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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종’과 ‘북’/문소영 논설위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재미를 붙여 생쥐가 풀 방구리 드나들 듯 들락날락한다. 한 달 전쯤 절의 누각에 함께 놓인 ‘종’과 ‘북’ 사진들이 등장하더니 요즘에 넘쳐나고 있다. 유행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에는 ‘대파’ 사진이 합세했다. 이른바 ‘종’과 ‘북’과 ‘파’ 사진을 함께 올린 뒤 ‘나는 종북파’라고 선언하고 깔깔댄다. ‘정부와 생각이 다르면 틀린 것이다’고 규정하는 무리한 ‘종북몰이’에 대한 반발을 해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방송에서 “요즘은 구세군이 종 쳐도 가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종북세력이라고 하니까. 북 쳐도 못 가고”라고 발언했는데, SNS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현실이 부조리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면 반발하고 풍자하기 마련이다. 상하 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도 무능하고 위선적인 양반과 선비를 비판하는 안동 하회탈춤이 탄생하지 않았나. 종북몰이에 종·북 사진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애매해진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해외여행 | 이시카와·도야마·니가타 일주-북쪽의 땅에서 만난 일본의 속살

    해외여행 | 이시카와·도야마·니가타 일주-북쪽의 땅에서 만난 일본의 속살

    규슈도, 홋카이도도 아니고 니가타에 간다고 하니 주변 반응은 한결같이 시큰둥하다. “일본에 가겠다고?” 걱정이 앞선 이 정도 반응은 양반이다. “방사능 먹으러?”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말은 재밌자고 하는 농담일까? 잠시 망설였지만 가기로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이 앞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은 살짝 비장하게 시작됐지만 결국 일주일간의 여행은 싱거우리만치 즐거웠다. 이시카와에서 시작해 도야마를 거쳐 니가타까지 북상하면서 걱정은 완전히 잊었다. 태풍을 교묘히 피해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은 늘 그렇듯 친절했다. 평화스러운 풍광 이면에 어떤 불안이 잠재해 있는 걸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보고 마주한 일본은 평온하기만 했다. 내가 보지 못한 일본에 대해선 모른다. 어차피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단, 이번 여정이 일본을 꿈꿀 때 기대한 모든 게 충족된 여행이라곤 말할 수 있다. 대자연을 엿보고, 건강하고 화려한 음식을 즐기며, 가장 일본다운 문화를 느꼈다. ●이시카와현에도시대의 유흥, 히가시 찻집 거리여행은 이시카와현에서 시작됐다. 이시카와현은 일본 금박의 99%를 생산한다. 금을 1만분의 1밀리까지 얇게 펴 금박을 만들 만큼 수공기술이 뛰어나다. ‘유노쿠니노모리’라는 전통공예마을에선 금박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염색한 천을 냇물에 길게 담가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이시카와의 고찰, 나타데라는 717년에 지어진 절이다. 바위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그 주변을 사계절 내내 초목이 감싸 안는다. 나타데라를 거쳐 카쿠센 계곡으로 여정은 이어졌다. 그곳엔 1,300년 된 야마시로 온천이 있다.이시카와는 일본의 북알프스와 바다 사이에 위치한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채 가장 일본적인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통만이 이시카와의 전부는 아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는 현대미술관으로 명성이 높은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도 있다. 내가 몇년 전 가나자와에 온 이유도 바로 이 미술관 때문이었다. 가나자와에선 전통과 포스트모던이 조화롭다.가나자와에는 히가시 찻집 거리가 있다. 에도시대의 거리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가나자와성 기준으로 동산(동쪽에 있는 산)의 찻집 거리라 해서 히가시(동쪽)라 부른다. 1820년경 만들어진 거리에서 200년 가까이 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일본어로 찻집(오차야)이라곤 하지만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은 아니다. 에도시대, 이곳에선 부유한 상인들이 게이샤를 불러 사케를 마시며 연회를 열었다. 히가시 찻집은 상류층의 사교장이다.시마찻집은 189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1층에선 게이샤들이 살았고, 2층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손님을 접대했다. 찻집을 밝히는 데 전기를 쓴다는 것과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것을 빼면 189년 전 모습 그대로다. 시마는 히가시 거리에서 일본 정부가 유일하게 중요 문화재로 지정한 찻집이다. 에도 시대, 시마찻집이 지어질 당시에는 엄격한 규제로 인해 2층 건물을 짓는 게 쉽지 않았다. 당시 시마찻집은 히가시 찻집 거리에서 몇 안 되는 2층 건물 중 하나였다. 시마찻집 2층으로 올라가면 ‘손님방’과 ‘대기실’이 있다. 손님은 손님방에 앉아 있다가 대기실에서 게이샤의 공연을 봤다. 에도시대의 유흥이다.히가시 찻집 거리는 가장 가나자와다운 거리를 대표한다. 교토 기온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었으니 가장 일본적인 거리다. 찻집의 가는 격자문은 히가시 찻집 거리의 트레이드마크다. 밤이 되면 게이샤가 연주하는 샤미센이나 북소리가 격자문 사이로 흘러나온다. 지금도 이곳에선 게이샤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 게이샤들의 공연을 볼 수 없다면 대신 찻집 2층에서 히가시 거리를 내다보며 양갱을 곁들인 말차를 마시는 것도 좋다.일본인의 마음, 겐로쿠엔겐로쿠엔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정원이다. 일본 정원의 전형으로 불린다.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로 꼽히니 가히 국보급 정원이다. 이시카와현립 역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겐로쿠엔 그림을 보면 600년 전 겐로쿠엔과 현재 모습이 거의 다르지 않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지나온 정원이다. 겐로쿠엔이란 이름은 중국 명원名園의 여섯 가지 조건에서 왔다. 중국에서 명원을 꼽을 때 정원의 광대함, 고요함, 고색창연, 인력, 수로, 조망성 등 6가지 조건을 살피는데, 겐로쿠엔은 이 모든 조건을 갖췄다는 얘기다.본래 겐로쿠엔은 가나자와 영주의 정원이다. 가나자와의 5대 영주인 쓰나노리가 성 맞은편 경사지에 작은 정원을 만든 게 시초이고, 12대 영주인 나리나가와 13대 영주 나리야스가 대규모 정원으로 개조했다. 겐로쿠엔은 한가운데 연못을 파고 주위에 정원을 조성했지만 겐로쿠엔에는 연못만 있는 게 아니다. 산이 있고, 폭포가 있고, 섬이 있다. 매화나무 숲도 있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의 다리도 있다. 다리를 잇는 납작한 돌은 거북이 등 모양이다. 숲과 산, 물과 섬, 동물 등은 자연을 모방하고 축소한 결과다. 일본사람들은 겐로쿠엔을 ‘자연풍경식 정원’이라고 설명한다. 처음엔 그 말이 의아했다. 자연을 모방하고 축소했으니 내 눈에는 겐로쿠엔 자체가 인공적이다. 단적으로 겐로쿠엔의 이끼를 관리하는 사람만 스물다섯명이다. 자연적으로 보이기 위해 인공적으로 가꾼다는 역설이다.대대손손 가나자와의 영주들은 180년에 걸쳐 겐로쿠엔을 가꾸었다. 영주들은 겐로쿠엔을 통해 장수와 영겁의 번영을 염원했다. 나이든 분들이 연못을 배경으로 스탠드에 줄지어 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의 마음엔 아마 비슷한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상향 같은 정원에서 장수와 번영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스탠드의 저 분들 모두 건강하시기를.●도야마현북알프스의 산악협곡을 달리다지난 밤 숙소인 도야마현의 우나즈키 뉴 오타니 호텔은 깊게 파인 쿠로베 협곡에 면해 있다. 협곡 사이로 쿠로베강이 흐르고, 협곡 저편으로 우나즈키역이 보인다. 우나즈키역에서 출발하는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 이 깊은 산 속까지 왔다. 협곡열차는 ‘토롯코 열차’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졌다. 토롯코라는 이름은 광산이나 토목공사에 쓰이는 작고 지붕 없는 화물차를 말한다. 토롯코 열차는 북알프스에 둘러싸인 협곡을 달리는 산악관광열차다. 해발 224m의 우나즈키역에서 해발 599m의 게야키다이라역까지 20.1km를 1시간 10분 동안 달린다.토롯코 열차가 지나는 협곡은 일본 제일의 V자형 협곡으로 불릴 만큼 가파르다. 까마득한 두 개의 낭떠러지 사이에 놓인 붉은색 아토비키바시 철교를 따라 건너는 순간은 협곡열차의 하이라이트다. 이른 아침에 탄 열차가 산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점점 차가워진다. 가벼운 점퍼 하나를 걸쳤으니 한기를 피할 순 없다. 사진을 찍겠다고 완전히 오픈된 객차에 탄 것도 오산이다. 게야키다이라역까지 한 시간을 오르는 내내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면서도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기차를 타고 375m를 올라가는 동안 하차가 가능한 역은 쿠로나기역, 카네츠리역, 게야키다이라역 등 세 곳뿐이다. 카네츠리역 부근에는 만년설 전망대가 있고, 종착역인 게야키다이라역 부근에는 족욕장이 있다. 게야키다이라역에서 족욕탕까지 가다 보면 거대한 암석 밑을 지나는데 길을 만들기 위해 암석을 잘라냈다. 사람이 그 밑을 지나면 마치 당장이라도 사람을 삼킬 것 같은 모양이다. 아쉽게도 게야키다이라역에선 만년설을 볼 수 없었다. 마침 옆 자리에 앉은 도야마현청 관광국의 다가타씨가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준다.“얼마 전 다테야마(다테산)에 다녀왔어요.”다테야마라면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다. 해발 3,000m가 넘는다. 다테야마의 만년설을 보며 다가타씨처럼 언젠가 꼭 여기에 오를 거라고 다짐했다. 3,000m급 산에 올랐다 하니 다가타씨가 프로페셔널한 산악인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그녀는 4년 전 대학을 졸업한, 언제나 소녀일 것 같은 앳된 아가씨다.1732년의 산간마을, 고카야마 합장촌집의 외형이 합장한 손을 닮았다 해서 합장촌이라 불린다. 메밀밭에 둘러싸인 도아먀현의 고카야마 합장촌에 들어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마을이지만 민속촌이 아닌 실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이와세케는 300년 전 집으로 가로 26.4m 세로 12.7m 높이 14m에 달한다. 메이지 시대까지 35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이 집에서 살았다.합장촌의 집들은 못이나 쇠장식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밧줄을 엮어 지었다. 지붕을 엮는 데 사용한 억새는 10년마다 마을사람들이 전부 모여 함께 바꿔 준다. 합장촌은 세계문화유산이지만 민박도 할 수 있다. 온천을 즐기고, 합장촌에 묵으며 전통 화로인 ‘이로리’에 둘러앉으면 시간은 어느새 1732년으로 돌아간다. 합장촌 사람들은 3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travie info 토롯코 열차의 객차는 보통, 특별, 릴렉스, 파노라마 객차 등 4가지로 나뉜다. 보통 객차는 완전히 오픈되어 창문이 없고, 특별 객차는 좌석이 마주 앉은 채 고정되어 있다. 릴렉스 객차는 좌석의 방향을 앞뒤로 전환할 수 있다. 파노라마 객차의 천장은 유리다. 보통 객차 외에는 별도의 승차권을 사야 한다. 우나즈키에서 게야키다이라역까지 운임은 어른 1,660엔.●니가타현대원시림, 사사가미네 고원도야마를 떠나 니가타를 여행하다 보니 ‘설실雪室’과 만난다. 눈을 이용한 보관창고다. 쌀은 물론이고 무와 당근 같은 야채뿐만 아니라 와인도 설실에 보관한다. 니가타식 자연냉장 보관소인 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배경이 바로 니가타다.니가타는 일본 열도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우리나라 동해와 접해 있다. 바닷가를 따라 도야마에서 니가타로 이동하면서 동해 넘어 속초 같은 우리나라 도시를 그려 보았다. 에치고 나나우라 해안도로를 달리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 저 너머에 우리나라가 있다. 문득 여정이 끝나가는 게 아쉽다. 결국 니가타에서 예정보다 이틀 더 머물기로 한다. 니가타는 점점 ‘나의 도시’가 되어 간다.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는 니가타의 이와무로 온천에 있는 유모토야 료칸이다. 료칸의 오카미상이 너무 젊어 깜짝 놀랐다. 결혼을 하고 도시를 떠나 이곳에 와 오카미상이 되었다. 이와무로는 에도시대 중기부터 번성했던 온천이다. 기러기가 뜨거운 물에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온천을 발견했고, 이로 인해 이와무로 온천은 ‘기러기 온천’이라 불린다. 유모토야 료칸에 도착한 날 이와무로 온천 개장 300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열렸다. 벼룩시장에서 배낭과 책을 샀다. 배낭은 1,000엔, 책은 100엔이다. 배낭은 서울에서 10만원을 훨씬 더 주어도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디자인이고, 책의 정가는 각각 3,500엔, 2,400엔이다.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사진이 있는 책들이다.대자연에 둘러싸인 니가타는 일본의 100대 명산 중 11개의 산을 가졌다. 해발 1,270m의 사사가미네 고원은 묘코 고원 서남쪽에 있다. 약초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수령 300년이 넘는 가문비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섰다. 여름철에는 산 아래보다 10도 정도 기온이 낮다.사사가미네 고원에선 여기저기서 ‘곰 주의’라고 쓴 팻말을 볼 수 있다. 아직 한국인 관광객이나 등산객은 물론이고, 외국인 방문객 자체가 없고, 인적조차 드물다. 어쩌다 마주치는 등산객은 달랑거리는 종을 배낭에 달았다. “곰이 종소리를 싫어해요.” 고원 사무소 안내인의 말이다.사사가미네 고원을 돌아볼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못 됐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사사가미네 숲에 푹 빠져 버렸다. 그곳에선 나무며 풀이며 바위, 숲 속의 모든 존재가 스멀스멀 살아 움직이고, 나무와 풀이 소리칠지도 모른다. 사사가미네 숲은 그런 곳이다.사진을 찍다 보니 일행들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나만 남았다. 어디선가 심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곰 주의’ 팻말이 떠오른다. 어느 순간 숲 가장자리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더니 내 앞을 후다닥 지나간다. 뭐지! 그 순간엔 정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휴…. 원숭이다. 잠시였으나 곰과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난생 처음이다.향긋한 차 같은 사케 이마요츠카사 양조장외지인들에게 니가타는 눈, 쌀, 사케로 유명하다. 눈으로 인해 수질이 독특하고, 쌀이 좋고, 쌀맛이 좋으니 사케 맛도 좋아진다. 사케 양조만 놓고 보면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이를 증명하듯 니가타에만 94개의 사케 양조장이 있다. 일본 최고의 사케는 니가타의 쌀, 기후, 물, 양조술에서 온다. 고시노간바이, 구보타, 핫카이산 같은 니가타 사케는 언제는 일본 사케 탑 쓰리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많다.이마요츠카사 양조장은 가업으로 이어 왔다. 매년 그해 생산한 쌀을 가지고 10월 초부터 이듬해 3월까지 사케를 만든다. 매년 12월 초순이면 그해 만든 첫 번째 사케를 맛볼 수 있다. 올해에는 1.8리터짜리 3만병 정도를 만들 예정인데 내년 6월이면 모두 팔릴 거라고 한다. 100년도 더 된 이마요츠카사 양조장 건물은 드라마세트장으로 사용될 정도로 분위기가 독특하다. 이마요츠카사 양조장에선 사케가 만들어지는 과정, 저장고에 관한 이야기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양조장 오너인 야마모토씨의 설명을 들으며 양조장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사케를 시음했다. 여기서 맛본 사케 중 한 가지는 매우 부드럽게 넘어간다. 향긋한 차 같은 사케다. 사케의 새로운 발견이다.도쿄도 오사카도 아닌 니가타한국에서 기자들이 왔다고 가나자와 TV와 니가타 신문사에서 우리를 취재하러 왔다. TV 리포터가 묻는다. “가나자와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가나자와 같은 소도시는 복잡하지 않아 좋아요. 지방의 작은 도시이지만 도쿄나 오사카에도 없는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이란 훌륭한 현대미술관도 있고요.” 어설픈 영어로 대답을 하면서 생각했다. 여기는 정말 뉴스거리가 없구나. 그만큼 평온한 도시다. 다음날 TV 속 나를 알아봐 줄 사람을 위해 가나자와에 하루 더 있어야 했는데 일정이 허락지 않았다.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와 자연 속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들 성정이 남다르다. 료칸 종업원들만 봐도 이를테면 교토의 료칸 종업원들이 친절하지만 엄격하다는 점에서 아주 프로페셔널하다면 도야마나 니가타의 종업원들은 아무래도 엉성하다. 그게 정겹다. 심지어 현청 공무원들 느낌도 소박한 게 남다르다. 때가 묻지 않은 공무원들이라 할까.다시 이시카와나 도야마, 니가타에 오고 싶다. 무엇보다 이번 겨울엔 스키를 타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니가타현에만 50개가 넘는 스키장이 있다. 내년 봄이나 가을엔 이시카와의 다테야마(해발 3,015m)에 오르고 싶다. 한라산이 1,950m, 백두산이 2,750m이니 다테야마는 아주 큰 산이다. 하지만 해발 2,450m까지 버스가 다닌다니 565m만 올라간다면 3,000m급 산에 오를 수 있다. 사사가미네 고원의 깊은 숲도 제대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 단, 곰과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이시카와나 니가타에 다시 오고 싶은 이유다.☞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글·사진 Travie writer 박준취재협조 니가타현청 www.enjoyniigata.com/korean 이시카와현청 www.hot-ishikawa.jp/korean 도야마현청 www.info-toyama.com/korean
  • 주말 영화

    주말 영화

    음란소설 창작에 빠진 사대부 문장가 윤서 ■음란서생(OBS 일요일 밤 10시 15분)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윤서에게 권력은 좇기에 허망한 것이고, 당파 싸움은 논하기에 그저 덧없는 것이다. 이렇게 권태로운 양반의 일상을 살아가던 윤서는 반대파의 모략으로 골치 아픈 사건을 맡게 되고, 이 와중에 저잣거리 유기전에서 일생 처음 보는 난잡한 책을 접하게 되면서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낀다. 윤서는 급기야 몸소 음란소설을 써 보는 용기를 발휘하게 된다. 그렇게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음란소설을 발표하던 윤서는 1인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고신 전문가로 악명을 떨치는 가문의 숙적 광헌에게 소설 속 삽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광헌 역시 자신의 맥박수치를 끌어올리는 제안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윤서와 나란히 음란 소설 창작에 빠져든다. ■철가방 우수씨(스크린 토요일 밤 11시) 고아로 자라 가난과 분노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우수의 인생은 마치 좁고 어두운 감방과도 같이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고 생각한 그때, 가난한 사람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아이들과의 기적과도 같은 만남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우수는 중국집에서 철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번 70만 원의 월급을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들어 본 ‘감사하다’는 인사는 평생 외로웠던 우수에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나날을 선물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뜨거운 감사는 이제 삶의 원동력이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비커밍 제인(씨네프 일요일 밤 10시) 혼기 꽉 찬 나이에 남자보단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해 부모님의 골칫거리가 된 제인 오스틴. 그런 그녀 앞에 부모님의 잔소리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톰 리프로이. 겸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함을 가진 최악의 남자다. 산책길에서, 도서관에서, 무도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그와 티격태격 신경전이 계속되지만, 이 느낌이 왠지 싫지만은 않다. 게다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은 주책없이 뛰고 솟아오르는 영감으로 펜은 저절로 움직인다. 한편 부와 명예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귀족집안의 미스터 위슬리의 청혼으로 자신은 물론 식구들 모두 가난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된 제인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 공론장의 지각변동, 시민을 깨우다

    공론장의 지각변동, 시민을 깨우다

    시민의 탄생/송호근 지음/민음사/548쪽/3만원 한국의 근대는 언제 형성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숙해졌을까. 사회과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이 주제에 대해 탐구해 왔지만 한국 근대의 기원과 진화 궤적은 여전히 모호하다. ‘시민의 탄생’은 19세기 후반 등장하기 시작한 ‘자각인민’들이 근대적 개인을 거쳐 시민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가 근대를 분석하는 틀로 삼은 건 ‘공론장’이다. 저자는 이를 ‘특정 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활용하는 정보와 상품의 유통 영역이자 수단으로 인쇄 매체, 모임, 토론 단체, 교통망, 그 밖의 유통 기제들을 동원하여 계급적 합의를 창출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공적 기제의 총체적 네트워크’라고 규정했다. 쉽게 말해 여론이 형성되고 결집하는 모든 영역이 공론장이라 보면 무리가 없겠다. 저자는 “조선의 역사는 공론장 구조 변동의 역사”라고 잘라 말한다. ‘조정 담론장’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양반 공론장을 계승한 ‘지식인 공론장’이 형성됐고, 동학운동에 의해 ‘세속적 평민 공론장’이 대두한 데 이어 지식인 공론장과 평민 공론장이 상호 연대하고 공명하면서 조선 근대화의 맹아도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로의 이행은 일제의 조선 병탄으로 갑작스레 차단된다. 저자는 이 과정을 ‘동굴’에 비유한다. 개인과 사회는 동굴 속에 갇혔고, 시민과 시민사회의 출현은 늦춰졌다. 시민의 탄생은 식민 통치 아래 유일하게 허용됐던 상상력의 공간, 문학의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동굴 속의 공론장’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책은 1,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말안장 시대’의 조선을 다룬다. ‘말안장 시대’는 마주보고 있는 양 모서리가 맞닿는 ‘안부’(鞍部)에서 착안한 용어다. 저무는 시간과 생성되는 시간이 겹쳐지는 부분, 그러니까 주자학 지식기반의 양반 사회가 언문(한글) 기반의 인민 사회로 변이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2부는 근대 이행에 관한 분석이다. ‘말안장 시대’를 마감한 조선이 일제에 병탄되는 과정 속에서 근대인과 근대사회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공론장 분석을 통해 규명하고 있다. 아쉽게도 책은 여기까지만 적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동굴 속 시민이 현실 세계로 나아가 진정한 시민을 형성하는 이 파노라마, 그리고 해방 후 전쟁과 산업화를 거쳐 민주적 시민 사회를 만들어 간 역경의 드라마를 추적하는 작업은 후속과제’로 남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극단적인 경쟁과 갈등으로 소통이 사라진 한국 사회가 대화와 토론, 합의가 이뤄지는 공론장과 그에 따른 시민의 출현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유효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열린세상] 이 시대의 회재불우/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열린세상] 이 시대의 회재불우/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는 곡도 곡이려니와 그 특이한 노랫말과 웅심(雄深)한 의미로 인해 세인의 사랑을 받았다.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한 인간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만년설이 쌓인 킬리만자로 산의 기슭까지 올라갔다가 죽은 표범으로 형상화한 이 노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다음 구절은 더 그러하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사람들은 재주와 능력을 지녔는데도 때를 만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산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에 동병상련하며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회재불우(懷才不遇)! 그렇다. 재능을 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보낸 경우는 동서양 모두에 있었으나, 특히 과거가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던 근대 이전 중국과 한국에서 지식계층의 보편적 콤플렉스였다. 몇 년에 한 번, 그것도 수십 명밖에 뽑지 않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여서 대부분의 운이 나쁜 낙방거사는 회한에 찬 삶을 보내야 했으며 급제했더라도 임금이나 권력자의 눈에 들지 못해 평생을 하급 관리로 보낸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양반이 아니라서, 남성이 아니라서 아예 과거에 응시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뛰어난 평민, 여성까지 포함한다면 회재불우 콤플렉스는 동아시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이나 보편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나라 때에는 모든 문학 장르 중에서 시가 특히 번성하여 시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데 훌륭한 시인 중에 낙방거사가 많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시는 궁핍한 이후에야 좋아진다”(詩窮而後工)라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시성(詩聖)이라고 기림을 받는 두보(杜甫)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일생을 미관말직으로 곤궁하게 살았는데 그의 시 전반에 깔려 있는 처량한 정조는 분명 회재불우의 심정과 관련 있을 것이다. 낙방해서 불행하기 그지없는 삶 속에서 나온 그의 시가 후대에 시가문학의 정전(正典)이 되어 부귀영화의 지름길인 과거 시험의 교과서가 된 것은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다. 장안에 눈이 내리면 술병을 차고 종남산으로 매화를 찾으러 들어갔다는 고사로 유명한, 그래서 산수화의 한 주제가 되어버린 낭만파 시인의 거두 맹호연도 회재불우를 한탄한 곤궁한 선비였다. 낙방거사인 그가 당시의 재상에게 올린, 벼슬을 애원하는 시는 보기 민망할 정도다. 이들보다 대선배로서 동진(東晋)의 위대한 전원시인 도연명도 회재불우 콤플렉스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이 시기에 과거제는 아직 시행되지 않았으나 군벌과 문벌이 관직을 독점하는 시대에 살았던 도연명은 처음에는 강렬한 정치 참여의 욕망을 지녔으나 현실적으로 좌절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고 보는 시각도 만만찮다. 한국에서 회재불우의 대표적 인물은 신라 말기의 천재 최치원이다.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국제적으로 문명을 날렸으나 귀국해서는 6두품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쇠망한 조국을 되살려 보려는 포부를 펼치지 못한 그의 통한은 “가을바람 쓸쓸하게 불어오는데, 세상에는 날 알아주는 이 드무네”(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라는 그의 시구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시대라고 해서 세간엔 무수한 명사 강좌가 개설되고 관련 서적의 출판이 봇물처럼 이어지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경영철학에 휴머니티와 인문학을 더할 것을 강조한 이후 기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인문학 열풍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하고 있다. 잡스의 탁견은 알아줘야 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경영을 위해서도 인문학의 도래는 분명 환영할 만하다. 다만 인문학의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게 여전히 추운 겨울인 곳은 정작 인문학의 본산인 대학이다. 문학, 역사, 철학을 전공하고 어렵사리 학위를 취득한 수많은 인문학 박사들이 생계 때문에 오늘도 이 대학, 저 대학으로 유리표박(流離漂泊)하는 이 현실, 이 아이러니를 어이해야 할까. 인문학 대학 강사들이야말로 이 시대 회재불우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 무도 멤버 7인 관상…유재석 ‘양반’ 하하·길·노홍철은?

    무도 멤버 7인 관상…유재석 ‘양반’ 하하·길·노홍철은?

    MBC 무한도전 멤버 7인의 관상이 공개돼 화제다. 지난 9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에는 관상 전문가가 출연해 무도 멤버 7인의 관상을 분석했다. 이날 관상 전문가는 무도 멤버 7인의 관상에 대해 유재석은 우두머리상, 박명수는 욕심과다상, 하하는 쥐상, 정준하는 곰상, 길은 호색상, 노홍철은 사이비교주상, 정형돈은 돼지상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관상을 조선시대에 대입하면 정형돈은 왕, 박명수는 명예 욕심을 내는 상인, 유재석은 양반, 하하는 망나니, 정준하는 무역상, 길은 천민 중 기생, 노홍철은 광대가 될 팔자인 것으로 밝혀져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줬다. 네티즌들은 “무도 멤버 7인 관상 기가 막히게 잘 맞춘 듯”, “무도 멤버 7인 관상 정말 그럴까”, “무도 멤버 7인 관상 그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국내여행 | 가을빛 담아 빠알간 장수

    국내여행 | 가을빛 담아 빠알간 장수

    계절은 색色으로 다가온다. 입추가 지나니 벌써 울긋불긋한 색들이 튀어나와 몸소 가을을 알린다. 멋과 맛 모두가 붉디붉은 장수야말로 가을의 출발점이었다. ●주 朱 논개님의 성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전라북도 장수는 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다. 기녀로 평가절하된 논개가 마냥 애틋한 장수 사람들은 정성스레 제의를 지내고 붉은 사당을 세워 아름답게 가꿔 왔다. 땅에 발을 딛고, 오는 길에 움츠렸던 몸을 쭈욱 펴 본다. 서울에서부터 3시간 거리에 있는 장수에 도착했다. 버드나무에 실려 오는 싱그러움이 섞인 공기가 마냥 달다. 손끝 발끝까지 청정한 기운이 금세 퍼지도록 바지런히 숨을 삼켰다. 한달 넘게 이어졌던 여름장마, 그 뒤에 바짝 붙어 숨통을 조였던 폭염에 지칠대로 지쳤건만, 장수에서는 기분이 마냥 달뜬다. “아마 해발이 좀 높아서 그럴 겁니다. 장수는 관측 이래로 열대야가 있어 본 적이 없어요.” 장수군 문화해설사님이 읊는 장수군 예찬을 주욱 듣자니 괜스레 기분 좋아지는 장수군의 기후적 특성을 이해할 법도 하다. 평균 500m 이상의 해발고도에 위치한 장수군은 여름에도 공기 중 습도가 낮아 한낮에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훑는다. 살기 좋은 마을이니 사람이 모이지 않을 턱이 없었다. 장수에는 조선시대 때 중국에서 건너 온 주朱씨 일가가 모여 살았는데, 이 무리 안에서 왜군 장수와 함께 촉석루에서 몸을 던진 논개論介가 나고 자랐다. 양반 주달문의 딸로 알려진 주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 나섰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남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주 관기로 등록했다고 전해진다.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가 연회 준비를 지시하자 논개는 이 기회를 틈타 왜장을 바위 위로 꾀어내어 함께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에게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이라는 호가 붙여졌고 그녀의 의로운 행동을 입으로 전한 지역민들은 눈물로 추모했지만 논개는 언제나 평가절하 되었다. 유교 사상 아래서 기녀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던 논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에 의해 편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논개가 태어난 장수는 그녀를 더 애달프게 여기는 것 같다. 비록 사후지만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사당을 지어놓고 남녀노소 사당에 올라 그녀를 추모한다. 그녀의 성처럼 붉은색의 사당이 의암호 주변에 우거진 나무의 초록빛과 대조돼 더욱 아름답다. 사당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3층 높이의 계단을 타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의암호의 풍광이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게 만든다. 주씨 일가가 모여 살았던 주촌마을에는 아직도 논개 생가가 남아있는데 너와를 척척 얹은 기와집이 오순도순 모여 있어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祀┃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3 문의 063-352-2550 입장료 무료 논개생가마을┃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1013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홈페이지 nongae.go2vil.org ●홍紅 아삭하니 한 입, 구수하니 두 입 볕을 받을수록 붉어지고 밤낮의 일교차를 극복할수록 단단해지는 게 사과다. 장수를 사랑하는 사람 손에 길러진 소는 인간에게 땅의 기운을 전한다.오전을 걷는 데 보내고 나니 평온했던 뱃속에 한바탕 소란이 인다. 위장의 동요는 사무실에 앉아서는 느끼지 못할 건강한 식욕이었다. 장수군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를 찾아 나설 타이밍인 것이다. 향긋한 향이 감도는 사과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절로 입에 군침이 고인다. 하루하루 가을에 가까워지고 있는 하늘 아래서 뜨거운 태양을 받아 익어 가는 사과들이 붉은색의 명도를 차츰차츰 높여 가고 있다. 단단한 과육을 자랑하는 최상 품종인 장수의 사과를 키우는 것은 기후가 8할이요, 농부의 땀이 2할이라 했다. 여름 평균 기온이 22도 정도로 선선하고 일교차가 심한 장수는 사과가 자라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췄다. 가능성을 일치감치 알아본 농부들이 장수의 너른 터에 집중적으로 사과나무를 심은 결과 전국에 유통되는 사과 중의 25%가 장수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장수군은 일반 사람들에게 사과나무를 분양하기도 하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1년 동안 작은 농장의 주인이 되어 직접 농사에 참여하거나 수확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는 사과농장에 들렀더니 주인의 이름표를 단 나무들이 추석을 앞두고 열심히 과실을 살찌우고 있었다. 9~10월 수확철에는 6,000~7,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튼튼히 여문 사과를 똑똑 거둬들인다. 가을 내내 작은 마을이 가족들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하니 사과는 장수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 다시 이 땅에 생동감을 선사하는 보은報恩 식물 같다. 맑은 공기와 건강한 땅의 기운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건강함은 사람에서 가축에까지 전해진다. 쨍쨍한 볕을 받아 낮 시간 내내 유기물을 합성한 풀을 먹고 자란 소는 장수군의 또 다른 아이콘이다. 장수 어디서나 소의 먹이로 쓰기 위해 건초와 짚을 정성스럽게 묶어놓은 곤포가 눈에 띈다. “잡다한 고기 찌꺼기를 먹고 자라는 소들과는 차원이 다르단 얘기지.” 우리 한우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드는 장수 사람들의 자랑스러움이 느껴진다. 현재 장수에는 3만2,000두 이상의 한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장수군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많은 수라고 한다. 한우유전자뱅크에서는 장수 한우의 우수한 품질을 유지·개량하는 데도 애쓰고 있다. 우르르 쾅쾅, 텅 빈 위장 소리. 자, 공부는 그만하고 붉은 육질 사이로 하얀 마블링이 반짝반짝 빛나는 한우를 숯 위에 올릴 시간이다. 장수사과 사이버팜┃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와동길 56 문의 063-350-5348 분양가격 한 그루당 10만원 홈페이지 www.mtapple.go.kr ●적赤 적토마를 타고 내달리리 유일하게 동물과 한 팀이 되어 교감하는 스포츠, 승마. 가을볕 아래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기분은 그 무엇과 쉽게 대치될 수 없으리.잔뜩 보양식을 먹었으니 훌훌 발산할 차례다. 다음 행선지를 보니 주소에서부터 웃음이 인다.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있는 장수 승마체험장.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달리듯 리듬감이 한가득 하다. 승마는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말들이 뛸 수 있는 너른 땅 외에도 예민한 말이 조용하게 쉴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광활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캐나다나 미국에서 승마가 보편적인 운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좁기로 우리나라 버금가는 네덜란드를 여행했을 때 도심 공원에서 누구나 말을 탈 수 있고 어린 아이들이 익숙하게 말을 다루는 걸 보고 새삼 부러웠던 경험이 있다. 역시 세상만사는 갖춰진 환경보다 의지의 문제인 듯하다. 어찌됐든 ‘부자 스포츠’로만 여겨지는 승마를 장수군에서 저렴한 값에 즐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기승체험을 하면서 승마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비바람막이가 설치돼 있어 날씨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말을 타기 위해서는 머리에 꼭 맞는 승마모자와 종아리 보호대인 챕스chaps를 착용해야 한다. 승마체험장에 모두 구비돼 있으니 따로 챙겨 갈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말안장에 오르면 보기보다 체감하는 높이가 높다 보니 긴장하게 되지만 그도 잠시, 말이 이끄는 리듬에 몸을 맡긴다. 4명이 한팀이 되어 코치의 지시 아래 말 위에서 걷다가 뛰다가 달리다가 걷다가를 반복한다. 전신에 유연하게 흐르는 리듬을 타고 나면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트랙에서 타는 게 익숙해지고 나면 너른 목장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적갈색 말에 오르고 싶어진다. 승마체험장 내에는 아기 조랑말과 당나귀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 먹이 주기 체험도 할 수 있고 거대한 트로이목마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 좋다. 장수 승마체험장┃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176-7 문의 063-350-2579 운영요일 수~일요일(월·화요일 휴장) 운영시간 하절기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료 성인 2만5,000원, 청소년 1만8,000원, 어린이 1만2,000원 글·사진 양보라 기자 취재협조 장수군청 www.jangsu.go.kr☞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 9월6일부터 8일까지 장수군 의암공원 일대에서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가 열린다. 올해 7번째로 치러지는 중견 축제답게 다채로운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2박3일간 펼쳐지는 축제에 참가해 직접 수확한 사과를 맛보고 1,500명이 한번에 장수 한우를 시식해 보자.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한우곤포 나르기 대회’에 참가해 힘을 뽐낼 수도 있다. 축제 2일차(7일)엔 음력 7월 보름 불가佛家의 승려들이 부처를 공양하는 날 풍요를 기원하는 장수 지역의 영농문화인 깃절놀이가 펼쳐져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의 의미를 되새기며 흥을 돋운다.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가 열리는 의암호 주변에는 캠핑장이 설치돼 야외에서 묵으며 청정 장수를 체험할 수 있다.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의암공원 및 장수군 일원 문의 063-352-2011 운영시간 9월6~8일 오전 10시~밤 10시 홈페이지 www.jangsufestival.com
  • 역사 교과서뿐이랴, 다른 과목도 고칠 것 수두룩… 교총 포럼서 일선 교사들 지적

    “초등 교과서는 빛의 3원색을 합치면 ‘하양’이 된다고 가르치는데 중학교 교과서는 제각각이었다. 5개 출판사는 ‘백색광’이라 했고, 2개 출판사는 ‘하양’, 1개 출판사는 ‘흰색’이라고 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에서 시작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초등교과는 물론 중·고교 국어, 체육, 미술 등의 교과서 역시 오류가 많고 난이도도 제각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새교육개혁포럼 창립총회 포럼에서는 일선 교사들이 직접 초등교과와 중등교과의 도덕, 국어, 체육, 미술, 기술가정 교과와 교과서 문제를 지적해 주목을 받았다. 초등교과는 2009년부터 4년 동안 4차례 개정됐다. 때문에 교사들도 바뀌는 교육과정을 분석하고 적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주민철 서울덕암초교 수석교사는 “학생들은 사회를 가장 어려워했으며, 이는 현실과 학습하는 내용의 괴리가 심했기 때문”이라며 “중학교에서는 사회를 하나의 교과로 접근하지만 초등교사는 가르쳐야 하는 교과 수가 6~9개나 된다. 난이도를 재조정하고 내용 정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어 교과서의 난이도도 문제였다. 한 예로 중2 학생들이 어렵다고 제기한 부분은 ‘양반전’,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이었다. 국어 과목을 분석해 발표한 김향숙 인천 용현여중 수석교사는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다”면서 “하지만 양반전과 박씨전 등 고전은 한문투 어법도 생소하고 조선후기 역사도 배우지 않아 학생들이 매우 어려워했다”고 설명했다. 기술·가정은 2007년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강제적 집중이수제로 학생들이 2년 동안 3권의 교과서로 공부했다. 하지만 2009년 교육과정 개정 이후에는 집중이수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3개 학년에 걸쳐 2권을 분산 이수했다. 하형숙 인천 계산여중 수석교사는 이를 가리켜 “오락가락 탁상행정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이 밖에 미술교과서 11종에는 색 이름 표기법과 색 이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기재된 교과서가 5종이나 됐다. 고교 체육 교과의 선택 과목 가운데 ‘운동과 건강생활’은 교과서가 10종이 있지만, ‘스포츠 과학’은 교과서가 단 1종밖에 없어 외면받는 실정이었다. 포럼 주제발표를 한 황규호 한국교육과정학회장은 “교과서와 교육과정 논란은 교육적 필요보다 정치적 논리와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임기응변식) ‘묘수’ 중심의 잦은 교육과정 개정 때문”이라며 “그동안의 교육과정 개편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위한 집단적 대화 여건부터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홍석우 딴생각] 유네스코의 판소리 지정 10주년

    [홍석우 딴생각] 유네스코의 판소리 지정 10주년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이 한국 초연이라기에 표를 예매했었다. 파르지팔 관람 기회가 다시 오기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성악가 연광철이 주역으로 출연한다기에 관람을 결심했다. 막상 공연일이 되자 아내에게 급한 일정이 생겨 혼자서 가게 됐다. 그 일정이 오페라 관람을 취소해야 할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섯 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과 아리아가 하나도 없는 바그너 오페라임을 감안하면 아내는 핑계거리가 생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오페라를 즐기던 10년 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음악으로 전달하는 예술로 우리에게는 판소리가 있지 않은가. 오페라 공연은 수없이 갔지만 판소리는 한 번도 완창 공연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처음 접한 것이 성우향 선생님의 심청가였다. 명창 한 명과 고수 한 명이 벌이는 무대이니 막연히 두 시간 남짓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 시간이 다 돼도 심청이가 인당수에 이르지 못하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지금까지 본 만큼 더 봐야 한단다. 심청가 완창에 걸리는 시간이 파르지팔 공연 시간과 비슷한 셈이다. 당시 보고 난 내 느낌은 이랬다. 명창 한 사람과 고수 한 사람만 바라보고 다섯 시간을 같이 한다는 것이 약간은 지루했지만 적절한 재미를 갖춘 ‘참을 만한 지루함’이었다. 뻔히 아는 줄거리인데 흥미진진함을 느끼면서 집중이 되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볼거리가 화려하고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오페라도 지루할 때가 있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의 변화도 없이, 두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예술이 그 정도라니 너무나 대단했다. 폭포 소리를 뚫고 닦았다는 득음의 경지와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북의 조화가 있어 가능했으리라. 3년 전에 중소기업청장을 물러난 뒤 벤처기업인 십여 명과 완창 공연을 간 적이 있었다. 다소 짧은 세 시간짜리 수궁가를 보고 인근 장충동에서 족발로 뒤풀이를 하는데, 한 분이 이렇게 소감을 얘기한다. “퇴임한 중기청장이 가자는데, 안 가면 현직 떠났다고 속보이는 것 같아 마지못해 왔습니다. 처음 10여분 보다가 졸면 되지 하고 왔는데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내 앞이라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대단한 칭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숙종 무렵에 등장한 판소리가 19세기 후반에는 제일 인기 높은 예술이 됐다. 양반 세도가들은 경쟁적으로 명창들을 후원했고 명창이 뜨면 시골 마을은 인산인해가 됐다. 1930년쯤 한반도의 축음기 보유 대수가 120만대이던 시절에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는 13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이러던 판소리의 명성을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 그래도 새로운 창작 판소리의 등장, 젊은 신예 명창들의 등장, 판소리를 접목한 뮤지컬·오페라의 등장 등 부활의 노력들이 보이고는 있지만 어쩐지 우리 전통예술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판소리 완창 공연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3시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예술 인프라가 전반적으로 열악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완창을 보다 보면 조금은 마음이 아프다. 파르지팔이 공연된 오페라하우스가 옛 양반들의 갓을 형상화한 건축물임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그 좋은 시설에서 갓을 쓴 분들의 공연이 이루어질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유네스코가 2003년 11월 7일 판소리를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했다. 영화 등 신예술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어 가던 명창들이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판소리 보전과 육성을 위해 만든 조선성악연구회 건물이 그해 겨울에 국밥집이 됐다고 한다. 글피가 그 10주년이 되는 11월 7일이라 판소리를 생각해 보았다. 성균관대 석좌교수·전 지식경제부장관
  • 지역색 살린 둘레길 브랜드화 열풍

    지역색 살린 둘레길 브랜드화 열풍

    인천의 ‘쇠뿔고개길’, 부산 동구 ‘이바구길’, 충북 제천 ‘청풍호 지드락길’, 대전 서구 ‘갑천누리길’…. 전국에 ‘둘레길’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의 관광 산업 육성 방안으로 지역특성을 반영한 둘레길 조성 및 브랜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31일 특허청에 따르면 지자체의 ‘둘레길’ 관련 상표는 지난 2009년 경기도 시흥의 ‘늠내길’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4년간 모두 97건이 출원됐다. 그러나 올들어서는 1~9월 모두 42건에 달한다. 지난해 출원건수(23건)를 벌써 82.6% 초과했다. 9월 현재 등록건수는 합천군의 해인사 소리길 등 75건이다. 둘레길 조성 및 관련 상표 출원이 활발한 것은 제주 올레길이 성공한 데 따른 것이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여가를 즐기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웰빙과 힐링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지역의 관광명소로 활용하려는 전략이 더해졌다. 조성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도 활성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둘레길 명칭은 지역의 지리적 또는 역사적 특성 등을 반영하고 있다. 여수의 금오도 비렁길은 금오도의 비탈진 해안절벽에 설치된 길이고, 부산의 갈맷길은 갈매기를 보며 걷는 길을 의미한다. 역사적 특성을 반영한 둘레길로는 충북 괴산군의 ‘양반길’, 경남 김해의 ‘허왕후 신행길’ 등이 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안평대군의 이상향 찾아 몽유도원도를 추적하다

    안평대군의 이상향 찾아 몽유도원도를 추적하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김경임 지음/산처럼/416쪽/2만 2000원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1418년 9월 19일 창덕궁에서 태어났다. 8월 11일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지 한 달여 만이다. 안평대군은 20대 초반부터 시서화 삼절(三絶)에 비유됐다. 문인으로서 그 학문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 시와 문장이라면 문인의 품격과 수양을 나타내는 것이 글씨이다. 문인은 또한 글로써 다할 수 없는 내면의 감정과 정취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시서화 모두에서 최고의 정신적·심미적 수준에 도달한 문인은 시서화 삼절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처럼 안평대군은 세종 때 시문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또한 이런 분위기를 함께 이끌어 간 인물이 바로 화가 안견이다. 세종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안견은 안평대군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고 시서화 삼절의 명작을 다수 탄생시켰다. 안견은 조선시대 최초로 도화원 화원의 최고 품계인 정6품의 한계를 깨고 정4품에 오른 대화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이 아닌 화공의 신분인지라 그의 가계나 인적사항 등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불후의 명작, 현실과 꿈의 세계가 물결치듯 흘러가는 한 폭의 환상적인 산수화 ‘몽유도원도’를 남겼다.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몽유하는 시작은 이렇다. ‘1447년 4월 20일 밤이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봄날의 숲속이었다. 아득히 첩첩 거산의 봉우리가 하늘에 솟아 있고 가까이는 여기저기 복사나무가 한가로이 꽃을 피운 나지막한 야산이 이어져 있었다.’(본문 114쪽) 이 같은 꿈 내용을 안견에게 이야기했고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이 서화는 계유정난(1453년) 때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1893년 일본에 다시 등장했고 1950년 덴리(天理)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간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역사의 물결을 타고 유랑하게 됐는지 그 흔적을 찾아 나선다. 꿈의 주인인 안평대군의 삶과 문화적 이상을 추적해 그림에 담긴 의도를 흥미롭게 밝혀내고 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부산 짚불 곰장어와 고갈비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부산 짚불 곰장어와 고갈비

    그때도 깊숙한 가을날이었지 싶다. 친구와 난 무작정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표는 바다와 자갈치시장이었고, 더 큰 목표는 연탄불에 뭔가 냄새를 피우며 노릇노릇 굽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눈에 비친 부산은 생각보다 어수선하고 넓었다. 우산이 애매할 만큼 가랑비가 어설프게 뿌렸다. 버스를 타고, 걷고, 어렵게 찾아간 자갈치시장의 오후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기웃거리다가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포장마차로 숨어들었고, 우린 굶주린 짐승처럼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지매, 곰장어도 굽고요, 고등어도 굽고, 오뎅 국물은 무료죠? 일단 소주 한 병!” 연탄불에 곰장어가 요동을 치고 연기는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둘이 소주를 두 병 동내며 말도 안 되는 스무살 갓 넘은 지지배들의 인생 얘기가 해운대 푸른 바다처럼 때론 가볍고 때론 심오하게 넘실댔다. 그런데 나이 들어도 그때 하얗게 피어올라 연신 기침을 불러내던 생선 굽는 연기가 잊히지 않았다. 그러니 음식은 향수인 것이 분명하다. 해서 작정하고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아 떠난 가을날 부산 ‘노릇노릇 연기여행’. 부산은 이미 그때의 부산이 아닌 게 분명하다. 탄 기름에 튀겨내는 생선조차 그 맛이 아니고 곰장어는 가스불판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전히 부산은 몇 가지 코드로 미식가들을 불러 모은다. 짚불에 요란하게 던져 굽는 곰장어와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고갈비 골목 생선구이, 과일향이 나는 밀면, 아침 해장으로 기막힌 돼지국밥과 비빔잡채, 어묵, 유부주머니, 단팥죽, 씨앗호떡 등 시장통 간식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70, 80년대까지 광복동 일대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과 학생들이 고등어 한 마리 구워 소주잔을 기울이던 고갈비골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용두산의 그림자가 길어지면 청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연기를 따라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갈비 대신 고등어를 뜯으며 시대의 울분을 토하고 호기를 사르던 애수의 골목이다. 지금은 ‘남마담’과 ‘할매집’ 단 2곳만 남아 있다. 1974년 문을 연 남마담 집은 7080세대에는 여전히 향수 가득한 청춘의 아지트다. 어머니는 타닥타닥 소리만 들어도 고등어 익은 상태를 안다. 큼지막한 고등어를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야들야들하게 구워내는 노련한 솜씨는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아 왔다. 흰 살점을 뜯다 보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달랑 미역냉국 한 가지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된다. 지금 고갈비집은 자갈치시장에 더 많다. 시장통 생선전으로 들어가면 고등어며 갈치, 빨간고기 눈뽈대 등을 수북이 쌓아 놓고 허기진 배를 유혹한다. 가격이 싼 편이 아닌 데다 기름이 깨끗하지 못하고 미리 구워놔 딱딱하니 맛과 만족도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불판에 빨갛게 구워주는 곰장어와 함께 허출한 시장통의 한 끼로는 제법 낭만적이다. 곰장어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도 손으로 집으면 꼼작꼼작 움직인다고 하여 이곳 사투리로 ‘곰장어’다. 여름부터 10월 중순까지 맛있는 철이라고는 하지만 사철 불판은 돌아간다. 어쩌면 날이 선선해지면서 ‘굽는’ 행위가 더 탄력을 받는지도 모른다. 해서 날 저물면 곰장어 애호가들은 기장 쪽으로 넘어간다. 불내 확확 번지는 짚불 곰장어 집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기실 짚불 곰장어는 징그럽다. 손질하여 양념구이로 불판에 내오면 모른 체하고 여성들도 집어 먹지만, 짚불 곰장어는 살아서 날뛰니 경악한다. 구워서 둘둘 말아 내온 생김새를 봐도 영 눈과 손이 안 간다. 그래도 굽는 모습이 보고 싶어 주방을 기웃거리다가 들킨 강아지처럼 어색하게 ‘기장곰장어’ 주인 김영근씨와 마주쳤다. 김씨는 가문 대대로 120년간 곰장어 요리를 해 왔다며 자부심이 컸다. 그는 직접 구워 맛을 보여주겠다며 연기 그을린 부엌으로 안내했다. 예전에는 마당에 짚으로 모닥불을 피워 곰장어를 던져 구워냈다. 지금은 굽기 좋도록 석쇠를 얹은 전용 아궁이를 만들었다. 슬쩍 둘러보니 고무 대야에 곰장어가 한 가득이다. 짚가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김씨는 능숙하게 볏짚을 내려 불을 붙였다. 대야에서 딱 먹기 좋다는 ‘돌돌 말아 한 입 크기’의 곰장어가 순식간에 김씨 손에 잡혔다. 불은 활활 타오르고 곰장어가 던져졌다. 요동을 친다. 지옥이다. 음식이라지만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한소끔 불길이 지나가고 움직임이 멈췄다. 김씨는 애벌 익은 곰장어를 손으로 돌돌 말아 똬리처럼 모양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짚불을 붙여 더 익혔다. 새까맣다. 훈기로 익었다고 했다. 김씨가 한 마리를 잡더니 가운데를 툭 분지르듯 휜다. 슬쩍 당기니 껍데기가 고스란히 벗겨지고 속살이 나온다. 넋 놓고 있는 사이 곰장어 한 마리가 내 입으로 쑥 들어왔다. 엉겁결에 받긴 했는데 아찔하다. 눈을 꼭 감고 씹었다. 쌉싸래하고 해초의 짠맛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오도독오도독 씹힌다. 정신없이 씹어 꿀떡 삼키고 나니 김씨가 “맛있죠” 하며 웃어 젖힌다. “곰장어는 생김새가 뱀을 닮았어요. 눈이 없고 몸 양 옆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흰 진액을 뿜어냅니다. 다른 생선이 곁에서 같이 살 수가 없어요. 흉물스럽다고 양반들에게 천대받았으니 오히려 서민들에게는 고마운 생선인 거죠.” 조선시대 말, 극심한 흉년이 들고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서민들은 허기졌다. 생김새가 요상하여 부자들은 거들떠보지 않으니 곰장어는 고맙게도 그들 차지였다. 산과 들 아무데서나 볏짚에 불을 피워 곰장어를 던졌다. 껍질 벗겨 깨끗한 속살 서너 마리만 먹으면 탈이 나지 않고 며칠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 허기를 달래준 고기가 짚불 곰장어다. 삶아도 먹고 방아 잎을 넣어 된장국과 매운탕을 끓여낸다. 귀한 영양식이다. 불을 피워 연기를 내는 음식은 뭐든 맛있다. 건강에 안 좋다고 소란을 피우지만, 다 따지고 떼어내면 먹을 것 없는 세상이다. 아궁이 잔불 꺼내 시커먼 천일염 툭툭 뿌려 굽는 생선 맛을 어찌 외면할까. 연탄불이며 짚불이 주는, 적당히 태워진 음식이 주는 냄새는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우리를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여행이다. 마침 부산에서 고등어축제가 열린다. 푸른 바다 한 잔 술 삼아 푸른 등 뒤적거리며 불을 피우러 부산에 가자, 당신과 나 단 둘이서. 글 사진 음식평론가 marrian@naver.com 여행수첩 →가는 길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은 KTX는 당일치기 부산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부산은 2박 3일 알차게 둘러봐도 볼 것과 먹을 것이 너무나 많은 도시다. 짝퉁과 불량식품이 혼재하는 시장과 다국적 거리들. 카메라 들고 감천마을 골목길을 둘러보는 재미도 좋다.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송도해수욕장 인근에서 고등어축제가 열린다. →제철 맛집(051) 남마담(246-2148, 고갈비구이), 기장곰장어(721-2934, 곰장어 짚불구이, 매운탕), 마산식당(631-6906, 돼지국밥)
  • [생명의 窓] 한 처음에 말이 있었다/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생명의 窓] 한 처음에 말이 있었다/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시작 글이다. 한 처음에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곧 하나님이란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말을 신성시했다. 인간에게 말이란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글자는 훨씬 나중에 탄생했다. 그런데 글자 역시도 그렇단다. 지난여름 중국 허난성 은허박물관에서 직접 보았다.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들이 인간의 숱한 물음들을 안고 춤추듯 신에게로 올라가는 황홀한 모습을.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겼던 일제강점기로 시간여행을 해본다. 어째서 일제가 그토록 강포하게 조선어 사용을 불허했는지 알 것도 같다. 조선의 정신, 곧 형체로서의 국가 존망과 상관없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 꿈틀대는 민족의 얼을 강탈하겠다는 거다. 학교 교실에서 일본말로 가르치지 않고 꿋꿋이 조선말을 사용한 죄로 교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된 김교신 같은 이가 끝내 지키고자 한 것도 불멸의 민족혼이었으리라. 조선시대의 주요 소통 수단은 한글이 아니라 한자였다. 아무리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널리 반포하였다고 해도 중화주의에 물든 사대부 양반들의 관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문과 한글은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어서 지배 엘리트를 자임할수록 한문에 집착했다. 이처럼 한글이 천대받던 시절에 기독교가 한글을 적극적인 포교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1903년 5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부인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한글 글짓기다. 기생도 아니고 여염집 아낙네들이 낯선 사내들 앞에서 글을 짓고 발표한다니, 그 자체가 후천개벽에 해당할 문화 충격이 아니었을까. 과거시험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여성들이 야소(예수) 덕분에 사람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했겠다. 한글을 당당히 부활시키기는 개혁파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서재필은 총칼을 통한 개혁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신혁명에 돌입했다. 그 수단이 한글이다. ‘독립신문’은 “조선 전국 인민이 상하귀천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사용했는데, 그에게 한글은 노예화된 정신을 일깨우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여 한글학자 최현배가 한글 ‘가로쓰기’를 주창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겠다. 세로쓰기로는 영영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갈 평등한 시민 주체가 나올 수 없다는 천재적 영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용상 위에 있거나 나뭇잎 지붕 아래에 있거나 다 같은 사람”이기에 그렇단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옥살이를 할 때도 그를 지킨 것은 바로 이 신념이었다. “현대는 민중의 시대요, 한글은 민중의 글자”이니, 봉건시대의 유산인 세로문화에 갈음하려면 한글로 가로문화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변치 않는 믿음이었다. 단언컨대, 이 믿음의 밑절미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권 선언, 곧 천하 만민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렷다. 무엇이든 흔하고 쉬우면 귀히 대접받지 못한다. 이 시대의 한글이 딱 그 짝이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쓰게 된 데는 지난한 역사의 투쟁이 있었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중국말에 이어 일본말과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된 우리말이 다시 미국말에 밀려 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우리말을 이리도 박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짓밟는 행위이겠구나. 우리말의 모음과 자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고, 또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수단이라고 가르치신 유영모 선생이 지하에서 통곡하시겠다.
  • [서울광장] 진영욱 정책금융공사 사장 이임식을 보고/안미현 논설위원

    [서울광장] 진영욱 정책금융공사 사장 이임식을 보고/안미현 논설위원

    진영욱 정책금융공사(정금공) 사장이 그제 중도 퇴임했다. 지난 8월 말 금융위원회가 산업은행과 정금공 통합을 핵심으로 한 정책금융 체계 개편안을 발표하자 “정책금융이 뭔지도 모르고 일을 저질렀다”며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던 그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그가 다시 떠들어대면 여간 불편하지 않을 테니 금융위로서는 국감 전에 끌어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진 사장은 이임식에서 “앞으로는 (정부가 정책을 내놓을 때) 생각을 좀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며 기어코 한 방을 더 날렸다. 졸지에 생각 없는 관료로 전락한 신제윤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경제관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원래 그런 양반’이라며 쿨하게 넘겼을까. 아니면 ‘아는 사람-진 전 사장은 행시 16회다-이 더 한다’며 서운해했을까. 단언컨대 대범하게 넘길 일도, 뒷전에서 비판할 일도 아니다. 이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자업자득이요, 처절하게 각성할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은은 ‘공고’(정책금융)와 ‘상고’(상업금융)로 나눠야 한다는 논쟁에 휩싸였다. 2008년 이명박(MB) 정권은 상고를 선택했다. 그런데 당시 금융당국이 더 힘을 뒀던 사안은 금산분리 완화였다. 금산분리법이 국회 문턱에 걸려 좌초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산은 민영화는 수월하게 통과됐다. 세계무역기구(WTO) 면전에 노골적으로 정책금융을 한다고 광고하는 무신경의 작명(作名)도 정책금융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국회 불안을 무마하려는 산물이었다. 그렇게 산은과 정금공은 쪼개졌다. 정책금융은 신설 공사로 넘기고 산은은 대형 투자은행으로 키운다는 MB 정권의 야심은 곧 이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표류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다시 붙이겠다고 나섰다. 떼는 데 들어간 단순비용만 2500억원이다. 사람은 700명 넘게 늘었다. 잔뜩 채용해 놓은 고졸 행원이며 불려놓은 지점 등 앞으로 다시 붙이는 데 들어갈 유무형의 비용은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비판이 거세지자 경제관료들은 “애초 잘못 꿴 단추를 바로잡는 것”이라며 민영화를 주도했던 이창용 당시 금융위 부위원장과 곽승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뒤에 숨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들이 잘못된 단추를 꿰는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느냐고. 물론 경제관료들이 산은 민영화를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훗날 산은지주 회장으로 간 강만수 MB 정권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점령군의 기세가 워낙 센 정권 초기였던지라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아니었다”는 게 관료들의 변명이다. 산은과 정금공의 통합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찬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산은이라는 덩치 큰 은행을 인수할 후보가 사실상 없는 상태에서 정금공과 계속 병존시키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정부 주장은 일리가 있다. 다만 언제까지 산은을 정책금융으로 가져갈 것인지, 영구히 가져간다면 그 역할과 방법은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 등 긴 안목과 진지한 성찰 끝에 내린 결정인지가 못 미더울 따름이다. ‘MB 흔적 지우기’라는 새 정권의 코드에 맞춰 영혼 없이 또 동조하고 본 것은 아닌지 불안할 따름이다. 민영화는 포기해도 기업공개(IPO)는 하겠다는데 정금공의 부실자산을 떠안은 채 그게 가능한 것인지, 산은의 건전성 악화로 추가 재정 투입 우려가 커지는데 괜찮다고만 하는 정부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인지, 5년 뒤에 또 떼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오지랖 넓은 걱정이 한 소쿠리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공무원에게 영혼을 기대하는 것은 국정철학을 충실히 받들라는 공무원법을 위반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농반진반했지만 영혼 없는 공무원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어떻게든 국감에서 난타당하지 않을 궁리만 하지 말고 이번 ‘도로 산은’을 계기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로서의 자부심과 자세를 어떻게 지켜 나갈지 되돌아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hyun@seoul.co.kr
  • [씨줄날줄] 혼외 자녀/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축첩(蓄妾·첩을 거느림)을 인정한 조선시대에 혼외 출산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양반들은 첩을 몇명씩 두고 혼외 자녀를 낳았다. 왕실에서도 혼외 출산이 성행했다. 왕은 왕후 외에 후궁을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자녀를 20명을 넘게 둔 왕도 6명이나 된다.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왕은 태종으로 아들이 12명, 딸이 17명이다. 성종은 16남 12녀를 두었다. 물론 후궁 소생도 포함된 숫자다.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는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는 9명을 출산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도 있었기에 서자들도 왕이 될 수 있었다.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은 선조였고 그의 아들 광해군도 공빈 이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서자다. 영조도 아버지 숙종이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에게서 얻었다. 인조, 정조, 순조, 철종, 고종도 서자 출신이다. 혼외 출생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들인 셈이다. 혼외 자녀 문제로 많은 권력자나 재벌, 유명인들이 회자된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정일권 전 국무총리, 임택근 전 아나운서가 그렇고, 최근에는 소설가 이외수씨가 친자확인소송에 휘말렸다. 친자확인소송은 필경 돈과 연결된다. 10여년 전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A재벌의 C회장은 탤런트 어머니를 둔 여성 2명에게서 친자확인소송을 당했다. 더 전에는 B재벌 K총수와 요정 마담 사이에 태어났다는 K씨도 소송을 냈었다. C그룹의 S회장은 유명 탤런트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입적시키고 계열기업 운영권을 넘겨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 피카소는 법적인 자녀가 댄서 출신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1명뿐이었지만 1973년 사망할 무렵 다른 여인 2명에게서 3명의 혼외 자녀를 둔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혼외 딸을 20년이나 숨겼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논란으로 시끌시끌하다. 논란은 사생활 보호로 번지고 있다. 금태섭 변호사는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가 4년 전 칼럼에서는 친자확인소송을 당한 A장관을 다룬 언론을 ‘하수구 저널리즘’에 비유했다고 꼬집었다. 칼럼 내용은 이렇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게 혼외의 딸이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프랑스 언론의 고참기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생활 문제이니 보도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오래된 불문율을 ‘파리 마치’라는 주간지가 깼다. 파파라치가 찍은 미테랑 부녀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숨겨진 자식을 보도한 대특종이었지만, 잡지에 쏟아진 시선은 냉랭했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커버스토리] 대기업 총수들의 ‘황제 의전’ 구설 오르기도

    기업 총수들이 누리는 ‘황제 의전’의 행태가 구설에 오르는 경우는 그 모습이 외부에 드러날 수 있는 사례에 국한된다. 다시 말해 총수가 사내 행사에 참석할 때 장내의 수백, 수천 명의 임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잘잘못을 따지기 어렵다. 이 경우 S그룹의 회장은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답례하고, H그룹의 회장은 무표정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자리에 앉는다는 정도의 차이. 수행원이 한 명뿐인 L그룹 회장은 자신을 몰라보는 임직원이 하나도 없을텐 데도 가슴에 명찰을 단다. 문제의 모습이 노출되는 경우는 공항 출입국, 대통령 수행, 그리고 법정에 출두할 때. 총수들도 공항에서 일반 탑승객과 똑같이 출입국 수속을 밟고 보안 검열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상당수는 공항 귀빈실에서 탑승 절차를 기다리다가 아래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 관련 직원들이 이용하는 별도의 통로를 통해 간단한 눈인사만 하고 지난다. 이런 비공식적 특전을 누리려면 평소 공항공사, 경찰, 법무부, 세관 등에 대한 ‘로비’가 필요하다. 공항공사 귀빈실은 입법·사법·행정부의 현직 장관급만 이용할 수 있다. 몇 해 전 D사와 H사의 총수가 특전을 누리다가 언론에 포착되면서, 이를 알선한 인천공항경찰대 소속 경찰관 3명이 인사조치를 받았다. 민간기업 사주가 출국하는데, 공항 기관장들이 새벽부터 나와 거수경례를 붙이는 특전은 일부 언론사들도 누린다. 대기업 총수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지난해 연말, 한 지방 건설사 대표는 공항에서 “받아먹을 것은 다 먹고 나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다가 결국 공항에서 쫓겨나는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대기업 총수들은 일등석 라운지를 이용한다. 출입국 수속을 항공사 의전팀이 도맡아 해주는 만큼 의전을 아예 돈으로 사는 셈이다. 2008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1300명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장관급으로 예우하는 ‘CIP(Commercially Important Person) 제도’를 지시했는데, 경제단체들이 선정한 대상 명단에 들지 못한 일부 중견기업들이 한바탕 로비전을 펼친 해프닝도 있었다. 2007년 10월 러시아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행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등이 미니 버스 한 대에 웅크리고 앉아 이동한 게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너무한 게 아니냐”는 반발과 “그럼 떠받들고 다니냐”는 항변이 맞섰다. 2008년 12월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 회장이 수뢰 혐의로 법정에 출두할 때 30~40명의 농협 직원들이 법원을 가득 메워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법원 출두가 비교적 많은 S그룹이나 H그룹도 그 정도는 아니다. 김경운 기자 kkwoon@seoul.co.kr
  • [문소영의 시시콜콜] 18세기 선비 이옥과 21세기 한국의 지식인

    [문소영의 시시콜콜] 18세기 선비 이옥과 21세기 한국의 지식인

    같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나 짝을 ‘동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단어는 남한에서 금기어다. 북한이 쓰기 때문이다. ‘인민’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1945년 해방 전후에 백성, 인민, 국민 등이 혼용되다가 북한에서 인민을 애용하면서 기피 단어가 됐다. 1948년 5월 개원한 제헌의회에서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Republic of Korea)라는 영문 국호와 달리 ‘공화국’을 적시하지 않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이유도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김진배 전 언론인이 쓴 ‘헌법의 두 얼굴’에 나온다. 북한 관련 드라마를 보면 “우리 공화국에선~”이 자주 나와 공화국도 왠지 불온한 듯해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화국이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간접 선거에서 일정한 임기를 가진 국가원수를 뽑는 국가형태이자 세습 군주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말한다. 글을 쓰다 사전을 찾아보면 알게 모르게 북한어를 사용해 깜짝 놀란다. 근대문학 등에서 일종의 사투리로 표현된 단어들이 무의식 속에 저장된 탓일 게다. 뜨락이나 쪼각, 누에벌레, 등멱을 하다, 멍멍하다, 또아리, 그러매다 등등은 북한어다. 뜰, 조각, 누에, 등물(목물)을 하다, 먹먹하다, 똬리, 얽어매다 등으로 바꿔줘야 한다. 그 단어를 내버려둘까 하다가도 ‘이게 빌미로 나중에 몰리는 것 아닐까’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정정하는 편이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위축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등에서 한때 마녀사냥하듯이 멀쩡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켰던 과거를 모르는 순진하고 태평한 사람인 게다. 최근 중국 사마천의 사기가 출전인 ‘이민위천’(以民爲天)도 맘놓고 사용할 수 없는 단어로 분류됐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이 사자성어는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가슴에 한 번쯤 품어야 하지만, 최근 ‘이석기 사건’을 계기로 북한 김일성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종북’의 대명사처럼 됐다. 청나라의 패관소품(소설과 잡문)을 좋아했다고 해 벼슬길이 막힌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이옥이 생각난다. 주자의 순정한 문체를 따라야 한다며 문체반정을 주도한 정조는 청나라 풍의 가벼운 문체를 사용하던 이옥을 문제의 인물로 지목해 강제 군역도 시키고 하더니 주류 양반사회에서 밀어냈다. 현대에 이옥의 작품은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능동적 경향과 다양성을 대변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중세 학자들은 지동설과 같은 신성모독성 이론과 철학을 논의할 때 교황의 파문에서 벗어나고자 ‘사실이 아니지만 이렇다고 가정해보자’라며 연구했고, 그것이 근대 과학혁명의 씨앗이 됐다고 한다. 금지어와 금기, 억압이 지뢰밭처럼 촘촘한 나라에서 창의적 생각이나 시도가 가능할까?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이석기 사태’로 김진태-김재연 의원 ‘맞고소戰’ 왜?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사태를 둘러싸고 국회에서 고소·공방전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3일 이 문제와 관련해 오전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나란히 출연했던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과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서로를 맞고소하겠다면서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김재연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진태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오전 라디오 방송에서 김진태 의원이 김재연 의원을 지목해 ‘RO 조직원’, ‘내란음모 공범’이라고 규정한 데 따른 것이다. 김진태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재연 의원을 가리켜 “그 양반이 처음에는 회합사실 자체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 본인이 그 회합에 들어가 있는 RO 조직원이라는 사실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면서 “말하자면 내란음모 공범”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진태 의원은 “이렇게 중요한 방송 인터뷰에 나와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을 모독하는 일”이라면서 “방송국에서도 이런 것은 자제해주셨으면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재연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저는 지하조직 RO라는 것에 가입해 활동한 사실이 없고 내란음모를 하는 회합에 참가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면서 “그럼에도 많은 국민이 청취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동료의원에 대해 ‘RO조직원이다’, ‘내란음모공범이다’ 등의 발언을 일삼는 것은 명백히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재연 의원은 또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을 모독하는 일’, ‘방송 자제를 요청한다’는 등의 발언까지 덧붙이며 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면서 형사고소 방침을 밝혔다. 그러자 김진태 의원은 이날 오후 반박 기자회견을 갖고 김재연 의원을 무고죄로 맞고소하겠다고 밝혔다. 김진태 의원은 “도둑이 남의 집 안방을 차지하더니 급기야는 주인을 내쫓으려는 격”이라면서 김재연 의원의 고소방침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크나큰 잘못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 치는 김재연 의원에 대해 분노를 넘어 서글픔마저 느낀다”고 비꼬았다. 김진태 의원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이석기 의원과 RO 조직원 1명은 통진당 비례대표”라면서 “현재 통진당 비례대표는 이석기 의원 외에 김재연 의원 1명이라는 보도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재연 의원은 오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5월 회합에 참석한 사실 자체는 시인한 바 있다”고 반박했다. 김진태 의원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며 자숙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동료의원을 고소하는 것은 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종북세력들의 역선전선동 전술”이라면서 김재연 의원을 무고죄로 맞고소하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인사동 재개발/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서울 인사동이 화랑과 필방(筆房), 골동품 거리가 된 것은 연유가 있다. 조선의 왕실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의 일터인 도화서는 인사동 옆 견지동에 있었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역 쪽으로 100m쯤 가다 보면 오른쪽에 갑신정변의 발화지인 우정총국이 있고 그 앞에 도화서 터 표지석이 있다. 도화서는 숙종 때에 중구 수하동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로 옮겨갔고, 그래서 을지로 입구에 도화서 터 표지판이 하나 더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도화서가 폐지됐지만, 인사동이 미술 거리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골동품 상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인근 북촌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고서화나 골동품들을 이곳에서 일본인과 미군들이 사고팔면서 상권이 형성됐다고 한다. 종로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길이 0.7㎞, 너비 12m인 인사동길은 1984년 11월 7일 길이름이 처음 제정되었다. 서울 시내 골동품상과 화랑 열 곳 가운데 네 곳이 이곳에 있다. 특히 필방은 90%가 인사동에 몰려 있다.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도 인사동에 있다. 인사동 골동품상들은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살인사건 등으로 1970년대 말 장안동 등지로 많이 빠져나갔다. 대신 토속음식점과 전통찻집 등 유흥음식점이 들어섰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인사동에는 역사적 유산들이 많다. 태화빌딩 자리는 조선 초 태화정과 부용당이 있던 곳으로, 인조가 어릴 때 자란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다. 태화정은 헌종 때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으로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매국노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1918년 마당에 있던 고목이 벼락을 맞아 쪼개지자 놀란 이완용이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에게 팔았고 순화궁은 태화관이라는 요정으로 바뀐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인사동은 3·1운동의 발상지인 셈이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로 태화관은 헐려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학자인 이율곡과 조광조, 조선 말기 박영효와 지석영의 집도 인사동이나 그 근처에 있었다. 민영환 자결 터, 서북학회 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근대 문화유산들도 즐비하다. 이런 점 때문에 1978년 도심재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뒤 35년간 개발이 제한됐던 인사동의 재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발을 하더라도 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일일 것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늦여름 밤 서울 고궁에 발자국 소리 요란하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

    늦여름 밤 서울 고궁에 발자국 소리 요란하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입추, 말복도 훌쩍 지나 처서를 넘어선 늦여름의 서울 도심 궁궐.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궁궐의 전각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어스름 달빛에 물든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람들은 ‘한중록’을 읽고, 깊어가는 그 달빛을 벗 삼아 수런수런 창덕궁 곳곳을 완상하는 발자국 소리가 고아하다. 궁궐은 더 이상 역사 속의 장소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시민들의 참여 열기로 달아오른 ‘창경궁 통명전 인문학 강좌’와, 번번이 매진행렬에 못 가봐서 더 안타까울 ‘창덕궁 달빛기행’ 현장을 가봤다. ■ ‘보름달’에 취한 창덕궁 궁녀 해설사와 함께하는 ‘달빛기행’ “저기 보이는 달 속 토끼가 무얼 만들고 있는지 아세요? 불로초입니다. 선녀 ‘항아’를 돕기 위해서라죠. 항아는 옥황상제의 아들을 죽인 죄로 땅으로 귀양 온 남편 ‘예’를 배신했다가 달로 쫓겨납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들은 1969년 싹 자취를 감췄다죠?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때문이랍니다.” 궁녀 ‘방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문화유산해설사 김지애(31)씨의 나지막한 해설에 관람객의 귀가 쏠린다. 고즈넉한 궁궐의 낮은 소나무 가지 위로 살짝 걸린 보름달. 달빛 아래서 만나는 궁궐의 풍광은 낮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들어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달빛과 청사초롱에 의지해 밤길을 걷던 관람객들의 입에선 절로 탄성이 터진다. 지난 21일 저녁 8시 서울 창덕궁. “문을 열어라”는 우렁찬 수문장의 외침에 돈화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리던 궁녀와 차비(差備·특별한 사무를 맡은 임시 벼슬) 차림의 직원들이 관람객을 살갑게 맞았다. 100여명의 관람객은 20여명씩 무리지어 궁에 들어섰고, 이들의 손에는 청사초롱이 들렸다. 이렇게 ‘달빛기행’은 시작됐다. 현존하는 궁궐 다리 중 가장 오래됐다는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에 이르니 ‘궁녀’가 나직이 이른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왕족이 돼 구중궁궐을 돌아볼 것입니다. 문을 지나 돌길이 나오면 꼭 가운데 길로 걸으셔야 합니다. 가운데는 왕족, 갓길은 문무백관이 걷던 길입니다.” 어둠에 잠긴 궁궐의 침묵을 헤쳐 닿은 곳은 인정전. 8명의 조선왕이 즉위했던 이곳에선 ‘건달불’ ‘물불’이라 불리던 구한말 전깃불과 드라마 ‘해품달’에서 보던 ‘일월오봉도’를 만난다. 해설사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낮아진다. “달빛기행이란 달빛 아래서 소원을 빌며 명상을 즐기기 위한 행사이기 때문”이란다. 헌종이 중전을 마다하고 짝사랑했던 김씨 여인을 후궁으로 맞아, 처소로 선물했던 낙선재를 지나 함양문을 건너자 왕의 휴식처인 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덕궁 면적의 60%를 차지하지만 평소에는 단체 예약객에게만 공개되는 비밀 공간이다. 문에 들어서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문을 건너 연경당에 닿으면 다과와 판소리, 춘앵전 등의 공연이 기다린다. 연경당은 창덕궁을 재건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양반가 집을 본떠 궁궐 안에 지은 120여 칸의 집이다. 두 시간의 달빛기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올해로 4년째인 ‘창덕궁 달빛기행’은 입소문을 탈대로 탔다. 해마다 3~5월, 8~10월 보름달이 뜰 무렵 매달 4~5회씩 이어진다. 연간 내국인 대상 18회, 외국인 대상 10회로 1회 입장객은 100여명으로 제한된다. 3만원의 적지 않은 참가비에도 지난 6일 시작된 하반기 온라인 예매(인터파크)는 발매 개시 2분여 만에 1500여장의 입장권이 동났다. 쌍쌍의 연인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관람객들 사이에 멀리서 걸음한 가족을 만났다. 두 딸, 남편과 함께 온 최지은(60·경주시 성건동)씨는 “밤의 고궁이 이렇게 운치 있고 색다를지 미처 몰랐다”며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창경궁에 물든 ‘인문학’ 밤바람과 함께하는 통명전 강의 “효명세자가 태어나자 순조는 크게 기뻐하며 ‘고금에 드문 경사’라는 교지를 반포합니다. 숙종 이후 150년 만에 왕후의 몸에서 난 적통 왕자였기 때문입니다.”(심승구 한국체육대 교수)지난 21일 밤 서울 창경궁의 통명전. 내전의 으뜸 건물인 이곳은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 60여명의 남녀노소로 가득 찼다. 한적한 밤 고궁에 홀로 불 밝힌 통명전에서는 역사 강의가 이어졌다. 강의를 듣기 위해 홍화문을 지나 행각을 건너온 이들은 불과 5분여의 짧은 시간에 수백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온 셈이다. 이날의 주제는 ‘효명세자의 삶과 예술’. 심 교수는 조선 순조의 장남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갔다. 19세기 초 세도정치의 풍파 속에서 영·정조를 따라 탕평정치를 꾀했던 효명세자가 22세 젊은 나이에 절명했다는 대목에선 사람들의 한숨이 절로 터졌다. 심 교수의 목소리는 통명전을 밝힌 6개의 한지등 불빛을 타고 잔잔히 퍼져 나갔다. 건물 앞 ‘월대’(돌마당)는 달빛을 머금고, 건물 뒤 ‘화계’(꽃과 돌로 만든 계단)는 늦더위를 식히는 청명한 바람을 몰고 와 천장에 매달린 들문을 들썩거렸다. 통명전이 어떤 곳인가.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기를 바라며 죽은 쥐와 붕어, 인형 따위를 통명전 일대에 묻었고 그 일로 사약을 받았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이곳에서 첫날밤 술잔을 기울이는 예를 치렀다. 효명세자가 원대한 꿈을 꾸던 곳도 통명전이다. 강의는 문화재청이 마련한 ‘2013 인문학으로 배우는 궁궐’ 프로그램. 이날부터 오는 10월 2일까지 매주 수요일(오후 6시 30분)마다 6회에 걸쳐 이어진다. 지난해 시작된 강의는 참석자들의 호응이 좋아 올해부터 1회 90분에서 180분으로 시간을 늘렸다. 창경궁 입장료 1000원만 내면 강의와 교재, 음료까지 제공받는다. 지난 7일 오후 1시, 문화재청이 홈페이지에서 강의신청을 개시하자 불과 5시간 만에 예약이 마감됐다. 홍화문, 조선후기 창경궁에 얽힌 정치·사회 이야기 등 녹록지 않은 주제로 채워졌기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인문학 열풍으로 봐야 할까. 이곳을 찾은 공기업 직원 안정란(44)씨는 “통명전 문을 활짝 열고 밤바람을 맞으며 듣는 강의가 색다르다”면서 “퇴직 후 문화유산해설사로 제2의 삶을 살기 위해 강의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를 전공하는 김유나(19·인하대)씨는 “이곳 강의를 들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김대환 창경궁 관리소 주무관은 “참석자 10명 중 7명이 여성과 20, 30대”라며 “의외로 전문적인 역사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전했다. 박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2000년대 이후 중요한 역사자료가 많이 공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역사학(인문학) 강의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며 “역사인식을 갖춘 이들이 강의를 통해 진지하게 자기성찰을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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