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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너무 가까우면 상대를 깊게 알 수도 있지만 뜻밖에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대마도(‘쓰시마’라는 현지 표기 대신 용어의 역사성을 고려해 대마도로 쓴다.)와 한국의 관계가 그렇다. 누구나 아침 6시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8시40분에 부산역에 내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대마도행 페리를 탈 수 있다. 불과 1시간30분이면 하타가쓰항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서울에서 흑산도 가는 것보다도 빠르다. 날씨만 맑으면 당연히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며, 반대로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한국의 남해안이 지척에 보인다. 거리만 가까운 것일까?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대마도는 우리와 ‘하나’가 아닐까. ●부산서 1시간30분… 너무도 가까운 섬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는 알지만 이키(壹岐)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이키는 한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가는 징검다리였으며, 일본 입장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섬들임에도 두 섬의 정체성이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대마도가 한반도에 밀착되어 있다면 이키는 보다 일본적인 곳이다. 대마도 스스로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모두 걸친 속국, 혹은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사적으로 대마도가 비일본적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정체성이 한반도에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한반도 문화를 모두 걸러낸다면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대마도가 오늘처럼 확고하게 일본 본토에 속하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대한(對韓)외교권을 중앙 정부로 가져가 이를 일본 정부에 편입시킨 결과일 뿐이다. 대마도는 국제법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일본 땅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우리와 더욱 가깝다. 대마도 서쪽 해안은 가히 한국 쓰레기들의 종합 전시장이다. 우리나라의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가 이곳 서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은 옛적 표류민 표착의 단서가 된다. 한반도 동남부에서 표류를 해도 자연스럽게 대마도에 닿곤 했으니 신라인 박제상이 이곳에서 죽은 것도 실은 이같은 교류사의 내역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나 신라식 산성이 존재함은 대마도의 선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에서는 대마도가 우리 주권 하에 복속된 섬은 아닐지라도 조선 영토의 일부로 보기도 했다. 지방에 내려보내는 경차관을 대마도에 파견했는가 하면 대마도 사람들이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의 벼슬과 녹봉도 받았다. 일찍이 고려 조정은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 즉 변방과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책임진 관직을 내렸다. ●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 본토인들 입장에서는 대마도가 한반도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 거북스러움을 느낄 터이지만, 정작 역사시대의 일본인들 스스로가 대마도를 별종의 섬으로 간주하여 본토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보았다. 오늘날도 대마도는 ‘국경의 섬’식으로 인식돼 대륙에 맞서는 자위대 기지가 곳곳에 위치하는 전략적 가치만 인정받을 뿐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사키현에 붙어서 소외받을 바에는 차라리 부산시 영도구에 붙어서 잘 살아보자는 농담도 나온다. 그 농담이 농담으로만 여겨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이키 관광상품을 개척한 범주항공의 신우진 차장은 “이키에는 주로 후쿠오카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대마도는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들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통계 수치까지 제시한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어 기본 단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이는 근래의 일이 아니다. 대마도 역사자료관에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본격 한국어 교재가 있다. 한국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학습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증거다. 대마도는 남북이 81㎞에 이른다. 작은 섬이라고 여기는 일반의 인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미국 밑에 쿠바가 있듯이 한반도 코밑에 거대한 섬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일간 절묘한 곳에 자리잡은 대마도에 왜구가 득실거리기라도 할라치면 한반도는 밤잠을 못이루었던 것이다.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왜구들 극성 대마도는 한마디로 ‘먹고살기 힘든 섬’이다. 북쪽 히타카쓰항에서 남쪽 이즈하라까지 근 2시간여 거리를 달려 보지만 보이는 것은 산뿐이다. 섬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다에 산들이 떠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배고픈 사람들이라 눈 앞에 건너다 보이는 조선을 바라보며 해적질을 꿈꾸었던 게 무리는 아니다. 대마도의 이름난 사찰마다 조선에서 얻어온, 정확하게 말해 약탈해 온 불상이나 범종들이 한두 개씩은 놓여 있다. 이키의 안국사에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팔만대장경 초판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약탈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고립된 조건 속에서 고귀한 문화유산들이 멸실되지 않고 남아 전하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일정한 식량을 공급하고, 무역을 허락하며, 왜관을 열어 회유함으로써 왜구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대마도는 부족한 식량을 조선을 통해 해결하는 반면 일본 본토와 조선 사이에서 조정능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대마도는 에도 바쿠후를 대리하여 대한 외교를 수행했다.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막중한 권한을 가지고 바쿠후와 한반도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중재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일종의 생존전략인바, 그들은 양자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이윤을 냈으며, 그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이런 탓에 임진왜란 이후에 일시적으로 한·일간 국교가 단절되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들도 대마도민들이었다. 현재 나가사키현에 속한 대마도와 이키는 히라도(平戶)와 더불어 왜구의 본거지였다. 태종 때 대마도정벌에 나선 이종무 장군의 아소만 소탕작전도 왜구를 청소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소만을 바라보니 왜 이 장군이 한달여 동안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왜구를 소탕하지 못했던가가 자명해진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다. 섬들이 은하수의 별처럼 흩어져 있어 섬 사이로 신출귀몰한다면 강력한 대군도 왜구 몇을 감당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이키와 히라도에서 출발한 왜구들은 이곳 대마도 왜구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며 끊임없이 한반도의 해안을 침탈해 댔으니 고려와 명나라가 왜구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절반은 진실에 가깝다. ●전쟁과 평화 교차하는 ‘국경의 섬´ 그런데 일본의 후소샤판 교과서에는 ‘왜구란 조선반도 및 중국 대륙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집단을 뜻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왜구는 대마도, 이키제도와 히라도 등을 포함해 세토나이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해적 및 악당들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최근 들어 왜구의 구성을 국적이나 민족을 넘어선 차원의 인간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당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가공된 역사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왜구 근거지는 북규슈 지역의 도서 연안이고, 발생 원인도 일본 내의 정치적 혼란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왜구의 시대에 이어 이번에는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가 등장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번 전란의 꼬투리는 대마도주 소오(宗義智)의 수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의 딸 마리아가 바로 이 소오의 아내였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된 고니시의 출병에는 조선말을 잘하는 대마도 사람 8000여명이 동원된다. 웬만한 남자들은 전부 동원됐다.‘전쟁이 끝나자 남자는 없고 과부들만 들끓어 대를 이을 수 없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이키도 대규모 병사를 내어 한반도에 출병했다. 과거의 왜구들이 왜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통신사 맞이하는 기착지… 친선의 가교로 전쟁이 끝나고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재개되자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는 한반도에서 오는 귀한 문화사절단을 맞이하는 기착지로 변신한다. 수백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는 그 자체가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전하는 통로였다. 조선정부는 성심성의껏 사신을 조직하였으며, 대마도와 이키 등지의 번주들도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맞았다. 대마도와 이키는 조선통신사를 통한 친선과 교류의 장이었지만 때로는 왜구의 본거지로 역사의 굴절을 계속했다. 이키의 아름다운 ‘원숭이바위’가 있는 곳에는 2차대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대마도에도 거대한 지하포대가 있다.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아소만 일대에 군함을 잠복시켜 놓고 반세키(万關)운하를 통해 러시아함대를 기습·괴멸시켰다. 근래 대마도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곳곳에 러일 친선을 기원하는 전승비를 세웠다. 명분은 친선이겠지만 본래 목적은 딴 곳에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니 이처럼 일본은 대마도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마도를 자국 본토와는 달리 오로지 ‘국경의 섬’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대마도와 이키는 한·일 간의 친선을 돋우는 징검다리도, 침략의 가교도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최익현 선생이 단식 끝에 절명했을 때, 대마도 사람들은 선생의 유해를 지극정성으로 이즈하라의 슈젠지(修善寺)에 모셨다. 이키에는 해방되던 해, 꿈에 그리던 조국을 향해 귀환선에 몸을 실었다가 집단 수장된 우리 동포 160명을 애도하는 비가 한국쪽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또 와니우라 포구의 팔각정 형태의 한국 전망대에는 1703년 무려 112명의 역관사들이 조난당해 생을 마친 사실을 기록한 비석도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바다가 국제교류의 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진실된 한일교류의 징검다리되어야 17세기 대(代)의 외교관으로 한국말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효슈의 말처럼 대마도와 이키는 진정한 ‘친선교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고, 문화재가 불타 버렸지만, 강제 동원되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했던 대마도나 이키의 백성들도 운명은 비슷했다. 조선통신사가 오고 갔듯이 이제 한·일간의 해양 네트워크는 더이상 침탈의 역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러일전쟁 100주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국을 꺾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분을 지금껏 향유하려고 드는 한 국제사회에서 그들이 ‘소인배’라는 비난과 지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1년 전인 1984년.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대마도와 이키의 역사·고고·미술·민속·언어·물질문화 등을 망라한 보고서를 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바다를 통해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목적의 대마도·이키 답사가 21년 만에 다시 서울신문 지면에서 재현된 셈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 기념의 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친선의 바다인가, 침탈의 바다인가.’ 그 난해한 화두를 대마도와 이키에서 다시 곱씹어 본다.
  • 마치무라 日외상 서면 인터뷰

    마치무라 日외상 서면 인터뷰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일본 외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과 관련,“신사측은 남북간에 반환처에 관한 공식적인 합의를 하고 일본 정부에 외교채널을 통해 요청하면 반환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남북의 정부당국이 조속히 조정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북관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온 임진왜란 승전비로, 정부가 반환협의를 위해 북측에 문화재회담을 제의해 놓은 상태다. 마치무라 외상은 한·일정상회담을 앞둔 16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현재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해서는 “한국측이 현 상황인 채로 관세협상을 개시하는 데 신중한 자세”라면서 한국측의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한·일관계 ▶한·일 우정의 해인 올해 초 독도문제가 발생했다. 독도문제로 양국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는가. -2005년은 아직 반환점에 오지 않았다. 양국간의 교류를 이어감으로써 우정의 해를 보낸 양국민이 올해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대단히 의미가 깊은 한해였다.”고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한이 예정돼 있다. 한·일 관계개선에 좋은 복안이라도 있는가. -올해 전반부는 양국관계가 곤란을 겪었다. 양국이 이런 곤란을 뛰어넘어,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공동성명에 있는 것처럼 ‘동북아시대를 향한 한·일협력’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양국간에 더한층 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관계를 한때의 긴장상태에서 평정한 상황으로, 나아가 양국의 우호협력을 한층 확고하게 하는 좋은 기회다. 지난달 도쿄에서 ‘한반도 출신 옛 군인·군속 및 민간징용자 등의 유골문제에 관한 한·일협의’를 여는 등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착실히 대응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항구적인 무비자 전환 같은 성과를 기대해도 좋은가. -일본 각지에서 ‘가깝고 가까운 나라’로부터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의 비자면제(아이치 만국박람회 기간 중 시한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항구적 면제에 대해 검토하겠다. ▶한·일 FTA에 대해 일본 정부는 어떤 로드맵을 갖고 있나. -협상 재개에는 서로 유연성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두 정상간에 확인된 연내 실질합의를 향해 계속해서 한국과 협력해 갈 생각이다. #역사문제 ▶(주변국 침략과 관련해)일본은 독일보다 사과를 더 했다고 발언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인가. -일본은 전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기본조약 등에 따라 국가간 배상 등의 문제를 일괄처리했으나, 독일은 동서로 분단돼 있어 우리같은 국가간 배상문제 등을 일괄처리할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상황인 일본과 독일의 대응을 단순히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어떻게 보는가. -총리 본인이 설명한 대로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참배 때마다 ‘부전(不戰·전쟁을 하지 않는다)’을 맹세하고 있다. 군국주의의 미화나 A급 전범을 위한 참배는 아니다. #국제관계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양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일은 국제사회,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일본과 여러 가지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이해와 지지를 해주도록 부탁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시아 균형자론’을 밝혔는데, 한국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의 실제 외교정책 운영에 있어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북한의 핵문제 같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관한 중요한 과제에 대처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 한국 및 미국의 긴밀한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 정부 스스로가 ‘균형자론은 어디까지나 한·미동맹을 기축으로 한 것’임을 밝힌 점에 유의하고 있다. #북한 문제 ▶북핵문제가 악화될 경우 미국이 무력행사를 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은 미국의 무력행사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관계국이 6자회담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중시해 왔다.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위해 한·미·일을 포함한 모든 관계국이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북핵문제의 악화를 상정해 관계국의 구체적인 대응에 대해 예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북·일 수교협상의 재개 전망이 불투명하다. 오히려 대북 제재의 목소리가 일본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대북 협상의 조건은 무엇인가. -납치문제와 관련해 북한으로부터 성실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한 납치피해자와 관련해 생존자의 즉시 귀국 및 진상규명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과의 대화에 응하도록 촉구해 가겠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정부 “우리땅… 거론땐 단호대처” 한·일 양국이 20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제 선정 작업에서부터 진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의 시각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도 문제의 경우 정부는 지리적·역사적·국제법적으로 분명한 우리나라 영토인 만큼 의제로 논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경한 입장이다. 반면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주요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지난 14일 열린우리당의 인터넷방송에 출연,“이번 정상회담 의제는 첫째 야스쿠니 문제, 다음에 역사왜곡, 세번째 독도문제”라면서 “특히 독도문제는 명백하게 우리 영토가 분명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고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해 시비를 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 장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가 먼저 독도 문제를 얘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본측이 문제를 제기하면 단호하게 받아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교과서 역사왜곡과 관련, 정부는 이번에 정식의제로 올려 일본의 무성의를 분명히 따지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일본은 가능하면 의제에서 제외했으면 하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도 우리 정부는 중요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 장관은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인터넷방송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 검토를 약속한 대로 제3의 추도시설 문제를 검토하도록 정상회담에서 강력히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상연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마치무라 외상 ‘왜곡 교과서’ 검정때 문부상 역임 마치무라 노부타카(60) 외상은 중의원 7선의 집권 자민당 내 중진이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 통상산업성에 들어가 13년간 공직생활을 했다.1983년 정계에 입문해 중의원에 첫 당선된 뒤 우리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해당되는 문부상을 두 차례 지냈으며, 외무성 정무차관과 자민당 간사장 대리도 역임했다. 2001년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 때 문부과학상이었다. 지난해 9월 개각의 외교·안보팀 개편 때 외상으로 발탁됐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과제를 떠안고 있으나 역사왜곡 교과서 파동, 독도, 야스쿠니 참배 문제 등이 겹쳐 유엔에서의 영향력이 큰 중국, 한국의 반발로 벽에 부딪힌 상태다. 역사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국회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했던 지난 4월 “한국인에게 대단한 아픔을 드린 데 반성한다.”고 밝히고 5월 뉴욕의 유엔개혁회의에서는 “일본은 역사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지만 독일보다 훨씬 여러 번, 더 많이 사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4월 일본 NHK에 출연해 “한국과 중국의 역사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다니 이런 바보같은 일도 없다.”고 말해, 외교통상부가 “매우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강력 항의하는 공식논평을 낸 바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최근 한일분쟁 일지 ▲2월22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다케시마의 날’ 조례안 상정. ▲2월25일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 “독도는 일본 영토” 발언. ▲4월5일 일본 문부성, 왜곡 교과서 검정. ▲5월11일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한국과 북핵 정보 공유 불가” 발언. ▲6월1일 신풍호 한·일 경비정 대치 사건. ▲6월11일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상,“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원래 없었다.”발언.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1534년 8월25일,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괴선박이 바람에 떠밀리듯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네가시마(種字島)의 가도쿠라곶(門倉串)으로 다가왔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규슈의 최남단에 딸린 작은 섬. 난파선이 분명했다. 이 배는 중국인 오봉(五峯)의 배였다. 오봉은 왜구 왕직(王直)을 말한다. 이 ‘중국 왜구’의 배에서 남만인(南蠻人)이 무려 110여명이나 내렸다. 이들은 인근의 유서깊은 시온지(慈遠寺)로 안내받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시온지는 예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학승, 상인들이 머무는 숙방(宿房)이 있던 절. 배를 수리하고 다시 출항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파선 주인 오봉은 중국인 왜구 왕직 섬의 도주가 긴 쇠막대기를 보고서 “무슨 물건이냐.”고 묻자 남만국 사내는 그 물건을 곧추세웠다. 남만인은 막대기에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한 조개가 단박에 산산조각이 났다.‘꽝’소리가 나면서 도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놀라 자빠졌다. 직감적으로 무기임을 간파한 도주는 직접 실험을 하고 싶어 했다. 도주 자신이 막대기에 검은 화약가루와 쇠구슬을 넣고는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총이었다. 위력이 대단했다. 이런 무기는 듣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이었다. 도주에게는 그들이 남만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드디어 총이란 물건이 일본에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2정을 사들였다. 도주는 즉시 명을 내린다.“즉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라.”고. 이 이야기는 총이 일본에 전래된 순간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의 총이 포르투갈에서 모두 수입된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앞의 2정을 모델로 똑같은 복제품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낸다. 총을 만들라는 도주의 명령을 무모하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네가시마 모래에서는 사철이 생산되고 있었고, 덩달아 대장간 수공업이 대단히 발달해 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대장간에서 만드는 가위는 일본 최고의 명품으로 친다. ●조총 기술 배우려 대장장이 딸 국제결혼시켜 도키타카의 명을 받은 철장(鐵匠) 야이타 긴베이(八板金兵衛)는 밤잠도 못 자고 움직였다. 형태는 대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물건이라도 한번 보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감탄할 만한 재주를 지닌 유능한 대장장이였지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총열 안쪽의 복잡한 나사홈을 깎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절에 머물고 있는 남만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대가를 요구했다. 기술을 넘겨주는 대신 대장장이의 딸 와카사를 부인으로 넘겨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딸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망설이던 끝에 스스로 결단했다.16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하여 이 낯선 이국인과의 혼인을 자청한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총이 완성된다. 이로써 일본의 ‘국제결혼 제1호’와 ‘총 제1호’가 동시에 탄생했다. 바야흐로 일본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총을 들고 나타난 남만인들은 아시아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과 에스파냐인이었으며, 이후에 들어온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고모(洪毛)’라고 불렸다. 남만인들이 가도쿠라곶에 당도한 1534년보다 24년이나 앞선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해 동방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다.1511년에는 말레이시아반도 남단의 요충지 말라카해협, 그리고 1517년에는 중국 남부의 마카오까지 진출한다. 고아와 말라카해협을 점령함으로써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한 포르투칼은 이내 중국 남부를 오가면서 아시아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해 들였다. 이들이 규슈 남단에 출현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16세기 초,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쓰긴 했지만 남부 광저우(廣州)는 이미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30여개 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해상교역이 번성했다. 물론 이러한 교역은 명나라로부터 통제받는 국가주도형 무역이었다. 해금책은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해양 침략자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개인들이 비밀리에 행하는 사상(私商) 무역까지 금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금이 강한 만큼 장사 이윤도 보장된다는 논리인 바, 돈벌이 욕구를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정부가 왕직 회유 뒤 처형 그런데 정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만인과 같이 타고 온 중국인들의 정체다. 왜 남만인들은 중국인 오봉의 배를 타고 왔을까. 오봉은 당시 고토(五島) 열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대두목 왕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왕직은 누구일까.2005년 2월5일 아사히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실었다.16세기 명나라 정부에 의해 처형된 중국인 출신 왜구 두목 왕직의 묘에 세워진 기념비를 훼손한 사건이 그것이다. 안후이(安徵)성 황산(黃山)시에 소재한 왕직의 묘비 가운데 인명 등 일부 내용이 2005년 1월31일 밤 난징(南京)의 한 대학 교수와 그의 친구에 의해 지워진다. 그는 “민족 배신자의 묘를 일본인이 정비하고 비석을 세운 것은 중국인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는 훼손 동기를 언론에 밝혔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논쟁이 불붙었다.‘후련하다.’는 찬성론부터,‘왕직의 해상 무역이 명나라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측면을 무시한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반대론이 치열하게 맞섰다. 왕직은 일본 나가사키현 후쿠에(福江)항을 근거로 생사, 유황 등을 밀무역하면서 왜구를 이끌고 포르투갈과도 결탁하여 약탈도 하고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명나라 정부는 “투항하면 공식 무역 허가를 내주겠다.”고 회유하여 그를 귀국시킨 뒤에 끝내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처형한다. 말하자면 그는 ‘중국인 왜구’였던 셈이다. 그동안 왜구는 일본인들만의 조직이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사실이다. ●다네가시마 사람들 총을 종교처럼 신성시 철포 전래의 흔적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총의 위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 마쯔리’를 열어 매년 6월말에 포르투갈 배의 도착을 기린다.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래도 이 ‘철포 마쯔리’는 계속될 것 같다. 다네가시마 사람들에게 총은 무기 이전에 일종의 ‘종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총을 ‘종교’로 믿는 사람들, 그렇게 불러도 그들은 허락할 것 같다.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이 머나먼 다네가시마의 총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이 총이 한반도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서양 총이 일본에 퍼지면서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불나방 행위를 일컫는 ‘무데뽀’란 일본말이 한국인에게까지 전달되어 있다. 그 뜻인 즉 무철포(無鐵砲)인 바,‘총도 없이 덤비는 놈’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결에 전쟁은 칼·활·창으로만 하던 시절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 없이는 그야말로 ‘무데뽀’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포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 철포는 즉각 실전에 활용된다. 전국의 봉건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철포를 입수하기에 혈안이 된다. 철포 전래 10년도 채 안되어 일본 열도에 확산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하통일의 판세를 가르는 전투에서 철포대를 들이밀어 승리를 거둔다. 철포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까지 이어진다. 생고쿠(戰國)시절, 피비린내 나는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은 조총부대를 앞장세워 파죽지세로 조선을 치고 올라갔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창과 활을 병용한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임란 초기에 이러한 화기 전술에 연패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왜군 전원이 조총을 소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총은 대단히 비싼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이라는 신무기를 통하여 기대 이상의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평양까지 짓쳐 올라가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을 가야 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하여 한마디로 조선군은 ‘총에 녹았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병의 보급로를 차단, 끝내는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내내 조총은 조선군을 고통스럽게 했다. 총을 들고 한반도를 침략한 왜병의 침략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의 평화를 깨는 중대한 ‘전쟁범죄’였다. 그러나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단 두정의 총을 받아들여 이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최선을 다하여 복제하고 대량 생산에 돌입하는 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를 십분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생활에 응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수십명이 표류한 하멜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그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않고, 얻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지 않는가. 바다를 통한 문명교류의 파장을 체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간 해양 부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감고계훈의 역사를 다시 배운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진해는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원래 웅천읍성이 자리했던 곳으로, 그 웅천 바닷가에는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1553~1993)기념’이란 설명문이 붙은 조각상이 서 있다. 그의 고향인 포르투갈 톨레도의 니야누에다 데알카르데테 시민들이 우정의 정표로 기증한 것이다. 그는 1593년 12월27일에 웅천포에 도착해 1년여를 이곳 왜성에서 묵었다. 그 34년 뒤인 인조 6년(1628)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부산 근처에 표착했고, 그로부터 59년 뒤인 1653년에는 하멜이 표류해 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표류가 아닌, 자의로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가 머물렀던 웅천 남산왜성을 올랐다. 돌들이 웅장하다. 틀림없는 왜성인데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했고 정유재란때 재침해 수축한 것이다. 경상도에는 유난히도 왜성이 많다. 웅천 안골포 양산 영등포 마산 고성 사천 남해왜성 등등 아예 장기 주둔을 염두에 두고 진을 쳤던 흔적들이다. 진해에는 웅천왜성 바로 건너편 안골포에도 왜성이 있다. 사면이 두루 보여 그만한 요새가 없다. 세스페데스가 웅천까지 온 이유를 알자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는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소오는 임란 직전까지 대마도 병마사로 조선의 녹봉을 받았다.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다.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종군 신부로 온 것이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의 훌륭한 문화재는 모두 고니시와 소오가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사람들도 엄청 붙잡아 갔다. 오죽했으면 강항이 ‘간양록’에서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는데, 배마다 조선 남녀의 통곡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라고 기록했을까. 고니시도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라는 세례명까지 얻게 했다.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대격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된다. 줄리아도 이때 외딴 섬으로 귀양가 신앙을 지키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써 하나의 ‘신화’가 됐다. 한편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간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임진왜란이라는 한·일간의 유쾌하지 못한 전쟁통에 묻어 오기는 했지만 서양인의 첫 방문은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왜성이 위치한 안골포는 임란 전승지로 유명한 곳.1952년 7월 왜 수군의 주력부대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하자 그를 따르던 가토 기요마사의 42척 제2 주력부대가 당황한 나머지 안골포에 옮겨 정박한 것을 이순신이 추격, 격파한다. 한산도해전과 더불어 안골포해전은 왜 수군 주력부대를 격멸한 큰 전공지였다.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한달동안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무려 7차례나 출격해 해전을 치렀는데, 이때 웅포 남산왜성의 왜 육군이 엄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스페데스는 그 해 겨울 웅천으로 들어왔다. 안골포에는 굴강(掘江)이 남아 있다.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남 여천에 선소(船所)와 굴강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사라진 지금 이곳의 해양문화사적 의미는 크다. 이순신의 대격전지에 이같은 해양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감회가 새로운데 머잖아 간척될 계획이라 운명이 풍전등화다. 매립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도 굴강만은 살릴 계획이라지만 이 희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임진왜란 대첩지를 매립해 땅을 얻어 써야겠다는 문화적 반달리즘을 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진해는 대마도를 거쳐서 규슈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마산에서 여몽연합군이 후쿠오카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듯 최단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본디 최초의 왜관이 자리잡은 곳도 또한 이곳 웅천이다. 왜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에 변란을 걱정해 웅천왜성은 폐지되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통합됐다. 이같이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진해에 다시 왜인들이 나타난다. 근 300여년 만에 이번에는 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변신해 나타났으니, 그들은 지형·정서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부터 점령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한다.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했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해 진해라 부르고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인 800만원을 퍼부어 10개년 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땅을 얻고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의 토지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시가지는 12만평이었으며, 계획도시답게 모범적 시가를 만들기 위해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해의 중원로터리 등을 보면 사방팔통으로 도로가 교체하는데, 여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관을 엄격히 고려하고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했다. 건물은 2∼3층을 원칙으로 하고 4층 이상은 허가를 받아 짓도록 했다.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에 오래 전에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목포나 군산처럼 본래의 조선인촌과 병존하게 하지도 않은 식민도시였다. 그리하여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진해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풍경을 읽는다.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로터리 모퉁이에 고색창연한 진해우체국이 서있어 식민지 시대를 전하고 있다. 도로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일장기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충무공 동상으로는 전국 최초인 1951년에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마산 등에서 갹출해 북원광장에 조성한 것이다. 일장기형 도로와 이순신의 동상이 주는 이중창이 묘한 갈등으로 다가온다. 자고로 벚꽃이 유명하여 4월 초순에는 군항제가 열린다. 충무공의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벚꽃도 즐기는 최대의 행사인데,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의 이미지는 왠지 좀 거북한 느낌이었다. 제황산정에는 웅장하게 솟은 탑이 있다. 일인들이 세운 러일전쟁 기념탑을 광복 후 철거하고 1967년 해군의 기함사령탑을 상징하는 이 탑으로 교체했다. 시내 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기념휘호를 각인한 비석이 있는데 가장자리가 깨져 있다.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을 땜질해 붙여놓았다. 로터리 중심의 나무에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그런 비석이 있는 줄도 모른다. 반면에 진해 바닷가에는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과 전용 낚시터, 장제스를 만났다는 육각정 등이 잘 보존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본디 일본군 통신대가 쓰던 건물이다. 진해 사람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보니 도시의 주요 토지들은 모두 군용으로 묶여 발전이 없다. 군사도시인 탓에 규제가 심해 발족 당시의 인구에서 별반 늘어난 게 없다. 게다가 부산시와의 갈등도 내연 상태다. 신항만 건설부지의 80%를 내놓았지만 명칭이 부산신항만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여서 폭발 일보 직전이다. 부산신항인지, 부산·진해신항인지를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중이라 이래저래 군사도시의 고충이 깊은 요즘이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항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게다가 이웃 거대도시 부산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진해 사람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장 쾌적하고 맞춤한 인구, 공장이 적은 대신 맑은 숲과 바다를 지닌 천혜의 미항 진해이건만 미래가 투명하게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벚꽃 펄펄 날리는 조건에서도 소작쟁의는 물론 동양제사 노동자들의 대투쟁, 그리고 각종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주기철 목사같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진정한 종교인을 배출한 곳이 진해 아닌가(황정덕의 ‘진해 항일독립운동사’ 참조). 진해예술촌장을 맡아 군사도시 속에서 문화를 가꾸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박차생 진해문화원장이 망산도로 안내하면서 간절하게 전한 말은 이랬다.“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아유타국 허왕옥 공주가 처음 내린 망산도도 진해지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국제 항구도시였으니 부산·진해신항으로 결정돼 사람들 시름 좀 덜었으면 합니다.”
  • [논술이 술술] 국화와 칼/루스베네딕트

    올해는 유독 일본과 관련된 문제들이 많이 일어났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여전했고, 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일본과의 갈등을 더욱 깊게 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일본과 아주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왔지만, 실제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근대 이전에는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근대 이후에는 우리 나라를 강점해 무자비하게 수탈했던 ‘침략자’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는 ‘소니’와 ‘도시바’ 등 다양한 상품들의 이미지로서만 단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화 ‘러브레터’나 ‘이웃집 토토로’ 등에서 나타났던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일본의 이미지와 ‘야스쿠니 신사’와 ‘이종격투기’가 보여주는 뻔뻔스럽고 호전적인 모습을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극히 피상적이고 낮은 이해는 그들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감정적인 거부감만을 키우며, 문제 해결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이 책은 일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보아야 할 책 가운데 하나다. 베네딕트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의뢰를 받아 일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전쟁 막바지에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맞은 적은 미국인의 사고와 문화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척 낯설고 이질적인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패턴을 탐구하기 위해 문화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한다. 이 연구는 1945년 ‘일본인의 행동 패턴’이라는 보고서로 나타났고, 이를 바탕으로 1946년 ‘일본 문화의 패턴’이라는 부제를 달고 쓰여진 것이 ‘국화와 칼’이다. 이 책은 외적인 생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의 문화 패턴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문화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 전쟁 중에 나타난 일본인의 행동은 물론 일본인의 계층구조 의식의 형성과 변화 과정 등을 분석하며,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 방식의 특징을 살핀다. 이를 통해 일본인은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고, 어떤 경우에 수치심을 느끼는지 등 평균적인 일본인의 습관과 행동 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제목의 ‘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두 가지 상징이다. 그것은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인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매우 절제되고 겸손한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는 국민이 동시에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호전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그러한 이중성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일본 문화의 패턴을 이해하려 한다. 한편 이 책은 당시까지 인디언 등 원시부족 생활을 주로 연구하던 문화인류학의 연구 대상을 산업사회로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베네딕트는 전쟁 때문에 일본을 직접 방문하지 못하고 여러 문서와 기록, 증언 등에만 의존해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해석 작업은 이후의 연구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 책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여러 한계가 드러난다.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본 동양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돼 서술한 경향도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일본에 대한 실체적 이해보다 미국인의 사고 속에 자리잡은 일본관에 대한 서술로 읽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인들의 사고 및 행동양식, 문화와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나름의 구실을 충분히 하고 있다. 게다가 서구, 특히 미국의 일본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미·일 동맹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과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고1∼고3 -관련 교과:고등 사회, 사회문화, 윤리와 사상 -함께 읽어 볼 책과 고전: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한길사),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성과 속(미르치아 엘리아데·〃), 이미지와 상징(〃·까치글방) -기출논제:한국외국어대 2004학년도 정시 논술, 서울교대 2003학년도 정시 논술, 부산대 2002학년도 정시 논술 ●생각해보기 -이 책은 일본 문화의 특징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나. -일본과의 역사적·영토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의 생각을 써보자. -문화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보자.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2)제주·전라 잇는 42개섬 ‘추자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2)제주·전라 잇는 42개섬 ‘추자군도’

    행정구역명은 북제주군 추자면이다. 그런데 추자도에서 제주도 토박이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대개 호남 말씨다. 남도 사투리의 ‘징함’이 빠진 채 표준화되어 조금은 무미건조하다. 공무원들을 만나 보면 조금 달라 제주도 말투가 엿보인다. 자연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간지대라고나 할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라남도 영암·완도군 등에 딸린 섬이었다.1946년 북제주군에 편입됐으니 불과 60여년 전이다. 재미있는 것은 1831년에 잠시 제주목에 이속됐다가 1891년에 완도군이 창설되면서 이곳으로 되넘어간 기록이 나온다. 좀 왔다갔다 했지만 그러나 추자도는 틀림없는 호남문화권이다. 뱃길은 여전히 목포로 열려져 있어 농산물 공급은 물론이고 상급학교도 대부분 이곳에서 다녔다. 덕분에 추자도 1세대들은 ‘전라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근래 20여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덕분에 그들은 비교적 ‘제주도적’이다. 이곳 공무원들이 대개 제주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그런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추자도 토박이로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집안에서는 전라도 말을 쓰는 사람의 경우, 그 문화적 정체성은 대단히 복잡하다. 제사나 장례, 세시풍속 등은 확실히 전라도적이다. 반면 제주도 출가 잠녀가 아니라 토박이 잠녀들이 물질하는 형태는 ‘제주도적’이며, 전복이나 소라맛 역시 ‘제주도적’이다. 그러나 묵리의 처녀당에서 해마다 올리는 당제의 명칭과 이때 걸궁이란 풍물굿을 동원하는 것은 ‘전라도적’이다. 풍물굿이 없던 제주도에 ‘걸궁’이 전파된 것이니, 추자도 걸궁은 본디 한반도 최남단의 풍물굿이 아니었던가 싶다.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추자도의 이런 중간자적 성격은 예로부터 육지와 제주도의 징검다리였다는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지어졌다. 제주행 비행기에서는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추자군도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다가 바람을 피해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추자도다. 지금도 상추자항의 봉줄리산 기슭에는 최영 장군 사당이 위엄있게 포구를 굽어보고 있다. 옛날에는 추자도를 징검다리 삼아 제주도로 향하였다. 예전에는 추자를 주자(舟子)로 불렀으니, 영암·무안·나주·진도 등 전라남도 남서해안으로 가는 뱃길이었다. 제주도는 애월이나 조천으로 드나들었다. 당연히 이름난 유배지였다. 유배객 중에는 해배 후 되돌아간 이도 있었으나 아예 섬사람이 된 이도 많았다. 정조 때 안조환은 유배 당시 천신만고의 생활상을 이렇게 노래했다.‘출몰사생 삼주야에 노 지우고 닻을 지니 수로천리 다 지내어 추저섬이 여기로다. 도중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하다. 사면으로 돌아보니 날 아는 이 뉘 있으리.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상추자, 하추자로 위·아래 섬이 갈리는데 추자교로 이어져서 이제는 상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상추자항은 대서·영흥리, 하추자항은 신양리 소속이며, 그밖에 예초·묵리 같은 아름다운 포구들이 흩어져 있다. 단단한 바위밭에 해류가 거칠게 흘러 흐리멍텅한 고기들은 살 수가 없는 곳이다. 참돔이나 감성돔·우럭·농어 같은 고급 어종이 바위밭에서 물살과 씨름하면서 육질을 키우는 까닭에 그야말로 ‘바다낚시의 천국’이다. 도처에 보이느니 낚시꾼들이다. 추자도는 끊임없이 왜구에게 시달렸다. 왜구들은 제 집 드나들 듯 추자군도를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수적(水賊)이란 이름의 바다도둑이 설쳐댔다. 일제시대, 이곳 수산자원에 눈독을 들인 일인들은 대서리에 진을 쳤다. 학교와 조합을 만들고 삼치어업에 매달렸다. 기선급 선박이 엄청난 양의 삼치를 잡아 그대로 상고선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른바 추자도 삼치파시는 이들 일본배들 때문에 이뤄졌다.1000여명이 넘는 ‘뱃동서’들이 일시에 포구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술집과 여관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일본 기생도 들어오고, 술꾼들은 취하여 쌈박질을 일삼아 이래저래 ‘난장’이었다. 당시의 여관 흔적 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일본인이 물러간 다음에도 삼치어업은 이어졌다. 삼치는 예전 방식대로 잡는 즉시 일본으로 수출했으며, 덕분에 파시도 70년대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이곳에는 ‘시와다 그물사건’이라는 전설 같은 일제하 어민항쟁이 전해진다.1926년 5월14일, 추자면민들이 대거 운집해 면장과 추자어업조합에 대한 불편과 불만을 토로했다. 형세가 대단히 격렬해 목포와 제주에서 경찰이 들이닥치고, 주동자 21명이 검거,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어업조합과 면장 등이 공모, 은행 빚으로 어구를 사들인 뒤 2배나 비싸게 팔았는가 하면, 주민 의견을 무시하고 우뭇가사리를 강제 매입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낌새를 알아 챈 조합장이 주재소와 결탁해 어민들을 억압하려 하자 예초리 남녀 700여명이 함께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본디 이곳 사람들은 외줄낚시로 필요한 만큼의 고기만 낚았으나 일본인들이 대형 그물로 싹쓸이하듯 고기를 잡아가자 이에 반발한 사건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곳 노인들은 “물반 고기반이었는데 왜놈들이 싹쓸이해 가 그걸 못 보겠어서 다들 일어선 게지.”라고 말한다. 일제의 수탈적 약탈어업이 빚은 필연적 결과였다. 추자도에는 딸린 섬들이 42개나 된다. 돈대산에 올라서니 완도군 청산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 청산도 삼치파시가 추자도 삼치파시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청산도와 나로도, 추자도 남쪽에 삼치떼가 몰려든 것이다. 추자도 최남단에는 관탈도가 있다. 옛적 귀양객들이 이곳에 이르러 다왔다는 생각에 갓을 벗었다 해서 ‘관탈’이라는 지명이 붙었단다. 관탈도에서는 불과 30분이면 제주항에 닿는다. 그러니 완도-청산도-추자도-관탈도 등이 징검다리처럼 일렬로 늘어서 육지와 제주도를 연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옛날 설문대 할망이 제주도와 남해 바다를 만들 때 징검다리는 박아놓은 섬들은 아닐는지. 이곳 토박이인 황필운(38) 선장과의 약속에 맞춰 선착장으로 나갔다. 매일 아침 9시면 정확하게 행정선 추자호가 바다로 떠난다. 횡견도와 추포도를 들러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길게 누워 있는 횡견도의 바람막이 돌담이 이곳의 모진 삶을 웅변해 준다.13가구가 사는 이곳에서 여자들은 물질로 전복·소라 등을 잡고, 남자들은 톳·가사리·미역 등 해초를 뜯어 생활한다. 한때 횡견분교까지 있었으나 잡초만 무성하고, 보리농사로 자족자급이 가능했던 섬이 지금은 인적이 끊겨 한적하다. 추포도는 2가구가 등록돼 있으나 실제로는 1가구만 산다. 낚시꾼들 뒷바라지로 생계를 잇는다. 고도에서 사는 1가구, 결코 쉽지 않은 삶일 것이다. 정 다산이 ‘남도경영’을 부르짖으며 경세유표에서 ‘남도의 섬을 잘 다스려야 재물이 숲처럼 일어서리라.’라고 했건만, 이들 낙도는 오로지 낙도라는 오명만 뒤집어쓰고 파도 아래 잠들어 있을 뿐이다. 요트처럼 빠른 배라면 뭍에서 불과 1시간도 채 안돼 당도할 수 있는 이 ‘보물섬들’이 오로지 ‘떠나가는 섬’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니 이곳에서도 우리 바다의 미래는 아득하다. 추자군도의 최대 문제는 역시 물이다. 횡견도 같은 섬에서는 아예 빗물을 받아 쓴다.‘물 쓰듯’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추자 본도에는 담수화공장이 있어 바닷물로 만든 비싼 물을 먹고 산다. 그래서 집집마다 거대한 물탱크 한두 개쯤은 갖추고 있다. 추자도는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너무나 덜 알려진 섬이다. 강태석 면장은 “청정해역일 뿐 아니라 천혜의 어족자원을 갖고 있어 21세기형 관광에 적합한 곳인데, 문제는 뱃길이지요.” 무인도를 이용한 청소년 자연생태체험학습장과 유료 유어장 등이 면에서 꿈꾸는 올 여름 사업들이다. 제주항에서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1일 관광도 가능하지만 배편이 하루에 편도 1회뿐이라 잠을 자고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추자의 돈대산을 오르자 눈 아래 신양항이 굽어보이고, 멀리 전라도 바닷가가 한눈에 잡힌다. 날씨가 맑으면 한라산도 보인단다. 해양성 기후라 바람 심한 것을 빼면 아열대식물도 생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선지 곳곳에 동백이 유난히 많다. 추자도에 딸린 사수도는 상록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고, 여기에 흑비둘기와 슴새들이 번식해 1982년 천연기념물(333호)로 지정되었다. 전복, 소라, 미역, 톳, 천초가 지천인 곳이 이곳 말고 또 어딨겠는가. 아,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이 하나 있다. 추자도 특산품하면 대개 멸치젓을 꼽곤 한다. 지금도 멸젓이 팔리고는 있지만 오늘날 추자도의 최고 특산은 ‘추자굴비’다. “어획량은 최고지만 문제는 덜 알려졌다는 점”이라는 김금충 수협 상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조기들이 동중국해에서 추자도 근해로 몰려오기 때문에 해마다 엄청난 양이 잡힌다. 예전에는 그대로 영광 등지에 생조기로 출하했으나 이제는 아예 굴비로 말리고 있다. 어족이란 참으로 묘한 것, 칠산바다를 떠돌던 조기들 간 곳 몰라 했더니 추자도에 운집했었나 보다. 지금 추세라면 법성포 굴비 못지 않아 ‘추자굴비’ 없으면 차례도 지내지 못할 날이 다가오지나 않을까. 실제로 추자군도에서 최대의 주력품으로 굴비를 키우고 있으니 곳곳에 조기잡이 안강망 어선들이 눈에 뜨인다. 조기를 잡지 않는 비수기에는 돔이나 고등어 낚시로 살아간다. 떠나 오면서, 추자도가 ‘오지’란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제주항에 1시간 만에 도착했고, 곧장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는 데 고작 1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스티로폼 박스에 횟감과 함께 넣어 온 얼음이 서울에 도착해서도 그대로이니 ‘멀고도 가깝다.’거나 ‘가깝고도 멀다.’는 야누스적 표현이 모두 맞는 곳이다.
  • 日약탈 북관대첩비 한국에 반환 가능성

    |도쿄 이춘규특파원|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온 임진왜란 승전비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한반도로 반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8일 보도했다. 신문은 일본 정부가 반환을 위해 야스쿠니신사와의 중개역할에 착수하기로 했으며 신사측도 “한국과 북한이 조정을 이루고 일본정부가 정식 요청하면 응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 6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외무장관회의에서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고 “반환이 실현되면 양국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개선에도 기여한다.”며 반환을 공식 요청했다. 마치무라 외상도 “신사 측과 대화하면서 성의를 갖고 중개하겠다.”고 답했다. taein@seoul.co.kr
  • [8일 TV 하이라이트]

    ●떨리는 가슴(MBC 오후 7시55분) 자식과 병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간 애심이 이십년 만에 돈을 달라며 나타나자 종옥은 분노와 함께 서글퍼진다. 두나와 고궁에 나들이 간 애심은 종옥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한편 집안일을 하던 애심은 혜정과 함께 들어오는 종옥의 시어머니와 마주치고….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아프리카 서부 라이베리아.80년대 후반 경제파탄으로 내전이 발생했고 오랫동안 약탈자와 용병들의 파괴행위로 지옥으로 변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인 100만여명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끝에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지금은 평화유지군이 치안을 맡고 있다. ●청소년 원탁토론(EBS 오후 6시10분) 반세기가 지나도록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는 ‘어버이날’을 맞이해 형식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어버이날 이야기부터 효 정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효와 불효의 경험에 대한 솔직한 고백 등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효의 모든 것에 대해서 토론한다. ●결정! 맛 대 맛(SBS 오전 10시50분) 100회를 맞이해 특집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이번 특집에서는 맛집 선정 과정과 스튜디오 녹화 얘기,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맛대맛의 제작 과정 등을 공개한다. 갈치찌개와 닭전골, 열무국수와 명태회냉면, 스페셜 중식과 스페셜 일식의 맛대결 등을 지켜본다. ●해피 선데이(KBS2 오후 5시55분) 위풍당당 여걸이 변화한다. 신(新)여걸 3인방의 화려한 등장 그리고 새로운 여걸 식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스타인 차태현, 성시경, 민우,mc몽,UN 등이 총출동했다. 환상적인 최고의 남자 스타와 못말리는 여걸 식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화포 시험발사 중 화포 장전에 소요되는 시간이 꽤 길다는 사실을 알고는 지금껏 화포의 위력으로 승리를 거뒀던 조선 수군을 무찌를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키자카의 거북선 파괴작전이 실패하였음을 알게 되고….
  • [사설] 꽃게어장 경비 어민이 떠맡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수역에서의 ‘꽃게전쟁’이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NLL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틈을 노려 중국 어선들이 꽃게를 싹쓸이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엊그제는 연평도의 우리 꽃게잡이 어선들이 NLL 바로 밑까지 북상해 중국 어선 4척을 붙잡아 왔다. 폭발하고 있는 우리 어민들의 분노를 풀어주지 않으면 이같은 집단행동은 계속될 것이다. 서해 해상에서 남북 군사충돌이 다시 발생할 우려도 있다. 매년 꽃게잡이철이면 서해상에서 남북한과 중국간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중국 어선이 낮에는 NLL 북쪽, 밤에는 남쪽에서 꽃게가 내려오는 길목을 막고 불법조업을 일삼았다. 북측은 경비능력 미비로 이들을 단속하지 않고 있고, 남측은 북측과 군사충돌을 염려해 적극적인 제재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인천지역 꽃게 어획고는 2년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었다. 올해도 중국 어선 300여척이 선단을 이뤄 불법조업을 하고 있다. 눈 앞에서 황금어장이 약탈당하는 것을 참다못한 어민들이 어로한계선을 넘어 중국 어선 추격에 나선 것이다. 해경은 중국 어선을 처벌하고, 어로한계선을 넘은 우리 어선에도 벌금을 물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사후조치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해군은 꽃게잡이철의 우발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무인정찰기를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지만, 이 역시 근본대책이 못된다. 서해 NLL 주변에 남북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군사적 고려 때문에 더이상 시간을 늦추면 안 된다. 꽃게잡이철에 한시적으로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 방법을 북한과 우선 협상해봐야 할 것이다. 그에 앞서 지난해 6월 개설된 해상핫라인을 활성화해 중국어선의 불법행위 제재에 남북이 협력해야 한다.
  • “우리네 恨에는 복수 아닌 소망 담겨”

    “우리와 일본의 ‘한’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본은 ‘우라미’ 즉 ‘복수의 한’이지요. 군국주의로 갑니다. 칼바람과 그로테스크, 에로티시즘과 난센스로 가고 있지요. 반면 우리는 ‘소망의 한’입니다. 가난과 무지를 극복하려는, 미래 지향적이고 탐구의 한의 담겨 있습니다.” 원로 소설가 박경리(79)씨. 따뜻한 봄날을 맞아 모처럼 일반인들을 상대로 문학강연을 했다. 주제는 ‘문학의 향기-박경리의 공간’이었다. 강연 도중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의 최근 행태에 대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던져 관심을 모았다. 지난 23일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1층 강의실. 대학교수와 문학지망생 등 전국에서 150여명의 문학팬들이 모였다. 토지문화관 바로 옆 자택을 나오면서 박씨는 “3년 만에 이런 자리에 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단에 오른 그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이다. 주제는 문학강연이지만 생명과 건강 얘기를 좀 하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물질과 영혼, 시·공간 속에서의 생명의 본질을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자주 던졌다. 또한 세상은 물과 불, 창과 방패같은 영원한 상극이 있듯이 인간은 어차피 ‘모순’ 속에서 행복과 불행, 죽음과 탄생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양은 이러한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 끝없이 전쟁과 살육을 벌여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인류는 이제 민족주의를 버려야 할 시점이며 통합을 안하면 멸망만 초래할 뿐.”이라면서 “하지만 일본 같은 나라가 있어서 세계 통합은 어렵다.”고 겨냥했다. 또 “이순신 장군처럼 민족을 지키는 것은 위대한 도덕이지만 (일본처럼)남을 약탈하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는 것은 인류의 죄악”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얼마 전 일본 기자들이 집으로 찾아왔더군요.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난 반일(反日)작가이지만, 반일본인(反日本人)은 아니다. 일본인도 인류의 차원에서 보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느냐.‘사람’이란 이름으로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의 ‘한’을 비교한 그는 “일제 때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우리 지식인 스스로가 우리의 한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미신을 나쁜 것으로, 모순이자 자가당착이라고 비난하는 우를 범했다.”고 꼬집어 참석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박씨는 또한 “중국과 일본은 패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면서 “중국은 생각보다 엄청난 문화유산과 철학을 가졌다. 시(詩)만 하더라도 보들레르보다 이백의 시가 훨씬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하지만 현재의 중국은 단절됐다. 위대한 유산·사상들이 유럽의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전부 미쳐버렸다. 그런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중국의 젊은이들은 무식하다.”고 안타까워했다. 1시간30분 동안 강연을 마친 후 약 20분 동안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 우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자 “아냐, 안 좋아. 그 전에는 뒷산에 올라가 가지치기도 했거든. 지금은 못해, 농사도 500평 있잖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추농사는 20년 동안 지었어. 뒷산에는 5000그루 나무도 심었고.”라며 웃었다. 이어 담배 한대를 피워물었다. 하루 몇갑 피우냐고 하자 “담배는 내 친구야.”라고만 대답했다.TV드라마 ‘토지’를 보는지 궁금했다.“처음 ‘토지’를 쓸 때에는 열 가닥으로 베틀을 짰지만 지금은 천 가닥으로 베틀을 짜야 할 만큼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제대로 (방송을)하려면 10년이 걸릴 텐데 생략이 있게 마련 아니냐.”고 했다. 또 “돈이 필요해서 (방송국에)팔았으면 잊어버려야 한다. 그 돈으로 (토지문화관 옆에)창작시설을 지었다.”며 또 한번 웃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면서 “행정수도를 옮기면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모래를 퍼내야 하는지 걱정”이라면서 결국 바다와 땅이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계절 중 봄이 제일 좋아.”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토지문화관 뒤뜰로 총총히 걸어나갔다. 팔순을 코앞에 둔 박씨의 뒷모습에는 우리 문학의 큰별다운 총기가 봄볕에 유난히 빛나보였다. 토지문화관 사무실에 걸려 있는 박씨의 최근 시(우리들의 시간)가 눈에 들어왔다. ‘목에 힘주다 보면/문틀에 머리 부딪쳐 혹이 생긴다/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뽐내어 본들 徒勞無益時間(도로무익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 3시간30분 대작 ‘떼적’을 만난다

    올해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프리드리히 폰 쉴러의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해 국립극단은 쉴러의 첫 작품 ‘떼도적’을 29일부터 5월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린다. 우리에게 ‘군도(群盜)’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떼도적’은 지난 1945년 단막극으로 올려진 바 있다. 이번 국립극단 공연은 5막 15장 전막을 올리는 최초의 공연으로 3시간30분이 소요되는 대작이다. ●쉴러 서거 200주년 기념 5막15장 전막공연 ‘떼도적’은 정의감 넘치고 고결한 성품의 사람이 사회의 악덕에 의해 어떻게 희생되고 전과자로 전락하는지를 그려낸 작품. 아버지 모르 백작의 총애를 받던 큰아들 칼이 동생 프란츠의 음모로 집에서 쫓겨나 방황하다 친구 슈피겔베르크를 만나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적떼를 조직하나 이상과 달리 약탈과 폭력만 일삼다 좌절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연출을 맡은 이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요즘 연극이 가볍고 작고 볼거리 위주인데 ‘떼도적’은 ‘연극이 참 크구나.’하는 것을 실감케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방, 자유, 혁명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지만 풍자극이라 절대 지루하지 않다.”면서 “속도감 있게 전개돼 정신없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지난 8일 오후 찾아간 국립극단 연습실.“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렸지? 염병할! 누군가 나서서 세상을 확 뒤집어 엎어야 돼!” 큰 아들 칼 역을 맡은 신구의 연기에서는 TV와 영화를 통해 보던 코믹하고 푸근한 이미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긴 대사와 격한 몸동작은 체력적인 면에서 그를 포함한 노장 배우들에게는 도전이다.“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은 무대 위에서 어느 정도 연륜이 돼야 표현할 수 있다.”는 이 감독의 설명답게 이들은 노련함과 젊은 배우 못지않은 열의로 연습실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이윤택 연출로 신구·오순택·장만호등 출연 국립극단 출신 배우로 1년에 한번은 꼭 무대에 서는 신구는 “대사가 정착이 안 되는 게 젊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부담”이라며 은근한 걱정을 드러냈다. 틈만 나면 형형색색의 형광펜으로 빽빽이 그어진 대본을 잡아들고 쉬는 시간에도 대사 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고민이 많이 되지. 고민한 만큼 나왔으면 좋겠는데 아직 거칠단 말이야.”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출연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배우는 오순택. 미국 할리우드에서 ‘악역 전문’ 동양배우로 활동하던 그가 ‘프란츠’ 역을 맡아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다시 선다.1972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30여년 만이다. 그는 “기회가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면서도 “40년 가까이 영어로 연기한 탓에 어색해진 우리나라 말 때문에 힘들고 두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단순히 사악한 인물이 아닌 대의와 사의를 두고 “내적 갈등을 겪는 복잡한 인물”을 표현해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국내 최고령 배우인 장민호(81)가 모르 백작 역을,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등을 통해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줬던 오영수가 슈피겔베르크 역을 맡는 등 연륜 있는 국내 최고 배우들이 출연, 작품의 무게를 더한다. 또한 김재건, 주진모, 이상직, 서상원, 이승비, 이은정 등 젊은 연기자들이 가세, 노련함과 패기가 어우러지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탈춤·판소리등 한국적 색채 입혀 ‘떼도적’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지는 찰흙 같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 이 감독은 200년 전 독일 작품에 탈춤, 판소리, 산대놀이, 정악, 범패, 태껸 등 한국적인 것을 녹여냈다. 드라마투르그(작품의 고증 담당), 안무, 의상 제작에 독일 현지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세계적 보편성도 갖췄다. 지난달 방한, 연습을 참관했던 만하임 국제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은 크게 감탄하며 6월4∼12일 열리는 ‘쉴러 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떼도적’을 초청했다. 만하임 국립극장은 1782년 쉴러의 ‘떼도적’이 초연됐던 곳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의 ‘떼도적’은 6월8일 1200석 규모의 만하임 국립극장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된다.(02)2280-4115.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경제저격수의 고백/존 퍼킨스 지음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제국(帝國) 건설자들은 무력을 최우선으로 앞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기막힌 방법으로 현대적 ‘제국’을 건설해 나가는 미국을 본다면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들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한 에스파냐의 왕들도,18∼19세기 수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의 강대국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 것이다. 미국은 그 지배력의 범위와 강도에 있어서 역사상 어느 제국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제국적이다. 그리고 제국 건설의 첨병은 이른바 ‘경제 저격수’란 사람들이다.‘경제저격수의 고백’(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은 미국이 이들 경제 저격수를 앞세워 탐욕을 채우는 과정을 폭로한 책이다. 책은 자유 보호와 평화 구축이란 미명 아래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유린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미국의 위선적 가면을 벗겨낸다. 저자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1971년부터 1980년까지 10년에 걸쳐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로 활동하며 미국 기업과 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각국의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경제 저격수란 겉으로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의 직원 신분으로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미국의 이권이 걸린 곳에 들어가 해당 국가의 국고를 미국 기업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회계부정, 선거조작, 뇌물,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공작을 벌이는 경제 전문가다. 그는 인도네시아 전력 개발 사업, 석유 파동, 사우디 아라비아 돈세탁 프로젝트, 파나마 운하 소유권 재협상 등 20세기 경제사의 굵직한 사건들 이면에서 경제 저격수로 일하며 미국의 세계 경제 약탈에 한 몫을 담당했다. 경제 저격수들의 활약 이면엔 미국 특유의 ‘기업정치’가 있다. 거대 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되어 돈과 권력을 함께 주무르며 약소국을 대상으로 전횡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처음엔 개도국에 호의를 베푸는 듯 행동한다. 개도국이 발전소, 고속도로, 항만 등을 지을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하는 것. 그러나 프로젝트 담당 업체는 반드시 미국 기업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 때문에 빌려준 돈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돌아온다. 더구나 과도한 차관을 감당하지 못한 개도국은 미국에 고삐를 잡히게 된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대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유엔에서의 투표권을 장악하거나, 그 나라 영토 안에 군기지를 세우고, 석유 같은 중요한 자원을 빼앗거나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 등을 뺏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저격수들이 실패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자칼’이라고 부르는 미 중앙정보국의 암살자들이 개입하고, 이라크에서처럼 자칼마저 실패하면 전통적인 방법, 즉 군인들이 쳐들어가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1981년 원인 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은 실제로는 모두 자칼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주장한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지음

    “등 위에 올라탄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가고 싶은 대로 질주하는 말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생각해 보라.”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묻는 저자 잭 웨더포드의 질문에 대한 한 몽골 학생의 대답이다. 테무진은 너무도 유명한 칭기즈 칸의 본명. 아마도 칭기즈 칸의 생애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설명은 찾기 힘들 듯 하다. 꼼꼼한 답사와 고증을 거친 ‘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정영목 옮김, 사계절 펴냄)가 번역돼 나왔다. 제목(원제 ‘칭기즈 칸과 근대세계 형성’)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서구의 시각에서 칭기즈 칸과 그 후손의 역사를 살펴본 책이다. 그러나 저자의 접근법은 ‘야만과 공포’를 강조하는 서구의 기존 접근법과 다르다. 이를테면 ‘내재적 접근법’에 가깝다. 번개 같은 기병으로 약탈과 방화만 일삼았던 잔혹한 몽골군이라는 표면적 인상 대신 어떻게 효율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사회를 유지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가 보기에 몽골군의 잔인함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됐다. 몽골군은 다만 굴복시킨 적 가운데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을 구분, 쓸모없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쓸모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권력, 돈, 지식을 가진 사람들, 바꿔 말해 지도층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반란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도 이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기록에는 이들의 호들갑과 공포, 동시에 자신들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변명과 책임회피가 가득할 뿐이다. 또 결정적으로 몽골은 쇠망했고 지금은 서구가 세계의 중심이다. 중국도, 유럽도, 인도도, 이슬람도, 그 어느 누구도 몽골을 좋게 말할 리 없다. 오죽했으면 영화 ‘반지의 제왕’의 우르크하이가 몽골군을 상징한다는 해석까지 나왔을까. 저자는 잔혹함보다는 칭기즈 칸이 부린 ‘통합의 마술’에 주목한다. 무기는 비밀리에 전해오던 몽골왕실의 기록 ‘몽골비사’와 수년간 직접 몽골을 둘러본 ‘현장답사’의 경험이다. 칭기즈 칸은 떠돌이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혈연관계를 사회적 관계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론 이 관계가 혈연관계와 똑같을 수 없다. 여기에는 100% 계약의 개념이 개입한다. 칭기즈 칸은 대내적으로는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거의 균등한 분배체계를 갖춘다. 대외적으로도 주변국들과 이런 관계를 철저히 지킨다. 항복하면 안전을 보장하지만 저항하면 처절하게 짓밟는다. 이 와중에도 지배층과 군인은 죽이되 나머지 피정복민은 양자 입적과 혼인 등의 방식으로 몽골에 동화시킨다. 자기네 왕에게 억압당하던 피정복민들에게 몽골이 제공하는 것은 평등한 분배체계의 혜택과 정치적 안정이었다. 이는 칭기즈 칸이 대법령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침략과 야만’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칭기즈 칸 본인도 법에 따른다는, 일종의 법치주의 선언도 한다. 그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출신에 따른 차별 금지, 완전한 종교의 자유 보장, 필수 공익사업자에 대한 면세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칭기즈 칸의 폭발적인 힘은 분배체계의 개선을 통한 단합에서 나온 셈이다. 이런 서술을 쭉 읽다 보면 칭기즈 칸의 통치기술은 놀랍게도 로마제국의 그것과 비슷하다. 혈연관계의 확장이나 피정복민 융화정책, 교통과 통신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이해 등. 여기에다 대제국 건설에 앞서 몽골의 지배권을 두고 20여년 동안 대립한 자무카와 칭기즈 칸의 얘기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관계와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 물론 이런 거창한 얘기만 담긴 것은 아니다. 저자의 전공이 부족민연구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몽골인에게 말총과 남자의 허리띠는 어떤 의미인지, 결투를 할 때 씨름하는 것과 칼을 꺼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등에 대한 각종 설명이 양념처럼 곳곳에 배어 있다.1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푸틴, 키르기스 혁명정부 승인

    ‘레몬혁명’으로 아카예프 정권을 몰아낸 키르기스스탄의 정국이 혼미한 가운데 약탈과 폭력사태는 진정되고 있다. 시민혁명 이후 야당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새 정권을 구성했던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와는 대조적이다. 26일 수도 비슈케크에서는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에 대한 암살음모설이 떠도는 가운데 좇겨난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반혁명 시위’가 잇따랐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바키예프 체제를 받아들이는 발언을 했음에도 시위를 촉발시킨 총선에서 뽑힌 의원들이 기존 의원들과 정면 대치하는 등 정국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다. 아카예프 대통령에 의해 내무장관에 임명됐다가 혁명으로 축출된 케네슈베크 두셰바예프는 이날 “정부가 무너진 것은 불법이며 국가가 양분됐다.”고 내전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그가 이끈 친(親)아카예프 시위대들은 정권교체를 ‘쿠데타’로 부르며 바키예프 임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의회진입 등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진 않았다. 앞서 아카예프 지지자들은 비슈케크에서 90㎞ 떨어진 케민에서 헌법수호 집회를 가진 뒤 수도로 행진했다. 이와 관련, 신임 내무장관에 지명된 펠릭스 쿨로프 전 부통령은 “바슈케크로 몰려들던 3000여명의 시위대는 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해산됐다.”고 말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는 약탈과 관련해 129명이 감금됐으며 순찰과 야간통행 금지 등으로 치안상태가 안정을 되찾았다고 밝혔다. 바키예프 임시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 “반혁명이 시작됐으며 선동을 일으키려는 특수집단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정부 대변인은 “바키예프 임시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는 기도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았다고 밝힌 아카예프가 러시아에 도착했다는 외신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바키예프와 전화통화를 갖고 키르기스스탄의 안정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아카예프의 러시아 망명을 허용했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보도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에선 1000여명이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등 옛 소련 지역에서 ‘시민혁명’이 확산되는 조짐이다. 벨로루시 경찰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체포한 34명의 사법처리 방침을 밝혔다. 야당 지도자 안드레이 클리모프는 “루카센코가 피플파워의 도미노를 두려워하는 증거”라며 반정부 투쟁을 다짐했다. 러시아 연방국가인 우랄 지방의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에서도 26일 5000여명이 무르타자 라키모프 대통령의 부패와 비리 등을 규탄하며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옛소련독립국 ‘피플파워’ 도미노

    ‘피플 파워’의 도미노 현상인가. 옛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에 ‘시민혁명’ 바람이 매섭다.2003년 11월 그루지야의 ‘장미혁명’과 지난해 12월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이어 24일 키르기스스탄에선 ‘레몬혁명’으로 14년을 집권해온 아스카르 아카예프 정권이 무너졌다. 이들 국가 모두 부정선거로 시민혁명이 촉발됐으나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이었다. 독재화 성향이 짙은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주변 독립국가연합(CIS)에로 시민혁명이 확산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야당 진영은 발빠르게 정국 수습책을 내놓았으나 전국에서 약탈과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주민간 유혈극으로 5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부상하는 등 정국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부패로 얼룩진 독재의 말로 이날 권좌에서 쫓겨난 아카예프 대통령은 한때 개혁의 기수로 불렸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1991년 이후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창했지만 예의 독재자처럼 그도 권력욕에 사로잡혔다. 그는 2000년 대선에 출마했던 펠릭스 쿨로프 전 부총리를 구속시켰고 2002년에는 야당 의원의 구속에 항의하던 시위대에 발포,6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후 가족 일가의 독재 체제를 강화, 국민과 야당의 불만이 고조됐다. 결국 지난 13일 총선에서 영구집권을 위해 선거 부정을 자행, 자신의 아들과 딸을 포함해 75석 대부분을 집권당이 차지하자 국민들의 분노가 일순 폭발했다. 그루지야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와 우크라이나의 레오니트 쿠치마가 걸은 길을 답습한 것이다. 아카예프는 쇼핑센터를 경영하는 부인 등 가족의 비리가 드러난 데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염증을 느낀 민심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카예프 “사임한 적 없다” 키르기스스탄 의회는 25일 야당 지도자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를 임시 대통령겸 총리로 지명, 바키예프가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바키예프는 이날 비슈케크 중앙광장에 모인 군중에 “마침내 우리에게 자유가 왔다.”며 “새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상황을 신속히 개선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하원은 시민들에 의해 석방된 쿨로프를 내무장관에, 상원은 이셴바이 카디르베코프 야당 의원을 의장에 지명했다.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는 3개월안에 치러야 하는 현행 헌법에 따라 6월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카자흐스탄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아카예프는 25일 자신이 사임했다는 보도를 부인하면서 야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카바르 통신에 이메일로 보낸 성명에서 아카예프는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나라를 떠나 있는 것”이며 곧 복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내가 사임했다는 소문은 교활하고도 모략적인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키르기스스탄은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와 달리 외교정책의 향배보다 경제회복과 부패청산이 최대 관건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와 달리 개혁의 구심점이 약한 데다 야당이 서구식 민주화에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아 ‘미완의 혁명’에 머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플 파워 확산 우려하는 주변국 주변국들도 이를 바라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으나 혁명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일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치른 몰도바도 후유증이 없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언론을 통제, 사태 추이를 일절 보도하지 않으면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과 벨로루시는 피플 파워를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현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해 종신 대통령제를 구축했거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동시에 피플 파워의 여파는 2008년 임기가 끝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로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크렘린 일각에선 대통령 3선 논의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제2의 독립’으로도 불릴 수 있는 CIS의 피플 파워 바람이 모스크바에 닥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부의 탄생/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부의 탄생/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개인이든, 국가든 현대사회에서 ‘부’(富)는 거의 ‘진리’에 가깝다. 잘라 말해서 나라의 목표는 부국(富國)이요, 개인의 목표는 부자(富者)라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부’의 정체를 아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국가의 부는 개인의 부보다 여러 요인이 훨씬 복합적으로 작용해 축적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남미와 남아시아 국가들은 왜 그렇게 가난을 벗지 못할까? 남유럽보다 북유럽 국가들이 잘 사는 원인은 무엇일까? 1500년대만 해도 가장 부유했던 이탈리아의 1인당 GDP가 최빈국의 1인당 GDP의 3배에 불과했는데 21세기엔 미국의 1인당 GDP가 최빈국의 15배에 달하는 이유는 무얼까? 비교적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던 나라들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부국과 빈국으로 극명하게 갈리게 됐을까? ●국부형성의 4요소는 재산권·과학적 합리주의·자본시장·빠른수송 ‘부의 탄생’(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김현구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주제들이다. 저자는 근대 이후 급격히 부가 축적된 나라들과 끝내 그 부를 향한 궤도에 이르지 못한 나라들에 대해 역사적·경제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부를 쌓을 수 있는 요소를 도출해낸다. 그것은 바로 노동의 대가를 국가나 범죄자에게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재산권’, 기술적 진보의 바탕이 되는 과학적 합리주의, 재화와 서비스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자본시장, 빠르고 효율적인 통신과 수송 등 네가지다. 이 요소들은 16세기 처음으로 네덜란드에서 동시에 나타났고, 영어권에선 1820년께 비로소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것들이 지구상 다른 곳으로 확산돼 나갔다. 이 네가지 요소중 하나라도 빠지면 경제적 진보가 위태로워져 국부라는 테이블은 쓰러지고 말았다. 18세기 네덜란드는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공산권에선 재산권 결여 때문에, 중동 국가들은 자본시장과 서구적 합리성 부재로 인해 이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아프리카의 경우 이 네가지 모두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국가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몇 개의 나라들을 대표적으로 선별하여 부국과 빈국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탐구한다. 먼저 근대의 부가 어떻게 가장 먼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두 나라에서 탄생했는지 검토한다. 네덜란드는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3세기나 앞선 1500년에 잉글랜드나 이탈리아보다 1인당 GDP가 두배에 달할 정도로 부유했다. 이는 그로부터 3세기 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폭발적 성장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당시로선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대부분의 영국인들과 함께 부러워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근대사회 富는 네덜란드·잉글랜드부터 출발 네덜란드는 1500년 이후 주변 나라들에 비해 주민들이 강건한 재산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도그마로부터 해방돼 종교로 인한 분열을 피할 수 있었고, 낮은 이자율과 강력한 투자자 보호 덕분에 자본시장이 활성화돼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가 산업혁명 이후 급성장한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가장 민주적인 의회제도가 정착돼 있었고, 이는 금융시장을 안정·발전시켰다. 분업화에 따른 전문화도 상당히 진전돼 있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촉발된 산업혁명은 성장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서 움튼 번영은 곧 서유럽의 나머지 나라들과 동아시아로 확산되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와의 근접성과 혁명 이후 개혁 덕택에 이웃을 가장 근접하게 추격했다. 앙시앙레짐 하의 비효율적 제도가 깨지면서 번영의 걸림돌이었던 통행세가 일소됐고, 소작농의 토지 소유권이 확인됨으로써 부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반면 16∼17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루며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부상했던 스페인은 영국과는 정반대되는 재정적·제도적 구조에 의해 쇠퇴의 운명을 맞는다. 종교적 이유로 경제의 주력이었던 유대인과 무어인을 내쫓았고, 프랑스·잉글랜드·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벌이며 국력을 소진했다. 중남미에 대한 무자비한 정복을 통해 금과 은 약탈로 구멍을 메워나갔으나, 금과 은이 고갈되자 스페인 사회는 산업 및 상업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를 드러냈다.16세기 스페인과 오늘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사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것은 식민지 나라들의 빈부의 엇갈림이다.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미국과 캐나다는 영국이 이룩한 부의 네가지 요소를 그대로 옮겨다가 발전시켰고, 스페인이 정복했던 중남미의 국가들은 정복자의 구태적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남미와 북미의 빈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말았다. ●英식민지 美·캐나다 부자로 …중남미는 정복자 스페인 구태 답습 우리나라와 인접한 일본이 부를 축적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체제는 재산권을 박탈하고, 효율적인 자본시장 발전을 가로막는 등 200여년간 경제 번영으로 가는 네가지 요소를 질식시켰다. 결국 유능한 일단의 사무라이들이 막부정권을 타도하고 메이지 정부를 세웠으며, 이후 개혁은 마치 면도날이 실크 천을 찢듯이 봉건적 일본을 해체시켰다. 번영을 위한 네가지 요인을 철저한 방식으로 도입함으로써 기적적인 경제번영을 이루어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전쟁·문화·정치의 부침이 아니라 경제적 동인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시공간에서 경제적 번영이 일어나는 원인과 과정을 검토하다 보면, 몇년째 안개 속을 헤매는 우리 경제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 윤곽이나마 잡히지 않을까? 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기업들 약탈적 M&A 노출”

    “기업들 약탈적 M&A 노출”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들어 달라. 공격과 방어 수단이 동등하게 주어졌을 때 경쟁이 가능하지, 지금처럼 공격자에게 치우쳐 있으면 국제 투기펀드의 ‘물 좋은 놀이터’로 전락할 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1일 내놓은 ‘국내 인수·합병 관련제도의 실태와 보완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에 국내 기업들이 일방적으로 노출된 만큼 이를 막을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이날 발표한 ‘주주 행동주의의 국내외 비교와 정책시사점’ 보고서에서 “외국계 자본의 이익 챙기기가 1970∼80년대 미국 주식시장에서 성행한 약탈형 주주 행동주의와 닮은꼴”이라며 향후 그린메일(경영권을 담보로 보유주식을 시가보다 비싸게 되파는 행위) 가능성을 경고했다. ●“방어 수단이 없다.” 전경련은 보고서에서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국내기업의 안정적 경영 환경을 위해 ▲의무공개 매수제 재도입 ▲제3자 신주인수권 배정요건 완화 ▲차등 의결권주 발행허용 등이 검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경련측은 “외환위기 이후 외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보호장치들이 상당 부분 폐지돼 힘의 균형이 깨졌다.”면서 “공격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거나 방어 수단을 보완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주주 및 경영자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과도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으며, 국내 금융 및 산업자본이 외국자본에 잠식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본이동 자유화 규약이 허용하는 범위와 외국인 직접투자 촉진제도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핵심기술이나 정보를 가진 기업은 외국자본의 인수를 아예 금지한 미국의 ‘엑슨-플로리오(Exon-Florio)법’과 같은 제도를 도입해 국내 기간산업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약탈형 투기펀드 판친다.” 대한상의도 외국계 자본의 주주 행동주의가 약탈형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지적하며 적절한 정책 대응을 주문했다. 상의측은 “지난해 말 현재 외국인들이 국내 최대주주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한 주요 기업이 53개, 단일 외국인 지분율이 5% 이상인 기업이 150개에 달하는 등 외국계 사모펀드들이 언제든지 수익률 게임을 벌일 수 있는 포석을 마친 상태”라며 “이들 기업의 약점을 잡아 앞으로 그린메일을 시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소버린자산운용이나 헤르메스 등의 외국계 사모펀드들은 M&A 위협이나 부당한 경영간섭 등의 기업 흔들기를 통해 반대 급부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소액주주 보호장치 등의 관련 제도가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굿이어나 월트디즈니 등이 기업 사냥꾼들의 부당한 주식 되팔기의 희생양이 되다 ‘포이즌 필(독소조항)’이나 ‘황금낙하산(CEO해임시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해 경영권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 등과 같은 다양한 경영권 방어장치가 도입되면서 주주 행동주의가 약탈형에서 기업가치 제고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면서 “국내에서도 이같은 안전판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자크 아탈리 지음

    유목적인 생활양태를 뜻하는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유행 속에서 노마디즘은 IT기술과 교통의 발달 등으로 이제 정착해서 살아가는 삶은 끝났다는 뜻으로 쓰인다. 소위 ‘팔리는’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이효숙 옮김, 웅진닷컴 펴냄)이 번역돼서 나왔다. 이 책은 culture(문명)와 cultivation(경작)의 어원설명에서 보듯 인류사를 ‘정착’으로 설명하던 기존틀을 파괴한다. 대신 ‘야만’과 ‘무지’의 상징이었던 ‘방랑’과 ‘유랑’을 복권시킨다. 아탈리는 ‘정착 문명’의 역사는 기껏해야 5000년에 불과하고 그 5000년마저도 노마디즘의 시대였다고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 열차, 자동차 등 운송수단의 발달 등과 관련된 문제를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그런데 아탈리 책은 역발상을 시도하는 다른 책들과 달리 별로 신선하지 않다. 역사책에서 읽던 사회변동 관련 논의를 그대로 옮겨다 놓고는 노마디즘이라는 꼬리표만 열심히 붙였다는 느낌이다. 이러다보니 무차별적으로 노마디즘을 가져다 쓰는 게 은근히 불편할 정도다. 예를 들자면 시베리아 아시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약탈하면서 이들을 학살한 것도 ‘같은’ 노마디즘이다. 현재의 소득불균형과 계층간 위화감의 문제 역시 ‘하이퍼’노마드와 ‘인프라’노마드의 분화로 설명된다. 이러다보니 최근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최후의 정착민국가 ‘미국’과 ‘시장’,‘민주주의’,‘종교(이슬람)’라는 3개의 노마드 제국간 다툼으로 묘사하는 결론 대목은 문명충돌론을 보듯 다소 생뚱맞기까지하다. 차이라면 문명충돌론이 서구 백인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비해 아탈리는 산업화라는 노마디즘에 이어 세계화라는 노마디즘을 잘 이끌면 여전히 주도국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정도다. 알제리 출신에 미테랑 정부 아래 주요 요직을 맡아 왔고 유럽부흥개발은행에까지 관여했다는 아탈리의 이력을 보면, 노마디즘을 외치면서 정작 유럽과 프랑스의 현실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은 아탈리 자신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노마디즘 개념을 만든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연구에 천착하고 있는 철학자 이정우같은 사람은 아탈리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을 속화(俗化)해 써먹고 있다.”고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아탈리보다 차라리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을 읽어보라고 권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단적으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아탈리의 맥락에서는 ‘정착민의 저항’에 불과하지만 하트와 네그리의 맥락에서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이다. 그럼에도 아탈리는 이제까지 잘 팔렸고, 또 앞으로도 잘 팔릴 사람 가운데 하나다.‘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노마디즘’을 말할 때 들뢰즈·가타리 혹은 하트·네그리보다 아탈리를 찾는 게 더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2만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길섶에서] 계사년 정월 스무나흗날/심재억 문화부 차장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읽자. 임진왜란 때 서울에 갓 입성한 왜군은 어찌된 일인지 약탈은 하면서도 살육만은 피했다. 남부여대 피란길에 올랐던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주뼛거리며 다시 몰려들면서 도성은 이내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책이었다. 조명(朝明)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로 한양으로 짓쳐 내려오자 왜군은 마각을 드러냈다. 한 날, 왜군은 느닷없이 성안의 백성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아예 조선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는 듯 집마다 불을 지르고, 축생까지도 목숨이 붙은 것은 남김없이 무찔렀다. 이 때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되지 않았고, 시체가 곳곳에 쌓여 산을 이뤘다. 이 후 해마다 그 날이 되면 슬프고 음산한 기운이 도성에 가득찼으니, 모두 속절없이 죽어간 조선 백성의 원통한 기운이 서린 탓이었다. 그 날이 바로 임진년 이듬해인 계사년 정월 스무나흗날이었다. 이웃을 두고 호놈 해야 하는 심사가 편치 않지만, 그 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가 그들을 ‘왜놈’이라 부를 이유는 너무나 많다.‘때리는 놈보다 맞는 놈 죄가 더 크다.’는 조선 속담을 그들이 알까 모르겠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말말말˙˙˙

    일제의 야만적인 산림자원 약탈 만행은 전쟁범죄와 더불어 반드시 계산돼야 한다.-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6일 입수된 최근호에서 “일제가 식민통치시기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원시림 200여만㏊를 비롯해 우리 나라의 이름난 처녀림을 모두 약탈해 갔으며, 그 죄악을 반드시 사죄하고 청산해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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