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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그룹에 직격 날린 장혜영 “뜨거운 심장 어째서 식어버렸나”

    86그룹에 직격 날린 장혜영 “뜨거운 심장 어째서 식어버렸나”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겠다던 그 뜨거운 심장이 어째서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린 것입니까.”정의당 소속 장혜영(33) 의원이 16일 국회 대정부질문의 모두 발언에서 정부·여당의 핵심 세력인 ‘86그룹’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의원은 “저는 1987년생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서두를 뗀 뒤 “목숨을 걸고 싸웠던 1987년 민주화의 주역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이틀 동안 코로나19 민생 문제를 다뤄야 했던 대정부질문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특혜 의혹에 대한 정쟁으로 허비된 점을 지적했다. 장 의원은 “2017년 ‘이게 나라냐’며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모두가 기대에 부풀었고 저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다”며 “민주화의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지금껏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할 것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한때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시대의 도전자가 아닌 기득권자로 변해 말로만 변화를 이야기할 뿐 사실은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또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며 평등과 공정의 가치를 역설했다. 장 의원은 “더 나쁜 놈들도 있다고, 나 정도면 양반이라고 손쉬운 자기합리화 뒤에 숨어서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것을 멈춰 달라”며 “젊은 시절 뜨거움을 과거의 무용담이 아닌 이 시대의 벽을 부수는 노련한 힘으로 되살려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고 강조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길섶에서] 미리 성묘/이종락 논설위원

    논어 양화편에서 공자와 제자 재아(宰我)의 대화가 흥미롭다. 재아는 공자에게 “3년상은 너무 길다. 1년이면 그칠 만하다”며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에 공자는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난 후에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며 3년상을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즉 핏덩어리로 태어나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3년이 지나야 비로소 온전한 몸이 되는데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갚기 위해 3년상을 치른다는 얘기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부모를 떠나보낸 자식들이 왕이든 양반이든 평민이든 3년상을 해야 했다. 개화 시기를 거치면서 3년상은 유명무실해졌고, 제사 당일에 제를 지내고 설이나 추석 명절에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대체됐다. 최근 대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혼잡한 교통 문제로 명절에 내려가기가 힘들어지자 명절 몇 주 전에 ‘미리 성묘’를 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올해 양평·대전·제주 등 일부 공원묘지는 성묘객에게 사전예약제를 시행하고 산소에 오지 못하는 성묘객들을 위해 사이버 추모관을 운영한다. 인천시는 아예 전국 최초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묘가 유명무실해지는 느낌이다. jrlee@seoul.co.kr
  • [금요칼럼] 하필 왜, 성리학 사회였을까/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하필 왜, 성리학 사회였을까/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조선은 유교적 도덕을 무척 중시한 사회였으나 후기에 부작용이 많아졌다. 그래서일 테지만 성리학이라는 낱말에도 갑갑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연히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도대체 왜 선비들은 성리학 사회를 만들고자 했을까?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세종 때 이야기를 해 보자. 대신 이순몽이 판서를 지낸 황상의 기생첩과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됐다. 그날 이순몽은 공무를 회피하고 그 기생을 만나러 갔단다. 화가 난 황상은 첩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심하게 폭행했다(실록, 세종 10년 10월 20일). 그런데 이순몽과 황상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의금부는 세 사람 모두에게 중형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런데 왕은 황상과 그 첩은 중벌하고, 이순몽만은 왠지 가볍게 다루었다. 여론이 들끓었다. 대사헌 조계생 등이 상소를 올려 황상과 이순몽의 죄상을 고했다. 황상은 모친의 상중에도 몰래 창기를 데려다 간음한 사실이 있었다. 이순몽은 자신의 비행이 드러난 다음에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황상의 첩을 데려다가 함께 살았다고 했다. 사헌부는 두 사람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불평했다. 그 이튿날 의금부도 비슷한 요구를 하자 왕은 그들의 처벌 수위를 약간 높였다(세종 10년 10월 21일). 그런데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왕은 뜻밖의 조치를 했다. 사헌부 관원 모두를 일시나마 의금부에 가두었던 것인데, 그들의 상소문에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서였다. 황상은 또 다른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고 어떤 양반과 다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생으로 말하면 나중에 태종이 궁궐로 데려다가 후궁으로 삼은 이였다. 사헌부는 황상의 방탕을 폭로하면서 태종의 후궁까지 문제 삼은 격이었다. 세종의 당혹감도 짐작할 만하지만, 15세기 조선은 이처럼 위아래가 뒤엉켜 도덕적 허물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이순몽은 정말 표본적이었다. 그는 애첩을 10명도 넘게 거느렸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아내가 세상을 뜨자 젊고 아름다운 과부에게 다시 눈독을 들였다. 이름난 양반의 딸이자 아내였던 그이가 허락하지 않자, 이순몽은 역시 과부였던 그이의 어머니에게 새 장가를 들겠다며 생떼를 썼다. 결국에 젊은 과부는 이순몽과 재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잔치를 열었고 마당에 손님이 가득하였다. 기쁨에 넘친 이순몽은 음식을 손에 들고 소리쳤다. 만일 신부가 나를 사랑하거든 이 음식을 받아먹으라고 했단다. 과부가 음식을 넙죽 받아먹자 손님들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스스로 눈을 가렸다. 이순몽은 영응대군의 수양아버지였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는데, 이순몽의 집에 머물며 전염병을 피한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수양아들로 삼아, 생일마다 금은보배를 바쳤다. 금으로 소와 수레까지 만들어서 바쳤다. 또 비단과 면포를 환관과 궁녀들에게 선사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천하의 세종 임금도 인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순몽은 벼슬이 정1품에 이르렀는데, 그가 죄를 저질러도 왕은 너그럽게 용서했다. 후세가 기리는 세종 시대에도 이처럼 깜깜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조선 사회에는 불의와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다. 그래서 뜻있는 선비들은 한 가지 사명을 발견했으니, 도덕과 윤리가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훗날 조광조 같은 성리학 지상주의자가 출현한 것은 그래서였다. 윤리가 강조되자 허위와 위선이 판을 쳤으니, 선비들의 노력도 따지고 보면 ‘절반의 성공’에 그친 셈이었다. 그래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상황이 크게 달라진 지금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정과 사회 정의라는 도덕에 목말라하지 않는가.
  • [그 책속 이미지] 볕 좋은 날, 책 널기 딱 좋은 날이네

    [그 책속 이미지] 볕 좋은 날, 책 널기 딱 좋은 날이네

    너른 한옥 마당에 깐 자리 위, 책 낱장들이 차곡차곡 올라 앉았다. 그릇, 접시, 가마솥까지 잔뜩 부엌 밖을 나왔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과 옷가지는 햇볕에 바싹 말랐을 터. 쨍한 햇빛 하나 보이질 않는데도 보송보송한 느낌이 전해 온다.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이 지겨워서였나. 책을 들자마자 단숨에 끝장까지 다다랐다. 조상들이 눅눅한 여름 끝자락, 볕 좋은 날에 책이나 옷가지를 말린 ‘쇄서포의’가 책장마다 펼쳐진다. 양반집, 가난한 선비집, 초가집, 풍경도 다양하다. 무심히 슥슥 그린 듯한데 또 자세히 보면 사대부 정자관이나 처마 밑 메주 등 디테일이 살아 있다. 산뜻한 색상과 섬세한 붓질로 장식한 그림에 마음이 기분 좋게 뽀송해진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모리배가 헛소문 퍼트려 교란할 것이니…”

    “모리배가 헛소문 퍼트려 교란할 것이니…”

    “대소 사민이 서로 ‘우리가 신해년의 변(현종 12년)’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습니다.” 조선 현종 14년(1673년) 사간원 사간을 지낸 이무의 상소 내용이다. 여기서 ‘신해년의 변’이란 현종 13년의 가뭄을 말하지만, 보통 현종 12년(경신년)의 기근과 합쳐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대기근을 전후로 조선의 공식 인구는 516만명에서 469만여명으로 줄었다. 열 명에 한 명이 사라진 것이다. 현종 대엔 기근과 전염병 등 재난이 극성했다. 현종이 ‘하늘을 두려워하며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恐懼修省·공구수성) 하려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동법은 광해군이 처음 경기도에서 시범실시하고 효종이 충청도와 호남 해안지방으로 확대했으며 현종 때 호남 내륙으로 확대했다. 그때마다 소수를 제외하고 집권 서인이나 야당 남인을 가리지 않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조선의 조세제도는 전세, 공납, 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공납을 쌀로 일괄 납부하고 가구별로 일정액을 부과하던 것을 토지 소유 규모에 따라 차등 부과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현종 때 조세 수입의 60%를 차지했던 공납은 방납업자의 폭리, 관리의 뇌물, 인징·족징 등 수탈, 양반 지주 특혜로 말미암아 농민을 아사지경으로 내몰았다. 폐해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농민들이 도망쳐 텅 빈 마을이 속출했다. “인정(뇌물과 수수료)으로 드는 비용이 공물의 값보다 두 배는 더 드는 형편이라 가산을 탕진하고 유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현종 2년 영부사 정유성) “진상품은 손으로 들고 인정물은 말에 싣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인조실록 14년 2월 10일, 대사간 이황) 대동법은 양반 지주에겐 끔찍했다. 전답 규모에 따라 부과했으니 부담이 수십 수백 배 더 늘었다.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 경기도 시행 후 마지막으로 황해도(숙종 34년)에서 시행하기까지 무려 100년이 걸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효종은 즉위년(1649년) 좌의정에 존재 조익, 우의정에 잠곡 김육을 제수했다. 선대왕 때부터 대동법 확대를 추진했던 중신이었다. 잠곡은 7번이나 고사했다. 마지막 사직상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군이 수성하는 데에는 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하는 것뿐입니다”, “(대동법을 호서로 확대하지 않으려면) 소신을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조정은 콩 볶듯 시끄러웠다. 이 문제를 놓고 집권 서인이 김육·조익·신면 등 ‘한당’과 김집·이기조·송시열 등 ‘산당’으로 분열했다. 한당은 왕의 신임을 받았지만, 수적으로 형편없이 밀렸다. 이듬해(1651년) 기회가 왔다. 청은 조선의 북벌 계획을 입수하고 압록강변의 군대를 움직여 효종을 청으로 압송하려 했다. 북벌에 앞장섰던 산당의 지도자 김집·김상헌 등이 부랴부랴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의정 이경석 등 애꿎은 사람만 청에 끌려갔다. 효종은 분개했다. 이듬해 1월 효종은 김육을 아예 영의정에 앉혔다. 김육의 건의에 따라 “호서에서 전답 1결마다 10두씩 징수하되 봄가을로 나누어 5두씩 받고, 산읍에는 쌀 5두에 무명 1필을 공납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 2년 8월24일) 납부 시기가 되자 ‘백성’을 앞세운 저항이 격렬해졌다. 사헌부 장령을 지낸 안방준은 김육이 대동법을 확대하는 것은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불러온 것과 같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다 보니, 무식한 백성과 노예들까지 ‘조선의 공사는 3일이면 흐지부지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백성에게 비웃음을 사느니 차라리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효종실록 3년 5월 16일) 효종은 묵살했다. 효종 7년(1656년)엔 호남의 해읍(연안의 군현)으로 확대했다. 잠곡의 노력 외에도 호남의 중소지주들이 찬성으로 돌아선 게 큰 힘이 됐다. 대동법 시행으로 충청도 농민의 세 부담이 크게 완화되자 호남 소작농이 대거 충청도로 옮겨갔고, 호남에서 일손 부족이 심각해지자 울며 겨자 먹기로 찬성하게 된 것이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효종의 유지를 앞세워 호남 전역으로 이를 확대하려 했다. 반대는 거칠었다. 현종 1년(1660년) 영의정 정태화가 직접 나섰다. “서두를 일이 아니라 일단 전라감사와 다시 의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현종은 일단 단호했다. “호남 산군에 시행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니 거행하기만 하면 된다.” 현종은 7월 11일 즉각 시행을 명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추수철이 되자 원로 대신들이 다시 ‘백성’을 앞세워 유예를 주장했다. 삼정승이 포함된 비변사에서 “백성이 원치 않는 것을 흉년에 시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조판서 홍명하가 “연해 지역은 흉년이지만 산군에서는 평년작인데, 대동법 시행이 불가하다니 영문을 알 수 없다”고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현종은 1년 연기했다. 이듬해에도 저항은 계속됐다. 잠곡의 아들 호조참판 김좌명은 참판직을 내놓고 ‘호남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비변사는 반대했다. 현종은 다시 1년 유예했다. 현종 4년 봄 호남 산군(내륙) 시행을 위한 절목(세칙)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승 판서 언관의 저항에 밀려 다시 또 유예했다. ‘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대동법 설행 후 소민(농민)들은 다 편리하다고 말했으나 대호(양반 대농)는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를 혁파해야 한다는 자가 많았다.”(현종개수실록 6년 12월 27일) 이듬해 봄 현종은 각도에 어사를 파견해 농민의 여론을 보고하도록 했다. 호남 담당 신명규는 이렇게 보고했다. “호우(대지주)는 대동법 혁파가 편리하다고 말하고 잔호(소작농)는 다시 실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현종실록 7년 10월 22일) 현종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백성은 다시 시행하기를 바란다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가.” ‘백성’을 앞세워 반대했던 자들은 할 말이 없었다. 호남 해읍에서 내륙으로 확대하는 데에만 무려 7년이 걸렸다. 대동법은 숙종 3년(1677년) 이정명의 건의로 영남으로 확대되고, 숙종 34년(1708년) 황해도를 포함하면서 전국 시행이 마무리됐다. 경기도 시행부터 무려 100년이 걸렸다. 임진왜란 중(1594년) 잠시 시행했다가 곧 폐기된 대공수미법으로부터 보면 114년 만이고 율곡이 건의했을 때부터 계산하면 139년 만이다. 조세정의 구현에 대한 저항은 그렇게 집요하고 극렬했다. 조선조 공납이 왕조를 흔들었다면, 요즘은 아파트가 정권을 흔든다. 그동안 투기는 일부 자산계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요즘 30대까지 은행 돈 빌려 가며 투기판에 뛰어들었고 외국인까지 몰려들어 아파트값을 천정부지로 올렸다. 정부는 부랴부랴 여러 대책을 내놨다. 투기자금의 공급을 막기 위해 은행대출을 옥죄고 보유세를 크게 강화해 다주택자의 부담을 대폭 늘렸다. 양도소득세 강화로 불로소득의 기회를 조이고 세입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공공임대주택 포함 신규 아파트를 대거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과 불만은 여전하다. 무주택자는 월세 부담이 커질까 걱정이고, 다주택자는 보유세 증가와 불로소득 감소가 불만이다. 아예 논외인 주택, 빌라 소유자들은 아파트값만 오르는 것도 불만인데, 보유세나 거래세 불똥이 튈까 걱정이다. 대다수 매체는 이런 걱정과 불만을 확대 과장하며 정책을 흔든다. 김육은 이렇게 경고했었다.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나 모리배들이 방납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트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다만 이 점이 염려됩니다.” 투기 대책을 교란하는 헛소문이 천지에 가득한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제가 갑자기 죽게 되면 일이 중도에 폐지될까 두렵습니다.” 잠곡의 마지막 병상 상소에 효종은 이렇게 답했다. “걱정 마시고 쾌차에 힘쓰세요. 서필원도 이시백도 있습니다.” 결정권자와 입안자의 호응이 아름답다. 헛소리에 굴하지 않은 이들 덕분에 조선은 저 참혹한 경신대기근에서 왕조를 지켰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연재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숲, 쉼

    숲, 쉼

    이른바 ‘7말8초’다. 절정의 휴가철이지만 유명 피서지에서조차 떠들썩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코로나19에 사상 최장 기간의 역대급 장마가 겹친 탓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숲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일상의 고단함을 다독여 줄 ‘힐링의 숲’을 꼽아봤다.①걷고 사색하고 치유하다-가평 잣향기푸른숲 경기도잣향기푸른숲은 153㏊ 면적에 수령 80년이 넘는 잣나무 약 5만 2000그루가 자라는 곳이다. 축령산과 서리산 중턱에 걸쳐 있다. 출렁다리와 데크로드를 아우르는 산책길, 사방댐으로 이어지는 ‘하늘호수길’ 등 다양한 숲 탐방로를 갖추고 있다. 탐방로 어디를 걸어도 하늘 높이 솟은 잣나무를 볼 수 있다. 명상과 기체조를 포함한 산림 치유, 숲 해설 프로그램 등은 무료로 진행되고 목공 체험만 재료비를 별도로 받는다. 잣향기푸른숲은 한국관광공사와 지역관광공사가 선정한 ‘비대면(언택트) 관광지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월요일은 쉰다. 조종천과 이어지는 호젓한 녹수계곡, 옛 가평역에서 뮤직 빌리지로 변신한 음악역1939(실내 입장 일부 제한) 등 주변 여행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100년 된 솔숲 힘-강릉 국립대관령치유의숲 국립대관령치유의숲은 1920년대 조성한 금강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울창한 숲에는 성격과 난이도가 다른 8개의 숲길이 조성돼 있다. 편안하고 쉬운 코스인 ‘솔향기치유숲길’과 목재 데크가 깔린 ‘치유데크로드’, 최고 난도를 자랑하는 ‘도전숲길’까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 사이를 산책하고, 울창한 숲이 내주는 그늘에서 쉬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산림치유지도사가 함께하는 맞춤형 산림치유 프로그램도 인기다. 9월 말까지는 토요일 밤마다 시원한 숲의 소리와 향기를 오감으로 느껴 보는 프로그램 ‘대관령숲, 별이 빛나는 밤에’(체험비 1만원, 예약 필수)가 진행된다. 아울러 국내 1호 자연휴양림인 대관령자연휴양림과 도보 여행길로 인기 높은 대관령옛길이 지척에 있다. 강문해변, 순긋해변, 사천해변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기 관광지를 비롯해 동해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헌화로, 복합 문화공간 하슬라아트월드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③꽃·나비와 숲속 힐링 타임-국립제천치유의숲 금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국립제천치유의숲은 올해 본격적으로 손님맞이를 시작한 곳이다. 숲하모니, 치유힐링숲테라피, 한방힐링숲테라피 등 산림 치유 프로그램들은 매일 단체손님이 있을 정도로 인기다. 프로그램은 참여 대상과 인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건강 측정, 티 테라피, 산림공예 등을 체험하는 숲하모니는 별도 예약이 필요 없지만, 나머지 프로그램들은 방문 일주일 전 홈페이지나 전화를 통한 예약이 필수다. 숲길은 치유 프로그램 없이 그냥 걸어도 좋은 길이다. 마가목과 음나무 등 약초가 자라는 약초원, 건강치유숲길과 숲내음치유숲길, 음이온치유숲길 등은 일년 내내 무료로 개방한다. 주변에 볼거리도 많다. 제천산야초마을에서 약초 체험을 하거나 ‘내륙의 바다’ 청풍호에서 유람선이나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정방사에 오르면 절벽 아래 들어앉은 아담한 산사와 청풍호가 어우러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④반려견과 힐링-영양 검마산휴양림·자작나무숲 영양은 아시아 최초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에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밤하늘과 힐링 숲이 자랑이다. 금강소나무가 빽빽한 검마산자연휴양림에선 피톤치드 삼림욕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다. 이 휴양림의 또 다른 매력은 책 읽는 숲이라는 점이다. 숲속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숲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휴양림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반려견과 함께 숙박이 가능한 휴양관과 캠핑 사이트, 그리고 야외 반려견 놀이터가 마련돼 있다. 검마산 자락에 자리한 또 다른 힐링 숲은 영양자작나무숲이다. 1993년에 인공 조림한 31㏊ 규모의 자작나무숲이 어느새 어엿한 청년 숲으로 자랐다. 사륜구동 차량이 아닌 경우, 숲 입구까지 약 3.2㎞를 걸어야 한다. 물론 그마저 푸른 나무와 청정한 계곡물 소리가 여행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장수포천변의 영양반딧불이천문대에 가면 별과 함께 반딧불이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민간 정원인 서석지,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 187호) 등은 영양의 멋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역사 명소다.⑤문씨 가문 지켜온 400년 숲-부산 기장 아홉산숲 기장군 철마면에는 걸으며 힐링하기 좋은 아홉산숲과 부산치유의숲이 있다. 아홉산숲이 울창한 숲이라면, 부산치유의숲은 시야가 탁 트이고 눈이 편안해지는 숲이다. 남평 문씨 가문이 400년 가까이 가꾸고 지켜온 아홉산숲은 맹종죽을 대표로 금강소나무, 삼나무, 편백 등 다양한 나무 군락이 있는 ‘모둠 숲’이다. 걷는 내내 탄성이 쏟아진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자가 찾는다. 아홉산숲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부산치유의숲은 갖가지 산림 치유 프로그램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곳이다. ‘힐링로드’부터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에코 트레킹 코스 ‘솔바람길’과 ‘큰바위길’까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고산 윤선도가 즐겨 찾았다는 황학대, 드라마 촬영지로 사랑받는 죽성드림세트장, 죽성리 해송(부산기념물 50호) 등 주변 볼거리도 풍성하다.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 “윤석열, 독재 언급 자격있나” 민주당 지도부도 ‘사퇴 요구’(종합)

    “윤석열, 독재 언급 자격있나” 민주당 지도부도 ‘사퇴 요구’(종합)

    신임 검사 신고식 ‘작심 발언’ 후폭풍설훈 최고위원 “윤 총장, 이제 물러나야”김종민 의원 “공무원이 이런 식은 안 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서 ‘독재 배격’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공개 사퇴 요구가 터져 나왔다. 설훈 최고위원은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윤 총장이 독재와 전체주의를 언급할 자격이 있나”라면서 “이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설 최고위원은 윤 총장의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 발언을 거론하며 “문재인 정부가 독재·전체주의라는 주장으로 해석되는데, ‘문재인 정부’라는 주어만 뺀 교묘한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설 최고위원은 “윤 총장은 측근 한동훈 검사장을 보호하려다 상급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마찰을 겪기도 했다”고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총장직을 유지한다면 독재와 전체주의 대열에 함께한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차라리 물러나 본격적인 정치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김종민 의원도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 양반이 ‘문재인 정부가 독재했다’고 얘기를 안 했는데, 정직하지 않다. 미래통합당에 공세 거리를 어시스트한 것인데, 공무원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100% 정치를 하는 것인데, 검찰총장은 정치하면 안 된다. 옛날 군인들이 정치해서 대한민국이 엄청 어려웠다. 집행권을 가진 사람이 정치하면 피해가 국민에게 간다”고 주장했다. 신정훈 의원은 페이스북 글에서 “윤 총장이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해 이뤄진다고 했다는데, 많이 유감스럽고 충격적”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지배하는 것은 양심이고,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윤 총장은 지난 3일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는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해 실현된다. 대의제와 다수결 원리에 따라 법이 제정되지만 일단 제정된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집행돼야 한다”고 밝혔다.청와대 “입장 언급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여권에서는 ‘정치하려면 총장을 그만두라’는 등 비판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나선 박주민 의원은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 요구인 검찰개혁을 검찰 수장이 나서서 독재, 전체주의로 폄훼하려 한다면 이는 기득권 지키기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최고위원 후보인 이원욱 의원도 “‘검찰 정치’를 하고 싶다면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정치하시라”며 “검찰의 법집행 권한은 윤 총장 말대로 ‘국민이 위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이 그 역할을 해낼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준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칼잡이 윤석열의 귀환을 환영한다. 민주주의의 당연한 원칙과 상식이 반갑게 들린, 시대의 어둠을 우리도 함께 걷어내겠다”고 밝혔다. 이번 논란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윤 총장 발언에 대해 언론이 해석한 부분에 대해 입장을 요구한다면 언급하기 어렵다”고 밝혔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제화업계의 ‘대왕’ 박덕유

    [근대광고 엿보기] 제화업계의 ‘대왕’ 박덕유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 짚신과 미투리가 서민이나 천민의 신발이었다면 양반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흑피혜(黑皮鞋)는 가죽, 목화(木靴)는 나무와 천, 태사혜(太史鞋)는 가죽과 헝겊으로 만들었고 남성의 신발이었다. 당혜(唐鞋), 운혜(雲鞋), 수혜(繡鞋) 등은 비단과 천으로 만든 양반 여성의 신발이었다.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을 갖바치라고 했는데 소를 잡고 벗겨 낸 가죽을 받아 신발을 만들었으므로 백정과 같이 천민 취급을 받았다. 구두는 청일전쟁 때 조선 군인들이 가죽 군화를 신으면서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구한말의 군화창이 있었다고 한다. 서양 옷은 양복이라고 하는데 신발은 왜 구두라는 말을 쓸까. 구두의 어원은 놀랍게도 일본어라고 한다. 일본어의 ‘구쓰’(靴)가 구두로 변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구두와 고무신이 전통적인 신발을 급격히 대체했다. 양화점이 우후죽순 생기고 구두가 광고면의 단골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구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10년대 초에 동광양화점(임상호), 순창양화점(신윤범), 신흥양화점(이환일), 광신양화점(김영배), 창흥양화점(송필진) 등의 양화점 광고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양화점 광고가 박덕유양화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화점은 1898년 서울 황토마루(광화문 네거리)에서 이규익이라는 사람이 열었다고 한다. 이것을 박덕유가 인수해서 수십 년 동안 운영했다. 박덕유양화점의 위치는 처음에 대사동(지금의 종로2가에서 인사동에 이르는 지역)이었다가 행정구역 변경으로 관훈동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에는 박덕유에 관한 기사가 여러 건 있다. 기사에 따르면 박덕유는 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곡물상을 하다 파산하고 경부철도보호 순검(巡檢·조선 말기의 경찰)으로 일했지만 또 일자리를 잃고 광화문의 양화점에서 구두 수선 일을 했다. 그러다 제화 기술을 배워 양화점을 열었다고 한다. 처음에 친구 둘과 양화점을 열었는데 손님이 없어 적자가 계속 나자 둘은 그만두고 홀로 운영했다. 그러다 점차 구두를 신는 사람이 늘어나고 사업이 번창해 종업원을 60여 명이나 거느린 양화계의 ‘대왕’이 됐다. 지방에서도 하루에 50여 켤레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고객은 점포에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에서는 연락을 하면 직원을 보내 발 크기와 모양을 재서 제작해 주었고 지방 사람들은 발 모양을 종이에 그려 돈과 함께 보내면 구두를 만들어 부쳐 줬다. 초기에 구두 한 켤레 값은 9원이었는데 쌀 한 가마 값이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체육 요람이자 예술 총아… 서울 맨 위에서 격동의 역사를 목도하다

    체육 요람이자 예술 총아… 서울 맨 위에서 격동의 역사를 목도하다

    첫 돔구장 ‘장충체육관’… 스포츠 중심지김일·천규덕·장영철이 이끈 프로레슬링가난한 시절 찌든 마음에 통쾌한 선물로 김수영·박인환·변영로 등 문인·예술가전쟁 후 활동무대 명동서 국립극장 개관남산으로 이전한 후 문화의 새 뿌리로 ‘남산서울타워’ 1980년 일반에 처음 공개서울·지방 사람·외국인 인기 관광 코스서울은 역사 이래 한반도에 영토를 둔 나라들의 각축장이었다. 조선의 도읍이 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됐고, 지금까지 역사의 중심축이다. 이곳에 있는 유무형의 문화재가 지난날 이야기라면, 시민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2000년 역사의 단층 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역사의 한 줄이 되고 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7차 남산산책’ 편이 지난 11일 열렸다. 참가자들은 남산의 동쪽 장충체육관에서 출발해 남산 정상을 지나 남산의 서쪽 남대문시장까지 서울미래유산을 찾아 함께 걸었다.1960년대 중반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스포츠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돔구장이었으며 각종 운동경기와 다양한 행사가 열린 곳이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던 종목은 프로레슬링과 권투였다. 아련하게 귓전에 맴도는 말, ‘여기는 장충체육관 특설링입니다’. 프로레슬링이 열리는 날 체육관은 만원이었다. 박치기의 왕 ‘김일’, 당수의 명수 ‘천규덕’, 비호 ‘장영철’ 세 명은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을 이끄는 주축이었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 링 위의 그들은 일상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뚫어 주는 명약이었다. 상대 선수의 공세와 반칙에 당하던 김일 선수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체중을 실어 상대방의 머리를 향해 박치기를 하면 관중과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가 상대 선수의 이마에 꽂힐 때마다 사람들은 “잘한다”, “잘한다”를 외쳤다. 천규덕 선수의 당수가 상대 선수의 가슴팍을 내리칠 때도 그랬다. 레슬링 경기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은 항상 모이는 친구 집에서 레슬링을 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따라 했다가 머리에 혹이 나는 아이들도 있었다.김일 선수는 장충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 세계 챔피언이 됐다. 권투에는 김기수 선수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인 그도 장충체육관의 스타였다. 1963년 개장한 장충체육관은 2012년부터 리모델링을 시작, 2015년에 재개장했다. 새롭게 단장한 그곳에서 배구와 격투기 등 여전히 각종 운동경기가 열려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한때 사람들 사이에서 장충체육관을 필리핀에서 무상으로 지어 줬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장충체육관 부근에는 1971년에 지어진 장충리틀야구장이 있다. 서울에 하나밖에 없는 유소년야구장이다. 이곳에서 야구를 하며 뛰어놀던 어린 선수들은 1983년, 1985년, 2014년에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어릴 때 이곳에서 야구를 했던 선수 가운데 박찬호와 이승엽도 있었다. 배우 송강호와 김혜수가 열연한 영화 ‘YMCA야구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장충리틀야구장 위에 있는 테니스장도 1971년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테니스 선수인 이덕희와 김봉수, 이형택 등 테니스 스타의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호주 오픈 본선 진출, US오픈 16강, 프랑스 오픈 본선 진출 등 이덕희 선수의 ‘한국 최초 기록’은 화려하다. 이번 미래유산 답사 코스는 아니지만 장충체육관 북쪽 약 1㎞ 거리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성운동장으로 시작,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9년에 재개장한 뒤 잠실에 종합운동장이 생기면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프로야구와 축구가 없던 시절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축구와 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 경기 못지않았다. 특히 동대문야구장은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대통령배 대회 등이 열리면 출신 지역과 학교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TV는 물론 라디오에서도 경기를 중계했다. 그 시절 최동원 선수는 최고의 고교야구 스타였다.장충체육관, 장충리틀야구장, 장충테니스장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국립극장으로 연결된다. 국립극장의 역사는 1950년 지금의 서울시의회 본관 건물에서 시작됐다. 첫 공연 작품은 ‘원술랑’이었다. 그해 4월 30일부터 5월 6일까지 7일 동안 5만명이 넘는 관객이 공연을 관람했다. 팬레터가 쇄도했다. “사랑하는 이를 눈물로 웃으며 보내는 예쁜 공주, 화랑 원술랑을 사모했던 것이 잘못일까?”라는 당시 어떤 팬이 보낸 팬레터의 한 대목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립극장은 대구에서 문을 열게 된다. 휴전협정을 맺은 다음해 미국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위문 공연 차 우리나라를 찾았다. 당시 ‘춘향전’에 출연한 배우 백성희와 촬영한 기념사진이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명동에 김수영, 박인환, 오상순, 이봉구, 변영로 등 문인과 음악가, 미술 분야의 예술인이 모여들었다. 1956년 박인환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노래로도 만들어진 시 ‘세월이 가면’을 남겼다. 폐허가 된 명동에서 예술혼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7년 국립극장은 명동에 둥지를 튼다. 환도 기념 공연 작품은 카를 쇤헤어의 ‘신앙과 고향’이었다. 희곡 현상 공모도 했다. ‘딸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하다’가 제1회 당선작이었다. 1961년 극장 리모델링을 시작해 1962년 3월에 새롭게 개관했다. 이때 ‘국립극단’이 발족됐다. 국립극장은 명동 시대를 끝내고 1973년 10월 지금의 자리인 남산으로 이전한다. 국립극장 남산 시대의 문을 연 개관 기념 공연은 ‘성웅 이순신’이었다. 240여명이 출연한, 당시 한국 연극 사상 최대 규모의 작품이었다.국립극장을 뒤로하고 남산서울타워로 향한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남산순환버스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있지만 무더운 날씨와 한정된 시간 때문에 남산순환버스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남산 정상 못 미쳐 넓은 터가 버스 종점이다. 종점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일행이 출발했던 장충체육관의 돔 지붕이 보인다. 그 풍경을 뒤로하고 정상으로 올라간다. 짧은 오르막길을 다 오른 후 오른쪽으로 돌아 전망데크에서 서울 도심을 조망했다. 서울 도심에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경계를 그려 본다. 발 딛고 서 있는 남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출발 지점인 장충체육관 뒤편으로 이어져 동대문을 만난다. 동대문을 지난 성곽은 낙산 줄기 주택가 사이를 비집고 올라 낙산 정상에서 숨을 고른다. 성곽은 백악산(북악산)을 지나고 그 품에 조선 시대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을 품었다.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다시 남산으로 흘러온다. 그 가운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청계천이 흐른다. 청계천의 상류를 웃대라고 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촌은 웃대의 한 마을이었다.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계곡 물줄기가 만든 풍경이 선경이라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었다. 겸재 정선이 살던 집은 현재 경복고등학교 자리다. 백사 이항복은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의 한쪽 끝부분에 필운대라는 둥지를 틀었다. 송석원시사는 중인 출신의 문인들이 시서화를 창작하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하류는 아랫대로 군영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군사체제와 경제체제가 흔들리자 군영의 군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현재 훈련원공원이 있는 곳이 훈련원이었는데, 조선 후기 훈련원 군사들이 농사지은 배추가 유명해 ‘훈련원 배추’로 팔렸다고 한다. 청계천 중류 중촌은 저잣거리이자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종로 남대문 주변에는 시장이 있었다. 의원, 역관, 꼭지(광통교와 수표교 등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한양의 거지 조직), 전기수(소설을 읽어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는 사람)가 서로 얽혀 살았다. 지리적으로 중촌의 북쪽은 북촌이다. 당대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중촌의 남쪽에는 남촌이 있었다. 양반 중 무반 쪽 사람들과 벼슬 없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그곳이 남산 기슭이었다.남산 정상 전망데크는 여러 곳이다. 그곳을 돌아다니며 도심 풍경을 봐도 좋고 남산서울타워 전망대(유료)에 올라 전망을 즐겨도 좋다. 남산서울타워는 전체 높이가 236m가 조금 넘는다. 남산의 해발고도가 270m다. 1971년 탑신과 철탑의 공사를 마쳤다. 전망대는 1975년에 생겼으며 일반에 공개된 건 1980년이다. 남산서울타워는 관록의 여행지이자 유행을 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사람은 물론 지방에 사는 사람, 외국인 등 서울을 찾은 사람들의 인기 관광코스다. 남산서울타워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며 굽어보는 시야에 인천 앞바다까지 들어온다. 남산서울타워를 뒤로하고 남대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 한양도성 성곽이 길을 안내한다. 백범광장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한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걸음은 낮 12시를 조금 넘겨 도착했다. 배가 고프다. 남대문시장으로 향한다. 오늘의 도착지 서울미래유산 남대문시장, 조선 태종까지 거슬러 오르는 시장의 역사를 뒤로하고 먹을 것이 넘쳐나는 골목으로 향한다. 50년을 넘긴 밥집이 여럿이다. 국밥에 곰탕, 닭곰탕, 칼국수, 갈치조림 등 한 끼 밥도 좋고 길거리 음식도 좋다. 돌아보니 출발했던 장충체육관 앞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장충동 족발거리도 있었구나! 글 장태동 여행작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박 시장 비서 관노에 비유한 네티즌 사과하며 “김구 선생도…”

    박 시장 비서 관노에 비유한 네티즌 사과하며 “김구 선생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고발한 것으로 알려진 전 비서를 관노(국가에 소속된 종)에 비유했던 네티즌이 결국 사과에 나섰다. 한 네티즌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 그를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가요?”란 글을 썼다가 질타를 받았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박원순은 이순신이 아니며, 피해여성은 관노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네티즌의 ‘관노’ 발언이 아주 솔직해 높이 평가한다며 “친문(문재인 대통령 지지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국민을 바라보는 시각을 노골적일 정도로 정직하게 보여준다”며 “한 마디로 친문의 눈에는 국민이 노비로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들의 눈에는 여성이 관노로 보이는 것”이라며 “그들이 자자고 하자면 언제라도 잠자리에 들 의무가 있는 관노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다”고 덧붙였다. 또 광장에 나가 촛불혁명을 한 대가로 졸지에 국민이 국가의 노비가 되었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사과의 글을 올린 네티즌은 “많은 분들이 ‘관노’란 단어에만 민감한데 가장 수치스런 지금의 잣대를 박 시장을 공적을 허는데 사용하지 말자는 취지”라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이순신 장군의 예는 지금으로 보면 수치스러운 부분”이라며 “이순신 장군의 수치스런 부분을 생각해보니 이것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관노 부분을 잘못된 예로 언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김구 선생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고 덧붙였다. 관노를 언급한 댓글이 게시된 동일한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관비와 잠자리 한 것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시장이 비서에게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한게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일인가”라며 저급한 비유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인간 평등 자주국가 건설의 용틀임” 동학혁명의 진실 50년 연구 집대성

    “인간 평등 자주국가 건설의 용틀임” 동학혁명의 진실 50년 연구 집대성

    “민중은 국가 폭력에 맞서 목숨 바쳐역사는 기억해야 살아있는 유산 된다”전투현장 답사·농민군 후손 증언 수집근현대사 관통 민족사적 이해에 초점“동학농민군의 정신은 미래의 역사적 자산이 될 것이요, 반외세·자주의 지향은 통일의 화두가 될 것이다.” 지난 3월 83세로 타계한 원로 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신간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전 3권·교유서가)에서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운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책을 통해 민주화운동, 촛불혁명을 거쳐 남북통일을 과제로 둔 우리에게 동학농민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신간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는 지난 50년 동안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했던 선생이 남긴 필생의 유작이다. 저자는 이 사건이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겨울에 작성했다는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동학농민혁명은 인간 평등을 추구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용틀임이었다. 민중은 국가 권력으로 자행되는 국가 폭력에 맞서 목숨을 바쳤다”고 했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혁명의 민족사적 의의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두고, 19세기 말 조선을 뜨겁게 달군 농민들의 처절한 저항적 민족주의 정신을 전한다.별세하기까지 저자는 ‘한국사 이야기’, ‘인물로 읽는 한국사’ 등으로 역사 대중화를 이끌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을 통해 사료를 해석했다. 이번 책 역시 동학농민군이 치열하게 싸운 현장 답사는 물론, 동학농민군 후손과 현지인들의 증언을 수집해 꼼꼼히 고증했다. 조선 관료들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물까지 샅샅이 훑었다. 200여장의 자료 사진과 각종 현장 사진도 곁들였다.1권에는 민란이 일어난 19세기 사회·경제적 배경과 함께 동학의 전파, 농민과의 결합 과정을 담았다. 2권에는 일본이 농민군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진출해 개화 정권을 수립한 뒤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농민군 섬멸작전에 나선 과정을 실었다. 마지막 3권에서는 전봉준 등 혁명 지도자들이 일본 영사경찰과 권설재판소의 문초를 받아 처형된 과정 등을 살필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직접 작성해 발표하고 전달한 관련 문서들을 모아 책의 뒷부분에 부록으로 정리했다. 문학적 느낌이 나는 서술도 곳곳에 돋보인다. 예컨대 동학농민군에 대해 ‘흰옷을 입고 푸른 죽창을 든 농민군의 모습에 “일어나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농민군이 일제히 일어서면 흰 구름을 뭉친 듯했고 앉아 있으면 푸른 죽창이 빽빽했던 것이다’라고 묘사했다.요란하게 출범했지만 문벌정치 세력과 양반 지주들의 반대로 폐지된 ‘삼정이정청’에 관해서는 ‘이때 삼정을 바로잡았다면 조선 말기는 더 생동감 넘치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요, 농민 봉기도 잦아들었을 것이다. 이로써 꺼져가는 조선왕조의 불꽃을 되살릴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의 마지막 역작을 통해 “역사는 기억해야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기억해 미래 인권과 통일의 유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금요칼럼] 도동서원과 한훤당 고택카페/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도동서원과 한훤당 고택카페/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예전에는 누가 취미를 물으면 ‘절 구경 하기’라 대답했는데 요즘에는 서원 구경이 더 잦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도 없지 않다. 낙동강 일대는 특히 흥미롭다.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과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이, 남쪽 달성에는 한훤당 김굉필의 도동서원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원 구경은 허망할 때가 적지 않았다. 지금 서원이란 선현에 대한 제사를 제외한 다른 기능은 사실상 멈춰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서원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할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원은 아름답지만 재미는 적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도동서원 일대를 둘러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됐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서남쪽으로 돌아드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에 동북향으로 앉혀 있다. 한훤당 무덤이 있는 뒷산은 대니산(戴尼山)이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이니 ‘공자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훤당은 인간의 기본 도리를 담은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린 인물이다. 주희가 편찬을 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학은 양반집 어린아이가 8세가 되면 손에 잡는다는 기초 경전이지만, 조선 사림에게는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이치를 담은 최고의 경전이었다는 것이다. 조금의 과장은 없지 않겠지만, 그래서 한훤당은 나이 설흔이 돼서야 다른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스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소학을 세상을 통치하는 원리를 담은 대학(大學)보다 유용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런 정도의 배경 지식만 갖추어도 도동서원의 모습은 달라 보였다. 낙동강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유형 유산으로 서원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소학 정신의 발신지’라는 무형의 정신 유산 또한 잊혀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이런 가르침이 서원에서 부족하게 느껴졌던 ‘오늘날에도 유효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서원에서 그동안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상식도 없이 찾아가곤 했던 ‘내 탓’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도동서원을 찾는 사람 가운데는 젊은층이 많았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한훤당 고택카페가 벌써부터 ‘핫플레이스’로 떠올랐고, 카페를 목적지로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도동서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대니산 동쪽 끝에 있는 고택은 서흥 김씨의 종가다. 김굉필의 후손이 1779년 지었다고 하니 한훤당(1454~1504)의 손때가 묻은 집은 아니다. 특유의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훤당 고택카페는 커피 손님이 많았지만, 미숫가루호두스무디, 가래떡추러스, 흑임자빙수처럼 전통에 바탕을 둔 먹거리도 인기를 끌고 있었다. 카페의 이름은 한글로 ‘소가’라 써 놓았는데, 손님들은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사랑채인 광재헌에 걸린 편액을 보고 곧 소학세가(小學世家)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학의 가르침을 대대손손 이어 가는 집안이라는 뜻이겠다. 한훤당 고택처럼 대표적인 도학자 집안의 유서 깊은 종가를 카페로 만들겠다는 종손의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카페를 찾는 손님의 상당 부분은 필자처럼 서원 구경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들이라 감히 짐작해 본다. 카페는 이제 여름이면 고택음악회가 열리는 지역의 문화적 명소로 떠올랐다. 이렇게 카페는 한훤당의 가르침을 알리고 도동서원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하는 일종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게 문화재 활용의 진정한 모범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훤당 후손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추리닝 아저씨’와 백일장 키즈의 관촌 추억

    ‘추리닝 아저씨’와 백일장 키즈의 관촌 추억

    ●여고생 먼저 달랬던 피투성이 맨발의 이문구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20년쯤 됐을까. 다니던 고교의 문예반 선생님인 이정록 시인을 따라서 ‘백일장 키즈’로 살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날도 백일장 낙선을 차표처럼 쥐고, 친구 셋과 버스에 올랐다. 어디선가 위로 삼아 먹겠다고 산 치킨 두 마리를 들고. 버스가 청라저수지를 거쳐 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모두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갔다. 드넓은 저수지가에 여고생 넷이 모여 앉아 치킨을 뜯었다. 저수지 근처의 허름한 슈퍼에서 환타 두 병과 콜라 두 병을 사 온 것까지는 좋았다. 음료에 취해 급기야 ‘H.O.T냐 젝스키스냐’ 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나가 버려 결국 싸움이 났다. 격하게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콜라병이 깨졌고, 누군가 울었다. 백일장에 낙선한 설움까지 겹쳐 울음은 매우 길었는데 그 소리를 따라왔는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치킨 뺏으러? 해코지를 하려나? 별로 깨끗하지 못한 속옷 상의에 낡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 게다가 맨발이었다. 치킨과 유리병들을 치우지도 않고 도망치듯 벗어났다. 정류장에서 조용히 저수지가를 걷던 그 ‘추리닝 아저씨’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깨진 병 조각을 밟은 것이었다. 아저씨의 상처와 타야 할 버스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그러다 슈퍼로 뛰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연고와 두루마리 휴지를 얻었다. 상처가 꽤 깊어 보였는데 아저씨는 자꾸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했다. 그날 인사는 하고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아저씨가 계속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내가 못 보고 밟았다”고 말해 줬던 것만 또렷이 남아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가 문예반 숙제로 읽은 ‘관촌수필’의 이문구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생님은 문예반 문학기행을 그 청라저수지가에 있는 이문구 선생 작업실로 가겠다면서, ‘선생께서 몸을 치료하기 위해 맨발로 저수지를 걷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추리닝 아저씨는 출타 중이었고, 동시를 쓰는 금은방 아저씨가 동행해 이문구 소설가의 흔적을 소개해 줬다. 그로부터 1년 후 서울의 한 백일장에서 특별 강사로 초빙된 추리닝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눈이 몇 번 마주쳤지만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따라 웃고, 말씀을 경청하는 척했다. 행사가 끝나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후 돌아서려는데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는 아연한 우리에게 한쪽 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얘, 나 다 나았어.” 투병 중에 특별히 외출하신, 거의 마지막 강연이었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야 알았지만 자꾸만 선생의 발치로 눈이 갔던 터라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산업화 이후 농촌소설의 계보 이어 간 작품 순천문학관에서 만난 김승옥 선생<‘작가의 땅’ 2회>은 내 책 ‘유빙의 숲’의 책날개를 오래 쓰다듬더니 ‘충남 보령 출생’이라는 문장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이문구’라는 이름을 써 줬다. ‘그분의 고향 맞다’며 나 역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천문학관에 전시된 문인들과의 단체 사진 속에서도 이이가 ‘이문구’라고 큰 손짓으로 알려 준 김승옥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뒤에나 쓰였을 것이다. 김승옥 선생이 써 주신 ‘이문구’라는 글자와 ‘친구’, ‘보고 싶다’는 단어와 오래된 저수지의 기억을 짊어진 채 보령으로 갔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문구 선생의 마지막 제자이자 한때 금은방을 운영했고 지금도 동시를 쓰는 안학수, 소설가 서순희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두 분은 문학기행 이후 20년 만에 그 여고생이 이렇게 장성해 왔다며 대견해했다. 이러저러한 옛이야기를 하며 함께 반나절 정도 이문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보령 시내와 청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명천 이문구 선생은 보령의 관촌에서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남로당이었던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집안은 몰락했고, 처참한 가족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안 해 본 막일이 없을 정도로 생계를 위해 애쓰던 선생은 소설가가 되면 빨갱이로 낙인찍힌 집안의 내력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서라벌예대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김동리 선생을 만났다. 그의 소설을 특별히 아꼈던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기에 이른다. ‘한국 문단의 특별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는 김동리 선생의 예언대로 그는 유장하고도 능청스러운 사투리가 일품인 문장을 지닌 소설가가 됐다. 그리고 고향 마을 관촌에 흐르는 개울의 명칭인 ‘명천’(여울물소리)을 호로 삼아 깊은 물소리의 울음을 이름 앞에 뒀다. 바다에 수장된 가족들과 고향을 에둘러 흐르는 물소리마저 모두 담아내어 문장으로 어우르겠다는 뜻이었을까. ‘우리동네’ 연작과 ‘관촌수필’ 등의 작품은 고향인 관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다.그는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산업화 이후 변화된 농촌의 모습과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 전후 산업화를 맞이한 농촌의 적나라한 변화와 고향 마을 사람들의 애잔한 삶을 소설로 쓰며 끝까지 그들을 향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농촌 소설의 계보는 몇 보 퇴보했으리라 여기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는 전후의 이념 대립과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농촌의 모습들을 소설로 쓰는 데 천착했다. ●분열된 한국문단 감쌌던 든든한 맏형 그러는 동시에 좌우로 갈라져 있던 문단을 두루 보듬어 ‘한국 문단의 맏형이자 듬직한 일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불의의 시대에 온몸으로 싸우고 있는 문인들을 앞장서 도운 일화는 너무도 유명한 일이어서 다시 열거하기도 벅차지만 분명히 기억돼야 할 그의 큰 발자취다. 선생의 사후에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등이 공동 주관해 문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일화는 그가 얼마나 ‘사람을 널리 살핀 이’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한 예다. 생전에 선생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문학상을 만들지 말 것을 여러 사람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그를 잊을 수 없었던, 그가 이렇게 잊혀져 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던 사람들이 그의 고향인 보령에 문학관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문구 선생 단독 문학관이 세워지기를 바랐던 수많은 사람과, 향토사료관, 갯벌체험관, 이곤순 서예관, 보령문화원을 한건물로 묶어 넣고 그 2층에 문학관을 세우려는 보령시의 뜻이 충돌했다. 그 사이에서 유족들은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보령시는 이문구 문학관 건립을 중단해 버렸다. 유족들이 기증했던 유품들을 되찾아 가기까지 긴 시간은 또 말해 무엇할까. 이것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이고 이문구 선생이 나고 돌아간, 김성동·이혜경·서순희 소설가를 비롯해 안학수 시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인들의 고장인 보령에서 일어난 일이라니.선생이 돌아가신 지 17년. 내가 다시 이문구 선생의 작업실이었던 청라저수지를 찾아갔을 때는 수풀이 무성하고 인적이 끊긴, 개 세 마리가 작업실 마당에 묶여 있는 곳이 돼 있었다. 선생이 직접 심고 기른 매실나무와 소나무, 은행나무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집을 에워싸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음대로 우거진 수풀 때문에 작업실 마당까지밖에 진입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지병이 있던 선생이 직접 심어 생즙을 내려 마셨던 돗나물도 여전했고, 작업실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의 위용과 그들 모두를 곳곳에서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군락도 변함없었다. 그곳으로 나를 안내해 준 안학수·서순희 작가 부부가 옛일을 추억하며 애통해하는 사이 나는 전에 이문구 선생을 만났던 청라저수지가로 향했다. 주인이 떠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업실에 더 머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보령 시내의 ‘관촌수필’ 안내석이 있는 장소는 더 참담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주유소 옆 공터에 안내석이 옮겨져 있었고,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뀐 채였다. 선생이 태어나고 소설을 써서 기렸으며 종내에는 화장된 뼛가루까지 뿌렸다는 왕소나무가 있던 자리와 부엉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도 서 있지 못하고 함부로 옮겨진 채 덩그러니 서 있는 안내석이라니. 보살피는 이 없이 맞은 시간의 흐름이려니 싶었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것을 이렇게 사라지게 놔둬도 되는 것일까. 선생이 없는 자리와 그를 추억하는 말소리만이 두런거리는 오후였다. ●희미해진 관촌의 흔적… 들리지 않는 ‘명천’ 나는 그렇게 반나절간의 ‘문학기행’을 마쳤다. 한 작가의 생의 흔적을 더듬는 데 반나절이면 충분했던 그 시간마저도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가 머무르고 썼던 곳의 기억과 흔적들이 사라진 장소에서 다시 그의 문학을 톺아보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땅’이 응당 짚어야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리고 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러나 이 마음은 농촌의 변화와 고향 상실을 꾸준히 그려 냈던 선생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가족을 처참하게 잃고 고향의 물소리를 이름 앞에 둔 선생이 감내했을 시간에 견준다면 더욱더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그가 홀연히 돌아간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옳은 일일까. 물론 문학관이니 관촌수필 안내석이 한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문호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는 관의 행정과 선생을 기리는 사업들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이었을까. 누군가를 기리는 일에 특별히 정해진 방법이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강으로 가서 바다로 흐르는 물소리에 대해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선생의 이름 앞에 있는 ‘명천’이라는 지명이자 호를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기며.소설가 이은선 ■ 매주 월요일자에 싣던 아파트 시세표는 지면 조정 관계로 없앱니다. ‘문화기획’은 매주 화요일자에서 월요일자로, ‘2020 미래문화유산’은 수요일자에서 화요일자로 각각 옮겨 담습니다.
  • [길섶에서] ‘서울식품’ 유인숙 대표/문소영 논설실장

    프레스센터로 국내외에 더 잘 알려진 서울신문사 빌딩의 지하 1층에는 1985년 4월 서울신문과 함께 입주한 업장들이 있는데, ‘서울식품’도 그중 하나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회사 잡화점이다. 기사 마감을 끝낸 기자들은 신문 초판이 나올 때까지 자투리 시간에 서울식품에서 새우깡 안주에 맥주 또는 소맥(소주+맥주)을 마시며 ‘석양반주’를 아주아주 가끔씩 하기도 했다. 숙취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내근에 들어오면 이온음료를 마시는 곳이었다. 아침에는 막 삶아 따끈한 계란이나 김밥이 준비돼 있었다. 출입처로 출근하던 탓에 등한시하던 ‘서울식품’을 애용하게 된 시기가 2018년 초봄 발 골절로 힘든 때였다. 목발로 멀리 걸어 나갈 형편이 안 되어 절름거리며 아침저녁으로 삶은 계란을 먹으러 들락거렸다. 2017년 겨울 서울식품의 새 주인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소소한 수다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나누었던 것도 같다. 유인숙 대표, 그는 재스민차를 매번 우려 주었다. 유 대표가 어제 서울식품에서 철수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괜히 마음이 울적해 기록으로 남긴다. 코로나19가 끝나고 건강도 되찾아 그가 사회로 어서 복귀하기를. 서울식품은 이제 대기업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symun@seoul.co.kr
  • [취중생] 커닝 속출 온라인 시험, 대학은 정말 책임 없나요

    [취중생] 커닝 속출 온라인 시험, 대학은 정말 책임 없나요

    [편집자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취중생’(취재 중 생긴 일)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사건팀 기자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님, 저희 학교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지난 2일, 1학기 기말고사를 비대면(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인 서울 한 사립대 관계자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한 얘깁니다. ‘온라인 시험 부정행위 방지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다 내놓은 대답이 이랬습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으면서 대부분의 대학은 이달 말 예정된 기말고사를 비대면 시험으로 전환했습니다. 아무리 방역과 소독을 철저히 해도 학생들이 한꺼번에 모여 시험을 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고 본 겁니다. 온라인 시험 친다면서 커닝 방지책은 “…” 문제는 비대면 시험의 공정성입니다. 지난 중간고사 때 이미 온라인으로 시험을 치른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이 집단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하대 의대에서는 무려 91명의 학생이 의학과 과목 단원평가와 중간고사에서 답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습니다. 건국대와 서강대, 연세대, 한양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에서도 중간고사 기간 학생들이 모여서 시험을 보거나 대리시험을 봤다는 제보가 속출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작 대학 당국에서는 온라인 부정행위를 막을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내 대학 10여곳에 물어본 결과 대다수의 대학이 커닝, 대리시험 등 부정행위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해 학생 얼굴을 확인하겠다는 대학은 ‘양반’이었습니다. 한 대학 관계자는 “엄격한 관리가 가능한 경우에만 온라인 시험을 허용한다”고 했는데, 엄격한 관리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논의 중”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대학 관계자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부정행위를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는 황당한 답을 내놨습니다. 대다수 대학이 선택한 답은 ‘교수 재량에 맡긴다’였습니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시험이든 보고서든 모든 결정을 교수나 강사 개인에게 떠넘기는 겁니다. 이에 서울 한 사립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기말고사 진행에 대해 의견을 물었는데, 너무 다양한 의견이 나와 고민스럽다”면서 “부정행위 방지도 문제지만, 수업을 열심히 들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어떻게 구분할지도 문제”라고 전했습니다. 공정성 논란을 막을 수 없는 온라인 시험 대신 아예 보고서만 제출받아 평가하겠다는 교수도 많습니다. 학생들 “교육권 침해…등록금 반환해야”학생들 사이에선 “온라인 시험이 ‘인싸’와 ‘아싸’를 구분하는 기준이 됐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별다른 방지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시험을 치면 절대 부정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한 학생은 “친한 친구가 많으면 (답안을 서로 공유하니) 시험을 잘 보고, 친구가 없으면 혼자 망하는 식”이라면서 “커닝 안하는 사람만 바보된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당국에 등록금 환불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와 청년단체 ‘청년하다’, 이화여대·숙명여대 학생회 등은 5일 국회 앞에서 등록금을 반환해달라며 10시간 연속 발언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교육권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교육부는 ‘대학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각 대학본부는 ‘교육부의 가이드가 없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서로 책임 미루기만 한다는 겁니다. 수개월째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답만 반복하며 수업에서도, 시험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대학. 이게 정말 최선일까요?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다음달 4일 돛을 올립니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예년보다 3개월가량 늦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답사 횟수를 20회로 줄였고 참가자 수도 20명 이내로 제한합니다. 이에 앞서 서울신문 지면 투어로 갈증을 풀어 드립니다. 1회 인사동(4일), 2회 대학로(10일), 3회 여의도(17일), 4회 동대문(24일), 5회 성수동(7월 1일) 등 5개 지역을 찾아갑니다. 이들 지역의 유·무형 서울미래유산을 집중 탐구하고 ‘장소인문학’의 비밀을 풀어 줄 것입니다. 장태동, 최석호, 권기봉씨 등 서울역사 여행가들이 해설자와 집필자로 새롭게 나섭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이소영 동화작가, 함혜리 문화칼럼니스트, 서동철 문화재위원,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등 역대급 필진을 초빙해 투어의 격을 높였습니다. 답사투어는 다음달 4일부터 11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진행하고 예약은 투어 전주에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 홈페이지에 하면 됩니다. 관련 기사는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 지면에 게재됩니다.●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금요칼럼] 미강서원과 미수 허목 미술관의 우선순위/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미강서원과 미수 허목 미술관의 우선순위/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파주에 살다 보니 쉬는 날 드라이브라도 하려면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자유로 남쪽보다는 언제나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재작년 문산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37호선이 완공되고는 연천을 목적지로 삼곤 하는데 괜찮은 막국수집이 몇 군데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천은 중요한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품고 있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전곡선사박물관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구석기 문화유산이고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남쪽에는 드문 고구려 유적이다. 경순왕릉과 숭의전은 각각 통일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다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를 상징한다. 최근에는 군남리 막국수집으로 가는 길에 미수 허목(1595~1682)의 묘소를 알리는 자그마한 푯말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미수라면 흔히 남인의 영수로 불리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이른바 예송 논쟁을 벌인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마디로 당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삼척에서 미수 특유의 전서라는 뜻으로 미전(眉篆)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글씨를 보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영천 완귀정(玩龜亭) 같은 다른 전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忠孝堂) 편액이 인상 깊었던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중국 상고시대 문자를 탐구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17세기에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연구 결과가 21세기에도 현대적 느낌을 주는 글자체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수가 만년을 연천에서 보냈고, 그를 배향한 미강서원이 이 고장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지만 푯말을 보기 전까지는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사실 지금도 연천에 남은 미수의 자취는 무덤뿐이다. 초가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은퇴한 거물 정객의 거처가 마땅치 않다는 소식에 숙종이 내렸다는 일곱칸 은거당과 임진강변의 사액서원은 주춧돌만 남았다. 십청원(十靑園)과 괴석원(怪石園)이라는 정원도 있었다지만 흔적이 없다. 연천군은 은거당 터와 미강서원 터를 발굴조사한 데 이어 두 유적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럴수록 개인적으로는 지역이 낳은 역사 인물의 거처와 그를 기리는 시설의 모습을 되살리는 흔한 방법보다 오늘날에도 미래지향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을 펼친 ‘미술인 미수’를 조명하는 데 투자의 우선순위를 두면 관광객 유치 효과도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과거엔 정치인이 예술인이고 예술인이 정치인이었다. 추사 김정희도 그랬다. 그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주 대정에 8년, 함경도 북청에 6년 동안 유배되기도 했다. 추사는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그곳에서 그린 세한도는 대표작이 됐다. 제주에는 세한도에 담긴 소박한 집을 닮은 추사관도 세워졌다. 일종의 미술관이다. 겸재 정선도 양반 사대부라는 출신 성분상 정치적 색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천현령 시절 겸재가 남긴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의 대부분은 노론 실세들의 별서(別墅) 등을 그린 것이다. 같은 시기 한강 주변 경치를 33폭에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도 소재를 고르는 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겸재가 정치인이자 행정가로 머물렀던 양천 관아와 양천향교 주변에는 겸재정선미술관이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 강서구에 속한다. 미수가 추사나 겸재와 다르지 않은 반열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정치인으로서, 사상가로서의 자취가 너무 우뚝해 예술 분야에서의 성취가 오히려 가려지고 있지 않은가 싶다. 첫 번째 ‘미수미술관’이 연천에 세워졌으면 좋겠다. 우리 문화사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미술관 입지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미강서원 터 주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국박서 만난 이집트 유물(하)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국박서 만난 이집트 유물(하)

    이집트인들은 미라 제작 과정에서 시신의 장기들을 모두 제거했지만 심장만큼은 남겨 두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심장을 한 개인의 정수가 담겨 있는 기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자의 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심장 무게 달기’는 한 개인의 생애를 평가하기에 적절한 조사 방법이라 할 만하다.그런데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심판 과정에서 주인의 의사에 반해 주인이 숨기고 싶은 잘못에 대해 떠드는 불상사도 우려했던 것 같다. 그런 심장의 일탈을 막고자 이집트인들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냈는데,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의 위치에 부적을 올려 놓아서 심장이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개똥벌레 모양의 부적을 ‘심장 스카라베’라고 부른다. 이 ‘심장 스카라베’는 재생과 생명 등을 상징하는 케프리를 묘사한 일반적인 스카라베들보다 좀더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심장 스카라베는 아랫부분이 금박으로 된 화려한 것이다. 문자 섹션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로제타스톤에 관한 영상물을 볼 수가 있다. 이름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로제타스톤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칙령을 기록하기 위해서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비석이다. 이 비석은 기록된 내용보다는 기록에 사용된 ‘언어·문자들’ 때문에 특별하다. 비석에는 같은 내용의 칙령이 3개의 서로 다른 언어·문자로 기록돼 있다. 가장 위에는 보통은 상형문자로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가 쓰여 있고 그 아래 역시 고대 이집트의 문자이지만 형태는 필기체이고 언어적으로도 신성문자를 기록한 언어와는 좀 다른 데모틱(Demotic)이 쓰여 있다. 맨 아래에 기록된 언어·문자는 고대 그리스어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로제타스톤은 1822년 샹폴리옹이 고대 이집트 언어를 최초로 해독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샹폴리옹은 고대 그리스어와, 고대 이집트어와 어원적으로 관계가 있는 중동 지역 언어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해독에 성공했다. 특히 그의 탁월성은 오래도록 ‘표의문자’로만 여겨졌던 신성문자에도 ‘표음문자’의 속성이 있을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에서 나타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문자섹션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서기상’이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형태의 서기상은 고왕국 시대부터 등장했다. 전시물은 중왕국 12왕조 시기로 크기는 비교적 작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서는 훨씬 더 큰 크기에 채색도 훌륭하게 보존된 고왕국 시대 서기상을 만날 수 있다. 보통의 서기상들은 실제로 펜을 들고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서기상은 허리춤에 필기도구를 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서기의 무릎 부분에는 일련의 문자들이 쓰여 있는데, 이는 망자를 위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관용적인 제문이다. 이 서기상의 건너편 벽면에 전시되고 있는 한 부조에서도 양반다리를 한 서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양각 부조는 25~26왕조 시대의 것으로, 앞서서 봤던 중왕국 시대의 서기상과는 1300~1200년가량 차이가 나고, 다른 박물관의 고왕국 시대 서기상들과는 무려 1800~1700년가량 차이가 난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 문명은 특정한 문화적 요소가 오래도록 유사한 모습으로 지속되는, 문화적 내구성이 매우 강한 문명이었다. 서기의 좌측 상단에는 보통은 ‘세쉬’라고 읽는 서기를 뜻하는 단어가 쓰여져 있다. 이 글자는 팔레트와 안료를 담는 주머니, 갈대로 만들어진 펜을 담는 통 등 서기들이 사용하는 필기도구들의 모양을 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휴관에 들어갔던 국립중앙박물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비록 완전한 개관은 아니어서 사전 예약을 해야만 관람할 수 있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답답해져 있을 이즈음 수천 년 전의 시공간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 이촌까지 가는 길이 멀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수천 년 전의 시공간이니 그 여정은 충분히 값질 듯하다.
  • 편하게 맛있게… 파우치에 든 국탕찌개

    편하게 맛있게… 파우치에 든 국탕찌개

    동원F&B가 한식 브랜드인 ‘양반’을 앞세워 가정간편식(HMR) 국물요리 시장에 진출했다. 동원F&B는 최근 간편 파우치 형태의 HMR 제품인 ‘양반 국탕찌개’ 14종을 출시했다. 탕 6종, 찌개 5종, 국 3종 등으로 구성됐다. 엄선한 자연 재료를 가마솥 전통방식으로 끓여 한식의 깊은 맛을 담으려 노력했다. 재료 본연의 맛과 식감을 살리면서 동시에 각각의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동원F&B는 양반 국탕찌개의 생산을 위해 동원F&B 광주공장 3000평 부지에 400억원 규모의 신규 설비 투자를 진행했다. 시중의 국물요리 간편식은 생산 과정에서 열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재료의 식감이 물러지고 육수의 색이 탁해진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번 신제품은 열처리 시간을 단축시켜 상대적으로 본연의 맛을 살렸다는 것이 동원F&B 측의 설명이다. 1986년 양반김, 1992년 양반죽, 1995년 양반김치를 ‘양반’ 브랜드로 출시했던 동원F&B는 올해 양반 국탕찌개 제품군의 매출액을 500억원, 2020년까지 1000억원 규모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동원F&B 관계자는 “급변하는 HMR 트렌드에 유연히 대응해 소비자들의 기호를 반영한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천젠런 대만 부총통의 아름다운 퇴장/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천젠런 대만 부총통의 아름다운 퇴장/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대만은 중국 대륙과 130㎞쯤 떨어진 데다 인구 2300만명 중 85만명이 본토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진환자와 사망자는 지난 22일 현재 각각 441명, 7명밖에 안 되는 세계 최우수 방역국이다. 2002년 11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시작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은 덕분이다. 37명이 희생된 사스 사태를 겪은 대만은 감염병 단계별로 120여개 행동지침을 촘촘히 마련해 해마다 업데이트해 왔다. 코로나 이전에 건강보험과 환자의 해외여행 이력 정보를 통합하고, 의심 환자가 왔을 때 의료기관이 위험 지역 여행 여부를 실시간 조회할 수 있도록 했다. 전염병의 조기 발견·격리가 가능한 이유다. 대만은 연초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코로나가 퍼지자 바이러스 전문가를 현지에 급파해 조사를 벌였고, 후베이성 입국자를 2주간 자가격리 조치했다. 중국이 우한을 봉쇄하자마자 의료용 마스크(N95) 수출을 금지하고. 마스크 실명제와 홀짝 구입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2월 6일 중국발 입국 전면 금지 조치를 내렸다. 중국 수출이 전체의 30%에 이르는 대만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초강수였다. 대만의 이런 방역 대책을 주도한 주인공이 천젠런(陳建仁·69) 부총통이다. 그가 4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20일 학자로 되돌아갔다. 국립대만대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공공보건 및 인간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소 중독과 유전성 전염병학을 연구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대만대 전염병학연구소장, 국가과학위원회 주임위원 등을 지냈다. 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03년 5월 위생서장(보건장관)을 맡아 사스를 철저히 통제해 ‘사스 퇴치의 영웅’으로 불린다. 이후 민진당에서 보건의료 분야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바이오산업 진흥 공약 마련을 주도했다. 2016년 대선에서 차이 총통의 러닝메이트로 제의를 받아들여 부총통에 당선됐다. 대만은 세계보건기구(WHO) 회원국은 물론 옵서버 지위에서도 쫓겨났지만 그의 진두지휘 덕에 방역 모범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천 전 부총통은 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으로 되돌아가 정체가 풀리지 않은 코로나를 집중 연구할 예정이라며 퇴임 부총통 관련 예우를 사절했다. 전직 부총통은 비서·운전기사·사무실이 나오고 매달 18만 위안(약 743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이를 모두 포기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총리와 대법원장, 대법관, 장관 등 고관대작을 지내고도 줄줄이 로펌에 둥지를 튼다.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최소한 금도(襟度)라는 게 있다. “책방을 하며 무료 법률상담을 하고 싶다”던 김능환 전 대법관은 중앙선관위원장에서 퇴임한 뒤 편의점에서 일하는 보통의 삶을 선택하자 ‘청백리의 표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5개월도 지나지 않아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돈이 있어야 마음도 올바르다)이라며 대형 로펌에 달려갔다. 편의점주들은 항심이 없다는 말인가. 안대희 전 대법관은 총리 후보 청문회에서 퇴임 뒤 5개월에 16억원을 변호사 수임료로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낙마했다. 하기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후원 기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는 윤미향 여당 비례대표 당선인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다. 서민들은 생각은 이렇다. 막말로 자녀들 대부분 다 컸겠다 부부 두 사람이 먹고사는 데 현직 후배에게 ‘민원을 넣는’ 자리로 가야 할 만큼 무슨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한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연금만도 50세 이상 퇴직자들이 꿈꾸는 월 사오백을 너끈히 받을 텐데도 말이다. 천 전 부총통과 같은 아름다운 퇴장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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