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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새해 가장 바빠지는 사람들은 점술인이다. 개명한 세상에 누가 미신 따위에 솔깃하랴 싶지만, 일간지조차 새해를 맞아 국운이 어떠할지를 점친다. 옛날부터 이 땅에는 나라의 앞날을 예언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뿌리도 제법 깊어서 삼국통일 이전까지 소급된다.‘고려비기(高麗秘記)’,‘고경참(古鏡讖)’이 고대의 예언서라면,‘삼한회토기’ ‘삼각산명당기’는 중세의 예언서였다. 근세의 예언서로는 ‘도선비기’를 비롯해 수십종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이다. 18세기부터 민중의 사랑을 받던 ‘정감록’은 국가의 탄압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다종다양한 필사본만 유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감록’은 1923년 드디어 활자화되었고 그것이 사실상 정본 취급을 받고 있다. ‘정감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곧 조선이 멸망하는데, 그 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계룡산에 세워질 새 왕조는 언제 나타나는지로 압축된다. 아무 해에 무슨 사단이 터진다는 식의 짤막한 예언이 대부분인데, 한국의 예언서가 대개 그렇듯 60갑자로 햇수가 적혀 있어 세월의 흐름에 구애되지 않는다. ●예언서에 보이는 민중의 공포 ‘정감록’의 비교적 앞쪽엔 이런 오싹한 대목이 있다. 원숭이해 봄 삼월과 성스러운 임금이 다스리는 가을 팔월, 인천과 부평에는 밤중에 배 1000척이 들어오고, 안성과 죽산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여주와 광주에는 인적이 영영 끊어져버리고, 수원과 남양에는 피가 흘러 냇물을 이루리라. 한강 이남 100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지고, 인적도 영영 사라질 것이다. 전쟁영화의 섬뜩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예언은 수도권 전체가 전쟁 통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작년 2004년도 원숭이해였다. 최악의 경제난으로 먹고 살기 참 힘든 한 해였고 북한의 핵문제로 전쟁 걱정도 컸었다. 북핵문제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강경책이 화근이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땅에 그런 참극은 없었다.‘정감록’의 예언이 틀린 셈이다.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구절을 보여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다들 그렇단다. 과연 ‘정감록’에는 민심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나 보다. 서울로 통하는 관문 인천 앞바다에 적을 태운 배가 1000척씩이나 들이닥친다고 했다. 그런 변고가 없다.1592년의 임진왜란, 그보다 5년 뒤의 정유재란도 이처럼 끔찍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참혹한 예언은 뜬금없이 나오는 예가 없다. 지난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바그다드 상공에 쏟아진 폭탄이 불꽃놀이 같았고, 명분 없는 전쟁에 죽은 사람만도 10만을 헤아렸다. 훗날 이라크에 예언서가 작성될 경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남긴 상흔은 집단적 기억이 되어 남을 것이다.‘정감록’에 담긴 이 대목도 민중의 전쟁공포증으로 헤아려봐야 한다. 우선 인명의 대량 살상을 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안성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도 대수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정감록’의 예언은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만 같다. 1894년 7월 하순 일본군함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하다가 아산(牙山)·풍도(豊島)로 내려가 청의 해군과 한바탕 싸웠다.‘정감록’에 나오는 인천 앞바다 운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격전지 아산과 풍도는 바로 예언서에 언급된 남양의 코앞이다. 그 뒤 일본군대는 천안 부근의 성환(成歡)에서, 같은 해 9월에는 평양에서 청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뒀다.‘정감록’에 나오는 안성, 죽산 등도 실제의 전쟁터 성환에서 멀지 않다. 근대식 무기가 동원된 청·일 양국간의 살벌한 전투 장면을 지켜보면서 민중은 공포에 떨었고 이것이 다소 과장된 형태로 ‘정감록’에 아로새겨졌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한 가지 다른 가능성도 있다.19세기 후반부터 한국에는 ‘서양오랑캐’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1840년 여름, 영국은 4000명의 병력으로 중국의 다구·톈진(天津)을 위협하였고, 이듬해에 다시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물밀 듯 난징(南京)으로 쳐들어갔다. 아편전쟁의 놀라운 소식은 연달아 한국에 알려져 조정은 물론 민심마저 발칵 뒤집혔다. 외침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1866년 프랑스 함대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불과 5년 뒤인 1871년에는 미국함대가 쳐들어와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당황한 나머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외국과 교섭을 전면 금지했지만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 속에서 각종 소문과 예언이 유행했다. 갑자기 1000척의 배가 쳐들어와서 수도권을 피바다로 만들어놓을 것이라는 예언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일 것이다. 거기에 청·일전쟁의 집단기억이 덧칠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정감록’에 숨겨진 비밀을 읽는 법 10년쯤 전이었다. 역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상세계를 탐구하던 내 눈길이 예언서 ‘정감록’에 닿았다. 한국역사상 대표적인 예언서라면 다들 ‘정감록’을 첫손가락에 꼽았기에 그 책을 끌어당겼던 것인데 실망이 컸다. 거기에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없었고, 성경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같은 것도 안 보였다.‘정감록’에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서술은 없고 대신 알쏭달쏭한 표현만 단편적으로 눈에 띄었다. 하지만 거듭 읽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정감록’이 지닌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마침내 ‘정감록’에는 비밀스러운 문화의 코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정감록’의 한 줄 한 줄은 수천년 동안 생성된 우리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였다. 민중은 공포와 절망에 떨면서도 예언 가운데 희망의 빛을 감춰두었던 것이다. ‘정감록’의 문화적 코드는 예언서를 예언서로서 바라보는 편협한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자구의 해석에 매달릴 경우 ‘정감록’은 그저 단편적이고 무질서할 수밖에 없다.‘정감록’을 읽는 옳은 방법은 그게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의 앞뒤를 재고 정치와 문화를 하나로 뚫어서 읽을 때, 그 비밀스러운 코드는 비로소 풀릴 것이다. ‘정감록’의 밑바탕에는 풍수지리설과 선천후천 교대설(옛 세상이 끝나고 이제 곧 천지가 개벽한다는 주장)이 있다. 맥맥이 흐르는 미륵신앙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은 한국문화의 젖줄이다. 따지고 보면 동학, 증산도, 원불교와 같은 근현대 한국의 신종교도 ‘정감록’으로부터 생명수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정감록’과 김지하 ‘정감록’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대 한국의 지식인 몇몇도 오래 전부터 ‘정감록’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시인 김지하다.‘오적’이란 시를 비롯, 군사독재에 목숨 걸고 맞서 싸운 그의 투쟁담은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김지하는 사상적으로도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생명이니 살림이니 하는 토종의 생각으로 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주의 주장을 아우르고 싶어했다. 그런 김지하가 ‘정감록’을 즐겨 인용하였다면? 김지하는 사실 ‘정감록’을 본떴으며,‘정감록’의 정수를 꿰뚫어 보았다. 이 말이 쉽게 믿기지 않을 사람도 있을 테니 그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다. 김지하의 책 ‘말뚝이 이빨은 팔만사천개’의 ‘오행’이란 시가 앞서 살핀 ‘정감록’의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그 해 여름 복중 큰 눈이 내리고, 큰물이 지고, 큰 흉(凶)이 들고 안성과 죽산(安竹)과 수성과 당성 사이(隨唐間)에 굶어죽은 송장이 산처럼 쌓이고 비석이 땀을 흘리고 우물에 피가 솟고 대꽃이 피고 운운. 여기서 김지하는 전쟁의 참혹상을 흉년의 비극으로 바꿔놓았지만 지명도 그대로 두었고 얼개도 ‘정감록’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앵적가’의 경우는 더 심하다. 안성과 죽산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며 하는 식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김지하의 패러디는 계속된다.‘이 가문 날에 비구름’에서는 아예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정감록’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 이 작품은 동학의 역사를 한 편의 유장한 시로 풀어낸 것인데,‘정감록’을 빌려다가 최제우가 동학을 개창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왜 김지하는 ‘정감록’을 자꾸 빌려다 썼을까. 단순히 그 예언서의 몇 대목에 관심을 둔 것일까, 아니면 ‘정감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큰 매력을 느낀 것일까. ●‘정감록’이란 민중의 밥그릇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문득 정경모란 이름도 생각난다. 그는 80년대 중반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찢겨진 산하’의 저자로, 남북통일에 관한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씨알의 힘’에는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저본)이 실려 있다. 정경모는 그 글에서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그리고 장준하 세 사람이 천상에서 만나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치 ‘정감록’에서 정감, 이심 및 이연이 금강산 비로봉에 앉아서 나라의 운명을 논의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정경모와 김지하가 ‘정감록’의 형식과 내용을 빌린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들은 민중의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한 사상가 또는 운동가였고, 그 점이 ‘정감록’을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같다. 그들로서는 ‘정감록’에 담긴 예언의 내용 못지않게 지난 수백년 동안 민중이 사용해온 비밀스러운 화법을 터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언서가 그렇듯 민중은 겉으로 절망을 말하면서도 희망의 씨앗을 남몰래 감춰두고 싶어했다. 김지하 등은 그 점을 간파하였다고 할까. 그런 그들에게 ‘정감록’은 일종의 교과서였을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선 지식인들은 실의에 빠진 민중을 고무하고 싶었고 따라서 민중의 혀로 말하는 법을 배우려 애썼다고, 그렇게 믿어진다. 조선 후기부터 오랜 왕조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민중은 ‘정감록’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잊을 만하면 ‘정감록’을 매개로 한 역모 사건이 터졌다. 그 때마다 수십 또는 수백명의 연루자가 붙잡혀 가 매를 맞고 더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기도 했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양반들의 조선이 영영 망하고 말 것이다. 천지개벽하면 시쳇말로 개똥쇠에 불과한 이 몸도 운대가 풀릴 것이다.” 민중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는 심정으로 예언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으리라. 집권층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다. 그래서 금서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정감록’은 합법적으로 출판되지 못한, 그러나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로 남았다. 일제시대까지도 그 인기는 여전해 ‘정감록’이 점지한 길한 땅을 찾아 수만명이 정든 고향을 버렸다. 일제시대 계룡산자락에는 불과 수년새 작은 읍 하나가 들어설 정도였다. 무수한 민중이 한 글자씩 ‘정감록’의 예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난세에 살아갈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김지하가 ‘정감록’을 방불케 하는 담시를 연달아 지은 것도 민중의 마음에 희망의 싹을 틔울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정감록’은 예나 지금이나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는 민중의 희망을 퍼 담는 밥사발이다. ● 정감록이란 조선후기부터 유행한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정도전, 정여립 등이 저자란 설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영조 때 실록에 처음 등장한 뒤 조정의 금령으로 출판, 소지 및 독서가 일체 금지되었다. 지배층에게는 혹세무민의 황당한 책, 민중들 입장에선 위로와 희망의 터전이었다. 곧 조선왕조가 망한다, 살아남으려거든 복된 피난처로 가라, 정씨(鄭氏) 진인(眞人)이 와서 새 왕조를 연다는 것이 예언의 골자다. 조선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역모사건과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수십곳에 정감록촌이 들어섰고, 수천의 신(新)종교단체가 등장했다. 겉보기엔 정감(鄭鑑), 이심(李沁), 이연(李淵) 3인의 엉성한 대담집인데, 풍수지리설·해도진인설·미륵신앙 등이 저변을 흐른다. 그들의 대화엔 은어(隱語)가 많아 해석이 안 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제목은 달라도 내용이 엇비슷한 온갖 예언서를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 백승종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現 푸른역사硏 소장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독일 괴팅겐 막스·플랑크 역사硏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진단학회 총무이사 ●저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2003년)‘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2002년)‘아버지 난 누구에요’(궁리,2001년)등 다수.
  • [문학이 머문 풍경] 최명희 ‘혼불’의 배경 남원

    [문학이 머문 풍경] 최명희 ‘혼불’의 배경 남원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혼을 담은 예술소설 ‘혼불’은 최명희(1947∼1998)가 지난 80년 4월부터 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혼신을 바친 대하소설이다.20세기 말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혼불’은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 전북 남원시 사매면의 유서깊은 ‘매안 이씨’ 문중의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宗婦)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근대사의 격랑속에서도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켜 나가는 양반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특히 우리 선조들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 민속학적, 인류학적 기록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아름다운 모국어로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혼불이 살아있는 마을 전북 남원시 사매면에서는 작가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고 글쓰기의 힘겨움을 호소했던 ‘혼불’의 주요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서도리 노봉마을은 혼불의 주 무대이다. ‘혼불마을’로 이름 붙여진 동네 입구에는 ‘꽃심을 지닌 땅’‘아소 님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한쌍의 장승이 방문객을 맞는다. 그 옆으로 ‘최명희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노적봉을 병풍처럼 뒤로 하고 자리잡은 혼불마을은 아담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마을 맨 위에는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 강모가 거주했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을 굽어 보는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중마당에 매화고목이 양반가의 기상을 보여 준다. 지난해 마을 옆에 ‘혼불문학관’이 건립됐다. 연못과 잔디밭, 물레방아가 조성된 6000여평의 문학관은 공원을 연상케 한다. 고래등 같은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문학관에서는 작품일지와 유품, 소설속의 주요 장면을 인형극과 디오라마로 볼 수 있다. 몽블랑 만년필로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육필원고와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 대청마루에 서면 소설의 중심무대였던 노봉마을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멀리 남원의 주봉인 천황봉, 임실 성수산, 진안 운장산, 장수 팔공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문학관 옆에는 청암부인이 만든 ‘청호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농사짓는 물이 부족해 청암부인이 실농한 셈치고 2년여에 걸쳐 만든 것이다. ●정겨운 문학적 공간들 노봉마을을 벗어나면 ‘구 서도역’이 눈에 띈다. 서도역은 작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다. 종손 며느리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고, 강모가 전주로 학교 다니면서 이용하던 장소다. ‘신 서도역’은 2002년 새로 역사를 지어 이전했다. 소설속의 서도역은 1932년 준공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옛 서도역이다. 녹슨 철로와 수동 신호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원시는 조만간 이곳을 영상촬영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반촌의 외곽지대였던 ‘거멍굴’과 ‘고리배미’는 매안 이씨의 집성촌인 상신마을이다. 작가가 “소쿠리 안에 들만치 도래도래 모여 앉은 납작한 초가집들”이라고 표현한 거멍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민촌이었다는 사실이 이곳 사람들을 떠나 보냈기 때문이다. 거멍굴은 무산마을, 고리배미는 인화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청암부인이 민촌에 있기는 아깝다고 말한 고리배미 ‘황장목 숲’은 여전히 푸르고 기운차다. 작품속에 강모가 안서방의 등에 업혀 면소재지 보통학교를 다닐 때 소피를 보기 위해 쉬어가던 ‘늦바우고개’ 떠꺼머리 노총각 춘복이가 신분상승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빌던 ‘달맞이 동산’ ‘당골네 집터’ 등도 옛모습을 떠올리며 살펴볼 수 있다. ●꺼지지 않는 혼불 정신 최명희는 1947년 10월 10일 전북 전주시 경원동에서 2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은 소설의 주 무대인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 작가는 학창시절부터 일찍이 빼어난 글솜씨를 인정받았다. 전주 기전여고 3학년때인 65년 전국남녀문예콩쿠르에서 수필 ‘우체부’가 장원으로 뽑혀 학생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고교 작문교과서에 실렸다. 72년 전북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기전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74년 서울 보성여고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때 작가의 나이 서른세살. 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이 당선됐다. 그해 2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보성여고 교사를 사임하고 이후 17년 동안 ‘혼불’ 창작에 전념했다.84년 서울신문에 단편소설 ‘이웃집 여자’를 발표하기도 했다.96년 12월 대하소설 ‘혼불’ 전5부 10권이 출간됐다. 생활이 어려운 작가를 위해 97년 9월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후원 모임이 창립됐다.97년부터 98년 사이에 단재문학상, 세종문화상, 전북애향대상, 여성동아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하지만 혼불이 완간된 지 2년이 채 못된 98년 12월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짧은 유언을 남긴 채 지병인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묘지는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동물원 입구에 마련됐다. 전주시는 이곳에 문학비를 세우고 ‘혼불공원’이라고 이름지었다.99년부터 전라문화연구소, 혼불기념사업회 등이 매년 ‘혼불문학제’를 열고 ‘혼불학술상’을 제정해 작가의 문학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청진기/박만호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청진기/박만호

    (무대) 원룸 아파트 아래 위층,301호와 401호 (등장인물) 남:소리감별사 여:빨간 구두의 여인 의뢰인1:50대 초반 의뢰인2:30대 중반 의뢰인3:30대 초반 할머니:꿈속의 환영 딸:중학생 (소리에 대해) 소리는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연기한다. 극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극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측정하는 청진기는 ‘호른’의 유려한 곡선 음관을 부착한 특별한 도구이다. ●제1장 어둠 속에서 “영호야- 영호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원룸 아파트 아래 위층인 301호와 401호가 서서히 드러난다. 스탠드만 침침하게 켜져 있는 아래층 301호는 실내가구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 위층 401호는 아직 어둠 속에 싸여있다. “우웅 우웅-”하는 진동음이 들리자,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귀마개를 벗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남자.“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라는 안내음이 들린다. 이어 아파트의 여러 생활소음들이 와글와글 들려온다. 다시 귀마개를 하고 눕는 남자. 이때 다급한 뾰족구두 소리. 쫓기듯 달려와 위층 401호로 올라간다. 문을 닫고 구두를 벗고 룸으로 들어서는 여자. 외투를 벗고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진다. 아래층 침대에 누웠던 남자가 슬며시 몸을 일으킨다. 플래시를 켜서 천장을 비춰본다. 위층 여인의 숨소리가 평정을 되찾는다.“끼리리리-”하며 냉장고 가동 소음이 시작된다. 냉장고를 비추는 플래시. 새벽 4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와 함께 암전된다. 무대 밝아지면, 아래층 301호의 실내가 드러난다. 침대와 평범한 실내가구들. 구석 쓰레기통에는 호른 나팔과 야구방망이가 처박혀 있다. 탁자에서 남자에게 소리 감별을 받고 있는 의뢰인들. 호른을 닮은 청진기로 손목시계들을 검진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리:(손목시계) “째각 째각 째각 째각-” 남자:이게 불량입니다. 태엽이 긁히는 소리가 나는군요. 의뢰인1:계측기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남자:0.5데시벨의 소음이군요. 계측기는 보통 플러스 마이너스 1데시벨의 오차를 가지고 있지요. 다음 분. 의뢰인2:(믹서기 3개를 탁자에 놓고) 동방가전에서 출시한 신제품입니다. 모델별 소음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소비자에게 주는 청각적 영향 말이죠.(뚜껑을 살피는 남자에게) 저... 뚜껑이 아니라 작동시의 소음만 분석해 주시면. 남자:모든 소리를 다 분석해야죠. 의뢰인2:우리가 필요한 건. 남자:다시 말하지만, 소리는 복합적입니다. 의뢰인1:감별사님을 믿고 따르세요. 남자:G-1800, Q-300, A-7, 이 세가지 모델의 소리 중에서 A-7이 가장 우수합니다. 의뢰인2:그럴리가요.A-7이 가장 구형인데. 남자:신제품이 G-1800이죠? 이건 실패작입니다.110데시벨의 고주파 파동 현상이 발생합니다. 여기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고객만족도가 어찌 될까요? 다음 분이오. 의뢰인3:역시 탁월한 분석이십니다.(포도주 2병을 내밀며) 적포도주와 백포도주입니다. 소리:(뾰족구두) “또각 또각 또각 또각-” (포도주 병을 살펴보다가, 뾰족구두 소리에 눈길을 돌리는 남자. 초인종 소리. 남자가 청진기를 벗고 문을 연다. 복숭아 접시를 들고 들어오는 이층 여자) 여자:안녕하세요? 저는…. 남자:위층 401호 분이시죠? 여자:어머나, 어떻게 아셨죠? 남자:(여인의 빨간색 뾰족구두를 보며) 내 추측이 맞았군요. 빨간색일 거라 생각했죠. 어젯밤에 구두 소리를 들었어요. 여자:어머나, 새벽 4시가 넘어 들어왔는데. 남자:새벽엔 더 잘 들리죠. 여자:한데 색깔까지 어떻게 아셨나요? 남자:검은색 구두였다면 소리가 더 낮게 깔리거든요. 낡은 가죽이라 세월의 나이가 느껴지던데요.15년 된 캥거루 가죽입니다! 여자:호호호- 점쟁이신가봐! 어제 이사왔어요. 인사도 드릴 겸 복숭아 좀 드시라고요.(남자에게 복숭아 접시를 건네며) 어머나, 손님들이 많이 계시군요. 남자:제 의뢰인들입니다. 여자:무얼 의뢰 받으시는데요? 남자:소리요. 의뢰인1:제품의 소리를 감별해 주시는 거죠. 의뢰인2:그 느낌까지요. 의뢰인3:감별사님은 기계보다 정확하시죠. 여자:우리 아파트에 대단한 명인이 살고 계시는군요. 저…이것도 감별이 되나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소리가 잘 안 들리거든요. 남자:(휴대전화를 검진하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소리가 작게 설정된 거 외엔.(진동음을 조정하고) 들어보세요. 소리:(휴대전화 진동음) “우웅 우웅 우웅…” 남자:커졌죠? (휴대전화를 여자에게 주며) 이웃사촌이니 감별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여자:아유, 고마워요. 남자:소리를 놓치면 후회가 크답니다. 여자:맞아요. 일년 전에 정말 중요한 연락을 놓친 적이 있어요. 샤워 중이었거든요. 제 인생이 걸린 중요한 기회였는데….30분 늦게 연락하는 바람에 바이 바이! 근데 감별사님은 소리를 어떻게 분석하시나요? 남자:기억되어 있는 소리들 때문에 분석이 되는 겁니다. 여자:이 세상 소리를 전부 기억하고 계세요? 남자:한 번 들으면. 의뢰인2:스리쿠션 때린 당구공처럼요? 의뢰인3:구구 팔십일 구구단처럼요? 여자: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남자:망각이 안돼요. 모두:오!…. (다시 포도주 병을 검진하는 남자. 가만히 주시하는 사람들) 소리:(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남자:아르마냑 17년산이군요. 의뢰인3:네! 맞습니다. 남자:색깔도 소리를 냅니다. 적포도주는 백포도주보다 0.3데시벨 정도 고음을 지닙니다. 잔에 따를 때, 잔을 부딪칠 때, 적포도주는 유혹의 소리를 발산하지요. 좋은 술은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우와!…. 의뢰인2:선생님. 그 차이를 일반인도 인식할 수 있나요? 남자:그들도 분명 듣습니다. 말로는 표현하진 않지만, 마켓에서 돈으로 표현하죠. 의뢰인들:(박수치며)니즈는 욕망이다! 여자:전 들을 수 없거든요! 색깔이 소리를 낸다고요? 그런 황당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왜들 무조건 믿는다고만 하시죠? 남자:이걸 쓰고 한번 들어보세요. (여자에게 청진기를 건네는 남자) 여자:이건 호른의 음관이잖아요! 남자:제가 특별히 제작한 청진기입니다. 여자:(쓰레기통에 처박힌 호른의 나팔부분을 발견하고) 저기서 떼어내 만드셨나요? 남자:네. 난 새로운 악기가 필요하거든요. 여자:이 청진기가 악기라고요? 남자:그럼요.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악기죠. 여자:혼자만 듣는 게 어떻게 악기가 되죠? (청진기를 던지며) 이건 장난감에 불과해요. 남자:진정하세요. 이 세상은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리를 외면하지 마세요. 제발…. 이리 오셔서 들어보세요. 호른 소리를 음미할 수 있어야 진정한 호른 주자가 될 수 있듯이, 이 청진기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거죠.(청진기를 여자에게 씌워주고 백포도주를 흔든다.) 들리나요? 눈을 감고 들어 보세요. 소리:(백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여자:들려요. 남자:이번엔 적포도주입니다. 소리:(적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남자:안단테 칸타빌레로 사라지는 아련한 고음의 잔상이 왼쪽 귓전을 스치죠? 여자:(청진기를 벗으며) 들려요…. 하지만 차이는 모르겠어요. 의뢰인1:허허허- 소리 감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의뢰인2:그래서 우린 의뢰를 하러 오고요. 의뢰인3:기계보다 정확하시니까요. 여자:흥, 정말로 듣지 못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어요? 남자:듣지 못하는 소리라…. 있죠. 잠들었을 때. 여자:밤에도 안 자고 전부 듣는다면서요. 새벽 4시에 제 구두소리도 듣고. 남자:낮에 자나보죠? 여자:농담하세요? 어째 좋은 이웃이 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휭하니 나가버리는 여자. 의뢰인들도 일어선다.) 의뢰인1:허허허. 성질도 급하시네. 오늘도 좋은 감별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뢰인2,3:최상의 분석이었어요.(박수치며) 엑설런트! (모두 나가면 하품하는 남자. 위층 402호로 들어서는 여자. 소리를 읊조린다.) 여자:“우리 아기 예쁜 배, 할미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우리 아기 동그란 배, 할미 손은 약손. 궁글궁글 쓸어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남자, 위층의 소리를 의식하며 침대 밑에서 박스 하나를 꺼낸다. 박스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 스케이트 신발의 줄을 풀렀다가 다시 매더니 하품하며 드러눕는다. 조명 분위기가 바뀐다.) (탁자 위에서 남자의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코를 고는 남자. 이어 부르는 소리) 소리:“우웅 우웅 우웅- 영호야. 영호야-” 남자:(몸을 뒤채며) 순이니…. 인라인 스케이트 사놨다. 어여 신어봐….(부스스 얼굴을 들고) 엥! 내가 자고 있었나. 순이니? 순이 왔니? 날 저물었는데 얘는 뭐하고 안 들어오나. 어휴, 말을 말아야지. 세상 좋아졌다. 맨땅에서 스케이트를 다 타고.(보호장구와 헬멧을 착용해보며) 돈 쓰게 만드는 기술도 가지가지여. 앉아서 이런 거만 연구하는 놈들 천지니. 어뗘. 순이야. 아빠도 멋져 보이냐? 아빠도 소싯적에 얼음지치기 한가닥 했다. 외날 썰매 모르지? 우선 중심을 잘 잡고…. 긴 꼬챙이 하나를 다리 사이로 넣고 얼음을 팍팍 찍으면서 달리는 거여. 대가미 방죽에선 아빠가 일등했다. 니 이렇게 차려입고 씽씽 달리면 동네 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것다. 순이야, 얼른 들어온나. 인제 호른을 필요로 하는 나이트클럽은 없다. 그러니 아빠는 내일이면 배 타러 가야헌다. 한동안 못 보니까 얼른 와. (시계를 흘낏 보다) 아니 근데 이누무 지지배가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여. 내 이년을….(휴대전화 메시지를 발견하고) 얼래, 이게 뭐여.“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려 근데.“아빠. 로데오광장 빨리….” 20분전에 온 거네. 로데오 광장? 하하- 요것이 눈치 하난 빨라요. 거기서 스케이트 타고 싶다 이거지? 다른 애들처럼. 오냐. 아빠가 가마. 근데 얘가 스케이트 사논 걸 어떻게 알았지? 돈 없다고 등짝을 후려패서 학교 보내 놨더니…. 하여튼 귀신이여 귀신.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 나가는 남자. 그 열린 문으로 여자가 은밀하게 들어와, 가구들 뒤에 무엇인가를 붙여 놓는다. 감별사의 청진기를 보고 자기 심장에 대본다.) 소리:(심장박동) “쿵 쿵 쿵 쿵-” (남자가 돌아오는 기척. 얼른 복숭아 가져왔던 접시를 드는 여자. 남자가 힘없이 들어선다.) 여자:어머! 오셨네요. 문이 열려 있기에 접시를 가져가려고요. 아깐 제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어디 산책 다녀오세요? 남자:근처 로데오 광장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더군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즐거워지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지요. 웬 처녀가 글쎄 나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자:어머나, 그래서요. 남자:후후후. 당황스러워 혼났습니다. 여자:그 아가씨 아빠가 감별사님과 비슷한가 보죠. 남자:하긴…. 그 아가씨도 우리 딸애와 비슷하긴 했어요. 여자:따님이 있으세요? 남자:……. 여자:참, 그거 잘 타세요? 스케이트요. 남자:내 스케이트가 아닙니다. 여자:누구한테 선물하시려나 보죠? 남자:……. 여자:호호- 말씀하기 싫으신가 봐요.(문으로 가며) 그럼 또 뵙겠습니다. 남자:일년 전, 휴대전화 소리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죠? 소리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금방 사라지거든요. 여자:감별사님. 좋은 이웃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여자 나가면, 남자는 박스를 옆에 낀 채 홀로 서성인다. 조명 분위기 다시 바뀐다.) 남자:어휴! 몇 분 차이로 이게 뭐여. 속 터져. 쬐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선.(박스를 놓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며) 이누무 기지배는 대체 어딜 간 거여. 소리:“삐- 삐- 새 메시지는 없습니다.” 남자:아! 눈부시다. 눈부셔. 왜 이리 눈이 부시지? 불을 끌 수도 없고. 순이야, 어여 연락 좀 해라. 아빠 이러다가 죽는다잉. 일주일째 이러고 잠 한숨 못 잤다.(침대에 드러누우며) 이러다 아빠 죽겠다. 순이야. 순이야…. 소리:(진동소음)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남자:(벌떡 일어나 휴대전화 확인하며) 아니잖아. 어디지? 아래층 201호여! 죽겠네.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뛰어가는 남자. 문을 다급히 두드리는 소리) 남자(E):여보세요,201호 아저씨! 전화 왔어요- 얼른 휴대전화 좀 받아 봐요. 201호(E):돌겠네! 안 받으려던 건데. 알았다니까- (휴대전화 진동소리 겨우 멈춘다. 다시 들어오는 남자) 남자:싸가지 없는 놈. 끝까지 안 받네. 매너들 없어. 소리:(TV 끝나는 소리)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치이-” 남자:302호 미친놈. 오늘도 저 모양이야. 꺼라. 제발 좀 꺼라. 바로 옆방에서 이러면 어떡하냐.(앞쪽 베란다로 나와서) 302호- 텔레비전 좀 끄쇼. 시끄러워 살 수가 있나. 이웃들(E):조용히 좀 해요. 남자:302호, 조용히 하라잖아요∼ 이웃들(E):301호, 당신이 조용히 해∼ 당신 때문에 못자. 아저씨 날마다 이게 뭐예요. 남자:이런 우라질. 귓구멍이 거꾸로 뚫렸나. 나는 니들 때문에 못자- 아! 눈이 터질 것 같네. 그래도 안 끈다 이거지. 니기미! 대한사람 살아야 길이 보전도 된다. (야구방망이 들고 나가는 남자.302호 문 부서지는 소리. 비명소리. 순찰차 사이렌 소리) (위층 401호 여자는 나지막이 뭔가를 읊조린다.) 여자:“쓱쓱 만져 주면…뭐든지 다 낫는다…궁글궁글 쓸어 주면…뭐든지 다 낫는다….”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 ●제2장 무대 밝아지면, 아래층 301호 침대에 우울하게 앉아있는 남자.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귀마개를 하고 있다. 말씨가 점차로 사투리 운율로 변해간다. 남자:백두산이 다 닳기 전에, 대한사람 살고 보자는데 웬 말들이 많은 겨.(수건을 풀며) 돌아와 보니 문은 닫혀있고 불은 꺼져 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거여. 그냥 빈집이여. 빈집.(귀마개를 벗으며) 기껏해야 한 삼일이면 됐지. 왜 삼일이 열흘 되고 달포 되고 한달 되느냔 말이여. 왜 삼일이 석달 되고 석삼년 되느냔 말이지. 이상타. 참말 이상한 일이다. 어무이는 금가락지 끼워주면 훨훨 날아간다 허지, 딸년은 스케이트 있어야 씽씽 달려간다 하지. 아! 나도 편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부산으로 가서 외항선 탔다 했지? 석달 열흘만 꾹 참고 다녀오자. 어무이도 없지. 딸자식도 없지. 여편네도 없지∼ 허참, 귀신이 곡할 노릇인 거여, 시방 이것이. 태평양 넘어 동지나해 건너 알류산 열도 거쳐 부산항에 도착, 광복동 시장에서 딸년 인라인스케이트하고 어무이 서돈짜리 금가락지 서둘러 해가지고 와보이, 종적이 묘연한 것이여. 여편네 줄려고 야들야들한 속곳 둘둘 말아 끼고 왔는디, 입을 사람이 없는 거여. 세상 참 얄궂네. 인생 허망타. 어무이도 없지, 딸자식도 없지. 여편네도 없지∼ 소리:(진동음)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얼른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남자.“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라는 안내음. 실망하는 남자. 이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 남자가 문을 여니 의뢰인들이 의뢰품들을 들고 들어온다.) 의뢰인들:좋은 아침입니다. 의뢰인1:(전자레인지를 탁자에 놓고) 부품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자:(청진기로 검진하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흠…흠… 소리:(전자레인지) “위이이잉-” 남자 : 모터가 낡았으니 교체하세요. 다음. 의뢰인2:(책들을 놓으며) 신나라출판사의 기획 시리즈 견본품인데요. 남자:(책장 넘기며) 책도 소리를 가집니다. 종이 지질에 따라서 소리는 천차만별입니다. 소리:(종이) “펄렁 펄렁… 팔랑 팔랑… 풀렁 풀렁…” 남자:이건 모조지, 이건 아트지, 이건 하드보드에 코팅까지. 아트지는 반짝 반짝! 모조지는 서글 서글! 3데시벨의 편차가 있네요.(표지를 보며) “세계의 미스터리”라…. 이 제목에는 모조지보단 아트지가 어울립니다. 미스터리는 반짝반짝해야죠. (여자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몰래 엿본다.) 의뢰인3:(돌멩이 2개를 놓으며) 심산인테리어에서 의뢰한 겁니다. 남자:(돌을 살피며) 흥미 있는 소재이군요. 돌의 소리는 가장 심원한 소리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재질이니까요. 돌의 소리는 음악의 근본입니다. 돌로 만든 악기인 편경의 소리는 국악의 표준 음정이죠.(돌을 부딪쳐 본다.) 오만년의 역사를 간직한 소리입니다. 소리:(돌) “딱 딱 딱 딱-” 의뢰인들:정말 탁견이십니다. 남자:저 전자레인지는 전에도 감별해 드린 건데요. 저를 시험하시나요? 의뢰인1:예? 오해십니다. 남자:칠일 전에도 해드렸고, 한 달 전에도 했습니다. 의뢰인1:청진기가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기계든 인간이든 자기만의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죠. 청진기는 거짓을 모릅니다. 여자:(앞으로 나서며) 감별사님의 판단을 믿지 못하시나요? 의뢰인1:음…. 출고담당 직원의 미스인가 봅니다. 확인해 보죠. 여자:(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어머나! 안녕하세요. 호호호- 문이 열려있지 뭐예요. 의뢰인1:소리 감별은 회사의 일급 기밀입니다. 여자:한심한 출고담당 재교육도 중요하죠. 의뢰인1:(전자레인지 들고 나가며) 성질도 급하시고 변덕도 심하시군요. 흠, 흠. 여자:오늘의 분석은 어땠나요? 의뢰인2:출판사가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의뢰인2,3도 나간다. 남자가 문을 잠그더니, 얼른 여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간다.) 남자:혹시 이 아파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 못하셨나요? 여자:글쎄요? 남자:이사 온 뒤로 다른 주민들 보신 적 있나요? 여자:네… 봤죠. 남자:이상하지 않던가요? 여자:네. 남자:언제부터인가 이 아파트 주민들이 잠만 자고 있어요. 모든 활동이 중지된 겁니다.201호는 휴대전화를 안 받는 버릇이 있고,302호는 지가 무슨 애국시민이라고 날마다 애국가를 시청하더니 모두 조용해 진 겁니다. 여자:에이, 고급 아파트는 원래 조용하잖아요. 남자:(눈치를 보더니 말소리를 죽이며) 나는 저 의뢰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여자:(놀라며)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뭔가 수상쩍은 음모가 있어요. 의뢰 물품이 변하지 않고 있어요. 여자:날마다 똑같아요? 남자:일주일 주기로 반복되고 있어요. 예전엔 한달 주기였죠.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나는 새로운 소리를 원합니다. 여자:좋아하는 음악은 자꾸 듣기도 하잖아요. 가령 호른 연주는 어때요? 남자:모차르트 호른협주곡 3번 2악장 로만자… 호른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날마다 다릅니다.(청진기 곡선음관을 어루만지며) 호른을 통해서 들어야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누가 날마다 같은 구름을 보고 싶겠소. 누가 날마다 같은 바람을 맞고 싶겠소. 출고담당 직원의 미스라고 둘러대지만 실수가 아닙니다. 치밀하게 반복되는 순환시스템이죠.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이 세상이 죽어가는 것처럼. 저들이 소리를 뺐어가는 겁니다. 아…. 이러다가는 당신의 잠꼬대마저 뺐어갈지도 몰라요. 여자:어젯밤에 제가 잠꼬대했나요? 남자:(흉내 낸다.) “쓱쓱 만져 주면… 궁글궁글 쓸어 주면…” 여자:어머, 어머! 저를 너무 속속들이 아시네.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가야겠어요. 남자:어젯밤에 당신의 잠꼬대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 여자:네? 남자:잠꼬대 소린 정말 너무 오랜만에 들어 봤어요. 지금 이 아파트에서 당신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가버린다면 당신도 잃어버릴 것만 같아요. 여기 계세요. 여긴 안전하니까. 여자:(남자를 경계하며)감별사님은 소리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남자:사실은 소리가 무서워요. 여자:왜요? 남자:너무 진실하니까. (이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고조되는 온갖 소리들. 서로 뒤섞여 아비규환의 아우성처럼 난무한다.) 소리:“찌르르르… 출렁출렁… 저벅저벅… 쿵쾅쿵쾅… 우웅우웅… 영호야∼영호야∼” 여자:이게 뭐야?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남자:(귀를 막으며) 아! 아! 저리가. 듣기 싫어. 씨끄러. 듣기 싫어. 아아악- (남자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한다. 나가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야구방망이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으며 발광하다가 쓰러진다. 여자는 놀라서 남자를 부둥켜안는다. 소리들이 그친다.) 여자:여보… 여보! (병원 가운을 입은 의뢰인들이 나타난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침대에 뉘고 벨트로 사지를 결박한다. 남자를 청진기로 진단하는 의뢰인1) 여자:아… 어떻게 된 거죠. 무서워요. 무슨 소리였죠? 그이는 괜찮은가요? 의뢰인2:안심하세요. 본 특병동의 소리치료 시스템입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죠. 의뢰인1:상태가 좋지 않아.2단계 프로그램도 실패야. 발작 증세가 멎지를 않네.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내일 수술 일정 잡도록 해. 의뢰인3:근데 보호자께서 동의서에 아직 서명을…. 의뢰인1:그깟 동의서 하나를 여태 못 받아? (여자에게) 똑바로 들으세요. 내일도 서명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할 겁니다.(의뢰인2에게) 자네 수련의가 왜 그 모양이야. 그럴 거면 딴 병원으로 가. 내가 이젠 환자한테 훈계까지 받아야 돼? 내가 저를 시험한다고? 미친놈이 입만 살아서. 한데… 어떻게 알았지? 의뢰인2:환자는 지각능력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에만 몰두하는 주의력 증가 기제가 너무 왕성해서 그렇습니다. 환자의 소리 분석은 정상입니다. 의뢰인1:믹서기 회사에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잖아. 의뢰인2:그건 생산부장의 말이고요. 오늘 아침에 마케팅팀장과 통화했는데 좋은 지적이라고 반기더군요.2차 분석도 의뢰하겠답니다. 일시적인 “해리성 황홀경”입니다. 의뢰인1:속단하지 말라고 했지? 자네의 진단은 정서적인 판단이 앞서고 있어. 의뢰인2:“뇌손상에 의한 퇴행성 기억장애”란 과장님의 진단은 측두엽의 손상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거 아닙니까? (쓰레기통에서 부서진 호른 나팔을 꺼내서 안고 있던 여자가 나선다.) 여자:선생님, 우리 그이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의뢰인1:미치겠네 정말. 아까 발작하는 거 못 봤어요? 가족도 몰라보잖아요. 여자:예전에 연주하던 곡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냈단 말이에요. 의뢰인1:단편적인 기억 정도는 모든 환자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부적뭉치를 던지며) 이게 뭡니까? 이런 식으로 맘대로 행동하면 퇴거조치시킬 겁니다. 여자:이 부적에 어떤 힘이 있다고 믿으세요? 미신에 불과하다면서요? 의뢰인1:그게 아니고…. 의사의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 아닙니까. 협조요. 협조! 여자:협조했잖아요. 가구며 소지품들 가져다가 집안처럼 꾸며놓고… 순이더러 로데오 광장에서 아빠를 기다리라고 해서 그렇게 했잖아요. 근데 별 이상도 없는 이가 왜 딸을 몰라보나요? 왜 아내도 몰라보나요? 그저 지쳐서 그런 걸 거예요. 집에 가서 잘 요양하면… 고요한 호숫가를 찾아서 호른도 불면서 푹 쉬면 나아질 거예요. 의뢰인1:흥, 호른 분다고 치료가 되면 병원이 뭐하러 있어요! 도대체 의사를 뭘로 보는 거요? 기물을 파손하고 상해를 입힌 환자는 완치되기 전엔 퇴원할 수 없습니다. 내일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세요.(의뢰인3에게) 진정제 5밀리그램…. 아니 7밀리그램 준비하고, 면회는 금지시켜. (의뢰인1,3 나간다. 흐느끼며 부적을 줍는 여자. 창문으로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의뢰인1이 보인다.) 여자:흑흑흑…. 날더러 어떡하라고요. 기다려라. 기다려라…. 벌써 세 달이 됐어요. 의뢰인2:왜 그토록 소리에 집착하는지 그 압제의 요인을 찾아야 하는데…. 기억 과잉이 문제입니다. 뇌의 측두엽에 너무 많은 소리의 기억들이 축적되어서, 컴퓨터가 다운되듯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치의께선 손상된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발작이 계속된다고 보십니다. 삭제키를 눌러야 리소스 부족에서 해방되니까요. 여자:그러면 과거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서요. 의뢰인2:대신 새 기억은 지킬 수 있습니다. 여자:그토록 찾던 딸이 눈앞에 나타나도 못 알아보는데, 앞으론 영원히 그렇게 되겠죠? 이 빨간 구두요… 15년 된 캥거루가죽 맞아요. 저이가 나이트밴드 아르바이트 뛰어서 첫 월급으로 사준 우리 결혼 선물이죠. 이거 신고 난생 처음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어요. 이 호른은 방직공장 월급 일년을 꼬박 모아서 제가 사준 거예요.(호른을 쓰다듬는 여자. 창가에서 귀 기울이는 의뢰인1) 서귀포 밤바다는 그날 따라 왜 그렇게 고요했는지, 저이가 부는 호른 소리가 수평선 끝까지 울려 퍼졌어요.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3번 2악장 알레그로. 그게 저이가 아는 유일한 연주곡이죠. 순이를 낳게 되어서 사범대학을 그만뒀으니… 이 모든 걸 다 잊어버리겠죠? 의뢰인2:아마 그렇게 되겠죠. 여자:그렇게 되면, 우린 이 세상 안 산 거나 같네요. 시골 고등학교 밴드부 남학생이 부는 호른 소리에 바람나 쫓아다니다가…. 외아들 사범학교 나와 선상님이 평생소원이던 홀어머니 가슴에 못질하고, 남자 앞길 망쳤다고 원망들은 촌년이… 저승 가서 어머니까지 못 알아보는 산송장 만들어 놨다는 소린 죽어두 들을 순 없네유. 차라리 청진기 쓰고 세상의 소리에 미쳐서 사는 게 나아요. 저인 소리를 사랑했으니까. 저이 어머니도 소리를 벗삼아 사셨으니 하늘나라에선 서로 알아보겠지요. 의뢰인2:사모님…. 여자:선생님도 저이가 미쳤다고 보세요? 의뢰인2:의사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하나 있지요. 알 수 없습니다…. (의뢰인3이 주사기 가지고 들어온다. 의뢰인2가 여자를 부축해 나간다. 의뢰인3이 주사할 준비를 하는데, 창문에서 지켜보던 의뢰인1이 들어와서 부서진 호른을 들어본다.) 의뢰인1:아까 몇 밀리그램이라 했지? (쳐다보는 의뢰인3) 3밀리그램만 투여해. 의뢰인3:3밀리요? 네…. (주사기 용량을 조절해서 남자의 팔에 주사 놓고 나가는 의뢰인3) 의뢰인1:길영호씨. 지금 혼자서 호숫가를 거닐고 있소? (입으로 모차르트 호른협주곡 3번을 불며 빠져든다.) 빠밤 빠바바밤 바밤바 빠바밤- 빠밤 빠바바밤 바밤바 빠바밤- (이층 401호로 힘없이 들어서는 여자. 부적 뭉치를 탁자에 놓다가 세어본다.) 여자:하나, 둘, 셋, 넷…. 분명 다섯장을 붙였는데. 한 장이 살아있어! (암전) (무대 밝아지면, 병실 분위기가 나는 아래층 301호. 환자복이 입혀진 남자가 침대 벨트에 묶여있고, 의뢰인2를 따라 여자와 딸이 들어선다.) 의뢰인2:휴, 제가 미친 거 같네요. 주치의가 회진오시기 전에 끝내셔야 합니다. 여자:고맙습니다. 순이야, 어서. 딸:아빠! 제가 왔어요. 어째 잠만 자는 거야. 흑흑흑…. 아빠 일어나세요. 눈떠- 아빠- 여자:여보! 순이가 돌아왔어요. 이제 일어나세요. 다 잘되었어요. 저도 직장 잡아 돈벌이해요. 지난 일은 잊고, 정신 좀 차리세요. (여자와 딸이 벨트를 풀고, 사력을 다해 남자를 일으켜 세운다.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고 무너져 태아처럼 웅크리는 남자) 딸:흑흑흑…. 엄만 대체 무얼 한 거야! 아빠가 저리 되도록. 여자:엄만 안 해본 거 없다. 귀신 쫓는다는 복숭아도 들이고, 부적도 붙여보고, 약손으로 아픈 데 쓸어주시던 할머니 소리도 해보고…. 너는 뭘 하고 있었어. 이년아, 니 아빠 이리된 것 다 너 때문이다. 나가버릴 거면 그냥 나가지 메시지는 왜 남겨! 딸:난 그냥…. 아빠가 기다릴 것 같아서…. 여자:그걸 아는 년이 세 달이나 안 들어와! 니 메시지 못 들었다고, 또 올지도 모르니까 지켜봐야 한다고, 휴대전화에서 눈도 못 떼고 일주일을 뜬눈으로 지새우셨다. 그러다 결국 쓰러지신 겨. 산송장 되신 겨. 집으로 가요, 여보. (남자의 환자복 윗도리를 벗기고 몸을 쓸어주며 사복으로 갈아입히는 여자와 딸.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소리를 하게 된다.) 여자:“우리 아기 예쁜 배, 할미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할머니:“우리 아기 동그란 배, 할미 손은 약손. 궁글궁글 쓸어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소리를 받아 부르는 할머니의 환영. 문으로 들어와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할머니:어여 일어나거라. 영호야. 된장찌개에 밥 말아먹고 어여 핵교 가야지. 온나 온나. 어여…(미소 짓는 남자) 우리 외동이, 온나 온나. 딸:엄마! 아빠가 웃어. 여자:어디? 정말! 여보, 어디 좋은 곳 유람이라두 하는 게유? 할머니:아유, 찌린내. 요 녀석 바짝 섰네. 쯧쯧쯧. 이부자리는 한강이구. 늦게까지 숙제하더니 곤했던 게여. 그려 됐다. 옷 갈아입자. 아부지 모르시게 저리 치워놨다. 인나렴. (여자와 딸이 남자의 아랫도리도 사복으로 갈아입힌다. 할머니는 싱크대로 가서 도마를 꺼내 칼자루 끝동으로 마늘을 다진다.) 소리:(마늘 다지는) “쫑 쫑 쫑 쫑-” 여자: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눈을 떠요. 딸:아빠. 눈 떠.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흑. 아빠. 제발! 남자:불…. 불이여…. 딸:뭔 불이 나? 남자:집에 불났다. 어쪄 어무이. 할머니:간밤에 어매가 호롱불 꺼놨다. 걱정 말그라, 불 안 났으니. 밥 다됐다. 소리:(찌개 끓는) “보글 보글 보글 보글….” (마침내 힘없이 눈 뜨는 남자) 할머니:됐다. 눈 떴다! 딸:아빠! 여자:여보! 할머니:어매는 좀 쉴란다. (이젠 할머니가 기력이 다한 듯 눕는다. 중얼거리며 그 옆으로 다시 무너지는 남자) 남자:왜 이리 자꾸 졸리지. 어무이 괜찮으셔유? 주무시는가베. 순이야, 엄마는 일 나갔니? 밥은 먹었니? 그래 아빠 잠깐 눈 좀 붙였다 일어날 테니 뭔 일 있으면 깨우렴. 아주 잠깐이다…. 아빠가 일어나서 떡볶이 해줄게. 설탕도 넣고 달달하게…. (모로 쓰러진 남자 어느새 코를 곤다. 할머니가 부스스 일어나 아들과 손녀를 보더니 천천히 문으로 걸어 나가며 아들을 부른다.) 할머니:애비야…. 영호야! 영호야….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남자) 남자:어무이! 딸:아빠. 꿈에 할머니 봤어? 남자:순이야. 혹시 할머니가 뭐라 하셨니? 딸:언제요? 남자:돌아가시기 전에. 딸:(할머니 목소리로) “애비야…. 영호야! 영호야….” 남자:그래… 맞았어. 어무이가 날 부르는 소리였어.(딸을 안으며) 순이야. 할머니가 아빠를 불러주셨구나. 아빠는 할머니가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가신 줄 알았다. 여보, 어무이가 나를 불러 주셨대. 날 용서하신 거여. 여자:여보, 흑흑흑…. 딸:내가 아빠를 얼마나 깨웠는 줄 알어? 남자:기특한 것. 아빠가 잘못했다. 어무이, 지가 죽일 놈입니다. 여자:아니에요. 지가 죽일 년이에요. 남자:어무이 손은 약손이여. 암…. 그렇구 말구. 딸:할머니 손이 약손? 남자:니 여섯 살 때, 맹장염을 앓았단다. 할머니가 밤새 순이 배를 문질러 주셨대. 할머니 약손으로. 니가 잠이 들어서 새벽이 됐는데, 아빠가 나이트 일 마치고 와보니 이미 혼수상태인 거라. 그래 아빠가 들쳐 업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거여. 딸:애게, 약손이면 맹장도 고쳐야지. 남자:아픈 걸 잊게 해주셨잖니. 그러니 약손이지. 이렇게 배를 쓸어주시면서…. (약손 소리를 함께 부르는 가족. 할머니가 밖에서 창문을 열고 함께 부른다.) 가족:“우리 아기 예쁜 배, 엄마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할머니:“우리 아기 동그란 배” 가족:“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궁글 궁글 쓸어 주면…” (노래하다가 침울하게 그치는 할머니) 할머니:인자 이 손 약발도 다 떨어졌는가부다. 이 손으로 아범 뺐어가려던 저승사자들 다 쫓아 버렸는데 이젠 안 되는가부다. 내 다시는 약손 안 할란다. 남자:어무이, 이참에 그 달랑무 소리도 그만 두세요. 동네 애들이 벌써 순이를 놀린대요. 할머니:내 그리하마…. 달랑무 소리두 안 할란다. (창문을 닫는 할머니. 의뢰인1이 방으로 들어선다. 긴장하는 의뢰인2) 의뢰인2: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어제 2단계 프로그램의 효과인 것 같습니다. 옷은 환자가 갈아입고 싶다고 해서…. 의뢰인1:음…. 잘했구만. 길영호씨. 이제 환청이 들리지 않습니까? 남자:네, 사라졌습니다. 의뢰인님. 의뢰인1:허허허…. 잊으세요. 불필요한 소리들을. 불필요한 기억들을. (의뢰인3이 호른 케이스를 하나 들고 들어온다.) 의뢰인3:지금 도착했습니다. 의뢰인1:(케이스를 남자에게 주며) 퇴원하게 되면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여자:호른이잖아요? 의뢰인1:제가 30년간 가지고 있던 겁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죠. 한적한 호숫가를 찾게 되거든 연락 한번 주세요.(나가며) 한번 들으러 가고 싶군요. 의뢰인2:선생님! 의뢰인1:자네가 “알 수 없습니다.” 하는 순간, 나도 알 수 없어 졌다네. 의사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남자:선생님. 신은 이 수많은 세상의 소리를 어찌 다 들을까요. 의뢰인1:허허허- 다 듣다간 신도 입원해야지요. (마주보고 씩 웃는 그들. 의뢰인들 나간다.) 남자:어머니더러 달랑무 못 파시게 한 그것이 내내 걸리는 거여. 바깥출입도 안 하시구 말수도 적어지더니 그냥 가신 거여. 여자:제 잘못이에요. 동네 푼수들 말만 듣고…. 남자:어무이는 소리 힘으로 사신 겨. 그게 어무이 약손이여. (문이 열린 채다. 그 문으로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어머니가 다시 들어와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뭔가 바람에 날려 쿵- 엎어지는 소리) 할머니:영호니? 영호야- 야가 삼일씩이나 어딜 간 거여. 저게 누구여. 영호지. 어여 어여 온나. 세상에! 야가 못 먹어서 눈이 십리는 들어갔네. 집 놔두구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겨. 들어가 밥 묵자. 엄매가 된장국 끓여놨다.(흰 고무신을 주며) 봐라. 흰 고무신 사놨다. 따습지? 어여 신어봐. (흰 고무신을 받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가, 가슴에 끌어안고 웅크리는 남자) 소리:(소년) 흰 고무신 때 타면 어쩐대유. 소리:(할머니) 영호야 자니? 엄매는 그깟 금가락지 없어도 된다. 영호만 있으면 된다. 소리:(소년) 어무이. 흰 고무신… 내 눈 내리면 신을란다. 소리:(눈 밟는) “뽀작 뽀작 뽀작 뽀작” 할머니:멋지다. 헌헌장부 났다. 남자: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것다잉. 손이 얼은 것 좀 봐. 요리로 들어와. 어여. (어느새 인라인 스케이트 신고 헬멧 쓰고 서있는 딸. 아빠 엄마 있는 침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문가에서 고개 끄덕이던 할머니, 달랑무 팔러 가신다.) 할머니:달랑무∼ 있어. 푸성귀나∼ 달랑무∼ 있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지며 암전. ■ 희곡 당선소감 게으른 며느리에게 시켜야 할 일은 두부 만드는 일이랍니다. 느긋하게 일해야 맛있는 두부가 만들어진다죠. 군대 지휘관도 게으른 사람이 좋답니다. 게으른 천재여야지 괜히 아랫사람 생고생 시키지 않는다는 건데…. 요건 사실 게으른 아랫사람들의 소망이죠. 부지런한 천재 즉 이순신 같은 양반 만났다간 그저 죽었구나 하고 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지요. 안 뛰면 바로 곤장 맞지요. 난중일기 쬐금 보니까,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 어른 매일 하는 일이 순찰 나가서 하급지휘관 곤장 치는 게 주업무이시더군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으니 백전백승의 신화를 창조하셨던 게죠. 선친께서 제 원래 이름자에 늦을 만(晩)자 하나를 넣어주신 덕택에 이렇게 느즈막히 입문하게 되었나 봅니다. 작은 상 하나를 펴놓으시고 늘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셨던 아버님께서는 교단 은퇴 후에 스스로 책 몇 권을 출간하셨죠. 그러곤 집안잔치가 있으면 친구 분들께 그 책을 선물하던 낙으로 사셨습니다. 평생 글을 쓰시던 열정은 정말 프로작가 못지않으셨지요. 이제부턴 저도 작심하고 자세 가다듬어 열심히 쓰겠습니다. 작은 상 앞이 아니라 PC 앞이 되겠네요. 축하해주는 벗님들, 사랑하는 영두와 영소, 그리고 가족들. 더불어 삶의 위안과 기쁨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아울러 미흡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약력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중앙대 교육대학원 무용 석사과정 ■ 심사평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지 응모작들 중에서도 투신자살, 노숙자, 입시부정, 로또복권 등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담은 작품들이 유난히 많았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그리고 각종 드라마 매체에 많이 노출된 탓인지 대화체의 이야기 구사에는 능숙해졌으나 막상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자들의 손에 남은 희곡들은 박만호의 ‘청진기’, 김성제의 ‘바다로 가는 성북행’, 그리고 류세균의 ‘달 속의 그늘’이었다. 공사판의 살인사건을 그린 ‘달 속의 그늘’은 밑바닥 인생들의 성격설정이나 대사구사에 능숙했으나 극 구성이 너무 평이하고 결말 부분을 배영감의 감상적인 인생고백으로 가져간 점이 지적되었다. 지하철 승강장을 배경으로 해서 사회적으로, 성적으로 상처받고 억압된 두 모자의 아픈 일상을 포착해낸 ‘바다로 가는 성북행’은 살아있는 독특한 정서가 심사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식당 파출부인 엄마와, 성전환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돈벌러 가는 여성적 아들의 아픔을 과장되지 않은 일상적 대사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극적 상황과 행동을 충분히 연극적으로 객관화시키지 못했고 극이 아직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있다. 현대생활을 지배하는 각종 소음과 어린 날에 듣던 정겨운 소리들을 대비시킨 ‘청진기’는 ‘소리’를 극적으로 전경화시킨다는 아이디어나, 신경증환자인 남편을 아내가 의료진과 공모해서 연극적으로 치유한다는 설정 등이 충분히 연극적이며 대사나 극 전개 기법도 상당히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비인간성/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라는 대비가 도식적이며, 극전개의 생략과 비약이 과도한 점에서 어느 기성작가를 연상시킨다는 점이 다소 걸렸다. 결국 각각 장단점을 갖춘 ‘청진기’와 ‘바다‘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다가 그 나름의 완성도와 무대적 상상력을 높이 사 ‘청진기’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철리(연출가)·김방옥(평론가)
  • [문학이 머문 풍경]정지용시인의 고향 ‘옥천’

    [문학이 머문 풍경]정지용시인의 고향 ‘옥천’

    “남한에 있는 아버님을 만나고 싶어요.” 2001년 이산가족 상봉신청때 북한에 있던 정지용(鄭芝溶·1902∼50) 시인의 셋째아들은 상봉대상자에 아버지를 포함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한국전쟁 당시 시인이 납북된 뒤 아버지를 찾으러 간 셋째아들은 아버지의 행방을 알지도 못한 채 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한다. 시인의 가족사 자체에 분단의 비극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셈이다. 정 시인의 사망도 평양감옥에 함께 있다 탈출한 사람이 “감옥에 폭격을 할 때 희생이 됐을 거다.”라고 말해 그럴 것으로 추측케 할 뿐 정확하게 언제, 어떤 과정으로 숨졌는지는 미스터리다. ●박제화된 흔적들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에는 초가로 지어진 생가가 있다.1988년 정지용이 해금된 뒤 시인을 기리는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이가 살고 있던 옥천읍 하계리 옛 생가 부지를 매입, 지난 97년 4월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시인의 큰아들 구관씨가 작고하기 전 그의 고증을 거쳐 건립됐다. 단장된 집옆에는 시인의 동상이 서 있고 물레방아도 만들어 놓았다. 대표시 ‘향수’에 나오듯 생가 앞에는 개천이 있다. 마을 주민이나 어린이들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하는 이 시구처럼 개천을 모두 ‘실개천’이라 불렀다. 부근에는 시인이 다니던 죽향초등학교가 있다. 운동장 한쪽에 일본식 옛 교사 한동이 서 있다. 지난해 6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57호로 지정한 교사앞 표지석에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을 배출했다.’고 썼다.4학년 박주영(10)양은 “정지용 시인이 우리학교를 나왔다는 게 자랑스럽고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1926년 건립돼 정 시인이 공부했던 교실은 아니지만 자기 시를 판금조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 같은 학교출신이라는 게 좀 아이러니하다. ●몰락한 충청도 양반 구관씨는 작고하기 전 옥천 삼양초 노한나(31) 교사와의 대화에서 “구한말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운좋게 근대교육을 받았지만 유교윤리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구관씨는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자식에게는 무척 엄격했다.”고 전했다. 시인의 이화여대 제자인 유수인씨도 “두루마기에 회색 명주목도리만 하고 다닐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았고 깨끗했다.”면서 “돈 한푼 없어도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매달리는 여제자들을 데리고 가 외상 밥을 사주는 허풍기도 좀 있었다.”고 말했다. 시인이 고향에 산 것은 휘문고에 들어가기 전인 17세까지. 휘문고 교사도 했고 이화여대 교수로도 일했다. 구관씨는 “성당과 학교, 시 쓰는 것밖에 모르던 양반으로 항상 머리에 시가 들어서 밥을 먹는지 반찬을 먹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성질이 굉장히 급해 별명이 ‘신경통’으로 불렸다고 한다. 성격이 활달했고 해학이 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김영랑, 유치환 등 시인과 친했고 청록파 시인을 추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박목월에 대해서는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고 격찬했다. 또 ‘보리피리’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이름과 이희승의 ‘일석’이란 호를 지어줄 정도로 이름짓는 일에도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정 시인이 졸업한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동상과 시비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인석 옥천문화원장은 “최근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조동일 계명대 교수 등과 함께 이 대학을 방문, 내년 가을까지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 정지용 동상과 시비 등을 세우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향 충북 옥천에서는 88년부터 정지용 문학축제’를 열어오고 있다. 문학상도 이듬해부터 열리고 있고, 신인문학상과 청소년문학상도 올해 10회와 6회째를 각각 맞았다. 매년 8∼9월 중국 옌볜에서 지용제 및 음악제가 열리고 있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부인과 큰아들·딸은 남한에, 둘째·셋째아들은 북한에 갈갈이 찢어져 살았지만 정지용 시인의 향기는 옥천군체육공원 옹벽을 시가 새겨진 돌로 장식할 정도로 고향에 진하게 남아 있다. 옥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경주박물관 유물관리 ‘구멍’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던 유물이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문화재 보관 및 관리에 허점을 드러냈다. 특히 경주박물관은 이같은 사실의 외부 노출을 우려,2개월여 동안 내부 단속과 함께 은폐해 온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 26일 경주지역 문화계에 따르면 경주박물관이 지난 10월 말 전체 소장유물에 대한 실사작업 과정에서 박물관 부지내 경주문화재연구소 앞 잔디밭에 전시됐던 석인상(石人像) 1점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했다. 도난당한 석인상(높이 50㎝, 폭 10㎝ 가량)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양반 가문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던 일종의 호석(護石)이다. 그러나 경주박물관은 2002년 5월 소장유물 실사를 한 뒤 2년 5개월만에 이번 실사를 하기까지 석인상이 언제 도난됐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경주박물관은 최근 경찰에 도난시기를 막연하게 ‘2002년 5월에서 2004년 10월 어간’으로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경주박물관측은 유물 도난 사실을 경찰에 수사를 의뢰 하면서도 내부 단속과 함께 이같은 사실을 공개치 않아 은폐 의혹을 사고 있다.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도난당한 유물은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는 아니며 민예품 수준”이라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대게 먹을까 과메기 먹을까

    대게 먹을까 과메기 먹을까

    대게 VS 과메기 살튀기는 속살전쟁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동해안은 만선의 깃발이 드높다. 다리에 살이 꽉 차오른 대게를 실어나르는 어부의 얼굴에도, 씹을수록 고소한 과메기를 말리는 덕장에서 일하는 아낙네의 얼굴에도 해뜨는 곳, 동해의 웃음이 있다. 곰치와 도루묵, 포항물회와 영덕막회도 이곳에선 더욱달착지근하다. 이 겨울에는 동해안 남부쪽으로 가기가 한결 가까워졌다.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최근에 개통된 까닭이다. 스트레스까지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동해로 떠나보자. 포항 · 영덕 이기철 한준규 기자 chuli@seoul.co.kr ■영덕 싱싱탱탱 대게잡이 동승기 지난 8일 새벽 4시, 경북 영덕의 대진항.“그만 일어나이소.”라는 굵은 목소리에 잠이 깼다. 전날 대게잡이 배를 동승, 취재하기로 하고 유신호(9.77t)선장 김택열(44)씨 댁에서 눈을 붙였던 것이다. 군대시절 신병처럼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숙소를 나섰다. 나름대로 옷을 두껍게 입었지만 칼바람이 그대로 얼굴을 때리고 파고들었다. 유신호에 오르자, 선장 김씨는 엔진 키를 돌렸다. 힘찬 시동과 함께 배는 미끄러지듯 포구를 빠져나왔다. 불빛을 밝힌 다른 배들도 뒤따랐다. 모두 대게잡이로 출항하는 배다. 칠흑같이 어둔 바다, 하지만 서울 도심에선 보기 힘든 별만 영롱했다.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선장 김씨는 “이리 들어가이소.”하며 선장실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내실에는 난로가 있었지만 스위치를 암만 당겨도 불이 붙지 않았다. “저기요 이거 불이 안 켜지는데요.”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경상도 ‘사나이’는 “아, 가스가 떨어져 삔네, 낭패네…. 추워도 좀 참으이소.”하며 무뚝뚝하게 키를 돌렸다. ‘으미 추운 거.’ 한 시간을 추위에 떨다 갑판으로 나왔다. 우려했던 배멀미가 순식간에 몰려왔다.‘참아야 하느니라….’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어둠이 가시며 동녘에서는 서서히 붉은 물이 들었다. 아침해가 떠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운행에 가려 일출을 못봐 안타까웠다.11월부터 다음해 5월말까지 대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11월에는 속이 꽉 차지 않아 어민들은 한 달을 기다려 12월부터 본격적인 대게잡이를 한다는 것이 선장 김씨의 이야기였다. 오전 7시, 유신호가 속도를 줄이자 선원들이 부표를 건져 올렸다. 그러고는 줄을 감았다. 이 해역은 수심 430m의 깊은 바다로 대게의 씨알이 굵다고 한다. 슬슬 그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빈 그물이다. 선장 김씨는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갑판에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선장 김씨에게 다가갔다.“누군가 그물을 건드린 것 같네. 그물이 엉켜 있어.”라며 “아마 오징어배가 그물을 들었다 놓은 모양이야.”라며 한숨을 내쉰다. 아니나 다를까. 그물이 뒤죽박죽이다. 오징어 채낚기 바늘도 걸려 있다. 그래도 계속 그물을 걷어 올렸다. 불가사리, 해초류, 말미잘 같은 것만 올라왔다. 첫 작업은 허탕이었다. 파도에 흔들리는 배는 마치 표류하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나의 배멀미는 정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입사 10년차 기자, 배위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대게가 줄줄이 딸려 올라오는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라고 하는 일 걱정이었다. 보통 그물을 바닷속에 15일 이상 쳐 놓아야 게들이 오가다가 붙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바다에 놓아두었던 2000m짜리 그물에 대게 20여 마리가 걸려 올라오다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보통 여기는 수심이 깊어 씨알이 굵은 놈들로 1000여 마리는 올라와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김선장. 같이 타고 있는 입장에서도 미안했다. 내 미안함을 눈치챘는지 사나이는 말했다.“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지. 그물을 통째로 가져가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며 “다른 곳에서 한번 땡겨보입시다.”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출발했다. 오전 10시30분, 그냥 귀항했으면 좋으련만 무심한 유신호는 2m 안팎의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다.12시쯤 다시 부표를 건져올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와, 드디어 대게가 올라왔다.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그물에 걸린 대게가 잇따라 올라온다. 속은 울렁거렸지만 마음이 안정됐다. 한 쪽에서 그물에 엉켜있는 대게를 떼냈다. 그다음 먼저 손으로 대게의 등딱지를 잡고 그물을 벗긴 다음 쑥 잡아당기니 길다란 다리가 그물에서 쏙 빠져나왔다. 신기하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리가 하나라도 떨어지면 상품성이 확 떨어진다. 그래서 작업은 조심스러웠다. 그물에서 떼어낸 대게가 금방 수북하게 쌓였다. 사진을 몇 장 찍고나니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낭만적이기는커녕 이렇게 미워보이긴 처음이다. 오전 일을 망친 어부들에게 빨리 돌아가자고 말할 수도 없고, 정말 바다에 뛰어들어 쉬고 싶었다. 구석에 처박혀 ‘노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선원 하나가 갑자기 애써 잡은 대게를 바다로 집어 던졌다. 힘든 몸을 일으켜 “아저씨, 왜 버려요?”라고 묻자 그는 “대게의 어족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빵게(암게)와 게딱지의 직경이 9㎝가 넘지않는 대게는 다시 놓아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작은 게를 잡았다가 해경에 적발되면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된다고 덧붙였다. 영덕대게는 유충에서 9㎝크기로 자라는데 보통 10년이 걸린단다. 드디어 선장은 귀항을 명령했다. 유신호가 대진항으로 선수를 돌렸다.‘빨리 가자.’내 마음은 벌써 대진항에 닿았다. 육지가 이렇게 그리울 수가. 서너 박스의 대게를 트럭에 옮겨 싣고는 수족관에 하나씩 꺼내 옮겨 놓았다. 이로써 하루의 대게잡이 작업이 끝이다. 이제 게들은 음식점이나 택배로 소비자들 식탁으로 올라갈 것이다. 비록 만선은 아니지만 하루 일을 끝낸 어부들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번졌다. ●맛있는 대게 고르는 법 영덕대게는 일반게인 홍게(붉은게)와는 다르다. 영덕대게는 색깔이 누런 주황색이며 속살이 꽉 차 있다. 그리고 맛을 보면 약간 단맛이 나면서 쫄깃하다. 값싼 수입산과 달리 몸체와 다리에 하얀 반점(따개비와 같은)이 없고 말갛다. 크기가 크다고 맛있는 게가 아니다. 일단 속이 꽉 찬 대게를 고르려면 다리나 배쪽을 살짝 눌러 보면 된다. 배쪽이 거무스름하고 눌렀을 때 단단한 느낌이 들며 등껍질은 살짝 말랑해야 한다. 겉으로 봐서 다리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물이 왔다갔다 하면 상품가치가 없는 물게다. ●대게 요리법 ▲대게는 삶기 전에 반드시 미지근한 물에 담가 두었다가 죽은 것을 확인한 뒤 쪄야 한다. 보통 5∼10분을 담가 놓으면 된다. ▲대게는 삶지 말고 김으로 쪄야 한다. 이때 대게의 배를 반드시 위로 향하도록 놓아야 한다. 그래야 뜨거운 김이 들어가더라도 게장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게 비린내를 없애려면 정종이나 맥주, 혹은 녹차를 물속에 조금 붓는 것이 좋다. ▲보통 30분 정도 강한 불에서 찌고,10분 정도 뜸을 들인다. ● 영덕선 대~게 여기서 먹죠 대진항에서 12년째 영덕대게를 팔고 있는 은하수수산(054-733-6447)은 영덕대게가 가장 싼 집이다. 남편이 15년째 대게잡이 배를 타고 있고, 부인이 식당을 운영해 진짜 영덕대게를 믿고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원래는 도매만 했는데 손님들이 “현지에서 게를 쪄 먹고 싶다.”고 해서 간단한 밑반찬과 스팀기로 대게를 20분 만에 쪄 준다. 가격은 8000원짜리부터 10만원까지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또한 배멀미에 자신있는 사람들은 미리 전화하면 대게잡이 배를 같이 타고 조업을 나갈 수도 있다. 물론 성인에 한한다.3만원을 내면 배에서 조업을 하는 것을 보며 대게도 실컷 먹을 수 있다. 주인 김순옥(011-884-9422)씨는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품질의 대게를 제일 싼 가격에 팔고 있어예.”라면서 “외형이나 시설이 좋은 곳에서 비싸게 드시지 마시고 진짜 드이소.”라고 구수한 사투리로 권했다. 또 대게 음식경연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김씨는 살아있는 게를 구워먹는 게구이와 회로 먹는 게무침, 게조림 등 다양한 음식도 만들어 준다. 주말은 예약이 필수. 전화로 주문하면 택배로 배달해 준다. 이외에도 물곰탕과 밥식해가 유명한 강구항의 청송식당(733-4675), 모듬물회가 유명한 축산항의 울릉도식당(732-4321), 해물탕으로 이름난 영해의 산해식당(732-2401) 등이 있다. ● 서울선 대~게 이집을 찾죠 대게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서민들에겐 만만찮은 가격이 부담스러운 게 단점.4인 가족을 기준으로 20만원은 잡아야 한다. 이왕 게요리를 맛보려면 대형 음식점이 좋다. 재료의 보관이 좋고 조리법이 체계화돼 맛이 안정적이고 메뉴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왕돌잠(723-3433) 게요리 전문점의 대명사격인 왕돌잠은 끊임없이 게요리를 개발하는 것이 발길을 잡는 비결이다. 서울경찰청 후문 쪽의 왕돌잠 입구의 거대한 수조엔 킹크랩·러시아산 대게 등도 있는데 요즘은 영덕산 대게를 내놓는다. 대게찜·게다리카레볶음·게살샐러드·킹크랩찜·대게탕 등 게요리 10여가지가 나오는 뷔페(5만원)가 인상적이다. 게찜과 게살영양밥 등이 나오는 점심 코스 정식(2만원), 여기에 생선회와 맑은 생선국 등이 추가된 저녁 진수성찬(5만원)도 인기다. 논현점(3444-3334)도 있다. ●유빙(403-6400) 입구 양쪽에 늘어선 수족관에서 손님이 직접 게를 고른다. 영덕 대게를 비롯해 태평양산의 킹크랩, 북한산 털게, 러시아산 대게, 코코넛 크랩 등 종류가 다양하다. 푸짐한 살에 쫀득한 맛을 내는 킹크랩을 많이 주문한다. 조리법은 담백하며 부드러운 게살과 달착지근한 게향을 즐기기 가장 좋은 게찜요리를 권한다.1인당 권장량은 600g(5만∼6만원)으로 별도 요금 없이 풀코스를 즐길 수 있다. 문정로데오거리의 우성아파트 인근에 있다. ●무화잠(3443-7852) 무화잠은 왕돌잠·신바위와 함께 대게가 많이 사는 동해 바다속의 섬이다. 대게와 함께 킹크랩을 낸다. 점심에는 돌솥게살비빔밥(1만원)도 있고, 게살초밥(3만원) 등을 많이 찾는다. 킹크랩과 대게 등이 들어가는 해물 샤부샤부(3만원)도 많이 찾는 메뉴다. 대게 찜으론 1인분에 600∼700g(5만원선)을 권한다. 양재점(2057-0001)도 있다. ●코오라(540-4244) 게살을 양념에 푹 절였다가 조리하기 때문에 맛이 진하다. 영덕게 샤부샤부(3만원), 왕덕게 스테이크(이상 2만 2000원), 왕게 샐러드(1만원), 왕게 한마리 코스(4만원)도 있다. 도산사거리 만리장성 맞은편 씨네하우스 옆에 있다. ●대게 셀프 카메라 ‘대게’는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다리의 마디 모양이나 누르스름한 아이보리 빛깔이 얼핏 마른 대나무와 비슷하다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때문에 한자로는 ‘죽해(竹蟹)’라고도 한다. ■포항 구룡포 과메기가 최고 “구롱(룡)포 과매(메)기는 몸에 최고니더. 과매기 무모(먹으면) 감기가 업습디더.”(구룡포의 한 과메기 덕장에서 꽁치를 손질하던 70대 김 할아버지.) “과메기에는 불포화지방산이 많고, 숙취해소에도 좋은 단백질도 풍부하대요. 인공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자연 식품이지요.”(울산에서 과메기를 먹으러 온 김승환씨.) “전라도에 홍어삼합이 있다면 포항에는 과메기가 있습니다. 홍어가 코를 똑 쏘는 아린 맛이 있지만 과메기는 생각보다 느끼하지도 비릿하지도 않습니다.”(과메기를 즐기던 김장석씨.) 경북 포항은 요즘 과메기가 한창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구룡포항의 도로옆 바닷가 빈터마다 과메기를 말리는 덕장이다. 과메기가 언제 시작됐는지 잘 모른다.‘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몇차례 거쳐야 할 만큼 오래됐다. 과메기 덕장을 운영하는 범진상사 김진희씨는 “조선시대 후반에 궁궐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백년은 됐겠지요.”라고 말한다. 수백년도 어림짐작이다. 과메기를 만드는 옛 방식은 청어를 꼰 새끼에 끼워 부엌의 살창에 걸어 두었다. 밥을 지을 때 솔가지의 연기가 빠져 나가는 살창에 걸어 두면 외풍으로 자연스럽게 얼었다 녹았다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솔향까지 뱄다고 한다. 솔향이 밴 청어 과메기가 얼마나 맛 있었으면 궁중에 진상까지 했을까?김삼식(79)씨는 “옛날엔 겨울 밤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역거리(통과메기)껍질을 벗겨서 찢어 생미역에 돌돌말아 초고추장에 푹 찍어 먹었지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1960년대 이후엔 포항 앞바다에서 청어가 잡히지 않아 꽁치를 대신 쓴다. 부엌의 살창이 아니라 해풍이 잘 드는 바닷가에서 과메기 말리는 틀인 ‘대차’에 걸어 얼렸다가 말린다. 대부분 꽁치를 활복, 뼈를 추려 말린다. 이를 ‘찌거리’라한다. 정재덕 구룡포과메기협회장은 “역거리는 말리는데 15일 가량 걸리지만 찌거리는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과메기는 자연에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위생이 무척 중요하다. 좋은 과메기를 고르려면 껍질이 은빛이 나는 것이 좋다. 이런 것을 ‘은광어(銀光魚)’라고 하는데 육질과 신선도 면에서 최고의 품질이다. 누른 빛은 피하는 게 좋다. 배쪽은 터지지 않아야 하고, 꼬리쪽은 너무 말라 단단하거나 물렁하지 않아야 한다. 통과메기는 살아 있을 때의 모양새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 반면 뼈를 추려낸 활복 과메기는 살이 발그스럼하면서 길게 고랑이 진 것이 좋다. 이맘 때면 포항시내 웬만한 음식점에선 과메기를 내놓고 있다. 다행히도 옛날의 청어 과메기를 맛볼 수 있는 곳도 있다. 호미곶 가는 방향의 백경횟집(054-292-7136)은 1월쯤이면 청어를 직접 얼말려 곁들이는 밑반찬으로 내놓는다. 청어 과메기는 꽁치보다 훨신 두텁과 기름진 것이 특징. 포스코의 큰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는 회 전문집으로 회는 한 사람에 2만∼5만원. 꽁치 과메기론 웬만한 미식가들은 동국대병원 맞은편의 다락방(283-1915)을 가장 먼저 꼽는다. 주변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것과는 달리 분위기는 소박하다. 과메기 단일 메뉴로 20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주인 조순옥씨는 “질 좋은 과메기만 받아와 팔고, 좋은 과메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직접 담근다는 초고추장 맛도 깊다. 불친절한 듯 보이지만 투박한 포항 사투리에 정은 오히려 깊다. 과메기 1인분(1만 2000원). 스티로폼 포장과 택배비를 부담하면 포장판매도 한다. 양념과 생미역·파 등의 야채까지 넣어준다. 다락방 인근의 소문난 막창 과메기(275-6410)도 손님들이 찾는다. 또 옛 삼성생명 뒷골목의 해구식당(247-5801)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항 과메기를 팔기 시작한 원조격에 해당하는 식당이다. 주인 지영자씨가 31년 동안 꽁치 과메기만 팔아 왔다. 발그스름한 과메기 살점을 모양좋게 발라내준다. 역시 포장 판매도 한다. 과거엔 과메기를 겨울 한철만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1년 내내 먹을 수 있다. 진공 포장한 다음 영하 20도에서 보관하는 까닭에 여름에도 내놓는다. 현지에서 과메기 20마리 한 두름에 1만원선이다. 포장과 택배비만 부담하면 집으로 배달된다. 택배 문의는 범진상사(284-5371), 구룡포과메기협회(276-2253). ● 물곰탕·고래고기도 맛보세요 과메기가 겨울 한철이라면 포항의 사계절 음식은 단연 물회다. 물회는 200여년전 포항앞바다에서 고기가 너무 많이 올라와 뱃사람들이 젓가락질할 시간이 없어 개발된 음식이란다. 오대양물회식당 박상규(57)씨는 “막 잡아 퍼덕거리는 생선을 썰어 넣고 야채와 고추장을 풀어 훌훌 마신 것이 물회”라며 “물회 생선은 광어나 도다리 등 넓적한 물고기를 쓴다.”고 말했다. 박정출(42)씨는 “물회는 회를 고추장에 으깨듯이 잘 비빈 다음 물을 풀어 먹는다.”고 말했다. 물회의 양념으론 배·상추·잔파 등을 넣고 깨소금·참기름을 얹어 비벼 먹는 것이다. 고추장을 볶아서 만드는 물회 초고추장에 맛의 비법이 달려 있다. 포항의 횟집마다 메뉴판에 물회를 적어두고 있지만 토박이들은 포항시청 뒤쪽의 오대양물회식당(244-7164)을 단연 최고의 물회집으로 꼽는다. 주인 박씨는 “우리집에선 고조할아버지부터 물회를 만들어 먹는 가전 비법대로 만든다.”고 말했다. 수족관엔 납작한 물고기만 넣어두고 있다. 박씨는 “고기를 섞어 넣어 두면 다른 물고기의 회충이 전염돼 회맛이 반감된다.”고 말했다. 이집의 물회(1만 1000원)는 물을 자작하게 부어 숟가락으로 떠먹고 국물은 마시는데 속까지 후련하게 한다. 다른 서비스없이 밑반찬으로 등푸른 생선, 메가리로 만든 밥식해를 내놓는다. 이집외에도 고속버스터미널 후문쪽의 코리아물회(274-0574)와 죽도시장 가는 길목의 새포항물회(241-2087)도 물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환호일출공원 인근의 환여횟집(251-8847)은 물회국수(1만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맛의 비결은 육수. 배·사과 등의 과일과 함께 여러가지 야채를 넣어 새콤·달콤·매콤한 육수에 국수를 만 것으로 색다른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 살짝 얼린 육수는 부서지는 포말처럼 시원하다. 포항은 또한 고래고기로도 유명하다. 포경업은 금지됐지만 그물에 걸려오는 고래고기는 맛볼 수 있다. 죽도시장 안쪽의 할매고래집(241-6283)과 옆집의 왕고래집(247-2552)은 고래육회와 수육을 내놓는다. 한접시에 1만∼3만원으로 고래 특유의 냄새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거북해할 수도 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귀빈예식장 근처의 구룡포돌문식당(276-2705)의 고래고기를 권할 만하다. 질 좋은 참고래를 재료로 써 가격이 만만치 않다. 돼지고기 편육과 비슷한 모양인 우네(가슴부위·3만 5000원)는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술마신 다음날 속푸는 해장으론 생아귀와 물곰이 좋다. 구룡포항의 조포네(276-1219)는 손님이 보는 앞에서 생아귀를 잡아 끓여내는 아귀탕(8000원)이 좋다. 아귀를 큼직하게 4∼5조각 썰어넣고 포항의 명물 부추와 콩나물·무·파를 넣고 끓여 낸 것이다. 국물엔 아귀 내장이 둥둥 떠 더욱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고기는 쫄깃하다. 북부해수욕장 앞의 설옥물곰식당(249-6969)의 물곰탕은 깔끔한 맛으로 술꾼들이 찾는 집이다. 물곰탕(7000원)의 물곰은 살이 흐물흐물하지만 해장국 뿐 아니라 식사도 좋다. 포항은 영덕이나 울진보다도 대게를 더 많이 잡는 곳이다. 구룡포해수욕장의 원경대게회식당(276-1711)은 대게를 비롯해 킹크랩도 내는 대게 전문 음식점이다. 포항에서 입이 궁금하다면 동해안 최대의 수산물 집산지 죽도시장을 찾으면 된다. 식당에 앉아 회를 주문해도 되지만 싱싱한 횟감을 직접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회나 횟밥 양념값으로 보통 1인당 3000원.3만원 정도면 회와 매운탕까지 먹을 수 있다. 일출을 보러 호미곶으로 갔다면 조금 떨어져 있는 선주회식당(284-9675)과 장기곶회식당(284-7752)이 좋다. 민박집도 겸하고 있는 장기곶회식당은 주인이 직접 배로 잡은 자연산 물고기를 내놓는다. 언덕위에 있어 동해안의 탁트인 조망도 빼어나다. ● 서울선 이집을 찾으세요 ●고래불(556-3677) 포항과 영덕 향토 음식을 많이 내놓는 이집은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구룡포에서 과메기를 가져온다. 과메기(2만원)가 싱싱하다. 서울 역삼동에 있다. ●영덕회식당(2267-0942) 서울시내에서 가자미 종류인 미주구리회를 야채와 초고추장에 비벼 먹는 막회의 원조격으로 20여년 됐다. 수년 전부터 과메기를 들여와 막회 못지않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충무로 중구청 근처에 있다. ●광교 과메기(720-6075) 조흥은행 본점 뒷골목에 있다. 포장마차 분위기로 상호도 없다. 단골들이 그냥 ‘광교 과메기’로 부른다. 살빛이 붉고 꾸덕꾸덕해 비린맛이 덜하다. 초장을 듬뿍 찍어먹는다. ●영덕대게(3210-1379) 교보문고 뒷골목에서 미대사관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나온다. 상호는 대게집이지만 대게보다 막회와 과메기를 많이 한다. 과메기는 6월까지 낸다. ● 과메기 셀프카메라 과메기는 이름이 좀 독특한 만큼 유래된 설도 다양하다. 황인 포항향토사학자는 “청어를 새끼를 꼬아 매달아 말린다는 뜻에서 ‘꼬아 메기’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생선의 눈을 꿰어 말린다는 뜻의 관목어(貫目魚)에서 관목의 ‘목’이 포항지역의 사투리 탓으로 ‘메기’라고 발음돼 ‘관메기’로 변하고, 이어 ‘ㄴ’자가 탈락되면서 ‘과메기’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다. 더불어 어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때 먹었다는 뜻에서 나온 ‘과맥어(過麥魚)’에서 유포됐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선정된 과메기는 비웃(청어)를 썼으나 1960년대 이후엔 꽁치를 쓴다.
  • 식품업계 ‘新라이벌 경쟁’

    식품업계 ‘新라이벌 경쟁’

    식품업계에 ‘신(新)라이벌 기업’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신 라이벌 기업’이란 당초 기업 출발 당시 대표하는 제품 및 사업 영역이 달라 경쟁을 벌이지 않았지만 최근 몇년 들어 각자 사업 다각화를 벌이는 과정에서 새롭게 경쟁관계가 형성된 기업이다. 동원 F&B-오뚜기, 풀무원-두산, 대상-해찬들, 대상-오뚜기 등이 대표적인 새로운 라이벌 기업이다. 이들 기업은 이미 시장을 선점한 업체의 제품과 똑같은 상품을 만들어 기존 업체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시도를 벌이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도전받는 업체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으로 상대 업체의 히트작들을 또다시 자사의 신제품으로 내놓고 있다. 이들 신라이벌 기업은 외형상 매출 규모가 비슷한 데다 영업 마케팅이나 유통 시스템 등에서 만만찮은 저력을 갖춰 시장 쟁탈전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풀무원과 두산은 두부와 김치를 놓고 치고 박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풀무원은 80년대 중반 일찌감치 포장 두부와 포장 콩나물을 업계 최초로 내놓으면서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포장두부 시장 규모는 2000억원 정도로 현재 시장점유율은 풀무원이 75%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종가집 김치’로 유명한 두산이 올 2월 ‘두부종가’를 내놓으면서 ‘두부 황제’ 풀무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산은 두부제품을 이마트 점포에 대대적으로 입점시킨 데 이어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전국의 주요 할인점에 납품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풀무원은 앞서 두산의 히트작 김치사업에 손을 뻗쳐 ‘풀무원 김치’를 시장에 이미 내놓았다. 동원 F&B와 오뚜기는 참치통조림, 면류, 즉석식품 등에서 시장 다툼을 벌이고 있다. 동원산업에서 4년 전 분사한 동원 F&B는 참치 통조림, 양반 동원김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250여 종류의 상품을 출시하는 식품전문 업체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오뚜기가 출시하는 제품들과 많이 겹치게 됐다. 라우동, 그랑누늘 등 면류제품과 다양한 즉석식품을 내놓으면서다. 이에 맞서 오뚜기도 마일드참치, 고추참치 등 동원의 대표작인 참치통조림 제품을 내놓고 있다. 오뚜기는 원래 카레·자장 등 즉석식품이 강한 식품업체였다. 조미료 미원으로 유명한 대상은 고추장·된장 등 장류사업에 뛰어들면서 장류전문업체인 해찬들과 1위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특히 대상은 지난 9월 고추장 제품명을 ‘순창고추장’에서 ‘순창 태양초고추장’으로 바꾸고 디자인도 세련되게 변경한 뒤 해찬들 ‘태양초고추장’을 위협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대상은 또 오뚜기와도 소스제품을 놓고 티격태격 중이다. 케첩과 마요네스, 드레싱 등 각종 소스제품의 강적 오뚜기를 잡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쇼핑in]인사동을 가다-공예품 가게

    [쇼핑in]인사동을 가다-공예품 가게

    ‘우리 전통문화의 거리’인 서울 인사동이 변하고 있다. 무늬만 한국적인 외국산 물건을 팔거나 아예 외제품을 파는 곳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서를 느껴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서울 인사동에서 순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살 수 있는 곳을 3회에 걸쳐 집중 소개한다. ●따듯한 금속공예세상 ‘제3공간’ ‘소담’을 지나 스무 걸음 정도를 옮기면 간판에 웃는 표정의 태양 조형물이 밝게 빛나고 있는 아담한 가게가 보인다. 금속공예가 김기안씨가 꾸민 ‘제3공간’이다. 여기에 들어서면 ‘차가운 금속도 이렇게 따듯하게 느껴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철과 구리 등 금속을 이용해 꽃·물고기·나비·고양이·사람, 태양을 닮은 시계, 촛대, 옷걸이 등 자연미가 넘치는 생활소품들이 사방에 걸려 있다. 형이상학적인 모양보다는 자연의 형태와 색깔을 그대로 살려 포근하고 안정감이 있다. 발가락이 큰 발모양의 시계(9만원), 앙증맞은 고양이가 손을 내민 듯한 모양의 옷걸이(2만원), 물고기 가족이 오순도순 달려 있는 모빌(12만원) 등 다정다감한 성격의 가족이나 애인에게 선물해 줄 만한 것들이 많다. ●제주도 감으로 물들인 ‘갈천제품’ 판매 인사동길 중간쯤에 이르면 ‘수도약국’을 지나 현대식 빌딩인 ‘인사아트프라자’가 나온다. 이 건물 1층에는 전통 염색기법인 감물 염색으로 만든 ‘갈천제품’ 전문점 ‘몽생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감물 전문 디자이너 양순자씨가 제주도에서 천연 소재인 면과 마를 사용해 직접 디자인하고 염색한다. 가방은 3만∼10만원, 바지 등 옷은 10만∼30만원, 모자는 2만 5000∼5만원. 몽생이 인사점을 운영하는 허재연씨는 “햇빛에 노출될수록 색이 짙어지므로 사용할수록 감빛이 진해져 매력적”이라며 “손세탁이 가능하지만 천연 염색된 제품이므로 비벼 빨아서는 안 되며, 물에 5분 이상 담가두지 말고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가족이 만드는 생활소품가게 ‘소담’ 안국역쪽에서 인사동길을 따라 수도약국쪽을 향해 20m정도 걷다 보면 야생화들을 내놓고 파는 작은 가게 하나가 나온다. 꽃집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 보면 도자기·목각 장식품·실크 주머니 등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다.‘소담’.‘그리고 수’씨가 운영하는 공예품점이다.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는다.’는 의미의 애칭이 말해주듯 주인의 손길이 닿아 있는 공예품들이 진열돼 있다. 자수용품들은 본인, 목각 장식품들은 남편, 도자기는 시누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야생화 자수가 놓인 식탁보는 20만원대, 도자기류는 1만 6000원부터 30만원대까지. 백화점이나 할인점에서 파는 공산품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소박하면서도 창의적인 수공예품들을 찾는 사람이라면 들러 볼 만하다.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살린 ‘우리세계’ 인사아트프라자 맞은편에 위치한 ‘우리세계’는 한국의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살린 상품을 만들고 있다. 작가 3명이 전통적인 소재를 이용해 만든 가방·명함집·액자·액세서리·시계 등이 있다. 서울 우수 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만큼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제품들을 2만∼5만원에 살 수 있다. 실크 스카프 ‘당초’ 4만 5000원,‘모시연꽃’ 안경집 2만 2000원, 식탁 중앙에 깔아 놓는 ‘누비 센타피스’는 2만 8000원에 판매한다. 다양한 무늬의 실크 넥타이(4만원대)들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코디하고 싶은 남성들에게 잘 어울릴 듯하다. ●국내 유일 탈 전문점 ‘탈방’ 제3공간 맞은편에는 외국인들이 지나가다가 꼭 한번씩 유심히 들여다보는 ‘탈방’이 있다. 하회탈과 본산대탈 전문 공예가 정성암씨가 만드는 탈 전문 판매점이다. 해학적인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뚝이·먹중·노장·포도대장·취발이 등 본산대탈과 양반·각시·이매·선비·백정 등 하회탈이 양쪽 벽에 걸려 있다. 탈을 좋아하는 수집가들과 한국 전통 문화에 호기심이 있는 외국인들의 눈길을 충분히 끌 만큼 한국 전통의 탈을 정교하게 재현해 놨다. 본산대탈은 20만원, 하회탈은 10만원, 탈 모양의 목걸이, 열쇠고리 등 소품류는 2000∼3000원이면 살 수 있다. 액자형 탈 조각품은 1만원부터 20만원까지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다.
  • 우리 역사 속의 사람들/노용필 등 지음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배워온 역사는 사건이 그 축을 이뤘고, 거대한 사건의 틀 속에서 인간의 숨결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럴수록 역사는 현대인들에게 먼 옛날얘기로만 다가왔다.‘우리 역사 속의 사람들’(노용필 등 지음, 어진이 펴냄) 시리즈는 사건 위주의 역사 집필에 반기를 들고, 그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 역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필진은 책임편집을 맡은 노용필 덕성여대 교수를 비롯해 이배용(이화여대)ㆍ박경자(대진대)ㆍ홍경만(신구대) 등 한국사학계의 중진·중견 학자 20명. 모두 ‘한국사신론’을 통해 역사는 인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천명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 사학자 고 이기백 선생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지배세력은 물론 평민, 천민까지 아우르며 거주지역과 출신 신분에 따라 분류한 책을 1년에 한 두권씩 발간할 계획. 이번엔 ‘개화기 서울 사람들1-왕실ㆍ중인ㆍ천민’ ‘개화기 서울 사람들2-양반ㆍ평민’ ‘대한제국기 서울 사람들’ 등 세 권에 24편의 글을 담았다. 다양한 세력들과의 대립 속에서 쇄국정책을 펼친 대원군, 가장 부침이 심했던 시기에 여성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비운 속에 스러진 명성황후 등을 통해 개화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지도를 그렸고, 역관 오경석, 화원 장승업, 백정 박성춘 등 역사책에서 몇 줄로 처리했거나 보기 힘든 이들의 삶도 생생히 살려냈다. 구식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이유, 박정양 대통령 추대설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개최와의 관계 등 한 인물의 미시적 삶을 넘어 거시적 역사 속에서의 의미까지 통찰해냈다. 독창적인 해석보다는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새롭지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권할 만하다. 딱딱한 글이지만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여졌다. 각권 1만원.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정인학 교육대기자 실전논술] 실전논술 지상강의 2회 제시문

    글 ㈎ ①“중국이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욕심을 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쳐요.”고구려 연구재단이 공식출범하기에 앞서 지난 주말 서울 고려대 법학관 1층 교수실에서 만난 김정배(64·고려대 사학과 교수·임기 4년)재단 초대이사장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중국측이 느닷없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들고 나와 고구려사를 자신의 지방사로 만들려는 데 대한 분노가 역력했다. 교수실은 얘기를 나눈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노학자가 내뿜는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②김 교수는 조목조목 중국 주장의 부당성을 꼬집었다.“그들의 주장대로 우리 반만년의 역사에서 고구려 부분을 빼면 2000년 역사 밖에 안 되는 민족이 됩니다. 또 단지 역사적인 측면을 넘어 향후 국경이라는 문제까지 비화될 수 있어요.” 중국 주장대로라면 고구려가 평양천도를 했으므로, 현재의 북한 역시 중국 땅이 된다. 한국은 고작 남한 땅으로 좁혀진다. 노학자의 차분하던 목소리는 이 대목에서 톤이 높아졌다.“세계적으로 이런 무리한 주장을 한 예가 없습니다. 일본도 이보다 심하지 않았어요. 일본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여기 비하면 양반입니다.”(임나일본부설이란 왜가 4세기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일본측의 주장) ③김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동안 책상위를 뒤져 자료 하나를 보여줬다.“이 사람이 실제 동북공정의 지휘를 맡고 있는 마대정(馬大正)인데, 신강쪽에서 변방문제를 주로 연구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점을 봐도 이들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중국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나라인데 21세기에 이런 패권주의로 무엇을 얻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④동북공정에는 조선족 문제에 대한 중국의 시각도 큰 몫을 하는 것으로 진단했다.“국내의 불법체류 조선족 문제는 중국으로서는 자국의 통치기반을 흔드는 중대사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감정적인 측면을 벗어나 법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중국인입니다. 중국으로서는 중요한 문제이지요.” ⑤김 교수는 한마디로 중국의 동북공정이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중국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포석의 성격이 짙다고 진단했다.“한국이 경제력이나 정치적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우리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⑥따라서 김 교수는 향후 재단의 활동을 연구와 현실참여 두 가지 모두를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민단체들을 지원할 방침이다.“시민단체들은 아무래도 행동을 중시해,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 공론화하는데 맞으리라고 봅니다. 외교문제가 걸린다면 상황에 따라 정책적인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도록 할 예정이에요.” 물론 시민단체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정·관계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계획입니다. 또 북한 학자와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해 통일·외교부 등과 연계해 합동조사나 세미나 등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중국과 맞부딪히려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우리 작업이 중국과의 영토분쟁으로 비쳐져서는 안 됩니다.마치 영토분쟁의 문제로 발전하는 것은 양국에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⑦그는 역사지키기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연구여건과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국내에서 고구려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겨우 14명 정도입니다. 연구자가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고대사 연구를 하는 후학에 대한 지원을 늘릴 겁니다.” 김 교수는 그러나 단숨에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없는 만큼 착실히 일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⑧중국의 왜곡된 주장을 반박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예컨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만 보더라도 고구려라는 문헌과 말갈족이라는 것이 공존하는데, 중국은 말갈족이라는 문헌만 택합니다. 발해가 말갈족의 지방정권이라고 중국이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지요. 하지만 고대사는 단지 사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물을 보면 고구려의 것이 대거 발견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한 나라가 갑자기 세워질 수 있습니까. 상식으로 말해야지요.” 비록 중국이 자국에 민감한 사료의 경우 사진촬영을 금지한다든지 접근을 불허하는 등의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주장을 반박할 자료는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중국 러시아 몽골 등을 모두 뒤져 고구려 관련 자료를 모아 실증적으로 고구려가 한국사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⑨김교수는 이번 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대외홍보라고 강조했다.“역사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알리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외국 연구기관 대학 등에 연구결과를 정기적으로 보내, 고구려사에 대한 세계의 공감대를 형성할 것입니다.” ⑩아울러 고구려 역사를 지키는데 특히 북한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했다.“북한은 고구려를 뿌리로 삼고 있어요. 심지어 삼국통일에서 신라의 역할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고려로 정통성이 이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지방사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⑪그렇다고 중국과 담을 쌓으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조만간 중국과 대화하기로 돼 있습니다. 앞으로 학술회의나 대담 토론회 등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뿐 아니라 러시아 등과도 만남을 가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국민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우리 역사를 지키는데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동북공정이란?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약칭해서 부르는 말로 ‘동북 변경지역이 역사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역임을 확인’하려는 이 작업은 지난 96년 중국의 국가기관인 사회과학원의 핵심연구과제로 추진되기 시작했다.‘학술은 대중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등의 원칙 아래 고구려사 등을 연구중이다. 글 ㈏ ①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동북공정’ 2004년도 연구과제가 서울신문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는‘동북변강연구총서’로 간행된 2003년 과제와 연결된 것으로 고구려, 발해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민족 기원문제와 명·청 시기 조·중 관계사 등 중국이 동북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장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와 관련된 각 연구자 및 관련기구들의 범위와 성격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②주목되는 것은 동북공정에 참여한 조직이 35개에 달하며 관련인력은 수백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즉, 동북 3성 지역의 모든 사회과학원과 대학, 전문연구소가 중앙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정점으로 연결되어 역할 분담을 통해 관련연구를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조직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동북 3성지역과 관련된 중요 쟁점사항들을 다양하게 망라하여 연도별로 진행하고 있음이 실제 확인된 것이다. ③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3월15일에 공포된 ‘동북공정 과제연구지침’내용이다. 이 지침에는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6개의 연구항목과 과제목표가 제시되어 이에 근거한 연구계획 수립을 관련 연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 중 새롭게 ‘고구려발해국문제연구’가 추가되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 동북공정에서 고구려, 발해가 핵심 연구분야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2003년의 세부연구주제였던 ‘발해유적현상조사’가 2004년 내용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2005년에 헤이룽장성 닝안(寧安)과 지린성 둔화(敦化)지역의 발해유적을 20억위안(약 2800억원)을 들여 중국고대도시로 복원한다는 최근 보도와 연결된 것임을 보여준다. ④결국,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라고 학술적으로 부각하고 곧바로 그에 대응되는 역사공간인 시안의 고구려유적과 둔화의 발해유적 등을 중국 역사유적으로 복원, 정비하여 명실상부한 중국 역사화 작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이번에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 ⑤또한 북방지역의 고대 종족, 고조선, 한국민족 및 고대 국가기원을 연구해 중국과 우리 민족의 관계사, 국경문제, 이민문제 등을 중국적 입장에서 정리하여 결국 이들 역사마저도 중국 역사범주에 있음을 강변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2004년 연구과제인 ‘조선반도민족, 국가의 기원과 발전’이란 제목의 연구과제는 중국의 연구가 고구려, 발해와 함께 우리민족의 성격까지도 중국측 논리로 파악하려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제의 연구책임자가 다른 연구논저에서 이미 한국민족은 중국계통의 유이민 세력이며 중국문화가 한국문화의 모태라는 식의 철저한 중국중심주의 입장을 피력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⑥이상에서 볼 때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연구사업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고구려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과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국은 동북지역을 장악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수백-수천년 전에도 같은 상황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존립근거와 역사 문화적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폭거이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역사침략이다. ⑦이제 우리는 후손에게 우리 역사를 당당히 지켜내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 무엇을 했고 또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때이다. 특히, 지난 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과 한민족 정체성부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의 열정과 노력, 체계적인 정부의 지원, 그리고 보다 많은 국민의 관심과 우리 역사 사랑이 요청된다. 글 ㈐ ①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충격적인 보도가 거의 날마다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게다가 중국이 저지르고 있는 왜곡의 정도나 수위가 오히려 일본보다 극심하다. 중국은 그동안 일본의 역사왜곡에서 우리와 같은 피해자로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기에 더욱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즉시 중국의 역사왜곡의 저의를 파악하고 근본적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②중국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와 수교한 직후부터 정부 산하의 학술기구인 중국사회과학원을 주축으로 역사왜곡을 획책하였다. 그들은 2002년 2월부터 ‘동북공정’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본격화하여 아주 조직적으로 우리의 고대사인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송두리째 가로채려 기도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왜곡에는 대내외적으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포석이 다양하게 깔려있다는 점을 먼저 간파해야 한다. 우선 대내적으로 볼 때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내부에 확산되면서 체제 유지와 안정을 위해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같은 국가주의는 애국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동북공정’도 바로 그러한 정책의 일환인 것이다. ③동시에 대외적으로 ‘동북공정’에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고 나아가 국제무대에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패권주의적인 야심이 담겨 있다. 특히 해양세력인 일본의 확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확립하겠다는 것이 1차적 목적인 것이다. 통탄스럽게도 현 강국들의 힘 겨루기가 과거 우리의 고구려사를 매개로 벌어지고 있는 격이다. ④이렇게 다양한 목적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역사 왜곡을 쉽사리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앞으로 그것을 더욱 심화하고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늦은 감은 있으나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 측에 엄중히 항의하는 동시에 북한과도 연대하여 공동대응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더욱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특히 아래의 몇 가지 사항들은 반드시 참작하여 대책 수립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⑤먼저 고구려사 왜곡이 정치문제로 불거졌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학문적인 저력을 배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역사의 요체는 문화전통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국가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의 저변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어학, 고고학 등 주변 인문학을 총동원해 학술적인 면에서 설득력을 강화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국어사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어의 특성을 밝힌다면 그것이 백제어, 신라어와 동질적 관계이고 중국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중국이 자행하는 역사왜곡의 허점을 잡아내고 그들의 억지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⑥다음으로 고구려사를 포함한 국사교육체제를 전면적으로 강화하여야 한다. 문민정부 이후 제도권 교육에서 국사과목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국사가 교양필수에서 그저 흥밋거리나 제공하는 선택과목으로 전락해 버린 지가 오래다. 이러다 보니 ‘국민의 집단기억’을 담고 있어야 할 국사교과서마저도 문제 투성 이라는 사실이 자주 지적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지구상에 자국사가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국민적 대응이라는 대전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⑦끝으로 고구려사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국제사회에 보급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특히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전이 시급하다. 고구려사가 한국고대사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인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우리는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 자국의 역사마저도 타국에 송두리째 강탈당하는 비극적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 박경리 소설무대에 표석 세운다

    원로작가 박경리(78)씨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 일부의 배경이 된 경남 통영에 작품내용을 담은 표석이 설치된다. 통영시는 14일 ‘통영을 빛낸 예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내달 두 소설에 등장하는 시내 지명 28곳을 선정, 박 선생과 협의를 벌여 이 가운데 명정동 생가를 비롯해 명정골, 충렬사, 죽림고개, 서문고개, 간창골 등 8곳을 최종 엄선해 표석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죽림고개는 김약국의 딸들 속에 ‘타관의 영락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라고 적혀 있고 서문고개는 토지 속에 ‘서문안 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뤄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라고 소개돼 있다. 표석은 해당 지명이 등장하는 소설의 이같은 내용을 담은 동판과 함께 소설책이 포개진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김약국의 딸들은 1894년부터 1930년 사이 통영 바닷가를 배경으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집안이 욕망에 얽혀 다섯 딸이 불행한 삶을 사는 등 비극적인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 하동군 평사리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한국과 중국을 배경으로 식민지적 고통과 운명, 민족의 한을 다룬 대하소설이다. 통영시 관계자는 “내년에는 미술분야의 예술인과 2006년에는 음악분야의 윤이상 선생에 대해서도 이들 예술인이 남긴 흔적과 업적을 토대로 표석을 설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일요영화]

    [일요영화]

    ●취화선(SBS 밤 12시) 임권택 감독의 2002년작. 최민식, 유호정 주연. 구한말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1850년대 청계천 거지소굴 근처에서 거지패에게 맞고 있던 어린 승업을 김병문이 구해준다. 승업은 맞은 이유를 설명하며 그림을 그려 보인다. 김병문은 거칠지만 비범한 승업의 실력을 눈여겨봐뒀다가 나중에 역관 이응헌에게 소개한다. 승업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워가던 중 이응헌의 여동생 소운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가슴 설레는 첫사랑은 소운의 결혼과 함께 끝나고 만다. 승업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인 기생 매향의 생황 연주에 매료되고, 매향은 승업이 그려준 그림에 제발을 써넣으며 아스라한 인연을 맺어나간다. 계속되는 천주교 박해로 승업은 그녀와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나눈다. 매향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승업은 그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릇을 본다. 승업은 그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도달하려는 경지를 보고, 조선의 운명인듯, 또한 스러져가는 자신의 운명인 듯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사라져간다.120분.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역(KBS1TV 밤 11시50분) ‘철도원’으로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후루하다 야스오 감독과 주연배우이자 일본의 국민배우라 불리는 다카쿠라 겐이 함께한 작품. ‘철도원’보다 18년이나 전(1981년)에 만들어졌지만, 홋카이도의 눈 덮인 아름다운 경관과 기차가 등장하는 풍경에서 마치 ‘철도원’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2000년 국내 개봉 제목은 ‘엑기’. 당시 등급제를 이유로 34분이나 삭제된 채 상영된 일이 벌어져, 영화 가위질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97분
  • 민노-민주 “민생부터 챙기고 싸워라”

    국회가 닷새째 파행한 1일 오후 4시. 국회 본회의장엔 열린우리당 의원 20여명이 드문드문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한나라당의 등원을 촉구하는 이른바 ‘압박시위’다. 그나마 참가자가 적어 맥이 빠졌다. 예정됐던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은 공전했고, 본회의를 진행해야 할 김원기 국회의장은 외부일정을 이유로 국회를 비웠다. 그런데 본회의장 한쪽에 민주당 손봉숙 의원이 앉아 있었다. 본회의장 밖으로 면회를 신청해 물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손 의원은 피식 웃었다.“싸움박질만 하는 국회의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국민들에게 보이려고요…. 그냥 책 읽고 있어요.” “이건 (본회의가)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니고…. 어디 가지도 못하고, 본회의장에 있어야 하는지 회관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지…. 차라리 대정부 질문 안 한다고 하면 남은 사흘 동안 새해 예산안 심의준비라도 열심히 할 텐데 답답해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극한대치로 국회가 파행하면서 손 의원 같은 군소정당과 무소속 의원 20여명은 닷새째 ‘직무정지’ 상태에 놓여 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와 다르지 않은 격이다. 그럼에도 이날 본회의장엔 이들 군소정당 의원들이 10여명 나와 앉아 있었다. 두 거대 정당이 닫아버린 본회의장을 이들 군소정당 의원들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다시 손 의원의 말.“다른 당 3선 의원에게 물었더니 웃으며 ‘사나흘 그냥 이대로 가도 괜찮아요.’라고 하대요. 그런가요.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데. 도대체 그 양반은 뭐가 괜찮다는 거죠?”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재미있는 통계를 냈다.“지난 닷새간 파행으로 국회가 27억 2500만원을 날렸다.”는 것이다. 국회 1년 예산 3300억원과 국회의원 299명의 세비 등을 기준으로 추산한 액수다. 파행 정국을 타개할 방법을 군소정당 의원들에게 물었다. 이들도 견해가 조금씩 달랐다. 민노당 노회찬 의원은 “이해찬 국무총리가 국회 파행의 단초를 제공한 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면 열린우리당 단독의 대정부 질문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민주당 손 의원은 “그것 역시 파행의 연장일 뿐”이라며 이 총리와 한나라당의 동시 사과와 한나라당의 국회 복귀를 전제로 대정부 질문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국민들은 이미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 파악하고 있다. 사과 받는 것이 승리이고 못 받으면 패배라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소아병적 닫힌 생각이다. 사과 여부에 집착하지 말고 한나라당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사과 받는 쪽이 지는 쪽이다.” 라고 말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연천 임진강 참게잡이 동승하다

    연천 임진강 참게잡이 동승하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작지만 야무지고 고소한 임진강 참게가 진짜 게맛이다. 진정한 참게의 맛을 느끼려면 지금 당장 임진강 중상류인 연천으로 달려가면 된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노란 장(영양분)이 가득찬 놈들이 한창 잡히고 있다. 더욱이 올해는 20년만의 최대 풍어라 한다. 경기도 연천 임진강변으로 참게맛을 보러 떠난다. 더욱이 임진강 주변은 분단조국의 현실을 느끼게 하는 오두산 전망대, 김신조 침투로, 황포돛배, 놀이동산과 미니 골프장이 있는 임진각 폭포어장, 황희정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반구정까지 갖춰져 수도권 하루나들이로도 적격이다. 연천군에는 34명의 어부들이 임진강을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중에서 정춘모(43)어촌계장과 큰아들 환동(24)씨와 함께 참게잡이 배에 동승했다. 함경도에서 시작해 황해도, 강원도를 거쳐 이곳까지 이르는 임진강은 분단의 아픔을 뱉어내듯 모락모락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벽 6시 임진강 어부들이 활동을 할 시간이다. 밤새 잡힌 고기들이 통발 안에 오래있으면 신선도가 떨어져 새벽에 거둬 오는 것이 이곳 어부들의 오랜 아침생활이다. 정씨와 아들은 강변에서 바지장화로 갈아입고는 배가 있는 곳까지 첨벙첨벙 걸어 들어간다. 구두에 양복바지를 입고 카메라까지 든 채 망연자실 서서 ‘나는 어떡하라고’라는 애처로운 눈으로 부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환동아 니가 기자양반 업고 들어와라!”라고 김씨가 말했다. 환동씨가 넓적한 등을 내게 내밀었다. 미안했다.“몸무게라도 관리 좀 했더라면….”때 아닌 후회를 하면서 80㎏가 넘는 몸에 힘을 빼고 업혔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힘들 테니까. 드디어 배는 안개를 헤치고 임진강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시원하다 못해 아침의 한기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5분을 달렸을까 아들이 부표를 찾아 건져 올렸다. 그리고 부표에 달려있는 그물을 잡아 올린다. 참게는 보통 통발로 잡는다고 하는데 정씨는 특이하게 그물 중간중간에 통발을 달아놓았다. 통발 하나에 주먹만한 참게가 10여 마리 들어있다.50m 그물에 통발을 13개정도 달아 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통발은 ‘모 아니면 도’다. 어떤 통에는 10여 마리가 들어있고 또 다른 통에는 아예 한마리도 없는 식이다. 정씨는 “참게는 줄을 서서 바다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잡히는 통발에만 많이 잡힙니다.”라고 한다. 놈들은 강바닥의 바위나 잡풀들 사이로 이동을 한다. 또한 지금 잡히는 것은 암놈이다. 수놈들은 대부분 8월말부터 강하구로 내려가서 집을 짓고 암놈들을 기다린다고 한다. 암놈들은 9월부터 노란 ‘장’이 차기 시작하고 9월 말부터 수놈을 만나러 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다. 작은 놈들이 먼저 가고 큰 놈들이 천천히 내려가므로 11월 초까지 잡히는 놈들이야말로 속이 꽉 차있어 참게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참게’하면 모두 파주나 문산을 생각하지만 원조는 연천이라 한다.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기 때문에 임진강의 중상류인 연천에서 크고 실한 놈들이 많이 잡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정씨는 “올해부터는 연천의 참게를 알리기 위해 군청의 지원을 받아 참게장박스도 만들어 나누어주고 공동어판장을 짓는 등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어 좀 신이 나요.”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아들의 높아진 목소리가 들렸다.“아부지 좀 잡아줘요, 힘이 달리잖아요.”우리가 수다 떠는 동안에도 아들은 묵묵히 일했던 것이다. 미안했다. 어업허가를 받은 4㎞구간에다 쳐 놓은 통발은 10여 개. 일을 마치고 보니 어느덧 10시가 넘는다. 오늘은 어획량이 적단다. 한창때인 9월에는 200∼300㎏이 잡혔다는데 오늘은 불과 30여㎏가 고작이다. 어째 따라나온 게 미안해졌다. 속마음을 읽은 듯,“그래도 씨알이 굵어 상품성은 괜찮다.”고 정씨는 말했다. 어부 부자는 배를 돌려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때마침 눈부신 아침햇살이 이들을 반기며 나왔다. ■ 저는요…수라상에서도 별미였죠 참게란 바다에 사는 것이 아니고 민물에서 산다.70년대 초만해도 논이나 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강이 오염되고 수중보나 댐때문에 거의 자취를 감췄다. 참게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봄철에 산란한다. 민물 상류로 이동해 겨울에 먹을 영양분을 몸 속에 가득 채우고 가을에 다시 바다쪽으로 내려간다. 참게의 습성을 이용해 가을철에 주로 통발로 잡는다. 게딱지의 크기는 보통 10㎝내외, 숫놈은 조금 크다. 우리나라는 금강에서 잡히는 금강참게, 남해안과 동해안 하천에서 잡히는 동남참게가 많다. 하지만 임진강에서 잡히는 ‘옥돌게’는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을 정도로 최고다. 임진강 참게는 4년 전부터 치어를 방류해 올해 20년 만에 최대 풍어를 기록했다. 가격도 많이 내려 2002년에는 마리당 1만 5000원을 호가했으나 올해는 3000원 선이다. 양식참게와 자연산을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양식참게는 그 크기가 일정한데 자연산은 제각각이다. 또 자연산은 발톱이 날카롭고 길지만 양식은 짧고 뭉툭한 편하다. 게의 색깔도 자연산은 거의 검정색에 가깝다. ■ 게요리 잘 하는 식당 임진강 참게를 맛보려면 어부가 직접 운영하는 식당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확실하게 자연산 참게를 먹을 수 있다. 연천 학고리에 있는 ‘밤나무집’(031-835-5484)이 그곳이다. 자유로를 타고 당동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적성을 거쳐 비룡대교를 건너 우회전해서 한참을 달렸다.‘도대체 누가 이곳까지 참게를 먹으러 올까.’ 싶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정갈한 시골집이 소박해 더 좋다. 참게매운탕(4만원)을 시켰다. 부글부글 끓는 매운탕은 게 특유의 비린 맛이 없고 구수하고 매콤하다. 참게의 속살이 고소하다. 익은 노란 장이 아작아작 씹힌다. 게가 작아서 몸통째 와작와작 깨물어 먹어도 별로 부담없다. 꽃게의 맛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참게는 작아 꽃게의 하얀 속살을 기대할 순 없지만 가득찬 ‘장’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맛이 가히 일품이다.‘임금님이 좋아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웬만큼 먹으면 주인 이소영(37)씨가 매운탕에 수제비를 넣어준다. 얼큰한 국물과 함께 먹는 쫄깃한 수제비의 맛도 일품이다. 이집에선 간장게장(1만 2000원)도 맛있다. 이역시 꽃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수위의 고소함이 있다. 밤나무집에 와 보지 않고 참게가 비리다든가, 먹을 것이 없다, 비싸다고 말하는 것은 ‘참게를 두 번 죽이는 일’임이 분명하다. 실컷 먹은 후 배를 두드리며 자갈이 잔뜩 깔려있는 임진강변을 걷는 것 또한 밤나무집만의 별미. 밤나무집에서는 참게를 택배로 배달해준다. 시기마다 좀 다르지만 1㎏에 3만원 선. 보통 12마리 정도 들었다.3㎏기준으로 파는데 냉매를 채우고 아이스박스에 담아 전국 어디서나 살아있는 ‘임진강 참게’를 받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어부의 집(031-835-8700), 장단가든(031-945-1559)도 잘한다. ■ 게장 집에서 담가볼까 흔히 ‘밥도둑’이라 한다. 게장 한 마리면 밥 한 그릇은 그냥 뚝딱 해 치우기 때문이다. 참게장을 잘 담그려면 우선 살아있는 참게를 하루 정도 물에 넣어 배설물을 빼낸다. 그런 다음 솔로 배꼽 등 구석구석을 잘 닦아낸다. 요즘에는 참게에 소고기를 먹여 장을 담그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하면 비린내만 낼 뿐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한다. 잘 닦은 참게를 유리병이나 항아리에 넣고 간장을 붓는다. 전에는 우리나라 국간장을 사용했는데 참게장이 너무 짜 양조간장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 참게가 충분히 잠길 정도로 간장을 채운 다음 뚜껑을 꼭 닫아 2∼3일간 놔둔다. 그러고는 간장을 따라내어 펄펄 끓여 식힌 후 다시 붓는다. 이러한 과정을 서너 차례 반복한 다음 한달 정도 있다가 먹으면 된다. 이때 생강과 마늘을 자루에 담아 항아리에 함께 넣는게 좋다. 주의할 점은 설탕이나 꿀을 절대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탕을 넣으면 노란장이 텁텁해져 땡감 맛이 나기 때문이다. ■ 이곳도 가보세요 ●임진강 폭포어장 가족나들이 코스로 그만이다. 깨끗하게 꾸며진 양식장에 놀이동산과 미니골프장, 식당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2500평의 양식장에 팔뚝만한 송어와 산천어가 뛰노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한 물고기 밥을 사서 주는 재미에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놀이동산에는 범퍼카, 바이킹, 꼬마기차 등 8종의 놀이시설이 있어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3종류의 놀이시설을 이용하는 ‘빅3’티켓이 어른 7000원, 아이 5000원으로 저렴하다. 미니 골프장은 3000평으로 18홀인데 퍼팅과 어프로치만 할 수 있다. 골프를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못하는 사람들도 재미로 놀 수 있어 가족끼리 잠시 즐기기에 좋다.18홀을 도는데 평일 1만원, 주말 1만 4000원이다. 무료로 골프화, 골프채도 빌려준다. 식당에는 여기서 양식하는 송어나 산천어를 맛볼 수 있다. 매운탕과 여러가지 요리를 포함해 1㎏에 송어는 3만 2000원, 산천어는 3만 8000원이다.4∼5명의 가족이라면 1.5㎏정도로 충분하다.(031)959-2222. ●황포돛배 두지나루엔 올 3월부터 조선시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가 원형 그대로 복원돼 운항 중이다. 모양이 특이하다. 배의 밑바닥과 앞이 평판형태로 우리 선조들이 2000여년 동안 사용했던 전통 방식의 배이다. 고종황제가 개방을 한 이후 1930년대부터 뾰족한 형태의 배로 완전히 바뀌어 자취를 감추었다. 50여명이 탈 수 있는 황포돛배는 두지나루를 나서 강물을 따라 40 여분을 유람한다. 뱃길이 완전히 정비되어 고랑포나루의 멋진 적벽도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다.(031)958-2557. ●김신조 침투로 1968년 1월17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무장간첩들이 청와대 폭파와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침투했던 곳이다. 당시의 철조망 및 망루 등과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군 작전 지역으로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군부대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보교육에 적당하다. 아침 9시부터 일몰시간 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문의는 (031)839-2063. 이밖에도 조선시대 학자 황희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반구정, 신라경순왕릉, 오두산전망대, 자유로 아쿠아랜드(031-942-9114) 등도 들러볼 만하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철도청 ‘직종 통합’ 진통

    철도청 ‘직종 통합’ 진통

    철도청이 내년 공사(公社) 전환을 앞두고 일반직과 기능직을 단일 직급으로 운영하는 ‘직종통합’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이 문제가 특별단협을 통해 불거지자 철도청 공무원직장협의회는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며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 직종통합에 합의한 철도청과 철도노조도 시행(안)을 놓고 서로 이견을 표출, 이 문제가 공사전환을 앞두고 ‘뇌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기능직은 ‘골품, 양반제’ 직종통합에 대해 이해당사자 공히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이 사장되고 근무의욕 저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통합방식을 놓고는 의견이 제각각이다. 공사는 현행 10급이 아닌 6급 체계로 바뀐다. 철도청은 현 기능직급을 그대로 반영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기능7급은 근속경력에 상관없이 4급 1년차로 전환된다. 노조는 이를 일반직 중심의 통합방식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일반직에겐 경력을 인정해주면서 기능직을 배제하는 것은 뿌리깊은 관료의식이라며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철도노조 전상룡 교육선전실장은 “특단협안중 하나로 수차례 검토와 토의를 통해 결정했다.”며 “원칙에 동의하는 만큼 구체적 실행방안은 교섭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률통합은 ‘일반직 역차별’ 철도청 공직협은 지난 25일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직종통합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대처 방안 등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회의결과 공직협은 일률적이 아닌 단계적, 직렬별 세부적 통합 추진으로 결론냈다. 공사 전환시 부역장·팀장 등 등용직은 일반직으로 자동 전환되고 일정기간(5년)내 100% 임용을 전제로 자격·검증절차를 거쳐 선발하자는 것이다. 사무직 전직자는 행정직 공채 상당의 시험을 치르고, 기술직은 자격증 등의 객관적 능력평가를 요구했다. 최근 10년간 직급 및 승진호봉을 하향 조정하면서 전직시험을 치러 일반직으로 바뀐 2600여명의 직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지적됐다. 회의에서는 노조안에 대한 반박과 절차상 하자에 따른 법적 대응 및 준법투쟁, 간부 퇴진운동 등을 요구하는 극단의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김일수 공직협회장은 “공채방법 및 업무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며 “일반직의 의견을 반영해 정책방향이 수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밥그릇 싸움 비난 철도청과 공직협은 노조안 반영시 3급이 1만여명을 차지,2급 승진뿐 아니라 인사적체로 4급 이하 승진도 기대가 어렵다는 해석이다. 기능직원의 경력이 높아짐에 따른 현장의 관리 및 지휘체계 혼란도 우려한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공사전환 후 신규채용 문제도 거론된다. 현재 기능 10급인 유지보수원을 채용하는데 대졸자를 대상으로 필기시험을 치를 수 없다는 고민이다. 이에 따라 직급체계를 6급이 아닌 9급으로 확대하거나, 보수와 직급은 통합시키되 전문·전임직렬은 유지되도록 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철도청 관계자는 “직종통합은 특단협 대상이 아니나 체제변화에 따른 통합 차원에서 수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차이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skpark@seoul.co.kr
  • [남규철의 DVD폐인]9회말 역전홈런의 감동으로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올해는 무척이나 특별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밤비노의 저주’가 풀릴 수도 있는 해이기도 하고 무승부 파문(?)으로 한국시리즈가 10차전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해이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한해 중 이맘 때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일년 중 가장 즐겁고 흥분되는 때일 것입니다. 그 해의 가장 훌륭한, 강한 팀을 뽑는 마지막 승부가 펼쳐지는 때이니까요. 이번 주에 소개하는 타이틀들은 바로 야구를 다룬 영화들입니다. 스포츠 영화가 그러하듯 인간승리 드라마와 훈훈한 감동이 담겨 있고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는 승부의 세계도 다루고 있어 야구팬들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즐기시기에도 부담이 없는 작품들일 것입니다. ●내추럴 야구영화를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1984년 작품입니다. 야구영화 사상 가장 멋진 라스트 신이라 불리는, 주인공의 홈런으로 전광판이 터지는 장면은 여전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시골소년이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로, 조금은 낭만적이고 영웅담의 분위기도 풍기지만 재미있고 감동적인 최고의 야구영화라는 것은 분명한 작품입니다.DVD는 1.85:1의 아나몰픽 화면과 돌비 디지털 5.1채널로 제공되며 전체적으로 무난한 수준의 화면과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이에 비해 부가영상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드는 타이틀입니다. ●메이저 리그 만년 꼴찌의 팀이 우승을 다투는 강팀이 되는 것은 물론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팀이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해온 엉망진창 오합지졸의 선수들과 감독에 의해 꾸려진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겠지요. 언뜻 우리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그러나 ‘공포의 외인구단’과는 다른, 상당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속에서도 꿈을 위해 전력질주를 하는 뭉클한 스포츠의 감동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DVD로 출시된 ‘메이저 리그’는 15년이 지난 영화이니만큼 그렇게 만족스러운 화면이나 사운드를 들려주지는 못하고 부가영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웃음과 감동으로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타이틀입니다. ●YMCA야구단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는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요? 학처럼 고고히 살아가는 선비와 뒷짐만 진 양반, 황실 호위무사와 장사치, 지게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조선 최초, 최강의 ‘베쓰뽈’팀의 이야기는 초창기 우리야구의 시작을 흥미로우면서도 유쾌하게 보여줍니다.DVD로 출시된 ‘YMCA야구단’에는 감독판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덕분에 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독의 원래 의도였다는 액자식 구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 강단서는 송두율 “아직도 삶 옥죄는 국보법”

    강단서는 송두율 “아직도 삶 옥죄는 국보법”

    “다음주부터 꿈에 그리던 강단에 섭니다.”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으로 불렸던 송두율(61·독일 뮌스턴대) 교수. 지난 21일은 송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지 1년째 되는 날이다.22일 독일에서 ‘1년의 감회’를 전하는 송 교수의 안부 인사는 의외로 소박했다. ●‘간첩’에서 ‘교수’로 맞는 특별한 가을 송 교수는 지난 7월22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 지 보름만에 독일 자택으로 돌아와 긴 휴식을 가졌다고 한다. 두 달 동안 독일 현지 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틈틈이 강의준비도 하면서 지난주에는 석방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과 지중해로 휴가도 다녀왔다는 것이다. 독일 현지에서 도움을 준 지인들을 만나 고마움을 전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일정이었다. 지난 12일은 송 교수의 61번째 생일이었다. 송 교수는 “하마터면 감옥에서 환갑을 맞을 뻔했는데 이렇게 자유의 몸으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뒤늦은 축하’를 전하는 기자에게 환하게 답했다. 송 교수는 전화 인터뷰 내내 밝은 목소리였다. 수감생활로 도졌던 고혈압도 많이 나아졌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송 교수는 “저녁이면 이곳 베를린 집 앞에서 단풍이 물든 가을 풍경을 보는 여유를 가진다.”면서 “지난해 가을에는 서울구치소에서 법원으로 재판받으러 가는 호송차 안에서 은행잎만 봤는데….”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1년의 감회를 떠올릴 때는 부인 정정희 여사가 대신 말을 잇기도 했다. 정 여사는 “이 양반 혼자 감옥에 두고 지난 4월에 잠깐 독일에 왔을 때 베란다에 코스모스씨를 심어두었더니 저 혼자 잘 자라 지금은 온 집안이 코스모스로 가득찼다.”고 전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변치 않는 숙원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는 환갑도, 붉은 단풍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도 여전히 ‘낯선 여유’였다. 국가보안법이 그들의 삶을 아직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송 교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선고 당시 ‘반국가단체 잠입·탈출’ 부분에서는 유죄를 면하지 못했던 터였다. 이와 관련, 송 교수 변호인단은 그의 석방 직후 대법원에 낸 상고 이유에 답변서를 제출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런 탓에 송 교수는 국내에서 국가보안법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거듭해서 물었다. 순간 지난해 송 교수가 구속되기 직전 서울 서초경찰서 유치장에서 기자에게 털어놓은 ‘최후 진술’이 떠올랐다.“나는 전향하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다. 나로 인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그래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지난 8월6일 출국에 앞서 “관용과 상생을 바탕으로 한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 내 사건은 분명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남기고 간 말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향한 그의 일성(一聲)이었다. 송 교수의 ‘구속 1년’ 화두 역시 ‘국가보안법’이었다. 독일에 건너가서도 매일 인터넷을 뒤지며 국가보안법 논쟁을 지켜보고 현지 언론과 대학 초청 인터뷰에서도 국가보안법은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송 교수는 최근 열린우리당이 확정한 ‘형법보완안’에 대해 “아직 분단사회의 최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다.”면서 “정치권이 폐지 불가의 이유로 주장하는 ‘안보 공백’과 ‘국민 불안’은 수십년 전부터 외쳐온 해묵은 논리 아니냐.”며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한번으로는 흡족하지 않다” 송 교수는 최근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보낸 지난 1년을 고스란히 담는 작업이다. 강의가 끝나는 내년 2월5일 이후쯤이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송 교수는 “아직도 서울은 낯선 외국 같은 땅이지만 45년만에 찾은 광주와 40년만에 밟은 제주도의 흙을 잊지 못한다.”면서 “‘Einmal ist kein Mal(한번으로는 흡족하지 않다.)’이라는 독일 말이 있다. 두번째, 세번째로 계속 이어지는 고국과의 뜨거운 만남을 반드시 기약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남은 생애도 우리 사회의 완전한 민주화를 위해 일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빚내 대체농토 샀는데 웬 날벼락…

    빚내 대체농토 샀는데 웬 날벼락…

    “대통령더러 우리 땅 사가라 그래유.” 충남 연기군 남면 갈운리의 김옥태(48·여)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털썩 주저앉으면서 울음부터 터뜨렸다. 김씨와 남편 임재호(50)씨는 행정수도가 들어와 토지가 수용될 것이라는 정부의 정책을 믿고 이웃들과 서면 아촌리에 8억원을 들여 집과 축사를 사들였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재산을 날리고 빚까지 떠안은 채 살아갈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땅과 집 값이 크게 떨어질 것이 뻔하고, 설령 싸게 내놓는다고 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을 테니 울며 겨자먹기로 이자를 물어내며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대유. 뭐 이런 게 다 있슈.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여유.” 김씨는 연방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가 땅을 사들인 것은 신행정수도 예정지가 결정되고 대통령이 강력한 추진의사를 밝힌 직후인 지난 8월. 김씨는 “처음엔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아 반대하다가 정부 의지가 워낙 강력해 어쩔 수 없이 고향과 가깝고 수용이 안 되는 서면에 앞으로 살아갈 땅을 샀다.”면서 “우리가 돌았어….”라고 되뇌었다. 김씨네가 이웃과 함께 산 부동산은 주택과 축사가 딸린 2600평짜리 논·밭이다. 평당 30만원으로 주변보다 조금 비쌌지만 집과 축사가 오롯이 지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김씨와 이웃집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집, 축사, 논·밭과 새로 사들인 부동산까지 모두 담보로 잡히고 농협에서 3억원씩 빚을 냈다. 나머지 1억원은 직장에 다니는 딸들이 빚을 냈다고 한다. 김씨는 “내년 1월부터 보상이 나오면 이 정도 빚은 너끈히 갚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가슴을 쳤다. 김씨 부부는 700평의 논·밭을 일구고 소 20마리를 기르며 알뜰하게 살아와 그동안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져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 임씨는 2년전 틈틈이 건축일을 다니다 다리를 다친 뒤에는 농사에만 전념했다. 김씨도 식당에 나가고 있다. 김씨는 “우리처럼 열심히 산 사람도 없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눈물을 쏟았다. 남편 임씨는 전날 한숨도 못자고 “소 먹일 짚 가지러 간다.”며 아침 일찍 나가서는 소식이 없었다. 김씨 부부는 지난 3월 폭설로 축사 지붕이 무너졌지만 ‘행정수도가 온다는데 뭘 고치냐.’는 이웃의 얘기에 일부만 고치고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김씨네와 함께 땅을 산 성기정(54·여)씨도 “난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와 TV를 봐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제 무슨 토론인가를 보니까 헌법에 대해서만 얘기하던데 그게 문제라면 진작에 얘기를 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성씨와 남편 임정철(55)씨는 대지 1000평의 집과 축사,1200평의 논·밭을 갖고 있다. 이것과 서면에 산 부동산도 모두 농협에 부채 담보로 잡혔다. 농협에서 얻은 3억원 말고도 나머지 1억원은 사채를 얻어 충당했다. 두 집이 내야 하는 이자만 매달 5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소 20마리를 기르고 있는 성씨는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인데 행정수도가 오지 않으면 왜 다른 곳에 땅을 샀겠느냐.”면서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작은아들 보내주느라고 이전에도 8000만원의 빚이 있었는데 큰 일”이라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성씨는 “이웃 마을에 사는 친척을 비롯해 부여 등에 농토를 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성씨는 “떨어진 콩 한톨이라도 모두 주워 된장을 만들어 팔고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1년에 겨우 천만원밖에 벌지를 못하는데 이 많은 빚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성씨는 “이자를 못내 전 재산이 경매에 넘겨지면 우린 죽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하소연했다. 성씨는 “강아지도 몰아대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며 이같은 일을 자초한 대통령과 국회가 나서 해결해줄 것을 바랐다. 연기군 남면 한문수 면장은 “농민들이 더 오르기 전에 다른 곳에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려 빚을 내면서 우리 면에서만 지난해 말 이후 300억원이 대출된 것으로 안다.”면서 “지금 땅과 새로 산 땅을 모두 날릴 판”이라고 걱정스러워 했다. 22일 오후 충남 공주시 장기면. 마을 입구와 면사무소, 농협에 내걸렸던 ‘행복 1번지로 통하는 행정수도 이전’,‘아름다운 행정수도 이전 운동’ 등의 플래카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면 직원은 “주민들이 속이 뒤집어진다고 해서 아침 일찍 떼어버렸다.”면서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놔둬 본들 비웃음밖에 더 사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면사무소 주변에 밀집한 부동산 중개업소 20여곳 가운데 문을 연 곳은 1곳뿐이었다. 그나마 중개업자는 기자가 접근하자 “서울에 계신 높으신 양반들은 순진한 사람들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느냐.”면서 “외지 사람과는 말도 섞기 싫다.”고 문을 닫아걸었다. 이날 면사무소 직원들은 하루종일 각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위로해야 했다. 이주를 준비하다 낭패를 본 주민들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꼴을 당하느냐.”며 공무원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면직원들 마을돌며 주민 위로 장기면 당암리에서 태어나 25년 동안 돼지와 소를 키워온 윤종환(50)씨는 행정수도가 들어서면 옮겨 가기 위해 지난달 이웃한 의당면에 축사부지 3000평을 사들였다. 이전하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땅값이 뛸 것이 걱정돼 은행에서 3억원을 대출받고 쌈짓돈까지 모두 털어 5억여원을 마련했다. 이주 보상금을 받고 새 축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빚은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산된 지금은 당장 대출이자를 갚을 일에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대출받아 새축사 마련했는데… 윤씨는 “배운 것이 소·돼지 치는 일밖에 없어 미리 준비를 한 것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면서 “우리가 수도 이전을 원한 것도 아닌데 왜 피해를 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근처 축산농가들도 우리와 사정이 모두 비슷할 것”이라면서 “이제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고 한숨지었다. 장기면 봉안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최은철(48)씨는 논 옆에 농가주택을 지으려고 형질변경 허가 신청을 냈다가 지난 6월17일 정부가 개발행위와 건축허가 등의 제한을 고시하는 바람에 12월 말까지 허가를 연기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씨는 “집을 짓기 위해 준비를 하다 형질 변경에서 가로막혀 반년 가까이 땅을 놀렸다.”면서 “애들 장난 같은 수도이전 싸움에 괜한 손해를 봤다.”고 억울해했다. 당암리 토박이 김모(60)씨는 행정수도 이전 소식에 욕심을 내 봄부터 채소 비닐하우스를 5동에서 15동으로 늘렸다. 은행에서 6000여만원을 대출받았으나 보상금을 받으면 어떻게든 메울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 것. 하지만 꿈은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그는 당장 대출금과 이자 상환금 마련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은 물론이고, 이웃들로부터 “한몫 잡아보려 투기를 했다가 저 지경이 됐다.”는 뒷말까지 듣는다고 했다.●“정부서 모른 척하지 않을것” 하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정부가 우리를 완전히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품고 있다. 정부가 ‘미안해서라도’ 다른 공공기관을 옮겨주지 않겠느냐는 것. 장기면 도계1리 토박이인 박모(65·상업)씨는 “주민들이 크게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돌아가는 마당에 적어도 대전으로 옮겨갔던 도청이라도 공주에 되돌려주지 않겠느냐.”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졌지만 그만큼 후속조치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공주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연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오늘의 눈] 헛물 켠 충청도 주민들/류찬희 산업부 차장

    충청도 ‘양반’들이 발끈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정치권을 향한 주민들 분통이 하늘을 찌를 기세다. 충남 연기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흥분한 친구는 어릴 때 시골에서 개구리를 갖고 놀던 얘기를 꺼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 없던 시절, 우리는 개구리 항문에 밀대를 꽂고 한껏 바람을 불어넣은 뒤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르면 이를 갖고 놀았다. 그러나 개구리는 아이들의 장난에 지쳐 헛바람이 빠지면 시들시들해졌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충청도 주민들의 표정이 헛바람 빠진 개구리 바로 그 모습”이라고 전했다. 고향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의 목소리도 격앙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시골집과 문전옥답 몇백평이 전부였던 어머니는 주변 땅값이 치솟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땅이 없는 것을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새 서울’ 사람 되어보는 것이 꿈이라며 여권을 열렬히 지지했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은 성난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그럴듯한 선거공약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빼앗아갈 때는 언제이고, 대통령이 사과 한마디 없느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순박한 시골 노인네가 정치권에 대놓고 욕하는 것을 들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민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와 4·15 총선을 떠올리기도 싫은 모양이다. 두 번 선거에 실컷 이용당하고 ‘팽’당했다는 불만으로 가득 차있다. 정치권은 이들의 격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부는 충청도 주민들에게 헛 바람을 불어넣은 개구리를 갖고 놀다가 지치면 슬그머니 내버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위헌 결정에 따른 차분한 수습보다는 정치 공세부터 나오고 있어 아쉽다. 사탕발림 발언보다는 우선 대통령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주민들이 헛물을 들이켜지 않을 실천 가능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 급하다. 류찬희 산업부 차장 chani@seoul.co.kr
  • TV3사 ‘고급 시트콤 전쟁’

    TV3사 ‘고급 시트콤 전쟁’

    “시트콤으로 한판 붙자!” KBS·MBC·SBS 지상파 방송3사가 가을 개편과 함께 한바탕 ‘시트콤 전쟁’에 돌입했다. 각 방송사가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가족·청춘 시트콤’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와 포맷으로 무장한 ‘고급 시트콤’을 앞다퉈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을 쓰고 있다. 실력파 개그맨 등 ‘외인부대’를 대거 투입해, 타사 경쟁프로그램과 같은 시간대에 편성하는 ‘맞불 작전’도 마다하지 않으며 시청률 확보 경쟁에 나선다. KBS 2TV는 새달 1일부터 ‘시트콩’(시트콤+콩트:Situation Conte)이란 새로운 장르를 표방한 일일 시트콤 ‘시추에이션 콩트 방방’을 방송한다.MBC 간판 청춘 시트콤인 ‘논스톱 5’와의 정면 대결을 위해 같은 시간대(월∼목 오후 6시50분)에 편성했다.20분 분량의 ‘…방방’은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 내 3∼4분짜리 콩트를 시트콤 형식으로 길게 늘린 것. 유명 코미디 작가 장덕균씨를 영입하고 박준형·정종철·강성범·김영철 등 인기 개그맨들을 총 출동시켰다. 광고회사 ‘방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KBS 2TV는 또 새달 15일부터 ‘달래네 집’ 후속으로 새 시트콤 ‘노처녀 다이어리(월∼금 오후 9시25∼55분)’를 선보인다. 미국 인기 시트콤 ‘섹스 앤드 시티’를 연상케 하는 이 시트콤은 세명의 노처녀(예지원, 김지영, 오윤아)가 일과 사랑을 놓고 벌이는 경쾌한 이야기들을 요절복통할 웃음과 함께 전달한다.‘윤도현의 러브레터’를 진행하고 있는 김석윤 프로듀서가 연출을 맡는다. 그동안 시트콤 시장을 주도해 온 MBC는 ‘논스톱 시리즈’를 새롭게 단장한 ‘논스톱 5’에 이어 새달 6일부터 ‘미라클’ 후속의 새 시트콤 ‘조선에서 왔소이다(토 오후 7시)’를 야심작으로 내놓았다. 한국판 ‘왕자와 거지’를 표방한 이 시트콤은 ‘시간 여행’과 ‘인생 역전’이라는 차별화된 소재를 도입했다. 현대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타임머신이 고장나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현재의 서울에 떨어지면서 과거의 양반이 거지가 되고, 노비가 재벌2세가 되는 등 좌충우돌 해프닝을 다뤘다. 탤런트 조여정과 가수 이성진이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장 먼저 가을 개편에 돌입한 SBS는 ‘빙의’를 소재로 한 판타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월·화 오후 8시55분)’를 황금시간대에 편성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코미디판인 이 시트콤은 무능력한 잡지사 기자(신동엽)가 귀신(공형진)과 동거하면서 펼치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각 방송사가 이렇듯 ‘고급’ 시트콤을 앞다퉈 편성하는 이유는 뭘까.MBC 시트콤 관계자는 “최근 각 방송사에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쏟아 부은 대작 드라마들이 줄줄이 실패하고, 한때 호황을 누렸던 가족·청춘 시트콤마저도 시청률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라면서 “시청자들의 달라진 구미에 맞추면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시트콤 쪽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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