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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UR STORY] 봄처녀를 그리다

    [OUR STORY] 봄처녀를 그리다

    꽃을 보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화사해진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진다. 어떤 꽃인들 그러지 않을까마는, 차디 찬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봄꽃의 유혹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3월이라…. 초순을 훌쩍 넘긴 이맘 때라면 청매실 농원이 있는 광양 매화마을로 가야 한다. 바람에 흩날린 하얀 매화꽃이 섬진강으로 떨어지는 광경, 생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섬진강 자락에 기댄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에선 노란 산수유가 다투어 피어났다. 해마다 중순을 넘어서야 만개하더니 매화꽃을 시샘하는 까닭인가, 일찌감치 꽃을 피워 냈다. 계곡과 돌담 사이에 흐드러진 산수유가 눈부시고 애절하다. 이맘 때면 또 봄이 깃든 약숫물, 고로쇠가 매화, 산수유와 공명을 다툰다. 삼국시대 병사들이 전투 중 화살에 꽂힌 나무에서 흘러나온 고로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던가.‘나도 예 있소!’하며 목청을 높이는 듯하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휘감으며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에 봄빛이 완연하다. 주 초반 꽃샘추위가 반짝 기승을 부리긴 했지만, 서둘러 찾아 온 봄이 개화시기를 앞당겨 놓은 탓에 서두르지 않으면 낙화하는 모습만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만화방창 때는 좋아 아니 가지는(?) 못하리라∼. 글 사진 구례 손원천 기자 km@seoul.co.kr ■ 산수유 군락지 전남 구례 산동 상위마을 전주와 임실을 뒤로하고 남원땅에 접어드니 이름도 살가운 춘향터널과 방자교차로가 이방인을 맞았다. 설핏 웃음이 흘러 나왔다. 혹시 몽룡 고가도로나 향단이 삼거리, 변학도 다리는 없을까. 도로시설 이름만으로 가슴 한자락 내려놓게 하는 남도의 해학에 장시간 운전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 노란 군무(群舞) 산수유 남원을 지나 20분쯤 달렸을까. 봄물에 방게 기어 나오듯, 고샅길과 개울가 곳곳에서 노오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던 산수유가 어느새 선연한 노랑색 군락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졌다.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 국내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다. 작가 윤대녕씨가 ‘마른 가지에 뿌옇게 튀어 올라 비구니 애처로운 머리통에 비죽비죽 돋는 머리칼 끝들을 생각나게 한다’던 바로 그 꽃.3월로 들어서자마자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가 산동마을 농가 앞마당과 돌담길, 논두렁이며 산기슭에 꽃구름을 피워 놓았다. 마치 마을 전체가 노란 구름에 파묻힌 듯한 느낌. 노랑빛 감도는 이끼가 낀 채 단정하게 서 있는 돌담길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좁은 돌담길을 걷다보면 남녀간 정이 도타워지고, 없던 정도 생긴다 해서 사랑의 길이라 불린다. 그 돌담 위로 산수유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산수유도 돌담도 온통 노랑빛. 때마침 내린 봄비마저 노란 색깔을 머금고 흩뿌려지는 듯하니, 그야말로 꽃처럼 아름다운 봄날이다. 아마 여수·순천 10·19사건 때 ‘산동애가’를 부르며 토벌대에 끌려갔다는 19세 백씨(氏)소녀도 그처럼 아리따웠을 게다.‘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고/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산수유가 지리산을 노랗게 물들여갈 때면 이곳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산동애가의 한 구절이다. 산수유에서 왠지모를 애절함이 느껴졌던 건 이처럼 가슴아픈 해방공간의 현대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나 보다. 상위마을에서 19번 국도를 가로질러 가면 만날 수 있는 현천마을과 반곡마을 또한 사진작가들이 즐겨찾는 산수유 명소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24. # 가볼 만한 곳 ●사성암 화엄사쌍계사 등 지리산을 대표하는 거찰 외에도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사성암도 놓치면 아쉬운 볼거리. 절 뜨락에 서면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드넓은 토지면 등 구례 들녘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문척면 죽마리. ●운조루 1776년 건축된 조선시대 전통 양반가옥.‘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구름 위로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의 이름만큼 아름답다. 남한 3대 길지(吉地)위에 세워져 세인들의 관심을 더한다. 중요 민속자료 8호. 토지면 오미리 # 가는 길 자가용을 이용해 갈 경우, 산수유마을을 먼저 둘러본 뒤 매화마을로 가는 게 편하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을 나와 남원 방향 17번 국도를 탄 뒤, 임실을 거쳐 남원시 직전에 있는 춘향터널을 지나자마자 19번 국도로 갈아 탄다. 밤재터널을 지나 지리산온천랜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2㎞쯤 가면 산수유 마을에 닿는다. 매화마을은 산수유 마을에서 나와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가다 화엄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861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직진, 화개장터 지나 남도대교를 건넌 다음 좌회전해 계속 직진하면 된다. 산수유마을에서 40∼50분 소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구례까지 가는 것이 우선. 구례행 직행버스(4시간 소요)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하루 4차례 운행한다. 기차는 하루 15회. 구례구역에서 내린다. 상위마을까지는 구례공용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061)780-2731. ■ 지리산 피아골 직전마을 고로쇠 ‘여러분은 지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계십니다.’지리산 피아골로 향하는 섬진강변 861번 지방도로 한쪽에 서있는 입간판 글귀다. 가슴에 여실히 와 닿는 명문. 최소한 이맘때 만큼은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 봄이 깃든 물 고로쇠 산수유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을 봄비에 씻기운 맑고 깨끗한 섬진강 바람에 날려보내고,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마지막 동네 직전마을로 향했다. 고로쇠 산지로 유명한 곳. 경칩을 막 지난 요즘 이 마을 사람들은 고로쇠 채취로 분주하다. 가을엔 부지깽이도 덤빈다더니, 딱 그 모양. 봄기운이 약동하는 피아골 자락에 나무들의 수액 차오르는 소리가 가득하다. 피아골에서 고로쇠 채취로 40여년을 보낸 손경섭(53)씨의 설명.“고로쇠는 뿌리에서 새순으로 흘려보내는 수액을 뽑아낸 겁니다. 날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이맘때 아니면 채취가 안되지요.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많은 수액이 나오지만, 비가 오고 눈이 오거나 강풍이 불어 날씨가 좋지 않으면 수액 양도 적습니다.”손씨의 자랑이 이어진다.“경칩 전후 한 달 동안 채취하는 직전마을 고로쇠 수액은 야산에서 생산되는 것에 비해 당도와 효능이 뛰어나 그야말로 산중 보약이죠.” 동행한 문화관광 해설가 박미연(35)씨는 “체내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로쇠 수액 한 말(18ℓ)을 서너명이 밤을 도와 마시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지리산 자락의 민박집 등에서 관광객들이 밤새 고로쇠 수액을 마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죠.”라며 거들었다. 막 채취한 고로쇠 한잔을 들이켰다. 들척지근한 것이 온몸에 산골의 봄기운이 통째로 전해진다. 미각을 통한 봄맞이처럼 생생한 게 또 있을까. 한화리조트 지리산(www.hanhwaresort.co.kr)은 피아골 직전마을 주민들이 채취한 고로쇠 수액을 택배로 보내준다.18ℓ1통 5만 5000원.(061)782-2171. 글 사진 구례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로쇠 수액의 약리효과 단풍과에 속한 활엽수인 고로쇠나무의 껍질을 한방에서는 ‘지금축’이라는 약재로 사용해 왔다. 지금축은 성미가 맵고 따뜻해 풍을 제거하고 습기를 없애며(祛風除濕), 혈액순환을 도와 어혈을 없애는(活血祛瘀) 작용을 한다. 따라서 풍과 습이 원인인 사지마비, 동통은 물론 골절·타박상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로쇠 수액은 해발 600∼1000m의 고지대에 자생하는 고로쇠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올라가는 수액을 인위적으로 채취한 것이다.1m 정도 높이의 나무 몸통에 드릴로 1∼3㎝ 깊이의 구멍을 뚫은 뒤 호스를 꽂아 흘러내리는 수액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소백산, 오대산 등 산이 깊고, 공해가 적은 곳에서 많이 재배하거나 자생하며 ‘고로쇠’란 이름은 관절통 등 관절질환에 좋다는 뜻의 골리수(骨利樹)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동안 고로쇠 수액의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당분 칼슘 마그네슘 칼륨 비타민B1·B2와 비타민C, 각종 미네랄 등의 영양소가 일반 물보다 40배 정도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알칼리성의 이온화된 성분은 인체에 쉽게 흡수된다. 이 가운데 주성분인 당분은 1∼2%가량 함유되어 있으며 사당, 포도당, 과당이 함께 어울려 달콤한 맛을 낸다. 성분이나 맛의 차이는 고로쇠나무가 자라나는 토양, 기후, 채취 시기 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고로쇠 수액은 많이 마셔도 탈이 나지 않아 평소 물처럼 하루 4∼5회 음용하면 되며, 다른 음식에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함유 성분이 풍부하고 체내 흡수도 좋은 고로쇠 수액은 건강음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의 효능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지만 수액에 포함된 당분이 혈당조절을 원활하게 해 당뇨, 고혈압, 피로회복 등에 효능이 있고, 각종 미네랄은 류머티즘 관절염, 통풍, 신경통, 산후 후유증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칼슘성분이 많아 노약자나 골다공증 등이 많은 부녀자에게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위장병, 피부병, 비뇨기과 질환 등에도 좋은 효험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이경섭 강남경희한방병원장·경희대한의대 한방부인과 교수 ■ 전남 광양 섬진강 다압 매화마을 매화(梅花)라 한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난다.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줄 뿐만 아니라 그 자태가 연분홍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봄처녀의 아리따운 모습과 닮아 애간장을 녹인다. 매화는 또 한평생 춥게 살면서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옛 선비들은 매화의 그 고결한 기품을 본받으려 늘 가까이 두고 노래했다. 청빈과 지조, 그리고 올바른 법도를 지키게 하는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병풍이나 족자, 청자·백자 도자기에서도 오롯이 피어나 사시사철 길잡이 역할을 했다. 퇴계 선생은 생전에 매화가 좋아 시 여러 편을 남겼다. 그 중 한 구절이다.‘옛 책을 펴서 읽어 성현을 마주하고/밝고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아/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보게 되니/거문고 줄 끊어졌다 탄식하지 않으리’-壬子正月二月立春(임자년 정월 초이틀 입춘) 매년 3월 한 달이면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 일대에는 매화축제가 열려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자,‘얼씨구나 매화로다’처럼 춘정이 그립거든 봄의 교향악이 펼쳐지는 그곳으로 훌쩍 떠나보자. 지리산과 구비진 섬진강을 덮은 매화의 시향(詩香)에 흠뻑 빠져 봄맛을 진하게 느껴 보자. 글 광양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광양시청 제공 매화마을로 유명한 광양 다압면(多鴨面). 지난달 하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는 550리 섬진강, 아름다운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을 배경으로 그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경남 하동 나들목에서 매화마을로 들어섰더니 섬진강 강가 주변에는 대나무와 억새풀숲 또한 그림처럼 쭉 이어진다.‘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표지판이 그럴듯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나는 차창 밖으로는 ‘섬진강 재첩국’이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입맛을 자극했다. 매화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백운산 자락에 내려앉은 연분홍 구름선녀들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가를 감상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이 광경에 ‘와∼’라는 탄성을 연발한다. 또한 연인끼리, 가족끼리 그 추억을 담아내려고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꽃잎 가까이에 다가가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볼에 비벼보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 17일부터 25일까지 매화축제 가장 이른 시기에 봄소식을 전해주는 매화꽃을 소재로 한 매화축제는 섬진강변 매화마을 일원에서 해마다 3월에 열리며 전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되는 꽃 축제이다. 1997년 시작된 매화축제는 품질 좋은 매실과 매실로 만든 매실식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시작됐으며 전국의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섬진나루터와 청매실농원의 전통옹기, 그리고 섬진강 재첩잡이 풍경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강변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다. 광양시청에서 주최하는 매화마을 축제는 매화꽃이 만개하는 오는 17일부터 25일까지 9일 동안 열린다(청매실농원 자체에서는 이미 지난 1일부터 시작됐다). 주제는 ‘달빛 어린 매화, 섬진강 따라 사랑을’이다. 특히 올해는 ‘매화학술대회’‘매화작품전시회’‘매화음악회’ 등의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아울러 ‘나만의 매화만들기’‘봄을 깨워라’‘매화탁본’‘꽃차만들기’‘섬진강변 소달구지여행’ 등의 체험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밖에 전국 매화사진 촬영대회, 매화백일장, 매화사생화대회 등의 부대행사도 이어진다. 광양시청의 한 관계자는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50만명의 관광객이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섬진강의 유래 1385년 고려 우왕 11년 때의 일로 전해 내려온다. 경남 하동에 왜구들이 많이 출몰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혔다. 왜구들이 강을 건너려 할 때 두꺼비 수만마리가 몰려와 울음으로 왜구를 쫓아내자 이를 가상히 여긴 임금님이 강 지명을 한문으로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라고 했다. 예부터 두꺼비는 집지킴이, 재복신으로 불리웠다. 액을 물리치고 부귀영화를 불러주는 동물로 여겨진 것이다. 예를 들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 잘 살아라’,‘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등의 동요도 있다. 또한 두꺼비가 절에 나타나면 스님이 합장을 하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등 불가에서는 큰스님, 또는 실지 금와보살로 지칭되기도 한다. # 교통편 서울에서 갈 경우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다가 산청으로 빠져 국도로 가는 길이 있으나 지리산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아예 진주까지 가서 하동읍내를 통해 다압면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경험자들이 권한다. ●서울∼대전∼진주∼하동IC∼하동읍∼섬진교∼매화마을.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이용해 익산을 거쳐가는 방법도 있다. 익산∼전주∼구례∼간전교∼다압면∼매화마을. ●열차편으로는 하동역 또는 진상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이동하면 된다. # 주변 볼거리 ●자연관광 백운산과 4대계곡, 섬진강나루터, 광양만, 망덕포구와 배알도, 희양십경 등.(061)797-2731. ●문화유적 옥룡사지 동백림, 중흥사, 형제의병 유적지, 성불사 등.(061)797-3363. # 먹을거리 재첩국과 고로쇠 등이 풍부하며 그외 식당안내는 (061)797-2607로 하면 된다.
  • 1919년 英화가에 비친 한국

    일제때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3·1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 여류화가가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전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전’이 경남 창원시 경남도립미술관에서 2일 개막된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는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살다 1915년 여동생 부부와 함께 일본으로 갔다가 1919년 한국을 방문, 우리의 일상을 그렸다. 같은 동양이지만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식민지 한국의 풍경에 매료된 키스는 독립을 갈망하면서 일상을 분주히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진솔함을 주로 표현했다. 농부와 아낙네, 노인, 무인 등 평민과 왕실의 공주와 양반댁 규수, 음악연주자 등 다양한 인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가 한국에서 그린 수채화는 대부분 일본에서 목판화로 다시 제작됐고, 이 작품들을 일본과 미국, 유럽 등에서 순회전시해 당시 한국의 현실과 생활문화, 예의와 풍습 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국회 국방위, 결의안 통과

    국회 국방위는 21일 ‘북한핵 해결전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회 결의안은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정부에 정치적 부담은 될 수 있다. 결의안은 오는 23일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지만, 열린우리당과 통합신당이 반대하고 있어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표결 끝에 7대6으로 가결된 결의안은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이 대표 발의했으며, 여당 의원으론 열린우리당 조성태 의원이 유일하게 찬성 표를 던졌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이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나라 빚갚기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출판사 김광제 사장과 부사장 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됐다. 이들은 항일구국지로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대구지사원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구의 유력 인사들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고 주권을 회복하자.’며 모금운동에 나선 것이다. 당시 일제는 군수품을 들여오면서 담배도 함께 도입,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유통됐으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담배 유통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특히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의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발행부수 1만부를 자랑하던 최대 권위지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2월21일자에 대구민의소가 발표한 ‘국채보상취지서’전문을 싣고 모금운동에 활을 당겼다. 운동에는 전국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로부터 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 [2007 자치구 핫이슈](16)종로구 ‘청계 관광특구’ 조성

    [2007 자치구 핫이슈](16)종로구 ‘청계 관광특구’ 조성

    왕년의 ‘정치 1번지’ 종로구는 이젠 ‘문화·관광 1번지’로 통한다. 서울에 온 외국인관광객 85%가 종로를 찾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로에는 상인 대표들이 모여 관광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변변한 협의체조차 없었다. 그래서 올해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종로 재창조’의 해로 삼았다. 문화·관광을 위한 전통 거리를 가꾸고, 프로그램을 만들며, 시설도 제대로 갖춘다는 복안이다. ●외국인이 돈쓰는 곳으로 만들자 김충용 구청장은 15일 “한국에 오는 외국인관광객 10명중 8∼9명이 종로를 찾는데, 정작 종로에 머물면서 쇼핑이나 음식, 공연은 즐기지 않고 그냥 휙 둘러보고 간다.”면서 “우리 문화재나 전통문화를 보고 감동을 해서 돈을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로 주민들도 외국인들이 문화재에 대해 물어보면 누구나 자부심을 갖고 친절히 대답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방안을 찾아 보겠다.”고 덧붙였다. 종로구는 지난해 3월 서울시로부터 광화문 동화면세점∼숭인동 다산교 일대를 ‘종로·청계 관광특구’로 지정받았다.54만 602㎡에 1만 400여개의 점포가 밀집된 곳이다. 서울시 특구로 지정되면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이제껏 이렇다 할 사업을 펴지 못했다. 지난해 10월이 돼서야 관철동 삼일빌딩 앞에 관광안내소를 설치하고 11월에 관광특구 홈페이지를 열었다. 올들어 지난 5일에는 상인회 대표들로 구성된 종로·청계 관광특구협의회를 설립했다.15일에는 8곳에 관광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다음달부터는 불법 노점상을 일제히 정비하고 관광객을 태운 대형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공용주차장을 신설한다. 공중 화장실을 늘리고 보도블록도 정비할 예정이다. ●먹고 입고 체험하는 프로그램 제공 종로구에는 경복궁, 창경궁, 종묘 등 전통 문화재가 즐비하다. 그러나 막상 종로와 고궁을 찾은 외국인들이 만족스럽게 즐길 프로그램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김 구청장은 “지금까지는 고궁의 문만 열어 놓았을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이 경희·경복·창덕·창경궁 등 4대 궁궐에서 궁중음식을 먹어보고 궁중의상도 입어 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신설할 계획이다. 북촌한옥마을에서는 조선시대 양반 생활을 잠시 맛볼 수 있도록 한다. 원한다면 머슴으로 분장해서 마당청소를 할 수도 있다. 아울러 4월28일∼5월9일 하이서울 축제 기간에는 ‘종로·청계 특구’의 500여개 점포가 참여해 할인행사와 기념품 증정, 경품행사 등을 할 예정이다. 세운상가의 귀금속 점포, 광장시장 등도 할인 행사에 동참한다. 또 특구 안에 ‘만남의 장소’ 3곳을 만들어 연중으로 각종 축제의 중심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전통과 문화가 숨쉬는 곳이라고 해서 주민복지시설을 만드는 데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오는 4월1일에는 사직동에 수영장, 헬스장, 공연장 등을 갖춘 3층짜리 종로문화체육센터를 개관한다. 문을 열기 보름 전에는 주민들이 시설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행사도 갖기로 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열린세상] 제3후보,밥상을 기다리지 말라/김종배 시사평론가

    고민스럽게 됐다. 작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처신을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위치를 ‘통합 대상’에서 ‘통합 중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여권 구도가 얼추 정리돼 간다. 혼란상을 거듭하던 열린우리당이 지난 14일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합 신당 추진을 결의했다. 김한길, 강봉균 의원이 주도하는 ‘실용 탈당파’도 자신들의 원내교섭단체 명칭을 ‘중도개혁 통합신당 추진모임’으로 정했다. 천정배 의원이 주도하는 ‘개혁 탈당파’도 ‘민생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모두가 영입에 나설 채비를 갖췄다. 외부 인사, 제3후보가 ‘등쌀’에 시달리는 건 불가피하다. 통합의 중심에 서 달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다. 당사자들의 태도는 느긋하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연말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고민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달다 쓰다 말이 없다. 얼핏 봐서는 당연한 처신 같다. 여권이 3분 구도로 정리돼 가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도기적 질서다. 대선 막판에 다시 합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판에 섣불리 나서서 위험등급을 올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니다.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잔류파가 탈당파를 향해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다. 특정 의원의 과거 처신까지 들춰내는 정도다. 감정이 쌓여가고 있다. 통합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격화되면 감정의 골은 더 벌어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외부 인사, 제3후보는 ‘단일 추대’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과도기적 질서가 재정립된다 해도 범탈당파와 범잔류파의 양분 구도를 극복하긴 어렵다. 때마침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은 ‘통합’이 아니라 ‘선거 연합’을 거론하고 나섰다.‘똑같이’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 가자는 말이다.‘따로 또 같이’ 구도가 짜이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어부지리를 노리면서 계속 살피기만 하다가는 누구처럼 좌고우면한다는 비난을 사면서 고립될 수 있다. 도리도 아니다. 최종 선택권은 탈당파나 잔류파가 아니라 국민이 갖고 있다. 국민에게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를 보여주는 건 도리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실용 탈당파’의 일원인 이강래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평한 바 있다.“훌륭한 후보감이었지만 훌륭한 대통령감은 아니었다.”면서 15가지 잘못을 나열했다. 잦은 말실수, 코드인사,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 고집, 오만, 독선, 정책의 일관성 부족 등이다. 대개가 정책 역량이 아니라 정치 역량이다. 국민도 훌륭한 대통령을 뽑고 싶다. 그래서 정책 역량 못잖게 정치 역량을 검증하고 싶다. 말실수는 안 하는지, 고집, 오만, 독선은 보이지 않는지, 일관된 정책 집행 역량이 있는지를 재고 싶다. 쉬운 과정이 아니다. 행정의 달인이라던 고건 전 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치권 밖에서 맴맴 돌다가 대선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서너 달 만의 일이다.‘정치 달인’이 정치 역량 부족을 질타당하고,‘행정 달인’이 정치적 도전에 무릎 꿇는 게 작금의 정치판이요 대선판이다. 어부지리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오픈 프라이머리에 나서서 검증 받는 절차가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특수한 승부’에서 이기는 것과 ‘일상적 갈등’을 조정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엔 앞만 보고 가면서 상대를 내치면 되지만 후자는 전후좌우를 두루 살피면서 모두를 안아야 한다. 양반 다리하고 앉아 밥상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가 아니다. 직접 나서서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다. 대선에 나설 마음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게 도리다. 김종배 시사평론가
  • [국악인] 거문고 악성 옥보고 맥 이으려는 김무길 명인

    [국악인] 거문고 악성 옥보고 맥 이으려는 김무길 명인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민속악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어야 잘 할 수 있다. 세습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야 피에 음악이 흐르고 몸에 음악이 녹아 있어 조금만 배우면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전설적인 명인 명창들 대부분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다. 송흥록 명창이나 박종기 명인이 모두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간혹 음악가 집안 출신 아닌 사람이 음악가가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비가비’ 또는 ‘비개비’라 하여 좀 낮추어 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비가비’란 비갑(非甲)에서 온 말인데 ‘갑이 아니다’ 즉 ‘동류가 아니다’는 뜻이고 그 반대말인 동류를 가리킬 때에는 ‘관동’이라 한다. ‘관동’이란 양반들이 쓰는 ‘동관(同官)’이란 말을 뒤집어 그렇게 쓰는 것이다. 김무길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고 부인인 박양덕 역시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부부가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남편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부인은 판소리 명창인데 자녀들도 모두 국악을 전공하여 식구가 모두 음악을 하며 살고 있다. 김무길은 지금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지도위원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고 박양덕은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판소리의 예능보유자로 남원시립국악단 지도위원을 하고 있다. 부부가 지리산 자락의 폐교를 인수하여 ‘운상원 소리터’를 만들었는데 ‘운상원(雲上院)’은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공부했다는 그 운상원이다. 우리네 공부하는 방법이 산에 들어가 혼자 연습하며 공력을 쌓는 것인데 그런 독공(獨工)을 통해 깨닫고 또 깨닫고 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기 때문에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있는 옥보고의 기록을 보면 남원은 거문고의 성지(聖地)이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공부한 지 50년에 새로 30곡을 지었고 그것을 속명득(續命得)에 전했는데 속명득은 그것을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했다. 귀금 선생은 다시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에게 전했는데 이때 신라왕은 혹시 금도(琴道)가 끊어질까봐 그 음악을 잘 전승하도록 하라고 남원공사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극장(克上)과 극종(克宗) 이후에 신라에서는 거문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니까 고구려에서 발달한 거문고 음악이 남원 땅인 지리산 운상원에서 재창조되어 신라의 음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김무길과 박양덕이 가꾸고 있는 ‘운상원 소리터’는 역사적 사건과 맥이 닿는 대단한 곳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 한국 최고의 거문고 명인이 서울을 마다하고 이곳을 택하여 소리 터로 가꾸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 옛날 옥보고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김무길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무길은 1962년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의 국악예술학교는 고등학생 또래가 다니는 학교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국악을 모두 배우는 예술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배운 국악 실력으로 국악단체나 연주자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었다. 김무길도 국악예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거문고 산조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한갑득 명인에게 배웠다. 당시의 수업방식은 완전히 옛날식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방법이어서 악보도 없이 매일매일 배운 것을 구음으로 외우고 충분히 익힌 다음 그 다음을 배우는 식으로 배웠다. 김무길은 정말 열심히 배우고 매일 구음을 외웠다. 지금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구음을 척척 해가면서 지도하는 것은 다 그때 그렇게 무한히 외고 열심히 거문고로 탔기 때문이다. 한창 열심히 배우던 시절 한갑득 선생에게 “저는 선생님과 똑같이 탄다고 타는데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선생님과 같이 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선생께서는 “이 놈아 수만 독(數 萬讀; 수만 번) 하면 돼”라고 했다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한다. 김무길은 한갑득을 철저히 사사했다. 거문고도 배우고 음악에 대한 태도나 생각도 배우고 술도 배웠다. 특히 거문고산조를 타면서 그 음악이 그려내고 있는 자연의 경치나 타는 사람의 심성에 따라서 음악이 변하는 것에 대한 한갑득의 설명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거문고 소리가 온 우주의 것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한갑득과 쌍벽을 이루던 신쾌동 선생까지 사사했다. 최고의 거문고 명인 두 분 밑에서 철저히 배우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김무길은 한국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이자 최고의 사범이 될 수 있었다. 김무길은 지리산 운상원 소리 터에 있지만 전국에서 많은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배운다. 국공립단체에서 활동하는 전문 연주가들 다수가 그의 문하에서 거문고 산조를 배우고 있다. 한갑득류나 신쾌동류의 긴 산조는 김무길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어 그런 큰 제자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김무길과 박양덕이 서울에 있으면 훨씬 많이 활동하고 돈도 잘 벌 텐데… 왜 그런 산골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내외의 생각은 다르다. 꿈이 있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를 좇는 꿈이 아니다. 정말 순수한 인간 순수한 음악가로서의 꿈이다. 무엇보다 어려서 가졌던 꿈을 실현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건물과 시설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몰려오는 제자들과 두 부부가 살기에는 너무 클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시설에 공연장 하나를 더 지어 정말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본인들의 음악도 더욱 공력을 쌓고 싶고 다음 세대를 위한 더 좋은 작품도 만들어 볼 작정이다. 옥보고가 운상원에서 득음하고 새 음악을 많이 만들었던 것처럼 김무길도 운상원 소리 터에서 거문고 음악의 새 장을 열고 싶은 것이다.     월간 <삶과꿈> 2007.01 구독문의:02-319-3791
  • “지역특구사업 국비지원 절실하다”

    지역을 특색있게 개발, 새로운 부의 창출구로 만들겠다며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중인 ‘지역특화발전특구사업(지역특구)’에 대한 국비지원이 절실하다. 자치단체들이 지역개발을 위해 경쟁적으로 지역특구 사업에 나서고 있지만 열악한 지방재정으로 인해 많게는 수천억원에서 적게는 수십억원에 이르는 예산 확보가 어려워 총체적인 사업차질이 우려된다. 지역특구는 정부가 재정·조세 등의 지원을 해주지는 않지만 토지·교육·농업 등과 관련된 각종 규제를 풀어줘 지자체가 지역특성을 살려 개발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8일 경북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영양반딧불이 생태체험마을 등 12개 지역이 지역특구로 지정됐다. 또 포항호미곶 등 12곳이 지역특구 지정을 추진중이다. 이들 사업에 소요될 예산은 지방비와 민간자본 등을 합쳐 모두 9089억원에 달한다. 전국의 지역특구는 모두 72개다. 그러나 특구사업을 추진중인 대부분 광역 및 기초단체들의 재정자립도가 10∼30%대로 열악해 예산확보에 차질을 빚는 등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민자 확보도 재정여건상 도로, 상하수도, 전기 등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경북의 경우 24개 특구사업에 3337억원의 민자를 확보할 계획이지만 지난해 말까지 실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특구사업을 추진중인 자치단체들은 정부가 사업비 지원이 가능하도록 관련법을 개정, 적극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자치단체 관계자들은 “열악한 지방재정으로 특구사업 예산확보가 어렵다.”면서 “정부가 지역별 재정자립도를 감안, 진입도로 등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산이라도 지원해 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문화마당] 조정자/김지우 소설가

    교수·의사·작가·기자·경찰·주태백이 시민 둘, 도합 동물 일곱마리 우화(寓話) 한 토막. 장소 하여 그 옛날 말로 파출소, 요즈음 말로 지구대, 술 먹고 개 되는 시각.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이 땅의 대한민국 국민 두분이 사는 게 고달프더란다. 그래 한잔 걸쳤겠다, 눈앞에 외제차가 있기에 그놈 엉덩이를 한대 걷어찼단다. 그런데 하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차 주인에게 딱 걸렸고 여지없이 사과와 배상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미 술에 영혼을 팔아버린 악당들은 무조건 그런 적 없다며 딱 잡아떼었단다.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폭력도 행사할 것처럼 거칠게 굴었단다. 격분한 차 주인은 즉각 112에 신고했고 가해자 피해자 모두 싹 쓸어 졸지에 지구대까지 납시게 되었다. 지구대에 도착한 차 주인은 일절 대화를 거부하며 강경하게 나오더란다. 사과도 배상도 필요 없으니 무조건 고소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고소장을 작성하더란다. 원활한 사과나 배상을 받기 위한 제스처나 압력이 아닌 듯했단다. 경찰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막무가내였단다. 오로지 처벌만을 원한다며 서슬 퍼래 날뛰더란다. 차 주인과 동행이었던 교수와 작가와 기자가 지구대로 달려갔을 땐 막 고소장이 접수되고 있었다. 작가가 경찰 손에 넘겨진 고소장을 빼앗다시피 넘겨받았다. 교수가 차 주인인 의사를 떼밀고 나가고 기자도 악당 둘을 떼밀고 나갔다. 담배 한대씩을 물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차근한 설득과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1시간여를 설득해도 화해와 조정은 번번이 결렬됐다. 사과는 대충 옆구리로 삐딱이 해치우려 하고, 받는 쪽은 양반절로 곱다시 받으려 하니 될 턱이 없었다. 보다 못한 작가 한마디.“사과는 진정성을 담아 정중히 하는 겁니다.” 기자도 한마디.“대충 사과 모양 갖췄으면 못 이기는 체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요.” 경찰도 한마디 “싸울 줄이나 알지 조정할 줄을 알아야 말이지.” 세계 갈등의 조정자가 되겠다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말고 나라안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는 없단 말인가. 100년 정당을 외치며 창당한 열린 우리당이 불과 3년 만에 대나무 쪼개지듯 쪼개졌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고 정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잽싸게 자기 살 길 찾아 나간 것으로 그다지 곱게 보아지지 않는다. 마치 비바람 몰아치고 홍수 날 것 같으니 앞동질 쳐 피난가는 개미떼를 보는 듯했다. 적대적인 분위기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분쟁과 갈등, 대립과 암투 속에서 충돌과 마찰만을 조장하더니 해체의 단계로 나섰다. 분쟁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조정자로서의 위기관리 능력을 자생자득하지 못하면 그들이 꿈꾸는 합체란 한낱 요원한 꿈에 불과할 것이다. 정부와 대통령이 사회갈등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거나, 정부와 대통령이 갈등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에 과연 누가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국회와 시민단체와 언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자 역할에 있어 그 역할을 가장 잘못하고 있는 동네가 바로 수구보수 언론계이다. 언론이란 모름지기 객관적 시각과 냉철한 판단으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치유하며 통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불협화음과 불균형을 초래하며 이념대결을 선동하고 있으니, 정작 복잡한 사회의 조정자가 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세치의 혀를 가진 종이권력에 불과하다. 앞의 에피소드에서 보았듯이 인생도 조정자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보다 중재하고 조정하는 조정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김지우 소설가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는 위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왕기 서린 인왕산 서울의 물길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이 물을 개천(開川)이라고 하였다. 백악의 남쪽, 인왕산의 동쪽 명당에 궁궐을 지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종로를 경계로 하여 살았다. 왕족과 양반 관료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의 지역, 지금의 율곡로 양쪽 일대에 모여 살았다. 즉 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의 북촌이 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白岳·北岳)이다. 백악의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도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으며, 북악처럼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다. 그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할 무렵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의논도 있었다. 이는 전설이 돼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온 듯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겪고 나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다시 퍼져, 광해군 시대에 인왕산 기슭에다 경희궁(慶熙宮)을 세웠으며, 자수궁(慈壽宮)이나 인경궁(仁慶宮)도 세웠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왕위에 올라 인조(仁祖)가 되었으니, 인왕산 왕기설이 입증된 셈이다. ●장안의 명승지 인왕산 인왕산에는 왕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도 좋았다. 서울의 명승지로는 반드시 인왕산이 꼽혔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弼雲臺)·청풍계(淸風溪)·반송지(盤松池)·세검정(洗劍亭)을 포함했다.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가 서울 명승지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서울의 5대 명승지 가운데 인왕동과 백운동이 모두 인왕산에 있었다.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심 가까이 있으니, 성안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명승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인왕산을 보면 앞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습을 인왕산의 전부로 알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 부분에만 집과 관청이 들어섰고 사람이 살았으며, 역사가 이뤄졌다. 골짜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강희언(姜熙彦·1710∼1764)의 그림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뒤 몇개씩 합해져서 지금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몇개의 법정동이 합해져서 다시 행정동이 되었다. 사직동부터 체부동을 거쳐 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까지가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인왕산의 동네들이다. 인왕산에는 약수터도 많아서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서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다가 입산통제 25년 만인 1993년 2월25일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져, 서울시민들에게 등산로가 다시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33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등산로가 14곳이나 되며,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의 네 구역 인왕산은 경치가 좋은 명승지면서 경복궁에서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 건물이 모두 불타버려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양반과 중인들이 대대로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라는 이름에 비해, 이름난 정자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 사는 경복궁이 너무 가까운 데다, 높은 곳에서 궁궐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이 일대에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제한이 있다. 그래서 인왕산에 지어진 집들은 시대마다 그 구역이 달랐다. 경복궁이 정궁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옆동네에 관청만 있었고,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인왕산에 있었지만,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지 않는 옆자락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수성동(水聲洞)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따로 있었다. 수성동은 옥인아파트 자리라고 추정되는데,1960년대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김영상 선생이 증언하였다.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던 청풍계(지금의 청운동)나 위항시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옥류동(지금의 옥인동)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활기를 띠었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불타버려 오랫동안 폐허가 되자, 높은 곳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아전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인왕산은 구역과 높이에 따라 고관들의 호화주택이나 별장, 위항인들의 초가집들이 섞이게 되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누상동이나 누하동, 필운동 일대에는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다음 회에는 인왕산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안평대군과 무계정사, 안동 김씨와 청풍계, 김수항의 청휘각과 송석원, 필운대와 육각현 순으로 살펴본다. ■ 역사기록이 전하는 인왕산 인왕산은 역사 기록에서만 보더라도 명산으로 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인왕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무학(無學)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답했다. 이는 후에 인조반정으로 현재화된다. 또한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인왕산의 경치를 자랑했다. 한성 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적은데, 그중 놀 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줄임)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인데, 깊은 골짜기가 비스듬히 길게 뻗어 있다고 말했다. 유본해가 서울의 명승지와 동네를 소개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도 그 사실을 적시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물 맑고 바위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 이 동네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고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마누라도 참다못한 목사님「프리섹스」

    마누라도 참다못한 목사님「프리섹스」

    『「섹스」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처자를 버려두고 놀아나던「카사노바」목사가 아내의 고발로 쇠고랑을 찼다. 광주(光州)시 모 종합병원의 목사 박형주(朴炯柱·31)씨가 성직자(聖職者)에서 성직자(性職者)로 둔갑한 이야기. 결혼하자 남편 소행알고 호소하고 설교도 했으나 62년 충남 대전시 D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모 신학교 3학년에 편입, 성직자로서의 교육을 마친 다음 광주 제중병원 원목으로 근무하던 박형주(朴炯柱)목사는 65년 8월14일 충남 대전시에 있는 어느 외국인 선교사 집에서 현재의 부인 허(許)모여인(29)과 찬물 한그릇을 떠놓고 문자그대로 재건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기전 넘지 못할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을 올려야만 했던 허여인에게 박목사의 달콤한 속삭임은 모두 진실로만 들렸다. 그러나 두사람의 결합은 식을 올리자마자 먹구름이 일기 시작. 결혼을 하고 난 뒤 허여인은 박목사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것. 그러나 허여인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이제부터 새출발하면되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그러나 박목사의 여자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난잡해지기만 했다. 허여인은 만인의 귀감이 돼야 할 목사로서의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충고도 하고 성경에 있는 귀절을 들려주며 성직자의 길을 지키기를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와 놀아나는데 맛을 들인 박목사 귀에 아내의 설교가 들어올리 만무. 식모 손대고 홍등가 출입 놀아난 이야기 자랑삼아 법무부 대전소년원 원목으로 2년동안 일하다 67년 11월25일 종합병원의 목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친정에 가고 집을 비운새 박목사는 식모 이경순양(당시16·가명)을 자기 방으로 조용히 불러들여 가까이 앉히고는 변태적인 장난을 강요했다. 질겁한 이양은 얼마뒤 그 집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박목사의 추태는 이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는 1주일에 한두번은 홍등가를 드나들어야 직성이 풀릴만큼 정력(?)이 왕성한 사람. 박목사가 의외로 한달 동안 아내에게 접근하지 않기에 수상하게 생각한 허여인은 그 이유를 따졌다. 끔찍한 대답-『성병에 걸렸다』고 고백을 하더라는 것. 허여인은 남편과 같이 약을 먹어가며 속죄의 뜻으로 기도했단다. 그러나 박목사는 구약성서를 아내에게 그릇되게 풀이해 들려주며「섹스」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자기 멋대로의「프리·섹스」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허여인은 남편의 외도를 원망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아내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한것이 아닌가』하고 여러모로 남편시중에 신경을 쓰며 남편이 마음돌릴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박목사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놀아난 이야기를 자세한 부분까지 아내에게 고했다. 이럴 때마다 허여인은 회개하라고 타이르며 함께 손을 모았다. 남편의 마음은 점점 믿을수 없이 변해갔다. 남편의 퇴근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마음이 돌아설 기미는 전혀보이지 않았다. 허여인은 마침내 남편에 대한 희망을 단념했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남편의 꼬리를 잡기로 결심했다. 병원교회 목사를 기화로 입원한 아가씨 환자하고 마침 3월22일은 박목사의 생일. 준비 해놓은 보람없이 새벽3시가 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이 양반이 이젠 자기 생일도 몰라 볼만큼 여자에 미쳤구나』- 새벽4시가 넘어서야 남편이 돌아왔다.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날이 새자 다그치는 아내에게 박목사는 근무하는 병원5병동 17호실에 있었다고 고백. 허여인은 부리나케 17호실로 뛰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감은 들어 맞았다. 얼굴이 예쁘장한 정복숙(鄭福淑·23·광주시 산수동74)이「베드」에 누워있었다. 알고본즉 정양은 3월 10일 결핵으로 이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있는 중. 정양이 입원한 첫주일에 설교에 나선 박목사는 병원부속교회에서 정양과 눈이 맞은것. 이날부터 박목사는 17호실을 자주 드나들게 됐고 서로 친숙해졌다. 자주 만나면 정들게 마련. 허여인은 4월10일 밤 늦게 돌아온 남편의 목에서「키스·마크」를 발견하고 누구와 놀아났는지 따지자「미스」정이라고 고백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었다는 것. 그런데 그 날 밤 남자의 목소리를 빌어『정양이 음독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한 인간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허여인은 할수없이 남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6시쯤 돌아온 박목사는 정양이「세코날」을 먹고 중태에 빠졌더라고 아내에게 능청을 부렸다. 그것도 말짱한 연극이었던 것. 정양에 미쳐버린 박목사는 정양과 함께 병원을 나와 광주시 충효동 무등산 기도원으로 밀회장소를 옮겼다.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를 마음껏 즐겼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전북 정읍군 내장사로 사랑의 보금자리를 바꿨다. 박목사의 머리에서 가족은 이미 사라졌고 오직 정양뿐. 이때부터 그는 퇴근후 거의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 일을 저질렀을때 어느쪽에서 먼저 한것도 아니었고, 둘이 서로 진실했기에 진실을 토했을 뿐이에요. 단 한번 뿐이었읍니다. 그걸로 모든게 이뤄졌고 더욱 진실해졌읍니다』정양의 알쏭달쏭한 첫날밤 고백. 『목사의 직을 내놓고 인간으로 살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기위해 사랑을 찾은 것입니다. 서로 울고 몸부림치며 사랑을 했읍니다』 이것은 박목사의 인간적(?)인 고백. 그들은 모든것을 등지고 무등산장 아래 깊숙한 원효사에 도피하기로 결심. 지난 4월29일 밤 10시쯤 입산하여 5월4일까지 마음껏 단꿈을 꿔오다 허여인의 끈덕진 추격에 덜미를 잡혀 결국 쇠고랑을 찬것. [선데이서울 70년 6월 14일호 제3권 24호 통권 제 89호]
  • [인터뷰] 우리 모두 내 안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터뷰] 우리 모두 내 안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글 고은별 자유기고가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경이었다. 그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렇게 금방 눈에 띄는 차가운 질감의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을 쓴 여성은 내 기억에 김홍남 관장이 처음이다. 여자라고 사리는 것이 없었고 자신을 드러내기에 두려움이 없었기에 운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전통과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사람. 홍남(紅男)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김 관장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일까? 박물관이 문을 연 지 61년 만에 남성들이 우월적 지위를 누려온 이 분야에서 김 관장이 여성 최초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것은 문화계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은별 | 우선 꿈을 이루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김홍남 | 감사합니다. 고은별 | 지난 4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평화 포럼에서 만난 후 몇 개월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어요. 김홍남 | 그렇지요. 그 동안 제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인사라는 것이 되어 봐야 아는 것이고 뚜껑이 열려 봐야 아는 것이잖아요. 정상적으로 그날 하루의 일과를 지내고 있었는데 전임 관장님께서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은별 | 이름이 붉은 홍(紅) 자에 사내 남(男) 자 세요.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인가요? 김홍남 | 딸이 위에 셋이다 보니까 아들을 낳으라고 지어 주셨어요. 우리 집과 친하게 지내던 한의사 한 분이 지어 주셨는데 평범한 여성으로 키우려면 초등학교 지나서 이름을 바꿔주라고 하셨지요. 어머니께서는 호적의 이름은 바꾸지 않고 저를 애칭으로 남이라고 부르셨어요. 고은별 | 어머니의 교육열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홍남 | 다섯 형제 중에서 어머니하고 제가 가장 가깝지 않았나 생각해요. 우리 형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요. 어머니께서 저를 아주 특별하게 사랑해 주셨지요. 호흡기 장애로 돌아가셨는데 2개월 내지 3개월 정도 무의식 상태였어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제가 어머니를 안아드리면서 귀에다가 “엄마 나 누구야?”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어머니 입이 움직이면서 ‘김 홍 남’ 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은별 | 어머니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김홍남 |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몇 개월 동안 말 한마디 못하시고 무의식 상태였는데 제 이름 석 자를 말씀하신 거예요. 한 달 후에 돌아가셨지요. 고은별 | 보스다운 면모가 많으시다고요? 김홍남 | 보스답다기보다 독단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것을 좋은 의미로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바꿔서 말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독단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리더가 되려면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우선 앞서 가야 하지요.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인데, 앞서 보지 않고 어떻게 리더가 되겠습니까? 문화에서 비전이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서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앞서 있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들다는 표현이 되기도 하지요. 선견지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옳은 것이 있고 따라오라 하면 독단이라고 합니다. 저는 전력투구하는 타입입니다. 앞이 보이는데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몰고 가거나 의도를 곡해할 때 참 안타깝고 외롭습니다. 고은별 |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김홍남 | 저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이에요. 긍정적인 사람이지요. 묻어두지는 않고 그냥 잊어버립니다. 고은별 | 에코 피스 리더십(Eco-Peace Leadership) 명예이사로도 활동 중이시죠? 김홍남 | 유네스코와 관련이 있는 단체입니다. ‘평화는 자연 사랑과 함께’라는 취지를 갖고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자연 속에서 자연 사랑과 평화 사랑을 체득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고은별 | 북촌포럼은 어떤 모임인가요? 김홍남 | 경복궁에서 창덕궁 사이가 북촌이지요. 본래는 가회동의 양반 집들, 궁 집들도 많았어요. 옛날에는 대가집들이 많았지요. 윤보선 전 대통령 집도 있고…. 서울에 마지막 남은 한옥집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고은별 | 박물관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김홍남 | 획기적인 것은 없어요. 우리 국민들이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전시를 통해서 한국 문화의 뿌리와 특성, 예술적 성취 등을 느끼면서 체험하고 한국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도록 해줄 수 있어야겠지요. 꼭 가봐야 하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야지요. 고은별 | 현장 교육을 온 학생들이 많았어요. 문화 교육 기관으로서의 박물관의 역할이라고 할까, 어떤 프로그램들을 구상하고 계신지요. 김홍남 | 지금 참 잘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어린이 박물관도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합니다. 다만 학생 단체 입장수로 일년의 관람객 수를 메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오는 것은 강제 동원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문화 선진국이 되려면 그냥 삼삼오오 찾아와서 수준 높은 관람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 높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지금 선진 박물관에서 전시만큼 중요시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박물관 안에서 성인 교육, 청소년 교육, 장애인 교육 등의 사회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을 담당하는 부도 없고 과도 없습니다. 아마추어 수준이지요. 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할 우수한 인적 자원이 절실합니다. 고은별 | 우리는 지금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예술의 핵심, 문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홍남 |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유산을 현대와 미래의 문화 재창조의 발원지로 쓰는 데서 힘이 나오겠지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어떤 공통부분이 있지만 공통이 아닌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시아의 일부라는 것을 당당히 인정하고 아시아 문화 속에서의 한국 문화가 갖고 있는 특색, 문화의 힘을 키워 나가야만 아시아의 문화도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요. 각자 자기 몫을 다함으로써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문화는 우월하고 어느 나라의 문화는 열등하다는 식의 논리는 옳지 않습니다. 한국 문화만이 최고라고 하는 인식은 자기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게 합니다. 고은별 |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십니까? 김홍남 | 그런 편이지요. 이제 막 육순의 나이에 뭘 그렇게 대단한 로맨스를 하겠어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고은별 | 어릴 적의 꿈이 지금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나요? 김홍남 | 우리 어머니가 원예를 하셨고 항상 무엇인가를 수집하셨어요. 어머니의 안방이 작은 박물관이었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 같았어요. 보스 기질이 있었지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닐 때 사진부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는데 여자로서 처음으로 사진부 부장을 맡았습니다. 고은별 | 내부에 존재하는 여성성에 대해서…. 김홍남 | 어릴 때부터 여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못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그렇게 키우지 않으셨어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결혼이 꼭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었지요. 사리는 것이 없었어요. 고은별 | 앞으로의 꿈은? 김홍남 | 이 삶을 잘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자기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위대함을 위대한 실현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 모두 내 안에 위대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 위대한 가치를 그냥 가치로 남겨놓지 말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실천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0분 인터뷰….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김홍남 관장은 절도 있고 명확한 어조로 질문에 답하였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인터뷰가 시작된 지 정확히 삼십 분이 지나자 김 관장은 다른 스케줄 때문에 약속장소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일어섰다. 지난 8월 9일 박물관장에 취임하여 공식 업무를 시작한 김 관장이 얼마나 바쁜 일정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 앗 뜨거워/ 빌 버포드 지음

    “셀러리의 가장 좋은 부분을 내버리고 있잖아. 이봐요, 기자 양반. 당신 해고야! 우리의 원칙은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고, 그 비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서 돈을 버는 거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이같은 무시와 폭언을 들으며 잡지 ‘뉴요커’의 기자가 노예처럼 주방에서 버틴 이유는? 바로 세계적인 명성의 요리사 마리오 바탈리의 뉴욕 최고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밥보’의 주방이었기 때문이다. 요리에 자신있다고 큰소리치던 괴짜 기자 빌 버포드는 요리 잘하고, 술 잘 마시고, 여자 좋아하며, 크게 웃는 요리사 마리오를 친구 생일잔치에서 우연히 만난다. ‘앗 뜨거워(빌 버포드 지음, 강수정 옮김, 해냄 펴냄)’는 파스타를 삶기 위해 기자직을 내던진 버포드의 주방에서의 생존기이자 쓸 만한 요리사로서의 성장기이다. 일류식당의 주방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회학을 세밀히 그려냈다.‘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423쪽, 1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강신옥 변호사 “출세욕에 눈멀어… 사표라도 냈어야”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다면 사표를 내더라도 저항했어야지.”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유죄 선고한 판사들 명단이 공개돼 여론의 찬반이 뜨거운 가운데 자신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갔던 강신옥(71) 변호사가 사법부를 향해 일침을 가했다. 강 변호사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을 변호하다 “긴급조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자신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젊은 기자양반은 상상을 못합니다.”라면서 말문을 뗀 강 변호사는 유신헌법에 따라 계엄령이 전국에 내려졌던 70년대를 한마디로 ‘중세시대’로 규정했다. 긴급조치는 법이 아니라 폭력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계엄령 당시 법정인 보통군법회의에선 장교가 재판장이 되어 판결을 좌지우지했고, 반대심문도 받아주지 않은 채 재판을 종결하기도 했다. 강 변호사는 사법부 내의 반대 여론에 대해 묻자 “법률가가 불법적인 폭력에 따라야 하느냐.”며 반문했다.“출세하려는 욕심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양심에 따라 했다면 유신시대는 금방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정법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자기합리화이자 강변일 뿐이라고 말했다. 출세욕에 눈이 멀어 형량을 더 세게 때리던 판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강 변호사는 “사법부의 권위가 어디서 나오냐.”면서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권위”라고 말했다. 현재의 사법부가 공동 죄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사 정리에 망설이고 있다면서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하루 빨리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던 강 변호사는 58,59년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에 잇달아 합격하고 62년 서울지법 판사로 있을 때 영장기각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경주지법으로 발령나자 임명 2년도 안된 상태에서 법복을 벗었다.임광욱기자 limi@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그동안 한양 인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들의 이야기를 몇차례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관청의 아전들이 많았지만,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고, 서당 훈장도 있었으며,인쇄전문가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지식인 이라고 평가되는 중인은 과연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다. ●중인의 직업은 수십가지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지으면서,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우리나라 백성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부류를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았다.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농·공·상(農工商) 가운데 한 직업을 택해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혹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하여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그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직업은 네가지가 아니라 수십가지였다. 이 책의 총론에서 그 예를 들었다. “종실(宗室)과 사대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집안이 되고, 사대부보다 못한 계층은 시골의 품관(品官)·중정(中正)·공조(功曹) 따위가 되었다. 이보다 못한 계층은 사서(士庶) 및 장교·역관·산원(算員)·의관과 방외의 한산인(閑散人)이 되었다. 더 못한 계층은 아전·군호(軍戶)·양만 따위가 되었으며, 이보다 더 못한 계층은 공사천(公私賤)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노비에서 지방 아전까지가 하인(下人) 한 계층이고, 서얼과 잡색(雜色)이 중인 한 계층이며, 품관과 사대부를 양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대부가 혹 신분이 낮아져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이 오래 되면서 혹 신분이 높아져 차츰 사대부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인은 전문직업인 이중환이 말한 중인은 서얼과 장교·역관·산원·의관 등의 전문직업인이다. 서얼은 물론 양반이지만 진출에 제한받기 때문에 저절로 중인과 한 부류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위항문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정조시대였는데, 정조(正祖)는 중인과 시정배(市井輩)를 이렇게 구분하였다. “중인에는 편교(校)·계사(計士)·의원·역관·일관(日官)·율관(律官)·창재(唱才)·상기(賞技)·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녹사(錄事)의 칭호가 있다. 시정(市井)에는 액속(掖屬)·조리(曹吏)·전민(廛民)의 이름이 있다. 이것이 중인과 시정의 명분이다. 이들 밖에도 하천(下賤)의 복사역역자(服事力役者)들이 수만이나 되니, 군예(軍隸)·노복(奴僕)·공(工)·상(商)·용고(傭雇)같이 미천한 자들도 또한 낫고 못한 차이가 있다.” 정조가 말한 중인들의 직업을 요즘으로 치자면 장교, 공인회계사, 의사, 외교관 겸 동시통역사, 천문학자, 변호사와 법관, 서예가, 화가, 공무원 등이다. 정조는 중인 외에 시정(市井)과 하천(下賤)을 구분했는데, 이 세가지 계층을 아울러 당시에는 위항인(委巷人)이라고 했다.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인데, 넓은 의미의 중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숙영이 지은 서문에 “유희경은 본래 위항인이다.”고 했는데, 본래는 천한 종이었다.‘화곡집’ 서문에는 “아깝게도 황군은 위항인이다.”라고 했는데, 황택후는 금위영 서리였다.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만이 아니라, 훨씬 낮은 서리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 바로 위항인이다.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위(委)는 곡(曲)이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이다. 즉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 바로 위항이고,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위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로 내려가면서 양반보다 부유한 중인들이 많아졌으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열가지 복을 누린 역관 조수삼 송석원시사 동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호는 추재(秋齋)로 한양 조씨이다. 그의 후배 조희룡은 그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는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다. 문장력이 넓고도 깊었는데, 시에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사대부의 풍채와 문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이 화원이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직업적인 역관이 아니었는데,28세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처음 중국에 따라갔다고 한다.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다. 그 뒤론 북경 사람과 말할 때에도 필담(筆談)과 통역의 힘을 빌지 않았다.” 역관을 선택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몇년 동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그는 북경까지 가는 길에서 중국어를 다 배운 것이다. 여섯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뒤엔 역관의 신분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서울의 모습이 바뀌자, 전에는 듣고 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조수삼은 그러한 이야기를 71편 골라서 ‘기이(紀異)’라는 시를 쓰고 그 앞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군상의 소묘이면서도 사회변화를 보여준다. “내 나무(吾柴)는 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나무를 팔면서) ‘나무 사시오.’라 말하지 않고,‘내 나무’라고만 말하였다. 심하게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무’라고) 외치다가, 나무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틈이 나면 길가에 앉아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고본 경서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위에도 열두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쪽 거리 북쪽 거리에서 ‘내 나무’라고 외치네. 어리석은 아낙네야 비웃겠지만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다오.” 고본 경서를 읽는 것으로 보아 나무 장사꾼은 양반계층에서 몰락한 지식인인 듯하다. 그래서 차마 다른 장사꾼들처럼 “나무 사시오.”라는 존댓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내 나무”라고 반말을 씀으로써 양반 선비의 마지막 체면을 세웠던 듯하다.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 그러나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어도 쓸 데가 없는 것이 당시 사회였고, 그런데도 끝까지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서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에 비하면 조수삼은 행복한 중인이었는데, 조희룡은 그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가지란 첫째 풍도(風度), 둘째 시문(詩文), 셋째 공령(功令), 넷째 의학, 다섯째 바둑, 여섯째 서예, 일곱째 기억력, 여덟째 담론, 아홉째 복택, 열째 장수이다.” 8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여 남의 부러움을 샀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공령문인데, 과거시험 때에 쓰는 시나 문장이다. 양반들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답안지를 쓰기 위해 공령문을 배웠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 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문집에 공령시가 실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의 문집에는 공령시가 57편이나 실렸다. 그가 공령시를 잘 지었다고 소문났지만, 자기가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이 아니라 양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연습한 것이다. 그는 61세에 경상도 관찰사 조인영의 서기로 따라갔는데, 실제로는 가정교사이다. 그는 83세에야 진사에 합격했는데, 영의정 조인영이 시를 짓게 하자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를 지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합격자 명부인 방목에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표시했으니,83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진사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응시했는데, 그는 60년이나 뒤처졌다. 시의 제목은 “진사시 합격자를 발표한 날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입으로 읊은 시”이다. 조인영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기쁨을 시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한 것인데,“가까스로” 합격해 난삼을 걸친 기쁨과, 몇백 짐의 책을 외우고도 60년 늦게 합격한 중인의 한을 함께 표현했다. 그나마 영의정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전문직업을 지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면서도 신분적으로는 60년이나 양반에게 뒤진 것이 바로 중인의 한계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살기좋은 지역 만들기] “술 한잔 받으시게” 아침부터 막걸리 권유에 빠져…

    서울신문과 행정자치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공동 추진하는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우수 지역 탐방이 마무리됐다.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여 동안 각 지방자치단체가 추천하는 우수 마을 50여곳을 다녀 왔다. 방문한 대부분의 마을이 본받을 만한 장점으로 가득했다. 기사로 쓴 내용보다 기사에 담지 못한 뒷얘기가 더 많다. 마지막으로 그 일부나마 소개해본다. ●어르신들 반짝이던 눈가에 이슬 맺히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사상마을로 향하던 차 안에서 주민 수가 100명 남짓이라는 말을 듣고 “많아야 4∼5명쯤 만날 수 있겠구나.”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은 족히 30∼40명은 됐다. 젊은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기자보다 20∼30년 이상 연배가 많은 어르신들이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처음에는 기자의 질문과 설명이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좀 격한 표현을 썼다.“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는 지금 여기에 모이신 분들만 잘 되라고 하는 정책이 아닙니다. 지금도 자식들은 모두 외지로 떠났는데, 어르신들이 살아계실지 모를 10년이나 20년쯤 뒤에 마을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마을이 남아 있을까요? 어르신들보다는 어르신들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이곳에서 잘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왔습니다.”순간, 어르신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보았다. 열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얼마나 절실함을 느끼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자와 이 어르신은 눈으로 얘기했다. ●“우리도 궁금한 게 많은데…” 이처럼 현지 취재에 나선 기자가 주민들이 보여준 열의 때문에 머쓱해지는 순간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대승마을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모이신 분들은 이 지역 주민들과 공무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 자문을 해주는 예원예술대 한지문화연구소 관계자 등 기자를 응시하는 눈이 너무 많아 괜한 부끄러움까지 들 정도였다.1시간여 동안 질문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순간,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기자님, 고작 그것만 물어보나요? 우리도 궁금한 게 많은데….” 이 후 기자는 그때까지 주민들에게 했던 질문보다 더 많은 답변을 해야 했다. 마을 발전을 갈구하는 주민들의 궁금증에 비하면 기사를 쓰기 위한 기자의 궁금증은 ‘새 발의 피’였다. ●“헉! 어르신 한명당 한잔?… 그럼 기자는?”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다랭이마을을 갔을 때다. 취재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에 이른 아침 서둘러 마을을 찾았다. 취재를 마친 뒤 다른 마을로 떠나기 위해 부랴부랴 짐을 꾸리는 기자의 손은 어느덧 동네 어르신들의 몫이었다. 어르신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을을 일부러 찾은 손님을 그냥 보내면 주인된 도리가 아니지. 이 술 한 잔만 받고 가시게. 우리 동네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약이야. 젊은 기자 양반이 막걸리 한 잔 못 마신다고 하겠어?” 하지만 속았다. 한 잔은 어르신 한 명당 한 잔이었다. 연거푸 막걸리 몇 잔을 들이킨 뒤 마을을 다시 둘러봤다. 우리 농촌에서 황폐해진 것은 눈으로 보여지는 주변 환경일 뿐, 가슴으로 전해지는 훈훈한 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애교섞인 청탁에 대략 난감 “저는 그냥 취재 기자일 뿐인데요.” 현지 취재를 다니면서 기자가 가장 많이 한 표현 중 하나다. 정책 취지와 방향을 잘 알고 있을테니, 마을 발전에 조언을 하거나 중앙정부에 얘기를 잘 해달라는 식의 ‘애교섞인 청탁’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민 평균 수입이 연간 1억원이 넘는 ‘전복 마을’을 찾았던 전남 완도군의 경우 기자에게 재방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겠노라고 답변했지만,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현지에서 만난 지자체 공무원들의 모습도 다양했다.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와 관련, 기사화됐던 내용을 모두 꼼꼼히 스크랩한 뒤 방문 당시 궁금한 점을 조목조목 질문하는 ‘학구파형’이 상당수였다. 기자와 동행한 행자부 공무원 등에게 무조건 잘 할테니 잘 봐달라는 ‘읍소형’, 다른 지역의 동향부터 살피는 ‘스파이형’, 우리 지역 사정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흔들림없이 계획을 추진하겠다는 ‘요지부동형’ 등이다. 보여지는 모습은 달랐지만, 모습 뒤에 감춰진 열의는 대부분의 공무원이 똑같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도 기자와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누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지자체 우수계획 선정을 위한 1차 심사 결과,126개 시·군 가운데 47곳이 통과했다. 다음달 초면 최종 선정 지역 30곳이 가려진다. 최근 1차 심사에서 탈락한 지자체 공무원이 전화를 걸어왔다.“장 기자님. 그동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탈락했지만, 낙담하지는 않습니다. 더 노력해서 내년에는 반드시 뽑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지역이 나아질 수 있는 길인데, 쉽게 포기할 수 있나요.”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마을 발전 씨앗 뿌리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정책은 ‘위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지역의 변화는 ‘아래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지역을 가꾸기 위해 소수의 실천가가 아이디어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파문을 일으킨다. 이 소수의 실천가는 마을 발전의 비전을 세우고 씨앗을 뿌려 주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런 실천가들을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국 우수 마을 현장취재 당시 부산·울산·경남지역을 함께 다녀왔다. 이 지역에서도 이러한 실천가들을 중심으로 독특한 개성을 바탕으로 삶터를 가꾸어 가는 다양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울산 울주군 맑은내배꽃마을을 방문했을 때, 경남 밀양군 밀양연극촌을 방문했을 때 꽃보다 아름다운 마을 리더를 만났다. 마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쇠락해 가는 마을을 재생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초기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행정기관을 설득하는 이장님, 대도시가 아닌 소규모 도시에 연극단을 세워 ‘연극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단장님. 이들 모두가 지역의 숨겨진 보물과 같았다. 이런 마을 리더를 묵묵히 지원해주고 협력하는 많은 지원기관도 눈에 들어왔다. 지자체 공무원과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그들이다. 지역만들기, 마을만들기는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하고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빚어낼 수 있는 조화로운 하모니다. 일본의 마을가꾸기 운동인 ‘마치츠쿠리’는 지난 1970년대 시작돼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늦었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우리도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마을이 있고, 이런 마을에서 활동하는 리더가 있고, 이를 지원하려는 정부가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는 이제 막 시작됐지만, 그 터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닦여있었다. 김상광 행정자치부 사무관 살기좋은지역기획팀 ■ 밤에 눈 비벼가며 토론 ‘방관자’서 ‘참여자’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지방자치단체 우수계획 선정을 위한 1차 관문을 통과했다.2차 평가가 남아 있지만, 적어도 “우리도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과 희망을 갖게 됐다. 남원시는 지리산과 광한루, 섬진강을 간직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마을 환경을 정비한 뒤 30년 넘게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다 보니 인구 유출과 고령화의 늪에 빠져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는 주민들의 열의로 증명됐다. 대상지역 선정을 위한 자체 공모에서 무려 16개 마을이 신청한 것이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대산면 구름다리마을을 대상지역으로 뽑았다. 지난해 11월 추수가 끝나지 않은 터라 주민들은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밤에 눈을 비벼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마을 부녀회에서는 매일같이 밤참을 내왔고, 브레인 스토밍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사실상 브레인 스토밍을 했다.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의 의견도 빼놓을 수 없었다. 마을에 위치한 대산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푸짐한 상품을 내걸고 ‘우리 지역을 어떻게 만들었으면 좋을까.’에 대한 아이디어도 받았다. 무려 75가지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모였으며, 상당수는 계획에 반영했다. 지금까지 지역개발 방식은 지역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중앙이 기획하고, 지방이 따르는 하향식이었다. 창의성과 특성있는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고, 주민 참여는 구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는 지역이 갖고 있는 자원과 개성을 활용해 주민들이 직접 그려나가고 있다. 주민들을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바꿔놓은 것이다. 강춘성 전북 남원시 부시장
  • [깔깔깔]

    ●정신병원에서한 사람이 정신병원 원장에게 어떻게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결정하느냐고 물었다. “먼저 욕조에 물을 채우고 욕조를 비우도록 차숟가락과 찻잔과 양동이를 줍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숟가락보다 큰 양동이를 택하겠군요.”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욕조 배수구 마개를 제거합니다.”●경상도 할머니 경상도 할머니가 독립기념관에 나들이를 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느라 피곤해진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쉬는데 경비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할머니, 이 의자는 김구 선생님이 앉던 자리입니다. 앉으시면 안돼요.” 그래도 할머니가 태연히 앉아있자 경비원은 다시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화가 난 할머니 “아, 이 양반아!주인 오면 비켜주면 될거 아이가.”
  • 할머니 시인·작가 댕기머리 처녀 되어

    할머니 시인·작가 댕기머리 처녀 되어

    그들에게 그런 열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40대에서 80대인 열아홉 사람의 시인과 작가들이 지난 9월 29일부터 30일, 이틀 동안 남산자락에 있는 <문학의 집·서울>에서 공연한 문인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자신의 모습을 던져버리고 극중 인물에 빠져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필자는 이 연극의 스태프로 기획단계부터 마지막 쫑파티까지 참여하면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한 연극의 늪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번 연극을 통해 새롭게 연극이라는 늪 속에 빠진 문인이 몇 사람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문인극은 오래 전에 몇 번 공연된 바 있지만 최근 10여 년 간은 볼 수가 없었는데 지난해 <산림문학관>을 개관하면서 김후란 이사장이 문인극에 관심을 가져 이번 <문학의 집·서울> 개관 5주년 기념행사로 서울시와 유한킴벌리의 지원을 받아 공연이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맹진사댁 경사>는 1943년 오영진 작가가 발표한 때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공연되고 있는, 대학에서나 기성극단에서 선호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돈으로 진사를 산 천민이 더 대접받는 양반이 되고 싶어서 가문에 혹해 사윗감을 보지도 않고 혼사를 결정하고는 그 사돈댁에 어울리는 가문이 되어야 한다며 맹씨네 족보를 거짓으로 바꾸는 등 법석을 뜬다. 그러는 중 사위가 병신이라는 소문을 듣는다. 아무리 가문이 탐난다 해도 하나뿐인 딸을 병신한테 시집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맹진사는 궁리 끝에 딸의 몸종을 대신 시집보낸다. 그런데 초례청에 나타난 신랑은 외모가 준수했다. 이에 놀라 밤 피신을 시킨 딸을 데려다 놓지만 신랑은 대신 시집온 착한 이뿐이를 진정한 아내로 맞겠다고 공포하여 맹진사 내외와 그 딸은 하늘이 무너지는 허탈감에 빠진다는, 인간의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됨을 보여주는 풍자극이다. 몇 번을 보아도 새로운 재미로 공감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문학의 집·서울> 개관 다섯 돌을 맞는 잔치 분위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연출을 맡은 극단 미추의 강대홍 상임연출가는 출연을 희망하는 문인들이 모인 첫날, 대본을 한 번씩 읽어보게 한 후 사흘 후에 배역을 결정하기로 하고는 걱정에 빠졌다. 문인들이라 감성이 있어 책 읽기는 좀 하는 것 같은데, 나이 드신 분이 많아 대사 외우는 것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주최측에서 원래 문인극이란 전문극단 공연과 달리 실수하기 마련이고 관객들도 실수를 애교로 보아준다고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손님을 초대해놓고 실수하고 장난처럼 공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연출가와 출연자 모두가 열심히 연습들을 했다. 그러기는 해도 으레 대사는 까먹을 테고 실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막을 올리고 보니 입석까지 꽉 메운 관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에 빠져들어 재미있어 하며 놀라워할 정도로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연극이 어설플 줄 알았는데 너무 잘했다” “얼마나 연습했느냐?” “현실에 맞는 풍자 몇 마디 감칠맛 났다”는 등 칭찬이 줄을 이었다. 맹 노인 역의 황금찬 시인은 여든아홉이며, 열세 사람이 6~70대여서 전체 출연자의 평균 연령은 일흔에 가까웠다. 그리고 주인공 맹 진사 역의 유자효 시인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출연자가 무대에 처음 서는 것이고 보면 그만큼의 성과 뒤에는 부단한 노력이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처녀 역을 맡은 박순녀 소설가, 김여정 시인, 박정희 시인, 최금녀 시인, 지연희 수필가도 모두 할머니이다. 이 할머니들이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봄놀이 나와 두어 마디하고 퇴장하는데, 그 몇 마디를 위해서 보름 동안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대사가 입에 붙지 않아 어색했지만 자꾸 연습을 하니 자신이 붙고 욕심이 생겨서 공연이 임박해서는 연출자에게 한 번 더 나오게 해달라고, 그게 안 되면 대사라도 한마디 더 달라고 조르기도 했단다. 누군가가 “연극은 모르핀 같아서 한번 맛을 알게 되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서도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두 나름대로 무척 바쁜 사람들이 출연료도 거의 없이 겨우 20여 일 연습기간 동안 오가는 교통비 정도인 데도 불구하고 연극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공동체 작업에 맞도록 서로 위하고 배려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연습에 몰두하여 공연의 성공을 가져오게 하였다. 연극이 끝나고 쫑파티라는 것을 했다. 연습하는 동안의 에피소드도 얘기하고 미진함도 털어놓으며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아쉬움을 가슴 가득 안은 채 문인극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헤어졌다. <맹진사댁 경사>에 출연한 문인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맹노인 : 황금찬 시인 맹진사 : 전 SBS이사 유자효 시인 맹진사 부인 : ‘시마을문학회‘ 대표 홍금자 시인 갑분이 : 장안대학 교수 김유선 시인 이쁜이 : 박미경 수필가 삼돌이 : 전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시인 미언(신랑) :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이길원 시인 미언의 삼촌 :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성춘복 시인 박참봉 : 박정기 희곡작가 김규은 : 김규은 시인 텁석부리 : 장안대학 교수 정승재 소설가 처녀 I : 동남대학 교수 지연희 수필가 처녀 2 : 최금녀 시인 처녀 3 : 전 세륜중학교 교장 김여정 시인 처녀 4 : 박순녀 소설가 처녀 5 : 전 한양여대 교수 박정희 시인 농민1·친척 갑 : 한국희곡작가협회장 김흥우 희곡작가 농민2·친척 을 : 한국시문학연구소 소장 김경식 시인 농민3·친척 병 : 동덕여대 명예교수 조병무 평론가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 [데스크시각] 고구려를 추억함/심재억 문화부차장

    최근 문화재연구소가 펴낸 ‘고구려 벽화고분 보존실태 조사보고서’의 도록을 넘기다가 ‘안악 3호분의 벽화’를 찍은 기록사진에 눈길이 멎었습니다.‘5000년으로 소급하는 우리의 핍진한 역사, 그 허리쯤에 마치 살진 시궁쥐라도 꿀꺼덕 삼킨 배암처럼 커다란 결절을 만들고 있는 고구려의 기억은 지금 우리의 삶과 정신에 있어 과연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귓전에서 문득 대륙을 말 달리던 고구려 사내들의 우렁우렁한 외침이 들립니다. 그러나 오로지 갈망의 부산물인 이런 환청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고구려는 하나의 추상입니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가당찮은 의식의 빈곤은 우리 삶에서 고구려를 통째로 거세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가 가진 고구려적인 것이라야 불가시(不可視)한 피(血)의 섞임 같은 것뿐이니 도무지 실체를 잡아낼 수 없는 추상일 수밖에요. 그런 추상의 고구려가 안악묘 벽화의 기록사진 속에서 오롯이 되살아납니다. 푸줏간의 아궁이에서는 활활 불길이 일고, 가마솥에서는 돝고기가 맛있게 삶기고 있습니다. 숨소리 거칠게 드넓은 요동벌을 말달리던 사내들의 허기를 채울 요깃거리겠지요. 갓 삶아낸 돝고기에 독한 술 몇잔 걸친 그 사내들, 문득 ‘사추리 뻐근하게’ 뻗치는 억센 힘을 감당하지 못해 벌건 대낮부터 ‘안해’를 껴안고 나뒹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치미와 용머리기와를 얹은 푸줏간의 정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의 퇴행적 신분사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조선시대라면 천민 중에서도 맨 앞줄에 섰을 백정이 어찌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저다지 말끔한 옷을 입고 비린 고기를 다뤘겠습니까. 관청에 잡혀가 태질이라도 당할 죄였을 터인데, 그 벽화속 어디에도 조선 백정의 그런 주눅든 표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집도 그렇습니다. 측벽의 반듯한 인(人)자 대공과 추녀끝 낙수 자리에 깎은 듯 만들어 놓은 단은 이 건물이 막 지은 집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푸줏간에 내걸린 살집 푸짐한 멧돼지와 꿩, 그리고 노루가 보기에도 넉넉합니다. 일하는 사람들도 편해 보입니다. 삶은 고기를 건지거나 그릇을 쌓아 안은 여인의 표정이 강퍅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풍경에서 고구려의 자유로움을 읽습니다. 불길이 활활 이는 아궁이와 한 세트인 온돌은 고구려가 낳은 우리 민족 창의력의 결정체입니다. 어떻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구들을 덥힐 생각을 했을까요. 세계 역사에 유일한 이 빛나는 창의의 근본은 바로 자유분방함일 것입니다. 자유는 속박받지 않는 상태이고, 속박 없음은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그러니 조선시대처럼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층이 모든 권력과 부, 사회적 절차와 결과까지도 독점했던 그런 막힌 의식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라는 역사적 실체를 이해할 수 없겠지요. 고구려는 강건한 나라였습니다. 중국에 맞서 한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던 그 억센 강단은 우리 민족이 가진 역동성의 실체였고, 고리타분한 신분의 굴레를 씌워 인민을 속박하지 않았던 자유분방함은 굴종을 거부하는 자존감의 원천이자 발랄한 창의력의 모태였습니다. 새해 벽두에 그 고구려를 추억합니다. 지리멸렬한 현실이 그렇게 제 생각을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두가 지쳤다고들 말하고, 모두가 가망 없다고들 외고 다닙니다. 그러나 힘이 다해 허리가 휘면 다리 힘으로 버티고, 다리가 꺾이면 사지로 땅을 짚고 서야 합니다. 지난 한해, 참 힘든 여정을 헤쳐 왔습니다. 그러나 힘겨움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방증입니다. 너른 대륙을 짓치며, 산과 들을 아우르던 그 고구려 사내들의 기상으로 이 한해 끝까지 줄달음질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고구려 사내들의 ‘발정 같은’ 힘을 얻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심재억 문화부차장 jeshim@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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