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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야기3] 낙타를 알면 아랍이 보인다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야기3] 낙타를 알면 아랍이 보인다

    지금은 대도시에서 첨단 생활을 하는 아랍사람들도 50년 전만 해도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살았다.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서는 대추야자와 낙타가 주요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대추야자는 오아시스의 유일한 식물성 식량이다. 사막을 횡단하던 캐러밴(대상)들이 대추야자 두 알로 한 끼를 해결할 정도로 칼로리가 뛰어나다. 사막의 비상식품인 셈이다. 낙타는 더욱 중요하다. 의식주 생활에 끼치는 의존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낙타, 생존의 동의어 유목사회에서 가축 사육 선호도는 수송과 이동 기능, 의식주 동반자 기능, 전쟁 수행 보조 역할 등에 의해 결정된다. 낙타는 400kg 이상의 짐을 적재하고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400km를 이동해 갈 수 있다. 뜨거운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이나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아랍 유목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막의 동반자이다. 또한 낙타는 양질의 고기는 물론 풍부한 젖을 공급한다. 낙타 한 마리를 잡으면 적어도 200kg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 5인 한 가족이 매일 2kg(3근 반) 정도의 고기를 소비한다 해도 3~4개월을 견딜 수 있는 주요한 식량이다. 여기서 다양한 육류 보존법이 생겨났다. 훈제와 염제는 기본이고, 향신료나 양념을 바르거나 건조시켜 육포를 만든다. 보존식품은 이처럼 유목사회에서 개발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아랍사람들에게 낙타고기를 먹어 봤느냐고 물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낙타는 잡아서 고기를 취하는 것보다 살려서 활용할 수 있는 혜택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완벽한 생태 순환 동물 우선 낙타는 인간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해 준다. 가끔은 사람들이 물처럼 낙유를 그냥 마시기도 한다. 마시고 남는 젖은 요구르트(응고상태)를 만들고, 다시 발효시켜 라반(액체 요구르트)으로 만들어 마신다. 남은 젖으로는 수백 종류의 치즈를 만든다. 두부 같은 치즈에서부터 몇 년을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한 다양한 치즈로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 이뿐인가! 버터를 만들고 락토스라는 유당을 추출하여 당분을 해결한다. 말려서 분유나 전지분으로 보관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정발효시켜 젖술을 만드는 일이다. 물론 이슬람이 받아들여진 이후에 술은 금기되었지만, 낙타 젖술은 삶의 애환을 달래고 낭만을 노래하던 유목생활의 청량제였음이 분명하다. 그외 낙타 가죽으로는 텐트나 신발을 만들고, 털로는 카펫이나 깔개를 짠다. 뼈판은 기록이나 그림의 캔버스로 사용한다. 요즘도 이스탄불이나 테헤란, 카이로 등지의 관광지에는 낙타 뼈판에 채색을 하고 판넬 속에 아름다운 미니어처(세밀화)를 그려 판매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심지어 낙타오줌은 여인들이 머리 감는 샴푸 대용으로 사용한다. 물이 귀한 생태환경에서 물로 세수나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연에 대한 도전이요, 범죄행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오줌을 큰 통에 받아 두었다가 날을 잡아 머리를 감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의 척도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여자가 얼마나 자주 머리를 감느냐 하는 것이다. 오줌으로 머리 감는 횟수는 바로 소유하는 낙타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개시설이 완비되고 담수화 시설 덕택에 전통 오아시스촌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럼 낙타 똥은 어디다 사용할까? 낙타의 배설물은 말려서 훌륭한 연료로 쓴다. 석유는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좀처럼 잘 쓰지 않는다. 낙타 똥은 생각보다는 잘 타서 요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낙타는 수송과 전쟁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동물이다. 목축과 제한된 오아시스 경작이 주가 되는 경제순환에서 교역은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주된 통로이다. 그러나 교역로는 부족 간이나 국가 간에 평화가 유지될 때는 제대로 기능하지만, 평화구도가 깨어지면 금세 약탈과 침략 루트로 돌변한다. 어떤 경우라도 낙타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낙타 없는 교역이나 전쟁은 상상할 수 없다. 낙타는 생존과 동의어이다. 금기시 되는 돼지고기 반면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를 철저한 금기 식품으로 금하고 있다. 코란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으로 돼지고기 금기가 명시되어 있다. 굳이 종교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낙타의 경우처럼 오아시스 생태방정식에 돼지를 적용해 보면 답은 보다 명확하다. 우선 돼지는 지방질과 병원균 함유 때문에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춰도 자연 상태에서 부패해 버릴 뿐만 아니라 건조되지 않는다. 낙타 한 마리를 잡아 몇 달이고 가족의 식량을 충당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보존식품이 불가능하여 바로바로 처분하지 않으면 고기의 기능이 상실되어 버린다. 둘째, 돼지는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젖의 잉여분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새끼에게도 모자라는 젖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지 못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유제품 음식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돼지 가죽, 두꺼운 삼겹살 껍질을 어디다 쓰겠는가? 그리고 돼지 털은? 돼지 뼈와 배설물은 또 어떠한가.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의 말린 배설물은 모두 초식동물이다. 돼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이기 때문에 그 똥을 연료로 쓸 수가 없다. 따라서 돼지가 주는 의식주 동반자 기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수송과 이동 기능은 어떤가? 그리고 전쟁 보조 기능은? 너무나 분명하게 돼지고기가 금기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처럼 문화연구는 막연한 것 같지만, 때로는 수학공식 풀듯이 명쾌한 대답이 나오는 법이다. 글·사진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캘리포니아 허스트 캐슬,나치 약탈 미술작품 반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언론재벌 윌리엄 허스트의 저택이었던 ‘허스트 캐슬’이 1930년대 독일 나치가 유대인 미술상으로부터 강탈했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 두 점을 반환해 눈길을 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10일 보도에 따르면 베네치아의 화가 야코포 틴토레토의 제자가 그린 ‘알비제 벤드라민의 초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베네치아 화가의 자화상,두 작품은 1935년 베를린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미술상 제이콥과 로사 오펜하이머의 소유였는데 나치 정권이 팔라고 강압해 헐값에 넘겨주고 말았다.당시 나치는 유대인 미술상 등에게 독일을 떠나는 ‘출국세’로 판매 대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어느 갤러리 소유였다가 허스트의 손에 들어온 것.허스트는 1919년 지은 허스트 캐슬에 이 작품들을 걸어두었는데 1970년대 허스트 캐슬 전체가 주정부에 기증돼 이 작품들은 주정부 소유가 됐다. 허스트 캐슬에는 이 두 그림의 복사본을 오펜하이머 부부의 소유였던 세 번째 작품의 원본과 나란히 전시하게 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세 번째 작품은 베네치아 화가 파리스 보르동의 제자가 그린 작품인데 오펜하이머 후손들과 미술관측은 허스트 캐슬에 계속 전시하게 하는 데 동의했다. 지금까지 수백만명의 관람객이 165개의 방이 딸린 허스트 캐슬의 한 침실 벽에 걸린 이 그림들을 구경했지만 2년 전 우연히 오펜하이머 후손들의 변호사가 허스트 캐슬의 선전 리플렛에 인쇄된 그림을 확인하고 문의하기 전까지는 이 그림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허스트 역시 이 작품들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이콥 오펜하이머는 부부가 함께 탈출했던 프랑스에서 1941년 숨을 거뒀고 나중에 부인 로사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허스트 캐슬을 관리하는 캘리포니아주 공원공단의 로이 스턴스 대변인은 “그림들은 약 74년 동안 이곳에 있었는데 별달리 주목받지 못했다.”며 “대리인들을 통해 허스트가 하도 많은 작품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우리는 허스트가 OK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문화재 반환은 미국이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을 원 소유주에게 반환한 25 번째 사례이며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미국 박물관들은 수집품의 유래를 꼼꼼이 따지고 있다고 영국 BBC는 덧붙였다. 1951년 타계한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 왕국이 가장 번창했을 때 20곳이 넘는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의 캐슬에는 2만 2500점의 예술품이 전시돼 관광객들의 발길을 불러모았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과거사 청산은 우리 모두의 몫 아픈 기억과 끊임없이 대면해야”

    “과거사 청산은 우리 모두의 몫 아픈 기억과 끊임없이 대면해야”

    “과거사 청산은 과거의 아픈 기억과 계속 대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한양대 연구중심대학(WCU) 석학교수로 초빙받아 방한한 일상사 연구의 대가 알프 뤼트케 교수가 10일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임지현 교수와 대담을 가졌다. 이날 ‘트랜스내셔널 일상사’라는 주제로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에서 열린 강연에 앞서 가진 대담에서 두 학자는 “과거사 청산은 소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성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부터 독일 에르푸르트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뤼트케 교수는 거대담론 위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개인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일상사’ 분야에서 저명한 석학이다. ●독일 과거사 청산은 현재진행형 →독일에서의 과거사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한국과 비교한다면. 뤼트케 과거사 청산은 파시즘이 무너진 후 20~30년에 걸쳐 이뤄졌다. 동독의 경우 “파시스트였던 적이 없다.”며 과거를 외면했지만 1970년대 들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것은 많은 무명씨였다는 시각이 생겨났다. 대도시뿐 아니라 작은 마을에서 유대인을 약탈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과거사 청산의 선구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과거사 청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옛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를 둘러싼 논란만 해도 그렇다. 임지현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제국주의와 싸웠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친일파가 청산됐다고 주장한다. 남한도 일제나 독재시대에 대해 소수의 권력자만 책임이 있을 뿐 나머지는 피해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독재시대에 대한 향수가 만연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그 시대의 사회적 가치가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와 싸우려면 인적 청산으론 안 된다. 일반인들이 그 시대의 가치와 대면하는 것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가위원회들이 통폐합될 처지다. 임지현 그런 위원회들이 없어지면 과거사 청산이 안 된다는 것인가. 과거와 대면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시민사회 성원들이 해야 하는 몫이다. 뤼트케 과거청산에서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 원칙이다. 정부, 역사가, 소시민, 시민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1970년대 영국에서 ‘역사 작업장’이라는 운동이 시작돼 독일로 옮겨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반성한다. 정부가 주도한 게 아니었다. ●시민들 스스로 역사 공부하고 반성을 →과거사 청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뤼트케 ‘네트워킹’이다. 모여서 공부하고, 과거와 대면해야 한다. 20세기의 슬로건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면 지금은 “만국의 노동자여 네트워킹하라.”다. 과거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글 사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평화 찾지 못한 줌머족 고통에 관심을…”

    “평화 찾지 못한 줌머족 고통에 관심을…”

    2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수벌 모니 탄창갸는 아직도 어릴 적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족들이 땀흘려 일구던 텃밭이 화염에 휩싸였던 것, 이웃 아저씨가 방글라데시 군인들에게 맞아 피를 뿜고 죽어 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현실은 소년을 투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탄압은 더더욱 거세졌다. 탄창갸는 인도와 태국을 거쳐 26세 되던 해인 2007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과학자를 꿈꾸던 그의 인생이 풍비박산 난 건 순전히 그가 방글라데시 소수 민족인 줌머(Jumma)족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12일 ‘보이사비 축제’ 준비 한창 탄창갸는 오는 12일 김포 양촌 다목적체육관 무대에 선다. 한국으로 치면 설날에 해당하는 ‘보이사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한국에 모여 사는 줌머인 50여명은 2002년부터 매년 4월12일이면 전통 춤과 노래를 부르며 타지에서 사는 설움을 달랜다.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재한 줌머인들을 9일 김포에서 만났다. 줌머인은 방글라데시 동남부에 위치한 치타공 산악지역에서 사는 소수민족이다. 인도의 지배를 받을 때는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1947년 파키스탄으로 지배권이 넘어가면서 경작지가 수력발전소 건설로 수몰되고 인구의 40%가 인도로 강제이주됐다. 1971년 방글라데시 치하에 놓였지만 자치권은 요원했다. 약탈과 강간이 난무하고 있다. 줌머인 가운데 처음으로 1994년 한국으로 망명한 산티지반 차크마(41)는 망명한 지 10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차크마는 운 좋게 난민이 된 재한 줌머인 18명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 아니라는 것 외에 다른 점은 없다. 김포의 작은 자동차 납품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2001년 만난 아내와 살고 있다. 차크마는 “망명 올 때 한국이 군부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독립운동의 경험 등 줌머인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 한국으로 오게 됐다.”면서 “한국에선 안전을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외국인 아닌가.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향 어린이에 매년 200만원씩 보내 차크마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공장,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줌머인들은 마음속에서 고향을 놓지 못한다. 재한 줌머인들은 2년 전부터 매년 200만원씩 돈을 거둬 고향의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보낸다. 지난해 겨울엔 이불과 옷가지도 보냈다.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 줌머인연대 사무국장은 “아직도 평화를 찾지 못한 고향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국인들도 줌머족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글ㆍ사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펴낸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펴낸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

    영국의 비평가 겸 사학자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말했다. 서구의 역사는 살상과 약탈, 정복으로 얼룩져 있음을 비유한다. 지난달 프랑스 크리스티 경매장에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 원명원(圓明園)에서 약탈된 동상 2점이 출품됐다. 발끈한 중국은 경매 중단을 요청했고, 프랑스 법원은 이를 기각하는 등 양국간 한바탕 신경전이 벌여졌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유품이 경매에 나와 인도 국민을 분노케 했다. 이처럼 중국과 인도를 비롯해 그리스, 이집트 등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둘러싼 피탈국들의 반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등 일본, 프랑스, 미국 등 국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모두 7만 6000여점에 이른다. ●15년동안 세계 돌며 자료 모아 1978년 외무고시 첫 여성 합격자이자 여성 2호 대사를 지낸 김경임(61) 전 튀니지 대사. 15년 동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약탈 문화재에 대한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여기에 30년 문화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얻은 경험을 녹여 최근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클레오파트라의 바늘’(홍익출판사)이라는 책을 펴냈다. 문화재 환수의 해법을 어느 정도 제시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세계 최초의 약탈 문화재 ‘함무라비 법전’과 인류 최초의 인권문서 ‘사이러스 칙령’, 그리고 덴마크로 유출됐다가 아이슬란드로 반환된 ‘레기우스 필사본’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는 “문화재를 약탈해간 유럽은 피탈국들의 반환 요구에 대해 오랫동안 반대논리를 개발해왔다. 우리는 그 논리의 허점을 기술적으로 잘 파고들어야 한다.”면서 “각국의 대응과 반환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세계 문화재 약탈사를 다루게 됐다.”고 했다. 또한 올해 말에는 우리나라 문화재 약탈사를 다룬 제2권을 펴내는 등 앞으로 우리의 문화재 환수운동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언제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까. -1990년대 파리 유네스코 주재 한국대표부에 근무하면서였지요. 국제사회가 문화재 반환청구국과 반대국가로 양분돼 치열한 외교전을 치르며, 자국의 문화재 수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이러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틈틈이 집필을 했지요. ●“일본의 약탈 관행·입장 등 간파해야” →문화재를 찾기 위한 해법은 어떤 것인가요. -요즘 국제사회는 문화재의 윤리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약탈의 경우 불법성과 비윤리성 때문에 반환운동에 도덕성이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지요.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를 인류공동의 문화재라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그게 말이 됩니까. 프랑스가 조선왕실의 의식과 행사를 기록한 문서를 해독하고 연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환요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그들의 약탈 관행이나 현재 입장 등을 간파하면서 적절히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문화재 반환운동은 어떻게 전개해야 합니까. -그리스는 180년 넘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단기간이 아닌, 대를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문화재란 그 나라 국민들의 인격체입니다. 잘려지고 흩어진 것들을 원래대로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화재가 경매로 나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그는 1974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미 오하이오주립 애크론 법대에서 수학했으며, 1978~2007년 도쿄·뉴욕·파리·뉴델리·브뤼셀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지금은 문화재 반환문제와 관련된 초청 강의를 틈틈이 나가고 있다.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이라크 침공 6주년…마실 물도 없는 바그다드

     미군이 이라크 해방을 명분으로 침공한 지 20일로 6주년이 되지만 아직도 수도 바그다드에선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미국의 진보 신문 매클래치가 18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라크 환경부에 따르면 상황이 좋은 달에는 30%,나쁜 달에는 90% 정도의 바그다드 시민이 마실 물을 구할 수 없다.지난해 여름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관료들은 올 여름에는 또다른 전염병이 만연할지 두려워하고 있다.  어린 딸 파티마가 시름시름 앓고 있고 자신도 만성적인 욕지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팔라 아부 하산은 “우린 가난해요.그런데 누구도 우리가 아프건 죽건 신경도 쓰지 않아요.물이 더러우니 질병을 옮겨요.”라고 말했다.모든 이들이 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지만 누구도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식품점 주인인 후세인 자와드는 “오늘 마실 물이 깨끗하더라도 누구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수입의 40%를 생수 파는 것으로 충당한다고 설명했다.가게 안에는 2m가 넘는 높이로 생수통이 잔뜩 쌓여 있었다.  1200년 전 이 도시가 처음 세워졌을 때는 ‘바그다드 알 자와’로 불렸다.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시작되는 이곳에는 물이 풍부해 ‘바그다드 정원’이라 불렸던 것.  바그다드시는 여전히 티그리스 강에서 물을 끌어오고 있지만 터키가 최근 상류에 댐을 건설하면서 강물을 막아 저수량이 내려가고 있다.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이 이번 주 터키를 방문한 것도 댐 건설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또 시리아와 이란 역시 댐 건설로 이라크의 물 고갈을 부채질하고 있다.  니르민 우스만 환경부 장관은 수자원 관리가 낙후돼 있는 데다 급격히 도시로 집중되는 인구 때문에 티그리스강의 공급 능력을 계속 고갈시키고 있다고 말했다.강물은 줄어들고 도시에서의 소비는 계속 늘어나 강물은 계속해서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바그다드의 상수도 체계는 1984년 대대적인 정비를 앞두고 있었지만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 이란과의 전쟁에 이어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바람에 무산됐다.이라크군을 쿠웨이트 영토에서 퇴각시키기 위해 쏟아부은 미군의 폭탄 탓에 상수도 체계는 타격을 입었고 정비할 수 있는 자원들을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수십년 이어진 경제제재 탓에 수질은 악화일로였다.6년 전 미군 침공 이후 많은 관청들이 광범위한 약탈을 당했고 관개 시스템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그 뒤 종파 갈등과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인해 이를 뜯어고칠 여력은 사라졌고 상수원을 개발하기보다 경호인력 구하기에 바빴다.수도관 하나 파묻는 공사를 미군이 발주하는 데 9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500명의 시 소속 엔지니어가 피살됐으며 수많은 상수원 개발 게획이 지연됐다고 하킴 압둘자라 시 대변인은 말했다.사망한 인력을 대체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물도둑도 늘어나 사방에서 수도관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수압이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것도 수질 악화를 재촉하고 있다.바그다드 시민 60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물을 훔쳐 마시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는 10년간 60억달러를 들여 수도 시스템을 고쳐 물도둑들을 막으려 하고 있지만 이럴 경우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종족 분쟁을 부채질,시아파 전사들의 신병 모집을 돕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아 시다 모스크에서 만난 이맘 마흐누드 알 바야티는 “물이 없으면 심지어 기도조차 올릴 수 없어요. 기도하기 전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수도 기술자로 일하다 이맘으로 전업한 그는 “그런데 요즈음 바그다드 물로 손을 씻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낄낄거렸다.”물론 씻을 물이 없으면 사막의 모래를 써도 된다고 쿠란에는 나와있지만 말이예요.그건 널려 있잖아요.”  기가 막힌 바그다드의 참상이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조선 세종1년 대마도 정벌 “왜구 소탕보다 明의 日정벌 차단 전략”

    조선 세종1년 대마도 정벌 “왜구 소탕보다 明의 日정벌 차단 전략”

    조선 세종1년(1419년) 5월, 왜선 50여척이 충청도 비인현을 약탈한다. 이어 황해도에도 잇달아 수십척의 왜선이 출몰한다. 이에 상왕인 태종과 세종은 대신들과 함께 대마도 정벌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해 출정 명령을 내린다. 전선 227척과 병력 1만 7285명을 동원한 대규모 원정이었다. 그 결과 대마도 도주는 항복하고, 대마도는 경상도의 일부로 편입돼 조선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는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부른다. 고려말부터 약탈 행위를 일삼아온 왜구의 도발을 참다 못한 조선 정부가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한 강력한 대응책으로 파악돼 왔다. 하지만 건국 초기 명(明)과 일본 등 주변국과 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조선이 단순히 왜구를 격멸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활동을 벌였다는 점은 의문으로 남았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대마도 정벌을 감행한 데는 다른 의도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전면전 회피… 위력 과시 ‘상징적 공격’ 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발표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미리 공개한 논문에서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년(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은 일본 국왕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이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명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여진 지역 영향력 확대 수확 얻어 이 강사는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왜구를 제어한 공로로 여진 지역의 실력행사에 대한 명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이 사대교린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자국의 이익과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마도 정벌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유대인 자산 보호로 비밀금고 악용

    스위스 은행(UBS)의 ‘비밀주의’는 17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할 만큼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건너온 위그노 신교도들이 만든 은행은 유럽 왕조들의 부를 숨겨주며 국경 밖의 돈을 조금씩 자국으로 끌어들였다. 비밀주의가 스위스의 예금정책으로 공식화된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34년. 독일 나치 정권이 유대인 재산을 색출하기 위해 명단을 요구하자 스위스는 이를 거부하기 위해 헌법에 비밀주의를 명문화했다. 나치가 비밀주의 명문화의 단초를 제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스위스 은행들은 나치와 연계되기도 했다. 최근 영국 일간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는 비밀주의의 이면에 나치와의 협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3년 아돌프 히틀러는 취리히 생고타르 호텔에서 은행가들을 만났다. 이후 스위스 은행들은 나치가 갈취한 금괴를 감추기 위한 은닉처로 이용됐다. 97년에는 UBS가 과거 나치와 거래한 내부 자료를 파기하려는 것을 UBS 야간경비 크리스토프 메일리가 폭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은행 금고에서 나치가 약탈한 유명 미술품 10여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스위스 은행들은 독재자의 비밀금고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페르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오세스쿠, 나이지리아의 독재자 사니 아바차 등이 스위스 계좌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염주영칼럼] 속도전과 지구전

    [염주영칼럼] 속도전과 지구전

    미국의 금융위기가 다시 도졌다. 이번에는 실물경제 위기까지 겹치면서 외환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달러당 200원 이상 올랐다. 장중에는 1600원선을 뚫기도 했다.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1998년 3월의 환율 수준이 1550원 선이다. 환율만 놓고 보면 외환위기와 다를 바 없다. 지난 1년 동안 원화는 일본의 엔화나 중국의 위안화 대비 70%, 미국의 달러화 대비 50%, 유럽연합(EU)의 유로화 대비로는 40% 이상 폭락했다. 왜 이럴까?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을 쌓아 두고도 시장은 여전히 외환위기의 악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환시장에 짙게 드리운 공포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야 거기에 맞는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진단은 매우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선 외환위기 학습효과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외환위기의 교훈이 경제주체들에게 과잉 학습된 나머지 시도 때도 없이 위기의식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경제위기가 한참 진행 중인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 안이한 설명이다. 다음으로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부재가 지적되곤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해 떠나는 것은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원론적인 설명이다. 신뢰가 없다면 애당초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외환시장의 이상폭등 현상이 미국의 금융위기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생긴 위기가 순식간에 전 세계,전 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금융과 산업의 동반 부실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새로 출범한 미국 오바마 정부를 비롯, 세계 각국이 재정확대 등의 수습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 당시부터 오래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위기의 성격이 단순한 금융사고가 아니라 금융시스템의 위기이자 도덕성의 위기라는 측면을 띠었기 때문이다. 즉 금융자본가들의 탐욕이 신자유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약탈적 금융시스템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독부재의 허점을 타고 도덕적 해이를 야기한 것이 이번 금융위기의 본질이다. 따라서 금융시스템을 재건하고 도덕성의 위기를 치유하자면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 당시 미국 경제의 조기 회복 가능론을 폈던 일부 학자들도 지금은 대부분 주장을 수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도 지구전을 펴야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오래간다는 전제 하에 정책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외환시장 정책이다. 윤증현 경제팀이 들어선 이래 비교적 침착한 대응을 하고 있는 점은 다행이다. 그러나 엊그제 일부 시장개입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환율을 몇십원 더 낮추는 데 힘을 소모할 때가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 유지와 통화스와프 확대 등을 통해 가용 외환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펼치는 속도전이 불안하다.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고 조기 달성을 위해 밀어붙이기 식으로 대응한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책의 내용이 ‘성급한 대응’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염주영 이사대우·멀티미디어본부장 yeomjs@seoul.co.kr
  • [씨줄날줄] 약탈 문화재/함혜리 논설위원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명성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소장품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실상 이 소장품들 대부분은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렸던 제국주의 시대에 이집트나 그리스, 이탈리아,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약탈해 온 전리품들이다. 문화재 피강탈국들은 강탈국을 상대로 빼앗긴 유물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노력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약탈된 문화재도 유산이며, 국유재산은 반환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파리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이브 생로랑 소장품 경매에 청나라시대 토끼와 쥐머리 청동 동상이 경매품으로 나오면서 약탈 문화재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인 위안밍위안에 있던 12지신상을 1860년 중국을 침략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반출했는데 이중 쥐머리와 토끼머리 조각상이 경매에 나온 것이다. 중국 정부는 크리스티 및 프랑스 정부에 경매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에 반발한 중국인 수집상이 청동상을 고가에 낙찰받은 뒤 약탈 문화재라는 이유로 대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분쟁에서 가장 많이 원용되는 규정은 유네스코가 지난 1970년 채택한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이다. 하지만 이는 1970년 이후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에만 적용돼 분쟁해결에는 한계가 있다. 이탈리아 라치오 지방행정재판소의 판결은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국제분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 재판소는 2007년 4월20일 판결을 통해 ‘문화재를 그 맥락으로부터 이탈시키지 않는 정책’을 이탈리아의 전통적 정책으로 확인하고 이탈리아가 식민지배 시기에 약탈해 온 리비아 문화재를 본국에 돌려줬다. 우리나라도 1991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요구했지만 외교적 현안으로 남았을 뿐 진전이 없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는 20여개국에 모두 7만 6143점에 이른다. 적극적인 문화재 환수 노력이 아쉽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中 토끼·쥐머리 청동상 낙찰받은 중국인 “경매대금 지불 안할것”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지난달 2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 위안밍위안(圓明園)의 토끼와 쥐 머리 청동상 2점을 3149만유로(약 600억원)에 낙찰받은 익명의 전화 응찰자는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의 문화재 수집상 차이밍차오(蔡銘超)로 밝혀졌다. 중국 문화부가 약탈된 문화재를 회수하기 위해 2002년 설립한 중국해외문물환수전용기금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1860년대에 약탈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낙찰 대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파문이 예상된다. 그는 또 “모든 중국인들이 당시 이렇게 행동하고 싶었을 것이며 다행히 내게 낙찰 기회가 와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낙찰자가 대금 지불을 거부함에 따라 주최측 및 소장자측의 대응과 두 유물의 향후 처리 방식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차이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뉴셴펑(牛憲鋒) 해외문물환수기금 부총간사는 “우리 기금은 입찰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압력과 위험에 직면했다.”면서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경매를 유찰시키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경매에서 2점의 유물이 익명의 전화입찰자에게 낙찰된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낙찰자의 신원과 관련,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앞서 차이는 2006년에도 홍콩에서 열린 명나라 시대의 불상 경매에 참여해 1억 1600만 홍콩달러(약 234억원)에 낙찰받는 등 희귀 중국 문화재 회수에 진력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stinger@seoul.co.kr
  • [이주헌의 캔버스 세상] 문화재 약탈행위 엘기니즘에 대하여

    [이주헌의 캔버스 세상] 문화재 약탈행위 엘기니즘에 대하여

    청나라 원명원에 있다가 약탈된 중국 문화재의 경매로 인해 중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중국 네티즌은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중국 당국은 경매를 주관한 크리스티의 중국 내 활동에 제한을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문화와 예술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현실 속의 문화와 예술은 늘 권력과 돈에 생채기를 입는다. 문제가 된 청나라 문화재는 청동으로 만든 쥐머리와 토끼머리 상이다. 12지상의 일부인 이 청동상의 디자이너는 예수회 신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로 여겨진다. 그는 건륭제를 위해 서양루(西洋樓)를 짓고 인공분수인 해안당(海晏堂)을 만들었는데, 12지상을 설치해 매 시간 돌아가며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했다. 그 중 두 마리의 청동상이 이번 크리스티의 이브 생 로랑 경매에 나와 수수료를 포함해 도합 3140만 유로,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600억여 원에 낙찰된 것이다.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가 되어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나라 사람들은 공분을 느낄 일이나, 프랑스 법원은 이 경매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나라들 사이에서 오래 전에 발생한 ‘문화재 강도질’은 법적으로 문제삼기 어렵다는 게 서양 나라들의 대체적인 입장이다. 이런 약탈행위를 ‘엘기니즘(elginism)’이라고 부르고, 이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엘긴의 변명(Elgin Excuse)’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의 어원이 된 이는 토머스 브루스 엘긴 백작으로, 19세기 초 오스만튀르크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낼 때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이 약탈 행위에 대해 당시 영국 내에서도 비난이 일었지만, 결국 영국박물관이 이를 사들여 오늘날 핵심 소장품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는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로 신음하던 시절 빼앗긴 것이니 이제는 돌려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은 자신들이 보관하지 않고 아테네에 있었다면 이 조각들은 지금쯤 엄청나게 파손되었을 거라며, 이제 돌려 주어 봤자 신전에 다시 설치하기 어려워 결국 아테네의 박물관으로 가야 할 터이니 세계인이 보다 많이 볼 수 있게 자신들이 계속 수장하는 게 훨씬 낫다는 입장이다. 전형적인 엘긴의 변명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제2차 아편전쟁 때 원명원의 파괴와 약탈을 명령한 사람이 이 엘긴의 아들 제임스 브루스 엘긴 백작이라는 것이다. 오늘 중국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쥐머리와 토끼머리 상의 유랑 생활이 바로 그에게서 비롯된 셈이니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과거사를 되돌릴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당장은 없다는 것이다. “경매에 나왔을 때 사가는 게 가장 좋은 문화재 환수 방법”이라는 서구 경매사들의 발언이 얄밉더라도 어쩌면 이는 진실이다. 문화민족은 다른 무엇보다 문화재를 지키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된다. 미술 평론가
  • ‘반환 논란’ 中청동상 결국 팔렸다

    │파리 이종수·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 정부가 반환을 요구하며 논란을 일으킨 쥐머리, 토끼머리 청동상이 25일(현지시간) 폐막된 이브 생로랑 소장품 경매에서 각각 1400만유로(약 270억원)에 팔렸다. 경매를 주관한 크리스티측 발표에 따르면 두 청동상은 익명의 전화 입찰자에게 낙찰됐다. 낙찰가는 당초 전문가들이 예상한 800만~1000만유로를 크게 웃돈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두 청동상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경매 직후인 26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문화재는 원 소유국에 귀속돼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을 위배한 이번 경매의 책임은 전적으로 경매 주관사인 크리스티에 있다.”며 “앞으로 중국 당국은 국제사회의 공약과 중국의 국내법을 준수하면서 불법적으로 빼앗긴 중국 문화재를 찾아오는 데 적극 노력하겠다.”고 주장했다. 중국 유학생 수십명도 경매가 열린 파리 그랑팔레 앞에서 약탈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며 항의했다. 두 유물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이 끝난 뒤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인 베이징의 위안밍위안(圓明園)을 파괴하고 약탈해 간 청동 12지신상 중 쥐머리, 토끼머리 청동상. 지난해 6월 타계한 디자이너 생로랑이 소장해 왔다.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 중국측이 경매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으나 파리지방법원은 기각했다. 한편 이번 경매는 ‘세기의 경매’라는 평가에 걸맞게 다양한 신기록을 쏟아냈다. 일단 경매에 내놓은 이브 생로랑의 소장품 가격(2억 600만유로)이 개인 소장품 경매로는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런 만큼 낙찰가도 모두 3억 7350만유로(약 7830억원)로 엄청나다. 이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야수파의 대가 앙리 마티스의 유화 ‘푸른색과 핑크빛 양탄자 위의 노란 앵초’로 3590만유로에 팔렸다. 이어 이탈리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희귀 목재 조각품 ‘마담 L.R.’는 2920만유로, 아일랜드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의 안락의자 작품인 ‘용’(龍)은 2190만유로, 피에 몬드리안(1872~1944)의 작품 ‘파랑, 빨강, 노랑 그리고 검정의 조화’는 2160만유로에 각각 팔렸다. 이브 생로랑의 연인이자 동업자로서 이번 경매에 소장품을 내놓은 피에르 베르제는 “정말 행복하다.”며 “모든 낙찰자들은 이번에 산 예술품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밝혔다. vielee@seoul.co.kr
  • 佛-中 문화재 반환 충돌

    佛-中 문화재 반환 충돌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지난해 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면담한 이후 급속히 냉각된 중국과 프랑스 관계가 19세기 제국주의 침탈과정에서 사라진 위안밍위안(圓明園) 유물의 경매 문제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약탈 유물은 즉각 중국측에 반환돼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술품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와 소장자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1936~2008)측이 예정대로 23~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물 경매를 진행하기로 하자 중국인들의 반(反)프랑스 감정이 들끓고 있다. 프랑스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경매 기간 중 경매중단을 요구하면서 시위에 나설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인 변호사 81명으로 구성된 ‘유물반환 공익소송단’이 19일 프랑스 법원에 제기한 경매중단 소송 재판이 23일 오전에 열릴 예정이지만 원고의 적격성 문제 등 때문에 프랑스 법원이 중국측 손을 들어줄지는 불투명하다. 소장자측의 경매 강행 입장은 매우 완강하다. 이브 생 로랑의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주는 “나는 법에 따라 유물들을 취득했고, 법에 따라 완벽하게 그 권리를 보호받고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경매중단 및 반환을 요구하는) 중국측 얘기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22일 보도했다. 그는 또 “중국이 인권 문제를 인정하고,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한편 달라이 라마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언제든 중국측에 유물을 돌려줄 준비가 돼 있다.”며 중국의 ‘아킬레스건’을 자극했다. 이번 경매에 출품되는 이브 생 로랑과 베르주의 소장품은 모두 700여점. 문제가 된 위안밍위안의 토끼와 쥐 머리 조형물 2점은 현지시간으로 25일 오후 늦게 경매에 부쳐질 것으로 알려졌다. 주최측은 위안밍위안 유물들의 낙찰가를 각각 1000만유로(약 190억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인 위안밍위안 분수대에 장식돼 있다가 1860년대 영국, 프랑스 군대의 청나라 침탈 과정에서 사라진 12 동물 머리 조형물 가운데 지금까지 중국에 돌아온 것은 5점에 불과하다. stinger@seoul.co.kr
  • 佛 화해 시도에 中 “사과부터”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진실성을 보여주라.”며 프랑스측에 화해의 전제조건으로 티베트 문제 개입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달 말 열릴 예정이었던 원명원(圓明園) 유물 2점에 대한 경매는 중국측의 강한 반발로 결국 무산될 전망이다.원 총리는 화해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장 피에르 라파랭 전 프랑스 총리와 10일 만나 “현재의 양국 관계 악화는 중국 책임이 아니다.”라며 ‘프랑스 귀책론’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원 총리는 또 “프랑스는 진실된 행동을 취해야 한다.”며 “중국의 핵심 관심사안에 대해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대답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중국측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만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사과 또는 티베트 문제에 대한 친(親) 중국적 입장 표명이 없는 한 양국 관계 복원이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앞서 라파랭 전 총리는 전날 중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으며, 양국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중국측에 화해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한편 경매 회사인 크리스티와 이브생로랑 가문이 원명원 유물 경매를 취소키로 했다고 중국의 반관영통신사인 중국신문 등이 보도했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인 원명원에 있던 12 동물 머리 조형물 가운데 이브생 로랑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토끼와 쥐 조형물 등 2개의 유물을 이달 말 파리에서 경매키로 했으나, 중국 변호사 80여명이 반환을 위한 공익소송단을 꾸리는 등 중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경매를 취소하고 사적인 거래를 통해 매매키로 했다는 것. 일각에서는 2007년 마카오의 카지노재벌 스탠리 호가 사재 82억원으로 말 조형물을 사들여 중국에 헌납한 형식으로 2개의 유물이 중국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약탈 과정에서 사라졌던 원명원 12 동물 머리 조형물은 지금까지 5개가 중국으로 돌아왔고, 5개는 아직 소재불명이다.stinger@seoul.co.kr
  • 존 레넌 동상 ‘반달리즘’ 횡포로 철거 위기

    스페인 남부 알메리아 시청에 설치된 존 레넌의 동상이 ‘반달리즘’ 횡포와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고 영국 매체들이 10일 보도했다. 반달리즘이란 455년 무렵, 로마를 점령한 반달족이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화재와 예술품을 파괴하려는 경향을 뜻한다. 존 레넌의 동상은 실물 크기로 제작된 것으로 언론에 공개된 현재 상태를 보면 안경과 기타 모형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종적을 감췄으며 얼굴 정면에는 페인트가 뿌려진 참혹한 모습이다. 영국 데일리미러는 레넌의 동상이 평소에도 훼손당하는 일이 잦았던 터라 관리 당국에서 유지 보수를 포기해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상을 제작한 카르멘 무다라는 “이런 짓은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반달리즘 행위와 거리가 멀다.”며 “분명한 파괴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소식을 접한 비틀즈 측 관계자는 “존 레넌의 동상을 제물로 삼은 반달리즘 무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라며 “존이 그 곳에서 2달이나 지내며 비틀즈의 명곡을 탄생시킨 과거를 잊었나.”라며 개탄했다. 1966년 당시 존 레넌은 이 도시에 칩거하며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작곡했으며 곧 철거될 동상은 이를 기념해 2년 전 세워졌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음악통신원 고달근 kodal69@gmail.com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인각사서 발굴된 통일신라 국보급 불교공예품 왜 무더기로 묻혔을까?

    인각사서 발굴된 통일신라 국보급 불교공예품 왜 무더기로 묻혔을까?

    고려시대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곳으로 잘 알려진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국보급 불교 공예품(서울신문 2월6일자 3면 보도)들은 어떻게 땅속에 무더기로 파묻혔을까. 매장의 방식이나 장소 등이 전례가 없는 만큼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매장 방식·장소 전례없어 관심 증폭 앞서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범하)는 “지난해 말 인각사 5차 발굴조사에서 금동병향로, 청동정병 2점, 청동향합, 청동이중합, 청동반자 등 통일신라시대 불교의식구 10여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된 지점은 인각사의 오른쪽으로 통일신라시대 회랑과 담장, 탑 등의 터가 드러났다. 그리고 부도로 추정되는 탑터 2~3m 지점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큰 의문점은 왜 묻었을까이다. 묻힌 장소가 지표층에서 5㎝밖에 되지 않는데다, 묻는 방식이 그리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욱 의문을 남긴다. 유물들은 둥그렇게 땅을 파서 바닥에 기와를 깔고 벽과 위쪽에 기와로 칸막이를 삼은 뒤 흙을 덮어 묻었다. 일부에서는 몽고 침입 당시 약탈이나 훼손을 막으려 급하게 묻은 것이거나, 새로운 건물이나 탑을 지을 때 땅의 신을 위로하고자 묻는 지진구(地鎭具)가 아니겠느냐는 가설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동반 유물인 기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확실한 만큼 몽고가 침입한 고려나 임진왜란 때 묻어놓았을 가능성은 낮다. 지진구라는 가설 역시, 매납 방식이 정교하지 않은 데다 유물이 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은 높지 않다. ●생전의 공양구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금속공예전문가인 안귀숙 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은 “일단은 통일신라시대에 국사(國師)급의 고승이 열반하자 묘탑을 짓고 생전의 공양구를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불교사 연구 전문가들이 더욱 연구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 길이 40㎝, 높이 10㎝의 금동병향로(銅柄香爐·금박이 입혀진 손잡이 달린 향로)는 중국, 일본에서는 몇 차례 발견된 사례가 있으나 국내에서는 두 점(삼성미술관 소장 병향로, 말흘리 출토 병향로)만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출토 지역과 성격이 명확한 것으로는 사실상 이번 것이 처음이다. 손잡이에는 사자가 조각돼 있어 765년 세워진 당나라 고승 신회선사의 신탑(身塔) 지하석실에서 나온 병향로와 유사하지만 세밀한 아름다움은 더욱 뛰어나다는 평가다. 또한 청동정병(靑銅淨甁) 2점은 그동안 고려시대의 것만 알려져 있었으나 통일신라시대 것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 점은 완벽하게 형태를 보존하고 있고, 또 한 점은 목 부분이 파손됐다. 작은 뚜껑으로 여닫을 수 있는 주구와 첨대가 달린 정병으로 유일한 통일신라시대 출토물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열린세상] ‘이기+이타’ 경제학 다시 쓰자/강지원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변호사

    [열린세상] ‘이기+이타’ 경제학 다시 쓰자/강지원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변호사

    동네 슈퍼 아저씨는 돈벌이를 위해 장사를 한다. 그뿐인가. 아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 돈벌이도 하지만 동네 주민들이 가까운 데서 실생활용품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돈벌이라는 이기적 행위뿐 아니라 좋은 물건 공급이라는 이타적 행위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이란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교환·분배·소비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제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경제현상이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이어서 여러 ‘가정’들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새삼 눈에 띄는 것이 경제주체에 관한 가정이다. 대체로 경제학에서는 경제주체들이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경제행위를 한다고 상정한다. 생산자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고, 소비자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생산의 경우를 보자. 경제학은 생산자들이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뿐일까. 생산자는 그런 이기목적의 행위 외에도 소비자에게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이타행위도 하는 것 아닌가. 만일 생산자들이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어디서 한 술 밥이나 떠먹고 차 타고 다니겠는가. 소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시 같은 논리로 소비는 자신의 효용을 얻기 위한 이기행위다. 그러나 그뿐인가. 그 대가를 생산자에게 지급해 보탬을 주는 이타행위도 된다. 유통도 마찬가지. 동네 구멍가게도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상품을 생산·교환·분배·소비하는 행위는 모두가 다 이기행위이면서 동시에 이타행위라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경제학은 이 중에서 이기적 측면만 보고 이타적 측면은 도외시해 왔다. 게다가 이같은 이윤이나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행위를 합리적 경제행위라고까지 규정했다. 그리하여 모든 이기행위에 대해 합리라는 정당성까지 부여해 주었다. 더욱이 이같은 경제학의 분석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의식화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이윤을 추구하는 자신의 행태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태까지 초래한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지금의 세계금융위기다. 그 머리 좋은 아이비리그 출신 경제전문가들의 뇌리에는 돈 놓고 돈 먹기라는 투기적 이윤추구가 합리적 경제행위라는 해괴한 망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 합리적 경제주체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의 생산, 소비를 통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는 데 그치는 존재일까.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로 상대에게 그만큼의 보탬이 되는 행위를 하는 주체가 아닐까. 이기행위와 이타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합리적 존재 아닐까. 그동안 경제학은 너무나 편파적으로 이기행위만을 가르쳐 온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경제행위란 ‘이기+이타’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그 대가관계가 균등할 때 이상적인 선(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 아닐까. 예컨대, 값싼 물건을 비싸게 팔아먹는 폭리행위, 공정한 규칙 없이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투기행위, 좋은 물건을 제값 주지 아니하고 후려쳐서 값싸게 가져 가는 약탈행위 등등, 이런 것들이 바로 이기만을 추구하는 악덕행위가 아닐까. 자본주의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이같은 이기행위들을 척결하고 ‘이기+이타’ 행위로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경제학을 다시 쓰자고 제안해야 하는 것 아닐까. 수많은 경제행위 중 그동안 묵살해 왔던 이타적 요인을 발견하고 ‘이기+이타’의 바람직한 경제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동물적인 돈 경제학이 아니라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사는 사람의 경제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강지원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변호사
  • 불타고 약탈당하고… 책의 수난사

    불타고 약탈당하고… 책의 수난사

    책의 역사는 빛나는 인류 지성의 역사인 동시에 야만의 역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은 끊임없는 박해와 약탈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55세기 수메르 점토판부터 종이책을 넘어 전자책에 이르기까지 인위적인 파괴 혹은 재난과 사고, 부식 등으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진 책의 규모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책의 수난사에서 가장 근래에 일어난 최악의 사례로는 2003년 4월 이라크 바그다드의 도서관, 박물관 방화와 약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립도서관으로 몰려들어 쇼핑하듯 원고를 가져갔다. 몰락한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약탈자들은 무방비상태에 있던 도서관 서고에 휘발유를 뿌려 책을 불태웠다. 2층의 이라크 국립문서고와 3층의 마이크로필름 문서 보관소가 잿더미로 편했다. 오토만 제국의 기록물과 법령 등 1000만건이 넘는 문서와 100만여권의 책이 사라진 이 참혹한 사건은 ‘책의 홀로코스트’로 불릴 만하다. ●수메르 점토판부터 전자책 소멸까지 베네수엘라의 도서관학자이자 저술가인 페르난도 바에스는 그해 5월 바그다드를 방문해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과 박물관의 참상을 직접 목도했다. 이때의 충격은 그의 오랜 관심사였던 ‘책 파괴’에 관한 연구에 가속도를 붙였고, 이에 힘입어 이듬해 세상에 나온 책이 ‘책 파괴의 세계사’(조구호 옮김, 북스페인 펴냄)다. 책이 어떻게 파괴되고, 사라졌는지에 대한 일종의 연대기이자 백과사전인 이 책은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시대에 매장된 점토판의 역사부터 해커의 위협에 노출된 현대 전자도서관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료에 기초해 광범위한 지식을 꼼꼼히 엮어낸다. 저자에 따르면 사라진 책의 40%는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책벌레 같은 주변 환경, 그리고 재질 자체의 결함으로 인한 것인 반면 60%는 인간의 자발적인 파괴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책 파괴의 역사만 해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중세 스페인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도서관 파괴, 유럽의 종교재판으로 인한 파괴, 나치의 도서 파괴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도서관의 폭격 등을 들 수 있다. ●책 파괴는 원초적 본능? 지배 세력이 자신들에게 위험요소가 된다는 이유로 책을 없앤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과거 중국의 법가 사상가들은 민중이 깨우치면 지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책을 불살랐고(진시황의 분서갱유),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피정복 지역의 역사와 신앙을 지우거나 바꾸기 위해 책을 파괴했다. 천년왕국설 신봉자들은 무식한 사람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며 책을 경원시했다. 철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책을 없앤 경우도 드물지 않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론을 확신해 독자들에게 옛 서적을 불태우도록 요청했고, 데이비드 흄도 형이상학에 관한 모든 책을 말살하자고 주장했다. 저자는 인류가 책을 의도적으로, 자발적으로 파괴하는 건 원초적 파괴 본능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책 한권에는 특정 문화 전체의 관념적인 유산을 내포하는 기억이 들어있는데 그 기억을 말살하기 위해 책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책을 파괴하는 사람의 성향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획일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시대착오적이고, 과시적인 요지부동의 독재적 인간”을 책 파괴자의 전형으로 꼽았다. 1만 8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책의 역사는 빛나는 인류 지성의 역사인 동시에 야만의 역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은 끊임없는 박해와 약탈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55세기 수메르 점토판부터 종이책을 넘어 전자책에 이르기까지 인위적인 파괴 혹은 재난과 사고, 부식 등으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진 책의 규모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의 국립도서관 약탈은 인류의 정신을 파괴하는 책 수난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 이라크인이 폐허가 된 국립도서관 건물 안에서 남아 있는 문서를 수거하고 있다.
  • [김문 전문기자의 인물 프리즘] 토종 막사발 전도 30년 도예가 김용문 씨

    [김문 전문기자의 인물 프리즘] 토종 막사발 전도 30년 도예가 김용문 씨

    때론 ‘무미평범’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일본의 유명한 민예연구가였던 야나기무네요시(柳悰烈·1889~1961년)는 1931년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大德寺)에 소장돼 있는 이도차완(井戶茶碗)을 본 후 감격에 겨워 이렇게 읊었다. “어디를 찾아도 이보다 더 평이한 기물은 없다.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 심상한 것이 없다. 그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가난뱅이가 보통 쓰던 사발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이 싼 물건이다. 그것은 평범, 더할 수 없는 범기(凡器)다. 흙은 뒷산에서 파온 것이다~” 막사발, 밥그릇 등 조선의 민속 생활자기를 말한다.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인들은 상거래와 약탈로 조선의 막사발을 호심탐탐 노렸다. 그러다가 임진·정유왜란을 일으켜 우리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의 상류층과 무사들의 밥그릇과 찻그릇을 만들게 했다. 이들이 만든 막사발이 지금껏 42점이 남아 있으며 그중 하나는 일본의 국보(26호)가 됐다. 다름아닌 ‘이도차완’이다. 내면의 우물을 닮았다고 해서 1578년 야부노우치 종화회(藪內宗和會)에서 명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막’ 쓰이던 질그릇이 일본 땅에서 구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보배로 여기는 원조명품이 됐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막사발을 세계적 국가브랜드로 만들었으면…” 도예가 빗재 김용문(54)씨는 지난 30년동안 우리의 막사발을 세계화하는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우선 1998년부터 매년 5월이면 어김없이 경기도 오산에서 ‘세계 막사발장작가마축제’를 11년째 개최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사재를 털어서 말이다. 올해도 5월1일부터 일주일간 중국, 일본, 타이완 등 7개국 도예가들과 함께 축제를 벌인다. 그는 또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차례에 걸쳐 중국 산둥성 쯔보시에서 막사발축제를 열어 한국의 토종을 알렸다. 그의 작품 수십점이 쯔보시 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이런 인연으로 산둥 이공대에서 객좌교수가 됐다. 올해에도 해외일정이 바쁘다. 3월초 미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지에서 현지 도예가들과 막사발 워크숍이 예정돼 있으며 9월에는 중국에서 열리는 도자박람회에도 참여한다. 터키에도 갈 예정이다. 오산시 궐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막사발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흔히 막 쓰는 사발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막장의 갱도에서 캐낸 것처럼, 조선 도공들이 오랜 숙련 끝에 마지막으로 빚어내는 밥그릇과 국그릇이지요. 종류도 옹기·분청·백자 막사발 등이 있습니다. →막사발 세계화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매년 열리는 세계막사발축제 외에도 중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호주 등과도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의 막사발(Macsabal)을 세계적 국가브랜드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합니다. →한국의 막사발은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릅니까. -역삼각형으로 돼 있으면서 안정된 모습입니다. 한국 사람만이 가진 유전자 정보를 잘 집합시켜 놓은 우리의 전통 상징물이지요. 얼마전 문화부에서 막사발을 한국민족의 100대상징물로 선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 부분에서 “그동안 우리나라는 정치와 경제논리로만 살아왔다. 이제는 우리 독자적으로 예술적 지위향상을 꾀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최근 ‘문화 예술이 살아야 나라가 살며, 문화 예술로 세계를 교류하고 세상을 즐기자.’는 취지의 ‘문화 예술 독립선언문’이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붓 대신 손가락 쓰는 ‘手畵紋 작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할 때부터 일반 대중들의 관심 밖에 있는 막사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졸업하자마자 충북 단양으로 내려가 막사발장작가마를 만들어 토우전(19 82년), 수장제(84년), 옹기전(87년), 막사발전(89년), 빗재가마 지두문전(91년), 옹기와 분청초대전(94년) 등 25차례의 개인전을 열면서 옹기와 막사발 전도에 앞장서 왔다. 아울러 1994년부터는 고향인 오산으로 옮기면서 토종 막사발의 세계화에 본격적인 기치를 내걸었다. 지난해 8월에는 시와 도자기의 만남인 ‘김용문의 막사발 시도자전’을 열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특징은 민족적이며 민중정서에 근거한 서민취향으로 옹기토와 장작가마를 사용해 천연재가 많이 드러난다. 붓대신 손가락을 사용해 수화문(手畵紋) 작가로도 유명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이곳의)가마터 일대가 도시개발지역에 포함돼 쫓겨나야 할 입장이지만 막사발 실크로드를 위해 일생을 바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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