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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청 ‘기독교 역사적 과오’ 고해

    [로마 DPA 연합] 로마 교황청은 5일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교회가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과오를 공식 인정하는 문건을 발표했다.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범죄’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총 40쪽 분량으로십자군 원정,유태인 탄압,중세고문형,신대륙 원주민 학살 등을 기독교의 과오라고 고백하고 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2일 바티칸 미사에서 이를정식으로 공개할 예정이다.다음은 기독교의 과오 내용를 요약한 것이다. ■피로 점철된 십자군 원정 교황 우르반 2세의 칙령으로 1095년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성지회복’이란 명분아래 유태인 및 회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십자군 선발대는 7만 예루살렘인 학살,콘스탄티노플·베이루트 등 도시약탈 등으로 회교권에 기독교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심었다. ■유대인 박해 몇십년 전까지만도 교회는 반유태주의를 공공연히 표방해왔다.초기 기독교도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유태인을 저주했으며,십자군 원정기에는 교회가 유태인 탄압에 앞장섰다.교회의 가장 고통스런 과거는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에 침묵했다는 점.교황청은 98년에야 나치에대한 기독교의 저항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마녀사냥 등 가혹한 형벌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중세 교회는 각종 고문형을 자행했다.12세기 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가 화형을,교황 이노센스 4세는 고문의 사용을 승인했고 15세기 마녀 화형식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교회의 고문형은 19세기나 돼서야 공식 폐지됐다. ■신대륙 무차별 학살 방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듬해인 1493년 교황알렉산더 6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고 선교등의 명분아래 이들의 정복활동을 옹호,방조했다.정복자들의 학살극으로 처음1,500명에 달하던 멕시코 원주민 수는 16세기 3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 英,나치 약탈 명화 목록 공개

    나치 독일이 약탈했다가 패전후 영국 정부로 넘어가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돼 온 미술품 350점의 목록이 최근 공개됐다. 이 그림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총리가 된 1933년부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의 소유권이 입증되지 않은 것들로,피카소·모네·드가·루벤스·반 고흐 등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109점은 국립미술관이,80점은 테이트미술관이 갖고 있다.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 리스트를 공개한 영국 정부는 보상금 지급이나 작품반환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작품을 반환하려면 의회 동의가 필요하다.
  • [외언내언] 현대판 해적

    해적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그리스 사모아스섬의 왕 포로크라테스는 기원전 6세기경 해적질로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이집트 함대를 약탈하다 살해됐다’는 서술이 있다. 10세기경 노르만족의 바이킹이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대륙까지 석권했으며 16세기 식민지 경쟁에 나선 영국과 스페인은 국왕의 특허장까지 받아 공공연히해적행위를 일삼았다. 이처럼 예전에나 있을 법한 해적들이 요즘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교역로말라카해협을 거점으로 날뛰고 있어 주변국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현대판 해적선은 16∼17세기 창궐한 서양 해적들처럼 해골 깃발은 달지 않았지만 위성통신설비에서 자동소총·로켓포까지 갖춘 현대식 무기로 상선들을 기습,선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뒤 화물과 선박을 약탈해 악명이 높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인 말라카 해협 중에서도대표적 해적 소굴인 필립해협은 폭 30㎞로 3,000여개의 섬 사이로 하루 600여척의 유조선과 화물선이 왕래해 해적이노리는 황금길목이다.지난해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285건의 해적행위 중 113건이 이곳에서 발생했을 정도다. 지난달 23일 우리선원 등 17명을 태운 글로벌 마스호가 이곳을 지나다 열흘째 통신이 끊겨 해적의 공격을 받고 실종된 것으로 우려된다.이곳에서는 2년전 텐유호가 실종돼 한국인 선장 등 13명의 생사마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당시 해적들은 선원들을 살해하고 배에 실렸던 35억원어치의 알루미늄을 약탈한 뒤 배는 개조해 선박회사에 처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적들은 고가 화물을 적재한 선박을 용케 표적으로 삼고 있어 국제조직의범행으로 추정된다.해적단은 인근 바탐섬 인력시장을 통해 조직원을 선원으로 위장취업케 해 정보를 입수,범행한 뒤 약탈물도 조직적으로 처분하는 것으로 국제해사기구(IMO)는 파악하고 있다. 공해상에서 이뤄지는 범죄행위로 인접국들이 적극 개입을 꺼리는 데다 국제범죄조직이어서 실종선박을 발견해도 범인들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해적의 범죄행위로 인명과 재산피해 등 국가적 손실도 크지만 말라카해협은원유와 수출상품의 해상로인 우리의 생명선이다. 수송로 확보는 우리의 안보와 직결돼 있고 갈수록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여 어떠한 위협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우선 국제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해양경찰 공조약정을 체결해 범행이 재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하겠다.필요한 경우 우리 함정이 출동해 국제경찰의역할을 담당하는 대양해군의 체제를 이제부터라도 갖춰야한다. 이기백 논설위원
  • 인도네시아 정국 또 불안

    인도네시아 정국이 또 불안하다.과거청산을 위해 군부실세인 위란토 장군의공직 사임을 요구하는 민선 와히드 대통령과 이를 거부하는 위란토가 팽팽히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히드 대통령은 2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방문한 영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위란토 장군은 동티모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앞서 유엔 인권조사단과 인도네시아 국가조사위원회는 지난달 31일 각각 위란토가 동티모르 유혈사태에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유엔측은 당시위란토 군참모총장이 지위하던 인도네시아군과 친인도네시아계민병대가 살인, 약탈, 방화 등을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그를 국제법정에서 기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인도네시아 조사위는 위란토와 5명의 장성 등 33명이 살인, 방화, 파괴 등을 인지했다고 지적하고 명단을 검찰총장에 제출했다. 검찰은 바로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위란토는 완강히 버티고 있다.그는 “훌륭한 군인답게 계속 싸우겠다”고사임 요구를 거부했다.각료회의에도 참석했다.그는 동티모르사태 당시 군부의 치안유지 노력을 조사위원회가 고려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그를지지하는 군변호인단측은 그가 살인 등을 ‘인지’했다는 ‘증거’가 없다고반박하고 있다. 와히드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경제개혁과 군부입김 차단을 통한 과거청산 의지를 유럽,미국 등 투자국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이 작용하고있다. 그는 “나는 위란토를 존중하지만 법이 그를 유죄로 판결한다면 그는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군부 장악 자신감도 빼놓을 수 없다.그는 “군의 90%는 나를 지지하며 그들은 내 말을 귀담아 들을 것”이라고 쿠데타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이에 따라 의회내 75석을 관례적으로 할당받고 있는군부가 어떻게 나올지가 관심거리다.위란토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대변인인 그라이토 우소도 공군중장은 2일 “군은 대통령과 정부의 어떤 결정도 지지한다”며 군부 쿠데타설을 일축했다. 박희준기자 pnb@
  • 印尼 와히드 “위란토장관 경질”

    [다보스(스위스)AFP AP 연합] 압두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지난해동티모르에서 자행된 인권유린 행위의 책임자로 비난받고 있는 위란토 전군참모총장을 경질할 것이라고 31일 발표했다.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중인 와히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2주후본국으로 돌아가는대로 위란토 안보장관의 사임을 공식 요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와히드 대통령은 “물론 위란토는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는동티모르 폭력사태에 군부가 직접 연루됐다는 보고서들이 발표된데 따른 후속조치라고 설명했다. 와히드는 ‘권력이 막강한’ 위란토가 사법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일단 사임한 후에 인도네시아 국내 법정의 심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 유엔의 국제법정회부 제안을 일축했다. 한편 위란토 안보장관은 1일 자신에 대한 사임요구를 거부하고 군참모총장재직시인 지난해 발생한 동티모르 폭력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정부 보고서를일축했다.그는 와히드 대통령의 요구대로 장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날 용의가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훌륭한 병사처럼 진실을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라며 사임 거부의사를 밝혔다. 이에 앞서 유엔 인권조사단은 31일 보고서에서 동티모르 소요사태 당시 위란토 군참모총장이 지휘하는 인도네시아 군부와 동티모르의 독립을 반대하는민병대가 살인,약탈,방화 등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이들을 국제법정에 기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날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폭력사태 조사위원회’도 검찰에 제출한보고서에서 위란토와 군 고위장교 33명이 민병대의 범죄행위를 부추기며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와히드 대통령은 위란토에게 사임을 공식 통보하지 않았지만 신문을 통해알게될 것이라면서 구체적인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이미 후임자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군부의 쿠데타설과 관련,와히드 대통령은 “물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항간의소문을 부인했다. *- 위란토 前군참모총장 탄탄가도를 달려오던 인도네시아 실력자 위란토 전군참모총장(52)의 정치적야심은 폭력사태로 폐허가 된 동티모르의 도심처럼 무참히 무너졌다. 위란토는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던 98년 봄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32년 독재를청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킹 메이커’겸 실세로 부상했다.그후 인도네시아 정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군부의 개혁 및 구조조정에 착수,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하비비 대통령 시절인 98년11월 군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위대에 발포한 사건이 승승장구하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그를 천당에서 끌어내린 결정적 원인은 그 자신 두번이나 근무했던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군의 야만적 행위였다. 유엔군의 동티모르 배치에 반대하며 동티모르에서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겠다던 그의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군과 그 사주를 받은 민병대에의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유혈폭력이 빚어져 위란토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는 결국 동티모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설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의 핵심인 그의 사법처리에 군부가 어떻게 대처할지가여전히 문제.인도네시아는 와히드 대통령 취임 이후 계속 군부 쿠데타설에 시달려 왔다. 유세진기자 yujin@
  • 日정부, 난징대학살 첫 시인

    [홍콩 연합]일본 정부가 1937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진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을 처음으로 시인한 것으로 20일 밝혀졌다. 홍콩의 위성채널인 봉황(鳳皇)TV를 비롯,명보(明報),성도(星島)일보 등은중국 신화통신 보도를 인용,일 정부 관계자가 60여년만에 최초로 일본군이난징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한 책임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성도일보에 따르면 일 외무성의 누마타 사다키(沼田貞昭) 대변인은 19일 신화통신 회견에서 “정부는 ‘난징사건이 발생한 적 없다’는 민간단체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당시 일본군에 의한 살인과 약탈행위는 부정할 수 없는사실”이라고 말했다. 누마타 대변인은 그러나 ‘난징사건 왜곡’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일본 우익단체들이 23일 오사카(大阪)에서 난징 사건의 전모를 부인하는 대대적인집회를 계획중인 것과 관련,“난징 사건에 대한 정부 인식과는 별개로 민간단체의 집회 자체를 막을 수 없다”고 말해 이들의 집회를 제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 [변혁으로서의문학과역사](46)이산하 장편연작시’한라산’

    1980년대는 필화의 활화산 시대였다.연속적으로 터졌던 각종 필화 중 가장첨예했던 사건이 장편 연작시 제1부 ‘한라산’이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제주도에서,지리산에서,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는 헌사를 앞세운 이 시는 ‘사회과학 전문 부정기 간행물’을 표방한 ‘녹두서평’ 제1호(1986.3 발행)에 게재되었다. “독자 대중은 우리의 사회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과정을 통해 구체화된 논의를 담은 출판물을 원하고 있다.독자 대중의 그러한 요구는 우리의 사회현실을 추상적이거나 반역사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명백한 거부이고,자족적이고 현실에 대해 무기력한 아카데미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며,나아가 타국의 이론에 대한 일방적인 승인의 강요가 아니라 그것의 우리 사회 현실에의 올바른 적용에 대한 요구이다”는 기치를 내건 ‘녹두서평’은 특집으로‘민주주의 혁명과 제국주의’를 다뤘는데,이것은 당시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 타도를 위한 기본과제로 보았다. 군부독재와 제국주의론을 결부시켰던 이 특집은 특히 8.15 직후 미군정의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춰 분단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폭로코자 시도했으며,그연장선에서 장시 ‘한라산’도 자리매김하도록 배치되었다.중요 논문보다 우대하여 가장 앞에 ‘한라산’을 실었던 편집 의도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연작시는 곧 미군의 분단 한국 침탈사 고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 제1부 ‘서시’ 1∼4에서는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란 구절로 알수 있듯이 미국에 대한 비판정신이 관류하고 있다.제1장 정복자 1∼5에서는8.15 직후 진주한 미군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침략 야욕을 규탄하고 있다.제2부 ‘폭풍 전야’ 1∼5에서는 1945년 9월28일 미군의 제주도 진주와,47년 3.1절 행사 때 희생 당한 한 소년,그리고 총파업과 도민들의 결연한 투지를노래한다. 제3부 ‘포문을 열다’ 1∼4에서는 4.3항쟁 횃불이 오르면서 터진 혼란상을점묘파(點描派)식으로 엮어 나간다.마지막 제4장 ‘불타는 섬’은 “미고문단 초대 단장이자 팬터곤 내에서도 극우파로 이름 높은 윌리엄 L.로버트 준장을 현지에 파견하여,대규모 중원부대를 미군 상륙함정으로 섬의 해안 곳곳에 대놓고,미국식 빨갱이 토벌전을 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제주 항쟁의 전설적 인물인 김달삼과,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열 중령은 “일본 복지산 예비 육사 동기”였던 사실.둘은 민족 내분을 멈추고자 극비 회동(4.28)을 갖고 전격적인 합의에 이르러 바야흐로 제주항쟁은 평온하게 마감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5월 6일자로 김익열은 해임,6월 18일 여수 제14 연대장으로 전임되므로써 4.28 평화안은 사그라진 채,김익열의 후임으로는 제11연대장 박진경이부임,“모두 불사르고/모두 죽이고/모두 약탈하는” 삼광(三光)정책과,“불태워 없애고/죽여 없애고/굶겨 없애는” 삼진(三盡)정책을 폈다.이 처참한진화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박진경의 암살이 뒤따랐고,그 범인은 모 하사관의 배신으로 잡혀 수색에서 처형 당했다는 데서 연작시는 끝난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많은 소설과 시 중 이산하의‘한라산’처럼 비극 그자체를 미국의 개입으로 못박는 경우는 없었던 터라 이 잡지는 이내 호된 홍역을 치뤘다.즉 강력한 단속과 시인의 구속이 잇따랐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외언내언] 我 朝鮮

    최근 재일조선인총연합회(朝總聯) 기관지 조선신보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기술한 일본 어린이용 도서‘我朝鮮’(우리의 조선)을 공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은 조총련계 역사연구가 남영창씨가 일제시대에 약탈된 조선 문화재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것이다. 책의 제목 ‘我朝鮮’에서 ‘我’는 일본을 가리킨 것이다. 한·일합방 다음해인 1911년 일본이 발행한 이 책의 내용은 조선합방의 전말 및 합방 이후의 이왕가(李王家) 처리문제를 비롯해서 조선의 지리,역사 등 총 90쪽 분량이다. 또 일본의 조선합방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천년 전부터 정해진 것이라면서 ‘기자(箕子)건국설’을 제시하며 조선의 5,000년 역사도 3,000년으로 깎아내렸다. 특히 조선에 대한 멸시의식을 유포하는 가운데 “조선은 일본천황의 정치아래 들어서야 처음으로 조선인의 행복이 이루어진다”는터무니 없는 강변으로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 침략자의 그릇된 우월감을 일본 소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으며 조선민족에 대한 철저한 모멸감을 고취시키는 패권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식민정책의 치밀함과 교활함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안고 있다. 100여년 전 일본이 펴낸 ‘我朝鮮’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위해 온갖 흉계를 꾸미고 있을 때 우리 선조들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사색당파 싸움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운명을 좌초시킨 결과를 초래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세기 초 세계적인 변혁의 거센 조류가 동아시아로 이동해올 때 일본은 과감하게 개혁과 개방을 수용,근대화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를 포함하는 대동아공영권의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로 부상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이 수구적인 폐쇄성을 탈피하고 좀더 진취적인 개방을 선택했더라면 일제의 강점과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는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일본의 ‘我朝鮮’ 공개를 계기로 우리가 다져야할 교훈은 진정한 의미의 극일(克日)의식을 갖추는 일이다. 한·일관계가 호혜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500여명의 일본인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새로운 각오가 절실히 요청된다.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거주지번을 독도로 옮겨놓는 현실상황에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극일이 요원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장청수 논설위원
  • 佛해군이 태운 외규장각 도서 4,700여권 달한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이 불태워 없애버린 강화도 외규장각 서적은 4,700여권(책)이며 이 중 800여권은 유일본인 것으로 밝혀졌다. 3일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국사학과)교수는 대한국제법학회 학술대회(4일)에 발표할 논문을 통해 당시 외규장각에는 도서류 1,007종 5,067권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따라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 현재 한국과 프랑스간반환협상 대상이 되고 있는 문건 350여권 외에 프랑스군이 불태워 멸실시켜버린 서적은 4,800권에 육박한다는 것이다.특히 이때 방화멸실된 도서 문화재 가운데 영조가 손수 쓴 시문 25종과 함께 의궤 125종 224권,의궤 외 도서65종 598권은 외규장각에만 있는 유일본이라고 이교수는 밝혔다. 그동안 외규장각 소장도서 규모는 “6,000여권 가량 된다”고 추정되어 왔는데 이교수는 1857년 양요 9년전에 작성된 ‘정사 외규장각형지안’을 분석해 이같은 정확한 규모를 파악했다고 말했다. 김재영기자 kjykjy@
  • [김삼웅 칼럼] 이 나라가 뉘 나라인데

    두 시골 선비가 현의 성문 앞에 와서‘신명정(申明亭)’의 ‘신(申)’자를보았다.한 사람이 말했다.“유(由)자다”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갑(甲)자다”그러자 옆 사람 하나가 말했다.“자네는 머리 하나를 더 달았고, 저 이는 다리 하나를 더 달았다.보아 하니 역시 전(田)자다.” 부분만을 보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 부리는 것을 풍자한 ‘정선아소(精選雅笑)’에 나온 이야기다.우리 국정조사와 청문회 꼴이다. 뭇 동물이 근심과 절망감에서 회의를 마치고 퇴장하려는 순간에 가장자리에서 아주 명랑한 어조로 “저는 아무 걱정이 없어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모두들 놀라 돌아보니 하루살이였다.내일이면 지구의 종말이라는 소식에 대책회의가 열린 마당에서 일어난 소극으로 요즘 학생들 사이에 나도는 ‘썰렁한’이야기다.‘내일’을 모르는 우리 하루살이 정치인들을 풍자한다. 옛날 제나라 환공이 들에 유람을 나갔는데,망한 나라의 옛 성터인 곽국(郭國)의 폐허를 보고 촌부에게 물었다.“이곳은 곽국의 폐허입니다”환공이 말했다.“곽국의 성이 어찌하여 폐허가 되었는가?”촌부가 말했다.“곽국은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환공이 물었다.“선을 좋아하고악을 미워하는 것은 잘한 일인데, 그것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니 무슨 말인가?”촌부가 답했다.“선을 좋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습니다.그런 까닭에 폐허가 된 것입니다.” ‘신서(新書):잡사’의 ‘곽국의 성터(郭國之墟)’에 나온 고 사다. “선을 좋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정곡을 찌른다. 바다에 오적(烏賊)이라는 고기가 있다. 이놈은 먹물을 뿜고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데,남이 자기를 볼까 걱정하여 먹물을 뿜어 자기를 숨겼다. 바닷새가 이를 보고는 이상하게 여기다 그 안에 고기가 숨어 있음을 알아 채고는 고기를 잡아 냈다.아, 아! 헛되이 몸을 숨겨 안전을 구할 줄 알았지만, 흔적을 없애 의심받지 않게 할줄은 몰랐던 고로 들키고 말았다. 오적어설(烏賊魚說)’에 나오는 우화다.옷사건,파업유도사건,정형근의원 폭로사건,서경원 전의원 고문사건,DJ 1만달러 수수 조작사건 등을 지켜보면서‘인간 오적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하루살이에게 얼음이야기를 하지말고, 우물 안 개구리에게 산불 이야기를하지말라 했다.‘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자 (葦管窺天)’와는 더불어 담론하지 말라 일렀다.옛 선사(禪師)의 게송(偈頌) 한 토막. 不知明日之鷄 但知今日之卵 내일의 닭을 모르고 오늘 달걀만 아는가. 솔개가 참새를 쫓자 참새가 스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스님은 손으로 참새를 쥐고 말했다.“아미타불, 내 오늘 고기 한덩어리 먹게 되었구나. ”참새는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스님은 참새가 죽은 줄 알고 손을 폈고 참새는 즉시 날라갔다.그러자 스님은 말했다.“아미타불,내 오늘 너를 방생했노라.” 간지와 교활과 언어의 유희를 통해 양비론을 펴는 이성(理性)의 약탈자들,소잡아 먹는 권력에는 침묵·방조하고 계란 깨뜨리는 권력에는 이성을 잃은지식인들의 양면성을 고발하는 우화다. 어떤 사람이 큰 기러기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하다가 말했다.“잡으면 삶아 먹어야지” 그 아우가 다투어 말했다.“고기는 삶아 먹는 것이 마땅하나 날아다니는 기러기는 구워먹는 것이 마땅해요”형제는 다툼을 그치지 않다가 고을 수령을 찾아가서 판정을 청했다.수령 왈 “기러기를 반으로 갈라 각각 굽고 삶으라”고 했다. 잠시후 기러기를 찾으니 이미 하늘 높이 멀리 날아갔다. 〔'응해록(應諧錄)'〕 여야의 진흙밭싸움,특검의 내분,정치인들의 ‘아니면 말고’식의 끝없는 폭로, 표류하는 국회,‘기러기’는 저만치 날아가는 데 끝모르는 쟁론으로 20세기를 보내는가.“이 나라가 뉘 나라인데.” 주필
  • 인도, 세기의 자연재앙‘속수무책’

    인도가 엄청난 자연의 재앙에 직면,속수무책의 상황에 놓였다.지난달 17일강력한 사이클론이 인도 동부 오릿사주를 강타,147명의 사망자를 낸데 이어29일 부터 또다시 시속 260㎞의 강풍과 비바람을 동반한 ‘슈퍼 사이클론’이 엄습,1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시에 발전및 송전시설의 피해로 전력공급이 끊기고 대중교통 통신수단이완전 두절됐으며 콜레라 등 전염병이 발생하기 시작,주전체 인구 3,200만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집을 잃고 식량부족과 병마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인도 바지파이 총리는 긴급재난사태를 선포,6,900만 달러의 구호자금을 푼다고 했지만 강풍과 계속되는 폭우로 정부기관과 구호단체의 현장접근이 어려워 구호품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실정이다.월드비전과 적십자사등 국제 구호단체들도 인터넷 모금운동을 벌이고 현장에 요원을 급파하는 등 지원에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못한 수만명의 주민들이 구호차량을약탈하는 등 치안부재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주도인 부바네샤와르에서는주민들이 정부 소유 슈퍼마켓을 약탈하기도 했으며 주민들은 “정부는 우리를 버렸다”고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이 지역에 투입된 5만여명의 군인들은 구호작업과 함께 구호차량을 굶주린 주민들로부터 보호하는게 주 업무로 변했을 정도다. 가장 피해가 심한 파라디프에서는 군인들이 불도저로 진흙에 묻힌 주검들을발굴,트럭으로 운반하고 있다.여기저기서 물속에 잠긴 사람과 가축들의 주검으로 인한 오염된 물로 설사,콜레라 증세를 보이고 있다.월드비전의 한 요원은 “도시 전체가 주민들이 태우는 타이어 냄새와 시신 썩는 냄새로 가득,지옥과 같다”고 전했다. 기르다르 가망 주 총리는 “지난 71년 약1만명의 사망자를 낸 사이클론을 능가한 사상 최악의 사태”라며 연방정부에 지원을 호소했다.구조에 참가한 한군장교는 “희생자가 2만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이날 2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텐트 등 구호품 지원을 약속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Q채널 오늘밤9시 방송…동티모르의 오늘 생생한 르포

    전투병 파견문제로 국회에서도 격론이 일었던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지난달 5일 전후 긴박했던 상황이 생생하게 방영된다. 다큐전문 케이블TV Q채널(25)은 한 비디오 저널리스트(VJ)가 동티모르의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진행되던 8월20일 현지에 들어가 보름넘게 취재한 ‘VJ현장르포-동티모르 독립,그날 이후’를 8일 밤9시에 내보낸다. 이번 취재는 공중파 방송이 놓친 현장을 VJ가 메웠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동티모르 사태에 관심을 갖고 3년전부터 취재해 온 VJ 금강석씨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거둔 개가라고 할 수 있다.VJ는 기획에서 연출,촬영,편집을 모두 혼자서 해내야 한다.금씨는 이번 프로에서 직접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중계한다. 동티모르는 지난달 30일 24년간 식민지배를 받아온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78.5%의 지지율로 독립이 확정되자 반대파 공격이 시작됐다. 이 프로그램은 동티모르인들이 어떤 상황에서 독립투표를 치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소요가 격화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특히금씨가 동티모르를 떠나기 하루 전인 지난달 4일 반대파가 해외 취재단 100여명이 묵고 있는 마코타 호텔에 총격을 가하고 인도네시아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장면은 긴박했던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금씨는 독립파 진영의 건물에 몰래 들어가 카메라를 설치해 독립반대파가 물자를 약탈하는 장면을 담는 데도 성공했다. 공중파 채널도 이 프로그램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병선기자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대만 지진 이모저모

    [타이베이 타이중 외신종합] 지진참사로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여진까지 계속되자 타이완섬 전체가 공포에 질린채 이틀째 밤을 세웠다.22일부터 국제사회의 지원이 답지하면서 구조 및 구호활동이 본격화됐지만 정전,단수,교통두절의 절박함과 가족을 잃은 슬픔마저 겹친 10만여명의 이재민들은망연자실한 모습들이었다. ■올해 초 대형 지진을 예고한 바 있는 타이완(臺灣) 지진학자들은 지아이(嘉義)현과 먀오리(苗栗)현에도 대형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이날 경고했다.국립타이완과학기술대학의 섀넌 리 교수는 “대지진이 발생할 장소는 난터우가 아니라 지아이현이라는데 이의가 없었다”고 밝혔다. 리 교수는 타이완 남서부 지아이현에는 30∼50년을 주기로 큰 지진이 발생해 왔으며 “지아이현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강도는 난터우 지진에 못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1,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난터우(南投)현에는 이날 수많은 시신을 분주히 병원으로 실어 나르고 있으나 영안실이 부족해 시신들을 파란색 비닐시트로 싸 도로 한켠에 계속 내려 놓고 있다. 섭씨 27도의 기온에다 정전으로 도로에 내려놓은 시신은 물론이고 영안실에있는 시신들도 부패하기 시작,악취마저 진동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실종 가족을 찾기 위해 시체를 싼 비닐 시트를 차례로 들춰보고 있고 그 옆에는 새로운 시신을 실은 구급차들이 속속도착했다. 한 남자는 “형이 부모를 찾기 위해 4시간동안 손으로 건물 더미를 치워낸끝에 숨진 80세 노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타이베이(臺北)시는 시내 중심가 신이루(信義路)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정전된 가운데 밤이 되면서 수천명의 이재민과 옥내에 있기가 두려운사람들이 임시 수용소로 몰려들었다.시내의 거의 모든 식료품점은 약탈당한것처럼 보였다.건물 잔해 제거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는 남편이 건물더미에 매몰된 한 여성이 승용차에 계속 머리를 짓찧으면서 “그이 없이는살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다. ■이날 새벽 다시 강력한 여진이 수 차례 발생하자 혼비백산한 주민들은 또다시 거리로 뛰쳐 나왔으며 일부 여성들은 도로에 엎드리거나 나무 등 고정물을 붙들고 움직일줄 몰랐다. 대피할 곳도 없는 생존자들은 공터,공원,자동차 안에서 밤을 지새며 추위에 떨었다.르웨탄(日月潭)지역 등의 주민들은 가옥과 인근 학교 등 대피 시설로 이용 가능한 건물마저 파괴되자 도로에서 잠을 청했다. ■타이완 각지의 종교,시민 단체들이 보내온 쌀,담요,의약품 등 구호 물품들이 일부 피해지역 주민들에게는 전달되고 있으나 많은 지역은 교통이 두절돼 전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중부의 몇몇 마을은 밤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전체 건물의 98%가 파괴된 진앙지 인근 푸리를 중심으로 반경 30㎞ 지역에는 의약품과 식료품 공수 및 부상자 수송을 위한 헬기 운항마저중단돼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야 했다.구조대원들의 접근도 어려워 주민들이직접 맨손으로 땅을 파며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도 내년 3월 치러지는 총통선거에 출마하는 ‘빅 3 후보’들은표밭 갈이를 계속했다.이재민과 유가족들을 찾아 위로하는 한편 언론 매체의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 구조작업 현장도 빠짐없이 챙겼다. ■한편 타이베이시내 하얏트 호텔은 21일 밤 타이베이 전체가 암흑속에 빠져있음에도 불구, 비상 전력을 공급,불을 밝힌뒤 2층 식당에서 음악 연주회까지 열어 주민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됐다.
  • 동티모르 참관단장 민병대만행 목격기

    지난 8월30일 주민투표이후 3주동안 동티모르는 무법천지였음이 드러났다. 친(親)인도네시아 민명대는 인도네시아 경찰과 군의 묵인하에 독립지지파 주민들의 머리에 총을 쏘고 도끼를 휘둘렀으며 약탈과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카터센터 동티모르 참관단 공동단장인 브렌트 프레스턴과 나세르,딜리라는가명을 쓴 두 목격자들이 전하는 민병대와 인도네시아 군·경의 만행을 미국의 유에스에이 투데이가 20일 보도했다. 프레스턴은 지난 5일 자동소총 소리가 콩볶듯이 들리는 가운데 17명의 감시단 직원과 5명의 어린이를 4대의 차량을 이용,철수하려했다.딜리 공항에 차가 도착하자 무장 민명대가 직원을 내리게한 뒤 한 직원을 도끼로 내리쳤다. 군인들은 이를 보면서도 웃기만 했다. 나세르(30)와 샌디(28)는 2,500명의 주민이 피신해있던 카를로스 벨로 주교 관저를 덮친 민병대의 잔혹무도함에 몸서리를 친다. 9월6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경찰 사이렌이 울리고 곧바로 20∼30명의 민병대가 주교 관저와 근처의 적십자 건물에 들이닥쳤다.일부는 사제총을쏘기도했고 일부는 기름을 주교관저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리저리 달아나던 30여명이 작은 방안으로 몰렸고 민명대들이 이들을 마당으로 끌어냈다.계단에는 이마에 총알구멍이 난 12∼13세로 보이는 여자아이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마당에서는 한 남자가 죽은 아이 시체를 안고 있었다.그의 팔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 아기는 머리에 총을 맞고이미 숨져 있었다.족히 30∼40명은 죽었다. 경찰은 민병대가 총쏘기를 멈추자 도착했다.그들은 벨로 주교를 구금했고생존자들의 사진을 촬영했다.그날 늦게 경찰은 민병대와 협력해 피난민들을차량에 꽉꽉 채워 서티모르로 보냈다. 7대의 수송차량에 실린 67명의 난민은 15명의 민병대의 ‘호위’를 받았다. 서티모르 아탐부아로 가는 3시간동안 6∼7곳의 민병대 검문소를 지나쳤다.이름과 사진이 붙은 명단을 갖고 있던 민병대는 난민을 일일이 조사한뒤 차량을 통과시켰다. 민병대들은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인 ‘코파서스’ 장교의 지시를 받았다. 박희준기자 pnb@
  • 동티모르 파병 국군…특전요원등 420명선

    국제평화유지군(IPF)의 일원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될 우리 군 보병부대는 무장 민병대의 주민학살 저지,난민 호송,특정지역 방어 등의 임무를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은 19일 동티모르에 파견될 보병부대의 임무 등과관련,이같이 밝혔다. 보병부대는 기본적으로 지난 15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명시된 대로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전 회복 ▲유엔 동티모르 파견단(UNAMET)의 임무수행 지원및 보호 ▲인도적 구호활동 지원 등의 임무를 띤다.그러나 수만명의 무장민병대가 무차별 학살을 저지르고 있는 현지 상황을 고려해 보병부대는 검문·순찰 등을 통해 민병대와 비무장 주민간 접촉과 충돌을 방지하고 특히 주민에 대한 살인·방화·약탈 등 범죄행위를 저지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또 난민들이 위험지역을 탈출하도록 호송하고 요인을 보호,거점을 방어하는 임무도 맡게 되며 다른 나라에서 파견된 다국적군과의 연합작전도 수행하게 된다. 조장관은 그러나 민병대 소탕이나 전투는 파병부대의 임무가 아니며 자위권차원에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기 사용이 제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임무 특성과 현지 기후 및 지형조건 때문에 파병부대는 고도로 훈련되고 악조건 극복능력이 뛰어난 특전부대를 모체로 250여명 가량의 경보병요원과 의무·공병·수송·통신 등 170여명의 지원요원 등 420여명 규모로편성된다.또 동티모르 민병대들의 무장공격에 대비,효율적인 치안활동을 펴기 위해 K1소총과 유탄발사기·조명탄 등 기본 휴대장비 외에 박격포와 장갑차 등 공용화기를 해군 수송함편으로 현지에 보낼 계획이다. 우득정기자 djwootk@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7)海商王 장보고(상)

    841년 11월 중순 어느 날.한반도의 남쪽에서 빛나고 있었던 ‘동아지중해의 진주’인 청해진이 역사에서 사라지고,그 주인인 장보고는 암살돼 영웅의일생을 마쳤다. 장보고는 현재 완도군에 있는 한 섬에서 태어나 차별받고 자란 섬사람이었다.아명이 ‘궁복(弓福)’인 그는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배를 타고 당으로 건너갔다.그때는 관리와 귀족,승려,상인들도 많이 건너갔다.가난을 피해 외국으로 이민가는 서해 연안의 농민이나 어민들도 많았다.당군의 초급장교가된 장보고는 역설적으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일가가 일으킨 대당전쟁을 토벌하는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으로 출세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멸망후 요동에서 산동으로 옮겨와 그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이었다.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로 발해 및 신라의 교역을 통제하였다.동족인 발해와는 황해북부항로를 이용하여 상당한 규모로 군마교역을하면서 부를 축적했다.그는 산동지역의 해양권과 대운하의 주변을 장악하면서 당을 경제·정치적으로 위협하다가 제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오랫동안 전쟁을 했으나 결국 819년에 패하면서 55년에 걸친 역사는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유민사회는 전환을 맞았으며,신라와 당의 관계는 보다 원활해졌다.이 시기에는 대운하와 황해연안주변에 재당 신라인들이 집단거주지를이루었으며,황해를 건너다니며 교역을 하였다.장보고는 이들을 조직화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갔다. 당의 고급장교로 신라변방의 해양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거대 해상(海商)으로 커가던 장보고는 당시 국제질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세계는 군사적 대결에서 경제협력 중심으로 변화하였고,교역이 질서변동의 핵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지중해와 페르시아의 물품들이 대상길과 해상길을통해서 중국에 수입됐고,다시 더 큰 이익을 위해 신라와 일본으로 수출됐다. 마찬가지로 신라와 일본의 토산물이나 공산품들도 당에 수출되었다. 산업이 발달한 신라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수출해야 했다.당시 육로는 폐쇄돼 있어,열린 길은 해로 뿐이었다.때문에 각 나라는 물류망을 장악하고,해양력을 강화하는 일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장보고가 시대변화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몇가지 상황이 조성되었다.당시 동아지중해에는 당과 신라,일본의 해적이 횡행하고 있었다.해적들은 일종의 무장상인(武裝商人:armed-merchant)으로 그 실체가 분명하지못했다.다국적군으로 이뤄진 해적은 선박을 공격하고,교역을 방해하며,심지어 노예무역까지 하였다. 때문에 해로망을 이용한 교역을 통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당상인 신라상인 일본상인들에게 해적은 제거의 대상이었다.각 국은 해양방어체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현실에서 대규모 해군을 편성해 해적선을 토벌할 능력이없었다.때문에 상인과 정부는 무정부 상태인 황해에 무장력을 갖춘 해상관리자가 나타나 해적을 퇴치,바다를 평정하고,교역로를 보호해주길 바랐다. 한편 당에는 해적들에게 잡혀온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와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당은 법으로 이를 금할 정도였다.장보고는 신라에 노예약탈을 방지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웠다.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으며,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서해와 남해에서 발호하는 해상세력들을 통제하는 일이 시급했다.또 교역상의 이익을 국가가 환수하는 한편 보다 국제화되고,정치적인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국의 해상세력을 키워야만 했다. 이렇게 다이나믹한 국제환경과 신라내부의 필요에 의하여 장보고는 828년에 귀국,‘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책으로 해양과 관련한 전권을 부여받으면서 동아지중해의 ‘해상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라이샤워 설)이 되어갔다. 그는 해적을 퇴치하여 바다를 안녕시켰다.황해 연안에 퍼져 있던 재당 신라인들을 체계적으로 조직,거주지역,물품생산,교역과 해상운송 등을 효율적으로 운영했으며,법화원(法華園)같은 종교시설을 마련,정신적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다.특히 본거지를 군항이며,자유무역항(金成勳설)으로 만든 청해진에 두어 재당신라인과 본국의 신라인을 동시에 관리하고 조정했다.제조업,상업,운송업,삼각 중계무역,보세가공업,문화교류,이데올로기 전달 등을 ‘해양’이라는 시스템속에서 운영하였다. 장보고는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를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에 실어 파견하였으며,구(毬:페르시아산 담요) 자단(紫檀:자바 등의 향목) 향(香:수마트라산 향료)등 고가품을 수입해 신라귀족들에게 팔았다.또 일본을 방문,현재의 후쿠오카에 지점을 설치하고 ‘회역사(廻易使)’란 무역선을 보내 사무역(私貿易)은 물론 공무역까지도 시도하였다.이 때문에 엄청난 무역 역조현상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장보고는 무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상권을 장악하면서 신라인의 저력을 동아지중해에 실현시켰다.그는 오늘의 의미로 볼 때 좁은 신라땅을 극복하고 해양을 매개로 NET(자연스러운 영토.Natural Economic Territory)로만들었다.그는 또한 군산상(軍産商)복합체를 실현시켰으며 가문이나 혈통,학문적인 배경없이 탐험정신 하나로 해외로 진출,사업에 성공한 벤처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질서를 두려워한 신라의 보수적 중앙귀족과 장보고선단의 해상권 장악을 억제하려는 세력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장보고의 깨진 꿈과 함께 우리는 동아지중해의 주인자리를 앗겨버렸다.장보고는 바다를 향해 진출하려는 현재의 우리에게 ‘중핵관리 역할’이라는 희망과 지도자의 한계에서비롯된 좌절을 함께 보여준 인물이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사설] 동티모르 파병 의미

    자유 독립을 지원하고 학살과 유혈사태로부터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는 일은 국제사회의 의무이자 도리이다.정부가 동(東)티모르에 파견할 유엔의 평화유지군(PKO)에 국군을 파병키로한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하고도 적절한 결정이라 하겠다.다만 유엔 평화유지군의 성격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데다 인도네시아와의 외교관계등을 고려하여 파견 규모나 방법등은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티모르에서는 지금 코소보사태를 방불케하는 참혹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다.지난달 30일 유엔의 관리 아래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 80%의 주민들이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찬성하자 독립에 반대하는 민병대의 동티모르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방화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치안유지를 위해 파견된 인도네시아군조차 학살행위를 방관하고 오히려 민병대의 만행에 합세하고 있는 것으로 외신은 전한다.의지할 곳 없는 동티모르 주민들은무참히 죽음을 당하거나 고향을 버리고 도망다니며 국제사회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다.지금까지 희생자만도 만여명에 이르고 수십만명이 피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뒤늦게나마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방침을 받아들임에따라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할 길은 열리게 됐다.유엔과 인도네시아의 협의를 거쳐 유엔 안보리의 승인이 나는대로 평화유지군이 파견돼 동티모르 주민들을 보호하고 독립 이행을 지켜볼 것이다.현재 20여개국 이상이 파병의사를 밝혔고 호주등은 이미 파병준비를 끝낸 채 대기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유엔 평화유지군의 파견으로 동티모르 사태가 모두 해결될 것으로기대하기는 어렵다.평화유지군의 앞날과 동티모르의 완전독립까지는 어려운과제가 많다.평화유지군이 민병대를 무장해제하고 동티모르의 치안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유엔 평화유지군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인도네시아 정부의 협조도 미지수다.인도네시아는 국제통화기금(IMF)위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데다 수하르토 퇴진 이후 정국마저 불안한 상황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 사태의 논의를 주도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평화와 인권을 존중하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인 우리나라의 위상으로 보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같은 맥락에서 한국군의 유엔 평화유지군 참여는 당연하다.파병에 앞서 현지의 어려운 상황을 면밀히검토하여 파견부대의 적절한 규모와 편성을 결정하기 바란다.희생 없이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파병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 BBC보도 네덜란드女기자 동티모르 수도 딜리 취재기

    영국 BBC방송은 네덜란드 여기자 이레네 슬렉트가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송고해온 현장 취재기를 7일 보도했다.슬렉트기자는 딜리 시내의 유엔 동티모르파견단(UNAMET)본부 건물에 피신해 있으면서 유엔파견단의 속수무책에분노를 나타냈다. [런던 BBC 연합] 지난 며칠 동안 끊이지 않는 총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을자지 못했다. 그동안 480명의 각국 언론인들이 동티모르에서 민병대들의 위협을 받고 철수했으며 이제 이곳에는 20명만 남아있다.UNAMET 주변 도처에서화재가 일어나고 있다. 민병대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불을 지른 뒤 우리가 도망가려 하면 사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인도네시아인들이 딜리에 건설한 모든 건물과 사회간접자본들이 체계적으로 불에 타 사라지고 있다.대학과 정부기관등 모든 것이 불에 탔다.식량과 물이 부족하다.파견단 본부 건물 내에는 이제 이틀분의 식량과 식수만 남아있다.시내 역시 모두 민병대들에 의해 불타고 약탈당하고 있다.파견단 본부 건물에는 현재 약 2,000여명이 있으며 대부분 민병대의 공격을 피해들어온 사람들이다.동티모르 주민들은 그동안 교회나 성당에서 성직자들의 보호를 받아왔으나 최근 민병대들이 이들을 쫓아냈으며 대부분 동티모르 외부로 추방됐다. 나는 이곳에서 파견단의 처사에 분노하고 있다.다가올 상황을 보지 못했던파견단은 주민들에게 주민투표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티모르인들은 투표결과가 발표된 뒤부터 민병대들에 의한 진짜 폭력사태가 시작될 것임을 수개월 전부터 경고해왔다.그러나 유엔은 이같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동티모르인들은 외국 언론인 극소수라도 남아있는 것을 안도하고 있다.이곳 딜리에서만 약 5만명이 추방됐다.파견단은 동티모르 주민중 3분의 1이 이동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이곳에 그대로 남겨져 학살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이들이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 [이어령의 새 천년읽기] 지식산업

    벌레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양분을 빨아먹고 자라는 버섯이 있다.그래서겨울에는 벌레요,여름에는 풀이라 하여 동충하초(冬蟲夏草)라고 불렀으며 천년에 한번 꽃이 핀다는 전설과 함께 불로장생의 신비한 선약으로 여겨져 왔다.오늘날에도 덩샤오핑(鄧小平)이 애용했다는 항암 면역제로 세상에 널리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희귀한 동충하초의 균을 누에에 접종하여 다량 생산하는기술을 개발했다.농가에서 그것을 기르면 같은 누에에서 고치를 생산할 때보다 10배나 더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된다고 한다.물론 사람의 손도 덜 간다. 몇 천년 동안 누에에서 비단실을 뽑아 오던 잠업의 패러다임이 바이오 테크놀로지의 첨단산업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동충하초의 작은 이야기속에서 21세기의 미래 사회를 읽을수가 있다.그것은 새 천년 준비위원회가 내건 다섯가지의 비전 가운데 하나인 ‘지식 창조’의 모델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천년 이상 잠업의 기술은 발전해왔고 나라마다 그 기술에도 차이를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일년에 한번밖에 딸 수없던 고치를 춘잠(春蠶)과 추잠(秋蠶)으로 두번 딸 수 있게 한것은 일본인이 개발한 기술이고 이상(李箱)의 말대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이‘귀족 가축’의 식성이나 생리를 바꿔 사육하게 쉽도록 종자를 개량한 것은독일인이었다. 그러나 동충하초를 다량 생산하여 생산성을 올린 한국의 경우는 잠업의 기술이 아니라 잠업,그 자체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지식기술의 산물이다.벌레가풀이 되는 이야기를 황당하다고 비웃고 누에에서 비단실이 아니라 약재를 얻는 것을 허황된 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은 새 천년의 이야기이다. ■ 벌레가 풀이되고 누에가 약이되고우리가 백년동안 서양사람들의 뒷통수를 보며 숨차게 따라온 산업문명이란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면 농장을 공장으로 바꾸는 일이었다.농장에서는 식물이던 동물이던 살아있는 생물체를 가꾼다.그러기 때문에 농산물은 씨를 받아 되풀이해서 재생산을 하게 된다.먹는 것,입는 것,사는 집이 모두 끝없이순환하는 생명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공산품은그와는 다르다.생산품의 원료도 그것을 제조하는 동력도 거의 모두가 지하에서 캐낸 광물이다.제일 먼저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을 석탄 위에 떠있는 섬이라고 불렀듯이 현대 산업문명은 어느 하나 지하자원에 의존해 있지 않은 것이 없다.그리고 그것은 에누리없이 재생산이 불가능한 무기물로서 한번 쓰면 그냥 버려야만 한다. “내가 달나라에 가서 맨먼저 한 일은 폐차장을 만든 것이었다”라고 말한우주인 에드윈 올드린의 고백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실감한다.올드린이 달 표면에 탐사차를 놓고 지구로 돌아온 순간 달은 거대한 자동차 폐차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인간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쓰레기장이 된다.그것이 우리가지금 겪고 있는 생태계 파괴요 환경오염이다. 그러기 때문에 20년 전에 로마클럽이 인류에 경고한 것처럼 지구의 자원은고갈되고 그 성장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땅의 자원에 의존해있는 농장이나 공장을 머리와가슴을 기반으로 한 지장(知場)으로 바꾸어가는 작업을 해야만한다. 로마클럽이 지구의 자원 가운데 제일 먼저 고갈하는 것으로 동(銅)을 지목했을 때 세계의 동 값은 2배로 뛰었다.일부 석유회사들은 동광(銅鑛)을 매수하기도 했다.중국이 앞으로 거대한 대륙 전역에 전화선을 깔게 되면 지구의동이 바닥이 날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한 일이다.그러나 동선보다 싸면서도 그 용량은 수백배가 넘는 광섬유가 발명되고 통신위성을 실용화하면서 그파동은 가라앉는다.최근 15년동안 동값은 잠잠하다. 자연자원의 고갈을 억제하거나 대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신소재를 발견해내거나 산업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그리고 그 신소재나 통신위성 같은 디지털 기술은 땅이 아니라 머리에서 캔다.그러니까 광섬유와 디지털 기술 상품은 농산품이나 공산품이라기 보다 지식상품에 더 가깝다. ■ 知場은 인간의 머리·가슴에농장이나 공장은 땅 위에 있다.그것을 지으려면 넓은 농토나 대지가 필요하다.생산의 자원과 동력원도 모두 땅위나 땅 밑에서 가져온다.평균 독일사람이 한햇동안 마시는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토지는 150㎡라고 한다. 소백 오렌지 등 평균 독일인이 먹는 식료품을 생산하기 위한 토지의 합계는자국 재배면적의 3배에서 4배 정도이다.만약 중국이나 인도가 독일 수준으로생활수준이 오르면 지구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장(知場)은 인간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있다.그 자원도 동력원도 모두가 머리와 가슴속에 숨어있다.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캐 써도 없어지는 일이 없고 남에게 나눠줘도 고갈하는 법이 없다.동시에 굴뚝 없이도 생산되고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고서도 버려질 수가 있다.그 지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사이버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인터넷이요 버철 리얼리티이다. 디지털 기술이 이루어 낸 정보혁명은 또하나의 신대륙과 서부지대를 제공해준 것이다.그것은 종래의 언어와 문자공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간의지적 창조활동의 영역을 무한으로 넓혀준다.더구나 그 공간은 비트로 되어있어서 유한한 아톰의 지구자원을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만약 수백만의 네티즌이 전자우편이 아니라 종이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생각해보라.하루에 하나씩 지구상에서 정글이 사라져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사회는 단순히 자원의 절약이나 억제만이 아니라 생산요소 자체를 바꿔놓는다.지식은 노동,자본,토지에 첨가되는 자원의 한 요소가 아니라 동충하초의 경우처럼 생산자체의 개념을 바꿔놓는 자원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그래서 지식사회에서는 생산개념이 창조개념으로 변하고 경제력과 군사력의 뒷바퀴 노릇을 하던 지식이 앞바퀴로 바뀐다. 보잉777의 동체부분을 깎을 때 보통 오차가 5∼6㎜ 생긴다고 한다.기계기술의 한계다.하지만 지식기술이 가미되면 그 오차를 머리카락 정도로 줄일 수가 있다.그렇게 되면 마찰열이 줄어들어 기체관리의 코스트가 내려가고 그것을 네트워크를 이용,해외 공장으로 보내면 설계 코스트의 반 이상이 감소된다.똑같은 비행기를 만들면서도 다운 사이징이나 구조조정과 같은 지식기술로 하면 생산도,관리 코스트도 전연 달라진다. ■ 사이버공간에 투자해야 기계기술에서 앞섰던 일본은 90년대초만 해도 국제경쟁력이 3위였지만 90년대 말에는 18위로 밀려났다.지식기술에서 뒤진 것이다.산업사회에서 우등생이었던 일본은 지식사회에서는 낙제생이 되고만다.경기가 한창 좋을 때 일본은 사이버 공간에 투자하지 않고 토지에다 투자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땅값으로 치면 일본 열도가 미국보다 몇배나 더 큰 버블현상을 빚고 만 것이다. 이제는 경제계에서도 문화자본(사회자본)과 같은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오늘날의 기업 경쟁력과 생산력은 토지나 공장이나 설비와 같은 하드의 자원보다 지적 능력이나 서비스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지식을 관리하는 지력(知力)만이 앞으로의 경영자에게 필요한 능력”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자면 기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기술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과지혜에 더 많은 힘이 실어주어야 한다.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자연히 부국강지(富國强知)로 바뀔 수밖에 없다.지식사회에서의 부(富)란 지식노동자를최대의 자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병(强兵)의 논리도 마찬가지다.군대의 힘은 근육이나 주먹을 바탕으로 한것이지만 앞으로의 군사력은 기업과 마찬가지로 지력에서부터 나온다. 걸프전때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미 공군은 스마트탄과 같은 최신무기로 대통령궁의 침실을 정확히 폭격했다.그러나 후세인은 죽지 않았다.왜냐하면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나 위기가 올 때에는 침실이 아니라 밖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미군은 고도한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첨단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슬람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문화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다. ■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에 비중을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머리를 쓰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공헌하거나 부를 창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그래서 지력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창조적인 데에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예술가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 가거나 재주로 남을 속이다가 범법자가 되었다.오죽하면 한국에는 IQ,EQ 말고 JQ하나가 더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왔겠는가.JQ는 ‘잔머리를 굴리는 지능지수’라는 것이다. 1993년 뉴스위크는 한국과 싱가포르를 예로 들면서 “미래는 손을 사용하는사람이 아니라 머리를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특집을 내고 장래의 국제경쟁력은 그 나라가 창출하는 지식의 우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뉴스위크의 칭찬과는 달리 한국은 아직 지식의 가치가 대접받고있는 사회가 아니다.초등학교 교실만 들여다보아도 알수 있다.이순신장군의거북선을 하드웨어로 가르치고 있는 한 우리의 지식사회는 요원하다. 일본의 해군전술은 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상대방 배를 불태우지 않고 그 위에 올라타 칼로 공격하여 약탈을 하는 해적전법을 사용한다.그것을 잘 안 이순신 장군은 왜병이 배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뚜껑을 해닫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아 놓았다.단순한 엔지니어적 발상이 아니라 전술상의 소프트웨어로서 거북 모양의 배가 탄생된 것이다.거북선을 하드에서 소프트로 시점을 옮기는 교육시스템의 변화없이는 새 천년은 없다.누에에서 비단실을 뽑던 농가가 바이오 지식을 이용하여 동충하초의 약재를 만들어낸다.이러한 작은 변화에서 농촌은 지촌(知村)으로 바뀌고,생산은 창조로 변하고,폐기는 순환으로 이어진다. 동충하초를 21세기의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벌레가 풀이 되고,땅을 파던 사람들이 머리와 가슴을 파고 토지에 투자하던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으로 몰려드는 진귀한 광경이 보일 것이다.지식사회가 온다.어서 대비하라는 새 즈믄해의 아주 낮은 귓속말이 들려온다./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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