응했다고 한다. ●생모에게 “낙태시키지 않아 감사” 잡스의 인생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입양됐다는 것이다. “너네 진짜 부모님은 널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야?”란 동네 아이의 말에 울부짖는 잡스에게 양부모는 “우리가 너를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고 일러주었다. 잡스는 양부모를 향해 “1000% 내 부모”, 친부모를 향해서는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후에 잡스는 생모 조앤 심슨에게 직접 전화를 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는데 “잘 지내고 계신지 확인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책은 “낙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일이 고맙게 여겨졌다.”고 전했다. 전기는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은 잡스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잡스는 버려졌다는 사실이 집착을 낳았다는 등의 성격 분석에 대해 “버려졌기 때문에 죽어라 열심히 일한다는 식의 얘기는 어처구니없다. 입양됐다는 사실을 안 것은 독립성을 키워 주었을지 모르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빠진 적은 없다.”고 일축했다. ●선불교와 채식주의로 영혼 형성 잡스가 미국에서 가장 학비가 비싼 대학이자 히피 생활 방식으로 유명했던 리드 대를 중퇴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학비에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부모의 돈을 많이 쓰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고 훗날 자퇴 이유를 밝혔다. 홈스테드 고등학교 때 마리화나, LSD(환각제)에 손댄 잡스는 부모의 분노에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훗날 딸 리사를 낳은 크리스앤 브레넌과 부모의 반대에도 야산의 오두막에서 동거하기도 했다. 잡스는 첫 직장인 비디오게임 제조사 아타리에서 시급 5달러를 받고 고용되지만 곧 ‘냄새 나고 건방진 히피 녀석’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일처리만은 똑 부러지게 해냈다. 그리고 유럽에서의 프로젝트를 해결하고 회사 돈으로 인도 순례를 떠난다. 7개월간 인도에서의 시간에 대해 “인도인의 직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직관에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지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 깨달음은 일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했다. 평생 야채와 과일만 먹는 강박적 식생활을 고3 때 시작한 잡스는 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졌고, 냄새를 풍겼다. ●디자인 열정 어린시절 주택서 유래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로 알려진 이 문구는 애플Ⅱ 팸플릿에 들어가면서 잡스의 디자인 철학이 된다. 깔끔한 디자인을 대중에게 공급하고자 하는 열정은 잡스가 어린 시절 살았던 아이클러 주택에서 유래했다. 1950~74년 캘리포니아 곳곳에 1만 1000채의 집을 세웠던 부동산 개발업자 조셀 아이클러는 깨끗한 디자인과 심플한 취향을 서민에게 선사했다. 잡스는 심지어 투병 중에도 “마스크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며 디자인에 집착했다. 병세가 악화돼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도 의사에게 마스크를 다섯 가지쯤 가져오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겠다고 지시했다. 책에는 애플이 아이패드에 삼성의 칩을 사용하게 된 사연도 등장한다. 잡스는 인텔 칩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들은 정말 느리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 삼성이 상대적으로 속도 경쟁력을 갖췄음을 시사했다. ●영속하는 기업이 핵심 “마이크로소프트(MS)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MS의 DNA에는 인간애와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맥을 보고도 제대로 모방하지도 못했다.…월트 디즈니, 휼렛과 패커드, 인텔은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영속하는 기업을 구축했다. 애플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나는 내가 사람을 함부로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형편없으면 그저 면전에 대고 얘기하는 것뿐이다.” 책 말미에 실린 잡스가 직접 쓴 글 일부다. 그리고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생들에게 한 유명한 말인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실은 히피족 몽상가 스튜어트 브랜드가 카탈로그에 쓴 문구였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열린세상] 혁신적 사업가의 길/이레나 이화여대 방사선 종양학 교수

    [열린세상] 혁신적 사업가의 길/이레나 이화여대 방사선 종양학 교수

    스티브 잡스! 21세기 최고의 정보기술(IT) 혁신가이며 사업가인 애플 컴퓨터의 창업자가 5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오래전부터 병에 시달리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유명을 달리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전세계인들이 슬퍼하며 애도하고 있다. 과학자뿐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경하는 가장 큰 영예가 노벨상 수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잡스와 같은 혁신적인 사업가를 꿈꾸기도 한다. 잡스는 많은 과학자들이 본받고 싶은 인물이다. 양부모의 집 주차장에서 친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1976년 애플사를 설립한 뒤 애플 컴퓨터,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다양한 혁신적인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으며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노키아, 삼성 등을 제치고 최고의 IT 회사 애플을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 정서상 양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대학을 중퇴해 정식 이공계 교육과 경영수업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그가 외부의 도움 없이 세계최고의 CEO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어느 누구도 독선적인 성격과 괴짜 성향의 스티브 잡스가 첨단 기술 산업 최고의 혁신적인 사업가이며 전략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잡스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과연 최고의 혁신 사업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우선 기본적으로 인류발전을 선도하는 최고의 기술자적 자질을 보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기술자만이 자기가 만들어 내는 상품이 세상에 어떤 충격과 변화를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자기 제품에 혁신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도 최고가 되었으니 대학교육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애플을 있게 한 데는 최고의 컴퓨터 기술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술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현 시대는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고객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기능과 마음을 빼앗는 디자인이 융합되어야만 고객의 궁극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라도 중간에 타협하지 않는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추구하는 성향을 가져야 한다. 버튼이 하나만 있는 아이폰 개발에 대해 모든 기술자들이 어렵다고 했지만, 결국 잡스가 주도한 애플은 버튼이 하나만 있는 디자인의 휴대전화를 출시했다. 하나의 버튼만 있는 것이 아이폰의 성공 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매우 큰 차별화 포인트였으며 고객에게 애플사의 비전과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였다. 마지막으로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현재의 삶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잡스는 췌장암에 걸리고 치료하면서도 애플의 성장과 혁신에 온 힘을 쏟았다. 자신의 죽음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인생관을 가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죽음 직전까지 매진했다.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과정과 도전,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존재감과 기쁨이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잡스로부터 배운다. 오늘의 삶을 사는 과학자들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인류 발전을 위해 해결할 숙제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그렇게 유명한 잡스도 암이라는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참 활동 할 수 있는 나이에 사망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완벽한 암의 진단과 치료는 과학자 그리고 젊은이들이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다. 인류 발전을 위해 우리 앞에 놓인 그 많은 숙제를 조기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잡스의 예에서 보듯이 최고의 기술을 갈망하는 혁신적 개척 정신, 예술적 감각, 타협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 성공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늦은 밤까지 자신의 현재 삶에 최선을 다하는 과학자와 젊은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우리나라 과학의 발전이 있을 것이고 우리 국가의 미래도 있을 것이다. 바보처럼 우직하게 갈망하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생각난다.
  • 세상을 바꾼 남자 Logout

    세상을 바꾼 남자 Logout

    한달 반 전, 애플은 그를 잃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잃었다. ‘혁신의 아이콘’, ‘디지털 혁명가, ‘정보기술(IT)의 제왕’으로 불렸던 애플의 창업자이자 전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시간) 숨졌다. 지난 8월 24일 애플의 CEO직을 사임할 때 남겼던 “불행히도 그날이 왔다.”는 그의 말이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됐다. 분신과도 같았던 회사를 떠나게 만든 병마가 그의 개인적 불행이라면 잡스의 혁신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된 현실은 시대의 불행일지 모른다. 롤러코스터 같은 56년의 삶이었다. 미약한 시작이 창대한 끝을 예고하고, 실패는 성공을 낳는다는 명언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생이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양부모 아래서 자랐다. 사고뭉치 청소년이었고, 대학을 중퇴했으며,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애플을 창업해 개인용 컴퓨터(PC)의 대중화에 성공했지만 쫓겨났다. 애플로 복귀해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일련의 히트작을 냈다. 성공의 정점에서 췌장암이라는 복병과 마주쳤고, 처절하게 싸웠지만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잘팔리는 제품만 만드는 기업인이 아니었다. 세상이 열광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창의와 혁신의 가치였다. 제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바꾸는 천재성이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흔들림 없는 신념, 언제나 검은 터틀넥 상의와 청바지를 고수하는 데서 드러나는 단순함과 집중의 미학은 잡스를 디지털 시대를 이끄는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이트에는 전 세계 애플 사용자들의 추모글이 넘쳐났다. 바로 전날 애플이 공개한 아이폰4S가 ‘for Steve’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인터넷에 퍼지며 잡스의 유작을 소장하겠다는 네티즌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잡스가 끝까지 애플에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애플은 이날 성명서에서 “애플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천재를 잃었고, 세상은 경이로운 인간을 잃었다.”면서 “그는 자신만이 세울 수 있는 회사를 남겨두고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애플의 바탕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로렌과 1남 2녀가 있으며, 결혼 전 사귄 여자친구가 낳은 딸이 하나 있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고 강조했던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일상처럼 평온하게 마무리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굿바이, 잡스] PC·포스트PC시대 개척… 그에겐 죽음도 발명품이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외부의 기대와 자부심, 좌절, 실패 따위는 모두 사라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마음에 남습니다.” ‘IT 구루’(정보기술 지도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마저 변화를 위한 채찍으로 활용했던 혁신가다.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불태웠던 그는 늘 절박했기에 자신과 주변을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덕분에 ‘독설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타고난 세일즈맨이기도 했다. 개인용 컴퓨터(PC)와 포스트 PC(스마트폰과 태블릿PC) 시대를 모두 열어젖혔던 잡스는 스스로 말했던 ‘최고의 발명품’을 찾아 떠났다. 잡스의 유년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핍’이다. 1955년 2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몇 주 뒤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잡스는 ‘사고뭉치’였지만 부모의 보살핌 덕에 명문 리즈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불과 6개월 만에 스스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학비만 비쌀 뿐 도무지 배울 게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년기 키워드는 ‘결핍’ 그는 이후 ‘기행’과 ‘고행’으로 젊은 생을 채웠다. 숙소가 없어 친구의 방바닥에 누워 잤고 빈 콜라병을 팔아 5센트씩 모아 간신히 허기를 채웠다. 자퇴한 학교를 찾아 ‘손글씨 강의’ 따위를 청강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으며 선불교에 심취했다. 잡스는 “쓸데없어 보이는 이 경험이 내 철학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고 회고했다. 잡스는 1977년 천재 엔지니어였던 선배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창업하면서 첫 승부수를 띄웠다. 양부모 집 창고에서 만든 PC ‘애플Ⅱ’는 4년 만에 100만대가 팔리며 대히트했고 잡스는 유명 언론의 표지를 장식하며 IT 업계 샛별로 떠오른다. 하지만 잡스는 30세 때인 1985년 자신이 영입한 최고경영자(CEO) 존 스컬리와 갈등을 빚다 끝내 회사에서 쫓겨난다. ●기업인 키워드 ‘도전’ 좌절했지만 도전을 멈출 새는 없었다.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인 픽사를 설립해 보란 듯이 재기했다. 그 사이 잡스가 떠난 애플은 ‘관료주의’의 덫에 걸려 곪아 갔다. “애플에서 전구 하나 갈려면 전구설계 담당, 프로젝트 관리자, 수익성 분석 담당, 번역 담당, 언론 발표 담당 등 43명의 직원이 필요하다.”는 조롱이 잡스의 귀에까지 들렸다. 부도 위기에 몰린 애플은 잡스에게 ‘SOS’ 신호를 보냈고 잡스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애플은 고공행진했고, 시가총액 세계1위(3372억 달러·약 364조원) 기업에 올랐다. 하지만 생은 잡스를 편히 놓아두지 않았다.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2009년에는 간 이식 수술까지 해야만 했다. 평범하지 않던 잡스는 평생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멋대로이며 완고하고 화를 잘 낸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열정’과 ‘자기 확신’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애플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타임의 전 기자 마이클 모리츠는 “맞다. 잡스는 시장 상인처럼 야비했고 이해타산적이며 의심이 많았다. 하지만 끈질겼으며 설득할 줄 알았다.”고 변호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김치로 코리안 뿌리 찾은 美혼혈 입양녀

    김치로 코리안 뿌리 찾은 美혼혈 입양녀

    혼혈 입양녀 ‘마르자’ 는 김치를 담그면서 어린 시절 이름인 ‘말자’로 되돌아간다. 한 미국 언론은 은 8일 요즘 미 공영 방송 PBS 채널이 방영중인 다큐멘터리 시리즈 ‘김치 연대기’의 호스트인 한국계 마르자 봉거리첸이 한국 요리로 인해 잃어버렸던 뿌리를 되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일간지 뉴욕 데일리 뉴스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TV 프로그램과 동명의 요리책인 ‘코리안 크로니클(연대기)’이란 요리책을 낸 마르자의 근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마르자는 세계적 요리사인 남편장 조지와 함께 한식 소개 프로그램인 ‘김치 연대기’를 직접 출연해 제작한 바 있다. 마르자는 뉴욕 데일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주방에서 한식 만들기’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내게 된 경위에 대해 “나에겐 너무나 자연스런 진전”이라고 설명했다. 유아 시절 입에 밴 한식의 풍미를 성인이 되어 다시 접하면서 절반의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되찾게 됐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뉴욕에서 재혼해 살고있던 한국인 생모와의 재회 당시를 설명했다. 17년만에 만난 생모가 “네가 어렸을 때 먹던 음식이란다.”며 불고기와 된장국, 그리고 총각김치 등 낯설어보이는 한식을 내놓았을 때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내 입이 오랫동안 갈구하던 풍미였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름에 남아있던 한국계 소녀 ‘말자’의 정체성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군병사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4살 때 부모가 헤어지면서 미국인 양부모 가정에서 자라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정체성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생부모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김치 연대기’는 프랑스 요리사 장 조지와 부인인 마르자가 서울과 강원도 제주 등 전국을 돌며 한국 음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13부작 다큐멘터리로, 요즘 뉴욕 일원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고 한다. 장 조지는 레스토랑 안내서인 ‘미슐랭 가이드’의 최고등급인 3스타를 획득한 세계 정상급 셰프로 뉴욕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지난 5월부터 고추장 버터 스테이크와 김치 핫도그를 각각 선보이고 있다. 마르자도 한식 요리책을 내면서 남편과 함께 한식 요리 전도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녀는 뉴욕 데일리 뉴스와의 회견에서 “딸 클로이도 세계적 요리사인 아빠가 만든 다른 고급음식을 제쳐두고 한식만 찾는다.”며 귀띔했다. 사진=자료 사진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평창, 꿈을 이루다] “평창 만세” 대표단 100여명 태극기 휘날리며 눈물

    [평창, 꿈을 이루다] “평창 만세” 대표단 100여명 태극기 휘날리며 눈물

    6일 오후 5시(한국시간 밤 12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발표장인 더반 국제컨벤션센터(ICC) 오디토리엄. 화동이 개최 도시 명단이 담긴 봉투를 들고 발표장으로 들어선다. 세 후보 도시 관계자 등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게 봉투가 건네진다. 위원장은 봉투를 열고 개최지를 호명했다. “평창” 순간, 단상 하단에 있던 100여명의 평창 대표단은 자리를 박차고 모두 일어서 소리 높이 외쳤다. “평창 만세” 대표단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시울을 붉혔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조양호 유치위원장과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김진선 특임 대사 등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서로 진한 악수를 나눴다. 경쟁 도시인 독일 뮌헨과 프랑스 안시의 유치위 관계자들도 악수를 청하며 오래 준비한 평창의 승리를 축하했다. ICC 인근에서도 “평창 만세”가 울려퍼졌다. 가슴 졸이며 주변에서 기다리다 결과를 전해들은, 한국에서 온 20여명의 응원단은 “평창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북을 울렸다. 흥겨운 시간은 늦게까지 이어졌다. 앞서 평창은 안시, 뮌헨에 이어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8명의 발표자가 3~4분씩 나눠 쓰며 45분간 평창 유치의 당위성을 진한 감동과 함께 선사했다. 조양호 유치위원장을 시작으로 이명박 대통령, 김진선 특임대사, ‘피겨퀸’ 김연아, 문대성 IOC 선수위원,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한국계 미국 스키 선수 출신인 토비 도슨, 나승연 대변인 순으로 단상에 올랐다. 먼저 조양호 유치위원장은 “우리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우리가 준비됐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면서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우리의 꾸준한 열정과 유치 수준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8년 평창은 대한민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이며 대통령으로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증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선 특임대사는 “우리는 두번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했다.”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이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해졌다는 것이다. 나 개인적인 꿈, 강원도민의 소망으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국민의 꿈이 됐다.”며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김연아는 “과거 한국의 많은 동계 스포츠 선수들은 올림픽 드림을 위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연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드라이브 더 드림’ 프로그램을 통해 시설을 지원해 내게도 행운이었다.”면서 “우리의 승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성공과 성취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했다. 문대성 IOC 위원은 “올림픽 선수들은 이동시간이 적게 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우리는 동계올림픽 사상 가장 콤팩트한 경기장을 설계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위해 집과 같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성 체육회장은 “지난 몇달 IOC 동료들로부터 ‘올림픽 기간 중 평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쇼핑이나 엔터테인먼트 장소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서 “우리는 ‘베스트 오브 보스 월드’라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동양의 독특한 진미에서부터 세계 곳곳의 문화 시설까지, 손님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평창에서 제공될 것”이라며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토비 도슨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로스타일스키 미국 선수다. 양부모를 통해 스키를 배웠고 스키는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면서 “유치 노력의 핵심은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더반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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